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이문열 초한지 세트 (전10권)
이문열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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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풍가(大風歌)]와 [해하의 노래(垓下歌)]
- 꽉막힌 항우와 방만한 유방

알라딘에서 읽어볼 책을 검색하다가 ‘초한지 원본번역’이 떠서 급궁금하여 더 찾아보니,
2000년대 중반에 동아일보에서 연재할 때 다음 회를 기대하며 재미있게 읽었던 이문열의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가 [이문열 초한지] 총 10권으로 나와 있었다.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는 한고조가 된 유방이 고향 패현으로 놀러가서 고향 선후배, 친구들과 음주가무를 즐기다가 전쟁터에서 지낸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지은 시의 첫 구절이다.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大風起 雲飛揚 : 대풍기 운비장)
위세가 해내에 떨쳐 고향에 돌아왔네 (威加海內 歸故鄕) : 위여해내 귀고향)
어떻게 하면 맹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까 (安得猛士 守四方 : 안득맹사 수사방)”

한고조 유방의 인생 절정기에 지어 부른 이 노래의 제목은 [대풍가(대풍의 노래)]다.
유방은 이 노래를 부른 다음해에 53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한다.

유방 최후의 적수 초패왕 항우도 해하에서 ‘사면초가’를 듣고는 유방에게 패배를 인정한 후 총애하는 우미인과 준마 추를 앞에 두고 독주 한 잔 마시면서 시를 한 수 읊는데 이 노래는 유방의 [대풍가]보다 유명한 [해하의 노래(해하가)]다.
31세의 항우는 이날 최후의 결전을 벌이고는 하늘을 탓하며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한다.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덮어도 (力拔山 氣蓋世 : 역발산 기개세)
때가 이롭지 않아 추가 나아가지 않네 (時不利 騅不逝 : 시불리 추불서)
추가 나아가지 않음을 어찌하랴 (騅不逝 可奈何 : 추불서 가내하)
우야 우야 너를 어찌한단 말이냐 (虞兮虞(兮) 奈若何 : 우혜우(혜) 내약하)

어조사 ‘혜(兮)’는 뜻은 없이 음율을 맞추기 위함인데 일종의 쉼표와 같다. 예를 들어 ‘대풍기 운비장’ 중간에 넣어 ‘대풍기혜운비장(大風起兮雲飛揚)’과 같이 부르는데 우리 어릴적 중국에서 온 ‘비단장사 왕서방’이 “우리 사람 ‘혜’ 명월이한테 반했어~” 같은 것 아닐까 싶다.

아주 오래전인 기원전 12세기 이전부터 중국 하북지역은 ‘2+2=4’글자 시를 지어 불렀고, 춘추전국시대 중국 남방 초나라 지역의 ‘초사’는 ‘1+2(역+발산) 또는 2+1(대풍+기)’ 운율이 전해지다가 진시황의 전국 통일 후 섞이고 섞여 ‘2+3 또는 3+2’에 ‘2 또는 2+2+4’가 붙어 5글자 또는 7글자 운율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리가 시조를 보며 익히 들어온 ‘4언절구’, ‘5언절구’, ‘7언절구’ 등일 것이다.
아마도 ‘3언절구’가 없는 것이 항우의 초나라가 망해서 그런 것 아닌가 싶은 것은 오로지 나의 추측이다.

초패왕 항우는 초나라 사람으로 정통 ‘초사’에 따라 ‘3+3=6’을 철저히 따른 반면,
한고조 유방은 그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성정 그대로 술이 꽐라되어 남방의 ‘3+3=6(대풍기+운비장)’으로 거창하게 시작했다가 ‘2+2+3(위여+해내+귀고향 / 안득+맹사+수사방)’으로 형식에 구애없이 막 부른 듯 하다.
이런 자유로움 속에서 ‘7언절구’가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역시 나만의 추측이다.

여기서도 꽉막힌 항우의 형식주의와 방만한 유방의 자유주의적 성정의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 참고 : [패권], 진순신/오자키 호츠키 편, <솔>, 2000.

명나라 말기 ‘종산거사’ 견위라는 사람이 적었다는 ‘서한연의’ 원본번역을 읽어봐야겠다.

이문열의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중 인상깊은 고사인 ‘說者同而得失異者(설자동이득실이자)’ 관련 2006년 글을 첨부한다.

***

같은 말에도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다르다
(說者同而得失異者)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통해 보는 고사성어(故事成語)(10)
: ‘항우본기(項羽本記)’, ‘고조본기(高祖本記)’를 통해 본 초한전쟁(楚漢戰爭) - 2


사학법(私學法) 개정을 반대하며 수구세력(守舊勢力)이 국회를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치권에서 ‘연회(宴會)’를 열었다. 연회의 시작은 단연 여당인 열린우리당이었다. 2006년 1월의 내각인사 이후 원내대표와 당의장을 새로 선출한답시고 한창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하더니 신임 여당 원내대표와 역시 새로 뽑힌 야당의 원내대표가 설날 다음날에 북한산에 오르면서 정치적 연회의 절정을 이루었다. 북한산 정상에서의 양당 원내대표의 합의. 사학재단의 ‘사유재산(私有財産)’을 지키고 ‘국가정체성(國家政體性)’을 ‘수호(守護)’하고자 국회문을 박차고 나갔던 수구야당은 다시 국회 등원을 선택했고, 여당에서는 사학법의 재개정을 전제로 한 합의가 아니었다고 손을 내젓는다. 입시경쟁 위주의 교육제도를 통해 자신의 ‘사유재산’을 더욱더 불리고 ‘교육(敎育)’이라는 허울을 빌어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한 온갖 비리를 일삼던 사학재단을 개혁하고자 했던 애초의 취지는 사학법의 재개정의 가능성과 더불어 이미 민중들로부터 의혹의 눈초리를 받기 시작했다. “‘일점일획(一占一劃)’도 고치지 않겠다”는 여당 지도부의 수사(修辭)에도 이 땅 민중들은 별로 수긍을 하지 않는 듯 하다. 정치(政治)는 결국 ‘타협(妥協)의 예술(藝術)’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206년, 진(秦)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을 항우(項羽)보다 먼저 점령한 유방(劉邦)은 뒤따라오는 항우의 세력에 겁을 먹고 일단 근처 패상(覇上)이라는 지역으로 물러나 있었고, 뒤늦게 함양에 도달한 항우는 홍문(鴻門)이라는 곳에 40만의 군사를 주둔시키고 10만에 불과한 유방의 군사를 치려 하고 있었다. 이에 항우의 숙부인 항백(項伯)은 오래전 유방의 책사(策士) 장량(張亮;張子房)으로부터 신세를 진 바 있어 다음날의 참사를 미리 알려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돕고자 유방의 진채로 찾아든다. 하지만 장량은 유방을 버리고 도망갈 수는 없다며, 항우에게 항복할 것을 유방에게 권유하였고, 유방은 항백을 맞아 자신은 원래부터 함양을 들어 항우에게 바칠 의사였노라고 말한다. 이에 항백은 유방에게 그 다음날 직접 항우를 찾아가서 그 뜻을 전하라고 권하지만, 천하를 차지하려는 유방의 큰 뜻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항우의 책사 범증(笵增)은 유방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꺾지 않는다.
다음날, 항우를 찾아간 유방은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사죄하는 한편, 범증은 항우의 사촌동생 항장(項莊)으로 하여금 검무(劍舞)를 추게 하여 유방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검무의 짝을 맞추면서 이를 교묘하게 제지한 항백과 당시에는 항우를 위해 일했으나 후에 유방의 또 다른 책사로 활약한 진평(陳平)의 도움으로 유방은 술에 취한 척 하며 자리를 떠남으로써 항우를 속이고 무사히 목숨을 보전하게 된다. 유방이 슬그머니 도망갔음을 알아챈 범증은 유방이 헌상한 옥두(玉斗;옥으로 만든 국자)를 칼로 내리치며 분개했지만 이미 항우의 마음은 풀어졌으며 유방은 40리나 떨어진 패상으로 도주하고 난 후였다.

‘홍문연회(鴻門宴會)’는 유방의 언사에 속아 넘어간 항우가 헛되이 베푼 잔치인 동시에 유방을 유인하여 모살(謀殺)하려는 범증의 살육제(殺戮祭)였으며, 궁지에 몰린 유방이 후일을 기약하며 일단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처절한 정치적 타협의 장이었다.

鴻門宴會 (鴻門:홍문, 지역이름 / 宴:잔치 연 / 會:모이다 회)

홍문의 연회, 유방을 제거하려는 범증의 계략(計略)이 화려한 검무로 위장되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순간에 자신의 속내를 감춘 유방이 항우를 회유하여 속이는 한편, 강한 상대 앞에서 비굴한 모습도 불사하면서 술에 취한 척 도주함으로써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여 후일을 꾀할 수 있게 한 잔치였으며, 고대로부터 타협의 극치인 정치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다음 해인 기원전 205년, 스스로 옹립한 초(楚)나라 의제(義帝)를 죽이고 항우는 패왕(覇王)이 되었고 이에 항우의 토벌(討伐)을 선언한 한왕(漢王) 유방은 각 지역의 제후(諸侯)들을 모아 항우의 본거지 팽성(彭城)을 공격하였으나 항우의 3만 군사에게 56만의 대군을 잃고 퇴각하던 중 형양(滎陽)에 머물게 되는데, 형양을 기점으로 하여 동서로 땅을 나눠 갖고 휴전을 하자는 제의도 거절당한 채 고단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유방의 측근 중에는 역생(易生) 또는 역이기(易餌其)라고 불리는 선비가 있었다. 그는 한왕 유방에게 오래 전 은(殷)나라 시조(始祖) 탕왕(湯王)이 하(夏)나라의 폭군(暴君) 걸왕(桀王)을 끌어내린 후 그 후손에게 기(杞)나라의 봉지(封地)를 하사한 일, 주(周)나라를 일으킨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무찌르고 나서 그 후손에게 역시 송(宋)나라의 봉지를 나누어 준 일을 상기시키면서 진(秦)나라 이전 육국(六國)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봉건제를 다시 세우며 한왕의 관인(官印)을 내리면 모두가 한왕 유방을 우러르면서 마침내 초나라의 항우도 한왕 유방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방책(方策)을 제시한다. 이는 진나라의 폭정에 최초로 반란을 일으켰던 진승(陳勝;陳涉)과 오광(吳廣)에게 각 영지의 제후들과 그 측근들이 헌책(獻策)했던 내용으로서 극악한 진나라 황실에 대한 반란을 전국적으로 조직할 수 있게끔 하였던 계책이었다. 이 말을 듣고 즉시 육국의 관인을 제조하라고 지시한 유방은 그의 책사 장량(張亮;張子房)에게 그 헌책의 장중함을 자랑하게 되는데, 장량은 역이기의 시대착오적인 정세분석이 왜 잘못되었는가에 대하여 유방의 밥상에 있던 젓가락 여섯 개를 가지고 조목조목 설파한다.

첫째, 은나라 탕왕이나 주나라 무왕이 걸왕이나 주왕의 후손을 왕으로 봉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든 상대의 생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였는 바, 유방은 지금 항우의 생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가의 물음.
유방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장량은 천하를 힘으로 장악(掌握)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후들을 왕으로 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고는 첫번 째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둘째,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공격하면서 태행산(太行山)에 은거(隱居)하던 현인(賢人) 상용(商容)이 살던 마을 어귀에서 그의 밝고 어짐을 칭송하였고, 주왕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옥에 갇힌 기자(箕子)를 풀어주었으며, 역시 주왕에게 직언(直言)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비간(比干)의 무덤에 봉분을 키워주었는데, 지금 유방은 성인의 무덤을 돌보거나 현자를 널리 칭송할 만한 상황인가.
아직 그럴 겨를이 없다고 대답하는 유방.
즉, 아직 천하 만민의 마음을 두루 어루만지지 못한 상황에서 제후를 왕으로 봉할 수 없다는 설명과 함께 두번 째 젓가락이 밥상 위에 올려진다.

셋째,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의 창고를 열고 재물을 흩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며 천하의 지지기반을 닦았는데, 과연 지금 유방은 천하 모든 창고의 돈과 곡식을 꺼내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도 아직 천하의 창고를 모두 얻지 못한 유방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즉, 천하의 모든 재물과 곡식을 풀어 가난한 민중들에게 나눠줄 수 없는 상황에서 제후를 왕으로 봉할 수 없다는 설명과 함께 세번 째 젓가락이 소리를 내었다.

넷째,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 주왕을 끌어내린 후 전투수레를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타는 수레로 바꾸고 창칼에 호랑이 가죽을 씌워 거꾸로 매달았으며, 전투에 쓰였던 우마(牛馬)를 풀어주면서 다시는 전쟁에 사용하지 않겠노라고 천하에 선언하였는데, 과연 지금 유방도 무력(武力)을 포기하고 문교(文敎)를 우선시할 수 있는가라는 네번 째 젓가락 소리에도 역시 천하 형세를 결정짓는 싸움을 다 끝내지 못한 유방은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었다.

다섯째, 현재 한왕 유방을 따라 천하를 떠도는 수많은 호걸들에게는 유방이 천하를 얻은 후에 봉지를 받아 제후가 되고자 하는 목적이 있을 터, 육국의 후손들을 왕으로 봉하게 되면 유방과 생사를 같이 하기로 결의한 호걸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땅이 없음을 알고는 유방의 곁을 떠날 것이니 그들이 없이는 유방이 천하를 얻을 수 없기에 지금 제후들을 왕으로 봉할 수 없는 다섯번 째 이유가 그것이다.

여섯째로, 한나라와 초나라의 형세가 저울질되는 판에 만약에 유방이 뜻한 바와 다르게 초나라가 강성해지게 되면 육국의 후손들을 초나라를 섬기게 될 것이니 한왕으로서는 지금 그 제후들을 왕으로 봉해서는 안된다는 설명을 마지막으로 여섯번 째 젓가락이 유방의 밥상 위에서 소리를 내었다.

장량의 정세판단에 유방은 육국의 관인을 즉시 녹여 없애라 명하였으며, 역이기는 한참 동안 그의 거처에서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장량은 역이기와 다른 정세분석을 내놓고 있는데, 한왕 유방이 항우와 자웅(雌雄)을 겨루던 당시는 수백 년에 걸친 봉건제(封建制)의 모순(矛盾)이 극에 달한 후에 진나라에 의해서 초석이 세워진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음을 간파한 장량의 명석한 정세판단 능력을 보여준다. 객관적으로 같은 조건에도 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이후 북송(北宋) 시대의 역사가 사마광(司馬光)이 저술한 편년체의 역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역이기의 시대착오적인 헌책을 두고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고 한다.

說者同而得失異者
(說;이야기 설/者;접미사 자/同;같을 동/而;부정접속 이/得;얻을 득/失;잃을 실/異;다를 이/者)
같은 말에도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다르다. 즉, 객관적 정세에 대한 판단의 차이에 따라 같은 말도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뜻으로서, 역시 객관적 인식이 모든 판단의 우선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자치통감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고 한다(이문열의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에서 인용).

“일찍이 장이와 진여가 진승을 찾아가 육국을 되일으켜 한편으로 삼으라고 한 것과 역이기가 한왕을 찾아가 헌책을 한 것은 그 말한 것은 같지만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다르다(說者同而得失異者). 진승이 일어날 때는 천하가 모두 진나라가 망하기를 바랐으나, 초나라와 한나라가 나뉘어 형세가 정해지지 않은 당시에는 천하가 반드시 항씨(項氏;項羽)가 망하기만을 바라지는 않았다.
따라서 진승에게는 육국을 되세우는 것이 말하자면 자기편을 늘리고 진나라의 적을 더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거기다가 진승은 아직 천하의 땅을 오로지 얻지 못했으니 제 것이 아닌 것을 남에게 주어 속빈 은혜로 알찬 복을 얻어낸 셈이었다. 그러나 한왕에게 육국을 되세우게 하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잘라내 적에게 보태주는 꼴이요, 헛된 이름을 내세워 실제의 화를 얻는 길이었다…”

역사적으로 중앙집권적인 새로운 체제가 등장해야 하는 단계에서, 이전 시대 역사발전의 질곡(桎梏)이었던 봉건제의 부활을 통해 현재의 얽킨 실타래를 풀려고 했던 선비 역이기는 북송시대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의 개혁적 당파에 대립하여 보수적인 구법당(舊法黨)의 영수(領袖)의 위치에 있던 사마광이 보기에도 현실을 타개(打開)하는 대안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유재산’과 ‘국가정체성’ ‘수호’라는 명목 하에 언제까지 사학재단의 비리와 구태가 반복될 수는 없다. 수구세력은 ‘타협의 정치’를 통해 사학재단의 재산을 굳게 지킬 방법을 모색할 것이고, ‘정치적 타협’을 위해 연회를 마련한 중도개혁세력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적당한 선에서 재개정을 의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객관적인 조건을 보자. 교육을 빙자한 소수의 ‘사유재산’ 지키기에 손을 들어줄 사람이 많을 것인가, 아니면 대다수 민중을 위해 보다 공공성(公共性)을 담보한 제도 속에서 아이들이 교육받기를 바라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인가.
같은 말이라 해도 객관적 인식의 차이에 따라 그 의미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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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스탈린주의, 공동전선
레온 트로츠키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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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파시즘’이 준동하는 지금 , 다시 '공동전선'!
- 레온 트로츠키, [파시즘, 스탈린주의, 공동전선], 이수현 옮김, <책갈피>, 2019.

"파시즘은 두 가지 조건의 산물이다. 하나는 첨예한 사회적 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적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허약성이다.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허약성 자체는 두 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다. 하나는 사민당의 역사적 구실, 즉 사민당은 여전히 프롤레타리아의 대열 안에서 자본가계급의 유력한 대리인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공산당의 중간주의 지도부가 노동자들을 혁명의 깃발 아래 단결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 L. Trotsky, <독일:국제 정세의 열쇠>, [파시즘, 스탈린주의, 공동전선].

자유한국당의 기획적 망언과 광주 학살 치매골퍼 전두환의 '자서전' 등 '촛불혁명'으로 궁지에 몰린 극우 정치세력이 우리 민주주의 원천 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총공세를 시작했다. 시대에 '절망'한 '태극기부대'를 주력으로 하는 극우 '파시즘'이 준동하고 있다.
이명박근혜의 국정농단과 부정부패에 분노한 다수 민중들이 극우 정권을 몰아내고 혁명적 흐름에 편승한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나, 자본독재체제에서 대다수 민중들의 생활은 절망적 '헬조선'을 벗어나지 못한 '사회적 위기'와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꿀 혁명적 세력의 부재 혹은 '허약함'을 보면, 또한 현 민주정부가 '노동존중', '혁신적 포용국가' 등 일련의 사회민주주의적 수사를 붙인 정책을 내세우고 있지만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와 탄력적 노동시간제 개악, 경사노위 야합을 통해 '자본가계급의 유력한 대리인 구실'을 하고 있는 현 정세는 1930 ~ 1933년의 트로츠키가 규정한 '파시즘'이 득세하게 되는 바로 그 사회적 조건이기도 하다.

"파시즘의 역사적 구실... 파시즘은 프롤레타리아의 바로 위에 있는 계급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 대열로 전락하는 것을 늘 두려워하는 계급들이 들고 일어나게 만든다. 파시즘은 공식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금융자본의 돈으로 그들을 조직하고 무장시킨다. 그들을 이끌고 프롤레타리아 조직들을 혁명적 조직이든 보수적 조직이든 가리지 않고 박멸하려 한다.
파시즘은 보복, 무자비한 폭력, 경찰테러의 체제만은 아니다. 파시즘은 부르주아 사회내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요소들을 모두 뿌리뽑은 바탕위에 수립된 독특한 지배체제다."

- L. Trotsky,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같은책.

노동조건 개악은 물론 민주노총을 비롯한 일체의 민주적 노동자와 시민조직들을 '일베'와 '어버이' 등 중간계급(프티부르주아)을 금전지원 및 동원하여 박멸하려 했던 이명박근혜 정권은 엄연한 '파시즘' 정권이었다.
수많은 민중들이 '혁명적'으로 몰아낸 후 들어선 민주정부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고립된 극우정당인 자한당은 다시금 '파시스트'로서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이 미친 파시스트들이 '박근혜 사면'과 '5.18 망언'을 앞세우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동전선... 혁명적 변증법은 (스탈린주의적 관료적 최후통첩주의의) 그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이미 오래전에 제시했고, 아주 다양한 영역에서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 그것을 입증했다. 즉 권력장악을 위한 투쟁과 개혁을 위한 투쟁을 서로 연결시키고, 공산당의 완전한 독립성을 지키면서도 그 기구들을 활용하고, 의회연단에서 의회주의를 가차없이 비판하고, 개혁주의에 맞서 무자비하게 전쟁을 벌이면서도 부분적 투쟁들에서는 개혁주의자들과 실천적 협정을 맺었다."

- L. Trotsky,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같은책.

평생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와 '관료적 최후통첩주의', '교조적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초좌파주의'적 '국가자본주의'에 맞서 '소비에트 혁명'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다가 결국 스탈린에 의해 암살당한 트로츠키의 정세분석 문건이므로 이 책에서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은 가차없다.
그 중 '스탈린주의'의 가장 큰 오류는 당시 독일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하려 했던 독일 사민당도 '파시즘'과 쌍둥이라고 하면서 사민당을 지지하던 다수 노동세력을 이른바 '사회파시즘'으로 규정하고 '공동전선'을 펴지 못하도록 한 '초좌파주의'이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기획하던 '국제공산주의자'였던 트로츠키는 '혁명적 공산당'이 다음과 같은 '공동전선'을 적극 조직해야 한다고 강력 주장한다.

1. 소비에트유럽합중국 건설 : 정치경제적 모순이 첨예해진 독일이 당시 '국제정세의 열쇠'다.
2. '계급 대 계급(의 투쟁)' : 프롤레타리아 모든 조직들이 부르주아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에 참여해야 한다.
3. '공동전선'의 '실천적 강령' : 대중이 분명히 지켜보는 앞에서 조직들이 체결한 협정에 따라 결정된다. 모든 조직은 자신의 깃발과 지도부를 유지한다. 그러나 행동에서는 '공동전선'의 규율을 지킨다.
4. 소비에트 건설 : 프롤레타리아 '공동전선'의 최고형태인 노동자 소비에트를 선전하고 조직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5. 따로따로 행진하여 함께 공격 : 어떤 상황에서도 공산당은 완전한 조직적, 정치적 독립성을 항상 유지해야 한다.
6. 당(조직)내 민주주의 복원 : 프롤레타리아의 광범위한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7. 노동조합 정책방향의 급격한 전환 : 노조의 단결을 바탕으로 개혁주의 지도부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8. 노동통제 기관으로서 공장위원회와 산업경영참여기관으로서의 중앙집중적 소비에트 : 물가인하를 위한 투쟁과 임금삭감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이 투쟁을 노동자들이 생산을 통제하는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9. 혁명 : 사회주의로 변화시키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 L. Trotsky, 같은책.

트로츠키가 정세분석을 하던 1930 ~ 1933년의 독일은 이탈리아의 '파시즘의 방법론을 독일 신비주의 언어로 번역'한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나치당이 집권하기 전에 지지세를 늘리고 있던 시기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 프랑코 등으로 대표되던 유럽 집권 '파시즘'에 대항한 '일시적인 수세적 전술 이상의, 궁극적으로 패배를 공세로 전환시키기 위한, 민주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전략(에릭 홉스봄)'으로서의 1936년 이후 '인민전선' 이전에 트로츠키는 이미 '계급 대 계급'의 거대한 공세적 전선인 '공동전선' 전략을 강조한 것이다.

현재 우리 정세에서 극우 '파시즘'은 정신나간 일부 정치세력의 발악으로, 집권 가능성이 당장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독일의 정세를 분석하던 1933년까지 히틀러는 '오로지 성격이 매우 괴팍하고, 목소리가 남들보다 훨씬 크고, 지능은 평범하지만 자심감은 넘쳤기 때문'에 두각을 나타냈고 '모욕당한 1차대전 참전병사의 복수심 말고는 기존의 어떤 강령도 운동에 가져오지 않은' 상태로 집권 가능성이 역시 높지 않았다.
사민당도 포함된 개혁세력의 우유부단함과 단호해야 했던 혁명세력의 비겁함의 틈새에서 중간계급을 동원하여 자본가계급에 복무하게 만든 결과 히틀러는 '파시즘' 정권을 수립하고 대산업과 금융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 2차대전을 일으킬 수 있었다.

"파시즘 체제가 정치적으로 나아갈 길은 전쟁 아니면 혁명이다."

- L. Trotsky, <국가사회주의란 무엇인가?>, 같은책.

'파시즘'이 준동하는 지금, 민주정부를 지지하는 대다수 노동자들과 실천적으로 연대하는 '공동전선'을 통해 한국노총 같은 어용 지도부와 다수 노동자를 분리시키면서 사회체제에 절망한 중간계급을 노동자계급편에 서도록 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미친 '파시즘'의 종착지는 '전쟁'이고, '계급 대 계급'이 대결하는 거대한 '공동전선'의 목표는 '혁명'이다.

"공동전선 정책은 '계급 대 계급'의 투쟁이라는 근본적이고 냉엄한 현실에서 비롯한다."

- L. Trotsky, 같은책.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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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책소개)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원근법'과 '인상주의'로 미술사를 돌아보다


"흔히 투시법은 서구 미술에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원근법이 유일한 투시법은 아니다. 파노프스키가 지적한 대로 그것은 가능한 많은 투시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원근법과는 다른 투시법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러시아 성상에 적용된 역원근법이다. 
르네상스 원근법은 움직이지 않는 시점을 전제한다. 러시아 성상에서는 시점이 움직인다. 이렇게 움직이는 시점으로 본 장면들을 하나로 통일시킬 때, 외려 가까이 있는 것일 수록 짧게 묘사되는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한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고전예술편>, 5장 '물구나무선 원근법'


'미학'을 대중적으로 풀어쓴 진중권이 '서양미술사'를 개괄한 대중서 4편이다. 
통시적으로 '고전예술편', '모더니즘편',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편'으로 '서양미술사'를 돌아봤던 기존 3편에 최근 '인상주의편'을 추가하였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나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등이 미술이나 예술 전문가들을 위한 학술고전 같은 성격이라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는 미술사를 처음 접하는 일반 대중들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미술의 역사이다 보니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있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두 가지 테마는 '원근법'과 '인상주의'다.

2차원 평면에 잠겨있던 고대와 중세의 그림에 3차원적 혁명을 불러온 것이 르네상스의 원근법이다. 진중권은 이 혁명이 하나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는 '고전적 원근법'에 불과하며, 실제 과학적인 사실은 여러개의 다양한 시선으로 대상을 보는 것으로서 '러시아의 역원근법'을 거쳐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알려진 폴 세잔의 '체험된 원근법'으로 풀어낸다.
즉, 우리의 안구와 지각을 통해 보이는 사물이나 대상은 하나의 고정된 시선이 아닌 다양한 시선으로 현상한다는 것이다.

미술사 또한 인류 역사처럼 '부정의 부정', 끊임없는 변증법적 혁명의 과정이다.
이런 미술사를 관통하는 첫번째 테마가 바로 '원근법'인 것이다.

'고전예술편'은 파노프스키, 뵐플린 같은 저명한 미술비평가들의 논문을 한편 한편 소개하는 방식으로 모더니즘 이전까지를 정리한다.
유시민도 올해 신작 [역사의 역사]에서 헤로도토스, 사마천, 마르크스, 카, 박은식과 신채호,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아랍 역사가 이븐 할둔까지의 역사서를 소개하면서 비슷한 서술방식를 취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서술방식이 좋아 진중권의 4편 중 ‘고전예술편’을 가장 추천한다.

역사도 그렇지만 미술사라는 것이 갖가지 '예술사조'로 도식화될 수 없다. 곰브리치나 하우저도, 진중권은 특히 그러한 도식화를 경계하고 있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전문분야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런 도식화가 불가피하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주로 '사실주의(또는 ‘리얼리즘’)를, 곰브리치는 '모더니즘'을, 하우저는 '낭만주의'를 분명하게 지지하는데, 진중권이 미술사를 읽는 두번째 테마는 '인상주의'다.

과학과 산업의 혁명적 발전을 배경으로 기존 '고전주의'를 부정한 쿠르베의 '사실주의'로부터 시작하여 진중권은 대상의 객관적 묘사에 복무하는 '사실주의'보다는 인간의 지각에 묘사된 사물을 그린 '인상주의'에 주목한다.

특히, 진중권은 '인상주의'를 넘어서 현대미술을 시작하는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폴 세잔에게서 현대미술의 '혁명'을 본다.

고전적 미술로부터 "색채를 해방시킨 '야수주의' 앙리 마티스"와 "형태를 해방시킨 '입체주의' 파블로 피카소" 둘 다 '후기 인상주의' 폴 세잔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진중권은 폴 세잔을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로 규정한다.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로서... 세잔의 작업은 고전미술이 현대미술로 이행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그의 화면에서 발견되는 '색채의 놀라운 풍부함'과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형태, '고전적 원근법'과 다른 '체험된 원근법'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초석이 된다. 마티스는 그에게서 색채의 효과를, 피카소는 그에게서 형태의 기하학적 단순화와 고전적 원근법의 파괴를 배웠다. 현대미술의 두 위대한 이정표 모두 세잔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그 때문이다...
마티스와 드랭의 야수주의,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 현대미술의 두 이정표도 세잔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거나, 혹은 그 탄생이 뒤로 한참 늦춰졌을 것이다. 세잔은 마지막 고전주의자이자 최초의 현대주의자였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 11~12장 '세잔'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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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사
레온 트로츠키 지음, 볼셰비키그룹 옮김 / 아고라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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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소개) 이 시대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자본주의 쇠퇴’이다(1709)
- 러시아혁명 100주년 : 카, [러시아혁명],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대중이 사회의 운명에 직접 개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이다… 역사 서술은 혁명 사건들의 뒤에서 일어나는 집단적 의식의 변화들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운동의 ‘자발성’이라는 자루 속에 모든 것을 처넣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이 추상적인 말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혁명은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이 말은 혁명 대중이 혁명의 법칙들을 인식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대중의 의식은 우연히 변화하지 않으며 이론적으로 설명 가능한 객관적 필연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대중의 의식은 예측 가능하며 지도가 가능하다."
 
- L.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2권과 3권 서문>, 1932.

 
러시아혁명의 주체 중 하나였던 레온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혁명은 억압받는 다수 피지배계급이 낡은 체제를 무너뜨린다는 사회법칙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적극 실천했던 볼셰비키라는 정치세력의 ‘지도’에 의해 가능했으며 다수 대중의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러시아혁명의 ‘비민주성’을 두고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고 판단한 칼 카우츠키와 계급투쟁의 운동방식으로서 대중파업의 ‘자발성’도 중시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대립하는 한편, 내부적으로 부르주아와 지주 계급 뿐만 아니라 즉각적 무장봉기에 반대했던 멘셰비키 등과의 투쟁 과정에서 혁명을 성공했고 집권 후에도 혁명을 지키기 위해 외무, 군사인민위원으로서 처절하게 내전을 치른 당사자로서는 당연한 평가일 것이다.
 
2017년은 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이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30년 만에 다수 대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종식시킨 역사적인 해이다.
2017년은 30년 전인 1987년 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독재권력을 끌어내리기까지 한 해이다.
우리 사회 동시대 민중들 덕분에 러시아혁명 또한 ‘사회주의’ 이념이나 ‘볼세비키’ 정치세력 중심보다는 ‘소비에트’라는 대중 조직의 ‘자발성’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1917년 10월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 과정을 그 해 2월 혁명부터 7월 봉기를 거쳐 8월 코르닐로프 반혁명, 10월 볼셰비키 혁명까지 르포처럼 엮은 미국의 역사가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1976)의 중심에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이 거스를 수 없는 다수 대중의 운동이자 권력의 한 축, 즉 ‘소비에트’가 있다.

 
"나의 주목표는 ‘밑으로부터의 혁명’의 발전과 1917년 2월과 10월 사이에 페트로그라드에 존재했던 각급 볼셰비키당 조직의 견해와 활동과 상황을 될 수 있는 대로 충실 하고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혁명의 이 두 가지 주요 측면과 볼셰비키의 궁극적 승리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규명하려고 시도했다… 나는 당대의 문서에 나타난 공장 노동자와 병사와 수병들의 열망을 연구하면서 이들의 관심사가 볼셰비키가 내놓은 정치, 경제, 사회 개혁 강령과 가까이 일치했던 데 반해, 다른 모든 주요 정당은 충분히 열의를 다해 의미 있는 대내적 변화와 러시아의 즉각적 종전을 추진하지 않아서 널리 불신을 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 결과, 대중의 이해를 얻음으로써 볼셰비키의 목표는 10월에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2월 혁명 기간 동안에 페트로그라드에는 1905년 혁명기간에 러시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잠시 존재했던 기관을 본뜬 노동자∙병사 소비에트(평의회)도 나타났다. 소비에트는 1917년 봄∙여름에 페트로그라드의 각 구에 설치되었으며, 소비에트와 함께 러시아 전역의 도시, 읍, 마을에서 유사한 풀뿌리 민주주의 기구가 생겨났다… 이것은 모두 합치면 임시정부보다 수적으로 더 큰 대표성을 띄었으며, 공장 노동자와 농민, 특히 병사 사이에서 충성심을 얻은 덕분에 잠재적으로는 임시정부보다 더 강력했다."
 
- A.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프롤로그>, 1976.

 
레닌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4월 테제]를 수정했든 말든,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가장 기민하게 현실에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2017년 ‘혁명’이 보여준 것처럼, 전위가 대중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대중이 소수 전위를 결국  ‘지도’한다.

 
"사실, 1917년에 볼셰비키의 증대하는 힘과 권위의 주요원천은 ‘평화(전쟁종식)∙토지(무상배분)∙빵(노동자 경영참여)!’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에서 구체화된 당 강령이 뿜어낸 자력이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의 공장 노동자와 병사, 크론시타트 수병의 지지를 얻으려는 운동을 아주 힘차고 능숙하게 벌였다. 이 집단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소비에트 안에 있는 모든 정당과 정파를 대표하고 즉각적 강화와 중요한 내부 개혁과 조속한 헌법제정회의 소집이라는 강령에 헌신하고 사회주의자로만 이루어지는 민주정부를 창출한다는 뜻이었다… 오직 볼셰비키만이 권력투쟁에서 군대가 필연적으로 지니는 결정적 의의를 간파한 듯 하다. 아마 훨씬 더 근본적으로는 볼셰비키의 경이로운 성공은 적잖이 1917년에 당이 띤 성격 덕택으로 돌릴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그 역사적 의의를 부정할 수 없는 레닌의 대담하고도 결단성 있는 지도력이나 비록 크게 과장되기는 했지만 흔히 언급되는 볼셰비키 조직의 통일과 규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 전통적 레닌주의 모델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 내부적으로 비교적 민주적이고 관용적이며 분권화한 당의 구조와 작동 방식,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당의 성격을 강조하고자 한다."
 
- A.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에필로그>, 1976.


트로츠키가 [러시아혁명사]를 맺으며 결론지은 노동자, 병사, 빈농 등 대다수 '모든 사람들'의 열망을 정치적으로 실현한 10월 혁명의 문화적 의의를 보자.


"혁명으로 파멸한 러시아 유산계급은 혁명이 러시아의 문화수준을 하락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0월 혁명이 타도한 러시아 귀족문화는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서구의 더 고상한 모델을 피상적으로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러시아 인민은 그것을 향유하지도 못했으며 그 문화는 인류의 문화적 보고에 근본적으로 기여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10월 혁명은 새로운 문화의 기초를 놓았다. 모든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즉시 국제적 의의를 획득한 것이 이 새로운 문화다. 불리한 조건과 적대세력의 공격으로 소비에트 체제가 일시적으로 타도될 수 있다고 잠시 가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10월 혁명의 지울 수 없는 자취는 인류 미래의 발전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L.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결론>, 1932.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저술로 보수적인 역사학자들의 허울 뿐인 ‘중립성’에 맞선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저술을 남겼는데 그가 대중서로 편집한 [러시아혁명 1917 – 1929](1979)은 제1장 <1917년 10월>에서 10월 혁명의 과정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고는 혁명 후 반동세력으로부터 혁명을 지켜낸 내전과 신경제정책(NEP)으로 농민의 입장을 지지했던 과정, 일국사회주의 선언과 ‘대약진’을 선포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 등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혁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혁명은 자본주의의 쇠퇴가 낳은 결과인 동시에 쇠퇴를 야기한 원인으로 볼 수도 있다."
 
- E. H. 카, [러시아혁명 1917 - 1929], <1917년 10월>, 1979.

 
이 시대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쇠퇴’이다.
 
 
(2017년 9월)
 
 
***


1. [E.H.카 러시아 혁명 1917 - 1929], E. H. 카 지음(1979), 유강은 옮김, <이데아>, 2017.
 
2.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 A. 라비노비치 지음(1976), 류한수 옮김, <책갈피>, 2017.
 
3. [러시아혁명사], L. 트로츠키 지음(1932), 볼셰비키그룹 옮김, <아고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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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 카 러시아 혁명 - 1917-1929
에드워드 H. 카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데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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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시대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자본주의 쇠퇴’이다(1709)
- 러시아혁명 100주년 : 카, [러시아혁명],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대중이 사회의 운명에 직접 개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이다… 역사 서술은 혁명 사건들의 뒤에서 일어나는 집단적 의식의 변화들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운동의 ‘자발성’이라는 자루 속에 모든 것을 처넣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이 추상적인 말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혁명은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이 말은 혁명 대중이 혁명의 법칙들을 인식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대중의 의식은 우연히 변화하지 않으며 이론적으로 설명 가능한 객관적 필연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대중의 의식은 예측 가능하며 지도가 가능하다."
 
- L.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2권과 3권 서문>, 1932.

 
러시아혁명의 주체 중 하나였던 레온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혁명은 억압받는 다수 피지배계급이 낡은 체제를 무너뜨린다는 사회법칙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적극 실천했던 볼셰비키라는 정치세력의 ‘지도’에 의해 가능했으며 다수 대중의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러시아혁명의 ‘비민주성’을 두고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고 판단한 칼 카우츠키와 계급투쟁의 운동방식으로서 대중파업의 ‘자발성’도 중시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대립하는 한편, 내부적으로 부르주아와 지주 계급 뿐만 아니라 즉각적 무장봉기에 반대했던 멘셰비키 등과의 투쟁 과정에서 혁명을 성공했고 집권 후에도 혁명을 지키기 위해 외무, 군사인민위원으로서 처절하게 내전을 치른 당사자로서는 당연한 평가일 것이다.
 
2017년은 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이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30년 만에 다수 대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종식시킨 역사적인 해이다.
2017년은 30년 전인 1987년 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독재권력을 끌어내리기까지 한 해이다.
우리 사회 동시대 민중들 덕분에 러시아혁명 또한 ‘사회주의’ 이념이나 ‘볼세비키’ 정치세력 중심보다는 ‘소비에트’라는 대중 조직의 ‘자발성’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1917년 10월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 과정을 그 해 2월 혁명부터 7월 봉기를 거쳐 8월 코르닐로프 반혁명, 10월 볼셰비키 혁명까지 르포처럼 엮은 미국의 역사가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1976)의 중심에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이 거스를 수 없는 다수 대중의 운동이자 권력의 한 축, 즉 ‘소비에트’가 있다.

 
"나의 주목표는 ‘밑으로부터의 혁명’의 발전과 1917년 2월과 10월 사이에 페트로그라드에 존재했던 각급 볼셰비키당 조직의 견해와 활동과 상황을 될 수 있는 대로 충실 하고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혁명의 이 두 가지 주요 측면과 볼셰비키의 궁극적 승리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규명하려고 시도했다… 나는 당대의 문서에 나타난 공장 노동자와 병사와 수병들의 열망을 연구하면서 이들의 관심사가 볼셰비키가 내놓은 정치, 경제, 사회 개혁 강령과 가까이 일치했던 데 반해, 다른 모든 주요 정당은 충분히 열의를 다해 의미 있는 대내적 변화와 러시아의 즉각적 종전을 추진하지 않아서 널리 불신을 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 결과, 대중의 이해를 얻음으로써 볼셰비키의 목표는 10월에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2월 혁명 기간 동안에 페트로그라드에는 1905년 혁명기간에 러시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잠시 존재했던 기관을 본뜬 노동자∙병사 소비에트(평의회)도 나타났다. 소비에트는 1917년 봄∙여름에 페트로그라드의 각 구에 설치되었으며, 소비에트와 함께 러시아 전역의 도시, 읍, 마을에서 유사한 풀뿌리 민주주의 기구가 생겨났다… 이것은 모두 합치면 임시정부보다 수적으로 더 큰 대표성을 띄었으며, 공장 노동자와 농민, 특히 병사 사이에서 충성심을 얻은 덕분에 잠재적으로는 임시정부보다 더 강력했다."
 
- A.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프롤로그>, 1976.

 
레닌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4월 테제]를 수정했든 말든,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가장 기민하게 현실에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2017년 ‘혁명’이 보여준 것처럼, 전위가 대중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대중이 소수 전위를 결국  ‘지도’한다.

 
"사실, 1917년에 볼셰비키의 증대하는 힘과 권위의 주요원천은 ‘평화(전쟁종식)∙토지(무상배분)∙빵(노동자 경영참여)!’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에서 구체화된 당 강령이 뿜어낸 자력이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의 공장 노동자와 병사, 크론시타트 수병의 지지를 얻으려는 운동을 아주 힘차고 능숙하게 벌였다. 이 집단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소비에트 안에 있는 모든 정당과 정파를 대표하고 즉각적 강화와 중요한 내부 개혁과 조속한 헌법제정회의 소집이라는 강령에 헌신하고 사회주의자로만 이루어지는 민주정부를 창출한다는 뜻이었다… 오직 볼셰비키만이 권력투쟁에서 군대가 필연적으로 지니는 결정적 의의를 간파한 듯 하다. 아마 훨씬 더 근본적으로는 볼셰비키의 경이로운 성공은 적잖이 1917년에 당이 띤 성격 덕택으로 돌릴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그 역사적 의의를 부정할 수 없는 레닌의 대담하고도 결단성 있는 지도력이나 비록 크게 과장되기는 했지만 흔히 언급되는 볼셰비키 조직의 통일과 규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 전통적 레닌주의 모델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 내부적으로 비교적 민주적이고 관용적이며 분권화한 당의 구조와 작동 방식,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당의 성격을 강조하고자 한다."
 
- A.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에필로그>, 1976.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저술로 보수적인 역사학자들의 허울 뿐인 ‘중립성’에 맞선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저술을 남겼는데 그가 대중서로 편집한 [러시아혁명 1917 – 1929](1979)은 제1장 <1917년 10월>에서 10월 혁명의 과정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고는 혁명 후 반동세력으로부터 혁명을 지켜낸 내전과 신경제정책(NEP)으로 농민의 입장을 지지했던 과정, 일국사회주의 선언과 ‘대약진’을 선포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 등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혁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혁명은 자본주의의 쇠퇴가 낳은 결과인 동시에 쇠퇴를 야기한 원인으로 볼 수도 있다."
 
- E. H. 카, [러시아혁명 1917 - 1929], <1917년 10월>, 1979.

 
이 시대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쇠퇴’이다.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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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H.카 러시아 혁명 1917 - 1929], E. H. 카 지음(1979), 유강은 옮김, <이데아>, 2017.
 
2.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 A. 라비노비치 지음(1976), 류한수 옮김, <책갈피>, 2017.
 
3. [러시아혁명사], L. 트로츠키 지음(1930), 볼셰비키그룹 옮김, <아고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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