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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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中)'국 아닌 중국 이야기
-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김선자 옮김, <메디치>, 2017.


"그(아틸라)가 장악한 흉노제국은 흉노 역사상 최후의, 그리고 가장 찬란했던 한 장을 써내려 갔다. 그는 '이로우면 나아가고 불리하면 물러난다. 도망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는 군사 책략을 발전시켰다. 수십만 군대를 지휘해 사방을 약탈했으며, 그 족적이 유럽 전체에 미쳤다. 441년, 아틸라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해 비잔티움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다가와 해마다 2,100만 파운드의 황금을 바치겠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그 뿐만 아니라 비잔티움제국은 발칸반도 대부분을 흉노에 양도해야 했다. 447년, 아틸라는 도나우강 유역의 교역시장에서 꼬투리를 잡아 대군을 이끌고 비잔티움제국으로 쳐들어갔다. 70여 개의 성를 공격해 무너뜨렸고, 비잔티움제국의 많은 지역을 유린했다... 이때부터 비잔티움 사람들은 아틸라를 '신의 채찍'이라고 불렀다."
-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1장. 흉노>


중국(中國)은 글자 그대로 모든 국가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아시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라 또는 민족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일텐데, 중국의 '동북공정'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오래전부터 '서북공정'으로 진행되어 오는 오만한 민족통합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동북공정'에는 우리 한반도의 오래된 한민족이 고조선 연구로 또는 '요동'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서 연구하는 '요동사'의 작업 등으로 대치하고 있으니 차치하고 '서북공정'에 대한 대항논리로 중국 서방의 '오랑캐', 즉 서방의 소수민족 역사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수많은 '오랑캐'의 시작은 중국의 기원전 6~8세기 춘추전국시대부터 등장하는 북방의 집단 '흉노'다. 

아득한 시절, '동이족'의 '용산문화'인 은나라를 물리치고 중원을 장악한 서방의 '앙소문화' 주나라는 수도를 서안(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며 '동주 열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었고 자신들을 중심으로 서북쪽의 '견융족'을 견제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통해 국력을 강화시켜 결국 최초의 통일을 이룬 나라가 바로 진시황의 진나라다. 사실 진나라는 '오랑캐' 견웅족'과 혼혈된 '오랑캐' 그 자체였겠지만 구분은 모호하고 중국이 통일된 후로는 농경이 가능한 연 강우량 15인치선을 기준(만리장성)으로 '중국인'과 북방 민족의 큰 전선을 긋게 된다.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그 북방민족을 중국인들은 '흉노(匈奴)'라 불렀다. '흉노', 즉 '흉측한 노예'라는 명칭을 북방인 스스로 불렀을 리는 없으나, 흉노의 왕은 '선우(單于)'라 불렀는데 우리의 시조 '단군'의 유래가 '선우'와 비슷한 한자인 '단간(單干)'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로 중국 문화와 크게 구분되는 북방의 거대한 역사문화적 공동체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도 된다.

유목의 흉노는 전국시대 진의 서북부와 연의 동북부를 자주 침범하여 농경 생산물을 약탈하고 도망가기를 반복하였는데 말이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은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수확의 계절보다 건강한말을 타고 흉노족이 노략하러 내려오는 무시무시한계절이었다. 


"'중국'이라는 말의 최초 기록은 (주나라) 성왕이 낙읍(뤄양/낙양)을 건설한 것과 관계가 있다... 성왕은 (주)문왕이 천명을 받은 일과 무왕이 상(은)나라를 멸망시킨 일을 회고하면서, 무왕이 하늘에 고하길 '제가 이 중국에 정착해 여기서 백성을 다스리겠습니다'라고 했던 말을 언급한다... '이 중국에 정착하다'라는 무왕의 말에 언급된 중국이 바로 '중국'이라는 용어의 최초 기록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된 중국은 국가 개념이 아니라 '천하의 중심'이라는 의미이며 낙읍, 즉 뤄양(낙양)이 바로 그곳에 해당한다."
-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2장. 뤄양>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중국의 역사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이 건설되면 다른 소수민족들은 약화되고, 제국이 분열하면 소수민족들이 강성하여 대륙을 분할하는 과정이 반복되어 왔다. 삼국지의 무대 후한 시기 잠시 집권한 동탁과 여포도 사실 서쪽 오랑캐인 강족 일파로 추정되는데 서방 양주 출신 동탁이 한나라 수도 낙양을 불태우고 서쪽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한 일, 조조가 원소를 소탕하며 원소를 도운 동북의 오환족을 멸망시킨 이야기, 사마염의 진나라가 '팔왕의 난'으로 무너지는 과정에서 전개된 '5호 16국' 시대, 즉 흉노, 갈, 선비, 저, 강족의 다섯 '호(胡;오랑캐)'의 16개 단명정권 시대를 통해 중국의 문화가 더욱 다양하고 찬란하게 채워졌음은 이미 다수설이다. 유방의 한나라 또는 사마염의 진나라를 끝으로 이후 중국의 통일정권은 모두 이민족(선비족의 수나라)또는 그 혼혈정권(선비족과 한족 혼혈 당나라)이었으니 '순수한 중국 민족'은 없다.

최초의 '오랑캐' 흉노족은 한무제에 의해 서방으로 더 밀려나며 5세기경 '신의 채찍' 아틸라는 서쪽 유럽의 비잔티움제국(동로마)은 물론 서로마까지 진출하는데, '신의 채찍'은 기독교적 프랑크인(동고트족 등의 유럽인)들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인간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죄를 많이 지은 자신들에게 신이 채찍을 내려 교훈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지은 별칭이었다. 말을 타고 약탈하고 도망가다가 갑자기 말 위에서 등을 돌려 활을 쏘아 반격하는 유목인의 기동전은 이후 몽골족 칭기즈칸 대제국의 기본동력이었고,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요동의 '예맥족' 고구려인의 모습과도 같다.

동북쪽의 '오랑캐', '동호족'은 이후 민족과 문화의 활발한 결합과 확장을 통해 오환족, 선비족, 거란족 등으로 대륙을 분할했고 아예 '숙신족' 여진은 금나라는 물론 청나라(후금)로서 중국 황제국의 마지막 역사를 장식했다.
서쪽의 '오랑캐', '흉노족'은 유라시아와 중근동 각 지역의 민족인 스키타이족 등과 섞이며 에프탈족, 마자르족 등의 모습으로 유라시아와 동유럽을 분할했다. 헝가리 제국을 세운 '훈족'의 조상이 '흉노족'이라는 역사적 증거는 찾기 힘들다지만, '중국' 중심에서 밀려난 아득한 거대 민족들이 전 세계를 유목하듯 누비며 열어젖힌 다양한 문화의 힘은 세계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피엔스]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가 "인류 역사에서 유일하게 효율적인 체제"로 꼽는 '제국'의 역사를 강조하며 "매번 전투에서 지면서도 전쟁에서 결국 이기면서 버티고 유지하는" '제국'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지만, '제국'이 기록한 역사에서 밀려나고 지도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소수 민족들은 알렉산더나 칭기즈칸, 나폴레옹 못지 않게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다양하게 하는 윤활유였다.

그 민족 자체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여 스스로의 이름도 없이 명멸해 가며 중국 역사서를 통해 이름지어진 수많은 민족들의 역사는, 오만한 '중심'으로서의  '중(中)'국 아닌 중국 이야기를 펼치면서 '전통 중국사'를 '절반의 중국사'로 만든다.

우리 자체의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며 지금껏 잘 살아온 우리 민족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역사를 배운 식민사관의 대부 이병도 무리의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역시,
세상에는 '중심'이란 없다.

(2020년 3월 13일)

***

1.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김선자 옮김, <메디치>, 2017.
2.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도현신, <서해문집>, 2013.
3.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4. [삼국지 해제], 장정일/김운회/서동훈, <김영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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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중국사 - 한족과 소수민족, 그 얽힘의 역사
가오훙레이 지음, 김선자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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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中)'국 아닌 중국 이야기
-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김선자 옮김, <메디치>, 2017.


"그(아틸라)가 장악한 흉노제국은 흉노 역사상 최후의, 그리고 가장 찬란했던 한 장을 써내려 갔다. 그는 '이로우면 나아가고 불리하면 물러난다. 도망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는 군사 책략을 발전시켰다. 수십만 군대를 지휘해 사방을 약탈했으며, 그 족적이 유럽 전체에 미쳤다. 441년, 아틸라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해 비잔티움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다가와 해마다 2,100만 파운드의 황금을 바치겠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그 뿐만 아니라 비잔티움제국은 발칸반도 대부분을 흉노에 양도해야 했다. 447년, 아틸라는 도나우강 유역의 교역시장에서 꼬투리를 잡아 대군을 이끌고 비잔티움제국으로 쳐들어갔다. 70여 개의 성를 공격해 무너뜨렸고, 비잔티움제국의 많은 지역을 유린했다... 이때부터 비잔티움 사람들은 아틸라를 '신의 채찍'이라고 불렀다."
-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1장. 흉노>


중국(中國)은 글자 그대로 모든 국가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아시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라 또는 민족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일텐데, 중국의 '동북공정'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오래전부터 '서북공정'으로 진행되어 오는 오만한 민족통합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동북공정'에는 우리 한반도의 오래된 한민족이 고조선 연구로 또는 '요동'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서 연구하는 '요동사'의 작업 등으로 대치하고 있으니 차치하고 '서북공정'에 대한 대항논리로 중국 서방의 '오랑캐', 즉 서방의 소수민족 역사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수많은 '오랑캐'의 시작은 중국의 기원전 6~8세기 춘추전국시대부터 등장하는 북방의 집단 '흉노'다. 

아득한 시절, '동이족'의 '용산문화'인 은나라를 물리치고 중원을 장악한 서방의 '앙소문화' 주나라는 수도를 서안(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며 '동주 열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었고 자신들을 중심으로 서북쪽의 '견융족'을 견제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통해 국력을 강화시켜 결국 최초의 통일을 이룬 나라가 바로 진시황의 진나라다. 사실 진나라는 '오랑캐' 견웅족'과 혼혈된 '오랑캐' 그 자체였겠지만 구분은 모호하고 중국이 통일된 후로는 농경이 가능한 연 강우량 15인치선을 기준(만리장성)으로 '중국인'과 북방 민족의 큰 전선을 긋게 된다.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그 북방민족을 중국인들은 '흉노(匈奴)'라 불렀다. '흉노', 즉 '흉측한 노예'라는 명칭을 북방인 스스로 불렀을 리는 없으나, 흉노의 왕은 '선우(單于)'라 불렀는데 우리의 시조 '단군'의 유래가 '선우'와 비슷한 한자인 '단간(單干)'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로 중국 문화와 크게 구분되는 북방의 거대한 역사문화적 공동체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도 된다.

유목의 흉노는 전국시대 진의 서북부와 연의 동북부를 자주 침범하여 농경 생산물을 약탈하고 도망가기를 반복하였는데 말이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은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수확의 계절보다 건강한말을 타고 흉노족이 노략하러 내려오는 무시무시한계절이었다. 


"'중국'이라는 말의 최초 기록은 (주나라) 성왕이 낙읍(뤄양/낙양)을 건설한 것과 관계가 있다... 성왕은 (주)문왕이 천명을 받은 일과 무왕이 상(은)나라를 멸망시킨 일을 회고하면서, 무왕이 하늘에 고하길 '제가 이 중국에 정착해 여기서 백성을 다스리겠습니다'라고 했던 말을 언급한다... '이 중국에 정착하다'라는 무왕의 말에 언급된 중국이 바로 '중국'이라는 용어의 최초 기록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된 중국은 국가 개념이 아니라 '천하의 중심'이라는 의미이며 낙읍, 즉 뤄양(낙양)이 바로 그곳에 해당한다."
-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2장. 뤄양>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중국의 역사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이 건설되면 다른 소수민족들은 약화되고, 제국이 분열하면 소수민족들이 강성하여 대륙을 분할하는 과정이 반복되어 왔다. 삼국지의 무대 후한 시기 잠시 집권한 동탁과 여포도 사실 서쪽 오랑캐인 강족 일파로 추정되는데 서방 양주 출신 동탁이 한나라 수도 낙양을 불태우고 서쪽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한 일, 조조가 원소를 소탕하며 원소를 도운 동북의 오환족을 멸망시킨 이야기, 사마염의 진나라가 '팔왕의 난'으로 무너지는 과정에서 전개된 '5호 16국' 시대, 즉 흉노, 갈, 선비, 저, 강족의 다섯 '호(胡;오랑캐)'의 16개 단명정권 시대를 통해 중국의 문화가 더욱 다양하고 찬란하게 채워졌음은 이미 다수설이다. 유방의 한나라 또는 사마염의 진나라를 끝으로 이후 중국의 통일정권은 모두 이민족(선비족의 수나라)또는 그 혼혈정권(선비족과 한족 혼혈 당나라)이었으니 '순수한 중국 민족'은 없다.

최초의 '오랑캐' 흉노족은 한무제에 의해 서방으로 더 밀려나며 5세기경 '신의 채찍' 아틸라는 서쪽 유럽의 비잔티움제국(동로마)은 물론 서로마까지 진출하는데, '신의 채찍'은 기독교적 프랑크인(동고트족 등의 유럽인)들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인간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죄를 많이 지은 자신들에게 신이 채찍을 내려 교훈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지은 별칭이었다. 말을 타고 약탈하고 도망가다가 갑자기 말 위에서 등을 돌려 활을 쏘아 반격하는 유목인의 기동전은 이후 몽골족 칭기즈칸 대제국의 기본동력이었고,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요동의 '예맥족' 고구려인의 모습과도 같다.

동북쪽의 '오랑캐', '동호족'은 이후 민족과 문화의 활발한 결합과 확장을 통해 오환족, 선비족, 거란족 등으로 대륙을 분할했고 아예 '숙신족' 여진은 금나라는 물론 청나라(후금)로서 중국 황제국의 마지막 역사를 장식했다.
서쪽의 '오랑캐', '흉노족'은 유라시아와 중근동 각 지역의 민족인 스키타이족 등과 섞이며 에프탈족, 마자르족 등의 모습으로 유라시아와 동유럽을 분할했다. 헝가리 제국을 세운 '훈족'의 조상이 '흉노족'이라는 역사적 증거는 찾기 힘들다지만, '중국' 중심에서 밀려난 아득한 거대 민족들이 전 세계를 유목하듯 누비며 열어젖힌 다양한 문화의 힘은 세계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피엔스]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가 "인류 역사에서 유일하게 효율적인 체제"로 꼽는 '제국'의 역사를 강조하며 "매번 전투에서 지면서도 전쟁에서 결국 이기면서 버티고 유지하는" '제국'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지만, '제국'이 기록한 역사에서 밀려나고 지도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소수 민족들은 알렉산더나 칭기즈칸, 나폴레옹 못지 않게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다양하게 하는 윤활유였다.

그 민족 자체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여 스스로의 이름도 없이 명멸해 가며 중국 역사서를 통해 이름지어진 수많은 민족들의 역사는, 오만한 '중심'으로서의  '중(中)'국 아닌 중국 이야기를 펼치면서 '전통 중국사'를 '절반의 중국사'로 만든다.

우리 자체의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며 지금껏 잘 살아온 우리 민족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역사를 배운 식민사관의 대부 이병도 무리의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역시,
세상에는 '중심'이란 없다.

(2020년 3월 13일)

***

1.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김선자 옮김, <메디치>, 2017.
2.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도현신, <서해문집>, 2013.
3.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4. [삼국지 해제], 장정일/김운회/서동훈, <김영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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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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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 (2011) 외
- 스스로를 끊임없이 초월하려는 '호모 사피엔스'의'과학적 역사'


"이 책의 시작에서 나는 역사를 물리학, 화학, 생물학으로 이어진 연속체의 다음 단계라고 말했다. 사피엔스 역시 모든 생명체를 지배하는 물리적인 힘, 화학반응, 자연선택 과정에 종속된다... 사피엔스는...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룩한다고 할지라도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스스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이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하는 중이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지적설계의 법칙으로 대체하고 있다."
-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4부 20장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이른바 '빅히스토리' 열풍을 불러 일으킨 책 [사피엔스]는 영국에서 중세 전쟁사를 전공한 이스라엘 출신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인류의 역사를 전 지구 역사 속의 모든 생명체와의 관계를 통해 통크게 확장시켜 고찰한다. 전쟁의 역사는 문명의 질적인 전환을 다루게 되므로 저자는 박식함을 토대로 인류의 거대한 역사, '빅히스토리'를 풀어낸다.

과학과 역사의 접합을 통해 전개되는 호모 사피엔스의 궤적에서 하라리는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 등 3가지 혁명을 통해 인류가 발전했다고 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약 600만년 전, 직립보행인호모 에렉투스는 70만년 전, 현재 인류의 직계조상 호모 사피엔스는 약 15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태동하였으나 '인지혁명'은 약 7만년 전이며, 인류가 사회적 네트워크를 이어주는 '유연'한 언어를 사용한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지적인 뇌구조는 우연하게 만들어진다.

"인지혁명이란 약 7만년 전부터 3만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이론은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가 사피엔스의 뇌의 내부 배선을 바꿨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전에 없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 [사피엔스], <1부. 인지혁명>

'인지혁명'을 통해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 같은'형제들'을 멸종시키고 살아남아 진화한 결과 현재 인류가 되는데 이는 '유연한 언어'만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 '허구'를 만들어내고 이를 중심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하나로 단결하게 하는 능력 때문이기도하다.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종교, 이념처럼 현실은아니지만 현실적 힘을 지닌 허위의식, '이데올로기'는  인류 역사에서 신화의 기원이다.

"어느 종이 성공적으로 진화했느냐의 여부는 굶주림이나 고통의 정도가 아니라 DNA 이중나선 복사본의 개수로 결정된다...만일 한 종이 많은 DNA 복사본을 뽐낸다면 그것은 성공이며 그 종은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농업혁명의 핵심이 이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있게 만드는 능력."
- [사피엔스], <2부. 농업혁명>

우리는 역사를 통해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오는약 1만년 ~ 6천년 전 '농업혁명'을 통해 수렵채취에서 정착문명이 자리잡으면서 인류가 더 번영한 것으로 배웠다. 하라리에 의하면 절반만 맞는데, 인류는 '농업혁명'으로 자연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밀'이라는 작물종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란다. 농경사회는 결코 풍족하지도 건강하지도 않았다. 정착하면서 인구가 늘어났고 수확은 보잘 것 없어 대부분이 굶고 병균의 전염이 용이해 더 많이 죽었다는 것인데, '밀'의 번식에 더 기여하고 말았으니 차라리 수렵생활이 더 풍족하고 건강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긴, 채 백년도 안된 우리 과거만 해도 보릿고개와 전염병으로 사망률이 높았지 않은가.

"농업혁명 이래 인간사회는 점점 더 규모가 크고 복잡해졌다. 그동안 그런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상상의 건축물 역시 더욱 정교해졌다. 신화와 허구는 사람들을 거의 출생 직후부터 길들여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특정한 기준에 맞게 처신하며, 특정한 것을 원하고, 특정한 규칙을 준수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수백만 명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주는 인공적 본능을 창조했다. 이런 인공적 본능의 네트워크가 바로 '문화'다.
- [사피엔스], <3부. 인류의 통합>

'과학혁명'에 들어가기 앞서 '농업혁명'으로 정착의 공동체를 형성한 인류는 '문화'라는 네트워크를 통해 계급 피라미드를 구축하고 국가를 건설하고 '제국'으로 통합된다. 하라리는 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를 '형제(네안데르탈인) 살해범', 전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대량 학살자'라며 전 생명체 입장에서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 하나, '인류의 통합' 최고체제로서 '제국'의 긍정성은 강조한다. 지난 "2,5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정치조직"인 '제국'은 그 자체로 독재는 아니며 그 '문화적 확장성'을 통해 인류를 '통합'했는데 "전투에서는 지고 또 지면서도 전쟁에서는 이기면서 타격을 입더라도 버티고 유지하는 능력"으로 지금까지 인류문명을 발전시키고 유지한 가장 효율적인 체제라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에게 '제국'은 인류의 현실역사에서 '최고의 체제'이다.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
- [사피엔스], <4장. 과학혁명>

인류의 첫 번째 '해방'은 '신화'로부터 인간의 '자유의지'를 해방시킨 '철학'이고, 두 번째는 '종교(철학)'로부터 객관적 자연법칙을 해방시킨 '과학'이다. 
'제국'의 영향으로 인류 문화가 통합되어 가던 약 5백년전 '과학혁명'을 통해 글로벌 자본주의가 더 발전하고 정보혁명이 진행되고 있는데, 하라리는 다른 모든 사상들을 무위로 돌리는 한편 결코 찬양하지는 않으면서도 '과학과 자본주의'의 현실적 힘을 또한 강조한다. 
유발 하라리에게도 역사는 '과학'이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는 인류 역사에서 '과학'적 지식에서 '세 번의 (신)대륙 발견'이 있었는데, 이'과학적 발견들'은 기존 사상체계에 혁명적 전환을 불러온 '인식론적 단절(절단)'이다.

"사실 우리가 인류 역사에 있었던 위대한 과학적 발견들을 살펴볼 때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대한 이론의 '대륙들'이라고 불러야 할 것과 연계시킬 수 있는 건 아닌가... 마르크스 앞에는 오직 두 개의 '대륙'만이 계속된 인식론적 단절로 인해 과학적 지식으로의 길을 열었다... 두 개의 '대륙'이란 (탈레스 등) 그리스인의 '수학의 대륙'과 갈릴레오와 그 후계자들에 의해 열린 '물리학의 대륙'이다... 인식론적 단절에 의해 마르크스는 제3의 과학의 신대륙, 즉 '역사의 대륙'을 과학적 지식을 향해 활짝 열어 놓았다."
- 루이 알튀세, [레닌과 철학] (1968)

'과학적 지식'의 입장에서 탈레스로부터 시작된 그리스 철학은 수학(논리)적 사고의 발견으로 기존 신화적 사고와 '인식론적 단절'을, 갈릴레오로 시작된 물리학(이후 화학, 생물학 등 일체 자연과학)의 발견으로 기존 종교사상과 '인식론적 단절'을, 마르크스로 시작된 '역사유물론' 의 발견으로 기존 관념적 역사관과 '인식론적 단절'을 이루면서 인류 사상은  혁명적으로 전환되어 왔다.

하라리는 한때 세계 최강이었던 중국 제국이 유럽 제국들에게 뒤쳐진 이유는 '본인들은 모든 걸 다 갖추어서 더 이상 수용할 게 없다'는 자만이었다고 한다. 이에 반해 뒤쳐진 유럽 제국은 본인들의 '무지'를 인정하고 '과학'의 힘에 의해 계속 혁신해 나간 결과 세계를 지배했으며, 그들의 무기인 '과학과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혁신으로 인공지능, 신인류 등의 발명을 통해 끊임없이 혁신하고 결국 성공할 것이며, 이러한 '유연성'에 힘입어 '사피엔스'는 종말하고 '신적 존재(호모 데우스)'로 다시금 재탄생한다는  것이다. 
결론으로 옛날 메소포타미아에서 영원불멸을 꿈꿨던 '길가메시'를 따서 이름지은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신(호모 데우스)'이 되려는 '사피엔스'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하기보다 '욕망'을 설계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사피엔스]는 끝을 맺는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초월하려는 '사피엔스'는 과연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길가메시 프로젝트가 과학의 주력상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과학이 하는 모든 일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한다... 우리는 머지않아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대단히 방대하고 재미있는 책이기는 하나, 아쉬운 점은 인류 역사에서 '철학의 부재'를 염려하는 유발 하라리가 인류 최고의 정치체제로서 '제국'의 '빅히스토리' 속에 더 나은세계, 더 나은 역사, 더 나은 인류 등의 상상력 따위는 다 갈아넣어 버린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빅히스토리'는 '과학과 자본주의'의 힘으로 '신'이 되려는 공상과학적 [호모 데우스]와 [사피엔스]와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을 미래예언서로 재탕하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일 뿐이다.

재미는 좀 덜해도 하라리식 '빅히스토리'의 모티브였던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1997)의 진지함과 겸손함이 더 돋보인다.

***

1.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조현욱 역, <김영사>, 2011.
2. [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 김명주 역, <문학과 사상사>, 2017.
3. [총,균,쇠], 제레드 다이아몬드, 김진준 역, <문학과 사상사>, 1998.
4. [역사의 역사], 유시민, <돌베개>, 2018.
5. [레닌과 철학], 루이 알튀세, 이진수 역, <백의>, 1991.

(2020년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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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을 위한 변명 - 혁명가 정도전,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설계하다
조유식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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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반도의 '맹자'이자 '트로츠키', 정도전!
- [정도전을 위한 변명] - 조유식 (1997) 


"민심을 얻으면 민은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은 군주를 버린다."
- 삼봉 정도전, [조선경국전], 1394.


맹자는 위나라 양혜왕에게 "'인'을 해친 자를 '적'이라 부르고 '의'를 해친 자를 '잔'이라 부른다. '잔적'은 일개 필부에 불과하니 (은나라)주왕이라는 일개 필부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 군주가 시해되었다는 말을 들어보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이는 아시아 정치사상사에서 최초로 '민본주의' 또는 현재의 '민주주의'를 설파한 아마도 최초의 기록일 것인데, 조선건국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 신생국 조선의 '제헌법전'격인 [조선경국전]에서 위와 같이 쓴 명제의 기원이기도 하다.
정도전을 말한다는 것은 즉, 역사에서 '혁명의 정당성'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조선건국이 봉건체제의 일대유신을 도모한 혁명적사건이라는 주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파쟁과 정체로 상징되는 조선사에 그 같은 격동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은 기자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 길로 나는 서점과 도서관을 뒤지며 정도전을 취재하기 시작하였다... 그(정도전)는 그가 살았던 시대 이상이요, 그가 세운 나라 이상이었다. 고조선 이래 수천년간 이어 내려온 귀족중심체제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기도한 모반자이자, 이미 6백년전에 군주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실현한 합리주의자였으며, 열강들 사이의 일시적 권력공백을 파고들어 만주 수복을 도모한 야심만만한 국제전략가였다. 선비인가 하면 정략가였고, 유교이론가인가 하면 군사전략가였다. 수학과 의학, 불교에 두루 밝았고, 직접 악기를 제작할 줄도 알았다. 조선의 문물제도, 경복궁과 태평로, 종로 등 서울 도심의 기본설계, 4대문과 4소문, 그 안의 동네 이름이 다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건국의 공으로 치더라도 단연 으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시대 내내 만고역적의대명사였으니, 역사를 주재하는 신은 그에게 너무 각박했던 게 아닐까. 나의 귀에는 6백년간 '역적'으로 낙인찍혀 사료 창고 속에 처박혀 있던 정도전이 자신의 진실을 알아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 [정도전을 위한 변명], <머리말 - 의로운 자는 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야 하는가>, 조유식, 1997.


21세기 들어서야 '역사 재조명'을 통해 소설이나 대하드라마 등을 통해 익히 알게 된 내용이겠으나, 20세기 후반까지도 우리 역사에서 '정.도.전'이라는 이름은 태봉국의 궁예나 조선후기 허균 등과 같이 일반인들에게 '진실되게'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1997년 당시 <월간 말>지 기자였던 현재 알라딘문고 대표 조유식 선생이 1990년대 초 어느 젊은 정치인으로부터 "정도전을 파보라"는 권유를 받고 '서점과 도서관을 뒤지며' 취재하고 [정도전을 위한 변명](1997)을 발간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대중에게 정도전이라는 인물은 아예 관심이 없거나 '역적'에 불과했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정안군 이방원은 훗날 태종이 되기 위한 1398년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최후의 정적 정도전의 목을 베고는, [태조실록]에 기록하기를 "옛날에도 정안공이 정몽주를 죽여 나를 살려주었으니 이번에도 한 번만 더 살려주시오"라면서 정도전이 이방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고 했다. 이방원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정도전, 남은 등의 '거사일'에 그들의 난을 진압한 것이 '2차 왕자의 난'이라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거사일'에 '반란수괴 정도전'은 동지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발각되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고 이후 반세기 동안 '만고 역적'이 되었다.
알다시피 '승자의 기록'으로서의 역사인 것이다.
물론, 역사학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겠으나 대중에게 '혁명가 정.도.전'을 알린 최초의 책이 바로 조유식 선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이며, 그 덕분에 삼봉 정도전은 우리 역사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산 몇 만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으시오 훗날 서로 뵐 수 있으리까
인간세상이란 잠깐 사이에 묵은 자취인 것을"
- [용비어천가] 중, 정도전과 이성계의 첫 대면


위 시는 정도전을 '조선의 역적'이라 규정한 이방원의 [태조실록]을 그대로 인용한 [용비어천가]에서 정도전과 이성계의 첫 만남 중에 정도전이 이성계의 함흥군영 소나무에 남긴 시다.
고려말 유학자 목은 이색의 문하생 중 개혁적 신진사대부 2기였을 동기들 모임 '동심회'를 결성하고 그 중 가장 따르던 선배 정몽주의 주선으로 당대 최고의 무력을 자랑하던 '변방 장수' 이성계를 처음 만났던 1383년의 기록인데 이 만남으로부터 '역성혁명'의 서막이 열린다.


원래도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성품이었겠지만 어머니가 서얼 출신이라 고위관직에 오르지 못했던 정도전은 원나라 사신 접대 거부 사건으로 친원파 이인임에 의해 정몽주와 함께 유배를 당했다. 정몽주가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출사할 때도 정도전은 신분의 한계로 계속 낭인 생활을 이어가는데 나주 유배생활부터 삼각산 '삼봉재'에서의 교육자생활, 정적의 핍박으로 부평과 김포까지 쫓겨다니는 고난의 여정을 통해 '민본주의'를 체득한다. 부패한 불교에  대항하여 도덕정치, 군자정치, 이상사회를 기획한 급진사상으로서의 당시 성리학이라는 이념에 고난한 민중의 삶을 통한 공자의 '애민 정신', 맹자의 '여민 정신'을  현실적으로 접목시키는 과정에서 중앙정치로부터 소외된 '변방 장수' 이성계의 무력까지 결합하여 '역성혁명'은 드디어 본막에 진입하게 된다. 


정치적 사건으로서의 '조선건국'과 '역성혁명'은 잘 아는 내용일테니, '사상혁명'으로서의 조선건국을 보면, 단연 [맹자]가 보인다.
부패한 불교가 지배이념인 고려말에 이미 신진사대부 정몽주와 정도전은 유교의 예법인 부모 '삼년상'을 '선구적'으로 지킨 인물들이었는데, 정도전은 그 삼년상 시기에 정몽주로부터 받은 [맹자]를 하루에 한 두 장만 읽을 정도로 정독하고 연구했다. '민중을 사랑하라(애민 정신)'고 했던 공자를 넘어 '민중과 함께하라(여민 정신)'고 말하며 '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중은 군주를 버린다(역성 혁명)'고 주장하는 맹자의 '혁명론'이 정도전의 실천적 이념이 되었고 그는 죽는 날까지 그 뜻을 꺾지 않았고 타협하지 않았다.
현대적 토지공개념 제도인 '계민수전(인구수에 따라 토지분배)'의 토지개혁을 경제적 토대로 하고, 군주제의 한계를 넘어 이상사회 구현의 중심인 재상과 사대부들이 체계적으로 왕권을 견제하는 정치체제로 조선의 기초를 닦으려 했던 정도전의 '혁명'은 '왕권강화 쿠데타'를 획책하던 이방원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역사는 '이익과 실리'를 앞세워 승리한 소인배들이 '인의'를 꿈꾸는 의로운 군자들을 역사로부터 지웠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는 '승자의 역사'가 아니라 다수 민중을 사랑하고(공자의 '인') 모두 함께 살아가고자 했던(맹자의 '의') 의로운 '패자들의 역사'라는 사실을, 한반도의 '맹자'이자 '트로츠키'인 정도전의 부활을 통해 재차 각인하며, 무려 23년전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조유식 선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에 다시금 경의를 표한다.

현실에서는 비록 패배하였으나, 역사에서는 결국 승리한 '혁명가' 정도전을 닮은 소비에트 '영구혁명가' 트로츠키는 정도전이 죽은 6세기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강력한 서기장(스탈린)의 복수보다 '역사의 복수'가 더 무섭다."
- 레온 트로츠키


(2020년 3월 7일)

* 추천도서 : 조유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가장 추천하는책이며, 소설형식으로는 김탁환의 [혁명 1,2]도 적극 추천

1. [정도전을 위한 변명], 조유식, <푸른역사>, 1997.
2. [혁명 1,2], 김탁환, <민음사>, 2014.
3. [역사의 복수], 앨릭스 캘리니코스, <백의>,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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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화의 제국 - 자본주의의 새로운 역사
스벤 베커트 지음, 김지혜 옮김, 주경철 감수 / 휴머니스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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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문명'과 '야만'이 하나로 연결된 [면화의 제국]
- [면화의 제국 - A New History of Global Capitalism], 스벤 베커트 지음, 김지혜 옮김, <휴머니스트>, 2014.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맨먼저 부르주아(상품) 사회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하고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대량적이고 가장 일상적이며 헤아릴 수 없이 목격되는 단계, 즉 '상품교환'을 분석하고 있다. 그 분석은 이 가장 단순한 현상 속에서(부르주아 사회의 이 '세포' 속에서-개별로서의) 현대사회의 모든 모순(혹은 '맹아')을 폭로한다. 계속되는 서술은 이 모순의 발전('성장'은 물론 '운동'도)과 그 개별 부분들의 총합 속에서 이 사회의 발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방식은 또한 '변증법 일반'의 서술(내지 탐구)의 방법임에 틀림없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하고 가장 대량적인 것 등등으로부터 시작하면,... 이미 이 속에는 (헤겔이 천재적으로 지적하였듯이) '개별은 보편이다'라는 '변증법'이 존재한다... 이리하여 대립물(개별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에 대립한다)은 동일적이다.
'변증법'은 다름아닌 (헤겔과) 마르크스의 '인식론'이다."
- V. I. Lenin, [철학노트], <변증법의 문제에 대하여>, 1915.

레닌에 의하면, 마르크스가 [자본론]이라는 '정치경제학' 이론서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는 방식은 가장 단순하지만 자본주의 일반을 담지하는 '상품'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시작으로 그 운동을 일반화하는 것이었다. 현실에서는 체제 속에서 '상품' 개념을 추출했으나, 서술방식은 헤겔이 [정신현상학]이라는 주저에서 '이성'의 자기운동을 통해 '절대이성'이 지배하는 관념론적 세계관을 완성했던 방식을 따랐던 것인데, [자본론을 읽자]던 알튀세에 의하면 [자본론]은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것이 아니라 당시 영국의 정치경제 체제를 순수하게 '이론적으로' 연구한 저서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주저 [자본론]은 어느 특정한 시대가 아닌 자본주의 체제 일반을 분석하고 '정치경제학'적으로 비판한 책이다.

"... 면화는 경작지와 공장이라는 두 단계의 노동집약적 생산과정을 거쳐야 했다. 사탕수수와 담배는 유럽에서 대규모 산업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양산하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담배는 새로운 거대 제조기업의 등장을 초래하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인디고를 재배하고 가공하는 과정은 유럽의 제조업자에게 거대한 새시장을 제공하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아메리카에서 쌀경작은 노예제와 임금노동의 폭발을 가져오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그 결과 면산업은 다른 어떤 산업과도 다르게 세계 전역에 널리 분포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여러 대륙을 연결한 면화는 근대세계를 이해할 열쇠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근대세계의 특징인 심각한 불평등과 글로벌화의 오랜 역사,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본주의의 정치경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도 함께 제공한다."
- S. Beckert, [면화의 제국], <서론>

미국 근대역사가 스벤 베커트(Sven Beckert)는 [면화의 제국 - 글로벌 자본주의의 새로운 역사](2014)라는 저서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일관하는 역사를 분석하면서 '면화'라는 구체적 사물을 짚어낸다. 
사람들을 농촌에서 쫓아내어 도시의 '임금노동'에 기반한 거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출현시킨 것, 거대 산업의 발전, 글로벌 신시장 개척 등을 가능케 한 것은 '면화'의 역사 속에 다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추상적 '정치경제학 비판'이 아니라, 미국의 '자본주의 역사'의 관점에서 구체적 '상품원료'를 캐내고 있다.
[면화의 제국]은 방적/방직 산업의 원료, '면화'를 통해 현대 글로벌 자본주의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면화의 제국]은 19~20세기 '제국주의' 시대를 '전쟁자본주의'와 '산업자본주의'로 구분한다. 
'전쟁자본주의'는 노예제(강제노동), 식민지(원주민) 약탈, 제국팽창, 무력동반교역, 사람과 토지를 장악한 기업가 등을 특징으로 하는데, '면화' 재배 및 방직산업의 성장과 신시장 개척을 위해 강력한 '국가'가 필요해진 상인(또는 '자본가')들이 이미 한계에 다다른 '흑인노예제'를 '임금노동'으로 대체하면서 '산업자본주의'로 넘어간다.

"산업자본주의가 국가의 힘을 더 증폭시키면서도 눈에 덜 띄게 했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국가의 역량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지만 그럴수록 전세계 국가들의 역량은 불평등해졌다."
- [면화의 제국], <3장. 전쟁자본주의가 치른 대가>

미국의 역사가 중심이므로 이 책에서 '세계를 뒤흔든 전쟁'이라며 9장에서 다루는 사건은 1861년 미국 남북전쟁이다. '흑인노예제'에 기반한 면화재배에 한계가 드러나면서, '자유노동'이라는 명목으로 '임금노동'이 태동하던 미국 북부연방과 남부연합의 대지주들간의 내전을 거쳐 '임금노동'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혁신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남북전쟁으로 인해 기존 수공업적 면화생산이 주를 이루던 인도, 중국, 오스만제국, 이집트 등의 지역에서도 급격한 공업화가 추진되었고,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의'글로벌화'가 시작되었으니 '세계를 뒤흔든 전쟁'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발산지 유럽은 물론 전세계 식민지 전체적으로 대공업과 '임금노동'으로의 본격적 전환의 계기가 남북전쟁이라는 것인데 다분히 미국중심적 사고이기는 하나, 어쨌든 국가가 자본주의 혁신의 주요장치로 등장하는 '국가자본주의'의 시작이다. 
'제국주의' 국가는 "실력행사에 적극적인 전혀 새로운 형태의 국가"(9장)인 것이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자본가들에게는 한때 그들의중요한 권력의 원천이었던 강력한 국가에 의지하는것이 이제 가장 크고 유일한 약점이 되었다. 그러한 국가 덕분에 결국 노동계급이 작업현장과 정치에서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자본가들에게 국가는 양면적인 존재였다. 국가는 지구전역의 농촌지역에서 노동력을 동원한 일을 포함해 산업자본주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지만 자본가들에게는 '덫'이 되기도 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건과 임금을 향상시키기 위해 국가정책에 접근해 이용했기때문이다."
- [면화의 제국], <13장. 남반구의 귀환>

대공업과 대자본가, 독점자본의 출현으로 사실 '자유노동'이 아닌 '강제노동'으로서 '임금노동'의 본질이 드러나고 노동계급과 노동자 진보정당이 '노동시간단축'과 '보통선거권 쟁취' 투쟁을 통해 국가권력에 개입하게 되면서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가들에게 '양면성'을 갖게 되었고, 노동계급은 끊임없이 국가권력을 둘러싼 투쟁을 전개한다.
한편으로, '면화'를 시작으로 산업자본주의를 발전시킨 대자본과 국가는 신시장 개척을 위해 철도, 항만 등의 기반산업은 물론 '정보'와 '지식'을 독점하면서 자본주의의 글로벌화를 선도한다.
이러한 근현대 자본주의 역사 전체가 '면화'의 역사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폭력의 여러 형식들 중에서도 특히 노예제, 식민주의, 강제노동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핵심에 놓여 있었다.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특정지역에서 특정한 방식으로일할 것을 강요하는 일은 '면화의 제국' 전 역사를 통틀어 변함없이 등장하는 요소였다."
- [면화의 제국], <14장. 에필로그: 씨실과 날실>

'면화'의 역사를 통해 '글로벌 자본주의'의 역사를 서술하는 미국 역사가인 저자가 마르크스 [자본론]처럼 자본주의 체제 일반을 비판하고자 했을지, 최근 유행하는 [사피엔스]류의 '빅히스토리' 서술방식을 현대 자본주의 분석에 적용해본 것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20세기 '제국주의'로 인한 '탈식민화' 투쟁에서 '면화'로 시작된 "최초의 글로벌 산업의 진화와 그것을 모델로 삼은 다른 여러 산업의 진화에서는 '문명'과 '야만'이 하나로 연결"(14장)되어 있다는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2020년 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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