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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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革命)'이 만든 '반역(叛逆)'의 나라, 조선(朝鮮)
- [조선반역실록] /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성계는 역적인가, 아니면 혁명가인가? 그는 조선왕조에서는 왕실을 일으킨 국조이고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혁명가이지만 고려왕조 입장에선 나라를 훔친 역적이었다.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스스로 옹립한 공양왕과 그의 세자를 죽였으며, 수많은 고려 왕씨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고려왕조를 지키려던 정몽주를 충신이라 부르고, 두문동에 숨어 살며 조선의 신하되기를 거부한 72현을 고려의 마지막 충절로 기리는 것이다.
...
그렇듯 조선은 고려왕조의 마지막 역적의 피묻은 손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다. 하지만 조선을 세웠을 때만 해도 '혁명'의 성공에 도취되어 자신이 다시 '역적'에 의해 쫓겨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인과응보라고 했던가? 그 역시 반역에 의해 쫓겨날 운명이었던 것을!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에게 쫓겨날 줄을 어찌 알았으랴!"
- [조선반역실록], <1. 고려의 마지막 역적 이성계>, 박영규, <김영사>, 2017.


고려말 권문세족의 토지경제 전횡과 지배 이데올로기 불교의 부패 등의 폐단을 뒤집어 엎기 위해 '계민수전(計民授田)'의 경제토대와 '민본주의(民本主義) 성리학(性理學)' 이념으로 새로운 국가를 설계한 '혁명가' 정도전(鄭道傳)은 본인이 건설한 '조선왕조 5백년' 내내 '역적(逆賊)'이었다. 그처럼 조선왕조 마지막까지 신원(伸冤)되지 못한 이씨 왕조의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영원불멸의 역적은 광해군 시기 [홍길동전]의 허균(許筠) 정도였다. 선조 때 역적 정여립(鄭汝立)도, 조선 후기 계룡산 일대를 중심으로 퍼진 비기(祕記) [정감록(鄭鑑錄)]도 그 뿌리는 정도전의 '정(鄭)씨'였다.



"고려 말기에 이씨 왕조 예정설이 떠돌았는데 조선 중후기에 접어들면서 정씨 왕조설로 변형되었다. 원래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려 죽자 그의 후손과 세력들이 이를 애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고도 하고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이 정도전을 모함하기 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는 설도 있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정씨 왕조설을 담은 비기는 조선 후기에 들어 다른 비기들을 압도하며 유행을 탔다.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인 숙종 시기였다.
... 
한편 조일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 직전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1,000여 명이 죽었다. 정여립이 지리산에 묻힌 옥판을 찾아냈는데 여기에 정씨 왕조설과 계룡산이 도읍지라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 
숙종과 영조 시기까지도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책명은 공식 기록에 나타나지 않다가 18세기 말엽인 정조 말년에야 나타난다.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는 [정감록]이 '요서(妖書)와 방서(方書)를 섞어 모은 책'이라 하고 이어 '영조 연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9세기 문벌정치(세도정치) 시기에 들어와 [정감록]은 크게 유행을 탔다."
- [민란의 시대], <1. 문벌정치의 등장과 관서농민전쟁>,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참여하고 22권 한국통사 [한국사이야기]를 집필한 재야사학자 이이화 선생은[정감록]과 '홍경래의 난'을 비롯하여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과 의병(義兵) 투쟁까지 조선 후기 다수 민중들의 '혁명'의 역사를 2017년에 [민란의 시대]로 엮었다. 한편,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으로 우리 역사를 대중화시킨 작가 박영규는 같은 해 '12개의 반역사건으로 읽는 새로운 조선사'라는 부제의 [조선반역실록]에서 고려의 최후 역적 태조 이성계부터 태종과 세조, 억울한 청년 장수 남이, 정여립과 허균, 이괄 등 12건의 '반역사건'을 통해 조선 역사를 돌아본다.

조선태조 이성계는 정도전 등 급진개혁파의 혁명이론에 따라 고려말 '3단계 혁명 단계'를 거치는데, 1차는 위화도 회군 후 우왕과 최영 처단, 2차는 '폐가입진(廢假立眞: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 논리로 우왕과 창왕을 공민왕 시기 승려 신돈(辛旽)의 자식으로 규정하여 '진짜 왕(王)씨' 공양왕 옹립, 마지막 3차는 일종의 '상생협정'을 맺고자 찾아온 공양왕을 그 자리에서 폐위시킨 전략단계였다. 
정도전이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 등에서 설파한 새로운 국가는 '천명'을 받은 '인군(人君,人主)'을 중심으로 '민본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대부(士大夫)'가 이끌어가는 체제였는데, 이에 따르면 건국의 공로가 있는 왕자라도 사병을 거느리면 안되었기에 당시 혁명국가의 설계자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이유로 중앙군을 강화하기 위해 사병들을 혁파하였다. 그러나 '혁명가' 정도전은 결국 조선을 온전히 '이(李)씨'의 국가로 만들려는 태조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이 일으킨 '2단계 쿠데타' 중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가장 먼저 숙청된다.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으로 형인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 3대 태종이 되는데, 7백여 년 전 중국의 당태종 이세민과 비슷한 경력으로 아버지를 도와 '혁명'에 공헌한 왕자로서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왕조의 기틀을 잡았다는 후대의 평가는 받지만, 고려 최후의 '역적'인 아버지 이성계와 같이 '반역'은 하였으되 '체제변혁'과 무관하므로 '혁명'이 아닌 '쿠데타'였다. 이후 태상왕 이성계는 개국 당시 정5품 형조의랑을 지낸 조사의(趙思義)라는 수하를 통해 본인의 복위를 위한 반란을 도모하나 태종에 의해 진압되었고 결국 아들의 쿠데타를 인정하게 된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마지막 화해의 자리에서도 이성계는 이방원을 보자마자 활을 쏘았으나 기둥을 맞추고 술잔을 따르려는데 신하를 시켜 받으니 소매에서 철퇴를 꺼내놓고는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한탄했다는 야사를 전한다. 
'역적' 태조의 아들 태종은 아버지의 '반란'을 진압한 후 살기 위해 처남들인 민씨형제들도 '역적'으로 숙청한다. 후대는 이방원이 이룬 '왕권강화'의 결과를 말하지만, 당시로 보면 피묻은 칼을 쥔 자가 개죽음 당하지 않기 위해 평생 본인 주변의 '역적'을 만든 생애였다. 


"단종 1년(1453년) 10월 19일 새벽, 수양대군 이유의 집 지게문으로 세 명의 갓 쓴 사내들이 찾아들었다. 권람, 한명회, 홍달손이 그들이었다. 권람은 조선 개국공신이자 대제학을 지낸 권근의 손자였고, 한명회는 개국 당시 명나라로 가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짓고 돌아온 한상질의 손자였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명문집안 출신들인 셈인데, 그들과 달리 홍달손은 내금위장 출신의 무장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한명회와 친밀한 자들로서 몇 년 전부터 수양대군과 부쩍 가깝게 지낸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벼슬살이로 보자면 권람은 36세의 늦은 나이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고, 홍달손은 내금위장을 거쳐 수군첨절제사를 지내다가 파직당한 처지였고, 한명회는 조상의 공덕에 힘입어 문음으로 겨우 종9품 경덕궁직으로 있었다."
- [조선반역실록], <6.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 박영규.


'역적'의 자손이라 그 유전적 형질로 인해 계속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아니리라. 왕조만이 유일한 정치체제였던 당시로서는 필연적인 과정의 반복이었을 뿐이다. 
'민본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대부'가 이끌어가는 체제가 정도전의 죽음으로 작동하지 못한 것도 아니리라. 후대의 분분한 이견들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마지막까지 견고한 관료체제로 왕권을 끊임없이 견제했던 나라였고 유일하게 이를 완전히 무시했던 연산군부터 시작하여 관료들의 '반란'으로 왕을 갈아치운 '반정(反正)'이 반복되었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癸酉靖難) 쿠데타는 아마도 왕자가 일으킨 마지막 반란일 것인데 마치 오늘날 윤석열 검찰총장을 연상시키는 권람과 과거 급제도 못한 채 '사대부'의 자격조차 미달이었던 한명회 등을 끌어들인 수양대군이 '역적'의 중심이었다. 이후 '반정'으로 즉위한 진성대군 중종이나 능양군 인조는 실질적 중심 '역적'이 아니었고 권력투쟁을 위해 결사한 '사대부' 무리가 '반정'의 중심이었다. 

이후 선조 시기 정여립은 고향 전주로 낙향하여 유학 경전에 대한 자유분방한 해석과 호방한 행보로 '대동계'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역적'이 되어 처단되었고, '율도국'이라는 이상세계를 건설한 의적 [홍길동전]의 허균도 광해군 시기 여당이었던 북인 중 대북파의 정파투쟁 과정에서 국문도 없이 능지처참 당했다. 정여립이나 허균 모두 명문 집안 출신 자제로서 수재들이었고 남보다 특출한 인물들이었으되 '반역'의 증거는 없다. 그들을 '역적'으로 만든 건 '혁명'으로 건설된 나라였던 조선왕조의 '역적' 왕자들 및 그들을 중심으로 권력을 쟁탈하려던 '사대부' 관료들의 반복적 출현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반역'에 대한 권력자들의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진사라 했으나 어떻게 그 칭호를 얻었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그는 어릴 때부터 외숙인 유학권에게 글을 배웠다. 그런 끝에 뜻을 품고 서울로 와 과거에 응시했다. 서북 출신들이 비록 등용은 되지 않으나 문과는 진사, 무과는 출신(무과 합격자)이라도 되기 위해 과거를 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홍경래는 몇 차례 과거를 보았지만 번번이 낙방했고 자신보다 형편없는 글재주와 학식을 가진 남쪽 출신의 양반붙이들이 합격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20대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문벌집단이 벌이는 차별과 부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접한 홍경래는 과거 합격을 단념했다. 그리고 절로, 산으로 떠돌며 유랑생활을 했다. 그는 길흉을 점치는 술수를 익히기도 하고 풍수를 배워 지사(地師)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는 중에 평안도 박천의 청룡사에서 자신보다 다섯 살 아래로 서자 출신인 우군칙을 만났다. 이 만남이야말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
홍경래는 민중의 영웅이 되었지만,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조하고자 한 그의 혁명가적 의지는 실현되지 않았다. 구체적인 변혁지향의 이론이나 실천운동이 민중에게 절실하게 부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에도 운수가 있을까? 뒤이어 나타난 전봉준은 이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 [민란의 시대], <1. 문벌정치의 등장과 관서농민전쟁>, 이이화.

나름대로 왕권을 견제하면서 유지되던 '사대부' 관료체제가 실질적으로 무너지고 오로지 왕권에 기생하여 부를 축적하는 데만 혈안이 된 19세기 세도정치(勢道政治)에 이르러 '혁명(革命)'이 만든 나라 조선에서는 진정한 '혁명(革命)'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 당시 '역적'은 부패정치로 인해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다수 농민 민중들이었고, 조선 최초의 '혁명가'들은 관서의 과거시험 낙방생 홍경래와 서자 우군칙, 지식인 김사용과 김창시, 장사 홍총각, 부호 이희저 무리였다. 
홍경래 이후 같은 관서지방의 유흥렴, 삼남지방의 이필제 등의 '직업혁명가'들이 그를 이어 조선의 마지막 1백년 '민란의 시대'에 등장하기도 한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그들의 계획이 감히 '혁명'인 이유는 다수 민중을 동력으로 했기 때문이며, 이후 왕조의 몰락 과정에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으로 '반역' 역사의 절정을 맞는다. 
물론 '근대화'라는 당시 시대정신에 휘말린 갑신정변(甲申政變) 등의 쿠데타도 있었고 국가 주도의 갑오경장(甲午更張,갑오개혁)도 있었지만, 썩어빠진 왕조를 결과적으로 무너뜨린 것은 다수 민중 '역적(逆賊)'들의 '반역(叛逆)', 즉 '혁명(革命)'이었다.


반봉건(反封建) 투쟁으로 시작된 갑오농민전쟁은 당시 정세에 따라 반외세(反外勢) 투쟁이 되었고 결국 조선말 '혁명' 운동은 '의병 투쟁' 등의 반침략 투쟁의 형태를 띄게 되는데, 역사에 가정은 없겠지만 조선왕조 내부 체제 '혁명'이 이루어졌다면 우리 역사 마지막 왕을 끌어내린 혁명가는 과연 누가 되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혁명(革命)'이 만든 '반역(叛逆)'의 나라, 조선(朝鮮)의 로베스피에르와 쑨원은 어디에 있었을까?

***

1. [조선반역실록], 박영규, <김영사>, 2017.
2.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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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제국 이야기 - 유라시아 대륙 양단에 강력한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흉노를 찾아서
장진퀘이 지음, 남은숙 옮김 / 아이필드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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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지대'와 '교환'의 세계사
- [칭기스의 교환], 티모시 메이, 권용철 옮김, <사계절>, 2020.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 몽골제국은 화약 지식의 주요 전달자로 알려져 있다... 유럽이 몽골로부터  직접 화약 지식을 획득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몽골이 침입한 이후에야 화약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상인들이 (심지어 폴로 가문도) 몽골제국을 여행하면서 화약제조법을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이는 1500년 이후 유럽인들이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 [칭기스의 교환], <2-5. 새로운 전쟁방식>, 티모시 메이, 2012.



"... 몽골족의 폭발적 팽창은 장기 십자군운동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왜냐하면 몽골족은 중국을 제압하고, 러시아를 유린하고, 이슬람 영역을 초토화했지만, 기독교 왕국은 거의 그대로 뒀기 때문이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3-14. 유럽과 장기 십자군운동>, 타밈 안사리, 2019.


진시황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후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예전부터 각 나라들이 세운 성벽들을 통일제국답게 하나로 이은 대공정이었다. 달에서도 보인다는 현재의 만리장성은 진나라 이후 천년 이상 지나 중국을 다시금 통일한 명나라가 증축한 것이다. 농경의 가능 여부를 가르는 연간 강우량 15인치선과 대략 유사하다는 만리장성은 '정착민'들이 북방 '유목민'들을 막기 위해 세웠다.

동쪽의 만리장성은 이후 서쪽의 로마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발상으로 미국의 저술가 타밈 안사리는 세계사 5만년을 종합한다. 미국의 몽골학자 티모시 메이는 동서양을 연결한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 중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몽골족을 중심으로 한 세계사를 '칭기스의 교환'이라 칭한다.


"(일 칸국 가잔 칸의 계승자) 울제이투는 라시드 앗 딘에게 [집사(集史)]의 일부로 몽골족의 역사를 포함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그 내용을 '세계의 역사'로 확장하라고 명령했는데 불교에 관한 내용이 꽤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 수니파 행정관료들은 불교도가 포함된 조사팀과 함께 시아파 몽골칸(일 칸국)을 위해 불교의 역사를 저술했다."
- [칭기스의 교환], <2-7. 종교와 몽골제국>, 티모시 메이.


모든 '제국'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았으므로 자기가 서술한 역사가 '세계사'였다. 인류 최초의 제국이었던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왕조부터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동방의 페르시아와 서방의 로마, 더 동쪽의 중국 모두 본인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엮었을 것이므로 진정한 '보편역사'는 없다. 타밈 안사리 말대로 '세계사'는 인간 관념의 '별자리'를 만드는 '언어의 상징적 상호모형'인 각자의 '세계관'의 영향를 받는다. 미국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편집자였던 이슬람계 미국인 타밈 안사리가 돌아본 '5만년의 세계사' 또한 동서를 이어준 '중간지대' 이슬람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부각된다. 

이 '중간지대'는 동아시아와 서유럽까지를 연결하는 지역으로 샤머니즘 토착신앙은 물론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불교와 이슬람교까지 유래한 지역이다. 현재 '실크로드'로 알려진 동서교역의 지대는 일찍이 초원의 유목민족들이 닦아놓은 길인데, 티모시 메이는 미국 역사학자 앨프리드 크로스비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동반구와 서반구 문명을 이은 콜럼버스를 기려 '급격한 사회변화'를 지칭한 '콜럼버스의 교환'에 빗대어 몽골족의 세계사적 영향을 의미하는 '칭기스의 교환'을 설명한다. 칭기스 칸 이후 4대를 거치면서 분열된 몽골제국이 동서양 문명을 교환시킨 윤활유 역할을 이야기한다.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중간지대'를 거쳐 어떤 세계문명으로 이동해왔다... 중국을 400여 년 동안(기원전 206년부터 서기 200년까지) 다스린 한왕조는 유라시아 스텝 지대의 유목민인 북쪽의 이웃들을 상대로 자주 전쟁을 치렀다. 중국인들은 그들을 '흉노'라고 불렀다. 중국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유목 부족들은 중국과 로마의 중간지대를 돌아다녔고, 여러 무리 간의 교류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흉노의 후손들과 혈족관계인 유목부족들은 훗날 아틸라의 지휘 하에 서유럽을 휩쓸었고, 로마를 공격했다. 유럽에서, 그 유목민 침략자들은 '훈족'으로 알려졌다. 동양에서 그들은 중국사의 일부분이었고, 서양에서는 유럽사의 일부분이었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2-8. 중간지대>, 타밈 안사리.


로마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는 했지만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고트족, 반달족 등의 게르만족과 스키타이족은 그냥 내려온 것이 아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먹고 살 곳을 찾기 위해서, 한편으로 중국의 '문명국가'를 약탈하지 못하고 서쪽으로 내쫓긴 '흉노족'에 의해 밀려난 결과로 남유럽을 침범하게 된 것이다. 타밈 안사리가 진시황의 만리장성과 로마의 '변화'를 연계시킨 이유다. 흉노족이나 그의 후예로 추정되는 훈족은 유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그들에 밀린 게르만족들은 유럽 남부에 정착하고 적응하며 유럽을 변화시켰다. 로마인들은 로마가 '멸망'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가 '변화'한다고 생각했다. 이슬람을 비롯한 '이교도' 또는 '타자들'과 구분하면서 '프랑크인'에서 '유럽인'으로 정체성을 굳힌 '장기 십자군운동' 과정에서 로마 문명은 지금껏 '멸망'이 아닌 '변화'를 겪어온 것이다.


13세기초, 타타르족과 케레이트족, 나이만족을 흡수하고 몽골리아 초원을 장악한 테무진은 '단호하고 사나운 지도자'라는 의미인 '칭기스 칸'이 된 후 '대몽골국(예케 몽골 울루스)'을 건국한다. "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유목민족은 정체성면에서 모두 몽골족이었다([칭기스의 교환], <1부>).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흡수통합하였지만, 칭기스 칸은 정주문화를 지배하기 보다 외부 위협으로부터 몽골리아를 보호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우구데이(오고타이) 칸은 "정복이라는 개념을 강화하여 칭기스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는 '믿음'을 북돋았다(같은책)". 이는 '흉노'로부터 몽골까지 이어온 유목민 신앙으로서 '텡게리즘'이 체제 유지를 위한 제국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텡그리'는 그들의 말로 '하늘'이다. 북방 유목민족들의 '선우'는 중국의 '천자'다. 북방 유목민족 중 하나인 우리의 '단군'은 '선우'와 비슷한 발음을 한자로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 단군 또한 하늘의 자손이다. '텡게리즘(천명)'에 의한 칸 체제 또한 4대 뭉케에 이르러 분열의 조짐이 보이는데 그의 동생 쿠빌라이는 동쪽의 중화 문명을, 다른 동생 훌레구는 서쪽의 이슬람 문명을 장악한다. 이후 권력투쟁 과정에서 칭기스 칸의 몽골제국은 중국의 원나라, 이슬람의 일 칸국, 남쪽의 차가타이 칸국과 북쪽의 주치 칸국으로 분열되고 각 지역의 실력자들이 '칭기스 가문' 후계자를 주장하며 세력화한다. 타밈 안사리가 말한 '복원의 서사'로서 중국 명나라가 원나라 몽골족을 북쪽으로 내쫓았을 때 이슬람 튀르크계 티무르는 칭기스 칸의 후예를 자처하며 '중간지대'를 석권했으나 시대정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의 과학발전과 '진보의 서사'로 대체되고 있었다. 그 결과 유럽과 미국이 지금껏 '역사의 중심축'이 되었다.




"'칭기스의 교환'은 무역을 촉진시키고 종교를 확산시킨 것 이상의 일을 해냈다. 지구적 규모에 걸쳐 사상, 기술의 교환을 야기했다. 기술에는 화약을 비롯한 군사적 기술을 넘어서는 것들이 포함되었다. '문화교류'의 관점에서 볼 때 몽골족이 직간접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분명하지만 몽골족 자신이 항상 전파의 담당자였던 것은 아니다. 몽골 군대의 위력이 교역로를 보호했지만, 교역로는 상인, 선교사, 용병이 함께 사용한 길이었다."
- [칭기스의 교환], <2-10. 문화교류>, 티모시 메이.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전체 4,800km를 행군하며 페르시아 제국 등을 장악했지만 코끼리를 앞세운 인더스의 마우리아 왕조 앞에서 막혔다. 칭기스 칸의 장수 수베데이(수보타이)는 증원부대나 항해장치의 도움없이 8,050km를 주파했다. 물론 칭기스 칸의 몽골은 지배하지 않고 모든 것을 파괴한 후 초원으로 사라지면서 서방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는데, '천고마비'의 계절에 살짠 말을 타고 약탈하러 내려오는 북방 유목민을 두려워한 중국 농경민들의 모습이다. 얼마 후 몽골족은 치고 빠지는 '기마궁수', 무슬림의 '투석기', 중국의 '화약', 특수부대 '망구데이(망고타이)' 등의 '새로운 전쟁기술'을 동서로 전파하면서 동쪽의 중국은 물론 서쪽의 튀르크계 이슬람 문명까지 장악하고 지배하는 제국이 되어 중앙행정체계의 '케식(친위대와 가신)', '밍간(천호제)', '탐마치(무관)'와 '다루가치(문관)'의 총독 지배체제 등의 행정 또한 널리 공유한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 있는 '칭기스의 교환'은 상인들(경제)과 선교사들(종교이념)의 활발한 교류와 장려였다.

몽골족과 같은 유목민족들은 중국이나 유럽처럼 유교나 기독교 등의 논리로 '외부'를 배척하지 않았다. 흉노시절부터 그들은 특유의 '개방성'으로 문화를 흡수하고 교역을 장려하며 상인들과 종교인들을 보호했다. 오고타이 칸을 비롯한 후세 칸들의 과소비는 교역을 활성화했고 발달된 역참제도와 통일된 교역망은 물류비용을 효율화했으며, 칸 제국을 위협하지 않는 한 어느 종교도 탄압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를 활발하게 연계시킨 '칭기스의 교환'은 14세기 유럽에 '흑사병'까지 전달하면서 유럽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이 모든 '교환'은 물론 유목민족들과 몽골족의 의도와는 무관한 역사의 물질적 과정이다.


"결과적으로 (차에 관한) 청 조정의 정책은 미국의 탄생에 기여했다. 청 조정의 정책과 미국의 탄생은 사슬로 기다랗게 연결된 인과관계의 양쪽 끝이었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4-20. 중심이 흔들리다>, 타밈 안사리.


뜬금없다. 타밈 안사리는 상호연계의 역사에 집착한 나머지 중국 청나라로부터 차를 수입하던 영국이 관세를 올리면서 동인도회사가 수입차들을 식민지 미국에 전가함으로써 미국의 독립전쟁이 기인했다는 식의 이야기까지 전개한다. 물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사라예보의 총성'이 되어 버린다. 


동서양의 교역은 초원 스텝 문명을 이끈 북방 유목민의 생존투쟁 결과였고, 유럽의 장기 십자군운동은 후진문명 유럽 기독교왕국들의 이익투쟁 결과였으며, 미국 독립은 원주민 해방이 아닌 아메리카 정착 유럽인들의 투쟁이었다. 20세기 세계대전은 자본의 이윤증식 자기운동 결과로서 제국주의가 원인이었다.

티모시 메이는 몽골족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문명 '교환'의 세계사를 보았고, 타밈 안사리는 이슬람 '중간지대'를 통한 '돈'과 '기술', 그 '도구' 속에 담긴 '언어'적 '거대 서사'를 보았다. 

역시, 다양한 세계관의 각축장인 '상호연계'의 세계사에서 기본토대는 경제이고, 역사의 동력은 경제적 발전과 분배의 문제 앞에 선 다수 인간이다.

***

1. [칭기스의 교환](2012), 티모시 메이, 권용철 옮김, <사계절>, 2020.
2.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2019),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3. [흉노제국 이야기](2007), 장진쿠이, 남은숙 옮김, <아이필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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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의 교환 - 몽골 제국과 세계화의 시작
티모시 메이 지음, 권용철 옮김 / 사계절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중간지대'와 '교환'의 세계사
- [칭기스의 교환], 티모시 메이, 권용철 옮김, <사계절>, 2020.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 몽골제국은 화약 지식의 주요 전달자로 알려져 있다... 유럽이 몽골로부터  직접 화약 지식을 획득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몽골이 침입한 이후에야 화약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상인들이 (심지어 폴로 가문도) 몽골제국을 여행하면서 화약제조법을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이는 1500년 이후 유럽인들이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 [칭기스의 교환], <2-5. 새로운 전쟁방식>, 티모시 메이, 2012.



"... 몽골족의 폭발적 팽창은 장기 십자군운동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왜냐하면 몽골족은 중국을 제압하고, 러시아를 유린하고, 이슬람 영역을 초토화했지만, 기독교 왕국은 거의 그대로 뒀기 때문이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3-14. 유럽과 장기 십자군운동>, 타밈 안사리, 2019.


진시황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후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예전부터 각 나라들이 세운 성벽들을 통일제국답게 하나로 이은 대공정이었다. 달에서도 보인다는 현재의 만리장성은 진나라 이후 천년 이상 지나 중국을 다시금 통일한 명나라가 증축한 것이다. 농경의 가능 여부를 가르는 연간 강우량 15인치선과 대략 유사하다는 만리장성은 '정착민'들이 북방 '유목민'들을 막기 위해 세웠다.

동쪽의 만리장성은 이후 서쪽의 로마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발상으로 미국의 저술가 타밈 안사리는 세계사 5만년을 종합한다. 미국의 몽골학자 티모시 메이는 동서양을 연결한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 중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몽골족을 중심으로 한 세계사를 '칭기스의 교환'이라 칭한다.


"(일 칸국 가잔 칸의 계승자) 울제이투는 라시드 앗 딘에게 [집사(集史)]의 일부로 몽골족의 역사를 포함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그 내용을 '세계의 역사'로 확장하라고 명령했는데 불교에 관한 내용이 꽤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 수니파 행정관료들은 불교도가 포함된 조사팀과 함께 시아파 몽골칸(일 칸국)을 위해 불교의 역사를 저술했다."
- [칭기스의 교환], <2-7. 종교와 몽골제국>, 티모시 메이.


모든 '제국'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았으므로 자기가 서술한 역사가 '세계사'였다. 인류 최초의 제국이었던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왕조부터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동방의 페르시아와 서방의 로마, 더 동쪽의 중국 모두 본인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엮었을 것이므로 진정한 '보편역사'는 없다. 타밈 안사리 말대로 '세계사'는 인간 관념의 '별자리'를 만드는 '언어의 상징적 상호모형'인 각자의 '세계관'의 영향를 받는다. 미국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편집자였던 이슬람계 미국인 타밈 안사리가 돌아본 '5만년의 세계사' 또한 동서를 이어준 '중간지대' 이슬람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부각된다. 

이 '중간지대'는 동아시아와 서유럽까지를 연결하는 지역으로 샤머니즘 토착신앙은 물론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불교와 이슬람교까지 유래한 지역이다. 현재 '실크로드'로 알려진 동서교역의 지대는 일찍이 초원의 유목민족들이 닦아놓은 길인데, 티모시 메이는 미국 역사학자 앨프리드 크로스비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동반구와 서반구 문명을 이은 콜럼버스를 기려 '급격한 사회변화'를 지칭한 '콜럼버스의 교환'에 빗대어 몽골족의 세계사적 영향을 의미하는 '칭기스의 교환'을 설명한다. 칭기스 칸 이후 4대를 거치면서 분열된 몽골제국이 동서양 문명을 교환시킨 윤활유 역할을 이야기한다.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중간지대'를 거쳐 어떤 세계문명으로 이동해왔다... 중국을 400여 년 동안(기원전 206년부터 서기 200년까지) 다스린 한왕조는 유라시아 스텝 지대의 유목민인 북쪽의 이웃들을 상대로 자주 전쟁을 치렀다. 중국인들은 그들을 '흉노'라고 불렀다. 중국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유목 부족들은 중국과 로마의 중간지대를 돌아다녔고, 여러 무리 간의 교류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흉노의 후손들과 혈족관계인 유목부족들은 훗날 아틸라의 지휘 하에 서유럽을 휩쓸었고, 로마를 공격했다. 유럽에서, 그 유목민 침략자들은 '훈족'으로 알려졌다. 동양에서 그들은 중국사의 일부분이었고, 서양에서는 유럽사의 일부분이었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2-8. 중간지대>, 타밈 안사리.


로마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는 했지만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고트족, 반달족 등의 게르만족과 스키타이족은 그냥 내려온 것이 아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먹고 살 곳을 찾기 위해서, 한편으로 중국의 '문명국가'를 약탈하지 못하고 서쪽으로 내쫓긴 '흉노족'에 의해 밀려난 결과로 남유럽을 침범하게 된 것이다. 타밈 안사리가 진시황의 만리장성과 로마의 '변화'를 연계시킨 이유다. 흉노족이나 그의 후예로 추정되는 훈족은 유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그들에 밀린 게르만족들은 유럽 남부에 정착하고 적응하며 유럽을 변화시켰다. 로마인들은 로마가 '멸망'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가 '변화'한다고 생각했다. 이슬람을 비롯한 '이교도' 또는 '타자들'과 구분하면서 '프랑크인'에서 '유럽인'으로 정체성을 굳힌 '장기 십자군운동' 과정에서 로마 문명은 지금껏 '멸망'이 아닌 '변화'를 겪어온 것이다.


13세기초, 타타르족과 케레이트족, 나이만족을 흡수하고 몽골리아 초원을 장악한 테무진은 '단호하고 사나운 지도자'라는 의미인 '칭기스 칸'이 된 후 '대몽골국(예케 몽골 울루스)'을 건국한다. "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유목민족은 정체성면에서 모두 몽골족이었다([칭기스의 교환], <1부>).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흡수통합하였지만, 칭기스 칸은 정주문화를 지배하기 보다 외부 위협으로부터 몽골리아를 보호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우구데이(오고타이) 칸은 "정복이라는 개념을 강화하여 칭기스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는 '믿음'을 북돋았다(같은책)". 이는 '흉노'로부터 몽골까지 이어온 유목민 신앙으로서 '텡게리즘'이 체제 유지를 위한 제국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텡그리'는 그들의 말로 '하늘'이다. 북방 유목민족들의 '선우'는 중국의 '천자'다. 북방 유목민족 중 하나인 우리의 '단군'은 '선우'와 비슷한 발음을 한자로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 단군 또한 하늘의 자손이다. '텡게리즘(천명)'에 의한 칸 체제 또한 4대 뭉케에 이르러 분열의 조짐이 보이는데 그의 동생 쿠빌라이는 동쪽의 중화 문명을, 다른 동생 훌레구는 서쪽의 이슬람 문명을 장악한다. 이후 권력투쟁 과정에서 칭기스 칸의 몽골제국은 중국의 원나라, 이슬람의 일 칸국, 남쪽의 차가타이 칸국과 북쪽의 주치 칸국으로 분열되고 각 지역의 실력자들이 '칭기스 가문' 후계자를 주장하며 세력화한다. 타밈 안사리가 말한 '복원의 서사'로서 중국 명나라가 원나라 몽골족을 북쪽으로 내쫓았을 때 이슬람 튀르크계 티무르는 칭기스 칸의 후예를 자처하며 '중간지대'를 석권했으나 시대정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의 과학발전과 '진보의 서사'로 대체되고 있었다. 그 결과 유럽과 미국이 지금껏 '역사의 중심축'이 되었다.




"'칭기스의 교환'은 무역을 촉진시키고 종교를 확산시킨 것 이상의 일을 해냈다. 지구적 규모에 걸쳐 사상, 기술의 교환을 야기했다. 기술에는 화약을 비롯한 군사적 기술을 넘어서는 것들이 포함되었다. '문화교류'의 관점에서 볼 때 몽골족이 직간접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분명하지만 몽골족 자신이 항상 전파의 담당자였던 것은 아니다. 몽골 군대의 위력이 교역로를 보호했지만, 교역로는 상인, 선교사, 용병이 함께 사용한 길이었다."
- [칭기스의 교환], <2-10. 문화교류>, 티모시 메이.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전체 4,800km를 행군하며 페르시아 제국 등을 장악했지만 코끼리를 앞세운 인더스의 마우리아 왕조 앞에서 막혔다. 칭기스 칸의 장수 수베데이(수보타이)는 증원부대나 항해장치의 도움없이 8,050km를 주파했다. 물론 칭기스 칸의 몽골은 지배하지 않고 모든 것을 파괴한 후 초원으로 사라지면서 서방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는데, '천고마비'의 계절에 살짠 말을 타고 약탈하러 내려오는 북방 유목민을 두려워한 중국 농경민들의 모습이다. 얼마 후 몽골족은 치고 빠지는 '기마궁수', 무슬림의 '투석기', 중국의 '화약', 특수부대 '망구데이(망고타이)' 등의 '새로운 전쟁기술'을 동서로 전파하면서 동쪽의 중국은 물론 서쪽의 튀르크계 이슬람 문명까지 장악하고 지배하는 제국이 되어 중앙행정체계의 '케식(친위대와 가신)', '밍간(천호제)', '탐마치(무관)'와 '다루가치(문관)'의 총독 지배체제 등의 행정 또한 널리 공유한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 있는 '칭기스의 교환'은 상인들(경제)과 선교사들(종교이념)의 활발한 교류와 장려였다.

몽골족과 같은 유목민족들은 중국이나 유럽처럼 유교나 기독교 등의 논리로 '외부'를 배척하지 않았다. 흉노시절부터 그들은 특유의 '개방성'으로 문화를 흡수하고 교역을 장려하며 상인들과 종교인들을 보호했다. 오고타이 칸을 비롯한 후세 칸들의 과소비는 교역을 활성화했고 발달된 역참제도와 통일된 교역망은 물류비용을 효율화했으며, 칸 제국을 위협하지 않는 한 어느 종교도 탄압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를 활발하게 연계시킨 '칭기스의 교환'은 14세기 유럽에 '흑사병'까지 전달하면서 유럽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이 모든 '교환'은 물론 유목민족들과 몽골족의 의도와는 무관한 역사의 물질적 과정이다.


"결과적으로 (차에 관한) 청 조정의 정책은 미국의 탄생에 기여했다. 청 조정의 정책과 미국의 탄생은 사슬로 기다랗게 연결된 인과관계의 양쪽 끝이었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4-20. 중심이 흔들리다>, 타밈 안사리.


뜬금없다. 타밈 안사리는 상호연계의 역사에 집착한 나머지 중국 청나라로부터 차를 수입하던 영국이 관세를 올리면서 동인도회사가 수입차들을 식민지 미국에 전가함으로써 미국의 독립전쟁이 기인했다는 식의 이야기까지 전개한다. 물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사라예보의 총성'이 되어 버린다. 


동서양의 교역은 초원 스텝 문명을 이끈 북방 유목민의 생존투쟁 결과였고, 유럽의 장기 십자군운동은 후진문명 유럽 기독교왕국들의 이익투쟁 결과였으며, 미국 독립은 원주민 해방이 아닌 아메리카 정착 유럽인들의 투쟁이었다. 20세기 세계대전은 자본의 이윤증식 자기운동 결과로서 제국주의가 원인이었다.

티모시 메이는 몽골족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문명 '교환'의 세계사를 보았고, 타밈 안사리는 이슬람 '중간지대'를 통한 '돈'과 '기술', 그 '도구' 속에 담긴 '언어'적 '거대 서사'를 보았다. 

역시, 다양한 세계관의 각축장인 '상호연계'의 세계사에서 기본토대는 경제이고, 역사의 동력은 경제적 발전과 분배의 문제 앞에 선 다수 인간이다.

***

1. [칭기스의 교환](2012), 티모시 메이, 권용철 옮김, <사계절>, 2020.
2.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2019),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3. [흉노제국 이야기](2007), 장진쿠이, 남은숙 옮김, <아이필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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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 - 인류의 문화, 충돌, 연계의 빅 히스토리
타밈 안사리 지음, 박수철 옮김 / 커넥팅(Connecting)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중간지대'와 '교환'의 세계사
- [칭기스의 교환], 티모시 메이, 권용철 옮김, <사계절>, 2020.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 몽골제국은 화약 지식의 주요 전달자로 알려져 있다... 유럽이 몽골로부터  직접 화약 지식을 획득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몽골이 침입한 이후에야 화약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상인들이 (심지어 폴로 가문도) 몽골제국을 여행하면서 화약제조법을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이는 1500년 이후 유럽인들이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 [칭기스의 교환], <2-5. 새로운 전쟁방식>, 티모시 메이, 2012.



"... 몽골족의 폭발적 팽창은 장기 십자군운동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왜냐하면 몽골족은 중국을 제압하고, 러시아를 유린하고, 이슬람 영역을 초토화했지만, 기독교 왕국은 거의 그대로 뒀기 때문이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3-14. 유럽과 장기 십자군운동>, 타밈 안사리, 2019.


진시황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후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예전부터 각 나라들이 세운 성벽들을 통일제국답게 하나로 이은 대공정이었다. 달에서도 보인다는 현재의 만리장성은 진나라 이후 천년 이상 지나 중국을 다시금 통일한 명나라가 증축한 것이다. 농경의 가능 여부를 가르는 연간 강우량 15인치선과 대략 유사하다는 만리장성은 '정착민'들이 북방 '유목민'들을 막기 위해 세웠다.

동쪽의 만리장성은 이후 서쪽의 로마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발상으로 미국의 저술가 타밈 안사리는 세계사 5만년을 종합한다. 미국의 몽골학자 티모시 메이는 동서양을 연결한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 중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몽골족을 중심으로 한 세계사를 '칭기스의 교환'이라 칭한다.


"(일 칸국 가잔 칸의 계승자) 울제이투는 라시드 앗 딘에게 [집사(集史)]의 일부로 몽골족의 역사를 포함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그 내용을 '세계의 역사'로 확장하라고 명령했는데 불교에 관한 내용이 꽤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 수니파 행정관료들은 불교도가 포함된 조사팀과 함께 시아파 몽골칸(일 칸국)을 위해 불교의 역사를 저술했다."
- [칭기스의 교환], <2-7. 종교와 몽골제국>, 티모시 메이.


모든 '제국'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았으므로 자기가 서술한 역사가 '세계사'였다. 인류 최초의 제국이었던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왕조부터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동방의 페르시아와 서방의 로마, 더 동쪽의 중국 모두 본인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엮었을 것이므로 진정한 '보편역사'는 없다. 타밈 안사리 말대로 '세계사'는 인간 관념의 '별자리'를 만드는 '언어의 상징적 상호모형'인 각자의 '세계관'의 영향를 받는다. 미국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편집자였던 이슬람계 미국인 타밈 안사리가 돌아본 '5만년의 세계사' 또한 동서를 이어준 '중간지대' 이슬람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부각된다. 

이 '중간지대'는 동아시아와 서유럽까지를 연결하는 지역으로 샤머니즘 토착신앙은 물론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불교와 이슬람교까지 유래한 지역이다. 현재 '실크로드'로 알려진 동서교역의 지대는 일찍이 초원의 유목민족들이 닦아놓은 길인데, 티모시 메이는 미국 역사학자 앨프리드 크로스비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동반구와 서반구 문명을 이은 콜럼버스를 기려 '급격한 사회변화'를 지칭한 '콜럼버스의 교환'에 빗대어 몽골족의 세계사적 영향을 의미하는 '칭기스의 교환'을 설명한다. 칭기스 칸 이후 4대를 거치면서 분열된 몽골제국이 동서양 문명을 교환시킨 윤활유 역할을 이야기한다.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중간지대'를 거쳐 어떤 세계문명으로 이동해왔다... 중국을 400여 년 동안(기원전 206년부터 서기 200년까지) 다스린 한왕조는 유라시아 스텝 지대의 유목민인 북쪽의 이웃들을 상대로 자주 전쟁을 치렀다. 중국인들은 그들을 '흉노'라고 불렀다. 중국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유목 부족들은 중국과 로마의 중간지대를 돌아다녔고, 여러 무리 간의 교류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흉노의 후손들과 혈족관계인 유목부족들은 훗날 아틸라의 지휘 하에 서유럽을 휩쓸었고, 로마를 공격했다. 유럽에서, 그 유목민 침략자들은 '훈족'으로 알려졌다. 동양에서 그들은 중국사의 일부분이었고, 서양에서는 유럽사의 일부분이었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2-8. 중간지대>, 타밈 안사리.


로마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는 했지만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고트족, 반달족 등의 게르만족과 스키타이족은 그냥 내려온 것이 아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먹고 살 곳을 찾기 위해서, 한편으로 중국의 '문명국가'를 약탈하지 못하고 서쪽으로 내쫓긴 '흉노족'에 의해 밀려난 결과로 남유럽을 침범하게 된 것이다. 타밈 안사리가 진시황의 만리장성과 로마의 '변화'를 연계시킨 이유다. 흉노족이나 그의 후예로 추정되는 훈족은 유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그들에 밀린 게르만족들은 유럽 남부에 정착하고 적응하며 유럽을 변화시켰다. 로마인들은 로마가 '멸망'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가 '변화'한다고 생각했다. 이슬람을 비롯한 '이교도' 또는 '타자들'과 구분하면서 '프랑크인'에서 '유럽인'으로 정체성을 굳힌 '장기 십자군운동' 과정에서 로마 문명은 지금껏 '멸망'이 아닌 '변화'를 겪어온 것이다.


13세기초, 타타르족과 케레이트족, 나이만족을 흡수하고 몽골리아 초원을 장악한 테무진은 '단호하고 사나운 지도자'라는 의미인 '칭기스 칸'이 된 후 '대몽골국(예케 몽골 울루스)'을 건국한다. "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유목민족은 정체성면에서 모두 몽골족이었다([칭기스의 교환], <1부>).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흡수통합하였지만, 칭기스 칸은 정주문화를 지배하기 보다 외부 위협으로부터 몽골리아를 보호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우구데이(오고타이) 칸은 "정복이라는 개념을 강화하여 칭기스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는 '믿음'을 북돋았다(같은책)". 이는 '흉노'로부터 몽골까지 이어온 유목민 신앙으로서 '텡게리즘'이 체제 유지를 위한 제국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텡그리'는 그들의 말로 '하늘'이다. 북방 유목민족들의 '선우'는 중국의 '천자'다. 북방 유목민족 중 하나인 우리의 '단군'은 '선우'와 비슷한 발음을 한자로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 단군 또한 하늘의 자손이다. '텡게리즘(천명)'에 의한 칸 체제 또한 4대 뭉케에 이르러 분열의 조짐이 보이는데 그의 동생 쿠빌라이는 동쪽의 중화 문명을, 다른 동생 훌레구는 서쪽의 이슬람 문명을 장악한다. 이후 권력투쟁 과정에서 칭기스 칸의 몽골제국은 중국의 원나라, 이슬람의 일 칸국, 남쪽의 차가타이 칸국과 북쪽의 주치 칸국으로 분열되고 각 지역의 실력자들이 '칭기스 가문' 후계자를 주장하며 세력화한다. 타밈 안사리가 말한 '복원의 서사'로서 중국 명나라가 원나라 몽골족을 북쪽으로 내쫓았을 때 이슬람 튀르크계 티무르는 칭기스 칸의 후예를 자처하며 '중간지대'를 석권했으나 시대정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의 과학발전과 '진보의 서사'로 대체되고 있었다. 그 결과 유럽과 미국이 지금껏 '역사의 중심축'이 되었다.




"'칭기스의 교환'은 무역을 촉진시키고 종교를 확산시킨 것 이상의 일을 해냈다. 지구적 규모에 걸쳐 사상, 기술의 교환을 야기했다. 기술에는 화약을 비롯한 군사적 기술을 넘어서는 것들이 포함되었다. '문화교류'의 관점에서 볼 때 몽골족이 직간접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분명하지만 몽골족 자신이 항상 전파의 담당자였던 것은 아니다. 몽골 군대의 위력이 교역로를 보호했지만, 교역로는 상인, 선교사, 용병이 함께 사용한 길이었다."
- [칭기스의 교환], <2-10. 문화교류>, 티모시 메이.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전체 4,800km를 행군하며 페르시아 제국 등을 장악했지만 코끼리를 앞세운 인더스의 마우리아 왕조 앞에서 막혔다. 칭기스 칸의 장수 수베데이(수보타이)는 증원부대나 항해장치의 도움없이 8,050km를 주파했다. 물론 칭기스 칸의 몽골은 지배하지 않고 모든 것을 파괴한 후 초원으로 사라지면서 서방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는데, '천고마비'의 계절에 살짠 말을 타고 약탈하러 내려오는 북방 유목민을 두려워한 중국 농경민들의 모습이다. 얼마 후 몽골족은 치고 빠지는 '기마궁수', 무슬림의 '투석기', 중국의 '화약', 특수부대 '망구데이(망고타이)' 등의 '새로운 전쟁기술'을 동서로 전파하면서 동쪽의 중국은 물론 서쪽의 튀르크계 이슬람 문명까지 장악하고 지배하는 제국이 되어 중앙행정체계의 '케식(친위대와 가신)', '밍간(천호제)', '탐마치(무관)'와 '다루가치(문관)'의 총독 지배체제 등의 행정 또한 널리 공유한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 있는 '칭기스의 교환'은 상인들(경제)과 선교사들(종교이념)의 활발한 교류와 장려였다.

몽골족과 같은 유목민족들은 중국이나 유럽처럼 유교나 기독교 등의 논리로 '외부'를 배척하지 않았다. 흉노시절부터 그들은 특유의 '개방성'으로 문화를 흡수하고 교역을 장려하며 상인들과 종교인들을 보호했다. 오고타이 칸을 비롯한 후세 칸들의 과소비는 교역을 활성화했고 발달된 역참제도와 통일된 교역망은 물류비용을 효율화했으며, 칸 제국을 위협하지 않는 한 어느 종교도 탄압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를 활발하게 연계시킨 '칭기스의 교환'은 14세기 유럽에 '흑사병'까지 전달하면서 유럽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이 모든 '교환'은 물론 유목민족들과 몽골족의 의도와는 무관한 역사의 물질적 과정이다.


"결과적으로 (차에 관한) 청 조정의 정책은 미국의 탄생에 기여했다. 청 조정의 정책과 미국의 탄생은 사슬로 기다랗게 연결된 인과관계의 양쪽 끝이었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4-20. 중심이 흔들리다>, 타밈 안사리.


뜬금없다. 타밈 안사리는 상호연계의 역사에 집착한 나머지 중국 청나라로부터 차를 수입하던 영국이 관세를 올리면서 동인도회사가 수입차들을 식민지 미국에 전가함으로써 미국의 독립전쟁이 기인했다는 식의 이야기까지 전개한다. 물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사라예보의 총성'이 되어 버린다. 


동서양의 교역은 초원 스텝 문명을 이끈 북방 유목민의 생존투쟁 결과였고, 유럽의 장기 십자군운동은 후진문명 유럽 기독교왕국들의 이익투쟁 결과였으며, 미국 독립은 원주민 해방이 아닌 아메리카 정착 유럽인들의 투쟁이었다. 20세기 세계대전은 자본의 이윤증식 자기운동 결과로서 제국주의가 원인이었다.

티모시 메이는 몽골족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문명 '교환'의 세계사를 보았고, 타밈 안사리는 이슬람 '중간지대'를 통한 '돈'과 '기술', 그 '도구' 속에 담긴 '언어'적 '거대 서사'를 보았다. 

역시, 다양한 세계관의 각축장인 '상호연계'의 세계사에서 기본토대는 경제이고, 역사의 동력은 경제적 발전과 분배의 문제 앞에 선 다수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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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칭기스의 교환](2012), 티모시 메이, 권용철 옮김, <사계절>, 2020.
2.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2019),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3. [흉노제국 이야기](2007), 장진쿠이, 남은숙 옮김, <아이필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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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독재
에티엔 발리바르 / 연구사 / 198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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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다"
- [국가와 혁명],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김영철 옮김, <논장>, 1994.



"국가가 화해불가능한 계급 적대감의 산물이고 사회의 상부에 위치하면서 '사회로부터 자기를 스스로 점점 소외시키고 있는' 권력이라면, 억압받는 계급의 해방은 '폭력혁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창출했고, 또한 이러한 '소외'를 이루고 있는 몸체인 국가권력기구의 '파괴를 통하지 않고서는' 계급해방이 불가능하다."
-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모든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 규정하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국가'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지배하고 억압하기 위한 기구, 더 나아가 지배계급의 이익을 지키는 '위원회(엥겔스)'에 불과하다. 부르주아(자본가계급)에 의한 '생산수단 독점'이라는 경제적 토대 위에 이러한 생산관계를 공고히 하는 상부구조로서 정치적 기구가 바로 '국가'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의하면, 국가란 '계급지배의 도구'이므로 계급이 소멸되면 그 역할을 다하고 사멸된다. 프롤레타리아(노동자계급)는 '혁명'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을 '사회화'함으로써 일체의 계급을 철폐하고 인류 역사에서 '마지막 계급'으로서의 소명을 완수하는데, 마르크스-엥겔스는 이 시기 사멸하는 '국가' 대신, 프랑스어 '코뮌'이나 독일어 '공동체(Gemeinwesen)'가 그 '최종적 형태'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실현되지 않은 '공산주의', '코뮌주의' 또는 '공동체주의'이며, 그 내용은 "개인의 발전이 만인의 발전의 기초"가 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공동체'다.



"모든 부르주아 국가는 그들의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고 끝까지 그 본질을 분석해 보면 '부르주아지의 독재'라는 동일한 본질이 드러난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풍부하고 아주 다양한 정치적 형태들을 창출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동일하게 될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이다."
-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계급사회 국가의 본질을 분석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수립할 '노동자국가'는 기존 계급사회의 국가장치를 파괴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행체제를 통해 '계급사멸(공산주의)'을 달성해야 하고 그와 함께 국가의 역할도 소멸된다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국가(State)'는 '사멸'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폐지'되고 '계급철폐'와 함께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준국가(Semi-state)'는 궁극에 '사멸'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필연적으로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반한다.




[국가와 혁명]은 소비에트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7년 8월과 9월에 발표된 저작으로서 계급국가의 정의와 분석으로부터 시작하여 엥겔스의 보충설명, 국가에 관한 각종 기회주의적 경향(카우츠키 류)에 대한 비판을 지나 1905년과 1917년 사이 러시아 혁명의 경험까지 기획하였지만, 임박한 실제 혁명의 정세를 맞아 제7장인 <1905년과 1917년 러시아혁명의 경험>장을 시작하기 전에 중단된 '미완의 저작'이다.


"이 소책자([국가와 혁명])는 1917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쓰여졌다. 나는 이미 제7장(1905년과 1917년 러시아혁명의 경험)에 대한 계획을 구상해두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써내려갈 시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1917년 10월 혁명의 전야라는 정치적 위기가 나의 저술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그러한 '중단'은 반가운 것일 수밖에 없다..."
- 레닌, [국가와 혁명], <초판 후기>, 1917.11.30.


[국가와 혁명] 말미에 '임박한 혁명'을 실천하기 위해 펜을 놓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레닌의 '급박함'이 묻어나는데, 그는 소비에트 러시아혁명 후 출간된 이 '미완의 저작' <초판 후기>에 위와 같이 쓰면서 "아마도 1905년과 1917년 러시아혁명의 경험에 대한 저술은 먼 훗날로 미루어야 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결국, 그 시기에 대한 기록은 레닌의 몫이 아니라 '혁명'으로 '국가'를 '장악'하고 '폐지'하고 '사멸'시켜야 할 후세의 '노동자계급'의 임무가 되었을 터, 그러나 '혁명'은 실패했고 아직까지 '계급'은 존재하며 '국가'는 건재하다.


체코의 현대적 '변증법적 유물론자' 슬라보예 지젝의 [레닌 재장전]에 따르면, 혁명 전의 레닌과 혁명 후의 레닌은 사상 및 실천적으로 구분되는데, [국가와 혁명]은 레닌의 혁명 전 사상을 표현하는 ‘마지막 저작’이 된다. 

레닌의 이 '미완의 저작'은 1976년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알튀세르의 동료이자 제자인 에티엔 발리바르([레닌 재장전]의 저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가 저술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한역판은 [민주주의와 독재])를 통해 요약 및 정리된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이 정리한 '국가론',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레닌의 세 가지 테제는 다음과 같다. 


(1) 국가권력은 항상 단일한 계급의 정치권력이다. 
(2) 국가장치가 없이는 국가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리하여 기존 계급사회의 국가장치들은 혁명기에는 철저히 파괴되어야 한다.
(3)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기이다.


결국, 계급사회에서 국가를 통해 실현되는 '민주주의'는 결국 한 계급의 '독재'에 불과하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동일하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론'의 결론이다.


마지막으로 '국가론'과 연관된 '민주주의'에 대한 레닌의 견해를 들어본다.


"민주주의는 처음에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투쟁을 치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융합되고, 이어 자본주의를 산산조각내며, 모든 부르주아 계급과 공화적인 부르주아지와 국가기구 그리고 상비군과 경찰과 관료제까지도 이 지구상에서 싹쓸어버리고, 그 대신에 보다 민주적인 국가기구로, 그것도 모든 대중을 포함하는 시민군을 형성하는 무장한 노동자들이라는 측면에서 본 국가기구로 그것들을 대체하게 된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

1. [국가와 혁명], 레닌, 김영철 옮김, <논장>, 1994.
2. [민주주의와 독재], 에티엔 발리바르, 최인락 옮김, <연구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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