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그림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 무서운 그림 1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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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무서운' 것은 '그림'이 아닌 '인간'이다
- [무서운 그림 1~2], 나카노 교코, 이연식/최재혁 옮김, <세미콜론>, 2008~2009.



"내가 '무서운' 그림에 대해 쓰려고 생각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앙투아네트를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의 스케치였다. 머리는 짧게 깎고 손은 뒤로 묶인 채 짐마차에 실려 단두대로 끌려가는, 한때는 '로코코의 장미'였던 이의 깜짝 놀랄 만한 모습. 이 그림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영고성쇠의 낙차를 느꼈기 때문이라기 보다 오히려 그림을 그린 이의 악의가 날카롭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다비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꾸었고 생애 내내 동료를 배신하며 권력자에게 아첨한 화가였다. 이 앙투아네트를 그린 1793년 무렵, 국왕을 처형하는 쪽에 표를 던진 그는 왕비였던 앙투아네트에 대한 증오 또한 숨기지 않았다... 정말 '무서운' 노릇이다."
- [무서운 그림 1], <서문>, 나카노 교코, 2007.


자크 다비드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기의 '투사'였고 로베스피에르의 급진 '자코뱅파' 당원이었다가 나폴레옹 황제의 '남작'이기도 했다. 또한 혁명가 '마라'의 타살을 예수의 죽음과도 같은 '피에타'처럼 그린 18~19세기 신고전주의 대표적 화가였다. 
그는 루이 16세와 그 '음탕한'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처형을 주장한 로베스피에르의 동지로서, 단두대로 향하는 왕비의 마지막 초상을 '무서운' 스케치로 남겼는데 권력에 아부하는 화려한 '로코코'식 궁정화풍을 단순한 스케치로써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자코뱅파가 실각하고 몸을 피했던 다비드는 형장으로 끌려가던 로베스피에르를 또 스케치했다는 것이다. 이후 20세기에 역사소설 [마리 앙투아네트](국역 : [베르사유의 장미])를 쓴 독일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로베스피에르의 혁명동지였으나 '왕당파'에 기운 정적 조르주 당통의 입을 빌어 다비드를 "이 못된 종놈"이라고 저주하고 있다. 
'로코코' 궁정화풍을 비판했던 신고전주의 대표화가 자크 다비드는 역시 권력에 빌붙는 '무서운' 인간의 초상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서 '신고전주의'적으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내가 보기에 다비드의 가장 '무서운' 그림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스케치>도 <마라의 죽음>도 아닌 단연 대혁명을 배신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그림이다.


"... 이에(카라바조의 유딧에) 반해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유딧은 단호한 의지를 지닌 성숙한 여인이다.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사내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조차 꺼리지 않고 만약 실패한다면 목숨을 잃을 각오도 되어 있다. 그녀를 돕는 젊은 몸종도 부림을 당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한 사람의 동지로서 강한 연대감을 내보인다. 둘은 예사롭지 않은 기백으로 임하고 있다. 곯아떨어졌다지만 상대는 한 군대의 우두머리다. 정의는 우리 편이라고 믿기는 해도, 어지간히 독한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사람의 목을 벨 수는 없다. 
이렇게 하여 이때까지 전설의 미녀였던 유딧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피와 땀 냄새가 진동하는 범죄 현장을 생중계하는 듯한 그림이 나왔다. 만약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카라바조 그림의 유딧 같은 모습을 기대했다면 놀라고 당황할 것이 뻔했다."
- [무서운 그림 1],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 나카노 교코, 2007.


여기 또 다른 '혁명가'들이 있다. 이 여성 '혁명가'들은 권력이나 가부장적 권위에 순응하기보다 이에 용감하게 맞선 '무서움'의 상징들이다. 19세기 아르누보 계열의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프의 [유디트]로 잘 알려진 유대 여인 '유딧'과 17세기 이탈리아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다. 

구약성서의 외전에는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핍박하는 아시리아 군대의 장수 홀로페르네스의 장막으로 들어가 술과 섹스로 떡실신한 그 장수의 목을 썰어서 나온 유대인 과부 '유딧' 이야기를 전한다. 16세기 화가 카라바조나 17세기 남성화가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그림에서 묘사된 '유딧'은 여리고 아름답고 그만큼 '비현실적'이다. 카라바조의 '유딧'은 예쁜 척을 너무 유지한 나머지 도저히 목을 벨 수 없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알로리의 '유딧'은 화가 자신의 구애를 뿌리친 창녀의 얼굴을 모델로 한 '유딧'이 알로리 본인의 머리를 들고 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17세기에 흔치 않은 여성 화가이자 동료 화가에 의한 강간사건의 피해자로 오랜 시간 송사에 시달리다가 결국 이겨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려낸 '유딧'은 강력하고 거침없다. 예쁜 척하면서는 결코 적군 장수의 목을 썰어서 가지고 나올 수 없다. '무서운' 현실보다 훨씬 더 '무서워' 지지 않고서는 베길 수도 없다. 
젠틸레스키의 '유딧'과 그 하녀 '동지'는 그 강렬함 만큼 '현실적'이다. 

그러므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의 그림 중 가장 '현실적'이기에 '무서운' 작품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딧'이다.


"그 중에서 유난히 선호되었던 것이 '악녀'들의 이야기였다. 남자의 피를 빠는 흡혈귀 여인, 마술로 남자를 미혹시키는 마녀, 어부를 바다로 뛰어들게 하는 인어, 예쁜 얼굴과 풍만한 가슴으로 남자를 유혹해 결국엔 잡아먹는 괴물 스핑크스, 그리고 남자의 목을 자르는 '유딧'과 '살로메'..."
- [무서운 그림 2], <비어즐리의 '살로메'>, 나카노 교코, 2008.


19세기 영국의 탐미주의 극작가 오스타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는 성서나 고대 유대사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순교사건을 다룬다. 실제는 '유대왕'의 재림을 두려워한 '이스라엘 왕' 헤롯왕가 이야기다. 동방박사로부터 '예수 탄생' 소식을 들은 헤롯왕은 그 시기 1~2년 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들 전부를 죽이라 명하고 기독교 '최초의 순교'일 수 있는 '베들레헴 영아 대학살(피터르 브뢰겔, 16세기)'을 일으킨다. 헤롯왕가의 이후 다른 헤롯왕은 예수에게 세례를 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요한을 참수하면서 의붓딸 '살로메'를 희생자로 이용하는데, 어차피 죽일 생각이었던 요한의 목을 '살로메'가 원하여 마지못해 베었다는 식의, '종교 박해'를 다분히 '정치적 우화'로 전환시켜 버렸다. 이에 오스카 와일드는 한 발 더 나아가 감금된 세례 요한을 유혹하다가 뜻대로 안되자 헤롯왕에게 청하여 아예 목을 따버린 '악녀 살로메'로 진화시킨다. 

스물 한살의 영국 화가 오브리 비어즐리는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 삽화로 유명해졌는데, 동성애 스캔들에 휘말려 외국 도피 중 결핵으로 스물 다섯의 나이에 요절했다. 
아무튼 이렇게 '악녀'의 이미지는 '남성'의 잘린 머리와 자동적으로 교합('베톨리아로 돌아가는 유딧' / 산드로 보티첼리, 15세기)하면서 하나의 상징적 우화가 되었고, 그 아이콘이 바로 '유딧'과 '살로메'다.

로마를 대신하여 세금을 징수하다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방의 왕이 되었고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유대교'로 개종까지 했음에도 정작 유대인들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은 '헤롯왕가'는 지역의 힘없는 영아들을 대학살하고 성자를 죽였으며 동시에 나약한 여인 '살로메'를 '악녀'로 만들어 후세들, 특히 '남성'들에 의해 두고두고 죽게 만들었다.

하긴, 이 가부장제는 '성녀' 마리아의 '수태고지' 자체도 폭력적으로 관철하는데, 결혼예정자 요셉과 '별도 못 봤는데' 임신했다는 황당무계한 소식을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들은 마리아의 대답은 결국,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임하소서."라는 순종의 언어였다(<수태고지>, 자코포 틴토레토, 16세기 / 프라 안젤리코, 15세기).
가부장제는 '악녀' 뿐만 아니라 '성녀'조차도 폭력적으로 양산한다.

이로 인해, 가장 '무서운' 것은 욕정과 욕망에 가득찬 '악녀'와 그녀의 쟁반에 올려진 참수된 '남성의 머리'가 아니라, 수단을 가리지 않고 특히 '약자'인 타인의 희생을 통해 본인의 이익과 목적을 쟁취하는 '정치'와 그런 권력을 탐닉하고 유지하는 '인간'이다.


"그러면 이 야무진 악당들과 우둔한 젊은이가 엮어내는 드라마는 왜 이처럼 보는 이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걸까?
그건 어리석은 청년을 비웃은 뒤 자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 갑자기 불안에 사로잡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그림에서는 남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인간의 사악한 시선이 훌륭하게 포착되어 있지만 현실에서는 이처럼 분명하게 보일리 없다...
위기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른 채 아무렇지 않다니, 무척이나 두려운 노릇이다. 왜냐하면 어찌 되었든 그 위기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아예 모른 채로 있던 시간이 길면 길수록 파국은 해일처럼 몰아칠 것이 틀림없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순식간에 전후로 지각이 확장되어 가는 순간, 그것이야말로 '공포의 본질'이리라."
- [무서운 그림 1], <라 투르의 '사기꾼'>, 나카노 교코, 2007.


역시 '무서운' 건 '인간'이다. 사기를 치는 '인간'도 그렇고, 사기를 당하는 '인간'도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이야기일 수 있기에 그러한 관계와 상황 자체가 '공포'다. 
17세기 프랑스 루이 13세 궁정화가였던 조르주 라 투르의 그림 <사기꾼>은 이런 상황을 카드 게임 장면을 통해 간명하게 보여준다. 사기를 당하는 '호구'인 귀족 청년은 처음에 쉽게 딴 금화들을 앞에 두고 자기 패에만 몰두하느라 상황을 모르고 있지만 나머지 두 선수와 하인까지 모두 다 한 패거리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만 가능한 장면인데 '짜고차는 고스톱'인 건 사기당하는 사람 혼자만 모른다. 
루이 13세의 궁정화가 조르주 라 투르의 이런 단순하고 평면적이며 노골적인 화풍은 이후 루이 14세의 화려한 '바로크'식 분위기에 맞지 않았다. 궁을 나와 고리대금업 등을 통해 재산을 불린 전 '궁정화가' 라 투르는 아마도 전쟁과 약탈, 학살과 페스트가 만연한 당시 유럽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의심하고 세상을 불신하는 극도의 '개인'으로서 '나'만을 믿었을 테고, 이런 세태는 지금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가속화하는 현상이겠지만, 역시 가장 '무서운' 것은 '유령'도 '그림'도 아닌 '인간' 자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독일문학과 서양문화사를 가르치는 나카노 교코는 [무서운 그림 1](2007)과 그 속편인 [무서운 그림 2](2008)를 통해 "가장 무서운 건 '천재지변'도, '유령'도 아닌, 바로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20년이 지난 지금, 이제 그런 '무서운' 인류는 '천재지변'이나 '호환마마' 같은 '기후위기'와 '생태위기'적 '바이러스'라는 더 '무서운' 것들에게 잠식당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무서운' 인류의 탐욕과 이기주의가 초래했다는 사실이 '공포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임박한 파국을 정작 당사자 본인만 모르는,
조르주 라 투르의 <사기꾼>에서 극적으로 묘사된 이런 상황과 현실이,
이것을 만든 '인간'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

1. [무서운 그림 1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2007), 나카노 교코, 이연식 옮김, <세미콜론>, 2008.
2. [무서운 그림 2 - 매혹과 반전의 명화 읽기](2008), 나카노 교코, 최재혁 옮김, <세미콜론>, 2009.
3. [불편한 미술관 - 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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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림 2 - 매혹과 반전의 명화 읽기 무서운 그림 2
나카노 교코 지음, 최재혁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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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무서운' 것은 '그림'이 아닌 '인간'이다
- [무서운 그림 1~2], 나카노 교코, 이연식/최재혁 옮김, <세미콜론>, 2008~2009.



"내가 '무서운' 그림에 대해 쓰려고 생각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앙투아네트를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의 스케치였다. 머리는 짧게 깎고 손은 뒤로 묶인 채 짐마차에 실려 단두대로 끌려가는, 한때는 '로코코의 장미'였던 이의 깜짝 놀랄 만한 모습. 이 그림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영고성쇠의 낙차를 느꼈기 때문이라기 보다 오히려 그림을 그린 이의 악의가 날카롭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다비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꾸었고 생애 내내 동료를 배신하며 권력자에게 아첨한 화가였다. 이 앙투아네트를 그린 1793년 무렵, 국왕을 처형하는 쪽에 표를 던진 그는 왕비였던 앙투아네트에 대한 증오 또한 숨기지 않았다... 정말 '무서운' 노릇이다."
- [무서운 그림 1], <서문>, 나카노 교코, 2007.


자크 다비드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기의 '투사'였고 로베스피에르의 급진 '자코뱅파' 당원이었다가 나폴레옹 황제의 '남작'이기도 했다. 또한 혁명가 '마라'의 타살을 예수의 죽음과도 같은 '피에타'처럼 그린 18~19세기 신고전주의 대표적 화가였다. 
그는 루이 16세와 그 '음탕한'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처형을 주장한 로베스피에르의 동지로서, 단두대로 향하는 왕비의 마지막 초상을 '무서운' 스케치로 남겼는데 권력에 아부하는 화려한 '로코코'식 궁정화풍을 단순한 스케치로써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자코뱅파가 실각하고 몸을 피했던 다비드는 형장으로 끌려가던 로베스피에르를 또 스케치했다는 것이다. 이후 20세기에 역사소설 [마리 앙투아네트](국역 : [베르사유의 장미])를 쓴 독일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로베스피에르의 혁명동지였으나 '왕당파'에 기운 정적 조르주 당통의 입을 빌어 다비드를 "이 못된 종놈"이라고 저주하고 있다. 
'로코코' 궁정화풍을 비판했던 신고전주의 대표화가 자크 다비드는 역시 권력에 빌붙는 '무서운' 인간의 초상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서 '신고전주의'적으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내가 보기에 다비드의 가장 '무서운' 그림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스케치>도 <마라의 죽음>도 아닌 단연 대혁명을 배신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그림이다.


"... 이에(카라바조의 유딧에) 반해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유딧은 단호한 의지를 지닌 성숙한 여인이다.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사내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조차 꺼리지 않고 만약 실패한다면 목숨을 잃을 각오도 되어 있다. 그녀를 돕는 젊은 몸종도 부림을 당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한 사람의 동지로서 강한 연대감을 내보인다. 둘은 예사롭지 않은 기백으로 임하고 있다. 곯아떨어졌다지만 상대는 한 군대의 우두머리다. 정의는 우리 편이라고 믿기는 해도, 어지간히 독한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사람의 목을 벨 수는 없다. 
이렇게 하여 이때까지 전설의 미녀였던 유딧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피와 땀 냄새가 진동하는 범죄 현장을 생중계하는 듯한 그림이 나왔다. 만약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카라바조 그림의 유딧 같은 모습을 기대했다면 놀라고 당황할 것이 뻔했다."
- [무서운 그림 1],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 나카노 교코, 2007.


여기 또 다른 '혁명가'들이 있다. 이 여성 '혁명가'들은 권력이나 가부장적 권위에 순응하기보다 이에 용감하게 맞선 '무서움'의 상징들이다. 19세기 아르누보 계열의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프의 [유디트]로 잘 알려진 유대 여인 '유딧'과 17세기 이탈리아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다. 

구약성서의 외전에는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핍박하는 아시리아 군대의 장수 홀로페르네스의 장막으로 들어가 술과 섹스로 떡실신한 그 장수의 목을 썰어서 나온 유대인 과부 '유딧' 이야기를 전한다. 16세기 화가 카라바조나 17세기 남성화가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그림에서 묘사된 '유딧'은 여리고 아름답고 그만큼 '비현실적'이다. 카라바조의 '유딧'은 예쁜 척을 너무 유지한 나머지 도저히 목을 벨 수 없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알로리의 '유딧'은 화가 자신의 구애를 뿌리친 창녀의 얼굴을 모델로 한 '유딧'이 알로리 본인의 머리를 들고 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17세기에 흔치 않은 여성 화가이자 동료 화가에 의한 강간사건의 피해자로 오랜 시간 송사에 시달리다가 결국 이겨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려낸 '유딧'은 강력하고 거침없다. 예쁜 척하면서는 결코 적군 장수의 목을 썰어서 가지고 나올 수 없다. '무서운' 현실보다 훨씬 더 '무서워' 지지 않고서는 베길 수도 없다. 
젠틸레스키의 '유딧'과 그 하녀 '동지'는 그 강렬함 만큼 '현실적'이다. 

그러므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의 그림 중 가장 '현실적'이기에 '무서운' 작품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딧'이다.


"그 중에서 유난히 선호되었던 것이 '악녀'들의 이야기였다. 남자의 피를 빠는 흡혈귀 여인, 마술로 남자를 미혹시키는 마녀, 어부를 바다로 뛰어들게 하는 인어, 예쁜 얼굴과 풍만한 가슴으로 남자를 유혹해 결국엔 잡아먹는 괴물 스핑크스, 그리고 남자의 목을 자르는 '유딧'과 '살로메'..."
- [무서운 그림 2], <비어즐리의 '살로메'>, 나카노 교코, 2008.


19세기 영국의 탐미주의 극작가 오스타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는 성서나 고대 유대사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순교사건을 다룬다. 실제는 '유대왕'의 재림을 두려워한 '이스라엘 왕' 헤롯왕가 이야기다. 동방박사로부터 '예수 탄생' 소식을 들은 헤롯왕은 그 시기 1~2년 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들 전부를 죽이라 명하고 기독교 '최초의 순교'일 수 있는 '베들레헴 영아 대학살(피터르 브뢰겔, 16세기)'을 일으킨다. 헤롯왕가의 이후 다른 헤롯왕은 예수에게 세례를 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요한을 참수하면서 의붓딸 '살로메'를 희생자로 이용하는데, 어차피 죽일 생각이었던 요한의 목을 '살로메'가 원하여 마지못해 베었다는 식의, '종교 박해'를 다분히 '정치적 우화'로 전환시켜 버렸다. 이에 오스카 와일드는 한 발 더 나아가 감금된 세례 요한을 유혹하다가 뜻대로 안되자 헤롯왕에게 청하여 아예 목을 따버린 '악녀 살로메'로 진화시킨다. 

스물 한살의 영국 화가 오브리 비어즐리는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 삽화로 유명해졌는데, 동성애 스캔들에 휘말려 외국 도피 중 결핵으로 스물 다섯의 나이에 요절했다. 
아무튼 이렇게 '악녀'의 이미지는 '남성'의 잘린 머리와 자동적으로 교합('베톨리아로 돌아가는 유딧' / 산드로 보티첼리, 15세기)하면서 하나의 상징적 우화가 되었고, 그 아이콘이 바로 '유딧'과 '살로메'다.

로마를 대신하여 세금을 징수하다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방의 왕이 되었고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유대교'로 개종까지 했음에도 정작 유대인들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은 '헤롯왕가'는 지역의 힘없는 영아들을 대학살하고 성자를 죽였으며 동시에 나약한 여인 '살로메'를 '악녀'로 만들어 후세들, 특히 '남성'들에 의해 두고두고 죽게 만들었다.

하긴, 이 가부장제는 '성녀' 마리아의 '수태고지' 자체도 폭력적으로 관철하는데, 결혼예정자 요셉과 '별도 못 봤는데' 임신했다는 황당무계한 소식을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들은 마리아의 대답은 결국,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임하소서."라는 순종의 언어였다(<수태고지>, 자코포 틴토레토, 16세기 / 프라 안젤리코, 15세기).
가부장제는 '악녀' 뿐만 아니라 '성녀'조차도 폭력적으로 양산한다.

이로 인해, 가장 '무서운' 것은 욕정과 욕망에 가득찬 '악녀'와 그녀의 쟁반에 올려진 참수된 '남성의 머리'가 아니라, 수단을 가리지 않고 특히 '약자'인 타인의 희생을 통해 본인의 이익과 목적을 쟁취하는 '정치'와 그런 권력을 탐닉하고 유지하는 '인간'이다.


"그러면 이 야무진 악당들과 우둔한 젊은이가 엮어내는 드라마는 왜 이처럼 보는 이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걸까?
그건 어리석은 청년을 비웃은 뒤 자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 갑자기 불안에 사로잡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그림에서는 남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인간의 사악한 시선이 훌륭하게 포착되어 있지만 현실에서는 이처럼 분명하게 보일리 없다...
위기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른 채 아무렇지 않다니, 무척이나 두려운 노릇이다. 왜냐하면 어찌 되었든 그 위기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아예 모른 채로 있던 시간이 길면 길수록 파국은 해일처럼 몰아칠 것이 틀림없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순식간에 전후로 지각이 확장되어 가는 순간, 그것이야말로 '공포의 본질'이리라."
- [무서운 그림 1], <라 투르의 '사기꾼'>, 나카노 교코, 2007.


역시 '무서운' 건 '인간'이다. 사기를 치는 '인간'도 그렇고, 사기를 당하는 '인간'도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이야기일 수 있기에 그러한 관계와 상황 자체가 '공포'다. 
17세기 프랑스 루이 13세 궁정화가였던 조르주 라 투르의 그림 <사기꾼>은 이런 상황을 카드 게임 장면을 통해 간명하게 보여준다. 사기를 당하는 '호구'인 귀족 청년은 처음에 쉽게 딴 금화들을 앞에 두고 자기 패에만 몰두하느라 상황을 모르고 있지만 나머지 두 선수와 하인까지 모두 다 한 패거리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만 가능한 장면인데 '짜고차는 고스톱'인 건 사기당하는 사람 혼자만 모른다. 
루이 13세의 궁정화가 조르주 라 투르의 이런 단순하고 평면적이며 노골적인 화풍은 이후 루이 14세의 화려한 '바로크'식 분위기에 맞지 않았다. 궁을 나와 고리대금업 등을 통해 재산을 불린 전 '궁정화가' 라 투르는 아마도 전쟁과 약탈, 학살과 페스트가 만연한 당시 유럽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의심하고 세상을 불신하는 극도의 '개인'으로서 '나'만을 믿었을 테고, 이런 세태는 지금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가속화하는 현상이겠지만, 역시 가장 '무서운' 것은 '유령'도 '그림'도 아닌 '인간' 자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독일문학과 서양문화사를 가르치는 나카노 교코는 [무서운 그림 1](2007)과 그 속편인 [무서운 그림 2](2008)를 통해 "가장 무서운 건 '천재지변'도, '유령'도 아닌, 바로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20년이 지난 지금, 이제 그런 '무서운' 인류는 '천재지변'이나 '호환마마' 같은 '기후위기'와 '생태위기'적 '바이러스'라는 더 '무서운' 것들에게 잠식당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무서운' 인류의 탐욕과 이기주의가 초래했다는 사실이 '공포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임박한 파국을 정작 당사자 본인만 모르는,
조르주 라 투르의 <사기꾼>에서 극적으로 묘사된 이런 상황과 현실이,
이것을 만든 '인간'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

1. [무서운 그림 1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2007), 나카노 교코, 이연식 옮김, <세미콜론>, 2008.
2. [무서운 그림 2 - 매혹과 반전의 명화 읽기](2008), 나카노 교코, 최재혁 옮김, <세미콜론>, 2009.
3. [불편한 미술관 - 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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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 평양 지역 고구려 고분벽화의 디테일
이태호 지음 / 덕주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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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오행(陰陽五行)'과 고구려(高句麗)
- [고구려 고고학], 중앙문화재연구원, <진인진>, 2020.
-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이태호, <덕주>, 2020.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여 668년에 멸망하기까지 7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동북아시아의 고대 국가 중 하나이다. '고구려(高句麗)'라는 나라이름은 '성(城)'을 뜻하는 '구려(句麗)'와 높고 크다는 '고(高)'가 합쳐진 '큰 고을', '큰 성'을 뜻한다. 고구려 사람은 주몽설화에 근거하여 부여족에서 기원하였다고도 하며, 중국 진나라 이전의 기록에 등장하는 맥(貊)족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고구려 사람이 되었다고도 한다... 혼강 유역과 압록강 중류 및 그 지류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유적들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는 외부에서 이주해 온 주민집단에 의해 성립했다기 보다는 압록강 유역에 살았던 주민들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주변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북쪽의 부여에서 이주해 온 주민 일부가 더해져서 성립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건국 초부터 영역 확장을 시도하여 병합된 주변지역의 주민이 더해진 관계로, 고구려는 여러 집단의 주민으로 구성된 다종족 국가라고 할 수 있다."
- [고구려 고고학], '1. 고구려 고고학 개관', 중앙문화재연구원, <진인진>, 2020.


고구려는 원래 '고려(高麗)'였는데 구분을 위해 이전의 '고려'에 오래될 '구(句)'를 붙였다고 나는 생각했다. 중국의 [구당서]와 [신당서] 등의 문헌기록을 근거로 한 설을 따랐다. 중국에서 우리를 부르는 대로 본 것이었다. 문자는 한자였으되 우리말은 달랐을 터, '고구려'라는 나라이름은 '고을'이나 '성'을 뜻하는 '구려'에 높을 '고'를 붙여 '큰 고을' 또는 '큰 성'을 의미한다는 설을 이제서야 봤다. 지금부터는 후자의 의견을 따를 예정이다.
'이름'이란 원래, 남이 불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제대로 규정하는 '정체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 막연한 '꿈'은 '고고학자'였다. 공룡을 발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한참이 지나 그 '꿈'이 잊혀진 후에도 고대 그리스 미케네 문명을 발굴한 독일 상인 '하인리히 슐리만'이나 중동을 누빈 영국인 탐험가 '아라비안 로렌스'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가슴이 뛰었다. 지금도 고고학자 중 프랑스 '천재 서지학자' 폴 펠리오, '문헌'을 통해 미술사를 해석하는 '도상해석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 등을 동경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다. 

폴 펠리오의 스승은 19세기에 사마천의 [사기]를 처음으로 불어로 번역하여 프랑스에 소개한 에두아르 샤반느다. 이들은 '언어의 천재'들이라 외국어 습득에 능통했고 동양의 어려운 한자도 많이 알았다. 에두아르 샤반느는 1907년에 고구려의 중기인 4~5세기경 수도였던 국내성을 답사한 후 보고문을 남겼고 이때 처음 고구려 고분벽화가 서양에 소개되었다고 하는데, 고구려 고고학 연구의 시작은 국내적으로는 1876년 요동에서 광개토왕릉비를 재발견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445년 [용비어천가] 39장에서 태조 이성계가 '확인'했다는 기록 이후의 '첫' 재발견이었다.


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 엮은 [고구려 고고학]에 의하면, 고구려 고고학 연구 '제1기(1895~1945)'는 일제에 의한 '요동'과 '만주' 점령의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추동되었고, '제2기(1946~1973)'는 북한의 '주체사상'적 역사작업이 주를 이뤘으며, '제3기(1974~1994)'는 중국의 '동북공정'의 전초작업이 주가 되었는데, '제4기(1995~)'는 남한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박과 남북 공동작업 등으로 중국 못지 않은 활발한 연구와 발표를 하고 있다 한다.


북한의 '주체사상'적 역사관은 평양을 '인류 문명의 시초'로 규정하는 '대동강 문명설'까지 정립하고 있으니 중국 '동북공정'에 대한 대항논리로 고조선과 고구려를 우리 고유의 민족국가로 굳히고 있으며, 중국의 '동북공정'은 동쪽 요동과 한반도의 고대국가 모두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으로 규정한다. 
상반되는 이 두 시각은 역설적이게도 고구려를 한반도에 국한된 '평양 정권'으로 묶어두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나는, 한반도 삼한(三韓)을 이룬 우리 한(韓)민족도 있고,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아우른 북방 유목민족들도 있으며, 중국 대륙을 계속 통일하려던 중국 한(漢)족이 각기 따로 각 권역의 문화권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따른다. 고구려의 지배민족인 '예맥족(濊貊族)'은 한반도가 아닌 요동을 중심으로 한 '요동사(遼東史)의 일원인 것이다. 고조선을 건국하고 동북방의 '선비족'과 그 아래 지방의 '거란족', '말갈족', '여진족'과 함께 요동의 역사와 문화를 만들면서 고대 한반도의 '삼국시대'를 통해 한민족과 지속적으로 섞여 온 '동북아시아 공동체'의 한 역사가 고구려다.



"(고구려 미술은)... 한, 남북조, 수, 당의 중국 미술은 물론,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 그리고 동유럽에 이르는 서역의 문화까지 도상(圖象)들의 수집 폭이 넓다. 고구려는 개방적인 태도로 남의 것을 수용하여 자기 문화의 중심으로 끌어들일 정도로 자신감을 가졌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문화교류의 폭이 넓고 고구려의 문화역량이 대범했음을 엿볼 수 있다."
-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총론', 이태호, <덕주>, 2020.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는 2006년 남북공동으로 평양의 고분을 연구할 때 디지털 카메라로 수많은 벽화를 실사했고 2008년에 전시회까지 열었다고 한다. 이 실사된 '디카' 사진을 2020년 8월에 '인물풍속도 고분'인 안악3호분, 덕흥리와 수산리 벽화고분과 '사신도 고분'인 진파리와 호남리 사신총, 강서대묘와 강서중묘 등으로 목차를 짜서 간단한 설명과 사진도감으로 펴낸 책이 [고구려의 황홀, 디카로 담다](<덕주>)이다.


'인물풍속도' 벽화는 4~5세기 불교의 영향으로 당시 생활상을 볼 수 있으며, '사신도(四神圖)'는 5세기 말부터 6~7세기까지 고구려 말기 도교적 지배를 추정케 한다. 소수림왕때인 4세기에 중국 전진으로부터 들어온 불교는 삼국시대 지배 이데올로기였으나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고구려 사회는 급격하게 도교의 영향이 강해진다. 기존의 지배이념을 타격하기 위함이었을 것을 추정된다.
'사신도(四神圖)'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유행하게 된 배경이다.


기원전 1세기 사마천은 [사기(史記)]의 '서문'격인 마지막 130권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유가, 묵가, 법가, 명가, 도가, 음양가 등 '육가' 사상들의 특징과 한계점을 논한다. 이 중 '음양가'는 "사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일해야 한다"는 '유물론'적 '객관성'의 장점은 인정하되, "길흉의 징조에 너무 집착하여 금하고 피하라는 것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구속하고  겁을 먹게 하는 일이 많았다"고 하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도교'적 세계관은 노자, 장자의 '도가'와 비슷하면서도 자연만물에 기반하는 '음양오행설'을 기초로 세계를 해석하고 길흉을 점치는 사상이며, 교리와 경전을 중시하는 유교나 불교 등의 종교이념에 비해 좀더 자유로운 사상일 수도 있겠으나 사마천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음양오행설'이라는 '운동규칙'에서 현실에 대한 '제약'을 보았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은 [주역(周易)](역경: 易經)과 같이 세계가 '음(陰:어두움)'과 '양(陽:밝음)'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종교적 이분법을 기초로 하되,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오행'의 관계와 그 운동을 통해 세상이 돌아간다는 이론으로 '음양'의 기초는 [주역]과 같되 '유물론'적이지 않고 '관념론'적인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의 영역에 속한다. '오행'은 각각 '상극(相剋)'과 '상생(相生)'의 관계로 순환하는데, '상극설'은 '수-화-금-목-토'의 순서로 서로 밀쳐내고, '상생설'은 '목-화-토-금-수'의 순서로 서로 낳아주는 관계를 맺지만, 그 해석의 근거는 다분히 임의적이다. 하늘의 '황도(黃道)'가 거치는 '이십팔수(二十八宿)'의 붙박이별들과 씩씩하고 굳건하게 황도를 가는 태양과 함께 운동하는 '다섯 별의 운동(五行)'이라는 천문학을 모티브로 하였으나 임의적 해석으로 '유물론'적인 [주역]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결국, [주역]은 '점'을 치는 책이 아니지만,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도서(圖書)'를 읽는 '음양오행설'로는 주로 '점'을 친다. 
또한, 같은 '점(占)'이라도 [주역] '점'은 누구에게도 의뢰하지 않고 스스로 '덕'과 '지혜', '책임의식'과 '주체성'을 가지고 쳐야 하는 바, 반대로 '음양오행'의 '점'은 주로 타인에게 의뢰하는 것이 익숙하다.


'오행'은 각기 '동서남북(東西南北)'과 '중앙(中央)'을 이른다. '동(東)'은 '목(木)'이요 '청(靑)색', '서(西)'는 '금(金)'이요 백(白)색', '남(南)'은 '화(火)'요 '적(赤)색', '북(北)'은 '수(水)'요 '흑(黑)색'이며, 만물을 낳는 '토(土)'는 '중앙(中央)'이요 '황(黃)색'이다. 유교의 '인(仁)-의(義)-예(禮)-지(智)'와 '중앙'의 '신(信)'이며, 불교의 '사천왕(지국-광목-증장-다문)'과 '중앙'의 부처에 대비되는데, 각 방향에 색깔을 입히면 '도교'적 색채가 함께 입혀진 것이리라. 예를 들어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의 얼굴이 푸르거나 북쪽 다문천왕의 얼굴이 검은 경우 말이다.


도교적 영향으로 유행한 '사신도' 또한 동쪽은 '청룡(靑龍)', 서쪽은 '백호(白虎)', 남쪽은 '주작(朱雀)', 북쪽은 '현무(玄武)'이며, 가운데는 '황룡(黃龍)'이다. 전설의 동물인 용과 봉황을 등장시켰으되 지상에서 가장 강한 호랑이와 가장 오래 사는 거북을 등장시킬 때도 '신화화'된 모습이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서 본 고구려 '사신도' 고분벽화의 표본은 평양 대동강 서쪽의 강서대묘다. 그 옆의 강서중묘는 같은 사신도라도 규모와 디테일이 약간 떨어진다.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요동과 요서를 말달리던 고구려는 4~7세기 동북아시아를 지배했던 '대제국(大帝國)'이었을 것이다. 고분벽화의 선명한 붉은색과 초록색 안료를 광물 등의 자연 원료로부터 추출한 과학기술도 뛰어났을 것이라 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과 불교의 도상이 결합된 중앙아시아 돈황의 양식까지도 흡수한 유연한 '제국의 문화' 또한 고구려 벽화미술에서 엿볼 수 있다.

북으로부터 5호16국과 남북조를 거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의 도발이 반복되었고, 남으로부터 신라와 백제의 도전을 동시에 받던 고구려의 국제정세 속에서, 왕을 비롯한 구(舊)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군국(軍國)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중앙'의 '황룡'이 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동서남북' 사방에 '신장(神將)'인 '사천왕(四天王)'보다 강력한 '사신(四神)'을 배치할 수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음양오행'은 [주역]의 '주체적'인 '과학'과 달리 '타자'에게 의탁하는 경향이 다소 있다.
요동을 호령하던 대제국 고구려의 멸망은 혹시 격동의 과정에서 그들이 선택한 '음양오행설'의 한계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

1.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이태호 글/사진, <덕주>, 2020.
2. [고구려 고고학(高句麗 考古學)], 중앙문화재연구원, <진인진>, 2020.
3.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가는 길], 전창선/어윤형, <와이겔리>, 2010.
4. [요동사(遼東史)], 김한규, <문학과지성사>, 2004.
5. [사기(史記)], 사마천, 김영수 옮김, <알마>,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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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고학 중앙문화재연구원 학술총서 45
강현숙 외 지음 / 진인진 / 202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음양오행(陰陽五行)'과 고구려(高句麗)
- [고구려 고고학], 중앙문화재연구원, <진인진>, 2020.
-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이태호, <덕주>, 2020.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여 668년에 멸망하기까지 7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동북아시아의 고대 국가 중 하나이다. '고구려(高句麗)'라는 나라이름은 '성(城)'을 뜻하는 '구려(句麗)'와 높고 크다는 '고(高)'가 합쳐진 '큰 고을', '큰 성'을 뜻한다. 고구려 사람은 주몽설화에 근거하여 부여족에서 기원하였다고도 하며, 중국 진나라 이전의 기록에 등장하는 맥(貊)족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고구려 사람이 되었다고도 한다... 혼강 유역과 압록강 중류 및 그 지류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유적들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는 외부에서 이주해 온 주민집단에 의해 성립했다기 보다는 압록강 유역에 살았던 주민들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주변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북쪽의 부여에서 이주해 온 주민 일부가 더해져서 성립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건국 초부터 영역 확장을 시도하여 병합된 주변지역의 주민이 더해진 관계로, 고구려는 여러 집단의 주민으로 구성된 다종족 국가라고 할 수 있다."
- [고구려 고고학], '1. 고구려 고고학 개관', 중앙문화재연구원, <진인진>, 2020.


고구려는 원래 '고려(高麗)'였는데 구분을 위해 이전의 '고려'에 오래될 '구(句)'를 붙였다고 나는 생각했다. 중국의 [구당서]와 [신당서] 등의 문헌기록을 근거로 한 설을 따랐다. 중국에서 우리를 부르는 대로 본 것이었다. 문자는 한자였으되 우리말은 달랐을 터, '고구려'라는 나라이름은 '고을'이나 '성'을 뜻하는 '구려'에 높을 '고'를 붙여 '큰 고을' 또는 '큰 성'을 의미한다는 설을 이제서야 봤다. 지금부터는 후자의 의견을 따를 예정이다.
'이름'이란 원래, 남이 불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제대로 규정하는 '정체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 막연한 '꿈'은 '고고학자'였다. 공룡을 발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한참이 지나 그 '꿈'이 잊혀진 후에도 고대 그리스 미케네 문명을 발굴한 독일 상인 '하인리히 슐리만'이나 중동을 누빈 영국인 탐험가 '아라비안 로렌스'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가슴이 뛰었다. 지금도 고고학자 중 프랑스 '천재 서지학자' 폴 펠리오, '문헌'을 통해 미술사를 해석하는 '도상해석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 등을 동경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다. 

폴 펠리오의 스승은 19세기에 사마천의 [사기]를 처음으로 불어로 번역하여 프랑스에 소개한 에두아르 샤반느다. 이들은 '언어의 천재'들이라 외국어 습득에 능통했고 동양의 어려운 한자도 많이 알았다. 에두아르 샤반느는 1907년에 고구려의 중기인 4~5세기경 수도였던 국내성을 답사한 후 보고문을 남겼고 이때 처음 고구려 고분벽화가 서양에 소개되었다고 하는데, 고구려 고고학 연구의 시작은 국내적으로는 1876년 요동에서 광개토왕릉비를 재발견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445년 [용비어천가] 39장에서 태조 이성계가 '확인'했다는 기록 이후의 '첫' 재발견이었다.


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 엮은 [고구려 고고학]에 의하면, 고구려 고고학 연구 '제1기(1895~1945)'는 일제에 의한 '요동'과 '만주' 점령의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추동되었고, '제2기(1946~1973)'는 북한의 '주체사상'적 역사작업이 주를 이뤘으며, '제3기(1974~1994)'는 중국의 '동북공정'의 전초작업이 주가 되었는데, '제4기(1995~)'는 남한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박과 남북 공동작업 등으로 중국 못지 않은 활발한 연구와 발표를 하고 있다 한다.


북한의 '주체사상'적 역사관은 평양을 '인류 문명의 시초'로 규정하는 '대동강 문명설'까지 정립하고 있으니 중국 '동북공정'에 대한 대항논리로 고조선과 고구려를 우리 고유의 민족국가로 굳히고 있으며, 중국의 '동북공정'은 동쪽 요동과 한반도의 고대국가 모두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으로 규정한다. 
상반되는 이 두 시각은 역설적이게도 고구려를 한반도에 국한된 '평양 정권'으로 묶어두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나는, 한반도 삼한(三韓)을 이룬 우리 한(韓)민족도 있고,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아우른 북방 유목민족들도 있으며, 중국 대륙을 계속 통일하려던 중국 한(漢)족이 각기 따로 각 권역의 문화권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따른다. 고구려의 지배민족인 '예맥족(濊貊族)'은 한반도가 아닌 요동을 중심으로 한 '요동사(遼東史)의 일원인 것이다. 고조선을 건국하고 동북방의 '선비족'과 그 아래 지방의 '거란족', '말갈족', '여진족'과 함께 요동의 역사와 문화를 만들면서 고대 한반도의 '삼국시대'를 통해 한민족과 지속적으로 섞여 온 '동북아시아 공동체'의 한 역사가 고구려다.



"(고구려 미술은)... 한, 남북조, 수, 당의 중국 미술은 물론,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 그리고 동유럽에 이르는 서역의 문화까지 도상(圖象)들의 수집 폭이 넓다. 고구려는 개방적인 태도로 남의 것을 수용하여 자기 문화의 중심으로 끌어들일 정도로 자신감을 가졌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문화교류의 폭이 넓고 고구려의 문화역량이 대범했음을 엿볼 수 있다."
-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총론', 이태호, <덕주>, 2020.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는 2006년 남북공동으로 평양의 고분을 연구할 때 디지털 카메라로 수많은 벽화를 실사했고 2008년에 전시회까지 열었다고 한다. 이 실사된 '디카' 사진을 2020년 8월에 '인물풍속도 고분'인 안악3호분, 덕흥리와 수산리 벽화고분과 '사신도 고분'인 진파리와 호남리 사신총, 강서대묘와 강서중묘 등으로 목차를 짜서 간단한 설명과 사진도감으로 펴낸 책이 [고구려의 황홀, 디카로 담다](<덕주>)이다.


'인물풍속도' 벽화는 4~5세기 불교의 영향으로 당시 생활상을 볼 수 있으며, '사신도(四神圖)'는 5세기 말부터 6~7세기까지 고구려 말기 도교적 지배를 추정케 한다. 소수림왕때인 4세기에 중국 전진으로부터 들어온 불교는 삼국시대 지배 이데올로기였으나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고구려 사회는 급격하게 도교의 영향이 강해진다. 기존의 지배이념을 타격하기 위함이었을 것을 추정된다.
'사신도(四神圖)'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유행하게 된 배경이다.


기원전 1세기 사마천은 [사기(史記)]의 '서문'격인 마지막 130권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유가, 묵가, 법가, 명가, 도가, 음양가 등 '육가' 사상들의 특징과 한계점을 논한다. 이 중 '음양가'는 "사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일해야 한다"는 '유물론'적 '객관성'의 장점은 인정하되, "길흉의 징조에 너무 집착하여 금하고 피하라는 것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구속하고 겁을 먹게 하는 일이 많았다"고 하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도교'적 세계관은 노자, 장자의 '도가'와 비슷하면서도 자연만물에 기반하는 '음양오행설'을 기초로 세계를 해석하고 길흉을 점치는 사상이며, 교리와 경전을 중시하는 유교나 불교 등의 종교이념에 비해 좀더 자유로운 사상일 수도 있겠으나 사마천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음양오행설'이라는 '운동규칙'에서 현실에 대한 '제약'을 보았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은 [주역(周易)](역경: 易經)과 같이 세계가 '음(陰:어두움)'과 '양(陽:밝음)'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종교적 이분법을 기초로 하되,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오행'의 관계와 그 운동을 통해 세상이 돌아간다는 이론으로 '음양'의 기초는 [주역]과 같되 '유물론'적이지 않고 '관념론'적인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의 영역에 속한다. '오행'은 각각 '상극(相剋)'과 '상생(相生)'의 관계로 순환하는데, '상극설'은 '수-화-금-목-토'의 순서로 서로 밀쳐내고, '상생설'은 '목-화-토-금-수'의 순서로 서로 낳아주는 관계를 맺지만, 그 해석의 근거는 다분히 임의적이다. 하늘의 '황도(黃道)'가 거치는 '이십팔수(二十八宿)'의 붙박이별들과 씩씩하고 굳건하게 황도를 가는 태양과 함께 운동하는 '다섯 별의 운동(五行)'이라는 천문학을 모티브로 하였으나 임의적 해석으로 '유물론'적인 [주역]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결국, [주역]은 '점'을 치는 책이 아니지만,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도서(圖書)'를 읽는 '음양오행설'로는 주로 '점'을 친다. 
또한, 같은 '점(占)'이라도 [주역] '점'은 누구에게도 의뢰하지 않고 스스로 '덕'과 '지혜', '책임의식'과 '주체성'을 가지고 쳐야 하는 바, 반대로 '음양오행'의 '점'은 주로 타인에게 의뢰하는 것이 익숙하다.


'오행'은 각기 '동서남북(東西南北)'과 '중앙(中央)'을 이른다. '동(東)'은 '목(木)'이요 '청(靑)색', '서(西)'는 '금(金)'이요 백(白)색', '남(南)'은 '화(火)'요 '적(赤)색', '북(北)'은 '수(水)'요 '흑(黑)색'이며, 만물을 낳는 '토(土)'는 '중앙(中央)'이요 '황(黃)색'이다. 유교의 '인(仁)-의(義)-예(禮)-지(智)'와 '중앙'의 '신(信)'이며, 불교의 '사천왕(지국-광목-증장-다문)'과 '중앙'의 부처에 대비되는데, 각 방향에 색깔을 입히면 '도교'적 색채가 함께 입혀진 것이리라. 예를 들어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의 얼굴이 푸르거나 북쪽 다문천왕의 얼굴이 검은 경우 말이다.


도교적 영향으로 유행한 '사신도' 또한 동쪽은 '청룡(靑龍)', 서쪽은 '백호(白虎)', 남쪽은 '주작(朱雀)', 북쪽은 '현무(玄武)'이며, 가운데는 '황룡(黃龍)'이다. 전설의 동물인 용과 봉황을 등장시켰으되 지상에서 가장 강한 호랑이와 가장 오래 사는 거북을 등장시킬 때도 '신화화'된 모습이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서 본 고구려 '사신도' 고분벽화의 표본은 평양 대동강 서쪽의 강서대묘다. 그 옆의 강서중묘는 같은 사신도라도 규모와 디테일이 약간 떨어진다.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요동과 요서를 말달리던 고구려는 4~7세기 동북아시아를 지배했던 '대제국(大帝國)'이었을 것이다. 고분벽화의 선명한 붉은색과 초록색 안료를 광물 등의 자연 원료로부터 추출한 과학기술도 뛰어났을 것이라 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과 불교의 도상이 결합된 중앙아시아 돈황의 양식까지도 흡수한 유연한 '제국의 문화' 또한 고구려 벽화미술에서 엿볼 수 있다.

북으로부터 5호16국과 남북조를 거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의 도발이 반복되었고, 남으로부터 신라와 백제의 도전을 동시에 받던 고구려의 국제정세 속에서, 왕을 비롯한 구(舊)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군국(軍國)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중앙'의 '황룡'이 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동서남북' 사방에 '신장(神將)'인 '사천왕(四天王)'보다 강력한 '사신(四神)'을 배치할 수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음양오행'은 [주역]의 '주체적'인 '과학'과 달리 '타자'에게 의탁하는 경향이 다소 있다.
요동을 호령하던 대제국 고구려의 멸망은 혹시 격동의 과정에서 그들이 선택한 '음양오행설'의 한계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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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이태호 글/사진, <덕주>, 2020.
2. [고구려 고고학(高句麗 考古學)], 중앙문화재연구원, <진인진>, 2020.
3.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가는 길], 전창선/어윤형, <와이겔리>, 2010.
4. [요동사(遼東史)], 김한규, <문학과지성사>, 2004.
5. [사기(史記)], 사마천, 김영수 옮김, <알마>,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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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왕필주 - 전면 개정판
왕필 지음, 임채우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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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변화'의 경전, [주역]은 '변증법'이자 '유물론'이다
-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 이상수, <웅진지식하우스>, 2014.


"... [주역]을 만든 사람들의 점에 대한 생각... 이들은 인간의 길흉을 결정하는 것은 점괘가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행동, '덕'과 '지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른 덕을 지니고, 바른 실천을 하고, '변화'에 바르게 대응하는 경우, 점을 쳐볼 필요도 없이 길하고 유리할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왕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기 '운명'에 관심을 가진다는 전제 아래 [주역]을 만들었다...
...
나도 [주역]을 만든 사람들과 똑같은 주장을 하고 싶다. 정말 점을 치고 싶다면 주역점을 쳐라. 그것도 누구에게 의뢰하지 말고 스스로 쳐라. [주역] 번역서만 한 권 있으면 해결된다. 그것이 왕처럼 점을 치는 유일한 방법이다."
-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 '19~20장', 이상수, <웅진지식하우스>, 2014.


[주역(周易)]은 '점(占)'을 치는 책이 아니다. 유학의 '4서 5경' 중 하나인 [역경(易經)]이다. 흔히 '점'으로 길흉을 본다 하여 '음양오행설'이나 도교적 시각으로 볼 수도 있으나 [주역] 또는 [역경]은 엄연한 유학의 '철학' 경전이며 상고시대부터 세상의 이치를 밝히고 설명하기 위한 집단지성 '과학서'다. 학문 분야로서 '과학'이 없었던 그 시대는 '과학'이 '철학'이요, '철학'이 즉 '과학'이었다.


[주역]은 '인류 문화의 시조'라는 중국의 복희씨가 '8괘'로써 만물의 이치를 정리했고 이 '8괘'들을 겹쳐 '8X8=64괘'로 확장했으며, 주나라 문왕이 은나라 주왕에 의해 핍박받고 격리되었을 때 '괘사', 즉 각 괘에 관한 해설을 지었다고 한다. 주문왕의 아들이자 주무왕을 도운 주공 단이 각 괘를 이루는 '효사'를 지었다고 하여 이를 [역경]이라 이르고 이후 공자가 이에 대한 10개의 '역전(易傳)'이라는 '10익'을 써서 이 모두를 [주역]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미래에 대한 길흉 예측의 '과학'이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의미일 터, 고대시대 국가의 앞날과 전쟁의 승패들을 점쳤던 기록들이 무수하게 축적된 데이터들이 발굴되면서 당시 수천년 '예측 과학'의 빅데이터 집적물 중 하나가 [주역]이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거북이 등딱지를 태우는 '복점(卜占)'과 '시초(蓍草)'라는 풀의 줄기를 나누어 치는 '시초점' 두 가지 중 '복점'은 등딱지를 남겼고 '시초점'은 [주역]의 거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후 3세기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 왕필(王弼)이 유가와 도가를 종합하고 지양하여 종합적 [주역주(註)]를 23세에 지었다 하는데 현재 널리 알려진 [주역]의 형태라고 한다.


"[주역]을 만든 사람들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이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상황은 인간이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일과 닮았다고 보았다... 
...
그래서 [주역]은 자연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주역]에는 하늘, 땅, 우레, 바람, 물, 불, 산, 연못 등 여덟 가지 자연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왜 하필 여덟 가지만 나오는 것일까?
고대 인도의 브라만교나 불교에서는 우주 만물이 '지수화풍', 곧 땅, 물, 불, 바람 등의 '네 가지 큰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엠페도클레스는 만물이 물, 공기, 불, 흙의 '네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고대인들의 공통된 사고방식이다. [주역]을 만든 사람들도 공기(하늘), 흙(땅), 물, 불의 '네 가지'가 만물을 구성한다고 생각한 점에서 다르지 않다. [주역] 지은이들은 이 '네 가지 원소'에도 각각 그늘과 볕의 성질을 부여했다."
- 같은책, '3장', 이상수.


고대인들이 보기에 세계를 이루는 '4원소'는 '공기(하늘)', '흙(땅)', '물', '불'이었는데, 동양에서는 [주역]의 '4괘'인 '건(하늘)', '곤(땅)', '감(물)', '리(불)'가 그것이다. 이것이 '태(연못)', '진(우레)', '손(바람)', '간(산)' 등으로 분화된 것이 '8괘'다. '괘(卦)'는 '음양(陰陽)'을 나타내는 막대기인 '효(爻)가 3개 겹친 형태다. 가장 작은 단위인 '효'는 '볕(양)'은 홀수이며 '-'로, '그늘(음)'은 짝수이며 '--'로 표현한다. 이 '효'가 아래로부터 1,2,3효로 세 개 겹친 각 형태에 따라 '건(乾)-태(兌)-리(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의 '8괘'로 교차하고, 각 '괘'가 교차한 조합들이 '8X8=64괘'가 된다. 
[주역]의 번역서들은 '양효'인 '-'가 여섯 개 겹친, 즉 '건괘' 두 개로 이루어진 '중천건괘'로부터 '음효'인 '--'가 여섯 개, 즉 '곤괘' 두 개로 구성된 '중지곤괘'로 이어지며 예순네 가지 변형를 거치는데, 생성하고 모이고, 변하다가 막히기도 하며, 나아가다 물러나는 각 '괘'들을 통해 세상사의 큰 궤적을 그리고 있다. 마치 헤겔의 '이성'이 '부정'의 과정을 거쳐 '절대이성'에 이르는 [정신현상학]의 '변증법'적 여정과 닮았으되 [주역]은 완성되지 않는다. 63괘인 '기제괘'는 '불(리)' 위에 '물(감)'이 있는 '수화기제'로 아래로 내려오는 물이 위로 올라가는 불을 끄는 완벽한 형태로 모든 일의 완성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마지막 64괘는 '미제괘'다. '물(감)' 위에 '불(리)'을 얹은 '화수미제'는 마지막까지 왔으나 다 건너지 못한 상태로 불완전하게 마무리되고 있다. 
동양적 사고방식으로 끝없는 순환을 암시한다.

'변화(變化)'의 경전, [주역]은 만물의 운동과 대립물의 투쟁, 상호침투와 양질전화 모두를 아우르며 세계를 묘사하고 해석하는 '변증법(辨證法)'의 경전이기도 하다.
'볕(양)'과 '그늘(음)'을 나타내는 '-'과 '--'도 그 자체 '불변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젊은 볕'은 숫자 '7'로 시간의 양이 쌓이면 숫자 '9'인 '늙은 볕'이 되고 또 시간의 양이 더 쌓이면 이 '양'은 '음'으로 전환된다. 짝수인 '8'로 나타나는 '젊은 그늘'로의 질적전환 후 또다시 '늙은 그늘'인 숫자 '6'이 된다. '볕(-)'이라고 다 같은 '불변효'가 아니라, '그늘(--)'로 양질전화하는 '변효'도 공존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주역]은 '변화'의 경전이다. '변화'를 어떻게 예측할 것인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예측은 반드시 조짐을 실마리로 삼는다. 오늘날 현대 과학의 어떤 예측도 결국은 조짐의 분석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일기예보나 지진예측도 대기의 흐름이나 특정 자연현상을 조짐으로 삼아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다... 조짐을 보는 눈은 혜안이다. 조짐을 보고 판단해낼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조짐을 보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눈을 감고 캄캄한 미래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
- 같은책, '15장', 이상수.


서자 홍길동은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아버지 홍판서로부터 감금된 후 흉계에 의해 자객이 찾아오는 위급한 때 책상을 물리고는 '주역점'을 친다. 물론 자객을 죽인 것은 그의 도술이었으되, 홍길동은 격리된 어려움 속에서 [주역]을 연구했고 그 점괘의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나 '의적' 또는 '반란의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인생의 '질적전환'을 도모한다.
주 문왕(周 文王) 서백 창(西伯 昌)은 격리된 곤란함 속에서 '64괘'를 연구하여 '괘사'를 지었고, 다산 정약용도 긴 유배시절 독창적으로 [주역] 연구서를 썼다.

그러나 '도적질' 같은 소인배의 길을 [주역]을 통해 예측할 수는 없다. '주역점'은 반드시 '군자'의 '도'와 '인의'의 '덕'을 중심으로 쳐봐야 하며 남에게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왕'처럼 쳐야 한다. 꼭 '왕'이 되라는 게 아니라 그만큼 '주체성'이 [주역]의 중심이라는 의미다.


'주역점'은 "떳떳함이 있는 크나큰 시초를 빌립니다(가이태서유상:假爾泰筮有常)"하고 두 번 외친 후 점칠 내용을 명확한 명제로 읊고는 '시초(筮:서)'라는 풀줄기로 친다고 하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시초든 성냥개비든 이쑤시개든 신성한 가지 55개(1에서 10까지 더한 수) 준비한다.

2. 6개(음양 분화전 태초의 태극)를 빼고 49개를 두손에 임의로 나눠 쥔다.

3. 각 손에 든 갯수에서 '4'의 배수로 남기는데  예를 들어 한 손에 쥔 수가 22개면 2개를 덜고 20개를 남긴다.

4. 양 손의 수를 합친 후, 다시 이 방식을 총 세 번 반복한다.

5. 최종 남은 수를 '4'로 나눈다. 아마도 숫자 '4'는 '건곤감리'의 '4원소'일 것이다.

6. '6', '7', '8', '9' 중 한 숫자만큼 남는데, '7'은 '젊은 볕', '9'는 '늙은 볕', '8'은 '젊은 그늘', '6'은 '늙은 그늘'에 각각 해당된다.

7.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의 '효'를 얻는데, '젊은 효'는 '불변효'로 변하지 않는 '효'이며 '늙은 효'는 '변효'로서 '양'에서 '음'으로, '음'에서 '양'으로 전환될 운명이다.

8. 위의 방식을 여섯 번 반복하면 64괘 중 하나의 괘가 나오는데 이를 [주역] 번역서에서 찾아보고 앞날을 예측한다.

9. '변효'로 인해 64괘 중 얻은 결과가 다른 괘로 전환되는 내용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다.


[주역]은 '길흉'을 치는 점이 아니다. 
긍정의 괘가 나오더라도 그 안에 배태된 부정의 기미를 예측해야 하며 부정의 영향은 최대한 제거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한없이 씩씩하고 당당한 '중천건괘'로 시작했지만 온갖 부침을 겪으며 결국 '화수미제'의 미완성으로 마무리되는 [주역]에는 완전한 '긍정'도 완전한 '부정'도 없다.
모든 만물은 운동하고 대립하며 서로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며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물러서기도 하는 '변증법' 자체다. 
한편으로 '운명'은 스스로 개척할 수 있으되, 자연만물의 이치로서 '숙명'에는 순응할 줄 아는 '유물론'이기도 하다.
조선을 건국한 고려말 '혁명가' 정도전의 '급진적 성리학'에서 보이는 '유물론'의 단초가 바로 [주역]이었으며, 그의 '혁명동지' 권근 또한 조선 건국 후 [주역] 연구서를 집필했다.
[주역]은 당시 '혁명가'들의 '자연변증법'이었다.


"[주역]을 지은 이들은 인간의 길흉을 결정하는 것은 점괘가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행동, '덕'과 '지혜'라고 생각했다. 바른 덕을 지니고, 바른 실천을 하고, 변화에 바르게 대응하는 경우에는 점을 쳐볼 필요도 없이 길하고 유리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왕과 같은 수준의 '책임의식'과 '주체성'을 가지고 점을 쳐야 한다고 했다. 주역점만이 아니다. 운명을 대하는 태도가 왕과 같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운명을 이겨낼 수가 있겠는가."
- 같은책, '20장', 이상수.


[주역]은 '변화'의 경전이며, '유물론'에 기초한 '변증법'의 경전이다.
우리가 '덕(德)'과 '지혜(智慧)', '책임의식(責任意識)'과 '주체성(主體性)'을 가지고 [주역]을 읽는다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갈 수 있다.

[주역]을 읽는 우리 모두가 '왕'이고 '홍길동'이다.


***

1.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 이상수, <웅진지식하우스>, 2014.
: 21세기초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을 쓴 전 한겨레신문 기자 이상수는 뛰어난 [주역] 전공자다.

2. [주역 - 왕필 주](3세기), 왕필, 임채우 옮김, <길>, 1998~2013.
: 64괘에 관한 왕필의 주석

3. [주역 - 64괘 384효의 본질], 신창호, <역사인>, 2019.
: 명나라 학자 호광의 [주역전의대전]이 저본

4. [인생의 공식 64], 장경, <청림출판>, 2019.
: 전공자는 아니지만 작가의 [주역] 해설 내공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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