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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1 - 상 - 정치경제학 비판 ㅣ 경제학고전선집 7
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노동은 인권이다
-노동/계급/노동자계급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한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필두로 전세계에 걸쳐 연쇄적으로 이룩되었던 민주주의 사회 치고 나라의 가장 큰 법인 헌법에 이 문구를 집어넣지 않은 나라는 없다. 약소국가로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늦게나마 ‘민주주의 국가’를 만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의 의식이 조금씩 더 민주화되고 다양한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주체로서 자리매김해 가는 현대사회에서 사람으로서의 기본적 권리, 즉 ‘인권(人權)’에 대한 관심은 발전되어가는 사람들의 의식의 속도만큼, 어떤 면에서는 그 이상으로 커지고 있다. 물론 다양성이 인정되는 지금 시대에서는 ’인권’에 대한 이해와 해석도 각양각색일 터이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대다수 봉급쟁이들에게 있어 ‘인권’은 어떠한 색깔을 지니고 있는가.
1. 노동(勞動)
… 노동은 모든 가치의 창조자이다. 오직 그것만이 자연의 산물에 경제학적 의미의 가치를 부여한다. 가치 그 자체는 어떤 사물 속에 대상화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인간 노동의 표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은 어떤 가치도 가질 수 없다.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그것을 결정할 수 있다면 이와 똑같이 사람들은 가치의 가치에 관해서 논하거나, 무거운 물체의 무게가 아니라 무거움 그 자체의 무게를 결정할 수 있다…
- F. Engels, <반뒤링론>, 1878, 제6장 단순노동과 복잡노동, 김민석 譯, 새길, 1987.
현대사회라는 거대한 수레를 굴러가게 하는 요소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무수히 많은 것들이 떠오르겠지만 경제학적(經濟學的)으로 사고를 좁혀 생각해 보면, 우리가 경제활동을 하는 무대가 있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사회이기에 ‘돈’이 있어야 할 것이며 다음으로는 우리 모두의 경제활동 행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고전적으로 위의 요소들을 3대 생산요소로서 정리하였는데, 가치생산의 잠재적 공간으로서의 토지(土地), 끊임없이 자기가치증식하는 화폐로서의 자본(資本), 이들에 결합하여 최종적으로 가치창출을 실현하는 노동(勞動)이 그것들이다. 앞서 현대사회라는 말을 했으니 이들 요소들에 좀더 현대적인 해석을 가해보자. 우선 첫 번째 요소인 토지. 경제사상적으로 ‘중농주의(重農主義)’가 한 주류를 형성할 수 없는 현대사회에서 단순하게 ‘토지’ 자체에만 그 의미가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경제적 가치들이 발현될 수 있는 물질, 대상, 공간 모두를 아우를 수 있을 것이며 여기에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축적된 지식, 정보 또한 이 첫 번째 요소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요소인 자본. 이는 지금 경제체제에서 일반적으로 화폐, 즉 ‘돈’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단지 그 화폐형태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언급하였듯이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자기가치증식을 하는 ‘돈’을 말하는 것이다. 예금이나 주식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가지 재산의 형태로 이자 및 이득을 발생시키든지 각종 생산수단에 재투자되어 이윤창출에 혁신적인 변화를 촉진시킴으로써 가치량 증가에 기여를 하든지 간에 다양한 형태로 자기운동을 하면서 가치를 증식시키는 ‘돈’ 모두를 이르는 것이 자본이라는 요소이다. 마지막으로 노동. 전술하였듯 이는 인간이 행하는 일련의 경제활동의 행위라 할 수 있는데, ‘토지’, ‘자본’ 등으로 매개되는 다른 재화에 결합하여 최종적으로 가치를 창출하고 기업에는 이윤을, 사회에는 물질적 발전과 생산력 증대를 이루는 요소인 것이다. 여기에서 노동 혹은 노동력의 가치에 대한 고찰은 이후에 구체적으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위에서 두 가지 요소, 즉 ‘토지’나 ‘자본’ 같은 단어들은 고매하고 권위있는 주류경제학자(主流經濟學者)들을 비롯하여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구에 날마다 회자되는 것들이라 경제학적 권위나 전문성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본 글에서 굳이 그 의미를 되새길 필요는 없다. 다만 ‘자본’으로 일컬어지는 노동대상이나 노동수단과 같은 일체의 생산수단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나타내는 대다수의 사람들, 우리 모두는 거의 대부분이 ‘토지’나 ‘자본’의 소유와는 무관하게 현실적으로 ‘노동(력)’이라는 결정적 생산요소 하나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만을 언급하자. 대다수 사람들의 삶이 ‘노동’을 통해 영위가 되고 있기에 대다수의 우리들은 바로 이 ‘노동’이라는 생산요소에 더욱 주목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는 이 운동(노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천성)을 변화시킨다… 우리가 상정하는 노동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의 노동이다. 거미는 직포공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꿀벌의 집은 많은 인간 건축가들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라도 가장 훌륭한 꿀벌보다 뛰어난 점은, 그는 집을 짓기 전에 미리 자기의 머리 속에서 그것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즉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의식하고 있는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키는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처럼 그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는데, 그는 자신의 의지를 이것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기관들의 긴장 이외에도 주의력으로서 나타나는 합목적적 의지가 노동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필요하다.
- K. Marx, <자본론>, 제3절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김수행 譯, 비봉출판사, 1996.
다분히 원론적이라 약간 지루하지만, 우리 모두의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그 물적 기반이 되는 노동이라는 생산요소를 탁월하게 규정하고 있는 글이라 인용을 했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개념인 ‘노동’에 대해 위 글을 기초로 정리를 해보면,
첫째,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다. 동물의 한 종(種)으로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가장 먼저 접하는 대상은 객체로서의 자연이기에 당연한 전제이다.
둘째, 노동을 통해 인간은 객체로서의 자연을 변화시켜 자신의 합목적적 의지(合目的的 意志)를 실현한다. 원시적으로 인간은 하나의 종(種)으로 살아남기 위해 자연이라는 대상을 극복해야 했는데 자신의 삶에 맞게 관념적이나마 목적을 세우고 그에 따라 물적으로 자연을 변화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노동을 통해 인간은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 또한 변화시킨다. 인간은 대상을 변화시키는 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변화된 대상으로 인해 스스로의 삶의 양식을 변화, 발전시킨다는 의미인데 경제학적으로는 증식된 가치의 형태로, 축적된 자본의 형태로 생산력의 발전을 이룩하여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그에 따라 지속적으로 발전을 기획한다. 변화, 발전에 대한 ‘합목적적 의지’는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행동방식을 규정’한다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넷째, 노동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주체, 객체의 변화 및 발전을 이룩하려는 인간의 ‘합목적적 의지’와 그것의 외화(外化)된 형태로서의 노동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교육되며, 혁신되고 축적되어 인간 역사발전에 복무한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하고 있는 노동을 위와 같은 원론적인 개념으로서만 설명해내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음은 인정하자. 다만 지금까지 서술한 노동의 개념을 볼 때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만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즉, 노동이라는 것은 시초적으로는 탄생과 함께 자연이라는 거대한 대상과 마주하게 된 인간 개체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신체기관을 통해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출발하지만 하나의 개체로서만이 아닌 인류라는 하나의 종(種)으로서 존속하기 위해 더욱 발전된 노동을 실현하기 위한 생산도구를 다름아닌 바로 그 노동을 통해 축적, 발전시키게 되는데, 이와 같이 노동이라는 행위는 각각의 사회를 형성하는 인간 역사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혹은 생산력 발전이라는 유구한 과정에서 필연적인 계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본질적으로 한 개체로서의 인간인 개인의 시각에서는 ‘자아실현’의 매개로서 기능하는 동시에, 인간 역사의 발전을 견인해 내는 원동력으로서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획득할 수밖에 없다. 노동은 결국 인간이 창조해 온 역사와 각각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떠나게 되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궁극적인 존재의미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노동은 항상 인간의 역사, 사회형태와 함께 고려되어야 할 개념인 것이다. 물론 인간의 역사가 발전해온 각각의 단계에 따라 인간의 노동이 실현되는 양상에 각각 차이가 있었으며 실제로 각 시기의 경제체제에 따라 인간 노동 실현의 양태는 각각 다르게 규정이 되어 왔다. 이후 노동이라는 아직까지 다소 친숙하지만은 않은 개념과 관련하여, 그럼에도 현대사회에서 실제로 노동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대다수의 우리의 삶을 조망하기 위해 논의를 전개하면서 좀더 구체적인 언급을 하기로 하고 일단 이 장에서는 노동이란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인간이 가진 필연적인 의무이자 권리일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해석에 만족하면서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2. 계급(階級)
계급들은 사람들의 대규모 집단들이며, 이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의 생산체계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지위에 의해, 생산수단들에 대한 그들의 관계(대부분의 경우 법으로 고정되고 형성된다)에 의해 노동의 사회적 조직에서 그들의 역할에 의해, 그리고 결국,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적 부의 몫의 정도와 그 부를 획득하는 양식에 의해 서로 구별된다.
- V. I. Lenin, <위대한 출발> 中
노동은 언제나 사회, 역사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며 그런 한에서만 그 존재의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형태인 ‘사회(社會)’에 대한 언급이 누락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전적으로 사회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같은 무리끼리 모여 이루는 집단, 서로 협력하여 공동생활을 하는 인류의 집단, 온갖 형태의 인간의 집단적 생활, 어느 특정한 발전단계를 이룬 집단(민중실용국어사전, 민중서림 편)’ 등으로 설명된다. 쉽게 이해하면 주지하다시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모여 이루는 집단을 일컫는다는 포괄적인 의미에서부터 이 속에 존재하는 각종 모임, 회합, ‘패거리’ 등을 지칭하는 것이 바로 사회라는 어휘인 것이다. 사회라는 개념에 대한 정치하고 학적인 설명은 우리 주변에서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많은 사회학자들에게 맡기고 본 글은 ‘패거리’로서 존재하는 인간 사회에 대한 고찰에 주목하고자 한다. 논의의 시작으로서는 약간의 무리가 있을 지 모르나 앞에서 작위적으로 명명한 ‘패거리’라는 말을 사회적 ‘계급’이라는 기호로 대체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자.
이 장 서두에 인용한 글에서 ‘계급이란 사람들의 대규모 집단’이라는 말을 이해함에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계급은 단순하게 사람들의 집단만을 이르는 것이 아닌 ‘대규모 집단’이라는 것이다. 즉, 대규모이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해당 사회에서 그 존재가치가 클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결국 위에서 행한 잘못된 비유와는 달리 계급은 단순한 ‘패거리’와는 다르다. 그런데 우리의 사회와 계급에 대한 이해에 앞서 이 대상들에 대한 우리 인간의 인식은 어떠한지 잠시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의 구절을 되새겨 봄이 적절할 지도 모른다.
사회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를 반영한다… 반영은 반영되는 것의 근사적으로 정확한 복사일 수는 있으나, 여기에서 동일성을 운운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의식 일반은 존재를 반영한다. 이것이 유물론 전체의 일반적 명제다.
- V. I. Lenin,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1908, 박정호 譯, 돌베개, 1992
따분한 이야기일 지는 모르나 철학적으로 인간의 유물론(唯物論)적 인식론(認識論)에 대한 언급이다. 즉,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 그들의 의식(意識)의 토대는 사회 자체를 물(物)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객관적 존재들이라는 의미이다.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초(楚)나라 지방 말단관리였던 이사(李斯)를 강대국 진(秦)나라의 재상으로 만든 계기가 되었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오래된 격언으로 이해하든, 제복을 예찬한 나폴레옹이 ‘군복이 진정한 군인을 만든다’는 의미로 이해하든 포괄적 의미에서는 무방하다. 인간의 모든 인식과정에서 어떠한 의식이든 그 기저에는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종의 물적 토대가 반영되어 있으며, 이 객관적 존재는 의식 형성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로 이해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의식은 물질적 조건이 그대로 반사된 것에 불과하다는 식의 유물론의 기계적인 해석은 온갖 물신적(物神的) 시각과 행태로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음에 물적 존재와 인간 의식 사이의 ‘동일성을 운운하는’ 터무니없는 시각은 진정한 유물론적 관점과 전혀 관계가 없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물질들 사이의 관계로 보이는 것들은 결국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의식에 절대적으로 반영되지만, 존재를 토대로 일단 형성된 의식은 상대적으로 그 토대가 되는 물적 존재에, 그 변화와 발전에 궁극적으로 기여한다는 변증법적(辨證法的) 인식론이 결국 진정한 유물론의 방법론이 된다. 이 같은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에 대한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회, 그 속의 ‘계급’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장 서두의 인용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사회 속에서 각각의 ‘대규모 집단’을 이루는 ‘이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의 생산체계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지위에 의해, 생산수단들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 의해 노동의 사회적 조직에서 그들의 역할에 의해, 그리고 결국,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적 부의 몫의 정도와 그 부를 획득하는 양식에 의해 서로 구별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의 생산체계란 무엇인가. 주지하다시피 지금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정의로서 자본주의는 어느 순간 하늘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노동을 통해 사회를 조직, 존속시켜온 인간은 노동의 도구, 혹은 생산수단을 포함한 사회적 부에 대한 소유를 중심으로 특정한 인간관계를 맺어왔다. 이를 정치경제학에서는 생산관계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민법, 상법 등의 사법(私法)적 형태로 대부분 규정되고 보장되는 이 관계를 통해 인간의 노동은 그 특정 사회에 맞게 조직되어 왔고 노동을 하는 인간은 그 관계 하에서 그들의 역할이 주어졌으며 그에 따라 인간의 ‘대규모 집단’들도 형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회적 ‘계급’인 것이다. 따라서 계급이라는 것은 앞 장에서 서술한 노동과 함께 고려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계급을 형성하는 생산관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노동과 함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생산력의 발전, 즉 양적 증대의 측면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각 사회의 생산체제를 특정지어온 각각의 발전단계는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형태를 중심으로 노동이 조직되어가는 방식인 생산관계를 통해 질적으로 변화되어 왔다는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또 다른 개념이 노동의 ‘분업(分業)’인데, 고전경제학의 시조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위대한 발견이 바로 이 질적인 생산관계의 역사적 특질을 이루는 ‘분업’의 발견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아담 스미스의 역작인 <국부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개념이 바로 ‘분업’이라고도 한다.
번영하는 문명국의 가장 일반적인 수공업자 또는 날품팔이 노동자의 생활용품을 관찰해 보면, 그에게 이러한 생활용품을 제공하기 위해 노동을 조금이라도 투하한 사람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수천 명의 도움과 협력 없이는 문명국의 가장 초라한 사람조차도 우리가 단순하다고 오해하고 있는 단순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것이다.
- A. Smith, <국부론(An Inquiry into Nature and Cause of the Wealth of Nations)>, 제1편 제1장
분업에 대한 위와 같은 간단한 소개와 함께 스미스는 노동의 분업이야말로 생산력을 증진하는 중요한 계기라는 설명을 하는데 그의 제자들인 고전경제학자들에게서 분업은 상품의 교환을 매개로 하는 시장경제의 측면에서만 이 의미가 국한되고 있다. 그러나 생산력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는 생산관계로서의 분업은 보다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얻어야 한다. 앞서 후에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로 했던 역사발전단계에서의 인간 노동 실현의 양태에 대한 고찰은 생산관계로서의 노동의 분업에 대한 이해와 불가결하다.
원시 공동체사회로부터 인간 노동의 경험이 축적되고 농업발전이나 전쟁 등을 통해 남는 재화들이 생겨나면서 이것에 대한 소유를 둘러싸고 인간 공동체에서는 대립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물론 원시 공동체사회에서는 남는 재화에 대한 소유가 기본적으로는 공동체에 귀속되었지만 생산력 발전을 위한 재축적과 관리의 필요성에 따라 다수의 노동하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소수의 계층이 생기기 시작되었는데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가 바로 최초의 사회적 분업의 형태이다. 육체노동자의 물질적 노동에 의해 부양되던 이들 지배자들, 즉 당시의 철학자였던 ‘정치적’ 정신노동자들은 생산력 발전을 위한 생산수단의 사적인 소유를 영속화시키기 위해 국가(國家)라는 단위를 형성하면서 인간 역사에서 고대사회를 열게 된다. 앞서 고대 사회는 노예노동에 기초한다고 했다. 즉 단위내 모든 사람들이 평등했던 원시 공동체적 사회관계는 소멸하고 노동력을 지닌 인간 자체인 노예를 포함한 일체의 생산수단을 독점한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대다수를 지배했던 사회가 바로 동서양을 막론한 고대사회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체제가 언제까지 영속될 수는 없는 법, 생산력의 증진이라는 물질적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의식들도 조금씩 고양되기 시작했고 이는 종교로 대표되는 사상(思想)의 형태로 고대사회를 압박하기 시작하였으며 분열된 지배층은 봉토(封土)의 형태로 당시에는 중요한 요소였던 토지를 분할하며 봉건지주(封建地主)들이 됨으로써 인간 역사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주지하다시피 철저하게 신분제에 기초한 사회였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은 고대사회에서 중세 봉건사회로의 질적인 발전을 이루는 데 이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어느덧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데 있어 주요한 지배이념으로 자리매김한 종교의 역할이었다. 어쨌든 중세봉건사회에서의 대다수 사람들은 고대 노예들과는 다르게 약간의 사적소유가 허용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토지와 지주들에게 인신적으로 구속이 된 채 자신의 노동생산물 대부분을 수탈당해야만 했다. 언제나 대다수가 노동을 통해 생산한 ‘잉여가치’는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축적되었으나 대다수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이러한 체제를 감당하기에는 어느덧 과학과 생산력의 발전이 너무나 앞서가게 되었다. 국제적 교류를 통한 상업의 발전, 전문적 수공업자들에 의한 산업의 발전이라는 양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농업노동에 기반한 중세의 봉건적 신분관계와 소유관계에서 상인이나 수공업자들과 같은 계층들은 항상 소외되어 왔던 것이다. 역사발전과정에서 생산력 발전이라는 양적인 형태에 질적인 변화를 촉진하였던 생산관계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더 이상의 발전을 막는 질곡(桎梏)이 된다. 여기에서 또 다시 나타나는 분업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분리였다. 또한 근대 자본주의사회가 시작되면서 대규모 공업이 등장하였고 인간의 노동은 본격적으로 생산력 발전을 위한 철저한 ‘부문내 분업’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으며 몇 백년도 안되어 인간 역사에서 생산력 발전의 신기원을 이루게 된다. 고전경제학자들이 예찬하는 ‘분업’은 근대사회 이후에 나타난 바로 이 자본주의적 ‘부문내 분업’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시각을 좀더 넓혀보면 ‘분업’은 인간의 역사발전단계에서 생산력 발전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생산관계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연적인 계기이다.
이제 다시 계급이라는 본 주제로 돌아오자. 산업도시의 발전과 봉건지배의 약화는 대다수 중세농노들을 농촌으로부터 쫓아내었고 이들의 노동은 이제 달라진 근대적 생산체제에 맞게 다른 형태로 조직된다. 한편 중세체제의 말기에 이르러 과학 및 산업의 발전과 함께 이들 상인 및 수공업자들은 최초에는 ‘중세 중산층’으로서 ‘부르주아지(Bourgeoigie)’라는 대규모 집단으로 형성이 되었고 공장 및 일체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를 통해 사회적 생산체제의 질적인 발전에 기여하면서 이른바 자본주의적 생산체제를 구축하였으며 그 이후 지금까지 ‘자본가’라는 대규모 집단으로 사회를 지배해 왔다. 자본가는 산업발전의 근간이 되는 자본을 비롯하여 모든 생산수단을 독점한 집단을 지칭하며 자본주의 생산체제에서 끊임없이 자기가치증식을 하는 자본의 운동이 계급적 형태로 인간화되어 표현된 것이다. 지속적인 자본축적과 생산력 발전을 이루기 위해 자본가라는 계급은 역시 일체의 사회적 생산수단을 소유한 상태에서 노동자들을 고용하였는데, 소위 부르주아지라고 하는 자본가 계급과 대비되어 모든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는 전혀 없이 노동력이라는 상품 하나만을 지닌 채 임금을 대가로 각 산업에 고용된 자들을 ‘임금노동자’ 혹은 근대적 의미로서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라고 한다. 물론 자본주의 초기단계에서 이들의 대부분은 중세적 토지로부터 추방된 농노들이었다. 노동을 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 대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생산수단의 소유를 둘러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인해 철저하게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데, 그 원인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개념이 바로 분업, 생산수단을 비롯한 일체의 사회적 부에 대한 소유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 살고 있는 지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근대사회를 시작하게끔 했던 특정 생산관계에는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사회에 있어 가장 주요한 대규모 집단이자 전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계급은 사회 계층적 존재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대규모 집단, 즉 ‘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계급이며 결국 이 계급들의 역관계에 따라 해당 사회의 구체적인 성격이 규정된다.
3. 노동자계급-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임금노동자
‘임금이란 사용자가 근로의 대가로 근로자에게 임금, 봉급, 그 외 어떠한 명칭으로든지 지급하는 모든 금품’. 따라서 기본급, 시간외 수당, 연차수당, 상여금 등 명칭에 관계없이 ‘근로에 대한 대가성’, ‘노동력이라는 생산요소에 대한 상품값’만 인정되면 모두 임금에 포함된다. 임금의 전제가 되는 ‘근로의 대가’라 함은 사용종속관계 아래에서 제공되는 근로에 대한 보상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근로기준법 제 14조에 규정된 근로자가 같은 법 제 15조에 규정된 사용자의 지시, 명령 아래에서 제공한 근로에 대한 반대급부라고 규정할 수 있다.
-윤욱현, <새노동법 해설>, 한국경제신문사, 1999.
지금까지, 태어나자마자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게 된 인간은 물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노동이라는 생산적 행위를 해야만 했고 하나의 종으로서 존속하기 위한 조건인 생산력 발전을 위해 노동대상 및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를 중심으로 일련의 생산관계를 형성하면서 그 속에서 노동을 사회적으로 조직, 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대규모 집단’인 계급을 이루어 왔다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근대를 거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전유(專有)를 통해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자본가 계급과 시장에서 가치로 교환되는 상품화된 노동으로서의 노동력만을 가진 채 그에 고용되어 살아가는 노동자 계급이 주된 ‘대규모 집단’들이라는 뭔가 석연치 않은 규정까지 내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은 어떤 구체적 형태로 현상하고 있는가. 각 산업에 고용되어 노동을 통해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 구체적 형태인데,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파는 대신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노동을 하는 우리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될 ‘근로의 대가’, 즉 ‘임금’에 대한 언급부터 시작하자. 이 지점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12년간의 제도교육을 통해 바르게 성장한 우리들 귀에 자본가 계급이네 노동자 계급이네 하면서 어쩐지 께름직하게만 들리기만 하는 규정에 대한 해명이 필요한 출발점이다.
임금(賃金,wage)에 대한 정의는 이 장 서두에 인용했듯이 애써 표현하지 않아도 ‘봉급쟁이’인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이에 더하여 우리나라의 근로기준법 제 14조 ‘근로자의 정의’ 및 제 18조 ‘임금의 정의’를 보면, ‘사용자가 근로의 대상으로 근로자에게 임금, 봉급 기타 어떠한 명칭으로든지 지급하는 일체의 금품’을 ‘임금’이라 정의하고 이를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근로자’라고 한다. 이 법에서 말하고 있는 ‘근로’라는 개념은 본 글 첫 장에서 고찰한 인간의 역사적, 사회적 ‘노동’이라는 개념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지면의 한계로 인해 편의상 동일한 의미로 보자. 따라서 ‘노동’이라는 어휘와 좀더 친숙해지기 위해 법에서 규정한 일체의 ‘근로’를 그 맥락상 본 글에서는 ‘노동’으로 대체하도록 한다. 어쨌든,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노동’(근로)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이 법 제 16조 ‘근로의 정의’를 보면 노동은 정신노동, 육체노동 모두를 포함하는데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노동자는 이 사회에서 ‘직업을 불문’하고 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노가다’, 또는 육체노동에만 노동의 의미가 국한될 수는 없다는 것인데, 우리가 주목하는 노동이라는 개념은 단지 노동과정에서의 ‘기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노동을 통해 살아가는 하나의 ‘대규모 집단, 즉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노동자는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생산직 봉급쟁이든 사무직 봉급쟁이든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같은 사회적 지위에 있다는 인식이 우선된다. 고전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상품의 가격을 중심으로 볼 때 우리가 신고 다니는 신발의 가격과 옷의 가격이 같다면 상품시장에서 같은 값의 화폐를 통해 구매를 할 수 있기에 일반적으로 가치(교환가치)가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이는 결국 신발과 옷의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각각 지출된 추상적 형태로서의 노동량이 같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고전적이고 도식적인 이해로서 복잡한 현대사회의 다양한 노동을 설명할 수는 없다. 현대경제학에서 상품은 단순하게 재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형의 서비스도 포함하므로 각각 상품들의 가치측정에 관한 다양한 양태들은 좀더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기본적으로 상품생산을 위해 결정적 요소로서 결합되는 노동은 ‘직업을 불문하고’ 동일한 사회적 가치를 지니며, 그로 인해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력을 지불하는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동일한 사회적 지위를 차지한다는 의미로서 이해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앞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노동자들은 일체의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기관 및 그에 기반한 지식 등만을 지닌 채 임금이라는 대가를 목적으로 노동력을 지불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지닌 노동력이라는 요소 또한 시장에서 자유롭게 판매, 구매, 교환되는 다른 상품과 다를 게 없다. 즉, 노동력도 하나의 상품인 것이다. 여기에서 잠깐 상품 일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상품은 생산된 하나의 재화로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목적물로서 지니는 가치와 상품이기에 시장에서 교환되고 거래되는 과정에서 획득하는 또 다른 형태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정치경제학에서는 전자(前者)를 상품의 본질로서의 ‘사용가치(使用價値)’, 후자(後者)를 상품의 현상형태로서의 ‘교환가치(交換價値)’라고 구분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하고 가장 대량적인 것’이 지니는 이중성(二重性)을 폭로한다. 그러나 대상(對象)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배제하면서 기능적인 ‘과학’으로서 존재한다고 자부하는 경제학에서는 ‘사용가치’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교환가치’만을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가치’로 한정시키고 있다. 이 ‘가치’가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상품의 ‘가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술했듯이 우리 노동자들이 지불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에도 하나의 경제학적 ‘가치’, 가격이 존재하는 바, 이것이 바로 임금이며 ‘노동력의 가치’인 것이다. 따라서 상품 일반에 이중성이 존재하듯, 노동력이라는 상품에도 위와 같은 이중성이 있다. 즉, 인간의 협동적 행태, 분업을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조직된 총노동, 그리고 인간 본연의 창의성을 기반으로, 그 자체로는 잠재가치에 불과한 물적 대상들에 변화를 가하여 현실적인 가치-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사용가치’로서의 본질적 측면, 다른 한편으로 생산된 상품이 시장에서 교환되기 위해 측정되는 가치척도로서의 현상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로써 노동의 사용가치로서의 전자는 ‘노동의 가치’라 하고 후자를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교환가치를 형성하는 ‘노동력의 가치’라 하여 양자간에 본격적으로 구분선을 그을 수 있다.
상품의 가치가 측정되는 척도로서 그 상품에 결합된 노동력은 시간으로 측정되어 왔는데, ‘노동의 가치’로서의 본질은 질(質)적인 측면을 지칭하는 데 반하여 ‘노동력의 가치’로서의 현상형태는 시간으로 측정되는 양(量)적인 측면을 지칭한다. ‘사용자는 근로계약 체결시에 근로자에 대하여 임금, 근로시간, 기타의 근로조건을 명시하여야 한다’며 ‘근로조건의 명시’에 대하여 규정한 근로기준법 제 24조 조항에서 보듯이 노동자가 결국 임금과 맞바꾸는 것은 자신의 노동 자체가 아니라 양적으로 표현된 노동, 즉 일정한 노동량이며 이는 본질적인 ‘노동의 가치’가 아닌 ‘노동력의 가치’인 것이다. 봉급쟁이들이 가진 것이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다고 해서 ‘몸을 팔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단지 ‘노동력’이라는 상품만을 팔며 살아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상으로도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그렇다면 더더욱 ‘자유경쟁’의 시장경제에서는 임금과 노동력을 맞바꾸어 교환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또한 실제로는 어떠하든 일단 법적으로는 평등하다. 노동력을 팔았다고 해서 노동자의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인격, 본성, 권리 자체를 팔았다는 의미가 아닌 것인데, 이것이 고대사회의 노예, 중세사회의 신분제적 농노와 다른 점이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노동자계급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현대사회의 임금노동자들이 근대적 의미의 ‘프롤레타리아트’, 이미 화석화되어 버린 낡은 계급주의적 관념으로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갈수록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지금은, 지난 역사에서 항상 소외되어 왔고 객체로만 머물러 왔던 대다수 사람들에게 ‘계급’의 형태로든 ‘대중’의 형태로든 사회의 구성과 발전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과 지위가 주어져야 할 시점이며, 현재 이 대다수 사람들의 존재적 근거가 되는 것이 다름아닌 노동이라는 것이다.
임금과 자신의 능력으로서의 노동력을 교환하는 우리 사회 모든 봉급쟁이들, 즉 임금노동자들에 대하여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 글 첫 장에서부터 지루하게 고찰해 온 본질적 노동, ‘노동의 가치’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여 양적으로 표현된 ‘노동력’과 그것의 ‘가치’에 대해 주목해야 하고, 임금노동자 즉 봉급쟁이인 우리들이 상품으로서 판매한 노동력에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고 있는지, 사회 대다수인 봉급쟁이들에게 사회적 노동을 통해 축적된 사회적 부(富)가 정당하게 분배되고 있는지 고려해야 함은 물론, 우리 사회에서 임금노동자 즉 노동자계급이라는 ‘대규모 집단’의 사회적 지위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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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태어나서 당연하게 누려야 할 기본권으로서의 ‘인권’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며 평등하기에 법률상의 조문으로만 규정된 형식적 평등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평등한 ‘인권’을 확보해야 하는 출발점은 다름아닌 우리들의 ‘노동’일 것이다.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의 노동3권을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노동(勞動)이 곧 인권(人權)인 것이다.
(2003년 6월)
본 글에서 ‘계급’을 다루었다고 해서 노동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굳이 ‘계급적’으로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하며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은 지칭하는 말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궁극적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발전시키는 한 주체로서의 정당한 사회적 지위만 인정될 수 있다면 노동하는 대다수 사람들을 어떠한 단어로 표현하든 무방할 것이다. 그에 대한 일례로 이탈리아 출신 정치학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의 규정으로서 ‘대중 노동자(mass worker)’와 같은 개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1968년까지 시기의 노동자에 대한 규정이다. 자본주의와 독점의 발전에 따라 세계는 초국적 자본의 지배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나 ‘대중 노동자’는 여전히 현대자본주의 초기의 포드주의적 대량 생산체계 속에 종속되어 탈숙련화되어 있으며 케인즈주의적인 개입주의 국가에 의해 지배되는 상태에 있다고 한다. 초국적 자본으로 대변되는 현재의 ‘제국’의 시대에서 그 변화와 대항의 주체로서 안토니오 네그리는 ‘대중(Multitude)’을 설정하고 있는데 이는 현대사회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조화되고 획일화되는 수동적인 ‘대중(Mass)’과는 달리 다양한 공통성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주체적인 욕망과 주장들을 결집해 나가는 무리를 지칭한다는 것이다.(A.Negri, M.Hardt, <제국(Empire)>, 2000, 윤수종 譯, 이학사, 2001. 참조) 이 다양한 ‘공통성’중 하나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노동’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러므로 현대사회의 한 축을 형성하는 거대한 무리로서 ‘대중 노동자’를 설정함에 무리가 따르지만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