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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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수요회] 동지에게 '정의'란 무엇입니까? - 제13차 독회

"본질적인 도덕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결정할 수 없고,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 정의는 영광과 미덕, 자부심과 인정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여러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10강 <정의와 공동선>

산별교육원의 날 - '수요회' 제13차 독회는 9월 7일(수) 산별 교육장에서 진행되었습니다.

2016년 하반기 커리큘럼을 끝내는 제13차 독서회의 주제는 미국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하버드대학 강의록을 엮은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였습니다.

1950 ~ 70년대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하면서 도덕과 결합한 정치철학을 이론화하는 마이클 샌델은 미국식 '공동체주의자' 또는 미국식 '공화주의자'로 분류되는데, 그 중심 테마는 '공동선'입니다.

샌델의 '정의철학'을 철학사적으로 이해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과 철학이 결합한 '공동선'에서 시작하여 - '정'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 등의 이념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근대 독일 주관적 관념론자 임마누엘 칸트와 현대의 미국식 관념론자 존 롤스를 통해 도덕과 정치가 분리된 철학적 사유의 기초로서 '인간 이성'과 '개인(시민)의 권리'에 대한 재정리를 거쳐 - '반'
도덕과 정치가 결합한 '공동체주의'적 정의철학을 정립합니다. - '합'

위와 같이 '관념철학' 진영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를 거쳐 정립되는 샌델의 정의철학을 한덕환 최우수회원 동지의 발제를 통해 함께 읽어본 후 세 가지 논의를 해 보았습니다.

1. 샌델의 '공동체주의'는 '전체주의'인가?

'선'보다 '옳음'을 우선시하는 칸트, 롤스와 대비하여 샌델은 '옳음'보다 '선(공동선의 가치)'을 강조한다. '공동선'이란 지역, 국가, 세계의 범위 및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 개념이다. 샌델에게 '공동선'은 미국의 정치체제이며 '미국식 공화주의'라는 그들만의 건국이념이다. 샌델의 주장이 '전체주의'는 아니라 해도 미국의 국가주의자들에게 이론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

2. 샌델의 ''공동체주의' 실체는 무엇인가?

위에서 정리했듯 미국 국가주의자들의 '이상사회'로서 건국초기 미국식 '공화주의'이다. 다양한 인종(사실은 백인), 종교(사실은 기독교), 사상(사실은 자유주의)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그들만의 '이상주의', 사실상 '미제국주의'이다.

3.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공동선'은 시대와 지역, 국가, 세계 등에 따라 다르므로 샌델에 따르면 '정의'는 '상대적'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계급에 따라서도 다를 수 있다. 삼성재벌의 '정의'와 다수 노동자의 '정의'가 다를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롤스와 피케티처럼 '불평등'을 용인하되 '정당한 불평등'을 최소화하는 것이 '정의'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정의'란 '평등'일 수 있다.

'비판적 독해'는 '수요회'의 힘!

고도로 발전된 현대 자본주의 세계체제,
양극화와 분단의 땅 한반도에서 묻습니다.

동지에게 '정의'란 무엇입니까?

***

작년 5월부터 올해 9월 제13차까지 함께 해주신 회원 동지들, 비록 책은 안 읽지만 지지해주신 외부세력들, 첫 책 구입과 초청강연회 예산도 잡아주고 집행해준 산별교육원에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산별교육원의 날 - '수요회'는,
자랑스런 2천만 노동자의 조직 민주노총 사무금융 산별 동지들의 마음 속에 항상 있습니다!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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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예술의 의미 한길그레이트북스 126
에르빈 파노프스키 지음, 임산 옮김 / 한길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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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예술의 의미], 에르빈 파노프스키 : 자연과학과 '인문학'으로서의 미술사학
 
"과학이 자연현상의 혼돈의 다양성을 이른바 자연의 질서(cosmos)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반면, 인문학은 인간기록(문헌)의 혼돈의 다양성을 이른바 문화의 질서(tabula)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마치 자연과학이 현상이라 불리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듯이, 인문학은 역사적 사실이라 불리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한다... 결국, 자료가 자연의 질서로 조직화되는 연속단계들과 자료가 문화의 질서로 조직화되는 연속단계들은 서로 유사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함의되는 연구방법의 문제들도 마찬가지이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앞에서 얘기했듯이 자연현상의 관찰과 인간기록의 검토가 행해진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자연으로부터의 메시지'가 관찰자에게 받아들여지듯이, 기록도 '판독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관찰과 검토의 결과가 '의미를 지니는' 일관된 체계로 분류되고 정의되어야 한다."

- 에르빈 파노프스키, [시각예술의 의미], <서장: 인본주의적 학제로서의 미술사학> 중

그림, 조각 등의 '시각예술(Visual Arts)'에서 '일차적-자연적 주제'를 넘어 '이미지', '일화', '알레고리' 등을 구분하는 '이차적-관습적 주제'를 파악하는 것, 즉 "미술작품의 형식에 대비되는... 주제 또는 의미에 관련된 미술사 분야"(1장 <도상학과 도상해석학 : 르네상스 미술연구에 관한 서문>)로서 '도상학(iconography)'에 그치지 않고 '도상해석학(iconology)'을 개척한 미술사학자가 바로 독일 출신의 미국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1892-1968)이다.

그의 '도상해석학'은 미술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 '일화', '알레고리' 등의 관습적 의미 등을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련 문헌과 당시 예술사조 등을 바탕으로 시대의 '문화적 징후' 또는 '상징'을 읽어내고 해석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데 철학과 역사를 아우르는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인문학'으로서 그의 미술사학이 객관적으로 현상을 파악하는 '자연과학'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예술작품을 '미적으로 경험될 것을 요구받는 인조물'로 정의함으로써 우리는 처음으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근본적인 차이와 조우한다. 과학자는 자연현상을 다룰 때, 일단 그것들을 분석한다. 인문학자는 인간의 행위와 창작물을 다룰 때, 총합적, 주관적 성격의 정신적 처리 과정에 적극 관여하여야 한다."

- 파노프스키, 같은 책, 같은 논문.

객관성을 근본으로 하는 '자연과학'에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는 '철학'이 개입함으로써, 예술작품에 담긴 '의미(meaning)'를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이 논문집의 제목인 '시각예술의 의미(Meaning in the Visual Arts)'의 '의미'이다.

그리하여 결국, '자연과학'과 '인문학으로서의 미술사학'은 서로 대립적이면서도 상호 통일적이다.

"고고학적 조사는 미적 재창조(예술작품의 재창조) 없이는 맹목이고 공허하다. 또한 미적 재창조는 고고학적 조사 없이는 비이성적이고 그른 길로 향할 때가 많다... 일시적인 사건들을 정적인 법칙으로 바꾸는 대신 정적인 기록에 동적인 생명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충돌하지 않고 그것을 보완한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한편을 전제하고 요구한다... 자연과학의 이상적인 목적은 정복과 비슷한 어떤 것처럼 보이는데, 인문과학의 이상적인 목적은 지혜와 비슷한 어떤 것처럼 보인다." 

- 파노프스키, 같은 책, 같은 논문.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처럼 흥미로운 주제이기는 하나, 파노프스키의 '주관적'이고 난해한 '도상해석학'적 시도는 일반인에게는 어렵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에서도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사실 하나 만큼은 다시금 확인한다.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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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의 기초개념
하인리히 뵐플린 지음, 박지형 옮김 / 시공사 / 199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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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뵐플린의  [미술사의 기초개념]과 우리 애기들 첫 미술전시 관람 
- 2016. 8. 5. (금), 충무아트센터, '서양미술사 아틀리에'


"아무도 '눈(시각)'이 제 스스로 발전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항상 다른 정신적 영역과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세계에 죽은 모형처럼 덮어 씌워진 그러한 시각적 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항상 보기 원하는 대로 보아 온 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변화 속에서도 법칙이 작용하였을 가능성은 상당히 농후하다. 이 법칙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과학적 미술사의 중심과제이자 기본과제일 것이다."
- 하인리히 뵐플린, [미술사의 기초개념], <서문>, 1915.

스위스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의 [미술사의 기초개념](1915)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우리집 신창동 헨젤과 그레텔 및 무적 애기의 첫 미술 관람을 결국 완수하고야 말았는데,
인터넷 예약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갔다가 저번 전쟁기념관 미켈란젤로전처럼 헛탕칠 수 없어 막무가내로 꼽사리껴서 입장했다.

15세기 고전기 르네상스(콰트로첸토)에서 16세기 전성기 르네상스(친퀘첸토)를 지나 17세기 바로크(세이첸토)로 이어지는 시각표현양식의 이행을 뵐플린은 다음의 다섯가지 개념쌍으로 이론화한다.

1. 선적인 것(소묘) - 색채적인 것(회화)
2. 평면성 - 깊이감
3. 폐쇄적 형태 - 개방적 형태
4. 다원적 통일성(개별적 완성미) - 단일적 통일성(전체적 완성미)
5. 절대적 명료성(명료성) - 상대적 명료성(불명료성)

독일 근대 관념철학의 관점에서 미술사를 서술하는 뵐플린이 칸트 철학에서 차용했을 '직관 범주'로서 이 개념쌍들은 상호 중첩되기도 하고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동일한 사태에 대한 다섯 가지 관점"(결론)이라고 한다.
15, 16세기 르네상스에서 17세기 바로크 및 로코코로 이행하는 이러한 양상과 특징들은 각 시대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나선형으로 반복되고 발전된다는 뵐플린의 이론은 또한 독일 철학자 헤겔의 변증법적 체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바로크와 로코코는 18세기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고전주의'의 부활로 다시 대체된다.

"... 1800년경의 미술사적 변화는 당시의 일반적인 시대상황 만큼이나 독특하다. 서양 문화는 당시 비교적 짧은 기간에 총괄적인 갱신 작업을 수행해 냈다. 모든 분야를 막론하고 새로운 경향과 낡은 경향간의 직접적인 대립이 일어났다. 마치 모든 것이 처음부터 다시 새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었다."
- 뵐플린, 같은책, <결론>, 1915.

미술사를 일직선적인 발전으로서 '고전주의의 승리'로 파악하는 18세기 요한 빙켈만의 '신고전주의' 관점과 달리, 
20세기 뵐플린은 고전적 '르네상스'와 '바로크'는 별개의 발전양식으로서 '새로운 경향'과 '낡은 경향'이라는 두 양식의 대립과 투쟁을 통해 미술사가 나선형의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고전적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절대로 가치판단을 의미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바로크에조차 그 나름의 고전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크는 고전적인 것의 몰락도 아니고 고양도 아닌, 전반적으로 아예 다른 미술이다. 근세 서유럽의 발전은 성장, 정점, 몰락의 간단한 곡선도식으로는 도저히 환원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두 개의 정점을 지닌다고 볼 수 있는데..."
- 뵐플린, 같은책, <서문>, 1915.

"위의 두 가지 유형은 서로 독립하여 병존하는 것이므로 나중 단계를 전단계의 단순한 질적 상승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대상은 여러 방식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근거에서 바로크 양식은 18세기 말엽(아마도 프랑스 대혁명) 바로 대상에의 충실이라는 기치 아래 생겨난 고전적 경향에 의해 다시금 밀려나게 된 것이다."
- 뵐플린, 같은책, <4. 다원성과 통일성>, 1915.

뵐플린은 미술이나 예술에 미치는 '외적 미술사(정신사)'의 영향을 인정하고는 있으나 '내적 미술사'로서 미술 고유의 역사적 특수성을, 그 '내적 형식주의'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시각의 역사(표상의 역사)가 단순한 미술의 영역을 뛰어넘듯 '시각'을 통해 드러나는 민족적 다양성은 한낱 취향의 문제로 치부되어질 수 없는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한 민족의 전체 세계상에 대한 토대를 이룬다. 시각 형식의 이론이 역사학 분야에서 쓸모없기는 커녕 오히려 필수불가결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뵐플린, 같은책, <결론>, 1915.

"시각의 역사... 시대별 감각과 정신 사조에 맞추어 진행되는 그 내적인 과정은 늘 그 시대가 처한 포괄적인 발전상에 포함된다... 진부한 감이 없지 않지만 나는 여기서 나의 [기초개념] 중에 나오는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하겠다. 즉 '인간은 항상 원하는 대로 볼 뿐이다.'(서문) 예를 들면 회화적인 양식이라는 것도 그것이 납득될 만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시각의 역사와 일반 역사간의 상관성을 통해 너무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한다거나 전혀 비교 불가능한 대상을 비교하려 한다거나 해서는 안된다. 미술은 역시 그 나름의 독특한 속성을 지니는 것이다. 미술이 명실상부한 최고의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순수 직관에 의거하여 늘 새로운 형식을 유도해 냄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미술이 때로는 선두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인정하는 문화사도 쓰여질 법 하다."
- 뵐플린, 같은책, <후기:재고(1933)>.

미술이나 예술도 사회경제체제 토대를 반영하며, 그 '특수한 반영'(게오르그 루카치)을 통해 해당 사회체제에 다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철학적 사유를 중시한 뵐플린이 '서문'에서 언급한 '과학적 미술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외적 '정신사'로서의 '관념철학'이 아니라 사회경제체제 전반을 아우르는 '역사유물론'을 기초로 해야 한다.

'과학적 미술사'에서도 아직까지 철학적으로 다른 길은 없다.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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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반양장)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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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 에른스트 곰브리치, 1950.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 <서론 - 미술과 미술가들에 관하여> 중

곰브리치는 추상적인 '미술'이라는 '지적인 유희'는 속물근성이라고 본다. 단지 세계를 편견 없이 '제대로' 표현하는 그릇으로서 '미술가들'이 있다는 전제로 건축, 회화, 조각 등 예술 '이야기(Story)'를 시작한다.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제일 큰 장애물은 개인적인 습관과 편견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태도이다."
- <서론> 중

사람들은 자신이 보는 세계가 '제대로'라고 판단한다. 물론 이 '제대로'는 선사-고대-중세-근대-현대의 각 시대마다 기준이 다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대체로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 것을 그렸고,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본' 것을 그린 반면에 중세의 미술가들은 그들이 '느낀'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8장 <혼돈기의 서양 미술 - 6세기부터 11세기까지 : 유럽>)처럼.

"미술사 책에서는 대개 조토와 더불어 새로운 장을 시작... 천년동안 이와 같은 것이 만들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토는 평면에서 깊이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을 재발견한 것이다." 
- 10장 <교회의 승리 - 13세기> 중

15세기 르네상스를 앞서 예고했던 13~14세기 피렌체 화가 조토 디 본도네처럼 미술가는 당대 사람들이 보는 유행과 같은 '제대로'를 혁신한다. 그러므로 곰브리치에게 "미술사는 미술가들의 역사"가 된다. 또한 그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 '예술사조'를 심각하게 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상이한 문맥 속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 <서론> 중

곰브리치는 "어떤 유행의 표본으로서만 흥미있는 작품"들은 배제하고 "진정으로 훌륭한 작품"들을 선정했다고 초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데, 이 '진정한 작품'이란 세계를 '제대로' 표현하려는 미술가들의 노력을 대중들이 '편견' 없이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을 의미한다.
한편 일반 대중들이 해당 작품을 각 시대의 '유행'에 따라 구분하고 그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예술사조'에 따른 분류도 필요하다. 그러나 곰브리치는 '예술사조'를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예술사'에서 엥겔스는 '리얼리즘의 승리'를, 하우저는 '낭만주의 흐름'을 강조하는 반면, 곰브리치가 '모더니즘의 승리'로 [서양미술사]를 끝맺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데, 20세기 초반 격렬했던 '~주의' 이후 나타난 '모더니즘' 자체가 그 무어라 규정하기 힘든 '예술사조'이기 때문이다.

'미술사(History)'보다 '미술가들' 중심으로 '미술 이야기(Story)'를 풀어가는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를 '끝이 없는 이야기(28장)'로서 '모더니즘의 승리'로 결론짓기 전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미술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중의 역할을 언급한다.

"결국 우리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형태와 색채가 '제대로' 될 때까지 그것을 조화시키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드물기는 하지만 어중간한 해결방식에 머물지 않고 모든 안이한 효과와 피상적인 성공을 뛰어넘어 진정한 작품을 제작하는데 따르는 노고와 고뇌를 기꺼이 감내하는 뛰어난 남녀들이다. 미술가는 계속해서 태어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미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는 적지 않게 우리들 자신, 즉 일반 대중의 태도에 달려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느냐 아니냐에 따라, 편견을 갖느냐 이해심을 갖느냐에 따라 미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의 흐름이 끊이지 않게 하고 미술가가 과거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이 미술이라는 보물에 귀중한 것을 하나 더 보탤 수 있게 하는 것도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 27장 <실험적 미술 - 20세기 전반기>

결국, 미술가들이 미술을 혁신한다면, 예술을 완성하는 것은 다수 대중이다.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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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세트 - 전4권 - 개정2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반성완 외 옮김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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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아르놀트 하우저, 1951. (1606)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처음 나오면서부터 큰 반향을 일으킨 데는 당시(1974~1981년) 우리 출판문화의 척박함도 한몫했다. 예술사에 관한 수준있는 저서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다 사회현실을 보는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 자체가 억압의 대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석기시대의 동굴벽화로부터 20세기의 영화예술에 이르는 온갖 장르를 일관된 '사회사'로 서술한 예술의 통사는 교양과 지적 해방에 대한 한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바가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러한 특성은 원저가 출간되기 시작한 1950년대 초의 서양의 지적 풍토에서도 흔하지 않은 미덕이었음을 덧붙이고 싶다. 속류 맑시즘의 기계적 적용이 아닌 예술비평을 이처럼 방대한 규모와 해박한 지식 그리고 자신만만한 필치로 전개한 사례는 그후로도 많지 않았기에, 하우저의 이 저서는 오늘도 여전히 이 분야의 고전적 저술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것으로 안다... 
'예술사면 됐지 어째서 예술의 사회사냐'는 시비 또한 지속된다고 할 때, 예술도 하나의 사회현상이고 사회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마땅하다는 저자의 발상은 지금도 여전히 필요한 도전임을 짐작할 수 있다."

- 백낙청(번역자), <새로운 개정판에 부쳐>

***

물론, 지금 시대에는 '토종 미학자' 유홍준의 저서나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등을 보면서 '예술의 사회사'를 접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고전은 고전'이다.

'세계사 입문의 고전'인 [곰브리치 세계사]를 우리 아이들과 한장 한장 읽듯이 두고두고 곱씹으며 후세들에게 권할 수 있는.

헝가리 태생 맑스주의 예술사학자 아르놀트 하우저는 "자연주의(리얼리즘)란 실상 새로운 관습을 지닌 낭만주의"라 규정하는가 하면, "인상주의는 자기중심적인 심미적 문화의 정점으로 실제적이고 활동적인 삶에 대한 낭만주의적 체념의 극단적 귀결"이라고도 하며, "20세기 인상주의의 부정"이자 "표현의 직접성을 위한 투쟁"으로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본질적으로 낭만주의적인 움직임"이라면서 '낭만주의'를 '예술의 사회사'에서 가장 주요한 문예사조로 보는 듯 하다.
엥겔스가 발자크의 '사실주의(자연주의)'를 통해 '리얼리즘의 승리'를 보았다면, 하우저는 문예의 사회사를 통해 혁명적 '낭만주의의 승리'를 보았을 수도 있다.

역사적 유물론의 시각으로 접근하되 문예사조를 '도식화'하지 않는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단연 '예술사의 고전'이다.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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