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정치사상사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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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사의 '일이관지(一以貫之)'
- [중국정치사상사], 김영민, 2021.


"사회계통적 설명의 관점에서 보면,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는 순간에는 그러한 측정이 나름대로 유용할 수 있어도, '중국적'이라는 말은 결국 내용상 정확성을 결여한 말이다. '중국적'이라는 것의 본질은 없기 때문이다... '연속성'이란 서사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고, 서사란 선재하고 있는 어떤 것들을 베껴쓰는 것이 아니다. 적실성 있는 텍스트 상의 증거가 존재하면, 사상가들은 단순히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에 대해 형식적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다... 여기서 '일관성'이란 구분 가능한 일련의 주장들을 꿰어준다는 의미에서의 '일관성'이다."
- [중국정치사상사], <1. 서론>, 김영민, 2021.


현재 중국은 마르크스주의가 쇠퇴한 자리를 다시금 그들 나름 역사와 전통의 '중화(中華)'로 채우고 있다. 지금 중국은 실크로드와 해양무역로를 아우르는 '일대일로(一带一路)'라는 슬로건으로 유라시아 일대를 지배하고자 하며 더 나아가 세계를 감히 '덕치(德治)'하겠다고 한다. '인(仁)'을 중시한 공자의 후예들이라 온세계에 새삼 공표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던 자들이 '제국'으로 다시금 회귀하고 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2018) 등의 에세이와 [공부란 무엇인가](2020)를 비롯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김영민 교수의 글을 읽다가, 과연 '사상사 연구자'인 학자로서 이 분의 글은 어떨까 궁금해져서 [중국정치사상사](2021)를 읽었다. '장학금' 때문이라고는 해도 '동아시아 사상사' 전공자가 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전공서적'은 2017년 영문으로 저술된 책을 2021년에 내용을 증보하여 우리글로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김영민 교수는 [중국정치사상사]를 통해 '중국역사'라든지 '중국사상사'를 통사로 다루지는 않는다. 중국역사를 따라가되 그 '정치사상사'를 '계몽된 관습공동체(2장)', '정치사회(3장)', '국가(4장)', '귀족사회(5장)', '형이상학 공화국(6장)', '혼일천하통일(7장)', '독재(8장)', '시민사회(9장)', '제국(10장)' 등의 테마 별로 묶어 '정치사상'들이 드러내는 '연속성'을 추적하고 '중국적' 또는 '중화'라는 이데올로기를 '일관성(一貫性)'의 서사로 꿰뚫어내고자 한다. 중국인들의 스승인 공자의 말씀인 [논어]에 나오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의 방법론이다. 방대한 '중국사'나 '중국사상사'를 일일이 다룰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중국'을 넘어 인류의 '정치사상'을 분석하는 '일관성'이 무기다. 그래서, 다시 '철학' 이야기다.


"공자가 정치질서의 새로운 기초를 찾아나선 것은 바로 이러한 ('천명' 해체의) 역사적 맥락에서였다. 비록 하늘이 여전히 최상위의 권위로 남아있었지만, 그 하늘이 인간사에 직접 반응하리라고 공자는 더는 믿지 않았다. 그는 인간세계 내에서 정치질서의 대안적인 기초를 찾았다... 사실 공자 뿐 아니라 상당수 춘추시대 지식인들이 초인간적 존재가 갖는 정치적 적실성에 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다."
- [중국정치사상사], <2. 계몽된 관습공동체>, 김영민, 2021.


'중국통사'가 아니기에 저자는 '삼황오제'나 이 중국족보체계를 세운 사마천 [사기] 등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수천년 중국사가 아닌 약 3천년 정도의 역사로부터 사상사를 시작한다. 상(은)나라는 '귀신들로부터 선택받은' 부족이 세습하여 지배권력이 되었지만 상나라라는 '부족연합국가'를 멸망시키고 '봉건제'를 시작한 주나라는 유목민족이 섬기던 '텡그리' 또는 '하늘'을 대신하는 '천명(天命)' 사상을 앞세웠다. 이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천하(天下)'가 되었다. 주나라의 쇠퇴는 '천명'의 몰락이었고, 춘추시대는 "인간들이 신적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어떻게 공동체를 통제할 것인가?"(같은책, <2>)에 대한 의문의 시작이었다.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이와같은 집단적 질문이 '공자'가 나타난 배경이었다. 즉, 고대로부터 '유학(儒學)'이라는 사상은 종교와 같은 '유교'가 아닌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철학이었다. 중국의 '종교사'가 아닌 '정치사상사'가 '공자'의 유가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다. 한세기 이후 전국시대의 묵가는 평등주의 '겸애'를, 노자는 '무위'를 통해 선학인 춘추시대 공자를 비판했다지만, 춘추전국시대 그들 제자백가는 주나라 군주체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공자가 내세운 '예(禮)'는 일상생활의 '미시적' 영역까지 포괄하는 '관습'으로서 서로 말하지 않아도, 억압하거나 폭력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잘 돌아가는 일종의 '관습공동체'를 이상적으로 만들자는 사상이었고 그 주체들은 공부를 통해 '계몽'된 성인군자들이었다. 이러한 이상적인 '계몽된 관습공동체'에서 성인군주는 '무위(無爲)'로써 천하를 다스릴 수 있었는데, 공자가 이상화시킨 '주나라'는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이상향'의 구체화된 모델이었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에는 실현불가능했기에 더욱 이상적이었다.


"전국시대 사상가들은 기존질서의 자연적 기초를 의심하였다.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함께 어울려 살 새로운 기초를 찾아내겠다는 강렬한 욕망에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구상한 '정치사회'는 통치가 부재한 '자연상태'와 대비될 뿐 아니라... '관습공동체'와도 다르다."
- [중국정치사상사], <3. 정치사회>, 김영민, 2021.


역시 '중국통사'가 아니니 각 시대에 관한 고전적 정의 같은 건 생략한다. 춘추시대 공자를 비판한 전국시대 제자백가들은 '정치사회'에 관한 사상들을 생산했다. 거대한 '전쟁기계'로서의 강력한 군주국의 군국주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국가'라는 괴물 앞에서 '정치사상'은 '정치사회'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제각각의 답을 세상에 제출했다. 묵자는 '유용성'을, 순자는 '욕망의 조율된 충족'을, 노자는 '자유방임'을, 한비자는 '이기심'의 통제를, 장자는 극단적 관조를 통한 '상대성'을, 그리고 맹자는 공자를 계승하면서 '개인도덕의 완성'을 그 대책으로 내놓는다. 이들은 고대에 이미 '정치사회'를 이론화시키면서 견고해지기 시작한 '국가론'과 상호보완하는 동아시아적 '시민사회'의 기반을 닦는다.


"... 국가의 하향식 집행과 사회공학적 접근은 종종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논리적으로 계획되고, 통합되고, 중앙집권화된 행정체계는 현실에서 거의 실현되지 않는다."
- [중국정치사상사], <4. 국가>, 김영민, 2021.


'정치학'에서 '국가론(國家論/Theory of the state)'은 피해갈 수 없다. 
저자는 관념적인 '국가론' 대신, [중국정치사상사]에 등장했던 실제 국가들의 역사를 통해 '국가론'을 살핀다. '확장된 정주지 도시국가 연맹구조'였던 상나라와 '봉건제도'의 주나라, 춘추전국시대의 '전쟁기계'로서의 군주국들과 이를 통일한 진나라는 그 연장선으로 '폭력의 합법적 수단에 대한 독점' 체제였고, 초한전쟁의 승리자 유방의 한나라는 중앙집권과 '준봉건제도'가 혼합된 정치체제로 시작하여 한무제의 '중앙집권'으로 전환하였지만 북방의 강자 '흉노'로 인해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불안정한 국가체제에 불과했다. 즉, '흉노'를 포함한 북방 이민족이 있었기에 '한족' 또는 '중화'라는 이념의 국가가 존재할 수 있었다. 한무제 사후 흉노와 대결구도에서 촉발된 '염철론(鹽鐵論)'은 소금과 철에 대한 국가전매에 관한 논쟁으로서 강력한 '국가주의'와 분권적 '지방주의' 간 정치대결의 시작이었다. 이는 서한과 동한을 나눈 신나라 왕망과 송대의 왕안석 신법 논쟁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었다."(같은책, <4>)


"엘리트를 지칭하는 용어로 가장 많이 사용된 중국어는 '사(士/선비/젠트리)'이다... 왕조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중국사회가 전과 유사한 형태로 재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엘리트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 공화국' 비전은 당나라 귀족사회 비전과는 뚜렷이 다르다... '도학(道學)'은 '모든 사람이 본래 평등하다'는 급진적인 생각('性卽理')을 통해 위대한 조상을 자랑해대는 골수 세습귀족제를 거부하고 훨씬 더 평등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도학'에 따르면, 진정한 의미의 고귀함이란 오직 탁월한 사람됨이라는 면에서만 운위할 수 있다."
- [중국정치사상사], <6. 형이상학 공화국>, 김영민, 2021.


주자의 성리학이 조선 후기에는 신분질서를 '예학'으로 더욱 고착시켰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위진남북조와 당나라를 거쳐 견고해진 귀족사회에 대항하여 등장한 '도학(道學)'으로서 '성리학'은 '성즉리(性卽理)', 즉 인간의 본성은 평등하며 이를 잘 연마하면 누구나 우주만물을 관장하는 천리에 통달한다는 당대의 '평등주의' 사상이었다. 이 '도학자'들의 '형이상학 공화국'은 엄밀히 서양식 '공화주의'는 아니었으나 '군주제'를 견제하고 함께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사회' 또는 '시민사회'를 형성했고 이들 주체를 이르는 '신사(Gentry)' 또는 '선비(士)' 계층은 이후 '정치사상사'에서 '국가주의'와 대립하기도 하고 상호보완하기도 하는 분권적 지방주의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한족의 송나라와 명나라는 한족 통일국가를 표방했지만 주변국들에 둘러싸여 상대적으로 좁은 영토를 차지했고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민족의 요-금-원-청나라에 비해 배타적 문화를 영위했다. 남송과 명의 '도학' 또는 '성리학'이 편협한 이유가 달리 있었던 게 아니다. 그러나 저자가 쓰고 있듯, 역사의 '연속성'에서 사상사를 꿰뚫는 '일관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공자에서 제자백가 및 국가관료를 거쳐 '도학'으로 집중된 '평등주의'적 '엘리트'들은 '형이상학 공화국'이라는 '시민사회'적 성격으로 '국가주의'와 공존하며 '정치사회' 국가를 형성하고 발전시켰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중국의 정치체 및 그 사상적 기초를 지탱해 온 '통일성'이란 분절되고 갈등하는 다양한 요소간의 깨지기 쉬운 복합적인 균형상태이다. 명시적으로 역사적인 관점을 천명하는 이 책은, '통일성'이란 그처럼 아슬아슬한 균형상태에 불과하다는 점을 충분히 의식하면서 중국정치사상을 기술하고자 하였다... '중화'는 확정되어 있는 (물리적) 실제 혹은 구현태와 동일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픽션'에 가깝다. 따라서 그것은 '허구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 [중국정치사상사], <11. 보다 넓은 맥락에서의 중국>, 김영민, 2021.


중국왕조를 정의할 때, '독재' 또는 '전제주의'를 많이 빗댄다.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독재' 또는 '전제주의'라는 정의는 명태조 주원장의 '독재의 전형'으로서의 황제권 확립과정에는 맞는 말이었을지 몰라도(같은책, <8. 독재>), '혼일천하' 원나라 칸의 제국이나 청나라는 그러한 방식만으로 국가권력을 유지하지 않았다. 배타적인 한족주의 명나라는 '황제권'에 갖혀 안으로 문을 걸어잠갔고 다민족 지배체제인 청나라는 외부로 분권확장한 결과, 현재 중국의 영토를 확정한 청나라의 영토는 이전 왕조인 명나라의 2배가 되었다(같은책, <10. 제국>). 역사적으로 중국 역사에서 2/3 이상을 차지했던 다양한 이민족 정권들은 소수의 힘으로 방대한 '중국'의 영토와 문화를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굳이 직접 지배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 이민족의 국가들과 제국들은 공식적으로 중앙집권적 '국가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지방의 엘리트들을 통해 '천하'를 통치했고 스스로 '중국화'되었다. 몽골의 제국은 '중국'만이 목표가 아니었기에 오로지 '중국화'되지는 않은채 100년만에 북방으로 돌아갔고, 청나라 제국을 통해 비로소 '만주족'으로 정체성을 갖추었던 중국의 마지막 왕조는 근대 이후 세계사의 흐름에 따라 '공화정'으로 대체되었다. 태평천국과 같은 대규모 민란을 거치며 청나라 제국의 분권화는 가속되었고 19세기말 무술변법의 실패를 통해 '개혁'의 한계에 봉착한 '시민사회'는 20세기에 접어들어 아예 왕조를 뒤집어엎는 '혁명'의 길로 가게 된다(같은책, <10>).

여기서도 정치사상을 꿰뚫는 '일관성'으로서의 주테마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투쟁이자 변증법이었다. 세계사는 물론 중국사에서도 '국가론'의 주요 주제는 '국가'와 '시민사회'인 것이다.

결국, 동서양을 막론하는 이 '국가론'의 '일관성'에서 '아슬아슬'하고 '분절되고 갈등하는' 균형체제로서의 '중국정치사상'의 '통일성'은 설명될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균일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았던 '중국적'이라거나 '중화주의' 같은 사상은 그 자체로 '허구적'이지만 그래도 '비현실적'이지만은 않은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저자는 광범한 '정치사상사' 연구를 통해 입증하고자 한다. 

분명, 중국인들에게 '중화'를 지탱했던 '천명'이나 '천하' 개념은 저자의 말대로 그들의 주요한 역사적 정신자산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불안정한 '제국'의 전통이야말로 설령 그것이 현실적으로 나타난다 한들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이며 '픽션'이라는 사실을 주변의 인접국가인 우리로부터 다시금 인식시켜줄 시간일지 모른다. 
흉노가 없었으면 한나라 '중화'가 없었을 것이고, 고구려와 선비, 돌궐이 없었으면 당나라의 '중화'도 없었을지 모른다. 지금까지 잘 지켜온 한반도의 독립성 또한 '중화'의 '허구적 현실성'을 일깨워주는 계기 중 하나일지 누가 알겠는가.
이것이 동아시아 역사를 꿰뚫는 '일관성'일지 또한 누가 알겠는가.

'사상사 연구자' 김영민 교수는 [중국정치사상사]를 통해 보편적 '정치사상사' 일반을 꿰어낸 '일관성'의 철학으로, 언젠가는 [한국정치사상사] 연구서를 내겠다고 한다. 
에세이나 사회평론보다는 그의 다음 '전공서적'을 기대한다.

***

- [중국정치사상사](2017), 김영민, <사회평론아카데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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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공부란 무엇인가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전2권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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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 철학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사회주의와 같은 거대한 시도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전면적 파악이 가능하다는 대단한 믿음 위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실패는, 단순히 어떤 정치적 청사진이 몰락하는 사건을 넘어, 현실을 전면적으로 파악한다는 일이 많은 이들에게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다가오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산한 것은 현실이라기 보다는 현실을 냉정히 파악하고 기획하고자 하는 태도다...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관념론자가 되어야 하고, '살기 위해서는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반영웅으로서 영웅, 관념론자로서 유물론자, 죽은 자로서 살아있는 자 : 고스트 독>, 김영민, 2001.


인류는 어떠한 시련에 닥쳐도 꿈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덩치큰 다른 종에 밀려 밀림을 떠나 초원으로 나왔던 600만 년 전에는 먹고살기 위해 두 발로 서서 손을 사용했고, 어쩌다 얻어걸린 생고기를 소화시키느라 시간낭비를 하는 대신 '불'을 찾아 화식을 하고는 덩치큰 종들이 쫓아오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떴다. 70만년 전에는 직립 후 자유로워진 손으로 도구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노동'을 했으며, 1만년 전부터는 아예 다른 종들을 쫓아내고 떼거지로 모여 살았다. '공동체' 또는 '사회'의 시작이다. 이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말'과 '글'을 만든 인류는 자신들의 고난과 혁신과 미래를 '꿈'으로 만들어 대대로 전승해 왔다. 이를 통해 사람은 있는 것을 지키는 '보수'도 꿈꾸고, 조금씩 바꾸는 '개혁'도 꿈꾸며, 아예 뒤집어 엎는 '혁명'도 꿈꿔왔다. 
'적응'과 '혁신'이라는 양면성이 '사피엔스'의 생존비결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말'과 '글'을 통한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2018년에 '칼럼계의 아이돌'로 부상한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의 에세이집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2018)를 며칠전 추천받았을 때, '나는 에세이는 읽기 싫은데'라는 속마음과는 달리 "너무 잘 쓴 글이라 읽고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보다 나이가 많고 액면으로는 나보다 지혜로워 보이는 군대 후임 이재환 병장 형님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래도 '에세이'는 여전히 싫어서 같은 저자의 [공부란 무엇인가](2020)라는 제목의 아마도 '에세이'는 아닐 것 같아 보이는 책과 함께 구입했고, 잘난체 하려는 나는 [공부란 무엇인가]부터 펼쳐들었다. 

그랬더니 역시 '에세이'를 엮은 것 같은 [공부란 무엇인가]에 초반에 잠시 실망하며 서울대 교수면 교수지 대체 얼마나 공부를 했기에 "공부란 무엇인가?" 대놓고 묻는가 싶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짜 책을 많이 읽고 공부도 엄청나게 했을 이 '(정치)사상사 연구자'의 '무엇이란 무엇인가?'라는 일련의 질문은, 그 '무엇'을 '내가 잘 아니 이리와봐 알려줄게'가 아니라 이 세상이 그 '무엇'으로 부르는 '상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이었다. 200여 년 전 독일 철학자 헤겔이 "철학은 상식과 다르다"고 했듯이 시대의 사상가 김영민 교수 또한 우리가 '적응'해서 알고있는 '상식'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대놓고 제기하고 있었다. '공부란 무엇인가?', '추석이란 무엇인가?', '독서란 무엇인가?', 서평이란 무엇인가?'... 세상 모든 '상식'에 대한 그의 '철학'적 질문은 사피엔스의 역사만큼이나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아마도 아침 댓바람부터 '죽음'을 생각하라는 저자의 주장 또한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삶에 관한 또 하나의 철학적 질문을 하라는 권유였을 거다. '삶'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실존주의 철학일지 아니면 '죽음'이라는 '음'이 없다면 '삶'이라는 '양'도 없다는 서양의 헤겔식 '변증법'이나 동양의 도가적 '음양오행' 또는 유가적 '무극이태극'일지 모르지만 '죽음'을 '철학'적이고 근본적으로 사색하지 않으면 '삶' 또한 '상식'에 머물고 만다는 사상가의 깊은 통찰로 읽힌다. '죽음'이라는 미래로 가는 '삶'의 길에서 '상식'이라는 이름의 만물을 다시 돌아보는 작업은 그 '상식'들에 대한 끝없는 근본적 '질문'을 필요로 한다.

아마도 '혁명'이라는 거대한 현실의 정치적 기획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본 저자는 인간세상에서 "총체적이고 현실적인 비전으로 번역"하는 그 거대한 기획의 파산을 통해 산산히 흩어져가던 '상식'들에 주목하게 되었을 것이다. 1998년에 영화평론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한 작가이기도 한 저자는 2001년에 이미 <고스트 독>이라는 영화평론글에서부터 '죽음'을 전제로 한 '삶'에 관한 통찰을 썼다. 그리고 2015년에는 심지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도발로 이어가더니 이윽고 2018년 즈음에 이르러 "언제 결혼하니?"라고 묻는 당숙의 추석 안부말의 면전에다가 "당숙이란 무엇이며, 추석이란 무엇인가?" 대놓고 반문하라 권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언뜻 뜬금없어 보이는 이 질문들은 저자가 여러 번 표현하듯 답답하고 열받아 "테이블을 당수로 쪼개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목젖을 뽑아 줄넘기를 한 다음에 창문을 온몸으로 받아 깨면서 밖으로 뛰쳐나가기"라는 현실도피 대신에, 세상의 온갖 '상식'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그 근원에 대해 침착하게 반문하며 결국 세상을 조금씩이나마 새롭게 혁신하자는 위대한 '철학'의 길인 것이다.
더디고 돌아가기도 하며 간혹 진창에 빠지거나 제 얼굴에 침을 뱉을지도 모르는 이 질문의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그래도 인류답게, 사피엔스의 후예답게 품위를 지키려면 이 길 밖에 없다. 이것이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philosophy;哲學)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인문학(humanities;人文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인간'으로, 존재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침을 열면서 공동체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일단 실제로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이미 죽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부고는 늘 죽음보다 늦게 온다... 이러한 시절에 아침을 열 때는 공동체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첫째, 이미 죽어있다면 제때 문상을 할 수 있다. 둘째, 죽음이 오는 중이라면, 죽음과 대면하여 놀라지 않을 수 있다. 셋째, 죽음이 아직 오지 않는다면,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보다 성심껏 선택할 수 있다. 넷째, 정치인들이 말하는 가짜 희망에 농락당하지 않을 수 있다. 다섯째, 공포와 허무를 떨치기 위해 사람들이 과장된 행동에 나설 때, 상대적으로 침착할 수 있다. 그렇게 얻은 침착함을 가지고 혹시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과 이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는거다."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2015.


학자도 아니도 서울대학교 신입생은 더더욱 아니며 글쟁이는 아니지만 서평과 소설을 쓰고 싶은 나로서는, 김영민 선생이 묻고 알려주는 [공부란 무엇인가]에 대해 100퍼센터 응답하기는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름의 관심사를 쫓아 '독서란 무엇인가?'와 '서평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저자 나름의 답변의 문장들은 옮겨 적어봐야만 할 것 같다.


"사회로부터 도망하기 위해 책을 읽다가 거꾸로 소통을 위한 언어가 풍부해지는 역설이 독서행위에 있다."
- [공부란 무엇인가], <3-3. 정신의 날선 도끼를 찾기 위하여 - 독서란 무엇인가?>, 김영민, 2020.


원래 좀 튀고 싶고 잘난체 하고 싶었는데, 아쉽게 잘나지도 못하고 말도 잘 못한 내가 찾은 것이 '책'이었다. 독서를 하면 다른 걸 잊을 수 있었고 조금은 똑똑해진다고 착각도 되어 더욱 파고들었다. 나한테도 '역설'은 생겼다. 사람들을 만나 할 말이 많아졌고 심지어는 말할 기회를 안주면 남의 말을 끊고라도 내 말을 하고 싶어졌으며, 잘 쓰지는 못해도 '글쓰기'가 어느새 개인적 취미가 되어 버렸다. 다른 이들이 나를 보기에는 어떨는지 몰라도 나 스스로는 '소통'의 기제가 독서였고, 나 혼자 생각이지만 '언어도 풍부'해졌다. 저자가 말한 '독서'의 '역설'을 나는 200퍼센트 이상 동감한다.
있는 척 해보려고 두껍고 어려운 '고전'들을 읽으니 얇고 가벼운 책을 읽는 것은 저자의 말마따나 진짜로 '휴식'이 되었고, 어려운 책들을 읽어나가는 극복의 과정은 '자기갱신'의 '공부'라는 저자의 가르침도 실감했다.
나는 이제 '책'을 놓고는 어디에도 못 간다.

사실 나는 독서를 많이 하고 난 다음에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소질이 없어 그나마 읽은 책을 정리하면서 독후감을 써놓았고 혼자 '서평'이라 불렀다. 에릭 홉스봄이 지난 세기 역사를 서술하면서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돌아본 것처럼, 김영민 선생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책"에 대해 말하는 '서평'에 대해서도 '서평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하고 있다. 영화평론작가이기도 한 김영민 선생에 의하면 '서평'은 단순한 책의 요약이나 느낌을 남기는 '독후감'과는 달리 그 책이 전하고자 의도했든 아니든 그 '맥락'을 전달하기도 해야하고 더 나아가 해당 '서평' 나름의 '문체'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즉, '추천사'나 '출판비평' 달리 소개하려는 책과는 별개로 하나의 '작품'으로서 독립된 '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과는 별개로 '문학비평' 자체가 하나의 '작품'인 것처럼 말이다. 역시 영화 '제작자'가 아닌 영화 '평론가'다운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지력, 매력, 멍청함, 편견 등"을 드러내는 줄 알지만 '서평'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소설'은 못 쓰더라도 '작품'은 언젠가 쓰고 싶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비평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비평의 독자가 꼭 그 비평대상이 된 책의 저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책의 저자에게는 말조차 걸고싶지 않아도, 광의의 독자에게 말을 건내기 위해서 서평을 쓸 수도 있다... 서평은 서평의 대상이 된 책 뿐 아니라 서평자 자신의 지력, 매력, 멍청함, 편견 등를 대대적으로 홍보할 좋은 기회다."
- [공부란 무엇인가], <3-4. 하나의 전체로서 책에 대해 말하기 - 서평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2020.


'에세이'는 싫어하지만, '상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날리는 김영민 선생의 글을 읽은 후 결국 나는 저자의 의도든 아니든 걸려들고 말았다. '사상사 연구자'인 김영민 교수의 '본업'을 담은 글이 궁금해졌다. 
다음 책으로 그의 [중국정치사상사](2021)를 읽고 싶어진 거다.
초반 몇 장을 읽다가 졸음이 몰려와 '죽기 전에 꼭 다 읽어야지~' 하면서 중간에 덮은 20세기에 나온 E.K.헌트의 [경제사상사]가 책장에서 먼지만 덮어쓰고 있는데, 그 옆에 [정치사상사]가 한자리 더 차지하지 않을까 짐짓 염려가 되기도 하지만. 
그냥 눈감고 주문한다.

***

1.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어크로스>, 2018.
2. [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어크로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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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리더 조조 더봄 평전 시리즈 3
친타오 지음, 양성희 옮김 / 더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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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시대를 초월한 '난세의 영웅'
- [난세의 리더, 조조], 친타오, 2013.


"한나라 말기는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영웅호걸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 중에서 원소는 네 주를 근거로 하여 호시탐탐 노렸으며 강성함은 대적할 자가 없었다. 태조(조조/위무제)는 책략을 이용할 계획을 세워 천하를 편달하고, 신불해와 상앙의 치국 방법을 받아들이고, 한신과 백기의 기발한 책략을 사용하여 재능있는 자에게 관직을 주고, 사람마다 가진 재능을 잘 살려 자기의 감정을 자제하고 냉정한 계획에 따랐다. 옛날의 악행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마침내 국가의 큰일을 완전히 장악하고 대사업을 완성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오직 그의 명석한 책략이 가장 우수했던 덕분이다. 따라서 그는 '비범한 인물'이며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 [삼국지], <위서>, '무제기-評曰', 진수, 3세기.


'치세(治世)의 능신(能臣), 
난세(亂世)의 간웅(奸雄).'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에서 조조(曹操)를 평가한 문장이다. 주지하다시피 원말명초 시기에 몽골족의 압제에 맞서 중국 한(漢)족의 독립투쟁에 가담했다던 나관중은 고대 중국 한나라의 정통성을 복원하기 위해 '춘추필법'에 따라 한나라 유씨 왕조 후손을 자처했던 촉한의 유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따라서 유비의 최대 맞수 조조는 교활하고 간악한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오랫동안 우리에게 전해진 조조의 이미지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중국 4대 정사'인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중 가장 문장이 유려하다는 범엽의 [후한서]의 <허소전>은 후한말 당시 인물평의 대가였던 유학자 허소가 아직 관리가 되기 전의 부잣집 건달 조조의 협박에 못이겨 "그대는 태평한 시대에는 간적(奸賊), 혼란한 시대에는 영웅(英雄)이 될 것"이라고 내린 평을 조조가 듣고는 크게 웃으며 돌아갔다고 전한다. 사실의 기록은 [후한서]가 맞을 것인데, 유비의 주적인 조조를 폄훼하려는 [삼국지연의]는 손성이 쓴 [이동잡어]의 설을 채택하여 조조를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또는 간적'이라 전한다. 어쨌든 중국의 문호 루쉰이 "세상의 어떤 잣대로 평가해도 문무를 겸비한 '최소한의 영웅'이었다"고 평가한 조조는 이 '최소한의 영웅'이 되었으니 크게 웃으며 돌아간 것이다. 중국 역사가 이중톈이 [삼국지강의(品三国)]에서 말했듯 조조는 '최소한의 영웅(英雄)'이면 되었지, '간사하든(奸雄)' 아니면 '능력있든(能臣)'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위-촉-오 삼국 중 조조가 세운 위나라를 무너뜨리고는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서진(西晉)의 학자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는 위나라 무제 조조의 열전인 <위서-'무제기'> 말미에서 "평하여 말하기(評曰)"를 "비범한 인물이며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라 할 수 있다"고 남겼다. 

'간'이든 '능'이든 신경쓰지 않고 '최소한의 영웅'이면 족했을 난세의 '실용주의자' 조조가 여전히 '72개 가짜무덤(의총)' 중 어딘가에서 크게 웃고 있다.


"사실 조조가 태어날 때부터 난세의 간웅이었던 것은 아니다. 세상이 깨끗하고 공정했다면 그 역시 정상적으로 훌륭한 신하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조조의 인생은 그 자신이 선택한 결과였지만 모든 선택은 그에 합당한 배경이 있기 마련이다."
- [난세의 리더, 조조], <5. 삼기삼락>, 친타오, 2013.


2017년에 [노모자사마의(老謀子司馬懿)]를 통해 음흉하고 복잡다단한 인물 사마의를 후한말 난세가 낳은 극단적 '개인주의자'로 평가했던 중국의 법사학자 친타오는 이미 2013년에 [흑백조조(黑白曹操)]라는 책으로 조조를 '72가지 얼굴'을 지닌 '실용주의자'로 평가했다. 국역으로 '더봄' 출판사 '평전시리즈'로서 '평전 시리즈-1' [결국 이기는 사마의](2018)와 '평전 시리즈-3' [난세의 리더, 조조](2022)로 각각 출간되었다. 
참고로 여담이지만 '평전 시리즈-2'는 [제왕의 스승, 장량](위리, 김영문 옮김)인데 내가 좋아하는 인물 장자방의 흔치 않은 평전이라 나 개인적으로는 제일 재미있게 읽었다.

하긴 위나라 관리이자 조조의 후계자 조비의 참모였고 촉한의 명재상 제갈량을 이기고 결국 맞수 제갈량이 없어지자 내부로 칼을 돌려 자신이 섬기고 있던 위나라를 멸망시킨 사마의를 평가함에 있어 그의 대선배 조조를 빼놓을 수는 없다. 후한말 난세가 배출한 전형적 '개인주의자'였던 노련한(老謀子) 사마의(司馬懿)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를 없애고 사마씨 아들과 손자로 하여금 새나라를 세우도록 판을 깔았지만, 명목상으로는 삼국 중 위나라를 '계승'했다고 선전했다. 사마의가 평생 경외했던 유일한 존재가 바로 조조였기 때문이다. 조조의 가문이 한나라 유씨 왕조로부터 선양을 받았듯, 진나라의 사마씨 가문 또한 위나라의 조씨 왕조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후한말 극단의 '개인주의자' 사마의는 난세의 대선배인 극단의 '실용주의자' 조조를 유일하게 두려워 했다. 
불가능한 가정이겠지만, 조조와 사마의가 동년배였다면 승자는 조조였을지도 모른다. 

[조조 평전]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장쭤야오가 2000년도에 쓴 것이 있다. [난세의 리더, 조조]의 저자 친타오도 장쭤야오의 책을 참고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친타오는 장쭤야오처럼 장대한 정치경제학적 방식이 아닌 테마를 중심으로 한 대중적 서술로써 조조를 쫓아간다.

부잣집 환관 가문의 유협 건달(1장-난세의 악동)에서 15세 태학생 시절 겪은 '당고의 화'(2장)의 여파, 효렴이지만 환관 가문의 배경으로 출사한 벼슬직에서 세번이나 물러난 경력(5장-'3기3락'), 여백사 일가족 살인사건인 '착방조의 진실'(6장)은 물론 원소와의 건곤일척 '관도대전'(10장)과 황제를 등에 업고(8장) 시대의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12장-'명법의 치'와 13장-'인재 모집령')하며 결국 '선양' 형식이지만 본인 방식으로 '혁명'의 대업을 이룬 조조의 삶(15장-대단원의 막)을 조명한다. 

장쭤야오는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의 평가인 '법가'와 '병가'의 정치인 조조에 유학의 '천명'과 '성리'를 투과하여 결론적으로 '유가'로서의 조조를 평전한다. 그에 의하면 조조는 난세에 환관 가문 출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면서 본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정치에 적극 투신했지만, 한편으로는 민중들을 안정시키고자 권력을 쥐고 개혁을 실시한 정치인으로서 '성리'를 현실에 조화시키려 한 그 나름의 정치이력을 통해 결국 낡고 부패한 구체제를 뒤집고 새로운 왕조를 열어 '천명'을 실현한 현실 정치가였던 것이다. 물론 조조의 '천명'은 '인의예지' 같은 높은 덕목이 아니라 지극히 '실용주의'에 입각한 현실정치였는데, 유학이나 성리학의 특징은 신을 모시는 관념적인 종교의 영역보다는 사람을 우선으로 하는 현실정치를 중시한다는 지점이고 장쭤야오가 조조에게서 뜬금없이 '유가'적 측면을 끌어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조조는 한고조 유방이 초한전쟁를 시작하기 전의 '법삼장'에서 시작했지만 400년간 왕조가 이어지며 복잡하고 방대해진 한나라 법률을 단순화시킨 '명법의 치'를 세웠는데 사례마다 매번 새로운 규정이 신설되는 대신 일련의 포괄적인 규칙들이 서로 연결되어 신설법 없이 탄탄하게 돌아가게 만드는 이 방식은 이후 왕조 법령들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조조 자신도 젊은 시절 '평판'에 매달려 허소를 칼로 협박하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 환관 집안 유협건달을 멸시하던 유학자들에 대한 반발심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난관을 헤치고 '황제를 등에 업은' 최고 권력자가 된 조조는 세차례의 '인재 모집령'을 내려서 '평판'보다는 '능력' 중심의 인재를 중시한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하였는데, 실제로 이 인재 모집령으로 등용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원래부터 실시되어 왔던 조조의 인재 모집 원칙을 더욱 공고히 밝히기 위한 반복적 선언에 불과했다. 후한말 인재들 출사의 원칙을 가문이나 허울좋은 평판이 아닌 '실용'적인 '능력'에 두었던 것이다. 뜬구름 잡는 '현학'이 사상계를 지배하며 허위적 풍류를 쫓던 후대 '위진풍도(위진풍류)'의 유래는 후한말의 이 난세였는데 당시는 유학이 장려하던 '충효'의 덕목을 지키기 위해 사기는 물론 복수와 살인까지도 불사하던 행태가 만연했다고 한다. 조조 또한 이러한 시대가 낳은 아들이었지만 그의 '비범함'은 시대에 편승하기보다는 이를 극복하고 혁신하려는 노력에서 나온다. 후한말 난세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조조가 다양한 '능력'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용인술(用人術)'의 대가였다는 평가는 보편적이다.

물론, 조조가 펼친 이 난세의 '용인술'이 치세에도 맞았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난세의 영웅'(허소)일지 '난세의 간웅'(손성/나관중)일지 알 수 없는 '72가지 얼굴'의 조조가 '치세의 간적'(허소)일지 '치세의 능신'(손성/나관중)일지 어찌 알겠는가.


"72기 의총은 사실이 아니지만, 조조에게는 72가지 얼굴이 있다."
- [난세의 리더, 조조], <16. 사후 미스터리>, 친타오, 2013.


아무튼 이토록 난세의 최강 능력자인 '실용주의자' 조조에 대해서는 그가 죽은지 1,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갖가지 평가가 난무한다. 그래서 저자 친타오는 조조의 흑색에서 백색까지 조명한다는 의미에서 짧은 평전의 제목를 [흑백조조]로 하였을까. 결국 "매우 다양하다"는 진부하면서도 불가피한 결론이지만, 선배 역사학자 장쭤야오처럼 고전적이며 전형적인 방식의 통시적 평전이 아닌 테마를 중심으로 한 어느정도 공시적이고 간략하며 그로 인해 더욱 대중적인 평전을 시도한다. 

난세에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조조가 사후 무덤이 파헤쳐질 것을 우려하여 '72개의 가짜무덤(의총)'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실용주의자' 조조는 소박한 무덤을 지정하고 장례도 간소하게 하며 금은보화를 부장물로 무덤에 묻지 말라고 유언했다. 후한말과 삼국시대의 허위의식은 수많은 재화들을 경쟁적으로 시신과 함께 순장시키면서 실물경제를 바닥치게 만들 정도였다고 하니 '비범한 인물'이자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며 시대의 경세가였던 조조가 이에 편승했겠는가. 

"내가 천하를 버리는 한이 있어도 천하가 나를 버리게 하지는 않겠다"는 하지도 않은 말로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하고, "죽어도 남의 손에 내 목숨을 맡기지 않겠다"며 당대의 명의 화타까지도 죽인 의심의 달인이었으며, 있지도 않은 '72기 의총'으로 교활함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지만, 욕을 먹든 말든 '72가지 얼굴'의 '실용주의자' 영웅 조조는 죽는 순간까지 시대를 바꾸고자 했던 것이다.

'3의 배수'인 '72가지'는 '36계'와 같은 논리로 '무한대'를 의미한다. 중국에서 '3'은 완벽의 수 단위로서 '3의 배수'는 서로 교차하고 조합하며 무한한 형태로 나타난다. '36계'는 무한한 전략과 전술의 조합이고, 서유기 손오공의 '72가지 도술'은 그 자체로 셀 수 없다는 뜻이다. 조조의 '72기 의총(가짜무덤)'은 그 설 자체가 가짜지만 조조의 '72가지 얼굴'은 이 난세의 '실용주의자' 영웅이 지닌 '무한대'의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다.

***

1. [난세의 리더, 조조](2013), 친타오, 양성희 옮김, <더봄>, 2022.
2. [삼국지 - 위서](3세기), 진수,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
3. [조조 평전](2000), 장쭤야오, 남종진 옮김, <민음사>, 2010.
4. [삼국지강의(品三国)](2006), 이중텐, 김성배/양휘웅 옮김, <김영사>, 2007.
5. [결국 이기는, 사마의](2017), 친타오, 박소정 옮김, <더봄>, 2018.
6.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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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개정판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만권당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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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史必歸正) : 한국 '고대사'는 '현대사'다
- [우리 안의 식민사관], 이덕일, 2018.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이덕일, 2009.


"조선총독부 사관과 독립운동가 사관 사이의 최전선은 늘 한국 고대사였다. 한국 고대사는 나라를 빼앗긴 10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늘 이 자리의 현대사였다. '사관(史觀)'이란 말에 볼 '관(觀)' 자가 붙는 이유는 역사를 보는데는 관점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고대사나 현대사나 일정해야 한다. 고대사는 지배층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현대사는 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에게 사관(史觀)이란 용어를 써서는 안된다...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고대사'는 지금 이 자리의 '현대사'라는 사실... '고대사는 고대사 전공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은 조선총독부 사관을 영원히 유지시켜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 [우리 안의 식민사관], <4. 한국 고대사는 늘 현대사였다>, 이덕일, 2018.


수년 전 잡지에서 '실증주의'를 앞세운 젊은 역사학자들이 '유사' 역사학을 비판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역시 모든 학문(學問)에는 반드시 '철학(哲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했었다. '유물'과 '답사'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그들의 '실증주의'는 역사를 '과학'으로 재정립하고 싶었겠지만, 시대와 역사에 관한 통찰이 없는 한 '역사' 또한 진정한 '과학'이 될 수 없다. 사회분석과 예측이 틀리기만 하는 '경제학'이라는 '과학'이 시대 전반을 통찰하는 '정치경제학'의 사회과학을 넘어설 수 없는 이유와도 같다. 젊은 '실증주의' 사학 전문가들은 '고대사 전공자'로서 해방 후 선배 강단 식민사학자들이 전가의 보도로 여기던 유적과 유물을 '실증적'으로 재확인하는 자들에 불과했다.

역사학자는 1차 사료들을 바탕으로 이 흩어진 사실들을 조합하는 2차 논리적 추론을 통해 해당 역사를 3차로 재구성하는 일종의 탐정과 같다. 1차 사료는 유적과 유물, 그리고 문헌이다. 이들 사료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중국의 고대문헌이 거짓을 기록한 경우에도 당시의 종합적 문헌비교를 통해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이지 당시 저자의 증인으로서의 효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헌비교에서 가장 당대와 가까운 저자가 남긴 기록이 그나마 가장 사실을 그 맥락 속에라도 담고 있다. 기록의 역사 또한 수천년의 방대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밥먹듯 거짓말을 하며 살지만, 유물과 유적의 건조한 사실 자체보다 당대는 물론 그 시대를 언급한 기록들을 반복하여 다루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이 더욱 풍부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한가람역사연구소 이덕일 소장 또한 1차 사료로서 당대의 문헌을 중요하게 보는데, 그의 역사연구는 시종일관 '식민사관'에 맞서 현대의 '민족사관'을 바로 세우는 고난한 작업이다. 두계 이병도를 조상으로 모시는 주류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으로 규정하며 이덕일 소장이 벌이는 전투는 아래와 같은 네 개의 진지전이다.

1) '한사군 한반도설' 및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
2) '임나일본부설' 및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3) 조선후기 주류 '노론사관'
4) 무장 독립투쟁 말살 위한 '현대사 연구금지론'


1. '한사군 한반도설' 및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


"고조선이 평양 일대의 소국이었다면 두 나라가 왜 전쟁을 치렀는지 설명조차 할 수 없다. 북방의 강자 흉노와 맞서고 있던 한(漢)나라가 고조선에 위협을 느끼고 전쟁까지 일으키려면 고조선의 위치는 당연히 한나라에 위협적인 곳에 있어야 한다... 다시 정리하면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한나라 시대까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지금의 난하와 갈석산 지역이며 이 지역이 고대의 요동이다. 곧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사마천 시대에는 요동이라고 부르던 난하 지역이었지만 현재의 지리개념으로는 요하의 서쪽인 것이다... (만리장성 동쪽 끝은)... 명태조(1381) 때에야 겨우 현재의 산해관에 관문을 쌓은 것이고, 과거에는 그보다 더 서쪽이었다."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1.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는가?>, 이덕일, 2009.


고조선이 서기전 2세기에 중국 한나라에게 멸망되고 그 자리에 한무제는 네 개의 군을 설치했다. 이른바 '한사(4)군'이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의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단군왕검의 고조선의 출발지가 평양이었고 망할 때까지 그 자리였으니 한무제의 한사군도 한반도 내에 존재했다는 것이 두계 이병도와 그 후예들의 식민사관이다.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와세다대학에서 역사공부를 시작했다. 스승들은 당연히 일본 역사학자였는데, 이병도는 나중에 해방후 남한 역사학계의 '태두'로 칭송되었고 일본인 스승들을 '인격적으로 사랑'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 스승들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들이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정당화되려면 근대의 후진성만으로는 모자랐다. 고대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식민지성을 입증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어거지 지역비정을 위해 유물들도 조작했다. 그런데 그 후예 이병도 무리들은 '실증주의'를 앞세운다.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투쟁을 했던 '민족사학'과 사회구성체 역사학설을 도입한 '사회경제사학'에 밀려 그나마 '과학'이나 '객관주의'를 갖다붙인 '실증주의'였지만 이들의 스승들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었고 그들 식민사학자들은 '실증주의자'가 아니라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억지주장에 역사를 끼워맞추는 '정치'로서의 역사학 연구자였다. '실증주의'와 정반대인 식민사학이 '실증주의'로 둔갑한 것은 해방 후 분단과정에서 친일파가 다시 득세한 남한을 민족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이 떠나고 빈 자리를 이병도 무리의 식민사학자들이 차지하고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덕일 소장이 파헤치는 이병도 무리들의 식민사학은 사료분석에 타당하게 근거한 자기와 다른 의견을 배척한다. 1960년대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 박사의 [고조선연구]와 1980년대 남한 역사학자 윤내현 교수의 [한국고대사신론]은 고대 문헌들을 철저하게 비교분석하여 우리 고조선의 강역을 요동을 넘어 지금의 요서지역까지 넓혔다. 중국 고대문헌인 [사기]와 [한서], [삼국지]와 [후한서] 등 고대 4서 모두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 요하를 요동의 난하 또는 그보다 더 서쪽의 대릉하로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병도 무리는 굳이 그 요하를 한반도의 대동강 또는 청천강으로 확정한다. 요동과 만주 일대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과 고인돌 같은 유물과 유적에 이 '실증사학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반도 평양에서 발견된 한나라 시대 유물과 기왓장 따위가 중요하다. 북한에서는 평양의 한나라 물건은 한무제가 아니라 동한 광무제 시절 평양에 들어온 유물이라는 것을 입증했다는데 우리의 식민사학자들에게는 고조선과 한사군이 한반도를 넘어서면 안되기 때문에 평양에서 한나라 유물이 발견된 사실만 중요하다. 또한 분단반공이념으로 그동안 무시했던 북한 역사학계의 연구성과 중 유일하게 동조한 것이 평양의 한나라 유물이다. 

사실 고조선과 고구려 등 고대의 '평양'은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평양'은 수도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서 요동에 위치했고 나중에 고구려 장수왕이 한반도 북부로 수도로 옮기면서 '평양'이라는 지명도 따라왔다. 즉, 고대의 '평양'은 요동에 있던 고조선과 고구려의 주요도시였다. 그러나 식민사학에게 '평양'은 현재의 평안도 평양으로 오로지 하나만 존재해야 했다. 우리 역사가 일제 식민사학 선배들이 비정한 대로 한반도 북쪽으로 더 넘어가서는 안되었기 때문이고, 모두에게 열린 학문이 아니라 그들만의 강단역사학으로서의 그 식민사학을 지키는 길이 곧 생존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재야역사학자들의 노고로 인해 하나하나 드러난 역사적 진실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식민사학은 그 생존전략의 생리를 가동하여 타협안을 내놓았다. 바로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이다. 위만에게 밀려 내려온 고조선 세력이 지금의 한반도 평양 등지로 중심지를 이동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위만 또한 중국 한족이 아니라 요동지역의 독립적 실력자로서 고조선 문화의 계승자였다. 고조선 자체가 요동사의 일부였는데 위만은 중국역사고 우리 고조선은 '중심지 이동설'로 한반도에 국한될 이유가 없다. 결국 식민사학이 무슨 변형과 타협안을 시도하든 그 목적은 일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의 유지일 뿐이다.

이덕일 소장에 의하면 모든 1차 사료 일체는 고조선이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며 고조선이 멸망한 자리에 세워진 한사군은 그러므로 한반도 북부가 아닌 요동에 있었다는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한사군 한반도설'은 허구다.


2. '임나일본부설' 및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삼국사기]는 분명 신라의 건국연대를 B.C.57년,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B.C.37년, 백제의 건국연대를 B.C.18년으로 기록했음에도 자의적으로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를 누락시킨 것이다... (일본 식민사학자) 쓰다 소우키치는 임나일본부를 살리려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창안해 냈다... 그러나 (김부식의 사대주의사관을 비판했던) 신채호 주장의 핵심은 <신라본기>와 <백제본기>가 조작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고구려의 역사가 2백년 더 올라갈 수도 있다는 것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내용이다."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2.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는가?>, 이덕일, 2009.


2014년 이덕일 소장은 고려대 교수 김현구의 '임나일본부' 관련 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다. 1심에서 실형을 받고 2심과 대법원에서 무죄확정을 받은 이덕일 소장은 무죄확정된 2018년에 [우리 안의 식민사관] 2판을 내며 소회를 드러내는데, 2009년까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서 1차 문헌사료들을 바탕으로 조목조목 비판한 쟁점에서 더 나아가 이병도와 김현구를 비롯한 식민사학자 일체의 실명을 공개하는 투쟁의 새로운 장을 연다. 학문적, '실증적'으로 논쟁하고자 했으나 결코 이에 응하지도 않은채 전혀 끄떡없는 '식민사학 카르텔'은 친일파들이 그랬듯 자기가 살겠다고 자기를 비판하는 독립운동을 죽였고 그런 방식 자체가 유일한 생존방식이 되었다. 박근혜 정권은 '국정국사교과서' 재편찬을 통해 역사의 사유화를 기도했음은 물론 재야사학을 '유사' 역사학으로 싸잡아 비난하면서 법정에 세우기까지 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기독교, 불교 등 식민통치에 고분고분했던 종교 이외의 동학이나 대종교(단군교) 등은 '유사' 종교로 분류했다는데, 식민사학은 재야 민중적인 역사학은 그 주장이 아무리 타당하다 하더라도 '전공자'의 역사학이 아닌 '유사' 역사학이라고 매도했다. 우리 한국사 주류가 일제 식민사학의 후예들임을 증명하는 사례다. 독재자와 제국주의자들은 '정치경제학'이 아닌 독립 '경제학'을, '민족민중사학'이 아닌 '전공자'들만의 '실증사학'을 좋아한다. 그 '실증'과 '실험'에만 매달리며 사회전체적 관점에는 관심없는 '전공과학'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과학자'들은 본인이 식민주의 독재자들에게 부역한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고도 모른 척 한다.

식민사학의 거두 두계 이병도의 일본사학자 스승 중 쓰다 소키치라는 자가 있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서 식민사학 확립을 위해 한반도와 요동의 역사를 조작한 이 자는 이병도의 일본 유학시절 스승이었던 인연으로 귀국한 이병도를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할 수 있도록 알선하였다. 생계는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이지만 이병도는 생계와 생존을 위해 우리 역사까지 팔아먹었다. 
이병도의 일본인 스승 쓰다 소키치는 한반도 남부의 고대사에서 일본이 가야지역과 그 이상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퍼뜨려야 했는데 [일본서기]에 나오는 구절이 우리의 [삼국사기] 기록에는 언급도 없다는 것에 주목하고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설'을 주장한다. 즉 8세기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는 사실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세운 지역임에도 [일본서기]를 앞세운 근대의 일제에 의해서는 고대 한반도 남부에 조선총독부와 같은 '임나일본부'가 반드시 존재했어야 했는데 12세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임나일본부'가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중국 사대주의의 온상이라 단재 신채호 선생은 김부식과의 역사투쟁을 독립투쟁 못지않게 전개하셨다. 그런 김부식에게조차도 '일나일본부 한반도 지배설'은 나타나지 않는다. 2011년 북한 역사학자 조희승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 삼국시대 한반도와 요동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 세력은 동쪽의 일본땅에 각자의 식민지를 세우는 경쟁을 했고 실제 고구려-백제-신라-가야(임나) 식민지들은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현지의 일본정부와도 교류했다는 역사가 바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록들임을 문헌과 현지 유물유적의 1차 사료들을 통해 입증했다. 그것이 1960년대 북한 역사학자 김석형의 가야사 연구이며 2011년 조희승 박사의 '임나일본부' 해체설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병도의 스승 쓰다 소키치는 '임나일본부'가 고대 한반도 남부에서 한반도 일대를 지배했다는 주장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창조했고 남한 식민사학은 이에 따라 고구려는 고씨 태조왕, 신라는 김씨 내물왕, 백제는 고이왕부터 고대국가를 건설하면서 그 역사를 시작했다고 가르쳐왔다. 물론 [삼국사기]는 '단군설화'가 없고 동명왕' 조 등은 모호한 면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연대는 비교적 명확하다. 아마도 이는 당대 이전 중국은 물론 현전하던 역사사료 일체가 증명하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대주의자 김부식 조차도 무시할 수 없던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아래 있지도 않았던 한반도 남부 '임나일본부'를 위해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불신되었고 남한 식민사학은 생존을 위해 일제 스승의 학통을 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비판받아야 할 지점은 그 '사대주의' 사상으로 인한 우리 '민족사학'의 탈각에 있지, '임나일본부'를 기록하지 않아 '조작되었다'는 식민사학의 '불신설'이 아니다. '임나일본부'는 가야가 일본에 세운 소국이었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적은 없다. 
[삼국사기]가 '임나일본부'를 기록할 이유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3. 조선후기 주류 '노론사관'


"한국 주류사학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사관(史觀)이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 살펴본 일제 식민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후기 노론사관이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정설인 한국사의 확대재생산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한국사회는 미래로 나갈 수 없다... 이제 한국사는 소수 학벌 카르텔의 당파적 해석에서 벗어나 시민들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3. 노론사관은 어떻게 조선후기사를 왜곡시켰는가?>, 아덕일, 2009.


조선을 일제에 팔아넘긴 주요 세력은 왕실이었다. 고종과 외척 민씨는 조선말 동학농민반란을 청나라와 일본의 외세의 힘을 빌어 진압함으로써 일제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이씨 조선왕조는 압제를 당하던 다수 당사자인 조선민중들의 손으로 끝장나야 했는데 순순히 목을 내놓을리 없는 이씨왕조는 외세보다 조선민중을 더 두려워 했고 외세의 힘을 빌어서라도 구차한 권력투쟁을 이어갔다. 이완용 같은 왕실인사가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은 이 더러운 권력투쟁의 귀결이었다. 

인조반정으로 단독집권한 서인세력은 이후 남인과의 당파투쟁을 거치며 이 '거대양당' 체제에서 최후승자가 되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했을 때 이미 노론은 국왕를 독살하고 정권을 바꿀 정도의 유일당 집권세력이 되었다. 말로만 북벌을 외치던 송시열은 실제 북벌에는 관심없었다. '북벌' 위기론을 이용해 국내 권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만이 목적이었고 소론과 노론 거대정파 기득권동맹을 이용해 성리학 지배자들의 부를 늘렸고 민중을 피폐하게 만들면서 조선을 부패시켰다. 지금의 '거대양당 기득권동맹'의 뿌리가 바로 노론정치다.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은 왕실 친척이었고 조선 고위관료였으며 노론 당수였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결국 같은 것들이라는 증명이 이보다 더 적나라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한사군 한반도 북부설'과 '임나일본부 한반도 남부설' 따위가 주류 정설로 뿌리내리는 근본 토양을 본다. 

지금도 건재한 '조선후기 노론사관'을 뿌리뽑지 않으면 현재 '거대양당 기득권동맹'의 정치도, '식민사학'의 역사도 극복할 수 없다. 이 소수 기득권은 오로지 다수 민중의 직접민주주의 정치로 뒤집는 수 밖에 없다. 
노론사관과 식민사학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4. 무장 독립투쟁 말살 위한 '현대사 연구금지론'


"청동기 시대가 되어야 고대국가가 시작된다는 '국사교과서'의 공식이 단군조선을 부인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한국에만 있는 '현대사 연구금지' 원칙 또한 독립운동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한참 후였다... 독립운동사는 무장투쟁사를 우선하는 것이 원칙이다... 한국사를 바로잡는 데서부터 시작...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면 동북공정은 자연히 무력화한다... 현재의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을 극복하는 것이 국내적으로는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하는 길이자 국외적으로는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지름길..."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4.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이덕일, 2009.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국가와 제국, 이집트와 중국 하-상-주나라, 아메리카의 마야-잉카-아즈테크 문명 등은 서기전 5천년~2천년부터 번성한 역사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 문명은 다른 지역보다 좀 이른 신석기와 청동기 문화였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신석기 시대부터 고대국가 또는 제국으로 인정된다. 그런데 유독 우리 고조선은 청동기 이전의 역사는 국가가 아닌 부족부락이라 일축된다. 중국에서 철기문화가 이식된 후에 고대국가가 된 고조선이 중심지를 한반도로 이동했다가 망한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존재했다거나, '원삼국' 시대라는 모호한 용어로 부족국가로 산재하던 한반도 남부에 일본의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고 우기기 위해 [삼국사기]조차 불신하는 남한의 식민사학은 노론사관과 이복형제다. 해방 후 친일파가 친미파로 변신하여 다시 득세한 남한에서 그나마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독립유공자 선정위원회를 운영할 때 남한에는 남아있는 독립운동 투사가 거의 없었다. 김승학, 김창숙 같은 얼마 안되는 무장 독립투사가 그나마 '역사학자'랍시고 위원회에 이름을 건 조선사편수회 출신 학자들에게 "임자가 독립운동을 암만?"이라고 물었던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만주로 이주했던 무장 독립투사들은 박은식, 신채호 뿐만 아니라 모두가 살아있는 '역사가'였는데, 해방 후 남한에는 '독립투쟁사'를 증언할 역사학 '전공자'는 이미 씨가 마른 후였다. 

이런 식민사학에는 '현대사 연구금지론'이 있었다는데, 현대사는 아직 평가하기 어려움이 있다는 핑계였지만 실은 현대사를 연구할수록 무장 독립투쟁사가 부각될테고 그럴수록 식민사학의 생존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남한 이승만 정권과 죽이 맞는 식민사학계에서 독립투사들은 설 곳이 없어졌고 대거 북으로 향했다. 그렇게 남은 유일한 식민사학 기득권 세력의 '실증주의' 과학의 입장에서는 '현대사'는 '실증'이 어려우므로 연구가 금지되었단다. 그래서 '유사' 역사학일 수 없는 '민족민중민주사학'과 '식민사학'의 전쟁은 '고대사'의 전장에서부터 치러져 왔다.

이덕일 소장이 "한국 고대사는 늘 현대사였다"([우리 안의 식민사관], <4장>)고 주장하고 있는 이유다.

***

1.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이덕일, <역사의아침>, 2009.
2. [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만권당>, 2014~2018.
3. [한국 고대사 신론], 윤내현, <만권당>, 2017.
4. [고조선 연구](1962), 리지린, 이덕일 해역, <도서출판 말>, 2018.
5. [북한학계의 가야사(伽倻史) 연구], 조희승, 이덕일 해설, <도서출판 말>, 2020.
6. [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7.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석필>, 1997.
8. [조선상고사], 신채호, <일신서적>,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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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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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史必歸正) : 한국 '고대사'는 '현대사'다
- [우리 안의 식민사관], 이덕일, 2018.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이덕일, 2009.


"조선총독부 사관과 독립운동가 사관 사이의 최전선은 늘 한국 고대사였다. 한국 고대사는 나라를 빼앗긴 10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늘 이 자리의 현대사였다. '사관(史觀)'이란 말에 볼 '관(觀)' 자가 붙는 이유는 역사를 보는데는 관점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고대사나 현대사나 일정해야 한다. 고대사는 지배층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현대사는 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에게 사관(史觀)이란 용어를 써서는 안된다...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고대사'는 지금 이 자리의 '현대사'라는 사실... '고대사는 고대사 전공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은 조선총독부 사관을 영원히 유지시켜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 [우리 안의 식민사관], <4. 한국 고대사는 늘 현대사였다>, 이덕일, 2018.


수년 전 잡지에서 '실증주의'를 앞세운 젊은 역사학자들이 '유사' 역사학을 비판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역시 모든 학문(學問)에는 반드시 '철학(哲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했었다. '유물'과 '답사'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그들의 '실증주의'는 역사를 '과학'으로 재정립하고 싶었겠지만, 시대와 역사에 관한 통찰이 없는 한 '역사' 또한 진정한 '과학'이 될 수 없다. 사회분석과 예측이 틀리기만 하는 '경제학'이라는 '과학'이 시대 전반을 통찰하는 '정치경제학'의 사회과학을 넘어설 수 없는 이유와도 같다. 젊은 '실증주의' 사학 전문가들은 '고대사 전공자'로서 해방 후 선배 강단 식민사학자들이 전가의 보도로 여기던 유적과 유물을 '실증적'으로 재확인하는 자들에 불과했다.

역사학자는 1차 사료들을 바탕으로 이 흩어진 사실들을 조합하는 2차 논리적 추론을 통해 해당 역사를 3차로 재구성하는 일종의 탐정과 같다. 1차 사료는 유적과 유물, 그리고 문헌이다. 이들 사료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중국의 고대문헌이 거짓을 기록한 경우에도 당시의 종합적 문헌비교를 통해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이지 당시 저자의 증인으로서의 효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헌비교에서 가장 당대와 가까운 저자가 남긴 기록이 그나마 가장 사실을 그 맥락 속에라도 담고 있다. 기록의 역사 또한 수천년의 방대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밥먹듯 거짓말을 하며 살지만, 유물과 유적의 건조한 사실 자체보다 당대는 물론 그 시대를 언급한 기록들을 반복하여 다루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이 더욱 풍부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한가람역사연구소 이덕일 소장 또한 1차 사료로서 당대의 문헌을 중요하게 보는데, 그의 역사연구는 시종일관 '식민사관'에 맞서 현대의 '민족사관'을 바로 세우는 고난한 작업이다. 두계 이병도를 조상으로 모시는 주류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으로 규정하며 이덕일 소장이 벌이는 전투는 아래와 같은 네 개의 진지전이다.

1) '한사군 한반도설' 및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
2) '임나일본부설' 및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3) 조선후기 주류 '노론사관'
4) 무장 독립투쟁 말살 위한 '현대사 연구금지론'


1. '한사군 한반도설' 및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


"고조선이 평양 일대의 소국이었다면 두 나라가 왜 전쟁을 치렀는지 설명조차 할 수 없다. 북방의 강자 흉노와 맞서고 있던 한(漢)나라가 고조선에 위협을 느끼고 전쟁까지 일으키려면 고조선의 위치는 당연히 한나라에 위협적인 곳에 있어야 한다... 다시 정리하면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한나라 시대까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지금의 난하와 갈석산 지역이며 이 지역이 고대의 요동이다. 곧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사마천 시대에는 요동이라고 부르던 난하 지역이었지만 현재의 지리개념으로는 요하의 서쪽인 것이다... (만리장성 동쪽 끝은)... 명태조(1381) 때에야 겨우 현재의 산해관에 관문을 쌓은 것이고, 과거에는 그보다 더 서쪽이었다."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1.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는가?>, 이덕일, 2009.


고조선이 서기전 2세기에 중국 한나라에게 멸망되고 그 자리에 한무제는 네 개의 군을 설치했다. 이른바 '한사(4)군'이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의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단군왕검의 고조선의 출발지가 평양이었고 망할 때까지 그 자리였으니 한무제의 한사군도 한반도 내에 존재했다는 것이 두계 이병도와 그 후예들의 식민사관이다.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와세다대학에서 역사공부를 시작했다. 스승들은 당연히 일본 역사학자였는데, 이병도는 나중에 해방후 남한 역사학계의 '태두'로 칭송되었고 일본인 스승들을 '인격적으로 사랑'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 스승들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들이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정당화되려면 근대의 후진성만으로는 모자랐다. 고대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식민지성을 입증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어거지 지역비정을 위해 유물들도 조작했다. 그런데 그 후예 이병도 무리들은 '실증주의'를 앞세운다.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투쟁을 했던 '민족사학'과 사회구성체 역사학설을 도입한 '사회경제사학'에 밀려 그나마 '과학'이나 '객관주의'를 갖다붙인 '실증주의'였지만 이들의 스승들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었고 그들 식민사학자들은 '실증주의자'가 아니라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억지주장에 역사를 끼워맞추는 '정치'로서의 역사학 연구자였다. '실증주의'와 정반대인 식민사학이 '실증주의'로 둔갑한 것은 해방 후 분단과정에서 친일파가 다시 득세한 남한을 민족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이 떠나고 빈 자리를 이병도 무리의 식민사학자들이 차지하고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덕일 소장이 파헤치는 이병도 무리들의 식민사학은 사료분석에 타당하게 근거한 자기와 다른 의견을 배척한다. 1960년대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 박사의 [고조선연구]와 1980년대 남한 역사학자 윤내현 교수의 [한국고대사신론]은 고대 문헌들을 철저하게 비교분석하여 우리 고조선의 강역을 요동을 넘어 지금의 요서지역까지 넓혔다. 중국 고대문헌인 [사기]와 [한서], [삼국지]와 [후한서] 등 고대 4서 모두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 요하를 요동의 난하 또는 그보다 더 서쪽의 대릉하로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병도 무리는 굳이 그 요하를 한반도의 대동강 또는 청천강으로 확정한다. 요동과 만주 일대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과 고인돌 같은 유물과 유적에 이 '실증사학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반도 평양에서 발견된 한나라 시대 유물과 기왓장 따위가 중요하다. 북한에서는 평양의 한나라 물건은 한무제가 아니라 동한 광무제 시절 평양에 들어온 유물이라는 것을 입증했다는데 우리의 식민사학자들에게는 고조선과 한사군이 한반도를 넘어서면 안되기 때문에 평양에서 한나라 유물이 발견된 사실만 중요하다. 또한 분단반공이념으로 그동안 무시했던 북한 역사학계의 연구성과 중 유일하게 동조한 것이 평양의 한나라 유물이다. 

사실 고조선과 고구려 등 고대의 '평양'은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평양'은 수도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서 요동에 위치했고 나중에 고구려 장수왕이 한반도 북부로 수도로 옮기면서 '평양'이라는 지명도 따라왔다. 즉, 고대의 '평양'은 요동에 있던 고조선과 고구려의 주요도시였다. 그러나 식민사학에게 '평양'은 현재의 평안도 평양으로 오로지 하나만 존재해야 했다. 우리 역사가 일제 식민사학 선배들이 비정한 대로 한반도 북쪽으로 더 넘어가서는 안되었기 때문이고, 모두에게 열린 학문이 아니라 그들만의 강단역사학으로서의 그 식민사학을 지키는 길이 곧 생존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재야역사학자들의 노고로 인해 하나하나 드러난 역사적 진실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식민사학은 그 생존전략의 생리를 가동하여 타협안을 내놓았다. 바로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이다. 위만에게 밀려 내려온 고조선 세력이 지금의 한반도 평양 등지로 중심지를 이동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위만 또한 중국 한족이 아니라 요동지역의 독립적 실력자로서 고조선 문화의 계승자였다. 고조선 자체가 요동사의 일부였는데 위만은 중국역사고 우리 고조선은 '중심지 이동설'로 한반도에 국한될 이유가 없다. 결국 식민사학이 무슨 변형과 타협안을 시도하든 그 목적은 일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의 유지일 뿐이다.

이덕일 소장에 의하면 모든 1차 사료 일체는 고조선이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며 고조선이 멸망한 자리에 세워진 한사군은 그러므로 한반도 북부가 아닌 요동에 있었다는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한사군 한반도설'은 허구다.


2. '임나일본부설' 및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삼국사기]는 분명 신라의 건국연대를 B.C.57년,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B.C.37년, 백제의 건국연대를 B.C.18년으로 기록했음에도 자의적으로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를 누락시킨 것이다... (일본 식민사학자) 쓰다 소우키치는 임나일본부를 살리려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창안해 냈다... 그러나 (김부식의 사대주의사관을 비판했던) 신채호 주장의 핵심은 <신라본기>와 <백제본기>가 조작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고구려의 역사가 2백년 더 올라갈 수도 있다는 것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내용이다."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2.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는가?>, 이덕일, 2009.


2014년 이덕일 소장은 고려대 교수 김현구의 '임나일본부' 관련 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다. 1심에서 실형을 받고 2심과 대법원에서 무죄확정을 받은 이덕일 소장은 무죄확정된 2018년에 [우리 안의 식민사관] 2판을 내며 소회를 드러내는데, 2009년까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서 1차 문헌사료들을 바탕으로 조목조목 비판한 쟁점에서 더 나아가 이병도와 김현구를 비롯한 식민사학자 일체의 실명을 공개하는 투쟁의 새로운 장을 연다. 학문적, '실증적'으로 논쟁하고자 했으나 결코 이에 응하지도 않은채 전혀 끄떡없는 '식민사학 카르텔'은 친일파들이 그랬듯 자기가 살겠다고 자기를 비판하는 독립운동을 죽였고 그런 방식 자체가 유일한 생존방식이 되었다. 박근혜 정권은 '국정국사교과서' 재편찬을 통해 역사의 사유화를 기도했음은 물론 재야사학을 '유사' 역사학으로 싸잡아 비난하면서 법정에 세우기까지 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기독교, 불교 등 식민통치에 고분고분했던 종교 이외의 동학이나 대종교(단군교) 등은 '유사' 종교로 분류했다는데, 식민사학은 재야 민중적인 역사학은 그 주장이 아무리 타당하다 하더라도 '전공자'의 역사학이 아닌 '유사' 역사학이라고 매도했다. 우리 한국사 주류가 일제 식민사학의 후예들임을 증명하는 사례다. 독재자와 제국주의자들은 '정치경제학'이 아닌 독립 '경제학'을, '민족민중사학'이 아닌 '전공자'들만의 '실증사학'을 좋아한다. 그 '실증'과 '실험'에만 매달리며 사회전체적 관점에는 관심없는 '전공과학'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과학자'들은 본인이 식민주의 독재자들에게 부역한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고도 모른 척 한다.

식민사학의 거두 두계 이병도의 일본사학자 스승 중 쓰다 소키치라는 자가 있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서 식민사학 확립을 위해 한반도와 요동의 역사를 조작한 이 자는 이병도의 일본 유학시절 스승이었던 인연으로 귀국한 이병도를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할 수 있도록 알선하였다. 생계는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이지만 이병도는 생계와 생존을 위해 우리 역사까지 팔아먹었다. 
이병도의 일본인 스승 쓰다 소키치는 한반도 남부의 고대사에서 일본이 가야지역과 그 이상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퍼뜨려야 했는데 [일본서기]에 나오는 구절이 우리의 [삼국사기] 기록에는 언급도 없다는 것에 주목하고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설'을 주장한다. 즉 8세기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는 사실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세운 지역임에도 [일본서기]를 앞세운 근대의 일제에 의해서는 고대 한반도 남부에 조선총독부와 같은 '임나일본부'가 반드시 존재했어야 했는데 12세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임나일본부'가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중국 사대주의의 온상이라 단재 신채호 선생은 김부식과의 역사투쟁을 독립투쟁 못지않게 전개하셨다. 그런 김부식에게조차도 '일나일본부 한반도 지배설'은 나타나지 않는다. 2011년 북한 역사학자 조희승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 삼국시대 한반도와 요동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 세력은 동쪽의 일본땅에 각자의 식민지를 세우는 경쟁을 했고 실제 고구려-백제-신라-가야(임나) 식민지들은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현지의 일본정부와도 교류했다는 역사가 바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록들임을 문헌과 현지 유물유적의 1차 사료들을 통해 입증했다. 그것이 1960년대 북한 역사학자 김석형의 가야사 연구이며 2011년 조희승 박사의 '임나일본부' 해체설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병도의 스승 쓰다 소키치는 '임나일본부'가 고대 한반도 남부에서 한반도 일대를 지배했다는 주장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창조했고 남한 식민사학은 이에 따라 고구려는 고씨 태조왕, 신라는 김씨 내물왕, 백제는 고이왕부터 고대국가를 건설하면서 그 역사를 시작했다고 가르쳐왔다. 물론 [삼국사기]는 '단군설화'가 없고 동명왕' 조 등은 모호한 면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연대는 비교적 명확하다. 아마도 이는 당대 이전 중국은 물론 현전하던 역사사료 일체가 증명하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대주의자 김부식 조차도 무시할 수 없던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아래 있지도 않았던 한반도 남부 '임나일본부'를 위해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불신되었고 남한 식민사학은 생존을 위해 일제 스승의 학통을 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비판받아야 할 지점은 그 '사대주의' 사상으로 인한 우리 '민족사학'의 탈각에 있지, '임나일본부'를 기록하지 않아 '조작되었다'는 식민사학의 '불신설'이 아니다. '임나일본부'는 가야가 일본에 세운 소국이었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적은 없다. 
[삼국사기]가 '임나일본부'를 기록할 이유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3. 조선후기 주류 '노론사관'


"한국 주류사학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사관(史觀)이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 살펴본 일제 식민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후기 노론사관이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정설인 한국사의 확대재생산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한국사회는 미래로 나갈 수 없다... 이제 한국사는 소수 학벌 카르텔의 당파적 해석에서 벗어나 시민들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3. 노론사관은 어떻게 조선후기사를 왜곡시켰는가?>, 아덕일, 2009.


조선을 일제에 팔아넘긴 주요 세력은 왕실이었다. 고종과 외척 민씨는 조선말 동학농민반란을 청나라와 일본의 외세의 힘을 빌어 진압함으로써 일제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이씨 조선왕조는 압제를 당하던 다수 당사자인 조선민중들의 손으로 끝장나야 했는데 순순히 목을 내놓을리 없는 이씨왕조는 외세보다 조선민중을 더 두려워 했고 외세의 힘을 빌어서라도 구차한 권력투쟁을 이어갔다. 이완용 같은 왕실인사가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은 이 더러운 권력투쟁의 귀결이었다. 

인조반정으로 단독집권한 서인세력은 이후 남인과의 당파투쟁을 거치며 이 '거대양당' 체제에서 최후승자가 되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했을 때 이미 노론은 국왕를 독살하고 정권을 바꿀 정도의 유일당 집권세력이 되었다. 말로만 북벌을 외치던 송시열은 실제 북벌에는 관심없었다. '북벌' 위기론을 이용해 국내 권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만이 목적이었고 소론과 노론 거대정파 기득권동맹을 이용해 성리학 지배자들의 부를 늘렸고 민중을 피폐하게 만들면서 조선을 부패시켰다. 지금의 '거대양당 기득권동맹'의 뿌리가 바로 노론정치다.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은 왕실 친척이었고 조선 고위관료였으며 노론 당수였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결국 같은 것들이라는 증명이 이보다 더 적나라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한사군 한반도 북부설'과 '임나일본부 한반도 남부설' 따위가 주류 정설로 뿌리내리는 근본 토양을 본다. 

지금도 건재한 '조선후기 노론사관'을 뿌리뽑지 않으면 현재 '거대양당 기득권동맹'의 정치도, '식민사학'의 역사도 극복할 수 없다. 이 소수 기득권은 오로지 다수 민중의 직접민주주의 정치로 뒤집는 수 밖에 없다. 
노론사관과 식민사학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4. 무장 독립투쟁 말살 위한 '현대사 연구금지론'


"청동기 시대가 되어야 고대국가가 시작된다는 '국사교과서'의 공식이 단군조선을 부인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한국에만 있는 '현대사 연구금지' 원칙 또한 독립운동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한참 후였다... 독립운동사는 무장투쟁사를 우선하는 것이 원칙이다... 한국사를 바로잡는 데서부터 시작...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면 동북공정은 자연히 무력화한다... 현재의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을 극복하는 것이 국내적으로는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하는 길이자 국외적으로는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지름길..."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4.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이덕일, 2009.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국가와 제국, 이집트와 중국 하-상-주나라, 아메리카의 마야-잉카-아즈테크 문명 등은 서기전 5천년~2천년부터 번성한 역사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 문명은 다른 지역보다 좀 이른 신석기와 청동기 문화였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신석기 시대부터 고대국가 또는 제국으로 인정된다. 그런데 유독 우리 고조선은 청동기 이전의 역사는 국가가 아닌 부족부락이라 일축된다. 중국에서 철기문화가 이식된 후에 고대국가가 된 고조선이 중심지를 한반도로 이동했다가 망한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존재했다거나, '원삼국' 시대라는 모호한 용어로 부족국가로 산재하던 한반도 남부에 일본의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고 우기기 위해 [삼국사기]조차 불신하는 남한의 식민사학은 노론사관과 이복형제다. 해방 후 친일파가 친미파로 변신하여 다시 득세한 남한에서 그나마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독립유공자 선정위원회를 운영할 때 남한에는 남아있는 독립운동 투사가 거의 없었다. 김승학, 김창숙 같은 얼마 안되는 무장 독립투사가 그나마 '역사학자'랍시고 위원회에 이름을 건 조선사편수회 출신 학자들에게 "임자가 독립운동을 암만?"이라고 물었던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만주로 이주했던 무장 독립투사들은 박은식, 신채호 뿐만 아니라 모두가 살아있는 '역사가'였는데, 해방 후 남한에는 '독립투쟁사'를 증언할 역사학 '전공자'는 이미 씨가 마른 후였다. 

이런 식민사학에는 '현대사 연구금지론'이 있었다는데, 현대사는 아직 평가하기 어려움이 있다는 핑계였지만 실은 현대사를 연구할수록 무장 독립투쟁사가 부각될테고 그럴수록 식민사학의 생존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남한 이승만 정권과 죽이 맞는 식민사학계에서 독립투사들은 설 곳이 없어졌고 대거 북으로 향했다. 그렇게 남은 유일한 식민사학 기득권 세력의 '실증주의' 과학의 입장에서는 '현대사'는 '실증'이 어려우므로 연구가 금지되었단다. 그래서 '유사' 역사학일 수 없는 '민족민중민주사학'과 '식민사학'의 전쟁은 '고대사'의 전장에서부터 치러져 왔다.

이덕일 소장이 "한국 고대사는 늘 현대사였다"([우리 안의 식민사관], <4장>)고 주장하고 있는 이유다.

***

1.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이덕일, <역사의아침>, 2009.
2. [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만권당>, 2014~2018.
3. [한국 고대사 신론], 윤내현, <만권당>, 2017.
4. [고조선 연구](1962), 리지린, 이덕일 해역, <도서출판 말>, 2018.
5. [북한학계의 가야사(伽倻史) 연구], 조희승, 이덕일 해설, <도서출판 말>, 2020.
6. [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7.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석필>, 1997.
8. [조선상고사], 신채호, <일신서적>,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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