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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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역사, '문명'의 역사
- [도시로 보는 유럽사], 백승종, <사우>, 2020.
-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교과서에 실린 공식적 종교개혁 이전에 보헤미아 사람 '얀 후스(Jan Hus)'가 있었으니, 그는 16세기에 일어난 모든 변화의 선구자였다. 후스가 활동한 시기는 15세기다... '후스파 운동'이라 불리는 이 흐름에는 한세기 뒤의 '루터파'가 친숙함을 느꼈을 '온건파'도 있었고, 급진적인 '타보르파'도 있었다. 후자('타보르파')는 모든 재화를 공유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려 한 '기독교 공산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 후스 시대와 루터 시대의 중요한 차이 하나는 인쇄기의 발전과 읽고 쓰는 능력의 증대였다."
- [유럽민중사], <2. 다른 종교개혁>, 윌리엄 펠츠, 2016.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은 흔히 마틴 루터(Martin Luther)로 대표된다. '면죄부'를 통해 세속적 부를 축적하던 부패한 교황청을 비판한 <95개조 반박문>의 파괴력은 성경의 인쇄와 대중화를 토대로 한다. 그런데 루터는 종교개혁을 넘어선 '사회개혁'은 부정했고 오히려 탄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대의 모순은 정치경제체제의 문제였지 결코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종교개혁'만으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없었다.

우리에게 14세기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있기는 하지만, 15세기 유럽의 구텐베르크 인쇄술 혁명은 16세기에 이르러 대중화되고 문자의 보급에 기여했으며 다수 민중들이 두루마리가 아닌 '책(코덱스)', 주로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자유의 도시' 체코 프라하 광장에 동상으로 서 있는 신학자 얀 후스(Jan Hus)는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한세기 앞선 15세기에 이미 타락한 '종교'를 너머 불평등한 '사회' 체제를 변혁하고자 했다. 그 결과 후스는 파문과 화형을 당하고 그의 정신을 이은 '후스파 운동'은 성경의 대중화라는 문명을 만나지 못한 채 기존 체제로부터 처절하게 말살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한세기 전 후스나 동시대 토머스 뮌처(Thomas Muntzer) 등에 비하면 '개혁성'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을 넘어서 '사회변혁'을 외쳤던 '혁명가'들을 기득권과 결탁하여 짓밟은 '보수반동성'으로 연명했다. 
현 체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구반동 세력과 거대양당 과두지배 동맹을 맺고 사회체제 변혁을 요구하는 소수 다양한 진보정치세력을 말살하는 지금 우리의 '민주당'과 같다.


역사학자 백승종 교수는 아테네와 로마, 스톡홀름과 콘스탄티노플, 프라하, 런던과 파리, 빈과 베를린 등 유럽의 유명 '도시'들을 답사한 기록을 토대로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유럽사'를 조망한다. [도시로 보는 유럽사](2020)를 통해 그 도시들에 직접 가보지는 못했어도 유럽 '문명'의 역사를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테네로부터 고대 도시국가의 발현을 보고 로마에서 도시 공화제를 벗어난 제국의 향기를 느끼며 바이킹의 후예들이 건설한 북유럽 복지국가의 힘을 발견한다. 보헤미안적 자유의 도시 프라하에서는 거대 제국들과 기득권에 맞선 '저항과 혁신'의 역사를 본다. 위에서 만난 얀 후스 뿐 아니라 천문학의 대가 튀코 브라헤(Tyge Brahe)와 그의 제자로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용한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는 얀 후스의 저항정신의 산실로서 16~17세기 당시 신앙의 자유가 존중되던 프라하였기에 가능했다.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하자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기독교도였던 그들은 이슬람의 지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천 년 동안 고이 간직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을 이탈리아에 전해주었다. 이로부터 새로운 문화운동인 르네상스가 일어나게 되었다. 유럽에 새 시대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 [도시로 보는 유럽사], <콘스탄티노플>, 백승종, 2020.


로마 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고 서로마가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무너진 후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중심으로 비잔틴 제국이 1천년 이상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독일 지질학자 리히트호펜이 명명한 '실크로드'를 잇는 '중간지대' 도시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철옹성'으로 불리던 콘스탄티노플은 15세기 중엽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초대형 대포를 앞세워 점령했고 기독교적 명칭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식 '이스탄불'로 명명되었으며 소피아 대성당은 모스크가 되었다. 동서양을 매개하던 학자와 지식인, 예술인들이 이슬람 술탄의 지배를 벗어나 오래전 몰락한 서로마 지역으로 몰려와 '르네상스'를 선도했다는 이야기와 오스만 투르크가 향신료 중개료를 인상하는 바람에 포르투갈 모험가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로 가는 항해로를 개척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 각 사실들의 인과관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무솔리니가 발호하던 시절, 그에게 끝까지 저항한 한 사람의 위대한 정치사상가가 있었다. 옥중에서 사망한 안토니오 그람시였다...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 '진지전(war of position)'... 마치 진지를 구축하여 전투를 벌이듯, 지식인들이 운동의 거점을 만들어서 대중의 세계관을 차츰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기득권층의 '헤게모니'를 대중이 장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되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보았던 것인데, 수긍할 만하지 않은가."
- [도시로 보는 유럽사], <로마>, 백승종, 2020.


고대 로마 제국의 발원지, 근대 '르네상스'의 지역이자, 현대 '파시즘'의 발상지 로마를 그곳 출신 천재작가 움베르트 에코는 '역사의 실험실'이라 불렀단다. 파시스트 무솔리니와 그에 끝까지 저항한 그람시, 로마 시조 로물루스-레무스의 '형제살육'의 역사와 '공화정'의 탈을 쓴 '로마 제국'의 역사는 유럽연합의 시대인 현재까지도 역동적인 유럽사를 관통한다. 케사르와 마키아벨리의 후예인 로마인들은 '제국'과 '군주제'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도 스스로가 '공화정'을 만들고 유지해 온 '자유 도시민'임을 잊지 않았다. 인류 최초로 '제국'이라는 체제를 만든 길가메시 키루스적이고 페르시안적 이슬람 지배로부터 '르네상스인들'이 탈주한 이유가 이 '자유 도시민'의 습성 때문 아니었을까.


"'30년 중국을 이해하려면 선전(深圳)을 보고 1,000년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베이징(北京)을 보고 3,000년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시안(西安)을 보라'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 중국의 굴기를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개혁개방 성과를 대변하는 선전 뿐 아니라 찬란한 역사를 구가했던 심장부를 아울러 살펴봐야 한다. 베이징과 시안 그리고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항저우(杭州), 난징(南京) 등 중국의 역대 도읍지는 중국 역사의 심장부다.
...
공간을 중심으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중국처럼 땅덩어리가 크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의 역사라면 더더욱 그렇다. 도읍지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공간으로 중국을 읽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도읍지에는 '중심'으로서 구심력이 작동하기 마련이다."
-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여는 글>, 이유진, 2018.


중국전문 연구자 이유진은 시안(서안), 뤄양(낙양), 카이펑(개봉), 항저우(항주), 난징(남경), 베이징(북경)의 '여섯 도읍지 이야기'로 중국사를 조망한 책,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2018)에서 '문명'의 중심지였던 각 왕조의 수도를 돌아보는 것을 '공간'을 통해 시간적 역사를 읽는 하나의 방식으로 채택한다.

시안(서안)은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아시아측 관문이었고 인류문명의 주요 발상지인 중앙아시아와 고대로부터 활발히 교류하던 통로였다. 전국시대를 끝내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진나라를 포함하여 시안은 서주와 전한, 남북조시대 서위와 북주를 이어 수,당을 거치며 고대의 화려한 교류문화를 꽃피웠다.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中)'이라 칭한 '중국(中國)'은 기원전 3천년경 주나라 2대 성왕의 명에 따라 주공이 뤄양(낙양)에 도읍을 정하며 "천하의 중심으로 사방에서 공물을 바치는 거리가 같다([사기], <주본기>)"고 한 것에서 유래한다. 뤄양이 있는 허난성은 지금까지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다. 뤄양은 동주, 후한, 삼국시대 조위, 남북조 북위, 5대10국 후량과 후당 등 시안에서 일단 망조가 든 제국이 부흥을 도모하기 위해 다시 개국할 때 선택한 중국인들의 '고향'과도 같다. 
고대에서 근세로 접어드는 과정이었던 5대10국의 난립시대에 카이펑(개봉)이 새 도읍지로 떠오르는데, 후진, 후한, 후주 등을 거쳐 터를 닦은 카이펑은 북송 시대에 세계적 무역도시로 발전한다. 콘스탄티노플 인구가 50만이던 10~11세기에 북송 카이펑의 인구는 150만 명이었단다. 당시 우리 고려의 개경도 약 40만의 인구였다는데 동아시아 일대의 번영을 추측해볼 수 있다. 카이펑은 지난 문명 위에 다른 문명이 계속 쌓인 결과 북송의 유적은 현재 카이펑 지하 10미터 아래 묻혀 있단다.
항저우(항주)는 거란과 여진, 몽골에 의해 아래로 쫓겨난 한족(漢族)의 남송이 오래전 춘추전국시대 남방 '오랑캐' 도시를 악비로 대표되는 중원 재탈환의 기지로 삼았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원나라 말기 농민반란군 세력들을 석권하고 '오왕'이 된 난징(남경)은 넓은 중원 통치를 위한 '남쪽 수도'로서 삼국시대 오, 5호16국시대 동진과 남북조시대 남조의 중심이었다. 물자가 풍부한 '강남'으로 불리며 사치와 향락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 중화민국의 수도가 된다.
베이징(북경)은 '남경'에 대비되는 '북쪽 수도'로서 몽골의 원나라로부터 명나라 영락제 이후와 청나라를 거치며 중국 근현대 왕조의 명멸을 지켜본 도시로서 지금까지 중국인들의 '도읍지'다.


'도시'를 중심으로 한 역사관은 '문명'의 역사관의 다른 이름이다. 
소규모로 흩어져 살던 인류가 정착을 하고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회운영 체제를 갖추게 되고 경계를 둘러친 '도시'. 
서양의 '도시(burg)'는 하나의 도시국가로서 '성안의 자유민(부르주아)'의 기원이 된 공간이었고, 아테네와 초기 로마와 같이 고대노예제 사회였음에도 '자유시민' 사상을 퍼뜨려 왔다. 한편, 동양의 '도시'는 '천자'를 참칭하는 권력자들이 점령하여 제국의 수도로 삼는 도읍지였고 우리를 비롯한 동양의 민중들은 오랜 기간 강도나 폭력배와 같은 '천자'의 노예들이었다. 물론 이 '천자'들은 왕조체제의 내부 모순이 불거지면서 반복된 혁명에 의해 타도되었고, '새로운 세상'이 아닌 다른 '천자'로 대체되어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의 기반은 사회 체제 변혁을 요구하던 대규모 민중반란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민중반란군의 최종 목표는 제국의 '수도'였고 그들이 파괴해야 했던 것은 낡은 체제라는 '문명'이었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문명'이란 '기술'의 전수로 본다. 제국이 멸망하고 다른 권력자가 들어서 사상과 종교나 철학이 바뀌고 체제가 바뀔지언정 여전히 '낫'이라는 기구는 들에서 곡식을 베고 있다는 얘기다. 
'문명'이 집중된 '도시'는 역사 속에서 스스로의 '문명'을 파괴하지만 다수 인류가 면면이 이어온 '문명'을 지속적으로 보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도시'의 역사는, 그 자체로 '문명'의 역사가 된다. 


***

1. [도시로 보는 유럽사], 백승종, <사우>, 2020.
2.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3. [유럽민중사 - 보통사람들이 만든 600년의 거대한 변화](2016), 윌리엄 펠츠,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18.
4. [로마제국 쇠망사](18세기), 에드워드 기번, 황건옮김, <까치>,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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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과 좌파 - 유럽에서 벌어진 논쟁 기본소득 총서 5
필리프 판 파레이스 외 지음, 안효상 옮김 / 박종철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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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인가, '보편복지'인가
- [기본소득과 좌파], 필리프 판 파레이스 외, 안효상 옮김, <박종철출판사>, 2020.



"'기본소득 대 복지국가'라는 허구적 대당 속에서는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1) 노동, 특히 고용 노동의 중심성 혹은 우선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어떤 복지국가를 지향하든 '완전고용'을 목표이자 기반으로 보고 있다는 점, 2) 기본소득은 예산이 너무 많이 드는 것에 비해 그 효과는 떨어진다는 점, 3) 기본소득을 실시할 경우 다른 사회보장제도를 몰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 [기본소득과 좌파], <역자후기 - 한국에서 벌어진 기본소득 논쟁(?)>, 안효상, 2020.


다음 대선에서 내 나름대로의 최대 쟁점 또는 이슈를 꼽는다면, 나는 '기본소득'이 될 것이라 본다. 지난 2017년 대선 과정에서 민주당 경선후보였던 이재명은 '기본소득'을 앞세웠고 현재까지 코로나 재난수당이나 성남시 청년수당 등을 '기본소득'과 무조건 연결시키고 있다. 정치인 '이재명' 하면 '기본소득'이 자동으로 연상되도록 완전히 이미지화시켰다. 그에게는 이미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물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2020년 총선에서 허경영 무리들이 내건 '국가배당금'과 동전의 양면이다.


'기본소득' 관련 논쟁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노동당대회에서 데니스 & 메이블 밀너 부부가 제안한 '국가보너스'로부터 시작한다. 전후 빈곤해결책으로 개인의 '삶과 자유를 유지'할 수 있는 현금수당을 '국가보너스'로 명명한 이 안건은 당대회에서 부결되었고 이후 '사회배당(social dividend)'이라는 이름으로 변호된다. 재원은 공기업이나 국유화 기업의 이윤으로 노동과 별개인 소비자에게 지급하는 것이었다. '기본소득'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미국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데모그랜트(demogrant)'라는 정책제안으로 다시 나타나는데, '민주주의(democracy)'와 '급여(grant)'의 합성어로서 매년 모든 미국시민들에게 각 1천 달러를 지급하는 '민주급여'가 그것이다. 미국 민주당 좌파의 이 제안은 결국 공약화되지는 못했다. 이후 1980년대 유럽의 급진좌파와 녹색당 등 대안세력들이 '기본소득(basic income)'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각국에 지부를 결성하면서 논쟁을 다시금 촉발하였는데, 2008년 세계 경제위기와 2020년 코로나 팬데믹 현상을 배경으로 더욱 논쟁이 필요한 대목에 이르렀다. '4차 산업혁명' 또한 그 주요한 배경이 된다.
'기본소득' 논쟁에서는 1) '노동'과 2) '국가재정', 3) '보편복지'가 주된 키워드다.


"기존 사회부조 계획안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에서 '무조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수당은 현금으로 지급되며, 사회보장 기여금의 사전 납부라는 조건부가 아니며, 해당 나라의 시민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기본소득은 세 가지 추가적인 의미에서 '무조건적'이다. '개별적'이다. 기본소득은 수급자의 가구 상황에 독립적이다. '보편적'이다. 기본소득 수급 자격은 다른 원천에서 나오는 소득의 수준에 의존하지 않는다. '의무 면제(duty-free)'다. 기본소득은 일하고 있거나 일할 의사가 있는 사람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 [기본소득과 좌파], <기본소득과 사회민주주의>, 필리프 판 파레이스, 2016.


기본소득 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이자 전 사회당원 안효상은 한국의 대표적 '기본소득론자'다. 체제 전환을 기획하는 주요 대안으로써 '기본소득'의 도입을 주장하는 그는 2014년부터 2017년 사이 유럽에서 진행된 '기본소득 논쟁'을 소개하면서 그 자신의 '기본소득론'을 '역자후기' 형식으로 싣고 있다. 번역은 직역수준인 듯 하며 읽을 때 잘 이해되지 않는 편인데 말 그대로 유럽 논쟁글들은 '소개' 수준이며 책의 주요내용은 '역자후기'에서 그가 하고 싶은 '기본소득론'이다. 원문의 엮은이 필리프 판 파레이스는 기본소득론자인 유럽의 대학교수로서 유럽에서 시작된 '기본소득'의 기본개념 등을 설명하면서 논쟁을 주도하고 있으며, 보 로트슈타인 교수, 빈센테 나바로 교수 등의 '사회적 유럽' 논자들은 '보편복지'와 '공공정책론'으로 기본소득에 반론을 펼친다.


기본소득은 '무조건성'과 '보편성', '개별성' 등이 특징이다. 즉, '조건없이 모든 개인에게 일정금액을 지급한다.' 단기적인 목적은 '빈곤'과 '불평등'의 완화이고, 장기적인 목표는 '체제 전환'이다. 재원은 공유재(commons)로부터의 초과이윤이든, '부유세'나 '누진세', '자본(금융)거래세'나 '기후세' 등의 누진적 세금이든 세부전략으로 다듬겠다는 것이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이 세부 방안에 대해서는 토론을 통해 수정될 수 있지만, 체제 전환의 '대안'으로서 '기본소득론'을 수정하거나 정정할 마음이 없다. 이는 '보편복지'를 사수하기 위한 '좌파'들도 마찬가지인데, 양자의 기본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논쟁은 있으되 토론은 불가능해 보인다. 루이 알튀세르가 말했듯, "철학적 토론(꼬뮈니까시옹)은 없다." 각자의 주장만 난무할 뿐이다.


"무조건기본소득 아이디어의 기본적 오류는 '무조건성'에 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계속해서 세금을 내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호혜성' 원리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공동선'에 생산적으로 기여한다. 복지국가의 주요 몸체는 이타주의가 아니라 '호혜성' 위에 세워졌다. 이 원리와 헤어지면 이러한 복지국가를 세운 광범위한 토대의 '사회연대'의 유형을 해체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 십중팔구다."
- [기본소득과 좌파], <무조건기본소득: 복지국가에 해로운 아이디어>, 보 로트슈타인, 2017.


안효상이 제목에서 언급한 기본소득 반대론자로서 '좌파'라는 용어는 거의 풍자에 가깝다. 급진좌파였던 본인이 주장하는 '기본소득'을 전통 사회민주주의 입장 또는 구좌파의 전통 혁명론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세력을 싸잡아 비난하기 위한 레토릭인 것이다. 
그가 보기에 '기본소득'과 '복지국가'의 대립은 허구인데, 사민주의 '좌파'는 1) 완전고용 달성을 전제로 한 '노동윤리'에 기반하고, 2) 재원 걱정을 하는 '국가재정균형론'에 머물러 있으며, 3) '기본소득'이 '복지'를 축소시킨다는 주장을 기본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체제 전환을 기획하는 진짜 '좌파'의 '기본소득론'에 의하면 1)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화로 인해 산업사회 '강제 임금노동'이 줄어들고 기본소득으로 인해 노동에 대한 구속이 완화되면 그것이 '노동해방'이고, 2) '재원'에 관한 전략은 얼마든지 생산적 토론을 통해 수정 및 조정이 가능하며 나아가 내가 보기에는 '현대화폐이론(MMT : Modern Money Theory)'처럼 '균형재정론'을 벗어날 수도 있겠으며, 3) '예산제약'에 관한 염려를 너머 진정한 체제 전환을 목표로 하는 '기본소득론'은 '보편복지' 축소로 갈 수 없다는 주장이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제국]에서부터 현재 [어셈블리]까지 '공통적인 것(공유재/commons)'을 '다중(대중)'이 공유하는 사회화 과정에서 '기본소득'을 '사회적 임금' 등의 형태로서 긍정적인 제안으로 본다.
한편 [21세기 자본]의 토마 피케티는 최근작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누진적 자본세' 등의 재원을 고민하지 않는 현실 우파 '사회토착주의자'들의 '기본소득론'은 무책임한 '포퓰리즘'에 다름 아니라고 평가한다. 
'완벽하게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FALC : Fully Automated Luxury Communism)'를 21세기에 선언하는 아론 바스타니는 '보편적기본소득(UBI : Universal Basic Income)'은 '역대 최대 규모의 재정이 들어간다는 사실 외 모든 게 불확실'하므로 주거와 의료 등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보편적기본복지(UBS : Universal Basic Service)'가 체제 전환의 바람직한 대안이라고 전망한다.
한편으로 '국가재정 거덜난다'는 '균형재정론'적 우려에 관해서는 누진적 자본(금융)거래세 등 피케티식 사후적 조치와 달리 자국통화로 화폐가 유통되는 한 국가는 지속적으로 지출할 수 있고 국가재정의 적자는 국민소득의 흑자가 되는 '탱고춤'이라는 랜덜 레이 식 '현대화폐이론(MMT)'도 참고할 만 하다. 단, '화폐'에 관한 전통적 '상품화폐론'과 MMT의 '명목화폐론'의 기본 전제 또한 '기본소득론'과 '복지국가론'에서 '노동'에 대한 본질적 관점의 차이 못지 않게 '철학적 토론'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MMT는 '완전고용'과 '소득 주도형' 이론이라는 점에서 '노동'에 친화적이라 '기본소득'의 국가재정 논쟁에서 고려할수 있는 하나의 전략적 이론이 될 수도 있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개별적' 이타주의가 아닌 '사회연대성'에 기반한 '호혜성'을 더욱 유지하고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득 불평등 감소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정치적'인 것이며, 다시 말하지만 이는 각국의 자본-노동 관계의 상태를 토대로 삼는다. 노동이 약한 나라에서는 불평등이 크다... 우리는 자본에서 얻는 소득이 노동에서 얻는 소득보다 훨씬 빨리 증가하고 있음을 보아왔다. 사실, 불평등의 주요 원인은 부의 집중이 어마어마하게 커진 것(소득을 낳은 재산)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각 개인이 동일한 액수를 받는) 보편기본소득을 토대로 불평등을 교정하는 것으로는 매우 불충분하다."
- [기본소득과 좌파], <보편기본소득이 빈곤이나 불평등을 줄이는 최선의 공적 개입이 아닌 이유>, 빈센테 나바로, 2016.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의 '혁신'과 일자리 감소는 자연사적이고 경제적인 논리로만 볼 수 없다. 이는 '정치적'인 영역에서 인간의 권리보장 차원으로 보호된다. 우리는 18~19세기 증기기관 산업혁명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권을 지속적으로 지키고 확장해온 '보편복지'의 '정치적' 경험을 가진 21세기 인류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화로 인한 무차별적 '노동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며, 끊임없이 노동을 하고 그로 인해 정체성을 지키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무조건적' 기본소득은 빈곤은 줄일 수 있을 지언정 자산(자본/금융)소득 격차가 갈수록 심화되는 현재의 불평등을 완화할 수도 없다.


'체제 전환'을 기획하는 '좌파'들 사이의 합치되지 않을 '철학적 토론'도 필요하겠지만, 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점은 이미 '시대정신'이 되고 있는 '보편복지'와 '기본소득'의 밥상에 극우파들이 숟가락을 얹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란 '상대'가 있는 투쟁이다. 당장 수구정당도 '기본소득' 공약을 내걸 것이고 다음 대선이나 총선 등 선거에서 정책화할 것이다. 수구정당은 한정된 국가재정을 이유로 '기본소득' 또는 '국민수당' 따위와 보편복지 제도를 함부로 맞바꾸려 할 것이며, '국가배당금'으로 최악의 우파 포퓰리즘을 시현했던 극우정당은 아예 더 나아가 모든 복지를 무력화하고 국가가 하나의 거대독점자본가처럼 국민들에게 임금수당을 지급하며 다수 민중들을 국가의 노예로 공공연하게 만들고자 할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하는 다수인 우리들이 해야할 일은 '국민임금수당'에 불과할 '나쁜 가짜 기본소득'을 가려내고 우리가 땀흘려 이룩한 우리의 기본권으로서의 '보편복지'를 굳게 지켜내는 것이다.

'보편복지' 제도에서 아우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각종 '수당'과 무조건적 '기본소득'은 다르다. '좌파적 기본소득'은 나중에 '정치적'으로도 우리의 노동을 더 이상 지킬 수 없을 때까지 잘 다듬고 있으면 어떤가.

지금은 설익은 '기본소득'보다는 우리 다수의 '노동'과 '기본권'에 기반한 '보편복지'를 지켜야 할 시기다.

***

1. [기본소득과 좌파 - 유럽에서 벌어진 논쟁], 필리프 판 파레이스 엮음, 안효상 옮김, <박종철출판사>, 2020.
2.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토마 피케티,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3. [어셈블리(Assembly)](2017),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4. [21세기 공산주의 선언 - FALC](2019), 아론 바스타니, 김민수/윤종은 옮김, <황소걸음>, 2020.
5. [균형재정론은 틀렸다 - 화폐의 비밀과 현대화폐이론(MMT)](2015), 랜덜 레이, 홍기빈 옮김, <책담>, 2017.
6. <좌파 기본소득, 우파 기본소득을 모두 반박한다>, 이상이, 2020.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020060811214851134?fbclid=IwAR2Z6tI73Eqz3X4HM90cDe9BD3IuCzOWdZy1ZUR8NPGmdpJin5H67_Wxdgg#0D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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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의 재발견 - 후루룩 맛보는 라면 연대기
김정현.한종수 지음 / 따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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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국수, '라면'
- [라면의 재발견], 김정현/한종수, <따비>, 2021.



"[동경몽화록]에는 '장사하는 사람 집에서는 식사 때마다 음식점에서 요리를 시켜 먹어서 집에서 반찬을 준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북방요리점, 남방요리점, 사천요리점처럼 지방색이 강한 음식점, 또는 기름에 튀긴 빵이나 북방민족의 요리 등 전문적 메뉴만 취급하는 음식점이 번창했다는 내용도 있다. 당시 카이펑(개봉/동경)에는 정점이라고 부르는 큰 음식점이 72곳이나 있었고, 그보다 작은 규모의 가게인 각점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즉 카이펑의 거리는 바쁜 이들을 위한 '외식의 천국'이었다.
이 외식의 핵심이 바로 '면'이었다.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식사 시간이 되면 몰려드는 손님들을 감당하기에 '국수'만큼 훌륭한 음식이 없었다. '국수'는 다른 재료와 함께 조리를 해도 모양이 변하지 않고, 미리 삶아놓았다가 살짝 데쳐서 국물을 붓고 고명만 얹어도 되는데다 다양한 재료와의 조화가 가능했다.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원했던 카이펑 시민에게도 후루룩 넘어가는 '국수'가 최적의 메뉴였다."
- [라면의 재발견], <1. 라면의 탄생>, 김정현/한종수.


우리의 주식은 쌀이다. 원래 쌀은 여름이 길지 않은 한반도보다 더 아랫쪽 기후에 어울린다는데 우리는 고대로부터 주식이 늘 부족했단다. 약 1만년 ~ 6천년 전 인류가 '농업혁명'을 이루었을 때, 인류도 큰 변화를 겪었지만 '밀'의 번식확장에 '사기당한 것'이라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말하는데, 인류의 주식 양대산맥은 '쌀'과 '밀'이다. 쌀은 알곡 그대로 먹을 수 있는데 그게 밥이다. 반면 밀은 그대로 먹을 수 없어 빻아서 먹어야 한다. 따라서 '제분(製粉)' 기술은 인류 문명에서 '불'의 발견 못지않게 음식사의 혁명이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 중앙아시아 지대가 '밀'의 고장이란다. 이를 중심으로 밀을 빻아 서쪽은 구워 먹었고 동쪽은 삶아 먹었다. 전자가 '빵'이고 후자는 '국수'다. '국수'는 가늘고 긴 면발이 연상되지만, 원래는 밀가루 반죽을 '면(麵/麪)'이라 했으며, 이를 가공한 음식재료 일체는 '병(餠)'이라 했다. 이동을 한 사람들은 이 '면'을 구워서 '빵떡'을 먹었고, 정착을 한 사람들은 삶아서 '국수'를 먹었다. 현재는 '면'이라 하면 '국수'를 이른다.


광고홍보학 김정현 교수와 역사저술가 한종수 선생은 [라면의 재발견]을 이 '국수'의 역사로부터 시작한다. 중국 후한시대 기록에서 '삭병' 즉 '새끼줄 모양 밀떡'이 동양 국수의 첫 기록으로 추정되며, 남북조 시대 '수인병' 즉 '물에 띄워 삶은 밀떡'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이탈리아 '파스타'는 폼페이 화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데 이 모두가 '국수'다. 이후 '제면(製麵)' 기술의 발전을 통해 10세기 이후 중국 북송시대부터 '국수'는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남송시대에 북송의 영화를 그린 맹원로의 [동경몽화록]에서 '동경'은 카이펑이며 이 때 이후로 중국인들은 국수를 먹기 위해 나무 숟가락을 놓고 젓가락을 들기 시작했다. 동양의 젓가락은 '국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당시 북송 수도 카이펑(개봉/동경)은 이미 인구 150만명의 '메트로시티'였다. 유럽 최대도시 콘스탄티노플이 50만, 런던이 10만에 불과할 때 이미 카이펑은 물자와 유통의 국제적 중심지였다. 5대10국 시대 후주의 세종 시영이 터를 닦았고 그 어린아들 공제로부터 '진교병변'을 통해 선양받아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이 발전시킨 도시 카이펑은 장택단의 <청명상하도>를 통해 후세에 그 번영의 면모를 보여준다는데 홍교라는 다리 위 즐비한 노점들에서 판 주종목이 바로 '국수'였으며 바쁜 도시에서 빨리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식품'의 원조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 '댜오쯔' 국물이 옛 도쿄의 '라멘' 국물과 꼭 닮은 맛이다. 도쿄 라멘은 가다랑어포로 국물을 우렸기에 가벼운 신맛이 있었다. 게다가 일본 간장은 중국 본래의 간장보다 신맛이 강하다. 그런데 이 신맛과 똑같은 신맛이 댜오쯔에도 있다. 돼지 내장에서 나는 신맛이다... 라멘에는 왜 챠슈라는 이름의 삶은 돼지고기가 들어가는 걸까? 삶은 돼지고기는 만주족의 간판음식이 아닌가? 어쩌면 라멘은 만주 둥베이(동북)에서 온 맛이 아닐까? 만주족이 만들어 먹던 요리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아닐까?"
- [혁명의 맛], <1. 중국요리란 무엇인가>, 가쓰미 요이치.


중국음식을 통해 중국의 혁명역사를 돌아보는 일본의 미술감정가 가쓰미 요이치는 우동에 버금가는 일본의 대표국수 '라멘'의 '원조'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하며 '중국요리란 무엇인가?' 묻는다. 문명은 교차하고 교환하므로 근거를 알 수 없는 음식의 '원조'를 파헤치기는 무망하다. 현지에 뿌리내린 음식의 근원을 찾았다 해도 그 형태는 다를 것인데, 1905년 인천의 화교반점 '공화춘'의 '짜장면'은 중국 화북의 '작장몐(炸醬麵)'과 다르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중국 고학생들을 먹이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는 '나가사키 잔퐁'은 중국의 '잡(탕)면'도 우리의 '짬뽕'과도 다르다. 
일본의 '라멘' 또한 중국 베이징 뒷골목의 돼지 내장 육수를 끼얹은 수제비 '댜오즈'와 비슷한 신맛이 난다지만 둘 사이 연관성은 알 수 없다고 한다.


"라면은 동아시아의 면 문화에 미국의 잉여 농산물이 합쳐져 만들어진 음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스턴트화하려는 대상이 왜 역사가 더 오래된 우동이 아니라 라멘이었을까? 여기에는 그의 출신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가 처음 개발한 '치킨라면'은 대만에서 많이 먹는 '계사면(기스면)'과 유사한 점이 있다."
- [라면의 재발견], <1>.


이제, '라면' 이야기다.
'라멘'이든 '라면'이든, 그 이름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면을 만드는 방식 중 수타면처럼 밀가루 반죽을 때려서 면을 뽑는 방식인 '납면(拉麵/라이몐)'이 그 출처일 수 있다는데, 참고로 칼국수처럼 반죽을 접어서 칼로 써는 것을 '수공면', 반죽덩어리를 어깨에 지고 칼로 쳐서 날리는 방식은 '도삭면'이라 한단다.

패전 후 일본의 경제침체와 식량난 속에서 대만 출신으로 일본에 귀화한 사업가 안도 모모후쿠가 원래부터 '패스트푸드'였던 국수를 더욱 즉석식품화한 '라면'으로 탄생시킨 게 1958년이었다. 우동은 원래 일본의 전통 국수라 변형이 어려웠을 테고, 가난한 도시노동자들이 노점에서 사먹던 '주카소바(중화국수)' 또는 정체불명 '라멘'을 개량한다. 면이 손상되지 않게 꼬불꼬불하게 뭉치고 면발에 구멍을 뚫어 튀겨서 급건조시키면 더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튀김면이 불면서 바로 즉석국수가 되는 방식인데 공업화의 영향으로 대량생산을 통해 상대적인 저가로 끼니를 해결하는 아이템이었다. 처음에는 맑은 닭국물 육수양념을 면에 같이 묻혀서 지금 컵라면처럼 그릇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익히는 방식이었단다. 역시 여러 기업들이 라면 상품화 경쟁에 뛰어들었고 은행원 출신 기업가 오쿠이 기요스미는 1962년에 '스프 별첨' 라면을 처음 개발했다. 우리 삼양식품 창립자 전중윤에게 라면 제조기술을 전수한 사람이 바로 '묘조식품'의 오쿠이 기요스미다.

강원도 김화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경성의 우체국에서 근무하던 전중윤은 원래 동방생명보험회사를 창립하고 제일생명 경영도 한 금융인이었단다. 어느날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람들이 줄서서 먹는 것을 보고는 6.25 내전 후의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결심했고 보험연수차 일본에서 먹어본 '라면'을 국내에 도입했다. 일본 최초 '치킨라면' 발명 5년 후인 1963년 우리의 10원짜리 '삼양라면'의 탄생이다. 

우리 최초 '삼양라면'은 스프는 별첨이었으나 용기에 담아 끓는 물을 부어 익히는 조리방식에 맑은 닭국물 육수였다는데 1974년생인 나는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삼양라면'을 라면의 '원조'로 알고 있다. 내가 처음 먹은 라면 맛은 처음부터 다 소고기 육수였고 모두 비슷했으니 어린 시절에는 '삼양라면'만 사 먹었다. 그러다가 막바로 라면 경쟁에 끼어들어 롯데공업으로부터 독립한 농심에서 나중에 발매한 '안성탕면'으로 갈아탄 이유는 안성탕면이 '생라면'으로는 제일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 집에 모이면 무조건 라면을 같이 끓여 먹었고 냄비에 코박고 서로 젓가락 싸움하며 먹던 라면이 내 인생 최고의 라면이었다. 친구랑 둘이서 라면 다섯개도 거뜬히 밥말아서 국물 한방울 안 남기고 먹던 시절이었다.


[라면의 재발견]은 국수와 라면의 '역사'를 주제로 한 책만은 아니다. 라면의 '재발견'인 이유는 미국의 밀가루 원조와 일본의 기술전수로 '자존심'은 상해도 먹고살아남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던 우리의 애잔한 역사와 그럼에도 '매운 맛'을 세계에 보여주려고 극강의 매운 라면을 만들고 먹어대는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리라. 먹을 것이 없어 식사 대체재로 물가통제를 받던 라면을 이제는 젊은이들의 유희음식으로 진화시킨 한국은 매년 한 사람이 75봉지를 먹어대는 단연 세계 최고 '라면 강국'이다.

한때 잠깐 '라면집'을 차리고도 싶었던 나는, 일 년에 200개는 먹는 것 같은데, 세상에 나보다 라면 잘 끓이는 사람은 많고 먹을 라면은 더 많다는 사실을 어느날 알게 되었고, 좋아한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새삼 깨닫게 해준 것도 내겐 '라면'이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의 국수, '라면'은,
내게도 참 고맙고도 정겹다.


***

1. [라면의 재발견], 김정현/한종수, <따비>, 2021.
2.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3. [혁명의 맛](2000), 가쓰미 요이치, 임정은 옮김, <교양인>, 2015.
4. [내 안의 역사], 전우용, <푸른역사>, 2019.
5. [라면에 관한 알쓸신잡 - 라면 인문학], 하창수, <달아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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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mount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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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동 크리스털 호수'의 추억 : 1990~1991

고등학교 입학한 1990년부터 학교 운동장 구석 철봉대 밑에서 친구들이 모였다. 각자 다른 중학교 친구들을 한 둘 데리고 나왔는데, 그 중에는 국민(초등)학교 동창들도 있었고 중학교 때는 말도 못 걸어본 친구도 있었으며 한 살 많은 재수생 형들도 있었다. 한창 성장기였을 고등학생이 되어 친구들도 새로 사귀고 싶었고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일대에서 서로서로 교차되는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시키는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오랜 친구, 생판 처음보는 건너 동네 휘경동 친구, 전라도에서 올라온 재수생 '형'들 포함 약 열댓 명이 방과 후 모여 놀았고, 1학년을 마친 겨울에 북한산을 오르며 조직을 출범시켰다. 이름하여, 경희고 '철봉파'다.

우리들은,
'노는 애들'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학교를 빠지지 않고 잘 다녔다. 그리고 조숙한 몇 명을 빼고는 부모님 말씀을 잘들어 술과 담배는 3학년 여름방학 또는 '백일주'까지 참았던 착한 학생들이 다수였다. 학교 끝나고 철봉대 밑에 모여 체력단련을 하다가 '스타워즈' 오락실에 마지못해 잠시 들렀더라도 오락은 조금만 하고 야자를 위해 다시 학교로 뛰어가던 어찌보면 '모범생' 무리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다수의 이런 '금욕주의'적이고도 '청교도'적인 성향에 반발한 조숙한 몇 명은 따로 더 친하게 모여 당구장 등으로 내뺐는데, 그래도 이 선진적 조직원들로 인해 스무살을 앞둔 나머지 '청교도'들은 술과 담배 및 당구 등을 빠르게 전수받을 수 있었다.

당시 우리들에게 토요일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천국 같은 시간이었는데, 평일의 모범적 삶을 벗고 고스톱과 포르노비디오 등을 아주 가끔 섭렵할 수 있었다. 대부분 넉넉치 못했던 우리들의 부모님들은 맞벌이가 많았고 토요일 방과후는 친구들 빈집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고스톱을 배우거나 비디오 시청을 했다. 하루는 고스톱 치다가 친구 형이 일찍 들어와서 노름판을 뒤집고 친구의 싸대기를 몇 번 돌려대기도 했다. 포르노비디오는 소문만큼 그리 많이 실물로 유통되지는 않았는데 비디오 플레이어 있는 빈집 친구 집에서 대부분은 천원 짜리 몇 장 모아 라면 사고 비디오 대여점에서 성인비디오를 빌려보기도 했다.

사실 금욕적인 우리들은 부끄러워서 '성인물'을 잘 빌리지도 못했다. 그래서 단골 단체관람물은 '공포영화'였다. 당시는 영화 쟝르 따윈 관심없었으나 보통 '슬래셔 무비(slasher movie)'로 일컬어지는 영화들은 모종의 '규칙'이 있었다. 섹스를 한 청소년들은 연쇄살인마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는 불문율. 우린 희대의 악마들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공포영화' 비디오를 빌린 이유는 '젖소부인 바람났네'나 '김밥부인 옆구리 터졌네' 등의 불후의 역작들을 차마 빌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난 추억한다.

1990~1992년 고등학교 시절의 토요일 오후 하면 가장 기억나는 건, 둘러앉아 끓여먹던 '삼양라면'과 '13일의 금요일'이다.

그리하여 나도 한 번,
"제이슨 얘기를 하겠다." ([13일의 금요일 2](1981) 대사 중)

영화 [13일의 금요일]은 미국 공포영화, '슬래셔 무비'의 대표작으로 1980년 감독 숀 커닝햄이 만들었다. '슬래셔 무비'는 그냥 무턱대고 막무가내로 패고 찌르고 베고 잘라서 사람을 죽이는 공포영화다. '13일의 금요일'이 제목이라 무슨 종교적이고 비의적이며 신비로운 메시지가 있을 거라 보면 실망한다. 예수가 십자가 못 박힌 날이 '13일의 금요일'이네, '13'이라는 숫자가 '악마'를 상징하네 어쩌네 하는 말들은 다 미신이고 종교와 1도 관계 없다. 그냥 불길한 기운 느껴지면 제이슨이 와서 칼이나 도끼로 팬다는 뜻이다. 이유는 알 필요 없다.

이유가 없다 했지만, 그래도 영화인데 스토리는 있어야겠다. [13일의 금요일]에 나오는 희생자들은 대부분 당시 우리들과 같은 청소년이었다. 우린 아직 애기였는데 미국애들은 이미 어른이었고 이성이랑 할 짓 못할 짓 다하고 있었으니, 눈으로 대리만족을 한 후 우린 걔들을 처단해 주는 제이슨 편이었다. 
그러나 제이슨은 어린 시절 선천적 기형으로 인해 '왕따'를 당했던 불우한 어린이었으며, 소풍가서 크리스털 호수에 빠졌으나 선생님들을 포함 아무도 구해주지 않아 익사하고 만다. 이후 불쌍한 제이슨의 친구 아닌 동창들은 아직 제이슨은 죽지 않고 밤에 돌아다닌다는 괴담을 퍼뜨렸고 제이슨의 엄마 파멜라는 이 괴담을 이용해서 제이슨을 죽게 만든 사람들을 하나씩 처단한다는 내용이 [13일의 금요일] 1편이다. 2편으로 이어지는 이후 이야기는 예상하다시피 실제로 죽지 않은 제이슨이 뭘 먹고 컸는지 영양과다의 체력으로 나타나 조숙한 남녀 불량청소년들에게 참교육을 실현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그 형식은 매우 끔찍하고 처참하므로 혈기왕성하고 방자하기 그지없었을 우리가 보기에도 당최 바람직하다 할 수는 없었다.

젊은 남녀의 섹스 장면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즈음에 우리는 제이슨의 등장에 더 치를 떨었는데, 어떤 상해를 입어도 계속 일어나는 그 불사신의 맷집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제이슨은 격투 게임의 캐릭터로 나와도 손색이 없었으나 '90년대 당시 우리가 동전을 쏟아붓던 오락실 아케이드 격투게임에서는 너무 최강이라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역시나 우리의 자식뻘 후배들의 게임 캐릭터로 등장했다는데, 인터넷이 활성화된 나중에야 알았지만 [13일의 금요일]은 미국에서는 영화는 물론 만화와 드라마, 게임 등으로 진화한 '상품'이었단다.

'슬래셔 무비' 또 하나의 공식은 다소 가련해 보이는 여주인공이 결국 지긋지긋한 제이슨을 무찌르고 살아남으면서 영화가 끝난다는 거다. 정신적으로만 교감하던 청순남녀 중 든든한 남자친구는 제이슨의 마지막 희생자가 되고 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다 떨어진 제이슨은 여주인공에게 항상 얼떨결에 응징당하는 마지막 엔딩의 무한반복인데, 제이슨은 팔이 잘리고 눈이 찔려도, 불에 타고 물에 빠져도 다음편에 다시 살아 돌아온다는 관객들의 믿고싶지 않은 예감을 항상 남긴다.

제이슨의 트레이드 마크는 아마도 2편인가 3편부터우연히 득템한 아이스하키 마스크일 게다. 아이스하키 전공 체육선생님께서 전파한 우리학교 체벌도구의 대명사 아이스하키채 덕분에 우리들은 그 스포츠 종목을 싫어했기에 제이슨의 마스크가 더 지겨웠던것 같기도 하다. 그외 어디서 주웠는지 모르는 큰 망나니칼과 주위에서 아무렇게나 주운 왕도끼 등은 제이슨의 빈손을 허전하지 않게 했던 것 같다.
아무튼, 본의 아니게 친구들과 섭렵하게 된 [13일의금요일] 이후로 [나이트메어] 등등의 경쟁작들도 일부 보기는 했으나 모든 것이 그렇듯 우리들의 '집단관람'은 어느새 시들해지고 지긋지긋하던 제이슨의 무한반복 환생쇼도 7편 정도를 끝으로 우리의 청소년기와 함께 사라져갔다. 나는 개인적으로 6편인가 7편에서 제이슨이 본인이 환생해 나왔던 크리스털 호수 밑바닥에 쇠사슬로 묶여 봉인되었을 때 '그동안 고생 많았을테니 이제 진정 안정을 취했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랬건 것 같다.

나중에 제이슨은 자본주의의 부름에 의해 다시 명부를 열고 지상으로 나와 [나이트메어]의 프레디와도 한 판붙기도 하고, 온라인게임에도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지만, 나와 우리 친구들은 이미 크리스털 호수를 떠난 후였다.

***

"30년지기 '철봉파' 친구들아, 사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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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 - 승자와 패자의 운명을 가른 역사의 한 장면
이현우 지음 / 어바웃어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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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역사', '역사의 전쟁'
-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 이현우, <어바웃어북>, 2018.



"그러나 정작 나라 이름인 '프랑스(France)'는 '문화'적인 단어보다는 상당히 호전적인 단어에서 비롯됐다. '프랑스'의 어원이 되는 '프랑크(Frank)'란 단어는 원래 '도끼'란 뜻의 '프란시스카(francisca)'에서 나왔는데, 이는 중세시대 전쟁터에서 살상용으로 던지던 '전투용 도끼'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 '도끼'를 주로 사용하던 종족을 '프랑크족'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오늘날 '프랑스'의 기반이 된 '프랑크' 왕국을 세운 민족이다."
-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 <1장>, 이현우.


서기 5세기 서로마 말기에는 이른바 '민족 대이동'으로 북쪽에서 '게르만'들이 따뜻하고 풍족한 남쪽으로 내려와 '용병'이 되어 점차 '제국'을 잠식했다. 이는 소규모 이동집단을 이루던 북방 민족들이 나름의 '사회발전단계'에 따라 정착과 농경을 주업으로 하게 되는 과정에서 더 중요한 건 인구가 급증하면서 발생한 것일 수 있고, 동쪽의 아시아 '제국'들에게 밀린 북방 '흉노' 등의 유목민족들에게 연쇄적으로 밀려 내려온 것일 수도 있겠다. '고트'족이든 '게르만'이든 아무튼 이 '프랑크'족이 로마에서 '용병'이 된 이유는 25년 '만기제대'하면 그 가족들이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부터 시조 로물루스 무리배들의 전쟁과 약탈을 통해 건국한 '군부정권' 로마의 전술은 전차는 물론 보병대형을 갖춘 조직형 전투였는데, 전차는 '직진' 밖에 모르는 약점이 있었고 보병 '진법'은 결국 원거리 공격전술에 무너지게 되었던지 북방에서 온 '프랑크'족의 '도끼'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것 같다. 로마는 물론 이슬람권 '제국'들의 전투규칙은 '야만인'들이 던지는 '도끼', 즉 '프랑크(frank)'로 인해 연이은 패배를 당했단다. 물론, 이 '프랑크'들도 아시아 북방에서 작은 말을 몰고 360도 활을 쏘던 유목민들의 기동력에 밀려 쫓겨 내려왔던 것이지만 말이다. '도끼'를 무수히 집어던져 보병대형을 무너뜨린 후 뛰어들어 칼과 도끼로 난자하는 이 방식은 아마도 더 원거리의 화포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강력한 '전술'이었겠지만, '문화'를 도입한 중세 유럽이 되면 '랜스(lance)'를 사용하는 '기사'의 비효율적 전술로 전환된다. 중세 유럽의 '기사'는 아시아 북방의 '철기병'과 달리 무거운 갑옷과 딸린 장비로 인한 기동력 '제로'였고 11세기 십자군 전쟁에서는 사라센의 기동력에 또 다시 무너진다. 물론, 이 모든 구닥다리 전술은 화약과 총의 도입으로 다 싹쓸이 당하겠지만 말이다. 
미술이 아닌 사학 전공자로 유럽 미술관을 다니면서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를 쓴 이현우 기자는 '프랑크'족의 이 '도끼'가 우리말로 '돌직구'라고도 하는데, 영어로 "Frankly speaking"은 "솔직히 말해서"로 남아 있다. 재미있는 대목이다.


"'랜스(lance)'는 원래 기병들이 들고 다니는 창을 일컫는 말이었다. 흔히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기사들의 마상 창 경기에서 말을 탄 기사들이 들고 나오는 기다란 창이 바로 '랜스'다... '프리랜서(free-lancer)'란 이 '랜스'에 소속되지 않은, 자기 혼자 왕이나 귀족과 일대일로 계약을 맺고 전쟁터에 나가는 '용병'을 일컫는 말이었다."
- 이현우, 같은책, <4장>.


'도끼(frank)'나 던지던 유럽인들이 기독교 이데올로기로 '문명화'된 중세는 '기사'의 시대였다. '랜스'라는 창과 갑옷으로 중무장한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튼튼한 중무장 말도 몇 마리에 시종도 몇 명 따랐으며 전투에서는 보병부대도 거느렸다. 지금으로 치면 '장교'나 지휘관일 텐데, '랜스'는 '소규모 부대'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기업'을 뜻하는 '컴퍼니(company)'의 어원이 이 '랜스'들을 모은 '용병 집단'이었다. 이 '기업(company)'들은 국왕이나 교황, 봉건영주들과 '자유 계약'을 맺고 '용병'인 '랜스'들을 보냈는데, 아마도 '기업'들이 서로 짜고 대충 전투 시늉만 내면서 고용자들로부터 '계약금'만 받고 '먹튀'도 했단다. 거대 기업들의 본질은 '경쟁'인 한편으로 '담합'이 될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 독점체제에서 최대로 강화된 이 '시장'에서 '경쟁'과 '담합'은 쌍둥이 형제다. 예나 지금이나 '자유 시장'은 허상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중세의 '컴퍼니'에서 독립하여 혼자 '계약'을 하던 '랜스'가 바로 '프리랜서(free-lancer)'다. [군주론]의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이 '사기꾼' 같은 '프리랜서'들을 경계하라고 '군주'에게 제안했다는데, 마키아벨리식 '군주'의 군사력은 '국민군' 또는 '민병대' 형식이었지 '귀족'적 '기사'들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프리랜서'들은 유럽의 첫 종교전쟁이었던 17세기 초 '30년 전쟁'에서까지 활약했다.  물론, 고용주들은 여전히 '사기'를 당했단다.

저자 이현우는 미술관에서 '전쟁의 역사'를 발견하고 그림들 속에 담긴 전쟁 관련 내용들의 역사를 엮어간다. 여성의 전유물인 코르셋과 스타킹은 군복을 입기 위해 고안된 남성의 착용물이었고 '허쉬 초콜릿'은 고대 '육포'와 같은 'D-레이션'이 시초이며 전쟁의 역사를 바꾼 '총'이 처음에는 장전시간이 오래 걸려 '칼'과 '창'에게 무참히 깨진 이야기 등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되는 '역사' 이야기다. [방구석 미술관]처럼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편한 방식도 있겠지만, '전쟁'이나 '음식'처럼 인류에게 친숙한 테마를 통해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동북아시아에 도착하기 전에 고추는 어떤 여정을 거쳤을까? 중국 책을 읽다보면 남아메리카에서 태평양을 가로질러 필리핀 해역에서 북상하여 타이완 건너편 취안저우에 위풍당당하게 다다르는 항해도를 이따금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추가 갓 전파되었을 시기에 이렇게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럽을 경유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다. 여하튼 중국, 한국, 일본이 고추가 마지막으로 전파된 지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 [혁명의 맛], <9. 고추와 쓰촨 요리의 탄생>, 가쓰미 요이치.


인류의 '문명'은 '불'의 사용에서 시작한다. 서양의 프로메테우스나 동양의 신농씨가 '불'을 전수했고 우리 '부여(불이)'족과 중근동 조로아스터 등이 '불'을 숭배했던 유사 이래 많은 것이 발전했지만 그 중 최고는 '음식'의 발전이다. '생식'을 한 후 나머지 시간 동안 '소화'를 시키느라 아무 것도 못했을 원시 인류는 '화식'을 통해 '소화'를 금방 끝내고 나머지 시간에 '노동'을 하여 문명을 건설했다는 미국 인류학자 리처드 랭엄의 분석은 설득력 있다. '음식'을 만들어 먹는 [요리 본능] 또한 역사를 이끄는 힘으로 '요리의 역사'도 '전쟁' 못지 않게 무시못할 역사의 주제다. 이 모든 것은 '과학'의 역사와 맞닿는다. 

일본의 미술감정가이자 요리평론가인 가쓰미 요이치는 중국 요리를 주제로 역사를 돌아보는데, 이 중 마오쩌뚱이 "매운 것을 먹지 않으면 혁명을 할 수 없다"고까지 말한 것처럼 한-중-일 아시아 삼국이 원래 매운 것을 먹어왔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 또한 '역사'다. 중남아메리카에서 나온 고추씨가 어떤 경로로 아시아에 유입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일본으로 유입된 '음식' 고추가 임진왜란 '전쟁'을 통해 조선에 들어왔을 수도 있고 유럽에서 인도까지 전파된 고추가 인접 지역 사천성(쓰촨)으로 도입되어 '사천 요리'가 매운 것일 수도 있다. 동아시아에 고추를 '전파'한 일본은 여전히 '매운' 맛을 모르니 앞으로 '역사의 매운 맛'을 보여주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아무튼, '음식'의 발전과 이동경로를 따라 '역사'를 살피는 것도 흥미로운데, '매운 혁명'을 했다는 중국의 '삼국지' 영웅들은 '매운' 맛을 몰랐으며, '작은 고추'를 뽐내며 신라면을 흡입하는 조선인들의 17세기 선배 실학자 [지봉유설] 이수광은 우리가 하루도 없이 못 사는 '고추'를 '독초'라 썼단다. 


"무용지물 전함이었던 '야마토'의 최후는 비참했다. 1945년 오키나와로 미군이 몰려오자 '야마토' 전함은 마지막 임무를 부여받았다. 오키나와 해안에 도달해 고정 포대 역할을 하며 장렬히 전사하라는 것이다. 패전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면목이 없으니 자살을 강요받은 셈이다. 적재된 연료도 오키나와까지 편도로 갈 만큼만 채워졌다고 한다... 전함 '야마토'는 일본을 비롯한 이른바 군국주의 전쟁광들의 페르소나일지도 모르겠다. 전쟁광들은 늘 대의를 위한 희생을 강요했고 강요당했다. 전함 '야마토'처럼 말이다."
- 이현우, 같은책, <2장>.


중학교 어린 시절에는 군부독재 '파시즘' 체제에 살아서 그런지, 2차 대전에서 독일의 '킹타이거' 전차와 일본의 '야마토' 전함, 항공모함 '아카기' 따위가 그렇게 멋져 보였다. 우리 '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기댈 곳 없던 '왜'가 '일본'이라는 국명을 채택하고 '독립'한 시기의 '야마토(大和)' 정권은 그들의 '근본'일텐데 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는 2차 대전 당시 군국주의 일본 GDP의 1%나 쏟아부은 전함이다. 그러나 너무 커서 기름만 많이 먹고 느리며 일본 최초 '3연장 주포'는 포신 사이 거리가 너무 가까워 표적도 못 맞출 뿐더러 발사된 포탄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아무도 몰랐단다. 결국 최고위층 연회장이자 호텔로 쓰이던 중 태평양 전쟁 최후 해전에서 총알받이를 하다가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도끼'를 던지며 '제국'을 후리던 '프랑크', 최고의 기사 '랜스'들을 조직하여 절대권력자들과 계약하던 '컴퍼니', 세계 최대의 '전함호텔 야마토' 등 '전쟁의 역사'. 지금부터 5세기 전까지만 해도 '독초'였던 고추 없이는 지금은 하루도 못 사는 우리 '음식의 역사'는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이 '역사'를 고정된 형태의 흥미거리로만 만난다면, 각자의 '역사'는 그 자체가 전쟁터다. 역사의 흥미로운 테마로서의 '전쟁'과 '음식' 등의 전장에서 '역사'를 이끌어 온 다수의 입장에 서서 그 경향성을 설정한 '역사의 전쟁'은 "원래 우리 역사는 이런 것"이라며 그 역사를 사유화하려는 소수 지배자들과의 싸움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1848.

***

1.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 이현우, <어바웃어북>, 2018.
2. [방구석 미술관], 조원재, <블랙피쉬>, 2018.
3. [요리 본능(Catching Fire)](2009), 리처드 랭엄, 조현욱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1.
4. [혁명의 맛](2009), 가쓰미 요이치, 임정은 옮김, <교양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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