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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3 -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 보이는 법이다
사마천 지음, 김진연 옮김 / 서해문집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같은 말에도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다르다
(說者同而得失異者)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통해 보는 고사성어(故事成語)(10)
: ‘항우본기(項羽本記)’, ‘고조본기(高祖本記)’를 통해 본 초한전쟁(楚漢戰爭) - 2
사학법(私學法) 개정을 반대하며 수구세력(守舊勢力)이 국회를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치권에서 ‘연회(宴會)’를 열었다. 연회의 시작은 단연 여당인 열린우리당이었다. 2006년 1월의 내각인사 이후 원내대표와 당의장을 새로 선출한답시고 한창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하더니 신임 여당 원내대표와 역시 새로 뽑힌 야당의 원내대표가 설날 다음날에 북한산에 오르면서 정치적 연회의 절정을 이루었다. 북한산 정상에서의 양당 원내대표의 합의. 사학재단의 ‘사유재산(私有財産)’을 지키고 ‘국가정체성(國家政體性)’을 ‘수호(守護)’하고자 국회문을 박차고 나갔던 수구야당은 다시 국회 등원을 선택했고, 여당에서는 사학법의 재개정을 전제로 한 합의가 아니었다고 손을 내젓는다. 입시경쟁 위주의 교육제도를 통해 자신의 ‘사유재산’을 더욱더 불리고 ‘교육(敎育)’이라는 허울을 빌어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한 온갖 비리를 일삼던 사학재단을 개혁하고자 했던 애초의 취지는 사학법의 재개정의 가능성과 더불어 이미 민중들로부터 의혹의 눈초리를 받기 시작했다. “‘일점일획(一占一劃)’도 고치지 않겠다”는 여당 지도부의 수사(修辭)에도 이 땅 민중들은 별로 수긍을 하지 않는 듯 하다. 정치(政治)는 결국 ‘타협(妥協)의 예술(藝術)’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206년, 진(秦)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을 항우(項羽)보다 먼저 점령한 유방(劉邦)은 뒤따라오는 항우의 세력에 겁을 먹고 일단 근처 패상(覇上)이라는 지역으로 물러나 있었고, 뒤늦게 함양에 도달한 항우는 홍문(鴻門)이라는 곳에 40만의 군사를 주둔시키고 10만에 불과한 유방의 군사를 치려 하고 있었다. 이에 항우의 숙부인 항백(項伯)은 오래전 유방의 책사(策士) 장량(張亮;張子房)으로부터 신세를 진 바 있어 다음날의 참사를 미리 알려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돕고자 유방의 진채로 찾아든다. 하지만 장량은 유방을 버리고 도망갈 수는 없다며, 항우에게 항복할 것을 유방에게 권유하였고, 유방은 항백을 맞아 자신은 원래부터 함양을 들어 항우에게 바칠 의사였노라고 말한다. 이에 항백은 유방에게 그 다음날 직접 항우를 찾아가서 그 뜻을 전하라고 권하지만, 천하를 차지하려는 유방의 큰 뜻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항우의 책사 범증(笵增)은 유방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꺾지 않는다.
다음날, 항우를 찾아간 유방은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사죄하는 한편, 범증은 항우의 사촌동생 항장(項莊)으로 하여금 검무(劍舞)를 추게 하여 유방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검무의 짝을 맞추면서 이를 교묘하게 제지한 항백과 당시에는 항우를 위해 일했으나 후에 유방의 또 다른 책사로 활약한 진평(陳平)의 도움으로 유방은 술에 취한 척 하며 자리를 떠남으로써 항우를 속이고 무사히 목숨을 보전하게 된다. 유방이 슬그머니 도망갔음을 알아챈 범증은 유방이 헌상한 옥두(玉斗;옥으로 만든 국자)를 칼로 내리치며 분개했지만 이미 항우의 마음은 풀어졌으며 유방은 40리나 떨어진 패상으로 도주하고 난 후였다.
‘홍문연회(鴻門宴會)’는 유방의 언사에 속아 넘어간 항우가 헛되이 베푼 잔치인 동시에 유방을 유인하여 모살(謀殺)하려는 범증의 살육제(殺戮祭)였으며, 궁지에 몰린 유방이 후일을 기약하며 일단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처절한 정치적 타협의 장이었다.
鴻門宴會 (鴻門:홍문, 지역이름 / 宴:잔치 연 / 會:모이다 회)
홍문의 연회, 유방을 제거하려는 범증의 계략(計略)이 화려한 검무로 위장되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순간에 자신의 속내를 감춘 유방이 항우를 회유하여 속이는 한편, 강한 상대 앞에서 비굴한 모습도 불사하면서 술에 취한 척 도주함으로써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여 후일을 꾀할 수 있게 한 잔치였으며, 고대로부터 타협의 극치인 정치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다음 해인 기원전 205년, 스스로 옹립한 초(楚)나라 의제(義帝)를 죽이고 항우는 패왕(覇王)이 되었고 이에 항우의 토벌(討伐)을 선언한 한왕(漢王) 유방은 각 지역의 제후(諸侯)들을 모아 항우의 본거지 팽성(彭城)을 공격하였으나 항우의 3만 군사에게 56만의 대군을 잃고 퇴각하던 중 형양(滎陽)에 머물게 되는데, 형양을 기점으로 하여 동서로 땅을 나눠 갖고 휴전을 하자는 제의도 거절당한 채 고단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유방의 측근 중에는 역생(易生) 또는 역이기(易餌其)라고 불리는 선비가 있었다. 그는 한왕 유방에게 오래 전 은(殷)나라 시조(始祖) 탕왕(湯王)이 하(夏)나라의 폭군(暴君) 걸왕(桀王)을 끌어내린 후 그 후손에게 기(杞)나라의 봉지(封地)를 하사한 일, 주(周)나라를 일으킨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무찌르고 나서 그 후손에게 역시 송(宋)나라의 봉지를 나누어 준 일을 상기시키면서 진(秦)나라 이전 육국(六國)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봉건제를 다시 세우며 한왕의 관인(官印)을 내리면 모두가 한왕 유방을 우러르면서 마침내 초나라의 항우도 한왕 유방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방책(方策)을 제시한다. 이는 진나라의 폭정에 최초로 반란을 일으켰던 진승(陳勝;陳涉)과 오광(吳廣)에게 각 영지의 제후들과 그 측근들이 헌책(獻策)했던 내용으로서 극악한 진나라 황실에 대한 반란을 전국적으로 조직할 수 있게끔 하였던 계책이었다. 이 말을 듣고 즉시 육국의 관인을 제조하라고 지시한 유방은 그의 책사 장량(張亮;張子房)에게 그 헌책의 장중함을 자랑하게 되는데, 장량은 역이기의 시대착오적인 정세분석이 왜 잘못되었는가에 대하여 유방의 밥상에 있던 젓가락 여섯 개를 가지고 조목조목 설파한다.
첫째, 은나라 탕왕이나 주나라 무왕이 걸왕이나 주왕의 후손을 왕으로 봉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든 상대의 생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였는 바, 유방은 지금 항우의 생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가의 물음.
유방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장량은 천하를 힘으로 장악(掌握)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후들을 왕으로 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고는 첫번 째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둘째,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공격하면서 태행산(太行山)에 은거(隱居)하던 현인(賢人) 상용(商容)이 살던 마을 어귀에서 그의 밝고 어짐을 칭송하였고, 주왕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옥에 갇힌 기자(箕子)를 풀어주었으며, 역시 주왕에게 직언(直言)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비간(比干)의 무덤에 봉분을 키워주었는데, 지금 유방은 성인의 무덤을 돌보거나 현자를 널리 칭송할 만한 상황인가.
아직 그럴 겨를이 없다고 대답하는 유방.
즉, 아직 천하 만민의 마음을 두루 어루만지지 못한 상황에서 제후를 왕으로 봉할 수 없다는 설명과 함께 두번 째 젓가락이 밥상 위에 올려진다.
셋째,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의 창고를 열고 재물을 흩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며 천하의 지지기반을 닦았는데, 과연 지금 유방은 천하 모든 창고의 돈과 곡식을 꺼내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도 아직 천하의 창고를 모두 얻지 못한 유방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즉, 천하의 모든 재물과 곡식을 풀어 가난한 민중들에게 나눠줄 수 없는 상황에서 제후를 왕으로 봉할 수 없다는 설명과 함께 세번 째 젓가락이 소리를 내었다.
넷째,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 주왕을 끌어내린 후 전투수레를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타는 수레로 바꾸고 창칼에 호랑이 가죽을 씌워 거꾸로 매달았으며, 전투에 쓰였던 우마(牛馬)를 풀어주면서 다시는 전쟁에 사용하지 않겠노라고 천하에 선언하였는데, 과연 지금 유방도 무력(武力)을 포기하고 문교(文敎)를 우선시할 수 있는가라는 네번 째 젓가락 소리에도 역시 천하 형세를 결정짓는 싸움을 다 끝내지 못한 유방은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었다.
다섯째, 현재 한왕 유방을 따라 천하를 떠도는 수많은 호걸들에게는 유방이 천하를 얻은 후에 봉지를 받아 제후가 되고자 하는 목적이 있을 터, 육국의 후손들을 왕으로 봉하게 되면 유방과 생사를 같이 하기로 결의한 호걸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땅이 없음을 알고는 유방의 곁을 떠날 것이니 그들이 없이는 유방이 천하를 얻을 수 없기에 지금 제후들을 왕으로 봉할 수 없는 다섯번 째 이유가 그것이다.
여섯째로, 한나라와 초나라의 형세가 저울질되는 판에 만약에 유방이 뜻한 바와 다르게 초나라가 강성해지게 되면 육국의 후손들을 초나라를 섬기게 될 것이니 한왕으로서는 지금 그 제후들을 왕으로 봉해서는 안된다는 설명을 마지막으로 여섯번 째 젓가락이 유방의 밥상 위에서 소리를 내었다.
장량의 정세판단에 유방은 육국의 관인을 즉시 녹여 없애라 명하였으며, 역이기는 한참 동안 그의 거처에서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장량은 역이기와 다른 정세분석을 내놓고 있는데, 한왕 유방이 항우와 자웅(雌雄)을 겨루던 당시는 수백 년에 걸친 봉건제(封建制)의 모순(矛盾)이 극에 달한 후에 진나라에 의해서 초석이 세워진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음을 간파한 장량의 명석한 정세판단 능력을 보여준다. 객관적으로 같은 조건에도 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이후 북송(北宋) 시대의 역사가 사마광(司馬光)이 저술한 편년체의 역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역이기의 시대착오적인 헌책을 두고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고 한다.
說者同而得失異者
(說;이야기 설/者;접미사 자/同;같을 동/而;부정접속 이/得;얻을 득/失;잃을 실/異;다를 이/者)
같은 말에도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다르다. 즉, 객관적 정세에 대한 판단의 차이에 따라 같은 말도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뜻으로서, 역시 객관적 인식이 모든 판단의 우선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자치통감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고 한다(이문열의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에서 인용).
“일찍이 장이와 진여가 진승을 찾아가 육국을 되일으켜 한편으로 삼으라고 한 것과 역이기가 한왕을 찾아가 헌책을 한 것은 그 말한 것은 같지만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다르다(說者同而得失異者). 진승이 일어날 때는 천하가 모두 진나라가 망하기를 바랐으나, 초나라와 한나라가 나뉘어 형세가 정해지지 않은 당시에는 천하가 반드시 항씨(項氏;項羽)가 망하기만을 바라지는 않았다.
따라서 진승에게는 육국을 되세우는 것이 말하자면 자기편을 늘리고 진나라의 적을 더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거기다가 진승은 아직 천하의 땅을 오로지 얻지 못했으니 제 것이 아닌 것을 남에게 주어 속빈 은혜로 알찬 복을 얻어낸 셈이었다. 그러나 한왕에게 육국을 되세우게 하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잘라내 적에게 보태주는 꼴이요, 헛된 이름을 내세워 실제의 화를 얻는 길이었다…”
역사적으로 중앙집권적인 새로운 체제가 등장해야 하는 단계에서, 이전 시대 역사발전의 질곡(桎梏)이었던 봉건제의 부활을 통해 현재의 얽킨 실타래를 풀려고 했던 선비 역이기는 북송시대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의 개혁적 당파에 대립하여 보수적인 구법당(舊法黨)의 영수(領袖)의 위치에 있던 사마광이 보기에도 현실을 타개(打開)하는 대안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유재산’과 ‘국가정체성’ ‘수호’라는 명목 하에 언제까지 사학재단의 비리와 구태가 반복될 수는 없다. 수구세력은 ‘타협의 정치’를 통해 사학재단의 재산을 굳게 지킬 방법을 모색할 것이고, ‘정치적 타협’을 위해 연회를 마련한 중도개혁세력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적당한 선에서 재개정을 의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객관적인 조건을 보자. 교육을 빙자한 소수의 ‘사유재산’ 지키기에 손을 들어줄 사람이 많을 것인가, 아니면 대다수 민중을 위해 보다 공공성(公共性)을 담보한 제도 속에서 아이들이 교육받기를 바라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인가.
같은 말이라 해도 객관적 인식의 차이에 따라 그 의미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