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D. H. 콜의 산업민주주의 시민 교양 신서 8
G. D. H. 콜 지음, 장석준 옮김 / 좁쌀한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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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를 '협업자(partner)'로 인정하라!"
- [산업민주주의](1957), G.D.H.Cole, 장석준 옮김, <좁쌀한알>, 2021.


"진정 배척돼야 할 것은 상호대등한 교류를 파괴할 정도로 큰 부의 격차, 권리와 의무의 상호 의존관계를 방해할 정도로 광범해진 지위의 차이다. '평등'의 가장 중요한 근저에 있는 것은 만인에게 개방된 교육 기회이고, 시민권의 정치적 측면 뿐만 아니라 일상의 노동 및 서비스 활동에서도 성인들의 삶에 제공되는 '협업자(partnership)'라는 만족스러운 지위다... 오늘날 정치 영역에서 우리 모두는 투표할 권리를 지닌 시민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동료 인간에 대해 서비스를 제공하고 생산을 담당하는 (산업의) 영역에서는 왜 우리 모두가 정치 영역과 마찬가지로 시민이어서는 안되는가?"
- G.D.H.Cole, [산업민주주의], <11장. 결론>, 1957.


냉전이 격화되기 전인 1950년대 유럽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고민과 실천을 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을 추종하며 국제적 연쇄혁명을 도모하는 세력, 의회 다수를 점하면서 서서히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세력. 전자는 '혁명적 좌파', 후자는 '유로 코뮤니즘'. 보통 후자는 '사회민주주의'로 불리지만 러시아공산당도 원래는 '사회민주노동당'이었다.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좌파의 공통이념이었다. 북유럽 복지국가로 흘러간 '사회민주주의'의 '민주주의'는 아마도 정치적 '민주주의'로서 투표를 통한 '대의민주주의'를 뜻하는 것이었으리라. 유럽의 '사회민주당'들은 그만큼 강력한 산별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보통선거권을 획득한 정치적 '시민' 노동자들에 의해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교육과 의료, 주거권 등의 기본권리에 있어 '보편복지'를 인류사회에 정착시켰다. 그러나 이들 '좌파' 대중정당들이 제도권에 안착하면서 좌-우 거대 정당의 '양당정치' 양상이 반복되었고, 이제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새롭게 접목하려는 세력은 거의 '고유명사'화 되어버린 '사회민주주의'라 하지 않고 '민주적 사회주의'라 부른다. 지금은 '대의민주주의'의 '대리주의'적 사고를 벗어난 다수 대중의 '직접민주주의', 다수의 '직접행동'만이 사회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정통 좌파'의 노동/자본 계급투쟁 전선을 확대하고 다양화, 중층화한 '신좌파' 운동은 계급투쟁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철폐와 양성평등, 인종차별 철폐 등의 소수자운동 및 소비자운동 등의 다양한 구호로 기존 자본주의 질서에 균열을 내기 시작하였는데, 이들 '신좌파' 학생운동의 지도이념으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있었다면 한편으로 영국의 '길드사회주의'도 있었다고 한다.

G.D.H.콜(George Douglas Howard Cole : 1889~1959)은 영국의 사회주의자로서 '길드사회주의' 이론가이다. '길드(guild)'는 중세사회 기능인들의 조합으로 장인들의 공동체로서 동일 기술을 지닌 장인들이 뭉쳐 서로의 삶을 챙겨주는 모임인데 필요할 경우 자체 무장력으로 도시간에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할 수 있었던 일종의 '산업적 결사체'였기도 하다. 이들은 자본주의 공장제 생산방식의 확산으로 영향력을 상실했으나, 자본주의 계급철폐를 위한 정치투쟁은 별도로 하고 노동계급의 일상적 산업현장의 일상을 '공동체'적으로 함께 조직하고 운영하는 모티브로 작용하여 발전한 사상이 '길드사회주의'이다. 이는 이후 에른스트 비그포르스(Ernst Wigforss : 1881~1977) 등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좌파의 기본이념이 되기도 하는데,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모여서 사회민주당을 무기로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 국가를 일종의 거대한 '공동체'로 운영한다는 전략이다. 이것이 스웨덴 복지자본주의를 넘어서려던 비그포르스의 '나라 살림의 계획'(노동운동 전후강령, 1944년)이며 그 이념적 토대는 영국의 '길드사회주의'였다. '길드사회주의'는 스웨덴에서 1920년대 '잠정적 유토피아', 1940년대 '나라 살림의 계획'과 1970년대 '임노동자기금' 등의 '좌파' 정책으로 나타났다.

콜의 만년이었던 1957년에 발간된 [산업민주주의](장석준 옮김)의 원제는 [The Case for Industrial Partnership]인데, 옮긴이에 의하면 '산업 동반자론' 또는 '산업 협업자론'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콜의 주장은 노동자가 "열등한 종류의 자본가나 자본주의 이윤참여자(같은책,5장)"가 되는 '동업자' 비슷한 '동반자(co-partner)'가 아닌, "해고당하기에 충분한 잘못을 스스로 저지른 경우가 아니라면 해고당할 위험이 없는 기업 내 지위(같은책,3장)"인 '협업자(partner)'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선거권과 투표권을 통해 정치적 '시민권'을 얻은 다수 노동계급은 당연히 본인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업(경제)'의 영역에서도 민주적 '시민권'을 획득해야 한다. 콜의 '길드사회주의'는 이것을 '산업민주주의'로 줄곧 주창하고 있다.
'동반자(co-partner)'가 노동자를 자본가와 함께 기업을 이끄는 '동업자'와 같다면, 콜이 자본가에게 줄기차게 인정하라고 주장하는 '협업자(partner)'는  자본가의 일방적 기업운영을 통제할 수 있는 대등한 '지위(partnership)'을 의미한다. 그런 만큼 콜은 '이윤공유제'나 '노동이사제' 같은 제도는 반대한다(같은책,5장). 즉, 노동의 대가인 임금은 노동자가 자본주의적 이윤추구에 '동업자'처럼 동참하여 나누는 '이윤공유' 형식이 아니라, 노동자가 산별노조를 중심으로 소비와 생활이 함께 섞이는 전체 생산과정에서 기업의 생산활동을 통제하고 노사간 산업별 단체교섭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다. '노동자 이사' 역시 "그들이 기업 이사로서 임무를 수행한다면 동시에 노동자를 대변할 수는 없다(같은책,5장)"며 "실제로 늘 소수 입장일테니 별로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같은책,5장)"고 단언한다. 


"사회주의자로서 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며, 자본주의의 모든 장치에 반대한다. 또한 나는 결코 노동자를 열등한 종류의 자본가로 전환시키길 바라지 않으며, 노동자가 외양만 조금 바뀐 자본주의 착취 체제의 수용에 얽혀들게 만들길 원치 않는다... 나는 노동자 급여를 정하는 방식은 노동조합이 모종의 사용자 기구...(중략)...와 협상하는 단체교섭이라고 생각하기에 '이윤공유제'에 반대한다."
- G.D.H.Cole, 같은책, <5장. 이윤공유제는 반대한다>, 1957.


콜은 명백히 '사회주의자'로서 자본주의에 분명히 반대한다. 그는 "민중이 모든 핵심 생산수단을 소유할 날을 고대한다(같은책,5장)." 그러나 당시로서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현실적으로 '국유화' 형태로 실현되었다. 콜은 이를 넘어 지자체나 협동조합 형식의 '사회화'도 그 특성에 따라 실시할 것을 제안하는데, 이 또한 '길드사회주의' 영향이다. 국가권력 장악을 통한 생산수단 '사회화'인 국유화는 전력(에너지)과 철도(교통), 보건(의료) 등 보편적 기간산업(공기업)에 적용하되 다른 산업(사기업)은 지역적, 산업적 특성에 따라 지자체나 협동조합 형식으로 '사회화'할 수도 있다. 사회주의 운동에서 확장된 '공통적인 것(commons)'의 '사회화'는 어떤 형식으로든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며 그로 인해 일상을 영위하는 공장과 가정 현장의 다수 민중들이 소유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사회화'다.


"'평등'은 본질적으로 '소득격차 해소'보다는 '사회적 지위'와 더 관련된 문제다."
- G.D.H.Cole, 같은책, <1장. 서론>, 1957.


사회주의자로서 콜의 주요 개념은 역시 '평등'이다. 보통선거권으로 정치적이고 형식적인 '평등'을 쟁취한 노동계급이 산업의 현장에서 경제적이고 실질적 '평등'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산업민주주의론'이다. 이는 '분배'에 중점을 둔 '경제민주주의'를 넘어선다. 소득격차 해소도 중요하지만, 산업의 영역에서 자본가와 실질적으로 대등한 '협업자' 지위를 획득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렵고 더디더라도 우리 모두의 삶의 현장을 통제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할 수 있으며 동시에 민주적 '단체교섭'을 통해 스스로가 '생활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적이고 어찌보면 낙관적인 주장이다. 

콜의 '산업민주주의론'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국가가 책임지는 '완전고용'이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초중반 대공황 이후 당시 자본주의 국가 조차도 케인스주의를 받아들이고 '완전고용'을 수용하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겠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 승리 후 자본주의 주류는 '완전고용'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민영화'에 열을 올리면서 '길드사회주의' 주장을 무시해 버렸으며 노동자들은 더더욱 기업의 '소모품'이 되어갔다. 노동자가 산업의 영역에서 자본가와 대등한 '협업자'가 되는 길은 더 멀어져 보였다.

그러나 21세기 초중반을 향하는 이제 다시 시대는, 노동계급 뿐만 아니라 체제에 의해 억압받는 여성, 인종, 소수자, 그리고 자연(환경/기후위기)까지 더이상은 참을 수만은 없는 때가 되었다. 이제 다수가 '공통적인 것'을 함께 소유하고 영위하는 시대에서 '포퓰리즘'의 벽을 넘는 것은 '산업민주주의'를 통한 새로운 '공동체'를 조직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사회주의자 콜은 [산업민주주의](1957)에서 '생산수단 사회화' 같은 사회주의적 주장까지 나가지 않는다. 다만 그 전제로서 "노동자를 대등한 '협업자'로 인정하라!"는 주장을 줄기차게 제기한다. 
생산과 소비, 생활의 주체로서 당당히 '공동체'를 조직하는 다수 민중의 모습, 콜의 '길드사회주의'가 변함없이 우리에게 남기고자 하는 사상적 유산이다.

탁월한 진보정치 이론가인 옮긴이 장석준 선생의 <해제>는 콜의 '길드사회주의'와 '산업민주주의론'으로부터 현재의 '민주적 사회주의' 운동의 흐름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한편의 훌륭한 논문을 읽는 듯 하다. 
콜의 원문보다 먼저 읽기를 추천한다.


***

- [G.D.H.콜의 산업민주주의 - 노동자를 협업자로 인정하라](1957), G.D.H.콜, 장석준 옮김, <좁쌀한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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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 왕과 사대부, 그리고 사관마저 지우려 했던 조선 최초의 자유로운 사상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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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주자' 혼자만 알고...
- [윤휴 -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이덕일, <다산초당>, 2011~2021.


"세상의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朱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 백호 윤휴, <숙종실록 3년>


조선 숙종 시기 당파를 갈아치우는 '환국(換局)' 중 첫 사건이었던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희생된 남인(南人) 유학자 중 윤휴와 허적이 있다. 17세기 조선 중후기 '주자(주희)'의 유교경전 해석을 절대화하던 우암 송시열(1607~1689) 같은 '서인' 당파에 의해 죽임을 당한 '청남(淸南)'의 영수 백호(白湖) 윤휴(尹鑴:1617~1680)가 [역경]이나 [중용] 등 유교경전들을 '주자'와 다르게 해석하고 집주한 본인을 비판한 교조적 서인 '성리학자'들에게 항상 위와 같이 말했다고 <숙종실록>은 전하고 있단다.

청나라로부터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인조의 둘째아들 봉림대군은 북벌을 꿈꾸던 임금 효종인데, 서인(西人)의 당수 송시열과 '북벌(北伐)'을 논한 1659년 '기해독대(己亥獨對)' 후 한달 반만에 효종은 의문스럽게 급서한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의 북인(北人) 정권을 숙청한 서인들은 청나라로부터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인조와 효종을 앞세워 '북벌'을 당론으로 부르짖었지만 이는 오로지 '국내정치'용 선동에 불과했다. 즉, '황제의 나라'로 모시던 명나라에 복수하고자 청나라를 쳐야 하는데 조선 내부 결속을 다져야 하므로 항상 준비 중이며 실제 북벌을 논하면 그 대의는 동의하되 항상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서인의 '북벌'은 그냥 '당론'이었고 송시열을 비롯한 그 어떤 서인 정치가도 실제 '북벌'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왜란과 호란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던 조선 중후기 신분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서인들이 내세운 것은 유교의 '예법(禮法)'을 강화하여 계급지배의 질서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고, 실제 '북벌'을 위한 '내부결속' 방책으로서 다수 농민들의 경제적 안정을 위한 '대동법(大同法)'의 전국 확대도 지배계급의 이익 사수를 위해 기를 쓰고 반대한 자들 또한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정치가들이었다. 그들 '서인' 당파는 늘 말했단다. '북벌'이든 '대동법'이든 그 취지는 좋으나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조선의 지배계급을 혁파하지 않는 한 그 '시기'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었는데, 그들은 오히려 지배계급의 강화를 위해 유교의 '예학'을 더욱 강조하고 '성리학'을 교조화했다. 가히 지금 거대양당 정치가들의 '표본'으로서 손색이 없다.
물론, '대동법'의 확대를 위해 일생을 건 정치가 잠곡 김육(1580~1658) 또한 '서인'이었으나, 특산물로 내던 조세를 쌀로 대체함으로써 다수 농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려 했던 김육의 개혁정치에 반대한 송시열 등은 같은 '서인'임에도 각 '한당(김육)'과 '산당(송시열)'으로 분열된다. 조선 유교적 지배계급의 화신이었던 17세기 조선의 '송자' 송시열은 12세기 중국의 '주자(주희)'의 '성리학'을 교조화하면서 '서인'의 당수로서 '실질적 '북벌'을 추진하던 윤휴와 같은 '남인'을 숙청하고, 같은 당파에서도 '대동법'의 개혁정치에 반대하며 '산당'을 만들었으며, '주자'의 '성리학'에 관한 다양한 해석과 탕평정치를 주장한 젊은 '소론'에 반대하는 '노론'을 형성한다. 그렇게 조선의 '송자'가 된 우암 송시열의 일생을 종합하면 그 자체로 지배계급의 철저한 대변자이자 화신으로서 역시 '서인-산당-노론'의 계보는 이후 '친일-친미-친독점-친독재 거대양당'의 모습으로 현재까지 살아 있다.


"윤휴는 '백성과 친한데 있으며(在親民)'라고 ([대학(大學)]을) 원래 [예기(禮記)]대로 환원... '주자학자(서인)'들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백성을 '교화의 대상(在新民)'으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윤휴는 ([대학]) 독서기에서 백성을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 이외의 천하(在親民)'라고 여겼다. 자신과 백성 사이에 계급적 차별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 관점으로 천하사해의 모든 백성을 한 가정처럼 여긴다는 '사해동포주의'의 발상이 '친민(親民)'에 담겨있었다. 주자학자들이 백성을 '교화의 대상'으로 떨어뜨려놓은 이유는 지배대상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윤휴는 그런 계급적 차별을 거부했다."
- [윤휴 -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2장. 주자를 거부하고 진리를 탐구하다>, 이덕일, 2021.


백호 윤휴는 17세기 조선 중후기의 '천재' 유학자였다. 그에게는 따로 스승이 없었다. 오래전 공자와 맹자, 자사와 주자 모두가 그의 스승이었고 윤휴는 독학으로 선학들의 글의 해석하고 주석했다. 일찍이 20대에 그 학문이 퍼져 열살 많은 송시열조차 그를 찾아 그의 학문을 칭송하며 교류하고자 했는데, 윤휴가 36세이고 송시열이 46세에 [중용]에 관한 '주자'와 다른 주석과 해석을 단 윤휴를 비판한 송시열과 오랜 정적이 되고 만다. 이후 '북벌'을 국내정치용으로만 이용하던 송시열의 서인은 청나라 오삼계의 '삼번의 난'이라는 대외정세에 맞춰 실질적 '북벌'을 추진하려던 윤휴의 남인 일당을 대거 숙청하고 강경파 청남이었던 윤휴는 물론 기회주의적 탁남 영수 허적까지도 모조리 죽여버리고 만다.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화' 때도 물론 조광조 등의 청렴한 개혁선비들이 사사되었으나 이후 당쟁 과정에서 꼭 그리까지 '성리학자' 선비유학자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서인 정철의 처단 여부를 두고 동인이 북인 강경파와 남인 온건파로 나뉘었고 숙종에 의해 미운털 박힌 송시열의 처단 여부를 두고 남인들이 강경파 '청남'과 온건파 '탁남'으로 나뉘기는 했지만, 이미 숙종의 '경신환국'에 이르면 반대파는 무조건 죽어야만 했다. 윤휴는 사약을 마시기 전 유서를 쓰기위한 필묵 요청도 거부되었는데,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는 송시열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던 '청남'의 영수인 윤휴의 눈에 송시열은 '유학자'로 보이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대 정계의 거물 송시열 따위 가벼이 여기며 '주자'와 어깨를 겨루던 도학자의 기개가 보인다.
그렇게 '천재' 유학자 윤휴는 서인들에 의해 죽어야만 했고 이후 조선 후기 '성리학'의 교조주의 세상에서 철저한 '금기어(禁忌語)'가 되었다. 삼봉 정도전, 대동계의 '반란자' 정여립은 물론 홍길동전의 허균까지 조선왕조 내내 '만고 역적들'이 있었으나, 백호 윤휴만큼 '금기(禁忌)'된 유학자는 없었다는 것이 재야 역사학자 이덕일의 관점이다. '만고의 역적'들 모두가 조선에서 신원되지 못한 이유는 체제를 개혁하고자 했던 그들의 '자유' 사상 때문이었다. 왕권을 견제하는 사대부 집단지도체제로 '민본주의'를 실현하려던 정도전, '자유 사상가' 정여립과 허균도 왕조의 '위험인물'이었으나 윤휴가 더 '위험'했던 이유는 그의 '신분철폐' 사상에 있었던 것이다.


20대에 독학으로 이름을 날렸고 본인의 이름도 '윤정(윤갱:尹鍞)'에서 '윤휴(尹鑴:큰 종)'로 스스로 개명했으며 60대까지 초야에 머무르며 '성리학'의 자유롭고 다양한 해석을 하고 주석을 달던 윤휴는 신분제 아래서 핍박받던 다수 민중의 삶도 내면에 체화했던 듯 하다. 합리적이지도 공정하지 못한 제도가 되어버린 과거시험도 거부하고 숙종의 여러 차례 관직 제수도 계속 거절하던 그가 60대에 이르러 대사헌으로서 출사를 결심한 이유는 실질적 '북벌'이었다. 말로만 '북벌'을 외치던 서인들에게 모든 권력을 주고서라도 북벌을 추진하려던 효종이 송시열과의 '기해독대' 북벌담판 후 얼마 안되어 의문사하고 현종이 즉위 후 14년이 된 1673년은 옛 명나라 말기 명장이자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을 자금성에서 한달만에 몰아내고 남명 복위정권도 정벌하며 청나라 개국의 절대공신이 된 대장군 오삼계가 '삼번의 난'을 이르켜 남쪽의 명나라와 북쪽의 청나라로 대치하던 시기였다. 명나라 망국의 신하 정성공과 정경 부자 또한 대만에서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으니 어린 나이에 제위를 계승한 청나라 강희제는 반란군에 둘러싸인 형국이었다. 윤휴는 이런 대외정세 분석을 토대로 강남의 오삼계, 대만의 정성공 부자와 연합하여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그 와중에 조선의 영토를 넓히자는 것이었다. 윤휴의 '북벌론'은 서인들의 말뿐인 '북벌' 당론과도 달랐다. 서인들의 '북벌'은 본인들이 유일하게 섬기던 '황제의 나라' 명나라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던 반면, 윤휴의 '북벌'은 중국의 혼란을 이용하여 조선의 입지를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고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북방으로 진출했던 정세 또한 5호16국의 혼란한 대외정세였다. 윤휴의 실질적 '북벌론'이 실제 정책으로 등장하자 말로만 '북벌'을 외치던 서인들의 허위적 실체가 드러났다. 이제 민중을 돌보는 것도, 국가를 위해 북벌을 추진하기도 거부하며 국내 지배계급의 이익만을 지키려던 서인들에게 윤휴와 그의 당파 일체는 사라져야만 하는 최대 정적이었다. 

일찍이 윤휴는 [대학] 독서를 통해 '3강령(大學之道)'인 '재명명덕(在明明德)-재친민(在親民)-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대학(大學)], <경문 1-1>) 중 '친민'을 '신민(新民)'으로 바꿔부른 '정주학('정이/정호 형제와 '주자')의 전통을 부정하고 다시 '친민'으로 돌아갔다. 즉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신민'은 민중을 '교화와 지배의 대상'으로 본 반면, '자신 이외의 천하'로서 민중을 대하는 자세가 바로 '친민'의 본래 의미라는 주석인 것이다. 윤휴의 '성리학'에는 이미 '신분차별'의 예법은 없다. 그는 여성에게도 학문을 권장했으니 '남녀차별'도 없다. 전쟁을 맞아 국토와 민중을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고 다수 민중의 전란의 고통도 외면했던 조선왕조의 계급사회 위기를 신분제 강화의 '예법'에서 다시 찾으려던 서인들에게 그렇게 윤휴는 죽어야만 했다.


"윤휴가 출사한 이유는 흉중의 포부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윤휴가 보기에 조선은... '소변통(小變通)'이 아니라 '혁명'에 가까운 '대변통(大變通)'이 필요한 나라였다. 주희의 경전해석만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상계도 변해야 하고, 말로만 북벌을 외치는 사대부들의 이중적 처신도 변해야 했다. 권리만 누리고 위무는 방기하는 사대부들의 계급 이기주의도 버려야 했다. 능력이 아니라 신분을 따지는 신분제도 바뀌어야 했다. 이렇게 국가기운을 일신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북벌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윤휴의 야심찬 계획은 매번 저지되고 있었다."
- [윤휴 -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6장. 말뿐인 북벌을 넘어 행동하는 북벌로>, 이덕일, 2021.


숙종 때 실질적 '북벌'을 위해 출사한 윤휴는 북벌을 위해 민중들의 경제적 안정을 꾀하는 제도를 제안한다. 기존의 신분제적 주민등록제인 '호패법'을 모든 사람이 차별없이 증명하는 '지패법'으로 바꾸고, 양반이나 농민이나 구분없이 묶는 '오가통법'으로 양인도 해당 단위의 대표가 될 수 있도록 하며, 양반은 제외하면서 농민에게 죽은자와 갓난아기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던 '호포법'을 개혁하면서 양반 사대부를 포함한 모두에게 징수를 하는 '구산법'까지 개혁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물론 이들의 눈치를 보며 정치적 '타협'이나 '조정'에만 힘쓰던 남인(탁남) 영수 허적의 반대로 누더기 개혁안으로 실시되면서 오히려 민중들의 반발을 사는 처지가 되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무과 시험의 기회를 주고자 했던 '만인과'로 무과 급제자가 늘었으나 '북벌' 의지가 없던 숙종과 서인, 탁남은 무과 급제자를 임용하지 않아 군대의 사기는 더 떨어지고 만다. 
"일터에서 죽지 말자"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상식 조차 기업과 지배계급의 이익과 타협하여 누더기 걸레 정책으로 만들어버리는 지금의 거대 기득권 양당정치의 모습 그대로다. 중간에서 '현실'적으로 '조정'하고 '타협'한답시고 애를 쓰던 기회주의자 탁남 영의정 허적도 윤휴와 같이 '경신환국'의 제물이 될 줄 허적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지배계급 독점과 복수의 정치에는 '현실적 조정자'도 설 자리는 없다. 허적의 죽음은 개혁과 변화에서 '현실'보다 '원칙'이 더 중요한 이유를 역사적으로 증명한다.
어찌보면,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원칙'을 버린 '현실주의자'들일지도 모른다. '국민의힘'은 원래 그런 자들이라 쳐도 지금의 개혁을 가로막는 자들이 한때 '민주주의자'였던 민주당 '586'이듯이 말이다.


"윤휴는 졸지에 갑산으로 유배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실제로 북벌을 단행하려 하고, 양반에게 군포를 받으려고 하고, 백성들의 이중, 삼중의 군포를 탕감하려 했던 윤휴는 조선에서 목숨을 부지해서는 안되었다. 신분제를 흔들려고 했던 윤휴의 숨이 붙어 있어서는 안되었다... 이른바 '경신환국(1680년/숙종6년)'으로 정권은 다시 '서인'이 차지했다... 서인들은 '역모'로 몰릴 논리와 실제 행동까지 있었지만 남인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서인들은 '정치공작'을 자행했다."
- [윤휴 -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9장. 금기어가 되어버린 이름>, 이덕일, 2021.


애초 고려왕조에 대한 '반역'으로 개국한 조선은 왕조 내내 '반역'과 쿠데타가 끊이지 않았다. 태종이나 세조는 왕자 본인이 사대부 집단지도체제를 깨부순 초기 사례였고 중종반정은 연산군으로부터 버림받을 운명에 처한 훈구파 사대부들이, 인조반정은 명나라만을 임금으로 섬기던 교조적 '성리학자' 서인들이 주도한 쿠데타였다.

이후 효종과 현종은 아마도 당쟁의 희생양이 된 듯 하며 숙종은 왕의 주도로 당파를 갈아치우는 '환국'으로 남인과 서인의 정권교체를 보여준다. 서인들은 끊임없이 왕족 후보들을 줄세우며 '반정(反正)'을 기획했는데, 1680년 '경신환국'으로 윤휴를 포함한 남인들을 숙청할 때도 '역모'의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백호 윤휴가 '반역자'였다면 교조화된 '주자'의 '성리학'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과 주석을 토대로 신분제를 철폐하거나 완화하고자 함이었다. 이는 서인들로 대변되던 당대 양반 지배계급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으나 '현실' 관료정치의 '타협' 앞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 그의 누더기 '개혁안'은 이후 쓰잘데기 없는 왕조와 사대부 당파들 사이의 정쟁과 '환국' 과정에서 도루묵이 되었고, 대외적으로 오삼계의 죽음으로 '삼번의 난'을 진압한 청나라는 강대해졌으며, 민중수탈은 더욱 강화되면서 조선 후기 100년은 '삼정 문란'으로 촉발된 대대적 민중반란, 즉 다수 민중에 의한 진정한 '반역'의 시대를 필연적으로 예고한다.


물론, 윤휴의 조선 대개혁안이 '북벌'의 이데올로기를 위한 또 하나의 비현실적 이념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세상의 이치를 '주자' 못지 않게 잘 안다는 어찌보면 천재적 자만으로 '현실정치'를 무시한 처사가 그의 죽음을 초래했을 수도 있다. 송시열이 직접 주도하지는 않았으나 윤휴를 죽여야만 살 수 있었던 지배계급의 대변자 서인들로서는 신분제를 흔드는 세력은 그 누구든 제거해야 했을 것이다. 서인들의 세상에서 '금기어'가 된 그 이름 윤휴의 혐의가 당대 신분제 질서를 건드린 점이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그렇게 '주자'만을 알았던 '서인들의 세상' 조선은 당대 '금기어'가 된 유학자 백호 윤휴의 사후 100년 이상 더욱 더 푹 썩어가며 다수 민중들의 진정한 '반역'을 기다리게 된다. 
역시, '계급투쟁'의 주체는 소수 지식인이 아니라 다수 민중이라는 진리를 조선역사 또한 생생히 증명하고 있다.

***

1. [윤휴 -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이덕일, <다산초당>, 2011~2021.
2.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석필>, 1997.
3. [사서(四書) - 이치를 담은 네 권의 책(대학/논어/맹자/중용)], 신창호 편역, <나무발전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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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서계인 옮김 / 검은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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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셰익스피어의 '죽음'
-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1933), 바너비 로스(엘러리 퀸), 서계인 옮김, <검은숲>, 2013.


"'셰익스피어의 사인이 무엇이었죠?'
'그거야 아무도 알 수 없죠.'
고든이 중얼거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러 형태의 과학적인 분석이 시도되고는 있지만 아직은 추측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오래전 <랜싯>지에 실려 있는 논문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의하면 셰익스피어는 갖가지 병이 복합적으로 발생하여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예컨대 티푸스, 간질, 동맥 경화증, 악성 알코올 중독증, 신장염, 보행성 운동실조증 등 모두 열세 가지나 되는 병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것 참 재미있군요. 하지만 그 문서에 의하면...'
세들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살해당했어요.'"
-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 <27. 삼백년 전의 범죄>, 바너비 로스, 1933.


20세기 초 미국의 미스터리 소설가 엘러리 퀸(Ellery Queen)은 만프레드 리(Manfred Lee:1905~1971)와 프레더릭 다네이(Frederic Dannay:1905~1982)라는 두 사촌형제의 필명이다. 이들은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 [그리스 관 미스터리], [로마 모자 미스터리] 등의 작품으로 이전 세기 애거서 크리스티, 코넌 도일 등으로 대표되던 영국 추리소설의 아성에 도전했는데, 거대한 전제 및 가설을 세우고 불가능 요소들을 소거하면서 오로지 연역적 논리를 가지고 사건을 해결하는 청년 탐정 '엘러리 퀸'으로 유명하다. 이른바 '연역소거법'이다. 이들은 대공황의 불황에도 다작으로 승부했다. 그 중 드루리 레인(Drury Lane)이라는 똑같은 추리방식의 노년 탐정을 내세운 [X의 비극], [Y의 비극] 등 네 편의 소설은 바너비 로스(Banaby Ross)라는 또 다른 필명으로 발표하는데, 오랜 기간 미국 독자들은 두 작가가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단다. 1930년대 엘러리 퀸 초기 미스터리는 같은 추리 스타일의 청년 탐정 '엘러리 퀸'과 노년 탐정 '드루리 레인'의 경쟁구도로 이어간다.

드루리 레인은 셰익스피어 연극을 하다가 은퇴한 유명 배우로 지금으로 치면 유명 연예인 쯤 되겠다. 그는 귀머거리가 된 60~70대 노년으로 우연히 편지 한통으로 대서양 건너 유럽의 미제사건을 해결한 후 [X의 비극], [Y의 비극], [Z의 비극] 등 미국의 비극 3종 세트를 해결하며 승승장구했지만, 1933년 셰익스피어의 '죽음'에 관한 마지막 사건(Last Case)을 끝으로 활약의 종지부를 찍는다.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시대를 대표하는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는 한때 영국이 식민지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던 대문호였다. 어떤 이는 그의 실존 자체에 의문을 두고는 그가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다고도 하고, 또는 여러 영국인들의 집단창작물을 '셰익스피어'라는 가공의 인물을 앞세워 창작자로 만들었다고도 했다. 그만큼 그의 죽음 또한 그 사인에 관한 의문들이 많았으리라.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은 삼백년 전 셰익스피어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을 중심으로 영국의 고서 수집가들과 고전 연구가들, 그리고 셰익스피어 극의 유명배우 드루리 레인 간의 쫓고 쫓기는 이야기가 주제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사인에 관한 결론은 베일에 가려진 채로 끝나지만 고서 연구가들과 드루리 레인은 셰익스피어의 숨겨진 친필 사인 편지를 두고 서로 다른 목적을 이루려 한다. 
물론 '최후의 사건'을 멋지게 해결한 주인공 드루리 레인이 그 자신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여 인류를 위해 조금이라도 이바지하고 싶은"(같은책, <30장>) 목적을 달성하면서 소설은 끝나고 있다. 
그렇다면, '삼백년 전' 셰익스피어의 사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스무살에 내가 영문과에 진학했을 때 그 해 대학을 졸업하던 나의 둘째 누나는 [햄릿], [맥베드], [로미오와 줄리엣], [리어왕] 등 4권의 책을 대학 입학선물로 건넸다. 고등학교 때까지 '영어'를 좋아했지만 셰익스피어는 아마도 잘 몰랐을 내가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로미오와 줄리엣] 대신 [오델로]를 넣으면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이 되었을 것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둘째 누나 송재영은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학이라는 곳을 간 '선구자'였다.

나는 위로 누나만 셋이다. 나와 4살 연상이었던 둘째 누나는 공부를 잘 했는데,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누나는 고등학교 시기 내내 아버지와 결연히 투쟁했다. 가난한 집에서 하나 뿐인 아들만 겨우 대학 보낼 생각이었을 우리 부모님은 의대를 가겠다는, 수학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던 나의 둘째 누나를 대학까지 보낼 수가 없었나 보다. 어느날 아버지한테 대들다가 심하게 맞으면서도 대학 가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던 재영이 누나를 보면서 소심한 중학생인 내 앞에 갑자기 '돈오점수'처럼 인생의 '계획'이 세워졌다. 덕수상고를 가서 은행에 취직하여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다. 언젠가 나의 그 '계획'을 내 나름 용기내어 발설했을 때 부모님은 역시 강하게 반대하셨다. 어머니의 꿈은 내가 포항공대에 가서 탄탄하고 안정된 '기술직'이 되는 것이었는데 나는 아쉽게도 재영이 누나처럼 수학을 잘 하지 못했다. 아무튼, 둘째 누나는 결국 의대를 포기하고 생물학과에 들어갔는데 중간에 의대에 편입하려고 했던 것 같다. 부모님은 누나의 등록금 시기가 오면 돈을 구하기 힘들어 다투기 일쑤였고, 그럴수록 덕수상고와 은행에 대한 나의 '계획'은 갈수록 확고해졌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이룰 수가 없었으며, 나는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로 향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대입원서를 쓸 때 둘째 누나는 무조건 높은 목표를 향하라 계속 조언했지만, 용감했던 누나와 다르게 소심 끝판왕이었던 나는, 두려웠다. 과연 우리 집이 나의 재수를 감당할 수 있을지, 나의 대학등록금 시기에 부모님이 또 얼마나 싸우게 될지. 결국 그 문제는 어떻게든 운좋게 해결되었는데 그건 마지막 학력고사가 끝난 후의 일이었고, 둘째 누나는 시험날 새벽에 나를 꼭 시험장에 데려다 주겠다 우기며 집을 나섰다. 그 이후로도 오랜 동안 몰랐다. 둘째 누나가 아마도 막내 동생인 나를 통해 본인이 못다한 꿈을 보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것을. 대학 4학년 때 취직 생각은 안하고 소설을 쓰겠다던 나를 계속 불러내어 밥을 먹이며 나의 '계획'에 관해 집요하게 물어대던 모습이 지금은 아련하다.

누나가 대입 선물로 주었던 셰익스피어 비극 4권은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설렁설렁 읽었다. '문학'에 관심이 생겨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나의 소설쓰기 목적은 '소설'을 통한 '혁명'이었고 당연히 영문학에는 관심도 없었다. 3~4학년 전공필수였던 셰익스피어가 전공선택으로 바뀌었을 때 나는 차라리 국문과 소설 수업을 들었다. 4권 중 [리어왕]은 지금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도 없는데 그게 새삼 마음 아프다. 누나의 선물을 더 소중하게 읽고 간직했어야 했다.


재영이 누나가 마흔네살로 나의 곁을 떠난 날, 맑은 날이었는데도 아주 잠시 비가 왔다가 갔다. 선뜻 잠들었던 나는 얼른 일어나서 옥상으로 뛰어올라가 하늘을 보았다. 저 멀리 가는 둘째 누나를 다시는 못 볼 거라는 생각 뿐이었다. 항상 나를 지켜보고 응원해주던 그 용감하던 비구름은 맑은 하늘 한켠에서 그렇게 멀어져갔다.


엘러리 퀸이 바너비 로스 필명으로 낸 마지막 소설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은 결국 '해결'되고 말았지만, 셰익스피어의 '죽음'에 관한 비밀은 밝히지 못하였다. 그에 관한 셰익스피어의 친필 편지는 풍문만 무성하되 결국 소설에 실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우리 곁을 떠났을까.
드루리 레인의 최종 '해결'에도 불구하고 그 진위는 여전히 미궁이지만, 위대한 극작가 셰익스피어가 인류에게 그렇듯 나의 하나 뿐인 둘째 누나는 내 삶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

1.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Drury Lane's Last Case)](1933), Barnaby Ross/Ellery Queen, 서계인 옮김, <검은숲>, 2013.
2. [햄릿/맥베드/로미오와 줄리엣/리어왕], William  Shakespeare, 신정옥 옮김, <전예원>, 1989~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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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개념들
몽배원 지음, 이기훈 외 옮김 / 예문서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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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실천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위하여
- [역학과 주자학], 주광호, <예문서원>, 2020.



"주자(朱子)가 역학(易學)을 동원해 구축하고 있는 '성리학(性理學)적 가치체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태극(太極)'이라고 하는 가치적 판명함과, 그로부터 확장된 질서와 조화의 체계다. 주자는 그것을 통해 이 세계가 얼마나 법칙적이고 체계적이며, 그래서 얼마나 규범적인가를 보이고자 한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그렇듯, 인간과 인간의 사회 역시 이러한 법칙과 체계의 일부분으로서 존재하고 또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주자가 구축하고자 하는 '성리학적 가치체계'다."
- [역학과 주자학], '전언', 주광호, <예문서원>, 2020.


삼봉 정도전이 부패한 고려 왕조를 개혁하는 것을 넘어 아예 뒤집어 엎으려고 했던 배경은 삼봉 개인의 정치적 입지의 한계였을 수도 있으나, 당시에는 '진보'적이었던 '성리학(性理學)'을 기본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공자의 '인(仁)'과 맹자의 '의(義)'를 기반으로 '민본(民本)'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중국 고대로부터의 '유학(儒學)' 전통은 '도교(道敎)'나 '불교' 등과의 사상투쟁을 거치면서 12세기 송나라에 이르러 집대성되기에 이른다. 남송시대 주희(朱熹:1130~1200)는 '유학'의 오랜 경전들을 '사서삼경(四書三經)'으로 정리하고 주석을 달았다. 그 '삼경' 중 하나인 [역경(易經)]에 관한 주석은 우주만물과 인간사회 '도덕윤리'의 기준이 되는 거대하고 체계적인 철학이자 세계관이었다. '천명(天命)'의 흐름은 우주만물의 '본성(本性)'을 드러냄이며, 그 선한 '본성'인 '성(性)'이 올바르게 발현하고자 하는 본질인 그 '천명'이 바로 '리(理)'이며, 이러한 '성즉리(性卽理)'의 철학이 '성리학(性理學)'이다. '성리학'은 그 사상의 최종 집대성자인 '주희'의 성을 따서 '주자학(朱子學)'이 된다. '유학'은 이미 고대로부터 중국과 한반도에 정착한 지 오래된 사상이었으나 중국에 '성리학'이 나타난 것은 12세기 송나라였고, 우리 한반도는 13세기 고려말에 들어와 사회를 '올바른 본성에 따라' 개조하려는 젊은 선비들을 '신진 사대부'로 이념무장시켰다.

물론, '신분차별'과 '군주정'의 시대적 배경이 있었으나 조선 중기경까지도 사회 '변혁'이나 '개혁'의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은 사림파 선비들이 기득권이 되고 당쟁에 매몰되는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수구반동적인 '유교'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세계는 더 이상 '신분차별'과 '군주제'를 당연시하던 그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고, '주자'는 물론 '공자'까지도 죽어야 젊은 세대가 살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삼봉의 길을 따라 추적하던 끝에 결국, '성리학', 즉 '주자학'을 만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나에게는 '필연'이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주자학'을 이야기함은 조선 후기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바로, '성숙한 인격이 모여 만드는 이상적 사회'를 바라며 유학사상을 집대성하던 12세기 '도학자(道學者)' 주희의 조건인 것이다.


"태극(太極)이나 동정(動靜)과 같은 우주론적 전통의 개념들을 자연스럽게 [중용]이나 [역전]의 '천인(天人)관계'로 전환시킴으로써 주돈이의 본체론을 세련되게 완성... 이 완성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적 전거가 바로 [중용]의 '天命之謂性(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이 성)'과 [계사]의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다. [계사전]에서 말하는 '한 번은 음이었다가 한 번은 양이었다가 하도록 만드는 도'는 곧 이 우주의 '본체(本體)'로서의 '태극'이자 '역리(易理)'이다. 주자의 모든 역학체계, 즉 상수, 복서, 의리는 최종적 '태극'으로 수렴되고, 우주의 본체인 '태극'은 '동정'하여 인간의 본체가 된다. 주자의 모든 역학체계가 '태극'으로 수렴되고, 그것이 우주와 인간의 본체가 된다는 말은, 주자의 모든 역학이 최종적으로 인간의 도덕성 본성에 대한 근거로 동원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주자의 '역학(易學)'은 그의 '성리학(性理學)'과 연결된다."
- [역학과 주자학], '3부 15장 - 주자와 육구연의 무극태극 논쟁', 주광호, 2020.


우선, '주자' 즉 '주희'의 시대는 북송이 망하고 북방의 금나라에 의해 남송이 핍박받던 시대였다. 전시 상태가 오래되었으나 강남의 풍부한 물자로 남송은 여전히 지배층의 향락이 만연했고 '유가'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군자(성숙한 인격자)'의 경지에 오른 '선비'들이 사회를 개조해야 했다. 그 방식은 옛 성인들의 경전을 철저히 공부하고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인데, 한당시대와 달리 송나라에 이르면 '경전'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해석으로 주석을 달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북송의 주돈이와 정이, 정호 형제 등은 그 시작이었으며 남송의 주희는 이 방대한 작업의 '집대성자'였다. 그의 제자들과 후대가 '주자(朱子)'라 우러르며 그의 '성리학'을 절대시하고 화석화시킨 것이지, 정작 주희 자신은 [경전]을 있는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 '이단'이었다.

[대학]과 [중용]은 물론, 주자가 [역경]에 관한 주석과 해석을 한 이유는 '성리학'의 세계관을 체계화하고 조직화하기 위함이다. '성리학'은 '도교'나 '불교'와 달리 세계를 관념의 상태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천명'이나 '본성'을 인간 사회에 제대로 실현하기 위한 '실천철학'이다. 춘추전국 제자백가의 쟁명시대로부터 12세기까지 '유-불-선' 등은 치열한 사상투쟁을 벌인 만큼 상호 침투하고 융합하며 영향을 받는 과정을 겪었을 테고, 북송시대는 더 이상 앞선 유학자들의 말에 일획일점도 고치지 말자는 태도가 아닌 다양한 해석을 도입했으며, "역리(易理)는 천리(天理)이자 성리(性理)"라는 '성리학'의 세계관은 도가는 물론 불교까지도 아우른 '유학'의 진보된 형태였다. [역경] 또는 [주역]이 '유교'의 주요 경전 중 하나가 된 이유다.

주자는 [역경]은 '복서' 즉 '점치는 책'에 불과하다고 규정한다. <하도낙서>를 발견한 복희씨가 '8괘'를 만들고, 주문왕과 주공단이 '64괘'와 384효'로 확장한 집단기록으로서 [역경(易經)]은 길흉을 점치기 위한 책이다. 그러나 공자와 왕필 같은 '유가'의 후학들이 이에 말과 글(辭)의 '주석'을 단 [역전(易傳)]은 세계관을 담은 '철학'적 작업이었다. 주희는 전자인 [역경]으로부터 기하학적이고 대수학적인 자연의 거대한 체계를 보았고, 후자인 [역전]을 통해 우주만물과 인간사회의 '본체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연속적 관계 및 그 구체적 '만남'을 체계화시켰다. 

'주자학'의 세계관은 육구연이라는 유학자와 '태극무극논쟁'을 통해 발전한다. 세계의 '본체'인 '리(理)'로서 [주역]의 '태극'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無)'인 '무극(無極)'이라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 주희의 주장이었고 이를 부정하고 '태극' 자체가 본질이라는 육구연의 고대답습적 사상과 서로를 '이단'이라며 논쟁하였으나 결국 합의를 보지 못했는데, 도교와 융합한 주희가 당시 '유가'적 전통으로서는 더욱 '이단'적이었으나 다른 사상과 변증법적으로 체계화된 주희의 '주자학'이 주류사상으로서 '성리학'적 세계관이 된다. 인간사회에서 '실천철학' 이전에 주자학의 '자연철학'은 [역경]에 관한 확장된 변증법으로 인해 확고해 진다. <하도낙서>와 <선천역학>의 기하학적이고 대수학적인 '상수학(象數學) 체계와 이에 관한 확장된 주석으로서 '의리학(義理學)'은 이렇게 '성리학(주자학)'의 '자연철학'이 된다.


"주자 역학은 태극으로부터 만물로 이어지는 '존재론적 연속성'이며, 태극에서 인극으로 직결되는 '본체론적 현재성'이다. 때문에 그의 '태극론'은 '본체론'임과 동시에 '존재론'이 된다... 주자는 '역'을 음양의 변화로, '태극'을 그것의 '이치(理)'로 규정하고 있다. '태극(太極)''은 '역(易)'의 '리(理)'다."
- [역학과 주자학], '3부 13장 - 주자의 형이상학적 체계와 태극이기론', 주광호, 2020.


우주만물의 근원이자 '본체'로서 '리(理)'는 그 관념 자체가 아니라 철학적 '주체' 외부의 '대상(객체)'으로서 '무극' 또는 '태극'으로 현상하는데 이는 그 자체 철학적 기본 범주인 '존재론'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우주발생 근원으로서 '본체론'이다. '이기론'으로 알려진 '성리학'의 논쟁은 시공간적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본체론'이자 '존재론'으로서 병진적이고 상호 침투하는 변증법적 '연속성'의 관계이다. 중요한 것은 육구연의 '심즉리(心卽理)' 설과 같이 '주체'로부터 세계의 근원을 찾는 '관념론'이 아니라, '주체' 외부의 '객체'로부터 그 근원을 규정하는 '유물론'적 철학이다. 당대 과학의 미발전 한계로 인해 더 이상의 세계 근원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의 '유물론' 또한 기계적 유물론은 될 수 없기에 '주체' 너머 '객체'로서의 근원 규명의 문제는 현대 과학의 과제로 남아 있다. 
현대 철학은 이제 다시 세계의 근원을 '신'이라는 '일자'로서 설명할 수 없다. 21세기 철학자의 맥락과 12세기 도학자의 맥락은 엄연히 다르지만, 현대 철학의 '유물론'적 방법론이 12세기 '성리학(주자학)'의 방법론과 크게 달랐던 것은 아니다.


'주희의 태극관' 연구로 북경대 박사학위를 받은 동양철학자 주광호 교수는 2020년에 [역학과 주자학]이라는 저서에서 기존 '이기론'과 도덕윤리학의 영역에 국한되었던 '주자학(성리학)'의 철학적 기반이 '역학'의 '태극론'이라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당대 사회 개혁을 위해 다듬어지고 실제로 조선의 건국은 물론 국가운영 과정에서 '실천철학'으로 굳건하게 사상적 토대가 되었던 '성리학'의 이야기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왕조의 시대적 위기를 겪은 조선 중후기 난세에 송시열의 서인 노론 같은 교조적 '주자학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윤휴 같은 주자학의 '이단'도 있었고, 이후 실학파에게 '성리학'은 화석화된 '주자학'에만 머물지 않았다. 조선 중후기 '성리학'의 '진보'적 전통을 이어받은 '선비'들은 조선 사회를 다시 세우고자 다시금 '성리학'으로 돌아갔고, 그 배경은 당대의 '관념론'적 '주자학'이 아니라 12세기 '유물론'적 철학으로 체계화되고 규범화되던 '성리학'이었다.

'태극'에서부터 '음양오행'으로, '하도낙서'에서 '4상'과 '8괘'를 거쳐 '64괘사'와 '384효사'로 분화되는 '주체' 외부의 '대상(객체)'에 관한 [주역]의 자연철학적 세계관은 결국, 인간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철학'이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조화되고 화석화된 '실천철학'은 자연철학 영역에서는 어떠할지 몰라도 인간 사회에서는 '관념론'에 다름 아니다.
'주자'는 '태극'으로 모든 것을 설명한 것이 아니었다. 주희에게 "성리 자체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개별적 차원의 이기론(주광호, 같은책, <3부 13장>)"이었으며, [대학]의 '명덕(明德)'은 '구중리(具衆理) 응만사(應萬事)', 즉 '모든 이치를 갖추고서 모든 구체적 대상에 대응하는' 주체의 능력이다.
주희 '성리학'의 '유물론'적 성격은 모든 사물(대상/객체)에는 그 자체의 '본성'으로서 구체적 법칙이 있으므로 그에 맞게 대응하는 것이 주체의 '성리'라는 현실적 '실천강령'에 있었다. 그로 인해 주희 '성리학'의 '공부론'에서 '주체'의 '함양론'은 혼자서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대상(객체)'과 구체적으로 관계(만남)를 맺는 '격물(格物)'과 그로 인해 인식을 확장하는 '치지(致知)'를 위한 준비단계가 된다. 


"모든 진리는 구체적이다."
- V. I. Lenin.

"중요한 것은 '실천의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
- L. Althusser.


내가 조선을 건국한 삼봉 정도전을 기리는 이유가 바로 [대학]의 '3강령 8조목'을 현실정치에서 유일하게 실현한 인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지금, 삼봉 정도전을 쫓다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 '성리학'을 다시금 되새기는 이유는 그 낡은 '실천철학'을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진보'적이었던 '성리학'이라는 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위함이다.


"철학은 보편을 추구하지만 철학자는 시대적 소명과 관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게 철학은 해석된다... 20세기 철학사가에게 그들의 맥락이 있었던 만큼이나 12세기의 도학자에게도 그만의 맥락이 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성숙한 인격이 모여 만드는 이상적 사회 건설'은 선진시대 이후 유가의 일관된 목표였으며, 주자의 평생 작업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회를 등진 인격자는 결코 인격자일 수 없으며, 현실과 맥락이 없는 윤리적 명제 역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 [역학과 주자학], '결어: 무엇이 주자학인가?', 주광호, 2020..


***

1. [역학(易學)과 주자학(朱子學) - 역학은 어떻게 주자학을 만들었는가?], 주광호, <예문서원>, 2020.
2. [성리학의 개념들](1989), 몽배원 지음, 홍원식 외 옮김, <예문서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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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학과 주자학 - 역학은 어떻게 주자학을 만들었는가 성리총서 17
주광호 지음 / 예문서원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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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실천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위하여
- [역학과 주자학], 주광호, <예문서원>, 2020.



"주자(朱子)가 역학(易學)을 동원해 구축하고 있는 '성리학(性理學)적 가치체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태극(太極)'이라고 하는 가치적 판명함과, 그로부터 확장된 질서와 조화의 체계다. 주자는 그것을 통해 이 세계가 얼마나 법칙적이고 체계적이며, 그래서 얼마나 규범적인가를 보이고자 한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그렇듯, 인간과 인간의 사회 역시 이러한 법칙과 체계의 일부분으로서 존재하고 또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주자가 구축하고자 하는 '성리학적 가치체계'다."
- [역학과 주자학], '전언', 주광호, <예문서원>, 2020.


삼봉 정도전이 부패한 고려 왕조를 개혁하는 것을 넘어 아예 뒤집어 엎으려고 했던 배경은 삼봉 개인의 정치적 입지의 한계였을 수도 있으나, 당시에는 '진보'적이었던 '성리학(性理學)'을 기본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공자의 '인(仁)'과 맹자의 '의(義)'를 기반으로 '민본(民本)'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중국 고대로부터의 '유학(儒學)' 전통은 '도교(道敎)'나 '불교' 등과의 사상투쟁을 거치면서 12세기 송나라에 이르러 집대성되기에 이른다. 남송시대 주희(朱熹:1130~1200)는 '유학'의 오랜 경전들을 '사서삼경(四書三經)'으로 정리하고 주석을 달았다. 그 '삼경' 중 하나인 [역경(易經)]에 관한 주석은 우주만물과 인간사회 '도덕윤리'의 기준이 되는 거대하고 체계적인 철학이자 세계관이었다. '천명(天命)'의 흐름은 우주만물의 '본성(本性)'을 드러냄이며, 그 선한 '본성'인 '성(性)'이 올바르게 발현하고자 하는 본질인 그 '천명'이 바로 '리(理)'이며, 이러한 '성즉리(性卽理)'의 철학이 '성리학(性理學)'이다. '성리학'은 그 사상의 최종 집대성자인 '주희'의 성을 따서 '주자학(朱子學)'이 된다. '유학'은 이미 고대로부터 중국과 한반도에 정착한 지 오래된 사상이었으나 중국에 '성리학'이 나타난 것은 12세기 송나라였고, 우리 한반도는 13세기 고려말에 들어와 사회를 '올바른 본성에 따라' 개조하려는 젊은 선비들을 '신진 사대부'로 이념무장시켰다.

물론, '신분차별'과 '군주정'의 시대적 배경이 있었으나 조선 중기경까지도 사회 '변혁'이나 '개혁'의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은 사림파 선비들이 기득권이 되고 당쟁에 매몰되는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수구반동적인 '유교'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세계는 더 이상 '신분차별'과 '군주제'를 당연시하던 그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고, '주자'는 물론 '공자'까지도 죽어야 젊은 세대가 살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삼봉의 길을 따라 추적하던 끝에 결국, '성리학', 즉 '주자학'을 만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나에게는 '필연'이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주자학'을 이야기함은 조선 후기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바로, '성숙한 인격이 모여 만드는 이상적 사회'를 바라며 유학사상을 집대성하던 12세기 '도학자(道學者)' 주희의 조건인 것이다.


"태극(太極)이나 동정(動靜)과 같은 우주론적 전통의 개념들을 자연스럽게 [중용]이나 [역전]의 '천인(天人)관계'로 전환시킴으로써 주돈이의 본체론을 세련되게 완성... 이 완성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적 전거가 바로 [중용]의 '天命之謂性(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이 성)'과 [계사]의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다. [계사전]에서 말하는 '한 번은 음이었다가 한 번은 양이었다가 하도록 만드는 도'는 곧 이 우주의 '본체(本體)'로서의 '태극'이자 '역리(易理)'이다. 주자의 모든 역학체계, 즉 상수, 복서, 의리는 최종적 '태극'으로 수렴되고, 우주의 본체인 '태극'은 '동정'하여 인간의 본체가 된다. 주자의 모든 역학체계가 '태극'으로 수렴되고, 그것이 우주와 인간의 본체가 된다는 말은, 주자의 모든 역학이 최종적으로 인간의 도덕성 본성에 대한 근거로 동원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주자의 '역학(易學)'은 그의 '성리학(性理學)'과 연결된다."
- [역학과 주자학], '3부 15장 - 주자와 육구연의 무극태극 논쟁', 주광호, 2020.


우선, '주자' 즉 '주희'의 시대는 북송이 망하고 북방의 금나라에 의해 남송이 핍박받던 시대였다. 전시 상태가 오래되었으나 강남의 풍부한 물자로 남송은 여전히 지배층의 향락이 만연했고 '유가'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군자(성숙한 인격자)'의 경지에 오른 '선비'들이 사회를 개조해야 했다. 그 방식은 옛 성인들의 경전을 철저히 공부하고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인데, 한당시대와 달리 송나라에 이르면 '경전'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해석으로 주석을 달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북송의 주돈이와 정이, 정호 형제 등은 그 시작이었으며 남송의 주희는 이 방대한 작업의 '집대성자'였다. 그의 제자들과 후대가 '주자(朱子)'라 우러르며 그의 '성리학'을 절대시하고 화석화시킨 것이지, 정작 주희 자신은 [경전]을 있는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 '이단'이었다.

[대학]과 [중용]은 물론, 주자가 [역경]에 관한 주석과 해석을 한 이유는 '성리학'의 세계관을 체계화하고 조직화하기 위함이다. '성리학'은 '도교'나 '불교'와 달리 세계를 관념의 상태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천명'이나 '본성'을 인간 사회에 제대로 실현하기 위한 '실천철학'이다. 춘추전국 제자백가의 쟁명시대로부터 12세기까지 '유-불-선' 등은 치열한 사상투쟁을 벌인 만큼 상호 침투하고 융합하며 영향을 받는 과정을 겪었을 테고, 북송시대는 더 이상 앞선 유학자들의 말에 일획일점도 고치지 말자는 태도가 아닌 다양한 해석을 도입했으며, "역리(易理)는 천리(天理)이자 성리(性理)"라는 '성리학'의 세계관은 도가는 물론 불교까지도 아우른 '유학'의 진보된 형태였다. [역경] 또는 [주역]이 '유교'의 주요 경전 중 하나가 된 이유다.

주자는 [역경]은 '복서' 즉 '점치는 책'에 불과하다고 규정한다. <하도낙서>를 발견한 복희씨가 '8괘'를 만들고, 주문왕과 주공단이 '64괘'와 384효'로 확장한 집단기록으로서 [역경(易經)]은 길흉을 점치기 위한 책이다. 그러나 공자와 왕필 같은 '유가'의 후학들이 이에 말과 글(辭)의 '주석'을 단 [역전(易傳)]은 세계관을 담은 '철학'적 작업이었다. 주희는 전자인 [역경]으로부터 기하학적이고 대수학적인 자연의 거대한 체계를 보았고, 후자인 [역전]을 통해 우주만물과 인간사회의 '본체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연속적 관계 및 그 구체적 '만남'을 체계화시켰다. 

'주자학'의 세계관은 육구연이라는 유학자와 '태극무극논쟁'을 통해 발전한다. 세계의 '본체'인 '리(理)'로서 [주역]의 '태극'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無)'인 '무극(無極)'이라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 주희의 주장이었고 이를 부정하고 '태극' 자체가 본질이라는 육구연의 고대답습적 사상과 서로를 '이단'이라며 논쟁하였으나 결국 합의를 보지 못했는데, 도교와 융합한 주희가 당시 '유가'적 전통으로서는 더욱 '이단'적이었으나 다른 사상과 변증법적으로 체계화된 주희의 '주자학'이 주류사상으로서 '성리학'적 세계관이 된다. 인간사회에서 '실천철학' 이전에 주자학의 '자연철학'은 [역경]에 관한 확장된 변증법으로 인해 확고해 진다. <하도낙서>와 <선천역학>의 기하학적이고 대수학적인 '상수학(象數學) 체계와 이에 관한 확장된 주석으로서 '의리학(義理學)'은 이렇게 '성리학(주자학)'의 '자연철학'이 된다.


"주자 역학은 태극으로부터 만물로 이어지는 '존재론적 연속성'이며, 태극에서 인극으로 직결되는 '본체론적 현재성'이다. 때문에 그의 '태극론'은 '본체론'임과 동시에 '존재론'이 된다... 주자는 '역'을 음양의 변화로, '태극'을 그것의 '이치(理)'로 규정하고 있다. '태극(太極)''은 '역(易)'의 '리(理)'다."
- [역학과 주자학], '3부 13장 - 주자의 형이상학적 체계와 태극이기론', 주광호, 2020.


우주만물의 근원이자 '본체'로서 '리(理)'는 그 관념 자체가 아니라 철학적 '주체' 외부의 '대상(객체)'으로서 '무극' 또는 '태극'으로 현상하는데 이는 그 자체 철학적 기본 범주인 '존재론'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우주발생 근원으로서 '본체론'이다. '이기론'으로 알려진 '성리학'의 논쟁은 시공간적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본체론'이자 '존재론'으로서 병진적이고 상호 침투하는 변증법적 '연속성'의 관계이다. 중요한 것은 육구연의 '심즉리(心卽理)' 설과 같이 '주체'로부터 세계의 근원을 찾는 '관념론'이 아니라, '주체' 외부의 '객체'로부터 그 근원을 규정하는 '유물론'적 철학이다. 당대 과학의 미발전 한계로 인해 더 이상의 세계 근원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의 '유물론' 또한 기계적 유물론은 될 수 없기에 '주체' 너머 '객체'로서의 근원 규명의 문제는 현대 과학의 과제로 남아 있다. 
현대 철학은 이제 다시 세계의 근원을 '신'이라는 '일자'로서 설명할 수 없다. 21세기 철학자의 맥락과 12세기 도학자의 맥락은 엄연히 다르지만, 현대 철학의 '유물론'적 방법론이 12세기 '성리학(주자학)'의 방법론과 크게 달랐던 것은 아니다.


'주희의 태극관' 연구로 북경대 박사학위를 받은 동양철학자 주광호 교수는 2020년에 [역학과 주자학]이라는 저서에서 기존 '이기론'과 도덕윤리학의 영역에 국한되었던 '주자학(성리학)'의 철학적 기반이 '역학'의 '태극론'이라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당대 사회 개혁을 위해 다듬어지고 실제로 조선의 건국은 물론 국가운영 과정에서 '실천철학'으로 굳건하게 사상적 토대가 되었던 '성리학'의 이야기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왕조의 시대적 위기를 겪은 조선 중후기 난세에 송시열의 서인 노론 같은 교조적 '주자학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윤휴 같은 주자학의 '이단'도 있었고, 이후 실학파에게 '성리학'은 화석화된 '주자학'에만 머물지 않았다. 조선 중후기 '성리학'의 '진보'적 전통을 이어받은 '선비'들은 조선 사회를 다시 세우고자 다시금 '성리학'으로 돌아갔고, 그 배경은 당대의 '관념론'적 '주자학'이 아니라 12세기 '유물론'적 철학으로 체계화되고 규범화되던 '성리학'이었다.

'태극'에서부터 '음양오행'으로, '하도낙서'에서 '4상'과 '8괘'를 거쳐 '64괘사'와 '384효사'로 분화되는 '주체' 외부의 '대상(객체)'에 관한 [주역]의 자연철학적 세계관은 결국, 인간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철학'이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조화되고 화석화된 '실천철학'은 자연철학 영역에서는 어떠할지 몰라도 인간 사회에서는 '관념론'에 다름 아니다.
'주자'는 '태극'으로 모든 것을 설명한 것이 아니었다. 주희에게 "성리 자체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개별적 차원의 이기론(주광호, 같은책, <3부 13장>)"이었으며, [대학]의 '명덕(明德)'은 '구중리(具衆理) 응만사(應萬事)', 즉 '모든 이치를 갖추고서 모든 구체적 대상에 대응하는' 주체의 능력이다.
주희 '성리학'의 '유물론'적 성격은 모든 사물(대상/객체)에는 그 자체의 '본성'으로서 구체적 법칙이 있으므로 그에 맞게 대응하는 것이 주체의 '성리'라는 현실적 '실천강령'에 있었다. 그로 인해 주희 '성리학'의 '공부론'에서 '주체'의 '함양론'은 혼자서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대상(객체)'과 구체적으로 관계(만남)를 맺는 '격물(格物)'과 그로 인해 인식을 확장하는 '치지(致知)'를 위한 준비단계가 된다. 


"모든 진리는 구체적이다."
- V. I. Lenin.

"중요한 것은 '실천의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
- L. Althusser.


내가 조선을 건국한 삼봉 정도전을 기리는 이유가 바로 [대학]의 '3강령 8조목'을 현실정치에서 유일하게 실현한 인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지금, 삼봉 정도전을 쫓다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 '성리학'을 다시금 되새기는 이유는 그 낡은 '실천철학'을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진보'적이었던 '성리학'이라는 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위함이다.


"철학은 보편을 추구하지만 철학자는 시대적 소명과 관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게 철학은 해석된다... 20세기 철학사가에게 그들의 맥락이 있었던 만큼이나 12세기의 도학자에게도 그만의 맥락이 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성숙한 인격이 모여 만드는 이상적 사회 건설'은 선진시대 이후 유가의 일관된 목표였으며, 주자의 평생 작업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회를 등진 인격자는 결코 인격자일 수 없으며, 현실과 맥락이 없는 윤리적 명제 역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 [역학과 주자학], '결어: 무엇이 주자학인가?', 주광호, 2020..


***

1. [역학(易學)과 주자학(朱子學) - 역학은 어떻게 주자학을 만들었는가?], 주광호, <예문서원>, 2020.
2. [성리학의 개념들](1989), 몽배원 지음, 홍원식 외 옮김, <예문서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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