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셈블리 - 21세기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제언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지음, 이승준.정유진 옮김 / 알렙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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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군주'인 전략적 '다중'에 의한 '대항권력'
- [어셈블리(Assembly)](2017),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새로운 '군주(君主)'가 지평선 위로 출현하고 있다. 이 '군주'는 '다중(多衆)'의 열정에게서 태어났다. 은행가, 금융가, 관료, 그리고 부자들의 여물통을 끊임없이 채우는 부패한 정책에 대한 의분, 사회적 불평등과 가난의 끔찍한 수준에 대한 격분, 지구와 그 생태계의 파괴에 대한 분노와 걱정, 멈출 수 없을 듯이 보이는 폭력과 전쟁에 대한 규탄. 사람들 대부분이 이 모두를 인식하지만,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힘이 없다고 느낀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군주'란 자유와 평등의 길, 모두에 의해 민주적으로 관리되는 '공통적인 것'을 모두의 손에 쥐어주는 과제를 제시하는 길을 가리킨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군주'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개인 혹은 심지어 어떤 당이나 지도자 회의를 가리키지 않고 오늘날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상이한 형태의 저항과 투쟁이 마디마디 이어져서 이루어진 정치적 결합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군주'는 일관된 배열로 움직이며 암묵적으로 어떤 위협을 가하는 떼, '다중'으로 나타난다."
- [어셈블리],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서문>, 2017.


삼성 재벌에게 '노조할 권리'를 요구하다 1995년에 해고된 김용희 노동자가 1년 여의 고공농성을 마치고 땅으로 내려왔다. 수많은 노동자가 함께 만든 '사회적 부'를 불법적으로 '사유화'하려는 한 줌의 삼성 재벌 3세가 재판에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해 공대위와 합의했으나 끝내 사과는 하지 않았다. '다중'의 힘으로 정치 권력자의 자리만 바꾼 결과 민주주의자들인 '촛불 정부'는 여전히 삼성 재벌의 편이다. 

2008년 신자유주의 금융자본 위기로 촉발된 다수 대중의 저항과 시위가 자본주의 개조를 외치는 지금, 이탈리아 정치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2017년에 [어셈블리(Assembly)]로 돌아왔다. [어셈블리]는 지난 세기전환기에 신자유주의와 노동 대중의 관계를 정립한 [제국]이래 [다중], [공동체] 등 연작의 총결산이며, 우리말로는 '집회/시위' 또는 '모이기/모으기'를 의미한다.


1. '신자유주의' = '금융자본'의 '제국'


"(반작용으로서)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유를 회복하는 대신 국가를 다시 발명했다. 즉, 국가를 계급투쟁과 사회적 요구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함으로써, 자본주의 발전에 관한 이론 및 실천을 사회적 갈등의 위험으로부터 멀리 떼어놓음으로써, 민주주의를 완전히 알아볼 수 없게 만들 정도로 종속시킴으로써 말이다.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정치적' 형태가 체제의 다른 모든 부분을 지배한다... 신자유주의와 그 통치형태에 맞서고 그것을 전복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다중'과 그들의 '해방기획'에 있다."
- [어셈블리],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3-0. 금융통제와 신자유주의적 협치>, 2017.


자본주의 체제의 사상적 유래는 '자유주의'다. 근대의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이념인데, 자본의 이익 창출은 개인간의 계약으로 가능하니 국가는 '작은 정부'여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 혁명사상으로서 '자유주의'는 봉건지주 왕국은 무너뜨렸으나, 노예처럼 일하거나 굶을 '자유'만을 지닌 다수 노동계급을 양산했다. 
세계대전과 자본주의 체제내 복지국가 전성기를 거치면서 강력한 노동계급 투쟁에 대한 '반작용'으로 20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자유주의, 이른바 '신자유주의'는 국경을 넘어서 이익을 창출하는 초국적 자본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되 '제국주의'적 패권을 다투는 강대국과 그들의 연합체를 더욱 강화한다. '신자유주의'는 그 조상인 '자유주의'와 달리 '작은 정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초국적 자본의 전세계적 수탈을 지지하고 보장하는 강력한 국가권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네그리와 하트는 지난 세기말 저작 [제국]에서 '제국'은 20세기 초중반의 '제국주의'가 아니고 그렇다고 초강대국 '미국'도 아니라고 규정했다. 이는 형태는 달라졌으되, 본질은 '금융자본'이 주가 되는 점에서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 제국주의'의 계보 위에 있다.

이 '신자유주의'의 위기 또한 '금융자본'의 위기에서 촉발될 수 밖에 없는데, 2008년부터 전면화된 세계적 금융위기가 그 현상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금융은 도박(투기)이 아니라 박탈의 장치"(3-10)로서 "실제로 금융자본은 철도, 통신, 제조업 혹은 국가의 문화재와 같은 공공재 등을 개인의 손에 넘기는 과정에 기여한다"(3-10). 모든 '신자유주의' 정치권력이 열성적으로 수행한 '민영화' 얘기다. '민영화'는 '제국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단순한 유행이나 정책결정이 아닌 '금융자본주의'의 필연적 형태인 것이다.

'자유경쟁'에서 출발한 자본주의는 그 발전단계에서 '독점'으로 흐르며 이를 촉발하는 '금융'이라는 매개는 끊임없이 '혁신'을 외치지만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기업가정신' 따위가 아니라 '파생금융상품' 등에서 보듯 모든 사물과 생명체까지도 '자본'으로 '추상화'시켜 이익을 무한하게 '추출'하고자 한다. [어셈블리]가 말하는 이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의 '추출주의'는 "지대가 산출되는 모든 활동들이 그렇듯... 생산으로부터의 유리(추상)로 특징지어지며"(3-10), 노동생산 현장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광범위하게 착취한다. 이 과정은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말한 '자본의 지대추구화'와 맞닿아 있으며, 이러한 금융자본이 "생산에 대한 중앙집중화된 통제를 촉진"(3-10)함으로써 '독점자본'으로의 필연적 귀결과 이와 결탁한 국가권력을 '발명'하는데 가히 김규항 선생이 [혁명노트]에서 말한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한쪽에는 '이자로 먹고살며 사유재산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다른 한쪽에는 "집단적 지식과 지성 및 사회적 소통능력, 돌봄능력, 협력능력을 통해 사회적 부(공통적인 것)를 생산하며 자신들이 생산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자유롭고 열려있는 접근을 통해 안전을 추구"(3부 - 시초축적 보론)하려는 '불안정한' 다수가 있다. 이것이 [어셈블리]가 규정하는 '계급투쟁'의 '전선'이다. 또한 이것이 '신자유주의'와 '금융통제', '혁신'과 '창조적 기업가정신'의 객관적 실체다.


"사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가장 악질적인 측면은 재산 소유자의 자유나 자본주의 기업가의 자유에 관한 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나 사회 최하층민의 자유를 찬양한다는 점에 있다... 신자유주의적 기업가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본질적으로 새처럼 자유롭다. 자신의 불안정한 삶을 최선을 다해 관리할 자유, 그리하여 살아남을 자유라나, 이 얼마나 멋진 위선인가!"
- [어셈블리],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3-12. 이음매에서 어긋난 신자유주의적 행정>, 2017.


2. '공통적인 것' : '고정자본'의 재전유


"현대적 소유관계를 탐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오늘날의 사회적 생산 및 재생산의 형태를 살펴보아야 한다... 노동이 사회화되고 전사회가 가치화의 영역이 될 때, 즉 지성, 신체활동, 문화적 창조성, 온갖 창의적인 힘이 협동적으로 연결되어 함께 사회를 생산 및 재생산할 때, '공통적인 것'은 생산성의 열쇠가 되는 반면, 사적 소유는 생산능력을 저해하는 족쇄가 된다. 다시 말해 소유의 주권적 성격을 벗겨내 '공통적인 것'으로 변형시킬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질 것이다... '공통적인 것'은 새로운 소유형태가 아니라 '비소유'이다."
- [어셈블리],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2-6. 어떻게 소유를 공통적인 것에 개방할 것인가>, 2017.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자본주의 모순' 중 하나는 '사적 소유'와 '사회적 생산'간의 그것인데, 생산수단(고정자본)을 사유화하여 발전시킨 '생산력'과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계급과 노동력만을 가진 다수 노동자계급과의 '생산관계'간의 모순이다. 자본이 독점화되고 '소유'가 '사유화'될수록, 생산수단(고정자본)으로부터 분리된 노동자계급은 다수가 되므로 '생산'은 '사회화'된다. 물론 이러한 정의는 마르크스주의를 '헤겔화'시킨 루카치나 마르쿠제 등의 해석으로 이제는 현재에 맞게 '현대화'시켜야 한다. 
[어셈블리]는 노동하는 '다중'의 '연대경제'를 강조하는데, 다수의 '협력'과 '자주관리'를 대안으로 하여 '다중'의 자유를 확장하고 협력의 규칙 및 민주주의 규범이 되면서 이러한 '사회적 협력' 속에서 '다중'의 '주체성'이 발생한다(2-6).

"'디지털화'는 이미 공장에서 일어나던 노동력의 기술적 구성의 변형을 전사회적으로 확장"(2-7)했는데, 스마트폰을 통해 자본의 생산활동에 일상적으로 참여하는 다수의 소비자들의 관계에서 보듯, 더이상 '사적 소유'의 영역에만 머무를 수 없는 "고정자본에 부여된 노동자들의 생산적인 사회적 협력은 비록 지금은 자신들이 생산한 잉여를 자본에게 넘겨주긴 하지만, 노동자들의 자율을 위한 잠재력을 제기하며, 노동과 자본의 힘 관계를 역전시킨다"(2-7). 이 역관계는 '계급투쟁'을 생산적 삶 자체에 투입하는데, 공장노동을 넘어선 전사회적 생산자로서 다수의 '사회적 노동'은 '삶정치적'(2-7) 계급투쟁의 형태를 제기하는 바, 이제 사회적으로 노동하고 생산하는 '다중'은 '협력'과 '연대'의 '민주주의' 무기로 무장한 채 '고정자본'을 되찾고 '재전유'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정의한  '산 노동'의 생산적 축적물로서 '죽은 노동'인 '고정자본(생산수단)'은 이제 현대에 이르러 다수의 수중으로 '사회화'되어야 한다. [어셈블리]는 "고정자본은 인간자신이다"(2-7)라고까지 규정하는데, '노동력'을 '인적 자본'으로 바꿔 부른 피케티의 [21세기 자본]과 역시 맞닿는다. 


"오늘날 강력한 노동형상이 알고리즘의 기능에 가려져 있다... '알고리즘'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적 지성에서 나온 기계이자 '일반지성'의 생산물인 '고정자본'이다... 노동자는 노동하는 동안 고정자본을 전유하여 그것을 다른 노동자와의 사회적, 협동적, 삶정치적 관계에서 발전시킬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생산적 자연을, 즉 새로운 생산양식의 토대가 되는 새로운 삶형태를 결정한다... '고정자본'의 '재전유'는, 다시 말해서 애초에 우리가 창출한 물리적 기계, 인공지능 기계, 사회적 기계 및 과학적 지식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는 것은, 그 전장에서 우리(다중)가 착수할 수 있는 대담하고 강력한 하나의 사업인 것이다."
- [어셈블리],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2-7. 우리, 기계적 주체들>, 2017.


산업과 공장을 넘어서 전사회적으로 확대된 현재의 계급투쟁의 전장에서 "환원할 수 없는 다양성"(2부)으로서의 '다중'은, '공장 외부'에서 "사회적 생산"을 기반으로 '노조 외부'에서 "사회적 조합주의"를 공유하면서 새롭고 더욱 강력한 의미의 '총파업'으로서의 "사회적 파업"을 통해 '생산수단(고정자본)'을 '사회화'하는데 여전히 복무해야 한다.


"'모두에게 그들의 필요에 따라'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적이고 환상적인 슬로건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부의 생산 및 재생산에의 공통 참여에 따른 '공통적인' 가능성들의 재분배를 위한 정치적 지령이다."
- [어셈블리],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4-16. 포르톨라노>, 2017.


3. '새로운 군주' = '다중'


"대신에 운동들은 전략과 전술을 전도해야 한다. 즉, 전략은 출현하는 사회세력들의 자율을 표현하는 것이 되어야 하며, 전술은 기존 제도들에 (적대적으로) 참여하면서 특정한 경우에는 '리더십' 구조를 활용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중(새로운 군주)'의 힘... 사회적 생산 및 재생산에 굳건히 근거할 때에만, 즉 우리가 공유하는 삶형태를 '공통적인 것' 안에서 유지하고 발전시킬 때에만, 우리는 오늘날 적절하게 말하고,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다중은 권력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다르게, 민주주의 제도를 근본적으로 혁신함으로써, 사회적 삶이 기입된 '공통적인 것'을 함께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킴으로써 잡아야 한다. 이것은 전위의 기획이 아니라 전복적, 적대적 형태로 사회의 복수적 존재론을 표현하는 연합의 기획이다. '다중'의 힘이 '새로운 군주'를 요청한다."
- [어셈블리],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4-0. 새로운 군주>, 2017.


이탈리아 정치학 사상가인 [어셈블리] 저자들은 역시 그람시가 그랬듯 '군주(君主)' 타령이다.
물론, 민주주의자들이 말하는 '군주'가 왕일리는 없다.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인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영향이다. 그가 당시 가장 이상적 정치체제로서 '군주'를 호명한 것에 대한 정치적 '은유'로서 그람시는 그의 [옥중수고]에서 1920년대 '현대의 군주'는 '진보정당'이라 했고, 백년 후의 네그리와 하트는 "다양한 생산적 주체들"로서의 '다중(多衆)'을 '새로운 군주'라 명명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이상적 삶정치 체제'를 만드는 주체들이 바로 '다중'이기 때문인데, 세기초 [제국]의 결론으로서 '대중(multitude)'과 내용상 동일하다.

[어셈블리]에서 인상적인 테제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다중에게 전략을, 리더십에게 전술을!" (1부)

"공통적인 것을 첫째로, 권력을 둘째로!" (4부)

'리더십'이 이끌던 저항과 집회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민주주의'를 무기로 다양성과 자율, 협력과 연대를 통한 '집회/모이기', 즉 '어셈블리(Assembly)'의 시대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다중과 유리되어 가기만 하는 '대의제' 자체도 실패했다고 규정하나 이는 '아나키즘'이나 '포퓰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새로운 군주'인 '다중'은 사회적 부로서 '고정자본'이나 기후환경 등을 포괄하는 '공통적인 것'의 재전유를 위해 '조직화'하는 "정치적 현실주의"(4-13)를 채택하고, '공통적인 것'을 우선 사회적으로 재전유한 후 '권력을 둘째로 잡아야' 하는데 권력자만 바꾸는 식이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방식이 되어야 한다. 즉, 다중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통해 집권하고 리더십의 대의적 전횡을 완전히 통제하는 "대항권력의 제도화"(4-14)를 끊임없이 지향한다.
러시아혁명 시기 소비에트처럼 권력 위임을 너머 아래로부터 스스로 '이중권력'을 구성하면서 공적 권력과 병존하는 '대항권력'을 구축하고 대의자들을 견제 및 통제하면서 체제 변혁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다중의 투쟁역사'는 "승리했든 패배했든... 대항권력의 제도를 창출했고"(4-14), 역사적으로 "공화국을 창립했다"(4-15).


이 과정에서 '대의제'를 대표하는 '리더십'은 더 이상 큰 기획의 '전략'적 위치에 있을 수 없다. 마키아벨리식 '왕자(The Prince)'도 그람시의 '현대 정당'도 아닌 '민주주의'로 무장한 '새로운 군주'인 '다중(多衆:multitude)'이 '전략'을 이끌어가고 '대의'적 '리더십'은 그때마다 '전술'로 활용되는 '전복적' 약술론이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그야말로, '리더십(leadership)'은 더 이상 '지도'나 '지배'가 아닌 라틴어 어원인 '여행하다(laedan)'의 원래 의미로서 '다중'들의 '자율적 여정'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말미에 잠시 언급되는 '무조건적 기본소득'은 이전 저작인 [제국]에서 지난 세기말에 이미 '사회적 임금'으로서 제기된 바 있으며, 현재는 '사회적 노동'으로 인해 '공통적인 것'을 되찾고 재전유하는 투쟁에서 '다중'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회의제이기도 하다.

"기본소득은 사회적 생산의 결과들을 더 정당하게 분배하는 것을 제도화할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형태의 가난과 혹사노동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기본소득은... 공통적인 것의 화폐와 새로운 민주적인 사회관계들의 더 실질적인 제도화를 이미 암시하고 있다."
- [어셈블리],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4-16. 포르톨라노(중세의 해양지도)>, 2017.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다중의 저항과 투쟁의 방식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인 '어셈블리(Assembly)', '집회/모이기'다.


"'집회/모이기(Assembly)'는 '구성적 권리'가 되어가고 있다. 사회적 대안을 구성하는, 권력을 장악하되 '다르게', 즉 사회적 생산에서의 협동을 통해 장악하는 메커니즘이 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사회적 부에 기반을 두고 오래 지속하는 제도들을 창출하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조직하는 '구성적 과정'으로, 그 관계들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다중의) 힘에 의해 성취된다."
- [어셈블리],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4-16. 포르톨라노>, 2017.


***

1. [어셈블리(Assembly)](2017),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2. [제국(Empire)](1998),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윤수종 옮김, <이학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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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보 삼봉집 2
정도전 지음, 정병철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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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혁명가 정도전은 '유물론'자다
- [삼봉집(三峯集) - 2], 정도전, 정병철 편저, <KSI한국학술정보>, 2009.


"[주역]에, 
'성인의 큰 보배는 위(位)요, 천지의 큰 덕은 생(生)이니, 무엇으로 위를 지킬 것인가? 바로 인(仁)이다.'...
인군(人君)의 위(位)는 높기로 말하면 지극히 높고, 귀하기로 말하면 매우 귀하다. 그러나 천하는 지극히 넓고 만민은 수없이 많은데, 한 번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마 크게 우려할 일이 생기게 될 것이다. 하민(下民)은 지극히 나약하나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으나 지혜로써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마음을 얻으면 복종하게 되고, 그들은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배반하게 된다... 그들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사사로운 뜻을 품고서 구차스럽게 얻는 것도 아니요, 도를 어기고 명예를 구하는 방법으로 얻는 것도 아니다. 그 얻는 방법은 오직 인(仁)으로써 가능하다."
-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보위를 바룸(正寶位)>, 정도전, 1394.



고려왕조를 멸하고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무리는 '유학(성리학)'을 지도사상으로 한 고려말 신흥사대부 중 '급진파'의 이념과 중앙에서 배제된 변방 무인세력의 무력의 결합이었다. 인물로 말하면, 정도전의 '머리'와 이성계의 '주먹'으로 이룬 혁명이었다.
고려말 대 유학자이자 재상이었던 목은 이색의 신흥사대부 사학 제자 중 정몽주는 온건개혁파였고 그 '운동권' 동아리 '동심회'의 4년 후배였던 정도전은 급진개혁파였는데, 이성계의 무력을 얻은 급진개혁파가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혁명의 길로 치닫는다.


조선 개국 2년 후인 1394년, 삼봉 정도전은 새 국가를 운영하는 '법전'인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태조 이성계에게 올린다. 오늘로 치면 '헌법'에 해당하는 문건으로 후세인 성종대에 이르러 [경국대전(經國大典)]으로 집대성되는 조선의 '법률초안'이다. [조선경국전]은 '이-호-예-병-형-공'의 중국 국가기구의 뼈대인 '육조(六曹)' 또는 '육전(六典)'을 정리하여 '국가조직을 짠다(經國)'는 국가운영 기획서이기도 했다. 유학의 시조 공자가 '이상적 시대'로 삼았던 중국 주나라의 [주례(周禮)]로부터 유래하는 '육전(六典)'은 '치(治)전', '교(敎)전', '예(禮)전', '정(政)전', '형(刑)전', '사(事)전'으로 각각 '이-호-예-병-형-공'을 의미한다. [조선경국전]은 각 공무조직의 틀과 업무 범위를 세세하게 규정하면서 중국과 고려의 역사를 함께 인용하고 있는데, 그 주제는 첫 장에 서술되는 '인사관리'의 '이(吏)조'에 해당하는 '치전(治典)'이며 주인공은 이를 총괄하는 '총재(冢宰)'다.

정도전이 설계한 '이상국가' 조선은 '천명'을 받은 군주를 앞세워 '유학(儒學)'의 군자가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세상이었다. [조선경국전]에서 '천명'을 받은 군주는 '인군(人君)' 또는 '인주(人主)'이며, 실질적 국가 운영자인 '성인군자'는 바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인 '재상(宰相)'이다.

'경영(經營)'이란 '조직의 틀을 짜는 것(經)'과 '인력을 운용하는 것(營)'의 조화를 뜻하는데, 이로써 '육전'의 최고는 '인사관리'의 '치전'이며 '재상' 중의 '재상'은 '치전'의 대표인 '총재'인 것이다. 


"총재(冢宰)라는 것은 위로 군부를 받들고 밑으로는 백관을 통솔하며 만민을 다스리는 것이니, 그 직책이 매우 큰 것이다. 또 인주(人主)의 자질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으니, 총재는 인주의 아름다운 점은 순종하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옳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은 것은 막아서, 인주로 하여금 '대중(大中)'의 지경에 들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상(相)'이라 하나니, 즉 '보상(輔相:임금을 도와 대신을 거느리며 다스림)'한다는 뜻이다. 백관은 제각기 직책이 다르고 만민은 제각기 직업이 다르니, 재상은 공평하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각자 그 처소를 얻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재(宰)'라 하나니, 즉 '재제(宰制:전권을 휘두름)'한다는 뜻이다."
- [조선경국전], <치전>, 정도전, 1394.


'치전'의 '총재'가 바로 '재상(宰相)'인 바, '전권을 휘두르며(宰)' '임금을 도와 대신을 거느리며 다스리는(相)' 직위이다. 가히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인데 국가운영의 하나하나를 소홀함 없이 다 알아야 하고 챙겨야 하는 중책이다. 사람이 이를 혼자 다 할 수는 없으므로 여러 인재를 선별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인사관리'가 제일 중요하니 '치전'의 '총재'가 조선의 '재상'이 되는 것이다. 재상은 아니나 먼훗날 조선 당쟁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 간관을 임명하는 정5~6품 '이조전랑'의 요직의 발령이 된 이유도 그 연장선상 아니겠는가.

'이상국가' 조선을 운영하는데 핵심은 이러한 성인군자 반열의 '재상'과 바른 말 하고 감사하며 비위자를 탄핵하는 '대간(臺諫:대관과 간관)'이었으니, 당시의 '유일한 정치체제'였던 '세습군주제'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대쪽같은 '성리학(주자의 유학사상)' 이념으로 무장한 비타협적 사대부 관료들과 그들에 의해 조직된 국가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위로는 음양을 조화하고 아래로는 서민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며, 안으로는 백성을 밝게 다스리고 밖으로는 사방의 오랑캐를 진정하고 무마하는 것이니, 국가의 작록과 포상과 형벌이 이에 관련이 있고 천하의 정치와 덕화, 가르침과 명령이 이로 말미암아 나오는 것이다. 전폐 아래에서 치도를 논하여 일인(군왕)을 돕고 묘당의 위에 서서 도견(성인의 정사)을 잡아 만물을 주재하니, 그의 직임이 어찌 가볍겠는가? 국가의 치란과 천하의 안위가 항상 이에서 비롯될 것이니 진실로 그 사람(재상)을 가볍게 고르지 못할 것이다."
- [경제문감(經濟文鑑)], <재상의 직>, 정도전, 1395.


정도전은 조선의 '헌법전'인 [조선경국전]에 이어, '재상'과 '대간(대관과 간관)'의 임무와 역할을 역시 성리학 사상에 기반하여 규정하는 '공무원 복무규정'으로서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저술하는데 이 책은 우선 '육전'의 구성을 간략히 정리한 후, 중국 역사상 각 왕조와 고려 및 새 국가 조선에서 '재상'의 형태들을 일별하면서 위와 같은 '재상의 직'에 이어 '재상의 업'은 '자기 몸을 바르게 한다', '임금을 바르게 한다', '인재를 잘 안다', '일을 잘 처리해야 한다', '임금을 이끌어 도에 도달하게 한다' 등의 47개조 항목을 들고 있다. 역시 대관과 간관도 같은 형식으로 서술한다.
또한, [경제문감]의 <별집>을 따로 지어 중국 역대 왕들과 고려의 역대 임금들에 대한 간략한 '평론'을 하고 있는데, 정도전이 인정하는 '유학 군자'로서 훌륭한 '재상'은 '주공 단'은 물론 한나라 소하와 삼국시대 촉한의 제갈량 등이며, 한편으로 꼽는 뛰어난 인군은 은탕, 주무왕, 한고조 유방, 당태종 이세민, 송태조 조광윤, 고려태조 왕건 등이 있다.
물론, 중국 역사에 대한 사대주의 풍조가 주를 이루고, 지배계급의 틀에서의 혁신을 논하기에 역사속 '농민혁명'과 왕안석 '신법' 등을 폄하하고 있음은 신분제 사회였던 당시의 시대적 한계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정도전의 '혁명'은 단순한 왕조 교체로서 '역성혁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진보적이었던 사상을 토대로 완전히 새로운 사회체제를 건설하고자 했던 진정한 '혁명'이었다.


"어떤 사회에서든 어른이 되려는 사람이 배워야 하는 지도자의 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의 착한 마음을 인식하고 그것을 밝혀라.
둘째, 자기 수양을 바탕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라.
셋째, 자신의 착한 마음의 수양을 바탕으로 타인과 어울리며, 조화로운 사회관계를 일상에서 지속하라.

대학지도(大學之道),
재명명덕(在明明德),
재친민(在親民),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
- [대학(大學)], <경문 1-1>


조선의 '건국이념'으로서 '성리학'은 춘추시대 공자로부터 시작한 '유학'을 북송시대 주돈이나 남송시대 주희(주자)가 철학적 '이기론(理氣論)'으로 정리한 사상으로 종교와 같은 반열의 '유교'가 되는데, 정도전이 말한 '군자'는 유교의 '4서'인 [대학], [논어], [맹자], [중용] 등을 완벽하게 체득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고대로부터의 역사는 물론 [논어]에서 말한 공자의 '인(仁)'과 [맹자]의 '의(義)'의 정치를 아우르고 [중용]의 치우침 없는 '불편부당'과 지도자(어른)가 갖추어야 할 학문적 소양을 가리키는 [대학] 등에 통달해야 한다.

우리나라와 중국을 통틀어 아시아, 아니 전세계 역사 속에서 정도전에 이르러 비로서 [대학]의 '3강령 8조목'이 현실에서 '혁명'적으로 실현된다. 공자의 '애민(愛民)정치'와 맹자의 '여민(與民)정치'를 기반으로 [대학]의 '3강령(明明德-親民-止於至善)'과 '8조목(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을 '관념'이 아닌 현실정치에서 실현했던 유일한 시도였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해도 삼봉 정도전은 일체의 '관념론'을 거부한 '유물론'자였던 것이다.


"불(佛)씨의 학(學)이... 저들 스스로가 물(物)을 부리기는 하되 물에게 부림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일 돈 한 푼을 주어도 곧 그것을 어찌할 줄 모른다면 그 일이 이상하지 않는가? 그런즉 하늘이 이 사람을 내어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고, 재성(財成), 보상(輔相)의 직책을 준 이유가 과연 어디 있겠는가?...
요컨대 우리(유학)는 마음과 이치가 하나라고 본 것이요, 저들(불교)은 마음이 공(空)함으로써 이치도 없다고 보았고, 우리는 마음이 비록 공하나 만물의 이치를 갖추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우리 유가는 하나이고 석씨는 둘이며, 우리 유가는 연속이고 석씨는 간단(間斷:끊어짐)인 것이다."
- [불씨잡변(佛氏雜辨)], <14. 유교와 불교가 같은 점, 다른 점에 대한 변>, 정도전, 1398.


정도전은 조선의 '건국이념' 성리학을 정치사상으로 실현함과 동시에 '철학' 이데올로기로 굳건히 하기 위해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불교'와 사상 논쟁을 전개하는데, 이 다분히 '논쟁적 저작'이 바로 [불씨잡변(佛氏雜辨)]이다.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은 '하늘의 이치'인 '이(理)'와 '인간의 실천'인 '기(氣)'가 하나라는 '일원론'적 주장을 통해 불교에서 속세와 내세를 구분하는 '이원론'을 통렬히 논박한다.
민중의 '물질적' 욕구와 토지제도 개혁과 같은 '경제민주화'는 등한시한 채 내세를 향한 '수양'과 '깨달음'을 앞세워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부정하게 부를 축적하는 당시 지배종교로서의 불교를 '불씨', '석씨(석가모니)'로 칭하며 비판과 논박을 하고 있다. 마치 5~6백년 후 유럽의 혁명가 엥겔스의 [반뒤링론]이나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못지 않다.
'혁명가' 정도전에 의해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 불교의 '윤회론', '인과론', '지옥론', '자비론' 등의 19개 논제가 처절하게 짓밟힌다.
불교와 유교의 가장 큰 차이는 '이원론'과 '일원론'이고 '관념론'과 '유물론'이다. 마치 천 년 이전 플라톤의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 차이와 비슷하기도 하다.
불교의 '내세'적 '관념론'과 대비되는 유학의 '현실'적 '유물론'은 역시 '4서 5경' 중 하나인 [주역(역경)]의 '과학'(또는 '음양오행설')에 의해 천태만상으로 변화발전하는 객관적 세계를 토대로 한다.


물론,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다수 민중을 위한 현실정치와 격리된 '유교'로서 성리학은 '관념론'의 길을 갔으나, 조선의 건국 이데올로기로서의 초기 '유학'은 이념과 현실을 '일원론'으로 파악한 '유물론'적 성격이 다분했다.

그리하여,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불세출의 혁명가 삼봉 정도전 선생을 감히 나는 '유물론자'라 부른다.


***

1. [삼봉집(三峯集) - 2], 정도전, 정병철 편저, <KSI한국학술정보>, 2009.
2. [사서(四書) - 이치를 담은 네 권의 책(대학/논어/맹자/중용)], 신창호 편역, <나무발전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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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호 지음 / 나무발전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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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혁명가 정도전은 '유물론'자다
- [삼봉집(三峯集) - 2], 정도전, 정병철 편저, <KSI한국학술정보>, 2009.


"[주역]에, 
'성인의 큰 보배는 위(位)요, 천지의 큰 덕은 생(生)이니, 무엇으로 위를 지킬 것인가? 바로 인(仁)이다.'...
인군(人君)의 위(位)는 높기로 말하면 지극히 높고, 귀하기로 말하면 매우 귀하다. 그러나 천하는 지극히 넓고 만민은 수없이 많은데, 한 번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마 크게 우려할 일이 생기게 될 것이다. 하민(下民)은 지극히 나약하나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으나 지혜로써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마음을 얻으면 복종하게 되고, 그들은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배반하게 된다... 그들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사사로운 뜻을 품고서 구차스럽게 얻는 것도 아니요, 도를 어기고 명예를 구하는 방법으로 얻는 것도 아니다. 그 얻는 방법은 오직 인(仁)으로써 가능하다."
-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보위를 바룸(正寶位)>, 정도전, 1394.

고려왕조를 멸하고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무리는 '유학(성리학)'을 지도사상으로 한 고려말 신흥사대부 중 '급진파'의 이념과 중앙에서 배제된 변방 무인세력의 무력의 결합이었다. 인물로 말하면, 정도전의 '머리'와 이성계의 '주먹'으로 이룬 혁명이었다.
고려말 대 유학자이자 재상이었던 목은 이색의 신흥사대부 사학 제자 중 정몽주는 온건개혁파였고 그 '운동권' 동아리 '동심회'의 4년 후배였던 정도전은 급진개혁파였는데, 이성계의 무력을 얻은 급진개혁파가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혁명의 길로 치닫는다.

조선 개국 2년 후인 1394년, 삼봉 정도전은 새 국가를 운영하는 '법전'인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태조 이성계에게 올린다. 오늘로 치면 '헌법'에 해당하는 문건으로 후세인 성종대에 이르러 [경국대전(經國大典)]으로 집대성되는 조선의 '법률초안'이다. [조선경국전]은 '이-호-예-병-형-공'의 중국 국가기구의 뼈대인 '육조(六曹)' 또는 '육전(六典)'을 정리하여 '국가조직을 짠다(經國)'는 국가운영 기획서이기도 했다. 유학의 시조 공자가 '이상적 시대'로 삼았던 중국 주나라의 [주례(周禮)]로부터 유래하는 '육전(六典)'은 '치(治)전', '교(敎)전', '예(禮)전', '정(政)전', '형(刑)전', '사(事)전'으로 각각 '이-호-예-병-형-공'을 의미한다. [조선경국전]은 각 공무조직의 틀과 업무 범위를 세세하게 규정하면서 중국과 고려의 역사를 함께 인용하고 있는데, 그 주제는 첫 장에 서술되는 '인사관리'의 '이(吏)조'에 해당하는 '치전(治典)'이며 주인공은 이를 총괄하는 '총재(冢宰)'다.

정도전이 설계한 '이상국가' 조선은 '천명'을 받은 군주를 앞세워 '유학(儒學)'의 군자가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세상이었다. [조선경국전]에서 '천명'을 받은 군주는 '인군(人君)' 또는 '인주(人主)'이며, 실질적 국가 운영자인 '성인군자'는 바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인 '재상(宰相)'이다.

'경영(經營)'이란 '조직의 틀을 짜는 것(經)'과 '인력을 운용하는 것(營)'의 조화를 뜻하는데, 이로써 '육전'의 최고는 '인사관리'의 '치전'이며 '재상' 중의 '재상'은 '치전'의 대표인 '총재'인 것이다. 


"총재(冢宰)라는 것은 위로 군부를 받들고 밑으로는 백관을 통솔하며 만민을 다스리는 것이니, 그 직책이 매우 큰 것이다. 또 인주(人主)의 자질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으니, 총재는 인주의 아름다운 점은 순종하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옳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은 것은 막아서, 인주로 하여금 '대중(大中)'의 지경에 들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상(相)'이라 하나니, 즉 '보상(輔相:임금을 도와 대신을 거느리며 다스림)'한다는 뜻이다. 백관은 제각기 직책이 다르고 만민은 제각기 직업이 다르니, 재상은 공평하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각자 그 처소를 얻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재(宰)'라 하나니, 즉 '재제(宰制:전권을 휘두름)'한다는 뜻이다."
- [조선경국전], <치전>, 정도전, 1394.


'치전'의 '총재'가 바로 '재상(宰相)'인 바, '전권을 휘두르며(宰)' '임금을 도와 대신을 거느리며 다스리는(相)' 직위이다. 가히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인데 국가운영의 하나하나를 소홀함 없이 다 알아야 하고 챙겨야 하는 중책이다. 사람이 이를 혼자 다 할 수는 없으므로 여러 인재를 선별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인사관리'가 제일 중요하니 '치전'의 '총재'가 조선의 '재상'이 되는 것이다. 재상은 아니나 먼훗날 조선 당쟁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 간관을 임명하는 정5~6품 '이조전랑'의 요직의 발령이 된 이유도 그 연장선상 아니겠는가.

'이상국가' 조선을 운영하는데 핵심은 이러한 성인군자 반열의 '재상'과 바른 말 하고 감사하며 비위자를 탄핵하는 '대간(臺諫:대관과 간관)'이었으니, 당시의 '유일한 정치체제'였던 '세습군주제'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대쪽같은 '성리학(주자의 유학사상)' 이념으로 무장한 비타협적 사대부 관료들과 그들에 의해 조직된 국가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위로는 음양을 조화하고 아래로는 서민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며, 안으로는 백성을 밝게 다스리고 밖으로는 사방의 오랑캐를 진정하고 무마하는 것이니, 국가의 작록과 포상과 형벌이 이에 관련이 있고 천하의 정치와 덕화, 가르침과 명령이 이로 말미암아 나오는 것이다. 전폐 아래에서 치도를 논하여 일인(군왕)을 돕고 묘당의 위에 서서 도견(성인의 정사)을 잡아 만물을 주재하니, 그의 직임이 어찌 가볍겠는가? 국가의 치란과 천하의 안위가 항상 이에서 비롯될 것이니 진실로 그 사람(재상)을 가볍게 고르지 못할 것이다."
- [경제문감(經濟文鑑)], <재상의 직>, 정도전, 1395.


정도전은 조선의 '헌법전'인 [조선경국전]에 이어, '재상'과 '대간(대관과 간관)'의 임무와 역할을 역시 성리학 사상에 기반하여 규정하는 '공무원 복무규정'으로서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저술하는데 이 책은 우선 '육전'의 구성을 간략히 정리한 후, 중국 역사상 각 왕조와 고려 및 새 국가 조선에서 '재상'의 형태들을 일별하면서 위와 같은 '재상의 직'에 이어 '재상의 업'은 '자기 몸을 바르게 한다', '임금을 바르게 한다', '인재를 잘 안다', '일을 잘 처리해야 한다', '임금을 이끌어 도에 도달하게 한다' 등의 47개조 항목을 들고 있다. 역시 대관과 간관도 같은 형식으로 서술한다.
또한, [경제문감]의 <별집>을 따로 지어 중국 역대 왕들과 고려의 역대 임금들에 대한 간략한 '평론'을 하고 있는데, 정도전이 인정하는 '유학 군자'로서 훌륭한 '재상'은 '주공 단'은 물론 한나라 소하와 삼국시대 촉한의 제갈량 등이며, 한편으로 꼽는 뛰어난 인군은 은탕, 주무왕, 한고조 유방, 당태종 이세민, 송태조 조광윤, 고려태조 왕건 등이 있다.
물론, 중국 역사에 대한 사대주의 풍조가 주를 이루고, 지배계급의 틀에서의 혁신을 논하기에 역사속 '농민혁명'과 왕안석 '신법' 등을 폄하하고 있음은 신분제 사회였던 당시의 시대적 한계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정도전의 '혁명'은 단순한 왕조 교체로서 '역성혁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진보적이었던 사상을 토대로 완전히 새로운 사회체제를 건설하고자 했던 진정한 '혁명'이었다.

"어떤 사회에서든 어른이 되려는 사람이 배워야 하는 지도자의 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의 착한 마음을 인식하고 그것을 밝혀라.
둘째, 자기 수양을 바탕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라.
셋째, 자신의 착한 마음의 수양을 바탕으로 타인과 어울리며, 조화로운 사회관계를 일상에서 지속하라.

대학지도(大學之道),
재명명덕(在明明德),
재친민(在親民),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
- [대학(大學)], <경문 1-1>


조선의 '건국이념'으로서 '성리학'은 춘추시대 공자로부터 시작한 '유학'을 북송시대 주돈이나 남송시대 주희(주자)가 철학적 '이기론(理氣論)'으로 정리한 사상으로 종교와 같은 반열의 '유교'가 되는데, 정도전이 말한 '군자'는 유교의 '4서'인 [대학], [논어], [맹자], [중용] 등을 완벽하게 체득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고대로부터의 역사는 물론 [논어]에서 말한 공자의 '인(仁)'과 [맹자]의 '의(義)'의 정치를 아우르고 [중용]의 치우침 없는 '불편부당'과 지도자(어른)가 갖추어야 할 학문적 소양을 가리키는 [대학] 등에 통달해야 한다.

우리나라와 중국을 통틀어 아시아, 아니 전세계 역사 속에서 정도전에 이르러 비로서 [대학]의 '3강령 8조목'이 현실에서 '혁명'적으로 실현된다. 공자의 '애민(愛民)정치'와 맹자의 '여민(與民)정치'를 기반으로 [대학]의 '3강령(明明德-親民-止於至善)'과 '8조목(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을 '관념'이 아닌 현실정치에서 실현했던 유일한 시도였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해도 삼봉 정도전은 일체의 '관념론'을 거부한 '유물론'자였던 것이다.


"불(佛)씨의 학(學)이... 저들 스스로가 물(物)을 부리기는 하되 물에게 부림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일 돈 한 푼을 주어도 곧 그것을 어찌할 줄 모른다면 그 일이 이상하지 않는가? 그런즉 하늘이 이 사람을 내어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고, 재성(財成), 보상(輔相)의 직책을 준 이유가 과연 어디 있겠는가?...
요컨대 우리(유학)는 마음과 이치가 하나라고 본 것이요, 저들(불교)은 마음이 공(空)함으로써 이치도 없다고 보았고, 우리는 마음이 비록 공하나 만물의 이치를 갖추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우리 유가는 하나이고 석씨는 둘이며, 우리 유가는 연속이고 석씨는 간단(間斷:끊어짐)인 것이다."
- [불씨잡변(佛氏雜辨)], <14. 유교와 불교가 같은 점, 다른 점에 대한 변>, 정도전, 1398.


정도전은 조선의 '건국이념' 성리학을 정치사상으로 실현함과 동시에 '철학' 이데올로기로 굳건히 하기 위해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불교'와 사상 논쟁을 전개하는데, 이 다분히 '논쟁적 저작'이 바로 [불씨잡변(佛氏雜辨)]이다.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은 '하늘의 이치'인 '이(理)'와 '인간의 실천'인 '기(氣)'가 하나라는 '일원론'적 주장을 통해 불교에서 속세와 내세를 구분하는 '이원론'을 통렬히 논박한다.
민중의 '물질적' 욕구와 토지제도 개혁과 같은 '경제민주화'는 등한시한 채 내세를 향한 '수양'과 '깨달음'을 앞세워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부정하게 부를 축적하는 당시 지배종교로서의 불교를 '불씨', '석씨(석가모니)'로 칭하며 비판과 논박을 하고 있다. 마치 5~6백년 후 유럽의 혁명가 엥겔스의 [반뒤링론]이나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못지 않다.
'혁명가' 정도전에 의해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 불교의 '윤회론', '인과론', '지옥론', '자비론' 등의 19개 논제가 처절하게 짓밟힌다.
불교와 유교의 가장 큰 차이는 '이원론'과 '일원론'이고 '관념론'과 '유물론'이다. 마치 천 년 이전 플라톤의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 차이와 비슷하기도 하다.
불교의 '내세'적 '관념론'과 대비되는 유학의 '현실'적 '유물론'은 역시 '4서 5경' 중 하나인 [주역(역경)]의 '과학'(또는 '음양오행설')에 의해 천태만상으로 변화발전하는 객관적 세계를 토대로 한다.


물론,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다수 민중을 위한 현실정치와 격리된 '유교'로서 성리학은 '관념론'의 길을 갔으나, 조선의 건국 이데올로기로서의 초기 '유학'은 이념과 현실을 '일원론'으로 파악한 '유물론'적 성격이 다분했다.

그리하여,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불세출의 혁명가 삼봉 정도전 선생을 감히 나는 '유물론자'라 부른다.


***

1. [삼봉집(三峯集) - 2], 정도전, 정병철 편저, <KSI한국학술정보>, 2009.
2. [사서(四書) - 이치를 담은 네 권의 책(대학/논어/맹자/중용)], 신창호 편역, <나무발전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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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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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즐기면, 이 또한 '희망'을 향해 지나가리라!
- [라틴어 수업], 한동일, <흐름출판>, 2017.




"많은 유럽 언어에는 '힘'을 나타내는 단어가 두 개씩 있다. 라틴어에는 potestas-potentia, 프랑스어에는 pouvoir-puissance, 스페인어에는 poder-potencia, 독일어에는 Macht-Vermogen 등이 있는 반면 영어에는 power 한 단어만 있다... 소문자 'power(활력)'와 대문자 'Power(권력)'로 구분... 수직적이고 중앙집중화된 지배권력, 자본주의 명령, 삶권력에는 '권력(Power/potestas)'이라 이름 붙이고, 저항의 수동적 과정, 산노동의 힘, 삶정치의 창조적 측면에는 '활력(power/potentia)'을 썼다."
- [Assembly](2017), '1-5 권력을 다르게 잡자',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라틴어는 문자로만 전해오는 '죽은 언어'다.
기원전 1세기경 지중해를 중심으로 뻗어나갔던 고대 로마제국의 문자로 '세계 공용어'였던 라틴어는 지금의 '영어'와 같이 강대국의 지배를 통해 널리 확산된 언어로서 '제국의 언어'라는 공통점이 있다.
20세기 미국의 패권을 표현했던 라틴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유래가 기원후 1~2세기 로마제국의 전성기를 나타냈던 표어 '팍스 로마나(Pax Romana)'다. 즉, 제국의 힘으로 유지되는 세계 '평화(Pax)'라는 오만함이다.
언어로서 영어의 부모는 게르만어와 라틴어인데 라틴어는 영어의 엄마 격이다.

'다중'의 아래로부터 운동으로 '제국'에 저항하고 새로운 권력지형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이탈리아 정치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최근 저작 [Assembly]에서 '권력'을 뜻하는 라틴어로 'potestas(포테스타스)'와 'potentia(포텐티아)' 두 개가 있는데, '포테스타스'는 물질적이고 수직적 '권력'이고 '포텐티아'는 잠재적이고 수평적 '활력'이라고 구분한다. 지배권력은 라틴어로 '포테스타스'이고 지배권력을 새롭게 구성할 '다중'의 '활력'은 '포텐티아'다. 영어로 '잠재력'인 'potential'의 어원이 라틴어 'potentia(포텐티아)'다.


"'카르페 디엠'은 원래 농사와 관련된 은유로서 로마의 시인인 호라티우스가 쓴 송가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시구입니다.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카르페 디엠, 쾀 미니뭄 크레둘라 포스테로.
오늘을 붙잡게. 내일이라는 말은 최소한만 믿고."

- [라틴어 수업], 한동일, <흐름출판>, 2017.


동아시아 최초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인 한동일 신부의 대학 강의록을 엮은 [라틴어 수업]은 라틴어 속담을 중심으로 풀어내는 인문학 이야기다. 유럽과 영미 등의 서양 언어에서 '로마제국'의 '라틴어'는 동아시아에서 '중국제국'의 '한자(漢字)'와 위상이 비슷하니 [라틴어 수업]은 아시아식으로 보면 '고사성어(故事成語) 강의' 정도 되겠다. 
언어는 역사적으로 다분히 정치경제적이고 사회적이다.
오래전 '죽은 언어' 라틴어는 이렇게 '살아 있다'.

우리에게 '오늘을 즐겨라'로 익히 알려진 '카르페 디엠'을 예로 들면, 이 문구는 호라티우스의 시에서 유래하는데, '카르페(carpe)'는 '추수하다'는 뜻의 '카르포(carpo)'의 명령형으로 일년 동안 힘들여 지은 농작물을 '오늘 수확하라'는 말이다. 그간 고생했으니 내일 생각은 말고 오늘에 충실하라는 시구절이 쾌락주의 사조의 표제어로도 쓰이면서 '오늘을 즐겨라'로 의역되었다는 이야기다.


"신약성서 마태오복음 6장 34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Nolite ergo esse solliciti in crastinum crastinus enim dies sollicitus erit sibi ipse sufficit diei malitia sua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일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마태오는... 기본적으로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믿음(신앙) 안에서 살아야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지금 당장 힘들어 죽겠는데 그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느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때 이 단순한 말 한 마디를 생각합니다.

Hoc quoque transibit!
혹 쿠오퀘 트란시비트!
이 또한 지나가리라!"

- [라틴어 수업], 한동일, <흐름출판>, 2017.


마태오는 신앙이라는 '영원'을 믿었기에 하루하루를 버텼겠지만, 일반 '다중'에게는 기쁨도 슬픔도 영원하지 않고 '본래 얻고 잃는 것은 없고 잠시 머물 뿐'이라는 [동국이상국집]의 이규보 선생이 말한 '부처님 말씀'이 더 현실적일 수 있다. 

카톡 프로필 문구 등으로 많이 쓰이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Hoc quoque transibit)"에서 '지나가는' 'transibit'는 '변화'를 의미하는 'trans-'의 어원을 갖고 있다. 지나가는 시간과 그 축적으로서 인생은 계속 '변화'하니 오늘의 슬픔이 내일의 행복이 될 수 있다. 동양의 고사성어로 중국 전한시대 잡기록 [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새옹지마(塞翁之馬)'와 비슷하다. 
그러니 일희일비 말고 '평상심'으로 오늘을 보내자는 지혜의 말이다.


오늘을 버티는 힘은 '희망'이다.
'희망'은 라틴어로 '스페스(spes)'라는데 '기대하고 바란다'라는 뜻인 인도-유럽어 ''speh-s'에서 왔다고 한다. 반대로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무너지는 순간 '절망'이 찾아오는데, '희망이 거두어진 것'이라는 라틴어 단어는 '데스페라티오(desperatio)'라고 한다. 영어로 '자포자기 또는 필사적 상태(desperation)'의 어원이다.
'절망'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희망'을 향해 '지나가는(transibit)' 것이 지혜로운 인생철학이며, 이것이 바로 '변증법(辨證法/dialectic)'이다.
'변증법(dialectic)'의 라틴어원 'dia-'는 '서로 통한다'는 의미의 접두어다.
이렇게 '반대말'도 서로 통하는 것이 바로 '변증법'이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아 고달프고 힘들어 내일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 동안의 노력을 '추수(carpe)'하는 오늘을 즐기고, 그 오늘이 별로였더라도 '지나가는(transibit)' 시간의 한 때로 담담하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지혜의 구절들을 소개한 후 한동일 신부는 [라틴어 강의]를 '삶'과 '희망'으로 맺는다.


"라틴어 명구에도 희망과 관련된 것들이 참 많아요.

Dum vita est, spes est,
둠 비타 에스트, 스페스 에스트,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Dum spiro, spero.
둠 스피로, 스페로.
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

Dum vivimus, speramus.
둠 비비무스, 스페라무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희망한다."

- [라틴어 수업], 한동일, <흐름출판>, 2017.

***

1. [라틴어 수업], 한동일, <흐름출판>, 2017.
2. [Assembly](2017),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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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5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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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중항쟁
- 신군부 쿠데타 세력에 의한 계엄령 선포와 광주민중들의 항쟁



"윤상현(소설 속 윤상원 열사)! 넌 왜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 하는가?... 
누군가는 이 자리를 지켜야 해. 지난 열흘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이어온 이 뜨거운 항쟁의 마침표를 누군가는 찍어야 해.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 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내가 하겠다는 거야. 이유는 다만 그것 뿐이야. 저 불의한 압제자들에게 이 자리를,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냥 고스란히 내어줄 수는 없어. 절대로. 그것이야말로 저들의 승리를 완전히 인정해 주는 것이 되고 말 터이므로...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설사 이 순간엔 우리의 싸움이 패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야. 훗날 다른 누군가가 이 싸움을 다시 시작하겠지. 그래, 아무 것도 헛된 것은 없어. 우리가 꿈꾸었던 것, 사랑하고 소망하고 투쟁했던 것, 진정 그 어떤 것도 헛된 것은 없어..."
- [봄날] 5권, '1980. 5. 27. 윤상원 열사의 독백', 임철우, <문학과지성사>, 1997.


들불야학 선생으로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지키던 서른 살 윤상원 열사의 심경을 작가 임철우가 그의 소설 [봄날]에서 재구성한 대목이다.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스물여섯 살이었던 소설가 임철우는 '살아남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런 스스로와 '화해'도 하지 못한 채 항쟁 후 17년이 지난 1997년에 '광주민중항쟁'의 일지를 소설로 재구성했는데, 바로 소설 [봄날]이다. 주인공은 가상의 인물이되 시공간은 사실 그대로를 배경으로 하는 논픽션 르포문학이다. 
'민중의 애국가'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기리는 '영혼결혼식'의 주인공인 윤상원 열사는 5월 광주의 마지막 날이었던 1980년 5월 27일, 최후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던 시민군들과 함께 본인이 국민으로 살았던 국가의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은 대한민국 정규군대가 국민을 상대로 벌인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1979년 10월에 독재자 박정희가 저격 당하면서 길고 긴 18년 간의 군부개발독재가 일단 종식되었고, 1980년 봄은 전국에 걸친 민주화의 물결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15일, 약 10만여명의 학생과 시민은 자발적으로 서울역에 모여 조속한 시일 내에 계엄을 해제하고 민주화를 추진할 것을 주장했으나 시위와 농성이 계속될 경우 군이 개입할 명분을 준다는 주장이 나오자 지도부 역할을 하던 대학생들은 시위를 해산하기로 결정하고 서울역에서 물러난다. 이를 사람들은 '5.15 서울역 회군'이라 부른다.

이후 바로 전해 '12.12 쿠데타'로 이미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5월 17일을 기하여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국회 해산, 국보위 설치 등의 조치를 단행하게 되는데, 전두환 '신군부'의 1979년 '12.12 쿠데타'에 이은 1980년 5.17 '2차 쿠데타'였다.


이날 광주에서는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전남대 등지에서 대학생들이 횃불 시위 등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역사적인 5월 18일, 신군부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두려워하여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는 대학생들과 군인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면서 학생들에 대한 군인들의 무자비한 시위 진압이 시작된다. 
전남대 앞에서의 진압은 5.18 광주민중항쟁의 첫 시작이었다. 이어 학교에 진입하지 못한 학생들이 광주 시내에 모여 군대를 물릴 것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개되었고 군대는 밤 9시 이후 통행금지 조치까지 내렸으나 민주화를 열망하는 광주민중들의 시위는 더욱 거세어질 뿐이었다. 이에 신군부는 광주지역을 고립시키고 특수부대 및 군인들을 증파하여 무자비한 폭력과 심지어는 군용칼까지 휘두르며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잡아간다. 하지만, 신군부의 이러한 진압행위는 광주민중들의 분노를 더욱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고 시위와 항쟁이 더욱 들불처럼 번지게 된다.
 
5월 20일, 고등학생들까지 시위대에 참여하게 되었고 신군부는 고등학교에까지 휴교령을 내렸다. 택시와 버스들도 차량시위를 벌이면서 광주민중들의 항쟁은 커져만 가는데, 신군부의 통제를 받은 방송과 신문은 고립된 광주의 상황을 ‘북한의 명령을 따른 폭도들에 의한 것’이라고 허위보도를 일삼는다.
 
5월 21일, 신군부는 금남로에서 시위 중이던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 집중사격을 하였고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가면서 광주민중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경찰서와 탄약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였다. 스스로 무장한 시민군은 군대를 광주 외곽으로 몰아내고 그들이 다시 몰려오는 5월 27일까지 광주의 질서를 유지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 짧은 시간 동안 광주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고 범죄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으며 시민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격려하는 등 ‘파리꼬뮌’이 아닌 이른바 ‘광주꼬뮌’으로 불릴 정도의 '민중 자치의 해방구'였다고 한다.
 
5월 27일 새벽, 신군부는 탱크까지 앞세우고 시내로 진격해 들어왔고, 시민군은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하지만, 중무장한 정규 군대를 시민군이 당해낼 수는 없었고 끝내 도청에 남아있던 많은 시민들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5.18 광주민중항쟁은 비극으로 끝난다.
12.12 쿠데타로 대통령 최규하를 허수아비로 만든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5.27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위한 '대책회의'에서 '광주사태'에 대한 '강경진압'을  지휘했고 '조기진압'을 위해 군대가 광주 시민들에게 직접 사격을 한 날 진압군에 '하사금'을 내리기도 했다. 
전두환이 광주 학살의 책임자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이제 그 자에게는 '옥사(獄死)'의 길 밖에 없다.

역사학자 서중석 교수는 '이명박근혜 정권'의 '뉴라이트' 역사왜곡에 대항하여 해방 이후 한국전쟁과 18년 박정희 군부독재 시기를 거쳐 전두환 학살정권에 이르는 우리 현대사를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기자 김덕련과의 문답 형식을 빌어 정리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권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이야기이고, 17권은 광주민중을 학살하고 집권한 '5공화국' 학살정권의 '잔혹사'를 다룬다.

소설 [봄날]에서 윤상원 열사의 입을 빌어 말한 "우리가 패배할지라도 훗날 다른 누군가가 다시 시작할 이 끝나지 않는 싸움"은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그 해 '8월 노동자 대투쟁', 1996년의 '총파업', 2002년과 2008년의 대규모 '촛불시위'와 최근의 2016~17년 '촛불항쟁'으로 계속 되살아나 우리 역사를 전진시켜 왔다.


우리 역사에서 5월 18일은, 당시 전두환 신군부 쿠데타 정권의 파쇼적 실체와 이에 대항한 우리 민중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세상의 주인인 우리 민중들을 폭력만으로 억압하고 통치할 수는 없다는 역사적 진실 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민주주의의 역사적 '아이콘'이 되어왔고, 이후 이 땅 민주주의 역사의 살아있는 교본이자 이 땅의 민주주의와 노동해방을 이루고자 하는 후세대들에게는 기어이 한을 풀지 못한 하나의 ‘원죄’가 되어 왔다.


"... 긴 시간이 흘렀지만, 밝혀야 할 사안은 지금도 적잖게 남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뻔뻔한 거짓말과 터무니없는 궤변으로 오월 광주를 어떻게든 폄훼하려는 세력이 여전히 날뛰고 있습니다. 오월 광주 문제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오월 광주의 진실을 잊으면 민주주의의 미래는 없습니다."
-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17권, '나가는 말', 서중석/김덕련, <오월의봄>, 2019.


# 5.18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 산화해 간 민주주의 영령들의 넋을 기립니다.

***

1. [봄날] 1~5권, 임철우, <문학과지성사>, 1997.
2.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17권, 서중석/김덕련, <오월의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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