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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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으로 진화한 국가의 폭력

- 작가 공지영의 쌍용자동차 르포르타주 : [의자놀이],<휴머니스트>,2012. -

 

   

이탈리아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안토니오 그람시는 현대의 국가를 강제의 철갑을 입은 헤게모니라고 규정했다. 국가의 기원은 인류의 역사에서 사유재산이 발생한 후 이를 지키기 위한 공동체였던 씨족’, ‘부족등 또는 이들의 동맹체였다. 사유재산은 독점을 통해 사회계급을 수반했고 근현대 이전의 국가는 폭력으로써 이 체제를 지켜왔다. 근현대 이전의 국가권력이 정당화했던 ’, ‘하늘등을 근현대 국가는 으로 치환했고 지금의 국가는 더 이상 폭력으로만 통치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 그람시의 규정은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에 이르러 강제의 철갑은 군대, 경찰, 감옥 등의 직접적 폭력, ‘헤게모니는 학교, 교회, 직장 등의 각종 이데올로기 시스템으로 진화한다. 국가의 본질에 폭력이 있지만, 국가는 폭력으로만 존립할 수 없게 되었다. , 국가의 폭력도 진화한다.

 

용산 철거민 사태를 보고도 국민들이 국가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에 쌍용자동차 사태가 발생했다.”

 

공지영 작가의 쌍용자동차 르포르타주 [의자놀이] 2012 8월 발간되었다. 작가는 2009년 쌍용자동차의 회계조작에 의한 2,646명에 대한 정리해고, 그 해 더운 여름 77일간의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의 옥쇄파업과 국가 공권력에 의한 살인적인 진압 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및 무급휴직자들과 그 가족들의 자살 및 외상후 스트레스증후군문제 등의 심각성을 뒤늦게 접하고 나서, 이 문제를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도가니로 보아 진실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글을 썼다고 한다.

 

의자놀이는 사람들보다 적은 수의 의자를 중심에 두고 주변을 돌다가 신호를 하면 자기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는 게임이다. 쌍용자동차 생산직 직원의 약40% 이상 된다는 2,646명의 정리해고는 그런 우리 사회 현상의 극단적 단면인데, 그 전에 작가는 국민기업 쌍용자동차를 상하이차라는 중국 자본에게 헐값에 넘겨준 정권과 대형 회계법인 등과 짜고 부채비율 160%대를 500%대 이상으로 회계조작하여 정리해고를 단행하면서 신차기술을 빼돌린 후 인도의 마힌드라 자본에게 다시 팔아치운 유령과도 같은 자본과 그 하수인들, 살기 위한 노동자들의 정당한 저항을 동료 노동자인 구사대와 요즘 사회적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사설용역업체까지 적극 동원하여 잔인하게 진압한 국가 공권력의 본 모습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작가는 말한다. “언론이 소설을 쓰니, 작가가 기사를 썼다.

 

이명박 정권은 2009년 초 용산철거민 참사 때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국가권력을 시험했다. 그리고 전국민을 분노하게 만들었지만 보수언론, 사법탄압 등의 이데올로기적인 방법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한 결과, 또 다시 광주학살과도 같은 야만적 폭력을 통해 지배해도 될 것 같다는 것을 학습했다. , “용산참사 때는 간을 봤고”, “쌍용자동차 옥쇄파업은 살인을 작정하고 달려든것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직접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우리 국민들조차 국가의 폭력이 야만적으로 진화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야만적으로 진화한 국가의 폭력을 두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 정치권에서의 쌍용자동차 특위 구성,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노조탄압에 대한 노동자들의 연대투쟁,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각종 시민사회 연대단체들도 있고 유명작가 공지영 [의자놀이]라는 책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함께 살자!”고 외치고 있다.

 

야만적으로 진화한 국가의 폭력, 이 거대한 괴물인 리바이어던에 맞서, 사회 대다수 약자들이 함께 살기위한 유일하고도 역사적으로 입증된 최선의 방법은 약자들의 광범위한 연대일 것이다.

 

[의자놀이]의 수익금 전액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후원금으로 쓰인다고 한다.

 

 (20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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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푸르트 강령 범우사상신서 58
칼 카우츠키 지음, 서석연 옮김 / 범우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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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 폐기와 ‘의회주의’ 정치 

- 칼 카우츠키의 [에르푸르트 강령]에서 ‘의회주의’ 

 

 

비단 직접 노동자계급에 특별한 관계가 있는 법규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부분의 법규의 대다수가 많건 적건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다른 일체의 계급과 같이 노동자계급도 정치적 세력과 정치적 권력의 획득을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근대적 국가에 있어서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두 가지의 길이 있다. 첫째는 국가 수장에게 개인적으로 영향을 주는 일이다… (둘째) 국민 중의 나머지 일체의 계급은 근대적 대국가에 있어서는 그들이 선출한 의회를 통해서만 국가 시정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국민에 의한 직접적인 입법을 논외로 해도 무방하다. 적어도 근대적 대국가에서는 국민에 의한 직접적 입법은 의회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기껏해야 의회와 병립해서 개별적인 경우에 있어서 의회를 보정하는 활동을 할 수 있는데 불과하다. 이것에 의해서 국가적 입법 전체를 처리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근대적 대국가가 존재하는 한, 정치적 활동의 난점은 항시 그 의회에 존재할 것이다. 

 

- K. J. Kautsky. [에르푸르트 강령],

제5장 <계급투쟁> 제9절 ‘정치적 투쟁’ 중

 

 

2011년 11월 22일, 한미FTA 국회비준안이 우리 국회 역사 초유의 날치기로 통과되었다. 한미FTA 협정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이식의 종결판으로 사회 양극화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며, 한미 양자간 불평등으로 점철된 협정으로 날치기 비준 이후 의회가 저버린 민중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노동자·시민들은 우리 역사에서 늘 그래왔듯 거리로 나섰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봐도 질적인 전환의 계기는 언제나 ‘거리’였다. ‘의회’는 민중들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었고 대다수 민중들은 변혁의 열망을 ‘거리’에서 분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이 민중들의 열망을 배반하면서 일시적으로 마무리된 장소 또한 언제나 ‘의회’이기도 하다. 

 

1917년 소비에트 혁명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권력을 쟁취했던 러시아 혁명 지도자 레닌의 볼셰비즘이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던 독일 사회민주당 이론적 지도자 칼 요한 카우츠키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의 영향 하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혀 왔고, 적어도 우리의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의회주의’로 대표되는 기회주의, 개량주의의 영역에서 머물다가 21세기를 넘어서면서 우리 사회에서 잊혀져 갔다. 그러나 칼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주의 정통파 이론을 대표하였고 초기 레닌의 마르크스주의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당시 사회민주주의는 현재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사회민주주의와는 달리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을 견지하는 대표적인 당파였다. 카우츠키는 독일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명실상부한 대표자였고 1875년 ‘고타강령’으로 유명한 독일사회주의노동당 창당 후 1890년에 독일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꾼 사회민주당이 1891년에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더욱 발전시킨 ‘에르푸르트 대회’에서 ‘에르푸르트 강령’을 기초한 초안자였다. 그는 이 에르푸르트 강령이 당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것으로 자부하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처럼 과학적 사회주의를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른바 ‘사회주의 문헌 중에서 팸플릿과 특수저서 사이에 중간적인 저서’로서 ‘에르푸르트 강령’ 해설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에르푸르트 강령]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에르푸르트 강령에 따라서 ‘사회주의적 관념계 중에서 본질적이면서도 또한 사회민주주의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것들을 알기 쉽게 서술’하면서 소경영의 몰락, 프롤레타리아, 자본가계급, ‘미래국가’, 계급투쟁 등으로 개념을 분류하여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에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문헌, 기존의 여러 반대파에 관한 공산주의자의 입장의 순서로 저술한 방식을 채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은 1892년 카우츠키의 초판 서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무튼, 대중들에게 사회민주주의를 선전·선동하는 당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저술하였으므로 학문적인 이야기보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본질적인 개념들을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분석하고 각 장의 각 절을 이루는 개념들이 쉽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서술한 점은 다른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서와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자본의 독점에 의해 소경영은 몰락하고 있지만 소자본은 대자본에게 철저하게 의존하면서 파산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화하여 언제든 노동력을 제공하는 ‘산업예비군’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이러한 소경영을 몰락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소경영의 증가를 촉진’시키고 있으며 대다수 노동하는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 내에서 다수화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계급투쟁을 통해 사회 변혁의 주체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의 선진적인 부분이 노동조합운동으로 실현되고 이러한 계급투쟁은 사회주의와 접목하면서 사회민주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의 실현체가 사회민주당이며 그 정신이 바로 ‘에르푸르트 강령’이다.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가급적 (사회주의적) 목적의식적 또는 가급적 활동목적으로 형성하는 것이 사회민주당의 임무이다. 

 

- K. J. Kautsky. [에르푸르트 강령], 

제5장 <계급투쟁> 제12절 ‘사회민주주의: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중 

 

소경영의 몰락과 대경영(대자본)에 의한 이들의 유지-‘증가·촉진’-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영세 자영업자 및 농민의 상황과 동일하다. 이러한 소경영 유산자는 고정자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옹색한 생산수단은 가지고 있지만 자본가처럼 착취자는 아니며 생활은 프롤레타리아와 다를 바 없다. 이는 또한 ‘공산주의 혁명은 비공산주의자들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명제가 근거하고 있는 지점이다. 간접세를 폐지하고 소득 누진세와 부유세,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무상법률지원 등을 주장하는 반(反)자본주의 정치 당파로서의 사회민주당과 ‘국민’의 관계를 다루는 마지막 장의 마지막 절에서 카우츠키는 말한다. 

  

사회민주당을 강화하는 것은 비단 임금노동자의 이익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민 중에서 노동으로 생활하고 착취로 생활하지 않는 모든 성원의 이익이기도 하다. 

  

- K. J. Kautsky. [에르푸르트 강령], 

제5장 <계급투쟁> 제14절 사회민주당과 국민 중 

  

여기까지 카우츠키는 과연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다운 사상적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의회주의’이다. 

현재 우리 사회 한미FTA 비준무효 정국에서 다시 한 번 ‘의회주의’를 생각한다. 의회가 날치기한 한미FTA를 무효화하려면 이를 반대하는 대다수 민중이 ‘거리’에서 모은 분노의 힘으로 진보정당이 통합되고 ‘중도진보’를 표방한 ‘민주통합당’ 세력과 연대하여 정권교체를 이룬 후 결국 ‘의회’를 통해 한미FTA 문제를 마무리 지을 수 밖에 없다. 우리 사회를 송두리째 바꿀 한미FTA를 중심으로 한 현 정세에서 한미FTA의 완전한 폐기를 목표로 하는 세력은 진보이고 자유무역의 환상을 버리지 못한 채 한미FTA 재협상을 목표로 하는 세력은 진보가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가능할 테지만, 모든 정치세력은 이미 내년 총선과 대선 과정에서의 정권교체를 중심으로 통합 재편을 하고 있는 중이다. ‘거리’의 슬로건은 한미FTA 폐기이지만, ‘의회’의 슬로건은 재협상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는  ‘의회주의’의 본질이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가 자기의식적 계급으로서 의회를 위한 투쟁(특히 선거전)에 참여하고 또한 의회에서 의석을 갖게 되면 의회주의도 역시 지난날의 본질이 변하기 시작한다. 의회주의는 부르주아지의 단순한 지배수단을 멈춘다. 바로 이러한 투쟁은 아직도 무관심한 프롤레타리아의 여러 계층을 분발시켜서 그들에게 확신과 희망을 고취해야 할 가장 유력한 수단이다. 그것은 또한 다양한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더욱더 공고히 하나의 통일적 노동자계급으로 융합시켜야 할 가장 유력한 수단이다. 그리고 최후에 의회주의는 국권을 프롤레타리아에게 유리해지도록 좌우하고 또 사정에 따라서는 일시적으로라도 얻을 수 있는 양보를 하게 하는 수단 중에서 현재 프롤레타리아에게 제공된 가장 유력한 수단이다. 이것을 요약하면, 이러한 투쟁을 프롤레타리아를 그 경제적, 사회적 및 도덕적 침몰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지렛대에 속하는 것이다. 

 

-         K. J. Kautsky. [에르푸르트 강령], 제5장 <계급투쟁> 제9절 ‘정치적 투쟁’ 중 

 

독일에서 사회주의자 탄압 당시 영국의 마르크스와 엥겔스 곁에서 사회민주당 기관지 [노이에 차이퉁;Neue Zeitung] 발행까지 했던 마르크스주의 정통파 이론가 카우츠키는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가 주도하던 제2인터내셔널의 주된 경향처럼 ‘경제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정통파’인 그의 관점에서 사회민주당은 생산수단의 사유를 폐지하고 새로운 ‘조합적 소유’를 주장하지만 반대파가 공격한 것처럼 ‘미래국가’의 설계도를 제시할 수는 없다. 새로운 사회의 모든 맹아는 현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 본질상 전투적 프롤레타리아의 목적의식적 분자에 지나지 않는’ 사회민주당 조차도 이러한 객관적 경제발전 법칙에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의 주저 [자본론]에서 물려받은 주요한 유산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또한 자본주의가 성숙되지 않았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킨 레닌의 볼셰비즘을 비판했던 근거이기도 했다. 

 

‘미래국가’를 설계할 수 없는 사회민주당의 관점으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무산자 및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자가 투쟁하여 강화시켜 온 ‘의회주의’가 최선은 아니겠지만 현실적 차선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 현대사를 봐도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 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던 해방공간에서 ‘극좌파’로 분류되던 박헌영의 ‘소비에트 교조주의’도 즉각적 무력혁명이 아닌 선거와 의회 장악을 우선으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로 설정한 바 있다. 그리고 수 십년이 지난 현재 수많은 ‘시민 민주주의 혁명’과 온갖 개혁과정을 거치면서 최근 십 수년 간 우리 사회 모든 진보정치 세력이 추구했던 진보정당 운동도 바로 카우츠키의 노선과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국면에서 무력했고 심지어는 전쟁을 찬성하기도 했던 유럽의 사회민주당과 이들이 다수를 차지했던 의회의 배반에 맞서 혁명적 사고를 급진전시켰던 레닌의 고민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지금, '의회주의'의 '독재'에 의해 촉발된 한미FTA 비준무효 국면에서 그 폐기를 목표로 하는 진보정치 세력에게 ‘의회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 

 

1. [에르푸르트 강령], 칼 카우츠키 지음, 서석연 옮김, <범우사>, 2003. 

: 1875년 ‘고타강령’으로 유명한 독일사회주의노동당 결성 후 1890년에 이 당은 독일사회민주당으로 당명으로 바꿨고 이듬해인 1891년 에르푸르트 대회를 통해 사회민주당 강령을 채택하는데 이 강령이 바로 ‘에르푸르트 강령’이며 그 초안자는 칼 카우츠키였다. 이 강령에서 “사회혁명은 일거에 단호하게 행해지지는 않는다. 이런 예는 아마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혁명은 수 년 또는 수십 년 간의 정치 및 경제적 투쟁 속에서 준비되어 계급 및 당파의 세력관계가 끊임없이 융성, 쇠퇴, 소멸하는 가운데 행해지며 종종 장기간의 반동에 의해 단절되는 수도 있다”고 하며 마르크스 경제주의에 기초하여 역사적 경험은 “경제적 발전을 저지하는 모든 수단이 효과가 없거나 또는 그것을 제거하려고 하는 고통을 도리어 크게 만든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고 본다. 한편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유해한 영향을 가능한 한 방어할 수 있는 유효한 다른 수단을 찾아냈다. 그것은 그들의 경제적 조직(노동조합)과 그들의 정치적 활동이다”. 이들 개혁은 “혁명적 견지에서도 지지”될 수 있는데, “국민대중의 프롤레타리아화,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경제생활을 지배하는 소수자로의 전 자본의 집중, 공황, 생존의 불안, 이 모든 잔인하고 광포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영향은 오늘의 소유질서의 지반 위에서는 어떠한 개혁에 의해서도-설사 그 개혁이 아무리 철저한 것일지라도- 부단히 증대하는 것을 저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카우츠키의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전면적인 정치권력 쟁취를 내건 레닌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와 달리 “사유재산의 몰락은 가령 그것이 언제 또 어떤 식으로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어도 분명히 도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부터 계승한 지점이지만 ‘경제주의’에 매몰될 가능성이 크기도 했다. 이후 독일사회민주당은 1914년 전시공채문제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분열되었고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던 카우츠키의 중도파는 따로 떨어져 나와 독립사회민주당을, 로자 룩셈부르크의 좌파 또한 독립하여 스파르타쿠스단을 각각 결성하였다. ‘에르푸르트 강령’과 같은 경향은 우리 사회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험으로서 12년간 존재했던 민주노동당의 노선이기도 했다. 번역이 다소 매끄럽지는 못하다. 

 

2. [프롤레타리아 독재/테러리즘과 공산주의:혁명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 칼 카우츠키 지음, 강신준 옮김, <한길사>, 2006. 

: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대하여 정면으로 비판한 카우츠키의 1918년 저작이다. 제헌의회 소집과 보통선거권을 거부하고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계급관계를 토대로 한   ‘계급민주주의’에 기반하여 중앙집중 권력을 구축한 레닌의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일당독재’의 맹아가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카우츠키 방식으로 증명하고 있다. 러시아 볼셰비즘 비판의 본질적 근거는 보통선거권과 ‘의회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였다. 카우츠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다름아닌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선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한 문장의 규정으로 요약된다. 카우츠키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란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는 때때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사고를 억누르기도 하지만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획득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 성숙해 가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수단이다… 그런 조건에서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잡게 될 경우 프롤레타리아는 즉각 경제발전의 방향을 사회주의로 향하게 하고, 즉시 사회의 전반적 복지를 증대시킬 수 있는 충분한 물적·정신적 권력수단을 갖게 될 것이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레닌은 카우츠키의 이 저작에 대하여 그 유명한 ‘배신자’ 낙인을 유래시킨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라는 글을 통해 ‘의회주의’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닌 ‘계급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임을 주장하였고, 카우츠키는 [테러리즘과 공산주의:혁명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이라는 반박문건을 통해 1789년 프랑스혁명의 자코뱅주의(이른바 ‘1차 파리코뮌’)와 1871년 파리코뮌(이른바 ‘2차 파리코뮌’)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러시아 볼셰비즘을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닌 ‘테러리즘’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카우츠키는 이 문건에서 “전세계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운동에 돌입해 있으며 그들의 국제적인 압력은 매우 커져서 이제 어떤 경제적인 발전도 자본주의적인 성격은 물론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함께 띠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면서 사회주의 이행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토대로 “의회주의와 민주주의는 국민의 유형과 그 계층에 따라서 다양한 내용과 형태를 가질 수 있다. 의회 내에서 부르주아 정당들이 우세할 경우 ‘의회주의’는 부르주아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의회 내에 사회주의 다수파가 자리를 잡게 되면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규정하며 사회주의 혁명에서 ‘국민의회’의 역할을 다시금 강조한다. ‘민주주의’와 ‘독재’를 철저히 구분하는 카우츠키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요약된다. “보통 및 평등선거권으로 이루어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적 지배의 특징이 아니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혁명 시기에 평등선거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차별선거를 도입했으며… 오랜 기간의 힘든 투쟁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프롤레타리아들이 보통 및 평등선거권을 쟁취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인데… 보통 및 평등선거권으로 이루어진 민주주의는 주먹에 의한 계급투쟁을 머리에 의한 계급투쟁으로 바꾸는 방법이며 자신의 적들에 비해서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더욱 성장해 있는 계급만이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1920년 레온 트로츠키는 같은 제목인 [테러리즘과 공산주의]라는 글로 다시 카우츠키의 ‘진화론적이고 자연법적’인 사회주의 이행강령을 비판하게 된다. 

 

3. [트로츠키:테러리즘과 공산주의], 슬라보예 지젝 서문 / 레온 트로츠키 지음, 노승영 옮김, <프레시안북>, 2009. 

: 카우츠키의 논문인 [테러리즘과 공산주의:혁명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을 같은 제목을 걸고 반박한 레온 트로츠키의 글이다.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에 대한 평생의 비판자이며 ‘불구대천의 원수’, 한편으로는 영구혁명론자이자 이후 소비에트연방에서도 끝내 복권되지 못한 트로츠키답지 않게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후 ‘일당독재’와 ‘노동의 군사화’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외부적으로 유럽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을 기다리면서 러시아 내부적으로는 부르주아 계급은 물론 러시아 사회혁명당 및 멘셰비키 등 사회주의 혁명의 적들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인 ‘의회주의’와 보통선거권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철저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이 글의 요지다.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 중요하다는 관점에서는 수긍이 갈 수 밖에 없다. 사회주의 적들과의 내전으로 인해 파괴된 러시아 산업을 지키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볼셰비키의 배타적 권력이 필요하다는 절실함이 묻어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의  스탈린주의와 교차점을 이루는 주장이기도 하다. 트로츠키에게 “코뮌은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살아있는 부정이었다”. 그럼에도 슬라보예 지젝에 의하면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궁극적 차이점은 이것이다. 

“스탈린에게 ‘레닌은 영원히 산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외설적 영혼, 권력의 도구가 되어 인공적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영혼으로 말이다. 트로츠키에게, 죽은 레닌은 조 힐(누명을 쓰고 죽은 미국의 노동운동가)처럼 살아 있다. 같은 이데아를 위해 투쟁하는 민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도 살아 있다.”

 

4. [로베스피에르:덕치와 공포정치], 슬라보예 지젝 서문 /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지음, 배기현 옮김, <프레시안북>, 2009. 

: 1789년 프랑스대혁명 당시 자코뱅주의를 통해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철저하게 구현하고자 했던 로베스피에르의 연설문 모음집이다. “이성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 없는 이성은 공허하다”고 말한 칸트의 테제를 빌어 “공포 없는 덕은 무력하고, 덕 없는 공포는 치명적이고 완전히 맹목적이다”고 규정한 로베스피에르의 이념을 강조하고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말한다. “평상시에 인민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양쪽 모두입니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라고. 군주정과 당시 부상하는 계급이던 소수 부르주아지의 ‘자유, 평등, 박애’가 아니라 다수 가난한 계급의 더 나은 삶과 민주주의를 위해 불가피하게 채택한 자코뱅주의의 ‘공포정치’를 우리는 더 이상 피하지 말고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 서문을 붙인 슬라보예 지젝의 해설이다. 대다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등장하기 이전이었지만 대다수 피착취자들을 위해 “대규모의 집합적 의사결정을 추진하기 위해 위험도 감수”한 자코뱅주의의 ‘공포정치’가 “아마도…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료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커다란 유산일지도 모른다”고 지젝은 이야기한다. “기회주의적 현실주의에 맞서며, 어떠한 고난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유라는 항구적 가치에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면, 로베스피에르의 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혁명은 ‘단지 하나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저지르는 또 하나의 소란스런 죄악’에 불과하다”는 서문의 결론은 피착취자의 혁명의 대부인 로베스피에르의 변하지 않는 정신을 후세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방향을 설정하여 준다. 나머지 로베스피에르의 길고 장황한 연설문들은 다소 지루한 점이 있기는 하다. 

 

5. [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89. 

: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는 명제로 시작하여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호소로 마무리되는 과학적 사회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주요 저작이다. 과학적 사회주의 또는 공산당(공산주의자)의 역사를 중심으로 1848년 현재 공산당(공산주의자)의 입장을 군더더기 없이 서술하고 있는데 선언문이라 그런지 명료하기는 하나 주석과 같은 예비지식 없이는 제대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점도 있다. 레닌은 과학적 사회주의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세 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첫째 독일의 관념론(변증법) 철학, 둘째 영국의 고전경제학, 셋째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하였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계급투쟁의 역사가 흐르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본격적 출현과 프롤레타리아트와 공산주의자의 관계, 기존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들에 대한 비판을 곁들이고 19세기 중반 현재 온갖 반대파들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입장이 어떠해야 하는지 주장한다. 계급투쟁과 모든 반정부주의자를 포함한 국제연대를 통해 공산주의자는 ‘전체 운동의 이해’와 미래를 대변하고 적들을 공포에 떨게 하면서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강력히 주장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6. [독일 이데올로기],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박재희 옮김, <청년사>, 1988. 

: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보다도 먼저였던 1845~1846년에 공동 집필한 저작이다. 칼 카우츠키의 [에르푸르트 강령]은 [공산당 선언]의 서술 형식을 따라 그 당시에 맞게 마르크스주의를 해석하여 발표한 노선이라 볼 수 있는데, 역사를 계급투쟁으로 보는 관점을 중심으로 [공산당 선언]이 주로 사회주의 사상 관련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독일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변증법적)유물론 철학의 밑그림을 그리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고대, 중세,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사회구성체의 역사와 그 토대를 이루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역사를 좀더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초기 저작이자 미완의 저작이다. 아마도 몇 년 후 이 초안을 바탕으로 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이 [공산당 선언]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7. [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실천문학사>, 2009. 

: 몰락 양반가의 ‘서자’로 1900년에 태어나 1955년 북조선공화국 정권으로부터 미제 간첩 혐의로 사형당한 남한 공산주의 운동의 최고지도자 박헌영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남북한 단독정부 건설로 인한 분단초기와 한반도 내전의 역사를 다룬 소설이다. 소비에트연방의 스탈린과 중국인민공화국의 모택동 등의 국제적인 공산주의 지도자들로부터 ‘조선의 유일한 공산주의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공산당 건설 사업에 매진하다가 해방 후 중도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전술을 꾀하면서 남조선노동당의 지도자로 역할을 하는데, 박헌영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식민지 해방투쟁을 벌인 국가의 혁명 단계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로 설정한 코민테른의 지침을 ‘교조적’일 정도로 준수하려 했던 ‘원칙주의자’였기에 가능했다고 저자는  평가하고 있다. 월북 후에는 김일성에 의해 소위 ‘정의의 반격전쟁’으로 시작된 6.25 과정에서 전쟁을 묵인하는 등 소신없이 처신하다가 ‘패전의 원흉’이자 ‘미제의 간첩’의 혐의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역사에서 뛰어난 인물은 아닐지라도 대다수 민중들이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박헌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가 관통해 왔던 우리 현대사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평전이다.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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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을 읽는다 - 두레신서 33
루이 알튀세르 외 지음, 김진엽 옮김 / 두레 / 1991년 3월
평점 :
절판


<자본>의 철학적 독해에 관한 노트

 

 

마르크스의 이론적 혁명은 그 답의 변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변경에 있다는 것, 따라서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의 혁명은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의 지형으로부터 과학의 지형으로 옮긴 ‘제요소의 변경’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 L. Althusser, <마르크스를 위하여>, 1965.

 

 

1, ‘대상(對象)’이라는 문제

 

인식과 관련된 존재론의 보편적 범주.

‘주체’와 ‘객체’로서 그 구성요소가 기본적으로 분화되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토대를 전제했을 때, 우리가 접하게 되는 개념들 중 하나가 바로 ‘대상’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위의 기본적 전제 하에서 인식의 행위를 하는 인간은 그가 살고 있는 세계의 ‘주체’적 요소가 되는 반면, 그러한 행위 이전에 이미 존재를 이루고 있는 인간 이외의 세계요소는 ‘객체’가 된다. 이런 인식론적 관계에서 후자, 즉 ‘객체’적 세계는 인식적 측면에서 다름 아닌 ‘대상’이다. 한마디로 말해, 인식론의 기본적 범주에서 ‘객체’는 철학적으로 그 성격을 부여받기 이전에 이미 ‘대상’으로서의 자기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좀더 명확하게 이야기해보자. 인식론이라는 이론적 분파는 흔히 철학이라는 이론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즉, 인간의 인식과 인식론의 관계, 현실행위와 이론 사이의 관계가 그것이다. ‘인식’이라는 것, 그 행위 자체는 ‘인식’의 ‘이론’과 다르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당연한 말이지만 ‘인식’이라는 행위가 ‘인식론’의 이론적 출발 이전에 이미 인간생활 속에서 존재하고 있어 왔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의식적이든 자생적이든 만약 그가 유물론자라면-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떤 개별적 행위나 현상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보편성’을 향한 그 나름의 내적인 요구에 의해 그것들의 이론을 형성하듯이, 무의식적이고 무언적인 그러한 인간 인식의 행위들 또한 위와 같이 계속 누적되고, 또 그것이 역사라는 끝없는 지평 위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그 자체의 요구에 당면하면서 비로소 탄생하게 된 역사적 산물이 다름아닌 ‘인식론’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론’의 발생, 그 역사적 경위를 본다면 그 뿌리는 바로 철학에 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삭막한 물질세계에서 첫울음을 터뜨렸던 인간. ‘목구멍이 포도청’이기에 살기 위해서 자신을 낳아준 물질적 자연과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고 그런 기본적 욕구로부터 노동을 배워나간 인간. 그 과정 속에서 보다 나은 노동력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 그 자체 노동의 필요로 인해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인식과 사유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그냥 그때그때 잊혀지고 마는 단순한 형태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마치 생식의 본능과도 같이 다음 세대에게까지 이어질 수 있는, 그런 인식과 사유를. 그러기 위해서는 각기 행위들의 개별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이 필요했을 테고, 그 필요에 의해 보편성을 지향하는 ‘이론’이라는 것은 비로소 인간역사의 발전 속에서 그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역사 초기에, 당시의 역사적 한계로 말미암아 각기 세분화된 영역을 가지지 못했던 과학적 지식들은, 그리고 여타 ‘이론’들은 단지 ‘철학’의 동일 개념일 뿐이었다. 기원적으로, ‘이론'은 ‘과학’에 다름 아니었으며 ‘철학’ 그 자체였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넓어지고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각기 이론들도 세부영역을 점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인간은 과학1)과 철학을 동일시할 수 없게 되었다. 각각의 세분화된 과학은 고대의 철학자들-당시에는 과학자이기도 했던-이 그랬던 것처럼 그냥 뭉뚱그린 ‘세계’라는 것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 데 그칠 수 없게 되었으며 이제 그 나름대로의 ‘대상’들을 갖게 되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과학과 이론의 세분화와 함께 ‘대상’도 세분화되었다. 그리하여 과학은 각각의 이론적, 실천적, 실험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대상’으로부터 이론적 지식들을 생산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해 이제 철학은, 아주 오래 전에는 이론으로서의 과학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것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철학은, 하나의 뭉뚱그려진 ‘세계’라는 막연한 자신의 ‘대상’을 갈가리 찢어진 형태로서 과학에게 넘긴 채 과학의 꽁무니만 쫓아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2)

“지혜3)의 여신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왜 밤에만 날아다니는가”라는 일견 식자연해 보이는 의문은 엄밀히 말해 “미네르바의 새가 왜 밤에만 날아다니는 올빼미일 수밖에 없는가”하는 의문으로 정정되어야 할 것인데, 아무튼 이 물음은 바로 과학의 발전과, 그것이 철학과 분리되는 역사, 세계라는 객체적 범주가 세분화된 형태로서 철학의 ‘대상’으로부터 과학의 ‘대상’으로 넘어가는 바로 그 역사 속에서 풀릴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세분화된 학문으로서 과학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그 개념으로서의 과학이 태동하게 된 근대에 이미 철학자 헤겔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철학은 황혼 녘에 날개를 편다”라는 은유적 명제로 표현했다. 즉, 수많은 가지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과학이 그 자신의 지식을 생산해내는 것이고, 철학은 그 조건 아래에서만이 진정 자신의 ‘대상’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위와 같은 역사적 인식은 진정한 철학이 왜 유물론일 수밖에 없는가, 라는 철학적 근본문제의 해결에 좋은 증거로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철학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관념적 전통과는 달리, 전혀 새로운 위치에서, 전혀 ‘새로운 실천’4)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여기 하나의 함축적 문장이 있다.

 

간단히 말해 철학은 분열한다는 냉혹하고도 기본적인 사실에 관한 의식이다. 과학이 하나로 된다면 철학은 분열한다. 철학은 분열함으로써만 하나가 될 수 있다… 철학적 꼬뮈니까씨옹(communication)이란 없다. 철학적 토론이란 없다.

- L. Althsser, <레닌과 철학>, 1968.

역사적으로 볼 때 과학은 그 자체의 세분화와 더불어 갖가지 혁명적인 모습들을 거쳤다. 즉, 토마스 쿤의 이론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전통적인 그것이 폐기됨으로써 결국에는 ‘진실적인’ 이론만이 남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알뛰세르에 의하면 철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즉, 과학이 그 자신의 ‘대상’에 대한 진리를 향해 ‘하나로’ 나아간다면, 철학은 그 과학적 지식에 기초하여 여러 가지 경향의 테제들을 생산하는데 이 과정은 철학의 근본문제인 관념론과 유물론으로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의 근본문제인 관념론적 경향과 유물론적 경향. 일찍이 엥겔스에 의해 정식화되었던 이 근본문제5) 속에서 양자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은 어느 시기에 한 경향이 우위를 점하였다고 하여 그 반대 경향이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철학은 역사 속에서 이 근본문제적 갈등을 무수히 반복하기만 할 뿐이다.6) 따라서 철학의 전장에서 경향성과 관련하여 근본문제에 대한 투쟁은 영속적이다.

과히 ‘철학은 분열함으로써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적 토론은 없다’라는 명제에 관해서는 역시 과학과의 관계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바, 즉 역사적으로 철학과 인간 사상에 영향을, 그것도 아주 혁명적인 영향을 끼친 과학적 ‘대륙’은 고대 그리이스의 ‘수학의 대륙’과 중세말기의 ‘물리학의 대륙’, 그리고 근대말기의 ‘역사의 대륙’이라는 세 가지이다. 탈레스로부터 시작한 첫 번째 시기에는 플라톤에 이르러 그 철학적 정점을 이루었고 갈릴레오로부터 시작한 두 번째 시기에는 철학적으로는 데카르트로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한정된 시기 내에서 과학이 철학에-구체적으로 말해 철학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학적인 철학적 경향은… 유물론밖에 없지 않은가- 끼치는 영향은 대략 그 즈음에서 그친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이후에 특정 ‘대륙’ 사이의 일정한 시기에 벌어지는 ‘철학적 꼬뮈니까씨옹’이라든가 ‘철학적 토론’은 예의 근본적인 경향들의 지리하고도 ‘무의미한’7) ‘세력다툼’을 반복한다. 이후의 철학적 “재탄생을 야기하는”8) 과학적 대륙이 나타나기 전까지.

이런 양상을 볼 때, 헤겔의 ‘철학은 황혼 녘에 날개를 편다’라는 명제는 옳다. 또한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관념론자인 데카르트가 그 역사적 의의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그 과학성(유물론적인)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의의’는 근대 말에 이르러 마르크스가 ‘역사의 대륙’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철학적 사명을 마친다. 이제 역사는 역사철학이나 사회철학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의 과학이 되었고-그럼으로 인해 역사적유물론은 정당하다-, “황혼 녘에 날개를 펴는” 철학은 변증법적유물론, 유물변증법으로서 정식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더 이상 ‘무의미한’ 토론은 역사적 의미 또한 잃었다. 남은 건 주지되어 온 것처럼 ‘새롭게 만들어진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 철학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9)이자 정치적 계급투쟁에 있어 과학적 ‘심급’을 유지시켜주는 하나의 ‘개입으로서의’ 정치가 되었다.10)

여기까지가 과학과 철학과의 관계에 대한 알뛰세르의 입장의 대개이다.

 

철학은 다른 과학들처럼 그 나름대로의 ‘대상’을 지니고 있지 않다. 철학적 대상은 다른 과학들의 ‘대상’을 통해 생산된 과학적 지식들을 기초로 행해지는 이론적 작업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대상’은 따로 존재할 수 없으며, 과학적 지식의 발견과 발전에 힘입어 우리가 지금 흔히 볼 수 있게 된 ‘~학’, ‘~론’ 등속의 것들이 모두 다름아닌 철학의 ‘대상’인 것이다.

철학의 ‘대상’은 바로 과학의 ‘대상적 지식’이다

 

2, 철학적 대상, 혹은 그것의 혁명적 전화(轉化)

 

어떤 텍스트에 대한 ‘철학적 독해’가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즉, 그 텍스트가 전통적으로 ‘표방’해왔던 특정 과학의 입장에서만 읽혀진다면 그것은 진정한 역사 위에 올라설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역사,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과학으로서의 역사이다.

반면, 특정 과학의 틀 속에서만 이해된 텍스트는 관념의 나열, 혹은 기껏해야 사건들의 단순한 열거로서의 역사 이상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 그 자체로 과학으로서의 역사는 그 내부로부터의 혁명적 전화를 통해서만이 실로 제 위치를 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보의 역사가 출발하게 되는 지점이다.

마르크스의 <자본> 또한 하나의 과학적 텍스트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이론적 원천11) 중 하나인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이라는 하나의 ‘과학’으로부터 출발하며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자본주의 일반을 경제학적으로 분석한 저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본>은 ‘경제학’이라는 특정 ‘과학’의 눈으로 읽어서만은 안되는 이론서이다. 만약 기존 경제학의 분석틀로 해석을 한다면 <자본>에서 마르크스가 이야기하고 있는 계급투쟁으로서의 현실 사회구성체를 진정한 ‘대상’으로서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비록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이라는 과학적 학문이 마르크스주의의 주요한 사상적 원천이라고는 하나, 마르크스 자신은 <자본>을 비롯한 그의 저서 속의 어느 한 문장에서조차도 고전파 경제학을 ‘경제학’적으로 해석하고 있지 않다. 즉, 모든 개인이 ‘공정한 룰’에 의해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한다는 이론적 전제를 하고 있는 아담 스미스를 읽을 때도, ‘노동의 가치’, 가치를 생산해내는 담지자로서의 노동의 발견을 이야기하고 있는 데이비드 리카아도를 읽을 때도 마르크스는 전혀 ‘경제학’적인 시각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칭 ‘순수이론’이라고 자부하는 고전파 경제학이나 근현대의 주류경제학과는 다르게 현실 사회구성체 그 자체를 자신의 ‘대상’으로 하면서 연구를 출발할 수 있었고, 엥겔스가 말한 것처럼 ‘역사적유물론’과 ‘잉여가치’라는 두 가지 위대한 역사적 발견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유물론적 사고체계에서 언급하고 있는 ‘정치경제학’인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학과 정치경제학의 차이는 무엇인가.

도식적일지는 모르지만 단언하자면, 그 ‘개별과학’ 속에 철학이 함께 존재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 다시 말하면 ‘대상적 전화’가 가능하도록 하는 철학의 눈으로써 그 과학을 읽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즉, ‘순수이론’이자, 단순한 ‘개별과학’으로서의 전자에는 철학적 사고가 수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향의 한 측면에서는 현실에서 정치, 즉 힘의 관계로서 현상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정치-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를 대변하는 존재로서의 ‘철학’을 전혀 상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12) 만약 이러한 ‘순수이론과학’에 위와 같은 철학이 개입을 하게 된다면, 우리의 ‘순수성’은 더 이상 그 어디에서고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은 다르다. 정치경제학은 그 자체로 유물론적 사고에서만이-엄밀히 말하면 유물변증법이다- 가능한 과학분야이므로 당연히 이론의 ‘순수성’을 현실과 유리시키지 않는다. 정치경제학은 더 이상 ‘순수성’을 자신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정치경제학의 대상은 과학의, 나아가 이론의 원료로서의 현실, 바로 현실 그 자체일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본>을 가지고 ‘순수한 이론서’라고 규정하는데 무리수가 개입된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상적 평균’13)으로서 <자본>이 서술하고 있는 이론적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유물론적 전제에 입각하여 이미 위와 같은 ‘철학적 독해’와 그로 인한 ‘대상적 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현실적 이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이 말하고 있는 ‘이상적 평균’으로서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또 다시 현실을 분석하는 자료와 기준으로서 객관적으로 충분히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경제학은 역사라는 ‘대륙’의 발견과 더불어 계급투쟁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고, 온갖 ‘순수성’의 장식으로 꾸며진 ‘이윤’만이 아닌 계급사회에서의 인간노동을 통해 발생하는 ‘잉여가치’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대상’,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철학적 대상’의 전화, 그것도 ‘혁명적’인 전화이다.

‘대상’에 대한 정확한 규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이론적 작업이라며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현실 위에 또 하나의 ‘왕국’14)을 만들고 있는 ‘대상’의 오류들에 대한 정정과 나아가 그것의 ‘혁명적’인 전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3, <자본>에 관한 철학적 독해

 

철학은 이미 우리의 ‘순수이론’으로서의 ‘경제학’에 개입되어 존재한다. 설령, 경제학이 자신의 독립성을 내세우며 이러한 진리를 부정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리하여 ‘<자본>의 경제학’이라는 것은 고전파 경제학과 주류경제학이라는 개념들에 빗대어서 쓰이는 하나의 은유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정치경제학을 지칭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의 윗부분에서 우리가 짧고도 미흡하게나마 고찰한 것, 그것들에 전제한 채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철학적 독해’에 대해 언급할 수가 있고, 또한 그것에 대해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지하다시피, 과학적 대상, 그리고 그런 대상적 지식 자체는 철학이라는 이론적 작업에 의해 그때그때 역사적으로 규정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다른 여타의 과학-경제학도 예외일 수는 없이-과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철학에 의한 ‘대상’의 규정, 재규정과 나아가 그것의 혁명적 전화는 과학의 진보에 필수불가결한 이론적 작업이며, 그 작업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텍스트에 대한 ‘철학적 독해’인 것이다. 마르크스가 사용한 읽기 방식도 바로 이것이었으며, 또한 아무런 경향성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새로움만을 요구받는 현재의 우리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읽어야 하는 방식도 바로 이래야 하는 것이다.15)

철학적 독해, 그것의 필요성은 죽은 마르크스를 대신하여 <자본> 2권을 출간했던 엥겔스에 의하여 이미 언급되어 있는 바, 이 글을 맺으면서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만 하다.

 

선학(先學)들이 해답을 본 곳에서 그-마르크스-는 문제만을 보았다.16)

 

(1998년 2월)







1) 여기서 계속 언급되는 ‘과학(科學)’이라는 것은 주지하다시피 자연과학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적이고 이론적 행위들 속에서 점점 세분화된 학문, 각각의 이론적 영역들을 말하는 것이다.


2) 이하에서 언급되는 내용은 철학에 대한 L. Althusser의 테제들, 즉 “철학의 새로운 실천”과 관련된 주장(<’자본’을 읽는다>, <레닌과 철학>, <철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을 참조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또한 각각의 명제들을 인용할 때에는 그때그때 출처를 밝힐 것이다.


3) 철학의 어원이 ‘philos(사랑)’와 ‘sophia(지혜)’의 합성어인 ‘philosophy’라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철학적 행위는 단순한 지식의 습득을 넘어선다. 즉, 철학은 각각의 지식들의 보편화, 이론화, 그리고 그 운용에 관한 학문이다.


4) 12) 참조


5) F. Engels,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1888.

엥겔스는, 철학에 있어서 이러한 근본적인 두 경향 사이의 문제는 고대철학의 발생 때부터 꾸준히 존재해 왔지만 결정적으로 중세사회에서 교회, 즉 종교적 논리가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 때 본격적으로 ‘첨예화’되었다고 쓰고 있다.

“… 신이 세계를 창조했는가, 아니면 세계는 영원히 존재해 왔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에 따라 철학자들은 두 가지 커다란 진영으로 갈라진다. 자연에 대해 정신의 일차성을 주장하고, 따라서 결국 어떠한 형태로든 세계창조…를 가정하는 사람들은 관념론의 진영을 구성했다. 한편 자연을 일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학파의 유물론에 속한다.

관념론과 유물론이라는 이 두 가지 표현은 원래 바로 그러한 것 이외에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ibid.)


6) 이하, 약간 언급되듯이, 철학은 과학적 지식의 발견이라는 각 계기를 거친다. 예를 들면 갈릴레오에 의해 정립되기 시작한 역학적(力學的) 발견-그 자체로 과학적 혁명-은 데카르트 철학의 유물론적 성격에 의해 ‘철학적으로’ 재정립되며, 이후 마르크스가 역사라는 ‘과학적 대륙’을 발견하기 이전까지 관념론과의 지리한 투쟁을 반복한다. 하지만 역사라는 ‘대륙’의 발견 이후 그것은 다시 유물론적 재정립으로 복귀하게 되는 것이다.


7) 비록 레닌의 말처럼 인류가 존재하고 또 그들이 사고를 하는 한 철학적 관념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경향이 인간이 만들어온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책동에 철저히 복무하게 되기 때문에 계급투쟁으로 현상하는 과학적 입장에서는 더더욱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8) L. Althusser, <레닌과 철학>, 1968.


9) 철학은 이론에 있어서 계급투쟁을 나타냅니다…”  - L. Althusser, <마치오키와의 대담>, 1968.


10) ”철학은 이론 형식 내에서 수행된 정치적 개입의 실천이다…”  - L. Althusser, <헤겔 이전의 레닌>, 1969.


11) V. I. Lenin이 마르크스 사후 30주년을 기념하여 1913년 4월 볼셰비키의 합법적 월간이론지 <프로스베시체니에>에 게재한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부분>이란 소논문 참조.

레닌은 이 글에서 인류의 전통을 가잘 잘 계승한 사상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이며 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천과 구성부분’을 가진다고 쓰고 있다. 즉 (1) 근대 계몽기의 기계적 유물론과 독일 고전철학의 사변적 변증법의 결합으로서 ‘변증법적유물론’, (2) 영국 고전파 경제학의 노동가치설을 토대로 한 ‘정치경제학’, (3) ‘자유와 평등’의 기치로 일단의 봉건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던 프랑스 ‘공상적 사회주의’ 등이 그것이다.


12) ”… 철학은 어떤 영역에 있어서 어떤 현실에 관한 정치의 어떤 연속이다. 철학은 이론 영역 내에서, 보다 정확히 말해 과학 곁에서 정치를 대변한다. 그리고 역으로, 철학은 계급투쟁에 참가한 계급 곁에서 정치의 과학성을 나타낸다… 마르크시즘은 실천의 (새로운)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

- L. Althusser, <레닌과 철학>, 1968.


13) 마르크스는 <자본>의 모델로서 당시 자본주의 최고 발전국가였던 영국을 상정하였지만, <자본>에서 영국자본주의를 개별적으로 논하지 않는다. 그는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 체제의 제 요소를 ‘이상적’이고 이론적으로 보편화하면서 자본주의 체제 일반에 대한 하나의 ‘이상적 평균’을 <자본>이라는 저서를 통해 구성하고 분석, 비판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L. Althusser, <자본을 읽는다>, 부록 <’이상적 평균’과 이행형태들에 대하여>, 1965, 두레, 김진엽 譯, 1991. 참고.


14) K. Marx,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중 4번째 테제

“… 세속적 토대가 자기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스스로 구름 속에서 하나의 독립적 왕국으로 자리잡는다는 사실은 오직 이 세속적 토대의 자기분열과 자기모순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15) L. Althusser, <’자본’을 읽는다>, 제1장 참조


16) F. Engels, <자본> 2권 ‘서문’, 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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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1 - 상 - 정치경제학 비판 경제학고전선집 7
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노동은 인권이다

-노동/계급/노동자계급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한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필두로 전세계에 걸쳐 연쇄적으로 이룩되었던 민주주의 사회 치고 나라의 가장 큰 법인 헌법에 이 문구를 집어넣지 않은 나라는 없다. 약소국가로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늦게나마 민주주의 국가를 만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의 의식이 조금씩 더 민주화되고 다양한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주체로서 자리매김해 가는 현대사회에서 사람으로서의 기본적 권리, 즉 인권(人權)에 대한 관심은 발전되어가는 사람들의 의식의 속도만큼, 어떤 면에서는 그 이상으로 커지고 있다. 물론 다양성이 인정되는 지금 시대에서는 인권에 대한 이해와 해석도 각양각색일 터이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대다수 봉급쟁이들에게 있어 인권은 어떠한 색깔을 지니고 있는가.

 

 

1. 노동(勞動)

 

… 노동은 모든 가치의 창조자이다. 오직 그것만이 자연의 산물에 경제학적 의미의 가치를 부여한다. 가치 그 자체는 어떤 사물 속에 대상화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인간 노동의 표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은 어떤 가치도 가질 수 없다.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그것을 결정할 수 있다면 이와 똑같이 사람들은 가치의 가치에 관해서 논하거나, 무거운 물체의 무게가 아니라 무거움 그 자체의 무게를 결정할 수 있다…

- F. Engels, <반뒤링론>, 1878, 제6장 단순노동과 복잡노동, 김민석 譯, 새길, 1987.

 

현대사회라는 거대한 수레를 굴러가게 하는 요소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무수히 많은 것들이 떠오르겠지만 경제학적(經濟學的)으로 사고를 좁혀 생각해 보면, 우리가 경제활동을 하는 무대가 있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사회이기에 이 있어야 할 것이며 다음으로는 우리 모두의 경제활동 행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고전적으로 위의 요소들을 3대 생산요소로서 정리하였는데, 가치생산의 잠재적 공간으로서의 토지(土地), 끊임없이 자기가치증식하는 화폐로서의 자본(資本), 이들에 결합하여 최종적으로 가치창출을 실현하는 노동(勞動)이 그것들이다. 앞서 현대사회라는 말을 했으니 이들 요소들에 좀더 현대적인 해석을 가해보자. 우선 첫 번째 요소인 토지. 경제사상적으로 중농주의(重農主義)가 한 주류를 형성할 수 없는 현대사회에서 단순하게 토지 자체에만 그 의미가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경제적 가치들이 발현될 수 있는 물질, 대상, 공간 모두를 아우를 수 있을 것이며 여기에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축적된 지식, 정보 또한 이 첫 번째 요소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요소인 자본. 이는 지금 경제체제에서 일반적으로 화폐, 즉 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단지 그 화폐형태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언급하였듯이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자기가치증식을 하는 을 말하는 것이다. 예금이나 주식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가지 재산의 형태로 이자 및 이득을 발생시키든지 각종 생산수단에 재투자되어 이윤창출에 혁신적인 변화를 촉진시킴으로써 가치량 증가에 기여를 하든지 간에 다양한 형태로 자기운동을 하면서 가치를 증식시키는 모두를 이르는 것이 자본이라는 요소이다. 마지막으로 노동. 전술하였듯 이는 인간이 행하는 일련의 경제활동의 행위라 할 수 있는데, 토지, 자본 등으로 매개되는 다른 재화에 결합하여 최종적으로 가치를 창출하고 기업에는 이윤1)을, 사회에는 물질적 발전과 생산력 증대를 이루는 요소인 것이다. 여기에서 노동 혹은 노동력의 가치에 대한 고찰은 이후에 구체적으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위에서 두 가지 요소, 즉 토지자본 같은 단어들은 고매하고 권위있는 주류경제학자(主流經濟學者)들을 비롯하여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구에 날마다 회자되는 것들이라 경제학적 권위나 전문성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본 글에서 굳이 그 의미를 되새길 필요는 없다. 다만 자본으로 일컬어지는 노동대상이나 노동수단과 같은 일체의 생산수단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나타내는 대다수의 사람들, 우리 모두는 거의 대부분이 토지자본의 소유와는 무관하게 현실적으로 노동(력)이라는 결정적 생산요소 하나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만을 언급하자. 대다수 사람들의 삶이 노동을 통해 영위가 되고 있기에 대다수의 우리들은 바로 이 노동이라는 생산요소에 더욱 주목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는 이 운동(노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천성)을 변화시킨다… 우리가 상정하는 노동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의 노동이다. 거미는 직포공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꿀벌의 집은 많은 인간 건축가들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라도 가장 훌륭한 꿀벌보다 뛰어난 점은, 그는 집을 짓기 전에 미리 자기의 머리 속에서 그것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즉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의식하고 있는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키는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처럼 그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는데, 그는 자신의 의지를 이것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기관들의 긴장 이외에도 주의력으로서 나타나는 합목적적 의지가 노동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필요하다.

- K. Marx, <자본론>, 제3절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김수행 譯, 비봉출판사, 1996.

 

다분히 원론적이라 약간 지루하지만, 우리 모두의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그 물적 기반이 되는 노동이라는 생산요소를 탁월하게 규정하고 있는 글이라 인용을 했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개념인 노동에 대해 위 글을 기초로 정리를 해보면,

첫째,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다. 동물의 한 종()으로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가장 먼저 접하는 대상은 객체로서의 자연이기에 당연한 전제이다.

둘째, 노동을 통해 인간은 객체로서의 자연을 변화시켜 자신의 합목적적 의지(合目的的 意志)를 실현한다. 원시적으로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 살아남기 위해 자연이라는 대상을 극복해야 했는데 자신의 삶에 맞게 관념적이나마 목적을 세우고 그에 따라 물적으로 자연을 변화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노동을 통해 인간은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 또한 변화시킨다. 인간은 대상을 변화시키는 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변화된 대상으로 인해 스스로의 삶의 양식을 변화, 발전시킨다는 의미인데 경제학적으로는 증식된 가치의 형태로, 축적된 자본의 형태로 생산력의 발전을 이룩하여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그에 따라 지속적으로 발전을 기획한다. 변화, 발전에 대한 합목적적 의지는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행동방식을 규정한다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넷째, 노동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주체, 객체의 변화 및 발전을 이룩하려는 인간의 합목적적 의지와 그것의 외화(外化)된 형태로서의 노동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교육되며, 혁신되고 축적되어 인간 역사발전에 복무한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하고 있는 노동을 위와 같은 원론적인 개념으로서만 설명해내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음은 인정하자. 다만 지금까지 서술한 노동의 개념을 볼 때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만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즉, 노동이라는 것은 시초적으로는 탄생과 함께 자연이라는 거대한 대상과 마주하게 된 인간 개체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신체기관을 통해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출발하지만 하나의 개체로서만이 아닌 인류라는 하나의 종(種)으로서 존속하기 위해 더욱 발전된 노동을 실현하기 위한 생산도구를 다름아닌 바로 그 노동을 통해 축적, 발전시키게 되는데, 이와 같이 노동이라는 행위는 각각의 사회를 형성하는 인간 역사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혹은 생산력 발전이라는 유구한 과정에서 필연적인 계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본질적으로 한 개체로서의 인간인 개인의 시각에서는 자아실현의 매개로서 기능하는 동시에, 인간 역사의 발전을 견인해 내는 원동력으로서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획득할 수밖에 없다. 노동은 결국 인간이 창조해 온 역사와 각각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떠나게 되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궁극적인 존재의미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노동은 항상 인간의 역사, 사회형태와 함께 고려되어야 할 개념인 것이다. 물론 인간의 역사가 발전해온 각각의 단계에 따라 인간의 노동이 실현되는 양상에 각각 차이가 있었으며 실제로 각 시기의 경제체제에 따라 인간 노동 실현의 양태는 각각 다르게 규정이 되어 왔다.2) 이후 노동이라는 아직까지 다소 친숙하지만은 않은 개념과 관련하여, 그럼에도 현대사회에서 실제로 노동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대다수의 우리의 삶을 조망하기 위해 논의를 전개하면서 좀더 구체적인 언급을 하기로 하고 일단 이 장에서는 노동이란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인간이 가진 필연적인 의무이자 권리일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해석에 만족하면서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2. 계급(階級)

 

계급들은 사람들의 대규모 집단들이며, 이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의 생산체계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지위에 의해, 생산수단들에 대한 그들의 관계(대부분의 경우 법으로 고정되고 형성된다)에 의해 노동의 사회적 조직에서 그들의 역할에 의해, 그리고 결국,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적 부의 몫의 정도와 그 부를 획득하는 양식에 의해 서로 구별된다.

- V. I. Lenin, <위대한 출발> 中

 

노동은 언제나 사회, 역사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며 그런 한에서만 그 존재의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형태인 사회(社會)’에 대한 언급이 누락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전적으로 사회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같은 무리끼리 모여 이루는 집단, 서로 협력하여 공동생활을 하는 인류의 집단, 온갖 형태의 인간의 집단적 생활, 어느 특정한 발전단계를 이룬 집단(민중실용국어사전, 민중서림 편) 등으로 설명된다. 쉽게 이해하면 주지하다시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모여 이루는 집단을 일컫는다는 포괄적인 의미에서부터 이 속에 존재하는 각종 모임, 회합, 패거리 등을 지칭하는 것이 바로 사회라는 어휘인 것이다. 사회라는 개념에 대한 정치하고 학적인 설명은 우리 주변에서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많은 사회학자들에게 맡기고 본 글은 패거리로서 존재하는 인간 사회에 대한 고찰에 주목하고자 한다. 논의의 시작으로서는 약간의 무리가 있을 지 모르나 앞에서 작위적으로 명명한 패거리라는 말을 사회적 계급이라는 기호로 대체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자.

이 장 서두에 인용한 글에서 계급이란 사람들의 대규모 집단’이라는 말을 이해함에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계급은 단순하게 사람들의 집단만을 이르는 것이 아닌 ‘대규모 집단’이라는 것이다. 즉, 대규모이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해당 사회에서 그 존재가치가 클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결국 위에서 행한 잘못된 비유와는 달리 계급은 단순한 ‘패거리’와는 다르다. 그런데 우리의 사회와 계급에 대한 이해에 앞서 이 대상들에 대한 우리 인간의 인식은 어떠한지 잠시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의 구절을 되새겨 봄이 적절할 지도 모른다.

 

사회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를 반영한다… 반영은 반영되는 것의 근사적으로 정확한 복사일 수는 있으나, 여기에서 동일성을 운운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의식 일반은 존재를 반영한다. 이것이 유물론 전체의 일반적 명제다.

- V. I. Lenin,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1908, 박정호 譯, 돌베개, 1992

 

따분한 이야기일 지는 모르나 철학적으로 인간의 유물론(唯物論)적 인식론(認識論)에 대한 언급이다. 즉,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 그들의 의식(意識)의 토대는 사회 자체를 물(物)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객관적 존재들이라는 의미이다.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초(楚)나라 지방 말단관리였던 이사(李斯)를 강대국 진(秦)나라의 재상으로 만든 계기가 되었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오래된 격언으로 이해하든,3) 제복을 예찬한 나폴레옹이 ‘군복이 진정한 군인을 만든다’는 의미로 이해하든 포괄적 의미에서는 무방하다. 인간의 모든 인식과정에서 어떠한 의식이든 그 기저에는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종의 물적 토대가 반영되어 있으며, 이 객관적 존재는 의식 형성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로 이해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의식은 물질적 조건이 그대로 반사된 것에 불과하다는 식의 유물론의 기계적인 해석은 온갖 물신적(物神的) 시각과 행태로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음에 물적 존재와 인간 의식 사이의 ‘동일성을 운운하는’ 터무니없는 시각은 진정한 유물론적 관점과 전혀 관계가 없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물질들 사이의 관계로 보이는 것들은 결국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의식에 절대적으로 반영되지만, 존재를 토대로 일단 형성된 의식은 상대적으로 그 토대가 되는 물적 존재에, 그 변화와 발전에 궁극적으로 기여한다는 변증법적(辨證法的) 인식론이 결국 진정한 유물론의 방법론이 된다. 이 같은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에 대한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회, 그 속의 ‘계급’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장 서두의 인용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사회 속에서 각각의 ‘대규모 집단’을 이루는 ‘이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의 생산체계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지위에 의해, 생산수단들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 의해 노동의 사회적 조직에서 그들의 역할에 의해, 그리고 결국,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적 부의 몫의 정도와 그 부를 획득하는 양식에 의해 서로 구별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의 생산체계란 무엇인가. 주지하다시피 지금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정의로서 자본주의는 어느 순간 하늘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노동을 통해 사회를 조직, 존속시켜온 인간은 노동의 도구, 혹은 생산수단을 포함한 사회적 부에 대한 소유를 중심으로 특정한 인간관계를 맺어왔다. 이를 정치경제학에서는 생산관계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민법, 상법 등의 사법(私法)적 형태로 대부분 규정되고 보장되는 이 관계를 통해 인간의 노동은 그 특정 사회에 맞게 조직되어 왔고 노동을 하는 인간은 그 관계 하에서 그들의 역할이 주어졌으며 그에 따라 인간의 ‘대규모 집단’들도 형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회적 ‘계급’인 것이다. 따라서 계급이라는 것은 앞 장에서 서술한 노동과 함께 고려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계급을 형성하는 생산관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노동과 함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생산력의 발전, 즉 양적 증대의 측면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각 사회의 생산체제를 특정지어온 각각의 발전단계는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형태를 중심으로 노동이 조직되어가는 방식인 생산관계를 통해 질적으로 변화되어 왔다는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또 다른 개념이 노동의 ‘분업(分業)’인데, 고전경제학의 시조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위대한 발견이 바로 이 질적인 생산관계의 역사적 특질을 이루는 ‘분업’의 발견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아담 스미스의 역작인 <국부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개념이 바로 ‘분업’이라고도 한다.

 

번영하는 문명국의 가장 일반적인 수공업자 또는 날품팔이 노동자의 생활용품을 관찰해 보면, 그에게 이러한 생활용품을 제공하기 위해 노동을 조금이라도 투하한 사람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수천 명의 도움과 협력 없이는 문명국의 가장 초라한 사람조차도 우리가 단순하다고 오해하고 있는 단순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것이다.

- A. Smith, <국부론(An Inquiry into Nature and Cause of the Wealth of Nations)>, 제1편 제1장

 

분업에 대한 위와 같은 간단한 소개와 함께 스미스는 노동의 분업이야말로 생산력을 증진하는 중요한 계기라는 설명을 하는데 그의 제자들인 고전경제학자들에게서 분업은 상품의 교환을 매개로 하는 시장경제의 측면에서만 이 의미가 국한되고 있다. 그러나 생산력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는 생산관계로서의 분업은 보다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얻어야 한다. 앞서 후에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로 했던 역사발전단계에서의 인간 노동 실현의 양태에 대한 고찰은 생산관계로서의 노동의 분업에 대한 이해와 불가결하다.

원시 공동체사회로부터 인간 노동의 경험이 축적되고 농업발전이나 전쟁 등을 통해 남는 재화들이 생겨나면서 이것에 대한 소유를 둘러싸고 인간 공동체에서는 대립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물론 원시 공동체사회에서는 남는 재화에 대한 소유가 기본적으로는 공동체에 귀속되었지만 생산력 발전을 위한 재축적과 관리의 필요성에 따라 다수의 노동하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소수의 계층이 생기기 시작되었는데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가 바로 최초의 사회적 분업의 형태이다. 육체노동자의 물질적 노동에 의해 부양되던 이들 지배자들, 즉 당시의 철학자였던 ‘정치적’ 정신노동자들은 생산력 발전을 위한 생산수단의 사적인 소유를 영속화시키기 위해 국가(國家)라는 단위를 형성하면서 인간 역사에서 고대사회를 열게 된다. 앞서 고대 사회는 노예노동에 기초한다고 했다. 즉 단위내 모든 사람들이 평등했던 원시 공동체적 사회관계는 소멸하고 노동력을 지닌 인간 자체인 노예를 포함한 일체의 생산수단을 독점한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대다수를 지배했던 사회가 바로 동서양을 막론한 고대사회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체제가 언제까지 영속될 수는 없는 법, 생산력의 증진이라는 물질적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의식들도 조금씩 고양되기 시작했고 이는 종교로 대표되는 사상(思想)의 형태로 고대사회를 압박하기 시작하였으며 분열된 지배층은 봉토(封土)의 형태로 당시에는 중요한 요소였던 토지를 분할하며 봉건지주(封建地主)들이 됨으로써 인간 역사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주지하다시피 철저하게 신분제에 기초한 사회였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은 고대사회에서 중세 봉건사회로의 질적인 발전을 이루는 데 이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어느덧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데 있어 주요한 지배이념으로 자리매김한 종교의 역할이었다. 어쨌든 중세봉건사회에서의 대다수 사람들은 고대 노예들과는 다르게 약간의 사적소유가 허용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토지와 지주들에게 인신적으로 구속이 된 채 자신의 노동생산물 대부분을 수탈당해야만 했다. 언제나 대다수가 노동을 통해 생산한 ‘잉여가치’는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축적되었으나 대다수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이러한 체제를 감당하기에는 어느덧 과학과 생산력의 발전이 너무나 앞서가게 되었다. 국제적 교류를 통한 상업의 발전, 전문적 수공업자들에 의한 산업의 발전이라는 양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농업노동에 기반한 중세의 봉건적 신분관계와 소유관계에서 상인이나 수공업자들과 같은 계층들은 항상 소외되어 왔던 것이다. 역사발전과정에서 생산력 발전이라는 양적인 형태에 질적인 변화를 촉진하였던 생산관계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더 이상의 발전을 막는 질곡(桎梏)이 된다.4) 여기에서 또 다시 나타나는 분업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분리였다. 또한 근대 자본주의사회가 시작되면서 대규모 공업이 등장하였고 인간의 노동은 본격적으로 생산력 발전을 위한 철저한 ‘부문내 분업’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으며 몇 백년도 안되어 인간 역사에서 생산력 발전의 신기원을 이루게 된다. 고전경제학자들이 예찬하는 ‘분업’은 근대사회 이후에 나타난 바로 이 자본주의적 ‘부문내 분업’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시각을 좀더 넓혀보면 ‘분업’은 인간의 역사발전단계에서 생산력 발전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생산관계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연적인 계기이다.5)

이제 다시 계급이라는 본 주제로 돌아오자. 산업도시의 발전과 봉건지배의 약화는 대다수 중세농노들을 농촌으로부터 쫓아내었고 이들의 노동은 이제 달라진 근대적 생산체제에 맞게 다른 형태로 조직된다. 한편 중세체제의 말기에 이르러 과학 및 산업의 발전과 함께 이들 상인 및 수공업자들은 최초에는 ‘중세 중산층’으로서 ‘부르주아지(Bourgeoigie)’라는 대규모 집단으로 형성이 되었고 공장 및 일체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를 통해 사회적 생산체제의 질적인 발전에 기여하면서 이른바 자본주의적 생산체제를 구축하였으며 그 이후 지금까지 ‘자본가’라는 대규모 집단으로 사회를 지배해 왔다. 자본가는 산업발전의 근간이 되는 자본을 비롯하여 모든 생산수단을 독점한 집단을 지칭하며 자본주의 생산체제에서 끊임없이 자기가치증식을 하는 자본의 운동이 계급적 형태로 인간화되어 표현된 것이다.6) 지속적인 자본축적과 생산력 발전을 이루기 위해 자본가라는 계급은 역시 일체의 사회적 생산수단을 소유한 상태에서 노동자들을 고용하였는데, 소위 부르주아지라고 하는 자본가 계급과 대비되어 모든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는 전혀 없이 노동력이라는 상품 하나만을 지닌 채 임금을 대가로 각 산업에 고용된 자들을 ‘임금노동자’ 혹은 근대적 의미로서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7) 라고 한다. 물론 자본주의 초기단계에서 이들의 대부분은 중세적 토지로부터 추방된 농노들이었다. 노동을 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 대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생산수단의 소유를 둘러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인해 철저하게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데, 그 원인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개념이 바로 분업, 생산수단을 비롯한 일체의 사회적 부에 대한 소유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 살고 있는 지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근대사회를 시작하게끔 했던 특정 생산관계에는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사회에 있어 가장 주요한 대규모 집단이자 전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계급은 사회 계층적 존재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대규모 집단, 즉 ‘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계급이며 결국 이 계급들의 역관계에 따라 해당 사회의 구체적인 성격이 규정된다.

 

 

3. 노동자계급-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임금노동자

 

‘임금이란 사용자가 근로의 대가로 근로자에게 임금, 봉급, 그 외 어떠한 명칭으로든지 지급하는 모든 금품’. 따라서 기본급, 시간외 수당, 연차수당, 상여금 등 명칭에 관계없이 ‘근로에 대한 대가성’, ‘노동력이라는 생산요소에 대한 상품값’만 인정되면 모두 임금에 포함된다. 임금의 전제가 되는 ‘근로의 대가’라 함은 사용종속관계 아래에서 제공되는 근로에 대한 보상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근로기준법 제 14조에 규정된 근로자가 같은 법 제 15조에 규정된 사용자의 지시, 명령 아래에서 제공한 근로에 대한 반대급부라고 규정할 수 있다.

-윤욱현, <새노동법 해설>, 한국경제신문사, 1999.

 

지금까지, 태어나자마자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게 된 인간은 물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노동이라는 생산적 행위를 해야만 했고 하나의 종으로서 존속하기 위한 조건인 생산력 발전을 위해 노동대상 및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를 중심으로 일련의 생산관계를 형성하면서 그 속에서 노동을 사회적으로 조직, 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대규모 집단’인 계급을 이루어 왔다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근대를 거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전유(專有)를 통해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자본가 계급과 시장에서 가치로 교환되는 상품화된 노동으로서의 노동력만을 가진 채 그에 고용되어 살아가는 노동자 계급이 주된 ‘대규모 집단’들이라는 뭔가 석연치 않은 규정까지 내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은 어떤 구체적 형태로 현상하고 있는가. 각 산업에 고용되어 노동을 통해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 구체적 형태인데,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파는 대신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노동을 하는 우리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될 ‘근로의 대가’, 즉 ‘임금’에 대한 언급부터 시작하자. 이 지점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12년간의 제도교육을 통해 바르게 성장한 우리들 귀에 자본가 계급이네 노동자 계급이네 하면서 어쩐지 께름직하게만 들리기만 하는 규정에 대한 해명이 필요한 출발점이다.

임금(賃金,wage)에 대한 정의는 이 장 서두에 인용했듯이 애써 표현하지 않아도 ‘봉급쟁이’인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이에 더하여 우리나라의 근로기준법 제 14조 ‘근로자의 정의’ 및 제 18조 ‘임금의 정의’를 보면, ‘사용자가 근로의 대상으로 근로자에게 임금, 봉급 기타 어떠한 명칭으로든지 지급하는 일체의 금품’을 ‘임금’이라 정의하고 이를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근로자’라고 한다. 이 법에서 말하고 있는 ‘근로’라는 개념은 본 글 첫 장에서 고찰한 인간의 역사적, 사회적 ‘노동’이라는 개념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지면의 한계로 인해 편의상 동일한 의미로 보자. 따라서 ‘노동’이라는 어휘와 좀더 친숙해지기 위해 법에서 규정한 일체의 ‘근로’를 그 맥락상 본 글에서는 ‘노동’으로 대체하도록 한다. 어쨌든,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노동’(근로)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이 법 제 16조 ‘근로의 정의’를 보면 노동은 정신노동, 육체노동 모두를 포함하는데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노동자는 이 사회에서 ‘직업을 불문’하고 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노가다’, 또는 육체노동에만 노동의 의미가 국한될 수는 없다는 것인데, 우리가 주목하는 노동이라는 개념은 단지 노동과정에서의 ‘기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노동을 통해 살아가는 하나의 ‘대규모 집단, 즉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노동자는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생산직 봉급쟁이든 사무직 봉급쟁이든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같은 사회적 지위에 있다는 인식이 우선된다. 고전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상품의 가격을 중심으로 볼 때 우리가 신고 다니는 신발의 가격과 옷의 가격이 같다면 상품시장에서 같은 값의 화폐를 통해 구매를 할 수 있기에 일반적으로 가치(교환가치)가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이는 결국 신발과 옷의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각각 지출된 추상적 형태로서의 노동량이 같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고전적이고 도식적인 이해로서 복잡한 현대사회의 다양한 노동을 설명할 수는 없다. 현대경제학에서 상품은 단순하게 재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형의 서비스도 포함하므로 각각 상품들의 가치측정에 관한 다양한 양태들은 좀더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기본적으로 상품생산을 위해 결정적 요소로서 결합되는 노동은 ‘직업을 불문하고’ 동일한 사회적 가치를 지니며, 그로 인해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력을 지불하는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동일한 사회적 지위를 차지한다는 의미로서 이해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앞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노동자들은 일체의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기관 및 그에 기반한 지식 등만을 지닌 채 임금이라는 대가를 목적으로 노동력을 지불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지닌 노동력이라는 요소 또한 시장에서 자유롭게 판매, 구매, 교환되는 다른 상품과 다를 게 없다. 즉, 노동력도 하나의 상품인 것이다. 여기에서 잠깐 상품 일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상품은 생산된 하나의 재화로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목적물로서 지니는 가치와 상품이기에 시장에서 교환되고 거래되는 과정에서 획득하는 또 다른 형태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정치경제학에서는 전자(前者)를 상품의 본질로서의 ‘사용가치(使用價値)’, 후자(後者)를 상품의 현상형태로서의 ‘교환가치(交換價値)’라고 구분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하고 가장 대량적인 것’이 지니는 이중성(二重性)을 폭로한다.8) 그러나 대상(對象)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배제하면서 기능적인 ‘과학’으로서 존재한다고 자부하는 경제학에서는 ‘사용가치’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교환가치’만을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가치’로 한정시키고 있다.9) 이 ‘가치’가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상품의 ‘가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술했듯이 우리 노동자들이 지불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에도 하나의 경제학적 ‘가치’, 가격이 존재하는 바, 이것이 바로 임금이며 ‘노동력의 가치’인 것이다. 따라서 상품 일반에 이중성이 존재하듯, 노동력이라는 상품에도 위와 같은 이중성이 있다. 즉, 인간의 협동적 행태, 분업을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조직된 총노동, 그리고 인간 본연의 창의성을 기반으로, 그 자체로는 잠재가치에 불과한 물적 대상들에 변화를 가하여 현실적인 가치-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사용가치’로서의 본질적 측면, 다른 한편으로 생산된 상품이 시장에서 교환되기 위해 측정되는 가치척도로서의 현상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로써 노동의 사용가치로서의 전자는 ‘노동의 가치’라 하고 후자를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교환가치를 형성하는 ‘노동력의 가치’라 하여 양자간에 본격적으로 구분선을 그을 수 있다.

상품의 가치가 측정되는 척도로서 그 상품에 결합된 노동력은 시간으로 측정되어 왔는데, ‘노동의 가치’로서의 본질은 질(質)적인 측면을 지칭하는 데 반하여 ‘노동력의 가치’로서의 현상형태는 시간으로 측정되는 양(量)적인 측면을 지칭한다. ‘사용자는 근로계약 체결시에 근로자에 대하여 임금, 근로시간, 기타의 근로조건을 명시하여야 한다’며 ‘근로조건의 명시’에 대하여 규정한 근로기준법 제 24조 조항에서 보듯이 노동자가 결국 임금과 맞바꾸는 것은 자신의 노동 자체가 아니라 양적으로 표현된 노동, 즉 일정한 노동량이며 이는 본질적인 ‘노동의 가치’가 아닌 ‘노동력의 가치’인 것이다. 봉급쟁이들이 가진 것이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다고 해서 ‘몸을 팔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단지 ‘노동력’이라는 상품만을 팔며 살아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상으로도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그렇다면 더더욱 ‘자유경쟁’의 시장경제에서는 임금과 노동력을 맞바꾸어 교환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또한 실제로는 어떠하든 일단 법적으로는 평등하다. 노동력을 팔았다고 해서 노동자의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인격, 본성, 권리 자체를 팔았다는 의미가 아닌 것인데, 이것이 고대사회의 노예, 중세사회의 신분제적 농노와 다른 점이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노동자계급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현대사회의 임금노동자들이 근대적 의미의 ‘프롤레타리아트’, 이미 화석화되어 버린 낡은 계급주의적 관념으로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갈수록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지금은, 지난 역사에서 항상 소외되어 왔고 객체로만 머물러 왔던 대다수 사람들에게 ‘계급’의 형태로든 ‘대중’의 형태로든 사회의 구성과 발전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과 지위가 주어져야 할 시점이며, 현재 이 대다수 사람들의 존재적 근거가 되는 것이 다름아닌 노동이라는 것이다.10)

임금과 자신의 능력으로서의 노동력을 교환하는 우리 사회 모든 봉급쟁이들, 즉 임금노동자들에 대하여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 글 첫 장에서부터 지루하게 고찰해 온 본질적 노동, ‘노동의 가치’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여 양적으로 표현된 ‘노동력’과 그것의 ‘가치’에 대해 주목해야 하고, 임금노동자 즉 봉급쟁이인 우리들이 상품으로서 판매한 노동력에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고 있는지, 사회 대다수인 봉급쟁이들에게 사회적 노동을 통해 축적된 사회적 부(富)가 정당하게 분배되고 있는지 고려해야 함은 물론, 우리 사회에서 임금노동자 즉 노동자계급이라는 ‘대규모 집단’의 사회적 지위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

 

사람으로 태어나서 당연하게 누려야 할 기본권으로서의 인권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며 평등하기에 법률상의 조문으로만 규정된 형식적 평등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평등한 인권을 확보해야 하는 출발점은 다름아닌 우리들의 노동일 것이다.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의 노동3권을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노동(勞動)이 곧 인권(人權)인 것이다.

 

(2003년 6월)

 







1) 고전경제학의 맥을 잇는 주류경제학(主流經濟學)과 다르게 인류의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하나의 과학으로서 경제학에서 또다른 주류를 형성하는 정치경제학에서는 노동을 통해 최종적으로 발현된 가치를 이윤(利潤,profit)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뭉뚱그려 표현하지 않는다. 상품생산의 요소를 불변자본으로서의 생산수단, 가변자본으로서의 노동력으로 분화하여 더 많은 가치는 노동(력)에 의하여, 나아가 절대적으로는 초과노동을 통하고 상대적으로는 자본의 투하 혹은 재투자를 통한 기술혁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가변자본으로서의 노동(력)이 생산해내는 가치를 잉여가치(剩餘價値,surplus value)라 엄밀히 규정하고 있다. 즉, 상품생산과정에서 노동이 결합됨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만들어내는 증가된 가치, 또는 최초의 가치를 넘는 초과분(아래책)을 잉여가치라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산업활동에서의 이득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이윤이라는 개념에는 생산과정 및 생산요소들의 기능에 대한 언급이 없다. 여기에서 간과하면 안될 것은 불변자본으로서의 생산수단에 투하되는 자본재투자와 축적의 과정도 인간이 한 가지 상품으로만 살아갈 수 없는 한은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기본적인 노동을 매개해야 하기 때문에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노동이라는 것이다.

“…노동과정은 노동력 가치의 단순한 등가물이 재생산되어 노동대상에 첨가되는 점을 넘어 계속된다. 노동력 가치의 등가물을 재생산하는 데는 6시간만으로 충분하지만, 노동과정은 이 6시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12시간 계속된다. 따라서 노동력의 활동은 그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초과가치를 생산한다. 이 잉여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와 그 생산물의 형성에 소비된 요소들(즉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차이다.”

(K. Marx, <자본론>, 1867, 제3절 제8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같은책.)


2) 노동의 양태가 각 경제체제에 따라 다르게 현상한다는 것에 대한 설명은 논의가 진전되는 과정과 함께 후에 다시 언급이 될 것이지만 해석의 차이에 따른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기본적인 내용만 우선 짚고 넘어가자. 즉, 인간의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라는 발전단계로 구분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사회에서는 사회계급의 차이에 따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유가 가능한 경제체제였기에 노동 자체도 다른 사람에 의해 전유(專有)되는 노예노동의 형태로, 중세사회에서는 농업의 발전과 함께 노동 자체가 전유되지는 않았지만 봉건지주들에 의한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이라는 명목하에 잉여가치의 가혹한 수탈을 기초로 한 봉건적 농노의 형태로,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중세에 그나마 가지고 있던 노동자의 생산수단에 대한 약간의 소유 자체도 완전히 박탈당한 채 가진 것이라고는 신체 하나로 시장을 통해 교환가치를 지니는 하나의 상품으로 전환된 노동력을 임금이라는 대가와 맞바꿀 수밖에 없는 임금노동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임금노동의 형태는 현대사회에서도 본질적으로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


3)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이사열전(李斯列典)’에 의하면, 이사(李斯)는 원래 초(楚)나라 사람으로서, 젊은 시절 지방의 말단관리로 있었을 적에 변소에서 더러운 찌꺼기를 먹던 쥐는 사람을 보고 놀라 급히 도망가는 반면, 커다란 곳간의 쥐는 좋은 쌀을 먹으며 사람이 와도 별로 놀라지 않는 광경을 우연히 목격하고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깨우침을 얻게 된다. 그는 곧바로 순자(荀子)를 찾아가 제왕의 법도를 익히고 약소국인 조국을 등지고 강대국 진(秦)나라로 가서 여불위의 식객을 거쳐 법가사상의 기반을 더욱 굳건히 하면서 진시황 정권의 재상으로서 중국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4) 사회와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론에 기초하여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관계를 규명한 다음 문구를 참조해볼 만 하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 즉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력들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에 들어선다. 이러한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그러한 실재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 일반을 조건짓는다.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들은 그 발전의 특정단계에서, 지금까지 그것들이 그 내부에서 운동해 왔던 기존의 생산관계들 혹은 이 생산관계들의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관계들과의 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관계들은 이러한 생산력들의 발전형태들로부터 그것들의 족쇄로 변전한다.’

(K.Marx,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 1859)


5) K.Marx, F.Engels, <독일이데올로기>, 제1편 1-3 ‘생산과 교류, 노동분업과 소유형태’ 참조.


6) ) 구매를 위한 판매만을 상정하는 단순상품생산은 재화 자체의 사용가치 취득 및 그 재화를 통한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서 기능하는데, 자본주의 생산체계에서 최종적 형태로서 화폐로 현상하는 자본은 끊임없는 투하 혹은 재투자를 통해 자기가치증식 운동을 지속한다. 사회적 계급으로 표현되는 자본가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이 운동에 있어 이른바 인격화된 자본이다.

‘…가치의 증식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자본의) 운동의 내부에서만 실현되므로,,, 자본의 운동에는 한계가 없다 이 운동의 의식적 담당자로서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 된다. 그의 일신(또는 보다 정확히 말해서 그의 주머니)은 화폐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이러한 유통의 객관적 내용(가치의 증식)이 그의 주관적 목적이 되고 추상적 부를 점점 더 많이 취득하는 것이 그의 행동의 유일한 추상적 동기로 되는 한에 있어서만, 그는 자본가로서-즉 의지와 의식이 부여된 인격화된 자본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K. Marx, <자본론>, 제2편 제4장, 자본의 일반공식)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하나의 대규모 집단인 계급으로서 자본가는 단지 돈이 많은 사람, 화폐를 많이 소유한 사람들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7)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는 전술했듯 산업사회에서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와는 전혀 상관없는 계급의 표현으로서 산업의 발전과 함께 농촌에서 쫓겨난 농민, 사회적 부를 분배받지 못한 채, 사회적 부에 대한 일체의 소유와는 전혀 상관없이 도시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빈민들을 이론적으로 지칭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어원은 라틴어의 Proletarii에서 나온 것으로서 로마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인구조사때 국가에 대한 존재가치가 오직 자손들(Proles)을 기르는 임무 외에는 없는 사람들에게 붙여졌다. 즉, 부나 지위, 특별한 능력 면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했다.’(J. London, <강철군화(Iron Heel)>의 각주에서 인용)


8) ‘상품은 사용가치(사용대상)임과 동시에 가치인 것이다. 상품은, 자기의 가치가 자기의 현물형태와는 구별되는 하나의 독특한 표현형태, 즉 교환가치를 가지게 될 때, 그 이중성을 드러낸다. 상품은 고립적으로 고찰될 때에는 교환가치라는 형태를 취하는 일이 없고, 그와 종류가 다른 한 상품에 대한 기치관계 또는 교환관계에서만 이 형태를 취한다.’

(K. Marx, <자본론>, 제1절 제1장)

사용가치는 모든 물질이 그 자체로 지니고 있는 가치,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고립된 가치로서의 본질을 의미하며 교환가치는 이 재화들이 시장을 통해 교환을 매개로 하는 상호관계를 이루게 될 때 측정되는 현상형태를 의미한다. 외부로 보이는 겉모습만이 아닌 물질의 본모습을 추적하는 철학적 사고방식에서 보면 상품만이 아닌 세상의 모든 물질은 현상과 본질이라는 이중적 모순에 기반한다. 물론 양자간에 어느 것이 우위에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9)경제학이 ‘노동의 가치’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사실상 (노동자라는 인물 속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노동력의 가치’이다… 노예노동에서는 소유관계가 노예의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을 은폐하는데, 임금노동에서는 화폐관계가 임금노동자의 무상노동(부불노동)을 은폐한다… 화폐는 그 지불수단으로서의 기능에서는 제공된 물건의 가치 또는 가격을, 따라서 이 경우에는 제공된 노동의 가치 또는 가격을 추후에 실현시킨다. 마지막으로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제공하는 ‘사용가치’는 실제로는 그의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력의 기능, 즉 재봉노동, 제화노동, 방적노동 등등과 같은 일정한 형태의 유용노동이다. 바로 이 노동이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를 창조하는 일반적 요소라는 것, 그리하여 이 속성에 의하여 노동은 다른 모든 상품과 구별된다는 것은 일상적인 의식으로서는 인식할 수가 없다.(K.Marx, <자본론> 제6절 임금 제19장 노동력 가치의 임금으로의 전환)


10) 본 글에서 계급을 다루었다고 해서 노동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굳이 계급적으로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하며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은 지칭하는 말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궁극적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발전시키는 한 주체로서의 정당한 사회적 지위만 인정될 수 있다면 노동하는 대다수 사람들을 어떠한 단어로 표현하든 무방할 것이다. 그에 대한 일례로 이탈리아 출신 정치학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의 규정으로서 ‘대중 노동자(mass worker)’와 같은 개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1968년까지 시기의 노동자에 대한 규정이다. 자본주의와 독점의 발전에 따라 세계는 초국적 자본의 지배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나 ‘대중 노동자’는 여전히 현대자본주의 초기의 포드주의적 대량 생산체계 속에 종속되어 탈숙련화되어 있으며 케인즈주의적인 개입주의 국가에 의해 지배되는 상태에 있다고 한다. 초국적 자본으로 대변되는 현재의 ‘제국’의 시대에서 그 변화와 대항의 주체로서 안토니오 네그리는 ‘대중(Multitude)’을 설정하고 있는데 이는 현대사회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조화되고 획일화되는 수동적인 ‘대중(Mass)’과는 달리 다양한 공통성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주체적인 욕망과 주장들을 결집해 나가는 무리를 지칭한다는 것이다.(A.Negri, M.Hardt, <제국(Empire)>, 2000, 윤수종 譯, 이학사, 2001. 참조) 이 다양한 ‘공통성’중 하나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노동’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러므로 현대사회의 한 축을 형성하는 거대한 무리로서 ‘대중 노동자’를 설정함에 무리가 따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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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법 - 인권의 높이를 보여주는 삶창문고 3
문재훈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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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바로 인권입니다!
- <삶창문고> 3부작 - 안재성의 [한국노동운동사1,2], 문재훈의 [노동법]
 

. 서론 – 인권과 노동권
. 본론
1. 인권과 노동권
. 인권
나. 노동권
2. 노동과 노동법
가. 노동의 개념
나. 노동법의 성격 및 역사
3. 우리 노동법과 노동조합
가. 개별적 노동관계 근로기준법 등
나. 집단적 노사관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등
다. 노동조합의 역할
. 결론 노동이 바로 인권입니다!  

 

. 서론 인권과 노동권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합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필두로 전세계에 걸쳐 연쇄적으로 건설된 민주주의 국가 치고 나라의 가장 큰 법인 헌법에 이 문구를 집어넣지 않은 나라는 없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늦게나마 민주공화국을 건설한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람들의 의식이 조금씩 더 민주화되고 다양한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주체로서 자리매김해 가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 인권(人權)’에 대한 관심은 발전되어가는 사람들의 의식의 속도만큼, 어떤 면에서는 그 이상으로 커지고 있습니다.  물론 다양성이 인정되는 지금 시대에서는 인권에 대한 이해와 해석도 각양각색일 것입니다. 헌법이 선언한 바 대로라면 모든 국민은 국가에 의해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합니다만, 지금 우리 사회의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는 실질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소수의 사람들과 가진 것이라고는 노동력 밖에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실질적으로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대다수 월급쟁이들에게 있어 인권은 어떠한 색깔을 지니고 있을까요?

노동교육을 인권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세계를 운영하는 기본주체가 돈이나 자본 등의 물질이 아닌 바로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철학을 재정립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인권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입장에서도 좀더 평등한 스스로의 권리를 찾아가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하지만, 본 교육을 통해 인권의 넓은 바다를 모두 항해할 수는 없습니다. 노동자 입장에서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한 목적이니 만큼 다소 협소하게 보이더라도 인권노동권을 하나의 인간의 권리로 연결하고 노동법을 매개로 하여 노동과 노동자, 그리고 노동조합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해보겠습니다.
 

. 본론

1. 인권과 노동권

. 인권

서론에서 거창하게 헌법을 언급했습니다. 이제, 인권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구체적으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근대법적으로 이 문구는 신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이슬람 격언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근대혁명 시기 시민의식이 발전하면서 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추해 본다면, 인권의 근거는 바로 이 되어야 하며, 현대의 법치국가는 인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면서 시작하므로, 헌법에 기초한 우리나라 대한민국도 당연히 국민을 보호하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합니다. 

. 노동권

다시, 헌법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우리 헌법은 2장에서 국민의 권리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 납세의 의무(38), 국방의 의무(39), 교육의 권리(31), 근로의 권리(32) 등입니다. 납세와 국방은 그대로 국민으로서의 의무이지만, 교육은 권리, 근로(또는 노동)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헌법 조항을 살펴보겠습니다(출처 : 대한민국헌법 0010 1987.10.29 전문개정)

* 헌법 31 

- 1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 2

모든 국민은 보호하는 자녀에게 적어도 초등교육과 법률이 정하는 교육을 받게 의무를 진다.

- 3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

* 헌법 32 

- 1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

- 2

모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진다. 국가는 근로의 의무의 내용과 조건을 민주주의원칙에 따라 법률로 정한다.

- 3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

- 4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임금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 5

연소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또한, 헌법은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라는 노동자의 가지 중요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 헌법 33

- 1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개별적으로 회사를 상대할 수도 있지만, 단결하여 조직할 있는 권리, 조직단체의 대표를 통해 회사와 교섭할 있는 권리, 노동조건의 향상이라는 목적을 위해 조직단체를 중심으로 파업, 태업 등의 실력행사를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 있고 국가는 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도 노동자가 사회적 약자이므로 국가적으로 보호받아야 함을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으며, 인권의 형태로서의 노동권이 중요한 권리라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헌법이 보장한 노동권은 하위법체계인 노동법에서는 어떻게 보장하고 있는 이후부터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2. 노동과 노동법

. 노동의 개념

노동권과 노동법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우선 지루하지만 노동에 대해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동근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식화의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냉전과 분단, 왜곡된 이념대립의 우리 역사 속에서 인간의 본질인 일하기라는 개념을 두고 북은 노동’, 남은 근로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오랜 벗을 북은 동무라는 우리말을, 남은 친구라는 한자어를 쓰게 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근로조합이 아니라 노동조합이므로, 인간의 본질인 일하기노동이라  부르며, 아래와 같이 정의해 보겠습니다. 레닌에 의하면, 개념정의라는 것은 한 줄로는 불가하므로 다각적으로 분류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자아실현체로서의 노동은

①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입니다.
동물의 한 종()으로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가장 먼저 접하는 대상은 객체로서의 자연이기에 당연한 전제입니다.

② 노동을 통해 인간은 객체로서의 자연을 변화시켜 자신의 합목적적 의지(合目的的意志)를 실현합니다.
원시적으로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 살아남기 위해 자연이라는 대상을 극복해야 했으므로  자신의 삶에 맞게 관념적이나마 목적을 세우고 그에 따라 물적으로 자연을 변화시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③ 노동을 통해 인간은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 또한 변화시킵니다.
인간은 대상을 변화시키는 데에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변화된 대상으로 인해 스스로의 삶의 양식을 변화, 발전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경제학적으로는 증식된 가치의 형태로, 축적된 자본의 형태로 생산력의 발전을 이룩하여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그에 따라 지속적으로 발전을 기획합니다. 변화, 발전에 대한 합목적적 의지는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행동방식을 규정한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로 인해 개별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할 수 있습니다

④ 노동은 결코 일회성 또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한 주체, 객체의 변화 및 발전을 이룩하려는 인간의 합목적적 의지와 그것의 외화(外化)된 형태로서의 노동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교육되며, 혁신되고 축적되어 인간 역사발전에 복무합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하고 있는 노동을 위와 같은 원론적인 개념만을 가지고 설명해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서술한 노동의 개념을 볼 때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만 지적하고 넘어가면, 노동이라는 것은 시초적으로는 탄생과 함께 자연이라는 거대한 대상과 마주하게 된 인간 개체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신체기관을 통해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출발하지만 하나의 개체로서만이 아닌 인류라는 하나의 종()으로서 존속하기 위해 더욱 발전된 노동을 실현하기 위한 생산도구를 다름아닌 바로 그 노동을 통해 축적, 발전시키게 되는데, 이와 같이 노동이라는 행위는 각각의 사회를 형성하는 인간 역사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혹은 생산력 발전이라는 유구한 과정에서 필연적인 계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은 본질적으로 한 개체로서의 인간인 개인의 시각에서는 자아실현의 매개로서 기능하는 동시에, 인간 역사의 발전을 견인해 내는 원동력으로서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노동은 결국 인간이 창조해 온 역사와 각각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떠나게 되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궁극적인 존재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노동은 항상 인간의 역사, 사회형태와 함께 고려되어야 할 개념입니다.

. 노동법의 성격 및 역사

1) 시민법(또는 일반법)과 노동법 사법과 공법의 교차점

법에 관한 지루한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개인개인으로 보면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는 국가로부터 법에 이한 보호를 받아야 하기에 다시 이야기로부터 출발합니다

개인이 취업을 하면 회사와 근로계약을 체결합니다. 우리 법체계에서는 계약법 따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민법과 상법 등에서 분야별로 계약법리를 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유, 평등, 박애를 근거로 하는 프랑스혁명 이후 근대법 체계에서 중요시한 자유, 중에서도 계약자유의 원칙에 기초합니다. , 만인은 앞에 평등하므로 계약 당사자도 평등하고 그에 따른 계약의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근대 이후 형성된 시민법 일반법리에서는 이처럼 모든 사람이 법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로 돌아오면 상황은 다릅니다

어려운 취업관문을 통과하여 회사에 들어온 노동자가 진정 회사와 동등한 지위에 있는가 생각해 봅시다. 물론, 회사가 노동자와 채용계약을 하지 않을 권리 못지 않게 노동자에게도 회사에서 일하지 않을 권리가 동등하게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회사는 일자리를 찾는 다른 노동자를 채용하면 되지만, 노동자는 실업자가 됩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우리나라는 헌법의 규정과 다르게 실업에 처한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하고 있으므로 현실적으로 시민법 또는 일반법 계약에 관한 노동자의 자유는 실업자가 자유입니다. 

따라서, 근현대 국가의 역사 속에서 노동자들은 노동법으로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노동의 역사 속에서 노동계약, 노동조합, 노사관계, 노동쟁의조정 등을 규정하는 이른바 노동법 계약자유의 사법과 국가에 의한 강제의 공법이 교차하는 성격을 지니게 됩니다.

2) 노동법의 역사 영국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초기 자본주의 발전은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현대에 이르는 후기 자본주의 발전은 미국에서 진행되었다고 있습니다. 대다수 농민들이 도시 노동자로 전환되면서 기업가(자본가)들은 대규모 공장제 생산을 통해 이윤을 얻고 부를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러한 생산력 발전과 생산관계 발전이 상충하는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대다수의 노동을 통해 부를 생산하고 축적하며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사회적 생산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를 종속시키고 착취하는 자본가의 생산수단의 사적 독점과의 모순입니다. 초기 자본주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비인간적 노예노동, 착취의 역사로부터 출발합니다.

자본축적의 역사는 노동착취의 역사의 다른 이름이며, 초기 노동법 제정이 초기 자본주의 발전이 촉발된 영국에서 시작할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영국의 노동법 제정 과정을 보면(서울남부노동법률상담센터의 문재훈 선생님의 [노동법]-삶창문고,2008-참고), 어이없게도 번째 노동법의 이름이 토론회 금지법’(1799), ‘노동자단결금지법’(1800)이었다고 합니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없도록 규제하는 법이었습니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기계파괴(러다이트 운동) 등을 통해 비인간적인 착취에 저항했고, 자본가와 정부는 단결금지법 폐지하고 단결완화법’(1824) 제정하게 되었습니다만, 법에서도 노동자의 단결과 행동으로 이윤이 적게 났다면 민사상 손해배상책임을 지우게 되는 단서를 달았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1802년의 공장법제정을 통해 열악한 공장노동 환경을 개선하고 노동시간을 법으로 제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공장의 주기적 청소, 아동에게 의복지급, 아동노동 12시간 제한, 노동시간 4시간 읽고 쓰기 교육 등을 규정하였고, 지속적인 개정을 통해 노동시간은 무한정에서 12시간, 1847 10시간, 1890년대를 거치면서 8시간으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우리 근로기준법의 전신이 공장법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노동조합법’(1871) 제정을 통해 노동조합이 불법에서 합법으로 전환됨으로써 노동조합 조직이 범죄행위에서 형사상 면책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한편, 1926년까지 모든 파업은 불법이었으나 1929 대공황을 겪으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1948 처음으로 파업이 합법화됨으로써 민사상 면책권까지 획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파업을 불법으로 몰아가는 행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3. 우리 노동법과 노동조합

. 개별적 노동관계 근로기준법 등

노동자는 개별적으로 사회적 약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노동자는 조직되어야 합니다만, 조직된다 하더라도 사회적 강자가 되는 것은 아닌 현실입니다

다시 헌법으로 돌아가면, 개별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노동조건의 최저기준을 법률로 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 헌법 32

3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

이렇게 하여 1953년에 우리나라도 근로기준법 제정하여 근로계약(해고제한 ), 임금,  하루 8시간의 노동시간 휴식(휴가), 여성과 청소년, 안전과 보건, 재해보상, 근로감독관, 기숙사 등의 최저기준을 정하고 이를 어길 벌칙조항까지 삽입하였습니다.

퇴직금 관련 조항은 2006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으로 따로 분리제정하여 퇴직연금 등의 운영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1970 11 13, 전태일 열사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외침과 함께 산화해 갔듯 사회적 강자인 기업가와 정권은 다른 나라의 사례를 토대로 근로기준법을 제정하기는 했지만 현실에서 실현하지는 않았습니다

근로기준법, 최저임금제법 등의 개별적 노동관계를 규율하는 법은 노동자가 싸워 얻은 그대로 노동권의 하한선이며, 사회적 약자인 개별 노동자들을 국가에서 보호하고 보장해야 함을 또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별적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기타 법률로는 헌법 32 1항에 따라 시행되는 최저임금제법, 노동자가 재해를 당했을 보장받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고용보험법 등이 있을 것입니다.  

. 집단적 노사관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등

역시, 다른 나라의 사례를 토대로 국가를 만든 이승만 정권은 1953년에 근로기준법뿐만 아니라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등도 함께 제정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헌법의 노동 3 보장과 헌법에 따라 위임된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따라 사회적 약자인 개별 노동자들은 단결하여 노동조합을 자유로이 조직할 있고, 조직을 매개로 사용자와 단체교섭 단체행동을 있도록 보장되어 왔습니다

신군부독재였던 5공화국 시기에 노동조합법은 노동자의 정치활동을 금지하였고, 노동쟁의조정법은 3 개입을 금지하는 노동자가 조직적으로 사회적 권익향상을 위해 싸우는 것과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법적으로 봉인하고 있는 대표적 노동악법이었습니다

1997년에는 이러한 악법 요소가 삭제되면서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이 통합되어 노동조합 노동관계조정법으로 제정되었습니다. 법은 노동조합, 단체교섭 단체협약, 쟁의행위, 노동쟁의의 조정 중재, 부당노동행위 처벌 등의 규정을 통해 노동조합의 정당한 노동권 쟁취를 보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1996 크리스마스 새벽에 김영삼 정권은 노조전임자의 임금지급금지를 통해 노조활동을 무력화하고, 복수노조를 허용하되 교섭창구를 단일화하여 노동현장의 혼란을 초래하는 등의 악법적 요소를 날치기로 통과시켜, 1997 전체 노동계의 거대한 전국투쟁을 촉발한 있습니다. 악법적 요소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차례의 유예를 거쳤으나, 2010년과 2011년에 걸쳐 시행되었거나 시행예정입니다. 노동자들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사수하기 위해 노동법의 악법적 요소를 철폐하기 위해 현재도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습니다

외에도 노동위원회법, 교원 공무원의 노동조합설립에 관한 법률 등은 집단적 노사관계 관련 법이라고 있습니다. 다만, 교원 공무원의 경우 노동자로 규정되고는 있지만 단체행동권은 제약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 노동조합의 역할

노동조합의 존재이유는 노동자의 사회적 권리향상이며, 존재근거는 자주적 단결입니다.

노동조합은 개별적으로는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집단으로 조직하여 사회적 강자인 회사와 정부를 상대로 노동자도 동등한 인간으로서 권리와 이익을 쟁취하여 모든 사회구성원이 실질적으로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끊임없이 기획합니다.

노동조합의 역사는 위와 같은 사회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민주노조의 전망을 만들고 지켜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사회에서 1987 민주화 이후 노동조합 운동은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체 노동자의 총단결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IMF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자들의 개인주의 및 파편화가 급속도로 전개되고 이를 계기로 하여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려는 정권에 의해 노동조합 운동은 위기에 처한 상황입니다. 우리 사회 주요 이슈인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양극화 문제,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 및 노조전임자 임금지급금지의 노동법 개악을 통해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려는 기도가 그것입니다.

파편화된 노동자들의 권리향상에 기업별 노조는 여전히 한계가 있습니다. 비정규직 문제, 상시적 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업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연대를 토대로 한 노동자 총단결 전망을 다시금 세우는 것이 절실합니다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체인 노동조합은,

대내적으로는 개별 노동자를 집단으로 조직하여 기업내 노동자의 권리 및 이익향상을 목적(경제투쟁)으로 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노동자들의 연대를 통해 사회적 권익향상을 이루어내고 궁극에는 사회적 민주주의를 완성(정치투쟁)하는 주요한 동력입니다


. 결론 – 노동이 바로 인권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당연하게 누려야 할 기본권으로서의 인권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며 평등하기에 법률상의 조문으로만 규정된 형식적 평등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평등한 인권을 확보해야 하는 출발점은 다름아닌 우리들의 노동입니다.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의 노동3권을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노동(勞動)이 바로 인권(人權)입니다! 

***

[참고]

1. [인권의 높이를 보여주는 노동법], 재훈, <삶이 보이는 창>, 2008.

서울남부노동법률상담센터 근무하는 저자 문재훈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인 인권이라는 개념을 시작으로 하여 한 사회 인권의 높이를 말해주는 최저 기준은 바로 생존권으로서의 노동이고 노동법이라고 하며 인권교육의 초보적 단계로서 노동법의 성격, 세계 및 한국의 노동법 역사를 일별하고 개별적 노동관계법으로서의 근로기준법과 집단적 노사관계법으로서의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등을 쉽게 풀어 설명한 책

2. [한국노동운동사1,2], 안재성, <삶이 보이는 창>, 2008.

: 일제강점기 전설적 사회주의자 이재유의 일대기를 그린 [경성트로이카]의 저자 안재성이 역시 초보 단계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사를 이해하기 쉽게 여러 문서와 자료 등을 조사하고 편집, 발췌한 책으로서, 1권에서는  한일합방에서 1945년 해방 이전까지의 역사를 평등한 세계를 기획하는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2권에서는 해방 이후 역시 사회주의자들과 전평(전국노동자평의회)의 투쟁 역사에서부터 1987년 노동자 대파업과 전투적 노동운동의 비약적 발전까지를 압축적이지만 노동계급적 당파성의 시각으로 서술한 책.

                                                                                                             (20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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