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0 세트 - 전20권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서중석.김덕련 지음 / 오월의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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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중항쟁
- 신군부 쿠데타 세력에 의한 계엄령 선포와 광주민중들의 항쟁



"윤상현(소설 속 윤상원 열사)! 넌 왜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 하는가?... 
누군가는 이 자리를 지켜야 해. 지난 열흘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이어온 이 뜨거운 항쟁의 마침표를 누군가는 찍어야 해.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 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내가 하겠다는 거야. 이유는 다만 그것 뿐이야. 저 불의한 압제자들에게 이 자리를,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냥 고스란히 내어줄 수는 없어. 절대로. 그것이야말로 저들의 승리를 완전히 인정해 주는 것이 되고 말 터이므로...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설사 이 순간엔 우리의 싸움이 패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야. 훗날 다른 누군가가 이 싸움을 다시 시작하겠지. 그래, 아무 것도 헛된 것은 없어. 우리가 꿈꾸었던 것, 사랑하고 소망하고 투쟁했던 것, 진정 그 어떤 것도 헛된 것은 없어..."
- [봄날] 5권, '1980. 5. 27. 윤상원 열사의 독백', 임철우, <문학과지성사>, 1997.


들불야학 선생으로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지키던 서른 살 윤상원 열사의 심경을 작가 임철우가 그의 소설 [봄날]에서 재구성한 대목이다.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스물여섯 살이었던 소설가 임철우는 '살아남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런 스스로와 '화해'도 하지 못한 채 항쟁 후 17년이 지난 1997년에 '광주민중항쟁'의 일지를 소설로 재구성했는데, 바로 소설 [봄날]이다. 주인공은 가상의 인물이되 시공간은 사실 그대로를 배경으로 하는 논픽션 르포문학이다. 
'민중의 애국가'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기리는 '영혼결혼식'의 주인공인 윤상원 열사는 5월 광주의 마지막 날이었던 1980년 5월 27일, 최후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던 시민군들과 함께 본인이 국민으로 살았던 국가의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은 대한민국 정규군대가 국민을 상대로 벌인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1979년 10월에 독재자 박정희가 저격 당하면서 길고 긴 18년 간의 군부개발독재가 일단 종식되었고, 1980년 봄은 전국에 걸친 민주화의 물결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15일, 약 10만여명의 학생과 시민은 자발적으로 서울역에 모여 조속한 시일 내에 계엄을 해제하고 민주화를 추진할 것을 주장했으나 시위와 농성이 계속될 경우 군이 개입할 명분을 준다는 주장이 나오자 지도부 역할을 하던 대학생들은 시위를 해산하기로 결정하고 서울역에서 물러난다. 이를 사람들은 '5.15 서울역 회군'이라 부른다.

이후 바로 전해 '12.12 쿠데타'로 이미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5월 17일을 기하여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국회 해산, 국보위 설치 등의 조치를 단행하게 되는데, 전두환 '신군부'의 1979년 '12.12 쿠데타'에 이은 1980년 5.17 '2차 쿠데타'였다.


이날 광주에서는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전남대 등지에서 대학생들이 횃불 시위 등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역사적인 5월 18일, 신군부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두려워하여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는 대학생들과 군인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면서 학생들에 대한 군인들의 무자비한 시위 진압이 시작된다. 
전남대 앞에서의 진압은 5.18 광주민중항쟁의 첫 시작이었다. 이어 학교에 진입하지 못한 학생들이 광주 시내에 모여 군대를 물릴 것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개되었고 군대는 밤 9시 이후 통행금지 조치까지 내렸으나 민주화를 열망하는 광주민중들의 시위는 더욱 거세어질 뿐이었다. 이에 신군부는 광주지역을 고립시키고 특수부대 및 군인들을 증파하여 무자비한 폭력과 심지어는 군용칼까지 휘두르며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잡아간다. 하지만, 신군부의 이러한 진압행위는 광주민중들의 분노를 더욱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고 시위와 항쟁이 더욱 들불처럼 번지게 된다.
 
5월 20일, 고등학생들까지 시위대에 참여하게 되었고 신군부는 고등학교에까지 휴교령을 내렸다. 택시와 버스들도 차량시위를 벌이면서 광주민중들의 항쟁은 커져만 가는데, 신군부의 통제를 받은 방송과 신문은 고립된 광주의 상황을 ‘북한의 명령을 따른 폭도들에 의한 것’이라고 허위보도를 일삼는다.
 
5월 21일, 신군부는 금남로에서 시위 중이던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 집중사격을 하였고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가면서 광주민중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경찰서와 탄약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였다. 스스로 무장한 시민군은 군대를 광주 외곽으로 몰아내고 그들이 다시 몰려오는 5월 27일까지 광주의 질서를 유지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 짧은 시간 동안 광주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고 범죄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으며 시민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격려하는 등 ‘파리꼬뮌’이 아닌 이른바 ‘광주꼬뮌’으로 불릴 정도의 '민중 자치의 해방구'였다고 한다.
 
5월 27일 새벽, 신군부는 탱크까지 앞세우고 시내로 진격해 들어왔고, 시민군은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하지만, 중무장한 정규 군대를 시민군이 당해낼 수는 없었고 끝내 도청에 남아있던 많은 시민들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5.18 광주민중항쟁은 비극으로 끝난다.
12.12 쿠데타로 대통령 최규하를 허수아비로 만든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5.27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위한 '대책회의'에서 '광주사태'에 대한 '강경진압'을  지휘했고 '조기진압'을 위해 군대가 광주 시민들에게 직접 사격을 한 날 진압군에 '하사금'을 내리기도 했다. 
전두환이 광주 학살의 책임자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이제 그 자에게는 '옥사(獄死)'의 길 밖에 없다.

역사학자 서중석 교수는 '이명박근혜 정권'의 '뉴라이트' 역사왜곡에 대항하여 해방 이후 한국전쟁과 18년 박정희 군부독재 시기를 거쳐 전두환 학살정권에 이르는 우리 현대사를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기자 김덕련과의 문답 형식을 빌어 정리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권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이야기이고, 17권은 광주민중을 학살하고 집권한 '5공화국' 학살정권의 '잔혹사'를 다룬다.

소설 [봄날]에서 윤상원 열사의 입을 빌어 말한 "우리가 패배할지라도 훗날 다른 누군가가 다시 시작할 이 끝나지 않는 싸움"은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그 해 '8월 노동자 대투쟁', 1996년의 '총파업', 2002년과 2008년의 대규모 '촛불시위'와 최근의 2016~17년 '촛불항쟁'으로 계속 되살아나 우리 역사를 전진시켜 왔다.


우리 역사에서 5월 18일은, 당시 전두환 신군부 쿠데타 정권의 파쇼적 실체와 이에 대항한 우리 민중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세상의 주인인 우리 민중들을 폭력만으로 억압하고 통치할 수는 없다는 역사적 진실 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민주주의의 역사적 '아이콘'이 되어왔고, 이후 이 땅 민주주의 역사의 살아있는 교본이자 이 땅의 민주주의와 노동해방을 이루고자 하는 후세대들에게는 기어이 한을 풀지 못한 하나의 ‘원죄’가 되어 왔다.

"... 긴 시간이 흘렀지만, 밝혀야 할 사안은 지금도 적잖게 남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뻔뻔한 거짓말과 터무니없는 궤변으로 오월 광주를 어떻게든 폄훼하려는 세력이 여전히 날뛰고 있습니다. 오월 광주 문제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오월 광주의 진실을 잊으면 민주주의의 미래는 없습니다."
-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17권, '나가는 말', 서중석/김덕련, <오월의봄>, 2019.


# 5.18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 산화해 간 민주주의 영령들의 넋을 기립니다.

***

1. [봄날] 1~5권, 임철우, <문학과지성사>, 1997.
2.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17권, 서중석/김덕련, <오월의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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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코스모스 - 전2권
앤 드루얀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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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전장에서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
-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1980)와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 - 가능한 세계들](2020)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니라..."
- [구약성경], <창세기>


"그리스인들은 신들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우주가 신들을 창조했다고 믿었다. 신들이 존재하기 전에 이미 천지가 형성되었고, 하늘과 땅이 최초의 부모였다. 티탄족은 그들의 자녀들이었고 (올림푸스) 신들은 그들의 손주들이었다...
신들이 등장하기 전인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한 태초에는 완벽한 어둠에 잠긴 무형의 혼돈 상태인 '카오스(Chaos)'만이 존재했다. 결국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두 자녀가 이 완벽한 '무(無)'로부터 태어났다. 이들은 '밤(Night)'과 '어둠(Erebos)'이었는데 당시 세상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죽음과 암흑, 무한의 공백 같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어둠으로부터 '사랑(Love)'이 태어나 질서와 아름다움의 힘으로 이 암흑의 세계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사랑'은 '빛(Light)'과 '낮(Day)'을 낳았다."
- Edith Hamilton, [Mythology](1940), <1-3. How the World and Mankind were created>에서 필자 번역


'철학(哲學)'의 전장(戰場)에는 두 개의 '거대한 진영'이 있다. 한 편에는 '물질'보다 '정신'이 우선한다는 '관념론'이 있고, 다른 한 편은 '물질'이 '정신'보다 일차적이라는 '유물론'이다.
철학의 기원인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 학파 탈레스는 세계의 근원 물질이 무엇인가 고민하다가 물, 불, 흙 등의 '원소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사상을 수학과 논리학 등의 형이상학적 증명을 시도한 것이 철학으로서 '관념론'의 시작이다. 이들은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종교'의 형태로 강화된다.
가장 원시적인 '유물론'은 고대 그리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인데, 모든 물질은 '원자'로 나뉜다는 주장이며 관념이 아니라 경험이나 실천 등의 중요성을 설파한 에피쿠로스학파 등이 뒤를 잇는다.
'관념론'은 '종교'의 발전과 함께, '유물론'은 '과학'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며 발전해 왔고 '철학'이라는 '사상의 전쟁터'에서 투쟁해 왔다. 


"인간 주체는 항상 어느 정도 자기 자신에게 낯선 자, 자신이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힘들에 의해 구성된 자다. 바로 이것이 유물론의 주장이다. 관념론이란 마치 스스로 태어나기라도 한 것 같은 주체를 출발점으로 삼는, 따라서 충분히 멀리 거슬러 올라가서 출발하는데 실패하는 철학이다."
- [유물론], <유물론들>, 테리 이글턴, 전대호 옮김, <갈마바람>, 2018.


영국의 문학 및 문화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현재까지 "마르크스주의가 옳다"는 명확한 당파성을 고수하는 '유물론자'다.
그에 따르면 고전적 유물론의 주장, 즉 '물질'이 '정신'보다 우선한다는 것은 기본 전제이기는 하나, 기계적 유물론을 넘어서야 한다. 1908년 레닌은 논쟁적 저작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정신' 또한 '뇌'라는 '물질'이 만들어낸 '최고 수준의 물질적 산물'이라는 식의 극단적 주장을 했는데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 여부는 명확하지 않은 상태이기는 하다.
테리 이글턴의 '유물론'은 현대 철학에서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 마르크스 등을 통해 '인간의 생체'가 중심이 되는 '신체적 유물론(Somatic Materialism)'으로 발전되고 있다. 그의 '철학 전장'에서는 "근본적인 사안들에서조차 합의에 이를 수 없는" '근대성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인해 인간의 욕망과 생체 모두를 아우르는 '신체적 유물론'만이 대안이 된다. 
과장을 섞으면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기독교적 관념론을 다른 편으로 하면서 '육체적, 성적 관계'를 가미한 그리스 신화의 '신체적 유물론' 같다.

그럼에도, 복잡한 '철학' 논쟁의 본질은 결국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이며, 그 극단을 이루는 질문은 "세계 존재의 기원은 무엇인가"이다.


"수천 년 동안 인류를 억눌러 온 생각은 이 우주가 눈에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신 또는 신들이 실을 당겨 조종하는 꼭두각시 연극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주위에 살고 있다. 그러다가 2,500년 전 이오니아에서 새로운 깨달음의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다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은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이 원래는 아주 단순한 형태에서 발생했다는 생각도 태동했다. 질병은 악마나 신리 만든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고개를 들었다. 지구는 단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별이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러한 사고의 혁명을 통해서 사람들은 '혼돈(Chaos)'에서 '질서(Cosmos)'를 읽어내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태초에 '형태가 없는' 혼돈이 있었다고 믿었는데 그 내용은 [창세기]의 구절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고대 이오니아인들은 우주에 내재적 질서가 있으므로 우주도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자연 현상에서 볼 수 있는 모종의 규칙성을 통해 자연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은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자연에게도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주의 이렇게 훌륭하게 정돈된 질서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1980), <7장 - 밤하늘의 등뼈>, 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6.


'코스모스(Cosmos)'는 인류 또는 생명체가 생겨나기 전의 '혼돈(Chaos)'으로서 우주 전체를 의미하는 '사실들의 총체'의 그리스어 표현이다. '우주'이되 현재만이 아니라 생명이 존재하기 전 헤아릴 수 없는 과거로부터 또 앞으로 셀 수 없이 먼 미래를 포괄하는 모든 '사실들의 총체'로서 '우주'다.

1939년 뉴욕 세계 박람회를 구경한 수많은 어린이 중 하나가 1980년에 '우주'에 관한 TV 시리즈를 정리한 책이 있다.
그 소년은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이고 그 방대한 주제를 다룬 책 제목은 [코스모스(Cosmos)]다.
1950년대부터 우주를 꿈꾸던 칼 세이건은 미국 NASA로 대표되는 우주 탐사계획이 활발하던 1970년대 '바이킹호'나 '보이저호' 탐사 프로그램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이 '천체물리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코스모스], [창백한 푸른 점] 등의 과학저서를 발표했다. 우리가 언뜻 본 적도 있을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는 사진은 2017년 토성에서 30년 넘는 임무를 수행하고 추락한 카시니호가 1990년대 토성을 탐사할 때 세이건이 주최측에 지속 건의하여 촬영한 사진이라고 한다. 나사는 실용성 없다며 카시니호가 굳이 각도를 돌려 사진 찍는 것을 계속 거절했는데 세이건의 끈질긴 설득으로 토성에서 본 지구의 사진을 담아서 후세에 남겼다. 토성에서 15억 킬로미터 떨어진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함께.

'코스모스'로서 우주는 1천억 개의 은하가 있고 한 개의 은하는 또 1천억 개의 별들이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별들과 항성계와 은하계들의 집합인 '코스모스'가 '무질서'한 '카오스'가 아니라 일정한 법칙을 담고 있는 '질서'라는 믿음과 방대한 천체과학실험을 통해 더 넓은 우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코스모스]는 강조한다. 
세이건은 이러한 '코스모스'에 대한 인식과 과학적 접근을 가능하게 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튼, 케플러, 다윈, 아인슈타인 등의 과학자는 물론,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까지 소환한다.
인간이 우주로 몇 발자국 내딛던 1980~90년대 천체과학자의 시선이었다.


"우리가 첫 번째 [코스모스]에서 말했듯이, "뇌는 아주 좁은 공간에 든 아주 넓은 장소다."... 작은 물질 단위들이 집단을 이루어 작동함으로써 자신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무언가로 바뀌는 것, '코스모스'가 스스로를 알아내는 수단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창발의 핵심이다... 
칼(세이건)은 사람의 대뇌겉질에 있는 연결의 개수가 100조 개쯤 되리라고 계산했다. 가시 우주에 있는 은하의 수보다 100배 더 많은 수의 연결이 우리 안에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이 위대한 탐사를 이제 막 시작했다. 생물학자들이 인간 유전체를 지도화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신경 과학자들은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개인마다 고유한 무언가를 지도화하는 작업에 나섰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의 모든 기억, 생각, 두려움, 꿈으로 아뤄진 고유한 배선도인 커넥톰(connectome)이다."
- 앤 드루얀, [코스모스 - 가능한 세계들](2020), <5장 - 우주의 커넥톰>,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2020.


칼 세이건은 1996년 작고했고, 1970년대부터 그와 함께 '코스모스'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그의 부인이자 역시 천체과학자인 앤 드루얀(Ann Druyan)은 칼 세이건의 뒤를 이어 천체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현재까지 '코스모스'를 이어왔다고 한다. 2020년 이 TV시리즈는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 - 가능한 세계들]로 출간되었는데, 20세기에 칼 세이건과 함께 바라봤던 거대한 '코스모스'의 현재 모습을 그간의 과학적 성과를 토대로 이어서 보여준다.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가 제시하는 '우주력(The Cosmic Calender)'에 따르면, 우주 발생 후 지난 138억년을 1년으로 치면 1개월은 11억년, 1주는 2억년, 1일은 3천만년, 1시간은 157만년, 1분은 2만년, 1초는 438년이다. 인류가 진화해 온 약 600만년은 '우주력'으로 환산하면 대여섯 시간에 불과하다.
20세기 칼 세이건은 '창백한 푸른 점'으로 46억살 지구를 직시하게 했고, 21세기 앤 드루얀은 우주력 1년 중 12월 31일, 5~6시간 전에 태어난 인류를 돌아보게 한다.

이처럼, 앤 드루얀은 칼 세이건 이후 현재까지 천체과학의 종합적 발전을 성과로 하여 '코스모스'로 나아가되 그 초점을 세이건과는 달리 '인류'에게 맞춘다.
"은하는 별을 낳고, 별은 행성을 낳으며, 그 행성과 위성은 자연히 생명을 낳는다([코스모스 - 가능한 세계들], <3장 - 사라진 생명의 도시>)"는 연쇄적 우주 역사에서 우리 태양계와 그가 속한 은하, 그 은하계 전체인 '코스모스'를 끊임없이 인식하며 막연하지만 "가능한 세계들"을 향해 나아가는 인류 말이다. 
비유가 맞는지 의문은 가나 '코스모스'의 망망대해로 나아가야 할 우리는 1만년 전 아시아 대륙에서 태평양 아래로 요트를 타고 내려가 인도네시아와 더 나아가 오세아니아를 개척한 '선조들'의 후손이라는 말과 함께.

21세기의 드루얀이 말하는 '인류'는 이제 '인류세(Anthropocene)'를 살고 있을지 모르는데, 지구 생명체 멸종의 기간인 '오르도비스기'-'데본기'-'페름기'-'트라이아스기'-'백악기' 이후 '인류 대멸종'의 기간이라는 의미로 '인류세'라는 여섯 번째 멸종 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20세기 인류가 초고속으로 발전시킨 '과학'의 성과는 이어가야 하지만, 그 동안 인류의 소행으로 지구에 더 이상 생명체가 존속하기 어렵게 되는 '기후 위기'와 맥을 같이 한다. 
21세기 드루얀의 [코스모스]가 제시하는 '가능한 세계'는 무엇인가.


"(지구에서의) '생존 지속 확률(100년당): 40퍼센트'
나는 저 40퍼센트라는 숫자를 가만히 응시한다. 물론 저 값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문득 내 귀에 황혼 녘 모헨조다로의 거리에서 주사위가 경쾌하게 구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꿀벌들이 다음 집을 어디로 할지 정하느라 윙윙거리는 춤으로 토론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빌로프와 동료들이 겪었던 허기가 느껴진다. 넘실거리는 물에 잠긴 스트로마톨라이트(생명의 기원)로부터 아인슈타인을 거쳐서 우리에게 오기까지 모든 존재가 품었던 모든 생각의 무게가 느껴진다. 아인슈타인이 1939년 세계 박람회 개막식에서 했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친다. '과학이 예술처럼 그 사명을 진실하고 온전하게 수행하려면, 대중이 과학의 성취를 그 표면적 내용 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까지도 이해해야 합니다.'"
- 앤 드루얀, [코스모스 - 가능한 세계들](2020), <13장 - 가능한 세계>,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2020.


'코스모스'의 140억년 역사에서 우주는 은하계를 낳았고 은하는 별들을 낳았으며 별들이 낳은 생명체에서 우연히 진화한 인류는 지금 모든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기후적 위기'를 겪고 있지만, '과학'의 성과를 선용하여 "자연의 책을 읽는 법을, 자연의 법칙을 배우는 법을... 익혔"고, "코스모스라는 망망대해에서 언제,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법을 익혔"으며, 그로 인해 "코스모스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수단이, 별로 돌아가는 길이 되었다(같은책, 13장 결론)"고 한다.

과학의 '올바른 진보'를 통해 우리가 사는 '코스모스'를 이해하고, 지구에서의 우리 삶이 끝나가기 전에 '코스모스'를 아우르는 '소통'을 꾸준히 시행하고 실험하자는 매우 낙관적인 과학자의 결론을 보면, 얼핏 '인류'라는 종에 관한 유발 하라리의 '빅 히스토리(Big History)'를 훨씬 넘어서는 '비기스트 히스토리(The Biggest History)'를 접하는 듯 하다.


"인류는 우주 한 구석에 박힌 미물이었으나 이제 스스로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로 이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기원을 더듬을 줄도 알게 됐다. 별에서 만들어진 물질이 별에 대해 숙고할 줄 알게 됐다. 10억의 10억 배의 또 10억 배의 그리고 또 거기에 10배나 되는 원자들이 결합한 하나의 유기체가 원자 자체의 진화를 꿰뚫어 생각할 줄 알게 됐다. 우주의 한 구석에서 의식의 탄생이 있기까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줄도 알게 됐다. 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세 충성해야 한다. 아니면, 그 누가 우리의 지구를 대변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생존은 우리 자신만이 이룩한 업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인류를 여기에 있게 한 '코스모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1980), <13장 - 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까?>, 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6.


20세기에 '코스모스'로 나아가든, 21세기에 '인류'로 다시 잠시 돌아오든, 천문학자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은 '과학자'이기에 우리 인류의 모든 선조들에 경의를 표하지만 특히 아인슈타인에게 특별한 존경을 표한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언급된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이나, 앤 드루얀의 책에서 언급된 아인슈타인의 '양자 물리학(역학)' 등은 문과생인 내가 이해하기 힘들어 내 주변에서 최고의 '이과적 두뇌'를 지닌 친구 철호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나름대로 '과학책'에 관한 '문과적 서평'을 써본다.

다시, '문과적'으로 돌아와서 '철학'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철학의 전장'에서 대결해 온 '거대한 두 개의 진영'인 '관념론'과 '유물론' 말이다.
미지의 '절대정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관념론'은 결국 '신화'나 '종교',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편에 있고, '과학'의 발전과 늘 함께했던 '유물론'은 인류의 생명을 존중하며 다수 인류와 그 성과를 기꺼이 공유하는 '민주주의' 편에 선 철학이다.

'코스모스'의 근원, 이 세계의 시작에 관한 존재론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민주주의 철학'인 '유물론'의 임무가 된다.
'철학의 전장'에서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은 그러므로 '유물론'이다.


"(철학이 과학의 영역에서) 구획선을 긋는다는 것은 이데올로기와 과학을 구별하여 사실상 하나의 길을 밝혀내기 위한 실천으로 볼 수 있다...
모든 과학적 실천은 자생적 '철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여기서 이러한 것들 사이에 게재되는 철학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유물론'과 장애가 되는 '관념론'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자생적 철학은 마지막 순간에는 철학사의 투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곧 유물론적 경향과 관념론적 경향 사이에서 벌어지는 세기적 투쟁으로 일컬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같은 투쟁은 더 멀리는 다른 형태에 의해서 불러일으켜지게 된다. 곧 이데올로기 투쟁과 계급투쟁이 그것이다."
- [철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1967), 루이 알튀세, 김용선 옮김, <인간사랑>, 1992.

***

1. [코스모스](1980), 칼 세이건, 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6.
2. [코스모스 - 가능한 세계들](2020), 앤 드루얀,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2020.
3. [Mythology](1940), Edith Hamilton, <New American Library>, 1969.
4. [유물론](2016), 테리 이글턴, 전대호 옮김, <갈마바람>, 2018.
5.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레닌, 박정호 옮김, <돌베개>, 1992.
6. [철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1967), 루이 알튀세, 김용선 옮김, <인간사랑>,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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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양장) - 세상의 모든 전쟁을 위한 고전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 3
손자 지음, 김원중 옮김 / 글항아리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평화(平和)'를 위해 '전쟁(戰爭)'을 논(論)하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전쟁이란 속이는 도(궤도:詭道)이다. 따라서 능력이 있는데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용병을 하되 적에게는 용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며, 가까운 곳을 노리면서도 적에게는 먼 곳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먼 곳을 노리면서도 적에게는 가까운 곳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롭게 하면서 적을 꾀어내고 (내부를) 어지럽게 하여 적을 습격한다. (적이) 충실하면 적을 방비하고, (적이) 강하면 적을 피하고, (적이) 분노하면 그들을 소란스럽게 하고, (적이) 비겁하면 적을 교만에 빠지게 하고, (적이) 편안해하면 그들을 수고롭게 만들고, (적이) 친하게 지내면 그들을 이간질하라. 그들이 방비하지 않는 곳을 공격하고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출격하라. 이것은 병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니, 정말로 사전에 누설되어서는 안된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계(計)>,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손자(孫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오나라 합려에게 기용된 군사가이자 정치가 손무(孫武)의 사상을 사마천이 춘추시대 제자백가 중 하나로 지칭한 학파로서 흔히 '병가(兵家)'로 분류된다. '병법서'는 군사전략전술에 관한 책으로 주나라 태공망 여상의 [육도삼략], 전국시대 명장 오기의 [오자병법] 등도 유명하다고 하나 '손자'가 정리한 13편의 [손자병법]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손무는 춘추시대 말기인 기원전 6세기경 패자가 되려던 신흥강소국 오나라의 합려에게 기용되기 전에 이미 [손자병법] 13편을 완성했다고 하나, 후세에 죽간으로 발견된 이 병법서가 손무의 것인지 아니면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 제나라에서 활약한 그의 손자 손빈(孫臏)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할아버지 손무의 저작을 손자인 손빈이 더 증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손자병법]의 무대는 '전쟁'만이 생존전략이던 춘추전국시대였다. 
춘추시대는 그나마 명분과 예의가 남아있어 전면전도 없었고 패전국은 승전국의 신하가 되어 예로써 섬기는 시대였다. 그러나 공자와 손무가 공존하던 시기는 그러한 예악 따위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오월쟁패로 월나라 구천이 오왕 합려의 아들 부차를 이겼을 때는 바야흐로 승전국이 패전국 전체를 멸망시켜 버리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시작이었다.
이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주류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게 되는 서쪽 변방 진(秦)나라의 '법가(法家)'와 동쪽의 강국 제(齊)나라의 '병가(兵家)', 이들을 조합하여 전국7웅을 넘나들며 유세하던 '술가(術家)' 등이 된다.

[손자병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에 관한 군사전략"이라 하겠다. 즉, '전쟁'에 관한 책이지만, '전쟁'보다는 '평화'를 지향하며 그래도 싸워야 한다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데 싸우기 전에 먼저 이겨놓고 싸우는 계책이다.
그리하여 손자가 제1편의 <계(計)>편에서 규정하는 '전쟁'은 다름아닌 '속임수(궤도:詭道)'가 된다. 정직하게 정면승부를 하는 것은 가장 하책으로 그 방법 밖에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쓰는 전술이다. 그러나 [손자병법]의 철학이자 가장 큰 '전략'은 '전쟁'이 아닌 '평화'이며, '속임수(詭)'는 불가피하게 '전쟁'에 임했을 때 사용하는 전술이다.
오랫동안 소인배들이 [손자병법]을 무조건 이기려고 사용하는 속임수의 경전으로 사용한 것은 '병가(兵家)'라기 보다는 모든 것을 '평화'가 아닌 '전쟁'으로 규정하고 남을 죽여야만 내가 산다고 생각한 '술가(術家)'의 영향인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적을 알지 못하고 나만 알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지게 될 것이며, 적을 알지 못하고 나도 알지 못하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게 될 것이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모공(謀攻)>,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세간에 알려진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패(百戰不敗)' 또는 '백전백승(百戰百勝)'의 원래 표현은 [손자병법]의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인 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인데, '승패(勝敗)'는 '전투'에 국한된 의미이고 '위태로움(태:殆)'이란 '전쟁'의 가능성 모두를 포함한다. 즉, '전쟁'은 물론 '평화'의 국면에서도 나 자신은 물론 상대방까지도 잘 파악해야 한다는 주관적, 객관적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적 '인식론'을 담고 있는데, '승패(勝敗)'만을 강조한 것도 '술가'의 유산일 것이다.


"전쟁이란 다섯 가지에 따라 경영되어야 하고, (일곱 가지) 항목을 비교하여 그 정황을 탐색해야 한다. 첫째를 '도(道)'라고 하고 둘째를 '천(天)'이라고 하며, 셋째를 '지(地)'라고 하고 넷째를 '장(將)'이라고 하며, 다섯째를 '법(法)'이라고 한다...
(일곱 가지) 계책 비교...
(첫째), 군주 중에 누가 도를 지키는가?
(둘째), 장수 중에 누가 더 유능한가?
(셋째), 천시와 지리는 누가 얻었는가?
(넷째), 법령은 누가 잘 시행하는가?
(다섯째), 병력은 누가 더 강한가?
(여섯째), 병사들은 어느 쪽이 더 훈련되어 있는가?
(일곱째), 상벌은 누가 분명한가?
나는 이런 것에 의거하여, 승패를 알 수 있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계(計)>,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전쟁' 뿐만 아니라 그 가능성을 포함하고 나아가 '전쟁'을 예방하는 '평화'에 관한 논의를 위해 [손자병법]의 <계편>에서는 철학적 방향을 제시하는데, 이른바 '5사7계(五事七計)'다.

'5사(五事)' 중 첫째 '도(道)'는 '올바른 길'이다. 죽음과 위험을 무릅쓰고 따를 수 있는 '도리'나 '정의', '명분'이다. 이로써 '정의의 전쟁'은 다수를 동원하는 명분이 된다. 둘째 '천(天)'은 '때'를 말하는데 '음양' 또는 계절적 요인 들이며, 셋째 '지(地)'는 지리적 요인, 넷째 '장(將)'은 전투를 지휘하는 장수, 다섯째 '법(法)'은 전투에서 유용되는 규율이나 상벌의 엄격함을 의미한다. 손자는 이 '다섯 가지 일(五事)'을 "아는 자는 승리하지만 알지 못하는 자는 승리할 수 없다(계편)"고 한다.

'5사(五事)'가 큰 전략이라면, 실제 전투에서 활용되는 '7계(七計)'는 전술인 바, 이를 잘 살펴 "군대를 쓰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니 그(오왕 합려)에게 남을 것(계편)"이라고 한다.

'5사7계(五事七計)'는 [손자병법]의 '전략전술론'이다.


"전쟁의 형세는 '기정(奇正)'에 지나지 않으나 기정의 변화는 남김없이 헤아릴 수 없는 법이다. '기정'이 상생하는 것은 마치 순환하는 것이 끝이 없는 것과 같으니 누가 능히 이것을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 [손자병법(孫子兵法)], <세(勢)>,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손자병법]에서 '전쟁'의 '형세'는 '기정(奇正)'인데, '기(奇)'는 '변칙'이고 '정(正)'은 '원칙'이다. '기'와 '정'은 상호대립과 침투를 반복하는 '변증법'적 관계를 이룬다. 어느 것이 우선인가 손자는 말하지 않으나 '전쟁'보다 '평화'를 우선시 한다면 '기'보다 '정'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도'이자 '천'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만으로는 안된다. 변칙적인 '기'를 잘 활용해야 한다. 
이것이 '기'와 '정'이 상호 변환하며, '정'을 지키되 '기'로서 승리한다는 '기정호변(奇正互變)'과 '출기제승(出奇制勝)'이며, <세(勢)>편이 <허실(虛實)>편으로 이어지는 이유인데, '예상을 뒤엎는 공격'이나 '한 번 쓴 계책은 버리기' 등의 '변칙'적 전술 등이 <허실>편의 내용이다.
<허실>에 이어지는 <군쟁>, <구변>, <행군>, <지형>, <구지>, <화공>, <용간> 등은 앞의 <계>, <작전>, <모공>, <형>, <세> 등의 '전략론'에 이어지는 '전술론'이다.
'전투의 상환 판단'이나 '지형 활용법', '살기 위해 어려운 지형에 들어가기'나 '간첩 활용법' 등은 '전투'에 임하는 각개 '전술'들이다. 

"적진아퇴(敵進我退) 적주아요(敵駐我擾) 
적피아타(敵避我打) 적퇴아추(敵退我追)"
- 마오쩌뚱, '16자 병법(전법)'

삼국시대 '난세의 영웅' 조조는 늘 전쟁터에서도 군막 안에서 책을 읽었다는데 [손자병법]을 최고의 병법서로 평가하고는 나름의 주석을 달았다고 한다. 중국의 혁명가 마오쩌뚱도 길고긴 내전 기간에 [손자병법]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하는데, "적이 공격하면 후퇴하고 적이 머물면 소요를 일으키며, 적이 피로하면 공격하고 적이 후퇴하면 추격한다"는 마오쩌뚱의 '16자 병법(전법)'은 [손자병법] '전술론'의 골자를 정리하고 있다.
이들 모두 '도'를 따르는 평화'를 위해 '정의'의 '전쟁'을 수행했던 정치가들이었다.


"옛날에 전쟁을 잘하는 자는 먼저 (적이) 승리할 수 없도록 만들고, 적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기를 기다린다. (적이)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으며 (내가)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적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능히 (적이) 승리할 수 없게 만들지만 적으로 하여금 (내가) 기필코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승리란 (미리) 알 수는 있어도 만들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형(形)>,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손자병법]을 '술가'가 아닌 '병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병법서는 '전쟁'을 다루되 '평화'를 지향한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 즉 '올바름'이므로 '변칙'으로서 '기'는 '올바름'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수단이며, 그럼에도 '평화'를 위해 '전쟁'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기지 못할 싸움은 하지 말 것"이고, "싸움을 하기 전에는 미리 이겨놓고 싸움을 건다(선승이후구전:先勝以後求戰)"는 정신이다.

물론, 미리 계획만으로 물리적 승리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미리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싸움을 예방하며 역시 불가피한 경우에 최후의 수단으로 전쟁에 임하되 단시간에 반드시 승리로서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손자병법]은 '평화(平和)'를 위해 '전쟁(戰爭)'을 논(論)하는 병법서다.


"상책의 용병은 적의 계략을 공격하는 것이며 그 차선은 적의 외교관계를 공격하는 것이며 그 다음 정책은 군대를 공격하는 것이며 그 아래 정책은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용병을 잘하는 자는 적의 군대를 굴복시키지만 전쟁은 하지 않고, 적의 성은 함락시키지만 공격은 하지 않으며, 적의 나라를 무너뜨리지만 질질 끌지는 않고, 반드시 (적을) 온전하게 하여 천하를 다투므로 군대는 무뎌지지 않으면서 '이익'은 정말로 온전해지니, 이것이야말로 지모로써 성을 공격하는 방법이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모공(謀攻)>, 손자, 김영수 옮김, <글항아리>, 2011.

손자가 말하는 '이익'이란 모두가 온전한 다수 민중들의 '평화'에 다름 아니다.


***

- [손자병법(孫子兵法)],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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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리커버 특별판) - 시공을 초월한 전쟁론의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손무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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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平和)'를 위해 '전쟁(戰爭)'을 논(論)하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전쟁이란 속이는 도(궤도:詭道)이다. 따라서 능력이 있는데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용병을 하되 적에게는 용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며, 가까운 곳을 노리면서도 적에게는 먼 곳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먼 곳을 노리면서도 적에게는 가까운 곳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롭게 하면서 적을 꾀어내고 (내부를) 어지럽게 하여 적을 습격한다. (적이) 충실하면 적을 방비하고, (적이) 강하면 적을 피하고, (적이) 분노하면 그들을 소란스럽게 하고, (적이) 비겁하면 적을 교만에 빠지게 하고, (적이) 편안해하면 그들을 수고롭게 만들고, (적이) 친하게 지내면 그들을 이간질하라. 그들이 방비하지 않는 곳을 공격하고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출격하라. 이것은 병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니, 정말로 사전에 누설되어서는 안된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계(計)>,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손자(孫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오나라 합려에게 기용된 군사가이자 정치가 손무(孫武)의 사상을 사마천이 춘추시대 제자백가 중 하나로 지칭한 학파로서 흔히 '병가(兵家)'로 분류된다. '병법서'는 군사전략전술에 관한 책으로 주나라 태공망 여상의 [육도삼략], 전국시대 명장 오기의 [오자병법] 등도 유명하다고 하나 '손자'가 정리한 13편의 [손자병법]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손무는 춘추시대 말기인 기원전 6세기경 패자가 되려던 신흥강소국 오나라의 합려에게 기용되기 전에 이미 [손자병법] 13편을 완성했다고 하나, 후세에 죽간으로 발견된 이 병법서가 손무의 것인지 아니면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 제나라에서 활약한 그의 손자 손빈(孫臏)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할아버지 손무의 저작을 손자인 손빈이 더 증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손자병법]의 무대는 '전쟁'만이 생존전략이던 춘추전국시대였다. 
춘추시대는 그나마 명분과 예의가 남아있어 전면전도 없었고 패전국은 승전국의 신하가 되어 예로써 섬기는 시대였다. 그러나 공자와 손무가 공존하던 시기는 그러한 예악 따위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오월쟁패로 월나라 구천이 오왕 합려의 아들 부차를 이겼을 때는 바야흐로 승전국이 패전국 전체를 멸망시켜 버리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시작이었다.
이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주류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게 되는 서쪽 변방 진(秦)나라의 '법가(法家)'와 동쪽의 강국 제(齊)나라의 '병가(兵家)', 이들을 조합하여 전국7웅을 넘나들며 유세하던 '술가(術家)' 등이 된다.

[손자병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에 관한 군사전략"이라 하겠다. 즉, '전쟁'에 관한 책이지만, '전쟁'보다는 '평화'를 지향하며 그래도 싸워야 한다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데 싸우기 전에 먼저 이겨놓고 싸우는 계책이다.
그리하여 손자가 제1편의 <계(計)>편에서 규정하는 '전쟁'은 다름아닌 '속임수(궤도:詭道)'가 된다. 정직하게 정면승부를 하는 것은 가장 하책으로 그 방법 밖에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쓰는 전술이다. 그러나 [손자병법]의 철학이자 가장 큰 '전략'은 '전쟁'이 아닌 '평화'이며, '속임수(詭)'는 불가피하게 '전쟁'에 임했을 때 사용하는 전술이다.
오랫동안 소인배들이 [손자병법]을 무조건 이기려고 사용하는 속임수의 경전으로 사용한 것은 '병가(兵家)'라기 보다는 모든 것을 '평화'가 아닌 '전쟁'으로 규정하고 남을 죽여야만 내가 산다고 생각한 '술가(術家)'의 영향인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적을 알지 못하고 나만 알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지게 될 것이며, 적을 알지 못하고 나도 알지 못하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게 될 것이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모공(謀攻)>,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세간에 알려진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패(百戰不敗)' 또는 '백전백승(百戰百勝)'의 원래 표현은 [손자병법]의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인 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인데, '승패(勝敗)'는 '전투'에 국한된 의미이고 '위태로움(태:殆)'이란 '전쟁'의 가능성 모두를 포함한다. 즉, '전쟁'은 물론 '평화'의 국면에서도 나 자신은 물론 상대방까지도 잘 파악해야 한다는 주관적, 객관적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적 '인식론'을 담고 있는데, '승패(勝敗)'만을 강조한 것도 '술가'의 유산일 것이다.


"전쟁이란 다섯 가지에 따라 경영되어야 하고, (일곱 가지) 항목을 비교하여 그 정황을 탐색해야 한다. 첫째를 '도(道)'라고 하고 둘째를 '천(天)'이라고 하며, 셋째를 '지(地)'라고 하고 넷째를 '장(將)'이라고 하며, 다섯째를 '법(法)'이라고 한다...
(일곱 가지) 계책 비교...
(첫째), 군주 중에 누가 도를 지키는가?
(둘째), 장수 중에 누가 더 유능한가?
(셋째), 천시와 지리는 누가 얻었는가?
(넷째), 법령은 누가 잘 시행하는가?
(다섯째), 병력은 누가 더 강한가?
(여섯째), 병사들은 어느 쪽이 더 훈련되어 있는가?
(일곱째), 상벌은 누가 분명한가?
나는 이런 것에 의거하여, 승패를 알 수 있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계(計)>,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전쟁' 뿐만 아니라 그 가능성을 포함하고 나아가 '전쟁'을 예방하는 '평화'에 관한 논의를 위해 [손자병법]의 <계편>에서는 철학적 방향을 제시하는데, 이른바 '5사7계(五事七計)'다.

'5사(五事)' 중 첫째 '도(道)'는 '올바른 길'이다. 죽음과 위험을 무릅쓰고 따를 수 있는 '도리'나 '정의', '명분'이다. 이로써 '정의의 전쟁'은 다수를 동원하는 명분이 된다. 둘째 '천(天)'은 '때'를 말하는데 '음양' 또는 계절적 요인 들이며, 셋째 '지(地)'는 지리적 요인, 넷째 '장(將)'은 전투를 지휘하는 장수, 다섯째 '법(法)'은 전투에서 유용되는 규율이나 상벌의 엄격함을 의미한다. 손자는 이 '다섯 가지 일(五事)'을 "아는 자는 승리하지만 알지 못하는 자는 승리할 수 없다(계편)"고 한다.

'5사(五事)'가 큰 전략이라면, 실제 전투에서 활용되는 '7계(七計)'는 전술인 바, 이를 잘 살펴 "군대를 쓰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니 그(오왕 합려)에게 남을 것(계편)"이라고 한다.

'5사7계(五事七計)'는 [손자병법]의 '전략전술론'이다.


"전쟁의 형세는 '기정(奇正)'에 지나지 않으나 기정의 변화는 남김없이 헤아릴 수 없는 법이다. '기정'이 상생하는 것은 마치 순환하는 것이 끝이 없는 것과 같으니 누가 능히 이것을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 [손자병법(孫子兵法)], <세(勢)>,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손자병법]에서 '전쟁'의 '형세'는 '기정(奇正)'인데, '기(奇)'는 '변칙'이고 '정(正)'은 '원칙'이다. '기'와 '정'은 상호대립과 침투를 반복하는 '변증법'적 관계를 이룬다. 어느 것이 우선인가 손자는 말하지 않으나 '전쟁'보다 '평화'를 우선시 한다면 '기'보다 '정'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도'이자 '천'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만으로는 안된다. 변칙적인 '기'를 잘 활용해야 한다. 
이것이 '기'와 '정'이 상호 변환하며, '정'을 지키되 '기'로서 승리한다는 '기정호변(奇正互變)'과 '출기제승(出奇制勝)'이며, <세(勢)>편이 <허실(虛實)>편으로 이어지는 이유인데, '예상을 뒤엎는 공격'이나 '한 번 쓴 계책은 버리기' 등의 '변칙'적 전술 등이 <허실>편의 내용이다.
<허실>에 이어지는 <군쟁>, <구변>, <행군>, <지형>, <구지>, <화공>, <용간> 등은 앞의 <계>, <작전>, <모공>, <형>, <세> 등의 '전략론'에 이어지는 '전술론'이다.
'전투의 상환 판단'이나 '지형 활용법', '살기 위해 어려운 지형에 들어가기'나 '간첩 활용법' 등은 '전투'에 임하는 각개 '전술'들이다. 

"적진아퇴(敵進我退) 적주아요(敵駐我擾) 
적피아타(敵避我打) 적퇴아추(敵退我追)"
- 마오쩌뚱, '16자 병법(전법)'

삼국시대 '난세의 영웅' 조조는 늘 전쟁터에서도 군막 안에서 책을 읽었다는데 [손자병법]을 최고의 병법서로 평가하고는 나름의 주석을 달았다고 한다. 중국의 혁명가 마오쩌뚱도 길고긴 내전 기간에 [손자병법]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하는데, "적이 공격하면 후퇴하고 적이 머물면 소요를 일으키며, 적이 피로하면 공격하고 적이 후퇴하면 추격한다"는 마오쩌뚱의 '16자 병법(전법)'은 [손자병법] '전술론'의 골자를 정리하고 있다.
이들 모두 '도'를 따르는 평화'를 위해 '정의'의 '전쟁'을 수행했던 정치가들이었다.


"옛날에 전쟁을 잘하는 자는 먼저 (적이) 승리할 수 없도록 만들고, 적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기를 기다린다. (적이)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으며 (내가)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적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능히 (적이) 승리할 수 없게 만들지만 적으로 하여금 (내가) 기필코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승리란 (미리) 알 수는 있어도 만들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형(形)>,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손자병법]을 '술가'가 아닌 '병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병법서는 '전쟁'을 다루되 '평화'를 지향한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 즉 '올바름'이므로 '변칙'으로서 '기'는 '올바름'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수단이며, 그럼에도 '평화'를 위해 '전쟁'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기지 못할 싸움은 하지 말 것"이고, "싸움을 하기 전에는 미리 이겨놓고 싸움을 건다(선승이후구전:先勝以後求戰)"는 정신이다.

물론, 미리 계획만으로 물리적 승리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미리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싸움을 예방하며 역시 불가피한 경우에 최후의 수단으로 전쟁에 임하되 단시간에 반드시 승리로서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손자병법]은 '평화(平和)'를 위해 '전쟁(戰爭)'을 논(論)하는 병법서다.


"상책의 용병은 적의 계략을 공격하는 것이며 그 차선은 적의 외교관계를 공격하는 것이며 그 다음 정책은 군대를 공격하는 것이며 그 아래 정책은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용병을 잘하는 자는 적의 군대를 굴복시키지만 전쟁은 하지 않고, 적의 성은 함락시키지만 공격은 하지 않으며, 적의 나라를 무너뜨리지만 질질 끌지는 않고, 반드시 (적을) 온전하게 하여 천하를 다투므로 군대는 무뎌지지 않으면서 '이익'은 정말로 온전해지니, 이것이야말로 지모로써 성을 공격하는 방법이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모공(謀攻)>, 손자, 김영수 옮김, <글항아리>, 2011.

손자가 말하는 '이익'이란 모두가 온전한 다수 민중들의 '평화'에 다름 아니다.


***

- [손자병법(孫子兵法)],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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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통제의 승부사 사마의 - 자신을 이기는 자가 최후의 승자가 된다 삼국지 리더십 4
자오위핑 지음, 박찬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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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공명(孔明)'과 산 '중달(仲達)'의 '평상심(平常心)'
-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 제갈량],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2.
- [자기통제의 승부사 - 사마의],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3.



"제갈량과 100여 일을 대치하다 때마침 제갈량이 병사하자 장수들이 군영에 불을 지르고 몰래 도망갔다. 백성들이 달려와 보고하자 사마의는 출병하여 그들을 추격했다. 제갈량의 장사인 양의가 군기를 돌려 북을 울리며 마치 사마의와 싸우려고 했다. 사마의가 몰린 적은 몰아붙이지 않아야 한다고 여겨 양의는 진을 유지하며 물러갔다. 며칠이 지나 사마의가 제갈량의 군영에 이르러 남은 물건들을 살피고 많은 서적과 군량를 노획했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죽었음을 확인하며 말했다. 
'천하의 기재구나.'..
당시 백성들은 이 일에 대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했다.'"
- [진서(晉書)], <선제기(宣帝紀)>, 방현령 외, 7세기.


"건흥 12년(234년) 봄, 제갈량은 전군을 인솔하여 사곡도에서 나왔는데, 유마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였으며, 무공현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의와 위남에서 대치했다. 제갈량은 항상 식량이 계속 공급되지 않아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게 될까 근심하여 병사를 나누어 둔전을 하게 하여 장기간 주둔할 기반을 만들었다. 경작하는 자들은 위수 가에 거주하는 백성들 사이에 섞여 지냈는데, 백성들은 마음 놓고 편안히 지냈고, 군대는 사사로움이 없었다. 서로 대치한 지 100여 일이 지난 그해 8월, 제갈량이 병이 들어 군중에서 사망했는데, 당시 54세였다.
촉의 군대가 퇴각하자 사마의는 제갈량의 군영과 보루, 거처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구나!'"
- [삼국지(三國志)], <제갈량전(諸葛亮傳)>, 진수, 3세기.


"[한진춘추]에 이르길, 양의 등이 군을 정돈하고 출발하자 백성들이 사마의에게 달려와 고했고 사마의는 그들을 추격했다. 강유는 양의에게 명하여 군기를 반대로 하고 북을 울리도록 하여 마치 사마의에게 향하는 것처럼 하자, 사마의는 곧 물러나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이에 양의는 진형을 짠 채 물러나고 계곡으로 들어간 뒤 발상을 했다. 사마의가 퇴각하니 백성들은 '죽은 제갈(諸葛)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라는 속언을 지었다."
- [삼국지(三國志) 주(註)], 배송지, 5세기.



제갈량(諸葛亮)은 자가 '공명(孔明)'이고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촉한 유비가 형주 유표에게 의탁하던 시절에 기용한 지식인 참모다. 
'삼국지 영웅'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는데, 전자는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 관우, 장비와 '도원결의' 후 '머리'도, '세력'도 없이 두주먹 불끈 쥔 '의지'만으로 버티다가 몰락하기 직전의 시절이고, 후자는 '머리'를 갖추고 '비전'을 장착한 후 대업을 향해 한발씩 전진하던 시기인 것이다.
제갈량은 진수의 '정사' [삼국지], <후주전>에서 '선주' 유비의 아들인 '후주'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를 통해 본인이 유비에게 기용된 과정을 말하는데, 이것이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출전이다. 조실부모하고 형주에서 초막살이를 하던 제갈량은 늘 본인을 제나라 관중과 연나라 악의에 비유하며 언젠가 큰 뜻을 펼칠 것이라 장담하고 다녔지만 주변으로부터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제갈량은 서서와 사마휘 등의 지인들을 통해 본인의 홍보를 부탁하고는 '삼국지 영웅' 중 가장 열세였던 유비가 위기에 빠진 것을 알고 유비 스스로 본인을 찾도록 계획한다. 그것도 앞의 두 차례 방문에서는 만나주지도 않고 세번째 방문에서야 마루에서 자는 척 하다가 만나서는 여유롭게 '천하삼분지계'의 '융중대'를 연출한다.
47세 유비도 인재에 목말랐지만, 27세 제갈량도 당시 나이대에는 내심 느긋하지는 못했을터,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하다. 다만, 밖에서 큰 소리 쳐서 상대를 불러들인 후 안에서 속삭이는 전술을 썼다.
이후 제갈량은 손권의 오나라와 동맹을 맺고 조조의 위나라를 적벽대전에서 패퇴시켜 북위가 더 남하하지 못한 채 위-촉-오 삼국이 솥발처럼 '정족지세'를 이루는 '천하삼분지계'를 확립한다. 제갈량의 이 '융중대' 전략은 당시 오나라 책사였던 노숙도 주장했던 것으로 강대국 위나라에 대항하여 2인자 오나라와 약소국 촉한이 연합하여 위나라가 망하면 상대적으로 약한 적이 남도록 하는 계략이었다. 제갈량은 촉한이 오나라로부터 형주를 빼앗겨 벽지로 더 몰리고 촉한황제 '선주' 유비가 죽은 후에도 오-촉 동맹을 유지하면서 6차례나 위나라 정벌을 위한 '북벌'을 수행하던 중 오장원에서 '떨어지는 별'이 된다.

제갈량의 '북벌'이 실패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실력은 뒷받침되지 않는데 '비전'과 '명분'이 우선된 점도 있으나, 외부적으로는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사마의때문일 수도 있다.

사마의(司馬懿)는 자가 중달(仲達)이며 제갈량보다 2살 많으나 18년을 더 살았다. 위-촉-오 '삼국'을 잠시 통일한 '사마(司馬)'씨의 진(晉)나라 '고조(高祖)'로 추존되었으므로 '정사' [삼국지] 기록에는 등장할 수 없었고,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도 조조, 유비, 관우, 장비 등의 '1세대'가 다 죽고 제갈량이 남은 후에야 등장하는 인물이다. [삼국연의]에서는 거의 '신(神)'적 존재로 그려지는 제갈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등하게 묘사되지만 위나라 조조(무제)-조비(문제)-조예(명제) 3대를 섬기면서 조용히 힘을 길러 손자 사마염에 이르러 '삼국통일'을 이루게 하는 '자기 통제의 승부사'가 바로 사마의 중달이다.
[삼국연의] '허구'이기는 하나 사마의는 제갈량의 '공성전'에 속기도 하고, 어지간하면 제갈량과 정면대결을 피하다가 여인의 옷을 선물받기도 했으나 웃으며 넘어갔으며,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었을 때는 제갈량의 계략으로 의심하여 공격을 머뭇거리다가 퇴각하는 촉한군을 놓치기도 한다. 아마도 마지막 장면은 [삼국지]와 그 [주석], [진서]에서도 일치하는 기록으로 사실일 것인데, 당나라 태종이 방현령 등에게 명해 정리한 '정사' [진서(晉書)], <선제기(宣帝紀)>에 의하면 "죽은 공명(제갈량)이 산 중달(사마의)을 달아나게 했다"는 당시 민중들의 비아냥에도 "나는 산 사람을 잘 알지 죽은 사람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역시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삼국시대'라는 난세에 생존을 넘어 '비전'을 제시하고 '대업'에 도전하던 제갈량과 사마의는 기본적으로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을 것이다. 누구보다 잘났고 목소리를 높이려는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인물들임은 기본일텐데, 두 사람의 대결과정에서는 상대적 차이점은 일단 보인다. 즉, 제갈량은 '촉한정통론'의 명분에 입각하여 조씨의 위나라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후한을 재건한 광무제 유수처럼 '북벌'을 포기하지 않는 '비전'을 가지고 궁벽한 촉한을 그나마 수십년 버틸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사마의는 조씨 3대 정권을 보좌하면서도 결코 그들을 자극하지 않고 필요하면 병으로 다 죽어가는 연기까지 하면서 꾸준히 '대업'을 준비한 결과 위나라 정권을 갈아엎고 촉한과 오나라까지 정벌하고는 삼국통일을 이루는 새로운 왕조의 기틀까지 다졌다.
'한왕실 부흥'이라는 제갈량의 '비전'은 '실패'했고, '새왕조 개창'이라는 사마의의 '대업'은 '성공'한 차이점도 있겠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더 많다.
우선 내부 조직 관리에서 본인보다 '조직'이나 '국가'를 우선하면서 사사로운 감정과 개인적 욕망을 조절했다. 결국 제갈량은 '북벌'의 '비전'을 위해, 사마의는 '혁명'의 '대업'을 위해 겉으로는 그랬다. 그리하여 조직 내부의 어떠한 도전에도 흔들림없이 스스로의 중심을 잡았다.
제갈량은 군사에 실패한 아끼는 수하 마속을 죽이면서까지 '북벌'을 위한 내부결속을 다지는 '읍참마속'의 고사를 낳았고, 사마의는 조조의 손자이자 왕족으로 실권자였던 조상과 대립하지 않고 병으로 물러나는 위장술 이면에 착실한 준비를 통해 자식들이 '창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갈량과 사마의의 공통점은 그리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비전'과 '대업'의 목표를 놓지 않는 '주체성(主體性)'과 '평상심(平常心)'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편으로 차이점 하나를 더 들자면, 제갈량은 '북벌'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사마의를 제거하고 싶었을지 모르나, 사마의는 세간의 비웃음을 감수하면서도 제갈량의 존재를 인정해야 했을 수도 있다. 위나라에서 촉한의 제갈량을 대적할 사람은 사마의 뿐이었기에 제갈량이 없으면 본인의 군사적 입지가 줄어들 것으로 판단했을 것인데 실제로 제갈량이 죽은 후 사마의는 '혁명'을 위한 준비에 착수할 수 밖에 없었다.


죽은 '공명(孔明)'이 산 '중달(仲達)'에게 더욱 치밀하고 굳건한 '평상심(平常心)'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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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 제갈량],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2.
2. [자기통제의 승부사 - 사마의],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3.
3.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진수,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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