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학계의 가야사 연구
조희승 지음 / 도서출판 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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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의 정체
-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조희승, 이덕일 해설, <도서출판 말>, 2020.



"(해방 후) 북한은 조선력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학술지 [력사제문제]를 출간했는데, 벽초 홍명희의 아들인 홍기문은 1949년에 [력사제문제]에 <조선의 고고학에 대한 일제 어용학설의 검토(상,하)>라는 논문을 썼다. 홍기문은 이 논문에서 일제 식민사학의 요체를 명쾌하게 정리했는데, 첫째 한사군의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 가야가 '임나'라는 '임나일본부'설이고, 셋째는 백제가 일본의 부용국, 즉 속국이라는 주장 등이 일제 식민사학의 요체라는 것이었다.
-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해설 : 남북한 가야사 연구의 현격한 차이', 이덕일, 2020.


1945년 해방 후 1948년 남북 단독정권 수립 시까지 3년간은 우리 현대사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활발했던 '해방공간'으로 불린다. 이 시기 역사학은 세 가지 학파가 있었는데, 하나는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을 계승한 '민족주의 역사학', 또 하나는 마르크스 역사유물론에 기초한 '사회경제사학', 나머지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뒤를 이은 이병도 무리의 '식민사학'이었다. 미군정의 비호 아래 수립된 남한 단독정권에서 친일파가 다시 득세했을 때, '민족사학자'들은 짓밟혔고,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차라리 북으로 넘어갔으며, 남한에는 오로지 '식민사학자'들만 남았다.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 선생의 아들 홍기문 선생은 북한의 역사학계에서 남북을 통틀어 '식민사학'의 '요체'를 위와 같이 정리했다. 
'낙랑=평양'설은 이후 1960년대 초 리지린 박사의 [고조선 연구] 논문에 의해 박살났고, 가야사는 1963년 김석형 선생에 의해 '임나가야'는 일본에 세워졌던 가야소국이라고 밝혀지며 올바르게 정리되었다. 이후 북한 '력사학계'는 '식민사학'을 극복하려는 '주체적 역사관'으로 단순하게 정립된다. 반면,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 제자들이 다수인 남한 역사학계는 '낙랑군 평양설'과 '임나 가야설'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정설이란다.

'가야사'를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는 '식민사학'이 따르고 있는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가야', '가라'라는 국호는 한자어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고유 조선말에서 나왔다. '가야'의 국호가 '갓'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일본서기]... '쯔누가아라시또'... '쯔누가'라는 말은 '뿔이 난 갓', '뿔이 난 고깔'이라는 뜻이다... '아라시또'를 '아라사람', 즉 '가야사람'으로 리해하는 것이 어느모로 보나 자연스럽다. 결론적으로 '뿔 달린 갓을 쓴 가라사람'이다."
-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1장 : 가야(금관)령맹체의 형성과 흥망성쇠', 조희승, 2011.


재일교포로 북한에서 '한일 고대사'를 연구한 학자 조희승은 1960년대 초 역사학자 김석형 선생의 학설을 계승하여 서기 1 ~ 6세기 한반도 남동부 '가야'의 역사를 정리한다. 남한의 역사학계는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전'에서도 그들의 근본과 같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조차 가야가 서기 42년에 건국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3세기부터 존재했다는 [일본서기]의 기사를 답습하고 있었다는데, 이 과정에서 북한의 역사학은 끊임없이 '임나일본부'를 해체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는 '가야'에 관한 유일한 종합적인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 <가락국기>다. 서기 42년 '거북아,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겠다'는 <구지가(龜旨歌)>를 부른 후 '알'에서 태어난 김수로(金首露) 왕이 건국한 '금관가야' 이야기의 출처다. 흔히 '가야'는 초기 연맹체 국가에서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여 우리 '삼국시대'의 변두리 역사에 머물러 있다. 북한 역사학계는 마르크스주의 역사발전단계설에 따라 청동기 시대의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철기 시대로 이행하며 봉건제 국가체제로 전환된다고 보는데 청동기 시대인 진국(辰國:삼한을 통치했던 청동기 노예제 국가)은 철기가 발전하면서 마한은 이후 백제로, 진한은 신라로, 변한은 가야로 진화한다고 본다. 진수의 [삼국지] <위서-한전>은 변한이 철이 많이 나는 지역이며 고깔 모양의 '갓'을 쓰는 문화를 가지고 있어 나라 이름이 '가야'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기록 [삼국지]에서도 '땅이 기름지고 오곡이 풍성하며 철기 문화가 발전'하여 번영된 문명을 지녔다던 '가야'는 주변의 고구려-백제-신라와 동등하게 '사국시대'의 주역이 되어야 했음에도 '신라 중심주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해 사장되었다. 그 결과 가야에 관한 문헌학적 자료는 매우 빈약하다.

'하늘(텡그리)'을 숭배하던 아시아 동북지역 부족 중 요동과 만주 일대 '고조선'의 후예들인 고구려와 한반도 남부 신라의 건국설화는 모두 동일하게 시조들이 '알'에서 태어난다. 이는 '하늘'의 상징인 '새'와 관련이 있으며 시신을 새의 먹이로 바치는 '조장(鳥葬)'의 장례 예식과도 관련이 있다. '알'에서 태어난 시조를 지닌 나라는 모두 한 민족 또는 동일 문화인 것인데 가야 연맹체의 첫번째 맹주국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은유는 그 통치집단이 북쪽(하늘)의 고조선에서 내려왔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고고학적 증거로는 김수로 금관가야의 무덤양식이 '나무곽무덤'이라는 점이다. 가야와 초기 신라의 한반도 남동부 무덤양식은 '수혈식돌널무덤'이었다. 금관가야를 제외한 다른 가야 소국(아라,고령,성산,대,소가야 등)들은 돌널무덤이었던 반면 금관가야만 나무곽무덤이었고 고구려와 같이 구리가마를 집에 걸어놓는 북방식 선진문화 또한 발견된다. '고조선인' 김수로 '통치배'의 금관가야는 이 선진문화에 힘입어 서기 3~4세기 지금의 대구와 상주까지 아우르는 가장 넓은 영역을 지배했고 금관가야 연맹체는 신라와 동등한 국력을 과시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가 고구려와 연합하였고 가야는 백제와 연합하는 이른바 '사국시대'가 전개되는데, 이 전선에 항상 등장하는 것이 '왜', 즉 '일본'이다. 백제-가야 연합세력은 조선해협을 건너 일본까지 장악했던 '해양성' 국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일본인들은 바다 건너 배를 타고 온 한반도인들을 '뿔이 달린 외국인(가야사람)', 즉 '쯔누가아라시또'라 불렀다.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왜'는 어디까지나 북규슈의 이또지마 반도 일대에 있던 가야계통 '왜'소국의 군사력이었다... 가야의 철이 '왜'와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광개토대왕)릉비의 '왜'가 기내지방 야마또 정권이 아니였다는 데 대해서는 구태여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다."
- 조희승, 같은책, '3장 : 경제와 문화'


가야연맹체는 3~4세기에 가장 전성기였는데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기 백제를 복속시키기 위해 남하하던 4세기 말 고구려-신라 연합과 백제-가야-왜 연합의 대전쟁 이후 패배한 금관가야는 신라에 복속되었고 5~6세기 가야 연맹체의 맹주국은 '고령대가야'가 되었다. 고령대가야 시기는 이미 고구려 선진문명과 직접 접했으므로 한반도 남부까지 개마무사 등 철기와 무기류, 전쟁장비 등은 고구려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는 이 당시 '왜'를 언급하고 있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기 위해 간첩질을 하던 19세기 말 '사또'라는 일제 장교가 광개토대왕릉비를 탁본해 가는데, '임나일본부'가 [일본서기]라는 무덤에서 좀비처럼 일어나는 계기다. 광개토대왕의 고구려와 신라에 의해 패퇴한 '왜'는 가야가 부산, 김해 등을 통해 바다 건너 일본 북규슈 땅에 건설한 소국(식민지)의 군사력이었으나, 동아시아를 장악하려는 일본 군국주의는 역으로 일본이 '철'을 얻기 위해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동남부에 진출하였고 이곳에 '임나(가야)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왜'는 이 '임나일본부'였다는 거다. 이것이 3세기 가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일본서기]의 허황된 주장이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국명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인 7세기(670년)에나 등장했고 '일본'을 연 이 야마또(대화) 정권은 당시 일본땅 조차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일본서기]는 8세기에 '일본' 천왕정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신화적으로 지어낸 시간 순서의 앞뒤도 안 맞는 그들만의 '정사'에 불과하다. 
'일본'도 없던 시절에 그들이 한반도를 점령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임나일본부가 남부조선에 있었다는 [일본서기]의 기사와 주장은...) 그 시기(5세기)에 벌써 서부 일본이 기내 야마또 정권에 의하여 통일되여 있었다는 판단에 기초한 그릇된 설이다. 5세기의 력사적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7세기 이후의 시점에서 임나에 갔다고 하는 기사를 곧 '조선의 임나(가야)로 갔다'고 속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면 어디에 있던 '가야(임나)'였던가. 그것은 '다사'가 본거지로 삼은 곳, 즉 기비의 '가야'였다...
그러므로 야마또 정권이 기비 지방의 '임나'에 인연이 있는 '다사'를 '임나국사', 즉 '미마나노구니노 미꼬또모찌'로 파견하였다고 보는 것이 어느모로 보아도 합리적이며 또 옳다."
- 조희승, 같은책, '4장 3절 : '임나일본부'의 정체'.


'임나'는 '가야'를 이르는 [일본서기]의 지명이다. 고대 한국어는 일본어처럼 받침이 없었다는데 '가야'를 뜻하는 다른 말인 '미마나'가 나중에 '임나'가 된 듯 하다. 부산과 김해를 중심으로 한 3세기 금관가야의 '해상력'은 바다를 건너 미지의 북규슈 섬 지역까지 진출하여 가야 '소국'들을 건설했고 5세기 한반도 대전쟁에서는 가야인들이 일본에 세웠던 소국들의 군대까지 총동원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였으며 6세기 고령대가야까지 해체된 후에는 가야 유민들이 일부는 백제로, 또 일부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까야마(기비) 지방에까지 '소국'들인 '임나(가야)'를 대거 건설했다. 고고학적으로는 가야와 동일한 그 지역의 '조선식 산성'이 증거가 되는데 일본의 '가야' 소국들은 산성을 축성할 정도의 '국력'과 동원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7세기 '왜'가 아닌 '일본'이 되려는 야마또 정권은 일본 통일전쟁에서 '가야계' 인사인 기비노가미쯔미찌 다사라는 자를 '임나국사(가야총독)'로 임명하여 일본 기비(오까야마) 지방에 '임나일본부'를 세우는데 그 지방을 장악하기 위한 야마또 정권의 '행정출장소'가 바로 7세기 '임나일본부'의 정체인 것이다. 
당시 일본 지역은 '구다라(백제)', '시라기(신라)', '미마나(임나/가라/아라/가야)' 등 한반도 중남부 '해양성' 국가들의 '식민지' 건설 각축장이었다. 그렇다고 '유사사학'처럼 우리 고대 국가들의 '제국성'이라든가 '고대 일본은 우리의 식민지였다'는 식의 보복성 주장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고대 문명의 확장은 대륙에서 전해졌을 것이고 아직 미지의 일본 섬 지방은 당연히 문명의 전파가 늦어졌을 것이며 조금이라도 먼저 '문명화'된 한반도의 고대 국가들이 이 '미지의 섬'으로 진출하여 선진문명을 '이식'하는 것은 인류 문명의 당연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식민성'을 주장하는 '제국주의'적 시각이 아닌 인류 보편역사의 관점에 보아야 한다.

요약하면, 7세기 전까지 '왜'에는 '일본'은 없었고, '임나일본부'는 7세기 이후 야마또(대화) 정권이 기비 지방에서 발전하던 신라('시라기') 소국들을 견제하고 해당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가야(임나/미마나)'계 사람들을 '총독' 비슷하게 임명하여 간접지배하던 '출장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임나일본부'의 정체다.

그리하여 남한 '식민사학'이 [일본서기]를 근거로 되뇌이는 '가야사'를 바로잡는 일은, '임나일본부'를 해체하고 그 정체를 밝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가야의 역사가 형체없이 된 것은 나라의 멸망이라는 비극적 사태가 빚어낸 후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삼국사기]를 엮은 김부식의 과오에 기인된다고 볼 수 있다. 김부식은 자기가 경주 김씨의 자손이라는 데로부터 신라를 중심으로 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력사를 편찬하였다... 김부식은 신라에 의해 통합된 가야를 [삼국사기]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마땅히 [사국사기]로 되여야 할 책이 [삼국사기]로 되고 말았다... '통일신라'라는 개념... 고구려 땅에 일떠선 발해의 력사를 서술하지 않고 후기신라만을 취급함으로써 '발해사'도 '가야사'처럼 말살되는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틈을 노려 가야 력사를 혹심하게 외곡(왜곡)해 나선 것이 약삭빠른 일본인들이였다. 그들은 빈구석으로 된 가야사의 자리에 일본 력사를 밀어넣었다. 그리하여 가야의 력사는 참혹히 란도질을 당하게 되였다."
- 조희승, 같은책, '4장 3절'.


***

1. [북한학계의 가야사(伽倻史) 연구], 조희승, 이덕일 해설, <도서출판 말>, 2020.
2.[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3. [삼국유사(三國遺事)], 일연,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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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국사기 1 - 두 천하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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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를 넘어서는 '오국사'의 지정학
- [오국사기(五國史記)], 이덕일 역사평설, <김영사>, 2002.


"고구려가 지녔던 '대륙성'과 백제와 왜국이 지녔던 '해양성'의 복원은 위기에 처한 우리 민족이 지향할 미래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대륙성'과 '해양성'을 복원하는 길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신라의 통일이란 장벽에 부딪친다.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신라는 너무 과한 값을 주고 샀으나 그 통일은 참 보잘 것 없는 통일이다. 청천강 이북을 가보지 못한 통일이다. 통일이 아니요, 분할이다'라고 한탄한 것처럼 신라의 통일은 우리 민족에게 고구려의 '대륙성'과 백제, 왜의 '해양성'을 사장시킨 역사이기 때문이다."
- [오국사기] 1권, '책머리에', 이덕일, <김영사>, 2002.


학창시절 한 번쯤 우리 삼국 중 신라가 아닌 고구려나 백제가 통일을 이루었다면 어떠했을까 공상해 보았을 것이다. 고등학생의 나는 고구려의 강역이 요동과 만주 일대였으므로 고구려가 통일국이 되었다면 우리의 영토도 더 넓어졌을 것이고 우리나라가 더욱 강대국이 되었을 것 같다고 우긴 적 있었으나 스무살 이후 역사의 '가정'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의 내 생각은 다시 시간을 되돌린데도 결과는 같다는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은 없으므로 서기 6~7세기로 되돌아간들 백제나 고구려나 썩은 내부 왕조체제로 인해 멸망하고, 가장 낙후된 정권이었으되 외교에 목숨걸었던 신라가 살아남는다는 사실은 변함없을 게다. 삼국 중 어느 정권이 존속했던들 역시 몇 백년 후 부패한 귀족체제로 인해 농민반란에 직면했을 것이고 말이다.

12세기 고려 시대 중기 '묘청의 난'을 진압한 당대 최고 지식인관료 김부식은 '왕명'을 받들어 [삼국사기]를 지었는데, 요동만주의 발해를 배제한 신라 중심 사관과 사대주의 사상에 기반했으되 현존하는 가장 '사실'에 기반한 제일 오래된 우리 자체 기록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에게는 역사투쟁의 주적이었고 어찌보면 이병도 무리의 근대 식민사학의 근원 같기도 하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이므로 역사적 사실의 근거가 될 수 밖에 없다. 아마도 고려왕조의 권위를 배경으로 유일한 '정사'가 되기 위해 참고했던 이전 왕조들의 기록들을 폐기시키지 않았을까 싶게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의 '정사'들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니 현존하는 당대 중국왕조들의 역사서와 일치한다면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비록 일부 주류사학자들로부터 '유사사학' 같다는 비난은 있으나, 우리 민족의 정신을 강조하며 식민사학을 극복하자는 민족사학의 뒤를 잇고 있는 재야사학자다. 서기 6~7세기 우리 역사를 '삼국'의 틀이 아닌 '오국'의 관점에서 2002년에 평가하고 해설한 [오국사기]는 그 제목에서부터 주류 [삼국사기]를 넘어선다.
[오국사기]는 '고구려-백제-신라-당-왜' 5국의 역사기록을 '사실'에 기반하여 소설형식으로 풀어냈다. 이십여 년 전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와 닮은 시도로 볼 수 있겠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시조 온조왕이 한성에 도읍한 것은 서기전 18년이었다. 그리고 사비성 함락이 의자왕 20년(660)이니 백제는 개국 678년만에 멸망한 것이었다.
한때 북쪽으로는 요하 서쪽을 차지해 요서군과 진평군을 설치할 정도로 흥성했던 왕국, 일본을 속국으로 삼았던 왕국, 한강 유역을 차지했던 백제왕국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갔다. 의자왕과 대성 8족으로 대표되는 지배층 사이의 격렬한 내분이 나라를 멸망하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오국사기] 3권, '제18장 사비성의 비극'.


[삼국사기]는 극복대상이지만, 역사적 사실 대부분에 있어서는 주요 참고문헌이다. 역사해석에 왜곡은 있을지라도 우리의 '정사'이기에 '기사'로서의 '사실성'까지 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6세기말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부터 시작하여  당나라 수립과 왜의 일본국 건설의 내용, 나-제 동맹의 해체와 복수를 꿈꾸는 신라의 국운을 건 외교, 고구려 내분 등이 드라마처럼 교차한다. 

망국의 군주 의자왕은 백제말기 부패한 귀족들과의 내부 권력투쟁에서 패배했기에 나-당 연합군에 대적할 수 없었다. 백제 민중들은 고구려의 대중국 전쟁의 성과를 들었기에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백제의 귀족들은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차라리 의자왕의 항복이 기득권 유지에 유리하다고까지 판단했단다. 전형적인 매국의 논리다. 치열한 백제 부흥운동을 벌이다가 당나라로 귀순하여 서방에서 공적을 세운 망국의 장수 흑치상지 이야기도 있고 백제왕 복위투쟁을 이어간 장수 복신과 승려 도침은 백제의 고도 부여 은산별신제의 주신으로도 모셔진다.  
'해양성' 강한 지정학적 '시파워(sea-power)' 국가 백제는 왜의 불교국가 건립을 도왔다는데 왜의 친백제 정권은 왕자 부여풍을 귀국시키고 지원군까지 파병하지만 결국 또 다시 부흥군의 내분으로 백제 부흥운동의 '지도부'는 와해되고 그 민중정신만 망국의 오랜 지역을 지키게 된다.


"보장왕은 이적에게 끌려 장안성으로 가야 했다... 뿐만 아니라 무려 20여만 명에 달하는 고구려 백성들도 장안으로 끌려가야 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멸망 때의 행정구역과 인구수를 '5부, 176성, 69만여 호'라고 적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3.5가구 중 한 명씩을 끌고 간 것이니 저항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끌고 간 셈이었다. 고구려 부흥운동을 철저히 차단하겠다는 당의 의도였다...
보장왕을 위시해 아들과 대신들은 이 헌전에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태종에게 사과해야 했다. 옛날 태종의 친정을 물리친 것이 큰 죄라는 사죄였다. 남건, 남산은 물론 오늘의 이 사태를 초래한 남생도 땅 속에 묻힌 태종의 시신에 절해야 했다. 668년 10월의 일이었다."
- [오국사기] 3권, '제22장 제국의 종언'.


고구려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며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중국을 가운데로 두고 볼 때 동북의 고구려 뿐 아니라 예전 북방의 흉노나 당시 서북의 돌궐 또한 '하늘(텡그리)'의 자식('천자')으로서 '가한(칸/한/선우)'이 있었으나 후대에 기록을 전하지 못했거나 중국 통일왕조에 의해 사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고구려는 주체적 국제외교를 통해 자국의 존재감과 역사를 남겼던 것이다.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하고 수나라 또한 정권 말기 농민반란으로 무너진 후 당나라가 국가의 기틀을 잡는 과정에서 당 태종 이세민은 서방의 돌궐을 제압한 자신감으로 동방의 고구려를 정복하여 진정한 '천자'가 되고자 하나 결국 실패한다. 당 태종 사후 신라의 김춘추가 아들을 동반하여 경주에서 중국 장안까지 가서 나-당 연합을 제안했을 때, 당 왕조의 참전은 이세민의 '설욕전'이었을 것이다.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국가의 명운을 걸고 고구려, 당의 강국과 동맹을 맺고자 한 건 백제에게 죽임을 당한 딸과 사위의 복수심 때문이었다는 평가를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어쨌든 김춘추의 복수심과 고국인 가야를 배신하면서까지 신라에서 승진하려던 김유신 가문의 결연한 파트너십은 결국 한반도 통일이라는 대업의 기초가 되었다.

정권 말기 부패한 귀족들을 진압하고 왕까지 갈아치운 '도교'적 대막리지 연개소문 사후 자식들의 내분은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 요인이겠으나, 민생은 살피지 못했을 무리한 상무정신은 내부의 적들을 제압하기 위함이었을 뿐 국제정세에는 무능력 자체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매도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은 분명, '영웅'적 기질을 선보이나 결국 민생을 돌보지 못하는 권력자는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대륙성'을 지향했던 '랜드파워(land-power)' 고구려는 결국 '하트랜드(heart-land)' 쟁탈전에서 거꾸러지고 말았다. 강대국들과의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패배했던 것이다.

무능한 고구려 '상무 정신'의 끝은 보장왕과 연개소문의 망할 놈의 자식들을 포함한  망국의 위정자들이 당 태종의 무덤까지 끌려가 '사죄'함으로써 죽은 이세민의 복수전으로 마무리되었다. 
또한 잊혀진 고구려의 강토는 요동만주에서 그 뒤를 이은 발해의 역사까지 지우면서 한반도 역사를 신라의 역사로 국한시키고 말았다. 
[삼국사기]의 가장 큰 과오가 또한 여기에 있다.


"427년에 통구(집안/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장수왕은 475년 3만 대군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 개로왕은 이 공격을 격퇴하지 못하고 수도였던 위례성, 지금의 서울을 함락당하고 만다.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한 백제 개로왕은 왕통을 잇기 위해 아들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키는데, [삼국사기]에는 이때 문주가 목협만치와 조미걸취라는 두 인물을 데리고 피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가 웅진까지 함락시킬지 모를 극한 상황에서 문주왕과 목협만치 사이에 일종의 역할분담이 이루어져 문주왕은 공주(웅진)를 사수하되 목협만치를 일본에 보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렇게 문주왕에 의해서 일본에 파견된 목협만치는 일본에 미리 와 있던 백제계 세력을 규합해 정권 장악에 나서게 된다."
- [오국사기] 2권, '제10장 태극전의 비극'.


왜는 고구려까지 멸망한 후인 670년 '일본'으로 국호를 고친다. 백제 부흥투쟁 파병도 실패하고 일본 본토에 백제식 산성을 증축하여 나-당 연합군에 대항한 농성에 들어가는데, 당시 왜국은 백제 이민자들의 정권인 '소아'가가 불교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토착종교 세력인 '물부'가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백제의 '식민정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왜에는 3세기 가야문화가 이식되었고 이후 '해양국가' 백제로부터 이식된 불교식 '아스카' 문화의 영향을 받은 정권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백제의 멸망으로 왜국은 진정한 독립단계에 이르러 '태양이 뜨는 근본'이라는 의미의 '일본'국이 된다. 그들의 대표적 역사서 [일본서기]는 '왜'가 아닌 '일본'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그들 최초의 기록이다.


"태종이 고려라는 말을 내뱉자 좌중은 갑자기 긴장했다. 사실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하는 한 아직 천하가 태종의 발 아래 들어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신하들은 고구려만큼은 잊고 싶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자신들만의 천하관을 갖고 있는 나라였다. 고구려는 자신들이 천하의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거란과 말갈 등을 속국으로 두었다.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도 다른 민족들처럼 중국의 천하관에 소속된 조공관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중국 남, 북조와 각기 외교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서로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수 양제가 여러 차례 쳐들어간 것도 그가 단순히 폭군이어서가 아니었다. 고구려를 정복하지 않고는 천하를 다스린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 태종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고구려를 정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천자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전쟁이 고구려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 [오국사기] 2권, '11장 생애의 마지막 과업'.


[오국사기]는 한반도와 요동의 당대 역사 외에도 수-당 교체기의 중국 역사라든가, 일본 천왕가의 권력투쟁 역사 또한 '외전' 형식이 아닌 주내용으로 전개시킨다. 수 문제와 양제, 당 고조 이연이나 수나라 말기 혁명가 양현감과 이밀, 당 태종 이세민 등도 [오국사기]의 엄연한 주인공으로 그들 중심의 사건 전개도 생생하다. 역사학자의 실증적 역사평설이므로 [수서], [신/구당서] 등 중국측 '정사'에 기초한 사실적 내용에 극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주인공' 이세민의 '생애 마지막 과업'인 고구려 정벌은 그가 죽어 땅에 묻힌 후에야 신라의 도움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신라의 문무왕은 재위 21년(681) 7월 초하룻날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를 보낸 임금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왕(무열왕/김춘추)을 따라 전쟁터를 전전하다 부왕 사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와 싸워 국체를 보존한 임금이었다...
그는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세계관을 터득한 임금이었다...
... 문무왕은 중국 삼국시대 오왕 손권의 북산 무덤과 위왕 조조의 서릉을 예로 들며 화려한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했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화장했다.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대당전쟁을 승리로 이끈 문무왕의 시신은 한줌 재가 되어 바람에 날려 출렁이는 동해에 흩뿌려졌다."
- [오국사기] 3권, '제23장 나당대전'.


이제 , '오국사'의 마지막 주인공 신라의 '남은 이야기'다.
신라와 관련된 이야기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차고 넘친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은 각각 <본기>와 <열전>의 하이라이트 같기도 한데, 신라는 [삼국사기]의 진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당연합군의 승리 후 신라의 당나라로부터 독립투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이 지금 한반도 남한에서의 '한-미 연합작전'처럼 당시의 강대국 당나라는 약소국 신라와의 연합작전에서 늘상 주도권 싸움을 걸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라가 역사에서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는 이런 반외세 해방투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라는 일반적인 평가에 덧붙여 저자 이덕일 박사는 김춘추의 아들이자 대당 투쟁을 승리로 이끈 마지막 '주인공' 문무왕의 유언으로 6세기 말부터 7세기 말까지 약 80여 년간의 장대한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복수심에 물불 안 가리는 아버지 김춘추와 성공욕에 불타는 김유신을 보며 냉철한 군주로 성장한 신라 제30대 문무왕 김법민은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들을 위로하고자 각 주현의 과세를 줄이고 군역을 줄였으며 불필요하고 번거로운 제도를 간소화하라는 유지를 남긴다. 그 중 가장 번거로웠을 국왕 본인의 장례 간소화를 위해 불교식 화장을 하고 동해바다에 묻혔다. 

우리가 익히 '동해바다의 용'이 되었다고 들어 온 '대왕암'이 그의 무덤이다.


***

1. [오국사기(五國史記)], 이덕일, <김영사>, 2002.
2.[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3. [삼국유사(三國遺事)], 일연,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1.
4. [지정학의 힘], 김동기, <아카넷>,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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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평화 - 삼국지 이전의 삼국지, 민간전래본
김영문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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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에서의 역사는 반복되는 '진실'이다.
-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20.


"중상에게 단단히 기억하게 하라. 한 고조는 세 공신을 배반했으니 세 공신이 한나라 천하를 나누어 갖게 하라. 한신에게는 중원을 나누어주어 조조가 되게 하고, 팽월에게는 촉 땅 서천(쓰촨성:서촉)을 나누어주어 유비가 되게 하고, 영포에게는 강동과 장사를 나누어주어 오왕 손권이 되게 하라. 한 고조는 헌제가 되게 하여 허창에 살게 하고, 여후는 헌제의 아내인 복황후가 되게 하라. 조조는 천시를 얻게 하여 헌제를 가두고 복황후를 죽여 복수하게 하라. 강동의 손권은 지리를 얻게 하여 많은 산과 강물로 보호받게 하라. 촉 땅의 유비는 인화를 얻게 하라. 유비는 관우와 장비의 용맹을 취하지만 전략을 세우는 사람이 없으니 괴통을 제주에 태어나게 하여 낭야군 사람이 되게 하라. 그의 성은 복성인 제갈, 이름은 량, 자는 공명, 호는 와룡 선생으로 불릴 것이다... 중상도 이승에 태어나서 복성 사마씨에 자는 중달을 쓰며 삼국을 병합하여 천하를 제패할 것이다."
- [삼국지평화], '상(上)편',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20.


후한 말기 황건 농민반란으로 촉발된 약 100여 년간 위, 촉, 오나라가 중국을 삼분하던 쟁패기를 거쳐 진(晉)나라가 다시 중국을 통일한 기록이 [삼국지]인데, 3세기 후반 진수가 정사 [삼국지]를 지었고 140년 후 남송의 배송지가 [삼국지]에 주를 달았다. 물론, 왕명을 받은 '정사' 기록 이전에 민간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먼저 있었을 것이며 각종 기록들은 그 뒤를 따랐을 것이다. '정사'를 쓴 진수 등의 관료학자들은 해당 이야기의 고증을 위해 관련 기록은 물론 민담 일체를 취재했을 것이다. 유목을 하던 몽골족이 중국 정착민 한족을 지배하던 원나라 지치 연간(1321~1323년)에는 당시 연극으로 전해오던 '삼국지' 이야기 대본이 간행되었는데, 이것이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다. 원나라 말기 핍박받던 중국 한(漢)족의 독립투쟁 과정은 유비의 '촉한정통론'의 사회적 배경이 되었고, '독립투사' 나관중은 170년 후인 1494년 명나라 시기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써 이 서사를 정리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 '삼국지'의 저본은 나관중이 한시와 함께 120회로 지어낸 [삼국지연의]를 청나라 때 모종강이 다시 편찬한 판본이다. 이 [연의] 또한 연극의 대본이었으나 이보다 170년 전, 아니 그 이전부터 민간에 이야기 형식으로 전해 내려오던 대본이 바로 [전상삼국지평화]인 것이다.


'전상((全相/像)'은 각 회별로 삽화가 있다는 의미이고, '평화(平話)'는 당시 이야기 공연 장르의 대본이라는 뜻이다. 글 모르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림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해주거나 연극을 하는 대본인 것이다. 65권의 '정사' [삼국지]나 120회의 [삼국지연의]에 비할 수 없이 분량은 짧으나 이야기 극으로는 길어서 짧은 단락을 한편의 그림과 함께 풀어냈을 것이며 그로 인해 사실 여부나 앞뒤 맥락이 맞지 않는 부분도 많았을 것이다. 요즘으로 보면 TV 앞에 모여 보는 연속극 만화 정도일 듯. 일관성도 팩트체크도 없이 '아무말 대잔치'도 가능했을 것이 수백년 전 당시 대다수 민중들은 글을 몰랐을 것이니 요즘 유투브 가짜뉴스 찍듯 흥미에 맞춰 이야기를 지어내고 부풀려서 확대재생산했을 것이고 '허구 70% 사실 30%('허칠실삼')'이라는 [연의]의 70% '뻥'의 근원이 아마도 이 [평화]일 것이다.


서두에 인용한 내용은 이른바 [삼국지평화]의 '서문'이자 일종의 '요약'이라 볼 수 있는데, 삼국을 평정하고 다시 통일한 '사마'씨 진나라의 '고조' 사마의(중달)가 후한 광무제의 부흥 시기에는 현세의 황제가 될 수 없으니 천제 앞에 불려가 저승의 판관이 되는 장면으로 [평화]는 시작하고 있다. [삼국지평화]의 서막은 바로 '초한지' 이후다. 
한고조 유방은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공신인 대장군 한신과 양왕 팽월, 구강왕 영포(경포)를 역모죄로 죽였다. 본인보다 강한 자는 '토사구팽'하는 고사의 유래다. 4백년 후 유방의 한나라가 망해갈 때 천제는 억울한 초한지 공신들을 부활시켜 한고조 유방의 땅을 찢어 갖게 한다는 것이며, 초한쟁패 당시 제왕 한신에게 유방(한)-항우(초)-한신(제)의 '천하삼분지계'를 유세한 괴통을 제갈량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윤회적 이야기다. '삼국지'의 서기 3세기는 중국에 불교가 공식 포교되기 전인데도 말이다.


사실 [삼국지연의]를 읽다보면 '초한지' 이야기와 비슷한 장면들이 적지 않다. 아마도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초한지' 내용과 진수의 [삼국지]에 담긴 '삼국지' 이야기가 섞이고 서로 교차하는 과정이었을 게다. 항우가 유방을 초대해 죽이려던 '홍문연'은 오나라 원수 주유가 유비를 죽이려던 '황학루' 연회로 반복되어 [삼국지평화]에 등장하나 당시 '황학루'는 존재하지도 않았단다. 도망치던 유방이 자식들을 수레 밖으로 밀어낸 것과 유비가 조운 앞에서 아들을 패대기친 것 등 사실과는 다르더라도 민중들에게 익숙한 이전 역사 이야기로 반복함으로써 극적 흥미를 높이고자 하는 내용이 [평화]에 자주 등장한다. 
민중들에게 이렇게 역사는 반복적으로 전해진다.


중국의 어느 지방에서는 유비나 관우가 아닌 장비를 최고의 영웅으로 친다는데, 이 또한 [삼국지평화]에서 유래한다. [연의]에서는 거의 철부지 같은 장비가 [평화]에서는 제갈량이 등장하기 전 모든 국면의 해결사로 등장하는 점이 인상깊다. 기실, '명분'의 유비, '맨주먹' 관우와 '도원결의' 후 이 보잘 것 없던 삼형제가 관군의 말단에 이르기 전 아마도 장비의 재산과 명성에 의지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삼국지평화]의 마지막 주인공은 아마도 '5호16국'을 연 흉노의 후예 '유연'일 수도 있다. 사실 고증이나 앞뒤 일관성 여부는 상관없이 '아무말 대잔치'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숨막히면서도 빠르게 흘러가고 어느새 마지막은 '사마'씨의 진나라가 '8왕의 난'으로 분열된 틈을 타서 '후한'을 다시 세운 흉노족 '유연'이 등장한다. 뜬금없을 수도 있으나 한나라 '유'씨 정통론을 강조하기 위한 민간인 대상 [평화]의 억지스런 장치이기도 하다. 한나라가 흉노 유화책으로 왕실 공녀들을 흉노 선우들에게 시집보냈으니 흉노의 외가가 한족이며 그러므로 흉노 후예 '유연'이 세운 '후한' 또는 '전조'가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결말이다. '오랑캐'를 배척하는 '중화'의 주류를 결국 '흉노'에서 찾음으로써 '촉한정통론' 자체가 허구임을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 증명하기도 한다. 

다수 민중들 사이에 구전되는 이야기의 역사는 반복되면서도 그 모순되는 이야기 속에 '진실'을 담고 있다 하겠다.


명나라 말기 '종산거사' 견위의 [원본 초한지(서한연의)]에 이어 [삼국지평화]를 번역한 역사전문번역가 김영문 선생께 경의를 표한다. 고증이나 일관성 맞추기의 부담없이 만화책 보듯 후딱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적당하다.

[삼국지평화]는 '삼국지'를 읽는 또 하나의 뜻깊은 방식이다.


***

1.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20.
2. [원본 초한지(서한연의)], 견위,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19.
3. [사기], 사마천,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
4. [삼국지], 진수,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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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발해고 - 최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 번역한 4권본
유득공 지음, 김종복 옮김 / 책과함께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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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고(渤海考)'를 읽다.
- [정본(正本) 발해고(渤海考)], 유득공, 김종복 옮김, <책과함께>, 2018.



"그러나 고려 500년간에 문인 학사들이 전혀 수습하지 않아 300년간 유명한 나라의 역사로 하여금 차가운 굴뚝과 잡초더미로 변하고 회오리바람에 사라져 그 자취가 있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 죄의 하나이다. 발해는 고구려의 유족인데도 동족의 나라가 성쇠흥망한 역사를 대하여 전혀 애석해 하는 사상도 없고 수습하려고 주의하지도 않았으니, 하물며 동족을 위하여 위기를 도와주는 의로운 행동조차 가졌겠는가. 이것이 그 죄의 하나이다. 발해의 강토는 고구려의 판도이므로 5천리 산하가 바로 우리 조상의 소유이니, 발해사에 의거하면 서쪽으로 거란에게 책망하여 돌려받고 북쪽으로 여진에게 책망하여 돌려받아 우리 강토를 잃지 않고 동양 세계에 일대 강국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거늘, 바로 고려의 문인 학사들이 이를 타인의 강토로 등한시하여 5경 15부의 빛나는 판도로 하여금 이역에 빠지게 하고 동남쪽 한 모퉁이로 축소되어 약소한 나라를 스스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그 죄의 하나이다."
- [황성신문], '<발해고>를 읽다', 1910.4.28. 논설.


1910년 '경술국치'의 해 4월 28일, [황성신문]의 '논설' 제목은 '<발해고>를 읽다'였다. 그 해 8월에는 이완용 등의 '을사5적' 매판관료들이 '한일합방 의정서'를 무단 날인했고 기어이 조선의 국권은 사라졌다. [황성신문]은 이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된 후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던 우리 일간지였다. 1910년 4월 위 논설 <[발해고]를 읽다>의 필자로 추정되는 일제강점기 민족사학자 박은식 선생은 경술년 그 해 임박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을 예상했으리라. 나라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건, 지금 '조선'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발해를 우리 역사로 포괄하지 못한 '고려 문인 학사들'로부터였다는 듯, "이역에 빠진" 발해를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나도 박은식 선생의 역사관에 심히 동조하기는 하나 국권침탈의 원인 중 주요인은 시대착오적 '대한제국'의 '왕권강화'로 본다. 전세계적 격동의 시기에 '제국'의 군사력도 없으면서 '이씨 왕조'만 지키려다 망한 것인데, 조선 후기 '개혁군주' 평가를 받는 정조도 이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조 대의 세계사는 인류 근대화의 시초인 프랑스 '대혁명'의 시기였다. 조선의 살 길을 나는, 이씨 '왕'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믿는다.

'개혁군주' 정조는 서얼 출신 지식인들을 대거 기용하는 '개혁'을 하긴 했다. 이들이 바로 '실학자'이자 '북학파'인 박지원의 제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인데 선대의 세종대왕 시기 '혁신'의 중심인 '집현전'을 모델로 한 정조의 '규장각'에서 수많은 서적과 사료들을 섭렵한 유득공(자는 혜보, 혜풍)이 1784년에 지은 역사서가 [발해고(渤海考)]다. 
결과적으로 유득공 자신이 '초판 서문'에서 밝혔듯, [발해고]는 참고사료의 부실함으로 인해 '세가-전-지' 등으로 발전하지 못한 미완의 역사 보고서(考)일 뿐, 비록 형식은 따랐으나 '기전체 정사기록'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 기록이며 그러므로 저자 본인은 "감히 역사가로 자처할 수 없다"고 하였다.


"...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차지하며 발해라 하였으니 이들이 '남북국'이다.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잘못된 일이다.
... 고려가 마침내 약소국이 되고 만 것은 발해의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탄식을 금할 수가 없구나!
... ([발해고]를) '세가, 전, 지'라 하지 않고 '고(考)'라고 한 것은 아직 역사서를 완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 또한 감히 역사가로 자처할 수 없다고 하겠다."
- [발해고], <초판 서문>, 유득공, 1784.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들은 조선왕조 내내 이어진 [동국통감]식 역사관에 반기를 들었다. 조선 역사관의 주류는 중국 사료들에 기반한 중화주의 역사관에 따라 '기자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 등 한반도 일대에 국한된 '신라' 중심인 고려 김부식 [삼국사기]의 전통이었다. 박지원을 필두로 실학자들은 한반도 이북의 '요동'에 눈길을 돌렸고 1784년에 우리 역사의 집대성인 [삼한총서]를 기획하는데 '통일신라'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하기 위해 [발해국기]를 싣는다. 이 [발해국기]가 바로 유득공의 [발해고] '초판'으로 추정된다. 

1784년 [발해고] '초판'은 저자가 <서문>에서 아쉬워 하듯, 고려가 발해의 10여만 유민들을 수용하면서 그들의 역사기록 등을 적극 수집하고 기록하지 않은 탓에 발해의 역사에 관한 사료가 없어 "문헌이 흩어져 없어진 지 몇백 년 뒤에 비록 편찬하고자 하지만 할 수가 없었다(<서문>)". 

대조영이 세운 발해국은 '주자감'이라는 국립교육기관도 있었고 '서경 압록부'를 통해 당나라, '남경 남해부'를 거쳐 신라, '동경 용원부'를 거점으로 하여 동해바다로 직접 일본과 외교를 했으며, 지배민족 고구려 유민 중심인 '중경'을 기준으로 '숙신(조선/여진)'을 관할하는 '상경', '예맥(조선/고구려)'의 '동경', '옥저'의 '남경', '고구려'의 '서경'을 비롯하여 '부여', '읍루', '말갈(솔빈/불녈/철리/월희)' 등의 요동 일대 여러 부족들을 '5경 15부 62주'로 분할통치했던 말 그대로 요동의 '제국'이었다. 그야말로 고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요동 제국'의 역사라 할 만 하다.

[발해고]는 고구려 무장 대걸걸중상(진국공)과 그 아들인 대조영(고왕)이 요동지역 일대 민족을 아우르며 발해를 건국한 이야기부터 중국의 산둥지방인 등주까지 공략한 대무예(무왕)과 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시호 기록 없음) 이후 발해 부흥을 도모한 대조영의 7대손 대연림('흥료왕') 등을 비롯한 그 왕족들의 기록인 <군고>, 신하들의 기록인 <신고>와 발해의 강역에 관한 기록인 <지리고>, 관직 기록 <직관고>, 국서 일부를 모은 <예문고>와 발해 멸망 이후 유민들이 웅집한 '정안국'에 관한 짧은 기록인 <정안국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서(記)'가 끝내 되지 못한 '역사보고서(考)'였으나, 유득공은 이후 오류가 많은 [발해고] '초판'을 세 차례 수정했는데, 중국이나 일본측 사료 참고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요동 일대를 답사한 후 특히 '5경 15부 62주'의 발해 강역에 관한 <지리고>를 대폭 수정했다. '초판'이 926년 발해를 멸한 거란 요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 <지리지>와 [신당서] <발해전>의 기록을 그대로 전재했다면, 이후 약 10여 년간 작업했을 '수정판'은 저자의 답사 등을 통한 지속된 노력으로 중국측 사료들의 오류들을 대폭 수정하고 있다.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한 후 고조선 유민들이 이주한 지역에서 본인들의 지명을 계속 사용했듯, 요나라가 발해를 멸한 후 발해 유민들을 대거 요동 일대로 이주시켰는데 역시 이주한 지역에서도 '동경 용원부', '상경 용천부', '중경 현덕부', '남경 남해부', '서경 압록부' 등의 '5경 15부'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고 그로 인해 발해 멸망 전후 지역에 관한 [요사]의 비정이 틀렸음을 수정하고 있다.

1784년 [발해고] '초판' 이후 1793년까지 세 차례의 '수정판'은 1791년 이덕무 등의 [소화총서] 기획에 수록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화총서] 기획 역시 박지원의 1784년 [삼한총서] 기획의 뜻을 이어받아 한반도와 요동의 서기 7~10세기를 '남북국사'로 정리하려던 것이었다. 그렇게 [발해고]는 [소화총서]에 수록됨으로써 비록 '역사서'는 아니지만 우리 역사에 '남북국' 시대를 최초로 도입한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다.

[발해고]가 수정되던 기간은 동시대 유럽의 프랑스 '대혁명'기(1789~1793)였다. 정치적으로 왕조를 타도하지 못한 '개혁군주' 시대였으나 역사적으로는 수백년 이어진 '삼국사-신라' 중심사관에 균열을 내고 '남북국' 시대를 연 우리 역사기록의 '혁명'이라 할 만하다.


***

- [정본(正本) 발해고(渤海考)], 유득공, 김종복 옮김, <책과함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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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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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생'이란 '개그'
- [로드(The Road)](2006), 코맥 매카시,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08.



"아팠죠, 그죠?
그래. 아팠어.
아빠는 정말로 용감해요?
중간 정도.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길에 뱉어냈다.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정말요?
아니. 귀담아 듣지 마라. 자, 가자."
- [로드], 코맥 매카시, 2006.


나는 자녀들과 '개그' 주고받기를 좋아한다. 일상을 진지하지 않게, 그러나 메시지가 남으면 좋은 그런 대화를 나는 '개그'라 보는데. 물론 아이들에게 '교훈'이 필요하다 판단되면 순식간에 진지모드 돌입하는 게 문제지만, '마지막 보호막'인 아버지라 어쩔 수 없다고 애들 의견은 상관없이 혼자 생각하고 말지만, 내가 내 아이들과 진짜로 하고 싶은 건 평생 '개그' 주고받다 가는 거다.

미국 소설가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1933~)의 소설 [로드(The Road)](2006)는 문명이 싸그리 파괴된 황무지에서 '남쪽'으로 길을 떠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작가는 현대 미국소설을 대표하며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계보를 잇는다고 하는데 역시, 왜 인류문명이 멸망했는지, 언제 어느 곳인지, 아들은 몇살인지 등은 굳이 친절하게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배경설명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그냥 화자 본인 얘기만 몽롱하게 이어간다. 읽다보면 꿈속 얘기인가 현실 묘사인가 모호하기도 하다.

"오늘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게 '가장 용감한 일'이라는 말은 소설 속 아빠가 아들에게 던진 '개그'만은 아니다. 인류문명은 전쟁이든 기후위기든 그 어떤 이유에선가 멸망했고, 대빙하기와 같은 시기를 맞아 인류는 멸종되고 있었으니 춥고 배고프고 무서운 밤을 이겨내고 아침에 눈을 뜬 것이 진정 '용감한 일'이 맞다. 몇 살인지 모르나 어린 아들에게는 그 '용감함' 조차 허락될지 모르지만 말이다.


"남자는 회색빛이 비치자마자 일어났다. 소년은 그냥 자게 놓아두고 길까지 걸어가 쭈그리고 앉아 남쪽 땅을 살폈다. 황폐하고, 고요하고, 신조차 없는 땅. 10월일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자신은 없었다. 날짜를 확인하지 않은지 몇 년은 되었다. 그들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한 번 더 겨울을 난다는 것은 죽음을 뜻했다."
- [로드], 코맥 매카시, 2006.


소설 초반에 그나마 가장 친절하게 묘사된 전체 소설의 배경설명이다. 나는 곧장 '황무지'를 떠올렸는데, 20세기초 영국시인 T.S.엘리엇을 비롯, 1980년대 미국영화 [매드맥스]와 1990년대 일본만화 [북두의권]의 배경인 풀 한포기 안 나는 누런 땅이었다. 이어 겨울을 연상하니 2010년대 한국영화 [설국열차]도 떠올랐으나 매카시의 [로드]는 2000년대 소설이니 [설국열차]보다 앞선다.

자본주의 체제위기인 전쟁과 내란, 착취와 약탈, 그리고 기후위기로 추정되는 문명파괴 후, [매드맥스]에는 '동쪽'을 찾아나선 사람들이 있고 이들을 돕는 '영웅' 맥스에게 특별한 방향은 없다. [북두의권]의 '세기말구세주' 켄시로도 마찬가지나 실은 전 여친 유리아가 그의 유일한 방향이다. [설국열차]의 혁명가 커티스는 열차 기관실이라는 명확한 현실적 목표가 있었지만 민수의 방향은 그 '현실'에 없는 열차 바깥이다. 
그런데 소설 [로드]의 '작은 영웅' 아빠의 목적지 '남쪽'은 무엇이었을까.

"소멸해가는 마지막 기독교군대([로드])"처럼 손바닥에서 사라지는 잿빛 눈송이를 보며 본인들의 존재도 소리소문 없이 소멸할 것을 알면서도 [로드]의 '남자'는 어린 '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스스로를 '남쪽'으로 "불을 옮기는 좋은 사람들([로드])"이라 부른다. '남자' 본인을 진정 그렇게 믿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언제 어디서든 우리들 '희망'의 상징인 어린 '아이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소설속 '남자'의 본심은 '아들'의 엄마이자 부인이었던 꿈속 '여자'를 따라 죽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아들'의 존재로 인해 그의 삶은 진부하지만, '절망'에서 '희망'으로 표현되는 역설법이자 반어법 자체가 된다. 이래서 '인생'이란 게 말로 참 표현하기 어렵게 된다.

소설의 끝은 자식을 둔 부모 입장에서 살짝 슬프다.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개그'를 날리며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을 수 있는 일상이 참으로 감사할 정도로. 이 또한 진부하지만. 멸종의 순간에도, 이제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거란 예감에도 '어린이'나 '청년'은 여전히 '희망'일 수 밖에 없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마저 없으면 인생은 그냥 '절망'이나 '죽음', "마지막 기독교군대"와 같은 비극적 '소멸'에 바로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생'이란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종의 '개그'다.


***

- [로드(The Road)](2006), 코맥 매카시,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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