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 프리즘 총서 16
피에르 마슈레 지음, 윤진 옮김 / 그린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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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
-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1966), 피에르 마슈레, 배영달 옮김, <백의>, 1994.



"작가는 질문을 제기하지만, 그것에 답하지 않는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


1965년,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라는 저작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관점에서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구분하였다. '대상'을 가지고 '지식'을 생산하는 '과학'과 말 그대로의 '허위의식'이지만 물질적 힘을 지니는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는 것이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인 '철학'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이듬해인 1966년, 프랑스 구조주의 문학비평가 피에르 마슈레는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라는 저서를 통해, 이러한 알튀세르의 작업을 '문학'의 영역으로 심화하여 '과학적 비평'을 정초하면서 하나의 '과학'으로서 '문학비평'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밝히려 한다.
마슈레는 문학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제도로서 존재하는 한, '문학비평'은 '이데올로기'와 단절하고 '과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문학생산이론'은 '과학'적 '문학비평'에서 출발한다.


"적어도 '(문학)비평'이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비평'은 항상 '부정'으로부터 시작하며, '비평'의 기본적 행위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작품에 대한) '거부의 행위'이다. 그러나 '비평'은 인식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하며, 그리고 '비평'이 행하는 권리는 결정적인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비평'은 '허위(이데올로기)'를 폭로함과 동시에 '진실(과학적 진리)'을 말하고자 한다... 읽는 것... 그것은 바로 (이데올로기로서 작품의) '파괴'라는 '부정'적 의미에서 비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읽기'에 의해 작품은 '파괴'된다."
- 피에르 마슈레,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 <1부. 몇 가지 기본적 개념들>, 1966.

사회구성체의 결정적 '최종심급'으로서 경제적 토대와 상호 영향을 미치는 상부구조로서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속하는 '문학'은 하나의 '과학'이 되어야 하는데, 이 '문학'을 인식하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설명'하는 것이다. 
'설명'하는 것은 마슈레에 의하면, "작품을 결정짓지만 어떤 의미로 확실히 귀결되지 않는 필요성을 알아보는 것"(같은책)으로서 "작품의 필요성은 그 의미의 '다양성'에 의거"하며 "작품을 '설명'하는 것은 이러한 다양성의 원리를 인정하고 '구분'하는 것이다."(같은책)

그리하여, 문학비평을 통해 "문학작품을 아는 것은 그것을 '분해'하고 그 '허구'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고 그것의 '침묵'의 의미를 알리는 것이다."(같은책)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작품의 그물 속에서 파악되기 때문에, 하나의 새로운 지위를 받아들이며, 그것의 직접성은 변형"되어 결국 "과거의 환상으로부터 '허구'적인 것이 된다."(같은책)
문학작품을 '설명'하려는 충동은 문학 내의 실제적 기능을 내포하는 환상의 메커니즘으로서의 언어 사용인 '이미지' 그 자체와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미지'에 위치를 부여하는데, 개개의 '이미지'를 증가시키고 새겨놓은 이 작업은 "질서의 탐구"로서 '과학'적 작업이다.
또한, 텍스트를 '창작'하는 것은 이 "질서 탐구"의 "끊임없는 재파악"이다.


"작품은 어떤 작업의 산물이자 기술의 산물이다. 그러나 모든 기술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술사나 흥행사의 일이 아니라 '노동자'의 일이다. 이 노동자의 힘은 '무(無)'로부터 완전히 선택된 형식을 생겨나게 하는 전혀 기적같은 것이 아니다... 텍스트 '생산자'로서의 '작가'는 특히 그가 가지고 일하는 재료들을 만들지 못한다."
- 피에르 마슈레,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 <1부. 몇 가지 기본적 개념들>, 1966.

'문학생산'은 '무(無)'로부터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재료'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는 '재료'들을 배열하고 '질서'를 부여하면서 생산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문학생산'의 조건은 "처음에 주어진 것, 즉 말의 경험적 의미에서 원인이 아니라 모든 작품을 측정할 수 있는 '합리성'의 원리"인데, "작품의 조건들을 인식하는 것은 그 구성의 실제 과정을 강조하는 것, 즉 실제로 다양한 요소들이 어떻게 작품을 구성하고 작품에 '일관성'을 부여하는가를 보여주는 것"(같은책)이다.

작가는 언어와 문자를 통해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사용'을 하는 '작가의 담론'은 "이론적 언표를 모방"하고 "그것의 기준을 반복"하며, "이 담론은 역시 '이데올로기'의 언어인 일상어를 모방"하고 "이 끊임없는 대조 속에서 언어의 실제 사용들을 혼합하는 문학은 마침내 언어의 '진실'을 드러내고 만다"(같은책). 
마슈레는 작가가 "설사 언어를 만들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언어로 실험하는 문학작품은 '지식'의 '유사물'인 동시에 일상적 '이데올로기'의 기묘한 모방"(같은책)이다.

따라서, '문학'은 '이데올로기'이고 '작가'는 언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사용하여 현실을 드러내며, '문학비평'은 이러한 '문학'을 '설명'하면서 현실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과학'이 된다.


"작가는 어떤 시대에 연결되는가라는 질문은... 방법적으로 '과학'적 비평의 최초의 질문이다."
- 피에르 마슈레,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 <2부. 톨스토이 비평가, 레닌>, 1966.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러시아 소설가 톨스토이를 '비평'하면서 "문학작품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하는데, 마슈레는 톨스토이에 대한 '문학비평가' 레닌의 작업을 조명한다. 
'작가'는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조망하지는 못하는데, 이론가로서 '비평가'는 이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과학자'이다.
'과학'은 '이데올로기'를 폐기하고 작품은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면서 동시에 거부하는데 '이데올로기'의 비체계적인 '의미작용'에 대한 다양한 독서를 제안하며 이것들을 언어의 '기호'들로 결합해낸다. '과학'으로서 '비평'의 역할은 "이 기호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다.
'문학작품'이라는 '거울'을 통해 '대상'은 완성되면서 '파편화'되는데, 문학적 '이미지'들은 이 '찢어짐' 속에서 나온다. '총체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개별적' 문학작품에 '과학'적 문학비평은 그 '보편성'을 부여한다.

"... 레닌은 문학작품이 허망한 '총체성'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필연적이고 실제적인 구분 속에서 단지 연구될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 피에르 마슈레, 같은책, 같은 부분.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 <3부>는 '몇 가지 작품들'에 대한 논고인데, '과학소설가' 쥘 베른느의 '불완전한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이다.

"쥘 베른느의 '문학적 실패', 이 시도의 취약함은 바로 그의 책들의 '소재'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베른느의 화해의 모든 이미지가 어떤 갈등의 묘사로 귀착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피에르 마슈레, [문학생상이론을 위하여], <3부. 쥘 베른느 혹은 불완전한 이야기>, 1966.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 어떤 '기술적 진보'도 현실의 '계급투쟁'을 담지 않는 한, '미래'를 생각할 수도, 재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과학기술' 발전을 '소재'로 하는 프랑스 '과학소설가' 쥘 베른느는 역설적이게도 결코 '과학'적이지 못하다.
엥겔스가 발자크 소설에서 부르주아계급의 '고상한 현실'을 그려내면서 그들의 '추락한 본질'을 의도치 않게 드러낸 것과 같은 '리얼리즘'적 '이중성'을 발견했듯, '문학비평'은 '문학작품'의 '이중성'을 설명해야 하는데, 쥘 베른느는 '과학기술'의 이름으로 현실의 '계급투쟁'을 탈색함으로써 그 '이중성'을 보여주며, 그로 인해 그의 이야기는 "불완전한 이야기"로 머문다.


"... 예술은 (부르주아 휴머니즘적)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나 체계의 요소로서의) '생산자'의 활동이다."
- 피에르 마슈레,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 <3부>, 1966.

'문학작품'은 부르주아적으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현실을 토대로 '생산'되는 것이다.

*** 

1.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1966), 피에르 마슈레, 배영달 옮김, <백의>, 1994.
2. [마르크스를 위하여], 루이 알튀세르, 고길환/이화숙 옮김, <백의>,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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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연구
김윤식 지음 / 문학사상사 / 198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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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의 점령(占領)'과 문화예술인 '임화(林和)'
- [임화(林和) 연구], 김윤식, <문학사상사>, 1989.
 


"사람은 누구이든지 '제1, 제2의 점령' 범위 내에서는 자유인 상태에 있다. 즉 말하자면 앞으로 걸을 수도 있고 또한 옆으로도 누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다음 '제3의 점령'은 용이히 자유로운 상태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땅에서 조금이라도 높이 뛰어오르려 해도 결국 지구의 인력에 저지되어 얼마 뛸 수 없다. 그러나 당세기에 있어 비행기의 발명은 결국 인류를 '제3의 점령'에서 비교적 완전히 탈출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그칠 바를 몰랐다. '제4의 점령'에다 자유해방을 구하여 결국 '예술'을 낳아놓고 말았다."
- 임화(林和), [근대문예잡감], <매일신보>, 1926. 5. 23.
 

'제1의 점령'은 점(點)이다. 이 공간 아닌 공간에서는 그 어떤 것도 옴짝달싹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자유롭다. '자유'라는 실체적 개념조차도 허락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제2의 점령'은 선(線)이다. 이 공간 비슷한 공간에서는 단 두 가지의 방향밖에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자유롭다. 나아갈 곳이 정해진 바 '자유'라는 말조차도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제3의 점령'은 면(面)이다. 공간으로서의 그야말로 이 공간은 나아갈 바가 자유롭게도 많은 현실이다. 그러나 자유롭지 못하다. 현실이란 '자유'라는 어휘 자체도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음에 자유롭고 정해진 '자유'이기에 자유로우며 자유롭기에 자유롭지 않은 것 투성이다, 온통.
그러나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다.
'제4의 점령'은 식민지 조선의 시인, 아니 '문화예술인' 임화(林和)에게는 '예술'의 영역에서 자유로이 열린다.


임화(1908~1953), 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며 보성중학교를 중퇴한 이듬해인 1926년에 위와 같이 '문화예술'에서 '제4의 점령(영역)'을 발견하면서 시와 문학평론을 시작한 인물이다. 그 해 그의 나이 18세였다.
1953년 북조선인민공화국에서 '남로당파' 박헌영 등과 함께 '미제 간첩'의 죄명으로 처형당하기 전까지 임화는 시인, 문학평론가, 영화배우 등의 '문화예술인'으로 살았다. 그것도 사회참여적, 실천적 문예인으로.


"(시인 이상이 취한) 유클리드 기하학은 교과서이다. 이 교과서를 버린 임화에게는 아무런 방패가 없었다. 기댈 곳 없음을 특질로 하는 가출 모티브는 근거없는 것, 무지개 같은 것, '제4의 점령'을 향한 줄달음이 있을 뿐인데, 그 때문에 임화는 그 누구보다도 파괴적이자 현실부정적일 수 있었다."
- [임화(林和) 연구], 김윤식, 1989.


1927년은 '카프(KAPF)'의 '1차 방향전환'의 해였는데, '조선 프롤레타리아 경향문학단체'인 '카프'가 단순한 '문학운동'을 넘어 사회변혁적 '참여문학' 단체로의 전환을 선언한다. 그 내용은 '볼셰비키화' 제창이며, 1925년부터 본격 시작된 '조선공산당' 건설과 함께한다는 의미였다.
'임화(林和)'라는 필명은 1927년 <조선일보>에 '무산계급 전망'을 주제로 한 평론에서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임인식의 최초 필명은 '성아(星兒)였고, 초기 경향은 시인 이상과 같이 '다다이즘', '미래파' 등의 '제4의 영역'으로서 '문학'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임화가 1927년 '카프'의 목적의식적 '1차 방향전환'을 목도한 후 1928년 '카프'의 초기 지도자 회월 박영희 등과 교류하고 1930년 동경에서 '무산자파'의 영향 아래 다시 1932년 조선에서 '카프'의 서기장이 되기까지의 궤적은 이전 '모더니즘'적 요소를 버리고 실천적 '경향파' 문학인으로서 '카프'의 '볼셰비키화'를 주도하는 과정이었다.

1929년 임화의 대표작인 단편 서사시, [우리 옵바와 화로], [네 거리의 순이] 등은 '카프' 지도자 중 하나인 팔봉 김기진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중화의 일환"이었으며, "임화 초기 시작의 배경이던 '다다이즘', '미래파' 등의 요소가 프롤레타리아 시에 '내면의 깊이'와 '외면의 넓이'를 획득하게 했다"면서 이것이 바로 "진지한 의미의 '모더니즘'적 기법"이라고 문학평론가 김윤식 교수는 [임화 연구]에서 평가한다.
당시 '모더니즘'이란 기존 관성에 대한 반발이므로, 초기 '성아' 임인식이든 이후의 '임화'든 결국 '모더니즘'의 영역에 속한다.


"'운동으로서의 문학' 개념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조직론(이론)과 창작(실천)이겠는데, 이 경우 실천으로서의 창작은 부분적, 파편적인 것이 아니고 총체적, 변증법적인 것이다. 따라서 시로서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 임화가 조직이 해체된 1935년 이후에도 계속 '소설론' 및 창작평에 주력한 것은 이로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론'에서 문학사랄까 '사적유물론'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지 시로서는 그러한 문제가 결코 커버될 수 없기 때문이다."
- [임화 연구], 김윤식, 1989.

1935년 '카프'는 공식적으로 해산된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카프' 잔당들의 내면 풍경은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임화의 노선으로,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을 우위에 둔 "작가의 창작과 세계관과의 일원론적 시각"이고(주인공-성격-사상),
둘째는 김남천의 노선인 "정치적 실천에 기인한 작가에 의해 보충되는 창작"으로서 "창작과 세계관의 분리" 입장이며(세태-사실-생활),
셋째는 이기영의 노선, 즉 "단순한 이론투쟁 수준이 아닌 현실적인 창작적 실천"으로서 "창작이 그대로 실천 자체"라는 것이다.

임화의 노선은 "문학과 삶, 예술과 정치의 일원론"은 이른바 '변증법적 사고체계'를 방법론으로 하는데, '가출아'이자 '문제아'인 임화가 1935년 [조선신문학사론 서설]을 통해 관철하고자 한 그의 주된 "사상적 테마"였다.
임화의 문학사에 대한 '변증법적 해석'에 의하면, "전향한 박영희의 '이원론'이나 최서해식의 '체험론'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발전단계의 일환'으로 수용될 수 있는 처지"(서설)라는 것이다.


"... (초기) 이광수 문학은 미숙하나마 한일합방에서 3.1운동 직전까지의 한국(조선)인의 개인과 사회의 합일이라는 사회적인 의식을 문학으로 전위시켜 보여준 것이며, 3.1운동의 실패로 말미암아, 개인과 사회의 관계란 분리되어, 박영희적 관념의 가닥과 최서해적 체험의 가닥으로 분화되었던 것인데, 이 두 가닥을 종합하는 사회의식의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이른바 '신경향파' 문학이었던 것이다."
- [임화 연구], 김윤식, 1989.


'카프' 해산 이후 위와 같은 '창작과 이념의 변증법적 통일'의 관점에서 임화는 '조선 신문학사'를 3단계로 정리하는데, [임화 연구]에 의하면 이는 "주체 재건의 과정"이다.

1단계 [조선문학사론 서설](1935.10~11)에서는 '카프' 해산 이후 그 문학사적 '족보' 작성이고,
2단계 [개설 신문학사](1939.9~11)는 일본제국주의 파시즘의 기세 아래 조선의 신문학사를 정리하는 취지이며,
3단계로 [개설 조선신문학사](1940.11~1941.2)를 통해 제도적 장치로서 '근대성(모더니즘)'을 검토하고 '신문학'도 그러한 장치의 일종으로 파악하는 단계인데, 기존 '프롤레타리아 계급론'에서 '시민 계급론'으로의 전향 단계라는 것이다.

[임화 연구]에서 김윤식 교수의 평가에 의하면, 임화의 위 작업은 "자존심 회복의 차원에서, 즉 세계와 자아(개인)와의 '균형감각'을 찾으려는 임화 자신의 '내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들이 '자기 재건'의 노선으로 고를 것은 예술적 실천 일반이 아니라 '리얼리즘'적 실천 그것이다."
- 임화

임화의 '리얼리즘 선언'은, '고발문학', '전향문학' 등에 대하여 임화 자신도 [문제는 리얼리즘이다](1938)라고 외친 헝가리 마르크스주의 미학자 게오르그 루카치와 같이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발자크론]에 기대어 주장한 '리얼리즘론'이다.
즉, 지배계급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발자크의 소설이 오히려 지배계급의 본질을 '사실적'으로 정확히 묘사한다는 엥겔스의 문학비평론은 오늘날 TV '막장드라마'에서 묘사하는 '재벌'의 모습과 그를 추종하는 '서민들'의 판타지가 우리사회 계급성의 본질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과 같다.
루카치에 의하면, 엥겔스로 시작한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1) '역사적 유물론'의 일부이고, 2) 그 속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적용이며, 3) 그 아래 각각의 문학에서 독자적 법칙이 있음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결국, 당시 '레닌주의'를 표방한 '스탈린주의'로서 '볼셰비키화'를 주도했고 일단의 실패를 겪은 후, 임화의 문학적 "주체 재건의 과정"은 '마르크스주의 미학론'으로의 회귀다.


식민지 말기 잠시 '전향'하여 '문인보국회' 이사로 등재되고, 해방 후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는 통일전선체 활동을 하다가 월북한 임화는 6.25전쟁 후 박헌영을 대표로 하는 '남로당파'와 함께 '미제의 고용간첩' 혐의로 숙청되는데, 아직까지 그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카프' 시절 동지인 문학평론가 백철의 증언에 의하면, 임화는 1934년 검거 당시 폐결핵으로 실신하는 연기로 구속을 면했다고 하는데, 백철은 연극도 하고 영화배우 경력도 있던 임화의 '연기력'이 매우 뛰어남을 지적한다.
'다다이스트'부터 '볼셰비키주의자', '리얼리즘론', '전향자'와 '공산주의자', 그리고 '미제 간첩'까지 식민지와 해방정국, 한국전쟁 중 할 것은 다 해본 임화의 '연기력'은 근대 문학사에서는 끊임없이 기존 관성을 부정하는 '모더니스트'였을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제4의 점령'에서 "자유해방을 구하는" 천생 '문화예술인'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시신도 못 찾은 임화가 지금도 죽지 않고 '제4의 점령'을 날아다니고 있을지도.

***

- [임화(林和) 연구], 김윤식, <문학사상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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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네버랜드 클래식 1
루이스 캐럴 지음, 존 테니엘 그림 / 시공주니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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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을 바꾸는 것은 '이상한 나라'의 '야만'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손영미 옮김, <시공주니어>, 2001.



"첫째 애는 성급하게
'시작해요!'라고 명령하고,
둘째 애는 조금 상냥하게
'재미있게 해 주세요.' 하고,
셋째 애는 채 일 분도 못 참고
이야기를 가로막는다.

아이들은 이내 입을 다물고,
상상 속에서 기이하고 새로운
마법의 땅을 여행하고
새나 짐승과 사이좋게 이야기하는
꿈의 아이들을 쫓아다닌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고 믿으려 한다.

지친 이야기꾼이 이야기도 떨어지고
상상의 샘도 말라서
'나머지는 다음에 하자.' 하고
화제를 돌리려고만 들면,
아이들은 '지금이 다음이에요!' 하고
신바람이 나서 외친다.

'이상한 나라' 이야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렇게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신기한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이제 이야기는 끝났고,
우리는 저물어 가는 햇살 속에서
즐겁게 노를 저어 집으로 돌아간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금빛 찬란한 오후 내내>, 1865.


1862년 7월 4일, 찰스 도지슨은 템즈 강에서 앨리스 리들의 세 자매들과 보트를 타고 놀면서 '이상한 나라' 이야기를 시작한다. 앨리스 리들은 돌아오는 길에 "그것을 책으로 써 주시면 정말 재미있을 것"이라고 말했단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를 쓴 루이스 캐럴의 본명은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 옥스퍼드 대학 수학부 교수였고, 그 대학 학장인 헨리 리들의 딸들과 '말장난'과 게임을 하며 놀아주던, '루이스 캐럴' 필명은 모호하나 본명이 '찰스'인 것을 보니 남성이다.
그는 수학 뿐만 아니라 논리학, 그림, 사진 등을 즐겼으며, 영국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기인'에 속한다고도 한다.

앨리스는 '그림도 대화도 전혀 없는 책'을 읽고 있는 언덕 위의 언니 옆에서, 동화의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잠이 드는데, 장자의 '호접몽'처럼 경계는 모호하다. 아마도 그 경계는 '말하는 흰 토끼'였을 텐데,  이를 '비정상적인 일'로 생각하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끼는 순간이다.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모호해진 상황에서 '이상한 나라'로 진입한다.

앨리스 어린이는 '현실'에서는 규칙들을 내재화시키지 못한 '비정상'이다. 그러나 '이상한 나라'에서는 반대로 '현실'의 규칙을 지키려 하는 '비정상'이 된다. 역시 모호한 경계에 계속 서 있다. 그럼에도 그 꿈에서 깨지 않는다. 음료수를 마시고 몸이 작아지고 과자를 먹고는 거인이 되고 '눈물바다'를 만들어 떠다니면서도 깨어날 생각을 않는다.
'어른들'은 가위 눌려 깰 이야기들일 수 있겠으나 앨리스는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이야기를 끝까지 이어간다. 작자의 의도이기는 하나, 어쨌든 '이상한 나라'에서 어린이 앨리스의 호흡이 어른인 언니의 그것보다 길다.

'현실'의 어른인 언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꿈 속의 모험을 이어가기에 너무 성장했을 것인데, 꿈에서 깨어 '이상한 나라' 이야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반쯤의 꿈'을 꾼다.


"'아, 정말 이상한 꿈을 꿨어!
앨리스는 언니에게, 여러분이 방금 읽은 모험 이야기를 최대한 기억해 내서 모두 해 주었다...

앨리스의 언니는 동생을 보내놓고 턱을 괴고 앉아서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어린 앨리스와 앨리스의 멋진 모험을 생각하다가 꿈 비슷한 것을 꾸었다...
언니는 눈을 감고 앉아서 자신이 이상한 나라에 있다는 것을 반쯤은 믿었다. 하지만 눈만 뜨면 이 모든 것이 단조로운 현실로 바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앨리스의 증언>, 1865.


'현실'의 규칙에 익숙해진 언니는 온전히 '이상한 나라'로 들어갈 수 없다. 눈을 감고 졸면서도 눈만 뜨면 미친 모자장수와 삼월토끼의 '달그락거리는 찻잔소리'는 '양들의 방울소리'로, '가짜거북의 구슬픈 울음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들의 울음소리'로 바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어른'인 언니는 '경계' 혹은 '선'을 넘지 못한다. 넘을 수 없다.
'현실'의 '비정상'인 어린이 앨리스는 이야기 첫 장부터 모호한 '경계'에 줄곧 섰다가 간단히 '선'을 넘어버렸다. '흰 토끼'를 매개로 빠져버린 '이상한 나라'에서 온갖 '비정상'들을 만나면서 '현실'적이었던 자기를 버리고 금방 동화되어 버린다. 
'이상한 나라'에서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선이란 애초에 없다.

꿈에서 깨어도 앨리스에게는 변한 것이 없다.
보물섬을 다녀와 보물을 얻은 것도, 시련을 통해 어른이 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상한 나라'로의 기행을 통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평생 잊을 수 없는 '영역'을 구축한다.
'현실'의 어른들 규칙을 '문명'이라 하자. 한편으로 이 어린이의 '영역'을 '야만'이라 해보자. 
'문명'의 관점에서 '야만'은 '비정상'일 테지만, 이 '문명'은 '혁신'과 '개혁'을 외칠 때도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 반면, '야만'이라는 '이상한 나라'에는 '경계'가 없으니 '선'은 넘으라고 있는 것이다. 
넓은 땅을 지배했던 로마제국이라는 '문명'을 무너뜨린 건 다른 '문명'이 아니라 게르만족 '야만'의 이동이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 다음으로 내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이야기다. 스토리나 구성을 생각할 수 없는 나이에 그런 걱정 없이 '의식의 흐름'으로 읽을 수 있는, 한편으로 머리는 복잡하나 그 정체가 무언지 굳이 알 필요 없는 이야기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규칙들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잠시나마 탈주하는 문이었고, 지금은 굳게 닫았으나 '선'을 넘어야 할 때 언제든 열 수 있는 마음 속 출구일 것이다.


디즈니 만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내 어릴 때는 볼 수 없었고, 내 아이들 어렸을 적 보여준, 사실은 내가 주로 보고 싶었던 애니메이션인데,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시리즈 중 개인적으로 제일 잘 만든 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원작 '고전 동화'에 대한 애정 때문일 게다.
또한, 냉전시대 미국의 '메커시즘(반공주의)' 광풍 속에서 나왔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물론 지극히 보수적인 디즈니의 의도는 아닐테지만, '전체주의'가 지배적인 세상에 던지는 '이상한 나라' 이야기란 그 자체로 멋진 것 아닌가.

'문명'을 바꾸는 것은 '이상한 나라'에서 온 '야만'이다.

***

1.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손영미 옮김, <시공주니어>, 2001.
2.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교원애니메이션세계명작동화>,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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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 네버랜드 클래식 29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김영선 옮김, 노먼 프라이스 그림 / 시공주니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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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의 '어른들'
- [보물섬](188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김영선 옮김, <시공주니어>, 2006.



"트렐로니 지주와 리브시 판사를 비롯한 몇몇 양반들이 나에게 보물섬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쓰라고 요청했는데, 아직 가져오지 못한 보물이 남았으므로 보물섬의 위치만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기록하라고 했고 나는 17백 몇년의 어느 때로 돌아가서 펜을 들어야 했다. 내 아버지가 남긴 '벤보우 제독' 여관 처마 아래로 뺨에 큰 칼자국이 있는 늙은 선원이 처음 들어섰던 바로 그 때 말이다."
- [보물섬], 로버트 스티븐슨, <1장, '벤보우 제독' 여관의 늙은 선원>


내 어릴적 가장 감명깊게 읽은 동화책을 꼽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내놓는다.
초등학교 때 우리집 '세계명작동화전집'에 있던 [보물섬]. 그러나 어렸을 당시에 책을 열심히 읽었던 것은 아니고 TV에서 방영하던 [보물섬] 만화를 본 후에야 비로소 그 전집을 뒤졌던 것 같다.
당시는 몰랐으나 1970년대 후반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방송되었던 그 때.
주인공은 짐 호킨스,
바로 이 녀석이다.



내가 '최고의 동화'로 기억하는 첫째 이유는 '악역'으로서 해적들의 개성들과 그들의 오랜 관계에 관한 추억이었다.
원래 스티븐슨이 처음 이 소설을 썼을 때 제목은 [바다의 요리사(The Sea Cook)] 정도였다고 하는데, '외다리 실버'가 주인공이라는 것이리라.
화자인 짐 호킨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소설의 초반부에 등장한 무서운 해적들의 거대한 배후이자, 전설의 플린트 선장의 실질적 후계자. 첫 장면에서 짐의 벤보우 제독' 여관에 들어선 칼자국의 빌리 본즈 부선장이 가장 두려워 한 인물 '외다리 실버'는 실질적 '주인공'이니 만큼 부하들을 먼저 몇 명 보내고는 한참 후인 <제 2부> 즈음 되어서야 등장한다. 

나는 빌리 본즈 선장이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는데, 전설의 플린트 선장의 해적단에서 '1등 항해사'로서 2인자였으며, 플린트 사후 보물지도를 가로챈 도망자, 예전의 동료들로부터 쫓겨다니는 주정뱅이 늙은 선원이 등장한 소설의 그 첫 장면이, 망상에 쫓기면서 '검은 동그라미'를 받고 혼자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어갔을 그 허무함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1인자가 되지 못한 2인자의 최후가 내게는 그토록 애잔했다.

그 외에 잘린 손가락의 검둥개, 말발굽에 비명을 다한 쇳소리의 장님 퓨... 이들은 빌리 본즈 부선장이 얼굴에 칼자국이 나고, 2등 항해사 실버의 한쪽 다리가 날아갔던 오래전 '대전투'에서 함께 싸우다가 손가락을 잃고 눈을 잃었을 해적단의 '동지'였고, 보물지도를 둘러싼 '내부의 적들'이었다.
어린 내게는 히스파니올라호 선원들의 보물섬을 향한 모험보다는 소설이 '침묵'하는 이야기, 플린트 해적단의 아련한 모험이 더 좋았다.
망원경을 든 채 석양을 비껴 선 빌리 본즈 선장의 외로운 어깨와 보물섬을 향한 이룰 수 없는 아련한 꿈은 오래된 해적 동지들의 최후를 미리 보여주고 있었다.


"실버에 관해서는 더 이상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 어마어마했던 외다리 선원은 내 삶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어딘가에서 예전의 흑인 부인을 다시 만나고 앵무새 '플린트 선장'과 평안히 지내고 있을 것만 같다. 물론 그 가능성이 적을 것이기에, 나의 바램에 불과하겠지만... 
난 아직도 악몽을 꾸며 한밤중에 깨어 일어난다. 어떤 날은 그 보물섬의 높은 파도소리가, 또 어떤 때는 "8센트! 8센트!"를 외쳐대는 앵무새 플린트의 목소리가 귓속을 맴도는 채로."
- [보물섬], 로버트 스티븐슨, <34장, 마지막 이야기>

두 번째 감동의 지점이 [보물섬]의 핵심이다.
어린 화자 짐 호킨스에게 크고 '어마어마했던' 어른들, 특히 믿음과 배신의 양 극단을 알게 해준 '외다리 실버'로 대표되는 그 '어른들' 이야기다.
애초에 내겐 히스파니올라호나 대지주 트렐로니, 리브시 판사 등은 관심 밖이었고, 카리스마 넘치는 스몰레 선장의 위기극복 '리더십'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중에 글을 쓰는 짐 호킨스는 예전의 빌리 본즈보다, 외다리 실버보다 더 힘이 센 청년이 되었을 테지만, 그의 마음은 잠시나마 '아버지' 같던 빌리 본즈와 오랜 시간 '삼촌' 같던 실버보다 언제까지나 여릴 것이다.

다 큰 나는 안다.
어릴 때 가장 커 보이던 '아버지'가 사실은 얼마나 '초라'했을 때가 많았을지, 제일 힘세 보이던 '삼촌들'이 사실은 힘없는 다수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인지.
그럼에도, 그 '어른들'은 다 큰 내 마음 속에서 여전히  그 모습으로 계속 살아 계속 불려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어른'이 된 내가 그런 존재가 되어 있음을.
그리하여, 우리의 [보물섬]이 달리 '고전동화'가 아님을.


이 두 가지가, 내 아들이 한글도 익히기도 전, 잠자리에서 [보물섬]을 수 백번 읽어준 이유다.

***

1. [보물섬](188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김영선 옮김, <시공주니어>, 2006.
2. [Treasure Island], Robert Louis Stevenson, <Collins classics>, 2010.
3. [보물섬], <교원 애니메이션 세계명작동화>,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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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 비룡소 클래식 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에드워드 윌슨 그림, 정영목 옮김 / 비룡소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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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의 '어른들'
- [보물섬], 로버트 스티븐슨, 김영선 옮김, <시공주니어>, 2006.



"트렐로니 지주와 리브시 판사를 비롯한 몇몇 양반들이 나에게 보물섬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쓰라고 요청했는데, 아직 가져오지 못한 보물이 남았으므로 보물섬의 위치만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기록하라고 했고 나는 17백 몇년의 어느 때로 돌아가서 펜을 들어야 했다. 내 아버지가 남긴 '벤보우 제독' 여관 처마 아래로 뺨에 큰 칼자국이 있는 늙은 선원이 처음 들어섰던 바로 그 때 말이다."
- [보물섬], 로버트 스티븐슨, <1장, '벤보우 제독' 여관의 늙은 선원>


내 어릴적 가장 감명깊게 읽은 동화책을 꼽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내놓는다.
초등학교 때 우리집 '세계명작동화전집'에 있던 [보물섬]. 그러나 어렸을 당시에 책을 열심히 읽었던 것은 아니고 TV에서 방영하던 [보물섬] 만화를 본 후에야 비로소 그 전집을 뒤졌던 것 같다.
당시는 몰랐으나 1970년대 후반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방송되었던 그 때.
주인공은 짐 호킨스,
바로 이 녀석이다.



내가 '최고의 동화'로 기억하는 첫째 이유는 '악역'으로서 해적들의 개성들과 그들의 오랜 관계에 관한 추억이었다.
원래 스티븐슨이 처음 이 소설을 썼을 때 제목은 [바다의 요리사(The Sea Cook)] 정도였다고 하는데, '외다리 실버'가 주인공이라는 것이리라.
화자인 짐 호킨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소설의 초반부에 등장한 무서운 해적들의 거대한 배후이자, 전설의 플린트 선장의 실질적 후계자. 첫 장면에서 짐의 벤보우 제독' 여관에 들어선 칼자국의 빌리 본즈 부선장이 가장 두려워 한 인물 '외다리 실버'는 실질적 '주인공'이니 만큼 부하들을 먼저 몇 명 보내고는 한참 후인 <제 2부> 즈음 되어서야 등장한다. 

나는 빌리 본즈 선장이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는데, 전설의 플린트 선장의 해적단에서 '1등 항해사'로서 2인자였으며, 플린트 사후 보물지도를 가로챈 도망자, 예전의 동료들로부터 쫓겨다니는 주정뱅이 늙은 선원이 등장한 소설의 그 첫 장면이, 망상에 쫓기면서 '검은 동그라미'를 받고 혼자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어갔을 그 허무함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1인자가 되지 못한 2인자의 최후가 내게는 그토록 애잔했다.

그 외에 잘린 손가락의 검둥개, 말발굽에 비명을 다한 쇳소리의 장님 퓨... 이들은 빌리 본즈 부선장이 얼굴에 칼자국이 나고, 2등 항해사 실버의 한쪽 다리가 날아갔던 오래전 '대전투'에서 함께 싸우다가 손가락을 잃고 눈을 잃었을 해적단의 '동지'였고, 보물지도를 둘러싼 '내부의 적들'이었다.
어린 내게는 히스파니올라호 선원들의 보물섬을 향한 모험보다는 소설이 '침묵'하는 이야기, 플린트 해적단의 아련한 모험이 더 좋았다.
망원경을 든 채 석양을 비껴 선 빌리 본즈 선장의 외로운 어깨와 보물섬을 향한 이룰 수 없는 아련한 꿈은 오래된 해적 동지들의 최후를 미리 보여주고 있었다.


"실버에 관해서는 더 이상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 어마어마했던 외다리 선원은 내 삶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어딘가에서 예전의 흑인 부인을 다시 만나고 앵무새 '플린트 선장'과 평안히 지내고 있을 것만 같다. 물론 그 가능성이 적을 것이기에, 나의 바램에 불과하겠지만... 
난 아직도 악몽을 꾸며 한밤중에 깨어 일어난다. 어떤 날은 그 보물섬의 높은 파도소리가, 또 어떤 때는 "8센트! 8센트!"를 외쳐대는 앵무새 플린트의 목소리가 귓속을 맴도는 채로."
- [보물섬], 로버트 스티븐슨, <34장, 마지막 이야기>

두 번째 감동의 지점이 [보물섬]의 핵심이다.
어린 화자 짐 호킨스에게 크고 '어마어마했던' 어른들, 특히 믿음과 배신의 양 극단을 알게 해준 '외다리 실버'로 대표되는 그 '어른들' 이야기다.
애초에 내겐 히스파니올라호나 대지주 트렐로니, 리브시 판사 등은 관심 밖이었고, 카리스마 넘치는 스몰레 선장의 위기극복 '리더십'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중에 글을 쓰는 짐 호킨스는 예전의 빌리 본즈보다, 외다리 실버보다 더 힘이 센 청년이 되었을 테지만, 그의 마음은 잠시나마 '아버지' 같던 빌리 본즈와 오랜 시간 '삼촌' 같던 실버보다 언제까지나 여릴 것이다.

다 큰 나는 안다.
어릴 때 가장 커 보이던 '아버지'가 사실은 얼마나 '초라'했을 때가 많았을지, 제일 힘세 보이던 '삼촌들'이 사실은 힘없는 다수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인지.
그럼에도, 그 '어른들'은 다 큰 내 마음 속에서 여전히  그 모습으로 계속 살아 계속 불려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어른'이 된 내가 그런 존재가 되어 있음을.
그리하여, 우리의 [보물섬]이 달리 '고전동화'가 아님을.


이 두 가지가, 내 아들이 한글도 익히기도 전, 잠자리에서 [보물섬]을 수 백번 읽어준 이유다.

***

1. [보물섬](188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김영선 옮김, <시공주니어>, 2006.
2. [Treasure Island], Robert Louis Stevenson, <Collins classics>, 2010.
3. [보물섬], <교원 애니메이션 세계명작동화>,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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