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 신론 - 개정판
윤내현 지음 / 만권당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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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역사에서 '기자'와 '위만'의 정체
- [한국 고대사 신론], 윤내현, <만권당>, 2017.




"서기전 195년엔 위만이 연나라로부터 난하를 건너 기자국으로 망명해 왔는데 자부의 아들인 자준(준왕)은 그를 신임하고 난하 유역에 거주하게 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서 중국의 망명자를 규합한 위만이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했다. 정권을 탈취당한 자준은 소수의 궁인을 이끌고 오늘날 발해로 도망했다. 그 후 자준은 정치세력을 형성하지도 못했고 그의 후손도 전멸했는데 기자신을 제사지내는 것만이 오늘날 난하 유역에 민속신앙으로서 고구려시대까지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지배계층에서는 이것을 사악한 신을 제사지내는 것으로 취급했다.
결국 기자국은 중국의 변방에 있었던 소국이었으며 그 말기인 자부 때에 고조선의 변방으로 쫓겨왔다가 오래지 않아 망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자나 기자국은 한국 고대사의 주류에 위치할 수도 없으며 '기자조선'이라는 용어는 전혀 부당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점은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위만'의 경우에도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 윤내현, [한국 고대사 신론], <4. 기자신고>, 2017.


고조선의 영토를 가장 넓게 본 이론으로서 1962년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 박사의 [고조선 연구]를 읽은 것은, 현재 '대동강 인류 문명설' 따위의 주체사상 어용 역사학 따위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의 북조선에는 그래도 아직 인류 역사를 '과학'적이며 유물론'적으로 보려했던 역동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고고학자를 중심으로 한 '낙랑군=평양설'과 문헌사학자를 중심으로 한 '고조선=요동설'이 대립했던 1961년 '고조선에 관한 과학토론회'에 종지부를 찍은 리지린의 북경대 박사학위 논문 [고조선 연구]는 우리 고조선의 강역을 중국 북경 인근 난하 지역까지 최대로 넓혀 놓았고, 고조선 사회구성체를 '계급투쟁'을 동력으로 하는 '역사단계설'에 따라 '고대노예제'로부터 '(아시아적)봉건제'로의 '과학'적 이행으로 분석했다.

물론, 우리 남한의 사학자 윤내현 단국대 교수의 [고조선 연구]에 관해서도 들어보았으나 나는 '실증주의' 경향이 강한 우리 강단 사학계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그러던 중 리지린 박사의 [고조선 연구]에 관한 내 서평에 대하여 어느 분의 의견이 있었다. 리지린은 "성급한 발표로 인해 논리가 꼬이고 억측이 많다"며 "식민사관 지리에 토대를 두었지만 일관적 논리를 구사한" 윤내현의 연구가 오히려 낫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단국대 사학과 교수 윤내현 선생(1933~)의 이론을 알기 위해 [고조선 연구], [한국 열국사 연구]에 이어 우리 고대사를 정리한 '3부작' 중 마지막 저서인 [한국 고대사 신론](2017)을 펼쳤다.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고조선 사회 성격'을 비롯한 총 6편의 글로 이루어진 논문집인데,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윤내현 교수가 1983년에 이미 발표한 '기자조선'에 관한 '새로운 고찰'인 '기자신고'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 고대사에 관한 독자적 문헌자료가 없어 중국의 고대문헌에 의거하여 유추해야 하는 바, 북한의 리지린 박사나 남한의 윤내현 교수 모두 [사기], [한서], [삼국지] 등의 중국 고대문헌에 밝은 한편, 윤내현 교수는 '실증적'이고 고고학적 근거에 좀더 중점을 두고 있다.


"고조선의 서쪽 국경을 난하로 본 견해는 일찍이 1916년 장도빈이 제출했다. 그리고 신채호, 정인보, 최동 등도 그 견해가 장도빈의 것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고조선의 강역을 발해 북안으로까지 확대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는 한국사의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재검토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역사학을 전문으로 하는 한국 역사학계로부터는 외면을 당했고, 이른바 재야사학자라고 불리는 일부 인사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한편 북한에서는 1960년대에 고조선의 위치를 오늘날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로 보는 견해와 오늘날 발해 북안(요동)으로 보는 견해 사이에 큰 논쟁이 있은 후, 지금은 고조선의 강역을 오늘날 중국의 요령성에 있는 대릉하로부터 한반도 북부의 청천강까지로 보는 설이 우세하다. 이 설은 필자의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북한에서 우세한 위치에 있는 설은 민족사학자들의 견해가 수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윤내현, 같은책, <서장>, 2017.


결과적으로 윤내현 교수가 보는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은 리지린 박사의 영역과 같다. 서쪽으로는 대릉하보다 더 서쪽의 '난하'를 고대 '요수'로 보았고, 북쪽으로는 흑룡강, 동쪽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청천강 이북까지다. 물론 한반도 전역은 고조선의 간접적 문화권으로 보고 있어 결론은 같으나, '재야사학자'가 아닌 '역사 연구' 전문인 역사학자로서 '민족사학자'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논증에서는 중국 고대 문헌사료 분석을 넘어 '실증사료'를 학자 스스로 연구하고 밝혀낸다는 자부심이 읽힌다. 1960년대 북한의 문헌사학자 리지린 박사는 '고고학'적 유물에는 그리 밝지 못하다 고백한 바 있다.

식민사관은 대동강 유역인 한반도 북부 '평양'에서 '낙랑군' 유물들이 발굴되었다는 '실증자료'를 토대로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 북부로 획정한다. 그러나 윤내현 교수는 고조선 수도 '평양'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고대 한국어에서 '대읍', '장성'을 의미한 보통명사였으며 발해 북안(요동)의 '왕검성'이 고조선의 '평양'이었음은 물론, 북한 '평양'의 '낙랑' 유적은 고조선이 '멸망'했다는 기원전 108년 서한의 한무제 시대의 것이 아니라 기원후 1세기 동한의 광무제가 고구려 견제를 위해 기습공격으로 '평양'에 설치한 '낙랑' 괴뢰국의 유물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왜 '낙랑'이 여러 곳인가? 이를 보려면 우리 고대사에서 '기자(箕子)'와 '위만(衛滿)'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 원래 연나라의 동쪽에는 그 지역의 토착세력의 군장이 있었고 그 토착세력과 연나라의 경계에는 성이 있었으며 그 성은 연나라 군사들이 쌓은 것이다. 그리고 그 토착세력의 서쪽에는 '기자국'이 있었고 '기자'의 후손인 준이 또한 군장이라고 했던 바 '위만'에게 공벌되어 해중으로 옮겨가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준이 위만에게 공벌당한 시기는 서한 초가 되는데 당시에 서한제국의 연 지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정치세력은 고조선이었다. 따라서 '기자국'의 준이 '한(칸/가한)'이라고 칭하기 이전부터 연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동쪽의 토착세력은 고조선이었다는 것이 된다."
- 윤내현, 같은책, <4. 기자신고>, 2017.


우리 역사 교과서는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웠고 중국 은(상)나라 제후인 '기자'가 동쪽 조선으로 와서 '고대국가' 체제를 세운 '기자조선'으로 '대체'되었으며 이후 '위만조선'이 되었다가 중국 한나라에게 망한 후 '한사군(낙랑/진번/임둔/현도)'이 설치된 것으로 가르친다. 고려 시대, 이승휴의 [제왕운기]나 일연의 [삼국유사] 조차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이 시각을 유지한다.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민족사학자와 리지린 박사는 부정한다. 심지어 '해'를 좋아했던 친일 전 최남선은 태양(해)을 숭상하는 고대 조선어 '개'와 '기'가 비슷한 음이라는 근거로, 리지린은 고조선 왕족의 성이 '기'씨였다는 근거로 '기자'가 오지도 않았음에도 혼동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윤내현은 '기자동래설'은 긍정하나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서쪽 변방을 차지했던 '기자국'에 불과하며 '기자'의 성은 은나라 성씨인 '자'씨로 주나라에 의해 은나라가 멸망했을 때 중국 동북부 '조선' 인근으로 망명한 것을 긍정한다. 준왕(자준)으로 끝난 '기자국'은 고조선 전체 영토의 200분의 1 정도 서쪽 변방만 차지했을 뿐이며, 성이 '기'씨든 '자'씨든 지금의 청주 한씨와 덕양 기씨, 선우씨 등이 그 후예라는데 고대 조선어 발음과 한자 표기의 결합의 결과다. '한'이나 '선우(단간/단군)'는 몽골-퉁구스 계 왕인 '칸(가한)'을 의미한다.

농경과 정착 초기인 '읍제국가'에서 사유재산과 계급발생의 초기형태인 '추방(추장)국가'로의 이행에는 청동기 발전이 있는데, 기원전 4세기경 철기 시대가 본격화되면 '연맹체'를 넘어서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 체계가 확립된다. 왕권이 강화되고 왕족의 조상을 숭상하며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면서 사유재산 집중을 위해 세금을 수탈하는 이 '고대 국가' 체제는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만연하는 바, 고대 기록에는 동시대 동북부의 고조선도 그러한 사회체제를 이루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황하 유역의 '앙소(주)' 문화나 '용산(은)' 문화와 별개의 고조선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말이다.


"위만의 모반은 준왕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볼 때는 준왕이 베푼 후의에 대한 어이없는 배신이었지만, 역사적 의미에서는 중국 대륙에서 일어난 거대한 사회 변혁의 파급 효과였다고 이해된다. 중국에서는 춘추시대에 이미 상(은)-서주의 봉건질서가 와해되고 전국시대를 거쳐 진제국의 성립과 더불어 중앙집권적 군현제가 실시된 후 불과 15년 만에 진제국은 멸망하고 한미한 출신의 유방에 의해 서한제국이 건립되고 군국제가 실시되었다. 한편 고조선은 당시까지도 고대의 '읍제국가'적 봉건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고조선의 국가질서에 새로 편입된 기자국도... 왕실의 교체 없이 40여 대를 내려왔기 때문에 고래의 통치체제와 질서에 안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 윤내현, 같은책, <5. 위만조선의 재인식>, 2017.


중국의 전국시대에는 이미 열국의 제후들이 스스로 '왕'이 되어 침략전쟁을 일삼던 시기인데, 연나라에서 고조선의 서쪽 변방 '기자국'으로 망명한 '맥족' 장수(리지린에 의하면) '위만'은 '기자국' 정권을 탈취한 후 동쪽의 고조선까지 진출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 서한 정권의 묵인과 동조가 필요했는데 오만해진 결과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때 한무제의 정벌을 당해 멸망한다. 식민사관은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의 멸망으로 고조선의 종식을 선언하나 고조선의 '예맥'족은 동쪽 최초 수도인 '왕검성'으로 천도하여 '읍제국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한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강력한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고대 국가' 체제를 정립하던 '전국시대'였다. 단군왕검을 중심으로 '신정정치'를 펼치던 고조선은 중국 '동주'와 같은 명맥만 유지한 채 아시아 동북부의 '열국시대'가 열린다. 우리가 잘 아는 북쪽의 부여와 고구려, 옥저, 남쪽의 진국(마한/진한/변한), 동쪽의 '큰 바다'에 둘러싸인([삼국지],<동이전-예전>) '예'가 바로 고조선이다. 결국 중국의 동북부는 고구려에 의해 통일되고 기원후 1세기 동한의 광무제는 중국의 전란을 어느 정도 평정한 후 고구려의 서진을 견제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지금의 평양 지역을 공략하여 '낙랑국'을 건설하는데, 이 '괴뢰국'은 고구려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전설과 같이 기원후 4세기에 고구려에 복속된다. 같은시기 요동 서남부 '낙랑군'도 고구려는 흡수하게 되는데 이래저래 '낙랑'은 우리를 헷갈리게 하지만, 윤내현 교수 등이 밝혀낸 지금 '평양'의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니라, 위만에 의해 밀려난 예전 '낙랑' 지역 사람들의 소국인 '낙랑국'과 이후 동한 광무제의 '낙랑 괴뢰국'인 것이다.


"위만의 정권 탈취와 성장은... 동아시아의 역사 전개 과정에서 본다면 중국에서 춘추시대 이래 있었던 사회 변화와 정치 변화의 여파였고 철기의 보급에 따른 고조선의 사회 구조와 경제 구조 변화의 영향으로 이해된다... 고조선의 쇠퇴와 위만조선의 성립은 읍제국가로부터 영역국가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서부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을뿐 아니라 그 멸망은 한국 고대에 있어서 읍제국가의 붕괴와 열국시대의 개시를 가져왔으므로 한국사의 범주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사의 주류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며, 한국사의 주류를 고조선으로부터열국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윤내현, 같은책, <5>, 2017.


'기자국'의 '배신자(윤내현)'이자 '혁명가(리지린)'였던 위만은, 한고조 유방의 사후 모반의 죄를 쓴 노관이 흉노로 도망쳤을 때 방향을 달리 하여 '조선'으로 망명한 연왕 노관의 부장이었다는 일본 사학자의 추측도 있지만, 리지린 박사에 의하면 고조선 서방 2천리를 빼았았던 연나라 장수 진개처럼 '중국인'이 아닌 '맥족'으로 볼 수도 있다. 요동 자체의 역사인 '요동사'의 시각으로 보면 요동 지역의 다수 원주민 자치정권인 '단군왕검'의 고조선은 읍제국가의 형태로 지속되었으며, 중국식 정치 체제의 영향을 받은 '기자'와 '위만'은 고조선의 서쪽 변방 일부를 지배했다. '중국인' 기자는 오래 가지 못했으나'요동인' 위만은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기 위해 동방의 고조선에 도전했고 이로 인해 요동의 '열국시대'가 개시된다.

우리 고대사는 이제, 우리 역사의 '주류'가 아닌 '기자'와 '위만'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고대 아시아 동북부를 아울렀던 '토착세력'으로서 고조선의 역사,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후... 아사달(왕검성/평양)에 돌아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가 된([삼국유사],<고조선조>)" 단군왕검이 다스린 그 고조선 자체의 역사에 직면하게 된다.


"기자국은 한국 고대사의 주류에 위치할 수 없음이 확인되었고 '기자'와 '위만'의 실체가 밝혀짐으로써 당시에 고조선이 강한 토착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방증되었다. 이제 고조선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르게 복원하는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 윤내현, 같은책, <4. 기자신고>, 2017.


요동의 고조선 '단군왕검' 체제는 중국의 정치체제와는 독립적인 '토착세력'으로서 2천년 이상 그 자체의 역사를 이어갔던 것이다.


***

1. [한국 고대사 신론], 윤내현, <만권당>, 2017.
2. [고조선 연구](1962), 리지린, 이덕일 해역, <도서출판 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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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Paperback) - 『백년의 고독』영문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 HarperPerennial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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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 고독'한 자들의 본질은 '부재(不在)'가 아닐까
- [백년 동안의 고독](196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1999.


"멜뀌아데스는 그 원고를 자기의 모국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적었으며, 짝수에 해당하는 줄은 모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인적인 암호로 적었고, 홀수에 해당하는 줄들은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의 군대암호로 적어놓았다. 그리고 남들이 쉽게 해독하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에서 마지막 다시 손질을 해서, 모든 사건들을 인간이 이해하는 보편적인 시간의 개념에 따라서 나열한 것이 아니라, '백년 동안' 날마다 일어날 사건들을 한순간에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처럼 적어놓았고, 이러한 비밀의 실마리를 아우렐리아노가 풀어내게 된 것은 아마란타 우르슬라의 사랑에 얽힌 복합적인 상황에서 빚어낸 혼돈에서였다."
- [백년 동안의 고독](196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1999.


다시, '소설'을 쓰고 싶었던 이십대 중후반의 이야기다. 
영문학을 '전공'한 것은 문학이 좋아서가 아니라 고등학교 때 단지 좋아했던 과목이 '영어'였기 때문이었고, 처음보는 대학선배들이 왜 영문과에 왔냐고 물으면 우리는 당시 인기가수 김종서의 노래 가사처럼 "영문~도 모른 채에~~"를 읊기 일쑤였다. 사실 신문기자가 중학교 때까지 나의 장래희망이었고 이제 스무살을 앞두고는 뭔가 구체적인 꿈을 기획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에 신문사 들어가려면 영문과가 유리하다는 전혀 구체적이지 않은 생각을 한 것 같다. 아무튼, 이 두 가지를 버무린 곳이 영자신문사였기에 입학하자마자 시험을 보고 교내 영자신문사에 들어갔으나 군대식 문화에 치를 떨며 바로 때려치우고는 학생회를 찾아갔다. 90년대는 아직까지 모든 곳이 '군대식'이었지만, 학생회는 그나마 '민주주의'의 탈을 쓴 군대였다.

내가 한때 '영어'라는 과목을 좋아하긴 했던가 기억조차 가물거리던 시절을 지나며 나는 '철학'과나 '사학'과를 왜 몰랐던가 잠시 아쉬워 하기도 했으나 결국 그것들이 나의 미래일 수는 없었다. 그때 섬광처럼 내게 '문학'이 날아들었다. 비록 학보사에 버리듯 던져넣었던 첫 번째 단편소설 [담배 세 까치]는 "군입대를 앞둔 어느 젊은이의 넋두리"라는 한줄 평을 받았다고 군휴가때 만난 복학생 선배가 소주잔과 함께 전해주었지만, 나의 이십대 중후반을 지배했던 건, 그래도 '가죽잠바'와 '담배', 그리고 '단편소설'이었다.

모든 일을 시작할 때는 무릇 '롤모델'을 상정하기 마련이다. 내 '소설가' 롤모델은 '90년대 최고의 리얼리스트' 김소진이었다. 그는 1963년생으로 나보다 열한살 많았지만 영문학을 전공했고 신문사 기자였다. 스물아홉에 [쥐잡기]라는 단편소설로 등단했는데, 자기 존재의 기원을 찾아 부모세대로 거슬러 오르는 어린 시절의 '원체험'이 그의 주요 주제였다. 1991년 우리 학교 김귀정 열사 투쟁을 배경으로 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칼 포퍼의 동명 저서와는 직접 연관은 없으나 '열린 사회'와 '민주 사회'로 나아가는 90년대 벽두에서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을 배제시키는 87년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위선을 정말 간명하고도 멋지게 드러내 놓았다. 루카치의 말마따나 "소설은 현실의 특수한 반영"이라는 계명을 들고 길을 나선 소설가 지망생인 나는 소설을 통해 모순된 사회체제를 고발하고 싶었고 카프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하였지만, 사실은 김소진처럼 쓰고 싶었다. 그래서 김소진은 내게 '90년대 최고의 리얼리스트'였고, 노동현장에 생생하게 뿌리를 둔 [객지]의 황석영은 70년대, [내일을 여는 집]의  방현석은 80년대 '최고의 리얼리스트'라 칭하며 내 소설의 '성삼위일체'를 이루었더랬다. 물론 황석영과 방현석처럼 노동의 현장에 투철할 정도의 깜냥이 못되는 나는 내 '리얼리즘'을 90년대 소설가 김소진에서 찾은 거였고 내 '단편소설'의 주제 또한 찌질한 내 일상의 기억들과 '원체험', 우리 세대 정체성의 '근원 찾기'로 설정했던 터였다.


20세기 초반에 제임스 조이스 같은 서구영미 소설가들은 '의식의 흐름', '개인주의', '초현실주의' 영역에서 '모더니즘'을 선도하며 '소설의 죽음'을 선언했다는데, 남아메리카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백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소설로 이 모더니스트들의 오만함을 비웃어줬다. 반어법과 역설적 풍자로 일관하는 이 소설은 서구영미 제국주의에 의해 망가지는 '제3세계'의 현실을 전혀 진지하지 않게 우화적으로 서술한다. 나름의 의미는 담았겠으나 그냥 아무말 대잔치처럼 서술하는 마르케스의 방식은 군제대 후 접한 우리 소설가 성석제를 떠올리게 했고, 역으로 원래는 시인이었지만 서른살 중반에 소설가로 등단한 90년대 한국의 성석제의 '롤모델'이 혹시 60년대 서른아홉에 [백년 동안의 고독]을 썼던 남미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게도 했다.

마르케스처럼 전혀 진지하지 않은 문체로 한바탕 놀아제끼는 성석제의 소설들은 내가 정말 배우고 싶던 서술방식이었으나 이십대 후반의 그 당시 나는 그의 소설을 '리얼리즘' 범주에 넣지 않는 지극한 편협함으로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김소진의 '원체험'을 붙잡고 있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나는 아마도 원고지에 세 번 이상 베껴썼던 것 같다. 

그러던 내가 김소진과 성석제 사이에서 한때 윤대녕 소설에 빠졌던 이유는, 윤대녕의 소설쓰기가 '은어'처럼 오랜 기억을 거슬러 오르는 '원체험'으로의 개인적 여행의 90년대식 표본이었기 때문이리라. '리얼리즘'을 표방했음에도 나는 앞뒤 안 맞게 '이상문학상'을 매년 거르지 않고 제일 먼저 찾아봤고, 90년대 초반 당시 우리의 20세기 초반 '초현실주의' 소설가 이상의 뒤를 잇는 소설가가 바로 윤대녕이라 생각했다. '과거회귀'를 모티브로 한 윤대녕은 역시 이십대 후반인 1990년에 [은어낚시통신]이라는 소설집을 냈고, 1994년에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라는 한편의 영화같은 장편소설로 강렬히 내 기억을 차지했다. 그리하여 윤대녕은 결국 성석제와 마찬가지로 따라쓰고 싶은 나의 소설가 목록에 오른다.


1999년 늦가을, 나의 이십대 후반에 '신춘문예'에 만약 기적처럼 당선된다면 발표할 '당선소감'을 감히 써둔 건 아니었지만, 그해 겨울 마지막으로 교문을 나올 때까지 내가 계속 생각했던 '당선소감' 제목은 '90년대 당시 과거 기억들의 부재(不在)에 대하여' 정도였던 것 같다. 한 번도 '중심'에 서보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았던 나의 정체성은 '과거'의 나와 우리 사회 주변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기원을 찾고자 하나, 김소진과 윤대녕의 소설에서처럼 그 실체를 결코 잡을 수 없다는 것, 포도대장 이완이 다시 찾아갔을 때 어느덧 사라지고 없는 허생 같은 그 '부재(不在)'가 내 소설의 모티브였다고 늘 생각했다. 이걸 어떻게 '리얼리즘'과 접목할지는 그 당시는 물론 '소설가'가 결국 못된 지금은 더더욱 모르겠다. 다만,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여주인공들의 대표이름이자 '처녀성'을 상징하는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근친상간으로 종족의 종말을 짓는 '우르슬라'를 잃은 채, 역시 종족의 종말을 예언한 기록을 보며 '낙원' 마콘도의 멸망을 목도하는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좋은 시대'라는 뜻)'가 역시 느꼈던 것이 바로 '부재(不在)'였다는 생각이 든다.

'백년 동안' 지속되어 온 줄 알았던 '낙원' 마콘도는 결국 '부재(不在)'했음에 다름 아니며,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해 현실을 묘사했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은 결국 예전에도 없었을지 모르고 앞으로는 더더욱 없을 정체성의 '부재(不在)'에 다름 아닐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미래에도 없을 이 '부재(不在)'들은 지금 현재에는 생생하게 존재하여 내 정체성을 단단히 붙잡고 있을지 모르니, 기회의 여신 '오카시오' 또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대머리 뒷통수를 보이기 전에 잽싸게 그 긴 앞머리를 잡아채어야 할게다.


"그러나 미처 아우렐리아노가 마지막 줄을 다 읽어내기도 전에, 그는 자기가 결코 이 방에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으니, 그것은 이 거울의 도시, 아니 신기루의 도시가, 바람에 날려 없어질 터이며,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가 이 원고를 해독하게 되는 순간부터 마콘도는 인간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며, 여기에 적힌 글들은 영원히 어느 때에도 다시 되풀이 될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은 '백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종족은 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 [백년 동안의 고독], 가르시아 마르케스, 1967.


***

1. [객지], 황석영, <창작과비평사>, 1974.
2. [내일을 여는 집], 방현석, <창작과비평사>, 1991.
3. [열린 사회와 그 적들], 김소진, <솔>, 1993.
4.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윤대녕, <중앙일보사>, 1994.
5. [새가 되었네], 성석제, <강>, 1996.
6. [순정], 성석제, <문학동네>, 2000.
7.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창작과비평사>, 2002.
8. [백년 동안의 고독](196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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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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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츠비의 '미래'와 콜필드의 '과거'
- [위대한 개츠비], 피츠제럴드 / [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



"판단을 유보하면, 희망도 영원하다."
- [위대한 개츠비], <1>, 스콧 피츠제럴드, 1925.


미국 대선을 지켜보면서 거대 양당제의 과두지배적 정치체제가 사실, 한심했다. 일제로부터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다시 지배당하고 거의 '미국인'에 가까운 초대 대통령은 한참 후세인 내가 보기에 웃기지도 않았는데 더 중요한 건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우리 정치도 미국의 '양당체제'가 이식된 것이 나는 더 슬펐다. 공화당은 '보수', 민주당은 '진보'라는 식의 수사가 우리의 '양당제'에도 그대로 이식되기를 우리의 지배자들은 바랬겠지만, 적어도 '정의란 무엇인가?' 묻는 마이클 샌델 식의 '공화주의적' 자부심이란 게 미국의 '보수'에게는 있었겠지만, 그건 '왕정'을 겪어보지 못한 미국인들의 역사일 뿐, 우리나라 '보수'는 할 수만 있다면, 즉 자기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왕정'을 선택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역사가 깊은 유럽의 '보수'들처럼 말이다. 
19세기 유럽의 과학적 사회주의자 엥겔스는 이미 미국식 양당 정치체제를 두고 "도둑놈들이 돌아가면서 자리를 바꿔먹는 정치체제"라 논평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대선을 통해 20세기를 지배했던 제국의 몰락을 본다. 이유는, 코로나도 경제위기도 아니다. 바로 빌어먹을 '양당제'다.

1920년대라면, 아마도 미연방공화국의 최대 전성기의 시작과도 같은 시기였을 텐데, 1차 세계대전 후 세력들이 재편되는 유럽을 제끼고 미국이 성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내 전공은 영문학이었으나 학창시절에 관련 공부는 커녕 관련 소설책도 제대로 읽어본 기억은 없다. 그래도 '20세기 영미소설' 하면, 아일랜드의 제임스 조이스, 미국의 스콧 피츠제럴드와 샐린저 등은 어깨 너머로 들어봤다. 그리고 마흔이 넘어서야 피츠제럴드와 샐린저를 읽었다. 사치스런 행각으로 유럽을 넘나들던 피츠제럴드는 유럽의 조이스와도 친분이 있었고, 미국의 샐린저와도 친했다고 한다.

1896년에 미국에서 태어나 1920년 첫 소설 [낙원의 이쪽]의 대성공으로 상류층의 딸 젤다와 결혼한 피츠제럴드는 호화파티와 유럽여행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많은 소설을 썼다. 부인 젤다는 정신병을 앓았는데 그녀 또한 소설을 썼고 아마도 피츠제럴드는 그녀의 소설을 질투했을 수도 있고 파경을 겪으면서도 그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라는 아주 얇은 '대작'을 남겼다. 그의 살아 생전에는 책의 '저렴한 가격'으로 인해 대성공까지는 못했다 하나, 1940년 알콜중독과 심장마비로 그가 사망한 후 [위대한 개츠비]는 '가장 위대한 미국소설'이 되었다고 한다.

미국 중서부 상류층인 닉 캐러웨이는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다. 그는 나서지는 않지만 주변 사람들의 곁을 지키는 성격인데, "판단을 유보하면, 희망도 영원하다" 말한다. 당시 성장 사업이었을 '드럭스토어(편의점/잡화점)'를 통해 부자가 된 1차대전 참전군인 '제임스 개츠'는 자신의 과거를 베일에 가린 채 이름을 '제이 개츠비'로 바꾸고 첫사랑이었던 상류층 딸 데이지의 인근에 화려한 대저택을 갖추고는 유명인사들을 꼬이는 호화 파티를 열면서 데이지를 기다린다. 개츠비의 이웃인 화자 닉은 데이지와의 친분이 있었으므로 개츠비의 '친구'가 된다.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화자 홀든 콜필드의 말을 빌어 말끝마다 "친구" 또는 "형씨"라 붙이는 개츠비식 말투를 높이 평가하는데, 아마도 당시 성장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고지식한 격식을 벗어나는 '미래지향적' 어법으로 본 듯 하다. 사실상  근본이 '유럽인들'이었던 미국인들은 상류층이 득세하면서 '유럽'의 '귀족'적 격식을 갖추고자 했을 텐데, 이 가식적인 상류사회에 '미국식' 벼락부자 개츠비가 끼어들어 과거는 잊고 모두를 "형씨"라 부르며 반말을 까는 거다. 소설가 김영하는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면서 동년배 사이의 존대를 없애고 다 현대식 '반말까기'로 번역했다고 한다.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는 바로 이 미국식 '미래지향적' 반말까기였다.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 [호밀밭의 파수꾼], <22>, J.D.샐린저, 1951.


스콧 피츠제럴드의 '친구'였다는 제롬 데이빗 샐린저(J.D.Salinger)는 1951년에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이라는 아주 정신없는 소설을 썼는데, 이 역시 20세기 미국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영문학'을 '전공'하던 스무살에 읽었다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1967)이나 우리의 소설가 성석제의 [새가 되었네](1996),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2002) 등에 못지않게 재미있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마흔이 넘어서는 별로 읽을 것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나아가 왜 '위대한' 미국소설인지 당최 이해할 수도 없다. 다만, 몇 구절에서 나도 모르게 피식거리거나 정신놓고 출근하다가 큰길에서 발목을 삐기나 할 뿐이다. 

1920년대에 성장하는 미국의 '미래'를 보여줬던 [위대한 개츠비]를 정신나간 와중에도 높이 사는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 콜필드는 여러 상류층 고등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채 퇴학을 거듭하면서 뉴욕의 상류층 부모를 실망시키고 헛소리와 정신분열을 거듭하다가 결국 정신병원 신세를 진다. 어린 여동생 피비에 집착하는 그는 아마도 호밀밭에서 어린이들이 절벽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 생각했지만, 그건 그의 '미래'가 아니라 단지 그의 '과거'일 뿐이다. 실제로 소설 내내 화자는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마도 샐린저는 '매카시즘(광신적 반공주의)' 같은 1950년대 당시 미국의 신종 '전체주의'로부터 일탈을 꿈꾸며 그 시대풍조를 비틀기 위해 '성장이 멈춘' 청소년 홀든 콜필드를 화자로 내세웠는지 모르나 '괜히 읽었나' 싶다가 발목이나 삐어버린 중년 노동자인 나로서는, 좀더 어렸을 때 읽을걸 하는 생각을 내내 했다. 그래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까지만 읽고 '영미소설'은 접을까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인 홀든 콜필드식으로 말한다면, "뭐 그렇다고 아주 나빴던 건 아니었다. 단지 난 괜히 읽었나 생각을 하다가 발목을 삐었을 뿐이고 그때문에 기분을 잡쳤는데, 그렇다고 이 '위대한' 미국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냥 내 나이가 백만살 정도만 더 젊었다면 훨씬 재미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후세들은 이 '위대한' 미국소설을 기저귀를 벗자마자 바로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는 정도로만 해두자.


다시 미국 '양당제' 얘기로 돌아오면, 20세기의 이 거대한 '제국'은 '공화주의'적 '양당제'로 흥했으나 이 과두지배체제로 이제 몰락하고 있다 말하고 싶다. 99% 다수의 운동도, 인종차별에 대한 극렬한 투쟁도 이 '도둑' 같은 '양당제' 정치체제로 편입되면 체제전환을 기획할 수 없다. 다수의 역동성을 잠식하고 무력화하는 이 거대양당의 과두지배체제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우리 사회도 이를 깨달았으면 한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죽은 개츠비 곁에서 '친구' 닉 캐러웨이는 '과거'를 딛는 '미래'를 애써 그리지만, 미국이라는 '거대제국'의 '미래'는 더 이상 영광스럽던 '공화주의'적 '과거'의 그 모습이 아니다.

체제변혁의 판단을 '유보'한다고 해서 희망이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을 '위대한' 개츠비와 그 친구들이 이미 역설적으로 보여주었지 않았는가.


"그곳에 앉아 그 옛날 미지의 세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개츠비가 데이지네 집의 잔교 끝에서 빛나는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의 놀라움에 생각이 이르렀다. 바로 이 파란 잔디밭까지 오기까지 그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 그의 꿈은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그는 몰랐다. 자신의 꿈이 어느새 자기 등 뒤에, 저 뉴욕 너머의 혜량할 수조차 없는 불확실성 너머, 밤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미국의 어두운 들판 위에 남겨져 있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새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위대한 개츠비], <9>, 스콧 피츠제럴드, 1925.


***

1. [위대한 개츠비](1925), 스콧 피츠제럴드, 김영하 옮김, <문학동네>, 2009.
2. [호밀밭의 파수꾼](1951), J.D.샐린저, 공경희 옮김, <민음사>, 2001.
3. [백년 동안의 고독](1967), 가르시아 마르케스,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1999.
4. [새가 되었네], 성석제, <강>, 1996
5.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창작과비평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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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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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개츠비의 '미래'와 콜필드의 '과거'
- [위대한 개츠비], 피츠제럴드 / [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



"판단을 유보하면, 희망도 영원하다."
- [위대한 개츠비], <1>, 스콧 피츠제럴드, 1925.


미국 대선을 지켜보면서 거대 양당제의 과두지배적 정치체제가 사실, 한심했다. 일제로부터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다시 지배당하고 거의 '미국인'에 가까운 초대 대통령은 한참 후세인 내가 보기에 웃기지도 않았는데 더 중요한 건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우리 정치도 미국의 '양당체제'가 이식된 것이 나는 더 슬펐다. 공화당은 '보수', 민주당은 '진보'라는 식의 수사가 우리의 '양당제'에도 그대로 이식되기를 우리의 지배자들은 바랬겠지만, 적어도 '정의란 무엇인가?' 묻는 마이클 샌델 식의 '공화주의적' 자부심이란 게 미국의 '보수'에게는 있었겠지만, 그건 '왕정'을 겪어보지 못한 미국인들의 역사일 뿐, 우리나라 '보수'는 할 수만 있다면, 즉 자기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왕정'을 선택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역사가 깊은 유럽의 '보수'들처럼 말이다. 
19세기 유럽의 과학적 사회주의자 엥겔스는 이미 미국식 양당 정치체제를 두고 "도둑놈들이 돌아가면서 자리를 바꿔먹는 정치체제"라 논평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대선을 통해 20세기를 지배했던 제국의 몰락을 본다. 이유는, 코로나도 경제위기도 아니다. 바로 빌어먹을 '양당제'다.

1920년대라면, 아마도 미연방공화국의 최대 전성기의 시작과도 같은 시기였을 텐데, 1차 세계대전 후 세력들이 재편되는 유럽을 제끼고 미국이 성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내 전공은 영문학이었으나 학창시절에 관련 공부는 커녕 관련 소설책도 제대로 읽어본 기억은 없다. 그래도 '20세기 영미소설' 하면, 아일랜드의 제임스 조이스, 미국의 스콧 피츠제럴드와 샐린저 등은 어깨 너머로 들어봤다. 그리고 마흔이 넘어서야 피츠제럴드와 샐린저를 읽었다. 사치스런 행각으로 유럽을 넘나들던 피츠제럴드는 유럽의 조이스와도 친분이 있었고, 미국의 샐린저와도 친했다고 한다.

1896년에 미국에서 태어나 1920년 첫 소설 [낙원의 이쪽]의 대성공으로 상류층의 딸 젤다와 결혼한 피츠제럴드는 호화파티와 유럽여행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많은 소설을 썼다. 부인 젤다는 정신병을 앓았는데 그녀 또한 소설을 썼고 아마도 피츠제럴드는 그녀의 소설을 질투했을 수도 있고 파경을 겪으면서도 그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라는 아주 얇은 '대작'을 남겼다. 그의 살아 생전에는 책의 '저렴한 가격'으로 인해 대성공까지는 못했다 하나, 1940년 알콜중독과 심장마비로 그가 사망한 후 [위대한 개츠비]는 '가장 위대한 미국소설'이 되었다고 한다.

미국 중서부 상류층인 닉 캐러웨이는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다. 그는 나서지는 않지만 주변 사람들의 곁을 지키는 성격인데, "판단을 유보하면, 희망도 영원하다" 말한다. 당시 성장 사업이었을 '드럭스토어(편의점/잡화점)'를 통해 부자가 된 1차대전 참전군인 '제임스 개츠'는 자신의 과거를 베일에 가린 채 이름을 '제이 개츠비'로 바꾸고 첫사랑이었던 상류층 딸 데이지의 인근에 화려한 대저택을 갖추고는 유명인사들을 꼬이는 호화 파티를 열면서 데이지를 기다린다. 개츠비의 이웃인 화자 닉은 데이지와의 친분이 있었으므로 개츠비의 '친구'가 된다.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화자 홀든 콜필드의 말을 빌어 말끝마다 "친구" 또는 "형씨"라 붙이는 개츠비식 말투를 높이 평가하는데, 아마도 당시 성장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고지식한 격식을 벗어나는 '미래지향적' 어법으로 본 듯 하다. 사실상  근본이 '유럽인들'이었던 미국인들은 상류층이 득세하면서 '유럽'의 '귀족'적 격식을 갖추고자 했을 텐데, 이 가식적인 상류사회에 '미국식' 벼락부자 개츠비가 끼어들어 과거는 잊고 모두를 "형씨"라 부르며 반말을 까는 거다. 소설가 김영하는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면서 동년배 사이의 존대를 없애고 다 현대식 '반말까기'로 번역했다고 한다.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는 바로 이 미국식 '미래지향적' 반말까기였다.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 [호밀밭의 파수꾼], <22>, J.D.샐린저, 1951.


스콧 피츠제럴드의 '친구'였다는 제롬 데이빗 샐린저(J.D.Salinger)는 1951년에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이라는 아주 정신없는 소설을 썼는데, 이 역시 20세기 미국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영문학'을 '전공'하던 스무살에 읽었다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1967)이나 우리의 소설가 성석제의 [새가 되었네](1996),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2002) 등에 못지않게 재미있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마흔이 넘어서는 별로 읽을 것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나아가 왜 '위대한' 미국소설인지 당최 이해할 수도 없다. 다만, 몇 구절에서 나도 모르게 피식거리거나 정신놓고 출근하다가 큰길에서 발목을 삐기나 할 뿐이다. 

1920년대에 성장하는 미국의 '미래'를 보여줬던 [위대한 개츠비]를 정신나간 와중에도 높이 사는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 콜필드는 여러 상류층 고등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채 퇴학을 거듭하면서 뉴욕의 상류층 부모를 실망시키고 헛소리와 정신분열을 거듭하다가 결국 정신병원 신세를 진다. 어린 여동생 피비에 집착하는 그는 아마도 호밀밭에서 어린이들이 절벽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 생각했지만, 그건 그의 '미래'가 아니라 단지 그의 '과거'일 뿐이다. 실제로 소설 내내 화자는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마도 샐린저는 '매카시즘(광신적 반공주의)' 같은 1950년대 당시 미국의 신종 '전체주의'로부터 일탈을 꿈꾸며 그 시대풍조를 비틀기 위해 '성장이 멈춘' 청소년 홀든 콜필드를 화자로 내세웠는지 모르나 '괜히 읽었나' 싶다가 발목이나 삐어버린 중년 노동자인 나로서는, 좀더 어렸을 때 읽을걸 하는 생각을 내내 했다. 그래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까지만 읽고 '영미소설'은 접을까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인 홀든 콜필드식으로 말한다면, "뭐 그렇다고 아주 나빴던 건 아니었다. 단지 난 괜히 읽었나 생각을 하다가 발목을 삐었을 뿐이고 그때문에 기분을 잡쳤는데, 그렇다고 이 '위대한' 미국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냥 내 나이가 백만살 정도만 더 젊었다면 훨씬 재미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후세들은 이 '위대한' 미국소설을 기저귀를 벗자마자 바로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는 정도로만 해두자.


다시 미국 '양당제' 얘기로 돌아오면, 20세기의 이 거대한 '제국'은 '공화주의'적 '양당제'로 흥했으나 이 과두지배체제로 이제 몰락하고 있다 말하고 싶다. 99% 다수의 운동도, 인종차별에 대한 극렬한 투쟁도 이 '도둑' 같은 '양당제' 정치체제로 편입되면 체제전환을 기획할 수 없다. 다수의 역동성을 잠식하고 무력화하는 이 거대양당의 과두지배체제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우리 사회도 이를 깨달았으면 한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죽은 개츠비 곁에서 '친구' 닉 캐러웨이는 '과거'를 딛는 '미래'를 애써 그리지만, 미국이라는 '거대제국'의 '미래'는 더 이상 영광스럽던 '공화주의'적 '과거'의 그 모습이 아니다.

체제변혁의 판단을 '유보'한다고 해서 희망이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을 '위대한' 개츠비와 그 친구들이 이미 역설적으로 보여주었지 않았는가.


"그곳에 앉아 그 옛날 미지의 세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개츠비가 데이지네 집의 잔교 끝에서 빛나는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의 놀라움에 생각이 이르렀다. 바로 이 파란 잔디밭까지 오기까지 그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 그의 꿈은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그는 몰랐다. 자신의 꿈이 어느새 자기 등 뒤에, 저 뉴욕 너머의 혜량할 수조차 없는 불확실성 너머, 밤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미국의 어두운 들판 위에 남겨져 있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새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위대한 개츠비], <9>, 스콧 피츠제럴드, 1925.


***

1. [위대한 개츠비](1925), 스콧 피츠제럴드, 김영하 옮김, <문학동네>, 2009.
2. [호밀밭의 파수꾼](1951), J.D.샐린저, 공경희 옮김, <민음사>, 2001.
3. [백년 동안의 고독](1967), 가르시아 마르케스,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1999.
4. [새가 되었네], 성석제, <강>, 1996
5.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창작과비평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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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기원 - 옛 인류는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줄리언 제인스 지음, 김득룡.박주용 옮김 / 연암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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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음성'을 들었던 흔적을 찾아서
- [의식의 기원](1976), 줄리언 제인스, 김득룡/박주용 옮김, <연암서가>, 2017.



"의식은 문화적으로 학습된 사건이고 초기 심리상태('양원적 정신')의 억압된 흔적이다."
- [의식의 기원], 줄리언 제인스, 1976.


'의식(Consciousness)'은 주체가 객체를 인식하는 행위로서 인간의 주관적 정신의 영역이다. '의식'의 기원을 추적한다는 것은 얼핏 인간의 '주관'이 우선한다는 '관념론'과 '정신'이나 '의식' 조차도 뇌라는 '물질'이 생산한 "최고의 산물(레닌)"이라는 극단적 '유물론' 간의 철학적 투쟁을 예고하는 듯 하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의 심리학자 줄리언 제인스(Julian Jaynes)는 '철학'적 고찰 대신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이며 '문화'적 접근방식으로 '의식'의 기원을 파헤친다.


"본래 의식의 본성 탐구는 장황한 철학적 해답들로 가득차 있는 심신관계의 문제로 알려졌다. 그러나 진화론이 등장한 이래, 이 문제는 더욱 과학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다. 정신의 기원 문제, 좀더 세부적으로 말하면 '진화 상에서의 의식의 기원'이라는 게 문제가 된 것이다."
- [의식의 기원], <서론 - 의식의 문제>, 줄리언 제인스, 1976.


'의식'이라는 철학적 주제는 오랜 동안 신화적이고 종교적이며 신비의 영역에 있었다. 근대에 들어 과학이 발전하고 특히 '진화론'의 영향으로 인해 '의식'이 인간의 생물학적인 요소라는 견해가 우세해 지기도 했다. 그러나 줄리언 제인스는 "뇌 지식만으로는 그 뇌가 우리와 같은 '의식'이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같은책, 서론)며 우리의 '의식'이 무엇인지의 개념부터 서술하면서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
그리하여 [의식의 기원]의 독해에서 가장 주요 개념은 '양원적 정신(Bicameral mind)'과 '내성(Introspect)'다. 

[의식의 기원]의 원제는 '양원적 정신의 붕괴과정에서 의식의 기원(The Origin of Consciousness in the Breakdown of the Bicameral Mind)'이다.


"... '의식의 기원' 문제... 의식이 (은유적) 언어에 근거를 둔 것이라면, 그 말은 곧 의식은 이제까지 주장되어 온 것보다 훨씬 더 최근에야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는..."
- [의식의 기원], <1권 인간의 정신 - 2장 의식>, 줄리언 제인스.


'양원적 정신'은 인간의 정신 또는 마음이 '신'의 영역인 '집행부'와 '인간'의 영역인 '실행부'로 나뉘어진 시기의 개념이다(같은책, 1권-4장). 즉, 인류가 '신'으로부터 매개 없이 직접 지시를 받고 고민 없이 실행하던 기원전 2000년 전 이야기다. 이 시기를 지나면 인간은 '사제'나 '영매', '무당' 등의 매개자를 통해 신을 접하게 되는데, 이 때는 이미 주관적 '정신'이 생기고 이것이 은유적 언어를 통해 표현되고 소통되면서 비로소 '의식'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쉽게 이해하면, 고대의 인류는 '어린 아이'와 같아서 의사결정의 스트레스를 신의 지시로 직접 들었는데, 인류가 성장하면서 '어른'처럼 '자기 주관'이 생긴다는 것이다. '신'에 직접 의지하는 '양원적 정신'이 붕괴하면서 그 자리를 '스스로 자기성찰'하는 '내성(Introspect)'을 특성으로 하는 '의식'이 생겨났다는 말이다. 
줄리언 제인스가 말하는 '의식'은 넓은 의미의 인간 정신, 관념이 아니라 '내성'하는 언어적 정신의 좁은 의미이다.

고대 그리스 '트로이 전쟁' 이야기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의식은 은유적 언어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줄리언 제인스의 가설을 평가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확실하게 번역할 수 있는 "최초의 언어기록(1권-3장)"이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 헥토르 등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에게는 개념도, 자유의지도 없다. 그저 '신'들이 '의식'의 자리를 대신한다. 이 고대 미케네인들의 정신구조 자체가 '양원적 정신'이다. 그들에게 '신'은 '유일신'도 아니고 천상에 있지도 않다. 모든 만물에 깃든 '신'들이 '의식' 대신 차지하고 있다. 미케네인들은 '신'들이 조종하는 꼭두각시들이었다. 물론, '어린 아이' 같았던 고대인들이 만든 '신'들이었지만, 그들에게 철저히 지배당하면서 의사결정의 스트레스를 견뎠다.
인간 개인으로 봐도 3~7세에는 '상상의 친구'와 논다. 8~10세에는 '최면' 감수성이 절정, 즉 최면에 잘 걸린다고 하는데, '정신분열'과 함께 '양원적 정신'의 현대적 흔적인 '최면'은 '신'과 '나'를 매개하는 단계와 같다고 한다. '양원적 정신', '상상의 친구' 따위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양원적 정신은 사회적 통제양식으로, 이는 인류에게 소규모 수렵-채취 집단에서부터 대단위 농경공동체로 이행하게 한 사회통제 양식인 것이다. (자체 내에) 자신을 통제하는 신을 갖고 있던 양원정신은 진화하여 최종단계의 언어 진화에 이른다. 그리고 문명의 기원은 바로 이 (언어의) 발달에서 비롯된다."
- [의식의 기원], <1권 - 6장 문명의 기원>, 줄리언 제인스.


'양원적 정신' 구조를 갖고 있던 고대 인류는 주로 '신의 목소리'를 '청각'적으로 들었다. [일리아드]에서 번역하기 모호한 '투모스'는 '신'이 불어 넣어주는 '충동질', '용기' 등을 의미한다는데, 신체적으로는 아드레날린 같은 호르몬을 조절하는 간이나 부신 등으로 볼 수 있다. 그 다음 많이 나온다는 '프레네스'는 '호흡'이자 복수형으로서 허파, '크라디'는 심장, '에토르'는 위장, '누스'는 지각, '사이키'는 생명 등을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이처럼 '양원적' 고대인에게 '신'은 신체기관과 직접 연결되어 지시를 내리고 인간은 청각으로 전달받은 지시를 그대로 이행한다. 그냥 '어린이' 자체다.

기원전 2000년경이 되면 인류는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 등으로 나타나듯 사회조직을 '문자'로 표현하고 유지한다. 어찌보면 '정신분열' 환자 같던 '양원적' 고대인들은 그냥 '미친놈들'이 아니었다. 거대한 사회조직의 '집단적 규범'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이다. 이제 문자와 같은 '문명'은 그 자체로 인간 개인의 '의식'을 발생시켰고, 거대한 사회를 조직하는 '사회통제' 기제로서 인간은 한단계 성장하여 '내성'을 하게 된다. 
청각적인 '양원적 정신'이 붕괴된 자리에 문자를 시각적으로 보는 '의식'이 들어선다.

줄리언 제인스가 주요 근거로 삼지는 않으나 우리의 뇌구조와 비교하면 '양원적 정신'의 이해가 더 쉽다. 우리 뇌의 좌반구는 언어와 말, 우반구는 종합적 사고와 노래 등의 감성적 영역일 텐데 '의식'이 우세한 현재 인류는 좌반구가 우세하나, '신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고대인들에게는 우반구도 활발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반구는 '신'의 영역, 좌반구는 '인간'의 영역. 이 '2중 뇌(1권-5장)'는 '양원적 정신'의 흔적이다.


"진정한 양원 시대에서는 그 어떤 '신'도 인간의 입술을 통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 400년에 이르렀을 때 요즈음 우리 주위에 많은 교회가 있듯이, 신들림은 그리스 전역에 흩어져 있는 신탁들과 개개인에게 빈번히 나타났다. 양원적 정신은 사라지고 신들림이 그 흔적으로 남았던 것이다... 양원적 정신에서는 환상이 우반구에서 만들어져 그것에서 들리고, 신들린 상태에서 하는 말은 정상적인 경우에서처럼 좌반구에서 생성되지만 우반구에 의해 조종된다... 우반구의 베르니케 영역에 대응하는 영역이 좌반구의 브로카 영역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 [의식의 기원], <3권 - 2장>, 줄리언 제인스.


1권 '인간의 정신'에서 '의식'의 개념을 정의하고, 2권 '역사의 증언'에서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와 '카비루(히브루)'의 구약 등을 통해 역사적 사례를 소개한 후, 저자는 3권 '현대세계에서의 양원정신의 흔적'으로 시와 음악, 최면과 정신분열 등의 흔적들을 일별하는데 3권은 불필요한 장광설에 불과한 듯 하나 마지막 '과학'에 관한 장은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한다.

'양원적 정신'의 붕괴에 대한 직접적 결과로서 '과학 혁명'은 그 자체로 '사실'에 기반한다 해도 근본적으로는 '신의 의지'를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과학'도 '종교'도 모두 '종교적'이라는 것이다(3권-6장).
미국의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종교는 그 시대의 '과학'이었으므로 '종교'와 '과학'의 대립은 "예전의 과학과 지금의 과학이 대립"하는 것이라 규정했듯, 심리학자 줄리언 제인스는 양자 모두 '종교'라 규정한다. 
결국, 성장한 현대 인류의 '의식'은 이러한 '종교적' 행위로써 아서왕과 기사들이 성배를 찾듯 '우주의 안정성'과 '총체성', '잃어버린 신의 음성'을 끊임없이 찾는다고 한다. 
고대에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던 인류는 이제 현대에 이르면서 '의식'을 통해 '과학'적으로 '신의 음성'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적대적인 것은 교회와 과학이지 종교와 과학이 아니다. 종교와 과학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지 상반되는 관계가 아니다. 둘 다 '종교적'이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잃어버린 권한위임을 '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고대 예언자에서부터 지속되어 온 사제들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지, 아니면 사제의 매개 없이 객관적 세계에서 우리의 현재 경험을 통해 '천국'을 찾을 수 있는지였다."
- [의식의 기원], <3권 - 6장 과학이라는 복신술>, 줄리언 제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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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의 기원](1976), 줄리언 제인스, 김득룡/박주용 옮김, <연암서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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