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은 말한다 - 화석이 말하는 진화와 창조론의 진실
도널드 R. 프로세로 지음, 류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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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진화'는 '덤불'이지 '사다리'가 아니다
- [화석은 말한다], 도널드 프로세로, 2017.


"생명은 처음에 창조주에 의해 소수의 또는 하나의 형태로, 여러가지 능력과 함께 불어넣어졌다는 견해, 그리고 이 지구가 확고한 중력의 법칙에 의해 계속해서 돌고 있는 동안에, 그렇게 단순한 발단에서 매우 아름답고 놀라우며 무한한 형태로 수없이 생겨나고 또 지금도 생겨나고 있다는 견해(생명관)에는 '장엄한 점(장엄미)'이 있다."
- [종의 기원], <15. 요약과 결론>, 찰스 다윈, 1859.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 1809~1882)이 1859년에 [종(種)의 기원(起源)]을 출간했을 때는 사실 '진화론'이라는 것의 첫 출현은 아니었다. 당시는 아직 신이 세상만물을 만들었다는 '창조론'의 시대였지만 칼 폰 린네 같은 생물학자들이 생물 분지학 및 계통분류학을 정립했고, 라마르크와 같은 초기 '진화론자'들도 이미 있었다. 그러나 과학사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 발표 후 본격적으로 열린 '진화론'의 세계는 생명체가 '신의 법칙'이 아니라 '자연법칙'에 따른다는 생물학의 '혁명'이었다. 
에이브리엄 링컨과 같은해 같은날 태어난 찰스 다윈은, 링컨이 미국 전근대식 흑인노예들을 근대식 노동자계급으로 '해방'시킨 것처럼 생물학을 신의 '초자연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도 하는데([화석은 말한다], <4. 진화론의 진화>, 도널드 프로세로, 2017.), 이는 물리학에서 아이작 뉴턴의 '중력 이론'이나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이 이룬 '과학혁명'에 비견될 수 있다. 생명체의 역사에서 생물이 변화해 왔다는 '증거'로서의 '진화' 사실과 이러한 유구한 '진화'가 일어나는 방식으로서 '자연선택'([종의 기원], <4. '자연도태' 또는 '적자생존'>)이라는 메커니즘을 밝히는 다윈의 [종의 기원]은 아직 '화석'이라는 주요 증거가 많이 발견되지 못했고 고생물학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주류 '창조론'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의심할 여지 없는 생물학의 '혁명'이었다. 
[종의 기원]의 원제는 '자연선택 방식에 의한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이다. 다윈은 비록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또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생명체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이의 방법이기는 하지만, 유일한 방법도 아니라는 것도 확신하고 있다"고 [종의 기원] <머리말>과 <15장 요약과 결론>에서 강조한다. 새로운 객관적 '증거'에 의해 반박되고 만약 오류가 드러나면, 즉 다윈이 "... 유익한 개체적인 차이와 변이의 보존 및 자기에게 유해한 형질을 가진 생물은 멸망된다는 것"([종의 기원], <4>)을 의미하는 '자연선택'이나 '자연도태' 또는 '적자생존' 외에 다른 '진화'의 요인이 발견되면 언제든 폐기될 수 있는 잠정적인 '과학적 가설'임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당시 '화석'과 고생물학의 발전이 더딘 관계로 '인간'의 '진화'에 관해서는 본격적으로 다룰 수는 없었지만, 다윈은 '중력'과 같은 자명한 '사실' 못지않게 생명의 '진화' 사실 자체에는 '장엄미'가 있다는 감탄과 함께 [종의 기원]을 마무리하고 있다.


"'중력'이 일어나는 방식을 우리는 아직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물체가 땅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진화'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어쩌면 완전히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생명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진화'를 설명하는 이론은 '신다윈주의'가 전부는 아니다. '진화'는 과거에도 일어났고 바로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 [화석은 말한다], <4. 진화론의 진화>, 도널드 프로세로, 2017.


미국의 고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인 도널드 프로세로(Donald R. Prothero)는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최근의 '화석' 발굴 결과에 맞춰 수정해가면서 발표한 [화석은 말한다]라는 책에서 아직도 미국의 정치권 및 교육계에 만연한 '창조론'을 최근 화석과 고생물학의 증거를 토대로 강력 반박하고 있다. 객관적 증거들을 토대로 잠정적 '가설'들을 세우지만 새로운 증거들에 의한 '실험' 및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미련없이 폐기되는 '잠정적 가설'인 '과학'적 지식으로서의 '진화론'에 기반하여, 온통 '도그마'로 점철된 '창조론'을 박살내는 과학자 프로세로의 이 책은 엥겔스의 [반뒤링론](1878)이나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못지 않게 다분히 논쟁적이다. 프로세로에 의해 '창조과학'은 논리로도 부정되고 '창조과학자'들은 인격적으로도 모독된다. 단, '창조론' 또한 하나의 '의견'이기에 '민주적'으로는 존중될 수는 있으나 '창조론'이 증거도 공부도 과학훈련도 없이 감히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ID : Intelligent Design)' 같은 '과학'적 외피를 둘렀을 때는 '과학적'으로 무참하게 깨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과학자'인 프로세로 또한 생명의 '진화'가 왜 일어나는지 알 수는 없다. 이는 '중력'이 왜 발생하는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논하자면, '진화'는 '이론(theory)'이라기 보다는 '사실(fact)'에 가깝다. 실제로 초기 '진화론자'들은 신을 믿는 자들이었고 [화석은 말한다]의 저자인 프로세로도 교회에 다니는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즉, '진화론자'라고 해서 '무신론자'는 아니다. 다만, '과학'도 아니면서 감히 '과학'을 참칭하는 '창조과학'은 쌍욕을 들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다분히 '미국'적인 시각에서 '창조론'이 끼치는 해악으로 미국 사회의 '반지성주의'적 면모인 기독교 근본주의와 공화당 트럼프와 같은 인종주의 등을 예로 들며 '창조론'이 미국의 정치권과 교육계에 더이상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결론'([화석은 말한다], <16. 무엇이 중요한가?>)으로 남기고 있다.


"다윈의 책([종의 기원])이 세상에 나오고 불과 두 해 뒤인 1861년,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졸른호펜의 석회암 채석장에서 놀라운 화석이 하나 발견되었다... 대영박물관 학예사였던 리처드 오언(Richard Owen)-'공룡(Dinosauria)'이라는 이름을 지은 사람-이 (이 화석을) 서술할 책임을 맡았다. 그보다 앞서 그 표본은 이미 '시조(始祖)새'(Archeopteryx : '고대의 날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오언도 기본적으로 그걸 '새'라고 서술하기는 했으나, '공룡'이 가진 모든 형질들이 그 골격에 담겨있음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저명한 생물학자 가운데에서 '진화론'에 반발한 마지막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오언은 이 화석을 그 친척(공룡)들과 결부시키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언의 맞수였던 토머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이 무렵에 그는 '다윈의 불독'이 되어 말과 글로 다윈의 이론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시조새'에서 보이는 그 '공룡' 형질들을 놓치지 않았다. 현생 조류를 처음으로 해부학적으로 연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자 콤프소그나투스 같은 공룡도 여럿 연구한 헉슬리는 '시조새'가 '새'와 '공룡' 사이를 이어주는 훌륭한 '빠진 고리'임을 놓치지 않고 알아보았다."
- [화석은 말한다], <12. 공룡이 진화하다. 그리고 하늘을 날다>, 도널드 프로세로, 2017.


그렇다고 해서 프로세로의 책 [화석은 말한다]가 비난으로만 일관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진화론'의 사실적 정당함을 '잠정적'으로나마 증명하는 '과학책'인만큼 흥미로운 '화석' 이야기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이 책은 <1부. 진화와 화석 기록>에서 '증거'로 세워지고 수정되며 과감하게 폐기될 수도 있는 '잠정적 가설'로서의 '과학적 지식'의 본성(1장)'과 '창조과학'의 허위성(2장), '화석'의 의미(3장)와 '진화생물학'의 발전과정 등(4~5장)에 관하여 서술하고, 
<2부. 화석은 진화를 말한다>를 통해 5억년 전 '생명의 기원들(6장)'과 5억5천만년 전 고생대 초 '캄브리아기 대진화'라는 '폭발'이라기 보다는 미생물에서부터 시작된 8천만년 동안의 점진적이고 '느린 도화(7장)' 과정을 거쳐 '무척추동물(8장)'로부터 '물고기(9장)',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10장)'와 '양막류(11장)'와 같이 '땅 위로 올라오거나 바다로 돌아간 동물'들로 이어지는 생명체 '진화'의 과정, 중생대의 '공룡과 조류(12장)', 백악기 말기부터 '진화 방산(evolutionary radiation)'으로 폭발적 진화를 이룬 '포유류(13장)'와 거대 '말굽동물(14장)'인 유제류(有蹄類)의 진화 과정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유인원의 반영(15장)'으로서 인류의 '진화사'를 돌아보며 '결론(16장)'으로 치닫는다.

과연 이 '진화사'의 '장엄'한 과정은 '창조과학'의 허위성을 밝혀내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로서 '화석'의 역사다. 라틴어로 명명된 온갖 학명들은 몰라도 상관없다. 그저 이 5억년 이상의 '장엄'한 역사에서 '진화'라는 것이 '사다리'처럼 직선적 변화 과정이 아니라 '덤불'과도 같이 우거진 광경이라는 점만 기억하면 된다. 다윈의 '진화론'을 '점진적'인 과정으로 정의하고 옹호하던 '신다윈주의'도 있었지만 이는 이른바 '신플라톤주의'와 같이 원래의 학설을 신비화시키거나 보수적으로 해석했던 경향이었다. 다윈 '진화론'의 본질은 '진화의 덤불' 속에서 폭발적으로 퍼져나간 '혁명'적 '진화'의 과정이었다. 
고대 해양 '미생물'이 '무척추동물'로 진화하고, 바다 물고기가 지상으로 올라오거나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과정도, 공룡이 조류로 변신하는 과정 및 포유류와 인류의 폭발적 '진화 방산(evolutionary radiation)' 모두는 '사다리'처럼 직선적 과정이 아니라 '덤불'과도 같은 공존과 공생의 과정이었다.


"'진화'는 '덤불'이지 '사다리'가 아니다."
- [화석은 말한다], <10.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 도널드 프로세로, 2017.


1859년에 찰스 다윈이 "자연선택은 변화의 중요한 요인이지만 변화의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종의 기원], <머리말>과 <15. 요약과 결론>)라고 강조했듯, 2017년의 도널드 프로세로도 현대판 [종의 기원]인 [화석은 말한다]에서 "진화는 덤불이지 사다리가 아니다"([화석은 말한다], <10장>부터 <16장>까지)라고 수차례 강조하고 있다.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화석 진화의 '중간 단계'를 끊임없이 요구하지만, 진화는 예를 들어 60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7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5만년 전 '네안데르탈인' 및 1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로 '사다리'처럼 이어진 것은 아니다. 6천만년 전까지 2억년 동안 이상 지구를 지배했던 거대 공룡이 대멸종을 맞고 중생대(트라이아스기-쥐라기-백악기)가 끝난 후 신생대 초기인 팔레오세에서 '진화 방산'을 시작한 소과 말과인 '말굽동물(유제류)'이 '덤불'처럼 분화하고 에오세에 개과 동물이, 올리고세에 고양이과 동물들이 분화 방산된 과정 자체도 '사다리'처럼 곧은 직선의 과정이 아니었다. 고래의 조상인 '암불로케투스'도 3천만년 전 올리고세에 바로 고래로만 진화한 것은 아니고 고래와 가장 비슷한 친척인 하마로 '덤불'처럼 분화했다. 인류 또한 600~700만년 전 지금은 '투마이(Toumai)'로 불린 화석인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Sahelanthropus tchadensis)'와 320만년 전 '최초의 인간 루시(Lucy)'로 불린 화석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의 진화 '사다리'가 아니라 '덤불' 방식의 폭발적 '진화 방산'이었다. 오늘날 밝혀졌다시피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은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조상'이 아니라 동시대 유라시아에서 공존했다. 4만5천년 전 아프리카 더운 지역에 살던 사피엔스가 추운 북쪽 유라시아에 살던 네안데르탈인의 영역으로 이주하여 두 종은 9천년 이상 공존하며 이종교배도 한 결과 현대인의 3% 정도는 호모 사피엔스보다 네안데르탈인의 형질을 가지고 있다고도 한다. 역시 '직립인간'인 '에렉투스(Homo erectus)'와 '도구인간'인 '하빌리스(Homo habilis)' 또한 '사다리' 형태가 아니라 190만년 전부터 3만년 전까지 '덤불'처럼 퍼져 공존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피엔스'와의 '사회성' 경쟁에서 밀렸을 수도 있을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운명은 아니었을지라도 '에렉투스'가 '하빌리스'를 경쟁에서 밀어냈는지는 모르지만 프로세로에 의하면 "사람족 가운데에서 (180만년 이상 존속했던) 호모 에렉투스는 처음으로 널리 퍼진 종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번성하고 가장 오래 존재한 종에 해당"([화석은 말한다], <15장>)한다고 하는데, 46억년 지구의 역사와 5억년 이상의 생명체 '진화'의 과정 속에서 이제 겨우 10~20만살 정도 되는 '사피엔스'가 더욱 겸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 '덤불'과도 같은 '장엄'한 '진화사'에 담겨 있다. 

도날드 프로세로의 다분히 논쟁적이지만 매우 유익하고 재미있는 '화석' 정보로 가득한 이 책 [화석은 말한다]의 원제는 '진화 : 화석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그것이 중요한 점(EVOLUTION : What the Fossils Say and Why It Matters)'이다. 즉, '과학적 가설'은 객관적 '사실' 및 '증거'로 인해 언제든 폐기될 수도 있는 '잠정적 가설'이기는 하나, '창조과학'처럼 '과학'도 아니면서 '증거'와 '사실'까지 조작하는 도그마와 달리 '사실'과 '증거' 자체를 매우 중시하는 지적 훈련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던 19세기와 달리 20~21세기 현대는 '진화'를 증거하는 '화석'들은 아주 풍부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그리고 미지의 '화석' 증거에 의해 '진화론'이라는 '잠정'적인 '과학적 가설' 자체가 폐기되거나 수정될 수도 있겠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화석'의 객관적인 '증거'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생명체의 '진화' 자체는 '중력' 못지 않게 자명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화석'이 지금껏 우리에게 '말'하는 것(What the fossils say)이 바로 이 '진화(evolutio)'의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중요(Why it matters)'한 것이다.


"... '과학적 가설'이란 반드시 시험 가능하고 반증 가능해야 하며, '과학자'들은 제 아무리 소중히 여기는 생각이 있다 할지라도 그게 잘못임을 '데이터'가 보여주면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는 것... 여기서 요점은, '과학'은 '이념'에 무릎을 꿇을 수 없으며, 정치지도자들을 즐겁게 할 목적으로 진실을 억지로 훼손할 수 없다는 것이다."
- [화석은 말한다], <16. 무엇이 중요한가?>, 도널드 프로세로, 2017.

***

1. [화석은 말한다 - 화석이 말하는 진화와 창조론의 진실(EVOLUTION : What the Fossils Say and Why It Matters)](2017), Donald R. Prothero, 류운 옮김, <바다출판사>, 2019.
2. [종(種)의 기원(起源)(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1859), Charles R. Darwin, 김창한 옮김, <집문당>,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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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 - 뗀석기에서 인공지능까지, 인간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왔는가
슈테판 클라인 지음, 유영미 옮김 / 어크로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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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자세로서의 '창조성'
-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 슈테판 클라인, 2021.


"하지만 '프로메테우스'가 역사적 인물이 아닌 것처럼 천재 숭배 역시 현실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최신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창조성'은 몇몇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재능이 아니다... '창조적 사고'는 인간 이성의 기본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의 이성이 어떤 열매를 맺느냐는 개인적인 자질보다는 다른 사람과 어떻게 소통하고 교류하는가에 달려있다. '창조성'은 한 개인의 머릿속에서 펼쳐지기 보다는 타인, 그리고 타인의 생각과 생산적으로 만나는 가운데 펼쳐지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새로운 착상을 빚어내는데 필요한 정신적 재료와 연장을 우리는 '문화'라 부른다."
-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 <들어가는 말>, 슈테판 클라인, 2021.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라는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아닌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기반하고 있다. 
인간은 '100% 동물'이라는 전제 하에 수억년간 '생존과 번식'을 위해 각 시기 '행복'이라는 정신적 '도구'를 이용하면서 지금까지 종을 유지해 왔다는 거다.

독일의 생물물리학 박사 슈테판 클라인(Stefan Klein)은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2021)를 통해 인간의 '집단적 뇌'가 수백만년 동안 진화해온 과정을 총 <4부>로 나누어 고찰한다. 
이는 인류 역사에서 4차례의 '혁명적 사건'을 기준으로 하는데, <1부>는 인류가 이동생활을 하던 330만년전 '르메크위'라는 곳에서 만들어진 '뗀석기(주먹도끼/돌칼)'로 표현되는 물질적 영역, <2부>는 인류 정착 후인 1만년전부터 '상징'적 사고인 신화와 예술로 대표되는 정신적 영역, <3부>는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세계교류를 통해 인류의 뇌가 연결되고 창조적 사고가 세계화되는 과정, 마지막 <4부>는 컴퓨터와 이동통신기계, 인공지능을 통한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영역이다.

슈테판 클라인은 '구텐베르크'로 불린 금속세공사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Johannes Gensfleisch), 콜럼버스와 코페르니쿠스, 아인슈타인과 스티브 잡스 등  인류 진화사에서 '창조적 사고'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은 이 천재들의 뇌가 특출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지능이 '창조'적으로 발휘되게끔 했던 인류 역사상 '집단적 뇌'(같은책, <1-3>)에 주목한다. 
소수의 '천재'가 역사를 이끌어왔다는 것은 '프로메테우스의 불'만큼이나 신화적이라는 말이다. 
330만년 전 '르메크위'라는 곳에서 실용적이고 심미적이기까지 했던 '뗀석기'의 '창조성'이 등장하기까지 인류는 역시 300만년 이상을 척박한 자연에 적응해야 했다. '상징'과 정교한 '언어'로 공동체를 꾸려나가기까지 또한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인류의 '집단적 뇌'가 오랜 세대를 통해 전승되는 공시성은 물론 동시대의 '집단적 뇌'를 연결시키는 통시성을 획득한 계기는 단연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이것의 확산을 통해 글을 접하고 읽을 필요성을 느꼈던 수많은 다수 민중들의 실천이었다. 1430년대 성지순례자들로부터 성지의 신성한 빛을 담아올 청동거울을 만들어 팔기 위해 목재 프레스기계를 주문 제작한 구텐베르크의 동기는 물질적 '이익'이었다. 흑사병으로 사업은 실패했고 이 목재 프레스기계로 어떻게  20여년 후 성경을 대량인쇄할 발상을 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인쇄술의 '영웅'의 사업실패로 인해 오히려 인쇄술은 다수가 공유할 수 있었고 그만큼 더욱 자유롭게 널리널리 퍼져나갈 수 있었던 역설 또한 이 '창조성'의 역사 속에 도사리고 있다.
결국 문자와 책은 말과 달리 증발되지 않고 공시적이고 통시적으로 인류의 '집단적 뇌'를 혁신적으로 연결하며 진화시켰다. 
이제 컴퓨터와 기계에 의한 '혁명'은 단기간에 이루어졌고 그 기간은 앞으로 더욱 단축된다.


"두뇌는 5억년 이상의 진화를 거치면서 유기체의 존속과 번식에 기여하도록 발달해 왔다. 이것이 인간의 지성과 기계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다. 컴퓨터는 문제해결, 두뇌는 생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두뇌의 작동원칙은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모든 행동은 유익하다고 보는 것이다... 컴퓨터에는 특정한 목표가, 반면 우리에게는 '자유'가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창조'적 사고가 인간을 자연계에서 조금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적 사고에 식량과 후손으로 보답한 자연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우리는 생물학적 존재로 남았다..."
-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 <4-10. 예언과 현실>, 슈테판 클라인, 2021.


그러나 저자는 이 '기하급수적인 발전'(같은책, <1-2>)을 이루는 로그 척도 도표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명확한 관점을 유지한다. 즉, 단지 연산능력이 인간보다 빠를 뿐인 컴퓨터와 경우의 수 확률데이터로 그 능력이 확장된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창조적 사고'의 유구한 역사를 압도할 수는 없다는 희망적인 주장이다. 인류라는 종에게는 수백만년, 전 생명체로 보면 5억년 동안 진화해 온 생물학적 뇌의 장대한 역사를 보았을 때, 특정 '목표'에 맞춰 프로그램 되어진 컴퓨터 등의 '4차 혁명' 요인들은 오랜 기간 진화를 거듭한 인간 '집단적 뇌'의 '자유'를 따라올 수 없다. 인간은 '행복'과 같은 '감정'을 통해 이 '창조적 사고'의 혁명적 진화를 가능케 해왔고 앞으로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류에게는 샹각과 사상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 관건이다.

단, 종의 존속을 위한 조건이 있다.
지구와 자연을 더이상 파괴시키면서까지 필요 이상의 욕심을 부리면 안될 것이며,
'아이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다.
이것이 현재 '삶의 자세로서의 창조성'(같은책, <4-11>)이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그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것을 실험할 준비가 되어있는 '아이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본다. '창조성'은 재능이 아니라 삶의 자세다.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것은 '창조성' 덕분이다. 인류의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서로에게 배우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경험자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후손에게 전해주었기에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 <4-11. 세상을 변화시키는 법>, 슈테판 클라인, 2021.

***

-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2021), 슈테판 클라인, 유영미 옮김, <어크로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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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원 -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서은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행복'은 '목적'이 아닌 '도구'다
- [행복의 기원], 서은국, <21세기북스>, 2021.


"뇌는 살벌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일종의 '생존지침서'다... 뇌는 생존경쟁에서 직면하게 되는 과제들이 무엇이고, 이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담고있는 수백년간의 생존기록서다... 인간은 여전히 100% 동물이다. 바로 이것이 최근 심리학계를 뒤흔드는 연구들의 공통점이다... 인간은 (이성통제라는) 자화자찬의 몽상에 수천년간 빠져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다윈의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현재 심리학에 막대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물결에 이상할 정도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연구자들이 한 부류 있다. '행복'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서양학자들은 '진화론'과 대조적 시각을 가졌던 한 철학자의 영향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다."
- [행복의 기원], <2. 인간은 100% 동물이다>, 서은국, 2021.


'스노비즘(snobbism)'이라는 용어가 있단다. 대상의 실체에는 관심없이 단지 아는체 하기 위한 '문화적 허영'이라고 번역된다는데, '스노비즘'적 해당 '전문가'는 속된 말로 '좆문가'란다.
이삼십대에는 별 관심도 없다가 나이들어 심심해진 내가 미셸 푸코 같은 난해한 프랑스 현대철학자의 저작에 손을 댔고 서평까지 써서 대학동기 단톡에 올리니 어느 동기 하나가 인간 모두의 '지적 허영'을 '스노비즘'에 빗대었다. 

이십년 전 푸코의 [감시와 처벌](1975)을 읽고 나서는 책 자체를 처단했고, 며칠전 [지식의 고고학](1969)과 [말과 사물](1966)을 읽을 때는 사실 '왜 이딴 책을 이리도 장황하게 썼을까?'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더랬다. 물론, 학자가 아닌, 특히 철학자가 아닌 일반인인 내가 푸코의 철학적 개념의 엄밀한 규정 속에서 그의 '고고학'적 사유를 추적하고 검증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란 건 안다. 푸코의 저작이 프랑스인들의 주식인 바게뜨빵만큼 팔렸다는 1960년대 중후반 프랑스 지적 분위기 자체도 곧이곧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동일자' 중심의 고전주의적이고 근대적인 철학관념이 견고했기에 1960년대 '신좌파'들이 니체와 같이 망치를 들고 고정관념을 깨부수려는 푸코 부류의 신사상에 그만큼 환호했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한편으로, 철학자 푸코는 박식하기 때문에 자기 사상의 증거로 온갖 사상가들과 예술작품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엔 사실 그게 바로 '스노비즘' 자체였다. 다시 말하지만, 학자가 아닌 내 눈높이에서는 푸코가 끌어다쓰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이나,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 및 잡다한 사상가들의 비유 같은 건 독서에 오히려 방해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푸코나 나나 '근대성'의 '인문과학'과 함께 등장한 '유한성'의 '인간'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 '인간' 모두는 100% '동물'이고, 그 무엇을 하든 '생존과 번식'을 위해 오랜 세월 그 최적화된 선택을 따라 유지되어온 '진화'의 산물이다.


"'행복'은 '사회적 동물'에게 필요했던 생존 장치..."
- [행복의 기원], <5. 결국은 사람이다>, 서은국, 2021.


심리학자 서은국 교수는 '행복'를 오래 연구한 학자라고 한다. 미국에서 역시 '행복' 권위자인 에드 디너(Ed Diener) 교수에게 배우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심리학 종신교수가 되었으나 귀국하여 국내에서 '행복'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다. 
그가 2021년에 낸 '행복'에 관한 심리학 대중서 [행복의 기원]은 일단 쉽고 재미있다. '행복'에 관해 학술연구서 같이 써봐야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이 결코 '행복'할 리가 없을테니 당연한 귀결일게다.

[행복의 기원]의 출발은 '철학'이 아니라 '생물학'이다. 인격화시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다윈'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진화생물학'에 가깝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목적론'적 사고 방식은 우리 인간사회 삶의 '목표'가 '행복'이라고 굳혀진 반면, 18세기 다윈으로부터 본격화된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수많은 생물들 중 하나의 동물종에 불과하고 이 '호모 사피엔스' 또한 다른 종들처럼 '생존과 번식'에 최적화된 조건으로 '적응'하며 지금까지 진화하고 살아남았다는 거다. 쉽게 말해 다들 알다시피 '인간도 100% 동물'이며 '행복'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해 '행복'이라는 '정신적 도구'를 역시 진화시킨 것이다. 인간의 뇌는 바로 '생존과 번식', 그리고 '진화'에 최적화된 기계이며 우리는 스스로도 모르게 이 오래된 '진화'의 습성을 따른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해 '행복'이라는 '도구'를 이용한다. 
이 책의 제목이 [행복의 기원]인 이유는, '진화론'을 정립한 찰스 다윈의 기념비적 저작인 [종의 기원](1859)을 기리기 위한 일종의 오마쥬와 같다.


"이 새로운 관점으로 보면 '행복'은 삶의 최종적인 이유도, 목적도 아니고, 다만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신적 '도구'일 뿐이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 [행복의 기원], <4. 동전탐지기로 찾는 행복>, 서은국, 2021.


그리하여 다시 푸코 얘기를 한다면, 그의 '스노비즘' 또한 철학이라는 어려운 학문의 영역에서 놀고는 있으나 철학하는 인간으로서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지적 허영'이라는 '행복'한 '도구'를 이용한 것이다.
한편, 이런 푸코를 씹으면서도 서평으로 요약하려는 나는, '글쓰기'나 '서평'이라는 '행복'한 '목적'을 위해 그러는 게 아니라 심심하지 않고 나름 즐겁게 '생존'하기 위해 '지적 허영 따라하기'라는 '행복'한 '도구'를 이용했을 뿐이다. 나는 '글쓰기'로 '생존'은 물론 '번식'도 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서은국 교수는 이 책에서 '행복'이라는 '정신적 도구'는 아이스크림과 같이 녹는 성질이 있으므로 복권 당첨과 같은 큰 '행복'보다는 시시하고 사소하고 작은 '행복'들이 더 효과적이라고 한다. 46억년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수백만년 동안 '생존과 번식'을 위해 진화해 온 인류는 이 수많은 작고 사소한 '행복'들을 통해 지금의 우리로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진화론'적 사실이다. 

그렇게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로 예리하게 다 베어내고 남은 [행복의 기원]의 결론은 결국, 우리는 "문명에 묻혀 살지만, 우리의 원시적인 뇌가 여전히 가장 흥분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음식, 그리고 사람"(같은책, <9장>)이라는 것이며, '사회성'을 통해 자연에 '적응'하고 함께 생존해 온 "결국은 사람이다"(같은책, <5장>과 <7장>)라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으로서 '행복'의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때"(이상 같은책, <9장>)가 된다. 음식은 금방 소화되고 '행복'은 아이스크림처럼 금세 녹지만, 이 맛을 안 사람은 또 다시 그 맛을 찾아 '사냥'에 나서고 그 무한반복 과정에서 '최적'의 형태로 '적응'하고 또다시 '진화'하게 될 것이다.


"결국 진화 과정에서 도움을 줄 때 기쁨을 느꼈던 자들('외향성'='사회성')이 선택적으로 더 많이 생존하게 되고, 그들의 유전자를 통해 우리는 이 습성을 물려받은 것은 아닐지..."
- [행복의 기원], <7. '사람쟁이' 성격>, 서은국, 2021.


'행복' 심리학자의 짧고도 유익한 책 덕분에 나는, 오래전 사두었으나 읽지 않았던 '진화론' 관련 책을 다음으로 읽기로 한다.

바로, '진화론'은 과학적 가설로서의 '이론(theory)'이라기 보다는 '창조론자' 조차도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fact)'이라고 단언하는 도널드 프로세로(Donald Prothero)의 [화석은 말한다(Evoluton : What the fossils say and What it matters)](2017)가 나의 다음 서평 타겟이다.


"결론... 우선, '행복'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 그것은 쾌락에 뿌리를 둔, 기쁨과 즐거움 같은 긍정적 정서들이다. 이런 경험은 본질적으로 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철학'이 아닌 '생물학'적 논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둘째, '행복'에 대한 이해는 곧 인간이라는 동물이 왜 쾌감을 느끼는지를 이해하는 것과 직결된다... 가장 본질적인 쾌감...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 진화의 여정에서 쾌감이라는 경험이 탄생한 이유 자체가 두 자원(생존과 번식)을 확보하도록하기 위함이었다."
- [행복의 기원], <9. 오컴의 날로 행복을 베다>, 서은국, 2021.

***

- [행복의 기원 - 생존과 번식, 행복은 진화의 산물이다], 서은국, <21세기북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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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물 현대사상의 모험 27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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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의 종언은, 인간의 출현이다
- [말과 사물], 미셸 푸코, 1966.


"형이상학의 종언은... 인간의 출현이다."
- [말과 사물], <9. 인간과 인간의 분신들>, 미셸 푸코, 1966.

이번에는 욕을 좀 덜 하긴 했다.
오래전 [감시와 처벌](1975)이란 책을 내 일생 유일무이하게 처단했던 사건을 떠올리게 했던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1969)을 읽을 때는 차마 앵두 같은 입술로 담을 수 없는 육두문자를 삭이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책장을 발기발기 찢을 뻔 했으나, 이보다 두 배는 분량이 많은 [말과 사물](1966)은 말이 많은만큼 '추상성'이 좀 덜했다. 
그렇다고 결코 '구체적'이었다는 말은 아니고 장황하지 않았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며 미셸 푸코 욕을 안했다는 말은 아니다. 
어차피 철학자 푸코든 일반인인 나든, 근대에 이르러 '형이상학'의 종언과 함께 출현한 '유한'한 '인간'에 불과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명백히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인식론적 영역,... 인식을 위한 가능조건의 역사가 드러나는 '에피스테메(담론의 질서)'인데,... 지식의 공간에서 경험적 인식의 다양한 형태를 야기한 지형이다. 우리의 시도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역사라기 보다는 오히려 '고고학'이다... '고고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은 고전주의 시대의 지식 전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를 고전주의적 사유로부터 분리하고 우리의 근대성을 구성하는 문턱이다. '인간'이라 불리면서 '인문과학'의 고유한 공간을 열어놓은 이 기이한 지식의 형상은 '근대성'의 문턱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출현했다."
- [말과 사물], <서문>, 미셸 푸코, 1966.

푸코는 어렵다. 
그러나 마약과 같은 모종의 '중독성' 같은 게 있다. 오래전 군대에서 읽을 책이 없어 진중문고 책꽂이에 있던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를 읽었을 때와 비슷하다. '왜 이딴 책을 썼을까?' 궁금하면서도 '그래도 읽었다'는 왠지 모를 뿌듯함 같은 게 있다. 그리고 욕을 하면서도 저자의 다른 책을 또 읽어보고 싶다는 나도 모를 호기심 같은 '중독성'이 있다.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최근에 [지식의 고고학]을 읽고 알게 된 것처럼, '동일성'을 부정한 20세기 현대철학자 미셸 푸코는 망치를 들고 '신'을 살해한 19세기 근대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정통 추종자였다는 사실이 그 막연한 이유일 수 있겠다.

[말과 사물]의 부제는 <인문과학의 고고학(The Archeology of Humanity Science)이다. 1966년에 출간된 이 저작은 1969년에 극도의 추상성으로 압축된 [지식의 고고학]의 최종 준비작업이었다. 그리고 [지식의 고고학]은 철학자 미셸 푸코의 전반기 사상의 총정리였다. 정리하면, [말과 사물](1966)이 없이 [지식의 고고학](1969)은 나올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식의 고고학]을 읽은 나는 어쩔 수 없이 욕을 하면서도 [말과 사물]을 읽을 수 밖에 없었고, 솔직히 전부 이해는 못했지만, 몇 가지 주요 개념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미셸 푸코가 궁금한 일반인이 굳이 욕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이다.


1. 르네상스-고전주의-근대성

"문자의 특권은 '르네상스' 시대 전체를 지배했고, 아마도 서양문화의 중대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인쇄술의 발명, 동방 수사본의 유럽 유입... 문학의 출현... 종교 텍스트의 해석... 이 모든 것은... 서양에서 문자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예증한다. 이제부터 '언어'의 으뜸가는 본질은 '기록'이다... 신이 세계에 내려준 것은 '글'이다... 참된 말씀을 재발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책'에서이다... 지식은... '말'과 '사물'의 드넓은 일률적 평원을 복원하고... 모든 표지 위로 '주석'이라는 이차적 담론을 생겨나게 하는데... 지식의 속성은 보는 것이나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다... 16세기까지는 실제로 하나의 기호가 의미하는 바를 그 기호가 가리킨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가 문제였으나, 17세기부터 문제시되는 것은 어떻게 기호가 스스로 의미하는 것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 문제에 '고전주의' 시대는 재현의 분석을 통해 대답하게 되고, '근대'적 사유는 의미와 의미 작용의 분석을 통해 대답하게 된다... 이제 '언어'는 오래지 않아 시작도 끝도 약속도 없이 증식하게 된다."
- [말과 사물], <2. 세계의 산문>, 미셸 푸코, 1966.

시대구분은 '신'으로부터 벗어나 '인간' 중심의 '인문주의'가 태동한 14~16세기 '르네상스'와 고대로부터 '인간'을 다시 탐구하는 17~18세기 '고전주의', 그리고 '인간'의 '유한성'에 천착하며 '생물학-정치경제학-문헌(언어)학' 등의 세부 과학과 함께 등장한 '인문과학'의 19세기 '근대성'이다.
그리고 푸코에게 이 '근대성'의 철학적 최정점은 '신을 살해'하고 '최후의 인간'을 등장시킨 니체다.


2. 에피스테메 : 담론의 질서

"재현하기... '말'과 '사물'의 관계 형태에서 '동일성'과 '차이'의 일반적인 (담론적) 질서를 발견하는 것..."
- [말과 사물], <7. 재현의 한계>, 미셸 푸코, 1966.

제목처럼 '사물'을 지칭하는 '말'은 태초부터 있었다. 성경처럼 태초에는 '말'이 '사물'을 지배했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러 과학이 발전하고 인간 인식이 진화하면서 '말'과 '언어', 그리고 '글'과 '문장'은 '사물'을 완전하게 '재현하기([말과 사물], <3장>, <7장>)'에 실패한다. '자연사'에 불과했던 '생명체'들은 그 특징 및 종으로 분류되는 '생물학' 또는 '생명과학'의 출현으로 '분류하기(같은책, <5장>)'를 거친다. '부(富)'의 분석으로서 고전주의 시대 원시 '경제학'은 19세기 근대에 이르러 '노동'과 '생산'의 개념을 장착하고 '화폐'의 형태로 '교환하기(같은책, <6장>)'의 형식을 통해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사물'을 지칭하고 '재현'하는 언어와 문헌은 '기호체계'와 '상징체계'로서 별도 과학의 대상이 되며 각 시대 '담론의 질서'를 형성한다. 모호하지만, 푸코가 사용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라는 개념은 해당 시대에 특정 학문 분야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는 담론의 양태들을 연결하는 관계로서 '담론의 질서'다. 그냥 쉽게 토마스 쿤의 과학개념처럼 '패러다임' 비슷하다고 보면 될게다. 
새로운 사상의 출현은 이 '에피스테메'와 '패러다임'의 전환을 전제로 한다.


3. 문헌학-생물학-정치경제학

"'부(富)'의 분석과 '정치경제학'의 관계는 일반 '문법'과 '문헌학'의 관계, '자연사'와 '생물학'의 관계와 같다... 모든 '부(富)'는 '화폐'로 환산될 수 있고, 따라서 (고전주의 시대부터) 유통되기 시작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어떤 '자연물'이건 특징을 부여받을 수 있었고 '분류'의 대상이 될 수 있었으며, 모든 개체는 명명될 수 있었고 분명한 '언어'로 말해질 수 있었으며, 모든 '재현'은 '의미'할 수 있었고 '동일성'과 '차이'의 체계에 포함되어 인식될 수 있었다... '부'의 분석에서 '화폐-재현'의 이론에 대해 근거가 되고 '자연사'에서 '특징-재현'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은 바로 동일한 '고고학'적 망이다."
- [말과 사물], <6. 교환하기>, 미셸 푸코, 1966.

[말과 사물]의 <2부-8장>의 제목은 '노동, 생명, 언어'다. '말'이 '사물'을 완전히 '재현하기'에 실패한 '재현의 한계(같은책, <7장>)'에서부터 '말-존재물-필요'라는 시초적 개념은 각각 17~18세기 고전주의적 '담론-도표-교환' 및 19세기 근대의 '문헌학-생물학-정치경제학'과 3개념의 쌍을 이룬다.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일반문법'은 '말'과 '언어'로, 고전주의 시대에는 '담론'의 형태로, 19세기 근대에는 '문헌학'의 과학이 된다. 역시 원시적 '존재물'은 진화론 등의 생명과학 발전과 함께 종의 기원을 분류하는 '도표'로, 근대 '생물학'의 과학이 된다. '부'와 '욕망'을 지칭하던 원시 '경제학'은 '필요'에서부터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을 거쳐 '자본'과 생산', '화폐'의 '교환하기(같은책, <6장>)'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로소 '정치경제학'이 된다. 일례로 푸코는 [말과 사물] <6장. 교환하기>에서 근대에서야 정립된 '정치경제학'을 "차후에나 갖게 될 단일성을 굳이 고전주의 시대의 '부의 분석'에 부여하려는 회고적 해석은 피해야 한다"(같은책, <6장>)고 경고한다. '문헌학-생물학-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은 각각의 '계보학'이 있는 것이지 예를 들어 '정치경제학'이라는 개념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푸코의 지적 사유의 작업은 바로 이 과학들의 '계보'를 밝히는 '고고학(考古學/Archeology)'이며, 19세기 '근대성'의 산물인 '인간'과 '인문과학'의 기원을 추적하는 이 책의 부제, '인문과학의 고고학'이다. 이 사유과정이 푸코 사상 전반기를 총정리하는 극도의 추상적 산물인 [지식의 고고학](1969)이다.


4. 인문과학과 니체

"(19세기...) '인문과학'의 본질적인 가능성, 다시 말해서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인류가 존재한 이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과학의 대상으로 등장했다는 적나라한 사실... 그것은 '지식의 질서(에피스테메)'를 뒤흔든 사건이다... '인문과학'은 인간이 인식하는 사물과 인간의 존재가 어떻게 관련될 수 있고 인간의 존재양태를 실제로 결정하는 사물을 인간이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유한성'의 분석론 쪽으로 '생명, 노동, 언어'의 과학을 은밀하게 이끈다... 고전주의적 지식이 연속적으로 확대되어 나간 이 공간의 세분화 때문에, 분리된 각 영역의 자율적인 전개 때문에, 19세기 초에 출현하는 인간은 '탈역사화'된다... 근본적인 지식의 배치에서 일어난 변화의 결과... 사유의 '고고학'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인간'은 최근의 시대(19세기)에 발견된 형상이다. 그리고 아마 (유한성으로 인해) 종말에 가까운 발견물일 것이다."
- [말과 사물], <10. 인문과학>, 미셸 푸코, 1966.

'인문과학'은 고전주의적 담론질서, 즉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를 뒤흔들면서 등장한다. 종교적 '신'이나 철학적 '동일자'가 아니라, 이들 최상위 '사물'을 '재현'한다고 믿었던 '말'이 과학의 발전으로 더 이상 '왕좌'에 앉지 못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유한성'을 태생적으로 갖춘 '인간'이 출현한다.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시대의 철학인 '형이상학'이 종언을 고하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유한'한 '인간'이 등장하는데, 근대의 '인문과학'은 바로 이 '유한성'이 본질인 '인간'을 탐구대상으로 한다. '정치경제학' 분야에서 데이비드 리카도의 '노동가치론'과 칼 마르크스의 '혁명적 유물론' 및 '잉여가치론' 등은 푸코가 보기에 동일한 '에피스테메(담론의 질서)'라는 '찻잔 속 폭풍'(같은책, <8>)에 불과하단다. 

"... 마르크스의 해석에 의하면 역사는 인간에게서 '노동'을 박탈함으로써, 인간의 '유한성'이 갖는 긍정적인 형태(마침내 해방된 인간의 물질적인 진실)를 뚜렷이 부각시킨다... 마르크스주의가 '부르주아' 경제학 이론과 대립한다 해도, 또한 이 대립 속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의 철저한 반전을 기도한다 해도, 이 대립과 기도의 가능조건은 역사 전체에 대한 재검토가 아니라, '고고학'에 의해서만 정확히 규명될 수 있는 사건, 19세기 '부르주아' 경제학과 19세기의 '혁명'적 (정치)경제학을 동일한 방식에 따라 규정한 사건이다. 이 양자 사이의 논쟁은 얼마간 파문을 일으키고 표면에 '주름'을 생기게 할지는 모르지만, 이는 기껏해야 '찻잔 속의 폭풍'일 뿐이다."
- [말과 사물], <8. 노동, 생명, 언어>, 미셸 푸코, 1966.

대신 푸코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신을 살해하고 최후의 인류를 등장시키면서", 인문과학의 출현이라는 '지식의 새로운 배치(에피스테메)'에 "불을 지름으로써 이 배치를 마지막으로 빛나게 했다"(이상 같은책, <8장>)고 주장한다. 다음은 [말과 사물] <8. 노동, 생명, 언어>에서 미셸 푸코가 그의 철학적 스승과도 같은 프리드리히 니체를 찬양한 문장이다.

"핵심은 19세기 초에 지식의 새로운 배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 19세기에 '유토피아'는 시간의 여명 보다는 오히려 시간의 마지막 붕괴와 관련된다... 18세기 말에 니체는 이 배치에 불을 지름으로써, 이 배치를 마지막으로 빛나게 했다. 그는 시간의 종말을 재검토했고 그것을 '신의 죽음'과 마지막 인간의 편력으로 변화시켰으며 인간학적 '유한성'을 다시 검토했지만, 이는 인간학적 '유한성'을 이용하여 '초인(超人)'의 경이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니체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를  위해 '변증법'과 '인간학'의 뒤섞인 약속을 불태워버린 사람이다."
- [말과 사물], <8. 노동, 생명, 언어>, 미셸 푸코, 1966.

결국, 미셸 푸코에게 근대에 등장한 '유한성'의 인간학과 철학에서 궁극의 경지는 프리드리히 니체다.
'관념론'과 '형이상학'의 영역에서는 거대한 '변증법'적 관념체계를 세운 '독일고전철학자' 헤겔이 종착점일 수도 있다.
'유물론'과 '혁명론' 사상에 기초한다면 헤겔의 관념론을 거꾸로 뒤집은 마르크스주의 유물변증법이 필연적 귀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대철학자 푸코에게 이 모든 철학사(哲學史)는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담론의 질서)'를 전환시키지 못하였으니 '찻잔 속 폭풍'에 불과했고, '신'이라는 '동일자'의 담론질서를 살해하고 곧 종말을 맞게 되는 '유한성'의 '최후의 인류'를 상정한 철학자, 오직 프리드리히 니체만이 궁극의 '인문과학' 철학자가 된다.


난해하고, 장황하고, 그래서 어려운, 그럼에도 묘하게 '중독성' 있는, 프랑스 현대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1926~1984)와는 이제 이별이다. 
언젠가 그의 다른 저작을 펼치게 될지 기약은 없다. 그래도 잊지 않기 위해 그의 주요 저작인 [지식의 고고학](1969)과 [말과 사물](1966)을 최대한 쉽고 단순하게 정리하려고 시도했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하던가.  
내가 쓴 푸코 서평을 읽고 또 다시 욕하고 있을 사람들이 보인다. 
그러나 이해하시라. 
원저자 미셸 푸코 자체가 어려운 걸 어쩌겠는가 말이다.

원전이든 서평이든, 너무도 장황하여 참고 읽을 수 없다면,
그냥 [말과 사물]을 요약한 이 한 문장만 기억하시기 바란다.

"('말'이 '사물'의 재현에 실패한) 형이상학의 종언은... (니체적 '최후의') 인간의 출현이다."

***

1. [말과 사물 - 인문과학의 고고학](1966), 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
2. [지식의 고고학](1969), 미셸 푸코, 이정우 옮김, <민음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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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 - 새롭게 읽는 공산당선언, 개정판
황광우.장석준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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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冥府)'는 열렸다
- [요한묵시록]과 [지옥도와 아귀도], [도교사상]과 [성리학의 개념들], 그리고 [공산당선언]


1. 요한묵시록 : 기독교


"묵시록은 한 부분씩 잘라 읽으며 해석하는 대신 한결 넓고 '통합적인 시각'으로 읽을 때 우리에게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중심환시(中心幻視)', 더 나아가 요한묵시록이라는 책은 과학과 예술과 신학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고도의 문학작품인 동시에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요한묵시록은 결코 우리를 협박하며 불안으로 몰아가는 책이 아니다. 비록 회개와 충실로 이끌기 위해 위협적인 장면이 동원되기도 하지만, '더이상 로마를 겁내지 마라. 설혹 죽임을 당할지라도 안심하여라'(14장)며 하느님께 속한 이들이라면 언제나 보호와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책, 마치 탈출기 1~15장을 읽던 유다인들에게처럼 위로와 격려, 안도와 희망을 전하는 책이다."
- [일곱 봉인의 비밀], <결론>, 배은주, 2022.


성경을 다 읽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집에 있는 1960년대 번역판에 세로쓰기 성경은 가독성이 완전 '제로'다. 그래도 처음과 끝은 궁금하기에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읽었다.
그리스신화에서 '혼돈(Chaos)'으로부터 '질서(Cosmos)'가 창조되는 과정과 비슷한 [구약성경]의 시작인 <창세기>는 읽을만 했던 반면, '성경'이라는 우주 전체의 거대한 '역사'를 마무리하는 [신약성경]의 마지막 기록, <요한계시록>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계의 '종말'을 암시 또는 '계시'하는 듯한 이 기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가장 모범생이었던 '요한'일 수도, 아니면 예수 사후 1세기 이내 살았던 다른 어느 '요한'일 수도 있는 어떤 예언자가 남긴 기록이라는데, 열심히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 본론인 '중심환시' 때문이다. 
로마로부터 억압받던 기독교인들에게 기원후 4세기 전까지의 세계는 '지옥'에 다름 아니었고, 유일신 하느님을 부정하고 기독교를 탄압하는 로마황제는 그 자체로 '사탄'의 현신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예언자 '요한'이 어느 섬에서 신의 계시를 '환시(幻視)'의 형태로 받고 이를 기록함으로써 세계의 종말과 '천년왕국'의 도래를 '묵시(默示)'하는 문헌이 바로 <요한계시록> 또는 <요한묵시록>이다.

대구 베네딕트회 소속 배은주 수녀는 이 <요한묵시록>의 '중심환시'에서 하느님이 요한에게 내린 '일곱 봉인'과 그 전개의 구조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곱 봉인의 비밀](2022)이라는 소논문을 출간했다. 
천상의 구름이 열리며 대천사를 대동한 채 왕좌에 앉은 이는 유일신 하느님일 수도, 아마도 그의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일 수도 있다. 하늘이 내린 '일곱 봉인'은 '지옥'과도 같은 현실의 순차적인 전개와 이를 일일이 극복해 나가는 하늘의 '승리'의 구조 아래 결국 억압적 현실을 딛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메시아(구세주)'의 출현을 '계시'하고 있다. 따라서 [일곱 봉인의 비밀]을 파헤치면서 우리는 '선천개벽'(사실 이런 말은 없다)의 '혁명'을 꿈꾸게 된다. 
그렇게 [요한묵시록]은 '종말'의 기록이 아니라, '희망'을 암시하는 '혁명'의 경전이 된다.


2. 지옥론 : 불교


"'지옥(地獄)'이라는 일반명사로서 가장 흔히 등장하는 것이 '나락가(捺落迦)'이다. 이는 '고통이 있는 곳' 내지 '자유롭지 못한 곳'이라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Naraka'를 한(漢)어로 음역한 것이며, 이것이 한어로 '지옥(地獄)'으로 번역된 것이다... '규환(叫喚)'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은 지옥에서 울리는 죄인들의 고통과 회한에 가득찬 비명소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왜 '아비(阿鼻)'지옥을 '무간(無間)'지옥으로 부르는 것일까? 이는 아비지옥의 여러 특성 중에서도, 죄인들이 모두 타서 서로간에 구별할 수 없는 틈이 전혀 없기 때문이며, 또한 그 지옥에서 받게 되는 고통의 세력이 간단(間斷)없이 계속 이어지게 되는 것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 [불교문헌 속의 지옥과 아귀, 그리고 구제의식], <2. 불교의 8대 근본지옥에 관하여>, 김성순, 2022.


산스크리트어 '야마(Yama)'는 고대 인도 신화에서 '가장 먼저 죽은 자'로서, 불교가 서역을 통해 중국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염마(閻魔)'로 음역되었다. 우리가 '지옥(地獄)'을 관장하는 신으로 알고 있는 바로 그 '염라대왕(閻羅大王)'이다. 이는 물론 불교만의 신화는 아니다. 염라대왕은 도교에서 유래한 '시왕(十王)' 신앙의 우두머리로 묘사되지만, 망자에 대한 인정적 심판을 이유로 불교의 '8대 지옥' 중 5대 지옥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고, 역시 불교가 서역을 통해 중국에 본격적으로 전해지던 5호16국 전란의 시대에 지옥 같은 현실의 참화 속에서 민중을 구제하려는 '대승(大乘)' 불교로의 전환과정에서 등장한 '지장보살'의 협신들인 '시왕'들 중 우두머리가 되었다. 

종교학자 김성순은 [불교 문헌 속의 지옥과 아귀, 그리고 구제의식](2022)에서 불교의 '8대 지옥'을 묘사하며 '대승' 불교적 '메시아'인 지장보살이 '미륵불하생'의 '종말' 또는 '희망'의 세상이 개벽하기 전 중생을 보살피고 구제하는 과정을 그린다. 
'미륵불하생(彌勒佛下生)'은 고대로부터 근대까지 우리 동아시아 민중반란의 주요 이념이었다. 원래는 '선천개벽'의 보수적 관념론이었지만, 서양의 천주교 또는 기독교 사상이 섞이고 또 우리의 '동학' 사상과 결합하며, '후천개벽'의 급진적 유물론의 성격으로도 드러났다. 


3. 선천 또는 후천 : 성리학


"'리기(理氣)'는 성리학(性理學)의 모든 개념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성리학자들이 비록 자연계의 최종적인 근원을 찾고자 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존재를 강조하지 않고  그것의 속성과 기능, 그리고 그것의 전개과정을 더욱 강조했다... 성리학에 나타난 변증법(辨證法)적 사유의 특징은 여기에서 충분히 표현되고 있다... 성리학자들은 이 (관계적) 개념들을 통해 대립과 통일의 변증사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립과 통일 가운데 통일을 결정적 요소로 간주하여 모든 대립은 결국 '합일(合一)'에 이른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성리학적 변증사상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성리학의 근본적인 임무... 자연계를 순수한 객관적 대상으로 간주하여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성리학 개념들의 구성체계를 가운데 하나의 구성부분으로 여긴 것이다. 이는 성리학이 결코 인간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성리학의 개념들], <1. 리기론-총론>, 몽배원, 1989.


주자학으로 불린 성리학은 '리기론(理氣論)'이기도 하다. '천명'과 같은 하늘을 비롯한 우주 전체의 원리인 '리(理)'와 인간의 실천과 같이 우주의 원리가 현실화되는 '기(氣)', 인간의 본성과 같은 '성(性)'과 역시 우주의 원리인 '리(理)', 앎의 '지(知)'와 실천의 '행(行)', 이러한 이항대립 개념들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는 철학이다. 성리학의 근본으로서 유학은 본래 기원전 중국 춘추시대 공자로부터 기원하는 인간중심 정치사상이자 우리를 비롯한 동아시아 일대를 지배했던 최대의 정치철학이었다. 
[주역] 또는 [역학]에 기반하여 '천인합일(天人合一)'로 나아가는 이 세계관은 자세히 보면 '유물론'적 요소도 있다. 그러나 성리학의 [대학]이 말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는 결국 인간의 '관념론'이다. 신을 전제하지 않고 '태극론'이나 '음양오행론' 등과 결합하여 '객관세계'인 우주와 하늘(천리:天理)을 연구(격물:格物)하고 지식에 이르는(치지:致知) 과정은 결국 인간의 도덕 함양을 위함이다. '객관세계'는 이러한 도학(道學)을 위한 궁극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연구하고 완성하기 위한 관념적 전제에 불과하다. 이 관념론적 성리학이 개인 도덕함양을 통해 이루려는 '대동세상'은 결국 '선천(先天)'의 혁명이다. 

그러나 이런 '관념론'과 '혁명'은 양립할 수 없다.
중국 사회과학원 철학박사 몽배원은 1989년에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위와 같은 '이항대립'적 [성리학의 개념들]을 정리했다.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져 가던 시기에, 서양의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동양의 '대동세상'을 지향하는 유학 사상을 접목하여 '동양식 공산주의' 사상을 전개하려는 시도였겠지만, 본질적으로 '관념론'인 성리학과 '유물론'인 마르크스주의는 잘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결국 체제의 질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관념론'과 체제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운동으로서의 '혁명'의 본질적 차이에 기인한다. 
우리의 동학은 유-불-선의 동양철학과 기독교의 서양사상이 결합하되 주요 이념은 '미륵불하생'의 메시아주의였다. 즉, 원래부터 '하늘'이나 '천명' 따위의 천상의 관념이 있었던 '선천'이 아니라, 유학(성리학)의 본래 이념대로 신이나 종교가 아닌 현실의 인간을 우선으로 하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은 불교적 '미륵불하생' 사상의 유교적 버전이다. 현실의 역사에서 '선천'은 질서를, '후천개벽'은 혁명을 호출했던 이유가 이 '미륵불하생'의 '메시아주의'에 있다. 


4. 신선사상 : 도교


"천계(天界)설을 고안했다는 사실에서 육조시대 후반기 불교 교리를 수용하는 한편 교리 체계를 구축해갔던 당시 도교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선계(仙界), 인계(人界), 귀계(鬼界)... 이 세상에서 불노불사의 선인(仙人)이 되지는 못하고서 사자(死者)가 되어 귀계에 들어간 경우라도 다시금 선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방법을 설파하였던 것은 도교 혹은 신선사상의 새로운 전개라 하겠다."
- [도교사상], <4. 우주론 - 눈으로 보이는 세계를 넘어서>, 가미쓰카 요시코, 2020.


5호16국과 위진남북조 시대에 인도로부터 서역을 거쳐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래되기 전, 중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정치사상은 '선천'의 질서를 강조했던 유학이었다. 성리학은 기원후 12세기나 되어야 발전된 사상이니 그 전의 사상은 유학(儒學)이었다. 한편 다수 민중들에 널리 퍼져있던 사상은 공자의 유학보다는 노자와 장자의 '도교(道敎)'가 더 지배적이었다. 중국의 황제시대부터 춘추시대 노자까지 하늘의 '태상(太上)' 천군(하늘신)과 '태상노군(太上老君:노자)'을 모시는 일종의 중국식 민속신앙과도 같다. 우리의 무속신앙과 같은 수준이라는 중국의 도교는 '신선' 사상이기도 한데, 하느님이나 노자와 같은 '태상노군' 또는 이들의 기운을 받아 신선이 된 자는 하늘이나 땅 아래의 피안보다는 현실의 인간세상 옆 어딘가에 존재한다. 천당도 지옥도 아닌 이 '신선'의 세계는 우리 주변 어딘가에 존재하다가 고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언젠가 도래한다.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는 메시아(구세주)가 등장할 수도 있고 인간 개인이 도를 닦아 신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이 역시 '지옥'과 같이 참담하다면 역시 '미륵불하생'처럼 '태상노군'의 메시아를 찾을 수 밖에 없는 일종의 민중적 집단지성이 발동된다.

일본의 도교 전공학자인 가미쓰카 요시코는 대학교수 퇴임을 앞두고 그 동안 진행했던 강의들을 10가지 주제로 분류하여 도교를 설명하는 [도교사상](2020)이라는 책을 냈다. 저자에 의하면 장각 형제의 '태평도(太平道)'가 바로 노자와 장자의 도가 사상이 중국 최초로 조직화된 '도교(道敎)'라는 설이 일반론이다. 동시에 장도릉이라는 유학자가 도를 닦고 스스로 '장천사(張天使)'라는 메시아적 신선이 되어 창시한 '오두미교(五斗米道)'는 누구나 쌀 다섯말(五斗)만 내면 공동체에서 함께 평등한 삶을 살 수 있고 나아가 신선도 될 수 있다는 '도교'의 조직화였다. 즉, '도교'의 시작은 후한말 황건 농민반란 시기의 '태평도'와 '오두미교'였다. 중국 후한 말기, 즉 우리가 아는 [삼국지]의 배경인 바로 그 '황건적의 난'이다. 이후 동아시아 역사에서 반복된 농민혁명은 원말명초 백련교나 마니교(명교)의 형태로, 청나라 말기 우리 조선말 최제우의 동학과 비슷한 시기에 역시 비슷한 동기로 유-불-선과 기독교의 결합에 의해 등장한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반란 등의 형태로 반복된다. 
이 모든 민란은 '지옥'과 진배없는 현실을 뒤집어 엎고 새세상의 '후천개벽'을 바라는 동양의 '메시아주의'였다. 대부분 동양 농민반란의 이념은 근대에 이르러 유학 또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불교의 '미륵불하생' 사상 및 도교의 '신선' 사상이 결합된 '유-불-선' 사상에 기독교적 '메시아' 사상이 접목된 '혁명' 이론이었다. 

불교에서 현실이 고되더라도 나쁜 짓 하면 '나락(지옥)'에 떨어져 똑같은 나쁜 짓으로 되갚음을 당한다는 '지옥론'을 설파한 이유는, 기독교에서 [요한묵시록]을 통해 고단한 현실을 버텨내라는 '희망'의 '종말론'을 기록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이 현실과 천상 또는 지옥의 이원론적 '관념론'은 현실 변혁의 시대적 요구로 인해 '혁명'적 '유물론'과 결합한다.

레닌의 말대로, "혁명 이론 없는 혁명 운동은 없다."([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 1903)


5. '혁명(革命)'의 '선언(宣言)' : 마르크스주의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와 교환관계, 부르주아적 소유관계, 마치 마술이라도 부린 듯이 그렇게도 강력한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을 만들어낸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자기가 주문(呪文)으로 불러낸 저승(명부:冥府/지옥:地獄/nether world)사자의 힘을 더는 감당할 수 없게 된 마술사와도 같다. 지난 수십년에 걸친 공업과 상업의 역사는 현대의 생산관계에 대한, 즉 부르주아지의 존립과 지배의 조건인 현대적 소유관계에 대한 현대적 생산력의 반역(叛逆)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 [공산당선언], <1.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마르크스/엥겔스, 1848.


이제, 결론이다.

기독교에서 [요한묵시록]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당시 로마 제국이라는 현실의 '지옥'을 극복하기 위한 '일곱 봉인'의 환시적 종말론이었지만, 결국 '천년왕국'의 도래를 계시하는 '희망'의 메시아주의였다.

불교에서 '8대 지옥'의 고통과 천계와 인간계를 배회하는 '아귀'와 '아수라' 등의 혼란한 존재들을 설파한 이유는 '지옥' 같은 인간세상이 더 '지옥' 같은 '나락가'에 빠지지 않도록 수양정진하라는 경고였고, 만일 그렇지 못한 세상이라면 '미륵불'이 강림할 것이라는 또다른 메시아주의였다. 다만 '미륵불하생' 전 그 수만 겁의 시간 동안 지장보살은 현실과 지옥을 오가며 인간과 반인반신의 '아수라', '아귀'와 '축생', 그리고 고통받는 지옥의 망자들을 보살피고 구제한다. 결국 우리 모든 '보살(깨달음을 구하는 자)'들의 궁극목표는 불교 사찰 내 '명부전(冥府殿)' 주신인 '지장보살'인 셈이고, 우리가 기다리는 '미륵불하생'의 시간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도교의 신선 사상은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니다. 중국 고유의 민속신앙인 도교는 우리의 삼국시대 고구려를 경유하여 유입되었다. 중국의 황건 농민반란을 시작으로 조직화된 도교는 5호16국과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를 거쳐 선비족의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역시 선비족과 한족의 혼혈왕조로 건국된 당나라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당고조 이연 집안은 스스로 새왕조 개창의 정통성을 오래전 사라진 노자의 본명인 '이이'에서 찾았다. 즉, 같은 '이씨 집안'이라는 것이었다. '도교 왕국' 당나라는 우리 고구려에게까지 '도교'를 강제했고 고구려는 '외교적 필요성'에 따라 그들의 '도교'를 수입했다. 그리고 연개소문 시대에는 이 팽배해진 '도교'와 '음양오행론' 따위를 앞세우다가 멸망했다. 그러나 결국, 도교가 말하는 '신선계'는 천국이나 지옥 어딘가가 아닌 우리 '인간계' 옆 어딘가에 있다. 즉, '태상노군'과 같은 '메시아(구세주)' 또는 '미륵불하생'은 우리 주변 이 세상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유교 또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대동세상'과 '천인합일'의 그날은 교조적 주자의 성리학자가 말하는 '성즉리(性卽理)'나 극단적 관념론인 왕수인의 양명학자가 말하는 '심즉리(心卽理)' 따위의 도학적 개인수양과 정신승리로 도래하지 않는다. 불교의 참선과 도교의 신선 수양(도닦기)의 영향으로 유교의 '도학'은 개인수양으로 현실을 '지옥' 같지 않도록 정화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사탄'이나 '역그리스도'와 같은 지배권력자들은 다수 민중들의 개인수양 따위를 강조하며 부패한 자신들의 소수 지배권력을 정당화한다. 

유교와 불교와 도교 일체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되어왔던 이유가 달리 있지 않다.

지금은, '혁명'적 '유물론'의 시간이다.
굳이 '마르크스주의'를 말하지 않아도, 유-불-선과 기독교 왕국의 지배자들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고 '명부(冥府)'의 문을 연지 오래다. 다수 민중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소수 지배자들이 채택한 지배 이데올로기 자체가 다수 민중들이 수천년 간 구축해 온 '집단지성'이었다. 그리고 '지옥' 같은 현실을 지탱해온 그 소수 지배자들 또한 한때는 다수 민중들의 일부였다. 따라서 그 소수 지배자들 또한 지금의 다수 민중들의 손에 의해 결국 심판받게 된다.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고 명부의 문을 열고만 마법사"([공산당선언], <1장>, 마르크스/엥겔스, 1848)와도 같이 소수 지배계급이 결국에는 다수 피지배계급의 '혁명'으로 타도되는 것, 이것이 인류의 역사가 보여준 단 하나의 '민주주의'의 원리이고,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본질은 '선거'나 '개혁'이 아닌 궁극의 '혁명'인 것이다.

동학의 후손들인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조선의 이씨왕조나 청나라-일제 같은 외세가 들었어야 할 그 경고는,
지금으로 치면 국찜당이나 민주당 같은 거대 기득권동맹체나 미국-일본 같은 주변국가들이 함께 들어야 할 경고와 같다.

한 줌도 안되는 그 소수의 지배권력이 언제까지 갈 것 같은가.
유-불-선과 기독교 따위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돌아보라.

'천년왕국'이나, '8대 지옥', '메시아' 같은 건 없다.
'혁명'적 '유물론'의 시간은 또 다시 반복되며, 
결국에 다시 온다.

***

1. [일곱 봉인의 비밀 - 요한묵시록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배은주, <분도출판사>, 2022.
2. [성경전서], '요한계시록', <대한성서공회>, 1989.
3. [불교문헌 속의 지옥과 아귀, 그리고 구제의식], 김성순, <역사산책>, 2022.
4. [도교사상 - 10개 강의로 도교 쉽게 이해하기](2020), 가미쓰카 요시코, 장원철/아동철 옮김, <AK>, 2022.
5. [성리학의 개념들](1989), 몽배원 지음, 홍원식 외 옮김, <예문서원>, 2008.
6.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 마르크스/엥겔스, 1848.7. [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황광우/장석준, <실천문학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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