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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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원근법'과 '인상주의'로 미술사를 돌아보다


"흔히 투시법은 서구 미술에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원근법이 유일한 투시법은 아니다. 파노프스키가 지적한 대로 그것은 가능한 많은 투시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원근법과는 다른 투시법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러시아 성상에 적용된 역원근법이다. 
르네상스 원근법은 움직이지 않는 시점을 전제한다. 러시아 성상에서는 시점이 움직인다. 이렇게 움직이는 시점으로 본 장면들을 하나로 통일시킬 때, 외려 가까이 있는 것일 수록 짧게 묘사되는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한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고전예술편>, 5장 '물구나무선 원근법'


'미학'을 대중적으로 풀어쓴 진중권이 '서양미술사'를 개괄한 대중서 4편이다. 
통시적으로 '고전예술편', '모더니즘편',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편'으로 '서양미술사'를 돌아봤던 기존 3편에 최근 '인상주의편'을 추가하였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나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등이 미술이나 예술 전문가들을 위한 학술고전 같은 성격이라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는 미술사를 처음 접하는 일반 대중들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미술의 역사이다 보니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있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두 가지 테마는 '원근법'과 '인상주의'다.

2차원 평면에 잠겨있던 고대와 중세의 그림에 3차원적 혁명을 불러온 것이 르네상스의 원근법이다. 진중권은 이 혁명이 하나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는 '고전적 원근법'에 불과하며, 실제 과학적인 사실은 여러개의 다양한 시선으로 대상을 보는 것으로서 '러시아의 역원근법'을 거쳐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알려진 폴 세잔의 '체험된 원근법'으로 풀어낸다.
즉, 우리의 안구와 지각을 통해 보이는 사물이나 대상은 하나의 고정된 시선이 아닌 다양한 시선으로 현상한다는 것이다.

미술사 또한 인류 역사처럼 '부정의 부정', 끊임없는 변증법적 혁명의 과정이다.
이런 미술사를 관통하는 첫번째 테마가 바로 '원근법'인 것이다.

'고전예술편'은 파노프스키, 뵐플린 같은 저명한 미술비평가들의 논문을 한편 한편 소개하는 방식으로 모더니즘 이전까지를 정리한다.
유시민도 올해 신작 [역사의 역사]에서 헤로도토스, 사마천, 마르크스, 카, 박은식과 신채호,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아랍 역사가 이븐 할둔까지의 역사서를 소개하면서 비슷한 서술방식를 취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서술방식이 좋아 진중권의 4편 중 ‘고전예술편’을 가장 추천한다.

역사도 그렇지만 미술사라는 것이 갖가지 '예술사조'로 도식화될 수 없다. 곰브리치나 하우저도, 진중권은 특히 그러한 도식화를 경계하고 있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전문분야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런 도식화가 불가피하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주로 '사실주의(또는 ‘리얼리즘’)를, 곰브리치는 '모더니즘'을, 하우저는 '낭만주의'를 분명하게 지지하는데, 진중권이 미술사를 읽는 두번째 테마는 '인상주의'다.

과학과 산업의 혁명적 발전을 배경으로 기존 '고전주의'를 부정한 쿠르베의 '사실주의'로부터 시작하여 진중권은 대상의 객관적 묘사에 복무하는 '사실주의'보다는 인간의 지각에 묘사된 사물을 그린 '인상주의'에 주목한다.

특히, 진중권은 '인상주의'를 넘어서 현대미술을 시작하는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폴 세잔에게서 현대미술의 '혁명'을 본다.

고전적 미술로부터 "색채를 해방시킨 '야수주의' 앙리 마티스"와 "형태를 해방시킨 '입체주의' 파블로 피카소" 둘 다 '후기 인상주의' 폴 세잔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진중권은 폴 세잔을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로 규정한다.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로서... 세잔의 작업은 고전미술이 현대미술로 이행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그의 화면에서 발견되는 '색채의 놀라운 풍부함'과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형태, '고전적 원근법'과 다른 '체험된 원근법'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초석이 된다. 마티스는 그에게서 색채의 효과를, 피카소는 그에게서 형태의 기하학적 단순화와 고전적 원근법의 파괴를 배웠다. 현대미술의 두 위대한 이정표 모두 세잔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그 때문이다...
마티스와 드랭의 야수주의,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 현대미술의 두 이정표도 세잔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거나, 혹은 그 탄생이 뒤로 한참 늦춰졌을 것이다. 세잔은 마지막 고전주의자이자 최초의 현대주의자였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 11~12장 '세잔'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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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사
레온 트로츠키 지음, 볼셰비키그룹 옮김 / 아고라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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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시대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자본주의 쇠퇴’이다(1709)
- 러시아혁명 100주년 : 카, [러시아혁명],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대중이 사회의 운명에 직접 개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이다… 역사 서술은 혁명 사건들의 뒤에서 일어나는 집단적 의식의 변화들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운동의 ‘자발성’이라는 자루 속에 모든 것을 처넣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이 추상적인 말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혁명은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이 말은 혁명 대중이 혁명의 법칙들을 인식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대중의 의식은 우연히 변화하지 않으며 이론적으로 설명 가능한 객관적 필연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대중의 의식은 예측 가능하며 지도가 가능하다."
 
- L.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2권과 3권 서문>, 1932.

 
러시아혁명의 주체 중 하나였던 레온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혁명은 억압받는 다수 피지배계급이 낡은 체제를 무너뜨린다는 사회법칙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적극 실천했던 볼셰비키라는 정치세력의 ‘지도’에 의해 가능했으며 다수 대중의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러시아혁명의 ‘비민주성’을 두고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고 판단한 칼 카우츠키와 계급투쟁의 운동방식으로서 대중파업의 ‘자발성’도 중시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대립하는 한편, 내부적으로 부르주아와 지주 계급 뿐만 아니라 즉각적 무장봉기에 반대했던 멘셰비키 등과의 투쟁 과정에서 혁명을 성공했고 집권 후에도 혁명을 지키기 위해 외무, 군사인민위원으로서 처절하게 내전을 치른 당사자로서는 당연한 평가일 것이다.
 
2017년은 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이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30년 만에 다수 대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종식시킨 역사적인 해이다.
2017년은 30년 전인 1987년 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독재권력을 끌어내리기까지 한 해이다.
우리 사회 동시대 민중들 덕분에 러시아혁명 또한 ‘사회주의’ 이념이나 ‘볼세비키’ 정치세력 중심보다는 ‘소비에트’라는 대중 조직의 ‘자발성’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1917년 10월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 과정을 그 해 2월 혁명부터 7월 봉기를 거쳐 8월 코르닐로프 반혁명, 10월 볼셰비키 혁명까지 르포처럼 엮은 미국의 역사가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1976)의 중심에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이 거스를 수 없는 다수 대중의 운동이자 권력의 한 축, 즉 ‘소비에트’가 있다.

 
"나의 주목표는 ‘밑으로부터의 혁명’의 발전과 1917년 2월과 10월 사이에 페트로그라드에 존재했던 각급 볼셰비키당 조직의 견해와 활동과 상황을 될 수 있는 대로 충실 하고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혁명의 이 두 가지 주요 측면과 볼셰비키의 궁극적 승리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규명하려고 시도했다… 나는 당대의 문서에 나타난 공장 노동자와 병사와 수병들의 열망을 연구하면서 이들의 관심사가 볼셰비키가 내놓은 정치, 경제, 사회 개혁 강령과 가까이 일치했던 데 반해, 다른 모든 주요 정당은 충분히 열의를 다해 의미 있는 대내적 변화와 러시아의 즉각적 종전을 추진하지 않아서 널리 불신을 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 결과, 대중의 이해를 얻음으로써 볼셰비키의 목표는 10월에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2월 혁명 기간 동안에 페트로그라드에는 1905년 혁명기간에 러시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잠시 존재했던 기관을 본뜬 노동자∙병사 소비에트(평의회)도 나타났다. 소비에트는 1917년 봄∙여름에 페트로그라드의 각 구에 설치되었으며, 소비에트와 함께 러시아 전역의 도시, 읍, 마을에서 유사한 풀뿌리 민주주의 기구가 생겨났다… 이것은 모두 합치면 임시정부보다 수적으로 더 큰 대표성을 띄었으며, 공장 노동자와 농민, 특히 병사 사이에서 충성심을 얻은 덕분에 잠재적으로는 임시정부보다 더 강력했다."
 
- A.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프롤로그>, 1976.

 
레닌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4월 테제]를 수정했든 말든,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가장 기민하게 현실에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2017년 ‘혁명’이 보여준 것처럼, 전위가 대중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대중이 소수 전위를 결국  ‘지도’한다.

 
"사실, 1917년에 볼셰비키의 증대하는 힘과 권위의 주요원천은 ‘평화(전쟁종식)∙토지(무상배분)∙빵(노동자 경영참여)!’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에서 구체화된 당 강령이 뿜어낸 자력이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의 공장 노동자와 병사, 크론시타트 수병의 지지를 얻으려는 운동을 아주 힘차고 능숙하게 벌였다. 이 집단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소비에트 안에 있는 모든 정당과 정파를 대표하고 즉각적 강화와 중요한 내부 개혁과 조속한 헌법제정회의 소집이라는 강령에 헌신하고 사회주의자로만 이루어지는 민주정부를 창출한다는 뜻이었다… 오직 볼셰비키만이 권력투쟁에서 군대가 필연적으로 지니는 결정적 의의를 간파한 듯 하다. 아마 훨씬 더 근본적으로는 볼셰비키의 경이로운 성공은 적잖이 1917년에 당이 띤 성격 덕택으로 돌릴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그 역사적 의의를 부정할 수 없는 레닌의 대담하고도 결단성 있는 지도력이나 비록 크게 과장되기는 했지만 흔히 언급되는 볼셰비키 조직의 통일과 규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 전통적 레닌주의 모델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 내부적으로 비교적 민주적이고 관용적이며 분권화한 당의 구조와 작동 방식,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당의 성격을 강조하고자 한다."
 
- A.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에필로그>, 1976.


트로츠키가 [러시아혁명사]를 맺으며 결론지은 노동자, 병사, 빈농 등 대다수 '모든 사람들'의 열망을 정치적으로 실현한 10월 혁명의 문화적 의의를 보자.


"혁명으로 파멸한 러시아 유산계급은 혁명이 러시아의 문화수준을 하락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0월 혁명이 타도한 러시아 귀족문화는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서구의 더 고상한 모델을 피상적으로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러시아 인민은 그것을 향유하지도 못했으며 그 문화는 인류의 문화적 보고에 근본적으로 기여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10월 혁명은 새로운 문화의 기초를 놓았다. 모든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즉시 국제적 의의를 획득한 것이 이 새로운 문화다. 불리한 조건과 적대세력의 공격으로 소비에트 체제가 일시적으로 타도될 수 있다고 잠시 가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10월 혁명의 지울 수 없는 자취는 인류 미래의 발전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L.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결론>, 1932.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저술로 보수적인 역사학자들의 허울 뿐인 ‘중립성’에 맞선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저술을 남겼는데 그가 대중서로 편집한 [러시아혁명 1917 – 1929](1979)은 제1장 <1917년 10월>에서 10월 혁명의 과정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고는 혁명 후 반동세력으로부터 혁명을 지켜낸 내전과 신경제정책(NEP)으로 농민의 입장을 지지했던 과정, 일국사회주의 선언과 ‘대약진’을 선포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 등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혁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혁명은 자본주의의 쇠퇴가 낳은 결과인 동시에 쇠퇴를 야기한 원인으로 볼 수도 있다."
 
- E. H. 카, [러시아혁명 1917 - 1929], <1917년 10월>, 1979.

 
이 시대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쇠퇴’이다.
 
 
(2017년 9월)
 
 
***


1. [E.H.카 러시아 혁명 1917 - 1929], E. H. 카 지음(1979), 유강은 옮김, <이데아>, 2017.
 
2.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 A. 라비노비치 지음(1976), 류한수 옮김, <책갈피>, 2017.
 
3. [러시아혁명사], L. 트로츠키 지음(1932), 볼셰비키그룹 옮김, <아고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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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 카 러시아 혁명 - 1917-1929
에드워드 H. 카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데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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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시대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자본주의 쇠퇴’이다(1709)
- 러시아혁명 100주년 : 카, [러시아혁명],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대중이 사회의 운명에 직접 개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이다… 역사 서술은 혁명 사건들의 뒤에서 일어나는 집단적 의식의 변화들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운동의 ‘자발성’이라는 자루 속에 모든 것을 처넣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이 추상적인 말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혁명은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이 말은 혁명 대중이 혁명의 법칙들을 인식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대중의 의식은 우연히 변화하지 않으며 이론적으로 설명 가능한 객관적 필연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대중의 의식은 예측 가능하며 지도가 가능하다."
 
- L.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2권과 3권 서문>, 1932.

 
러시아혁명의 주체 중 하나였던 레온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혁명은 억압받는 다수 피지배계급이 낡은 체제를 무너뜨린다는 사회법칙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적극 실천했던 볼셰비키라는 정치세력의 ‘지도’에 의해 가능했으며 다수 대중의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러시아혁명의 ‘비민주성’을 두고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고 판단한 칼 카우츠키와 계급투쟁의 운동방식으로서 대중파업의 ‘자발성’도 중시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대립하는 한편, 내부적으로 부르주아와 지주 계급 뿐만 아니라 즉각적 무장봉기에 반대했던 멘셰비키 등과의 투쟁 과정에서 혁명을 성공했고 집권 후에도 혁명을 지키기 위해 외무, 군사인민위원으로서 처절하게 내전을 치른 당사자로서는 당연한 평가일 것이다.
 
2017년은 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이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30년 만에 다수 대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종식시킨 역사적인 해이다.
2017년은 30년 전인 1987년 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독재권력을 끌어내리기까지 한 해이다.
우리 사회 동시대 민중들 덕분에 러시아혁명 또한 ‘사회주의’ 이념이나 ‘볼세비키’ 정치세력 중심보다는 ‘소비에트’라는 대중 조직의 ‘자발성’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1917년 10월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 과정을 그 해 2월 혁명부터 7월 봉기를 거쳐 8월 코르닐로프 반혁명, 10월 볼셰비키 혁명까지 르포처럼 엮은 미국의 역사가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1976)의 중심에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이 거스를 수 없는 다수 대중의 운동이자 권력의 한 축, 즉 ‘소비에트’가 있다.

 
"나의 주목표는 ‘밑으로부터의 혁명’의 발전과 1917년 2월과 10월 사이에 페트로그라드에 존재했던 각급 볼셰비키당 조직의 견해와 활동과 상황을 될 수 있는 대로 충실 하고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혁명의 이 두 가지 주요 측면과 볼셰비키의 궁극적 승리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규명하려고 시도했다… 나는 당대의 문서에 나타난 공장 노동자와 병사와 수병들의 열망을 연구하면서 이들의 관심사가 볼셰비키가 내놓은 정치, 경제, 사회 개혁 강령과 가까이 일치했던 데 반해, 다른 모든 주요 정당은 충분히 열의를 다해 의미 있는 대내적 변화와 러시아의 즉각적 종전을 추진하지 않아서 널리 불신을 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 결과, 대중의 이해를 얻음으로써 볼셰비키의 목표는 10월에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2월 혁명 기간 동안에 페트로그라드에는 1905년 혁명기간에 러시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잠시 존재했던 기관을 본뜬 노동자∙병사 소비에트(평의회)도 나타났다. 소비에트는 1917년 봄∙여름에 페트로그라드의 각 구에 설치되었으며, 소비에트와 함께 러시아 전역의 도시, 읍, 마을에서 유사한 풀뿌리 민주주의 기구가 생겨났다… 이것은 모두 합치면 임시정부보다 수적으로 더 큰 대표성을 띄었으며, 공장 노동자와 농민, 특히 병사 사이에서 충성심을 얻은 덕분에 잠재적으로는 임시정부보다 더 강력했다."
 
- A.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프롤로그>, 1976.

 
레닌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4월 테제]를 수정했든 말든,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가장 기민하게 현실에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2017년 ‘혁명’이 보여준 것처럼, 전위가 대중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대중이 소수 전위를 결국  ‘지도’한다.

 
"사실, 1917년에 볼셰비키의 증대하는 힘과 권위의 주요원천은 ‘평화(전쟁종식)∙토지(무상배분)∙빵(노동자 경영참여)!’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에서 구체화된 당 강령이 뿜어낸 자력이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의 공장 노동자와 병사, 크론시타트 수병의 지지를 얻으려는 운동을 아주 힘차고 능숙하게 벌였다. 이 집단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소비에트 안에 있는 모든 정당과 정파를 대표하고 즉각적 강화와 중요한 내부 개혁과 조속한 헌법제정회의 소집이라는 강령에 헌신하고 사회주의자로만 이루어지는 민주정부를 창출한다는 뜻이었다… 오직 볼셰비키만이 권력투쟁에서 군대가 필연적으로 지니는 결정적 의의를 간파한 듯 하다. 아마 훨씬 더 근본적으로는 볼셰비키의 경이로운 성공은 적잖이 1917년에 당이 띤 성격 덕택으로 돌릴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그 역사적 의의를 부정할 수 없는 레닌의 대담하고도 결단성 있는 지도력이나 비록 크게 과장되기는 했지만 흔히 언급되는 볼셰비키 조직의 통일과 규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 전통적 레닌주의 모델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 내부적으로 비교적 민주적이고 관용적이며 분권화한 당의 구조와 작동 방식,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당의 성격을 강조하고자 한다."
 
- A.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에필로그>, 1976.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저술로 보수적인 역사학자들의 허울 뿐인 ‘중립성’에 맞선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저술을 남겼는데 그가 대중서로 편집한 [러시아혁명 1917 – 1929](1979)은 제1장 <1917년 10월>에서 10월 혁명의 과정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고는 혁명 후 반동세력으로부터 혁명을 지켜낸 내전과 신경제정책(NEP)으로 농민의 입장을 지지했던 과정, 일국사회주의 선언과 ‘대약진’을 선포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 등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혁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혁명은 자본주의의 쇠퇴가 낳은 결과인 동시에 쇠퇴를 야기한 원인으로 볼 수도 있다."
 
- E. H. 카, [러시아혁명 1917 - 1929], <1917년 10월>, 1979.

 
이 시대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쇠퇴’이다.
 
 
(2017년 9월)
 
 
***


1. [E.H.카 러시아 혁명 1917 - 1929], E. H. 카 지음(1979), 유강은 옮김, <이데아>, 2017.
 
2.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 A. 라비노비치 지음(1976), 류한수 옮김, <책갈피>, 2017.
 
3. [러시아혁명사], L. 트로츠키 지음(1930), 볼셰비키그룹 옮김, <아고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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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 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지음, 류한수 옮김 / 책갈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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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시대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자본주의 쇠퇴’이다(1709)
- 러시아혁명 100주년 : 카, [러시아혁명],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대중이 사회의 운명에 직접 개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이다… 역사 서술은 혁명 사건들의 뒤에서 일어나는 집단적 의식의 변화들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운동의 ‘자발성’이라는 자루 속에 모든 것을 처넣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이 추상적인 말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혁명은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이 말은 혁명 대중이 혁명의 법칙들을 인식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대중의 의식은 우연히 변화하지 않으며 이론적으로 설명 가능한 객관적 필연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대중의 의식은 예측 가능하며 지도가 가능하다."
 
- L.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2권과 3권 서문>, 1932.

 
러시아혁명의 주체 중 하나였던 레온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혁명은 억압받는 다수 피지배계급이 낡은 체제를 무너뜨린다는 사회법칙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적극 실천했던 볼셰비키라는 정치세력의 ‘지도’에 의해 가능했으며 다수 대중의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러시아혁명의 ‘비민주성’을 두고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고 판단한 칼 카우츠키와 계급투쟁의 운동방식으로서 대중파업의 ‘자발성’도 중시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대립하는 한편, 내부적으로 부르주아와 지주 계급 뿐만 아니라 즉각적 무장봉기에 반대했던 멘셰비키 등과의 투쟁 과정에서 혁명을 성공했고 집권 후에도 혁명을 지키기 위해 외무, 군사인민위원으로서 처절하게 내전을 치른 당사자로서는 당연한 평가일 것이다.
 
2017년은 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이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30년 만에 다수 대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종식시킨 역사적인 해이다.
2017년은 30년 전인 1987년 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독재권력을 끌어내리기까지 한 해이다.
우리 사회 동시대 민중들 덕분에 러시아혁명 또한 ‘사회주의’ 이념이나 ‘볼세비키’ 정치세력 중심보다는 ‘소비에트’라는 대중 조직의 ‘자발성’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1917년 10월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 과정을 그 해 2월 혁명부터 7월 봉기를 거쳐 8월 코르닐로프 반혁명, 10월 볼셰비키 혁명까지 르포처럼 엮은 미국의 역사가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1976)의 중심에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이 거스를 수 없는 다수 대중의 운동이자 권력의 한 축, 즉 ‘소비에트’가 있다.

 
"나의 주목표는 ‘밑으로부터의 혁명’의 발전과 1917년 2월과 10월 사이에 페트로그라드에 존재했던 각급 볼셰비키당 조직의 견해와 활동과 상황을 될 수 있는 대로 충실 하고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혁명의 이 두 가지 주요 측면과 볼셰비키의 궁극적 승리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규명하려고 시도했다… 나는 당대의 문서에 나타난 공장 노동자와 병사와 수병들의 열망을 연구하면서 이들의 관심사가 볼셰비키가 내놓은 정치, 경제, 사회 개혁 강령과 가까이 일치했던 데 반해, 다른 모든 주요 정당은 충분히 열의를 다해 의미 있는 대내적 변화와 러시아의 즉각적 종전을 추진하지 않아서 널리 불신을 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 결과, 대중의 이해를 얻음으로써 볼셰비키의 목표는 10월에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2월 혁명 기간 동안에 페트로그라드에는 1905년 혁명기간에 러시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잠시 존재했던 기관을 본뜬 노동자∙병사 소비에트(평의회)도 나타났다. 소비에트는 1917년 봄∙여름에 페트로그라드의 각 구에 설치되었으며, 소비에트와 함께 러시아 전역의 도시, 읍, 마을에서 유사한 풀뿌리 민주주의 기구가 생겨났다… 이것은 모두 합치면 임시정부보다 수적으로 더 큰 대표성을 띄었으며, 공장 노동자와 농민, 특히 병사 사이에서 충성심을 얻은 덕분에 잠재적으로는 임시정부보다 더 강력했다."
 
- A.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프롤로그>, 1976.

 
레닌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4월 테제]를 수정했든 말든,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가장 기민하게 현실에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2017년 ‘혁명’이 보여준 것처럼, 전위가 대중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대중이 소수 전위를 결국  ‘지도’한다.

 
"사실, 1917년에 볼셰비키의 증대하는 힘과 권위의 주요원천은 ‘평화(전쟁종식)∙토지(무상배분)∙빵(노동자 경영참여)!’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에서 구체화된 당 강령이 뿜어낸 자력이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의 공장 노동자와 병사, 크론시타트 수병의 지지를 얻으려는 운동을 아주 힘차고 능숙하게 벌였다. 이 집단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소비에트 안에 있는 모든 정당과 정파를 대표하고 즉각적 강화와 중요한 내부 개혁과 조속한 헌법제정회의 소집이라는 강령에 헌신하고 사회주의자로만 이루어지는 민주정부를 창출한다는 뜻이었다… 오직 볼셰비키만이 권력투쟁에서 군대가 필연적으로 지니는 결정적 의의를 간파한 듯 하다. 아마 훨씬 더 근본적으로는 볼셰비키의 경이로운 성공은 적잖이 1917년에 당이 띤 성격 덕택으로 돌릴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그 역사적 의의를 부정할 수 없는 레닌의 대담하고도 결단성 있는 지도력이나 비록 크게 과장되기는 했지만 흔히 언급되는 볼셰비키 조직의 통일과 규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 전통적 레닌주의 모델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 내부적으로 비교적 민주적이고 관용적이며 분권화한 당의 구조와 작동 방식,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당의 성격을 강조하고자 한다."
 
- A.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에필로그>, 1976.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저술로 보수적인 역사학자들의 허울 뿐인 ‘중립성’에 맞선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저술을 남겼는데 그가 대중서로 편집한 [러시아혁명 1917 – 1929](1979)은 제1장 <1917년 10월>에서 10월 혁명의 과정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고는 혁명 후 반동세력으로부터 혁명을 지켜낸 내전과 신경제정책(NEP)으로 농민의 입장을 지지했던 과정, 일국사회주의 선언과 ‘대약진’을 선포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 등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혁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혁명은 자본주의의 쇠퇴가 낳은 결과인 동시에 쇠퇴를 야기한 원인으로 볼 수도 있다."
 
- E. H. 카, [러시아혁명 1917 - 1929], <1917년 10월>, 1979.

 
이 시대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쇠퇴’이다.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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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H.카 러시아 혁명 1917 - 1929], E. H. 카 지음(1979), 유강은 옮김, <이데아>, 2017.
 
2.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 A. 라비노비치 지음(1976), 류한수 옮김, <책갈피>, 2017.
 
3. [러시아혁명사], L. 트로츠키 지음(1930), 볼셰비키그룹 옮김, <아고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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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 세계사 즐거운 지식 (비룡소 청소년) 17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클리퍼드 하퍼 그림, 박민수 옮김 / 비룡소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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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독서모임 - 시즌 1 : '곰.세']

우리집 삼남매가 다 모여 독서모임을 하면 좋겠으나,
셋째 애기딸이 클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오빠언니가 이미 부모와 등지는 나이가 될까 우려되어 급시작한 '우리집 독서모임'.

[곰브리치 세계사]를 함께 읽으며 '역사'를 주제로 할 시즌 1 '곰.세'에서 막내 애기딸은 참관인 또는 훼방꾼으로 참여할 듯 한데 일단 8월 첫 모임에서는,

1. 책의 구성과 독서 방식 : '서론-본론-결론' 구조와 목차 먼저 읽기
2. '역사' - 시즌 1 : '변화 및 진화, 상호 발전하는 만물의 운동'이자 '세계를 보는 거울'로서의 '역사'
3. '철학' - 시즌 2 : '만물 운동의 본질 및 법칙과 경향인 진리를 추구하는 사유방식'으로서의 '철학'
4. '역사'와 '철학'을 토대로 어떻게 독서를 할 것인가
5. 향후 '우리집 독서모임' 운영 방안

등에 대한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토론을 하고자 했으나 그딴건 관심없고 머릿속에는 온갖 게임생각만 가득차 한시도 집중 안되시는 첫째 아드님과 자유분방하다 못해 이야기 흐름을 끊기 아니면 그림낙서에 여념 없으신 둘째 언니딸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리고, 셋째 애기딸은 예상대로 훼방꾼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시다.

2017년 8월 5일 (토), 
어쨌든, 
[곰브리치 세계사] 서론격인 1장 <옛날 옛적에>를 간신히 함께 읽고 시즌 1 첫모임을 마무리하다.

***

[곰브리치 세계사](1935) -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간략한 세계사

오스트리아 출신 예술사가 에른스트 요제프 곰브리치가 박사학위를 받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던 1935년에 영어로 된 '어린이를 위한 역사책'의 독일어 번역을 의뢰받았는데, 본인이 더 잘 쓸 수 있다고 판단하여 출간한 어린이 역사책이 [곰브리치 세계사]이다. 

곰브리치가 빈 대학에서 예술사와 고고학 박사학위 내용을 지인의 자녀에게 쉽게 설명하던 것이 동기가 되기도 했다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쓰게된 루이스 캐럴과 비슷한 모티브라 정겹다.

서장에 해당되는 1장 '옛날 옛적에'는 역사 전반에 대한 이야기, 
2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들'은 선사시대,
3장부터 17장까지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인도, 증국, 로마 문명 등 고대,
18장부터 24장까지는 민족대이동과 로마 제국의 몰락 및 중세시대,
25장부터 35장까지 도시의 생성과 시민의 등장, 혁명의 근대,
36장부터 결론이 포함된  39장까지는 현대의 산업혁명과 제국주의, 1차 세계대전 종전까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이 집필되고 첫 출간된 시기는 1935~1936년이었고 곰브리치는 39장에서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며 끝을 맺었으나, 이후 2차 세계대전을 겪은 그는 '후기'에 해당하는 40장 '나 자신이 체험한 세계사의 한 부분 - 회고'를 통해 과학의 진보가 더 나은 미래를 담보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세계전쟁이 보여준 점 등의 이야기를 첨부한다.

곰브리치 본인이 서양인이다 보니 유럽사 중심의 세계사라는 한계는 있으나,
어린이와 청소년이 문명 발상과 종교, 이념 등을 포함하여 간략하게 세계 인류의 역사 흐름을 이해하는데 손색이 없는 '어린이 역사책'의 고전이다. 우리 자녀들과 두고두고 한장 한장 곱씹어 읽을 만한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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