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서울
최종현.김창희 지음 / 동하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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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묵은 길을 품은 오래된 서울야망의 터전’ ‘서촌

- [오래된 서울], 최종현/김창희 共著, <동하>, 2013.

 

 

조선 초에 서울 도성을 쌓을 때 북서쪽 소문인 창의문을 왜 그 자리에 냈겠는가? 그 고개에 본래 길이 있었던 것이다그것은 바로 고려시대 남경에서 개성으로 가는 길의 출발점이자 개성에서 남경에 이르는 마지막 고갯길이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서울 도읍의 자리를 살피기 위해 무학과 함께 건너왔던 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길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이어주는 길이다

 

- [오래된 서울], ‘1부 서울의 탄생고려시대의 길을 찾아서2’

 

 

서울의 역사는 조선이 건국되고 2년이 지난 1394년에 수도로 정해진 이후로부터 ‘600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서울시도 1994년에 정도 600주년 기념식을 치렀다니 관()에서도 인정하는 공식 역사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도시공학과 교수를 지낸 최종현과 언론인 김창희가 공저(共著) [오래된 서울]은 우리 역사를 좀더 거슬러 올라간 서울의 원점에서 추리를 시작한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 형제는 주몽의 또 다른 아들 유리가 왕위에 오르자 남쪽으로 내려왔다. 비류는 미추홀에 자리 잡고, 온조는 위례에 자리 잡았다. 온조는 나라를 세운 후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 지역으로 땅은 습하고 물은 짠 곳이었고, 위례는 지금의 서울 지역으로 매우 기름진 곳이었다. 그 뒤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온조를 따랐다.

 

- [오래된 서울], ‘1부 서울의 탄생서울의 원점을 찾아서, [삼국사기] 재인용

 

서기전 18년 백제를 건국한 온조가 서울 위례 지역에 터를 잡고 건국한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나 위례성 지역은 지금의 경기도 하남 지역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서울로 행정구역이 바뀐 지 몇 십년 밖에 안된 지역에다가 조선의 수도 한양은 사대문안의 구역을 의미하니 양자의 서울은 현재의 서울로 통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전혀 다른 지역이다. 그렇다면 서울의 역사를 백제 건국 시기인 2000여년 전부터 시작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니 ‘600년 통설을 그대로 따라야 할 것인가.

 

[오래된 서울]은 고대 삼국과 근세 조선의 중간에 위치한 고려시대에서 그 해답을 추적해 나간다. , 지금의 사대문지역은 고려시대 한양부 남경(南京)’으로서 지금의 경기도 양주(楊州) 이남으로 천도를 준비하기도 했던 고려 숙종대인 1100년대 전후에 경복궁 후원 한 귀퉁이에 임금의 또 하나의 별궁인 남경행궁을 지었다는 것까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통해 추적해 나간다. 이후 무신정권과 몽골지배기를 거쳐 고려 말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100여년 시기에도 인도 승려 지공화상과 그의 고려 제자 나옹화상이 나누었다는 선문답에서 삼산양수(三山兩水)’, 즉 삼각산과 한강-임진강 사이의 명당이라 하여 개창된 경기도 양주 회암사를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의 명찰로 보면서 역시 지공화상의 제자 중 하나였으며 한양 천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조계종파의 무학대사가 공민왕대 화엄종의 신돈이 실권한 후 회암사에 머물렀다는 사실까지 추적해 낸다. 따라서 서울은 조선의 한양이전인 고려 중기 한양부 남경시절부터 하나의 수도로서 역사를 추리할 수 있으니 이쯤 되면 서울의 역사는 600년이라기보다는 1000년 정도로 볼 수 있게 된다.

 

[오래된 서울]은 추리에서 끝나지 않고 고려 중기 이후 천년묵은 길을 소개한다. 모든 길은 자연이 만든 길, 즉 물길을 기준으로 생기기 마련인데 조선 태종이 종로와 교차하여 창덕궁 앞으로 통하는 돈화문로와 양쪽의 피맛길을 만들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길을 보여준다. 현재 지하철 종로3가역 6번 출구에서 나와 갈매기집좌측으로 비스듬히 올라 삼일로 삼환기업 건물 길까지 이어지는 골목이 바로 [오래된 서울]이 이야기하는 천년묵은 길이라고 하는데 책을 읽은 후 찾아간 골목길은 두리번 거리며 걷는 내내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계속 들게 한다.

또 하나의 길은 고려시대 수도 개경(개성)에서 남경행궁으로 내려오는 유일한 길인 창의문(彰義門)’에 이르는 길이다. 현재 경복궁 서쪽으로 종로구 옥인동과 청운동 부근을 지나 올라가면 조선시대 사소문중 북문이었던 창의문이 나오는데 이 북소문은 조선이 만든 문이지만 여기로 통하는 길은 위에서 인용했듯이 천년묵은 길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북대문이었던 숙정문(肅靖門)’으로 통하는 길은 없었다고 하니 창의문이 북쪽과 남쪽을 잇는 실질적인 북문이었던 것이다. ‘창의문은 임진왜란 때 일부 소실되어 1740년대에 중창되었으나 사소문중 유일하게 그 자리에서 300년 가까이 제 모습을 보존한 문이라고 한다.

 

서울에서 천년묵은 길을 추적한 [오래된 서울]의 본래 주제는 서촌(西村)’이다. ‘서촌은 조선 초기 왕실군락지로서 경복궁 서쪽으로 해서 자하문로 따라 위로 올라가면 나오는 지역으로서 책은 세종이 태어난 준수방 잠저(임금이 되기 전 살던 집)’로 추정되는 지금의 우리은행 효자동 지점과 그 뒷편길로 해서 서북쪽으로 예전 청계천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세종의 3남 안평대군이 살았다는 수성동 계곡 일대를 소개하고 있다. 이 곳 수성동 계곡은 안평대군이 어느날 문득 꿈에서 본 풍경을 화가 안견을 불러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한 지역이라고도 하는데 아마도 서촌 수성동 계곡 어딘가에서 삼각산 쪽으로 바라본 풍경 아닐까 추정된다고 한다. 이후 단종복위사건으로 안평대군이 형인 세조에 의해 사사된 후 수성동 계곡에는 세종의 둘째 형이자 안평대군의 삼촌인 효령대군이 옮겨와 천수를 누리며 살았다고도 한다.

서촌은 임금이 되지 못한 왕자들 외에도 겸재 정선과 같은 화가가 살면서 서촌의 배경인 인왕제색도를 포함하여 그 특유의 화법을 발전시킨 곳이기도 하고, 병자호란 때 주전파(主戰派)’로 이름날린 김상용, 김상헌 형제의 장동 김씨류의 권신들의 터전이었으며 조선 중기로 넘어오면서 신분사회에 대한 절망을 시()로 승화시킨 중인들이 송석원등의 절경을 배경으로 동인회를 만들어 활동하던 지역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을 뒤에서 바라보며 실현될 수 없는 야망을 태우던 일종의 야망의 터전아니었을까 싶다.

 

이후 서촌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과 그에 못지 않았던 윤덕영 등이 현재 옥인동 일대를 강탈하여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조선의 마지막 왕후의 큰아버지이자 이완용과 친일을 경쟁하던 ‘1급 친일파윤덕영 같은 자는 현재 옥인동 47번지 일대와 송석원등의 지역에 벽수산장이라는 서양식 호화별장을 짓기도 했다는데 이쯤 오면 권력을 향한 폭력적 야망의 터전이기도 하였다. [오래된 서울]은 서촌 옥인동 일대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둔 이완용에 대하여 당시만 해도 민족정론이었던 <동아일보> 1926년 사설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나중 다음의 명문을 소개하기도 한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아마도 이완용과 친일부역자들의 삶을 가장 명료하게 정의한 테제가 아닐까 싶다.

 

조선 후기 서촌은 작가 이상과 화가 구본웅, 시인 윤동주와 국문학자 정병욱, 민족사회주의 화가 이여성과 이쾌대 형제 등이 시대를 고민하면서 동행했던 터전이 되었고, 김수임, 노천명, 앨리스 현 등의 역사의 파고에 쓸려간 여성들이 살던 지역으로도 소개된다. [오래된 서울]은 이들 모두를 포함하여 화가 이중섭이 작품을 생산하던 집까지 추적하여 소개하고 있다.

 

날씨 좋은 휴일에 [오래된 서울]의 추적을 따라 천년묵은 길서촌일대를 둘러보는 산책길은 이미 관광상품화된 서울성곽길과는 또 다른 상념을 선사할 지도 모른다. ‘동행이 없다 한들 어떤가. 우리에게는 천년묵은 길을 품은 오래된 서울의 역사라는 동행이 있으니.

 

 (2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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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노동 운동사 3 세계 노동 운동사 3
김금수 지음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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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집단적 대화

- [세계노동운동사 1,2,3], 금수, <후마니타스>, 2013.

 

 

역사는 오늘날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삶을 이끌어 낸 사건들의 연속이다. 역사는 우리가 어떻게 오늘날의 우리 자신을 만들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열쇠다.

 

- Chris Harman, [민중의 세계사], 재인용.

 

 

역사는 개별 사건들의 집합 만이 아니라 일정한 경향이다. 근대적인 시각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인류의 역사는 진보와 발전이라는 경향을 나타낸다. 역사라는 절대정신의 의지에 경향이 내포되어 있다는 관념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집단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인간들이 다수의 힘으로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삶을 지향하며 만들어온 시간의 흐름이 바로 역사라는 유물론적 의미이다. 그래서 연대기별 사건을 나열한 역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간 부류의 어떤 힘이 그 사건과 모순을 초래했고 또 어떤 부류의 힘이 그 모순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조건과 질서를 만들어내었는지를 봐야 한다. 항상 다수가 만든 질서를 소수가 유지했고 그 모순은 다시금 다수가 새로운 질서로 바꿔온 것이 바로 역사인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원로 김금수 선생이 노동운동의 위기 국면에서 노동운동, 사회운동가들과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를 함께 공부하고 토론한 후 서구 및 소련과학아카데미의 자료들을 참고하여 [세계노동운동사] 1,2,3편을 엮었다. 자본주의 시초축적, 즉 맑스에 의하면 노동자로부터 생산수단을 분리시킨 원시축적 시기 16~17세기부터 시작하여 18~19세기 유럽 혁명, 20세기 소비에트러시아 혁명을 거쳐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복합체로서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득세하기 시작한 2차 세계대전까지 노동운동의 역사를 일괄했다. 유럽 뿐만 아니라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식민지, 종속국가들 역사까지 두루 서술하고 있어 말 그대로 세계노동운동사로서의 내용을 포괄한다.

역시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과거를 참고하는 길이 필수이다.

 

현재 한국 진보운동, 노동운동의 위기 또한 현재의 안경으로 과거를 투영하지 않으면 안될 듯 하다. 책의 내용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20세기 초 파시즘의 대두와 1935년 제7회 코민테른 대회에서 결의된 인민전선’.

자본주의의 필연적 발전형태로서의 제국주의와 그 병폐적 현상으로서의 파시즘이 전염병처럼 퍼지던 시기, 각국에서 노동자계급과 공산당의 주도로 인민전선’, ‘민족전선’, ‘통일전선등의 명칭으로 이루어진 반파시즘 연대는 최근 우리 현대사에서 군부파시즘에 대항한 비판적 지지와 민간파시즘에 대항한 반이명박근혜 전선을 닮아 있었다.

 

인민전선은 수세적인 재조직화였다. 파시즘의 확산을 막는 장애물을 세우고, 파시즘이 승리한 곳에서는 저항을 고무하기 위한.

인민전선은 좌파의 공통 지반을 찾음으로써 공산당의 고립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폭넓은 협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원칙보다는 민주주의 원칙이 필요했다. 노동자계급 정당이 혼자 힘으로 승리할 만큼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좌파가 민주적인 신뢰를 확립하기만 하면 연합이 기존의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주의 이행의 토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인민전선 전략은 일시적인 수세적 전술 이상의, 궁극적으로 패배를 공세로 전환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것은 또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세심하게 고려된 전략이었다.’

 

- Eric Hobsbawm, [Fifty Years of Peoples Front], 재인용.

 

1870년의 전쟁 음모는 1851 (보나파르트)쿠데타의 개정판일 뿐이다.… 루이 보나파르트와 프로이센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제2제정의 조종(弔鐘)은 이미 파리에 울려 퍼졌다. 2제정은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패러디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루이 보나파르트가 18년 동안 복고된 제정이라는 흉악한 소극(笑劇)을 연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유럽의 정부들과 지배계급들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 Karl Marx, [프랑스내전], 재인용.

 

지난 대선에서 전개되었던 굳게 단결한 보수에 대한 민주·개혁·진보주의자들의 대동단결이라는 허상은 이제는 잊어도 좋을 듯 하다. 그런 연대는 지난 역사 속에서 숱하게 많았을 것이고 앞으로 많을 테니. 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파시즘은 양대 계급의 무능력을 기반으로 하여 계급균형이라는 환상에서 출발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러한 기형적 형태를 낳는 것은 정부와 지배계급들이라는 것, ‘인민전선은 극우보수의 폭력적 독재에 대항하여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 진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전략전술이었다는 것. 앞으로 펼쳐질 갖가지 연대의 형태 속에서도 진보는 일시적인 수세적 전술 이상의, 궁극적으로 패배를 공세로 전환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연대를 주도해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대다수에 기반한 힘을 토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 현대사회에서는 확고한 민주주의원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길이 사회민주주의인지, 민주적 사회주의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에 관한 고민 또한 더 필요하다.

 

저자도 서문에서 언급했듯, 에드워드 핼릿 카가 말한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표현은 너무도 적절하지만 하나 더 추가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것은 대다수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반영한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집단적 대화’”라고.

 

 (2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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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3부작 - 개정판, 소나무총서 1
칼 마르크스 지음 / 소나무 / 199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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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번은 희극으로

- K. Marx,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을 통해 본 21세기 대한민국 여왕 파시즘

 

 

 

헤겔은 어느 부분에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번은 희극으로 나타난다고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당통 대신에 코시디에르가, 로베스피에르 대신에 루이 블랑이, 1793~1795년의 산악당 대신에 1848~1851년의 산악당이, 삼촌 대신에 조카가 나타난다. 그리고 브뤼메르 18일의 재판(再版)’이 나온 정세에서도 동일한 현상을 볼 수 있다.

 

- K. Marx,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 1장 중.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사유방식에 역사의 순환은 없다. 이 사유방식은 역사의 운동을 전제로 하여 그 발전과 진보를 하나의 확고한 경향으로 삼는데, 어느 시기에서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의 퇴보적인 반복을 목격하기도 한다. 맑스는 이를 희극에 비유하는데 이는 진지한 역사적 선행 사건을 상대적 비극으로 보이게도 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제정(帝政)이 민중의 힘에 의해 무너지고 공화정(共和政)이 세워졌지만 왕정복고주의와 타협하고자 했던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공화정은 다시 무너진다. ‘공포정치초반 숙청된 자코뱅파 우파 당통의 비극 1848 2월 공화정 우파 민주인사 코시디에르의 희극으로 반복된다.

이 틈을 탄 공화국의 젊은 장교 루이 나폴레옹 1세가 1799년 황제로 등극하면서 1제정이 등장했다. 나폴레옹의 퇴위 후에도 시대착오적인 전제정이 지속되다가 1830년의 민중 반란에 의해 시민왕 루이 필립을 앞세운 ‘7월 왕정이 들어섰지만 대금융 부르주아의 횡포에 착취당하던 프랑스 민중들은 1848‘2월 혁명을 통해 왕을 몰아내고 다시금 공화정을 선포한다. 그러나 역시 테르미도르 반동 쿠데타 당시 대다수 민중을 위한 공포정치의 주역이었던 자코뱅파 로베스피에르의 비극 1848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소시민적 사회주의자 루이 블랑의 희극으로 반복된다.

대다수 프롤레타리아의 지지로 세워진 임시정부가 정치적 타협과 정쟁으로 대다수 민중의 요구를 배신했을 때 같은 해 6월 대규모 반란이 다시 일어나지만 대동단결한 왕정복고주의자, 부르주아지, 소시민 민주파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철저히 패배당하게 되는데, 대혁명기의 좌파 산악당비극 2월 혁명기 산악당희극으로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역시 희극적으로등장한 것이 바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3세였다. 자기계급 이익을 위해 공화정 가면을 쓰고 왕정복고의 흑심을 숨긴 부르주아지도, 혁명가인 척 하는 프티 부르주아를 대표로 내세운 결과 전혀 혁명적인 힘을 갖지 못하게 된 프롤레타리아트도 해당 시기의 지배계급이 될 수 없는 무능력한 상황에서 부랑자, 거지, 퇴역군인 등의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를 앞세우고 군대를 장악한 조카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후 의회와 민중들을 계속 기만하고 배신하는 과정에서 그는 결국 1852년 황제의 관을 억지로 머리에 얹은 채 프랑스 2제정을 열게 된다. 삼촌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비극이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희극으로 반복된다.

이 시기 자본주의 발전의 법칙에 의해 자본이 팽창하면서 주변국들과의 지속적인 전쟁을 하게 되었고 더 이상 이를 참다 못한 프랑스 민중은 다시금 들고 일어나 1871년의 파리 코뮌을 건설함으로써 보나파르트 2제정은 무너진다.

자본주의 역사발전의 법칙 속에서 정치체제는 비극에서 희극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환경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현세대는 자기자신과 만물을 개조하고 이제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무엇인가를 창출해내는 데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도, 바로 그와 같은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도, 그들은 자기의 일을 도와달라고 노심초사 과거의 망령들을 주술로 불러내며, 이 망령들로부터 이름과 전투구호와 의상을 빌려 이 유서 깊은 분장과 차용한 언어로 세계사의 새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 K. Marx,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 1장 중.

 

 

브뤼메르 18은 나폴레옹 1세가 황제로 등극한 1799년 11월 9 나타내는 공화력이라고 하는데 희극적으로 반복되는 역사적 사건을 목격한 맑스는 브뤼메르 18일의 재판(再版)’ 과정을 정리함으로써 자본주의 역사에서 국가 정치체제의 구체적 실현체를 기록하게 된다. 이 저서가 바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이다.

 

맑스는 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을 통해 케사리즘(Caesarism)’이라는 교과서적인 단어를 없애버리는 데에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1869년의 제2판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케사리즘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 1933년의 기록에 따르면, ‘갈등하는 세력들이 파국적인 방식으로 상호 균형지우고 있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논쟁적·이데올로기적 표현이지 역사해석의 기준은 아니다라고 하는 바, ‘케사리즘에서 모든 새로운 역사현상이 오로지 기본적 세력들만의 균형에 의해 생긴다고 생각한다는 그것은 방법적 오류로서 기본적 계급들로 이루어지는 중요한 집단들과 그 집단들의 헤게모니적인 영향에 의해 지도받거나 종속되어 있는 보조적인 세력들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도 고려해야하므로 프랑스의 군사적 집단과 농민의 기능을 연구하지 않고는 1851년 12월 2 쿠데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람시에 따르면 그러한 세력들이 역사적으로 유효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내재적인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세력들의 적의 무능력에 의한 것이다.

맑스에 의해 역사 속에서 계급균형을 가장한 파시즘은 케사리즘이 아닌 보나파르티즘이 되었다.

 

이제 이 희극과도 같은 보나파르티즘에도 불구하고, 맑스에 따르면 혁명은 자신의 과업을 일정한 방식에 따라 수행한다’.

1849 12 10 보나파르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힘은 프랑스 대다수 국민을 차지하고 있던 분할지 농민들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노동자, 농민, 영세자영업자 등의 대다수 분할된 민중들이 군부독재 유신의 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듯.

 

 

보나파르트는 한 계급을 그것도 프랑스 사회에서 수적으로 가장 많은 계급인 분할지 농민을 대변하고 있다. 부르봉가()가 대토지 소유자들의 왕조였고 오를레앙가()가 화폐소유자들의 왕조였듯이 보나파르트 왕조는 농민, 즉 프랑스 인민대중의 왕조이다1848년 12월 10 선거는 1851년 12월 2 쿠데타에 의해 비로소 성취되었다

 

- K. Marx,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 7장 중.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에서 다시 한 번 발견하는 역사적 유물론의 진리는 역사의 필연이다. ‘일정한 방식에 따라’ ‘자신의 과업을 수행하는 역사발전의 필연인 것인데,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행정권력을 장악한 루이 보나파르트는 과도한 세금으로 국가권력을 강화하면서 자신을 지지해준 대다수 분할지 농민들의 욕망을 배신하고 공화정 가면 뒤에 숨은 왕정복고주의자인 대부르주아지들을 기만하면서 황제의 길희극적이게도 묵묵히 가게 된다. 20세기에 대다수 민중을 압살하면서 동시에 자본을 탄압하기도 했던 아버지 대통령비극적인 길을 따라 21세기에 잘 살아 보세또는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는 딸 대통령희극적인 길이 다시금 열렸듯.

그러므로 이러한 시공을 초월한 희비극의 반복은 계급적으로 조직되지 못한 우리 대다수 민중의 무능력이 불러온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자루 분량의 감자들이 모여 한 자루의 감자를 이루듯이 프랑스 국민의 거대한 대중은 똑 같은 크기를 단순히 더함으로써 형성된다. 수백만의 가구가 자신의 생활 양식, 이해 관계, 문화를 다른 계급의 생활 양식, 이해 관계, 문화와 구별지으며 그것에 대해 적대적으로 대립하게 하는 경제적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한, 그들은 하나의 계급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들 분할지 농민들 사이에 단순한 지방적 연계만이 있는 한, 그리고 그들간의 이해의 동질성이 그들간에 어떠한 공통성이나 전국적 결합, 정치적 조직 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그들은 계급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의회를 통해서나 국민공회를 통해서나 간에 자신의 이름으로 자기계급의 이해를 관철시킬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고, 누군가에 의해 대표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해는 없도록 하자. 보나파르트 왕조가 대변하는 것은 혁명적 농민이 아니라 보수적 농민이다. 분할지 경작이라는 자신의 사회적 생활 조건을 박차고 일어나는 농민이 아니라, 자신의 분할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농민, 도시와 연계하여 새로운 힘으로 구질서를 타도하고자 하는 농촌의 민중이 아니라 반대로 무감각하게 구질서 속에 갇혀 자신과 자신의 보유지를 제국의 유령에 의해 보장받고 축복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변한다. 보나파르트 왕조는 농민의 계몽이 아니라 농민의 미신을 대변하고 농민의 건전한 판단이 아닌 편견을, 미래가 아닌 과거를대표한다.

 

- K. Marx,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 7장 중.

 

 

19세기의 프랑스에서 맑스의 결론은 이렇다.

농민의 이해는 비극적나폴레옹의 1제정과 달리 그 조카인 나폴레옹3세의 지속적인 사기와 배신에 의해 자본의 이해와 상충함으로써 부르주아 질서의 타도를 외치는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자신의 자연스러운 동맹자요 지도자로 여긴다는 것이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치환해 보자.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약속하는 사기극을 통해 희극적으로 반복된 여왕 파시즘은 결국 계급으로 조직되지 못한 국민, 시민, 민중들을 배반할 것이며, 이 제정(帝政)과도 같은 파시즘을 만들어준 대중들은 결국 새로운 세상, 더 나은 세상을 스스로 외치게 될 것이라고.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 1848 2월 혁명에서의 계급투쟁을 다룬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과 보나파르티즘을 무너뜨린 파리 코뮌을 상세히 다룬 [프랑스 내전]과 함께 프랑스 혁명사 3부작으로 통칭되고 있다.

 

 (2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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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채 평전 - 시대의 모순과 대결한 불온한 경제학자의 초상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김삼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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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민중의 자주적 공동체를 향한 진정한 지성

- ‘민족경제론학자 박현채 : [박현채 평전],김삼웅 지음,<한겨레출판>,2012. -

 

 

(민족경제론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국주의 침략과 맞닥뜨린 상황에서는 반제국주의적 경제이론이 민족경제론이며, 경제종속이 심화되고 있는 사회에서는 탈종속의 경제이론이 민족경제론인 것이다. 시장과 무역자유화 때문에 민족경제가 받는 피해가 이득보다 크다면 보호무역주의 경제이론, 반대로 민족경제의 활로가 무역자유화에 있다고 판단되면 자유무역론이 민족경제론이 될 것이다. 또한 계급갈등과 빈부격차가 극심하고 실업증대, 환경파괴, 민족분열의 조장으로 기존 체제의 의미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체제 변혁을 위한 혁명의 경제학이 민족경제론으로 등장할 것이다.

- 박영호 [역사적 맥락에서 본 민족경제론] 참고한 [박현채 평전] .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김영삼이 주창했던 ‘40대 기수론의 분위기에서 치열한 경선 끝에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된 김대중 후보는 대중경제연구소를 세우고 재야 경제학자 박현채를 비롯한 여러 재야 학자들에게 의뢰하여 대중경제론을 확립한다.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의 경제체제로 선언되는 대중경제론대중이 참여하는 시장경제를 모델로 만들어본 것으로, ‘우리 정치사에서는 정책 대결의 장을 여는 획기적인 정책 이론이자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기념비적인 이론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는 훗날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앞세운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경제이론으로서 대중경제론의 뿌리였으며, 재야 경제학자 박현채가 설파한 민족경제론의 근원이라고도 한다.

 

1970년대 민족경제론으로 성장위주의 박정희식 개발독재에 대한 대항담론을 형성했던 경제학자 박현채는 정희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삶의 궤적은 정반대였다. 일본군 장교 다카키 마사오였던 박정희 10대에 이미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섭렵하고 17세에 지리산에서 소년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박현채, 부정부패와 장기집권으로 민주주의를 말살했던 독재자 박정희와 시대에 순응하지 않고 행동하는 진정한 지성의 길을 택한 채 안정된 교수 자리를 마다하고 지식보따리상을 자처했던 박현채. 1978년에 출간한 [민족경제론]은 우리 현대사에서 저항의 삶을 살았던 그의 젊은 날과 1960~70년대의 장년기 그의 삶을 관통한 대다수 민중에 기초한 역사관을 굳건한 토대로 했던 경제학 논문들을 엮은 저서이다. ‘민족경제론이라는 제목은 박현채 자신이 아닌 편집자가 급조한 것으로서, 박정희 개발독재시대에서 그의 민족경제론은 다름 아닌 체제 변혁을 위한 혁명의 경제학이었을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 민중의 상황은 그 역사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주체적, 능동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이것은 국민경제의 상황에서 경제성장 결과의 광범한 민중소외로 사회적 불균형을 확대시키고 있다. 국민경제에 있어서 민중의 소리는 근원적인 국민경제의 구조에서 이미 주어지고 있으나 우리의 경우 국민경제의 성장유형은 이를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되고 있다.

오늘 우리나라 민중이 당면한 문제는 많다. 그것은 민주주의, 평화, 민족과 통일, 인권에 이르는 광범한 자기 과제에서 제시된다. 계급적, 계층적 이해의 조정에서 공동의 자기요구를 정립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대처하는 중요한 계기다.

- 박현채, [민중과 경제](1978) .

 

대다수 민중의 자주적 공동체를 향한 혁명의 경제학을 연구한 학자로서 박현채와 그의 민족경제론은 이후 1980년대 중반 우리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하는 사회구성체 논쟁을 촉발하기도 하였다. 1985 [창작과 비평]에서 박현채는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주장하면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나 주변부 자본주의론을 비판한다. 이는 민족경제론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이론으로서 우리 경제체제를 종속성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 단계로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는 이론적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사회구성체 논쟁은 관념적 형태로 변질되어 가기도 했지만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된 계급투쟁의 기본모순과 예속적 분단국가 민족모순으로서 주요모순의 치열한 선후논쟁의 결과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신식민지반봉건론또는 신식민지반자본주의론으로 대략 수렴하기도 하는데, 마르크스의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성격 규정을 하고자 했던 사회구성체 논쟁의 출발점 또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박현채 평전]에 따르면 박현채는 민족경제론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이론적 연관성을 완전히 제시하지는 못한 바, 그가 못다 이룬 연구와 과제는 후학의 역할로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평전]은 결말을 맺는다.

모순으로 가득한 우리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대처하는 중요한 계기로서 계급적, 계층적 이해의 조정에서 공동의 자기요구를 정립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일 것이며, 박현채는 대다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정치경제학을 설파하고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지성임을 지금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진정한 지성은 역사에서의 충실을 위한 현실적인 반역행위와 지배계급으로부터의 억압과 소외에 의해 규정짓는다.

- 박현채, [시대와 지성](1988) .

 

 (2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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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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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피 흘리지 않는 전쟁,

전쟁은 피 흘리는 정치

-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1,2,3],송태욱 옮김,<문학동네>,2012. -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고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이다

 

[전쟁론]으로 유명한 독일의 클라우제비츠와 중국의 혁명가 마오쩌뚱이 그의 저서 [지구전론]에서 했던 말이다. 클라우제비츠가 먼저 활동했던 사람이니 마오쩌뚱이 그를 인용하였을지도 모르겠지만, 현대사회인 지금도 전쟁의 본질은 정치이고, 가끔 정치는 전쟁으로 현상하고 있다. 정치는 내치와 외교가 있겠지만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정치의 실현체였던 전쟁은 참혹하기는 하지만 과학의 진보 뿐만 아니라 문화의 교류와 발전을 수반하기도 했다.

 

대륙을 기준으로 보면,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경우 위,,오 삼국을 통일한 사마염의 진()나라가 분열한 후 흉노, 선비, , , 강족 등의 다섯 오랑캐들이 서로 싸우면서  중원에 열여섯 나라를 세운 이른바 ‘516시대가 있었고, 이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 대륙의 문화가 더욱 발전했다는 역사학적 견해도 있다. ‘중화주의라는 왜곡된 중심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대립, 침투하면서 사회가 발전했다는 역사관이다.

 

유럽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아랍도 아직 없었던 중세 서구, 로마교황은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현세에서 신의 대리인이었고 신성로마제국황제와 프랑스왕, 각국의 제후들은 속세의 권력자로서 교황의 교시로 군사를 움직이고 정치를 하던 시기, ‘카노사의 굴욕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 7세로부터의 파문은 면하지만 지능적으로 교황을 고립시켜 로마로부터 떠나도록 한 후 대립교황까지 내세워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고, 1095 11,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는 말로 민중들을 선동하여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피로써 탈환하자는 교시를 내린다. 물론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므로 십자군 전쟁의 본질은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교황 우르바누스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제국을 지키려는 비잔틴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의 정치외교적 결과이기도 했다.

 

유럽의 중세는 제후기사의 시대라고 한다. 왕과 제후들의 수많은 영토확장 전쟁 속에서 여러 유명한 왕들이 있었다.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프랑스 카페왕조의 존엄왕 필리프’, ‘성왕 루이’, ‘미남왕필리프, 신성로마제국의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와 그의 손자 프리드리히, 이들은 유럽 내에서도 영웅이었으나 총8차례를 거친 십자군 원정 과정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가장 순수했고 열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제1차 십자군 전쟁에서는 왕은 출전하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제후 영웅들이 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이슬람 세력이 형제간에도 영토를 놓고 분열이 끊이지 않은 상황에 유럽과 아랍의 개념도 없었으니 각각 서로를 프랑크인사라센인으로 칭하던 시기에,  프랑크인의 십자군은 사라센인이교도를 성전의 이름으로 타도하기 위해 1차 십자군 원정을 시작했고, 종교전쟁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내부 분열만 거듭하던 이슬람 세력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모두의 성지였던 예루살렘을 빼앗기고 만다. 이 과정에서 북유럽 로렌 출신 고드푸르아 드 부용과 보두앵, 남부 이탈리아 노르만의 보에몬드와 탄크레디, 프랑스 툴루즈의 레몽 등의 십자군 영웅들이 등장했고, 이들이 바로 중근동에서의 그리스도교 영지 약200년의 역사를 연 주인공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운동에는 대립물이 있는 것, 역사도 예외는 아니다. 이슬람 측에서도 내부분열을 극복하고 이슬람 통일의 기초를 다진 태수 장기와 그의 아들 누레딘,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의 실질적 지도자 누레딘으로부터 이집트 파티마 왕조에 파견된 후 파티마 왕조를 멸하고 아이유브 왕조를 연 후 지하드’, 즉 성전을 명분 삼아 이슬람 세력을 하나로 통일한 살라딘이라는 이슬람 영웅에 의해 그리스도교들은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긴다. 이슬람 최고의 영웅이자 술탄 살라딘은 이후 계속된 십자군 원정 과정에서 사자심왕리처드와 치열한 전투 끝에 강화를 맺게 되고, 십자군 전쟁 약200년 간 대부분의 시간은 중근동에서 프랑크인사라센인들의 공존의 시간이 지속된다.

 

결론적으로,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를 멸한 노예왕조맘루크 왕조의 술탄들의 성전인 지하드에 의해 중근동의 그리스도교가 모두 쫓겨나면서 총8차례에 걸친 약200년간의 십자군 전쟁은 막을 내린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교 이전에 경제인으로서 지중해의 제해권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던 베네치아, 제노바 등의 경제강소국들의 문화적 중개 역할, 템플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 튜턴 기사단 등의 신비스런 종교기사단의 헌신적인 역할 등이 빛을 발한다. 특히, 교황을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납치한 아비뇽 유수를 통해 교황권을 약화시킨 프랑스 미남왕필리프가 오랜 십자군 전쟁의 책임을 가장 헌신적이고 원칙적이었던 템플기사단에게 뒤집어 씌워 잔인하게 말살한 과정은 종교기사단의 신비로움을 가중시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장면이기도 하다.  

 

고대와 중세의 정치는 근현대에 비해 더더욱 피를 흘려야 하는 전쟁으로, 그 당시의 국가는 피를 매개로 한 폭력으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보통 암흑의 시대라 불리는 중세에는 종교와 신앙의 이름으로 유럽과 서아시아의 문화권이 각각 고립되어 있었지만, ‘십자군 전쟁을 통해 결과적으로는 유럽과 아랍이 다양한 문화적 공존과 교류를 이루었고, 나아가 유럽과 동아시아 연결의 매개도 가능하게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간접적이나마 르네상스라는 몇 백 년 후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가능케 한 작은 돌파구를 내는 역사 발전의 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 당시 권력자들이 저지른 피 흘리는 정치로서의 전쟁과 대규모 살육에 대한 역사적 책임은 별개로 본다는 조건이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지만.

 

 (20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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