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관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김희균 옮김 / 검은숲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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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E.D. (Quod Erat Demonstrandum : What Was To be Shown)"
- Ellery Queen, [국명+사물+미스터리] 시리즈, <검은숲>



"살인자는 누구인가?
나는 내 소설에서 독자들이 범죄를 올바로 해결하는데 필요한 사실들을 모두 알게 되는 시점에 이르면 언제나 독자들의 지혜에 도전을 해 왔다.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도 예외는 아니다. 주어진 단서들을 엄밀한 논리와 추리로 분석해보면 지금쯤 범인의 정체를 단순히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증명'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답편를 읽어보면 알게 되겠지만 단 하나의 올바른 해결책에는 '만일'이나 '하지만'이란 것이 없다. 논리는 결코 요행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니, 당신의 올바른 '논증'에 행운이 따르기를 빈다!"
- 엘러리 퀸,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1932), <독자에의 도전>, 주영아 옮김, <검은숲>, 2012.


중학교 시절인 1988년에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동네 형의 어두운 방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장편 추리소설을 우연히 발견한 후, 오락실 갈 용돈을 모아서 추리소설을 사모으던 짧은 시절이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든 생각이었는데, 초등학교 때 친구집에서 빌려봤던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단편집]은 내게 '단편'을 읽는 힘을, 중학교 때 용돈 모아 사들였던 애거서 크리스티 등의 추리소설은 내게 '장편'의 바다에서 헤쳐 나오는 길을 알려줬다. 
당시 서점에 나온 영국 주류의 추리소설들 속에서 미국 추리소설은 양념과도 같았는데 지금은 책들도 사라지고 기억도 희미하지만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은 줄거리는 잊었으되 그 중 제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만은 또렷하다. 
'T'자형 십자가에 머리가 잘린 채 죽은 살인사건을 뒤쫓는 미국 탐정 엘러리 퀸의 모험과 어딘지 기괴한 미국식 삽화와 함께.


소설 속 주인공으로서 '엘러리 퀸(Ellery Queen)'은 1920년대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한 장서가이자 서지학자이며 뉴욕경찰서의 경관인 리처드 퀸의 아들로 여러 살인사건을 그 특유의 '연역적 소거 추리법'의 논리로써 해결한다. 학자로서 학위는 있는지, 경찰도 아니면서 '아빠찬스'로 '특수수사'를 하는 것을 보면 직업이 탐정인지, 그것도 아니면 사건 수사과정을 책으로 출간하는 것을 보아 '작가'인지, 그의 정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여러 작품을 통해 캐릭터 자체에 모순점들이 보인다고 하는데, 셜록 홈즈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예측할 수 없는 추리소설의 인기로 계속 연작 형태가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책이 안 팔리면 주인공 탐정은 그 첫 수사가 마지막 작품이 될 운명일 것이기에.
어쨌든 '탐정' 엘러리 퀸의 추리 기법은 모든 사실과 단서들을 하나도 빠짐 없이 논리적으로 연결시킨 거대한 사고틀에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용의자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연역적 소거논리'로 대부분 경찰들이 잡아온 단서들을 소파에 앉아 오로지 지식과 두뇌로만 해결하는데, 셜록 홈즈나 미스 마플, 포와로 등도 비슷한 방식일텐데 엘러리 퀸만의 특징은 그만의 '논리'를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현학적 행각을 통해 자랑한다는 것이다.
물론 '연역법'이기에 대전제가 틀리면 전체가 오류가 되기도 함에도 불구하고 엘러리 퀸은 'Q.E.D.(증명 끝.)'를 좋아한다.


"명망 있는 젊은 청년인 (범인)이 위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일련의 범죄를 저지른 범인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 믿기 어려우실지도 모릅니다. 또 그가 어떻게 그리고 왜 그랬는가를 모르면 머리가 아주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그러나 (범인)은 저의 '오랜 친구'인, 무자비한 '논리'의 그물에 걸렸습니다. 이 논리는 그리스인들이 숭상하던 로고스이고, 음모를 꾸미는 자들한테는 덫이 되기도 하죠."
- 엘러리 퀸, [그리스 관 미스터리](1932), <34. 핵심>, 김희균 옮김, <검은숲>, 2012.


수시로 라틴어 문구와 베르길리우스의 시구를 인용하고,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처럼 '분명'하다가도 사건이 갈피를 못잡으면 이럴 시간에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읽는 게 낫다는 둥 잘난체를 하며, 불어로 중얼거려 경찰들을 짜증나게도 하는 이 현학적 '탐정'은 결국, 친구와 놀러 가거나([로마 모자 미스터리]), 소파에 깊이 앉아서([그리스 관 미스터리]), 고전학 교수와 대화하면서([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 '연역적 소거법'을 완성해 간다. 모든 사실과 단서들이 열거된 후 '작가' 엘러리 퀸은 독자들에게 '이제 한 번 추리해 보시라' 막간 한 페이지를 던지는데, 매 작품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독자에의 도전>이다. 잘난 체 하는 주인공이 얄밉기도 하나 숱한 추리소설 중 범인을 맞춘 적이 거의 없기에 나는 '굳이 왜 내가 머리를 쓰나?' 싶어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 게 편하다.


"... 엘러리가 [로마 모자 미스터리]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이 책은 퀸 부자가 해결한 사건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흔한 살인 동기나 범죄 수법은 범죄 전문가라면 누구나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몬테 필드 살인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 사건에서 퀸 부자가 상대한 것은 치밀한 두뇌와 교묘한 술책을 가진 살인자였다... 그러나 이 사건도 다른 '완전 범죄'들과 마찬가지로 허점이 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엘러리의 날카로운 추리에 걸려들어 사건의 전말이 백일하에 드러나 결국 파멸을 맞았던 것이다."
- 엘러리 퀸, [로마 모자 미스터리](1929), <J.J.맥의 '서문'>, 이기원 옮김, <검은숲>, 2011.


한편으로 추리소설 작가로서 '엘러리 퀸'은 한 사람이 아니라, 만프레드 리(Manfred Lee)와 프레더릭 다네이(Frederic Dannay)라는 유태계 미국인 사촌형제의 필명이다. 뉴욕 출신으로 각각 영화사와 광고사에서 근무하던 이들은 당시 영국 추리소설의 아성에 도전하던 미국의 미스터리 바람을 타고 직장까지 때려치우며 미스터리 작가의 길을 가고자 했으나 하필 때는 1929년이었다. 
그들의 첫 작품인 [로마 모자 미스터리]가 공모작에 당선되기도 전 출판사가 파산하고 대공황의 경제 위기 속에서 이들 형제는 직장일과 미스터리 집필 작업을 병행하기로 하는데 다행히 책이 인기를 끌면서 전업작가 및 '미스터리 전문가'로 성공하게 된다. 책이 안 팔렸다면 아마도 대공황으로 직장도 잃고 작가로서도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아무튼 '미스터리 전문' 작가 '엘러리 퀸'의 명성은 현재까지도 '미국미스터리작가협회'를 이끌면서 건재하다고 하는데, 20세기 후반 일본의 추리소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봐, 퀸 군. 자넨 정말 바보짓을 했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엘러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타우(그리스 알파벳 19번째, 영어의 'T'에 해당) 십자가가 이집트 십자가가 아니란 말씀인가요?'
'바로 그걸세.'
...
'크룩스 코미사(crux commissa)가 이집트 십자가로 불린다는 생각은 어디서 나온건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요... 그런데 왜 타우가 이집트 십자가가 아니라고 말씀을...'
'이집트 십자가가 아니니까.'
야들리가 미소를 지었다.
'고대 이집트인이 사용하던 신성한 도구들 중에 그리스어 T와 닮은 모양을 한 게 있다네. 상형문자로 된 문헌에 자주 나타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오래된 기독교 신앙인 타우 십자가가 되는 건 아니지...'
'그렇다면 T형 십자가는 이집트 십자가가 결코 아니군요. 맙소사, 큰 실수를 했군.'
엘러리가 투덜거렸다.
...
교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가 굳이 확대 해석해서 이집트 십자가로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앙크(ankh)일세... 보통 크룩스 안사타(crux ansata)라고 불리는데, 이집트 비문에 아주 자주 등장하지. 이것은 신성성이나 왕권을 의미하며, 이는 곧 '생명의 근원'을 소유한 자로 치환할 수 있지.'
- 엘러리 퀸,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1932), <2-12. 교수가 말하기를>, 주영아 옮김, <검은숲>, 2012.


중학교 2학년 때 역시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청소년용 '팬더시리즈'인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을 읽었을 때, 시체의 목을 잘라 T자 십자가형을 집행한 살인자의 엽기적 행각은 물론 왠지 이교도적인 '이집트 십자가'의 신비로움에 한창 빠져 지낸 기억은 무의식 속에 남았겠으나 주인공 엘러리 퀸이나 주요 내용은 전혀 기억에 없었다. 
한참 지난 후 우연히 애거서 크리스티를 회상하던 중 중학 시절 한창 빠졌던 <해문출판사> 추리소설판을 검색하다가 기억 저편에서 소환한 엘러리 퀸에 이끌려 [국적+사물+미스터리] 시리즈를 몇 권 사서 출퇴근길 전철간에서 다시 읽었다.
현학적인 말장난, 국적과 사물에 입혀진 신비주의, 비상한 두뇌로만 가능한 기억력과 기막힌 논리로 완성되는 미스터리 소설의 고전.
덕분에 회사로 출퇴근하던 중년의 노동자는 그때만은 잠시 80년대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곤 했다.


아마도 잘난 척과 오류가 엇갈리는 '연역논리'의 탐정 엘러리 퀸 '1기'에 해당하는 대공황 시기 [국적+사물+미스터리] 시리즈 작명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함이었겠으나,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비밀)]는 정작 '이집트 십자가'와 무관하다. 미국의 시골 아로요에서 발생한 크리스마스 '타우' 십자가형과 곳곳에 배치된 문자 'T', 그리고 등장하는 '이집트 태양신'을 자칭하는 미치광이 등의 인물들을 보며 엘러리 퀸이 '타우 십자가 = 이집트 십자가'라는 상징적 전제를 연역적으로 상정한 우연한 실수에서 유래한 제목이다. 


단순한 살인사건 추적을 넘어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고전으로서의 엘러리 퀸과 함께 한 짧은 시간이 아쉬워 작가 '엘러리 퀸'의 'X-Y-Z 비극 시리즈'를 다시 주문하고 말았는데,
엘러리 퀸을 읽는 시간은 그들의 작품이 백년이 지난 지금도 '미스터리' 소설의 '고전'임이 논리적으로 '증명(Q.E.D)'되는 또 하나의 과정은 아닐런지.

"Q.E.D. (Quod Erat Demonstrandum : What Was To be Shown : 이것으로 증명 끝.)!"


***

1.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1932), 엘러리 퀸, 주영아 옮김, <검은숲>, 2012. (그리고 1980년대 <해문출판사>판.)
2. [그리스 관 미스터리](1932), 엘러리 퀸, 김희균 옮김, <검은숲>, 2012.
3. [로마 모자 미스터리](1929), 엘러리 퀸, 이기원 옮김, <검은숲>, 2011.
4. [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1929), 엘러리 퀸, 이제중 옮김, <검은숲>, 2011.
5.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1931), 엘러리 퀸, 정영목 옮김, <검은숲>, 2011.
6. [미국 총 미스터리](1933), 엘러리 퀸, 김예진 옮김, <검은숲>,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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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모자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기원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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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E.D. (Quod Erat Demonstrandum : What Was To be Shown)"
- Ellery Queen, [국명+사물+미스터리] 시리즈, <검은숲>



"살인자는 누구인가?
나는 내 소설에서 독자들이 범죄를 올바로 해결하는데 필요한 사실들을 모두 알게 되는 시점에 이르면 언제나 독자들의 지혜에 도전을 해 왔다.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도 예외는 아니다. 주어진 단서들을 엄밀한 논리와 추리로 분석해보면 지금쯤 범인의 정체를 단순히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증명'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답편를 읽어보면 알게 되겠지만 단 하나의 올바른 해결책에는 '만일'이나 '하지만'이란 것이 없다. 논리는 결코 요행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니, 당신의 올바른 '논증'에 행운이 따르기를 빈다!"
- 엘러리 퀸,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1932), <독자에의 도전>, 주영아 옮김, <검은숲>, 2012.


중학교 시절인 1988년에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동네 형의 어두운 방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장편 추리소설을 우연히 발견한 후, 오락실 갈 용돈을 모아서 추리소설을 사모으던 짧은 시절이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든 생각이었는데, 초등학교 때 친구집에서 빌려봤던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단편집]은 내게 '단편'을 읽는 힘을, 중학교 때 용돈 모아 사들였던 애거서 크리스티 등의 추리소설은 내게 '장편'의 바다에서 헤쳐 나오는 길을 알려줬다. 
당시 서점에 나온 영국 주류의 추리소설들 속에서 미국 추리소설은 양념과도 같았는데 지금은 책들도 사라지고 기억도 희미하지만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은 줄거리는 잊었으되 그 중 제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만은 또렷하다. 
'T'자형 십자가에 머리가 잘린 채 죽은 살인사건을 뒤쫓는 미국 탐정 엘러리 퀸의 모험과 어딘지 기괴한 미국식 삽화와 함께.


소설 속 주인공으로서 '엘러리 퀸(Ellery Queen)'은 1920년대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한 장서가이자 서지학자이며 뉴욕경찰서의 경관인 리처드 퀸의 아들로 여러 살인사건을 그 특유의 '연역적 소거 추리법'의 논리로써 해결한다. 학자로서 학위는 있는지, 경찰도 아니면서 '아빠찬스'로 '특수수사'를 하는 것을 보면 직업이 탐정인지, 그것도 아니면 사건 수사과정을 책으로 출간하는 것을 보아 '작가'인지, 그의 정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여러 작품을 통해 캐릭터 자체에 모순점들이 보인다고 하는데, 셜록 홈즈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예측할 수 없는 추리소설의 인기로 계속 연작 형태가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책이 안 팔리면 주인공 탐정은 그 첫 수사가 마지막 작품이 될 운명일 것이기에.
어쨌든 '탐정' 엘러리 퀸의 추리 기법은 모든 사실과 단서들을 하나도 빠짐 없이 논리적으로 연결시킨 거대한 사고틀에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용의자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연역적 소거논리'로 대부분 경찰들이 잡아온 단서들을 소파에 앉아 오로지 지식과 두뇌로만 해결하는데, 셜록 홈즈나 미스 마플, 포와로 등도 비슷한 방식일텐데 엘러리 퀸만의 특징은 그만의 '논리'를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현학적 행각을 통해 자랑한다는 것이다.
물론 '연역법'이기에 대전제가 틀리면 전체가 오류가 되기도 함에도 불구하고 엘러리 퀸은 'Q.E.D.(증명 끝.)'를 좋아한다.


"명망 있는 젊은 청년인 (범인)이 위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일련의 범죄를 저지른 범인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 믿기 어려우실지도 모릅니다. 또 그가 어떻게 그리고 왜 그랬는가를 모르면 머리가 아주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그러나 (범인)은 저의 '오랜 친구'인, 무자비한 '논리'의 그물에 걸렸습니다. 이 논리는 그리스인들이 숭상하던 로고스이고, 음모를 꾸미는 자들한테는 덫이 되기도 하죠."
- 엘러리 퀸, [그리스 관 미스터리](1932), <34. 핵심>, 김희균 옮김, <검은숲>, 2012.


수시로 라틴어 문구와 베르길리우스의 시구를 인용하고,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처럼 '분명'하다가도 사건이 갈피를 못잡으면 이럴 시간에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읽는 게 낫다는 둥 잘난체를 하며, 불어로 중얼거려 경찰들을 짜증나게도 하는 이 현학적 '탐정'은 결국, 친구와 놀러 가거나([로마 모자 미스터리]), 소파에 깊이 앉아서([그리스 관 미스터리]), 고전학 교수와 대화하면서([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 '연역적 소거법'을 완성해 간다. 모든 사실과 단서들이 열거된 후 '작가' 엘러리 퀸은 독자들에게 '이제 한 번 추리해 보시라' 막간 한 페이지를 던지는데, 매 작품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독자에의 도전>이다. 잘난 체 하는 주인공이 얄밉기도 하나 숱한 추리소설 중 범인을 맞춘 적이 거의 없기에 나는 '굳이 왜 내가 머리를 쓰나?' 싶어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 게 편하다.


"... 엘러리가 [로마 모자 미스터리]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이 책은 퀸 부자가 해결한 사건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흔한 살인 동기나 범죄 수법은 범죄 전문가라면 누구나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몬테 필드 살인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 사건에서 퀸 부자가 상대한 것은 치밀한 두뇌와 교묘한 술책을 가진 살인자였다... 그러나 이 사건도 다른 '완전 범죄'들과 마찬가지로 허점이 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엘러리의 날카로운 추리에 걸려들어 사건의 전말이 백일하에 드러나 결국 파멸을 맞았던 것이다."
- 엘러리 퀸, [로마 모자 미스터리](1929), <J.J.맥의 '서문'>, 이기원 옮김, <검은숲>, 2011.


한편으로 추리소설 작가로서 '엘러리 퀸'은 한 사람이 아니라, 만프레드 리(Manfred Lee)와 프레더릭 다네이(Frederic Dannay)라는 유태계 미국인 사촌형제의 필명이다. 뉴욕 출신으로 각각 영화사와 광고사에서 근무하던 이들은 당시 영국 추리소설의 아성에 도전하던 미국의 미스터리 바람을 타고 직장까지 때려치우며 미스터리 작가의 길을 가고자 했으나 하필 때는 1929년이었다. 
그들의 첫 작품인 [로마 모자 미스터리]가 공모작에 당선되기도 전 출판사가 파산하고 대공황의 경제 위기 속에서 이들 형제는 직장일과 미스터리 집필 작업을 병행하기로 하는데 다행히 책이 인기를 끌면서 전업작가 및 '미스터리 전문가'로 성공하게 된다. 책이 안 팔렸다면 아마도 대공황으로 직장도 잃고 작가로서도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아무튼 '미스터리 전문' 작가 '엘러리 퀸'의 명성은 현재까지도 '미국미스터리작가협회'를 이끌면서 건재하다고 하는데, 20세기 후반 일본의 추리소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봐, 퀸 군. 자넨 정말 바보짓을 했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엘러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타우(그리스 알파벳 19번째, 영어의 'T'에 해당) 십자가가 이집트 십자가가 아니란 말씀인가요?'
'바로 그걸세.'
...
'크룩스 코미사(crux commissa)가 이집트 십자가로 불린다는 생각은 어디서 나온건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요... 그런데 왜 타우가 이집트 십자가가 아니라고 말씀을...'
'이집트 십자가가 아니니까.'
야들리가 미소를 지었다.
'고대 이집트인이 사용하던 신성한 도구들 중에 그리스어 T와 닮은 모양을 한 게 있다네. 상형문자로 된 문헌에 자주 나타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오래된 기독교 신앙인 타우 십자가가 되는 건 아니지...'
'그렇다면 T형 십자가는 이집트 십자가가 결코 아니군요. 맙소사, 큰 실수를 했군.'
엘러리가 투덜거렸다.
...
교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가 굳이 확대 해석해서 이집트 십자가로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앙크(ankh)일세... 보통 크룩스 안사타(crux ansata)라고 불리는데, 이집트 비문에 아주 자주 등장하지. 이것은 신성성이나 왕권을 의미하며, 이는 곧 '생명의 근원'을 소유한 자로 치환할 수 있지.'
- 엘러리 퀸,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1932), <2-12. 교수가 말하기를>, 주영아 옮김, <검은숲>, 2012.


중학교 2학년 때 역시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청소년용 '팬더시리즈'인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을 읽었을 때, 시체의 목을 잘라 T자 십자가형을 집행한 살인자의 엽기적 행각은 물론 왠지 이교도적인 '이집트 십자가'의 신비로움에 한창 빠져 지낸 기억은 무의식 속에 남았겠으나 주인공 엘러리 퀸이나 주요 내용은 전혀 기억에 없었다. 
한참 지난 후 우연히 애거서 크리스티를 회상하던 중 중학 시절 한창 빠졌던 <해문출판사> 추리소설판을 검색하다가 기억 저편에서 소환한 엘러리 퀸에 이끌려 [국적+사물+미스터리] 시리즈를 몇 권 사서 출퇴근길 전철간에서 다시 읽었다.
현학적인 말장난, 국적과 사물에 입혀진 신비주의, 비상한 두뇌로만 가능한 기억력과 기막힌 논리로 완성되는 미스터리 소설의 고전.
덕분에 회사로 출퇴근하던 중년의 노동자는 그때만은 잠시 80년대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곤 했다.


아마도 잘난 척과 오류가 엇갈리는 '연역논리'의 탐정 엘러리 퀸 '1기'에 해당하는 대공황 시기 [국적+사물+미스터리] 시리즈 작명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함이었겠으나,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비밀)]는 정작 '이집트 십자가'와 무관하다. 미국의 시골 아로요에서 발생한 크리스마스 '타우' 십자가형과 곳곳에 배치된 문자 'T', 그리고 등장하는 '이집트 태양신'을 자칭하는 미치광이 등의 인물들을 보며 엘러리 퀸이 '타우 십자가 = 이집트 십자가'라는 상징적 전제를 연역적으로 상정한 우연한 실수에서 유래한 제목이다. 


단순한 살인사건 추적을 넘어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고전으로서의 엘러리 퀸과 함께 한 짧은 시간이 아쉬워 작가 '엘러리 퀸'의 'X-Y-Z 비극 시리즈'를 다시 주문하고 말았는데,
엘러리 퀸을 읽는 시간은 그들의 작품이 백년이 지난 지금도 '미스터리' 소설의 '고전'임이 논리적으로 '증명(Q.E.D)'되는 또 하나의 과정은 아닐런지.

"Q.E.D. (Quod Erat Demonstrandum : What Was To be Shown : 이것으로 증명 끝.)!"


***

1.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1932), 엘러리 퀸, 주영아 옮김, <검은숲>, 2012. (그리고 1980년대 <해문출판사>판.)
2. [그리스 관 미스터리](1932), 엘러리 퀸, 김희균 옮김, <검은숲>, 2012.
3. [로마 모자 미스터리](1929), 엘러리 퀸, 이기원 옮김, <검은숲>, 2011.
4. [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1929), 엘러리 퀸, 이제중 옮김, <검은숲>, 2011.
5.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1931), 엘러리 퀸, 정영목 옮김, <검은숲>, 2011.
6. [미국 총 미스터리](1933), 엘러리 퀸, 김예진 옮김, <검은숲>,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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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진달래 - 제13회 전태일문학상 특별상 수상작
노회찬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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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들은 '이익'을 지키고, 군자는 '명예'를 지킨다.
-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2004), [우리가 꿈꾸는 나라](2018)





"... 정책을 인물보다 앞세우는 일은 시련의 연속이다. 정책으로 인격화되지 않는 인물은 정치적 동물일 뿐이라는 사실. 정책이 인물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이번 총선의 전투지침이다. 
모든 전투는 시련이다."
-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 '1.22. 일지', <사회평론>, 2004.


2004년 2월부터 시작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정국' 속에서 그 해 4월 15일에는 17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299명 국회의원 중 신자유주의 '개혁'을 하려던 열린우리당이 152석, 그냥 수구세력 한나라당이 121석, 민주당과 자민련은 9석과 4석으로 찌그러졌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부유세' 등의 보편복지 정책과 1인2표 '정당식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해 선거제도 개혁투쟁을 했던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차지하면서 4.19 혁명 이후 44년만에 '진보정당'이 국회에 들어간 첫 선거였다.

1992년 민중당의 실패 후에도 지침없이 '진보정당' 건설운동에 매진했던 '진보정치인' 노회찬 선생은 1997년 말 IMF체제와 함께 치러진 대선에서 '96년 총파업을 이끌었던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대선후보로 한 '국민승리21'의 중심에 있었고, 역시 2000년 초 창당된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 민주노동당의 사무총장, 선대본부장으로 2004년 총선을 치른다. 이 해 1월부터 3월 말까지의 기록이 '총선 난중일기'라 불리는 [힘내라, 진달래]다. 

노회찬이 앞장선 민주노동당의 첫 총선에서 전국 각 지구당의 수많은 지역구 후보들과 당원들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부유세' 등 우리 사회 전례없던 보편복지 정책을 홍보하는 인간피켓이 되고 인간플래카드를 자처하며 이러한 의제들을 전사회적으로 공론화했다. 이러한 '진보정당' 운동은 노회찬의 표현에 따라 "삼겹살 판을 갈기 위해" 그 진보정당이 국회에 들어간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념정당'이냐 '대중정당'이냐, '대중투쟁'이냐 '의회주의'냐, '혁명'이냐 '개혁'이냐 등등의 어려운 논쟁 속에서 '진보정당'이 몇 차례 부침을 겪으며 '의회' 중심의 '개혁'적 '대중정당'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당시 지구당의 후보들이었던 수많은 '소대장'들도 스러져 갔다. 함께 했던 '소총수' 당원들은 얼마나 남았을까 싶지만, "흐르는 물처럼 한 사람이 가고 한 사람이 태어난다('2004.1.16. 일지')"는 노회찬 총장의 말처럼 '진보정당'도 이를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어제의 그들과 같을 수는 없을 터. 
흐르는 물처럼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 변증법 제1조 1항이다.('2004.2.10. 일지')"


"라디오 토론이니 점잖게 진행될 줄 알았는데 시작부터 난투극이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서로 사과하라고 언성 높인다. 국민들 앞에 고개들 처지도 아닌데 희대의 영웅처럼 큰소리다. CBS의 좁은 스튜디오가 동물원 우리처럼 느껴진다.
이러니 점잖고, 상식적이고, 순박한 사람들은 정치권을 꺼려하지 않았는가. 그 정치권에 이제 민주노동당이 들어간다. 타잔이 되어야만 이 동물들을 다룰 수 있다."
-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 '3.3. 일지', <사회평론>, 2004.


후보와 이미지, 지역과 학연을 내세운 기존 정치와 선거에 맞서 보편복지 '정책'을 앞세운 '진보정치'가 노회찬을 비롯한 수많은 진보정당 지지자들의 숙원이었다. 
"정책으로 인격화되지 않는 인물은 정치적 동물일 뿐이라는 사실. 정책이 인물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2004.1.22. 일지')"이라 상정한 17대 총선의 '전투지침'은 앞으로도 변함없는 '진보정당'의 선거지침이다.
'진보정치인' 노회찬은 갔어도 그의 '진보정치 지침'은 올곧게 남았다.


"여의도 나들목 부근은 어느새 밀려온 봄꽃 천지다. 개나리가 듬뿍 피어 있고 벌써 곳곳에서 진달래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3월 28일 아침 여의도. 노란 개나리와 연분홍 진달래꽃이 지금의 열우당과 민주노동당 지지율만큼 상륙해 있다.
힘내라, 진달래. 가슴도 눈시울도 연분홍이다."
-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 3.28. 일지', <사회평론>, 2004.


'총선 난중일기' [힘내라, 진달래]는 본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3월말에 끝나고 본 선거운동인 4월의 메모는 손질된 글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 해 총선 후 10월 이 기록들은 [힘내라, 진달래]라는 제목으로 "전태일 영전에 바친다"는 '서문'과 함께 출간되었고 13회 '전태일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한다.

봄이 와서 노란 개나리가 흐드려지고 조금 늦은 연분홍 진달래가 꽃판을 조금씩 점령하고 물들여가는 상상. 기존 정치판에서 '진보정당'의 미래에 대한 '진보정치인' 노회찬의 바램이었다. 
"힘내라, 진달래!"



"촛불의 가장 큰 의의는 무엇일까요? 잘못한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감옥으로 보낸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정권 교체를 총칼을 든 군인이 아닌, 촛불을 든 시민들이 민주주의 절차를 지키며 이뤄냈다는 점입니다.
민주주의는 시스템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업 또는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해도 시스템이 잘 작동하면 나라가 문제없이 운영될 수 있습니다... 촛불이 일어난 것은... 시스템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모여서 무엇을 했습니까?... 계속 외쳤습니다. 시스템을 복구하라고 말입니다... 언제든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은 마음속의 촛불을 꺼내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촛불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공정, 평등, 평화를 사회에 정착시키는 중요한 과제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987년에 미처 이뤄내지 못했던 일들이지요. 그리고 그 과제들을 풀기 위해 정치부터 바꿔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가장 중요하며 필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역시 촛불의 경험이 알려주지요. 국민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참여가 세상을 바꾼다', <창비>, 2018.


내가 유일하게 존경한 '진보정치인' 노회찬 의원이 돌아가시기 전인 2018년 초, <창비>에서 주최한 특강 녹취록을 엮어 그가 운명을 달리한 후인 그 해 9월에 출간된 [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1987년 이후 체제는 거리에 모인 민중의 힘으로 '민족', '민중', '민주'를 쟁취했다. 
노회찬은 2016~2017년 '촛불항쟁' 이후 우리 사회의 과제는 '공정', '평등', '평화'를 사회에 정착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국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시스템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운영원리이며, 이러한 민의가 제대로 의회에 반영되는 정치제도와 선거제도 개혁이 그의 유일한 '정치노선'이었다. '대중투쟁'이냐 '의회주의'냐, '혁명'이냐 '개혁'이냐 등의 논쟁에 대하여 그가 일생의 고단한 삶을 통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한 답변이었다.

'혁명'은 체제를 뒤집는 것을 이르는데, '촛불'이 '혁명'이 아니라 '항쟁'이었던 이유는 '촛불'이 '체제변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의 상식적인 '복구'를 요구하고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촛불'이 '혁명'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정치개혁과 선거제도 개혁을 담은 새로운 헌법개정으로 '제7공화국' 체제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 '진보정치인' 노회찬의 역설한 [우리가 꿈꾸는 나라]다.



그는 '작가'는 아니었고 '정치인'이다 보니 '글'보다는 '촌철살인'의 '말'이 더 유명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멀리서나마 보아온 그의 '글'은 유명해진 그의 '말'보다 더 빛나기에, 나는 감히 그를 좋아하는 '작가'로 추천한다. 그의 '촌철살인'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매순간 치열하게 사색하고 행동하며 메모한 그의 '글'이 원천인 것이다. 
아마도, 그럴리는 전혀 었었을 것이나 '정치인' 노회찬으로 살지 않았다면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우리의 역사와 나아가 인류 전체의 역사를 '진보적'으로 우리에게 재미있게 풀어 설명해주는 이웃집 '작가' 아저씨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작가 유시민보다 훨씬 더 친근한 그런.


노회찬 의원 2주기인 2020년 7월 들어 그의 책을 다시 뒤적이던 중, 박원순 서울시장의 사망소식을 듣는다. 입이 있는 자들은 숱하게 떠들어대고 있으나, 내게 떠오른 문장은 한 줄이었다.

'도적들은 이익을 지키고, 군자는 명예를 지킨다'

[논어], [맹자]에나 나올 법한 문장은 인용이 아니라 최근 비보를 듣고 무시로 떠오른 것인데,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같은 자들은 '무죄'를 주장하며 개인의 '이익'을 목숨걸고 지키려 하고 노회찬 같은 군자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국 목숨까지 내놓았기 때문이다.
'삼성 X 파일' 사건으로 '유죄'를 선고받아 의원직까지 상실했던 노회찬은 오히려 당당했으나 '드루킹' 사건 연루설은 그에게 부르주아 법원에서 '유무죄'의 차원이 아니었다. '진보정치인'으로서의 '명예'와 그가 평생을 바쳐 복무했던 인민에 대한 '의무'의 문제였다.


스스로 진보정치의 '원칙'이 되고자 했고, 그 '원칙'을 세우기 위해 일생을 바친 유일한 '진보정치인' 노회찬 선생을 다시금 떠올리는 시간들이 덧없이 이어지는 나날이다.


"스스로 원칙인 사람. 원칙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세워지고 또 관철된다."
-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 '1.17. 일지', <사회평론>, 2004.


***

1. [힘내라, 진달래], 노회찬, <사회평론>, 2004.
2. [우리가 꿈꾸는 나라], 노회찬, <창비>, 2018.
3.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노회찬,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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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꿈꾸는 나라 지혜의 시대
노회찬 지음 / 창비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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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들은 '이익'을 지키고, 군자는 '명예'를 지킨다.
-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2004), [우리가 꿈꾸는 나라](2018)



"... 정책을 인물보다 앞세우는 일은 시련의 연속이다. 정책으로 인격화되지 않는 인물은 정치적 동물일 뿐이라는 사실. 정책이 인물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이번 총선의 전투지침이다. 
모든 전투는 시련이다."
-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 '1.22. 일지', <사회평론>, 2004.


2004년 2월부터 시작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정국' 속에서 그 해 4월 15일에는 17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299명 국회의원 중 신자유주의 '개혁'을 하려던 열린우리당이 152석, 그냥 수구세력 한나라당이 121석, 민주당과 자민련은 9석과 4석으로 찌그러졌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부유세' 등의 보편복지 정책과 1인2표 '정당식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해 선거제도 개혁투쟁을 했던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차지하면서 4.19 혁명 이후 44년만에 '진보정당'이 국회에 들어간 첫 선거였다.

1992년 민중당의 실패 후에도 지침없이 '진보정당' 건설운동에 매진했던 '진보정치인' 노회찬 선생은 1997년 말 IMF체제와 함께 치러진 대선에서 '96년 총파업을 이끌었던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대선후보로 한 '국민승리21'의 중심에 있었고, 역시 2000년 초 창당된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 민주노동당의 사무총장, 선대본부장으로 2004년 총선을 치른다. 이 해 1월부터 3월 말까지의 기록이 '총선 난중일기'라 불리는 [힘내라, 진달래]다. 

노회찬이 앞장선 민주노동당의 첫 총선에서 전국 각 지구당의 수많은 지역구 후보들과 당원들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부유세' 등 우리 사회 전례없던 보편복지 정책을 홍보하는 인간피켓이 되고 인간플래카드를 자처하며 이러한 의제들을 전사회적으로 공론화했다. 이러한 '진보정당' 운동은 노회찬의 표현에 따라 "삼겹살 판을 갈기 위해" 그 진보정당이 국회에 들어간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념정당'이냐 '대중정당'이냐, '대중투쟁'이냐 '의회주의'냐, '혁명'이냐 '개혁'이냐 등등의 어려운 논쟁 속에서 '진보정당'이 몇 차례 부침을 겪으며 '의회' 중심의 '개혁'적 '대중정당'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당시 지구당의 후보들이었던 수많은 '소대장'들도 스러져 갔다. 함께 했던 '소총수' 당원들은 얼마나 남았을까 싶지만, "흐르는 물처럼 한 사람이 가고 한 사람이 태어난다('2004.1.16. 일지')"는 노회찬 총장의 말처럼 '진보정당'도 이를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어제의 그들과 같을 수는 없을 터. 
흐르는 물처럼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 변증법 제1조 1항이다.('2004.2.10. 일지')"


"라디오 토론이니 점잖게 진행될 줄 알았는데 시작부터 난투극이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서로 사과하라고 언성 높인다. 국민들 앞에 고개들 처지도 아닌데 희대의 영웅처럼 큰소리다. CBS의 좁은 스튜디오가 동물원 우리처럼 느껴진다.
이러니 점잖고, 상식적이고, 순박한 사람들은 정치권을 꺼려하지 않았는가. 그 정치권에 이제 민주노동당이 들어간다. 타잔이 되어야만 이 동물들을 다룰 수 있다."
-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 '3.3. 일지', <사회평론>, 2004.


후보와 이미지, 지역과 학연을 내세운 기존 정치와 선거에 맞서 보편복지 '정책'을 앞세운 '진보정치'가 노회찬을 비롯한 수많은 진보정당 지지자들의 숙원이었다. 
"정책으로 인격화되지 않는 인물은 정치적 동물일 뿐이라는 사실. 정책이 인물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2004.1.22. 일지')"이라 상정한 17대 총선의 '전투지침'은 앞으로도 변함없는 '진보정당'의 선거지침이다.
'진보정치인' 노회찬은 갔어도 그의 '진보정치 지침'은 올곧게 남았다.


"여의도 나들목 부근은 어느새 밀려온 봄꽃 천지다. 개나리가 듬뿍 피어 있고 벌써 곳곳에서 진달래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3월 28일 아침 여의도. 노란 개나리와 연분홍 진달래꽃이 지금의 열우당과 민주노동당 지지율만큼 상륙해 있다.
힘내라, 진달래. 가슴도 눈시울도 연분홍이다."
-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 3.28. 일지', <사회평론>, 2004.


'총선 난중일기' [힘내라, 진달래]는 본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3월말에 끝나고 본 선거운동인 4월의 메모는 손질된 글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 해 총선 후 10월 이 기록들은 [힘내라, 진달래]라는 제목으로 "전태일 영전에 바친다"는 '서문'과 함께 출간되었고 13회 '전태일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한다.

봄이 와서 노란 개나리가 흐드려지고 조금 늦은 연분홍 진달래가 꽃판을 조금씩 점령하고 물들여가는 상상. 기존 정치판에서 '진보정당'의 미래에 대한 '진보정치인' 노회찬의 바램이었다. 
"힘내라, 진달래!"





"촛불의 가장 큰 의의는 무엇일까요? 잘못한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감옥으로 보낸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정권 교체를 총칼을 든 군인이 아닌, 촛불을 든 시민들이 민주주의 절차를 지키며 이뤄냈다는 점입니다.
민주주의는 시스템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업 또는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해도 시스템이 잘 작동하면 나라가 문제없이 운영될 수 있습니다... 촛불이 일어난 것은... 시스템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모여서 무엇을 했습니까?... 계속 외쳤습니다. 시스템을 복구하라고 말입니다... 언제든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은 마음속의 촛불을 꺼내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촛불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공정, 평등, 평화를 사회에 정착시키는 중요한 과제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987년에 미처 이뤄내지 못했던 일들이지요. 그리고 그 과제들을 풀기 위해 정치부터 바꿔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가장 중요하며 필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역시 촛불의 경험이 알려주지요. 국민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참여가 세상을 바꾼다', <창비>, 2018.


내가 유일하게 존경한 '진보정치인' 노회찬 의원이 돌아가시기 전인 2018년 초, <창비>에서 주최한 특강 녹취록을 엮어 그가 운명을 달리한 후인 그 해 9월에 출간된 [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1987년 이후 체제는 거리에 모인 민중의 힘으로 '민족', '민중', '민주'를 쟁취했다. 
노회찬은 2016~2017년 '촛불항쟁' 이후 우리 사회의 과제는 '공정', '평등', '평화'를 사회에 정착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국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시스템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운영원리이며, 이러한 민의가 제대로 의회에 반영되는 정치제도와 선거제도 개혁이 그의 유일한 '정치노선'이었다. '대중투쟁'이냐 '의회주의'냐, '혁명'이냐 '개혁'이냐 등의 논쟁에 대하여 그가 일생의 고단한 삶을 통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한 답변이었다.

'혁명'은 체제를 뒤집는 것을 이르는데, '촛불'이 '혁명'이 아니라 '항쟁'이었던 이유는 '촛불'이 '체제변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의 상식적인 '복구'를 요구하고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촛불'이 '혁명'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정치개혁과 선거제도 개혁을 담은 새로운 헌법개정으로 '제7공화국' 체제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 '진보정치인' 노회찬의 역설한 [우리가 꿈꾸는 나라]다.



그는 '작가'는 아니었고 '정치인'이다 보니 '글'보다는 '촌철살인'의 '말'이 더 유명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멀리서나마 보아온 그의 '글'은 유명해진 그의 '말'보다 더 빛나기에, 나는 감히 그를 좋아하는 '작가'로 추천한다. 그의 '촌철살인'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매순간 치열하게 사색하고 행동하며 메모한 그의 '글'이 원천인 것이다. 
아마도, 그럴리는 전혀 었었을 것이나 '정치인' 노회찬으로 살지 않았다면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우리의 역사와 나아가 인류 전체의 역사를 '진보적'으로 우리에게 재미있게 풀어 설명해주는 이웃집 '작가' 아저씨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작가 유시민보다 훨씬 더 친근한 그런.


노회찬 의원 2주기인 2020년 7월 들어 그의 책을 다시 뒤적이던 중, 박원순 서울시장의 사망소식을 듣는다. 입이 있는 자들은 숱하게 떠들어대고 있으나, 내게 떠오른 문장은 한 줄이었다.

'도적들은 이익을 지키고, 군자는 명예를 지킨다'

[논어], [맹자]에나 나올 법한 문장은 인용이 아니라 최근 비보를 듣고 무시로 떠오른 것인데,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같은 자들은 '무죄'를 주장하며 개인의 '이익'을 목숨걸고 지키려 하고 노회찬 같은 군자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국 목숨까지 내놓았기 때문이다.
'삼성 X 파일' 사건으로 '유죄'를 선고받아 의원직까지 상실했던 노회찬은 오히려 당당했으나 '드루킹' 사건 연루설은 그에게 부르주아 법원에서 '유무죄'의 차원이 아니었다. '진보정치인'으로서의 '명예'와 그가 평생을 바쳐 복무했던 인민에 대한 '의무'의 문제였다.


스스로 진보정치의 '원칙'이 되고자 했고, 그 '원칙'을 세우기 위해 일생을 바친 유일한 '진보정치인' 노회찬 선생을 다시금 떠올리는 시간들이 덧없이 이어지는 나날이다.


"스스로 원칙인 사람. 원칙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세워지고 또 관철된다."
-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 '1.17. 일지', <사회평론>, 2004.


***

1. [힘내라, 진달래], 노회찬, <사회평론>, 2004.
2. [우리가 꿈꾸는 나라], 노회찬, <창비>, 2018.
3.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노회찬,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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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노회찬 지음 / 일빛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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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들은 '이익'을 지키고, 군자는 '명예'를 지킨다.
-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2004), [우리가 꿈꾸는 나라](2018)




"... 정책을 인물보다 앞세우는 일은 시련의 연속이다. 정책으로 인격화되지 않는 인물은 정치적 동물일 뿐이라는 사실. 정책이 인물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이번 총선의 전투지침이다. 
모든 전투는 시련이다."
-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 '1.22. 일지', <사회평론>, 2004.


2004년 2월부터 시작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정국' 속에서 그 해 4월 15일에는 17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299명 국회의원 중 신자유주의 '개혁'을 하려던 열린우리당이 152석, 그냥 수구세력 한나라당이 121석, 민주당과 자민련은 9석과 4석으로 찌그러졌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부유세' 등의 보편복지 정책과 1인2표 '정당식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해 선거제도 개혁투쟁을 했던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차지하면서 4.19 혁명 이후 44년만에 '진보정당'이 국회에 들어간 첫 선거였다.

1992년 민중당의 실패 후에도 지침없이 '진보정당' 건설운동에 매진했던 '진보정치인' 노회찬 선생은 1997년 말 IMF체제와 함께 치러진 대선에서 '96년 총파업을 이끌었던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대선후보로 한 '국민승리21'의 중심에 있었고, 역시 2000년 초 창당된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 민주노동당의 사무총장, 선대본부장으로 2004년 총선을 치른다. 이 해 1월부터 3월 말까지의 기록이 '총선 난중일기'라 불리는 [힘내라, 진달래]다. 

노회찬이 앞장선 민주노동당의 첫 총선에서 전국 각 지구당의 수많은 지역구 후보들과 당원들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부유세' 등 우리 사회 전례없던 보편복지 정책을 홍보하는 인간피켓이 되고 인간플래카드를 자처하며 이러한 의제들을 전사회적으로 공론화했다. 이러한 '진보정당' 운동은 노회찬의 표현에 따라 "삼겹살 판을 갈기 위해" 그 진보정당이 국회에 들어간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념정당'이냐 '대중정당'이냐, '대중투쟁'이냐 '의회주의'냐, '혁명'이냐 '개혁'이냐 등등의 어려운 논쟁 속에서 '진보정당'이 몇 차례 부침을 겪으며 '의회' 중심의 '개혁'적 '대중정당'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당시 지구당의 후보들이었던 수많은 '소대장'들도 스러져 갔다. 함께 했던 '소총수' 당원들은 얼마나 남았을까 싶지만, "흐르는 물처럼 한 사람이 가고 한 사람이 태어난다('2004.1.16. 일지')"는 노회찬 총장의 말처럼 '진보정당'도 이를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어제의 그들과 같을 수는 없을 터. 
흐르는 물처럼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 변증법 제1조 1항이다.('2004.2.10. 일지')"


"라디오 토론이니 점잖게 진행될 줄 알았는데 시작부터 난투극이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서로 사과하라고 언성 높인다. 국민들 앞에 고개들 처지도 아닌데 희대의 영웅처럼 큰소리다. CBS의 좁은 스튜디오가 동물원 우리처럼 느껴진다.
이러니 점잖고, 상식적이고, 순박한 사람들은 정치권을 꺼려하지 않았는가. 그 정치권에 이제 민주노동당이 들어간다. 타잔이 되어야만 이 동물들을 다룰 수 있다."
-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 '3.3. 일지', <사회평론>, 2004.


후보와 이미지, 지역과 학연을 내세운 기존 정치와 선거에 맞서 보편복지 '정책'을 앞세운 '진보정치'가 노회찬을 비롯한 수많은 진보정당 지지자들의 숙원이었다. 
"정책으로 인격화되지 않는 인물은 정치적 동물일 뿐이라는 사실. 정책이 인물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2004.1.22. 일지')"이라 상정한 17대 총선의 '전투지침'은 앞으로도 변함없는 '진보정당'의 선거지침이다.
'진보정치인' 노회찬은 갔어도 그의 '진보정치 지침'은 올곧게 남았다.


"여의도 나들목 부근은 어느새 밀려온 봄꽃 천지다. 개나리가 듬뿍 피어 있고 벌써 곳곳에서 진달래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3월 28일 아침 여의도. 노란 개나리와 연분홍 진달래꽃이 지금의 열우당과 민주노동당 지지율만큼 상륙해 있다.
힘내라, 진달래. 가슴도 눈시울도 연분홍이다."
-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 3.28. 일지', <사회평론>, 2004.


'총선 난중일기' [힘내라, 진달래]는 본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3월말에 끝나고 본 선거운동인 4월의 메모는 손질된 글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 해 총선 후 10월 이 기록들은 [힘내라, 진달래]라는 제목으로 "전태일 영전에 바친다"는 '서문'과 함께 출간되었고 13회 '전태일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한다.

봄이 와서 노란 개나리가 흐드려지고 조금 늦은 연분홍 진달래가 꽃판을 조금씩 점령하고 물들여가는 상상. 기존 정치판에서 '진보정당'의 미래에 대한 '진보정치인' 노회찬의 바램이었다. 
"힘내라, 진달래!"




"촛불의 가장 큰 의의는 무엇일까요? 잘못한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감옥으로 보낸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정권 교체를 총칼을 든 군인이 아닌, 촛불을 든 시민들이 민주주의 절차를 지키며 이뤄냈다는 점입니다.
민주주의는 시스템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업 또는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해도 시스템이 잘 작동하면 나라가 문제없이 운영될 수 있습니다... 촛불이 일어난 것은... 시스템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모여서 무엇을 했습니까?... 계속 외쳤습니다. 시스템을 복구하라고 말입니다... 언제든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은 마음속의 촛불을 꺼내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촛불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공정, 평등, 평화를 사회에 정착시키는 중요한 과제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987년에 미처 이뤄내지 못했던 일들이지요. 그리고 그 과제들을 풀기 위해 정치부터 바꿔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가장 중요하며 필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역시 촛불의 경험이 알려주지요. 국민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참여가 세상을 바꾼다', <창비>, 2018.


내가 유일하게 존경한 '진보정치인' 노회찬 의원이 돌아가시기 전인 2018년 초, <창비>에서 주최한 특강 녹취록을 엮어 그가 운명을 달리한 후인 그 해 9월에 출간된 [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1987년 이후 체제는 거리에 모인 민중의 힘으로 '민족', '민중', '민주'를 쟁취했다. 
노회찬은 2016~2017년 '촛불항쟁' 이후 우리 사회의 과제는 '공정', '평등', '평화'를 사회에 정착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국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시스템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운영원리이며, 이러한 민의가 제대로 의회에 반영되는 정치제도와 선거제도 개혁이 그의 유일한 '정치노선'이었다. '대중투쟁'이냐 '의회주의'냐, '혁명'이냐 '개혁'이냐 등의 논쟁에 대하여 그가 일생의 고단한 삶을 통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한 답변이었다.

'혁명'은 체제를 뒤집는 것을 이르는데, '촛불'이 '혁명'이 아니라 '항쟁'이었던 이유는 '촛불'이 '체제변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의 상식적인 '복구'를 요구하고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촛불'이 '혁명'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정치개혁과 선거제도 개혁을 담은 새로운 헌법개정으로 '제7공화국' 체제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 '진보정치인' 노회찬의 역설한 [우리가 꿈꾸는 나라]다.


그는 '작가'는 아니었고 '정치인'이다 보니 '글'보다는 '촌철살인'의 '말'이 더 유명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멀리서나마 보아온 그의 '글'은 유명해진 그의 '말'보다 더 빛나기에, 나는 감히 그를 좋아하는 '작가'로 추천한다. 그의 '촌철살인'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매순간 치열하게 사색하고 행동하며 메모한 그의 '글'이 원천인 것이다. 
아마도, 그럴리는 전혀 었었을 것이나 '정치인' 노회찬으로 살지 않았다면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우리의 역사와 나아가 인류 전체의 역사를 '진보적'으로 우리에게 재미있게 풀어 설명해주는 이웃집 '작가' 아저씨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작가 유시민보다 훨씬 더 친근한 그런.


노회찬 의원 2주기인 2020년 7월 들어 그의 책을 다시 뒤적이던 중, 박원순 서울시장의 사망소식을 듣는다. 입이 있는 자들은 숱하게 떠들어대고 있으나, 내게 떠오른 문장은 한 줄이었다.

'도적들은 이익을 지키고, 군자는 명예를 지킨다'

[논어], [맹자]에나 나올 법한 문장은 인용이 아니라 최근 비보를 듣고 무시로 떠오른 것인데,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같은 자들은 '무죄'를 주장하며 개인의 '이익'을 목숨걸고 지키려 하고 노회찬 같은 군자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국 목숨까지 내놓았기 때문이다.
'삼성 X 파일' 사건으로 '유죄'를 선고받아 의원직까지 상실했던 노회찬은 오히려 당당했으나 '드루킹' 사건 연루설은 그에게 부르주아 법원에서 '유무죄'의 차원이 아니었다. '진보정치인'으로서의 '명예'와 그가 평생을 바쳐 복무했던 인민에 대한 '의무'의 문제였다.


스스로 진보정치의 '원칙'이 되고자 했고, 그 '원칙'을 세우기 위해 일생을 바친 유일한 '진보정치인' 노회찬 선생을 다시금 떠올리는 시간들이 덧없이 이어지는 나날이다.


"스스로 원칙인 사람. 원칙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세워지고 또 관철된다."
-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 '1.17. 일지', <사회평론>, 2004.


***

1. [힘내라, 진달래], 노회찬, <사회평론>, 2004.
2. [우리가 꿈꾸는 나라], 노회찬, <창비>, 2018.
3.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노회찬,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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