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국사기 1 - 두 천하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삼국사'를 넘어서는 '오국사'의 지정학
- [오국사기(五國史記)], 이덕일 역사평설, <김영사>, 2002.


"고구려가 지녔던 '대륙성'과 백제와 왜국이 지녔던 '해양성'의 복원은 위기에 처한 우리 민족이 지향할 미래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대륙성'과 '해양성'을 복원하는 길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신라의 통일이란 장벽에 부딪친다.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신라는 너무 과한 값을 주고 샀으나 그 통일은 참 보잘 것 없는 통일이다. 청천강 이북을 가보지 못한 통일이다. 통일이 아니요, 분할이다'라고 한탄한 것처럼 신라의 통일은 우리 민족에게 고구려의 '대륙성'과 백제, 왜의 '해양성'을 사장시킨 역사이기 때문이다."
- [오국사기] 1권, '책머리에', 이덕일, <김영사>, 2002.


학창시절 한 번쯤 우리 삼국 중 신라가 아닌 고구려나 백제가 통일을 이루었다면 어떠했을까 공상해 보았을 것이다. 고등학생의 나는 고구려의 강역이 요동과 만주 일대였으므로 고구려가 통일국이 되었다면 우리의 영토도 더 넓어졌을 것이고 우리나라가 더욱 강대국이 되었을 것 같다고 우긴 적 있었으나 스무살 이후 역사의 '가정'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의 내 생각은 다시 시간을 되돌린데도 결과는 같다는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은 없으므로 서기 6~7세기로 되돌아간들 백제나 고구려나 썩은 내부 왕조체제로 인해 멸망하고, 가장 낙후된 정권이었으되 외교에 목숨걸었던 신라가 살아남는다는 사실은 변함없을 게다. 삼국 중 어느 정권이 존속했던들 역시 몇 백년 후 부패한 귀족체제로 인해 농민반란에 직면했을 것이고 말이다.

12세기 고려 시대 중기 '묘청의 난'을 진압한 당대 최고 지식인관료 김부식은 '왕명'을 받들어 [삼국사기]를 지었는데, 요동만주의 발해를 배제한 신라 중심 사관과 사대주의 사상에 기반했으되 현존하는 가장 '사실'에 기반한 제일 오래된 우리 자체 기록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에게는 역사투쟁의 주적이었고 어찌보면 이병도 무리의 근대 식민사학의 근원 같기도 하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이므로 역사적 사실의 근거가 될 수 밖에 없다. 아마도 고려왕조의 권위를 배경으로 유일한 '정사'가 되기 위해 참고했던 이전 왕조들의 기록들을 폐기시키지 않았을까 싶게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의 '정사'들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니 현존하는 당대 중국왕조들의 역사서와 일치한다면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비록 일부 주류사학자들로부터 '유사사학' 같다는 비난은 있으나, 우리 민족의 정신을 강조하며 식민사학을 극복하자는 민족사학의 뒤를 잇고 있는 재야사학자다. 서기 6~7세기 우리 역사를 '삼국'의 틀이 아닌 '오국'의 관점에서 2002년에 평가하고 해설한 [오국사기]는 그 제목에서부터 주류 [삼국사기]를 넘어선다.
[오국사기]는 '고구려-백제-신라-당-왜' 5국의 역사기록을 '사실'에 기반하여 소설형식으로 풀어냈다. 이십여 년 전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와 닮은 시도로 볼 수 있겠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시조 온조왕이 한성에 도읍한 것은 서기전 18년이었다. 그리고 사비성 함락이 의자왕 20년(660)이니 백제는 개국 678년만에 멸망한 것이었다.
한때 북쪽으로는 요하 서쪽을 차지해 요서군과 진평군을 설치할 정도로 흥성했던 왕국, 일본을 속국으로 삼았던 왕국, 한강 유역을 차지했던 백제왕국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갔다. 의자왕과 대성 8족으로 대표되는 지배층 사이의 격렬한 내분이 나라를 멸망하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오국사기] 3권, '제18장 사비성의 비극'.


[삼국사기]는 극복대상이지만, 역사적 사실 대부분에 있어서는 주요 참고문헌이다. 역사해석에 왜곡은 있을지라도 우리의 '정사'이기에 '기사'로서의 '사실성'까지 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6세기말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부터 시작하여  당나라 수립과 왜의 일본국 건설의 내용, 나-제 동맹의 해체와 복수를 꿈꾸는 신라의 국운을 건 외교, 고구려 내분 등이 드라마처럼 교차한다. 

망국의 군주 의자왕은 백제말기 부패한 귀족들과의 내부 권력투쟁에서 패배했기에 나-당 연합군에 대적할 수 없었다. 백제 민중들은 고구려의 대중국 전쟁의 성과를 들었기에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백제의 귀족들은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차라리 의자왕의 항복이 기득권 유지에 유리하다고까지 판단했단다. 전형적인 매국의 논리다. 치열한 백제 부흥운동을 벌이다가 당나라로 귀순하여 서방에서 공적을 세운 망국의 장수 흑치상지 이야기도 있고 백제왕 복위투쟁을 이어간 장수 복신과 승려 도침은 백제의 고도 부여 은산별신제의 주신으로도 모셔진다.  
'해양성' 강한 지정학적 '시파워(sea-power)' 국가 백제는 왜의 불교국가 건립을 도왔다는데 왜의 친백제 정권은 왕자 부여풍을 귀국시키고 지원군까지 파병하지만 결국 또 다시 부흥군의 내분으로 백제 부흥운동의 '지도부'는 와해되고 그 민중정신만 망국의 오랜 지역을 지키게 된다.


"보장왕은 이적에게 끌려 장안성으로 가야 했다... 뿐만 아니라 무려 20여만 명에 달하는 고구려 백성들도 장안으로 끌려가야 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멸망 때의 행정구역과 인구수를 '5부, 176성, 69만여 호'라고 적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3.5가구 중 한 명씩을 끌고 간 것이니 저항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끌고 간 셈이었다. 고구려 부흥운동을 철저히 차단하겠다는 당의 의도였다...
보장왕을 위시해 아들과 대신들은 이 헌전에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태종에게 사과해야 했다. 옛날 태종의 친정을 물리친 것이 큰 죄라는 사죄였다. 남건, 남산은 물론 오늘의 이 사태를 초래한 남생도 땅 속에 묻힌 태종의 시신에 절해야 했다. 668년 10월의 일이었다."
- [오국사기] 3권, '제22장 제국의 종언'.


고구려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며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중국을 가운데로 두고 볼 때 동북의 고구려 뿐 아니라 예전 북방의 흉노나 당시 서북의 돌궐 또한 '하늘(텡그리)'의 자식('천자')으로서 '가한(칸/한/선우)'이 있었으나 후대에 기록을 전하지 못했거나 중국 통일왕조에 의해 사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고구려는 주체적 국제외교를 통해 자국의 존재감과 역사를 남겼던 것이다.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하고 수나라 또한 정권 말기 농민반란으로 무너진 후 당나라가 국가의 기틀을 잡는 과정에서 당 태종 이세민은 서방의 돌궐을 제압한 자신감으로 동방의 고구려를 정복하여 진정한 '천자'가 되고자 하나 결국 실패한다. 당 태종 사후 신라의 김춘추가 아들을 동반하여 경주에서 중국 장안까지 가서 나-당 연합을 제안했을 때, 당 왕조의 참전은 이세민의 '설욕전'이었을 것이다.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국가의 명운을 걸고 고구려, 당의 강국과 동맹을 맺고자 한 건 백제에게 죽임을 당한 딸과 사위의 복수심 때문이었다는 평가를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어쨌든 김춘추의 복수심과 고국인 가야를 배신하면서까지 신라에서 승진하려던 김유신 가문의 결연한 파트너십은 결국 한반도 통일이라는 대업의 기초가 되었다.

정권 말기 부패한 귀족들을 진압하고 왕까지 갈아치운 '도교'적 대막리지 연개소문 사후 자식들의 내분은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 요인이겠으나, 민생은 살피지 못했을 무리한 상무정신은 내부의 적들을 제압하기 위함이었을 뿐 국제정세에는 무능력 자체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매도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은 분명, '영웅'적 기질을 선보이나 결국 민생을 돌보지 못하는 권력자는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대륙성'을 지향했던 '랜드파워(land-power)' 고구려는 결국 '하트랜드(heart-land)' 쟁탈전에서 거꾸러지고 말았다. 강대국들과의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패배했던 것이다.

무능한 고구려 '상무 정신'의 끝은 보장왕과 연개소문의 망할 놈의 자식들을 포함한  망국의 위정자들이 당 태종의 무덤까지 끌려가 '사죄'함으로써 죽은 이세민의 복수전으로 마무리되었다. 
또한 잊혀진 고구려의 강토는 요동만주에서 그 뒤를 이은 발해의 역사까지 지우면서 한반도 역사를 신라의 역사로 국한시키고 말았다. 
[삼국사기]의 가장 큰 과오가 또한 여기에 있다.


"427년에 통구(집안/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장수왕은 475년 3만 대군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 개로왕은 이 공격을 격퇴하지 못하고 수도였던 위례성, 지금의 서울을 함락당하고 만다.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한 백제 개로왕은 왕통을 잇기 위해 아들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키는데, [삼국사기]에는 이때 문주가 목협만치와 조미걸취라는 두 인물을 데리고 피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가 웅진까지 함락시킬지 모를 극한 상황에서 문주왕과 목협만치 사이에 일종의 역할분담이 이루어져 문주왕은 공주(웅진)를 사수하되 목협만치를 일본에 보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렇게 문주왕에 의해서 일본에 파견된 목협만치는 일본에 미리 와 있던 백제계 세력을 규합해 정권 장악에 나서게 된다."
- [오국사기] 2권, '제10장 태극전의 비극'.


왜는 고구려까지 멸망한 후인 670년 '일본'으로 국호를 고친다. 백제 부흥투쟁 파병도 실패하고 일본 본토에 백제식 산성을 증축하여 나-당 연합군에 대항한 농성에 들어가는데, 당시 왜국은 백제 이민자들의 정권인 '소아'가가 불교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토착종교 세력인 '물부'가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백제의 '식민정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왜에는 3세기 가야문화가 이식되었고 이후 '해양국가' 백제로부터 이식된 불교식 '아스카' 문화의 영향을 받은 정권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백제의 멸망으로 왜국은 진정한 독립단계에 이르러 '태양이 뜨는 근본'이라는 의미의 '일본'국이 된다. 그들의 대표적 역사서 [일본서기]는 '왜'가 아닌 '일본'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그들 최초의 기록이다.


"태종이 고려라는 말을 내뱉자 좌중은 갑자기 긴장했다. 사실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하는 한 아직 천하가 태종의 발 아래 들어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신하들은 고구려만큼은 잊고 싶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자신들만의 천하관을 갖고 있는 나라였다. 고구려는 자신들이 천하의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거란과 말갈 등을 속국으로 두었다.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도 다른 민족들처럼 중국의 천하관에 소속된 조공관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중국 남, 북조와 각기 외교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서로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수 양제가 여러 차례 쳐들어간 것도 그가 단순히 폭군이어서가 아니었다. 고구려를 정복하지 않고는 천하를 다스린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 태종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고구려를 정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천자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전쟁이 고구려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 [오국사기] 2권, '11장 생애의 마지막 과업'.


[오국사기]는 한반도와 요동의 당대 역사 외에도 수-당 교체기의 중국 역사라든가, 일본 천왕가의 권력투쟁 역사 또한 '외전' 형식이 아닌 주내용으로 전개시킨다. 수 문제와 양제, 당 고조 이연이나 수나라 말기 혁명가 양현감과 이밀, 당 태종 이세민 등도 [오국사기]의 엄연한 주인공으로 그들 중심의 사건 전개도 생생하다. 역사학자의 실증적 역사평설이므로 [수서], [신/구당서] 등 중국측 '정사'에 기초한 사실적 내용에 극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주인공' 이세민의 '생애 마지막 과업'인 고구려 정벌은 그가 죽어 땅에 묻힌 후에야 신라의 도움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신라의 문무왕은 재위 21년(681) 7월 초하룻날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를 보낸 임금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왕(무열왕/김춘추)을 따라 전쟁터를 전전하다 부왕 사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와 싸워 국체를 보존한 임금이었다...
그는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세계관을 터득한 임금이었다...
... 문무왕은 중국 삼국시대 오왕 손권의 북산 무덤과 위왕 조조의 서릉을 예로 들며 화려한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했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화장했다.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대당전쟁을 승리로 이끈 문무왕의 시신은 한줌 재가 되어 바람에 날려 출렁이는 동해에 흩뿌려졌다."
- [오국사기] 3권, '제23장 나당대전'.


이제 , '오국사'의 마지막 주인공 신라의 '남은 이야기'다.
신라와 관련된 이야기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차고 넘친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은 각각 <본기>와 <열전>의 하이라이트 같기도 한데, 신라는 [삼국사기]의 진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당연합군의 승리 후 신라의 당나라로부터 독립투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이 지금 한반도 남한에서의 '한-미 연합작전'처럼 당시의 강대국 당나라는 약소국 신라와의 연합작전에서 늘상 주도권 싸움을 걸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라가 역사에서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는 이런 반외세 해방투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라는 일반적인 평가에 덧붙여 저자 이덕일 박사는 김춘추의 아들이자 대당 투쟁을 승리로 이끈 마지막 '주인공' 문무왕의 유언으로 6세기 말부터 7세기 말까지 약 80여 년간의 장대한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복수심에 물불 안 가리는 아버지 김춘추와 성공욕에 불타는 김유신을 보며 냉철한 군주로 성장한 신라 제30대 문무왕 김법민은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들을 위로하고자 각 주현의 과세를 줄이고 군역을 줄였으며 불필요하고 번거로운 제도를 간소화하라는 유지를 남긴다. 그 중 가장 번거로웠을 국왕 본인의 장례 간소화를 위해 불교식 화장을 하고 동해바다에 묻혔다. 

우리가 익히 '동해바다의 용'이 되었다고 들어 온 '대왕암'이 그의 무덤이다.


***

1. [오국사기(五國史記)], 이덕일, <김영사>, 2002.
2.[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3. [삼국유사(三國遺事)], 일연,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1.
4. [지정학의 힘], 김동기, <아카넷>,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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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평화 - 삼국지 이전의 삼국지, 민간전래본
김영문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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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에서의 역사는 반복되는 '진실'이다.
-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20.


"중상에게 단단히 기억하게 하라. 한 고조는 세 공신을 배반했으니 세 공신이 한나라 천하를 나누어 갖게 하라. 한신에게는 중원을 나누어주어 조조가 되게 하고, 팽월에게는 촉 땅 서천(쓰촨성:서촉)을 나누어주어 유비가 되게 하고, 영포에게는 강동과 장사를 나누어주어 오왕 손권이 되게 하라. 한 고조는 헌제가 되게 하여 허창에 살게 하고, 여후는 헌제의 아내인 복황후가 되게 하라. 조조는 천시를 얻게 하여 헌제를 가두고 복황후를 죽여 복수하게 하라. 강동의 손권은 지리를 얻게 하여 많은 산과 강물로 보호받게 하라. 촉 땅의 유비는 인화를 얻게 하라. 유비는 관우와 장비의 용맹을 취하지만 전략을 세우는 사람이 없으니 괴통을 제주에 태어나게 하여 낭야군 사람이 되게 하라. 그의 성은 복성인 제갈, 이름은 량, 자는 공명, 호는 와룡 선생으로 불릴 것이다... 중상도 이승에 태어나서 복성 사마씨에 자는 중달을 쓰며 삼국을 병합하여 천하를 제패할 것이다."
- [삼국지평화], '상(上)편',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20.


후한 말기 황건 농민반란으로 촉발된 약 100여 년간 위, 촉, 오나라가 중국을 삼분하던 쟁패기를 거쳐 진(晉)나라가 다시 중국을 통일한 기록이 [삼국지]인데, 3세기 후반 진수가 정사 [삼국지]를 지었고 140년 후 남송의 배송지가 [삼국지]에 주를 달았다. 물론, 왕명을 받은 '정사' 기록 이전에 민간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먼저 있었을 것이며 각종 기록들은 그 뒤를 따랐을 것이다. '정사'를 쓴 진수 등의 관료학자들은 해당 이야기의 고증을 위해 관련 기록은 물론 민담 일체를 취재했을 것이다. 유목을 하던 몽골족이 중국 정착민 한족을 지배하던 원나라 지치 연간(1321~1323년)에는 당시 연극으로 전해오던 '삼국지' 이야기 대본이 간행되었는데, 이것이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다. 원나라 말기 핍박받던 중국 한(漢)족의 독립투쟁 과정은 유비의 '촉한정통론'의 사회적 배경이 되었고, '독립투사' 나관중은 170년 후인 1494년 명나라 시기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써 이 서사를 정리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 '삼국지'의 저본은 나관중이 한시와 함께 120회로 지어낸 [삼국지연의]를 청나라 때 모종강이 다시 편찬한 판본이다. 이 [연의] 또한 연극의 대본이었으나 이보다 170년 전, 아니 그 이전부터 민간에 이야기 형식으로 전해 내려오던 대본이 바로 [전상삼국지평화]인 것이다.


'전상((全相/像)'은 각 회별로 삽화가 있다는 의미이고, '평화(平話)'는 당시 이야기 공연 장르의 대본이라는 뜻이다. 글 모르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림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해주거나 연극을 하는 대본인 것이다. 65권의 '정사' [삼국지]나 120회의 [삼국지연의]에 비할 수 없이 분량은 짧으나 이야기 극으로는 길어서 짧은 단락을 한편의 그림과 함께 풀어냈을 것이며 그로 인해 사실 여부나 앞뒤 맥락이 맞지 않는 부분도 많았을 것이다. 요즘으로 보면 TV 앞에 모여 보는 연속극 만화 정도일 듯. 일관성도 팩트체크도 없이 '아무말 대잔치'도 가능했을 것이 수백년 전 당시 대다수 민중들은 글을 몰랐을 것이니 요즘 유투브 가짜뉴스 찍듯 흥미에 맞춰 이야기를 지어내고 부풀려서 확대재생산했을 것이고 '허구 70% 사실 30%('허칠실삼')'이라는 [연의]의 70% '뻥'의 근원이 아마도 이 [평화]일 것이다.


서두에 인용한 내용은 이른바 [삼국지평화]의 '서문'이자 일종의 '요약'이라 볼 수 있는데, 삼국을 평정하고 다시 통일한 '사마'씨 진나라의 '고조' 사마의(중달)가 후한 광무제의 부흥 시기에는 현세의 황제가 될 수 없으니 천제 앞에 불려가 저승의 판관이 되는 장면으로 [평화]는 시작하고 있다. [삼국지평화]의 서막은 바로 '초한지' 이후다. 
한고조 유방은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공신인 대장군 한신과 양왕 팽월, 구강왕 영포(경포)를 역모죄로 죽였다. 본인보다 강한 자는 '토사구팽'하는 고사의 유래다. 4백년 후 유방의 한나라가 망해갈 때 천제는 억울한 초한지 공신들을 부활시켜 한고조 유방의 땅을 찢어 갖게 한다는 것이며, 초한쟁패 당시 제왕 한신에게 유방(한)-항우(초)-한신(제)의 '천하삼분지계'를 유세한 괴통을 제갈량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윤회적 이야기다. '삼국지'의 서기 3세기는 중국에 불교가 공식 포교되기 전인데도 말이다.


사실 [삼국지연의]를 읽다보면 '초한지' 이야기와 비슷한 장면들이 적지 않다. 아마도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초한지' 내용과 진수의 [삼국지]에 담긴 '삼국지' 이야기가 섞이고 서로 교차하는 과정이었을 게다. 항우가 유방을 초대해 죽이려던 '홍문연'은 오나라 원수 주유가 유비를 죽이려던 '황학루' 연회로 반복되어 [삼국지평화]에 등장하나 당시 '황학루'는 존재하지도 않았단다. 도망치던 유방이 자식들을 수레 밖으로 밀어낸 것과 유비가 조운 앞에서 아들을 패대기친 것 등 사실과는 다르더라도 민중들에게 익숙한 이전 역사 이야기로 반복함으로써 극적 흥미를 높이고자 하는 내용이 [평화]에 자주 등장한다. 
민중들에게 이렇게 역사는 반복적으로 전해진다.


중국의 어느 지방에서는 유비나 관우가 아닌 장비를 최고의 영웅으로 친다는데, 이 또한 [삼국지평화]에서 유래한다. [연의]에서는 거의 철부지 같은 장비가 [평화]에서는 제갈량이 등장하기 전 모든 국면의 해결사로 등장하는 점이 인상깊다. 기실, '명분'의 유비, '맨주먹' 관우와 '도원결의' 후 이 보잘 것 없던 삼형제가 관군의 말단에 이르기 전 아마도 장비의 재산과 명성에 의지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삼국지평화]의 마지막 주인공은 아마도 '5호16국'을 연 흉노의 후예 '유연'일 수도 있다. 사실 고증이나 앞뒤 일관성 여부는 상관없이 '아무말 대잔치'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숨막히면서도 빠르게 흘러가고 어느새 마지막은 '사마'씨의 진나라가 '8왕의 난'으로 분열된 틈을 타서 '후한'을 다시 세운 흉노족 '유연'이 등장한다. 뜬금없을 수도 있으나 한나라 '유'씨 정통론을 강조하기 위한 민간인 대상 [평화]의 억지스런 장치이기도 하다. 한나라가 흉노 유화책으로 왕실 공녀들을 흉노 선우들에게 시집보냈으니 흉노의 외가가 한족이며 그러므로 흉노 후예 '유연'이 세운 '후한' 또는 '전조'가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결말이다. '오랑캐'를 배척하는 '중화'의 주류를 결국 '흉노'에서 찾음으로써 '촉한정통론' 자체가 허구임을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 증명하기도 한다. 

다수 민중들 사이에 구전되는 이야기의 역사는 반복되면서도 그 모순되는 이야기 속에 '진실'을 담고 있다 하겠다.


명나라 말기 '종산거사' 견위의 [원본 초한지(서한연의)]에 이어 [삼국지평화]를 번역한 역사전문번역가 김영문 선생께 경의를 표한다. 고증이나 일관성 맞추기의 부담없이 만화책 보듯 후딱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적당하다.

[삼국지평화]는 '삼국지'를 읽는 또 하나의 뜻깊은 방식이다.


***

1.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20.
2. [원본 초한지(서한연의)], 견위,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19.
3. [사기], 사마천,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
4. [삼국지], 진수,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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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발해고 - 최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 번역한 4권본
유득공 지음, 김종복 옮김 / 책과함께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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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고(渤海考)'를 읽다.
- [정본(正本) 발해고(渤海考)], 유득공, 김종복 옮김, <책과함께>, 2018.



"그러나 고려 500년간에 문인 학사들이 전혀 수습하지 않아 300년간 유명한 나라의 역사로 하여금 차가운 굴뚝과 잡초더미로 변하고 회오리바람에 사라져 그 자취가 있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 죄의 하나이다. 발해는 고구려의 유족인데도 동족의 나라가 성쇠흥망한 역사를 대하여 전혀 애석해 하는 사상도 없고 수습하려고 주의하지도 않았으니, 하물며 동족을 위하여 위기를 도와주는 의로운 행동조차 가졌겠는가. 이것이 그 죄의 하나이다. 발해의 강토는 고구려의 판도이므로 5천리 산하가 바로 우리 조상의 소유이니, 발해사에 의거하면 서쪽으로 거란에게 책망하여 돌려받고 북쪽으로 여진에게 책망하여 돌려받아 우리 강토를 잃지 않고 동양 세계에 일대 강국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거늘, 바로 고려의 문인 학사들이 이를 타인의 강토로 등한시하여 5경 15부의 빛나는 판도로 하여금 이역에 빠지게 하고 동남쪽 한 모퉁이로 축소되어 약소한 나라를 스스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그 죄의 하나이다."
- [황성신문], '<발해고>를 읽다', 1910.4.28. 논설.


1910년 '경술국치'의 해 4월 28일, [황성신문]의 '논설' 제목은 '<발해고>를 읽다'였다. 그 해 8월에는 이완용 등의 '을사5적' 매판관료들이 '한일합방 의정서'를 무단 날인했고 기어이 조선의 국권은 사라졌다. [황성신문]은 이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된 후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던 우리 일간지였다. 1910년 4월 위 논설 <[발해고]를 읽다>의 필자로 추정되는 일제강점기 민족사학자 박은식 선생은 경술년 그 해 임박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을 예상했으리라. 나라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건, 지금 '조선'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발해를 우리 역사로 포괄하지 못한 '고려 문인 학사들'로부터였다는 듯, "이역에 빠진" 발해를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나도 박은식 선생의 역사관에 심히 동조하기는 하나 국권침탈의 원인 중 주요인은 시대착오적 '대한제국'의 '왕권강화'로 본다. 전세계적 격동의 시기에 '제국'의 군사력도 없으면서 '이씨 왕조'만 지키려다 망한 것인데, 조선 후기 '개혁군주' 평가를 받는 정조도 이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조 대의 세계사는 인류 근대화의 시초인 프랑스 '대혁명'의 시기였다. 조선의 살 길을 나는, 이씨 '왕'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믿는다.

'개혁군주' 정조는 서얼 출신 지식인들을 대거 기용하는 '개혁'을 하긴 했다. 이들이 바로 '실학자'이자 '북학파'인 박지원의 제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인데 선대의 세종대왕 시기 '혁신'의 중심인 '집현전'을 모델로 한 정조의 '규장각'에서 수많은 서적과 사료들을 섭렵한 유득공(자는 혜보, 혜풍)이 1784년에 지은 역사서가 [발해고(渤海考)]다. 
결과적으로 유득공 자신이 '초판 서문'에서 밝혔듯, [발해고]는 참고사료의 부실함으로 인해 '세가-전-지' 등으로 발전하지 못한 미완의 역사 보고서(考)일 뿐, 비록 형식은 따랐으나 '기전체 정사기록'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 기록이며 그러므로 저자 본인은 "감히 역사가로 자처할 수 없다"고 하였다.


"...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차지하며 발해라 하였으니 이들이 '남북국'이다.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잘못된 일이다.
... 고려가 마침내 약소국이 되고 만 것은 발해의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탄식을 금할 수가 없구나!
... ([발해고]를) '세가, 전, 지'라 하지 않고 '고(考)'라고 한 것은 아직 역사서를 완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 또한 감히 역사가로 자처할 수 없다고 하겠다."
- [발해고], <초판 서문>, 유득공, 1784.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들은 조선왕조 내내 이어진 [동국통감]식 역사관에 반기를 들었다. 조선 역사관의 주류는 중국 사료들에 기반한 중화주의 역사관에 따라 '기자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 등 한반도 일대에 국한된 '신라' 중심인 고려 김부식 [삼국사기]의 전통이었다. 박지원을 필두로 실학자들은 한반도 이북의 '요동'에 눈길을 돌렸고 1784년에 우리 역사의 집대성인 [삼한총서]를 기획하는데 '통일신라'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하기 위해 [발해국기]를 싣는다. 이 [발해국기]가 바로 유득공의 [발해고] '초판'으로 추정된다. 

1784년 [발해고] '초판'은 저자가 <서문>에서 아쉬워 하듯, 고려가 발해의 10여만 유민들을 수용하면서 그들의 역사기록 등을 적극 수집하고 기록하지 않은 탓에 발해의 역사에 관한 사료가 없어 "문헌이 흩어져 없어진 지 몇백 년 뒤에 비록 편찬하고자 하지만 할 수가 없었다(<서문>)". 

대조영이 세운 발해국은 '주자감'이라는 국립교육기관도 있었고 '서경 압록부'를 통해 당나라, '남경 남해부'를 거쳐 신라, '동경 용원부'를 거점으로 하여 동해바다로 직접 일본과 외교를 했으며, 지배민족 고구려 유민 중심인 '중경'을 기준으로 '숙신(조선/여진)'을 관할하는 '상경', '예맥(조선/고구려)'의 '동경', '옥저'의 '남경', '고구려'의 '서경'을 비롯하여 '부여', '읍루', '말갈(솔빈/불녈/철리/월희)' 등의 요동 일대 여러 부족들을 '5경 15부 62주'로 분할통치했던 말 그대로 요동의 '제국'이었다. 그야말로 고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요동 제국'의 역사라 할 만 하다.

[발해고]는 고구려 무장 대걸걸중상(진국공)과 그 아들인 대조영(고왕)이 요동지역 일대 민족을 아우르며 발해를 건국한 이야기부터 중국의 산둥지방인 등주까지 공략한 대무예(무왕)과 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시호 기록 없음) 이후 발해 부흥을 도모한 대조영의 7대손 대연림('흥료왕') 등을 비롯한 그 왕족들의 기록인 <군고>, 신하들의 기록인 <신고>와 발해의 강역에 관한 기록인 <지리고>, 관직 기록 <직관고>, 국서 일부를 모은 <예문고>와 발해 멸망 이후 유민들이 웅집한 '정안국'에 관한 짧은 기록인 <정안국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서(記)'가 끝내 되지 못한 '역사보고서(考)'였으나, 유득공은 이후 오류가 많은 [발해고] '초판'을 세 차례 수정했는데, 중국이나 일본측 사료 참고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요동 일대를 답사한 후 특히 '5경 15부 62주'의 발해 강역에 관한 <지리고>를 대폭 수정했다. '초판'이 926년 발해를 멸한 거란 요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 <지리지>와 [신당서] <발해전>의 기록을 그대로 전재했다면, 이후 약 10여 년간 작업했을 '수정판'은 저자의 답사 등을 통한 지속된 노력으로 중국측 사료들의 오류들을 대폭 수정하고 있다.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한 후 고조선 유민들이 이주한 지역에서 본인들의 지명을 계속 사용했듯, 요나라가 발해를 멸한 후 발해 유민들을 대거 요동 일대로 이주시켰는데 역시 이주한 지역에서도 '동경 용원부', '상경 용천부', '중경 현덕부', '남경 남해부', '서경 압록부' 등의 '5경 15부'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고 그로 인해 발해 멸망 전후 지역에 관한 [요사]의 비정이 틀렸음을 수정하고 있다.

1784년 [발해고] '초판' 이후 1793년까지 세 차례의 '수정판'은 1791년 이덕무 등의 [소화총서] 기획에 수록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화총서] 기획 역시 박지원의 1784년 [삼한총서] 기획의 뜻을 이어받아 한반도와 요동의 서기 7~10세기를 '남북국사'로 정리하려던 것이었다. 그렇게 [발해고]는 [소화총서]에 수록됨으로써 비록 '역사서'는 아니지만 우리 역사에 '남북국' 시대를 최초로 도입한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다.

[발해고]가 수정되던 기간은 동시대 유럽의 프랑스 '대혁명'기(1789~1793)였다. 정치적으로 왕조를 타도하지 못한 '개혁군주' 시대였으나 역사적으로는 수백년 이어진 '삼국사-신라' 중심사관에 균열을 내고 '남북국' 시대를 연 우리 역사기록의 '혁명'이라 할 만하다.


***

- [정본(正本) 발해고(渤海考)], 유득공, 김종복 옮김, <책과함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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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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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생'이란 '개그'
- [로드(The Road)](2006), 코맥 매카시,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08.



"아팠죠, 그죠?
그래. 아팠어.
아빠는 정말로 용감해요?
중간 정도.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길에 뱉어냈다.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정말요?
아니. 귀담아 듣지 마라. 자, 가자."
- [로드], 코맥 매카시, 2006.


나는 자녀들과 '개그' 주고받기를 좋아한다. 일상을 진지하지 않게, 그러나 메시지가 남으면 좋은 그런 대화를 나는 '개그'라 보는데. 물론 아이들에게 '교훈'이 필요하다 판단되면 순식간에 진지모드 돌입하는 게 문제지만, '마지막 보호막'인 아버지라 어쩔 수 없다고 애들 의견은 상관없이 혼자 생각하고 말지만, 내가 내 아이들과 진짜로 하고 싶은 건 평생 '개그' 주고받다 가는 거다.

미국 소설가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1933~)의 소설 [로드(The Road)](2006)는 문명이 싸그리 파괴된 황무지에서 '남쪽'으로 길을 떠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작가는 현대 미국소설을 대표하며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계보를 잇는다고 하는데 역시, 왜 인류문명이 멸망했는지, 언제 어느 곳인지, 아들은 몇살인지 등은 굳이 친절하게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배경설명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그냥 화자 본인 얘기만 몽롱하게 이어간다. 읽다보면 꿈속 얘기인가 현실 묘사인가 모호하기도 하다.

"오늘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게 '가장 용감한 일'이라는 말은 소설 속 아빠가 아들에게 던진 '개그'만은 아니다. 인류문명은 전쟁이든 기후위기든 그 어떤 이유에선가 멸망했고, 대빙하기와 같은 시기를 맞아 인류는 멸종되고 있었으니 춥고 배고프고 무서운 밤을 이겨내고 아침에 눈을 뜬 것이 진정 '용감한 일'이 맞다. 몇 살인지 모르나 어린 아들에게는 그 '용감함' 조차 허락될지 모르지만 말이다.


"남자는 회색빛이 비치자마자 일어났다. 소년은 그냥 자게 놓아두고 길까지 걸어가 쭈그리고 앉아 남쪽 땅을 살폈다. 황폐하고, 고요하고, 신조차 없는 땅. 10월일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자신은 없었다. 날짜를 확인하지 않은지 몇 년은 되었다. 그들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한 번 더 겨울을 난다는 것은 죽음을 뜻했다."
- [로드], 코맥 매카시, 2006.


소설 초반에 그나마 가장 친절하게 묘사된 전체 소설의 배경설명이다. 나는 곧장 '황무지'를 떠올렸는데, 20세기초 영국시인 T.S.엘리엇을 비롯, 1980년대 미국영화 [매드맥스]와 1990년대 일본만화 [북두의권]의 배경인 풀 한포기 안 나는 누런 땅이었다. 이어 겨울을 연상하니 2010년대 한국영화 [설국열차]도 떠올랐으나 매카시의 [로드]는 2000년대 소설이니 [설국열차]보다 앞선다.

자본주의 체제위기인 전쟁과 내란, 착취와 약탈, 그리고 기후위기로 추정되는 문명파괴 후, [매드맥스]에는 '동쪽'을 찾아나선 사람들이 있고 이들을 돕는 '영웅' 맥스에게 특별한 방향은 없다. [북두의권]의 '세기말구세주' 켄시로도 마찬가지나 실은 전 여친 유리아가 그의 유일한 방향이다. [설국열차]의 혁명가 커티스는 열차 기관실이라는 명확한 현실적 목표가 있었지만 민수의 방향은 그 '현실'에 없는 열차 바깥이다. 
그런데 소설 [로드]의 '작은 영웅' 아빠의 목적지 '남쪽'은 무엇이었을까.

"소멸해가는 마지막 기독교군대([로드])"처럼 손바닥에서 사라지는 잿빛 눈송이를 보며 본인들의 존재도 소리소문 없이 소멸할 것을 알면서도 [로드]의 '남자'는 어린 '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스스로를 '남쪽'으로 "불을 옮기는 좋은 사람들([로드])"이라 부른다. '남자' 본인을 진정 그렇게 믿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언제 어디서든 우리들 '희망'의 상징인 어린 '아이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소설속 '남자'의 본심은 '아들'의 엄마이자 부인이었던 꿈속 '여자'를 따라 죽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아들'의 존재로 인해 그의 삶은 진부하지만, '절망'에서 '희망'으로 표현되는 역설법이자 반어법 자체가 된다. 이래서 '인생'이란 게 말로 참 표현하기 어렵게 된다.

소설의 끝은 자식을 둔 부모 입장에서 살짝 슬프다.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개그'를 날리며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을 수 있는 일상이 참으로 감사할 정도로. 이 또한 진부하지만. 멸종의 순간에도, 이제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거란 예감에도 '어린이'나 '청년'은 여전히 '희망'일 수 밖에 없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마저 없으면 인생은 그냥 '절망'이나 '죽음', "마지막 기독교군대"와 같은 비극적 '소멸'에 바로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생'이란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종의 '개그'다.


***

- [로드(The Road)](2006), 코맥 매카시,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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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의 힘 - 시파워와 랜드파워의 세계사
김동기 지음 / 아카넷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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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이익'을 위한 '지정학'의 힘
- [지정학의 힘], 김동기, <아카넷>, 2020.



"지정학(geopolitics) : 지리, 경제, 그리고 인구 같은 요인이 정치, 특히 국가의 외교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것."
- 웹스터 사전상 정의.


중국 후한 말기 [삼국지] 유비가 삼고초려한 '융중대'에서 제갈량이 내놓은 전략은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였다. 군웅이 할거하나 결국 유비, 조조, 손권의 세 실력자들이 삼발이처럼 세력균형을 이루는 상태. 이 정족지세를 통해 세력을 안정시킨 후 천하통일을 이룬다는 국제외교전략의 고전적 형태다.

'세계정부'나 '천하통일'은 '공상'이지만, 다극화 시대에서 생존과 존재의 조건인 '세력균형'의 '지정학'은 '현실'이다. 국제관계 연구자 김동기 선생의 [지정학의 힘](<아카넷>,2020)은 이 오래된 '국제 외교'의 세계사를 풀어낸 책이다. 책의 부제는 '시파워와 랜드파워의 세계사'다.


"1890년에 (앨프레드) 마한의 첫번째 책이 출간된 것은 아주 절묘했다. 미국의 내부 프런티어가 사라지고 해외를 향한 새로운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시점에서 마한이 '새로운 전략'을 제공한 것이다."
- [지정학의 힘], <1. 마한 : 시파워>


미해군 대령 앨프레드 마한에게 영국 왕립대학이 명예학위를 수여한 것은 19세기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제국주의 근원을 '지정학'적 전략으로 분석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미국의 해외 진출에서 '새로운 전략'이 된 이론이 마한의 '시파워(sea-power)'다. 바다를 장악한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내용이다. 15세기 콜롬버스로 대변되는 강대국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대서양 제해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주요한 지정학적 개념이 '시파워'다. 현재는 일본과 미국의 '지정학'적 특징이다.


"영국의 '시파워'와 러시아의 '랜드파워'가 국제무대의 중심을 차지... 그런데 (핼퍼드) 매킨더는 당시 대륙에 장거리 철도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기동력의 주역이 육상교통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 [지정학의 힘], <2. 매킨더 : 랜드파워>


19세기 영국의 지리학자 핼퍼드 매킨더는 마한의 '시파워' 개념에 대비되는 '랜드파워(land-power)'를 더 중시한다. 결국 세계를 지배하는 국가는 '하트랜드(heart-land:중심지)'를 차지하는 나라가 될 것인데, '하트랜드'는 아시아 중심지역이며 19세기말 ~ 20세기초 철도로 대표되는 육상교통의 발달로 '하트랜드'를 차지하고 통제하는 '랜드파워'가 지정학의 중심 개념이 된다. '랜드파워'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려 하자 '시파워' 일본이 1905년 '러일전쟁'을 개시했다.


"(칼) 하우스호퍼에게 '지정학'은 예술이고 정교하게 운용되어야 했다... 하우스호퍼는 지리를 친구로 삼아야지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 그가 보기에 로마제국은 지리를 우군으로 만들었지만 나폴레옹은 적으로 만들었다. 히틀러 역시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지리를 적으로 만들어버렸다. 독일은 악몽 같은 양면전쟁에 말려들었다. 처음에는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1941~1942년 겨울을 지나면서 역시나 지리는 가장 매서운 적이 됐다. 나폴레옹이 125년 전에 이미 겪었듯이 말이다."
- [지정학의 힘], <3. 하우스호퍼 : 레벤스라움>


저자 김동기는 세계를 분할하고 움직인 건 '이념' 같은 게 아니라 '지정학'이었다고 하는데, '지정학'은 단순한 '지리'적 요건에 그치는 것이 아닌 국제관계 전략이다. '지정학(Geopolitik)'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스웨덴 보수정치가 요한 셸렌이 처음 사용했는데, 이는 생물학적 사회진화론을 주장한 독일 라첼의 '국가론'을 모체로 한다. 개인이 아닌 전체로서 '국가'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생활공간을 차지하면서 자란다는 식인데, '레벤스라움(lebensraum)'은 국가의 '생활권'으로 하나의 권리처럼 그 확보 또는 확장까지 보장되어야 한다. 히틀러의 스승 칼 하우스호퍼에게 이 '지정학'은 정교한 '과학'이자 화려한 '예술'이었으나, 나치의 두령 히틀러에게는 '지정학'이 인종주의적 '신화'가 되었고, 결국 2차 대전의 대재앙을 초래했다. 독일과 파시즘의 패전 후 한동안 '지정학'은 악마화되어 지옥의 명부에 갇힌다. 저자가 보기에 두차례 세계대전은 '하트랜드' 차지를 위한 유럽과 아시아의 '랜드파워'를 중심으로, 영미일 등 '시파워'가 결합한 일대 격전이었다.


"(니콜라스) 스파이크먼은 미국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은 하나의 강대국이 유라시아 '림랜드(가장자리)' 지역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래서 '림랜드'를 지배하는 자가 유라시아를 지배하고,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라고 역설했다."
- [지정학의 힘], <4. 스파이크먼 : 림랜드>


'시파워'와 '랜드파워'의 세계사 주류인 마한-매킨더에 이어 미국의 지정학자 니콜라스 스파이크먼을 거쳐야 이후 중국의 '죽의 장막'을 걷은 미국의 헨리 키신저는 물론 러시아, 중국, 일본의 지정학을 이해할 수 있다. 2차 대전기 미국 국제관계학자 스파이크먼은 진주만 습격으로 한창 적국으로서 미국과 전쟁을 벌이던 일본을 두고 전후에는 관계를 회복해야 미국의 패권을 강화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여 당장의 빈축을 사기도 하는데, 결국 그의 '지정학적 리얼리즘'은 정확한 예측이 되어 현재까지 작동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미일 안보조약'의 뿌리이기도 하다. 일본 천왕 군국주의의 '접신' 지정학은 소련이 한반도로 진격한 후에 미국에 항복하는데, 소련과 미국에 의한 '한반도 분할'은 일본이 패전으로 '무사히' 빠져나가는 중요한 복선이었다. 한편 2차대전 종전과 함께 무덤으로 갔던 '지정학'을 1970년대에 냉전을 해빙(데탕트)시키면서 다시 부활시킨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는 이념보다 이 '지정학적 리얼리즘'을 구현했다. 
이제 소련의 해체로 인해 '이념'적 구냉전은 막을 내린지 오래고, 무조건 '국익' 우선의 신냉전이 한창 진행 중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림랜드' 지위를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통합과 적대관계 해소가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한반도 전체가 하나의 '림랜드'가 되어 강대한 '랜드파워', '시파워'와 더 독립적이고 균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랜드파워'와 '시파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세력균형'이 한반도에게 가장 바람직하다... 남북한이 한반도 생존을 위해 대외적으로 공통된 전략적 목표를 공유하는 것이다. 즉 외부의 잠재적 위협에 공동대응하는 것이다."
- [지정학의 힘], <11. 한반도 : 지정학의 덫>


스파이크먼의 주요개념 '림랜드(rim-land:가장자리땅)'는 '하트랜드' 아시아 중심에서 다른 지역으로 뻗어나가는 해안가 또는 '중간지대' 가장자리 지역으로서 '유라시아 제국'을 꿈꾸는 '랜드파워' 러시아가 계속 진출하고자 했고 영미일 등의 '시파워'가 끊임없이 숟가락을 얹으려 했던 우크라이나, 터키, 중국, 동남아, 한반도 등지를 이른다. 전통의 강대국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 '림랜드'를 지배 또는 통제하고자 한다. 매킨더-스파이크먼의 지정학적 전통을 잇는 이 이론에 따라 미국의 아시아 지배전략이 결정되고 중국의 '일대일로' 부상이 예견된다. 
우리 사는 한반도의 운명도 이 '림랜드'의 운명이다. 

'림랜드'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시파워'와 '랜드파워'가 공존하고 교차하는 지점이다. 한반도 국가는 미중러 같은 '강대국' 대열에 낄 수 없는 '지정학'적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국의 이익을 이용할 수 있는 '강소국'의 가능성은 있다. 그리하여 '천하삼분지계' 같은 국제 정치경제학으로서 '지정학'의 배경은 잘 알아야겠다만, 국제관계의 부침 속에서도 꿋꿋하고 주체적인 '강소국'이 되기 위한 내적조건이 우선 갖춰져야 한다. 그래야 '지정학'이 비로소 우리에게 '힘'이 된다.

국내 구성원들의 불평등이 완화된 강한 복지국가와 남북 군축을 통한 평화번영이 한반도 강소국의 조건이다.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민주주의연방공화국'으로 통일되면 더욱 좋겠지만 갈 길은 멀고 지난하니, 우선 남북간 '평화군축'과 '민간교류'의 실천부터 당장 시작할 일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국익'이자 한반도의 '이익'이다.


"지정학은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현실적 국익이었다. 우리가 지정학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 [지정학의 힘], <후기>, 김동기, 2020.


***

- [지정학의 힘], 김동기, <아카넷>,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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