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소년 완전판 1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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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박못 '20세기 소년'과 일본 만화
- [소년 공작왕]과 [북두의 권], [20세기 소년]과 이토 준지 '공포 만화'


어찌 보면 '20세기 소년'인 나는, 20세기에 청소년기와 이십대를 몽땅 보내면서 대부분의 세계관을 지난 세기에 이미 '완성'했다. 맞는지 틀린지가 아니다. '신문명'으로 당최 수정되지 않는 내 생각의 기본 뿌리, 즉 나의 '세계관'과 나의 '철학' 일체는 '20세기'의 그것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신문명의 새시대를 따라 나의 생각과 생활을 혁신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것에 수백 번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내 나름의 가치관을 교체하고 싶지는 않다. 
어찌 보면 '신문명의 배교자'인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원만하게 어울리기 위해 '신문명 과학'이라는 종교를 믿는 척 하지만 진심으로 추앙할 마음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내 진심이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수차례 명상해 보고 내린 나 자신에 관한 잠정 결론이다. 이제 중년에 접어들어 '꼰대'가 되어도 당연시될 나이가 되어 대놓고 '커밍 아웃'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를 아는 사람들은 '신문명'에 기민하게 따라가지 못하고 유행에 둔감한 내 성정을 보고 이미 그리 나를 평가했겠지만 정작 얼마 전까지의 젊은 나는 그런 판정에 불복하곤 했다. "나도 당신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 사람이 다 같을 수 있겠는가.

나는 1980년대 이전의 기억이란 것이 별로 없을 1974년 갑인년 '푸른 범'띠다. 내가 그 해 태어났다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 짧은 시간이나마 살아오면서 지켜본 결과 나는 1974년생이 삼촌격인 1958년 무술년생 '58년 개띠' 못지 않게 향후 우리 사회에서 기염을 토할 것으로 예상한다. 내 주변에서 보았을 때 '73년생 소띠'나 '75년생 토끼띠'는 전반적으로 순해보였을 정도로 내 동갑들의 기가 세 보였다. 나이 들어 가면이 두꺼워진 지금이 아니라 거의 벌거숭이 인격에 가까웠던 20대 초반까지의 내 주변을 되새겨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결코 보편화될 수 없는 의견이지만, 난 지난 2017년 '장미 대선'의 15명 대선후보 중 1/3 정도가 '74 갑인년 범띠'였다는 사실을 하나의 상징적 근거로 든다. 


나는 '일본 만화'를 부러 찾아서 보지 않는다. 흥미가 없다기 보다는 한 번 빠지면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유아 시절 TV에서 어른들이 틀어준 '어린이 명작동화'부터 청소년기 의식주와 같았던 오락실의 게임들이 전부 일본에서 만든 것이었으니 지금껏 이미 너무 많이 보기도 했겠다. 내가 좋아했던 영국소설 [보물섬](로버트 스티븐슨/1883년)의 이미지도 데자키 오사무의 1979년작 TV 방영판 일본 만화영화로 남아있다. 국산 태권브이(1976년)가 지구를 분명히 지키고 있는데도 나는 사실 일본산 마징가Z(1972년)와 그레이트 마징가(1974년)를 더 좋아했다. 


"세상에는 명(明)과 암(暗) 두 종류의 다른 세력이 있는데, 명(明)은 광명이니 선(善)이고 이(理)이며, 암(暗)은 암흑이니 악(惡)이고 욕(欲)이라는 것이다. 이 두 세력은 대립 항쟁을 하는데, 초제(初際), 중제(中際), 후제(後際)의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초제 단계에는 천지가 없고 명암만 있을 뿐, 명의 성질인 지혜와 암의 성질인 ‘치우(痴愚)’가 대립 상태를 이룬다. 중제 단계에는 암의 세력이 발전하고 확대되어 명의 세력을 압박하고 멋대로 내쫓아 대환(大患)이 만들어진다. 이때에 바로 명왕이 세상에 나와서 투쟁을 거쳐 암흑을 내쫓는다. 후제 단계에는 명과의 암의 이종(二宗)이 각각 제자리로 돌아가 명은 대명(大明)으로 돌아가고 암은 적암(積暗)으로 돌아가게 된다. 초제는 명암 대립으로서 과거이고, 중제는 명암 투쟁으로서 현재이며, 후제는 명암 복위로서 미래인 것이다…"
- [주원장전], <1-2. 유랑청년-행각승>, 오함, 1949.


고등학교 때 문방구 해적판으로 불법유통되던 일본 만화 중 가장 즐겨본 건 오기노 마코토의 [소년 공작왕](1985년)이었다. 친구들은 남성미 철철 넘치는 [북두의 권](하라 테츠오/1983년)에 더 열광하며 연속 주먹을 날리거나 손가락으로 혈을 찌르고는 "넌 이미 죽어 있다"는 대사를 읊고 돌아서곤 했지만, 나는 [공작왕]의 배경인 밀교(密敎)와 성배(聖杯), 나치의 악마적 부활과 이를 막는 지옥신(地獄神)의 강림(降臨) 등과 같은 신비적 요소에 더 빠져들기 일쑤였다. 선악(善惡)과 명암(明暗)이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 현실, 악마를 처단하는 것이 천상의 존재가 아니라 지옥(명부;冥府)의 '공작명왕(孔雀明王)'이라는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3세기경 페르시아의 '마니교(摩尼敎)'는 서방의 기독교와 인도의 '조로아스터교', 불교 등의 교리가 결합하여 창시되었는데 이는 '명(明)교'의 기원이다. 중국 원나라 말기 '명태조' 주원장은 이 '명교'와 백련교 등의 혼합 이데올로기를 지도이념으로 한 '홍건(紅巾)' 농민반란군에서 '한(漢)족 독립투쟁'을 통해 명(明)나라를 건국한다. 고대로부터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양의 종교가 서로 섞이면서 '미륵불(彌勒佛)'이나 '명왕(明王)' 같은 초인적 '구세주(救世主)'를 앞세워 부조리한 세상을 뒤집어 엎고 다수 민중의 손으로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것이 이러한 민간신앙으로서 '밀교(密敎)'의 역사이기도 하다. 태권브이는 한없이 착했으나 마징가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고 '공작명왕'은 지옥에 살았으니 동아시아 왕조 말기에 농민반란의 종교이자 혁명이념으로 등장한 마니교나 백련교, 명교나 미륵불하생교 등의 '구세주'는 '하느님'의 대리자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현실에서 치열한 계급투쟁을 통해 악마의 피를 손에 묻혀야 하는 존재였는데, 실제 마니교가 뿌리인 명교에서 '선악'과 '명암'은 처절한 전쟁을 치르지만 결국에는 서로를 뿌리뽑는 게 아니라 서로 대체하며 공존하는 '변증법'적 관계다. [주원장전](1949년)을 쓴 중국의 역사학자 오함은 이런 고대 밀교의 이론적 한계로 인해 역사 속 농민전쟁이 '혁명'을 끝까지 밀어부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혁명(革命)'과 '개혁(改革)'에 관한 인류의 오래된 숙제이기도 하리라. 
애초에 '밝음'은 '어둠'이 있기에 존재 가능했다. 독일 철학자 헤겔(G.W.F.Hegel)은 어딘가에서 "철학은 형식은 다르나 그 내용에서 종교와 같다"고 규정했다는데,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인식하는 사유를 근본으로 하는 기원전의 '조로아스터교' 이래의 모든 종교는 '명암'과 '선악'의 명확한 구분을 기본 전제로 한다. 이분법적인 종교적 사유의 기원인 '조로아스터교(배화교/拜火敎)'가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불(火)'을 숭배한 이유 또한 '불'이 태초의 '어둠'을 밀어내는 '밝음'의 표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초의 '어둠'이 없었다면 '밝음'도 없었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다. 서양의 근대 관념론을 집대성한 헤겔의 거대한 변증법 체계의 시작과 끝도 이와 같다. 동양의 유학(儒學)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한 성리학(性理學) 또한 '리/기(理氣論)', '체/용(體用論)','성/명(性命論)', '심/성(心性論)', '미발/이발(未發/已發論)', '지/행(知行論)', '격물/치지(格物致知論)' 등의 대립쌍들이 주요 개념을 이룬다. 이 대립개념이 '일원론(一元論)'인가 '이원론(二元論)'인가 하는 논쟁은 이후 철학의 발전과정이었다. 
종교든 철학이든 인류의 사유에서 '선악'과 '명암'은 이분법적 관계이면서도 서로의 다른 얼굴이었다.


"형이상학적 우주론의 이론체계... 최종의 완성은 주희의 '리기일원론(理氣一元論)'... '리기(理氣)'는 성리학의 모든 개념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성리학자들이 비록 자연계의 최종적인 근원을 찾고자 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존재를 강조하지 않고 그것의 속성과 기능 그리고 그것의 전개과정을 더욱 강조했다... 성리학에 나타난 '변증법(辨證法)'적 사유의 특징은 여기에서 충분히 표현되고 있다...성리학자들은 이 (관계적) 개념들을 통해 '대립'과 '통일'의 '변증사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대립'과 '통일' 가운데 '통일'을 결정적 요소로 간주하여 모든 '대립'은 결국 '합일(合一)'에 이른다고 생각하였다."
- [성리학의 개념들], '1부. 리기론(理氣論) - 총론', 몽배원, 1989.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몽배원 박사는 성리학의 개념쌍들은 '대립'을 통해 결국 '통일'에 이르는 '변증법'적 관계임을 유학의 계보학적 추적을 통해 증명하려는데, 20세기 '과학적 사회주의' 철학사상가답게 궁극의 '통일'과 '합일'의 증거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21세기'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등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그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에 따라 '통일'될 일 없이 끊임없이 '대립'하는 세기로 접어든지 오래 되었다. 
20세기말의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21세기도 이미 1/5이 지나고 있다. 이제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은 더 이상 '통일'의 '총체성'이 아닌, '대립'의 '영속성'만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이유로 아마도 현대철학은 다시 '명암'과 '선악'의 이분법이자 서로의 다른 얼굴이었던 그 태초의 시원으로 다시 돌아갈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일본 만화에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복잡하고 신비로운 소재들이 많았기 때문 아닐까 싶은데, 굳이 찾아서 읽지 않음에도 약 15년 전 쯤 동네 비디오와 책 대여점에서 마지막으로 빌려 읽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1999~2007)은 [소년 공작왕]과 함께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만화다. 록밴드의 노래에서 모티브를 딴 제목이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한참 잊힌 후 재연되는 이야기, 열심히 읽고 다시 들춰봐도 가면쓴 '친구'가 누구였는지 심증은 가되 물증을 못 찾은 복잡한 구성 등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이후 영화화된 [20세기 소년] CD까지 구입하여 여러 번 돌려보기 했으나 나는 결국 '친구'의 물증을 찾지 못했다. 
이토 준지의 '공포 만화'의 기괴함과 토미에의 신비로운 마력의 잔상 또한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미지다. 현실의 악마를 물리는 퇴마승려 '공작왕'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는 지옥(명부)의 문을 열어야 했고, 인류가 망친 암울한 지구의 미래에서 '북두의 권' 계승자는 '구세주 전설'의 표현이었다. '토미에'라는 미소녀로 상징되는 현실의 치명적 악을 숭상하는 인간의 기괴함은 이토 준지 이상으로 무섭게 그릴 수는 없어 나는 어지간하면 야밤에 포털사이트에 검색어로 떠올리지 않는다.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 같아 집어들었던 [20세기 소년]은 소년적 감성의 현실우화 같으면서도 복잡미묘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내게 일본만화는 '혼돈' 속에서 가끔 피우고 마는 고대 '밀교'적 아편이다.


어김없이 '종말론'이나 '휴거', 'Y2k' 등이 난무했고 그럼에도 아무일 없이 찾아왔던 새로운 밀레니엄 21세기도 4분의 1이 지나고 있다. 아마도 나는 22세기를 보지는 못하리라. 결국 내가 이 세상에서 본 시간은 20세기와 21세기 일부가 될테지만, 운좋게도 두 세기를 거치면서 왠지 20세기를 다 살아본 것 같은 느낌으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21세기만 살아보았을 후배들을 앞에 두고 무슨 '현자(賢者)'라고 되는 듯 20세기의 혁명과 전쟁 등 모든 역동적이고 격변적이었던 역사적 사건을 마치 겪어보기나 한 것처럼 구라나 쳐보려고 책이나 읽으며 '역사'를 운운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가다가는 더 늙어 지금의 '태극기 할아버지' 같은 '꼰대'가 될 상이다. 남은 생 살면서 극히 주의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20세기와 21세기 일부를 스쳐가는 과정에서 앞선 20세기는 책으로나마 '역사'로 알 수 있겠지만 앞으로 펼쳐질 21세기 후반부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제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빼도 박도 못할 '20세기 소년'으로.


***

1. [20세기 소년], 우리사와 나오키, 1999~2007.
2. [소년 공작왕(孔雀王)], 오기노 마코토, 1985.
3. [북두(北斗)의 권(拳)], 하라 테츠오, 1983.
4. [이토 준지 공포 만화 컬렉션], 이토 준지, 1987.
5. [주원장전(朱元璋傳)](1949), 오함 지음, 박원호 옮김, <지식산업사>, 2003.
6. [성리학의 개념들](1989), 몽배원 지음, 홍원식 외 옮김, <예문서원>, 2008.
7.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2006),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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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화질] 공작왕 17권 (완결) 공작왕 17
GTENT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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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박못 '20세기 소년'과 일본 만화
- [소년 공작왕]과 [북두의 권], [20세기 소년]과 이토 준지 '공포 만화'


어찌 보면 '20세기 소년'인 나는, 20세기에 청소년기와 이십대를 몽땅 보내면서 대부분의 세계관을 지난 세기에 이미 '완성'했다. 맞는지 틀린지가 아니다. '신문명'으로 당최 수정되지 않는 내 생각의 기본 뿌리, 즉 나의 '세계관'과 나의 '철학' 일체는 '20세기'의 그것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신문명의 새시대를 따라 나의 생각과 생활을 혁신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것에 수백 번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내 나름의 가치관을 교체하고 싶지는 않다. 
어찌 보면 '신문명의 배교자'인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원만하게 어울리기 위해 '신문명 과학'이라는 종교를 믿는 척 하지만 진심으로 추앙할 마음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내 진심이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수차례 명상해 보고 내린 나 자신에 관한 잠정 결론이다. 이제 중년에 접어들어 '꼰대'가 되어도 당연시될 나이가 되어 대놓고 '커밍 아웃'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를 아는 사람들은 '신문명'에 기민하게 따라가지 못하고 유행에 둔감한 내 성정을 보고 이미 그리 나를 평가했겠지만 정작 얼마 전까지의 젊은 나는 그런 판정에 불복하곤 했다. "나도 당신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 사람이 다 같을 수 있겠는가.

나는 1980년대 이전의 기억이란 것이 별로 없을 1974년 갑인년 '푸른 범'띠다. 내가 그 해 태어났다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 짧은 시간이나마 살아오면서 지켜본 결과 나는 1974년생이 삼촌격인 1958년 무술년생 '58년 개띠' 못지 않게 향후 우리 사회에서 기염을 토할 것으로 예상한다. 내 주변에서 보았을 때 '73년생 소띠'나 '75년생 토끼띠'는 전반적으로 순해보였을 정도로 내 동갑들의 기가 세 보였다. 나이 들어 가면이 두꺼워진 지금이 아니라 거의 벌거숭이 인격에 가까웠던 20대 초반까지의 내 주변을 되새겨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결코 보편화될 수 없는 의견이지만, 난 지난 2017년 '장미 대선'의 15명 대선후보 중 1/3 정도가 '74 갑인년 범띠'였다는 사실을 하나의 상징적 근거로 든다. 


나는 '일본 만화'를 부러 찾아서 보지 않는다. 흥미가 없다기 보다는 한 번 빠지면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유아 시절 TV에서 어른들이 틀어준 '어린이 명작동화'부터 청소년기 의식주와 같았던 오락실의 게임들이 전부 일본에서 만든 것이었으니 지금껏 이미 너무 많이 보기도 했겠다. 내가 좋아했던 영국소설 [보물섬](로버트 스티븐슨/1883년)의 이미지도 데자키 오사무의 1979년작 TV 방영판 일본 만화영화로 남아있다. 국산 태권브이(1976년)가 지구를 분명히 지키고 있는데도 나는 사실 일본산 마징가Z(1972년)와 그레이트 마징가(1974년)를 더 좋아했다. 


"세상에는 명(明)과 암(暗) 두 종류의 다른 세력이 있는데, 명(明)은 광명이니 선(善)이고 이(理)이며, 암(暗)은 암흑이니 악(惡)이고 욕(欲)이라는 것이다. 이 두 세력은 대립 항쟁을 하는데, 초제(初際), 중제(中際), 후제(後際)의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초제 단계에는 천지가 없고 명암만 있을 뿐, 명의 성질인 지혜와 암의 성질인 ‘치우(痴愚)’가 대립 상태를 이룬다. 중제 단계에는 암의 세력이 발전하고 확대되어 명의 세력을 압박하고 멋대로 내쫓아 대환(大患)이 만들어진다. 이때에 바로 명왕이 세상에 나와서 투쟁을 거쳐 암흑을 내쫓는다. 후제 단계에는 명과의 암의 이종(二宗)이 각각 제자리로 돌아가 명은 대명(大明)으로 돌아가고 암은 적암(積暗)으로 돌아가게 된다. 초제는 명암 대립으로서 과거이고, 중제는 명암 투쟁으로서 현재이며, 후제는 명암 복위로서 미래인 것이다…"
- [주원장전], <1-2. 유랑청년-행각승>, 오함, 1949.


고등학교 때 문방구 해적판으로 불법유통되던 일본 만화 중 가장 즐겨본 건 오기노 마코토의 [소년 공작왕](1985년)이었다. 친구들은 남성미 철철 넘치는 [북두의 권](하라 테츠오/1983년)에 더 열광하며 연속 주먹을 날리거나 손가락으로 혈을 찌르고는 "넌 이미 죽어 있다"는 대사를 읊고 돌아서곤 했지만, 나는 [공작왕]의 배경인 밀교(密敎)와 성배(聖杯), 나치의 악마적 부활과 이를 막는 지옥신(地獄神)의 강림(降臨) 등과 같은 신비적 요소에 더 빠져들기 일쑤였다. 선악(善惡)과 명암(明暗)이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 현실, 악마를 처단하는 것이 천상의 존재가 아니라 지옥(명부;冥府)의 '공작명왕(孔雀明王)'이라는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3세기경 페르시아의 '마니교(摩尼敎)'는 서방의 기독교와 인도의 '조로아스터교', 불교 등의 교리가 결합하여 창시되었는데 이는 '명(明)교'의 기원이다. 중국 원나라 말기 '명태조' 주원장은 이 '명교'와 백련교 등의 혼합 이데올로기를 지도이념으로 한 '홍건(紅巾)' 농민반란군에서 '한(漢)족 독립투쟁'을 통해 명(明)나라를 건국한다. 고대로부터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양의 종교가 서로 섞이면서 '미륵불(彌勒佛)'이나 '명왕(明王)' 같은 초인적 '구세주(救世主)'를 앞세워 부조리한 세상을 뒤집어 엎고 다수 민중의 손으로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것이 이러한 민간신앙으로서 '밀교(密敎)'의 역사이기도 하다. 태권브이는 한없이 착했으나 마징가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고 '공작명왕'은 지옥에 살았으니 동아시아 왕조 말기에 농민반란의 종교이자 혁명이념으로 등장한 마니교나 백련교, 명교나 미륵불하생교 등의 '구세주'는 '하느님'의 대리자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현실에서 치열한 계급투쟁을 통해 악마의 피를 손에 묻혀야 하는 존재였는데, 실제 마니교가 뿌리인 명교에서 '선악'과 '명암'은 처절한 전쟁을 치르지만 결국에는 서로를 뿌리뽑는 게 아니라 서로 대체하며 공존하는 '변증법'적 관계다. [주원장전](1949년)을 쓴 중국의 역사학자 오함은 이런 고대 밀교의 이론적 한계로 인해 역사 속 농민전쟁이 '혁명'을 끝까지 밀어부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혁명(革命)'과 '개혁(改革)'에 관한 인류의 오래된 숙제이기도 하리라. 
애초에 '밝음'은 '어둠'이 있기에 존재 가능했다. 독일 철학자 헤겔(G.W.F.Hegel)은 어딘가에서 "철학은 형식은 다르나 그 내용에서 종교와 같다"고 규정했다는데,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인식하는 사유를 근본으로 하는 기원전의 '조로아스터교' 이래의 모든 종교는 '명암'과 '선악'의 명확한 구분을 기본 전제로 한다. 이분법적인 종교적 사유의 기원인 '조로아스터교(배화교/拜火敎)'가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불(火)'을 숭배한 이유 또한 '불'이 태초의 '어둠'을 밀어내는 '밝음'의 표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초의 '어둠'이 없었다면 '밝음'도 없었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다. 서양의 근대 관념론을 집대성한 헤겔의 거대한 변증법 체계의 시작과 끝도 이와 같다. 동양의 유학(儒學)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한 성리학(性理學) 또한 '리/기(理氣論)', '체/용(體用論)','성/명(性命論)', '심/성(心性論)', '미발/이발(未發/已發論)', '지/행(知行論)', '격물/치지(格物致知論)' 등의 대립쌍들이 주요 개념을 이룬다. 이 대립개념이 '일원론(一元論)'인가 '이원론(二元論)'인가 하는 논쟁은 이후 철학의 발전과정이었다. 
종교든 철학이든 인류의 사유에서 '선악'과 '명암'은 이분법적 관계이면서도 서로의 다른 얼굴이었다.


"형이상학적 우주론의 이론체계... 최종의 완성은 주희의 '리기일원론(理氣一元論)'... '리기(理氣)'는 성리학의 모든 개념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성리학자들이 비록 자연계의 최종적인 근원을 찾고자 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존재를 강조하지 않고 그것의 속성과 기능 그리고 그것의 전개과정을 더욱 강조했다... 성리학에 나타난 '변증법(辨證法)'적 사유의 특징은 여기에서 충분히 표현되고 있다...성리학자들은 이 (관계적) 개념들을 통해 '대립'과 '통일'의 '변증사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대립'과 '통일' 가운데 '통일'을 결정적 요소로 간주하여 모든 '대립'은 결국 '합일(合一)'에 이른다고 생각하였다."
- [성리학의 개념들], '1부. 리기론(理氣論) - 총론', 몽배원, 1989.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몽배원 박사는 성리학의 개념쌍들은 '대립'을 통해 결국 '통일'에 이르는 '변증법'적 관계임을 유학의 계보학적 추적을 통해 증명하려는데, 20세기 '과학적 사회주의' 철학사상가답게 궁극의 '통일'과 '합일'의 증거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21세기'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등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그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에 따라 '통일'될 일 없이 끊임없이 '대립'하는 세기로 접어든지 오래 되었다. 
20세기말의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21세기도 이미 1/5이 지나고 있다. 이제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은 더 이상 '통일'의 '총체성'이 아닌, '대립'의 '영속성'만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이유로 아마도 현대철학은 다시 '명암'과 '선악'의 이분법이자 서로의 다른 얼굴이었던 그 태초의 시원으로 다시 돌아갈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일본 만화에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복잡하고 신비로운 소재들이 많았기 때문 아닐까 싶은데, 굳이 찾아서 읽지 않음에도 약 15년 전 쯤 동네 비디오와 책 대여점에서 마지막으로 빌려 읽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1999~2007)은 [소년 공작왕]과 함께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만화다. 록밴드의 노래에서 모티브를 딴 제목이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한참 잊힌 후 재연되는 이야기, 열심히 읽고 다시 들춰봐도 가면쓴 '친구'가 누구였는지 심증은 가되 물증을 못 찾은 복잡한 구성 등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이후 영화화된 [20세기 소년] CD까지 구입하여 여러 번 돌려보기 했으나 나는 결국 '친구'의 물증을 찾지 못했다. 
이토 준지의 '공포 만화'의 기괴함과 토미에의 신비로운 마력의 잔상 또한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미지다. 현실의 악마를 물리는 퇴마승려 '공작왕'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는 지옥(명부)의 문을 열어야 했고, 인류가 망친 암울한 지구의 미래에서 '북두의 권' 계승자는 '구세주 전설'의 표현이었다. '토미에'라는 미소녀로 상징되는 현실의 치명적 악을 숭상하는 인간의 기괴함은 이토 준지 이상으로 무섭게 그릴 수는 없어 나는 어지간하면 야밤에 포털사이트에 검색어로 떠올리지 않는다.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 같아 집어들었던 [20세기 소년]은 소년적 감성의 현실우화 같으면서도 복잡미묘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내게 일본만화는 '혼돈' 속에서 가끔 피우고 마는 고대 '밀교'적 아편이다.


어김없이 '종말론'이나 '휴거', 'Y2k' 등이 난무했고 그럼에도 아무일 없이 찾아왔던 새로운 밀레니엄 21세기도 4분의 1이 지나고 있다. 아마도 나는 22세기를 보지는 못하리라. 결국 내가 이 세상에서 본 시간은 20세기와 21세기 일부가 될테지만, 운좋게도 두 세기를 거치면서 왠지 20세기를 다 살아본 것 같은 느낌으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21세기만 살아보았을 후배들을 앞에 두고 무슨 '현자(賢者)'라고 되는 듯 20세기의 혁명과 전쟁 등 모든 역동적이고 격변적이었던 역사적 사건을 마치 겪어보기나 한 것처럼 구라나 쳐보려고 책이나 읽으며 '역사'를 운운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가다가는 더 늙어 지금의 '태극기 할아버지' 같은 '꼰대'가 될 상이다. 남은 생 살면서 극히 주의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20세기와 21세기 일부를 스쳐가는 과정에서 앞선 20세기는 책으로나마 '역사'로 알 수 있겠지만 앞으로 펼쳐질 21세기 후반부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제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빼도 박도 못할 '20세기 소년'으로.


***

1. [20세기 소년], 우리사와 나오키, 1999~2007.
2. [소년 공작왕(孔雀王)], 오기노 마코토, 1985.
3. [북두(北斗)의 권(拳)], 하라 테츠오, 1983.
4. [이토 준지 공포 만화 컬렉션], 이토 준지, 1987.
5. [주원장전(朱元璋傳)](1949), 오함 지음, 박원호 옮김, <지식산업사>, 2003.
6. [성리학의 개념들](1989), 몽배원 지음, 홍원식 외 옮김, <예문서원>, 2008.
7.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2006),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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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의 발자국 - 소설가와 고생물학자의 유쾌하고 지적인 인간 진화 탐구 여행
후안 호세 미야스. 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 지음, 남진희 옮김, 김준홍 감수 / 틈새책방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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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는 내 안의 '루시(Lucy)'
- [루시의 발자국](2020), 후안 호세 미야스/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 남진희 옮김, 김준홍 감수, <틈새책방>, 2021.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화석 형태로 발견된 '루시(Lucy)'는 약 300만년(320만년) 전에 살았던 원시인이다. 키는 1미터가 조금 넘고, 몸무게는 30킬로그램도 안되었으며, 20세를 전후해서 세상을 떴다. 그녀의 뼈는 발굴자들이 비틀스의 노래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드(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를 듣던 순간에 세상에 나타났다... 350만년 전 이족(직립)보행을 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발자국들은 해변 모래 위에 찍혀있는 우리 아이들의 발자국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우리 모두 무의식 상태에서 생체역학적으로 움직인다."
- [루시의 발자국], '3. 루시 인 더 스카이', 후안 호세 미야스/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 2020.


뤽 베송 감독의 2014년 영화 [루시]에서 우연히 인간 뇌의 100%를 사용하게 된 여주인공이 마지막에 마주보는 존재가 '최초의 인류'로 불리는 '루시(Lucy)'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두뇌'였다는 아인슈타인 조차도 뇌의 10% 정도 썼다는데 그런 천재도 말년에는 치매를 겪고 말았단다. 만약 뇌용량의 전부를 사용한다면 아마도 과부하로 인해 미쳐버리거나 폭발해 버릴 것 같지만 애당초 가능하지 않은 가정이니 정말 그럴지는 과학적으로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사피엔스]의 '빅 히스토리언' 유발 하라리가 '길가메시(Gilgamesh) 프로젝트'라 부른 '인류 영생'의 계획은 과학기술과 AI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간 능력의 100% 이상을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니 영화처럼 '우연한 약물반응'이 아닌 '필연적 과학'의 힘으로 가능할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과학은 그 실현 가능성을 떠나 극한으로까지 실험을 진척시켜야 할 그만의 길이 있을테니 말이다. 결국 영화 [루시]가 남기고 싶은 메시지는 인류가 100% 이상 진화할 때 하더라도 최초의 모습과 결국 마주칠 것이니 '최초의 인간'인 '루시'를 잊지 말라는 경고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인류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약 600만년 전 아프리카 동부지역에서 출현했다. 다른 유인원과 같이 밀림지대에서 나무를 타던 그들이 '어떤 요인'에 의해 땅으로 내려왔고 온갖 맹수들에게 잡아먹히면서도 이 힘든 환경에서 살아남으면서 그들만의 진화를 했다. 완전 직립보행을 하면서 7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가 되고 '불'의 사용과 '인지혁명'을 통해 10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면서 '네안데르탈인' 등의 힘센 종들을 '지략전'으로 물리치거나 '이종교배'로 흡수하면서 현재 지구상 포유류의 1/3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선사(先史)시대'는 인류 역사의 95%를 차지하니 5천년 전에야 '문자'가 처음 나타난 것을 보면 우리의 '문자'는 "전체 역사에서 본다면 '어제' 발명된 것"([루시의 발자국], '0. 할아버지를 찾아뵙고')이다. 물론 '진화'의 역사 또한 선형적이거나 단계적이지만은 않고 복합중층적이고 단계공존적일 테지만,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도식화'와 '공식화'가 필요하다는 게 지론인 나는 60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직립보행', 200만년 전 '호모 하빌리스'의 '도구적 인간', 100~7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의 '불의 발견', 10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의 '인지혁명', 8천년 전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 4천년 전 '청동기', 3천년 전 '철기' 시대 등으로 인류 역사를 단순화하여 기억한다. 여기에 지구 최강의 종(種)이 된 인간이 '과학혁명'을 통해 '호모(Homo)'를 떼고 그냥 '슬기로운' 사피엔스(Sapiens)가 된다는 것이 유발 하라리의 '빅 히스토리(Big History)' 인류학이다. 그 다음 단계는 인류 종 자체가 스스로 '신(神:Deus)'이 되는 '호모 데우스(Homo Deus)'인 것일테고 말이다.


스페인은 고인류학(古人類學) 분야에서 영국이나 미국 못지 않게 발전한 국가라고 한다. 3만 7천년 ~ 1만 4천년 전의 알타미라, 라 코바시에야 동굴벽화나 네안데르탈인,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등 고인류 관련 유적도 많고 그에 따라 연구성과도 높다고 포스텍대 김준홍 교수([루시의 발자국] 감수)는 말한다. 스페인 소설가인 후안 호세 미야스는 유명 고생물학자인 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의 입을 빌어 고인류학과 비교동물학 및 진화생물학 등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오래되고 어려운 전문지식을 현재의 생활 속에 녹여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아르수아가 교수를 따라 유적지와 시장, 놀이터와 학교, 박물관과 성인용품점, 개 전시장과 공동묘지 등을 돌아다니며 인류 진화의 이야기를 엮어내는 이 책 [루시의 발자국](2020년)은 우선, 재미있다. '소설가와 고생물학자의 유쾌하고 지적인 인간 진화 탐구여행'을 부제로 한 내용들은 어려운 주제임에도 머릿속에 억지로 주입할 필요없이 소설 읽듯이 책장을 넘기면 된다. 인류의 역사, 더 넓게 46억년 지구의 역사를 보면 모든 '과학'은 '가설'에 불과하므로 어느 이론이나 주장도 교과서로 공부하듯이 진지하게 읽을 것 없이 '그냥 그렇구나' 하면 될 것 같다. 지금 확실한 것 같은 사실 또는 진리가 앞으로의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의해 언제 뒤집어질지 모른다. 나만 해도 어린 시절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의 앞 단계 조상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두 종은 상당 기간 공존 및 생존경쟁을 했고 6~9만년 전 양종간 상호교배를 통해 현재 인류의 2% 정도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의 형질이 남아 있다고 한다. 아마도 대륙 중앙에서 유래했을 네안데르탈인은 아프리카 동부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후손인 호모 사피엔스보다 체격조건도 좋고 두뇌도 더 커서 육체적 진화가 앞섰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어떤 '우연'한 형질 변화를 겪어 똑똑하고 영리해진 호모 사피엔스의 '인지혁명'이 사회를 더 잘 조직하면서 사회가 덜 발달된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킬 수 있었다고도 한다. 생물의 '진화'는 '필연'이지만, 그 '필연'의 대장정에서 그때 그때의 선택은 '우연'이라는 이 '변증법'은 19세기 오스트리아 수도사 멘델이 교회 뒷마당에 완두콩을 키울 때 새롭게 시작된 것이 아니다. 모든 물질의 역사에 배태된 '법칙'이다. 세살 짜리 아이가 해변에 남긴 발자국은 600만년 전 나무에서 내려와 약 320만년 전 처음 두 발로 걷기 시작한 '루시(Lucy)'의 족적과 같은데, 어떤 '우연'의 힘에 따라 두발로 일어섰는지는 알 수 없지만, 300만년 넘게 후손들은 몸으로 이 생체역학을 그대로 구현하는 일종의 '필연'을 보여준다.


"사냥꾼 인간 가설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은 원래 식물성 양식을 섭취했고, 비교적 적은 양의 고기를 섭취한 가장 마지막 종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이다. 오스트랄로스피테쿠스가 먹던 식물성 양식은 대형 유인원의 먹이처럼 열량이 낮고 섬유질 함량이 높은 것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 고대 유인원의 소화계는 오늘날의 침팬지나 고릴라처럼 그 크기가 컸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사냥꾼 인간 가설은 약 200만년 전 오스트랄로스피테쿠스에서 진화한 (호모) 하빌리스와 이들의 후손이 고기를 더 많이 먹게 되면서 입과 소화계가 그에 맞게 적응해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 [요리 본능], '2장. 요리하는 유인원', 리처드 랭엄, 2009.


약 200만년 전 '호모 하빌리스'는 인류의 조상이 '도구'를 사용한 흔적에서 유래한다. 완전한 '직립보행'의 '호모 에렉투스'와 그로 인해 두 손의 자유를 얻은 인류의 조상이 주변 사물을 '도구'로 활용하며 진화해 갔다는데, 그 덕분에 풍성한 밀림에서 밀려난 척박한 초원지대에서도 먹을거리를 좀더 얻을 수 있었겠지만, 인류의 조상은 애초에 고릴라나 침팬지의 조상과 경쟁에서 이기기 힘든 신체조건과 환경을 가졌을 것이다. 고릴라는 생긴 것과 달리 지금까지도 편한 환경에서 채식을 주로 하면서 하루 종일 먹고 놀며, 침팬지나 원숭이류는 위험한 땅으로 잘 내려오지 않은 채 익숙한 나무에서 과일과 곤충 따위를 먹으며 살아간다. 오직 인간만이 그 옛날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루시'처럼 안하던 짓을 끊임없이 새롭게 시작한다. 그렇게 발전과 진화는 척박하고 낯선 환경에서 새롭게 획득한 형질의 '돌연변이'적 변화가 주요인이다. 최초의 인간 '루시'의 종족들은 사냥을 통해 본격적으로 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우연히 '불'을 발견하여 '화식(火食)'을 했다. 영미권에서 침팬지 연구로 저명하며 [루시의 발자국]의 화자 중 하나인 고생물학자 아르수아가가 자주 언급하는 동물학자 리처드 랭엄은 인간처럼 역시 사냥을 할 줄 알았던 침팬지는 '생식(生食)'으로 인해 하루 종일 소화시키는 것이 일이며 그 외의 다른 '노동'이 불가하다고 한다. 반면 인류는 그 조상 때부터 익혀먹은 결과 소화가 빨리 되고 그 열량과 자유로운 두 손으로 '노동'이 가능했다. 이는 노동문화적 측면 뿐만 아니라 소화기계의 진화로도 나타나는데, 밖에 나간 남성들의 사냥은 성공확률이 높지 않아 집안의 여성들이 땅을 보고 발견한 각종 곡물과 곤충, 생선/어패류를 통해 부족한 열량을 조금씩 채우며 소화력에서나마 그 열량을 아낄 수 밖에 없던 환경에 따라 인류의 소화기계는 갈수록 '지름길'을 찾아 짧아졌단다. 실제로 '불'을 사용하기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소화기관은 침팬지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가 '직립보행'과 '화식', 그리고 진화를 거쳐 지금의 인간은 다른 포유류에 비해 간소한 소화기관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동서양의 전설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은 영웅의 배를 갈라 꺼낸 창자가 엄청나게 많더라는 이야기는 그만큼 그가 품은 뜻과 도량이 원대했다는 암시였을 수도 있겠지만 고대의 그 영웅이 거의 원시인에 가까운 신체조건과 힘을 지녔다는 은유일 수도 있었다.
리처드 랭엄 교수의 '화식'과 인류 진화에 관한 [요리 본능](2009년)이란 책의 원제는 '불의 발견(Catching Fire)'이다.


"돌팔매질... 우리 인간은 어떤 물체를 정확하게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생물종이지요...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지금 우리 시대에는 '험담('리더십에 대한 제약')'이 돌멩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루시의 발자국], '2. 여기 있는 모두가 네안데르탈인이에요', 2020.


고생물/고인류학자 아르수아가는 신체조건으로 경쟁에서 이길 수 없던 인류의 조상이 주변 '도구'를 사용하면서 발전시킨 '기술' 중 하나가 '돌팔매질'이라고 말한다. '돌팔매질'로 시작한 이 정교한 기술개발은 '인지혁명'의 집단적이고 사회조직적 발전과 함께 이후 인간이 다른 강력한 종들을 견제하는 중요한 형질인데, '문명인' 다윗이 '원시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구약의 전설과도 같이 인간을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로 만드는 중요한 기술일 뿐만 아니라 '약자'들이 힘만 믿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강자'들에게 대항하는 기제이기도 하다. 아르수아가는 사회조직이 발달된 문명사회에서는 다수가 퍼뜨리는 '험담'이 이런 권력자를 견제하고 제어하는 '돌팔매질'이라고 빗대고 있는데, 이런 비유가 스페인 고인류학자 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의 대표적 입담이다. 물리적 힘이 약했던 인류의 조상은 늘 이런 식의 '혁명'적 형질을 개발하고 물려주었다.

'신(神)의 계획'에 따라 시계처럼 돌아가는 세계를 밝히고자 했던 18세기 신학철학자 페일리의 이론에 평생 맞서 자연의 '무의식적 선택'으로서의 '진화론'과 그 '종의 기원'를 과학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던 찰스 다윈의 작업은 "시계 제작자도 없고, 설계도 없고,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고, 의도도 없는([루시의 발자국], '8. 시계 제작자가 필요 없다')" 자연 그 자체의 진화의 역사를 알리는 것이었다. 
[루시의 발자국]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알무데나' 공동묘지에서 '죽음'(같은책, '16. 이제 사람들의 평가에 맡기자')을 주제로 마무리되지만, 개체의 동시대적 죽음들은 '종의 기원'에 따르면 영속성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일 수도 있다. '변증법'은 '단절'을 통해 이어진다.

진화사(進化史)의 '필연'적 경향에서 정해진 것은 "만물은 변화한다"는 '변증법적 진리'일 뿐이며, 나도 모르는 내 안의 '루시(Lucy)'가 나와 마주보며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바로 그것이 아닐는지. 


"진화의 이야기는 구조를 가진 게 아니에요. 사건의 발단, 절정, 결말이 없어요. 진화는 '카오스(Chaos)'의 세계거든요."
- [루시의 발자국], '5. 작은 것의 혁명', 2020.


***

1. [루시의 발자국](2020), 후안 호세 미야스/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 남진희 옮김, 김준홍 감수, <틈새책방>, 2021.
2. [요리 본능(Catching Fire)](2009), 리처드 랭엄, 조현욱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1.
3.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조현욱 역, <김영사>, 2011.
4. [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 김명주 역, <문학과 사상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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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 순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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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수덕사의 여승'이 되었을까
- 우리 엄마 한연순 여사의 팔순 기념 '수덕사' 순례기



"입학금만 대주면 내가 알아서 댕기겠다고 몇날 며칠을 졸랐거든. 근데 우리 엄마가 중핵교 합격통지서를 찢어서 날리는데, 그게 눈발처럼 막 휘날리드라고..."


2남 7녀의 아홉 형제자매 중 여섯 째인 우리 어머니는 '국졸'이다. 내 어릴 적 '가정환경조사서'에 아버지 '중졸', 어머니 '국졸'로 외워서 적어댔던. 내 어머니의 오빠인 나의 외삼촌은 등교길에 산길로 빠져 화투판을 펼치기 일쑤로 일찌감치 배움을 포기했고 어머니의 바로 위 언니인 지금의 '인천이모'는 학교가 싫어 도망을 다녔단다. 내 어머니 한연순 여사는 그래서 언니인 인천이모 '한간난'이라는 이름으로 국민학교를 다녔다. 일곱살도 안된 소녀 한연순은 언니 대신 학교로 가 교실 창 밖에서 매일 시위를 했단다. 선생님이 "넌 아직 때가 아니니 오지 말라"며 돌려 세워도 다음날 어김없이 창 밖에 와서 섰다. 결국 소녀 한연순은 학교에 등교하지 않은 '한간난'이라는 이름으로 국민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공부는 재미있었고 시험도 곧잘 보았단다. 충남 서산군 지곡면 '곤재벌'에 있던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읍내 중학교에 합격통지서까지 받았다는 것을 보면 '한연순' 본명으로 정식 졸업은 했는가 보았다. 어머니는 기쁜 마음에 중학교 합격통지서를 가지고 집으로 뛰어 갔는데 나의 외할머니가 "아들도 못 보낸 핵교를 딸년을 보낼 수 없다"며 중학교 합격통지서를 발기발기 찢어 어머니 눈 앞에서 뿌렸단다. 중년이 된 한연순 씨는 소녀 시절의 그 장면을 두고두고 눈발처럼 날리던 장면으로 늘 회상했고, 그 이야기를 무한반복으로 들어온 어린 내 눈 앞에는 언제까지고 눈꽃처럼 흩날리는 중학교 입학통지서 앞에 키작은 어린 소녀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어머니의 형제자매들 중 아마도 처음 시도되었을 중학교 입학 도전은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외할머니는 들과 논으로, 산과 바다로 딸들을 몰고 다니며 일을 시켰는데, 키도 제일 작고 농땡이도 잘 피웠다는 내 어머니 소녀 한연순은 '노동력'이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백수'로 규정하며 끊임없이 놀았단다. 사월 초파일에 외삼촌의 양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서는 돌아오지 않고 몇 달을 개기다가 추석에나 집에 왔다고 한다. 서너살 어렸던 '세창이 스님'과 맨날 뛰어놀고 골방으로 물러난 노스님 등을 긁어드리다가 몰래 나가 고기를 사다 드리기도 했다. 불사의 현역에서 물러나 뒷방에 앉은 노스님은 그래도 아직 중이었지만 고기를 먹고 싶어 어머니에게 돈을 주며 심부름도 시켰다. 어느날은 어머니보고 집에 가지 말고 여승이 되라고 꼬시기도 했다는데 백수건달소녀 한연순은 한사코 손사래를 쳤단다. 부처님이 좋아서 찾은 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난세를 맞은 후고구려 궁예나 명태조 주원장처럼 반란 또는 생계를 위해 행각승으로 숨어들었던 것일까. 어머니가 '김이륵'으로 기억하는 옛날 이야기 잘 해주고 '이화대학'을 나왔다는 늙은 여승은 일제시대 신여성이었다가 38세에 속세를 떠난 김일엽 스님이었다. 
꿈에 그리던 중학교를 끝끝내 갈 수 없었던 소녀 한연순이 한 때 살았던 그 절은 충남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다.


"내포 땅 가야산의 가장 이름 높은 명승지는 수덕사(修德寺)이다. 가야산 남쪽 덕숭산(德崇山, 해발 580미터) 중턱에 널찍이 자리잡은 수덕사는 백제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고려 때 지은 대웅전이 건재하고 근세에 들어와서는 경허와 만공 같은 큰 스님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불교계의 덕숭문중은 큰 일파를 이루어 종정 선출이 난항을 거듭할 때면 으레 덕숭문중의 의향이 관심의 초점이 되곤 하는 것이다. 
그런 중에 수덕사는 '청춘을 불사르고'의 시인 김일엽 스님이 있던 곳으로 유명해졌다. 또 여승들의 큰 선방이 여기에 있어 청도 운문사와 같은 청순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가수 송춘희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 같은 유행가까지 나왔다.
그러나 수덕사는 더 이상 그런 수덕사가 아니다..."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산사순례], '예산 수덕사와 서산 개심사', 유홍준, <창비>, 2018.


64년 만이라고 했다. 
내 어머니 한연순 여사의 '팔순'을 맞아 하루 휴가를 내고 당일로 예산 수덕사를 가게 된 건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인해 팔순 잔치는 못하고 생신 전 주말에 자녀들인 우리 형제자매들만 우리집에 모여 잔치상을 차렸다. 낮술판으로 왁자한 와중에 수덕사 얘기가 나왔다. 팔순을 맞아 큰누나와 둘이 다녀온 강원도 동해바다 여행에서 어머니가 "수덕사에 가보고 싶다"고 하셨단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수덕사에서 '좀 놀아봤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본 바 있었고 나는 불자는 아니지만 사찰을 좋아했기에 어머니 생신 당일에 수덕사 구경을 시켜드리겠다고 즉흥적으로 제안했다. 어머니는 또 한차례 손사래를 쳤다. 
이틀 후 어머니 팔순 생신 당일날, 생일자 어머니와 단둘이 예산으로 가는 차 안에서 수덕사에 관한 어머니의 기억은 16세 소녀 시절 기억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렇게 팔십세가 된 어머니는 자그만치 64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내려가고 있었다.


"춘삼월 양지 바른 댓돌 위에서 사당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로이 낮잠자는 듯한 절은 서산 개심사(開心寺)이다.
한여름 온 식구가 김매러 간 사이 대청에서 낮잠자던 어린애가 잠이 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은 강진 무위사(無爲寺)이다. 
늦가을 해질녘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반가운 손님이 올 리도 없건만 산마루 넘어오는 장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절은 부안 내소사(來蘇寺)이다. 
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골 한 아낙네가 솔밭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굴러가는 솔방울을 줍고 있는 듯한 절은 청도 운문사(雲門寺)이다. 
몇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은 영주 부석사(浮石寺)이다."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2], '영주 부석사', 유홍준, <창비>, 1994.


충남 서산 출신인 어머니는 적어도 나와 내 형제자매들 기억에는 '깡'이 센 분이었다. 더 나아가 나는 내 주변에서 남의 말을 제일 안 듣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바로 내 어머니를 꼽을 정도로 고집이 세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를 엮은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는 그 간의 사찰에 관한 답사기록을 골라 2018년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산사순례' 편을 냈다. 유교수는 이른바 '논제명찰(論題名刹)'이라고 하여 경북 영주 부석사, 경북 청도 운문사, 전남 강진 무위사, 전북 부안 내소사 등과 함께 '봄의 절'로 충남 서산 개심사를 추천하는데, 서산 제일의 절 개심사는 예산 수덕사의 '말사' 즉 지점 정도에 해당된다. 예산 수덕사는 조계종 조직으로 치면 '충남지역본부' 정도 되며 개심사는 '서산지점' 격이 되리라. 수덕사에서 노스님의 등을 긁고 김일엽 선사와 농담따먹기를 하던 백수건달 행각소녀 한연순 씨는 정작 서산 출신임에도 개심사는 못 가봤다고 한다. 그래서 내친 김에 생신 당일 예산 수덕사 다음 일정으로 서산 개심사까지 네비게이션에 입력해 두었다.

충남 가야산을 둘러싼 예산, 서산, 홍성, 태안, 당진, 아산 일대는 '내포(內浦)' 지역으로 불린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는 내포를 제일 좋은 곳으로 친다"고 기록했고 유홍준 교수에 의하면 내포 땅이 배출한 인재들은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라 "기골이 강해서 '깡'이 센 사람들"이라고 적고 있다. 최영 장군, 이순신 장군, 사육신 성삼문, 추사 김정희, 윤봉길 의사, 김좌진 장군, 남로당 박헌영, 만해 한용운 등을 예로 든다. 더 거슬러 가면 백제 부흥운동이 활발했던 '반란의 땅'이기도 하고 새왕조 개창의 시기에는 이 새로운 '반역자'에 대항한 반역을 도모하던 지역이기도 했다. 아마도 강원산간 지역 못지 않게 한반도 중남서부의 '오지' 취급을 받던 '내포' 땅이 정보와 유행에 둔감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 지역민들의 '반역'은 주로 낡은 왕조의 '부흥운동' 형태였을 테고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가장 '느린' 정치적 성향으로 표출되었을 수도 있겠다. 이건 오로지 내 생각이기는 하나, 실제로1939년 당진 출생 아버지와 1942년 서산 출생 어머니는 6.25 전쟁이 일어난 것도 당시에는 몰랐다고 한다. 참고로 팔순을 앞두고 '총기'가 많이 쇠하기는했지만 늘상 기억력은 최고라 자부하는 내 어머니 한연순 여사는 네 살때 광복을 맞아 흰저고리 입고 "만사이~"를 부르던 동네 할머니까지 기억할 정도로 총명한데도 그렇다.


서산 출신에 '눈발처럼' 휘날려 흩어지던 중학교 입학통지서를 평생 기억하며 살아온 나의 팔순노모는 그래서 굶어 죽더라도 자식들은 꼭 고등학교까지 보내리라 굳게 결심했고, 그 외진 '내포'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서울로 여관방 등을 전전하면서도 네 명의 자녀들을 적어도 고등학교 이상까지 졸업시켰다. 모든 부모들이 말로 다 못할 고생을 했겠지만 내 형제자매들 기억에서도 어머니는 단 하루도 쉬지 못했고 한 시도 손을 놀리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항상 가난에 허덕였으나 고집과 자존심은 세상 누구보다도 셌으니 역시 '반역의 고장'인 천생 '내포' 사람이었다.


조촐했던 팔순 잔치의 마지막 행사로 64년 만에 다녀온 수덕사는 16세 소녀 한연순의 기억들을 온전히 담고 있지는 않았다. 고려 시대부터 약 700년을 버텨온 대웅전과 그 뒷 산길은 여전했으나 일주문부터 천왕문까지 일체의 풍경에서 여든살의 어머니는 생전 처음 온 듯 두리번 거렸고 다소 헤매기도 했다. 결국 어린 시절 함께 뛰어 놀았다던 '선수암' 주지 '세창이' 스님은 뵙지도 못하고 왔는데 만약 만났다면 여든살의 할머니 얼굴에서 중학교도 못 간 슬픔을 웃음 뒤에 감춘 열여섯 소녀의 얼굴을 찾을 수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 어떤 때는 그냥 못 하고 오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미처 찾지 못한 수덕사의 오랜 모습이나 세창 스님의 기억은 그렇게 여전히 열여섯 소녀 한연순의 기억으로 온전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시간이 모자라 개심사행은 다음으로 미루고 수덕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첫선 이야기도 하고 그간 나누지 못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가며 나는 골방 노스님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고 다시 '속세'로 돌아온 내 어머니께 내심 고맙다는 생각을 줄곧 했다. 
중학교를 끝내 가보지 못했던 열여섯 소녀 한연순이 만약 '수덕사의 여승'이 되었더라면 나는 지금의 여든살 한연순 여사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하다.
중학교도 못 간 소녀 한연순이 앞으로 그렇게 고생하며 살 운명을 미리 알았다면, 노스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수덕사의 여승'이 되었을까.


***

1.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산사순례], 유홍준, <창비>, 2018.
2.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2], 유홍준, <창비>,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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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 중국 3대 고전
오승은 지음 / 혜민북스 / 202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요괴'와 '부처'의 경계에서
- [서유기(西遊記)](16세기), 오승은, <혜민북스>, 2021.


"삼장은 석가여래의 말에 머리를 조아렸다. 성불하여 '부처'가 되는 영광만큼 커다란 책임감이 그의 가슴 속에 가득 차올랐다. 그 날부터 삼장은 '전단공덕불(旃檀功德佛)'로 봉해져 모두의 존경을 받는 부처가 되었다.
석가여래의 은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삼장의 제자들에게도 차례로 직함이 내려졌다.
먼저 손오공은 '투전승불(鬪戰勝佛)'이 되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세상의 정의를 관할하는 부처가 됐다는 의미였다...
뒤를 이어 저팔계는 '정단사자(淨壇使者)'가 되었다. 그것은 (천축국) 뇌음사의 음식을 관리하는 자리였다... 평소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 썼으니 적성에 딱 맞는 직함이라고 할 만 했다...
마지막으로 사오정은 '금신나한(金身羅漢)'에 임명되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도록 돕는 자리였다..."
- [서유기], '28장. 불경을 전하고 부처가 되다', 오승은, 16세기.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를 언제 처음 알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인 1980년대 집 한구석에 있던 노란색 표지의 <세계동화전집>의 이미지를 아무리 톺아봐도 '서유기' 또는 '손오공' 따위의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그 전집에 있었다면 흑백이나마 그 독특한 캐릭터들의 삽화가 떠오를 텐데 그런 게 없는 걸 보면 분명 그 전집엔 없었다. 항상 그랬듯 TV에서 방영하던 일본 애니메이션의 '오로라공주'를 지키던 우주 손오공과 사오정, 저팔계가 우선 생각난 건 나의 초등 시절의 기억일 테고, 오락실의 아케이드 게임 '서유항마록(China Gate)'이 떠오른다면 '80년대 후반 나의 중학생 시절의 그것일 게다. 우리에게는 또 허영만 선생의 만화도 있겠다. 어쨌든, 나는 분명 중국 '4대 기서(奇書)' 중 하나인 [서유기(西遊記)]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럼에도 손오공 일행의 숙적들인 '금각', '은각' 대왕이나 '우마왕'과 '파초선' 따위가 기억나는 건 어디선가 짧은 에피소드들은 자주 접했던 것이리라. 원래 '4대 기서'인 [삼국지연의], [수호지], [금병매] 등과 같이 [서유기] 또한 이야기꾼들이 글 모르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림과 함께 들려주던 짧은 극들의 집합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어린이들에게도 그렇게 전해져 왔나 보다.

어렸을 적에는 손오공과 그 일당들의 '결말'이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정해진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의 경로를 따라 '성불(成佛)'했겠거니 예상했던 그 이상은 아니었다. 중년에 접어들어 새삼 [서유기(西遊記)]를 집어든 이유는 그 구체적 '결론'이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10권짜리 전집까지 읽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도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를 나이들어 다시 읽고는 크게 재미를 못 느낀 탓일 게다. 가장 최근에 나온 단권짜리 [서유기]는 2021년에 <혜민북스>에서 출간된 책인데, 시작과 결말은 그대로 옮기되 '삼장법사'를 수행하는 과정은 대표적인 에피소드 몇 가지만 추린 판본이겠다. 펴낸이 '진수진'이라는 것 외에 역자 소개도 없고, [서유기]의 최종 보스 격인 '우마왕'도 안나와서 아쉽기도 한 책이지만 오랫만에 손오공 일행의 모험담을 읽게 되었다.
결론에 삼장법사는 예상대로 '성불'하여 큰 부처 중 하나가 되었는데, 아마도 부처님들의 단상에 오르는 '전단공덕불'이다.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은 '투전승불'로 요괴들을 물리치는 부처가 되는데, 아마도 몸을 쓰는 하급 부처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주인공답게 '성불'한다. 손오공과 한편이면서도 계속 그의 자리를 시기하는 듯 부딪치기도 하는 저팔계는 이름을 '저오능'이라 삼장이 지어주었으나  별칭인 '팔계'로 더 알려졌는데 식탐과 게으름, 폭력 등 본능 위주인 캐릭터라 '여덟 가지 계율'의 별명을 받게 되었다. 저팔계는 '정단사자', 사오정은 '금신나한'이 되는데, '사자'와 '나한'은 부처나 보살 같은 존재보다는 등급이 낮지만 속세가 아닌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속하는 존귀한 신분이 된다.

중년이 된 내가 새롭게 캐릭터들을 창조할 수 없어 여러 가지 기억들을 더듬어 조합한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의 이미지는 역시 주로 1980년대 오락실 게임의 캐릭터를 90% 이상 모방하고 말았다. 그래도 오랫만에 그렸으니 첨부는 해둔다. 오락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던 내가 '서유항마록(China Gate)' 캐릭터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현장은 10세 때 형을 따라 낙양의 정토사에서 불경을 공부하다가 13세 때 승적에 이름을 올리고 전국을 떠돌며 강론을 펴면서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다. 그는 불경를 원전에 입각해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천축국'으로 가서 원전을 구하고자 629년 8월에 서역을 향해 장안을 떠났다. 이때 법사 나이 27세였다... 현장은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하서주랑'을 따라 길을 떠났다... 그러나 당시는 당나라가 건국한 지 얼마 안되어 국경을 넘나드는 것을 엄금하고 있었다. 이에 양주 도독은 현장의 출국을 단호히 금지하며 장안으로 돌아가 달라고 했다. 그러나 현장법사는 국법을 어겨서라도 인도로 가기로 굳게 마음 먹었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중국편 2], '3부. 실크로드의 관문', <창비>, 2019.


중국 명나라 작가 오승은(吳承恩:1509~1582)이 지었다는 [서유기(西遊記)]는 아마도 당나라 태종 시기 천축국(인도)으로 가서 불경의 원전을 가지고 온 현장(玄奘) 법사가 지은 [대당서역기]에 온갖 신화적 색채를 입혀 전해 내려오던 민간대중의 이야기를 모아서 편집한 책일 것이다. 위 책 [서유기]의 <7장>에는 화과산 돌원숭이로 태어나 72가지 도술을 익힌 후 천상과 온세상을 휘저으며 갖은 난동을 부리던 '제천대성(齊天大聖)' 손오공이 석가여래에 의해 오행산에 갇힌지 500년 후인 당태종 13년에 갈수록 흉악해지는 세상을 구원하고자 부처님이 관음보살을 당나라로 보내 불경을 전달할 '삼장법사'를 간택하는 장면이 나온다. '삼장'의 본명은 승려 '진현장(陳玄奘)'으로 석가여래의 두번째 제자가 환생한 자였다. [서유기]에서는 당태종 이세민이 이를 적극 후원하여 '현장'에게 '당삼장(唐三藏)'이라는 이름도 하사한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당나라 초기 서쪽 변경의 혼란을 막고자 민간인의 출국을 금지했고, 현장법사는 국법을 어기고는 밀출국을 시도한 것이었다. 당태종 이세민은 현장이 14년 후 불경을 가지고 귀국한 후에야 그를 인정하고 높이 모시려 했는데, 현장은 이를 사양하고는 이후 죽기까지 약 20여년 간 원전불경의 번역작업에 몰두한다. 이 시기 현장의 뛰어난 제자 2명 중 한 명인 원측대사가 신라 출신 승려라고 한다. 당나라 초기 서쪽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에는 '고죽국', '누란' 등의 독립왕국들이 번성하여 국가간 문화교류를 했고 이후 실크로드 연결을 통해 서역과의 교역도 가능하게 했는데 수백년 전인 기원전 한무제 시기 장건이 그랬듯 7세기의 '현장'은 당시 '하서주랑'과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의 문명국들을 다니며 [대당서역기]의 기록을 남긴다. 한편, [서유기]의 '삼장'이 온갖 요괴들을 물리치고 열국들을 거치며 천축국 뇌음사의 석가여래 앞에서 원전불경 '35부 5,048권'을 받은 것이 장안을 떠난지 14년, 즉 5,040여 일만이라고 한다. 이후 관음보살의 도움으로 다시 당나라로 가서 불경를 전한 후 천축국에 복귀하여 '성불'하는데는 고작 8일이 걸린 것을 보면, 정말 쓸데없이 개고생한 것 같지만 결국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세 제자와 함께 헤쳐온 과정 자체가 '성불'의 과정이었다는 것이 [서유기]의 실질적 결말이기에 이 기이한 이야기가 그렇게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 손오공이야 무예든 지략이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 끊임없이 동생 저팔계의 시기를 받지만 정말 어려울 때는 관음보살이나 옥황상제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만큼 문제해결의 능력자다. 그럼에도 '성불'의 조건은 무능력의 대가인 삼장법사의 신실한 한 걸음 한 걸음이라는 사실, 근두운(筋斗雲)을 타고 단숨에 날아가는 속도전이 아니라 용마를 타고 세상 곳곳을 답사하며 주변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불의한 요괴를 물리치며 정의를 확인하는 오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손오공의 모티브는 현장법사가 실크로드의 관문인 옥문관 가기 전 과주(안서)에서 마부로 고용한 '석반타'라는 호승(胡僧:서역승려)이라고 한다. 실제 석반타는 인도까지 현장을 수행한 것은 아니고 옥문관을 나서기 전 "딸린 가족이 많은 데다가 국법도 어길 수 없다"며 돌아선다. 이후 홀로 남아 제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들었을 '현장(삼장)'을 수행한 건 사람이 아니라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같은 환상 속 요괴들이었을 텐데, 기실 [서유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요괴들은 실제 존재라기 보다는 요괴보다도 더 무서운 인간 군상의 은유였을 것이다. 
'삼장법사'라는 중심이 없는 '세 제자(손오공/저팔계/사오정)'는 '요괴'와 '부처'의 경계에 선 존재들이며 막강한 도술 능력에도 불구하고 '요괴'의 본성에 더 가깝지만 비로소 '삼장법사'로 인해 '요괴'의 모습을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다시 [서유기]의 주인공은 '손오공'이 아닌 삼장'이, '요괴'가 아닌 '인간'이 된다.

이것이 바로 나이가 들수록 손오공의 활약보다 삼장법사의 신심에 더 관심이 가는 이유가 아닐까.


***

1. [서유기(西遊記)](16세기), 오승은, <혜민북스>, 2021.
2.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중국편 2], 유홍준, <창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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