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오인석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ake one's proper station"
-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1946.


"... '국화(The Chrysanthemum)'는 철사 고리를 떼어 버리고, 그처럼 철저한 손질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게 피어 자랑스러울 수 있다... '칼(The Sword)'이란 공격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이상적이며 훌륭히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인간의 비유이다."
- [국화와 칼], <12. 어린아이는 배운다>, 루스 베네딕트, 1946.


1.

내가 중고등학생 시절이었던 1980년대에 우리나라는 일본과 정식 문화교류를 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시절을 벗어난지 반세기도 채 안되었던 당시에는 대놓고 일본의 대중문화를 국내로 들여오고 공유할 수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보다 더 어렸던 1970년대의 나는 매일 TV에서 '일본만화'를 보고 자랐고 부산 같은 데서는 '코끼리 밥솥' 같은 일제 전자제품들이 밀매되었으며 중동에 세 번 다녀온 나의 아버지는 귀국할 때 '소니' 전축과 '카시오' 전자오르간을 사오셨지만, 1998년 전까지 우리는 대놓고 일본문화를 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그때까지도 줄곧 보고 자란 만화가 전부 일본만화라는 사실을 알게 된 1980년대 후반의 우리들은 학교 친구들과 자연스레 대놓고 일본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어른들이 막아봐야 소용없다. 중고생인 우리들은 청계천 일대를 다녀온 친구들을 통해 일본만화와 잡지, 소설 등을 몰래몰래 '대놓고' 돌려보았다. 어려서부터 시각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나였지만 기이하게도 나는, 해적판 일본만화는 [공작왕]과 [북두의권], [드래곤볼] 외에는 몰랐는데, 나는 어쩌다 내 차례로 돌아온 일본 음란소설을 좋아했다.

학교 동급생을 통해 알음알음 몰래몰래, 그러나 대놓고 유통되던 일본 춘화잡지나 음란만화는 자극적이었으나 왠지 모를 죄의식을 동반한 반면 소설은 '독서'라는 행위 아래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맛이 있었다. 나는 번역도 엉망이었을 해적판 일본 음란소설을 통해 '육봉'을 알았고 '69(식스나인) 자세'가 뭔지 알게 되었으며 미찌꼬가 남자의 얼굴을 'M'자 다리로 깔고 앉은 장면을 상상했다.

돌이켜 보면, 시각예술을 더 좋아하던 내가 춘화나 만화보다 소설을 더 선호했던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2.

2차 대전의 태평양전쟁은 소련이 동유럽 전선을 방어하고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점차 아시아 대륙에서 밀려나던 일제가 태평양 너머 미국을 직접 타격한 사건이다. 1942년부터 미국과 일본의 대전이 불붙었고 1944년 미국무부는 대체 이 아시아 인종의 실체가 무엇인가 궁금했는지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 1887~1948)에게 의뢰하여 국책 '연구서'를 낸다. 
전쟁 중이었으므로 베네딕트는 일본인을 연구하면서 일본땅 한 번 밟지 않고 미국에 사는 일본인들과의 인터뷰와 관련 문헌들을 토대로 펜대를 굴려서 중대한 국책 용역사업을 완수했는데, 이 책이 바로 미국인이 처음 일본인을 연구한 '고전'인 [국화와 칼](1946)이다.

지금이야 세계인들이 서로서로 교류하니 별 것 아니겠지만, 태평양 미일전쟁 중의 미국인들이나 1980년대의 나같은 중고생들이나 일본에 대해 대중적으로 알 길이 묘연했을 게다. 
1980년대의 내게 일본은 자체가 '음란의 제국'이었다. 1940년의 미국은 루스 베네딕트의 연구를 통해 일본을 '국화'와 '칼'이라는 상반된 이미지의 모순덩어리로 이해한 듯 하다. 요컨대, 서구인에게 정체불명의 일본인은 나라의 꽃인 사쿠라보다 천왕의 상징인 '국화'를 더 좋아하고 겉으로는 겸손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오랜 봉건시대 사무라이의 '칼'도 지니고 있다는 그런 식. 
지금이야 그게 어쨌다는 거냐 싶겠는데, 당시는 기독교적 선악 이분법에 익숙한 서구인에게 동양인의 '이원성'(같은책, <12장>)'과 양면성은 이해하기 힘든 모순이라고 본 듯 하다. 

[국화와 칼]의 우리말 완역은 내가 태어난 1974년에 되었다는데 이 때 <해설>을 쓴 국내 인류학자 이광규 교수는 이 책을 두 번은 읽어야 일본과 우리의 차이를 알 수 있다고 해설하고 있다. 즉, 처음에는 서양과 동양의 차이가 보이고 다음에야 같은 동양인 일본과 우리의 차이가 보인다는 말이겠다. 아무튼, 서양인 루스 베네딕트의 결론은 일본인들은 '국화'와 '칼'로 상징되는 동양적 '모순'을 지니고 있지만 메이지유신 같은 빠른 근대화를 보면 '천왕'이라는 허위에 얽매인 '국화'도 제대로 피어낼 수 있고, 세평에 얽매여 스스로를 옭죄는 '칼' 또한 책임있는 인격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제조건은 일본으로 대표되는 '동양'이 '서양'의 지배와 영향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일게다.
[국화와 칼]의 배경은 19세기말 메이지유신으로 서구적 '근대화'를 잘 받아들인 일본인들과 결국 서양에 대들다가 패전하고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된 일본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일본은 유럽의 패전국인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달리 패전을 순순히 받아들였단다. '정신승리'로 무장하고 목숨걸고 항전하던 사무라이 '칼'이 천왕의 '국화'가 이제 그만 싸우자고 선언한 순간 일사분란하게 순종적으로 돌변하여 미국의 지배를 달게 받아들이기까지 했단다. 일본은 전후 재건과 유럽 '68 혁명'의 여파 속에서도 '혁명' 같은 상황은 없었다. 변화와 발전, 그리고 퇴보 속에서도 여전히 고요한 정체된 사회 같은 무언가가 있는 듯 하다. 왠지 항상 그 자리가 '알맞은 위치 갖기(Take one's proper station)'인 듯이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이겠지만, [국화와 칼]이 일본문화 이해의 '고전'인 이유는 서양의 관점에서 처음 정리된 동양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이기 때문이자 더 나아가 승전국인 미국의 '국책보고서'였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수십년 전 지식인들에게는 귀한 책이었을지 모르나 지금의 내게는 '고전' 치고는 별로 배울만한 게 없는 책이다.


3. 

"Take one's proper station..."
- [국화와 칼], <3.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 루스 베네딕트, 1946.


일본이 단지 '음란의 제국'만이 아니었음은(물론 어린 내가 본 일본문화가 음란문화 뿐이었기 때문이었지만), [국화와 칼]에 의하면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같은책, <3장>)'로 설명될 수 있다. 
뒤에서는 호박씨 다 까고 살지만 기독교적 서양이나 유교적 동양(중국과 우리)에서는 '성(性)'을 대놓고 까발리지 않는다. 그러나 [국화와 칼]의 분석에 의하면 일본인에게 성적인 억압은 없다. 아주 성의 노예가 되지 않는 한, 사람이 '충'이나 '효' 또는 '의리'나 '의무'와 같은 세인의 평판에 체면을 상하지 않는 한, 음란한 것들은 얼마든지 허용된다. 즉, '인의'가 주요덕목인 중국식 가치관과 달리 세상의 평판에 '오명(같은책, <8장>)'을 입지 않는 한, 모든 도덕률과 덕목이 '각자 알맞은 위치(proper station)'에 있는 한, '성'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대놓고 허용되는 것이다. 

[국화와 칼]에 따르면, 이런 문화의 뿌리는 일본의 오래된 봉건적 신분제에서 유래한다.  
일본에서 봉기는 있어도 '혁명'은 없는 이유도 그렇고, 메이지유신이 '진보'라기 보다는 봉건적 막부정치를 탈피하여 천왕정치의 '복고'였다는 [국화와 칼]의 관점 또한 그렇다. 세상의 체면을 중시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자기에 대한 '의리'이자 '의무'라 생각하며, 자신을 모욕한 자에 대한 극단적 복수도 은혜를 갚는 것과 동일하게 '의리'로 인식되고 어쩔 수 없이 '의리'를 지킨 후 집단 할복이나 자살 등을 기꺼이 행하는 문화 또한 '각자 알맞은 위치'에서 이뤄지는 한 바람직한 것이라고 일본인들은 판단한다는 거다.


"어린 새는 먹이를 찾아 울지만,
사무라이는 이쑤시개를 물고 있다."
- 일본속담.

근대화에 맞서 칼을 물고 거꾸러진 일본의 사무라이들의 '가오'는 지금도 겸손한 표정의 일본인들 습성을 지배하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전력이 안되면서도 천왕을 향한 '충'에 목숨을 걸고 육체적 한계를 정신으로 극복한다는 가미가제식 '정신승리'의 근원은 먹은 게 없지만 배고픔 따위는 정신력으로 이겨내며 '이쑤시개를 물고' 있는 사무라이 정신이다.

'선악'의 이분법에 얽매이지 않고, 선이든 악이든 '각자 제자리'에만 있다면 용인한다는 일본인의 정신은 악 또한 선에서 나오고 어둠이 없다면 밝음도 없다는 보편적인 '모순'의 인식과 그리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한 사고가 된지 오래다. 다만 [국화와 칼]을 통해 일본인들의 경우 굳이 그 특성을 꼽자면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Take one's proper station)'가 되겠다. 그런데 봉건적 습성인 그 특성이 무슨 대수인가. 나 또한 개인적으로 루스 베네딕트처럼 전근대적인 일본식 봉건 '신분제'보다 '평등'을 더욱 중시하나 내가 보는 '평등'은 베네딕트 여사가 추앙하는 미국의 자본주의식 법적 '평등'과 다르다. 나 또한 '천왕' 같은 어이없는 군주제 따위는 개나 줘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영국이나 북유럽에도 아직 낡아빠진 '군주제'가 건재하고 우리나라도 왕은 없지만 제왕과도 같이 공고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을 중심으로 한 뿌리깊은 신분의식이 있는데. 

지금은 [국화와 칼] 식의 잣대나 들이대는 게 아니라 세계체제에 속한 그 어느 민족이 되었든 낡은 계급체제와 신분의식을 무너뜨리고 실질적으로 '평등'하게 다시 세워야 할 시기 아닌가.

'알맞은 위치'란 그 낡은 것들의 파괴를 통해 다시금 정립된다.

***

-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1946), Ruth Benedict, 김윤식/오인석 옮김, <을유문화사>, 1974~20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리얼리즘'으로서의 '개그'
- [깊은 잠(The Big Sleep)], 레이먼드 챈들러, 1939.


"나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오. 감정도 없고 양심의 가책도 없지. 오로지 아쉬운 것은 돈뿐이라고... 그 돈에 내 인생을 걸고 경찰들이나 에디 마스와 그 부하들한테 미움 사는 일도 감내하며 총탄에 돌진하고 곤봉에 머리를 얻어 맞고 (돈많은 의뢰인인) 당신 같은 사람에게도 고맙다고 하는 거요... 그런데 그렇게 하려다 보니 나 자신은 개자식이 되는군. 괜찮소. 별로 신경쓰진 않으니까."
- [빅 슬립], <32>, 레이먼드 챈들러, 1939.


1.

어린 시절, 오락실에서 아주 살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에게 당시의 나는 진심이었다. 등교길과 하교길에 무조건 들렀다. 돈은 없었으니 어쩌다 운좋게 주머니에 동전이 있으면 한판 50원 하던 게임 몇 판을 했지만, 어머니가 주신 용돈을 초반에 오락실에서 탕진하고는 대부분 빈털터리로 살던 나는 오락실의 '그림'을 주로 보러 갔다. 

미술과 그림을 좋아하긴 했던 나는 이론은 몰랐거나 아예 그런 게 있는지 조차 몰랐으니 가장 가까이에서 언제든 갈 수 있던 오락실에서 '그림 감상'을 했다. 더 어렸던 시절 1970년대 인천 십정동 할머니의 화투장 그림에서 시작했던 나의 '미술관'은 1980년대 들어 서울 이문동의 어머니 서랍속 화투장 그림에서 우연히 다시 열렸고 노년의 지금과 달리 한창 일하던 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어린 내가 화투장 들여다 보는 걸 금지하셨다. 결국 나는 아버지가 '남자는 이것저것 해봐야 한다'고 하시며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나를 처음 데려가서 갤러그를 처음 시켜줬던 오락실을 혼자 가게 되었다. 
오락실이 나를 이끌었던 이유는 '게임'이 아니라 '그림'이었다. 
그러던 1985년에 나는 동양의 화투그림 또는 서양의 팝아트 따위를 연상시키던 운명의 '너클 죠'를 만났다. 본격적으로 '나만의 오락실 미술관'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2. 

오락실에서 그림감상을 하던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88년에 오락실 들렀다가 거기서 만난 동네 구씨 형제네 집에 가서 라면을 얻어먹었고 민화투를 배웠다. 부모님이 일나간 오후의 구씨 형제 빈집에서 나는 그렇게도 좋아하는 화투그림을 실컷 보았고 그조차 질려서 19세기말 애거서 크리스티의 장편 추리소설을 처음 읽었으며 엘러리 퀸을 비롯한 20세기초 미국 추리소설을 읽어보았다. 나보다 한살 많고 또 한살 어린 동네친구 구씨 형제는 전혀 책을 읽지 않았지만 기이하게도 그 형제의 방 책꽂이에는 팬더 로고로 된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영미 추리소설이 몇 권 있었다. 물론 그 책들을 사주었을 것으로 추리되던, 내가 한번도 뵙지 못한 구씨 형제의 아버지께서는 꽤 두꺼운 포르노잡지를 아들형제의 책꽂이에 같이 꽂아둘 만큼 대담하시진 않았다. 나는 구씨 형제의 노력 덕택에 그 집 다락방 어느 구석에 수줍게 숨어있던 아주 두꺼운 미국 포르노잡지라는 걸 생전 처음 볼 수도 있었다. 여섯식구 중 여자가 넷인 집에 살았던 난 너무도 당연한 얘기긴 하겠지만 여자의 성기가 그렇게 생긴 건지 그 미국 포르노잡지에서 처음 보았다.

어린 시절의 나를 지배했던 주요한 감각은 시각이었다. 나중에 '시각예술(Visual Art)' 분류로 알게 된 '그림'이 어린 나의 주된 관심사였던 것 같다.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미국 추리소설의 삽화는 미국의 화가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풍의 '팝아트(pop-art)' 류의 그림이었다. 20세기초 미국의 DC 코믹스를 통해 등장한 배트맨과 수퍼맨 따위의 만화들 장면을 미술작품처럼 그려서 대량으로 찍어낸 후 대중유통하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미술상품 생산방식이다.우리나라 삼성재벌 회장 같은 요즘 자본가 집안 미술 컬렉션에서 수십억에 거래될 리히텐슈타인의 팝아트는 아마도 20세기초 미국 신흥자본주의에서는 '페이퍼백' 책처럼 박리다매 마케팅을 그 유통의 기원으로 한다. 초기에는 미술유통의 혁명이었을 팝아트 또한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면 그토록 경멸했을 소수 지배계급의 매혹적인 포로가 되어 버린다. 생계와 연결된 예술의 숙명이다.


3.

리히텐슈타인 풍의 미국식 '팝아트' 그림을 떠올릴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중절모를 쓰고 권총을 든 백인남성과 삐딱구두를 신은 금발의 아가씨가 헤집고 다니는 미국의 대도시가 겹쳐지는데, 1980년대 해문출판사의 문고판 미국 추리소설 덕분이다. 책 뒷표지의 목록에서 보았을 [몰타의 매]나 [깊은 잠] 등속의 소설을 당시에는 직접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그 삽화들 자체가 미국식 팝아트의 향연이었을 것으로 상상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한들 상관없다. 나는 미국의 사립탐정 필립 말로의 활약과 함께 연상되는 머릿속 팝아트의 전시관이 그리 싫지는 않다.

자본주의 체제는 경멸하지만, 일본의 1970년대 자본주의적 영웅 그레이트 마징가를 좋아하는 나는, 가진 게 돈밖에 없는 의뢰인들을 맘껏 비웃으며 대도시를 활보하고 모험하는 탐정 필립 말로와 함께 연상되는 미국식 팝아트 그림도 좋아한다. 아마도 그 기원은 원색의 화투그림일 테고 말이다.


4.

"그는 나를 향해 빙글 돌았다. 전통있는 학교의 신사들처럼 그가 한두발 더 쏘게 해주었다면 멋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총구는 여전히 들려 있었고 나는 더이상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 전통있는 학교의 신사가 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 [깊은 잠], <29>, 레이먼드 챈들러, 1939.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의 개그 또한 팝아트 못지 않게 난무한다. 
1930년대 미국의 '하드보일드(hard-boiled)' 추리소설의 거장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 : 1888~1959)의 대표작 [깊은 잠(Big Sleep)](1939)의 주인공인 사립탐정 필립 말로(Philip Marlowe)는 본인에게 "당신도 양아치인가요?"라 묻는 매혹적인 여성에게 "나도 양아치오"라고 숨도 안쉬고 바로 인정한다. 상대방이 총으로 위협하는 순간에도 상대방이 모르지만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본인이 가진 정보를 믿고 협잡하며 끊임없이 개그를 날린다. 모든 여자는 사실 멋진 외모보다는 용기와 개그를 남자의 최고 덕목으로 본다는 잘생기지 못한 우리 남자 부류들의 신앙이 맞을 수도 있다는 대목인데 실제로 소설 [깊은 잠]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 양아치 탐정 필립 말로를 경멸하는 척 하면서 동시에 끌린다. 물론 말로가 외모도 잘생겼으며 키도 180센치 중반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궁지에 몰려 피를 흘리면서도 끊임없이 개그를 나불대는 말로를 몰래 풀어주던 '은빛 가발의 여인' 모나 마스는 '숨쉴 때마다 농담을 해대는' 그 입 좀 다물고 열심히 두시간 쯤 도망치면 살 수 있다는 식의 충고를 잊지 않는데 그녀가 말로에 끌려서 풀어준 주된 이유가 아마도 그의 가늘고 긴 개그정신에 기인한 것은 아닌가 추정된다.
[깊은 잠]에서 말로가 부유한 의뢰인 스턴우드 장군의 명시적 의뢰가 없었음에도 사라진 장군의 사위 러스티 리건을 찾는 이유도, 그 과정도 명확하게 와닿지는 않는다. 고전 추리소설의 탐정들의 연역적이고 논리적인 추리기법은 필립 말로와 같은 자본주의 대도시 프롤레타리아 탐정에게는 사치다. 지방검사 수사관보였지만 상명하복 따위는 술 한잔으로 털어버리고 줄담배 연기에 비아냥을 썪어 내뱉어대다가 쫓겨나 사립 탐정사무소를 차린 그는 일거리가 떨어질까봐 불안해서 휴가도 못가고 일당 25달러에 기름값과 술값 같은 경비에 목숨을 거는 철저한 프롤레타리아지만, '개그'라는 인류의 아주 중요한 유산을 가늘고도 질기게 이어가는 위인이다.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했다는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도 어쩌면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자잘한 개그를 상대방에게 남기는 이 위대한 정신은 어쩌면 007 같은 영화에서도 언뜻 본 듯 하기도 하고, 아마도 그 최극강은 영화 [데드풀]이 쉬지않고 날리는 개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떤 개그를 유언으로 남길까 가끔 고민하는 내가 사실 살고 싶은 삶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내게는 말로나 데드풀 같이 소설이나 영화같은 담대한 용기가 부족하니 언제 한 번 오즈에서 도로시와 방금 헤어진 사자를 만나봐야 할 것 같다.

헤밍웨이의 소설기법이라는 '하드보일드'는 계란 완숙노른자처럼 딱딱하고 비정하며 냉혹한 현실을 묘사한 '리얼리즘'의 일종이지만 지천명을 2년 더 넘긴 추리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이런 '리얼리즘'은 위스키와 줄담배, 총소리와 개그로 날려버린다. 세부묘사는 추상적이라 독자가 따라잡기 쉽지 않기도 하지만, 결국 자본주의 대도시 삶의 현실을 생생하게 구현하는 '리얼리즘'을 담아낸다.


5.

만일 내가 소싯적부터 도박을 잘 했거나 게임에 일가견이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나는 모든걸 탕진한 빈털터리 술주정뱅이가 되었거나 차가운 감옥방 또는 서늘한 오동나무 관 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오락실에서 아예 살던 나는, 그러나 다행히도 이미 빈털터리였고 간도 작아서 게임이나 도박에는 도전도 못해보고 오로지 '그림'만 구경했다. 고스톱은 아주 가끔 늙은 어머니와 점백으로 치기는 하지만 번번이 잃기 일쑤고, 테트리스는 한판에 99판 세시간반 기록이 있고 비행기 오락은 곧잘 했지만 그 외에 오락실에 자주 간 이유는 '팝아트'와 같은 오락 '그림' 하나하나에 이끌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컴퓨터 게임 좀 그만하라는 내게 고딩아들이 "그러는 아버지는 제 나이 때 과연 어떠셨습니까?"라고 작정하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림감상'을 위해 오락실에서 주로 살았다는 답변은 부자지간에서는 뭔가 궁색할 게 뻔하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냉혹한 당대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리얼리즘'은 아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날려대는 얄미운 개그를 통해 결국 비정한 자본가계급과 이들의 뒤를 닦아주면서 뽑을 건 뽑아먹고는 비아냥대는 프롤레타리아 탐정, 부패한 계급을 따라 탐욕과 욕정에 몸을 맡기다가 지배계급을 대신하여 타락의 희생양이 되는 팜므파탈 여성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의 단면을 폭로하는 '리얼리즘'은 구현하고 있다.

나에게 '하드보일드' 추리소설과 함께 늘 따라붙는 '팝아트' 이미지 또한 실제 만화가보다도 못한 그림 솜씨일지언정 '시각예술'로서의 '그림'을 대중화시키기 위한 예술적 '리얼리즘'의 한 형태로 언제나 각인되어 있다.

그 '리얼리즘'은 재벌들이 몇백억을 들여 원작을 소유하든 말든 상관없이 존재하는 현실이다.

***

1. [빅 슬립(The Big Sleep)](1939), Raymond Chandler, 박현주 옮김, <북하우스>, 2004.
2. [범죄소설의 계보학], 계정민, <소나무>, 2018.
3.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의 1960년대 '팝아트(Pop-art)' 그림들 인터넷 갈무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풍기농서 - 이름 없는 영웅들의 비밀 첩보 전쟁
마보융 지음, 양성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농서에 바람이 인다
- [풍기농서], 마보융, 2017.


"장무 3년(223년) 봄 2월, 승상 제갈량이 성도에서 영안(백제궁)으로 왔다... 유비는 질병이 심해지자 승상 제갈량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상서령 이엄(이평)에게 보좌하도록 했다."
- 진수, [정사 삼국지], <촉서>, '선주전', 3세기.

"장무 3년(223년) 봄, 유비는 영안에서 병세가 위중하므로 성도에서 제갈량을 불러와 뒷일을 부탁했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말했다. 
'당신 재능은 조비의 열 배는 되니 틀림없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는 큰 일을 이룰 것이오. 만일 나의 후계자(유선)가 보좌할 만한 사람이면 그를 보좌하고, 그가 재능이 없다면 당신이 스스로 나라를 취하시오.'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은 감히 온 힘을 다하여 충정의 절개를 바치며 죽을 때까지 이어 가겠습니다.'"
- 진수,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3세기.

"장무 3년(223년)에 유비의 질병이 악화되자, 이엄(이평)은 제갈량과 함께 어린 유선을 보좌하라는 유조를 받았다. 이엄을 중도호로 삼고 안팎의 군사를 통솔하여 영안에 주둔하게 했다."
- 진수, [정사 삼국지], <촉서>, '이엄전', 3세기.


관우를 죽인 오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벼르던 중 장비까지 어이없이 죽자, 이성을 잃고 출정했다가 이릉에서 대패하고 영안의 백제성에 틀어박힌 유비는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한나라의 부흥을 명분으로 '백절불요'(진수, [정사 삼국지])의 삶을 질기게 이어오다가 파촉의 구석에서 기어이 황제가 되었으나 그 영웅의 최후는 북벌에 바쳐진 것이 아니라 의형제간의 의리에 바쳐졌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읽든, 나관중의 [삼국연의]를 읽든 '백절불요(百折不撓)'의 영웅 유비도, 유비와 본인을 천하의 진짜 두 영웅이라 떠보았다던(나관중, [삼국연의]) '시대를 초월한 영웅'(진수, [정사 삼국지]) 조조도,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까지 그 모든 난세의 군웅들이 내게는 만만해 보였다. 그리고 무수한 선학들이 내린 평가에 나 또한 세치혀와 고사리손가락을 얹으며 그들을 평가해댔다. 물론 나 개인적으로 군주든 제후든 주군이든 낡아빠진 권력관계를 싫어해서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삼국지'에 그들 말고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중국역사의 원동력은 농민반란이다"라는 사회주의 혁명가 마오쩌뚱의 계급투쟁론에 동조하며 후한말 당시 황건농민반란에 주목하고 썩은 한나라를 무너뜨린 건 대다수 농민과 민중계급이라 본다. 위나라 조조 가문이든 촉한의 유비든 강동의 손씨든 민란의 거대한 바람에 올라탔다.
고대 삼국의 군웅들이 대규모 농민반란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그 바람을 따라 갔다면, 대중민주주의가 정착된 현대의 우리 역사에서 주기적인 전국적 시위와 항쟁 후 민주당이라는 세력은 그 바람에 편승한 점만 다를 뿐. 
고대의 사회적 '군주'는 '황제'였지만, 현대의 '군주'는 다수 '민중'이기 때문이다.

민중반란이라는 계급투쟁의 거대한 바람에 숟가락 빨며 올라탄 이들은 사실, 낡은 체제를 결코 바꾸지 않는다. 황건농민반란은 세상을 뒤엎고 싶었겠지만,'황건적'을 진압하기 위해 조직된 '17로 제후연합군'은 후한 '황제'를 보위한다는 명분으로 당시 실권자 동탁을 쳤다.
현실의 정치적 영웅들은 혁명적 전환의 시대적 요구에도 '혁명'을 '개혁'으로 포장하며 오히려 본인 당파의 기득권을 공고히 한다. 결과적으로 낡은 체제는 전환은 커녕 그들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2016년 촛불항쟁의 바람에 편승한 민주당 정권이 또 다시 그랬다. 역사에서 사라졌어야 할 국힘당 파시스트들이 굳이 자본가 정권이라고 할 것 없다. 민주당 정권도 그에 못지 않은 철저한 자본가 정권이었다.

역시, 후한말 황건농민반란의 난세에 군웅할거하다가 권력을 쥔 이 영웅들 또한 낡은 한나라의 군주제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구분하자면 조조의 위나라는 한나라의 건국초기 '약밥삼장'으로부터 갈수록 복잡해진 법체계나 낡은 제도 등을 개혁하기는 했다. 이는 유가와 법가를 아우르는 조조의 실용성에 기인한다. 사마의는 조조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한편으로 촉한의 유비는 오로지 하나의 슬로건 뿐이었다.

"모든 것이 한나라 부흥을 위한 것!"
- [풍기농서], 마보융, 2007.



"[풍기농서]에... 등장하는 음모는 당연히 팩트가 아니다.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이용한 공상일 뿐이다. 나는 전혀 다른 세상의 관점에서 이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 가능성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지만 아주 흥미롭다. 역사적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지만 그 내막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빈치 코드]는 명화에 얽힌 사소한 에피소드를 아주 그럴싸한 천 년의 전설로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공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안의 세계에 푹 빠지지 않았던가?"
- [풍기농서], <후기 1>, 마보융, 2007.


중국의 젊은 작가(중년이지만 나보다 젊다) 마보융의 첫소설 [풍기농서]의 부제는 <이름없는 영웅들의 비밀첩보전쟁>이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와 나관중의 [삼국연의]를 통해 알려진 역사적 사실 하나를 배경으로 삼아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처럼 이야기를 꾸몄다. 주인공은 촉한의 창업자인 선제후 유비나 제갈량 등의 거물들이 아니라 위-촉-오를 넘나드는 가상의 간첩들과 이들을 색출하여 제거하려는 정보관리들이다.


"건흥 5년(227년), 제갈량이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 한중에 주둔...
건흥 6년(228년) 봄, (읍참마속 후) 겨울에 제갈량은 또 산관을 나와 진창을 포위했는데 위나라 대장군 조진이 이를 막았으며, 제갈량은 식량이 다 떨어져 돌아오고 말았다. 위나라 장수 왕쌍이 기병을 이끌고 제갈량을 뒤쫓아 왔는데, 제갈량은 그와 싸워 깨뜨리고 왕쌍의 목을 베었다.
건흥 9년(231년), 제갈량은 다시 기산으로 출격하였으며, 목우를 이용하여 군수물자를 실어 날랐는데 (이엄의 농단으로) 식량이 다 떨어져 군대를 물렸다. 위나라 장군 장합과 싸워 그를 활로 쏘아 죽였다."
- 진수,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3세기.


이야기는 회사원인 작가 마보융이 좋아하는 추리소설들의 중국식 '패러디'([풍기농서], <후기>)이라고는 하나 배경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풍기농서]는 유비 사후 제갈량의 북벌을 큰 배경으로 삼고 228년(촉한 후주 건흥 6년) 위나라 장수 왕쌍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231년(건흥 9년) 역시 위나라 장군 장합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렇다고 위-촉 북벌전쟁의 주역들인 촉한의 강유와 조위의 장합 등 조조, 유비, 제갈량보다 한등급 아래 영웅들이 한중에서 벌인 치열한 전투 이야기는 아니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 <열전>에서 다루는 위나라 장군 장합, 촉나라 승상 제갈량 및 제갈량과 함께 유비로부터 후사를 부탁받은 탁고대신 이엄(이평) 등은 조연에 불과하다. 다만, 탁고대신 제갈량과 이엄(이평) 간의 촉한 최고 지고층 내부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제갈량이 자신을 모함한 이엄을 탄핵하고 승리한 역사적 사실이 주요 배경이며 그 중간에 촉한 내부 양의와 위연의 알력 등의 역사적 양념이 뿌려졌다. 

마보융의 [풍기농서]는 이들이 주로 등장하던 제갈량의 4차 북벌 과정에서 암약한 것으로 그려지는 가상의 간첩들과 정보관들이 주인공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물론 정보전 일체는 공상이고 픽션이다. 마치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유일한 역사적 사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렸다는 것 하나 뿐인 것처럼. 그러나 촉한의 정보관 순후나 호충, 위나라에 파견된 촉나라 간첩 '흑제' 진공(두필)이나 촉나라에서 활동하는 이중간첩 '촉룡' 등의 특정 인물들이 가상인 것이지 전시의 그러한 첩보전쟁 상황까지 가상으로 보이진 않는다. 즉, 작가 마보융이 소설 <후기>에서 밝히듯 "삼국 역사 소설이 아니라 삼국 역사를 차용한 공상 소설"이기는 하나, 정사와 구전, 문헌과 기록에 없을 뿐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의 구성이다.



추리소설 형식이므로 내용 전개가 빠르다. 재미있기도 하여 하마터면 밤 꼬박 새며 다 읽을 뻔 한 걸 정신차리고 불을 껐다. 다음날 출근은 해야 하니까. 최근 읽은 재미진 소설을 하나 추천하라면 아마도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고 조만간 마보융의 역사소설을 나도 모르게 더 찾아 읽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주인공의 결론이 "모두 한나라의 부흥을 위해!"라는 것.
작가 마보융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촉한정통론'의 춘추필법을 따르는 [삼국연의]의 흐름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주장하듯 "소설은 재미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가장 대중적인 바람을 타야 하기 때문이겠다. 이 대풍의 흐름에서는 제갈량은 여전히 신적인 존재이고 황건농민군의 잔당 일파인 '오두미교'의 반란정신은 진압의 대상이거나 간첩들의 이용대상에 불과하다. 

즉, 재미있고 흥미로운 '촉한정통론'과 '삼국지영웅론'의 이야기 바람은 농서의 전장에서 쉴새없이 불어대나 그 바람에 민중은 없다. 더구나 가상의 소영웅들이 판치는 첩보전쟁에서 그 동안 만만했던 거물들은 더더욱 독자들과 멀어지고 거리감까지 생긴다.

결국, 농서에 부는 간첩들의 바람에는 '민중'도 '영웅'도 없다.
[풍기농서]의 이야기는 가상이지만 '민중'도 '영웅'도 없는 실제 현실을 본의 아니게 보여주는 소설같은 '리얼리즘'이 있다.

***

1. [풍기농서(風起隴西)](2007~2017), 마보융, 양성희 옮김, <RHK>, 2021.
2. [정사 삼국지 - 촉서](3세기), 진수,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
3. [조조 평전](2000) / [유비 평전](2004), 장쭤야오, 남종진 옮김, <민음사>, 2010~20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찰 속 숨은 조연들 -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노승대 지음 / 불광출판사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종이를 접는 시간 - 2 : 2022년~


1.

오늘도 종이를 접는다.

A4 용지 긴면을 4등분하고 정사각형 대칭면만큼 재단하여 자르면 A4 한 장에 지폐와 같은 비율의 종이가 4장이 나오고 짜투리로 좀더 작은 걸 2장 더 얻을 수 있다. '동청룡(東靑龍)'을 접으려면 재단된 종이 '원자재'가 8~9장 필요하니 A4 2장 이상이 필요하다. '서백호(西白虎)'는 7장이니 A4 3장, '남주작(南朱雀)'도 7장이니 A4 2장, '북현무(北玄武)'는 5장이니 A4 2장으로 동서남북 '4방신(四方神)'을 다 접는데 A4 용지가 총 7장 필요하다. 7장으로 '원자재'를 재단 후 그 짜투리로 좀더 작은 걸 총 14장 남길 수 있으니, 동서남북 사신 한 세트를 완성하는데 A4 용지 총 7장이 필요하다. A4 용지 14장을 재단하여 사신 두 세트를 접으면 그 짜투리 28장으로 조금 작은 사신 한 세트를 더 만들 수 있다.
정리하면, A4 용지 14장이면 동서남북 사신 두 세트와 조금 작은 한 세트로 총 세 세트의 '사신(四神)'을 접어서 동서남북의 사방을 지킬 수 있다.

나는 마치,
미켈란젤로가 고전적인 조각의 원자재가 되는 대리석을 다듬듯,
하얀 A4 용지를 여러 장 재단해 두고,
마치 그 르네상스 거장이 돌 속에 숨은 영혼을 깨우듯,
지폐 크기의 하얀 종이를 조각하듯 접어댄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사신'을 접는다.


2.

작년 12월, 경기도 오산에서 홀로 자취를 시작했을 때는 '주간 문사철'에 올리는 서평이나 습작글들이 넘쳐났다. 매주 책 한 권 읽고 글 한 편 쓰는 '주간 문사철'을 넘어 퇴근 후 남아도는 혼자만의 시간으로 그 동안 미뤄두었던 온갖 어려운 책들을 거의 다 씹어먹고 나름의 서평으로 정리했다. 휴대폰에 미리 써 둔 것을 블로그에 저장했다가 매주 금요일 저녁에 한 편씩 다듬어서 브런치에 올렸다. 자취 전에는 한 주를 마무리하고 매주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아침에 글을 쓰는 시간이 기다려지는 묘미가 있었는데 자취생활에서는 그런 재미는 좀 덜 했지만 그래도 매 시간시간이 온전히 책읽고 글쓰는 시간이라 좋았다.

그러던 어느날, 읽은 책과 써둔 글이 넘쳐난다는 생각에 다른 취미를 생각하다가 우연히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1984년 경부터 익혔던 종이접기가 생각났고 '인지(人紙)' 산업, 종이와 사람이 전부인 보험사 근무의 특징을 살려 A4 용지를 이용하여 오랫만에 종이접기를 해 보았다. 38년만에 접어보는데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거의 전부 기억이 났다. 어려서 얼마나 접어댔으면 40년 가까이 손이 기억할까 싶었다. 그 손을 따라서 머릿속을 뒤져보니 오래전 종이접기 비법을 전하던 책의 도면이 무의식의 저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이미지 파일로 저장되어 있는 듯 했다.

이후 정사각형으로 재단한 종이 한 장으로 필살기 6종을 접다가 더 난이도 높은 게 없나 싶어 유투브를 검색하던 중 'LQD'라는 베트남 유투버의 영상를 보고는 이번에는 외려 '이 어려운 걸 접는 게 과연 사람인가' 자문을 하며 자취방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따라 접었더니 어린 시절 알았던 1950년대 일본괴수 고질라와 킹기도라는 물론 '바하무트'라 불리는 루시퍼도 접게 되었다. 
마침내 서양의 드래곤(dragon)이 아닌 동양의 용(龍)을 필살기 10호로 마무리할 즈음, 새벽의 자취방으로 '사신(四神)'이 찾아왔다.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때 며칠간 잠자리가 심히 뒤숭숭하여 동서남북 방향을 보았더니 서쪽으로 머리를 두고 잤음을 알았다. 
예로부터 북쪽은 춥고 어둡고 막혔으며 서쪽은 죽어나가는 자리라고 나는 배웠다. 우리 조선의 한양 사대문 중 북쪽의 숙정문은 아예 산으로 막혀서 사용하지도 않았고 서쪽의 돈의문은 노량진이나 마포 등지를 통해 들어온 서역의 신문물이 사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관문인 한편 나갈 때는 이미 죽은 사람이 실려나가거나 사형수들이 나가 죽는 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남쪽으로 바꾸었는데 심리적인 이유겠으나 그 이후로 잠을 잘 자게 되었다. 아마도 자취생활에 적응하게 된 것이리라. 
해가 뜨는 동쪽도 길하지만 풍수지리 관점에서는 볕이 잘 드는 밝은 남쪽이 좋다. 왕은 항상 남면하는 상석에 앉았다. '배산임수(背山臨水)'도 그러한데 산을 중심으로 그 남쪽과 물을 중심으로 그 북쪽이 바로 그 밝은 땅이다. 그곳의 대표가 바로 '한양(漢陽)'이다. 무학대사가 삼각산 남쪽과 한강의 북쪽의 길한 지금의 서울 강북 땅을 지정했고 정도전이 성리학에서 사방을 지키는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각 포스트로 삼아 신국가 조선의 수도로서 한양의 도시개발계획을 닦았다.
사대문의 동쪽 흥인지문과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과 북쪽의 숙정문은 각 동서남북의 '인의예지'를 상징한다. 북쪽의 꾀할 '정(靖)'은 꾀 '지(智)'와 같다. 서울 종각인 '보신각'의 '신(信)'은 중앙을 상징한다.

아무튼, 문득 나를 찾아온 '사신'을 떠올리며 베트남 유투버 'LQD'로부터 사사받은 용머리와 피닉스 머리, 호랑이 머리 및 각종 기괴한 다리와 발톱, 그리고 날개와 비늘 등의 기술을 응용하여 용과 봉황, 범과 거북까지 내처 완성하고 말았다. 서책을 멀리하여 '주간 문사철'이 거의 '까막눈' 수준까지 이르렀으나 손이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게 나는 홀로 끊임없이 접고 또 접었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들은 고마운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들이 나를 기억하기 위해 간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또한 내가 수십년 후 지금은 거동을 거의 못하시는 연로한 내 아버지처럼 되었을 때, 눈도 침침하고 정신도 혼미하여 문자와도 멀어졌을 때, 손의 습관으로나마 고마운 사람들에게 접어서 건넬 수 있도록 한 살이라도 젊을 시간에 접고 또 접어대는지도 모른다. 한참을 이러고 나면 근 40년 후에도 정확하게 기억난 내 종이접기 필살기 1호처럼 나의 '사신'들 또한 나중에 한 30년이 지난 후에 어렴풋이 기억나도록.


3.

"사천왕은 원래 인도 재래의 민간신이었다. 수미산 높은 곳에 살며 제석천의 명을 받들어 중생의 세상을 지켜주는 호세신이자 방위신이었다. 불교가 일어나며 인도 재래의 신인 제석천이나 범천을 받아들였둣 사천왕도 불교에 흡수되어 부처님을 호위하고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 변모한다."
- [사찰 속의 숨은 조연들], '2. 절집의 외호신-사천왕', 노승대, <불광출판사>, 2022.


연로하신 내 아버지가 앉아계신 서울 우리집 거실과 오산의 자취방, 사무실의 내 책상과 동료들을 지키는 '사신'은 음양오행과 도교의 신들이다. 

도교적 영향으로 유행한 '사신도'는 동쪽은 '청룡(靑龍)', 서쪽은 '백호(白虎)', 남쪽은 '주작(朱雀)', 북쪽은 '현무(玄武)'이며, 가운데는 '황룡(黃龍)'이다. 전설의 동물인 용과 봉황을 등장시켰으되 지상에서 가장 강한 호랑이와 가장 오래 사는 거북을 등장시킬 때도 '신화화'된 모습이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서 본 고구려 '사신도' 고분벽화의 표본은 진파리 고분이나 평양 대동강 서쪽의 강서대묘와 중묘다.

한편으로 오행'은 각기 '동서남북(東西南北)'과 '중앙(中央)'을 이른다. '동(東)'은 '목(木)'이요 '청(靑)색', '서(西)'는 '금(金)'이요 백(白)색', '남(南)'은 '화(火)'요 '적(赤)색', '북(北)'은 '수(水)'요 '흑(黑)색'이며, 만물을 낳는 '토(土)'는 '중앙(中央)'이요 '황(黃)색'이다. 위에서 말한 유교의 '인(仁)-의(義)-예(禮)-지(智)'와 '중앙'의 '신(信)'이며, 불교의 '사천왕(지국-광목-증장-다문)'과 '중앙'의 부처에 대비되는데, 각 방향에 색깔을 입히면 '도교'적 색채가 함께 입혀진다. 동쪽을 지키는 용은 청룡이며 지국천왕은 얼굴이 푸르다. 북쪽을 지키는 거북은 현무이고 북쪽 다문천왕의 얼굴은 검다. 서쪽의 범은 백호이고 광목천왕은 희다. 남쪽의 봉황은 붉은새 '주작'이고 증장천왕의 표정은 붉다.

불교의 사천왕은 인도 재래신에서 기원한다. 원래는 부처를 지키는 야차들을 이르는 금강역사들이 동서남북 사방의 신으로 변천한 듯 하다. 불법을 지키는 무적의 독고저라는 무기는 아마도 제우스의 번개와도 같을텐데 이 독고저는 매우 단단하여 금강이라 불렸고 인도의 제석천이나 불교의 부처 대신 이 독고저(금강)를 들고 신을 호위하는 야차들이 금강역사의 기원이었다. 이들이 역시 인도의 재래신앙인 '사천왕'으로 대체된 것이다.

 사천왕이 사는 곳은 불교 세계관의 중심산인 수미산의 8부 높이 즈음에 한 줄기 산맥으로 돌출하여 수미산을 감싸고 있는 건타라산이다. 건타라산은 동서남북 사방에 큰 봉우리가 있고 이곳에서는 마이산을 포함한 칠금산 너머 먼 바다의 사대주가 바라다보인다. 사천왕은 각각 이 동서남북 봉우리에 궁전을 짓고 수많은 자식과 부하들을 거느리며 산다는 것인데 각각의 방향에서 그 땅을 관할하는 불가의 사방신이다.

얼마전 우리 영화 '사바하'에서 사이비종교가 믿는 신이 사천왕신이었는데 세평과는 별개로 내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라 나는 두 번 이상 보았다. 


4.

나이가 들수록 '귀신'을 믿게 된다.
젊어서는 스스로 '유물론자'로 부르며 온갖 종교와 신앙, 제례와 의식을 거부했다.
중년의 지금에 비로소 신앙이 생겼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내 주변의 보이지 않는 '물질'들을 믿는 종교적 '유물론자'가 된 듯 하다.

'신'을 믿는 게 아니다.
제사를 지내겠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물질'은 하나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과 방식으로 돌아다닌다는 믿음이다.
'귀신'이라 해서 머리를 풀어헤친 사람의 형상이 아니라 지금의 나와는 다른 형상으로 이 세상에 또 다른 '물질'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도교의 '신선'이 저 먼 곳이기는 해도 우리와 같은 세계에 사는 존재인 것처럼 '혼비백산'한 귀신, 즉 하늘로 날아간 '혼'과 땅으로 흩어진 '백'은 다양한 형상으로 우리 곁에서 공존하므로 종교적 신처럼 누가 누구를 심판하고 자시고 할 건 없다.

그저 나는,
나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공존하는 그 모든 것들을 '관념'이 아닌 '물질'로 인정하는 '유물론자'일 뿐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홀로 종이를 접는다.

***

1.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 노승대, <불광출판사>, 2022.
2. [고구려 고고학], 중앙문화재연구원 엮음, <진인진>, 2020.
3.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이태호 글/사진, <덕주>, 20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테 『신곡』 강의 교유서가 어제의책
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이영미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치, 단테처럼.
- [단테 '신곡' 강의], 이마미치 도모노부, 2002.


"우리의 생명길 한가운데에서,
어두운 삼림에 있음을 알았으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 단테 [신곡], 첫 3행, 이마미치 도모노부 번역.


1.

군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단테를 읽지 않았을 거다.

입대한지 일년이 넘었고 상병을 달았지만 대놓고 책을 읽을 짬밥은 아니었다. 읽을 책이 없어 내무반 책꽂이에 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몰래몰래 틈틈이 읽은 경험으로 단테의 [신곡]을 읽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라스콜리니코프' 따위의 러시아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 고생했는데, 단테를 읽을 때는 상황 자체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순례하는 단테를 따라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에게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던 베르길리우스는 단테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던 선학 시인이었던 반면, 
나는 나를 그 길로 안내하던 단테를 그닥 존경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래된 책으로 군대 내무반 책꽂이에 거의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것이었으니 번역이 형편없기 때문이었다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단테(Dante)에게 천국을 보여줬던 그의 이념 속 연인 '베아트리체(Beatrice)'를 따라 끝까지 읽고 말았다.
뭐 어차피, 군대 상병이었던 당시 나에겐 그 책 말고는 딱히 읽어볼 문자도 없었다.


2.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의 이메일 아이디는  'beatrice'로 시작하지 않았을 게다.

나름 '문학도'였으니 군대에서도 이등병에서 일병을 거치며 러시아 소설을 집어들었고 단테까지 펼쳐보았을 텐데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이름 '베아트리체'가 눈에 확 들어왔다. 먼저 들춰본 [신곡]의 결말에서는 온통 '베아트리체'만 보였다. 그러나 번역이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아 난 차라리 생경한 러시아 이름들로 가득한 도스토예프스키를 먼저 읽기로 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단테를 다시 펼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상병 진급 정기휴가를 나갔던 난 학교 2년 후배인 그녀에게 사귀자고 했고 뜻밖에도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녀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를 그 시간이 나에게는 지금까지도 가장 행복한 장면 중 하나였다. 

나에게도 단테처럼,
나만의 '베아트리체'가 생겼다. 

부대로 복귀한 나는 내무반 책꽂이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던 단테의 [신곡]을 다시 꺼냈고, 
단테와 나는 각자의 '베아트리체'를 따라 순례를 이어갔다. 
단테는 지옥과 연옥이라는 고난을 견뎠고, 
나는 거지같던 번역문의 고난을 견뎌냈다. 
우리에겐 '베아트리체'라는 공동의 '별'이 있었다.

그렇게 스물세살의 군장병인 내게,
사랑이 왔다.


3.

"영어 'history'의 뿌리가 된 라틴어 'historia'는 그리스어 '히스토리아'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은 '발자취를 따라 대상을 쫓아가다'를 의미하며 사냥용어로 쓰인 동사에서 비롯되었다. 즉, '발자취를 보고 동물이 도망친 방향을 안다는 것이며 그것과 동일선상의 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이 역사해석의 방법이었다."
- [단테 '신곡' 강의], <14강. 천국편 3>, 이마미치 도모노부, 2002.


전역 후 예전에는 후배였던 그녀를 본격적으로 만나면서,
처음 만든 내 이메일 아이디로 'beatrice'를 선택했다. 

군복무 후반기 일년을 헌신적으로 기다려주고 나를 위해 희생했던 그녀는,
여전히 나의 '베아트리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게든, 단테에게든, 
'베아트리체'는 현실의 사랑이 아니었다. 
그냥 동경하고 소망하는 마음 속 '별'이 되었다.


일본의 고전인문학자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2002년에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1265~1321)의 14세기 장편 서사시 [신곡(神曲/Divina Commedia)]에 관한 강의 15편을 책으로 엮어냈다.

지옥 34곡 1,540여 행과 연옥 33곡 1,540여 행, 천국 33곡과 역시 1,540여 행의 단테 [신곡] 100곡을 전부 해석할 수는 없지만, 주요 구절을 이탈리아어 원어와 그 유래로서 라틴어 및 그리스어를 상세히 열거하며 갖가지 일본식 번역을 소개하고 필자 본인의 번역도 곁들인다. 이탈리아어도, 일본어도 모르는 나는 그런 구절은 눈으로만 훑고는 빨리 넘어간다. 그랬더니 6백 페이지의 이 책은 짧은 시간에 마지막 장을 덮고 만다. 

[신곡]의 주요 싯구에 관한 세밀한 번역은 차치하고 이 책의 묘미는 사상가이자 시인인, 즉 '시인철학자'로 묘사되는 단테의 굵직한 선학들로서 그리스 문명의 호메로스와 로마의 키케로를 거쳐 베르길리우스에 이르는 인문학적 계보를 설명하는 초반부 1~3강이다.

우선, 단테는 로마의 키케로처럼 현실 정치가였다. 그것도 피렌체 공국의 '총리' 또는 장관급 되는 거물 정치인이었는데 교황권과 세속왕권의 정쟁에 휘말려 실각을 하고 망명생활까지 한다. 결국 망명지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에 라틴어가 아닌 고국의 이탈리아어 방언으로 적어내린 서사시가 [신곡]이다. 베아트리체로 상징되는 천상의 종교관의 내용과 별개로 루터의 독일어 성경 못지 않게 단테의 이탈리아어 서사시 [신곡]은 서양 인문학 고전사에서 의미가 깊다. 
단테 이후로 독실한 종교사상을 꼭 라틴어로만 적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는 호메로스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 고전을 로마식 라틴어로 번역한 키케로의 인문주의를 이어가는 길이었고 이로 인해 로마 최고 시인의 경지에 오른 베르길리우스의 인문학을 단테는 존경하며 따르게 된다.
이것이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지옥과 연옥을 안내해달라며 베르길리우스를 찾아간 이유다. 물론 천국에 오르지 못한 베르길리우스는 천국의 문 앞에서 단테를 베아트리체에게 인계한 채 사라져 버리지만, 단테가 사랑이 아닌 존경으로서 마음 속에 '별'로 삼았던 사람은 단연 [아이네이스]라는 로마건국 서사시로 로마의 주체적 역사관을 열었던 베르길리우스였다.

또한 단테의 종교관은 그리스도교에서 천국과 지옥으로 양분되는 이분법이 아니라 '연옥'의 존재로 특화된다. 
12세기경부터 구체화된 모습으로 등장했다는 '연옥'은 '지옥'과 '천국' 사이에 놓인 '희망'의 공간이다. 단테가 지옥문을 들어설 때 지옥문은 '희망을 버리라', 또는 '두고 오라'고 말한다. 지옥은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하는 절망의 공간이다. 그러나 연옥에서는 불로써 정화된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설 수도 있는 '희망'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단테는 연옥에서 비로소 '별'을 본다. [신곡]의 연옥편에 나오는 '별'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별을 쫓다보면 천국의 문 앞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나게 된다.

일본의 단테 전문가인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단테의 [신곡]을 매개로 서양 고전의 인문학적 기원을 돌아본다. 여신 무사(뮤즈)가 부르는 노래를 서사시로 옮겨적은 호메로스부터, 그리스와 로마의 인문주의를 번역의 형태로 매개했던 사상가 키케로, '나는 노래한다'고 선언하며 여신이 아닌 인문학자로서 시인 본인이 역사를 읊는 베르길리우스의 주체적 인문주의의 맥을 잇는 단테는 당대 지배이념인 그리스도교의 역사관을 장편 서사시 [신곡]에 담았다. 원래 제목이 '극(劇)'이나 '곡(曲)' 자체인 'commedia'였던 이 서사시는 이후 단테를 추앙하던 보카치오가 '신성하다(divine)'라는 의미로 앞에 'Divina'를 붙여 '신곡(神曲/Divina Commedia)'이 되었다. 
고매한 라틴어가 아닌 대중적인 이탈리아어 방언으로 적어내려간 단테의 [신곡]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 이전에 씌어졌으나 루터의 독일어 성경 못지 않게 서양 인문주의 사상사에서 사상의 대중화를 이끈 가히 '혁명'적인 계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곡]의 절정은 베아트리체를 향한 단테의 사랑이다. [신곡]의 첫머리에서 절망의 숲을 헤매던 단테에게 신의 거대한 프로그램인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며 절망을 너머 희망으로 이끈 베르길리우스 또한 베아트리체의 계획이었고 인간으로 하여금 원죄를 짓게 한 아담과 인류를 대표하여 속죄한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살해한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로마의 복수 또한 신의 역사라는 단테의 세계관의 중심에는 베아트리체가 오롯하게 서 있다. 

그렇게 단테가 천국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만나게 되는 베아트리체는, 
단테에게는 희망의 '별'인 동시에, 
신의 역사를 증명하는 단테 자신이었다.

40대에 현실에서 길을 잃고 '숲을 헤매던' 단테가 지옥과 연옥을 거친 후 천상에서 만난 베아트리체는 아마도 20대에 요절한 그 모습 그대로였을 게다.
단테의 마음 속에 남은 '희망'의 '별'로서의 그녀는 그가 '소망한 바의 실체'인 것이지 더이상 연모의 대상으로서의 여인이 아니었다.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너머 신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인 동시에 그 '희망의 실체'를 믿는 단테 본인인 것이다.


4.

"신앙이란 바라야 하는 것(소망/희망)들의 실체이다."
- 토머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천상의 안내자 베아트리체 조차도 따라오지 못한 천국의 대단원에서 신의 대리자가 단테에게 '믿음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중세 스콜라철학자 아퀴나스의 대답과 같다. 철학적으로 단테는 아퀴나스를 따르고 궁극으로 거슬러 오르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닿는다. 도식적인 해석이기는 하나 플라톤의 이분법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적 '형이상학'의 전통이다. 유물론 사상이 발전한 현대에 들어와서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관념론으로 분류되지만 단테까지의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를 가장 이단적이고 현실적이며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최고의 '과학'이자 '철학'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신학적 역사관과 철학을 견지하는 단테는 토머스 아퀴나스의 뒤를 따랐을 뿐.

그렇게 단테에게도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처럼 '신앙'이란 '희망'의 다른 이름이었고, 
베르길리우스를 통해 지옥과 연옥을, 
'베아트리체'를 쫓아 천국을 우리에게 보여준 이유가, 
바로 우리들 마음 속 '희망'이라는 '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5.

결국 그녀는 떠났지만, 
'베아트리체'는 여전히 남았다. 

이후로도 'beatrice'는 내 이메일 계정이고 각종 아이디의 대표명이다.

그녀는 아마 나를 만났던 젊은날을 지워버리고 싶은 아픈 시간으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당시 나의 '베아트리체'는 그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녀에 대한 미친 듯한 사랑도 결국 그녀를 사랑하던 젊은 나 자신에 대한 그것이었음을, 
내가 쫓던 마음 속 '별' 또한 젊은날의 나 자신이었음을,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알겠다. 
당시 부대에서 그녀와 주고받던 수백통의 군사우편에서도 비슷한 말을 해댔겠지만, 
당시야 뭐 열에 들뜬 나머지 뭔가 있어 보이려고 끄적인 거였다면, 
중년의 지금에서는 그것이 우리의 '역사(history)'였다는 걸 진정 알 것도 같다.


결국, 
당시 나의 '베아트리체'는, 
내가 한때 사랑했던 '그녀'가 아니라, 
젊음이라는 열병을 신앙과도 같이 앓던, 
나 자신이었다. 

당시 내가 단테의 [신곡]을 읽으며 쫓던 '베아트리체'는, 
스스로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었고, 
내 마음 속 '별'이었던 거다.

마치,
연옥을 해매던 단테처럼.

***

- [단테 '신곡' 강의](2002), 이마미치 도모노부, 이영미 옮김, <교유서가>, 20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