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기는 사마의 더봄 평전 시리즈 1
친타오 지음, 박소정 옮김 / 더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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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시순변(乘時順變)의 승자, 사마의(司馬懿)
- [결국 이기는, 사마의](2017), 친타오, 박소정 옮김, <더봄>, 2018.



"... 사마의의 인생은 수렴하는 방식이다. 사마의는 70 평생을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자기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의 경험과 교훈을 차곡차곡 모았다. 눈덩이를 굴리듯이 시간이 지날 수록 그 경험과 교훈이 쌓이게 된 것이다."
- [결국 이기는, 사마의], <서장>, 친타오.


2021년 4월,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는 5년 전 '촛불항쟁'으로 역사의 쓰레기통에나 처박힐 수구반동세력의 부활로 끝났다. '선거'나 투표' 같은 '대리주의' 정치는 부차적이다. 역사는 오만한 권력자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난 다수 민중의 대중반란이 주요 동력이니 민주당이든 수구정당이든 거대 양당 기득권동맹은 서로 자리 바꾸기나 반복하다가 결국 대중반란으로 질적 쇄신을 겪는다. 지금의 '민주정부'가 30년전 '문민정부'보다 조금이라도 낫다면, 그건 민중반란의 힘이다.
이제 우리 앞에는 '양당정치' 따위가 아니라, '20대 개새끼론'을 극복하는 '세대' 간 연대의 문제가 놓여 있다.


기원후 180년대 중국 후한(後漢) 말기를 깨우친 사건은 다수 민중이 일어난 '황건농민반란'이었다. 이후 위-촉-오 삼국 정립을 거쳐 사마염이 전국을 통일하고 진(晉)나라를 세우기까지 100년의 시간이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의 '삼국지'다. '삼국지'의 승자는 조조도, 유비도, 가장 오래 산 손권도 아니었다. 최후의 승자는 동오의 손권보다 한 해 먼저 죽은 73세의 노인이었다. 바로 '서진'을 창립한 사마(司馬)씨 가문의 사마의(司馬懿:179~251)였는데, 그가 진무제 사마염의 할아버지다.


"[진서]를 보면 사마의 형제가 '한나라 말기의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도 글공부를 쉬지 않았다'고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의 성공비결이다... '오경' 중에서 사마의가 즐겨 읽은 책은 추측해 보자면 [역경]과 [춘추]를 꼽을 수 있겠다. [역경]에는 천지의 지혜가 포함되어 있어 우주 균형의 원리를 파악할 수 있다. [춘추]는 정치와 군사교재에 가깝다... 사마의는 '현명한 사람이면 기회가 무르익지 않았을 때 경솔하게 움직이거나, 기회가 눈앞에 왔을 때 가만히 앉아 때를 놓치면 안된다'고 조조에게 간언했는데, 이는 바로 [역경]의 원리를 활용한 것이다. [역경]에 나오는 '승시순변(乘時順變)'의 사유방식은 사마의가 기회를 잡아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며 사마의의 일생에 영향을 주었다."
- [결국 이기는, 사마의], <1장. 잠룡물용>, 친타오.


유한한 능력의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 100년 쟁투를 끝낸 승자인 사마의는 지략이나 군사력 등의 재능과 정치력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었으나 겸손했고 인내심은 갑이었며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상심'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신을 끈질기게 기용한 주군이었던 조조를 한없이 우려르며 존경했지만 위나라 조씨 3대를 지나 결국 그 가문을 멸족시켰으며, '한나라 부흥'의 이데올로기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진지하기 그지 없는 촉한의 제갈량과 대치만 하면서도 거꾸러뜨렸다. 삼국지 최고의 지략가 제갈량이라는 외부의 강적이 사라진 후 '무적'의 사마의에게는 내부 정치투쟁을 통한 '혁명' 또는 '쿠데타'의 길 밖에 없었다.
사마의 최대 라이벌 '죽은 (제갈)공명'은 여전히 '산 (사마)중달'에게 '평상심'을 단련케 했다.
역시, '최고의 책사'로서 사마의 최강의 덕목은 '중국 최고의 책사' 장량(장자방)처럼 '참을성'과 '인내심', 그리고 '평상심'이다.


중국의 법사학자 친타오는 2017년 '권모술수'와 '후흑학'의 대가로까지 평가되는 사마의 평전의 '완결판'을 냈다. 이 책 한 권이면 사마의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광고가 기억나지만, 기존 '처세'에 치우친 듯 한 사마의 이야기가 아닌 소설 형식으로 지어진 '사마의 평전'이다. 사마의 최고의 적수 제갈량 뿐만 아니라 주군 조조 마저도 이 '평전'의 조연이다. 
목차는 [주역]의 제1괘 '중천건(重天乾)' 괘의 각 효에 관한 설명을 대부분 빗대어 구성된다. '중천건' 괘는 "건(乾)'은 크고(元) 형통하고(亨) 이롭고(利) 바르니라(貞)"는 대전제로 아래로부터 위까지 6개의 각 효(-)를 '잠룡물용(潛龍勿用)', 현룡재전(見龍在田)', 종일건건(終日乾乾)', 혹약재연(或躍在淵)', 비룡재천(飛龍在天), '항룡유회(亢龍有悔)'의 단계로 설명한다. 물 아래 용은 쓰임이 없으나 땅위로 나타난 용이 씩씩해지면서 연못을 찾아 도약하면 언젠가 하늘을 나는 전성기를 구가한다. 물론 [주역]은 '변화의 경전'이므로 '종일건건'과 '비룡재천'만 할 수 없다. 결국 양효(-)가 음효(--)로 전환하는 맹아로서 '항룡유회' 즉 전성기를 거친 용이 아쉬움을 꼭 남긴다. 이로써 '중천건' 괘는 '음효(--)'로 이루진 '중지곤' 괘로 넘어간다.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가 기틀을 다져 고조(선제)로 추존되는 통일정권 진나라는 건국하자마자 10여 년 후 '팔왕의 난'으로 쇠락하며 중국 역사 최초의 다양한 문명 충돌의 시기인 '5호16국' 시대를 연다.

'최후의 승자'였으나 한 인간에 불과했던 사마의 또한 완벽할 수 없다. 그는 먼저 조조에게 출사한 일곱살 위 큰형 사마랑보다 주목받지 못했고, 출사를 명하는 조조를 피해 7년 동안이나 꾀병으로 두문불출하다가 조조가 대세를 확정하고 '패업'을 달성할 기미가 보이자 그의 휘하로 들어가 조조가 죽을 때까지 두려워하고 경외했다. 제갈량의 북벌에도 적극 맞서지 못한 채 머리싸움만 하다가 결국 과로로 쓰러진 '죽은 (제갈)공명'에게 쫓겨간 '산 (사마)중달'이 되었다. 
사마의는 분명, '삼국지' 1세대는 아니었다. 조조의 군막 아래서도 최고의 책사이자 명문세가 출신인 순욱과 감히 경쟁할 수도 없었고, 순욱, 순유, 정욱, 곽가 등의 '1세대 참모진'이 조조와 함께 사라진 후 조조의 아들 조비 정권에서 '2세대 참모'로서 두각을 드러낸다. 그 동안은 정권에 적극적인 계책을 내놓지도 않았고, 설령 내놓더라도 관철을 위한 투쟁보다는 관망했다. 계책이 받아들여지면 사마의 덕이었지만 채택되지 않더라도 그의 책임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책의 실패 후에도 '선견지명'의 평판은 남았으니 이것이 바로 권력투쟁에서 사마의가 주로 사용한 '권모술수'였다고 평가된다.

사마의가 37세였던 215년, '계륵'의 고사를 남기고 조조가 한중에서 퇴각할 때만 해도 사마의는 "기회가 눈 앞에 왔을 때 가만히 앉아 때를 놓치면 안된다"며 촉한으로 치고 들어가자는 혈기왕성함이 있었다. 그러나 66세가 된 244년 위나라 조정 내 최대 정적이던 조상이 촉한을 정벌하러 갈 때는 그때가 촉한정벌의 적기임을 알고도 정적 조상이 성공할까 두려워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방해공작을 펼쳤다. 늙은 책사 사마의에게는 이미 국가보다는 자신과 가문의 보위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사마의는 생전에는 '비룡재천(飛龍在天)'하고, 사후에는 '항룡유회(亢龍有悔)'했다... 사마의만 놓고 보았을 때는... 지략이 뛰어나고 군사를 다루는데 능했고, 은인과 도광양회가 특기였다... 그와 대치하고 음으로 양으로 맞대결을 펼친 적수들로는 조조, 제갈량, 조상, 맹달, 공손연, 왕릉 등이 있었다. 하나 같이 당대의 준걸이었지만, 사마의는 이들 중 누구한테도 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마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가 자신만 구하고 시대를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마의가 한 일이라고는 이제나저제나 자기 몸 하나 보존하는 것이 전부였다... 사마의 본인도 어느 정도 '유학'적 소양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사용한 계책과 입신의 도리는 사실 권모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유가'적 소양은 그에게는 겉치레에 불과했다."
- [결국 이기는, 사마의], <7장. 항룡유회>, 친타오.



그렇게 아들과 손자로 하여금 새로운 국가 창업을 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다진 사마의의 본질은 명색이 '삼국지 2세대'로서의 모습이었다. 
179년생 사마의는 태어나기 전부터 후한 말기의 난세가 배경이었다. 바른 정치를 건의하던 '청류'가 환관내시와 외척의 '탁류'로부터 탄압을 받은 '당고지화(黨錮之禍)로 정치는 부패했다. 살기 위해서는 직언을 하면 안되었다. 지식인들은 속세가 싫으면 떠나야 했고 다수 민중은 무기를 들고 일어나야 했다. 사마의가 여섯살 때 황건농민반란이 일어났고 열한살에는 동탁에 반대한 '17로 제후연합군'의 전쟁이 있었으며 피난 중의 군막에서 어린 사마의는 앞으로 살 궁리를 하며 [역경]과 [춘추], 각종 병법서를 섭렵했다. 사마의도 공맹의 유학(儒學)을 공부하며 자기 단련과 수양을 한 선비였겠으나 이미 시대는, 난세를 살아내는 '생존법칙'을 자연스레 터득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사마의 스승이자 은자였던 호소(호공명)처럼 산속에 숨을 것이 아니라면, 속세에서 "살기로 했으면 계속 살아남아야 했고, 사회에 뛰어들기로 했으면 이름을 남겨야 했다. 이것이 바로 난세를 살아가는 '생존법칙'이었다(같은책, <1장>)."
사마의는 깡패영화에 나오던 대사, "강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자"라는 말을 태어나자마자 체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지금의 '세대'간 연대를 생각한다.
'적폐'를 청산할 의지도, 능력도 없던 민주당이 다수 민중반란인 '촛불항쟁' 덕에 어부지리로 집권했고 일부 민주주의자들의 개인기로 인기영합은 가능했을지 모르나 부동산 투기세력의 본질을 드러내며 수구반동들에게 부활의 기회를 제공했다. 거대양당 기득권동맹체제에서 집권 민주당에 실망한 20세 청년들이 수구반동을 선택한 것을 두고 '20대 개새끼론' 따위의 막말을 쏟아내는 우리 세대 '빠돌이'들을 돌아본다. 지금의 20대는 "정치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결국 선언하고 말았던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태어나서 이명박근혜 시절에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 당시 부모나 삼촌, 이모였던 우리 세대는 무슨 가치로 살았던가. 나 하나 살아남기 위해 남들을 더 철저하게 밟고 제껴야 했다.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기'를 해서라도 부를 축적하고 더 잘 살아남아야 했다. 그렇게 축적한 부에 만족하지 못하고 부동산 값을 있지도 않는 '시장 논리'라는 미명으로 천정부지로 치솓게 만들었다. 꿈이 '건물주'라는 지금 20대 후세들을 욕할 자격은 애초에 우리에게 없었다. 그래놓고 똑같은 부동산투기 귀재들인 거대양당 정치권력자들의 핑퐁놀이에 환호했으며 그 자들이 먹고 남은 떡고물을 주워먹기에 혈안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지금 세상은 누가 말했듯, '세습중산층' 사회며 이 따위 사회를 만든 것은 불우한 지금 20대들의 부모와 삼촌, 이모인 우리들 자신이다.

'결국 이기는' 사마의는 그가 젊은 시절 내내 경외했던 조조에 비하면 역사의 '실패자'다. 조조는 아들 조비와 조예를 잘 키워 3대까지 무난한 왕조를 이어간 반면, 사마의는 사마사, 사마소 아들형제는 잘 키웠으나 손자 사마염대에 이르러 창업과 동시에 멸망의 나락을 걷는다. 
평생 '한왕조 부흥'의 대업을 쫓았으나 결국 이루지 못한 제갈량은 후세에 '최고의 책사'가 된 반면, 사마의는 '권모술수'와 '후흑학'의 대가로 남았다. 
이렇게 '삼국지 2세대' 대표주자였던 사마의는 '공공성'이든 '국가'든 '민중'이든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생래적 특징이 본질이었다. 어찌보면 "살기로 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살아남아야 했던" 사마의는 지금 우리의 20대와 닮아있다. 


[주역]에서 말하는 '승시순변(乘時順變)'이, 
적어도 사마의 세대에게는 '권모술수'였던 것처럼.


***

1. [결국 이기는, 사마의](2017), 친타오, 박소정 옮김, <더봄>, 2018.
2. [자기통제의 승부사, 사마의](2011),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3.
3. [주역(周易)](3세기), 왕필 주해, 임채우 옮김, <길>, 1998~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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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백승종 지음 / 사우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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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中庸)]의 '빛과 그림자'
-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백승종, <사우>, 2019.



"[중용]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었다. 이 책은 시초부터 '이념투쟁의 도구'로 설계되었다... 유교는 초기 단계부터 사상적 적수를 만났다. 최초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설파하는 도가(道家)와 충돌했다. 곧이어 농가(農家)와도 격렬하게 부딪혔다. 그들은 스스로 재배하고 제작한 도구만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극단적인 자급자족주의자들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겸애설(兼愛說)'을 펴며 유교의 차등적 예법을 공격하는 묵가(墨家)와의 대결도 수월한 싸움이 아니었다. 그런데다 엄격한 형벌로 사회 기강을 세우려 한 법가(法家)와도 일전을 벌였다. 나중에는 불교와의 사상적 대결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에필로그 - 21세기 중용의 새로운 해석을 위하여>, 백승종, 2019.


중국 남송의 주희는 유교의 경전을 철학적으로 집대성한 '성리학(性理學)'의 대표학자로서 '공자'나 '맹자'처럼 '주자'로도 불린다. 주희의 선학들인 북송시대 주돈이, 정호/정이 형제('정자')로부터 정립되기 시작한 '성리학'은 유교 경전을 '4서 3경'으로 정리했는데, '4서'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이고, '3경'은 [시경], [서경], [역경(주역)]이다. 율곡 이이는 '4서' 중 [대학]을 제일 먼저 읽고 그 다음으로 [논어]와 [맹자]를, 가장 마지막으로 [중용]을 읽으라고 했단다. 기원전 1세기 중국 한나라 때부터 전해졌다는 [예기]에 포함되었던 [대학]과 [중용]이 '4서' 공부의 처음과 끝이 되는데, [대학]은 현실 정치에서 '지도자' 또는 '군자'로서의 소양을 '3강령 8조목'으로 정리한 제일 앞선 '큰 학문'인 한편, [중용]은 우주와 자연의 '본성'에 관한 방대한 철학사상으로 가장 추상적이고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용]은 '이념투쟁의 도구'가 될 만큼 고도로 추상화된 형이상학적인 철학경전이 되었다.


역사학자 백승종 선생은 [중용]을 주제로 조선시대 사상계의 흐름을 엮어서 소개한다. 제목은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2019)이다. [중용]은 한 국가를 '바꿀' 정도로 어렵고 난해한 책인 것이다.

조선은 고려말 신진 사대부들이 당시 부패한 지배이념으로서 불교를 반박하는 '진보이념'으로 '성리학'을 앞세우면서 개창한 국가였다. 
'유학'은 공자와 맹자 등의 춘추전국시대는 철학, 종교, 도덕, 예법 등을 아우른 사상이었는데 주희의 '성리학'에 이르면 불교나 도교 등과 지배이념의 자리를 다투는 '종교'적 지위로서 '유교(儒敎)'가 된다.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국가의 운영사상이 된 '유학'은 1천 년 동안 진화발전하고 고도로 추상화되면서 송(宋) 대에 이르러 '유교'로서 '성리학'의 모습을 갖춘다. 우리의 고대 삼국시대에도 '유학'은 성행했으나 '성리학'이 도입된 때는 고려말이었고 당시 한반도에 들어온 '성리학'은 유학의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한 '진보이념'이었다. 정도전을 위시한 급진적 신진 사대부는 '4서3경'을 완벽히 체득하고 진보적' 성리학으로 무장한 '선비'들이 지도하는 유교적 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실제로 정도전의 목을 베고 '왕자의 난'을 통해 집권한 후 절대왕권을 확립하고자 했던 태종 이방원도 [중용]의 중요성을 강조한 '선비 왕'이었다. 세종이 학문을 육성한 '학자 왕'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계유정난'의 세조가 [중용]을 매우 중시한 왕이었다는 지점에 이르면 대략 짐작이 된다. 피묻은 왕좌에 오른 자였다 하더라도 조선은 전세계 유례 없이 '성리학'을 공부한 왕을 세우고자 했고,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왕일 수록 [중용]을 강조했으며, 이는 [중용]이 그만큼 '유교'에서는 최상의 경지를 은유한다는 것을 말이다. 성종 대에 이르면 유교는 지배집단 내에서 [중용]을 집단학습하면서 도교와 불교를 조정에서 몰아냈다. 이후 격렬한 유학자들의 '당쟁'과 '사화', '환국'을 거치며 조선의 '성리학'은 수구보수, 반동의 아이콘이 되었다. 역사 속 지배이데올로기의 필연적 현상이다. 영조와 정조에 이르면 아예 왕 스스로가 최고의 '선비'나 '학자', '군자'나 '스승'을 자처하며 선비들과 사대부를 가르치려 들었고, 그로 인해 '개혁군주'라 평가되는 정조는 수구 성리학 이념에 미쳐 문체반정으로 다양한 사상의 활로를 막기도 했다. 그런 자가 썩은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던 18세기 후반에 프랑스에서는 '왕'을 처형했음은 물론 '왕정' 자체도 폐기해 버렸다. 다수 민중의 힘으로 처단하지 못한 '왕의 나라' 조선은 또 다시 '세도정치'라는 소수 기득권 동맹의 수중에 장악되었다. 이 또한 역사의 필연이다. 프랑스는 '태양왕' 루이14세부터, 청나라는 건륭대제부터, 조선은 '개혁군주' 정조대왕부터 이미 망조가 들었던 것인데, '왕조'가 다수 민중의 힘으로 무너진다는 역사의 흐름에 역행한 그들만의 '르네상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 무망한 시도들은 잘 해봐야 결국 망한다.


"중(中)이란 '치우치지 않음'이다. 용(庸)이란 '언제나 일정한 것'이다. '치우치지 않은'은 동정(動靜)을 겸한 것이요, '일정함'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한 것이다... 이른바 '중용'이란 정밀하고 은미한 '천명(天命)'의 본체다. 이 때문에 책의 이름으로 삼았다."
- 백호 윤휴, <중용장구보록>, 백승종, [같은책] '4장' 재인용.


공자의 수제자인 증자로부터 배운 공자의 손자 공급의 자는 '자사(子思)'인데, 애초 [예기]에 수록된 [중용]을 지은이가 바로 '자사학파'라고 한다. [중용]은 2천4백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기록인데, 주희가 [중용장구집주]라는 방대한 주석과 편집을 통해 '4서' 중 하나로 선포했단다. 물론 이전부터 [중용]이 주요 유교경전 텍스트로 인정된 사례도 많다지만, '성리학 이념국가' 조선의 17세기에 이르면 '주자'의 해석에 이의를 다는 선비는 '이단', 즉 '사문난적(斯文亂賊)'이 되었다. 역시 [중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16세기에 도학정치를 지향했던 정암 조광조의 뜻이 꺾인 후, 사림들은 각지에 숨어 학문에 몰두했고 [중용]에 관한 새로운 해석도 시도했지만, 왜란과 호란 이후 체제 위기에 처한 17세기 조선의 지배집단은 오히려 '주자학'을 강화했고 '마녀사냥'을 일삼았다. 조선의 '주자'인 '송자'를 자임했던 송시열은 그토록 칭찬해 마지않던 백호 윤휴가 주희의 [중용장구집주]와 다르게 [중용]을 공부하고 해석하자 10살 연하인 윤휴가 사약을 마시게 만들었고, 그 외 [중용]에 관한 다양한 해석자들을 정적으로 만들었다. '송자' 송시열은 [중용]의 다른 해석을 관용했던 명재 윤증과 척을 지고 집권세력인 서인당파를 '노론'과 '소론'으로 나눴다. 늙은 송시열을 따른 자들은 '노(老)'론, 젊은 윤증을 따른 자들은 '소(少)'론이 되었다. 노/소론 분파의 계기 또한 [중용]이었는데, '어느 한 곳에 치우침 없이(중:中), 항상 일정함(용:庸)'의 가르침과 달리 수구지배세력은 '주자'의 뒤에 숨어 기득권 유지를 위해 [중용]을 해석했다.


"사람다운 사람인 인격자(군자)는 중용을 지키고 실천한다... 
지성인의 중용 실천은 교육받은 사람답게 '때와 장소, 처지와 상황에 따라 알맞게' 한다.

군자중용(君子中庸)... 
군자지중용야(君子之中庸也), 군자이시중(君子而時中)"

- [중용(中庸)], <2장>


한국철학교수 신창호 선생이 편역한 [사서 - 이치를 담은 네 권의 책](2018)은 [대학], [논어], [맹자], [중용] 등 '4서(四書)'의 원문과 번역문을 담고 있다. 
'천명'이 만물의 '본성(性)'이고, 이 '본성'을 따르는 것이 '도(道)'이며, 그 '도'를 지키는 것이 '문화'적 가르침(1장)이라는 전제로부터 시작하여, 희로애락 이전 순수한 '천하의 큰 근본'인 '중(中)'과 인간세상에서 '도에 다다른' 상태인 '화(和)'로서 '중화(中和)'의 경지에 이른 상태에서(1장), '배우고(學), 묻고(問), 생각하고(思), 따지고(辨), 독실하게 실천(篤行)하는 삶(20장)을 지향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혼자 있을 때도 삼가는(戒懼愼獨)'군자'의 길은 '그 작용이 밝아서 쓰임이 넓고 그 본체는 은미하게 숨겨져 잘 드러나지 않지만(費而隱)(12장), 공부와 수양을 통해 '지/인/용(智仁勇)을 기르면(20장), '자연스러움과 명백함('誠明)'이 하나가 된다(21장). 

내가 보기에 위와 같은 '중용'의 길에 가장 중요한 결론은 '시중(時中)'인데, '군자의 중용'은 '때와 장소, 처지와 상황'에 따른 '알맞음'이다. 공자시대는 물론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이 '우주의 본성'과 '시중'을 신분제로 해석하고 확정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 시대의 '중용'이었다. 
그러나 신분제가 철폐된 현대의 '중용'은 만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본성'을 지키는 것 아닐까 한다.

이 자체에 [중용]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데, 그렇게 "중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의지하지 않으며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는 것이고, 용은 변하지 않는 일상생활"(신창호, 같은책, <4권-중용>)의 의미로서 '중용'은 조선을 너머 현대에 각인된다.


***

1.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백승종, <사우>, 2019.
2. [사서(四書) - 이치를 담은 네 권의 책(대학/논어/맹자/중용)], 신창호 편역, <나무발전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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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 이산의 책 46
사타케 야스히코 지음, 권인용 옮김 / 이산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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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 안에서 천리 밖 세상의 이치를 보다
- [제왕의 스승, 장량](2008), 위리, 김영문 옮김, <더봄>, 2021.



"한 고조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와 항우가 패망한 이유를 살펴보면 참을성이 있느냐, 참을성이 없느냐의 사이일 뿐이다. 항우는 참을성이 없었기에 백전백승하면서도 그 예봉을 경솔하게 사용했다. 한 고조는 참을성이 있었기에 자신의 온전한 예봉을 기르며 항우가 피폐하기를 기다렸는데, 이는 장량이 가르친 것이다. 회음후 한신이 제나라를 격파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하자 고조가 분노하여 말과 표정에 그 기색이 드러났다. 이런 점에서도 고조에게는 아직 참을성이 없고 강하게만 대처하려던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량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한 고조를 온전히 보호할 수 있었겠는가?"
- 소식, <유후론(留侯論)>, 김영문 옮김, [제왕의 스승, 장량] 부록.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가 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후, 대가 끊긴 나머지 6국은 진시황제를 몹시도 증오했다. 불멸을 쫓던 시황제는 끊임없이 암살의 위협을 받았다. 형가와 고점리 등의 자객들의 암살시도는 실패했으나 망국의 신하들은 복수를 다짐했다. 한(韓)나라 재상 집안 출신 공자였던 장량(張良)은 동쪽을 순행 중이던 시황제를 박랑사라는 곳에서 테러하려다가 실패하고 하비로 숨어드는데 용케도 잡히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전국은 오랜 기간 대수색령이 내려진다. 훗날 한 고조 유방의 제일 참모로서 한(漢)나라 건국 '삼걸' 중 하나로 거론되는 장량이 단순한 복수의 테러리즘을 넘어 개국(開國)의 정치강령으로 무장한 시기가 바로 이 하비에 숨어살던 수배시절이다.
"장량이 있었기에 유방은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고 평가한 북송시대 시인 소식은 <유후론>에서 장량(유후)이 수배시절에 만난 '황석노인'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은 [태공병법]만이 아니라 '참을성'이었으며, 이로 인해 동네건달이었던 한 고조 유방(劉邦)을 위대한 개국황제로 만들었다고 평한다.
흔한 말로, 유방이 장량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이용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훗날 조선의 삼봉 정도전도 술에 취해 태조 이성계가 본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태조를 이용해 조선을 건국했다고 말했듯이. 
이렇게 각 시기 최고의 참모들은 '참을성'과 끈기있는 정치강령으로 당대의 '주먹들'을 '선택'했다.


장량의 자는 '자방(子房)'이다. 역대의 영웅들은 최고의 참모를 '나의 자방'이라 불렀단다. 조조가 순욱을, 주원장이 유기를 그리 불렀는데, '장자방' 장량은 역대 모사들의 대명사다. 유비의 참모 제갈량도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유했으나 천하통일 전쟁에서 늘 장자방을 롤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실로 '삼국연의'는 '초한지' 이야기가 비슷하게 반복되는 구전이 바탕인데, '삼국지' 이야기에서 '자방'은 단연 제갈량이다. 물론, 천하통일을 완수한 장량과 통일의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비장하게 생을 마감한 제갈량은 비교가 안될 수도 있겠다지만, 장량의 주군이었던 유방은 '용인술'의 대가로서 소하와 한신, 장량 등 '삼걸'을 두루 기용한 반면, 제갈량은 무능한 유비 밑에서 위 '삼걸'의 일을 혼자 다 감당해야 했다. 장량은 말년에 도인이나 신선과 같은 삶을 살았던 반면,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결국 과로로 쓰러졌을 것이다.
장량은 단연 중국역사상 최고의 참모로서, '모신(謀神)' 또는 '모성(謀聖)'으로 추앙받고 있다.


"방략을 품고 계획을 구상하여 신묘한 계산으로 장막 안에서 계책을 마련하고 천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면은 짐이 장자방보다 못하오. 백성을 위무하고 나라의 재산을 잘 관리하면서 물자를 제때 공급하여 군대를 구제하는 면은 짐이 소하보다 못하오.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싸우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이기는 작전과 지휘의 본령은 짐이 한신에 미칠 수 없소. 장량, 소하, 한신 세 사람은 모두 세상에 드문 기재(奇材)요. 짐은 비록 이들보다 못하지만 이들이 나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했소. 이 점이 바로 짐이 천하를 얻은 원인이오."
- [제왕의 스승, 장량], <6장. 국가>, 위리.


기원전 202년,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고 공신들에게 분봉을 하면서 본인이 '서초패왕'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들며 건국 '삼걸(三傑)'로 소하와 한신, 그리고 장량을 꼽는 대목이다. 수도에서 국가운영을 이어가며 전선에 군량과 병력을 지원한 영원한 승상 소하, 중원의 삼진과 제나라의 동북방을 평정하며 유방에게 지원병력을 쉼없이 제공한 대장군 한신은 말할 것 없고 군막 안에서 천리 밖 전장의 계책을 마련할 뿐 아니라 중요한 시기마다 기묘한 책략으로 유방을 구한 장량이 한나라 건국에 가장 기여한 3명의 인재라는 의미다.


중국 작가 위리(본명, 바오광리)가 쓴 [장량전]은 사마천 [사기(史記)]의 <고조본기>와 <항우본기>, 장량의 열전인 <유후세가>, 한신의 열전인 <회음후열전> 등의 '원문'들을 기초로 장량의 일생을 그린 일종의 '장량 평전'이다. [사기]나 [초한지]로만 볼 수 있던 '모신' 장량의 모습을 오롯이 읽을 수 있다. 국내에 없던 '장량전'을 올해 김영문 선생이 번역했는데, 중국고전 전문가인 역자의 번역은 믿고 읽을만 하다.

처음에는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해 진시황에게 복수만을 다짐했던 장량은 공자의 땅에서 '예학' 즉 유학을 배우기도 했고 우리 고조선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명사인 '창해군'의 문객이 되기도 했으며 수배시절 '황석노인'으로부터 [태공병법]을 전수받은 후 '도가'의 사상까지 흡수하며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는 점차로 통일국가 건설의 프로그램을 체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유현 땅에서 우연히 마주친 유방과 친교를 맺은 장량은 본인이 깊이 수련한 방책들을 유연하게 흡수하여 실현시키던 유방의 큰 그릇에 감복하여 결국 천하쟁패의 '초한전쟁'이라는 건곤일척의 전선을 긋고 기묘한 책략으로써 유방을 승자로 만든다.
관중땅에 처음 들어가 '약법삼장'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게 한 것도, 홍문연에서 유방을 구하고 관중으로 물러가 몰래 힘을 기르게 한 것도, 역이기의 '6국 봉건제'를 깨고 '중앙집권군주제'의 대세를 설파한 것도, 홍구의 협약을 깨고 항우의 뒤를 쫓아 끝장낸 것도 모두, 장량의 '장막 안에서 천리 밖'을 내다본 계책이었다. 장자방이 없었다면 한 고조 유방의 대업도 불가능했다.

장량은 과연, 시대를 앞서간 '모신(謀神)' 또는 '모성(謀聖)'이다.


"요컨대, 이 책의 목표는 역사의 다양한 시점에서 왜곡된 유방의 행적을 사료에 입각하여 재검토함으로써 역사의 실상에 접근하는 데 있다. 유방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서민황제였다. 서민이었을 때 황제인 양 행동한다면, 거기에는 비극이 기다리게 되고, 황제가 되었을 때 서민인 양 행동한다면, 거기에는 더 큰 비극이 기다리게 된다. 사회계층의 밑바닥으로부터 정점으로 치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유방은 자연스럽게 또 의식적으로 그 행동양식을 바꾸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역사서술은 그 과정에 있었던 모순을 지워 없애고 그것을 순조로운 이행과정으로 바꿔 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 [유방], <서장 - [사기]에 대하여>, 사타케 야스히코.


일본의 중국문학자 사타케 야스히코는 2005년에 한 고조 유방의 '평전'을 냈다. 이 역시 [사기]와 [초한지]의 주역으로서의 유방보다는 유방이라는 인물을 더욱 중심에 둔 책인데, 특이한 점은 [사기]의 <본기>와 <세가>, <열전> 등에서 각기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는 유방의 모습을 통해 더욱 입체적인 그만의 평전을 지은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장량은 유방 진영 최고의 참모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리 인상깊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유현 땅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면도 [장량전]에서는 장량의 입장에서 주요하게 묘사된 한편, [유방전]에는 한 페이지의 서술에 불과하다. 

사타케 야스히코는 [유방]의 <서문>에서 [사기]의 특징을 짚고 시작한다. 즉, 한나라 건국 후 역사가 육가가 [신어]를 지은 것처럼 패현의 서민건달 유방이 원래부터 기이한 풍모로 '천자'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니라, 조금씩 건국자로서의 모습을 갖추면서 변모해 가는 과정을 [사기] 특유의 씨줄과 날줄의 서술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고조본기>는 유방의 입장에서, <항우본기>는 항우를 중심으로, <회음후열전>에서는 억울하게 토사구팽 당한 대장군 한신의 관점에서 유방의 행적을 서술함으로써 인간 유방에 관한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평전'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한신의 군권을 회수하던 장면은 <고조본기>에서는 담담하게, <회음후열전>에서는 처음부터 의도적인 것으로 쓰고 있다. 초한전쟁 동안에도, 한나라를 개국한 후에도 끝끝내 한신을 두려워했던 유방 입장에서 정당하던 '군권 회수'가 한신의 입장에서 보면 강도짓에 다름 없는 것이다. 
사타케 야스히코의 입체적 유방 평전인 [유방]은 역동적인 '초한(楚漢)전쟁'의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韓)나라에서 재상을 지냈다. 한나라가 멸망함에 미쳐, 만금의 재물도 아끼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 강력한 진나라에 복수하려 했고, 이 일로 천하가 진동했다. 지금 세 치 혀로 '제왕의 스승'이 되었고, 만호후에 봉해졌고, 제후의 지위에 올랐으니 이는 포의(布衣)의 극한에 오른 것이다. 나 장량에게는 만족스러운 일이다. 바라건대, 인간사를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 싶을 따름이다."
- [사기], <유후세가> 원문, 사마천, 김영문 옮김.


'황석노인'은 전국시대의 유세가 소진과 장의를 가르친 '귀곡자'였을 수도 있고, 수배시절 '도가'와 융합한 장량의 대전환기에 관해 후세 사람들이 갖다붙인 가공인물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이 시기 [태공병법] 또는 [육도삼략] 등을 통해 유가와 도가 등을 융합한 장량은 이미 천하통일의 새 시대가 오면 속세를 떠나야 끝이 아름답다는 이치를 알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소하는 승상으로서 제 명대로 살았으나 황제가 되어 교만해진 한 고조 유방에 의해 감옥에 갇힌 적도 있고, '다다익선'의 대장군 한신의 숙청은 말할 것도 없다. 장량이 초한전쟁의 대전선을 긋고 유방 진영의 한편을 만들었던 구강왕 영포와 양왕 팽월도 반란의 혐의 또는 실제 반란으로 몰려 숙청 당하고 말았다. 번쾌와 조참 등은 천수를 누렸으나 함께 호의호식했던 진평은 일평생 '음모'와 속임수에 능한 '모사꾼'으로 남았다. 
한(漢)나라 공신 그 누구도 풍족한 제나라 3만호 봉읍을 거절하고 유방을 처음 만난 유현땅의 1만호에 만족하며 '적송자'를 따라 노닐다 속세를 떠난 장량에 비할 수는 없다.

이 장면이 바로, '모신(謀神)' 또는 '모성(謀聖)'으로 빛나는 장량이 역사 속에서 더욱 더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장량은 '장막 안에서 천리 밖 세상'의 이치를 일찍이 깨달았고, 그 장대한 책략에 따라 거침없이 자유롭게 살다간 잔잔하지만 큰 '바람'이었다.

위리의 장량 평전, [제왕의 스승, 장량]의 원제는 [장량전:풍신모사(張良傳:風神謀士)]이다.

***

1. [제왕의 스승, 장량(張良傳:風神謀士)](2008), 위리 지음, 김영문 옮김, <더봄>, 2021.
2. [유방(劉邦)](2005), 사타케 야스히코 지음, 권인용 옮김, <이산>, 2007.
3. [사기(史記)], 사마천 지음, 김원중 편역, <민음사>, 2007.
4. [원본 초한지(서한연의)], 견위 지음,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19.
5. [이문열 초한지], 이문열 지음, <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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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스승 장량 더봄 평전 시리즈 2
위리 지음, 김영문 옮김 / 더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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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 안에서 천리 밖 세상의 이치를 보다
- [제왕의 스승, 장량](2008), 위리, 김영문 옮김, <더봄>, 2021.



"한 고조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와 항우가 패망한 이유를 살펴보면 참을성이 있느냐, 참을성이 없느냐의 사이일 뿐이다. 항우는 참을성이 없었기에 백전백승하면서도 그 예봉을 경솔하게 사용했다. 한 고조는 참을성이 있었기에 자신의 온전한 예봉을 기르며 항우가 피폐하기를 기다렸는데, 이는 장량이 가르친 것이다. 회음후 한신이 제나라를 격파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하자 고조가 분노하여 말과 표정에 그 기색이 드러났다. 이런 점에서도 고조에게는 아직 참을성이 없고 강하게만 대처하려던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량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한 고조를 온전히 보호할 수 있었겠는가?"
- 소식, <유후론(留侯論)>, 김영문 옮김, [제왕의 스승, 장량] 부록.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가 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후, 대가 끊긴 나머지 6국은 진시황제를 몹시도 증오했다. 불멸을 쫓던 시황제는 끊임없이 암살의 위협을 받았다. 형가와 고점리 등의 자객들의 암살시도는 실패했으나 망국의 신하들은 복수를 다짐했다. 한(韓)나라 재상 집안 출신 공자였던 장량(張良)은 동쪽을 순행 중이던 시황제를 박랑사라는 곳에서 테러하려다가 실패하고 하비로 숨어드는데 용케도 잡히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전국은 오랜 기간 대수색령이 내려진다. 훗날 한 고조 유방의 제일 참모로서 한(漢)나라 건국 '삼걸' 중 하나로 거론되는 장량이 단순한 복수의 테러리즘을 넘어 개국(開國)의 정치강령으로 무장한 시기가 바로 이 하비에 숨어살던 수배시절이다.
"장량이 있었기에 유방은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고 평가한 북송시대 시인 소식은 <유후론>에서 장량(유후)이 수배시절에 만난 '황석노인'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은 [태공병법]만이 아니라 '참을성'이었으며, 이로 인해 동네건달이었던 한 고조 유방(劉邦)을 위대한 개국황제로 만들었다고 평한다.
흔한 말로, 유방이 장량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이용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훗날 조선의 삼봉 정도전도 술에 취해 태조 이성계가 본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태조를 이용해 조선을 건국했다고 말했듯이. 
이렇게 각 시기 최고의 참모들은 '참을성'과 끈기있는 정치강령으로 당대의 '주먹들'을 '선택'했다.


장량의 자는 '자방(子房)'이다. 역대의 영웅들은 최고의 참모를 '나의 자방'이라 불렀단다. 조조가 순욱을, 주원장이 유기를 그리 불렀는데, '장자방' 장량은 역대 모사들의 대명사다. 유비의 참모 제갈량도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유했으나 천하통일 전쟁에서 늘 장자방을 롤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실로 '삼국연의'는 '초한지' 이야기가 비슷하게 반복되는 구전이 바탕인데, '삼국지' 이야기에서 '자방'은 단연 제갈량이다. 물론, 천하통일을 완수한 장량과 통일의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비장하게 생을 마감한 제갈량은 비교가 안될 수도 있겠다지만, 장량의 주군이었던 유방은 '용인술'의 대가로서 소하와 한신, 장량 등 '삼걸'을 두루 기용한 반면, 제갈량은 무능한 유비 밑에서 위 '삼걸'의 일을 혼자 다 감당해야 했다. 장량은 말년에 도인이나 신선과 같은 삶을 살았던 반면,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결국 과로로 쓰러졌을 것이다.
장량은 단연 중국역사상 최고의 참모로서, '모신(謀神)' 또는 '모성(謀聖)'으로 추앙받고 있다.


"방략을 품고 계획을 구상하여 신묘한 계산으로 장막 안에서 계책을 마련하고 천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면은 짐이 장자방보다 못하오. 백성을 위무하고 나라의 재산을 잘 관리하면서 물자를 제때 공급하여 군대를 구제하는 면은 짐이 소하보다 못하오.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싸우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이기는 작전과 지휘의 본령은 짐이 한신에 미칠 수 없소. 장량, 소하, 한신 세 사람은 모두 세상에 드문 기재(奇材)요. 짐은 비록 이들보다 못하지만 이들이 나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했소. 이 점이 바로 짐이 천하를 얻은 원인이오."
- [제왕의 스승, 장량], <6장. 국가>, 위리.


기원전 202년,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고 공신들에게 분봉을 하면서 본인이 '서초패왕'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들며 건국 '삼걸(三傑)'로 소하와 한신, 그리고 장량을 꼽는 대목이다. 수도에서 국가운영을 이어가며 전선에 군량과 병력을 지원한 영원한 승상 소하, 중원의 삼진과 제나라의 동북방을 평정하며 유방에게 지원병력을 쉼없이 제공한 대장군 한신은 말할 것 없고 군막 안에서 천리 밖 전장의 계책을 마련할 뿐 아니라 중요한 시기마다 기묘한 책략으로 유방을 구한 장량이 한나라 건국에 가장 기여한 3명의 인재라는 의미다.


중국 작가 위리(본명, 바오광리)가 쓴 [장량전]은 사마천 [사기(史記)]의 <고조본기>와 <항우본기>, 장량의 열전인 <유후세가>, 한신의 열전인 <회음후열전> 등의 '원문'들을 기초로 장량의 일생을 그린 일종의 '장량 평전'이다. [사기]나 [초한지]로만 볼 수 있던 '모신' 장량의 모습을 오롯이 읽을 수 있다. 국내에 없던 '장량전'을 올해 김영문 선생이 번역했는데, 중국고전 전문가인 역자의 번역은 믿고 읽을만 하다.

처음에는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해 진시황에게 복수만을 다짐했던 장량은 공자의 땅에서 '예학' 즉 유학을 배우기도 했고 우리 고조선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명사인 '창해군'의 문객이 되기도 했으며 수배시절 '황석노인'으로부터 [태공병법]을 전수받은 후 '도가'의 사상까지 흡수하며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는 점차로 통일국가 건설의 프로그램을 체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유현 땅에서 우연히 마주친 유방과 친교를 맺은 장량은 본인이 깊이 수련한 방책들을 유연하게 흡수하여 실현시키던 유방의 큰 그릇에 감복하여 결국 천하쟁패의 '초한전쟁'이라는 건곤일척의 전선을 긋고 기묘한 책략으로써 유방을 승자로 만든다.
관중땅에 처음 들어가 '약법삼장'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게 한 것도, 홍문연에서 유방을 구하고 관중으로 물러가 몰래 힘을 기르게 한 것도, 역이기의 '6국 봉건제'를 깨고 '중앙집권군주제'의 대세를 설파한 것도, 홍구의 협약을 깨고 항우의 뒤를 쫓아 끝장낸 것도 모두, 장량의 '장막 안에서 천리 밖'을 내다본 계책이었다. 장자방이 없었다면 한 고조 유방의 대업도 불가능했다.

장량은 과연, 시대를 앞서간 '모신(謀神)' 또는 '모성(謀聖)'이다.


"요컨대, 이 책의 목표는 역사의 다양한 시점에서 왜곡된 유방의 행적을 사료에 입각하여 재검토함으로써 역사의 실상에 접근하는 데 있다. 유방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서민황제였다. 서민이었을 때 황제인 양 행동한다면, 거기에는 비극이 기다리게 되고, 황제가 되었을 때 서민인 양 행동한다면, 거기에는 더 큰 비극이 기다리게 된다. 사회계층의 밑바닥으로부터 정점으로 치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유방은 자연스럽게 또 의식적으로 그 행동양식을 바꾸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역사서술은 그 과정에 있었던 모순을 지워 없애고 그것을 순조로운 이행과정으로 바꿔 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 [유방], <서장 - [사기]에 대하여>, 사타케 야스히코.


일본의 중국문학자 사타케 야스히코는 2005년에 한 고조 유방의 '평전'을 냈다. 이 역시 [사기]와 [초한지]의 주역으로서의 유방보다는 유방이라는 인물을 더욱 중심에 둔 책인데, 특이한 점은 [사기]의 <본기>와 <세가>, <열전> 등에서 각기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는 유방의 모습을 통해 더욱 입체적인 그만의 평전을 지은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장량은 유방 진영 최고의 참모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리 인상깊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유현 땅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면도 [장량전]에서는 장량의 입장에서 주요하게 묘사된 한편, [유방전]에는 한 페이지의 서술에 불과하다. 

사타케 야스히코는 [유방]의 <서문>에서 [사기]의 특징을 짚고 시작한다. 즉, 한나라 건국 후 역사가 육가가 [신어]를 지은 것처럼 패현의 서민건달 유방이 원래부터 기이한 풍모로 '천자'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니라, 조금씩 건국자로서의 모습을 갖추면서 변모해 가는 과정을 [사기] 특유의 씨줄과 날줄의 서술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고조본기>는 유방의 입장에서, <항우본기>는 항우를 중심으로, <회음후열전>에서는 억울하게 토사구팽 당한 대장군 한신의 관점에서 유방의 행적을 서술함으로써 인간 유방에 관한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평전'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한신의 군권을 회수하던 장면은 <고조본기>에서는 담담하게, <회음후열전>에서는 처음부터 의도적인 것으로 쓰고 있다. 초한전쟁 동안에도, 한나라를 개국한 후에도 끝끝내 한신을 두려워했던 유방 입장에서 정당하던 '군권 회수'가 한신의 입장에서 보면 강도짓에 다름 없는 것이다. 
사타케 야스히코의 입체적 유방 평전인 [유방]은 역동적인 '초한(楚漢)전쟁'의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韓)나라에서 재상을 지냈다. 한나라가 멸망함에 미쳐, 만금의 재물도 아끼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 강력한 진나라에 복수하려 했고, 이 일로 천하가 진동했다. 지금 세 치 혀로 '제왕의 스승'이 되었고, 만호후에 봉해졌고, 제후의 지위에 올랐으니 이는 포의(布衣)의 극한에 오른 것이다. 나 장량에게는 만족스러운 일이다. 바라건대, 인간사를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 싶을 따름이다."
- [사기], <유후세가> 원문, 사마천, 김영문 옮김.


'황석노인'은 전국시대의 유세가 소진과 장의를 가르친 '귀곡자'였을 수도 있고, 수배시절 '도가'와 융합한 장량의 대전환기에 관해 후세 사람들이 갖다붙인 가공인물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이 시기 [태공병법] 또는 [육도삼략] 등을 통해 유가와 도가 등을 융합한 장량은 이미 천하통일의 새 시대가 오면 속세를 떠나야 끝이 아름답다는 이치를 알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소하는 승상으로서 제 명대로 살았으나 황제가 되어 교만해진 한 고조 유방에 의해 감옥에 갇힌 적도 있고, '다다익선'의 대장군 한신의 숙청은 말할 것도 없다. 장량이 초한전쟁의 대전선을 긋고 유방 진영의 한편을 만들었던 구강왕 영포와 양왕 팽월도 반란의 혐의 또는 실제 반란으로 몰려 숙청 당하고 말았다. 번쾌와 조참 등은 천수를 누렸으나 함께 호의호식했던 진평은 일평생 '음모'와 속임수에 능한 '모사꾼'으로 남았다. 
한(漢)나라 공신 그 누구도 풍족한 제나라 3만호 봉읍을 거절하고 유방을 처음 만난 유현땅의 1만호에 만족하며 '적송자'를 따라 노닐다 속세를 떠난 장량에 비할 수는 없다.

이 장면이 바로, '모신(謀神)' 또는 '모성(謀聖)'으로 빛나는 장량이 역사 속에서 더욱 더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장량은 '장막 안에서 천리 밖 세상'의 이치를 일찍이 깨달았고, 그 장대한 책략에 따라 거침없이 자유롭게 살다간 잔잔하지만 큰 '바람'이었다.

위리의 장량 평전, [제왕의 스승, 장량]의 원제는 [장량전:풍신모사(張良傳:風神謀士)]이다.

***

1. [제왕의 스승, 장량(張良傳:風神謀士)](2008), 위리 지음, 김영문 옮김, <더봄>, 2021.
2. [유방(劉邦)](2005), 사타케 야스히코 지음, 권인용 옮김, <이산>, 2007.
3. [사기(史記)], 사마천 지음, 김원중 편역, <민음사>, 2007.
4. [원본 초한지(서한연의)], 견위 지음,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19.
5. [이문열 초한지], 이문열 지음, <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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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인권
토머스 페인 지음, 박홍규 옮김 / 필맥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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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이성보다..."
- [상식, 인권](18세기), 토머스 페인, 박홍규 옮김, <필맥>, 2004.


"시간은 이성보다 더 많은 개종자를 만들어 낸다."
- 토머스 페인, [상식], <서문>, 1776.


인류가 왕을 '정치'적으로 몰아낸 것은 1789년 근대의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그 전에도 폭군들은 쫓겨나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지만 다시금 다른 왕으로 대체되었다. 물론 프랑스 대혁명으로 건설된 '공화정(共和政)'도 혁명 시기 국민군 장교였던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면서 다시 '제정(帝政)'이 복고되었다가 1848년 '2월 혁명'으로 다시 '공화정'이 부활하고 또 다시 나폴레옹의 조카에 의해 '제정'과 '공화정'이 엎치락 뒤치락했지만, 근대에 이르러 이미 시대는 군주 1인이 아니라 다수 대중 또는 그들의 대표들이 이끄는 '공화국'의 시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3

기원전 9세기 고대 중국 주나라 폭군 여왕(厲王)이 '국인'들의 반란으로 쫓겨난 후 각각 평민들과 귀족들의 추대를 받은 '공(共)'과 '화(和)' 두 재상이 지도했던 짧은 기간을 '공화(共和)'로 불렀고 동양에서는 '왕이 없는 시기'를 의미하는 정치체제가 바로 '공화'였다. 서양은 '제국'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귀족과 평민의 '양원(兩院)'이 왕권과 함께 지배하는 체제인 'Republic'으로 나타났는데 로마 '황제'의 명목상 임무는 '공화정'을 지키는 것이었다. 근대 이전에는 '군주정'이 표방하던 '공공성(公共性)'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다수 민중의 요구가 '공공성'의 모습으로 '공화정(Republic)'을 출현시켰으며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군주정'과 '공화정'은 대립된 정치체제로 정립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한 세기 전 영국 '명예혁명'과 달리 왕을 처형한 후 다른 왕족으로 대체하지 않았다. 왕이 없어진 자리는 '국민'의 대표들인 '국민의회'가 차지했는데, 군주나 귀족의 '욕망'을 인간 일반의 '이성'으로 대체한 '계몽주의'가 사상적 토대였다. 
정치적으로는 한편,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1776년 미국 독립전쟁에서 그 영향을 받았다고도 한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상가가 있다. 바로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 1737 ~ 1809)이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38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반영투쟁'을 넘어 아메리카가 '왕이 없는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급진적 독립투쟁를 호소한다. 당시 워싱턴 총사령관부터 다수 아메리카 이주민들은 영국으로부터의 완전독립을 지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독학으로 여러 책들과 사상을 연구한 페인은 1776년 초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짧은 팜플렛으로 '군주정'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한 '공화정' 미국을 선언하고 있다. 그의 [상식]은 이후 미국 '독립선언문'의 기본 골격이 되는데, 그의 '상식'은 '왕의 나라'가 아닌 인간의 보편적 자유권이자 시민권인 '자유'와 '평등'의 인권에 기초한 '인민의 나라'다. 당시 다수 아메리카 인민들조차 전제군주를 '상식'으로 여겼고 그것이 '이성'적 판단이라 주장했으나 토머스 페인은 왕이 아닌 다수 인민, 보편적 인간의 기본권을 '이성'이라, 그것이 바로 '상식'이라 줄곧 주장한다. 결국, 오랜 혁명의 시간을 지나 다수가 주인인 '인민주권국가'는 전제정치의 무지한 신념을 무너뜨리고 모든 인류를 '개종'했다.
'상식'이 독재자를 몰아내고 다수의 힘으로 승리한 것이다.


"프랑스 국민이 혁명을 일으킨 것은 루이 16세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전제적 국가원리에 반대해서였다. 그 기원은 루이 16세가 아니라, 수세기 전의 근원적 제도에 있었다... 그리고 위기가 닥쳤을 때는 단호한 각오로 행동하든가, 아니면 전혀 행동하지 않든가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토머스 페인, [인권 1부], <2장. 프랑스혁명은 원리를 위한 투쟁이다>, 1791.


유럽 대륙에서 영국과 오랜 앙숙이던 프랑스는 정치체제 지지 여부를 떠나 아메리카 대륙의 반영국 독립투쟁을 지원한다. 프랑스 귀족인 라파예트 후작은 미국 독립전쟁에 지원하여 전공을 세우기도 했으며 토머스 페인과 교류도 했다. 프랑스에서 선출되지 않은 정치기구인 귀족들의 '명사회'에서 정치현안을 논의할 때 라파예트 후작은 '국민의회' 형식을 주장했고 루이 16세가 '삼부회'를 어쩔 수 없이 소집했다가 왕족과 귀족들의 반발로 다시 무력화시킬 때 '제3신분(평민)'의 대표들은 "죽을 때까지 흩어지지 말자" 호소하며 '테니스코트 서약'을 했다. 
1787년 프랑스로 가지 못하고 고국인 영국으로 다시 돌아간 토머스 페인은 에드먼드 버크라는 하원의원과도 교류하였다. 2년 후인 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에 관한 버크의 공격은 당연히 '군주정' 체제 내 '개혁'의 입장, 즉 전통적인 '마그나 카르타'식 입헌군주제의 관점이었다. '전제군주'를 증오하고 귀족들을 경멸하며 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을 사상적으로 기초했으며 보편적 인권사상을 설파하던 페인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군주정'이 '상식'이 아니며 '인권'에 기초한 보편사상으로 국가의 기원을 규명하고 다수의 복지를 증진하는 새로운 '공화국'을 위한 혁명은 단지 왕 한 사람이나 몇몇 귀족가문에 대한 투쟁이 아닌 인류의 보편적 '인권'이라는 '원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내용으로 영국 보수주의자 버크에 대한 반박글을 [인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다. 페인의 [인권]에 의하면 왕을 몰아내거나 처형해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필연이다.


사실 토머스 페인의 이 저서는 오래된 글이기도 하고 지금은 너무도 '상식'적인 '인권' 이야기를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어 읽기 지루하기도 한 책이다. 
[인권 1부]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페인 나름대로 정리한 장들은 역사책 읽듯 재미있기도 했으나 [인권 2부]의 세금 관련 장들은 지금과는 맞지 않는 데이터라 별 감흥이 없기도 하다.

그럼에도 18세기 당시 '국제적 혁명가'로서 토머스 페인의 결론은 다시금 되짚어볼 만 하다.

첫째, '군주정'과 '귀족정'에 대한 증오와 경멸. 
'군주국'인 영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왕과 귀족들의 무능한 세습체제에 대한 토머스 페인의 증오는 극에 달한다. 경멸의 표현 또한 노골적이고 시원시원하다. 일본에서 천왕을 암살하려 한 아나키스트 박열의 동지인 20세기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나 영국 여왕에게 무릎 꿇기를 거부한 21세기 노동당수 제레미 코빈 보다 몇 백 년 앞선 인간 자유의지의 선언이다. 다수 민중에게 진정한 '애국'은 '혁명'이다.
페인은 물론 현대의 우리의 '상식'에도 반하는 '소수지배체제'는 결코 '공공성'을 담보할 수 없으며 다수의 의지를 대표하는 '공화정'만이 '공공성'의 정치를 집행할 수 있다. 페인에게 최고 정치체제는 '대의민주주의'였고 이는 지난 20세기까지 우리의 '상식'이었다. 이제는 '공공성'을 더욱 확대하는 정치체제는 '대의제'라는 '대리주의'를 넘어서야 하지만, 한편으로 극단적 '포퓰리즘'도 경계해야 한다. '공공성'을 담지 못한 '포퓰리즘'과 파시즘적 '영웅주의'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둘째, 다수의 '복지'와 '노동', 그리고 국가.
18세기는 '노동계급'이나 사회주의 사상이 '평등'을 내걸기 전이며 이제 고작 종교적 신권과 정치적 왕권에 반발한 인류 보편인권 사상이 '계몽주의'의 이름으로 한창 등장하던 시기였다. 우리는 이를 '자유주의'의 기원으로 본다. 원래부터 강도나 악당, 찬탈자와 같은 전제군주국이 전쟁과 약탈로 민중을 대놓고 수탈했으니 18세기 자유주의 이념은 '작은 정부'와 '감세'를 주요하게 주장할 수 밖에 없었다. 다수 민중의 '노동'을 통해 생산된 부를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 쓸데없는 정복전쟁에 탕진하지 말고 빈민구제와 아동이나 노인에 대한 복지, 보편교육에 제대로 활용하기만 해도 당시 '군주정'이 걷는 막대한 세금을 줄이면서도 다수를 위한 국가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이 18세기 [인권 2부]에서 페인이 주장한 결론이다. 물론 지금은 '공화국'의 정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으므로 '자유주의'의 '작은 정부'와 '감세정책'은 그 자체로 '공공성'을 포기한 소수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주장일 뿐이다. 현재 '자유주의자'들의 '자유'는 정치경제적으로는 자본의 '자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또한 그 사상의 역사로부터 고찰해야 하는 것이다. '국제적 혁명사상가' 토머스 페인이 '작은 정부'와 '감세'를 주장한 이유는 소수의 사적인 이익을 위함이 아니라 노동하는 다수 민중의 보편적 인권과 복지, 그리고 국제적 평화'를 전제로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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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도 '자유주의'냐 '사회주의'냐 그 사상 이전에, '공공성'을 위한 '공화국'의 역사를 함께 생각해볼 만한 토머스 페인의 팜플렛 [상식, 인권]이 정치사상사에서 '고전(古典)'이 될만한 충분한 이유다.


'시간'이라는 '역사'는 '이성'이라는 당대 '철학'보다 더 많은 '상식'과 '인권'을 옹호하고 증명한다.


"승패를 초월한 고결한 긍지로써 나는 '인권'을 옹호한다... 미국과 프랑스의 두 혁명... 그 두 보기에서 분명한 것은, 혁명의 진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가장 큰 세력은 '이성'과 '공동이익(공공성)'이라는 점이다."
- 토머스 페인, [인권 2부], <5장>, 1792.


***

1. [상식(Common Sense), 인권(Rights of Man)](18세기), Thomas Paine, 박홍규 옮김, <필맥>, 2004.
2. [프랑스 혁명사 3부작](19세기), 칼 마르크스, 임지현/이종훈 옮김, <소나무>, 1987.
3. [한국 민주주의 100년, 가치와 문화], 김동춘 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엮음, <한울아카데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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