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하도 - 문명의 조형 탐구
아청 지음, 김영문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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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어디에서나
- [낙서하도], 아청/김영문, 2014.


"하수(河水)에서 그림(圖)이 나오고(河出圖), 낙수(洛水)에서 글씨(書)가 나와서(洛出書) 성인이 그것을 법도로 삼았다."
- [주역], <계사전>


1.

남송의 주희(주자)가 제자 체계통을 불렀다.
주희는 체계통이 처음 찾아왔을 때부터 그를 친구로 여겼지 제자의 대열에 세우지 않았다고 하는데, 체계통에게 어딘가 탁월함이 있었나 보았다. 
체계통은 그 중 그림을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났단다. 주희는 그런 그에게 [주역(역경)]에서 말하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찾아오라고 청했다. 

'하도'는 '하수', 즉 동아시아 문명의 큰 물인 '황하'에서 신룡이 몸에 새기고 나타난 '그림'이고, '낙서'는 주나라 문명(중국) 출발지인 '낙수'에서 거북이가 등딱지에 새기고 나온 '글씨'다.
즉, '하도낙서'는 동아시아 문명의 기원이다.

당대 유학의 대학자로부터 중책을 부여받은 체계통은 산 넘고 물 건너 대륙을 횡단하며 사천(쓰촨) 지역에서 드디어 '하도'와 '낙서'를 발견했고, '사방오위도'와 '팔방구궁도'를 주자에게 바치며 각각 '하도'와 '낙서'라 전했다.

이를 본 주희는 [주역]의 해설서와 같은 본인의 [주역본의]에서 '사방오위도'를 '하도'로, '팔방구궁도'를 '낙서'로 구분하여 이 '하도낙서'가 "변화를 생성하고 귀신을 움직이는 방법"이라 설명한다.

그러나 체계통에게는 한 장의 그림이 더 있었다.


2.

"인(仁)이란 비교적 낮은 경지이지만 기원전 500년 무렵에는 대단한 인간 각성의 기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선진(先秦)시대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이 기점입니다."
- [낙서하도], <천극과 선진철학>, 아청, 2014.

중국의 작가 아청(阿城:1949~)은 중국 소수민족 묘(먀오)족의 복식과 고대 청동솥(정/鼎)의 문양 등의 조형에 나타난 '하도낙서'와 '천극'(북극성) 신화 및 이 신앙의 변천을 통해 동아시아 문명을 크게 그려보고 있다. 
원래 도상학과 디자인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에게 실시한 강의를 엮은 듯 한데 그림과 이미지 같은 조형과 이들을 통한 도상학적 접근으로 동아시아 문명사를 조망해 보고자 도판을 계속 증보하면서 재판을 거듭했단다.

결론부터 보면,
동아시아 문명과 철학 및 사상의 기점은 진시황의 진나라 최초통일 이전인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와 백가쟁명 과정을 통과해 온 공자유학의 '인(仁)' 사상이 동아시아 '자유' 인문학의 기원이자 중심이란 내용이다.

공자의 유학은 원래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자연철학' 보다는 인간세상에 초점을 둔 '사회철학'(기원전 당시는 '과학'이 없었다)이다. 이 사상이 12세기경에 이르면 우주운행의 원리까지 사고를 확장하는데 이를 이념적으로 집대성한 사람이 남송의 주희(주자)였다. 그의 '주자학'이 이후 유학 이념으로서 정립되는 '성리학'이다.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설명해야 했으므로 주희는 '변화의 경전'인 [주역(역경)]을 연구하고 해석했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그림에 정통한 제자 체계통을 천하로 파견한 것이리라. 우주가 낳은 인류의 문명사에서 그 시초가 된다는 '하도'와 '낙서'의 원본을 주자 본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을 것이다.

체계통의 보고에 따라 주희는 '사방오위도'를 '하도'로, '팔방구궁도'를 '낙서'로 규정했으나, 사실은 그 두 그림 모두 '낙서'였다. 
체계통이 숨긴 세번째 그림은 '태극'의 원형과 같은 '음양도'였는데,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음양도'가 바로 '하도'였던 것이다.


이제, 아청의 이 책 [낙서하도]에서 서술하는 동아시아 문명의 기원을 순서대로 정리해 보자.

1) '낙서' 
신석기 후기 은(상)나라 거북점 등에서 보듯 낙수라는 강에서 신령한 거북이가 상형문자를 전했다. 실은 인류가 거북이 점을 이용해 갑골문자를 남겼다.

2) '하수' 
청동기 시대인 주나라 시기 신성한 제사용 솥(정)에 신령한 괴수를 그려넣었는데, 동서남북 사신 중 으뜸인 동청룡(신룡)으로 대부분 표상되니 황하에서 신룡 또는 [산해경]에서 용의 최고 단계인 응룡이 그림을 지고 나타났다. 이 응룡은 고대중국 황제와 치우와의 신석기-청동기 문명대전쟁에서 황제를 도와 치우천왕을 물리쳤고, 우임금의 치수(물관리)를 신령한 거북 '선구'와 함께 돕기도 했다. '하수'의 그림은 청룡 말고도 주작(봉황)이나 흉측한 괴수의 대표자 '도철'의 모습으로도 등장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 괴수들의 이마 정중앙 마름모꼴이다.

3) '천극' 
동아시아인이 태양을 숭배한 것은 불교가 처음 들어온 후한 시대란다. 그 전까지 기원전 시대는 '천극'의 시대였는데, '천극'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북극성'이다. '하도'의 신룡이나 도철 이마 정중앙에 새겨진 마름모 또는 이후 변천된 소대가리 이마의 소용돌이 등이 바로 이 북극성을 표시한다. 이를 중심으로 신룡이 오르고 봉황이 나는 별자리도 보이는 것이다. '천극'을 숭배하는 사상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본인이 '천극' 자체가 된 이후로 옅어진다. 이에 따라 천극과 수호신(용-봉황-도철-거북 등)을 새겼던 솥은 진나라 이후 문양없이 단순해진다. 이는 이후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농민황제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에 이르러 '천인합일', 즉 황제가 하늘(또는 그 아들인 '천자')이라는 유학사상과 결합한다.

4) '축의 시대(Axial Period)'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는 인류 사상사에서 공통된 '각성기'인 '축의 시대'라고 철학자 야스퍼스가 말했단다. 천극을 떠나 인간의 '자유의지'가 발견된 시대, 즉 공자나 석가,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같이 철학적으로 인간을 발견한 인문학 각성의 시대라는 것이다. 이 즈음부터 인류는 '동물성'을 버리고 '문(文)', 즉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키며 '인문학'을 발견했다. 인류가 신 또는 하늘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하여 '자유의지'를 펼치기 시작하는데,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양의 제자백가 등으로 나타났다.


"공자의 뜻, 즉 공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자유상태'입니다... 축의 시대 각성자로서 공자는 각성을 시작하면서 바로 각성의 궁극적 지점(자유상태)을 표현한 것이죠... (그러나) 기원전 500년 무렵의 공자는 내면의 '자유의지'라는 문제에서 대화상대가 없었던 셈이죠. 소위 '고독'이란 바로 이런 것이죠. 소위 '강함'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 [낙서하도], <천극과 선진철학>, 아청, 2014.

이상의 흐름을 통해 아청은 공자의 유학을 중심으로 '이질화'되지 않은 유학적 세계관을 펼치는데 역시 중국인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역사의 보편적 기원으로서 [낙서하도]를 추적하는 아청에게도 공자는 여전히 사상의 뿌리다. 시진핑의 '일대일로' 슬로건이 내세우는 철학 또한 '인'의 정치의 세계적 실현 아니던가.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공자의 어록 [논어]에 "칠십세에 이르면(七十而) 마음이 가는대로 따라가도(從心所欲:종심소욕)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不踰矩:블유구)"라는 말이 있다. 오래전 각성시대(축의 시대) 이후 인문학 궁극의 목적지점이다.

아청이 '하도낙서'를 '낙서하도'로 바꿔 부르면서까지 추적한 인류문명의 결정적 지점이다.


3.

"상나라 시대 청동기에 구현된 '하도'의 나선형 문양, 지금의 중국 먀오족 전통의상에 그려진 나선형 문양, 그리고 우리나라 태극기에 그려진 태극 문양이 동일한 시원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 어느것 중심의 영향관계가 아니라 동일한 근원에서 함께 분파된 열매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 중국, 중국 소수민족, 일본, 동남아 등이 모두 천극성 신앙과 도작(벼농사) 문명이라는 동아시아 보편의 뿌리에서 공평하게 갈려나간 독자적인 문화담지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 [낙서하도], <옮긴이의 말>, 김영문, 2023.

[낙서하도]의 저자 아청은 지금으로부터 11만년 전부터 약 1만년 전까지 지속된 마지막 빙하기의 후기에 중국과 한반도는 물론 일본까지 원래 하나의 대륙으로 연결되었던 그 시기부터 '낙서하도'와 '천극' 신앙, 도작(벼농사) 문명 등이 동아시아 인류 문명의 보편적인 바탕으로 존재한다고 추측하면서 책을 끝낸다. 
중국이 중심이라는 '중화주의' 사상이 아니라 오래전 '낙서하도'의 문명이 시작된 자리에 지금의 중국이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같은책, <동아시아 문명에 대한 추측>).

여기에 옮긴이 김영문 선생은 아청의 주장을 다시금 강조한다. 중국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가 보편적 문명을 공유하는 것이다.
'낙서하도'는 중국만의 것이 아니다.


내가 읽은 [낙서하도]의 내용은 또한 이렇다.

아청에 의하면, [역경]의 괘가 하나라와 상(은)나라 시기에는 건(하늘)과 곤(땅)이 반대였다. 아마 음양도 그랬을지 모른다. 이를 주문왕이 유리안치 시절 [역경] 괘를 [주역] 64괘로 재해석하며 원래 하늘이었던 '곤'을 땅으로, 원래 땅이었던 '건'을 하늘로 전환시켰다. 
아마도 땅을 중시하던 신석기 또는 하상나라 문명에서 하늘을 대리하려는 지배자의 시대인 청동기 문명으로 교체되는 문명적 '혁명'을 사상적으로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서쪽의 앙소문화(주나라)와 동쪽의 용산문화(상나라) 간 문명 대충돌의 '혁명'이 임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전의 상고시대에 벌어진 황제와 치우의 대전쟁 또한 평지의 도작문명과 고원의 속작문명 간 충돌이었을 수 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올라가면서 지금은 대륙붕 연안바다가 된 지역에서 벼농사를 시작한 도작문명이 조와 수수 등을 재배하던 속작문명의 영토를 침범하게 되었는데 치우가 도작문명 침략자를 대표한다는 설을 아청은 소개한다. 
원래의 땅을 지키던 황제 세력은 신룡과 거북 등 문명의 힘으로 요괴화된 침략자 치우 세력을 물리친다. '낙서하도'의 힘이다. 하지만 치우의 청동기 문화는 기존의 '낙서하도'와 융합된다. 이후 소빙하기로 추정되는 5~6세기 추워진 북방의 유목민족이 남방의 정착문명을 침략한 후 문명이 크게 또 다시 충돌하고 융합되는 것처럼, 문명은 언제 어디서나 '혁명'을 통해 진화한다.

원래 '하도'가 먼저 생기고 '낙서'가 뒤따른다는 설로 '하도낙서'라 불렸지만, 아청은 '문명의 조형 탐구'를 통해 신석기 시대에 낙수에서 거북이(선구)가 글자(상형갑골문자)를 지고 나타나는 '낙서'가 먼저 등장했고, 이후 청동기 시대에 청룡(신룡)이 황하에서 별자리와 같은 그림의 형태를 띄고 도상화되어 나타났으니, 기존의 '하도낙서'를 '낙서하도'로 순서를 뒤바꾸었다. 
도상학적으로도 '낙서'와 '하도'는 '혁명'적으로 전화된다.

'하늘'과 '땅'이 '곤건'에서 '건곤'으로 뒤집어지고, 음양이 뒤바뀌며, 신석기와 청동기 등의 문명이 충돌하고 융합되는 역사에서 '하도낙서'가 '낙서하도'가 되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인류 문명사에서 만물의 '혁명'적 전환으로 해석된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세상사 '만물유전(萬物流轉/panta rhei)'의 본질은 '혁명'이다.
인류 문명의 역사 또한 '혁명'의 역사 자체다.
'혁명'은 어디에서나 있다.

***

1. [낙서하도(洛書河圖) - 문명의 조형탐구](2014), 아청,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2023.
2. [산해경 괴물첩](2015), 천스위 그림, 손쩬쿤 해설, 류다정 옮김, <디지털북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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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가 묻고 답하다 - 2023 세종도서 학술부문
이경태 지음 / 박영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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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마르크스는 묻고 스미스는 답했다
-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가 묻고 답하다], 이경태, <박영사>, 2023.


"철학적 토론은 없다. 
철학적 코뮤니카시옹은 없다."
- 루이 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1968.


1.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지식이란 과학적 발견으로 생기며 철학은 사상의 경향성을 설정할 뿐이라고 했다.

철학자인 그가 보기에도 철학이란 지식 생산 기능은 없이 과학이 발견한 지식을 가지고 싸움질이나 하는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었다.

1980년에 정신 나가기 전까지 그 철학자는 '이론'적으로 투철한 공산주의자였다.

이십대의 나는,
그의 추종자, '알튀세리앵'을 선망했다.

내가 보기에도,
모든 '철학'적 토론은 같은 대상을 두고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자기 얘기만 하기에,
합의에 이를 수 없었다.

알튀세르의 말대로,
철학적 '코뮤니카시옹(communication)'이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2.

"나의 경제학은 자본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에 놓고 있지. 경제를 움직이는 주체는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경제인, 즉 'homo economicus'라는 것이 대전제로 설정되어 있지... 자본이 경제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자본은 수단에 지나지 않아."
-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가 묻고 답하다], <1부>, 이경태, 2023.

"[국부론]은 내가 [자본론]을 쓸 때 반면교사, 타산지석의 지적 깨우침을 선물해 준 고마운 양서네. 자네는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으로서 '보이지 않는 손'과 '자연조화설'을 제시했지. 나는 [국부론]을 수없이 읽으면서 내가 목격한 자본주의의 현실 인식과 대비한 결과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추동력이 '잉여가치'와 '노동자 착취'라는 불편한 진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네."
- 같은책, <1부>, 이경태, 2023.


재무부 공무원이었다가 미국으로 유학 가서 경제학 박사가 된 후 국책기관인 산업연구원에서 활동한 경제학자 이경태 선생은 올해 '사실과 상상의 융합'으로서 '논픽션에 기초한 픽션'(같은책, <머리말>) 장르를 내세워 18세기의 애덤 스미스와 19세기 칼 마르크스를 한 자리에 앉혔다.
배경은 결국 인간다운 세상을 꿈꾸었던 업적을 기려 천당에서 둘이 만나 염라대왕의 배려 하에 지금 세상을 주유천하 후 런던의 템스 강가에서 커피 한 잔씩 때리면서 토론한다는 설정이다.

서로 묻고 답하는 대화체 형식인데, 예상되듯 스미스는 자본주의에 기반하고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또는 과학적 사회주의)에 기반하여 현재의 세계경제를 논하고 있다.

[국부론]에서 합리적 인간의 이기심이 사회적으로 작동하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경제가 '자연조화'되고 발전한다는 스미스의 경제 자유주의 사상에서 그의 '고전파' 후학들은 '시장'의 절대적 힘을 강화시키고 신격화하고자 했지만,
[자본론]을 쓴 마르크스는 스미스가 발견한 '노동가치론'과 '노동분업'이 자본주의 발전의 기본골자라고 보았다.

애덤 스미스의 경제적 자유주의와 칼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상호 학술적 계보를 이루지는 않는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는 [국부론]도 인용되지만 그의 '노동가치론'은 스미스의 후학인 데이비드 리카도의 정치경제학 이론으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았다.
두 사람의 시대는 한 세기의 차이가 나고 스미스의 산업혁명기 시대는 마르크스의 시대와 비교해 노동이 착취되는 양상이 다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설정처럼 둘이 서로 '자네'라 부르며 각자의 사상을 주고받는 것은 넌센스임에도, 저자는 '자본주의(스미스)'와 '사회주의(마르크스)'의 차이와 장점들을 융합하여 우리식으로 '제3의 길'을 모색하고자 굳이 두 인물을 동시에 소환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말은 1902년에 베르너 좀바르트라는 독일 경제학자에 의해 널리 회자되었다고 한다. 즉, 'capitalism'은 학문적으로 18세기 스미스에게는 그냥 '경제학'이었고, 19세기의 마르크스에게는 당대 '정치경제학'적 분석대상이었을 수도 있다. 
18세기 스미스의 시대는 '경제학'이 '윤리도덕철학'과 구분되지 않은 시대라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이기심을 인간윤리도덕과 법적 통제로 보완하자고 주장했고, 과학이 좀더 발전한 19세기 마르크스 시대에는 '경제학'이라는 독립된 과학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므로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가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으로 '경제학'을 다시금 대체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경제라는 하부구조가 정치라는 상부구조를 규정하며 양자는 상호 변증법적으로 엮여있다는, 이른바 우리 80년대식으로 표현하면 '사회구성체론'이었다.
정리하면, 스미스의 경제학의 주제는 이기적이지만 합리적인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이었고,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주제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사회구조'(social structure)였다.

시기는 달랐으나 '자본주의'라는 같은 세상을 두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라는 동일한 지향점이 있었지만, 스미스는 인류의 '자연조화'를 믿었고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의 역사를 보았다.

이 책에서도 두 사람 사상의 차이점을 우선 확인하고 미국의 자본주의, 구소련과 중국의 짝퉁 사회주의를 각자 비판하면서 급기야 <6부>에서는 한반도에 모여 스미스가 남한의 재벌중심 자본주의를 개조하고 마르크스가 북한의 사회주의 사칭 김씨 봉건왕조를 혁명하면서 선의의 '체제경쟁'을 외친 후 마지막 <7부>에서 작별의 건배를 들기까지 하지만, 결론적으로 두 사상의 '철학적 토론'은 없었다. 
결국 한반도 통일방안 또한 '연방제'로 귀결된다.


"이해관계자 상생은 자본주의의 장점인 효율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자본주의의 결점인 불평등을 현저히 개선할 수 있는 대안임이 분명하네...이해관계자 상생은 분배과정에서의 기업과 시장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보려는 시도이지. 공정분배 기능을 시장기구 내부에서 작동하는 내생변수로 끌어들이자는 것이네. 평등사회의 실현을 정부, 종교단체, 시민사회의 책임으로만 돌리지 말고 기업의 경영목표로 내생화하자는 것이지."
- 같은책, <6부>, 이경태, 2023.

"협동조합체제도 생산수단은 공유하면서 사유재산을 부정하지만 공동생산에서 나온 산출물을 시장에 내다 팔고 그 대금을 조합원들이 공평하게 나누어 갖자는 것이니까 시장가격기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세. 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사유재산의 폐단과 불공평한 분배를 시정하자는 것이지."
- 같은책, <6부>, 이경태, 2023.


이상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첨단을 누리는 '디지털' 기술혁명의 놀랍고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공유한 두 사상가가 이 '디지털' 기술혁명을 기반으로 하여 이 책에서 내린 주요 결론들이다.

스미스는 기업이 효율만 따지지 말고 자본가와 노동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협력업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장기적으로 자본주의 불평등을 공정하게 완화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해관계자 상생' 전략을 내건다.

마르크스는 구소련 공산주의 등이 실패한 국가주도 중앙계획경제가 아닌 노동자 자치의 공유제를 통한 '협동조합'들이 '디지털' 기술혁명에 기반한 실시간 '계획경제'를 실현하고 한편으로 시장기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공정하게 경쟁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자본론]과 [공산당선언]의 궁극적 결론)를 꿈꾼다.

이 책 내내 두 사람은 열심히 토론하고 건배로 끝내지만 사실 서로 자기 얘기만 하고 끝난다.

역시,
알튀세르의 말대로 "철학적 토론은 없었다."


3.

"환경에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법칙은 생명체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제도와 사상에도 적용된다고 믿네. 자본주의는 비판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유연한 체제이기 때문에 수백 년 동안 번성하고 있지."
- 같은책, <7부>, 이경태, 2023.


사실 내가 읽기로 이게 이 책의 결론이다.

자본주의는 체제 자체에 내재된 주기적 공황과 외재적 위협인 사회주의라는 '소금' 덕분에 지속 수정발전하며 지금에 이르렀고, 인류는 다시 옛날의 빈곤으로 되돌아갈 수 없으니 조지프 슘페터의 말마따나 '기업가의 창의적 혁신'을 장려하며 생산력를 지속 발전시키고 존 메이나드 케인즈의 정책대로 정부의 '보이는 손'으로 유효수요와 완전고용을 확보하면서 분배를 고르게 이뤄야 한다는 것. 자본주의가 '인간화'되고 혁신하며 적응하고 버텨온 진화론적 '선택설'에 따라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방식도 좋으니 어쨌든 사회주의는 '소금'으로 자본주의에 간 좀 잘 맞춰달라는 것.


이 책에서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는 서로 자존심 세워가며 문답을 이어가지만, 결국 체제경쟁에서 1패한 마르크스는 물었고 어찌되었든 피묻은 1승을 거둔 스미스는 답을 한 것이다.

인류가 적응하며 다윈주의적 '자연선택설'을 통해 살아남았듯,
자본주의는 온갖 위험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사회선택설'에 따라 살아남았다고.

그러니 과연 이 체제 말고 다른 대안이 있냐고, 말이다.

***

-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가 묻고 답하다], 이경태, <박영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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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미술관 - 생각을 바꾸는 불편하고 위험한 그림들
김선지 지음 / 브라이트(다산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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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라는 '놀이터'
- [뜻밖의 미술관], 김선지, 2023.


"한 점의 그림은 참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술작품은 한 시대의 삶과 사회의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역사책 뿐만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도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제 그림 속 인물들과 그들을 그린 화가는 사라졌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남아 그들 모두의 감정과 생각을 우리에게 조용히 건넨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 [뜻밖의 미술관], <젊은 금수저 부부 초상화의 비밀>, 김선지, 2023.


1.

'독후감'과 '서평'의 차이에 관한 글을 페이스북에서 보며 생각한다.
과연 내 글은 무엇일까.

소설가를 꿈꾸던 이십대를 보냈고, 정치평론 같은 글을 게시판에 가끔 올리던 삼십대가 있었고, 노동조합 성명서를 주로 쓰던 사십대도 잠시 있었다. 공통점은 그리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지는 않았다는 점 정도.

이십대에는 주로 소설책을 끼고 다녔고, 삼십대에는 거의 철학책을 들고 다니다가, 사십대에는 주로 역사책을 펼쳐보았다. '문사철'의 장대한 인문학적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글을 쓸 때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서였는데 실제로 나이가 들 수록 모든 책이 '역사책'으로 읽혔다.

오십대가 된 지금까지 읽은 책을 꾸준히 글로 정리하며 나름의 '독서일지'를 써 둔 나는, 그것들을 감히 '서평'이라 불렀다. 그런데 '서평'은 '객관적'인 평론이 있어야 하고 개인적 감상은 '독후감'이라는 페이스북의 글을 보고는 새삼 궁금해졌던 거다.

내 글은 대체 뭐지?


2.

'브런치'와 '블로그' 같은 곳에 '주간 문사철'이라는 간판을 걸고 매주 글을 올리는 '온라인 작가'라는 생각에, 지난 몇 년간 나의 '서평'인지 '독후감'인지는 단순한 '책소개'에서 형식이 바뀌었다. 
원래 '소설'을 쓰고 싶었으니 짧은 '소설'과, 
책 읽는 걸 즐기니 '서평'을 융합해 보는 것으로. 
서론과 결론은 매우 짧은 논픽션 '소설'적 단상이고,
본론이 '책소개'다. 

이번 생에 진짜 '작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나의 글쓰기는 그렇게 혼자서도 잘 노는 일종의 '놀이'가 되었다.
퇴근 후 또는 토요일 아침 일찍 '서평+소설'을 쓸 생각으로 나는 일주일을 버틴다. 또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어려운 책도 잘 읽히고 심지어 업무까지 즐거워지는 믿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래도 인류의 어려운 '고전'들은 잘 넘어가지 않을 때도 간혹 있는데, 그럴 때는 나의 또 다른 취미인 종이접기나 하다가 '주간 문사철'이 '격주간 문사철'이 되기도 한다.
그 와중에 단 한 가지 분야에서만큼은 먹기 아까운 곶감을 꺼내 먹듯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책장이 아깝다.
그 분야가 바로 '미술사'다.

[그림속 천문학](2020)과 [그림속 별자리 신화](2021)를 쓴 김선지 작가는 내가 '브런치'와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미술사 전문작가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즐겼고 미술을 좋아했으며 한때 '고고학자'를 동경했던 나는 커서 어쩌다가 '문사철'과 '인문학'에 경도되면서 '미술사'에 끌리게 되었다. 
곰브리치와 하우저, 뵐플린과 파노프스키 등 저명한 미술사학자들의 저서를 읽고 '독후감'을 써놓기도 했으며, 우리의 유홍준, 진중권 등과 일본의 나카노 교코 같은 미술사가들의 책은 거의 무조건 읽는데, 내 브런치와 페이스북 '친구'인 미술학자 김선지 작가 또한 책이 나오는 대로 꼭 읽게 되는 작가다.

내가 믿고 읽는 김선지 작가가 그 동안의 일간지 연재글을 보완하고 엮어서 올해 또 한 권의 책을 냈다.
제목은 [뜻밖의 미술관](2023)이다.

'뜻밖의 미술사'라는 제목의 <한국일보> 칼럼은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대로 다 읽었기에 이 책의 <part 1. 명화 거꾸로 보기>는 대부분 익숙하다. 
<1부>와 <2부> 중간중간 곁들여진 <더 알아보기>는 영국의 '라파엘전파', 르네상스 화가 티치아노, 플랑드르의 캉탱 마시, 미술사가 대비열전과 같은 '게인즈버러 대 레이놀즈', '다빈치 대 미켈란젤로', '고흐 대 고갱' 등의 흥미로운 뒷이야기로 즐비하다. 
<part 2. 화가 다시 보기>는 칼럼으로는 읽지 못한 이야기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물론, 기괴한 기독교인 히에로니무스 보스와 요절한 르네상스 화가 조르조네, 벨라스케스와 고야, 고갱과 뭉크, 그리고 17세기 혁명적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8세기 프랑스 혁명 전 마리 앙트와네트의 초상화가 마담 르브룅과 현대 여성주의 화가 메리 베스 에델슨까지 소개해준다.

곶감 빼 먹듯 아까워 하다가 하룻밤에 읽어버리고는 아쉽게 입맛을 다시고 만 김선지 작가의 [뜻밖의 미술관]은 제목에서 암시하듯, 명화들과 화가들의 삶 이면에 내포되고 숨겨진 의미들을 밝혀내는 내용이다.

미술사가는 '탐정'과 같다고도 하는데, 이 책 또한 그렇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있는 예수는 전형적인 유럽인의 모습이지만 실제 유대인 예수는 유럽인과 다르게 생겼을테니 명화와 영화 속 예수는 서양중심주의의 산물이다.
로마의 그리스 조각상 모작들은 흰색이지만 원래 그리스 조각은 화려한 색채였고, 16세기에 역사상 유명한 예술가들의 [열전]을 쓴 조르조 바사리와 근대 수학자들이 만든 '1:1.6' 황금비율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신화라는 이야기도 있다.
다빈치와 고야 말년의 그림들은 염세적이었고 고갱은 사실 원주민 미성년 성착취자였으며 뭉크는 중근세의 흑사병이나 현대의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전세계인을 몰살시킨 20세기 초 팬데믹인 스페인 독감 투병일지와 같은 그림들을 남겼다. 한편 신분상승을 열렬히 꿈꾸었지만 벨라스케스는 약자였던 궁정의 '난쟁이'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깊은 연민을 보였고 풍경화를 그리고 싶었던 초상화가 게인즈버러는 금수저 동창 부부의 초상을 그리며 곳곳에 계급적 냉소와 풍자를 숨겨두었다.

인상적이었던 내용 하나를 꼽는다면,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초상화로 유명한 마담 르브룅은 치열을 드러내며 웃는 얼굴들을 자화상을 포함하여 몇 점 그렸는데 치아위생이 좋지 않았던 당시에는 서민이 아닌 귀족층에게 치아 노출은 꺼려지는 일이었단다. 요즘에도 개인적으로 증명사진 찍을 때 치아를 보이며 웃는 표정이 쉽지 않은 것처럼, 18세기 당시에는 가히 혁명적인 초상화였던 거다. 곰브리치 말대로 미술의 역사에 '미술'이란 '관념'은 없고 '미술가들'의 '혁신'만이 존재한다.

'최후의 만찬'으로 시작한 책은 역시 '최후의 만찬'으로 끝맺는다. 
마지막 장을 여는 그림은 현대 여성주의 화가 에델슨이 '현존하는 여성 예술가들'의 얼굴을 예수와 열두 제자 얼굴 위에 겹친 패러디다.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2020)로 등단한 작가답게 미술사에서 지워지고 소외된 여성 미술가들에 대한 오마쥬가 느껴진다.

김선지 작가를 내가 믿고 읽는 이유는,
내가 '미술사'라는 분야를 '뜻밖'에도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평등한 세상에서 계급적으로, 성별적으로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작가가 언제까지고 붙잡고 있을 것 또한 믿기 때문이다.


3.

"글을 쓸 수 있는 지금 나의 마음은 5월의 따사로운 햇살같이 포근하고 충만하다. 여전히 꿈을 꾸고 있고,... 항상 설레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 [뜻밖의 미술관], <프롤로그>, 김선지, 2023.

'작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모든 글쟁이들이 그렇겠지만, 김선지 작가의 페이스북 포스팅을 보면 공감이 될 때가 많다. 특히 글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과 먼길을 돌아 온 이 길에서 딛는 한 발 한 발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출간작가가 되지 못해 글쓰기를 한낱 '놀이'로 생각하기로 한 내가 보기에도 생생하게 그 마음이 전해져 온다.

책을 출간하면서 김선지 작가의 그 즐겁고 행복한 글쓰기가 고된 '노동'이 되지 않기를 독자로서 바래 본다.

그게 '서평'이 되었든, '독후감'이든, '소설'이든, 
그냥 책 읽고 쉬는 시간에 종이나 접어 제끼다가 다시 끊임없이 글 쓰는 걸 '놀이'로 삼고 사는 내게,
가장 재미진 '놀이터'는 여전히 언제까지나 '미술사'이기에 갖는 바람이다.

***

- [뜻밖의 미술관], 김선지, <다산북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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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된 표현형 - 출간 40주년 기념 리커버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장대익.권오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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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왕국'은 아니었다!
- [확장된 표현형], 리처드 도킨스, 1982.


"동물이 하는 행동은 그 행동을 '위한' 유전자가 행동을 수행하는 특정 동물 몸에 있든 없든, 해당 유전자가 달성하는 생존을 최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표현형' 특질을 끌어당기는 복제자는 몸 속 뿐만 아니라 몸 밖에도 있다는 점이 내 이론이 품은 핵심이다... 나는 거의 모든 '표현형' 형질이 내부 복제자 힘과 외부 복제자 힘 사이에서 일어나는 '타협'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 [확장된 표현형], <13장. 원격 작용>, 리처드 도킨스, 1982.


생명의 진화사에서 중요한 실체는 생물의 개체나 집단이나 유기체가 아닌 오직, 불멸의 '이기적 유전자(gene/DNA)'라고 선언하고 논증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1976~1989)를 덮자마자 그가 스스로 '학자'로서 "자랑거리이자 기쁨거리"라며 자화자찬했던 후속작 [확장된 표현형](1982)을 펼칠 때만 해도, 나는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다는 생각에 내가 좋아하는 '동물의 왕국'을 보듯이 편안한 자세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킨스의 "자랑거리이자 기쁨거리"라던 [확장된 표현형]은 결코 '동물의 왕국'이 아니었다! 

도킨스가 하고자 했던 주장은 [이기적 유전자](1976)의 1989년도 개정판에서 증보된 마지막 <13장>에 이미 다 소개되었고, [확장된 표현형](1982)은 대중과학서인 [이기적 유전자]가 제시한 관점에 대해 전문가들이 가한 비판에 대항하여 본인의 '이기적 유전자론'을 변호하고 논증하는 일련의 학술적인 작업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문 생물학자들을 대상으로 쓴 [확장된 표현형]에서 도킨스가 논증한 숱한 '사고 실험'에 지쳐서 나는 책을 덮고 종이접기나 했으며, 결국 중간에 잘 이해되지도 않는 '사고 실험' 몇 가지는 건너 뛰었다.
[확장된 표현형]은 전문적인 과학책이면서 현실의 '동물의 왕국'과 달리 이론적인 '사고(생각) 실험'으로 넘쳐난다. 
고등학교 때 문과였음에도 생물 시간만큼은 좋아했던 나였지만, 지금도 쉬는 날 오후에는 꼭 KBS 1TV '동물의 왕국'을 틀어놓고 조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리처드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은 결코 나 같은 사람이 아닌 생물학 전공자들의 책이었다.


"다소 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책은 '이기적 유전자'를 '개체'라는 개념적 감옥에서 해방시키려 한다. '유전자'가 발하는 '표현형' 효과는 자신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지렛대와 같은 도구이며 이러한 도구는 '유전자'가 자리한 '몸(생존기계)' 밖으로, 심지어 다른 개체의 신경계 깊숙이까지 '확장'될 수 있다."
- [확장된 표현형], <서문>, 리처드 도킨스, 1981.6.


일반인으로서 동물행동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읽으라면, 역시 [이기적 유전자] 한 권이면 충분하다.
리처드 도킨스의 대표저서 [이기적 유전자]는 1976년에 발표되었고 1982년에 유전자가 드러내는 '표현형(phenotype)'이 유기체 외부 환경으로까지 무한히 '확장(extend)'된다는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 출간 후 1989년 전작인 [이기적 유전자] 개정판에서 <12장>과 <13장>의 추가설명까지 덧붙였으니, 단언컨대,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은, 특히 문과적 인간이라면, 도킨스의 이론을 알기 위해 굳이 [확장된 표현형]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읽는다 쳐도 도킨스의 전작인 [이기적 유전자] 1989년 개정판보다 더 확장될 지식도 없다. 
공연히 읽다가 도킨스에게 실망만 더 하게 될 공산이 크다.
실제로 내가 그랬다.


"유전자는 '복제자'다. 유기체와 유기체가 모인 집단은 최적의 복제자라고 보기 어렵다. 그들은 복제자가 타고 여행하는 '운반자'다... 집단 선택 대 개체 선택 논쟁은 제시된 두 종류의 운반자를 다루는 논쟁이다. 유전자 선택 대 개체(또는 집단) 선택 논쟁은 우리가 선택받는 단위를 말할 때, '운반자'를 의미해야 하는지 또는 '복제자'를 의미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논쟁이다... 실제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든 생식계열 복제자는 잠재적으로 '불멸'이다."
- [확장된 표현형], <5장. 능동적인 생식계열 복제자>, 리처드 도킨스, 1982.


결코 '동물의 왕국' 같이 푸근한 분위기가 아닌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의 장황한 변론과 복잡한 '사고 실험'들을 제외하면,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이기적 유전자]의 1976년 초판과 1989년 개정판의 마지막 <13장>이 소개한 '유전자의 (확장된) 긴 팔' 그것 뿐이다.

리처드 도킨스에 의하면, 수십억 년의 생명 진화사에서 맹목적 생존만을 위해 프로그램된 '불멸의 이기적 유전자'와 이러한 유전자들의 '표현형'은 "유전자와 환경이 만드는 공동 산물로서 유기체가 지닌 밖으로 드러난 자질"이며 "유전자가 자리한 몸 밖으로" 유전자의 "기능적 차이"를 포함하는 영역으로까지 "확장"([확장된 표현형], <용어 사전>)된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gene)'의 자연과학적 개념을 확장하여 인간문명계의 '밈(meme)'을 논의하지만 그에게 '밈'은 "인간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보다는 유전적 자연 선택을 보는 통찰력을 예리하게"(같은책, <6장>)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확장된 표현형] <1장>에서 저자는 이 책의 "핵심"이 <11장>, <12장>, <13장>이라고 말한다.
<11장>은 거미와 비버 등의 특징을 나타내는 유전자의 '표현형'은 동물 유기체들 내부 뿐 아니라 그들이 조작하는 거미줄이나 댐 등으로도 표현되며 이 "동물이 만드는 조작물"들은 주변의 환경도 변화시키면서 결국 해당 유기체의 더 나은 생존을 위한 유전자 진화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이다. 
<12장>에서는 맹목적 생존만이 목적인 '이기적 유전자'는 한 유기체 뿐만 아니라 "기생자 유전자"로서 다른 유기체에 기생하며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 "숙주 표현형"을 통해 '확장'된다는 또 하나의 가설이다. 달팽이와 흡충은 유기체 결합 상태에서, 뻐꾸기 새끼와 개개비새 어미는 그렇지는 않지만 한 둥지라는 공간에서, 기생자가 숙주를 '조종(조작;manipulation)'한다. 이 '조종' 과정에서도 도킨스가 말하는 '군비 경쟁(Arms Races)'(같은책, <4장>), 즉 생존을 위해 '비용'보다는 좀더 '이익'이 되는 유전자를 선택하는 다윈주의적 '자연 선택'이 작용하여 '기생자'에게는 이익이고 '숙주'에게는 일견 손해로 보일지라도 결국 공생하고 함께 진화한다. 
[확장된 표현형]의 결말은 <13장> "원격 작용(Action at a Distance)"이다. '유전자'는 '유기체'나 생물 '개체'에 얽매이지 않고도 원격 조종으로 진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유전자 표현형 확장'의 "논리적 정점"(같은책, <12장>)이다.

한편, 도킨스는 [확장된 표현형]이라는 자기 변론서의 서두에서부터 '유전적 결정론'의 오해를 벗어나고자 하는데, 흔히 생각하듯 개체나 유기체의 '집단 선택' 진화설이 아니라 유전자의 '자연 선택' 진화설로 인해 '유전자'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통념적인 오해를 불식시키는 게 이 책의 우선적인 목표(같은책, <2장>)이기도 하다.
도킨스의 주장은 '유전자 결정론'이 아닌 '유전자 선택론'이라는 것이며, 유전자의 '표현형'은 유기체 내부만이 아닌 외부환경으로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무한히 '확장'된다는 일종의 '타협'(같은책, <14장>)이다.

이를 위해 도킨스가 [확장된 표현형](1982) <1장>과 [이기적 유전자] 1989년 <개정판 서문>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보이는 '네커 정육면체'의 비유를 통해 전제하는 것은 '유전자 자연 선택설'이나 '유기체 선택설'이나 생명을 보는 두 가지 타당한 관점이라는 것이다. 
다만 도킨스 본인은 다윈주의 진화론인 '자연 선택설'을 따르되 그 중요한 근본 실체를 '유전자' 또는 '불멸의 생식기계 복제자'로 본다는 주장을 '동물의 왕국'과 달리 매우 재미없게 논증한 다음 이 책 [확장된 표현형]의 '핵심'인 <11~13>장을 지난 후 마지막 <14장>에서 "통합된 다세포 유기체"를 재발견하며 끝을 맺고 있다. 
즉, '불멸의 이기적 유전자'가 근본이기는 하나 이 유전자와 외부환경이 함께 만든 '표현형'이 무한히 '확장'되며 환경과 함께 공진화한 '다세포 유기체'는 역시 '생존기계'이기는 해도 위대하고 장엄하다는 의미겠다.


"통합된 다세포 유기체는 원래 독립해 있던 '이기적 복제자'에 자연 선택이 작용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다. 함께 모여 행동하는 방침은 복제자에게 이득이었다. 원리적으로는 복제자가 생존하도록 보장하는 '표현형' 힘은 '확장'되며 한계도 없다."
- [확장된 표현형], <14장. 유기체의 재발견>, 리처드 도킨스, 1982.


유전자는 생명의 근본이고 이들이 통합된 유기체는 장엄하지만,
내게 [확장된 표현형]은 결코 휴일 오후 '동물의 왕국' 같은 편안함을 주지 않았다.

혹시 동물행동학자 리처드 도킨스를 알고 싶은 문과생이시라면,
그렇다면, 더도 말고 딱 [이기적 유전자](1976~1989)까지만 읽으시라.

***

1.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1982), Richard Dawkins, 홍영남/장대익/권오현 옮김, <을유문화사>, 2022.
2.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1976~1989), Richard Dawkins, 홍영남/이상임 옮김, <을유문화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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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4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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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건 오직, '불멸'의 '유전자'
-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1976.


"진화에서 실제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실체, 그리고 이에 근거한 관점이 의미를 가지는 실체는 오직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이기적 유전자'다."
- [이기적 유전자], <8장. 세대 간의 전쟁>, 리처드 도킨스, 1976.


1.

실적이 바닷속 심해 가오리처럼 바닥을 훑고 있다.
팀장이 된 지난 1년 반 동안 올해 상반기가 최악이다.
나를 팀장으로 추천한 선배팀장은 '선한 영향력'을 확장시키라고 권유했다. 
실적은 결국 그에 따라올 것이라는 희망을 담아서. 

후임자는 기본적으로 전임자로부터 배운대로 '모방'하고 '복사'한다. 선배팀장은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선한 영향력'을 지녔고, 그를 보고 배운 나는 이를 '확대재생산'해야 할 필연적인 의무가 있다.

내가 원래 선한지 악한지 '백지 이론(tabula rasa)' 또는 '빈 서판(the blank slate)' 이론을 따르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고는 싶다. 여태껏 반백년 살아오면서 실제로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는 언제나 그러려고 노력했고 지난 1년 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팀내 동료들 간 우애는 나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실적이 하향세만 그리면서 바닥을 치기 직전이 되니 문득 '이기주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쨌든 나도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 눈에 들어온 책이 [이기적 유전자]였다.


2.

"나의 목적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생물학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이 '유전자(gene)'가 만들어낸 기계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논의하려는 것은, 성공한 '유전자'에 대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성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정한 이기주의'라는 것이다... '자연선택'의 과정을 보면 자연선택을 거쳐 진화해온 것은 무엇이든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선택(집단선택이 아닌 자연선택)의 기본단위, 즉 '이기성'의 기본단위가 종도 집단도, 개체도 아닌, 유전의 단위인 '유전자'라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 [이기적 유전자], <1장.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리처드 도킨스, 1976.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 1941~)의 대표 저서는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1976)다.
찰스 다윈 진화론의 '자연선택설'을 지지하는 '신다윈주의' 일파를 표방하지만, 생명 진화의 기본 단위를 19세기 다윈을 포함한 보통의 생물학자들처럼 '개체'가 아닌 30억년 전 원시 지구의 생명의 기원부터 존재한 최소의 '분자', 즉 DNA라는 '자기복제자(the replicators)'로 불리는([이기적 유전자], <2장>) '유전자(gene)'로 본다.


"우리는 '생존기계'다. 즉 우리는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자다."
- [이기적 유전자], <초판 서문>, 리처드 도킨스, 1976.

"자기복제자... 이제 그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며, 우리(신체)는 그들의 '생존기계'다."
- [이기적 유전자], <2장. 자기복제자>, 리처드 도킨스, 1976.

"우리 모두는 같은 종류의 '자기복제자', 즉 DNA라고 불리는 분자(유전자)를 위한 생존기계다... '유전자'들은 '자기복제자'이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기계'다."
- [이기적 유전자], <3장. 불멸의 코일>, 리처드 도킨스, 1976.


유전자가 생명 진화의 기본단위고, 생물 개체들의 몸은 유전자가 영원토록 번식하고 살아남기 위한 '생존기계'라는 말은 이 책에서 계속 반복된다. 나머지 대부분의 장들은 과학자의 논리전개답게 이 가설을 증명하는 각 동물 개체들의 '행동'이다. 1976년의 <초판 서문>에서도 도킨스는 스스로를 "동물학자"이며 이 책은 "동물의 행동에 관한 책"이라 규정한다. 그러나 계속 오해가 없도록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본인은 다윈주의자이며 그럼에도 '생존기계'에 불과한 생물 '개체'가 아닌 불멸의 '유전자'를 연구하는 중이라고.
결국 도킨스의 진화론은 '개체'를 중심으로 한 '집단선택'이 아닌 다윈주의적 '자연선택'이다. 다윈이 '개체'에 머물렀던 건 19세기 중반 그가 [종의 기원]을 발표할 당시에는 '유전자'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진화는 '집단선택' 즉 각 '개체'들 집단의 오랜 선택의 누적이 아니라, '유전자'가 '생존'하고 '번식'하며 '불멸'의 존재로 이어지기 위한 '안정'적 선택, 즉 '자연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유전자의 '자기복제'가 기본인데 '자기복제'는 '진화적으로 안정된 생존전략(ESS)'을 위해 3가지 특성을 지닌다. '안정적 수명(장수)'과 '다산성', 그리고 '정확성'이다(같은책, <2장>). 이 특성으로 무장한 '유전자'는 결국 살아남는 '성공한 유전자'다. 물론 이들 특성에서 이탈한 '오류'(같은책, <2장>)는 아마도 진화의 질적 변화를 추동하는 '돌연변이'일 것인데, 실제 동물집단 사례에서도 처음에는 소수였던 생존전략이 다수가 되면서 '선택'의 질적변화를 이끄는 행동들을 이 책은 많이 소개하고 있다. 
물론, 개체들의 '집단선택'이 아닌 유전자의 다윈주의적 '자연선택'이라는 전제는 잊을만 하면 재차 강조하면서 말이다.


"'이기적 유전자'... 그것은 온 세상에 퍼져있는 특정 DNA 조각의 모든 복사본들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목적은 유전자 풀 속에 그 수를 늘리는 것이다. 유전자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생존'하고 '번식'하는 장소인 몸(신체)에 프로그램을 짜넣는 것을 도와줌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한다."
- [이기적 유전자], <6장. 유전자의 행동방식>, 리처드 도킨스, 1976.


'이기주의'냐 '이타주의'냐는 현상일 뿐이다.
'유전자'의 궁극적 목표는 '생존'이므로 겉으로는 '이타적'으로 보여도 해당 '유전자'가 '생존기계'인 여러 신체들을 죽이고 갈아타며 안정적으로 장수하기 위한 '이기성'이 그 본질이다. 다만, 이 책 [이기적 유전자]가 다루는 분야는 인문학이 아닌 자연과학이므로 '신'의 목적이나 프로그램 따위를 상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 스스로도 이 책의 제목으로 [이기적 유전자]보다는 [불멸의 유전자(코일)]가 더 맞을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어쨌든, 도킨스에게 결국 '이기주의'나 '이타주의' 같은 인문학적 가치판단 개념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전자(gene)'가 유전자 풀 내에서 퍼져나갈 때 정자가 난자를 운반자로 하여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뛰어다니는 것과 같이, '밈(meme)'도 밈 풀 내에서 퍼져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mimeme)'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 다닌다."
- [이기적 유전자], <11장. 밈-새로운 복제자>, 리처드 도킨스, 1976.


[이기적 유전자] 1976년 <초판>의 마지막 장은 원래 '밈(meme)'에 관한 내용이었다.
생명 전체에서는 '유전자'의 생존이 주제였지만, 인류에게는 뇌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유전자'의 생존이라는 원시 형태를 넘어서는 '문화'와 '문명'이 있음을 짚고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즉, 인류진화사에서 뇌에서 뇌를 통해 이어지는 '모방'과 전승의 '문화' 말이다. 
이를 우리는 인류의 '문명'이라 부른 것이다.

이 '문명'의 발전을 가능케 하는 기본단위는 '유전자'라는 일차원적 개념과 차별화되어야 했기에 도킨스가 고대 그리스어 'mimeme(모방)'를 어원으로 'gene(유전자)'처럼 단음절의 개념을 만든 것이 'meme(밈)'이다.

'gene'은 자연계, 'meme'은 인간문명계 진화사의 기본단위라는 차이 외에, 도킨스는 '가치중립'적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한 인문학적 가치판단으로 <초판>을 아래와 같은 문구와 함께 끝맺는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 [이기적 유전자], <11장>, 리처드 도킨스, 1976.


물론, 1976년 도킨스의 '유전자'의 '확장'은 인간계의 '밈'에서 끝나지 않는다. 1982년 그 스스로 "일생 동안 학자로서 성취했던 그 어떤 것보다 자랑거리이자 기쁨거리"(같은책, <13장>)라 표현한 또 하나의 대표 저서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 발표 후 도킨스는 1989년 [이기적 유전자] 제2판에서 '밈'의 <11장> 이후 2개의 장을 추가한다.

마지막 장인 <13장. 유전자의 긴 팔>은 그의 "자랑거리이자 기쁨거리"인 [확장된 표현형]의 예고편(예고와 본편의 선후는 바뀌었지만)이자 요약본이니 나로서는 그의 '자랑거리' [확장된 표현형]을 다음 책으로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마도 [이기적 유전자] 개정판의 <13장> 요약을 미리 읽었으니 내가 좋아하는 '동물의 왕국'을 시청하듯, 저명한 동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소개해 주는 여러 동물들의 '행동'을 읽어보고자 한다.


"유전자 간의 중요한 차이는 그 '영향'으로서만 드러난다... '표현형(phenotype)'이라는 용어는 하나의 유전자가 신체로 발현되는 것, 즉 배 발생 과정을 통해 유전자가 그 대립 유전자에 비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말할 때 쓰인다... 우리가 숙주의 변화는 기생자에게 이익이 되는 적응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숙주의 변화를 기생자 유전자가 '확장된 표현형(extended phenotype)'에 미치는 '영향'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유전자'는 자신의 몸 바깥까지 팔을 뻗쳐서 다른 생물체의 '표현형'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 [이기적 유전자], <13장. 유전자의 긴 팔>, 리처드 도킨스, 1989.


그리고 개정판에 추가된 <12장>의 제목은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한다"이다.


3.

"... 현실생활에서 인간과 동식물의 생활은 관중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실생활의 많은 측면은 '비영합 게임(nonezero sum game)'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이 종종 물주' 역할을 하고 개개인은 서로의 성공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반드시 경쟁자를 누를 필요는 없다. '이기적 유전자'의 기본법칙에서 벗어나지 않고도, 우리는 서로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세계에서조차 협력과 상호부조가 어떻게 번성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액설로드의 말대로 어째서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 [이기적 유전자], <12장.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한다>, 리처드 도킨스, 1989.


'권선징악'의 도덕책 얘기가 아니다.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의 개정판에 추가한 <12장>에서 소개한 게임 이론과 '죄수의 딜레마'를 주제로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액설로드가 수차례 실험한 사례들이 보여준 과학적 결과다. 
'이기적'으로 싸워야 하는 게임에서도 결국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한다'니.

여기서 조건은,
1) 서로 피터지게 빼앗아먹는 '영합 게임(zero sum game)'이 아닐 것,
2) '비영합 게임(nonezero sum game)'으로서 '자연'이라는 '물주'가 있어 자연은 망가지든 말든 게임참가자들이 공생할 수 있을 것,
3) 가장 중요한 건, 그 게임의 끝이 언제일지 알 수 없도록 '불멸의 시간'일 것,

대충 이렇다.
따라서, '마음씨 좋은' 전략이 '일등' 즉, '불멸'이 되기 위해서는 생명진화사와 같은 영겁의 시간이 필수전제인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에 의하면,
'불멸'의 시간 속에서 마음씨 좋은 '이타성'이 생존이라는 '이기성'과 동일해지게 된다.

과학자처럼 명료하지 못하고 온통 뒤죽박죽인 문사철 편애자인 나는 또 다시 헷갈린다.
이 끝이 보이는 '실적'의 게임에서 나의 '생존'은 역시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가.

일단, 나의 의식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맹목적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불멸의 유전자'만은 명확하다.


"우주의 어느 장소든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복제자(유전자/코일)' 뿐이다."
- [이기적 유전자], <13장>, 리처드 도킨스, 1989.


이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1976)는 덮고 그의 '자랑거리'인 [확장된 표현형](1982)이나 펼쳐봐야겠다.
일요일 오후 '동물의 왕국'을 틀듯 편안한 자세로 말이다.

***

1.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1976~1989), Richard Dawkins, 홍영남/이상임 옮김, <을유문화사>, 2018.
2.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1982), Richard Dawkins, 홍영남/장대익/권오현 옮김, <을유문화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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