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1 - 상 - 정치경제학 비판 경제학고전선집 7
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노동은 인권이다

-노동/계급/노동자계급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한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필두로 전세계에 걸쳐 연쇄적으로 이룩되었던 민주주의 사회 치고 나라의 가장 큰 법인 헌법에 이 문구를 집어넣지 않은 나라는 없다. 약소국가로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늦게나마 민주주의 국가를 만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의 의식이 조금씩 더 민주화되고 다양한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주체로서 자리매김해 가는 현대사회에서 사람으로서의 기본적 권리, 즉 인권(人權)에 대한 관심은 발전되어가는 사람들의 의식의 속도만큼, 어떤 면에서는 그 이상으로 커지고 있다. 물론 다양성이 인정되는 지금 시대에서는 인권에 대한 이해와 해석도 각양각색일 터이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대다수 봉급쟁이들에게 있어 인권은 어떠한 색깔을 지니고 있는가.

 

 

1. 노동(勞動)

 

… 노동은 모든 가치의 창조자이다. 오직 그것만이 자연의 산물에 경제학적 의미의 가치를 부여한다. 가치 그 자체는 어떤 사물 속에 대상화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인간 노동의 표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은 어떤 가치도 가질 수 없다.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그것을 결정할 수 있다면 이와 똑같이 사람들은 가치의 가치에 관해서 논하거나, 무거운 물체의 무게가 아니라 무거움 그 자체의 무게를 결정할 수 있다…

- F. Engels, <반뒤링론>, 1878, 제6장 단순노동과 복잡노동, 김민석 譯, 새길, 1987.

 

현대사회라는 거대한 수레를 굴러가게 하는 요소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무수히 많은 것들이 떠오르겠지만 경제학적(經濟學的)으로 사고를 좁혀 생각해 보면, 우리가 경제활동을 하는 무대가 있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사회이기에 이 있어야 할 것이며 다음으로는 우리 모두의 경제활동 행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고전적으로 위의 요소들을 3대 생산요소로서 정리하였는데, 가치생산의 잠재적 공간으로서의 토지(土地), 끊임없이 자기가치증식하는 화폐로서의 자본(資本), 이들에 결합하여 최종적으로 가치창출을 실현하는 노동(勞動)이 그것들이다. 앞서 현대사회라는 말을 했으니 이들 요소들에 좀더 현대적인 해석을 가해보자. 우선 첫 번째 요소인 토지. 경제사상적으로 중농주의(重農主義)가 한 주류를 형성할 수 없는 현대사회에서 단순하게 토지 자체에만 그 의미가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경제적 가치들이 발현될 수 있는 물질, 대상, 공간 모두를 아우를 수 있을 것이며 여기에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축적된 지식, 정보 또한 이 첫 번째 요소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요소인 자본. 이는 지금 경제체제에서 일반적으로 화폐, 즉 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단지 그 화폐형태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언급하였듯이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자기가치증식을 하는 을 말하는 것이다. 예금이나 주식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가지 재산의 형태로 이자 및 이득을 발생시키든지 각종 생산수단에 재투자되어 이윤창출에 혁신적인 변화를 촉진시킴으로써 가치량 증가에 기여를 하든지 간에 다양한 형태로 자기운동을 하면서 가치를 증식시키는 모두를 이르는 것이 자본이라는 요소이다. 마지막으로 노동. 전술하였듯 이는 인간이 행하는 일련의 경제활동의 행위라 할 수 있는데, 토지, 자본 등으로 매개되는 다른 재화에 결합하여 최종적으로 가치를 창출하고 기업에는 이윤1)을, 사회에는 물질적 발전과 생산력 증대를 이루는 요소인 것이다. 여기에서 노동 혹은 노동력의 가치에 대한 고찰은 이후에 구체적으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위에서 두 가지 요소, 즉 토지자본 같은 단어들은 고매하고 권위있는 주류경제학자(主流經濟學者)들을 비롯하여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구에 날마다 회자되는 것들이라 경제학적 권위나 전문성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본 글에서 굳이 그 의미를 되새길 필요는 없다. 다만 자본으로 일컬어지는 노동대상이나 노동수단과 같은 일체의 생산수단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나타내는 대다수의 사람들, 우리 모두는 거의 대부분이 토지자본의 소유와는 무관하게 현실적으로 노동(력)이라는 결정적 생산요소 하나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만을 언급하자. 대다수 사람들의 삶이 노동을 통해 영위가 되고 있기에 대다수의 우리들은 바로 이 노동이라는 생산요소에 더욱 주목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는 이 운동(노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천성)을 변화시킨다… 우리가 상정하는 노동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의 노동이다. 거미는 직포공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꿀벌의 집은 많은 인간 건축가들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라도 가장 훌륭한 꿀벌보다 뛰어난 점은, 그는 집을 짓기 전에 미리 자기의 머리 속에서 그것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즉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의식하고 있는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키는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처럼 그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는데, 그는 자신의 의지를 이것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기관들의 긴장 이외에도 주의력으로서 나타나는 합목적적 의지가 노동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필요하다.

- K. Marx, <자본론>, 제3절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김수행 譯, 비봉출판사, 1996.

 

다분히 원론적이라 약간 지루하지만, 우리 모두의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그 물적 기반이 되는 노동이라는 생산요소를 탁월하게 규정하고 있는 글이라 인용을 했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개념인 노동에 대해 위 글을 기초로 정리를 해보면,

첫째,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다. 동물의 한 종()으로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가장 먼저 접하는 대상은 객체로서의 자연이기에 당연한 전제이다.

둘째, 노동을 통해 인간은 객체로서의 자연을 변화시켜 자신의 합목적적 의지(合目的的 意志)를 실현한다. 원시적으로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 살아남기 위해 자연이라는 대상을 극복해야 했는데 자신의 삶에 맞게 관념적이나마 목적을 세우고 그에 따라 물적으로 자연을 변화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노동을 통해 인간은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 또한 변화시킨다. 인간은 대상을 변화시키는 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변화된 대상으로 인해 스스로의 삶의 양식을 변화, 발전시킨다는 의미인데 경제학적으로는 증식된 가치의 형태로, 축적된 자본의 형태로 생산력의 발전을 이룩하여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그에 따라 지속적으로 발전을 기획한다. 변화, 발전에 대한 합목적적 의지는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행동방식을 규정한다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넷째, 노동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주체, 객체의 변화 및 발전을 이룩하려는 인간의 합목적적 의지와 그것의 외화(外化)된 형태로서의 노동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교육되며, 혁신되고 축적되어 인간 역사발전에 복무한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하고 있는 노동을 위와 같은 원론적인 개념으로서만 설명해내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음은 인정하자. 다만 지금까지 서술한 노동의 개념을 볼 때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만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즉, 노동이라는 것은 시초적으로는 탄생과 함께 자연이라는 거대한 대상과 마주하게 된 인간 개체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신체기관을 통해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출발하지만 하나의 개체로서만이 아닌 인류라는 하나의 종(種)으로서 존속하기 위해 더욱 발전된 노동을 실현하기 위한 생산도구를 다름아닌 바로 그 노동을 통해 축적, 발전시키게 되는데, 이와 같이 노동이라는 행위는 각각의 사회를 형성하는 인간 역사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혹은 생산력 발전이라는 유구한 과정에서 필연적인 계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본질적으로 한 개체로서의 인간인 개인의 시각에서는 자아실현의 매개로서 기능하는 동시에, 인간 역사의 발전을 견인해 내는 원동력으로서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획득할 수밖에 없다. 노동은 결국 인간이 창조해 온 역사와 각각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떠나게 되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궁극적인 존재의미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노동은 항상 인간의 역사, 사회형태와 함께 고려되어야 할 개념인 것이다. 물론 인간의 역사가 발전해온 각각의 단계에 따라 인간의 노동이 실현되는 양상에 각각 차이가 있었으며 실제로 각 시기의 경제체제에 따라 인간 노동 실현의 양태는 각각 다르게 규정이 되어 왔다.2) 이후 노동이라는 아직까지 다소 친숙하지만은 않은 개념과 관련하여, 그럼에도 현대사회에서 실제로 노동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대다수의 우리의 삶을 조망하기 위해 논의를 전개하면서 좀더 구체적인 언급을 하기로 하고 일단 이 장에서는 노동이란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인간이 가진 필연적인 의무이자 권리일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해석에 만족하면서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2. 계급(階級)

 

계급들은 사람들의 대규모 집단들이며, 이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의 생산체계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지위에 의해, 생산수단들에 대한 그들의 관계(대부분의 경우 법으로 고정되고 형성된다)에 의해 노동의 사회적 조직에서 그들의 역할에 의해, 그리고 결국,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적 부의 몫의 정도와 그 부를 획득하는 양식에 의해 서로 구별된다.

- V. I. Lenin, <위대한 출발> 中

 

노동은 언제나 사회, 역사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며 그런 한에서만 그 존재의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형태인 사회(社會)’에 대한 언급이 누락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전적으로 사회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같은 무리끼리 모여 이루는 집단, 서로 협력하여 공동생활을 하는 인류의 집단, 온갖 형태의 인간의 집단적 생활, 어느 특정한 발전단계를 이룬 집단(민중실용국어사전, 민중서림 편) 등으로 설명된다. 쉽게 이해하면 주지하다시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모여 이루는 집단을 일컫는다는 포괄적인 의미에서부터 이 속에 존재하는 각종 모임, 회합, 패거리 등을 지칭하는 것이 바로 사회라는 어휘인 것이다. 사회라는 개념에 대한 정치하고 학적인 설명은 우리 주변에서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많은 사회학자들에게 맡기고 본 글은 패거리로서 존재하는 인간 사회에 대한 고찰에 주목하고자 한다. 논의의 시작으로서는 약간의 무리가 있을 지 모르나 앞에서 작위적으로 명명한 패거리라는 말을 사회적 계급이라는 기호로 대체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자.

이 장 서두에 인용한 글에서 계급이란 사람들의 대규모 집단’이라는 말을 이해함에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계급은 단순하게 사람들의 집단만을 이르는 것이 아닌 ‘대규모 집단’이라는 것이다. 즉, 대규모이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해당 사회에서 그 존재가치가 클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결국 위에서 행한 잘못된 비유와는 달리 계급은 단순한 ‘패거리’와는 다르다. 그런데 우리의 사회와 계급에 대한 이해에 앞서 이 대상들에 대한 우리 인간의 인식은 어떠한지 잠시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의 구절을 되새겨 봄이 적절할 지도 모른다.

 

사회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를 반영한다… 반영은 반영되는 것의 근사적으로 정확한 복사일 수는 있으나, 여기에서 동일성을 운운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의식 일반은 존재를 반영한다. 이것이 유물론 전체의 일반적 명제다.

- V. I. Lenin,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1908, 박정호 譯, 돌베개, 1992

 

따분한 이야기일 지는 모르나 철학적으로 인간의 유물론(唯物論)적 인식론(認識論)에 대한 언급이다. 즉,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 그들의 의식(意識)의 토대는 사회 자체를 물(物)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객관적 존재들이라는 의미이다.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초(楚)나라 지방 말단관리였던 이사(李斯)를 강대국 진(秦)나라의 재상으로 만든 계기가 되었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오래된 격언으로 이해하든,3) 제복을 예찬한 나폴레옹이 ‘군복이 진정한 군인을 만든다’는 의미로 이해하든 포괄적 의미에서는 무방하다. 인간의 모든 인식과정에서 어떠한 의식이든 그 기저에는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종의 물적 토대가 반영되어 있으며, 이 객관적 존재는 의식 형성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로 이해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의식은 물질적 조건이 그대로 반사된 것에 불과하다는 식의 유물론의 기계적인 해석은 온갖 물신적(物神的) 시각과 행태로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음에 물적 존재와 인간 의식 사이의 ‘동일성을 운운하는’ 터무니없는 시각은 진정한 유물론적 관점과 전혀 관계가 없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물질들 사이의 관계로 보이는 것들은 결국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의식에 절대적으로 반영되지만, 존재를 토대로 일단 형성된 의식은 상대적으로 그 토대가 되는 물적 존재에, 그 변화와 발전에 궁극적으로 기여한다는 변증법적(辨證法的) 인식론이 결국 진정한 유물론의 방법론이 된다. 이 같은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에 대한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회, 그 속의 ‘계급’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장 서두의 인용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사회 속에서 각각의 ‘대규모 집단’을 이루는 ‘이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의 생산체계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지위에 의해, 생산수단들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 의해 노동의 사회적 조직에서 그들의 역할에 의해, 그리고 결국,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적 부의 몫의 정도와 그 부를 획득하는 양식에 의해 서로 구별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의 생산체계란 무엇인가. 주지하다시피 지금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정의로서 자본주의는 어느 순간 하늘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노동을 통해 사회를 조직, 존속시켜온 인간은 노동의 도구, 혹은 생산수단을 포함한 사회적 부에 대한 소유를 중심으로 특정한 인간관계를 맺어왔다. 이를 정치경제학에서는 생산관계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민법, 상법 등의 사법(私法)적 형태로 대부분 규정되고 보장되는 이 관계를 통해 인간의 노동은 그 특정 사회에 맞게 조직되어 왔고 노동을 하는 인간은 그 관계 하에서 그들의 역할이 주어졌으며 그에 따라 인간의 ‘대규모 집단’들도 형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회적 ‘계급’인 것이다. 따라서 계급이라는 것은 앞 장에서 서술한 노동과 함께 고려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계급을 형성하는 생산관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노동과 함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생산력의 발전, 즉 양적 증대의 측면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각 사회의 생산체제를 특정지어온 각각의 발전단계는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형태를 중심으로 노동이 조직되어가는 방식인 생산관계를 통해 질적으로 변화되어 왔다는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또 다른 개념이 노동의 ‘분업(分業)’인데, 고전경제학의 시조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위대한 발견이 바로 이 질적인 생산관계의 역사적 특질을 이루는 ‘분업’의 발견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아담 스미스의 역작인 <국부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개념이 바로 ‘분업’이라고도 한다.

 

번영하는 문명국의 가장 일반적인 수공업자 또는 날품팔이 노동자의 생활용품을 관찰해 보면, 그에게 이러한 생활용품을 제공하기 위해 노동을 조금이라도 투하한 사람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수천 명의 도움과 협력 없이는 문명국의 가장 초라한 사람조차도 우리가 단순하다고 오해하고 있는 단순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것이다.

- A. Smith, <국부론(An Inquiry into Nature and Cause of the Wealth of Nations)>, 제1편 제1장

 

분업에 대한 위와 같은 간단한 소개와 함께 스미스는 노동의 분업이야말로 생산력을 증진하는 중요한 계기라는 설명을 하는데 그의 제자들인 고전경제학자들에게서 분업은 상품의 교환을 매개로 하는 시장경제의 측면에서만 이 의미가 국한되고 있다. 그러나 생산력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는 생산관계로서의 분업은 보다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얻어야 한다. 앞서 후에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로 했던 역사발전단계에서의 인간 노동 실현의 양태에 대한 고찰은 생산관계로서의 노동의 분업에 대한 이해와 불가결하다.

원시 공동체사회로부터 인간 노동의 경험이 축적되고 농업발전이나 전쟁 등을 통해 남는 재화들이 생겨나면서 이것에 대한 소유를 둘러싸고 인간 공동체에서는 대립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물론 원시 공동체사회에서는 남는 재화에 대한 소유가 기본적으로는 공동체에 귀속되었지만 생산력 발전을 위한 재축적과 관리의 필요성에 따라 다수의 노동하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소수의 계층이 생기기 시작되었는데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가 바로 최초의 사회적 분업의 형태이다. 육체노동자의 물질적 노동에 의해 부양되던 이들 지배자들, 즉 당시의 철학자였던 ‘정치적’ 정신노동자들은 생산력 발전을 위한 생산수단의 사적인 소유를 영속화시키기 위해 국가(國家)라는 단위를 형성하면서 인간 역사에서 고대사회를 열게 된다. 앞서 고대 사회는 노예노동에 기초한다고 했다. 즉 단위내 모든 사람들이 평등했던 원시 공동체적 사회관계는 소멸하고 노동력을 지닌 인간 자체인 노예를 포함한 일체의 생산수단을 독점한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대다수를 지배했던 사회가 바로 동서양을 막론한 고대사회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체제가 언제까지 영속될 수는 없는 법, 생산력의 증진이라는 물질적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의식들도 조금씩 고양되기 시작했고 이는 종교로 대표되는 사상(思想)의 형태로 고대사회를 압박하기 시작하였으며 분열된 지배층은 봉토(封土)의 형태로 당시에는 중요한 요소였던 토지를 분할하며 봉건지주(封建地主)들이 됨으로써 인간 역사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주지하다시피 철저하게 신분제에 기초한 사회였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은 고대사회에서 중세 봉건사회로의 질적인 발전을 이루는 데 이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어느덧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데 있어 주요한 지배이념으로 자리매김한 종교의 역할이었다. 어쨌든 중세봉건사회에서의 대다수 사람들은 고대 노예들과는 다르게 약간의 사적소유가 허용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토지와 지주들에게 인신적으로 구속이 된 채 자신의 노동생산물 대부분을 수탈당해야만 했다. 언제나 대다수가 노동을 통해 생산한 ‘잉여가치’는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축적되었으나 대다수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이러한 체제를 감당하기에는 어느덧 과학과 생산력의 발전이 너무나 앞서가게 되었다. 국제적 교류를 통한 상업의 발전, 전문적 수공업자들에 의한 산업의 발전이라는 양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농업노동에 기반한 중세의 봉건적 신분관계와 소유관계에서 상인이나 수공업자들과 같은 계층들은 항상 소외되어 왔던 것이다. 역사발전과정에서 생산력 발전이라는 양적인 형태에 질적인 변화를 촉진하였던 생산관계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더 이상의 발전을 막는 질곡(桎梏)이 된다.4) 여기에서 또 다시 나타나는 분업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분리였다. 또한 근대 자본주의사회가 시작되면서 대규모 공업이 등장하였고 인간의 노동은 본격적으로 생산력 발전을 위한 철저한 ‘부문내 분업’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으며 몇 백년도 안되어 인간 역사에서 생산력 발전의 신기원을 이루게 된다. 고전경제학자들이 예찬하는 ‘분업’은 근대사회 이후에 나타난 바로 이 자본주의적 ‘부문내 분업’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시각을 좀더 넓혀보면 ‘분업’은 인간의 역사발전단계에서 생산력 발전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생산관계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연적인 계기이다.5)

이제 다시 계급이라는 본 주제로 돌아오자. 산업도시의 발전과 봉건지배의 약화는 대다수 중세농노들을 농촌으로부터 쫓아내었고 이들의 노동은 이제 달라진 근대적 생산체제에 맞게 다른 형태로 조직된다. 한편 중세체제의 말기에 이르러 과학 및 산업의 발전과 함께 이들 상인 및 수공업자들은 최초에는 ‘중세 중산층’으로서 ‘부르주아지(Bourgeoigie)’라는 대규모 집단으로 형성이 되었고 공장 및 일체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를 통해 사회적 생산체제의 질적인 발전에 기여하면서 이른바 자본주의적 생산체제를 구축하였으며 그 이후 지금까지 ‘자본가’라는 대규모 집단으로 사회를 지배해 왔다. 자본가는 산업발전의 근간이 되는 자본을 비롯하여 모든 생산수단을 독점한 집단을 지칭하며 자본주의 생산체제에서 끊임없이 자기가치증식을 하는 자본의 운동이 계급적 형태로 인간화되어 표현된 것이다.6) 지속적인 자본축적과 생산력 발전을 이루기 위해 자본가라는 계급은 역시 일체의 사회적 생산수단을 소유한 상태에서 노동자들을 고용하였는데, 소위 부르주아지라고 하는 자본가 계급과 대비되어 모든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는 전혀 없이 노동력이라는 상품 하나만을 지닌 채 임금을 대가로 각 산업에 고용된 자들을 ‘임금노동자’ 혹은 근대적 의미로서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7) 라고 한다. 물론 자본주의 초기단계에서 이들의 대부분은 중세적 토지로부터 추방된 농노들이었다. 노동을 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 대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생산수단의 소유를 둘러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인해 철저하게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데, 그 원인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개념이 바로 분업, 생산수단을 비롯한 일체의 사회적 부에 대한 소유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 살고 있는 지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근대사회를 시작하게끔 했던 특정 생산관계에는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사회에 있어 가장 주요한 대규모 집단이자 전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계급은 사회 계층적 존재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대규모 집단, 즉 ‘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계급이며 결국 이 계급들의 역관계에 따라 해당 사회의 구체적인 성격이 규정된다.

 

 

3. 노동자계급-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임금노동자

 

‘임금이란 사용자가 근로의 대가로 근로자에게 임금, 봉급, 그 외 어떠한 명칭으로든지 지급하는 모든 금품’. 따라서 기본급, 시간외 수당, 연차수당, 상여금 등 명칭에 관계없이 ‘근로에 대한 대가성’, ‘노동력이라는 생산요소에 대한 상품값’만 인정되면 모두 임금에 포함된다. 임금의 전제가 되는 ‘근로의 대가’라 함은 사용종속관계 아래에서 제공되는 근로에 대한 보상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근로기준법 제 14조에 규정된 근로자가 같은 법 제 15조에 규정된 사용자의 지시, 명령 아래에서 제공한 근로에 대한 반대급부라고 규정할 수 있다.

-윤욱현, <새노동법 해설>, 한국경제신문사, 1999.

 

지금까지, 태어나자마자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게 된 인간은 물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노동이라는 생산적 행위를 해야만 했고 하나의 종으로서 존속하기 위한 조건인 생산력 발전을 위해 노동대상 및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를 중심으로 일련의 생산관계를 형성하면서 그 속에서 노동을 사회적으로 조직, 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대규모 집단’인 계급을 이루어 왔다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근대를 거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전유(專有)를 통해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자본가 계급과 시장에서 가치로 교환되는 상품화된 노동으로서의 노동력만을 가진 채 그에 고용되어 살아가는 노동자 계급이 주된 ‘대규모 집단’들이라는 뭔가 석연치 않은 규정까지 내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은 어떤 구체적 형태로 현상하고 있는가. 각 산업에 고용되어 노동을 통해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 구체적 형태인데,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파는 대신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노동을 하는 우리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될 ‘근로의 대가’, 즉 ‘임금’에 대한 언급부터 시작하자. 이 지점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12년간의 제도교육을 통해 바르게 성장한 우리들 귀에 자본가 계급이네 노동자 계급이네 하면서 어쩐지 께름직하게만 들리기만 하는 규정에 대한 해명이 필요한 출발점이다.

임금(賃金,wage)에 대한 정의는 이 장 서두에 인용했듯이 애써 표현하지 않아도 ‘봉급쟁이’인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이에 더하여 우리나라의 근로기준법 제 14조 ‘근로자의 정의’ 및 제 18조 ‘임금의 정의’를 보면, ‘사용자가 근로의 대상으로 근로자에게 임금, 봉급 기타 어떠한 명칭으로든지 지급하는 일체의 금품’을 ‘임금’이라 정의하고 이를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근로자’라고 한다. 이 법에서 말하고 있는 ‘근로’라는 개념은 본 글 첫 장에서 고찰한 인간의 역사적, 사회적 ‘노동’이라는 개념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지면의 한계로 인해 편의상 동일한 의미로 보자. 따라서 ‘노동’이라는 어휘와 좀더 친숙해지기 위해 법에서 규정한 일체의 ‘근로’를 그 맥락상 본 글에서는 ‘노동’으로 대체하도록 한다. 어쨌든,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노동’(근로)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이 법 제 16조 ‘근로의 정의’를 보면 노동은 정신노동, 육체노동 모두를 포함하는데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노동자는 이 사회에서 ‘직업을 불문’하고 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노가다’, 또는 육체노동에만 노동의 의미가 국한될 수는 없다는 것인데, 우리가 주목하는 노동이라는 개념은 단지 노동과정에서의 ‘기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노동을 통해 살아가는 하나의 ‘대규모 집단, 즉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노동자는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생산직 봉급쟁이든 사무직 봉급쟁이든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같은 사회적 지위에 있다는 인식이 우선된다. 고전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상품의 가격을 중심으로 볼 때 우리가 신고 다니는 신발의 가격과 옷의 가격이 같다면 상품시장에서 같은 값의 화폐를 통해 구매를 할 수 있기에 일반적으로 가치(교환가치)가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이는 결국 신발과 옷의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각각 지출된 추상적 형태로서의 노동량이 같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고전적이고 도식적인 이해로서 복잡한 현대사회의 다양한 노동을 설명할 수는 없다. 현대경제학에서 상품은 단순하게 재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형의 서비스도 포함하므로 각각 상품들의 가치측정에 관한 다양한 양태들은 좀더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기본적으로 상품생산을 위해 결정적 요소로서 결합되는 노동은 ‘직업을 불문하고’ 동일한 사회적 가치를 지니며, 그로 인해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력을 지불하는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동일한 사회적 지위를 차지한다는 의미로서 이해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앞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노동자들은 일체의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기관 및 그에 기반한 지식 등만을 지닌 채 임금이라는 대가를 목적으로 노동력을 지불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지닌 노동력이라는 요소 또한 시장에서 자유롭게 판매, 구매, 교환되는 다른 상품과 다를 게 없다. 즉, 노동력도 하나의 상품인 것이다. 여기에서 잠깐 상품 일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상품은 생산된 하나의 재화로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목적물로서 지니는 가치와 상품이기에 시장에서 교환되고 거래되는 과정에서 획득하는 또 다른 형태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정치경제학에서는 전자(前者)를 상품의 본질로서의 ‘사용가치(使用價値)’, 후자(後者)를 상품의 현상형태로서의 ‘교환가치(交換價値)’라고 구분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하고 가장 대량적인 것’이 지니는 이중성(二重性)을 폭로한다.8) 그러나 대상(對象)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배제하면서 기능적인 ‘과학’으로서 존재한다고 자부하는 경제학에서는 ‘사용가치’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교환가치’만을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가치’로 한정시키고 있다.9) 이 ‘가치’가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상품의 ‘가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술했듯이 우리 노동자들이 지불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에도 하나의 경제학적 ‘가치’, 가격이 존재하는 바, 이것이 바로 임금이며 ‘노동력의 가치’인 것이다. 따라서 상품 일반에 이중성이 존재하듯, 노동력이라는 상품에도 위와 같은 이중성이 있다. 즉, 인간의 협동적 행태, 분업을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조직된 총노동, 그리고 인간 본연의 창의성을 기반으로, 그 자체로는 잠재가치에 불과한 물적 대상들에 변화를 가하여 현실적인 가치-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사용가치’로서의 본질적 측면, 다른 한편으로 생산된 상품이 시장에서 교환되기 위해 측정되는 가치척도로서의 현상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로써 노동의 사용가치로서의 전자는 ‘노동의 가치’라 하고 후자를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교환가치를 형성하는 ‘노동력의 가치’라 하여 양자간에 본격적으로 구분선을 그을 수 있다.

상품의 가치가 측정되는 척도로서 그 상품에 결합된 노동력은 시간으로 측정되어 왔는데, ‘노동의 가치’로서의 본질은 질(質)적인 측면을 지칭하는 데 반하여 ‘노동력의 가치’로서의 현상형태는 시간으로 측정되는 양(量)적인 측면을 지칭한다. ‘사용자는 근로계약 체결시에 근로자에 대하여 임금, 근로시간, 기타의 근로조건을 명시하여야 한다’며 ‘근로조건의 명시’에 대하여 규정한 근로기준법 제 24조 조항에서 보듯이 노동자가 결국 임금과 맞바꾸는 것은 자신의 노동 자체가 아니라 양적으로 표현된 노동, 즉 일정한 노동량이며 이는 본질적인 ‘노동의 가치’가 아닌 ‘노동력의 가치’인 것이다. 봉급쟁이들이 가진 것이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다고 해서 ‘몸을 팔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단지 ‘노동력’이라는 상품만을 팔며 살아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상으로도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그렇다면 더더욱 ‘자유경쟁’의 시장경제에서는 임금과 노동력을 맞바꾸어 교환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또한 실제로는 어떠하든 일단 법적으로는 평등하다. 노동력을 팔았다고 해서 노동자의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인격, 본성, 권리 자체를 팔았다는 의미가 아닌 것인데, 이것이 고대사회의 노예, 중세사회의 신분제적 농노와 다른 점이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노동자계급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현대사회의 임금노동자들이 근대적 의미의 ‘프롤레타리아트’, 이미 화석화되어 버린 낡은 계급주의적 관념으로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갈수록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지금은, 지난 역사에서 항상 소외되어 왔고 객체로만 머물러 왔던 대다수 사람들에게 ‘계급’의 형태로든 ‘대중’의 형태로든 사회의 구성과 발전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과 지위가 주어져야 할 시점이며, 현재 이 대다수 사람들의 존재적 근거가 되는 것이 다름아닌 노동이라는 것이다.10)

임금과 자신의 능력으로서의 노동력을 교환하는 우리 사회 모든 봉급쟁이들, 즉 임금노동자들에 대하여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 글 첫 장에서부터 지루하게 고찰해 온 본질적 노동, ‘노동의 가치’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여 양적으로 표현된 ‘노동력’과 그것의 ‘가치’에 대해 주목해야 하고, 임금노동자 즉 봉급쟁이인 우리들이 상품으로서 판매한 노동력에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고 있는지, 사회 대다수인 봉급쟁이들에게 사회적 노동을 통해 축적된 사회적 부(富)가 정당하게 분배되고 있는지 고려해야 함은 물론, 우리 사회에서 임금노동자 즉 노동자계급이라는 ‘대규모 집단’의 사회적 지위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

 

사람으로 태어나서 당연하게 누려야 할 기본권으로서의 인권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며 평등하기에 법률상의 조문으로만 규정된 형식적 평등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평등한 인권을 확보해야 하는 출발점은 다름아닌 우리들의 노동일 것이다.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의 노동3권을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노동(勞動)이 곧 인권(人權)인 것이다.

 

(2003년 6월)

 







1) 고전경제학의 맥을 잇는 주류경제학(主流經濟學)과 다르게 인류의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하나의 과학으로서 경제학에서 또다른 주류를 형성하는 정치경제학에서는 노동을 통해 최종적으로 발현된 가치를 이윤(利潤,profit)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뭉뚱그려 표현하지 않는다. 상품생산의 요소를 불변자본으로서의 생산수단, 가변자본으로서의 노동력으로 분화하여 더 많은 가치는 노동(력)에 의하여, 나아가 절대적으로는 초과노동을 통하고 상대적으로는 자본의 투하 혹은 재투자를 통한 기술혁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가변자본으로서의 노동(력)이 생산해내는 가치를 잉여가치(剩餘價値,surplus value)라 엄밀히 규정하고 있다. 즉, 상품생산과정에서 노동이 결합됨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만들어내는 증가된 가치, 또는 최초의 가치를 넘는 초과분(아래책)을 잉여가치라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산업활동에서의 이득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이윤이라는 개념에는 생산과정 및 생산요소들의 기능에 대한 언급이 없다. 여기에서 간과하면 안될 것은 불변자본으로서의 생산수단에 투하되는 자본재투자와 축적의 과정도 인간이 한 가지 상품으로만 살아갈 수 없는 한은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기본적인 노동을 매개해야 하기 때문에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노동이라는 것이다.

“…노동과정은 노동력 가치의 단순한 등가물이 재생산되어 노동대상에 첨가되는 점을 넘어 계속된다. 노동력 가치의 등가물을 재생산하는 데는 6시간만으로 충분하지만, 노동과정은 이 6시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12시간 계속된다. 따라서 노동력의 활동은 그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초과가치를 생산한다. 이 잉여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와 그 생산물의 형성에 소비된 요소들(즉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차이다.”

(K. Marx, <자본론>, 1867, 제3절 제8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같은책.)


2) 노동의 양태가 각 경제체제에 따라 다르게 현상한다는 것에 대한 설명은 논의가 진전되는 과정과 함께 후에 다시 언급이 될 것이지만 해석의 차이에 따른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기본적인 내용만 우선 짚고 넘어가자. 즉, 인간의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라는 발전단계로 구분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사회에서는 사회계급의 차이에 따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유가 가능한 경제체제였기에 노동 자체도 다른 사람에 의해 전유(專有)되는 노예노동의 형태로, 중세사회에서는 농업의 발전과 함께 노동 자체가 전유되지는 않았지만 봉건지주들에 의한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이라는 명목하에 잉여가치의 가혹한 수탈을 기초로 한 봉건적 농노의 형태로,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중세에 그나마 가지고 있던 노동자의 생산수단에 대한 약간의 소유 자체도 완전히 박탈당한 채 가진 것이라고는 신체 하나로 시장을 통해 교환가치를 지니는 하나의 상품으로 전환된 노동력을 임금이라는 대가와 맞바꿀 수밖에 없는 임금노동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임금노동의 형태는 현대사회에서도 본질적으로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


3)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이사열전(李斯列典)’에 의하면, 이사(李斯)는 원래 초(楚)나라 사람으로서, 젊은 시절 지방의 말단관리로 있었을 적에 변소에서 더러운 찌꺼기를 먹던 쥐는 사람을 보고 놀라 급히 도망가는 반면, 커다란 곳간의 쥐는 좋은 쌀을 먹으며 사람이 와도 별로 놀라지 않는 광경을 우연히 목격하고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깨우침을 얻게 된다. 그는 곧바로 순자(荀子)를 찾아가 제왕의 법도를 익히고 약소국인 조국을 등지고 강대국 진(秦)나라로 가서 여불위의 식객을 거쳐 법가사상의 기반을 더욱 굳건히 하면서 진시황 정권의 재상으로서 중국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4) 사회와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론에 기초하여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관계를 규명한 다음 문구를 참조해볼 만 하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 즉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력들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에 들어선다. 이러한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그러한 실재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 일반을 조건짓는다.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들은 그 발전의 특정단계에서, 지금까지 그것들이 그 내부에서 운동해 왔던 기존의 생산관계들 혹은 이 생산관계들의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관계들과의 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관계들은 이러한 생산력들의 발전형태들로부터 그것들의 족쇄로 변전한다.’

(K.Marx,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 1859)


5) K.Marx, F.Engels, <독일이데올로기>, 제1편 1-3 ‘생산과 교류, 노동분업과 소유형태’ 참조.


6) ) 구매를 위한 판매만을 상정하는 단순상품생산은 재화 자체의 사용가치 취득 및 그 재화를 통한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서 기능하는데, 자본주의 생산체계에서 최종적 형태로서 화폐로 현상하는 자본은 끊임없는 투하 혹은 재투자를 통해 자기가치증식 운동을 지속한다. 사회적 계급으로 표현되는 자본가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이 운동에 있어 이른바 인격화된 자본이다.

‘…가치의 증식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자본의) 운동의 내부에서만 실현되므로,,, 자본의 운동에는 한계가 없다 이 운동의 의식적 담당자로서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 된다. 그의 일신(또는 보다 정확히 말해서 그의 주머니)은 화폐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이러한 유통의 객관적 내용(가치의 증식)이 그의 주관적 목적이 되고 추상적 부를 점점 더 많이 취득하는 것이 그의 행동의 유일한 추상적 동기로 되는 한에 있어서만, 그는 자본가로서-즉 의지와 의식이 부여된 인격화된 자본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K. Marx, <자본론>, 제2편 제4장, 자본의 일반공식)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하나의 대규모 집단인 계급으로서 자본가는 단지 돈이 많은 사람, 화폐를 많이 소유한 사람들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7)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는 전술했듯 산업사회에서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와는 전혀 상관없는 계급의 표현으로서 산업의 발전과 함께 농촌에서 쫓겨난 농민, 사회적 부를 분배받지 못한 채, 사회적 부에 대한 일체의 소유와는 전혀 상관없이 도시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빈민들을 이론적으로 지칭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어원은 라틴어의 Proletarii에서 나온 것으로서 로마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인구조사때 국가에 대한 존재가치가 오직 자손들(Proles)을 기르는 임무 외에는 없는 사람들에게 붙여졌다. 즉, 부나 지위, 특별한 능력 면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했다.’(J. London, <강철군화(Iron Heel)>의 각주에서 인용)


8) ‘상품은 사용가치(사용대상)임과 동시에 가치인 것이다. 상품은, 자기의 가치가 자기의 현물형태와는 구별되는 하나의 독특한 표현형태, 즉 교환가치를 가지게 될 때, 그 이중성을 드러낸다. 상품은 고립적으로 고찰될 때에는 교환가치라는 형태를 취하는 일이 없고, 그와 종류가 다른 한 상품에 대한 기치관계 또는 교환관계에서만 이 형태를 취한다.’

(K. Marx, <자본론>, 제1절 제1장)

사용가치는 모든 물질이 그 자체로 지니고 있는 가치,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고립된 가치로서의 본질을 의미하며 교환가치는 이 재화들이 시장을 통해 교환을 매개로 하는 상호관계를 이루게 될 때 측정되는 현상형태를 의미한다. 외부로 보이는 겉모습만이 아닌 물질의 본모습을 추적하는 철학적 사고방식에서 보면 상품만이 아닌 세상의 모든 물질은 현상과 본질이라는 이중적 모순에 기반한다. 물론 양자간에 어느 것이 우위에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9)경제학이 ‘노동의 가치’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사실상 (노동자라는 인물 속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노동력의 가치’이다… 노예노동에서는 소유관계가 노예의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을 은폐하는데, 임금노동에서는 화폐관계가 임금노동자의 무상노동(부불노동)을 은폐한다… 화폐는 그 지불수단으로서의 기능에서는 제공된 물건의 가치 또는 가격을, 따라서 이 경우에는 제공된 노동의 가치 또는 가격을 추후에 실현시킨다. 마지막으로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제공하는 ‘사용가치’는 실제로는 그의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력의 기능, 즉 재봉노동, 제화노동, 방적노동 등등과 같은 일정한 형태의 유용노동이다. 바로 이 노동이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를 창조하는 일반적 요소라는 것, 그리하여 이 속성에 의하여 노동은 다른 모든 상품과 구별된다는 것은 일상적인 의식으로서는 인식할 수가 없다.(K.Marx, <자본론> 제6절 임금 제19장 노동력 가치의 임금으로의 전환)


10) 본 글에서 계급을 다루었다고 해서 노동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굳이 계급적으로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하며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은 지칭하는 말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궁극적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발전시키는 한 주체로서의 정당한 사회적 지위만 인정될 수 있다면 노동하는 대다수 사람들을 어떠한 단어로 표현하든 무방할 것이다. 그에 대한 일례로 이탈리아 출신 정치학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의 규정으로서 ‘대중 노동자(mass worker)’와 같은 개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1968년까지 시기의 노동자에 대한 규정이다. 자본주의와 독점의 발전에 따라 세계는 초국적 자본의 지배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나 ‘대중 노동자’는 여전히 현대자본주의 초기의 포드주의적 대량 생산체계 속에 종속되어 탈숙련화되어 있으며 케인즈주의적인 개입주의 국가에 의해 지배되는 상태에 있다고 한다. 초국적 자본으로 대변되는 현재의 ‘제국’의 시대에서 그 변화와 대항의 주체로서 안토니오 네그리는 ‘대중(Multitude)’을 설정하고 있는데 이는 현대사회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조화되고 획일화되는 수동적인 ‘대중(Mass)’과는 달리 다양한 공통성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주체적인 욕망과 주장들을 결집해 나가는 무리를 지칭한다는 것이다.(A.Negri, M.Hardt, <제국(Empire)>, 2000, 윤수종 譯, 이학사, 2001. 참조) 이 다양한 ‘공통성’중 하나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노동’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러므로 현대사회의 한 축을 형성하는 거대한 무리로서 ‘대중 노동자’를 설정함에 무리가 따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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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법 - 인권의 높이를 보여주는 삶창문고 3
문재훈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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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바로 인권입니다!
- <삶창문고> 3부작 - 안재성의 [한국노동운동사1,2], 문재훈의 [노동법]
 

. 서론 – 인권과 노동권
. 본론
1. 인권과 노동권
. 인권
나. 노동권
2. 노동과 노동법
가. 노동의 개념
나. 노동법의 성격 및 역사
3. 우리 노동법과 노동조합
가. 개별적 노동관계 근로기준법 등
나. 집단적 노사관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등
다. 노동조합의 역할
. 결론 노동이 바로 인권입니다!  

 

. 서론 인권과 노동권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합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필두로 전세계에 걸쳐 연쇄적으로 건설된 민주주의 국가 치고 나라의 가장 큰 법인 헌법에 이 문구를 집어넣지 않은 나라는 없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늦게나마 민주공화국을 건설한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람들의 의식이 조금씩 더 민주화되고 다양한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주체로서 자리매김해 가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 인권(人權)’에 대한 관심은 발전되어가는 사람들의 의식의 속도만큼, 어떤 면에서는 그 이상으로 커지고 있습니다.  물론 다양성이 인정되는 지금 시대에서는 인권에 대한 이해와 해석도 각양각색일 것입니다. 헌법이 선언한 바 대로라면 모든 국민은 국가에 의해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합니다만, 지금 우리 사회의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는 실질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소수의 사람들과 가진 것이라고는 노동력 밖에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실질적으로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대다수 월급쟁이들에게 있어 인권은 어떠한 색깔을 지니고 있을까요?

노동교육을 인권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세계를 운영하는 기본주체가 돈이나 자본 등의 물질이 아닌 바로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철학을 재정립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인권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입장에서도 좀더 평등한 스스로의 권리를 찾아가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하지만, 본 교육을 통해 인권의 넓은 바다를 모두 항해할 수는 없습니다. 노동자 입장에서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한 목적이니 만큼 다소 협소하게 보이더라도 인권노동권을 하나의 인간의 권리로 연결하고 노동법을 매개로 하여 노동과 노동자, 그리고 노동조합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해보겠습니다.
 

. 본론

1. 인권과 노동권

. 인권

서론에서 거창하게 헌법을 언급했습니다. 이제, 인권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구체적으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근대법적으로 이 문구는 신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이슬람 격언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근대혁명 시기 시민의식이 발전하면서 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추해 본다면, 인권의 근거는 바로 이 되어야 하며, 현대의 법치국가는 인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면서 시작하므로, 헌법에 기초한 우리나라 대한민국도 당연히 국민을 보호하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합니다. 

. 노동권

다시, 헌법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우리 헌법은 2장에서 국민의 권리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 납세의 의무(38), 국방의 의무(39), 교육의 권리(31), 근로의 권리(32) 등입니다. 납세와 국방은 그대로 국민으로서의 의무이지만, 교육은 권리, 근로(또는 노동)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헌법 조항을 살펴보겠습니다(출처 : 대한민국헌법 0010 1987.10.29 전문개정)

* 헌법 31 

- 1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 2

모든 국민은 보호하는 자녀에게 적어도 초등교육과 법률이 정하는 교육을 받게 의무를 진다.

- 3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

* 헌법 32 

- 1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

- 2

모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진다. 국가는 근로의 의무의 내용과 조건을 민주주의원칙에 따라 법률로 정한다.

- 3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

- 4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임금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 5

연소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또한, 헌법은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라는 노동자의 가지 중요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 헌법 33

- 1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개별적으로 회사를 상대할 수도 있지만, 단결하여 조직할 있는 권리, 조직단체의 대표를 통해 회사와 교섭할 있는 권리, 노동조건의 향상이라는 목적을 위해 조직단체를 중심으로 파업, 태업 등의 실력행사를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 있고 국가는 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도 노동자가 사회적 약자이므로 국가적으로 보호받아야 함을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으며, 인권의 형태로서의 노동권이 중요한 권리라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헌법이 보장한 노동권은 하위법체계인 노동법에서는 어떻게 보장하고 있는 이후부터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2. 노동과 노동법

. 노동의 개념

노동권과 노동법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우선 지루하지만 노동에 대해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동근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식화의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냉전과 분단, 왜곡된 이념대립의 우리 역사 속에서 인간의 본질인 일하기라는 개념을 두고 북은 노동’, 남은 근로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오랜 벗을 북은 동무라는 우리말을, 남은 친구라는 한자어를 쓰게 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근로조합이 아니라 노동조합이므로, 인간의 본질인 일하기노동이라  부르며, 아래와 같이 정의해 보겠습니다. 레닌에 의하면, 개념정의라는 것은 한 줄로는 불가하므로 다각적으로 분류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자아실현체로서의 노동은

①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입니다.
동물의 한 종()으로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가장 먼저 접하는 대상은 객체로서의 자연이기에 당연한 전제입니다.

② 노동을 통해 인간은 객체로서의 자연을 변화시켜 자신의 합목적적 의지(合目的的意志)를 실현합니다.
원시적으로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 살아남기 위해 자연이라는 대상을 극복해야 했으므로  자신의 삶에 맞게 관념적이나마 목적을 세우고 그에 따라 물적으로 자연을 변화시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③ 노동을 통해 인간은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 또한 변화시킵니다.
인간은 대상을 변화시키는 데에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변화된 대상으로 인해 스스로의 삶의 양식을 변화, 발전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경제학적으로는 증식된 가치의 형태로, 축적된 자본의 형태로 생산력의 발전을 이룩하여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그에 따라 지속적으로 발전을 기획합니다. 변화, 발전에 대한 합목적적 의지는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행동방식을 규정한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로 인해 개별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할 수 있습니다

④ 노동은 결코 일회성 또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한 주체, 객체의 변화 및 발전을 이룩하려는 인간의 합목적적 의지와 그것의 외화(外化)된 형태로서의 노동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교육되며, 혁신되고 축적되어 인간 역사발전에 복무합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하고 있는 노동을 위와 같은 원론적인 개념만을 가지고 설명해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서술한 노동의 개념을 볼 때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만 지적하고 넘어가면, 노동이라는 것은 시초적으로는 탄생과 함께 자연이라는 거대한 대상과 마주하게 된 인간 개체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신체기관을 통해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출발하지만 하나의 개체로서만이 아닌 인류라는 하나의 종()으로서 존속하기 위해 더욱 발전된 노동을 실현하기 위한 생산도구를 다름아닌 바로 그 노동을 통해 축적, 발전시키게 되는데, 이와 같이 노동이라는 행위는 각각의 사회를 형성하는 인간 역사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혹은 생산력 발전이라는 유구한 과정에서 필연적인 계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은 본질적으로 한 개체로서의 인간인 개인의 시각에서는 자아실현의 매개로서 기능하는 동시에, 인간 역사의 발전을 견인해 내는 원동력으로서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노동은 결국 인간이 창조해 온 역사와 각각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떠나게 되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궁극적인 존재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노동은 항상 인간의 역사, 사회형태와 함께 고려되어야 할 개념입니다.

. 노동법의 성격 및 역사

1) 시민법(또는 일반법)과 노동법 사법과 공법의 교차점

법에 관한 지루한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개인개인으로 보면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는 국가로부터 법에 이한 보호를 받아야 하기에 다시 이야기로부터 출발합니다

개인이 취업을 하면 회사와 근로계약을 체결합니다. 우리 법체계에서는 계약법 따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민법과 상법 등에서 분야별로 계약법리를 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유, 평등, 박애를 근거로 하는 프랑스혁명 이후 근대법 체계에서 중요시한 자유, 중에서도 계약자유의 원칙에 기초합니다. , 만인은 앞에 평등하므로 계약 당사자도 평등하고 그에 따른 계약의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근대 이후 형성된 시민법 일반법리에서는 이처럼 모든 사람이 법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로 돌아오면 상황은 다릅니다

어려운 취업관문을 통과하여 회사에 들어온 노동자가 진정 회사와 동등한 지위에 있는가 생각해 봅시다. 물론, 회사가 노동자와 채용계약을 하지 않을 권리 못지 않게 노동자에게도 회사에서 일하지 않을 권리가 동등하게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회사는 일자리를 찾는 다른 노동자를 채용하면 되지만, 노동자는 실업자가 됩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우리나라는 헌법의 규정과 다르게 실업에 처한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하고 있으므로 현실적으로 시민법 또는 일반법 계약에 관한 노동자의 자유는 실업자가 자유입니다. 

따라서, 근현대 국가의 역사 속에서 노동자들은 노동법으로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노동의 역사 속에서 노동계약, 노동조합, 노사관계, 노동쟁의조정 등을 규정하는 이른바 노동법 계약자유의 사법과 국가에 의한 강제의 공법이 교차하는 성격을 지니게 됩니다.

2) 노동법의 역사 영국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초기 자본주의 발전은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현대에 이르는 후기 자본주의 발전은 미국에서 진행되었다고 있습니다. 대다수 농민들이 도시 노동자로 전환되면서 기업가(자본가)들은 대규모 공장제 생산을 통해 이윤을 얻고 부를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러한 생산력 발전과 생산관계 발전이 상충하는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대다수의 노동을 통해 부를 생산하고 축적하며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사회적 생산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를 종속시키고 착취하는 자본가의 생산수단의 사적 독점과의 모순입니다. 초기 자본주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비인간적 노예노동, 착취의 역사로부터 출발합니다.

자본축적의 역사는 노동착취의 역사의 다른 이름이며, 초기 노동법 제정이 초기 자본주의 발전이 촉발된 영국에서 시작할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영국의 노동법 제정 과정을 보면(서울남부노동법률상담센터의 문재훈 선생님의 [노동법]-삶창문고,2008-참고), 어이없게도 번째 노동법의 이름이 토론회 금지법’(1799), ‘노동자단결금지법’(1800)이었다고 합니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없도록 규제하는 법이었습니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기계파괴(러다이트 운동) 등을 통해 비인간적인 착취에 저항했고, 자본가와 정부는 단결금지법 폐지하고 단결완화법’(1824) 제정하게 되었습니다만, 법에서도 노동자의 단결과 행동으로 이윤이 적게 났다면 민사상 손해배상책임을 지우게 되는 단서를 달았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1802년의 공장법제정을 통해 열악한 공장노동 환경을 개선하고 노동시간을 법으로 제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공장의 주기적 청소, 아동에게 의복지급, 아동노동 12시간 제한, 노동시간 4시간 읽고 쓰기 교육 등을 규정하였고, 지속적인 개정을 통해 노동시간은 무한정에서 12시간, 1847 10시간, 1890년대를 거치면서 8시간으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우리 근로기준법의 전신이 공장법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노동조합법’(1871) 제정을 통해 노동조합이 불법에서 합법으로 전환됨으로써 노동조합 조직이 범죄행위에서 형사상 면책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한편, 1926년까지 모든 파업은 불법이었으나 1929 대공황을 겪으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1948 처음으로 파업이 합법화됨으로써 민사상 면책권까지 획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파업을 불법으로 몰아가는 행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3. 우리 노동법과 노동조합

. 개별적 노동관계 근로기준법 등

노동자는 개별적으로 사회적 약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노동자는 조직되어야 합니다만, 조직된다 하더라도 사회적 강자가 되는 것은 아닌 현실입니다

다시 헌법으로 돌아가면, 개별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노동조건의 최저기준을 법률로 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 헌법 32

3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

이렇게 하여 1953년에 우리나라도 근로기준법 제정하여 근로계약(해고제한 ), 임금,  하루 8시간의 노동시간 휴식(휴가), 여성과 청소년, 안전과 보건, 재해보상, 근로감독관, 기숙사 등의 최저기준을 정하고 이를 어길 벌칙조항까지 삽입하였습니다.

퇴직금 관련 조항은 2006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으로 따로 분리제정하여 퇴직연금 등의 운영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1970 11 13, 전태일 열사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외침과 함께 산화해 갔듯 사회적 강자인 기업가와 정권은 다른 나라의 사례를 토대로 근로기준법을 제정하기는 했지만 현실에서 실현하지는 않았습니다

근로기준법, 최저임금제법 등의 개별적 노동관계를 규율하는 법은 노동자가 싸워 얻은 그대로 노동권의 하한선이며, 사회적 약자인 개별 노동자들을 국가에서 보호하고 보장해야 함을 또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별적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기타 법률로는 헌법 32 1항에 따라 시행되는 최저임금제법, 노동자가 재해를 당했을 보장받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고용보험법 등이 있을 것입니다.  

. 집단적 노사관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등

역시, 다른 나라의 사례를 토대로 국가를 만든 이승만 정권은 1953년에 근로기준법뿐만 아니라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등도 함께 제정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헌법의 노동 3 보장과 헌법에 따라 위임된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따라 사회적 약자인 개별 노동자들은 단결하여 노동조합을 자유로이 조직할 있고, 조직을 매개로 사용자와 단체교섭 단체행동을 있도록 보장되어 왔습니다

신군부독재였던 5공화국 시기에 노동조합법은 노동자의 정치활동을 금지하였고, 노동쟁의조정법은 3 개입을 금지하는 노동자가 조직적으로 사회적 권익향상을 위해 싸우는 것과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법적으로 봉인하고 있는 대표적 노동악법이었습니다

1997년에는 이러한 악법 요소가 삭제되면서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이 통합되어 노동조합 노동관계조정법으로 제정되었습니다. 법은 노동조합, 단체교섭 단체협약, 쟁의행위, 노동쟁의의 조정 중재, 부당노동행위 처벌 등의 규정을 통해 노동조합의 정당한 노동권 쟁취를 보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1996 크리스마스 새벽에 김영삼 정권은 노조전임자의 임금지급금지를 통해 노조활동을 무력화하고, 복수노조를 허용하되 교섭창구를 단일화하여 노동현장의 혼란을 초래하는 등의 악법적 요소를 날치기로 통과시켜, 1997 전체 노동계의 거대한 전국투쟁을 촉발한 있습니다. 악법적 요소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차례의 유예를 거쳤으나, 2010년과 2011년에 걸쳐 시행되었거나 시행예정입니다. 노동자들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사수하기 위해 노동법의 악법적 요소를 철폐하기 위해 현재도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습니다

외에도 노동위원회법, 교원 공무원의 노동조합설립에 관한 법률 등은 집단적 노사관계 관련 법이라고 있습니다. 다만, 교원 공무원의 경우 노동자로 규정되고는 있지만 단체행동권은 제약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 노동조합의 역할

노동조합의 존재이유는 노동자의 사회적 권리향상이며, 존재근거는 자주적 단결입니다.

노동조합은 개별적으로는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집단으로 조직하여 사회적 강자인 회사와 정부를 상대로 노동자도 동등한 인간으로서 권리와 이익을 쟁취하여 모든 사회구성원이 실질적으로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끊임없이 기획합니다.

노동조합의 역사는 위와 같은 사회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민주노조의 전망을 만들고 지켜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사회에서 1987 민주화 이후 노동조합 운동은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체 노동자의 총단결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IMF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자들의 개인주의 및 파편화가 급속도로 전개되고 이를 계기로 하여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려는 정권에 의해 노동조합 운동은 위기에 처한 상황입니다. 우리 사회 주요 이슈인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양극화 문제,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 및 노조전임자 임금지급금지의 노동법 개악을 통해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려는 기도가 그것입니다.

파편화된 노동자들의 권리향상에 기업별 노조는 여전히 한계가 있습니다. 비정규직 문제, 상시적 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업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연대를 토대로 한 노동자 총단결 전망을 다시금 세우는 것이 절실합니다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체인 노동조합은,

대내적으로는 개별 노동자를 집단으로 조직하여 기업내 노동자의 권리 및 이익향상을 목적(경제투쟁)으로 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노동자들의 연대를 통해 사회적 권익향상을 이루어내고 궁극에는 사회적 민주주의를 완성(정치투쟁)하는 주요한 동력입니다


. 결론 – 노동이 바로 인권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당연하게 누려야 할 기본권으로서의 인권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며 평등하기에 법률상의 조문으로만 규정된 형식적 평등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평등한 인권을 확보해야 하는 출발점은 다름아닌 우리들의 노동입니다.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의 노동3권을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노동(勞動)이 바로 인권(人權)입니다! 

***

[참고]

1. [인권의 높이를 보여주는 노동법], 재훈, <삶이 보이는 창>, 2008.

서울남부노동법률상담센터 근무하는 저자 문재훈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인 인권이라는 개념을 시작으로 하여 한 사회 인권의 높이를 말해주는 최저 기준은 바로 생존권으로서의 노동이고 노동법이라고 하며 인권교육의 초보적 단계로서 노동법의 성격, 세계 및 한국의 노동법 역사를 일별하고 개별적 노동관계법으로서의 근로기준법과 집단적 노사관계법으로서의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등을 쉽게 풀어 설명한 책

2. [한국노동운동사1,2], 안재성, <삶이 보이는 창>, 2008.

: 일제강점기 전설적 사회주의자 이재유의 일대기를 그린 [경성트로이카]의 저자 안재성이 역시 초보 단계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사를 이해하기 쉽게 여러 문서와 자료 등을 조사하고 편집, 발췌한 책으로서, 1권에서는  한일합방에서 1945년 해방 이전까지의 역사를 평등한 세계를 기획하는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2권에서는 해방 이후 역시 사회주의자들과 전평(전국노동자평의회)의 투쟁 역사에서부터 1987년 노동자 대파업과 전투적 노동운동의 비약적 발전까지를 압축적이지만 노동계급적 당파성의 시각으로 서술한 책.

                                                                                                             (20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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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재장전 -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이현우 외 옮김 / 마티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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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현대의 군주’, ()의 재장전

- [레닌 재장전]을 통해 돌아보는 현재의 정치정당

 

현대의 군주, 즉 신화, 군주는 실제의 한 인격, 하나의 구체적인 개인일 수는 없다. 그것은 오직, 이미 인정받고 있으며 또 어느 정도까지는 행동을 통하여 스스로를 확인한 하나의 집단의지가, 그 속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는 유기체 혹은 복합적 사회요소일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이미 이러한 유기체를 보여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정치정당-보편적이고 전체적으로 되고자 하는 집단의지의 효소들이 함께 모여진 최소의 세포-이다.

- A. Gramsci. [옥중수고Ⅰ](1929~1935), <현대의 군주>,
‘마키아벨리 정치학에 대한 간단한 주석’ 중.

 

안토니오 그람시는 자신의 [옥중수고]에서 이탈리아 사람답게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에 주목한다. , 마키아벨리 이전에는 정치과학이 유토피아의 형식을 빌어 표현되거나 현학적인 논술의 형식으로 표현되었으나 마키아벨리는 이 양자를 결합하여, 교의적, 합리적 요소를 대장이라는 인격체 속에 육화시킴으로써 자신의 개념에 상상적이고 예술적인 형식을 부여하였으며, 순수히 이론적인 추상으로서의 군주를 통해 궁극에는 민중과 하나가 되고, 이 과정에서의 발화된 정치적 정열과 신화의 요소들이 실존하는 군주를 통해 이상적인 군주론이라는 정치적 선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람시에 있어 정치는 지배와 피지배의 전제하에 존재하는 것이고, 군주제 또한 사회를 통합하기 위한 전체주의적 시도를 군주라는 한 개인을 통해 실현하려고 했던 정치체제인 것이며, 현대에서는 이러한 시도를 구체적인 개인이 아닌 보편적이고 전체적으로 되고자 하는 집단의지의 효소들이 함께 모여진 최소의 세포로서 정치정당이 실현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정당의 역사는 어느 특정한 사회집단의 역사일 수 밖에 없으나, 이 사회집단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친구와 친척집단과 반대파와 적을 가지고 있주어진 정당의 역사는 오직 사회와 국가의 총체성에 대한 복합적인 기술 속에서만 드러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람시는 당연히 정당을 어느 특정한 사회집단, 계급을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는 바, 결국, 모든 정당은 어떤 계급의 학명(學名)에 불과한 것이므로 계급분열의 종언을 지향하는 정당은, 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계급의 표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됨으로써 정당 자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때에야 비로소 완전한 자기충족을 달성할 것(이하 [옥중수고])이라고 정당의 정치성을 육화시키고 있다. 
 


20세기 정치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조직이다. 조직적이지 않은 정치활동은 없으며, 실제로 정당이라는 단어가 이를 잘 보여준다. 1871년에 구성되었던 파리코뮌을 통해 알 수 있듯이, 19세기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지형이 펼쳐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활동의 기본은 봉기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에는 정치활동의 개념이 반란이었다면 20세기에 그것은 정당활동이었다고… 19세기 말에 정치를 담는 유일한 그릇이었던 계급이라는 범주가 몰락했다. 20세기 말에는 국가 정당이라는 정당 형태가 몰락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우리는 정당 없는 정치활동이라는 명제를 부여잡게 되었다. 이 메커니즘은 권력과 국가를 겨냥하지 않으며 인민을 지지하고 편든다. 이 메커니즘은 국가를 규정할 능력이 있지만, 국가의 주변에서 입장을 취하면서도 외부에 존재하고, 동시에 국가와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얘기이다.

- [레닌 재장전], 실뱅 라자뤼스, <레닌과 정당, 1902~17 11> .
 


20세기 정치사에서, 그것도 정당의 역사에서 레닌을 빼놓을 수는 없다. 노동계급의 자생적 의식혁명적 정당이라는 외부로부터 사회주의 의식이 주입되어 혁명을 이룬다는 혁명이론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이라는 실천까지 이루어낸 정치가가 바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 저작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주장한 혁명이론 없이 혁명운동은 없다라는 테제의 중심에는 언제나 당()이 있다.

이러한 사실이 유효한 이유가, 정당이라는 것이 정치권력 장악을 위한 도구로서 자본주의가 성숙했던 유럽에서는 정당의 정치활동 주무대가 의회였으므로 19세기의 계급이라는 범주는  정당 속에서 희석되어왔고 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당활동 자체가 20세기의 정치활동 개념이 되었는 바, 이러한 정치활동 개념을 뒤집고 정당을 중심으로 혁명을 실천한 이가 바로 레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주목해야 할 점은 사회변혁을 위해 레닌은 기존의 무대-의회주의  정당-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레닌 재장전]에서 슬라보예 지젝, 알렉스 캘리니코스, 에티엔 발리바르, 안토니오 네그리  외 여러 저자들이 지적한 지점은 비단 정치영역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들의 <레닌을 반복하기> 기획은 철학정치의 영역, 그리고 20세기 세계정치를 규정짓는 제국주의라는 주요한 이슈에 대한 레닌의 다양한 입장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저자들에게 20세기의 출발, 레닌의 재발견의 토대는 1914 1차 세계대전 국면이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의회주의 활동에 국한된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대부분 국익을 위해 전쟁을 지지했고 초반에는 독일 사회민주주의 교과서 칼 카우츠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레닌은 이 국면에서 결국 배신자 카우츠키와 등을 지고 망명지의 도서관에 파묻혀 헤겔을 연구한다

철학의 영역. 저자들은 레닌의 [철학노트]를 중심으로 레닌의 헤겔 다시 읽기가 그 자신 혁명사상의 인식론적 단절의 계기가 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관념론자 헤겔을 유물론적으로 단순히 뒤집는 것이 아니라, 헤겔 사유 속에 이미 내재해 있는 유물론을 재사유함으로써 그렇다는 것인데, 헤겔을 통해 마르크스를 재사유하려는 슬라보예 지젝의 작업이 <레닌을 반복하기> 기획에 미친 영향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레닌은 헤겔을 재사유한 [철학노트]를 통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다음과 같이 재조명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맨 먼저 부르주아(상품) 사회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하고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대량적이고 가장 일상적이며 헤아릴 수 없이 목격되는 단계, 즉 상품교환을 분석하고 있다. 그 분석은 이 가장 단순한 현상 속에서(부르주아 사회의 이 ‘세포’ 속에서-개별로서의) 현대사회의 모든 모순(혹은 모든 모순의 맹아)을 폭로한다. 계속되는 서술은 이 모순의 발전(성장은 물론 운동도)과 그 개별 부분들의 총합 속에서 이 사회의 발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방식은 또한 변증법 일반의 서술(내지 탐구)의 방법임에 틀림없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하고 가장 대량적인 것 등등으로부터 시작하면,이미 이 속에는 (헤겔이 천재적으로 지적하였듯이) ‘개별은 보편이다’라는 변증법이 존재한다… 이리하여 대립물(개별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에 대립한다)은 동일적이다… 변증법은 다름아닌 (헤겔과) 마르크스의 인식론이다.
 

- V. I. Lenin, [철학노트], <변증법의 문제에 대하여>, 1915.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을 통해 확고하게 재정립된 레닌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헤겔 속에서 한 번 더 변증법적으로 전환되고 있다.  

다음으로 제국주의 영역에서 레닌의 역할은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물론 급변하는 국제정세로 인해 민족주의에 대한 레닌의 입장은 일관성이 없기는 하나, 독점자본주의 최고단계로서 제국주의를 규정한 레닌의 정식화는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참고로,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정식은 다음과 같다. (1) 독점을 낳을 만큼의 생산 및 자본의 집중, (2) 금융자본(은행자본+산업자본)에 의한 금융과두제, (3) 자본수출의 중요성, (4) 독점자본가들의 국제적 동맹, (5) 독점자본 및 그 대변인인 국가에 의한 세계분할과 재분할. 

마지막으로 정치의 영역에서 가장 주요한 테마는 혁명과 정치정당이다. 또한 알튀세르에 의하면 철학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이 현실에서의 계급투쟁이므로 정치의 영역은 [레닌 재장전]의 모든 부분을 포괄할 수 있다. 1905년부터 시작한 러시아 차르체제에 대한 민중봉기, 총파업과 소비에트의 자생성은 레닌에게는 노동계급의 필연적인 사회주의적 자생성이며, 혁명을 목표로 사회주의정당의 전위는 이를 의식적으로 조직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로 대표되는 레닌의 당조직론과 철학적 재사유를 통해, 레닌의 정치이론이 기존 정당활동과 차이를 보이는 배경은 바로 제국주의, 식민주의, 세계대전-더 정확히는 1914년의 파국으로 진보주의라는 긴 시기가 정치적, 이념적으로 붕괴하고 난 뒤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조건이었고, 그 조건 속에서 그야말로 혁명적인 철학적 자기성찰이었으며, 그에 따른 신념 가득한 정치적 실천이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레닌’은 낡은 독단적인 확실성을 향한 향수어린 이름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되살리려는 레닌은 생성중인 레닌, 그의 근본적인 경험이 파국적인 새 성좌 속으로 던져지고 그 속에서 오래된 참조점들이 아무런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나버려 할 수 없이 마르크스주의를 재발명해야 했던 레닌이다. 묘비석을 찾거나 그림을 바라보는 것처럼, 레닌으로 단순히 돌아가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말이다. 우리는 레닌을 반복하고 재장전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오늘날의 성좌에서 똑 같은 추동력을 되살려내야 한다. 레닌으로의 변증법적 회귀는 ‘좋았던 옛혁명기’를 향수 속에서 재연하는 것도,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으로 옛 프로그램을 ‘새로운 조건’에 맞추는 것도 아니다. 그 보다 이 귀환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세계대전-더 정확히는 1914년의 파국으로 진보주의라는 긴 시기가 정치적, 이념적으로 붕괴하고 난 뒤-이라는 조건 속에서 혁명의 기획을 재창조하려는 ‘레닌의’ 제스처를 현재의 지구적 조건 속에서 반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라는 개념을 자본주의의 오랜 평화로운 확장이 끝난 1914년과 동구권의 붕괴 이후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형식이 생겨난 1990년 사이의 시간으로 정의한다. 레닌이 1914년에 한 것을 우리는 우리의 시대에 해야만 한다. 
 

- [레닌 재장전], 슬라보예 지젝 외, <서문-레닌을 반복하기> .

 

21세기인 현재 정당의 정체성은 무엇이며지금의 정치활동은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가. 그람시가 규정한 정치의 첫 번째 요소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지도자와 피지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인데, 정당이든 무엇이든 정치활동을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재차 상기함으로써 현재의 정당을 재장전해야 하지 않을는지. [레닌 재장전] 저자 중 하나인 앨런 샨드로는 1905년 혁명기의 소비에트와 노동계급과 당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그람시의 [옥중수고] 속 문제제기로 끝맺는다.

 

지도부를 구상하는 데서 한 가지 전제가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자와 지도받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해야 한다는 게 목표인가. 아니면 이런 분리가 더 이상 필요없는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 목표인가

-  [레닌 재장전], 앨런 샨드로,  

<레닌과 헤게모니:1905년 혁명기의 소비에트와 노동계급과 당> .

 

***

 

1. [레닌 재장전],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재원 외 옮김, <마티>, 2010.

: 스탈린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승리가 선언된 후 진보좌파 마르크스주의가 나아갈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하는 저자들-슬라보예 지젝, 알렉스 캘리니코스 등- <레닌 반복하기>를 기획하며 철학, 제국주의, 정치 영역에서 레닌의 혁명성을 재조명하고 있는 책. 현재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1914년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조차 국익을 위해 전쟁을 지지하면서 진보의 위기가 발생한 이른바 20세기의 시작과 닮아 있으며, 1914년의 국면에서 레닌이 헤겔 속 유물론을 재사유하고, 소비에트로 대표되는 노동계급의 자생성이라는 기반 위에서 혁명정당의 전위들의 결합을 통해 혁명을 이루어내었던 혁명의 제스처들을 현재의 조건에서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2. [철학노트],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지음,  홍영두 옮김, <논장>, 1989.

: 1914년 제국주의 세계전쟁과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배신 국면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해 레닌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저술할 때 그러했듯 망명지의 도서관에서 헤겔로 되돌아간다. 이전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주제도 철학이었지만 이는 경험주의, 상대주의인 오스트리아 마흐주의식의 경험비판론에 대한 다분히 논쟁적 의도로 저술되었고, [철학노트]에서는 헤겔의 [논리학] 적요를 시작으로 존재론’, ‘본질론’, ‘개념론등 철학의 기본개념부터, 즉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다. 레닌은 헤겔 속의 유물론을 재발견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 헤라클레이토스 등 철학의 대선배들의 사상 등도 두루 재학습하고 있다. [철학노트]는 헤겔의 [논리학]은 물론, [철학사 강의], [역사철학 강의] 등에 대한 적요 등을 포함하면서 관념론 철학의 완성체로서의 헤겔을 철저히 분석하고 정리한 대량의 노트라 할 수 있다. 그람시의 [옥중수고]와 같이, 발간목적이 아닌 마르크스주의, 과학적 사회주의의 재정립이라는 확고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진행한 방대한 학습노트, 수고록을 나중에 엮은 것이다. 철학학습을 시작하는 레닌의 금언은 다음과 같다.

헤겔의 논리학 전체를 철저하게 연구하지 않고 또 이해하지 않고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특히 제1(상품)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반세기를 경과하였지만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3.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지음,  박정호 옮김, <돌베개>, 1992.

: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전유럽에서 기승을 부렸던 경험비판론또는 오스트리아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마흐주의를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분쇄하기 위해 논쟁적으로 저술한 저서이다. 아직까지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경향이었던 엥겔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던 시기였다. , [반뒤링론](1878)이나 [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1888)에서의 엥겔스의 기본입장, ‘철학의 전장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양 진영 간의 투쟁이라는 테제를 기본으로 관념론 일체를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목적의식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이란 인간의 감각에 주어져 있으며 우리의 감각에 의해 복사되고 촬영되고 모사되지만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표시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라고 하는 유물론의 기본전제로부터 시작하여 객관적 진리는 존재하며 상대적 진리속에 절대적 진리가 항상 내포되어 있다는 식의 변증법적 사유방식이 결합된 변증법적 유물론의 엄격한 정식화를 시도하고 있다. 주관적 관념론에 불과한 경험비판론’, ‘마흐주의적 경향을 이러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철저히 비판하고 관념론 일체와의 적대적, 비타협적 투쟁을 위해 저술된 다분히 논쟁적 저작이다. 주제는 철학이지만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다루지는 않고 있으며, 전술했듯 레닌은 1914년의 국면에 이르러서야 [철학노트]를 통해 본격적으로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연구하게 된다.

 

4. [국가와 혁명],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지음,  김영철 옮김, <논장>, 1994.

: ‘모든 부르주아 국가는 그들의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고 끝까지 그 본질을 분석해 보면 부르주아지의 독재라는 동일한 본질이 드러난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풍부하고 아주 다양한 정치적 형태들을 창출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동일하게 될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이다라고 하면서 계급사회 국가의 본질을 분석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수립할 노동자국가는 기존 계급사회의 국가장치를 파괴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행체제를 통해 계급사멸-공산주의-을 달성해야 하고 그와 함께 국가의 역할도 소멸된다는 주장이다. 소비에트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7 8월과 9월에 발표된 저작으로서 계급국가의 정의와 분석으로부터 시작하여 엥겔스의 보충설명, 국가에 관한 각종 기회주의적 경향-카우츠키 류-에 대한 비판을 지나 1905년과 1917년 사이 러시아 혁명의 경험까지 기획하였지만, 임박한 실제 혁명의 정세를 맞아 제7장인 ‘1905년과 1917년 사이 러시아 혁명의 경험의 장을 시작하기 전에 중단된 미완의 저작이다. [레닌 재장전]에 따르면, 혁명 전의 레닌과 혁명 후의 레닌은 사상 및 실천적으로 구분되므로 [국가와 혁명]은 레닌의 혁명 전 사상을 표현하는 마지막 저작이 된다. 레닌의 이 미완의 저작은 1976년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알튀세르의 제자인 에티엔 발리바르-[레닌 재장전]의 저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가 저술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한역판은 [민주주의와 독재])를 통해 요약 및 정리된다. 그 한 예로, 국가론,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레닌의 세 가지 테제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국가권력은 항상 단일한 계급의 정치권력이다. (2) 국가장치가 없이는 국가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그리하여 기존 계급사회의 국가장치들은 혁명기에는 철저히 파괴되어야 한다). (3)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기이다.

결국, 계급사회에서 국가를 통해 실현되는 민주주의는 결국 한 계급의 독재에 불과하다. ,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동일하다.

 

5. [옥중수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상훈 옮김, <거름>, 1994.

: 국가는 강제의 갑옷을 입은 헤게모니, 국가와 시민사회, 강제와 헤게모니론, 기동전, 진지전 등의 이론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옥중에서 각 테마별로 저술한 기록을 엮은 책. <현대의 군주>-정당, 정치 등, <국가와 시민사회>-헤게모니론, <미국주의와 포드주의>, <역사와 문화>-지식인, 교육, <이탈리아 역사>, <실천철학> 등 각 주제별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람시의 사상에 관한 해설서는 많지만, 그 자신의 저서는 별도로 없다. 그람시가 한 말을 직접 읽어보고 싶다면 [옥중수고]를 직접 읽기를.

 

6. [레닌과 철학], 루이 알튀세르 지음,  이진수 옮김, <백의>, 1995.

: 철학과 과학의 관계, 철학과 정치의 관계 등을 연구한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가 철학 학계에서 철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레닌을 철학적으로 재사유한 책. 철학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다라는 유명한 테제로써 새로운 철학이나 실천철학 따위가 아닌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라는 사유의 증거로 레닌의 철학을 조명하고 있다. 레닌의 관점에서 철학의 당파성은 알튀세르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철학은 어떤 영역에 있어서 어떤 현실에 관한 정치의 어떤 연속이다. 철학은 이론 영역 내에서 보다 정확히 말해, 과학 곁에서 정치를 대변한다. 그리고 역으로, 철학은 계급투쟁에 참가한 계급 곁에서 정치의 과학성을 나타낸다. 유럽 전통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운동이 위기에 처한 1968년에 레닌을 철학적으로 <반복하기> 시작한 철학자, 바로 알튀세르였다.

 

(20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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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 이산의 책 46
사타케 야스히코 지음, 권인용 옮김 / 이산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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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의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
- 사마천의 [사기] 속의 유방(劉邦)과 변증법적 유물론 ‘재건’을 위한 슬라보예 지젝의 ‘시차적 관점’


두 개의 양립 불가능한 현상을 동일한 차원에 배치하는 허상은 칸트가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부른 것, 상호번역이 불가능하며, 어떠한 종합이나 매개도 불가능한 두 지점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일종의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현상들에 대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가상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두 층위 간에는 어떠한 관계도 성립하지 않으며 어떠한 공유된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일치한다 할지라도 말하자면 그것들은 뫼비우스 띠의 상반된 양면에 있는 셈이다. 

                                                                                -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중.

중국 역사서 [사기(史記)]는 사마천(司馬遷)이 부친 사마담(司馬談)의 업무를 이어받아 전한(前漢) 왕조 중엽인 서기전 1세기 초 무렵에 완성한 중국 통사(通史)인데, 편년체(編年體)가 아닌 기전체(紀傳體) 서술의 시초이다. 즉, 편년체로 불리는 대부분의 통사들의 연대기적 사건 나열과는 달리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 등으로 역사서술을 구분하여 씨실과 날실을 엮듯 사건과 인물들을 교차하여 다각적인 역사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 역사에서 고려시대에 편찬된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 또한 사마천 [사기]의 기전체를 그대로 본떠 그 당시까지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물론, 역사를 보는 시각은 많이 다르지만.

‘본기’는 ‘오제(五帝)’로부터 시작하여 사마천 당시의 한무제 까지 황제의 역사를 편년체 식으로 다루고 있고, ‘표(表)’는 말 그대로 역사 연표이며, ‘서(書)’는 예(禮), 악(樂), 봉선의식 등의 문화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사마천의 독특한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서 ‘세가(世家)’는 제후들의 역사, ‘열전(列傳)’은 천하에 명성있는 개인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열전’의 마지막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는 글쓴이의 역사관과 심경 등을 나타내고 있는데, 궁형을 받은 상황에서 부친의 업을 이어 [사기]를 서술한 사마천 본인의 심경은 물론, 부친 사마담이 못다 이룬 역사서술을 완성한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자기 이야기인 ‘自序’에서 ‘태사공(太史公)’은 사마천 자신이라기 보다는 부친 사마담이다.

[사기]는 역사서로서 당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사기]에서 가장 주요한 대목이 바로 한(漢)나라의 창건과정을 다루는 ‘초한전쟁(楚漢戰爭)’의 기간인 바, 한나라 시조인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다룬 ‘고조본기’, ‘항우본기’의 기록이 그 부분이며,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초한지(楚漢誌)]의 기본 뼈대이다.
중국 역사에서 ‘서민황제’는 공식적으로 두 명이 있다. 유방은 풍읍 패현 출신의 건달에서 통일중국 황제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인 바, 중국 역사 최초 서민황제이다. 두 번째로 약 1세기 이상 지난 후 명(明)나라를 건국한 주원장(朱元璋)은 ‘서민황제 2호’로서 유방과 같은 패현 출신이나 건달 우두머리격이었던 유방의 ‘가문’에 비해 다 쓰러져가는 농가의 자식이었으므로 ‘빈민황제’에 더 가깝기는 하다. 당나라 말기 후량을 건국하여 장안 일대를 잠시 평정했던 주온 또는 주전충도 서민 출신이기는 하나 황제라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고, 또다른 ‘황제’ 모택동도 서민 출신 아니냐고 하는 시각도 있기는 하다.

어쨌든, [사기]는 후한(後漢) 시대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로 계승되는 한나라 정권의 역사서로서 유방의 건국과 창업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는 시각으로 쓰여진 면이 농후하다. 아니, 그렇게 역사 속에서 수정되어 왔을 것이다. 관변 언론의 이러한 역사서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한서]의 경우 [사기]에 없는 내용은 없고 한나라 고조 유방에 관한 한 철저하게 미화하고 있는 반면, [사기]의 경우에는 고조본기, 항우본기, 뿐만 아니라 동시대 제후들의 세가 또는 열전을 보면 모순되는 서술이 자주 보임으로 인해서 정권 미화의 시대적 압력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역사 그대로를 보여준다고 한다.

하나의 예로, 유방이 항우를 죽이고 초한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해하 또는 진하’의 결전 후 제왕(齊王) 한신의 군대를 접수한 사건을 보자. ‘고조본기’에서는 ‘해하 또는 진하’의 결전으로 “참수가 8만 급, 드디어 대략 초 지방을 평정했다”고 기록하면서 초군이 사방으로 흩어진 후 유방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패잔병을 추격하여 노(魯)나라 지방에 이른 후 정도(定陶)라는 곳으로 돌아와 한신의 지휘권을 박탈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고조본기’는 “정도로 돌아와 말을 달려 제왕(한신)의 성에 들어가 그 군을 빼앗았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한신의 일대기인 ‘회음후열전’에는 “항우가 깨진 뒤, 고조는 기습하여 제왕의 군을 빼앗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누구라도 후자인 ‘회음후열전’이 더욱 사실에 가까움을 짐작할 수 있다.

한신(韓信)이 누구인가. 항우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하여 유방군에 가담했으나 유방 또한 신임을 주지 않음에 실망하여 도망쳤지만 유방 정권 제1 공신 소하의 인정을 받아 유방군 지휘권을 얻어 옛 주나라 본지라 하는 삼진은 물론 제나라까지 평정함으로써 바야흐로 유방, 항우와 함께 천하를 삼분할 수도 있었던 인물 아니었던가. 또한 한신군은 신병들을 모집하여 강군으로 양성 후 여러 전쟁에서 참패하여 자신의 군영으로 도망친 유방에게 그 훈련된 병력을 주고 자신은 또 다시 신병들을 이끌고 출전함으로써 유방군의 병력에 있어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았다. 이러한 한신의 참모 괴통은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한신에게 권하였음에도 정치적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실무적인 인물이었던 한신은 이를 거절하고 유방을 위해 혼신을 다하여 공을 세웠고, 결국 제왕에서 회음후로, 즉 왕에서 제후로 격하되다가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명언을 남긴 채 반역죄로 죽임을 당한 인물이었다. 항우를 제압한 유방에게는 최대의 적수가 아닐 수 없었으므로 유방은 필연적으로 한신을 제거할 수 밖에 없었으며 애초부터 계획적으로 한신의 병력을 접수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기]는 ‘고조본기’가 아니라 ‘회음후열전’을 통해 유방의 한신 ‘기습작전’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식과 서술에서 유물변증법과 ‘시차(視差,Parallax)’의 관계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시차(視差,Parallax)’란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공통언어나 공유된 기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고차원적인 종합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시차적 간극이라는 개념은 결코 변증법에 되돌릴 수 없는 장애물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그 전복적 핵심을 간파할 수 있게 만드는 열쇠를 제시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이러한 시차적 간극을 적절히 이론화하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재건하기 위해 필수적인 첫 단계이다. 

                                                                                -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중.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현대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하기 위하여 기존 헤겔식의 정반합적 구조를 해체하고 애초부터 다른 기반에 입각한 시각들의 끊임없는 긴장과 그 속에서의 관계정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각을 전제로 하여 철학, 과학, 정치 분야에서 각 사안들을 다루고 있는 바, 변증법적 유물론의 도식화를 철저히 배제한다. 슬라보예 지젝에게 이전 마르크스주의 도식화는 문학과 영화, 뮤지컬 등의 구체적인 분야에서 전반적으로 해체되며 항상 새롭게 분석되어야 한다.

역사서로서 [사기]를 보는 유물론적 해석은 이렇다. 본기와 세가, 열전을 넘나드는 서술의 모순과 불일치는 사마천의 원래 의도 여부와는 무관하게 [사기]가 하늘이 내린 한나라 정권의 합리화의 도구도 아니고 확인불가한 역사적 사실 그대로의 기술도 아닌, 춘추전국시대와 진(秦)나라를 거쳐 동양적 봉건양식을 넘은 중앙집권적 군주제 확립이라는 ‘경제발전단계’의 필연성을 토대로 하여 역사 속에서 내재된 다양한 해석과 관점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닐는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방법론에 관하여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에 관하여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방법론은 사건을 실제로 그러했던 바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혁명의 현실과 그 마지막 결과에서 배반된 숨겨진 잠재력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요점은… 어떻게 이렇게 배반된 급진적 해방의 잠재력들이 역사적 유령들로서 끈질기게 ‘존속’되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혁명적 기억을 일깨워 그 실현을 요구함으로써 이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또한 이 모든 과거의 유령들을 구원하도록(영면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중.

다시 [사기]의 초한전쟁으로 돌아가자. 유방과 항우로 대표되는 영웅들의 천하쟁패는 이후 중국의 여러 역사속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후한 말기의 황건농민반란을 거쳐 위촉오(魏蜀吳) 삼국전쟁, 위진(魏晉) 이후 5호16국은 이민족의 경쟁을 통해 중국문화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점, 수나라 말기의 군웅전쟁, 당나라 이후 5대10국은 분열왕조 중 권력유지가 최상의 문화가치가 되었던 최대의 암흑기였던 점, 한족 재부흥의 송나라 건국과 원나라의 침입, 원나라 말기 홍건농민반란 및 빈민혁명가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과 민중배반 등의 역사는 진(秦) 말기 유방, 항우 초한전쟁에 관한 [사기]의 모순된 기술들 속에 대략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남아 있는 기술상의 모순은 바로, [사기]를 유물변증법적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주요한 조건이고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관점정립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요소이며, 이로 인해 사마천의 역사의식은 현대에 이르러 한껏 빛을 발하지 않겠는가.


***

1. [유방(劉邦)], 사타케 야스히코 지음, 권인용 옮김, <이산>, 2004.
: 사마천 [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한고조 유방의 일대기를 서술한 일본 문학자 사타케 야스히코의 저서로 [사기]에 자주 보이는 서술상 모순은 사마천이 반고 등과 같은 관변 역사학자를 초월한 뛰어난 역사학자임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한고조 유방의 생애는 물론, [사기] 뿐만 아니라 역사서 속에 내재한 역사의 생생한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시각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2.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 ‘현대 철학이 처한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는 지젝의 도전’이라는 슬로건으로 도식주의에 빠진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하려는 구 유고슬라비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 도발이 담겨 있는 저서라고 볼 수는 있으나 솔직히 너무 어려워서 ‘철학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접하기에는 무리가 많이 따르는 책이다. 기존 헤겔식 정반합 도식을 벗어나 ‘시차적 관점’을 통해 ‘상호번역이 불가능하며 어떠한 종합이나 매개도 불가능한 두 지점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현상들에 대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가상’과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 대략의 내용인데, 이러한 시차적 간극을 ‘적절히 이론화’하기 위하여 철학, 과학, 정치 분야에서 각 사안들을 지루하고도 최대한 어렵게 다루고 있다. 이 책에 따른다면, 결국 시차적 간극을 최대한으로 좁히는 것이 변증법적 유뮬론자들의 최대강령이 될지도 모른다. 영화나 뮤지컬, 문학 등의 개입도 많이 언급한 철학서이기는 하나 영화 매트릭스의 철학적 관점을 논한 [매트릭스로 철학하기]가 그나마 읽기 편하다.

3. [사기], 사마천 지음, 김진연 편역, <서해문집>, 2002.
: 총 3권에 걸쳐 중국 통사를 뼈대로 하여 [사기]의 ‘표’와 ‘서’를 제외한 ‘본기’, ‘세가’, ‘열전’에 나온인물들을 엮어 서술하고 있다. 사마천의 역사의식, [사기] 관련 고사성어 등을 잘 정리해 놓은 책.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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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파업론 - 풀무질신서 4
로자 룩셈부르크 지음 / 풀무질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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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반자본주의’와 ‘대중파업론’
- [대중파업론]을 중심으로 본 [반자본주의 선언], [반자본주의]

"대중파업은, 러시아 혁명에서 나타났듯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효과를 높이려고 머리에서 쥐어짜 낸 교묘한 방법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운동방식이며, 혁명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현상형태이다… 대중파업은 몇 년 동안, 아마도 몇 십 년 동안 지속된 계급투쟁의 모든 시기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개념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론] 중.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계급의 경제투쟁과 사회주의(또는 공산주의) 건설을 위한 정치투쟁 간에는 예나 지금이나 괴리가 있습니다. 물론 유물변증법의 사유방식에 따라 정식화해 버리면 양자는 변증법적 관계로서 상호대립하지만 상호침투하면서 결국 통일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관념의 영역, 철학적 테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철학은 언제나 새롭게 ‘실천’되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반자본주의’의 기치를 내건 우리의 노동계급 운동은 현재 경제투쟁에 더욱 침잠하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던 이 땅 최초의 ‘노동계급 정치세력화’, ‘사회주의 이상 실현’이 일단의 실패를 겪으며 진보정치의 질적 전화가 좀처럼 쉽지 않고 미국발 금융위기가 어둡게 드리운 와중에 자본가와 그들의 정권은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협박하고 있습니다. 더욱더 일만 열심히 하라고요.
 

한편으로는 미국 주도의 세계화와 그에 대한 ‘저항의 세계화’로서 ‘반세계화’ 운동이 진정 세계적으로 활발한 듯 합니다. 급진적 맑시스트들은 이 운동 속에서 사회주의적 경향을 옹호하면서 시장경제가 판치는 세상에서 분배와 계획의 세계정치를 기획함으로써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초보적인 수준에서는 사이먼 토미의 [반자본주의]가 있고, 좀더 좌익적으로는 앨릭스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계경제포럼에 대항한 세계사회포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팻 데바인의 ‘민주적 참여계획 사회주의(DPPS)’ 등을 예로 들면서 전세계적 민중적 코뮌 지도부 같은 것을 구상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반자본주의’ 운동이 활성화되는 것, 더군다나 사회주의적 기획으로 이 운동을 이끌려는 노력이 지속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땅 노동계급은 아직 미래를 기획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노동계급 정치세력화의 후퇴가 원인일 것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6년의 저작 [대중파업론]에서 (사회민주주의)당의 정치투쟁과 그 부분으로서의 경제투쟁간 상호관계를 분석하면서 이를 잇는 가교로서 ‘대중파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운동의 발전이란 최초의 경제적 단계가 생략된 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시위의 모든 단계를 관통하는 빠른 속도와 파업이 전진하면서 다다르는 절정 속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정치투쟁의 모든 활발한 공격과 승리는 경제투쟁에 강력한 자극을 준다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이 휴지기를 맞이할 때마다 노동자들을 지탱해 준다. 말하자면,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에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노동자계급 역량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이다…
한마디로 경제투쟁은 운동을 하나의 정치적 촛점에서 다른 촛점으로 나아가게 하는 장치이다. 정치투쟁은 경제투쟁의 토양을 주기적으로 기름지게 한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는 끊임없이 자리를 바꾼다… 이 두 요소의 통일이 바로 대중파업인 것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책.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자는 운동의 미래를 대변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굳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권력을 쟁취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경제투쟁을 넘어 정치투쟁의 장을 반드시 열어야 합니다. 
 

현재의 ‘반세계화’, ‘반자본주의’ 운동의 흐름에 동참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 또한 노동계급 정치세력화일 것이라는 생각을 당최 버릴 수가 없습니다.  

 ‘1999년 시애틀’과 같은 반세계화 시위, 우리의 대규모 촛불시위 등도 넓게는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대중운동입니다. 더 나은 다른 세상을 기획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대중운동이 반드시 노동계급의 ‘대중파업’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여전히 노동계급 정치세력화는 폐기할 수 없는 전략일 것입니다. 
 

"노동조합 투쟁은 노동운동의 직접적인 이해를 포함하지만 사회민주주의적인 투쟁은 미래의 이해를 포함한다
노동조합 활동의 중요성과 절대적인 필연성을 강조하지만 이러한 활동의 한계와 그에 대한 비판에 중점을 두는 사회민주주의의 총체적 진리에서 일상적 투쟁의 적극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노동조합의 부분적 진리가 나온다.   

노동조합 운동은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불합리한 몇몇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환상 속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에서 승리해 온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의식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노동조합 운동은 사회민주주의의 한 부분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책.

 

***

 

1. [대중파업론], 로자 룩셈부르크 지음,  최규진 옮김, <풀무질>, 1995.
: 1906년의 저자는 노동계급의 파업을 경제투쟁에 한정지으려는 선진 자본주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의식과 운동의 미래를 포함하는 사회민주주의의 정치투쟁 및 당운동을 별개로 구분하는 인식을 비판하면서,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계급투쟁의 모든 시기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개념이자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통일된 현상형태로서 대중파업을 정의하고 있다. 당시 선진적이었던 독일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경제투쟁을 우선하는 후진적인 인식에 비해 후진적이었던 러시아 노동계급의 대중파업의 역사적 역할을 고찰하면서 혁명의 시기에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경제투쟁과 계급투쟁의 미래를 담보하는 (사회민주주의)당운동의 공동행동의 필요성을 설파하며, 양자를 이어주는 중요한 장치로서 대중파업을 강조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표 저작이다.
 

2. [반자본주의], 사이먼 토미 지음,  정해영 옮김, <유토피아>, 2007.
: 영국의 정치이론가인 사이먼 토미가 1999년 시애틀 사건 등으로부터 촉발된 반세계화 운동을 초보자(beginner)를 대상으로 소개한 책이다.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시장독재, 즉 시장만이 존재하는 지구 엘리트들의 세계화 흐름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기초적인 소개와 반세계화 운동을 질적으로 변화시킨 시애틀 반세계화 시위의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서술하고, 개혁주의에서부터 반자본주의, 멕시코의 사파티즘까지 아우르는 반세계화 운동, 이들 운동들의 운동을 소개 및 분석하고 있으며, 미국이 중심인 세계화 흐름에 대한 저항으로서, 시장경제에게 빼앗긴 세계정치의 복원을 기원하면서 이 운동들의 운동을 정리하고 있다. 지구 엘리트들의 세계경제포럼(WEF)에 대항한 세계사회포럼(WSF)의 중요성, 권력쟁취를 위한 종적인 다수의 정치보다는 인터넷 등의 횡적인 소수의 정치 또는 네트워크의 중요성 등을 강조하면서 현재 하나의 경향으로 통일되지 않은 반자본주의 운동의 불확실성 자체가 운동의 미래와 성공을 방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3. [반자본주의 선언], 앨릭스 캘리니코스 지음,  정성진/정진상 옮김, <책갈피>, 2003.
: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중앙위원이자 유명한 트로츠키주의자인 저자는 1999년 시애틀 사건 이후 질적으로 촉발된 반세계화 운동들의 다양한 흐름과 전망을 분석하면서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의 이념을 준거점으로 하여 이들 운동을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정식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공산당 선언]은 맑스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비판 중 가장 유명한 정식화로서, 작금의 반자본주의 운동은 다시 이러한 비판을 이론과 실천 양자에서 다시금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맑시즘의 입장에서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를 옹호하며 지구를 망치는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부르주아적, 지역주의적, 개량주의적, 자율주의적, 사회주의적으로 다양한 전략들을 소개하고 다른 세계의 구상으로서 팻 데바인의 민주적 계획 모델을 조심스레 제시하고 있는 바, 저자의 이와 같은 사상적 경향은 경제만이 판을 치고 있는 세계화 공간에서 분배와 계획의 틀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감으로써 더 나은 세계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 기인한다. 
 

4. [역사의 복수], 앨릭스 캘리니코스 지음,  김택현 옮김, <백의>, 1993.
: 가장 강력한 서기장의 보복보다 역사의 보복이 더 무섭다고 한 레온 트로츠키를 인용하면서 저자는 동유럽을 포함한 이른바 공산주의의 몰락이 결국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한 스탈린주의의 몰락에 불과하며 시장만이 존재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라는 고전 맑시즘을 옹호하고 있다. 공산진영의 몰락은 좌파의 위기가 아닌 사회주의를 마침내 스탈린주의의 악몽으로부터 해방시킬 기회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과 근거를 담고 있는 학술적 논문으로서 독서가 그리 용이하지는 않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다
 

5. [좌익 공산주의], 오세철 엮음,  <빛나는전망>, 2008.
: 현재 독자적인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을 주장하고 있는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운영위원장인 오세철 교수가 혁명적 공산주의 입장들을 엮어낸 책이다. 혁명적 공산주의 그룹인 국제공산주의흐름(ICC) 등의 이념과 강령 등을 소개하면서, 레닌 말년의 팜플렛인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은 유아적 무질서의 오역에 불과하다는 주장과 함께 스탈린주의 뿐만 아니라, 현존 사회주의 체제 전체를 개량으로 해석하고 진정한 좌익 공산주의의 세계적 연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혁명적좌익 공산주의의 현재 흐름 및 입장을 일별해볼 수 있는 책이다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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