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좌파의 상상력 :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 컬리지언총서 6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이재원 이종태 옮김 / 이후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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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신좌파의 상상력 -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조지 카치아피카스, 이재원/이종태 옮김, <이후>, 1999.


"만약 1968년이 그 누군가의 해였다면, 바로 이 해는 학생들의 해였다. 베이징에서 프라하와 파리를 거쳐 버클리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은 1968년을 특징짓는 운동들의 도화선이 됐다... 학생들은 대중 동원을 불러 일으키고 혁명적 조직의 초기 형성을 주도하는 등, '민족해방' 운동 내에서 오랫동안 중요한역할을 담당해 왔다... 1968년의 학생운동에서 돋보이는 점은 이들의 행동이 정치적으로 변해갔던 단계이다... 자기 이해(경제투쟁)에서 보편적 이해(정치투쟁)로의 전환(에로스 효과의 또 다른 차원)이 1968년에 발생한 일이었으며, 모든 이들이 이를 분명히 목격했다... 1968년에 학생들이 전개한 활동이직접적으로는 정치적이었다면, 이들의 행동이 가져온 결과는... 일상생활에 대한 가정들(소비주의에 대한 문화적 순응, 여성억압, 소수집단과 젊은이들에 대한 차별)을 의문에 부치면서, 학생운동은 전세계적인 정치적 반란을 동반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됐던 '문화적 자각'을 전세계적 차원에서 촉진... 핵심부와 주변부 그리고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학생운동은 기존의 현실과 날카롭게 대비되는 전세계적 열망을 '자율적으로' 일치단결시켰다."
- [신좌파의 상상력], 조지 카치아피카스, <1968년의 사회운동들>

[신좌파의 상상력]은 미국의 인문사회과학자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박사학위 논문이라고 한다. 그가  이 논문의 서두에 "스승이자 친구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에게"라는 헌사를 바친 것을 보면 독일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일군의 마르크스주의 일파인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제자였던 듯 하다. 동서냉전의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영구적 '부정의 변증법', '끝없는 혁명'의 편인 것이다.

카치아피카스는 프랑스의 '1968년 5월 혁명'과 미국의 '1970년 5월 혁명'을 주로 다루는데, 국제적 사건의 기원은 1961년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의 결성과 1964년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1968년 베트남의 대대적 '구정공세'로 수세에 몰린 미국의 군대 증파로 인한 '반전운동'의 확산이다. 그러나 그 물적토대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와 비록 '노동계급 혁명'을 이루었음에도 '혁명'을 배신한 '스탈린주의'였다. '68 혁명' 기간에 '반스탈린적 마오(모택동)주의'와 '영구혁명'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발호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들은 기존의 '(구)좌파'와 차별화되면서 '신좌파'로 명명된다.


"(1968년) 5월은 경제적 해방을 위한 사회적 운동과 거대한 문화적 반란이 융합됐다는 특징이 두드려졌다... 사회주의적 저항이라는 오랜 전통 내에서 5월의 사건들에 새로운 성격을 부여한 것은, 바로 대규모의 사회운동 내에서 문화적 반란과 정치적 반란이 결합됐다는 사실이었다... 역사는 자신을 반복할지 모르지만,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는 아니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소극(희극)'으로. 물론, 다음과 같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첫 번째는 '에로스'로, 두 번째는 '카오스'로."
- [신좌파의 상상력], <프랑스 신좌파, 1968년 5월>

'에로스'는 '로고스' 즉, '이성' 지배에 대항한 '감성'이나 '욕망' 등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카치아피카스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마르쿠제에 의하면 '이성 지배'의 극단적 반대급부로서 프로이트식의 '성적 욕망'과는 다른 '인간 본성'인데, 동양식으로 보면 공자의 '인'이다. '인'의 정치는, 인간의 '어진 본성' 또는 '인류애'를 실현하는 정치이며, 이것이 서양 '68 혁명'의 '에로스'의 정치와 맞닿는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일상 혁명'으로서 '신좌파'의 '68 혁명'은 일단의 '실패'로 귀결되는데, 새로운 '상상력'에 기반했던 '일상 혁명' 의제들이 기존 의회정치에 포섭되면서 진보적이고 급진적 정치는 '사표'가 되고, '학생운동가'들의 운동이 '직업화'되고 이전의 '수단'이 '목적'으로 전환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가속된다. 체제 변혁의 '거대 담론'은 '가부장제 혁파', '군축'과 '젠더', '세대' 등의 '부문(운동) 담론'으로 분화된다. 
영구적인 '일상 혁명'의 반복 속에서 1968년도는 '에로스'로, 이후의 반복은 '카오스'로 보일 수 있겠다.


"... '문화 혁명'의 자동적 발생이라는 초월적 믿음(일단 경제가 변혁된다면, 사회의 나머지 부분들도 곧 따라 변할 것이라는)... 즉 지난 60년 동안의 실천 속에서 완전히 그 신용이 상실된 이론... 하지만 이와 동시에, 철저한 '정치 혁명'이 사회를 철저히 변혁시키는 데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잊어서도 안된다."
- [신좌파의 상상력], <신좌파의 정치적 유산>

국가독점자본주의가 계속 혁신되고 현대화되는 과정에서, 지식인 노동자와 관료주의가 강화되고 기업의 경제영역에도 확산되면서 기존의 '프롤레타리아'는 분화되고 이간된다. 이러한 계급의 분화 속에서 [신좌파의 상상력]의 마지막 질문은 '혁명의 주체'에 대한 그것이다. 또한 다양해진 '혁명의 주체들'에 의해 수행되는 "필수적인 정치 혁명"의 중요성 또한 강조된다.
정치경제적인 '물적 토대'와  문화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상부 구조'는 여전히 상호 영향을 미치며, 결국 더욱 근본적인 것은 '경제'이고 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규정된 노동자 계급의 변화에 덧붙여, '혁명적 주체'가 스스로를 구성해 나아가는 방법상의차원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신좌파'가 던져준 유산들 중 하나는, '혁명적 주체'의 형성이 객관적으로규정된 생산 범주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역사적 통찰이다. '대자적 계급(부르주아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 같은 상대적 계급 각성)'의 형성은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민족이 공장 내에서 경제적 착취를 당하는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억압 및 정치적 지배를 겪는 차원에서도,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차원 모두에서 발생한다. 현대 세계에서 원자화된 개인이 '혁명적 주체'로 변형된 사례에는 제3세계의 민족해방 운동은 물론이고, 학생과 여성 및 공동체, 그리고 특히 중요하게는 소수 민족들 사이에서 발생한 운동도 포함된다."
- [신좌파의 상상력], <신좌파의 정치적 유산>

'신좌파'는 분화된 '혁명적 주체'라는 '정치적 유산'을 남겼다. 일체의 모든 '억압'에 맞서는 다양한 '혁명 주체'들의 영구적이고 일상적인 '혁명'이 1968년'신좌파'의 유산이며, 이를 끊임없이 추동하는 것이 바로 꺾이지 않는 다양한 영역에서의 '상상력'이다.


"너희에게 베트남 동지들을 멋대로 죽일 권리가 있다면, 
우리에게도 너희를 멋대로 죽일 권리가 있다.
...
너희에게 오키나와 동지들을 총검으로 찌를 권리가있다면,
우리에게도 너희를 총검으로 찌를 권리가 있다."
-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군사혁명위원회, '전쟁 선언' 중 / [적군파],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재인용

한편, 1968년 유럽과 1970년의 아메리카, 일본을 휩쓴 '학생운동'은 1968년 일본의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 세대를 양산하는데, 특히 일본 '전공투' 세대의 교조적 '섹트'인 '적군파'는 독일어 '분트(공산주의자동맹)를 모체로 하여 1972년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 테러' 등을 통해 전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일본 내부에서는 반자본주의 '무장 투쟁' 공동체로서 1970~1972년 '아사마 산장 농성'과 같은 폐쇄된 조직 내 살인과 숙청, 비극적 몰살 등의 엽기 행각으로 '사이비 종교단'과 같은 신비주의적 관심도 불러 일으킨 바 있다. '적군파' 초기 멤버이자 '일본 적군'의 여성 지도자 시게노부 후사코는 2000년부터 '전향'을 거부한 채 20년째 복역 중이고, 역시 일본 '전공투 세대'인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는 '허무주의 또는 염세주의적 세계관'을 소설화하는데, 일례로 하루키의 [1Q84]에  등장하는 변태적이고 이단적인 '종교단체'의 모티브 또한 '전공투'의 '좌파 섹터' '적군파'다.
여담으로, 1972년 '마징가 Z' 원작 만화의 '선과 악'의 이분법을 허무는 염세적 세계관 또한 '신좌파'의 영향을 받은 작가 나가이 고의 '상상력' 때문 아니겠는가.

(2020년 3월 21일)

***

1. [신좌파의 상상력 -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조지 카치아피카스, 이재원/이종태 옮김, <이후>, 1999.

2. [적군파 - 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임정은 옮김, <교양인>, 2013.

3.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2009.

4. [이성과 혁명](1941),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김현일/윤길순 옮김, <중원문화>,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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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전 雙典 - 삼국지와 수호전은 어떻게 동양을 지배했는가
류짜이푸 지음, 임태홍.한순자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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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와 수호전은 어떻게 동양을 지배했는가"
- [쌍전(雙典)], 류짜이푸, 임태홍/한순자 옮김, <글항아리>, 2012.


"이 책의 주제는 '쌍전(雙典)', 즉 두 권의 경전에 대한 비판이다. 두 권의 경전이란 중국 문학사에서 대표적인 소설로 꼽히는 [수호전]과 [삼국지]를 말한다. 여기에서 '비판'이라는 말은 '문화비판'을 가리키는 것으로 가치관에 대한 비판이며 통상적인 '문학비평'이 아니다.
'문화비판'과 '문학비평'은 그 개념이 서로 다르다. '문학비평'의 대상은 문학작품이다... 한편 '문화비판'은 문학작품 자체에 포함되어 있는 문화적인 인식을 다룬다. 그것은 단지 내용하고만 관련된다... 지금 [수호전]과 [삼국지]에 대해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소설들의 핵심적인 가치관과 인식이다...
우리는 [삼국지]와 [수호전]의 재기발랄함과 예술적인 매력에 스며 있는 '독기'와 '피비린내'를 거부할수 있다. 가치관의 측면에서 지적하자면 이 두 걸작은 '대재난의 책'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폭력을 숭배'하고, 또 한편으로는 '권모술수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정말 두려운 것은 이들 작품이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여전히 영향을 미쳐 사람들의 마음을 파괴하며 잠재의식을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두 소설은 중국인에게 '지옥의 문'인 것이다."
- [쌍전], 류짜이푸, <들어가는 말>

1989년 중국 '천안문 사태'로 공산당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아 해외 망명한 중국사회과학원 전 연구원 류짜이푸는 2012년 [쌍전]을 통해 [수호전]과 [삼국지]가 지금껏 중국인들의 정신을 파괴해 왔다며, "문학적으로는 매우 걸출하고 아주 재미있는 두 경전"을 "문화적으로 비판"한다.
간략히 요약하면, [수호전]은 "폭력을 숭배"하고 [삼국지]는 "권모술수를 숭배"하므로, "어려서는 [수호전]을 읽지 말고 늙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는 것이다. 반대로 해석해 보면, 어려서는 [삼국지] 권모술수의 외피인 다양한 인물군상의 매력을 보고 늙어서는 [수호전]의 폭력에 은폐되어 부각되지 않는 '상생의 철학'을 보라는 것일 수도 있겠다.
[쌍전] 독해에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저자 류짜이푸가 중국 '사회주의 혁명'을 이룬 '공산당 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으면서 수천 년 중국 역사상 '혁명가'들을 다 똑같은 자들로 본다는 것이다.


"[수호전]은 단지 탐관오리에 반항한 것이며 황제에반항한 것이다... 송강(양산박 두목)은 투항을 하여 수정주의자가 되었다... 고구(탐관오리)와의 투쟁과 마찬가지로 지주계급 내부에서 한 파가 다른 파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송강은 투항을 했고, 그 후 바로 방랍(북송 말 농민반란의 우두머리)을 쳤다. 이들 농민 의거를 이끈 지도자들은 바람직하지 않게도 투항을 했다. (양산박 부하들인) 이규, 오용, 완소아, 완소오, 완소칠은 훌륭하다. 그들은 투항을 원하지 않았다. 루쉰(노신)은 [수호전]을 잘 평가했다. 그는 말했다. '[수호전]은... 천자에 반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대군이 도착하자 바로 투항을 해버렸다. 그리고 국가를 대신해서 다른 강도들을 쳤다. 하늘을 대신해서 도를 행하는 강도가 되지 않은 것이다. 결국 노예였다.'([삼한집], <부랑배의 변천>)"
- 마오쩌뚱(모택동), 1975. / [쌍전], 류짜이푸, <1부. [수호전] 비판>에서 재인용

'폭력'을 숭배하는 [수호전]의 주인공들은 온갖 살육과 도살의 향연을 펼친다. '흑선풍 이규'는 특유의 쌍도끼로 부자들은 물론 혼외정사 남녀, 심지어 영아도 절단내고는 그 인육까지 구워 먹고,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무송, 축구만 잘하여 황제의 신임을 산 탐관오리 고구로부터 누명을 쓴 장교 임충, 술에 취해 절간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살인을 일삼는 노지심 등의 인물들은 "지옥의 문"을 지키는 마귀들 자체다. 명나라 말기 시내암이 정리한 소설 [수호전]의 서막에서 수십년 전 홍신이라는 북송 중앙정부 관리가 지역민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판도라처럼 호기심에 열어 버렸다는 '복마지전'이라는 상자로부터 108기의 악마들이 세상에 나온다. 
양산박 108인 반란자들은 '복마지전'에 갇혀 있던 바로 그 '악마들'인 것이다.

송강이라는 지방말단 관리는 특출한 능력도 없이 '포용력' 하나로 이 악마들의 두목이 되는데, 별명이 '급시우', 즉 '급할 때 내리는 단비'다. 악당들이 급할때 먹여주고 재워주고 같이 도망쳐 주고, 잔머리 대신 굴려서 유명한 호걸들을 속이고는 일부러 위기에 빠뜨려 양산박에 들어올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일이 송강의 역할이다. 겉으로는 탐관오리에 맞서 민중을 지킨다 하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폭력적으로 조직의 이익을 취하면서 결국 '반란군'이 아닌 양산박 '도적떼'에 머문다. 이들은 결코 진승과 오광, 유방과 항우, 이연이나 이밀, 황소, 주원장과 장사성, 이자성 같은 중국 역사상 '농민혁명가'들과 같은 권력의지가 없었으니, 무능했던 북송 마지막 황제 휘종에게 투항하고는 다른 농민혁명인 '방랍의 난'을 진압하는데 이용당하고 만다. 송강의 최후는 소설과 달리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겠으나 '혁명가'가 아닌 '노예'의 길을 택한 '양산박 108 두령'은 '폭력 숭배'라는 저질의 문화만 후대에 남기게 된다.
비록, 송강의 '정치철학'이 "너는 죽고 나만 살자"는 역대 중국 '혁명가'들의 '이기적 철학'과 달리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상생의 철학'이라고 정리한들, 그 과정에서 [수호전]의 악당들 손에 도륙된 민중, 여성, 아동들의 억울함이 풀릴리는 만무하다.


"유비가 관우를 위해서 보복한다고 하는 그 사건은 '의'가 지닌 치명적인 문제를 폭로했다. 하나는 '의'의 조직 원리와 윤리 원칙이 국가 원칙과 사회 원칙을 능가했을 때, 그것은 반드시 국가와 사회에 위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의'의 근본적인 약점을 폭로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감정만을 말하고 이성은 말하지 않으며, 형제간의 윤리만 말하고, 책임 윤리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정치는 윤리 도덕과 감정에서 분리되지 못하고 독립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단지 유비 집단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사회에서 일종의 전통 관습이 되었으며, 그것이 수 천 년간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 [쌍전], 류짜이푸, <2부. [삼국지] 비판 - 지옥의 빛>

후한 말기 황건군 농민반란을 진압하고 '십상시' 환관과 외척 무리로부터 한나라 황실을 지키기 위한 전국 군웅할거 시대를 그린 명나라 '민족주의자' 나관중의 [삼국연의], 즉, 속칭 '[삼국지] 이야기'는 류짜이푸에 의하면 온갖 '권모술수'의 백화점이다.
오랜 세월 민중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해 온 소설 [삼국지]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하되 재미를 위해 '초한지' 등의 이야기와 허구를 섞어 극화시키고 있다. 위나라 조조는 찬탈의 역적, 한나라 황실의 후예 유비는 파촉의 구석의 대장노릇으로 끝났으되 한왕조 부활의 영웅으로 그리며, 유비와 제갈량은 '초한지'의 유방과 장량과의 관계 등과 등치된다.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제갈량은 "정치적 수완은 있으되 군사적 재능이 부족"했음에도 소설을 통해 장량을 뛰어넘어 거의 '신'적인 존재가 되었고, '충성'과 '의리'의 화신 관우는 어떤 중국인들에게는 이미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난세였기는 하나, 류짜이푸에 의하면 그 시기는 '의리', '지혜' 등의 온갖 '원형(진짜)' 원리가 '위형(가짜)'으로 변질되는 변곡점이다. '너는 죽고 나는 살자'는 '건곤일척'의 투쟁에서 승리한 유방이 숙적 항우의 죽음을 예로써 대하는 것이 '원형'이라면, 일례로 오나라 주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제갈량이 숙적이 죽었다며 크게 웃고는 오나라 정세를 탐하기 위해 조문을 가서 거짓으로 곡을 하는 장면은 '위형'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권모술수'로 가득한 [삼국지]는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 정치투쟁의 '3원칙'의 근원이 되는데, 1) '성실성'은 필요 없고, 2) '사당(죽음으로 맺은 조직)'을 결성하며, 3) 상대방에 '먹칠'을 하는 '3원칙'이 그것이다. 

"그 소설([삼국지])에 등장하는 생사투쟁의 각 무리는 서로 구호가 다르고 내세운 기치도 달랐다. 그러나 그들이 이용한 '권모술수'는 대체로 같았다... 위와 같은 '(정치투쟁의) 세 가지 원칙'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러 정치 집단의 공통된 규칙이었다... 정치에 이렇다 할 '성실성이 필요 없다'는 것은 '지혜의 변질'이다. 죽음으로 뭉치는 '사당을 결성한다'는 것은 '의리의 변질'이며, '상대방에 먹칠을 한다'는 것은 '역사의 변질'이다."
- [쌍전], 류짜이푸, <2부. [삼국지] 비판 - '역사의 변질'>

[삼국지]를 통해 원래의 '지혜'는 속임수와 사기로 변질된다. [손자병법]에는 모든 군사계략은 '속임수(궤)'라 하나, [삼국지]에서는 병법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관계, 인간관계가 '속임수'고 '사기'다. 그러므로 '배신하면 죽음으로 갚는 사당' 결성이 필수적이며 초반부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는 그 증거다. 결국 위나라 조조와의 전쟁에서 촉과 오가 동맹을 맺어야 함에도 요충지 형주를 지키던 관우는 사사로운 정으로 위나라의 조조를 봐주고 오나라 손권을 모욕하며 죽음을 자초했고 이 변질된 '의리'로 뭉친 유비가 무리한 복수전을 벌여 결국 '같은 해에 죽음'을 맞음으로써 부질없는 그 '의리'를 완성하고 만다.  이런 '의리'는 자신의 '사당' 외 어떠한 도덕윤리적, 국가사회적 '의'에는 무관심하기에 결과적으로 일반 민중들에게는 고단함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삼국지]의 '후흑학'은 당대의 '영웅' 조조를 '간웅'으로 규정하고 '먹칠'로 일색하면서 '역사의 변질'을 이루고 있다. '권모술수'와 그릇된 '의리관'으로 역사왜곡까지 감행한다는 것인데, 소설에 대한 비판으로 가혹하다고 볼 것은 없다. 그 걸출한 작품 [삼국지]가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끼쳐 왔기에 '문학비평'이 아닌 '문화비판'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류짜이푸에 따르면, 이런 [삼국지]는 [수호전]보다 더 해롭다.

마지막으로 이런 '권모술수형 인물'의 전형인 중국 '5대10국' 시대 재상 '풍도'와 관련 인물평을 하나 인용해 보자.
시대와 국경을 떠나 우리 역사에서는 그 전형으로 '전두환 국보위원'과 '박근혜 경제참모'이자 '민주당 대표'를 거쳐 현재 수구보수 선거총책까지 노리는 김종인 같은 자가 있겠다.

"북송 구양수가 지은 [신오대사]는 나관중의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외모는 다르지만 마음 씀씀이는 같은 한 인물을 그려냈다. 즉 다섯 성씨의 아홉 군주를 모시면서 공자처럼 73세까지 살다 죽은 '풍도'였다. 그는 아주 뻔뻔한 성품의 소유자였는데, 정말 허구적인 문학적 이미지와 역사적 사실이 기묘하게 결합된 듯한 인물이었다. 구양수가 <풍도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한 것도 당연하다. '염치가 없어서 어느 것이나 다 가지려고 하고, 부끄러움을 몰라서 하지 않은 일이 없다. 사람이 이와 같으면 재난과 변란으로 패망할지라도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 하물며 대신이 되어 모든 것을 가지고, 어떤 짓이든 다 하게 되면 천하는 혼란에 빠지고 나라는 망하지 않겠는가? 나는 풍도가 쓴 [장락노서]를 읽어보았는데, 스스로 뻐기는 것을 보았다. 지극히 염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 [쌍전], 류짜이푸 - 역사학자 린강의 <서문>

(2020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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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박기봉 옮김 / 비봉출판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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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신채호, <일신서적>, 1988.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반드시 본위인 아가 있으면 따라서 아와 대치하는 비아가 있고, 아 가운데 아와 비아가 있으면 비아 가운데에도 아와 비아가 있다.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잦을 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 [조선상고사], 신채호, <1편. 총론>, 1924.


일제강점기 조선의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1880~1936)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규정하며 [조선상고사]를 시작한다. 우리 한반도 조선 민족을 '아'로 두고 그 기원을 고조선 이전 상고시대부터 연구하고자 한 거대한 기획은, 1924년도에 <총론>의 완성으로 시작되어 1931년부터 신문에 연재되었으나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백제의 멸망과 연개소문 사후 정국에서 멈춘 미완의 역작이다.
식민지 현실에서 일제에 대항하여 투철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옥사한 신채호가 '역사의 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내부의 주적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였다. 조선이라는 '아(我)'의 역사에서 사대적 유교주의자 김부식은 역사의 '비아(非我)'였으니 이를 물리치고 '역사의 승리자'가 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부식이 진압한 고려 중기 '묘청의 난'은 "조선 1천년 역사상 제1대 사건"이 되었고, 고구려의 마지막 중흥을 꾀한 '혁명가' 연개소문은 위대한 '민족의 영웅'으로 부각된다.

"고대 아시아 동부의 종족이 1) 우랄 어족, 2) 지나 어족의 두 갈래로 나누어졌는데, 한족(중국), 묘족, 요족 등은 후자(지나 어족)에 속한 것이고, 조선족, 흉노족 등은 전자(우랄 어족)에 속한 것이다.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 선비, 여진, 몽고, 퉁구스 등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이동하고 분산하여 돌궐(지금의 신강족), 흉아리(헝가리), 토이기(터키), 분란(판란드) 족이 되었다."
- [조선상고사], 신채호, <2편. 수두시대>

조선 역사의 기원을 추적하니 인류 문명의 '대혁명'인 '불의 발견'에서 시작하는데, "동서를 물론하고 고대의 인민들이 다 불의 발견을 기념하여 그리스의 화신, 프러시아의 화교, 지나의 수인씨 등 전설이있고", 조선은 "더욱 불을 사랑하여" 인명이나 지명을 지었는데 요동의 송화강을 중심으로 한 '부여'라는 공동체명의 유래가 '불'이라고 한다.
또한, 중국 정사 [삼국지]의 <위서> 말단에 '오환,선비,동이전'(이른바, '위지동이전') 변방에서 '위나라 동쪽의 여러 나라들' 중 하나인 '조선족'이 원래는 중원의 동북방을 지배한 민족이며(서북방은 '흉노족') 여기서 '여진, 선비, 몽고' 등의 민족이 분화되었다. 이는 더 거슬러 올라가면 탁록 전투에서 중국 황제 헌원씨와 싸운 치우천왕이나 중국 은(상)나라의 '용산 문화'의 뿌리가 '조선족'이라는 것이다.


"연개소문은 1) 고구려 9백년 이래로 전통의 호족공화의 구체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였고, 2) 장수왕 이래 철썩같이 굳어온 서수남진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의 정책을 세웠고, 그래서 국왕 이하 대신 호족 수백 명을 죽여 자기의 독무대로 만들고, 서국 제왕 당태종을 격파하여 지나 대륙의 침략을 시도했는데... 당시에 고구려 뿐 아니라 동방 아시아전쟁사 중에서 유일한 중심 인물이다."
- [조선상고사], 신채호, <11편. 고구려와 당의 전쟁>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신채호는 고려까지 [삼한고기], [해동고기], [삼국사] 등의 역사서가 있었으나, '사대주의 유교도' 김부식이 평양에 도읍을 두고 북벌을 하자는 '화랑 무사사상'의 불교도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에 "동, 북 두 부여를 떼어버려 조선 문화가 유래한 곳을 진토 속에 묻고 발해를 버려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를 초개 속에 던지면서"(총론) 이후 불행한 몽골 섭정기를 거치면서 김부식류의 '사대적 역사관'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신채호가 보기에 "앞뒤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것이 많아 거의 사적 가치가 없다."(총론)

"... 송 신종이 왕안석과 더불어 국사를 논의하며 말하기를, '당태종이 고구려를 쳤는데 어찌 이기지 못하였는가' 하니, (왕안석이) 말하기를, '개소문은 비상한 사람입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소문도 또한 재사인데 능히 바른 도로써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과 포학을 자행하여 대역에 이른 것이다."
- [삼국사기], 김부식, <열전9. 개소문전>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의 성을 '천'씨로 바꾸는데, 이는 당나라 고조의 이름이 이'연'이라 같은 한자를 피해 쓰는 사대적 발상이며 김부식에게 연개소문은 "재능은 있으나 잔인하고 포악한 대역죄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자료나 소설 '갓쉰동전'은 연개소문이 젊어서 중국 일대를 '서유'하며 당태종 이세민을 만난 적도 있음을 추정케 하는 바, 중국 정사인 [신,구당서]에서 "방자하고 야심찬 개소문" 등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당태종과 중국인들이 그만큼 '영웅' 연개소문을 두려워했음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고구려 서부대인 대대로직을 물려받게 되는 연개소문은 수나라를 망하게 한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서 신생국 당나라에게도 외교강경책을 주장하는데, 중국과의 평화책을 고수하는 영류왕과 호족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었으며, '고구려-당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는 국제정치의 숙적 당태종 이세민이 "더 이상 고구려를 넘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게 만든다.

"연개소문은 요동의 싸움을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 두 사람에게 맡기고 정병 3만으로 적봉진 등지를 습격하니... 당태종은 곧 군사를 돌이키려고 하였다. 오골성주 추정국과 안시성주 양만춘은 연개소문이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음과 당태종이장차 도망할 것을 짐작하고... 당태종은 말이 수렁에빠져서 꼼짝을 못하고, 양만춘의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아 거의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당의 용장 설인귀가 달려와서 당태종을 구하여... 가까스로 달아났다."
- [조선상고사], 신채호, <11편>

안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안시성주가 양만춘이라는 기록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시작된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와 오골성주에게 요동을 위임하고 대당 전쟁을 총지휘하며 신성 등의 큰 성에서의 승리와 효과적인 보급로 차단 및 양동작전 등으로 당태종을 물리쳤다. 한편, 중국의 역사에서는 당태종이 은혜를 베풀며 군사를 물렸다고 기록한다. 

신채호는 고구려의 '영웅' 연개소문이 추진한 대외정책을 '남수서진'이라 했다. "남쪽을 지키고 서쪽으로 진출한다." 고구려가 중국 동남쪽 변방이 아니라 중원과 아시아를 동서로 나누는 동등한 국가라는 의미다. 장수왕 이래 '서수남진'을 혁파하고 이를 주장하는 기득권을 척결했던 '혁명가' 연개소문. 한때 연개소문에게 감금당하기도 했고 당나라를 조선 민족 내전에 끌어들인 신라 무열왕 김춘추는 고구려의 멸망을 보지는 못했으나 이후 문무왕이 되어 삼국통일을 이루는 아들 김법민으로 인해 역사에서 살아나는 반면, 연개소문의 아들들은 내분으로 인해 망국의 원인을 제공하면서 연개소문은 중국과 김부식류가 날조한 '실패한 독재자' 이미지로 누누이 전해져 오기도 했다. 

중국 한무제에 이르러 사마천이 자신들의 역사를 아득한 '삼황오제'부터 시작하는 '통합족보'로 [사기]에 담았다면, 우리 조선족의 족보는 일제강점기에도 불구하고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를 통해 주체적으로 기초를 닦았다고 본다. 
그리하여 이후의 진정한 우리 역사가는 신채호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역사를 보아온 것 아닌가.

(2020년 3월 15일)

***

1. [조선상고사], 신채호, <일신서적>, 1988.
2.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김용만, <바다>, 2003.
3. [삼국사기],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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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2 세트 - 전2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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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탐험가들'인가, '제국주의 첨병들'인가
- [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김영종 옮김, <사계절>, 2000.


"예수가 태어나기 1세기 전, (중국 한무제 시기) 장건이라는 이름의 모험심 많은 중국의 한 젊은이가 비밀 임무를 띠고 당시로서는 멀고도 신비스러운 서역으로 출발하였다. 비록 그의 목적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은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여행이 되었다. 그 까닭은 중국이 유럽을 발견하고 또 실트로드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여행가'는 황제로부터 대단히 명예로운 벼슬을 하사받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중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길을 처음으로 개척한 셈이었고, 이는 당시 두 강대국인 중국과 로마를 잇는 결과를 낳았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1장. 실크로드의 성쇠>

돈황 막고굴은 중국 서쪽 장안을 지나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 사이에 있는 '천불동'으로 유명한데, 중국 문화의 다양성을 꽃피운 4~5세기 '5호16국 시대'에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북위, 전진 등의 저, 강, 선비족 소수민족 정권부터 '혼혈정권'인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지며 수많은 석굴을 만들어 왔다고 한다. 역시 소수민족들의 활발한 교류와 문화적 유연성으로 동서 문화가 접목되는 지점이다. 또한 '제국'의 역사가 끼어들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당시의 '제국'은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레닌, [제국주의론], 1916.)"로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가 경쟁적으로 식민지 쟁탈을 시작하던 그 시기의 특정 체제였다.

돈황 막고굴에서 수많은 고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북방의 차르 제국 러시아가 제일 먼저 들었고 지질학자 오브루체프를 보내 돈황 고문서를 발견한중국인 왕원록 도사를 통해 일부 입수하지만 그 가치를 몰랐다. 지질학자이니 당연히 몰랐을 것인데, 당시 식민지 영토 확장이 주목표인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지도의 구체적 확정을 위해 지리학자, 지질학자, 지도제작자를 오지로 파견했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 탐험의 선구자는 스웨덴 출신 지리학자 스벤 헤딘이다. 1899년에 헤딘은 중국 고대국경도시였다가 이민족에게 넘어간 도시 '누란'을 최초로 발견한 유럽 최초의 '제국주의' 탐험가였다. 고대 불교 유적과 당시 사람들의 기록 등 소중한 유물들을 발견했음은 물론이고 왜소한 체구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가차없이 탐험에 도전하는 불굴의 의지는 과연 최고였다고 칭송받지만, 정치적으로는 결국 독일 제국주의 편에 선 '제국주의자'였다. 스벤 헤딘은 유럽 제국주의 탐험가의 시조다.


"일찍이 헝가리 지리학자 로치 라요시한테서 돈황의 장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스타인은, 그곳을 발굴하거나 걸작의 벽화를 뜯어올 계획이 없었던 당시에도, 거기에 가보는 것이 오랫동안의 꿈이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2장. 돈황 - 숨겨진 고대의 서고>

이제 '제국주의' 국가들은 지리학자들을 철수시켰고, '동양학자'들을 파견한다. 독일의 폰 르코크, 영국의 오렐 스타인이 대표적인데, 아주 우연한 계기로 돈황에 먼저 들어간 사람은 스타인이다. 헝가리 출신 동양학자 스타인은 헝가리어, 영어, 독어, 불어는물론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산스크리트어에 능했으나 정작 중국어를 몰라 왕도사와 돈황 고문서를 거래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도 수차례 원정을 통해 많은 고문서를 영국으로 가져갔는데 헝가리 출신인 스타인의 조상이 흉노를 연상시키는 훈족이라 동방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고도 도 한다.


"촛불 하나만을 밝힌 채, 스타인이 필사본을 가져감으로써 생긴 비좁은 공간에 쪼그리고 앉아, 펠리오는 먼지투성이의 꾸러미들을 뒤지면서 길고 숨막히는 3주일이란 시간을 보냈다... '처음 열흘 간은 하루에 거의 1천 개의 두루마리를 공략했다...' 그는 자신을 경주용 차와 같은 속도로 달리는 서지학자라고...비유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3장. 펠리오 - 품위 있게 적을 만드는 기술>

결과는 그렇지 않았으나, 스타인이 돈황에 처음 갈 때만 해도 유물 약탈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 서지학자 폴 펠리오는 대놓고 고문서 유출을 위해 그곳으로 갔다. 사마천의 [사기]를 처음으로 불어로 번역한 에두아르 샤반의 제자이며 13개 국어에 능하고 특히 동남아와 북경에도 거주하면서  중국어도 능통한 데다가 사교성도 좋아 [실크로드의 악마]에서 '품위 있게 적을 만드는 기술'을 지녔다는 천재학자. 이전 선배들이 고문서들을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면, 이 프랑스 천재 서지학자는 지식을 토대로 고문서들을 분류하여 영리하게 유럽으로 들여와 전시회까지 연다. 불세출의 천재학자 또한 업적 욕심에 '제국주의'를 비껴가지 못한다.


"... (랭던) 워너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벽화가 있는 동굴로 들어갔고, 먹을 때와 잠잘 때만 빼놓고 거기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것들을 처음 본 순간, 내가 왜 대양과 두 대륙을 건너고, 또 몇 달 동안을 수레 옆에서 지친 몸을 끌고 걸어왔는가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연대를비정하고, 교수들의 기존 이론을 보기 좋게 논박하고, 미술사의 영향들을 발견하기 위해 온 내가, 그저두 손을 호주머니에 쑤셔넣은 채 석굴 사원의 한복판에 서서 생각을 가다듬어 보려고 애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5장. 랭던 워너가 위업에 도전하다>

펠리오가 왕도사를 속여 몇 차례 수탈해 간 다음, 미국에서는 동양미술사학자 랭던 워너가 온다. 그는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모티브가 된 탐험가로 하버드대학 박물관 소속이었다. 그가 목숨걸고 돈황까지 온 이유는 불교벽화와 조상들을 훔쳐가기 위해서였다. 불굴의 이 미국인은 고대 예술품들을 닥치는 대로 미국으로 반출했다. 결국 워너는 중국 정부로부터 추방되었고 폴 펠리오와 '합동 약탈작전'까지 계획하는 등 여러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중국에 발을 들이지 못한다. 영화의 존스 박사와는 달리 정의나 양심 따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모두 세 차례에 걸쳐 탐험대를 파견한 오타니 백작은 '정토진종' 본파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부친의 죽음으로 물려받은... 종파의 지도자로 취임하기 위해 귀국할 때까지 그는 장시간 유럽 등지를 여행하며 보냈다... 그는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회원이었다... 종무를 맡은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자기가 중앙아시아에 파견한 탐험대들의 사진과 간략한 기사를 학회에 보냈다... (오타니의) 두 권의 정치적 문제에 관한 저작-하나는 중국, 또 하나는 만주에 관한 것-이 있다... 물론 이것은 스파이 우두머리로서 정교한위장이었을 수도 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4장. 실크로드의 스파이들>

랭던 워너의 약탈 이후 중국 정부는 돈황을 봉쇄하고 중국 화가 장대천, 상서홍, 조선 출신 화가 한락연 등이 돈황벽화 보존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는데, 1900년대 초반에 독일과 영국 등 유럽 '제국주의'가 거세게 밀려올 때 타클라마칸 주변에 정체모를 '일본 스파이들'이 암약하고 있었다. 이들 '스파이들'의 대장은 오타니 고즈이. 일본 불교의 한 일파인 서본원사 정토진종 본파의 세습교주로 권세가인 공작의 딸과 혼인하여 백작이 되었으며 수 차례 '오타니 탐험대'를 중앙아시아로 파견하여 파산까지 아르러 '오타나 컬렉션'은 뿔뿔이 흩어진다. 학자도 아닌 다치바나 즈이초라는 젊은 승려를 탐험대장으로 한 원정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눈에 신비롭고 의아했을 것이며 결국 피터 홉커크는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일본 '오타니 탐험대'를 '실크로드의 스파이들'이라고 규정한다. 동양을 배척하는 서양 '제국주의자'의 시각일 수도 있겠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공략을 위한 첩자질은 명확해 보인다.
유럽 '제국주의'들은 '악마'였고, 일본 '제국주의'는 '스파이'에 불과했다.


19~20세기에 유럽 '제국주의'가 탐험가들을 파견했다면, 고대에는 중국의 한나라의 탐험가 장건이 있었고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있었으며 우리 신라 승려 혜초가 있었다. 장건은 한무제에게 서역의 문화와 흉노의 기마력에 맞서는 '천마'의 군사력을 전했고, 현장은 '서유기'의 '삼장법사'로서 불교경전 원본을 전하면서 오렐 스타인이 가장 존경하는 탐험가였으며, 신라의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으로 중국의 승려들을 거꾸려뜨렸다.

피터 홉커크는 서양 탐험가들의 흥미로운 기록의 제목을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 지었다. 그러나 이는 동양인의 입장에서 부른 '악마들(Foreign Devils)'을 번역한 것일 뿐, '제국주의'의 '악마성'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만약 서양의 약탈이 없었으면 과연 방치되어 있던 그 유물들이 제대로 보존되었을 것인가'라는 우문은 '역사의 가정'이라는 부질없는 전제를 깔고 있으니, '만일 박정희 아니었으면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했을까' 같은 하나마나 한 질문에 불과하다.
선구적 탐험가들과 학자들의 불굴의 정신과 신비한 행적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결국, 식민지 분할전쟁 과정에서 '문화약탈'이라는 20세기초 국가독점자본주의로서 '제국주의'의 '악마성'만이 짙게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2020년 3월 14일)

***

1. [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김영종 옮김, <사계절>, 2000.
2.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중국편 1,2], 유홍준, <창비>, 2019.
3. [돈황 이야기], 마쓰오카 유즈루, 박세욱/조경숙 옮김, <연암서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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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악마들 - 중앙아시아 탐험의 역사
피터 홉커크 지음, 김영종 옮김 / 사계절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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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탐험가들'인가, '제국주의 첨병들'인가
- [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김영종 옮김, <사계절>, 2000.


"예수가 태어나기 1세기 전, (중국 한무제 시기) 장건이라는 이름의 모험심 많은 중국의 한 젊은이가 비밀 임무를 띠고 당시로서는 멀고도 신비스러운 서역으로 출발하였다. 비록 그의 목적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은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여행이 되었다. 그 까닭은 중국이 유럽을 발견하고 또 실트로드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여행가'는 황제로부터 대단히 명예로운 벼슬을 하사받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중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길을 처음으로 개척한 셈이었고, 이는 당시 두 강대국인 중국과 로마를 잇는 결과를 낳았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1장. 실크로드의 성쇠>

돈황 막고굴은 중국 서쪽 장안을 지나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 사이에 있는 '천불동'으로 유명한데, 중국 문화의 다양성을 꽃피운 4~5세기 '5호16국 시대'에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북위, 전진 등의 저, 강, 선비족 소수민족 정권부터 '혼혈정권'인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지며 수많은 석굴을 만들어 왔다고 한다. 역시 소수민족들의 활발한 교류와 문화적 유연성으로 동서 문화가 접목되는 지점이다. 또한 '제국'의 역사가 끼어들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당시의 '제국'은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레닌, [제국주의론], 1916.)"로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가 경쟁적으로 식민지 쟁탈을 시작하던 그 시기의 특정 체제였다.

돈황 막고굴에서 수많은 고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북방의 차르 제국 러시아가 제일 먼저 들었고 지질학자 오브루체프를 보내 돈황 고문서를 발견한중국인 왕원록 도사를 통해 일부 입수하지만 그 가치를 몰랐다. 지질학자이니 당연히 몰랐을 것인데, 당시 식민지 영토 확장이 주목표인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지도의 구체적 확정을 위해 지리학자, 지질학자, 지도제작자를 오지로 파견했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 탐험의 선구자는 스웨덴 출신 지리학자 스벤 헤딘이다. 1899년에 헤딘은 중국 고대국경도시였다가 이민족에게 넘어간 도시 '누란'을 최초로 발견한 유럽 최초의 '제국주의' 탐험가였다. 고대 불교 유적과 당시 사람들의 기록 등 소중한 유물들을 발견했음은 물론이고 왜소한 체구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가차없이 탐험에 도전하는 불굴의 의지는 과연 최고였다고 칭송받지만, 정치적으로는 결국 독일 제국주의 편에 선 '제국주의자'였다. 스벤 헤딘은 유럽 제국주의 탐험가의 시조다.


"일찍이 헝가리 지리학자 로치 라요시한테서 돈황의 장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스타인은, 그곳을 발굴하거나 걸작의 벽화를 뜯어올 계획이 없었던 당시에도, 거기에 가보는 것이 오랫동안의 꿈이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2장. 돈황 - 숨겨진 고대의 서고>

이제 '제국주의' 국가들은 지리학자들을 철수시켰고, '동양학자'들을 파견한다. 독일의 폰 르코크, 영국의 오렐 스타인이 대표적인데, 아주 우연한 계기로 돈황에 먼저 들어간 사람은 스타인이다. 헝가리 출신 동양학자 스타인은 헝가리어, 영어, 독어, 불어는물론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산스크리트어에 능했으나 정작 중국어를 몰라 왕도사와 돈황 고문서를 거래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도 수차례 원정을 통해 많은 고문서를 영국으로 가져갔는데 헝가리 출신인 스타인의 조상이 흉노를 연상시키는 훈족이라 동방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고도 도 한다.


"촛불 하나만을 밝힌 채, 스타인이 필사본을 가져감으로써 생긴 비좁은 공간에 쪼그리고 앉아, 펠리오는 먼지투성이의 꾸러미들을 뒤지면서 길고 숨막히는 3주일이란 시간을 보냈다... '처음 열흘 간은 하루에 거의 1천 개의 두루마리를 공략했다...' 그는 자신을 경주용 차와 같은 속도로 달리는 서지학자라고...비유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3장. 펠리오 - 품위 있게 적을 만드는 기술>

결과는 그렇지 않았으나, 스타인이 돈황에 처음 갈 때만 해도 유물 약탈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 서지학자 폴 펠리오는 대놓고 고문서 유출을 위해 그곳으로 갔다. 사마천의 [사기]를 처음으로 불어로 번역한 에두아르 샤반의 제자이며 13개 국어에 능하고 특히 동남아와 북경에도 거주하면서  중국어도 능통한 데다가 사교성도 좋아 [실크로드의 악마]에서 '품위 있게 적을 만드는 기술'을 지녔다는 천재학자. 이전 선배들이 고문서들을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면, 이 프랑스 천재 서지학자는 지식을 토대로 고문서들을 분류하여 영리하게 유럽으로 들여와 전시회까지 연다. 불세출의 천재학자 또한 업적 욕심에 '제국주의'를 비껴가지 못한다.


"... (랭던) 워너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벽화가 있는 동굴로 들어갔고, 먹을 때와 잠잘 때만 빼놓고 거기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것들을 처음 본 순간, 내가 왜 대양과 두 대륙을 건너고, 또 몇 달 동안을 수레 옆에서 지친 몸을 끌고 걸어왔는가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연대를비정하고, 교수들의 기존 이론을 보기 좋게 논박하고, 미술사의 영향들을 발견하기 위해 온 내가, 그저두 손을 호주머니에 쑤셔넣은 채 석굴 사원의 한복판에 서서 생각을 가다듬어 보려고 애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5장. 랭던 워너가 위업에 도전하다>

펠리오가 왕도사를 속여 몇 차례 수탈해 간 다음, 미국에서는 동양미술사학자 랭던 워너가 온다. 그는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모티브가 된 탐험가로 하버드대학 박물관 소속이었다. 그가 목숨걸고 돈황까지 온 이유는 불교벽화와 조상들을 훔쳐가기 위해서였다. 불굴의 이 미국인은 고대 예술품들을 닥치는 대로 미국으로 반출했다. 결국 워너는 중국 정부로부터 추방되었고 폴 펠리오와 '합동 약탈작전'까지 계획하는 등 여러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중국에 발을 들이지 못한다. 영화의 존스 박사와는 달리 정의나 양심 따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모두 세 차례에 걸쳐 탐험대를 파견한 오타니 백작은 '정토진종' 본파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부친의 죽음으로 물려받은... 종파의 지도자로 취임하기 위해 귀국할 때까지 그는 장시간 유럽 등지를 여행하며 보냈다... 그는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회원이었다... 종무를 맡은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자기가 중앙아시아에 파견한 탐험대들의 사진과 간략한 기사를 학회에 보냈다... (오타니의) 두 권의 정치적 문제에 관한 저작-하나는 중국, 또 하나는 만주에 관한 것-이 있다... 물론 이것은 스파이 우두머리로서 정교한위장이었을 수도 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4장. 실크로드의 스파이들>

랭던 워너의 약탈 이후 중국 정부는 돈황을 봉쇄하고 중국 화가 장대천, 상서홍, 조선 출신 화가 한락연 등이 돈황벽화 보존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는데, 1900년대 초반에 독일과 영국 등 유럽 '제국주의'가 거세게 밀려올 때 타클라마칸 주변에 정체모를 '일본 스파이들'이 암약하고 있었다. 이들 '스파이들'의 대장은 오타니 고즈이. 일본 불교의 한 일파인 서본원사 정토진종 본파의 세습교주로 권세가인 공작의 딸과 혼인하여 백작이 되었으며 수 차례 '오타니 탐험대'를 중앙아시아로 파견하여 파산까지 아르러 '오타나 컬렉션'은 뿔뿔이 흩어진다. 학자도 아닌 다치바나 즈이초라는 젊은 승려를 탐험대장으로 한 원정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눈에 신비롭고 의아했을 것이며 결국 피터 홉커크는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일본 '오타니 탐험대'를 '실크로드의 스파이들'이라고 규정한다. 동양을 배척하는 서양 '제국주의자'의 시각일 수도 있겠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공략을 위한 첩자질은 명확해 보인다.
유럽 '제국주의'들은 '악마'였고, 일본 '제국주의'는 '스파이'에 불과했다.


19~20세기에 유럽 '제국주의'가 탐험가들을 파견했다면, 고대에는 중국의 한나라의 탐험가 장건이 있었고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있었으며 우리 신라 승려 혜초가 있었다. 장건은 한무제에게 서역의 문화와 흉노의 기마력에 맞서는 '천마'의 군사력을 전했고, 현장은 '서유기'의 '삼장법사'로서 불교경전 원본을 전하면서 오렐 스타인이 가장 존경하는 탐험가였으며, 신라의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으로 중국의 승려들을 거꾸려뜨렸다.

피터 홉커크는 서양 탐험가들의 흥미로운 기록의 제목을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 지었다. 그러나 이는 동양인의 입장에서 부른 '악마들(Foreign Devils)'을 번역한 것일 뿐, '제국주의'의 '악마성'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만약 서양의 약탈이 없었으면 과연 방치되어 있던 그 유물들이 제대로 보존되었을 것인가'라는 우문은 '역사의 가정'이라는 부질없는 전제를 깔고 있으니, '만일 박정희 아니었으면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했을까' 같은 하나마나 한 질문에 불과하다.
선구적 탐험가들과 학자들의 불굴의 정신과 신비한 행적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결국, 식민지 분할전쟁 과정에서 '문화약탈'이라는 20세기초 국가독점자본주의로서 '제국주의'의 '악마성'만이 짙게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2020년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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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김영종 옮김, <사계절>, 2000.
2.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중국편 1,2], 유홍준, <창비>, 2019.
3. [돈황 이야기], 마쓰오카 유즈루, 박세욱/조경숙 옮김, <연암서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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