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이상수 지음 / 길(도서출판)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세상의 ‘중심’에 관한 심각한 오해
- 한겨레신문 기자 이상수의 글모음집,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엥겔스는 '운동 그 자체가 하나의 모순이다'([반뒤링론]에서 인용}라고 말했다. 레닌은 대립과 통일의 법칙을 '자연계(정신과 사회 양자도 포함하여)의 모든 현상과 과정이 서로 모순하고 서로 배척하고 대립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음을 승인하는 것'([변증법의 문제에 관하여]에서 인용)이라 정의했다. 이러한 견해는 옳은가? 옳다. 모든 사물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모순되는 측면들의 상호의존과 상호투쟁은 모든 사물의 생명을 결정하고 모든 사물의 발전을 추진한다.
어떠한 사물도 모두 모순을 포함하고 있으며 모순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
- 마오쩌뚱, [모순론] 제2장 모순의 보편성 중
스스로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오해하는 세력들은 항상 있어왔습니다. 현재 '초국적 자본의 무한증식운동'으로 표현되는 신자유주의 신봉자가 아닌 세력을 '테러리스트', '악의축' 등으로 일축해버리는 미국이 그렇고, 게르만순혈주의인 히틀러의 나찌즘, '닛뽄'의 대동아공영권이 그랬으며, 동북공정으로 다시금 준동하는 오래된 '중화사상'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오해는 ‘중심’이 아닌 타자에게 언제나 심각한 영향을 미쳤지요.
형이상학적 논리학에서는 '모순'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변증법적 논리학은 사물의 본질은 상호대립, 상호투쟁하는 모순관계의 운동이라고 인식합니다. 마오쩌뚱의 [모순론]에 나오는 '일분이이(一分而二)', 즉 세상만물은 모순되는 양자로 나뉜다는 시각이 그렇습니다.
'중심'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동양철학을 해석하는 한겨레신문 이상수 기자의 글모음집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은 바로 이 '모순론'적 시각에 근거하여, 세상의 '중심'으로서 '나' 뿐만이 아닌 '다른 존재'들을 인정하면서 출발합니다. 하늘에 태양만 있는 게 아니라 밤에만 볼 수 있는 우주도 함께 존재하며, 밤이 없었다면 우주의 발견은 없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머리말부터 그렇습니다.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고 오해하는 시각에서 보면, 공자와 노자, 묵자와 손자는 엄연히 다른 철학입니다. 하지만, 이는 5대10국이라는 전란의 시대를 거쳐 조광윤이 건국한 송나라의 '유학중심사상', 궁극적으로 '중화민족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시켰던 그 시대 이후에 나온 시각이라는 게 이상수 기자의 해석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춘추전국의 백가쟁명 시대, 한(漢)족이 아닌 수많은 '오랑캐'들이 중원을 번갈아가며 지배했던 5호16국,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이 모든 사상들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결국 덕(德)을 바라는 같은 사상이었다는 것인데요, 실제로 그 시기들을 거쳐 동양의 문화는 더욱 번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책에서는 공자를 '중용의 철인'으로, 노자를 '급진적 관용철학'으로, 묵자를 '사랑의 사회과학'으로, 손자를 '평화'주의자로 그리고 있습니다. 2000년과 2001년 사이에 [한겨레21]에 연재되었던 <이상수의 동서횡단>이라는 글들을 엮은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사상의 일면을 벗어나 서로 교집합을 이루는 '다른 모습'에 주목하게 됩니다. 즉, 공자는 더 이상 편협한 신분주의자가 아니고, 노자는 알듯 말듯한 신비주의자가 아니며, 노동과 인간평등을 중시했던 묵자가 되살아나고, 전쟁광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전쟁을 기술했던 손자가 재조명됩니다.
스스로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심각한 오해에서 살짝 비껴나온 시각으로 보면, 나와 다른 존재로서의 남들을 인정하고 그 다양성 속에서 나름대로의 존재이유를 지닌 '나'를 존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랑캐'로 사는 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요.
이 다양성 속에서 세상의 '중심'들이 많아지면, 이 땅에는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수구세력 못지않게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진보세력도, 평등한 세상을 건설하고 싶어하는 사회주의자도 모두가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사물이든 모순을 포함하고 있으며, 모순이 없으면 세계도 없기 때문입니다.
***
1.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이상수 지음, <길>, 2001.
: 젊은 시절, 과학적 사회주의를 신봉했고, 위장취업으로 노동운동도 했으며, 한겨레신문 기자로서 세상의 모든 교조적 시각에서 벗어나고자 하면서 동양철학을 주제로 삼은 저자의 짧은 글들을 통해 공자와 노자, 묵자와 손자의 사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모든 사상이 결국은 동일하다는 막연한 통합주의적 결론이 도출될 위험성도 약간 있습니다. [한겨레21]을 구독할 시기에 열심히 읽다가 글모음집이 나온 후 다시 읽게 된 책입니다.
2.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중국역사기행1)], 박한제 지음, <사계절>, 2003.
: 동양사학자인 저자가 중국 현지답사를 통해 생생하게 서술한 중국역사서 삼부작 중 1권입니다. 많은 사진자료와 함께 삼국시대부터 5호16국 시대까지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전통적 중화사상을 거부하고 5호16국 시대를 중국역사에서 문화적 번영기로 해석하는 시각에 많이 동감하게 됩니다.
3. [모순론], 마오쩌뚱 지음, 이등연 번역, <두레>, 1989. /
[모택동선집], 김승일 번역, <범우사>, 2001.
: 만물은 보편적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계급투쟁으로서의 기본모순과 각 사회발전 단계에서의 주요모순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은 상대적이지만, 결국 모든 사물의 발전을 추진하는 것은 모순의 상호대립과 투쟁이라고 하는 변증법적 인식론을 간결한 문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조금 먼저 나온 [실천론]은 '모든 사상에는 계급의 낙인이 찍혀있다'는 규정을 통해 계급투쟁이라는 정치적 실천을 강조함으로써 마오쩌뚱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은 공식화됩니다. '93년 맑스와 엥겔스, '94년 레닌을 거쳐, '95년에 탐독했던 마오쩌뚱의 대표저서가 바로 [실천론]과 [모순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