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견문 2 - 히말라야에서 지중해까지 유라시아 견문 2
이병한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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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東學)] -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기준
- [유라시아 견문 1~3], 이병한, <서해문집>, 2016~2019.


"과거(過去)는 해석(解釋)의 전장(戰場)이다... 
혼자 추억하면 노스탤지어지만, 다함께 추모하면 유토피아의 원동력이 된다. 고로 역사는 인과법칙을 따지는 과학을 초월한다. 주관적이며 예술적이고 창조적이다."
- [유라시아 견문 3], <13.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제국의 추억 - "나토는 가고, 티토는 오라!">, 이병한.


1. 다시 '동학'으로


20대에는 마르크스를 모시는 '과학적 사회주의자'였다. 30대에 들어서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국학자'였다. 40대가 되어 우리 역사로 돌아와 '동학(東學)'에 귀의했다. 이십대부터 전세계를 주유했는데, '동학'으로 돌아오기까지 수년 간 '유라시아' 대륙 사방을 '견문(見聞)'했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 '신동학(新東學)'의 길을 찾고 있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유럽과 아시아 일대를 다니며 <프레시안>의 [유라시아 견문]을 쓴 원광대 교수 이병한의 이야기다. 정말 부지런하고 공부 많이 한 사람 같다. 영어, 독일어, 중국어, 아랍어까지 각종 언어를 계속 익히면서 당대 유라시아 각 지역의 문명과 문자들을 직접 훑어본다. 타국을 돌며 수년을 살면서도 요가나 운동도 열심히 한단다. 나 같은 일반인은 범접도 못할 습성이다. 나보다 네 살 어린 사십대 중반인데 '동학'에 귀의했다니 아마도 21세기의 '수운 최제우'가 되고자 하는 '천재'인가 보다. 최제우는 서른일곱에 '접신'하고 '득도'했는데 조선말 당시에는 '늙은' 축에 들었을 것이나 21세기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마흔넷은 '애기'다. 조선말 최제우는 그 나이도 되기 전 '난민(亂民)'의 죄를 쓰고 죽어갔지만 이 시대의 사십대는 아직 창창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시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학'이 시대정신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점은 같다.

'유물론자'를 자처하는 나도 지금껏 '서구사상'을 '유일신'으로 믿고 있다. '전체주의'와 '파시즘'을 비웃으며 '민주주의'에 찬동하고, '왕정'과 '제국주의'를 증오하며 '공화주의'를 앞세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함께 실현하는 사상으로 '과학적 사회주의'에 기초한 '인민민주주의'를 선호한다. 다수가 사람답게 사는 '대동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옳은 방법론이라 판단한다는 말이다. 그 과정에서 한반도의 혁명가 삼봉 정도전을 쫓다가 성리학에 부딪혀 유학을 조금 엿보게 되었고,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을 갖던 중 중국이라는 나라와 그 거대문명에 너무 빨려들 것을 경계하며 우리 역사로 되돌아서니 '동학'이 우뚝 서 있었다. 
'개벽(開闢)' 세상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학'에 관한 글을 써보다가 그래도 젊은 시절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찬양했던 내가 정작 '동학'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선후배를 만나 '동학' 이야기를 나누었다. 삼십대였던 내가 '민주주의'에 관해 많은 영감을 받은 이진 선배와 우리의 토착사상에 조예가 깊은 후배 정평을 만나 '자문'을 구하던 중 평이 추천은 물론 친히 빌려주기까지 한 책이 바로 이병한 교수의 [유라시아 견문]이었다. '동학'에서 갈라져 나온 원불교의 학당에 자리잡은 그는 이 대장정의 견문을 통해 '좌-우', '근대-전근대', '서구-비서구'의 '3중 분단체제'를 넘는 21세기 '전환시대의 반전'을 '유라시아'의 신(新) '제국'에서 찾는다. 기존 20세기 영미와 서유럽 중심의 '자유민주주의'는 물론 실패한 현실사회주의 또한 동전의 양면이라는 시각으로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대일통'과 '사통팔달'의 '대회통'을 통한 활발한 연대를 조망하고 그려나간다. 그리하여 '해석의 전장'인 과거 역사를 그 지역의 전통과 문명의 관점에서 재고찰한다. '객관성'과 '과학'으로 점철된 20세기 서구사상의 일방적 지배에서 벗어나 21세기에 다시금 '주관성'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그의 [유라시아 견문]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성(理性)과 영성(靈性)의 '공진화(共進化)'"를 뽑겠다. 지난 백년 이상 지배한 서구의 '이성의 제국'을 넘어 '영성의 제국'이 함께 지배하는 세계, 그 안에서 다시 한반도의 '동학'을 재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절반만 동의하기로 한다.


2. [유라시아 견문]의 모티브 - '개벽' 이전의 '개화'


"탈냉전은 또 다른 개항기였다. 대륙으로, 유라시아로 다시 길이 열렸다. 왕년의 초원길, 바닷길에 하늘길까지 분주하다. 고로 '포스트모던'은 치우친 독법이었다. '서구적 근대의 종언'이자 '탈서구적 근대의 개막'이 더욱 합당할 것이다. 유라시아는 그 '지구적 근대'의 중원(中原)이다. 20세기에 억압되었던 역사의 무의식이 중국몽, 인도몽, 아세안몽, 이란몽, 터키몽으로 피어난다. 유라시아로 방향을 선회하여 견문을 이어가는 까닭이다. '헛개화'를 거두고 '진(眞)개화(開化)'를 이루는 새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기를 소망한다. '개화'는 여전히, 영원히 진행형이다."
- [유라시아 견문 1], <2. 연행록과 견문록 - 개화기의 사대부 유길준, 우리는 그를 몰랐다>,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제목의 모티브는 의외로 조선말 개화파 유길준의 [서유견문]이다.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은 알고보면 '자주적 근대화'를 꿈꾼 사대부였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전쟁이 패배한 이후인 1895년에 발간된 [서유견문]은 국한문혼용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조선의 전통사상인 '유학(儒學)'의 관점에서 서구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사대부'의 부흥을 통해 개화를 하자는 입장이었단다. 유길준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만든 단체가 '흥사단(興士團)'이었다. '견문'이 가능했던 지배계급의 '개화' 중에서도 우리의 민중적 '동학'의 '개벽' 못지 않게 자주적인 '개화'가 있었던 것이다.

이병한의 [유라시아 견문]은 '자주적 근대화'의 관점에서 유럽과 동서남북의 아시아를 바라본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이성' 혁명에 억눌려 있던 각 지역의 '영성' 혁명에 주목한다. 그 실현태는 '철학'이 아니라 '종교'다. 서구 사상의 뿌리는 '기독교'이고, 동아시아는 '유교', 남아시아는 '불교', 북아시아 유목문화의 '텡그리(천명)' 사상을 넘어 러시아의 '그리스 동방정교'를 각 지역별 중심으로 삼는다. 여기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종교가 발견되는데 바로 동서남북을 잇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다. 
[유라시아 견문] 1권에서는 중국과 몽골, 실크로드 일대인 하서주랑과 동남아시아를 주유하며 유교와 불교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된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유교와 불교의 융합으로 문명을 이어왔고 이로써 우리도 토착된 '영성'을 재발굴하여 유라시아 대일통의 성원이 되자는 주장이다. 결국 [유라시아 견문]의 목표는 '동학'의 재발견이다. 저자에 의하면 '동학'은 '서학(천주교)'을 배타하지 않고 "되감아 치는 회심의 발군"(1권, <18. 인의예지의 공화국>)이자 전통을 내치지 않는 "유학의 민중화"이며, "사대부의 교양과 일상을 전 인민에게 널리 보급하는 동방형 민주화 기획"이었다. 국학의 지배사상으로 함몰되지 않고 "신세계와 신세기로 열린 고금 합작의 원조이고 원형"으로서 '동학'은 "서학과 국학의 분단체제를 허물고, 구학과 신학의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동아시아학이 지향해야 할 덕목을 상당 부분 내장"(이상 같은책)하고 있는 "굉장하고 신통"한 사상이라고 반추하고 있다. '고금 합작'에 기반하여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계급투쟁'은 기각해 버린 저자가 보기에 '동학'은 농민전쟁의 주역인 다수 피지배민중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인 '자주적 개화파' 유길준까지 포괄하는 동아시아 유교적 '대장부'의 시각이겠다.
'동학'의 재발견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대체하는 유라시아 각 지역의 '중국몽', '인도몽', '터키몽', '러시아몽', '이란몽' 등 대제국적 '꿈(夢)'들의 연합에 우리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자는 것이다. 
참고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살아온 우리는 '유-불-도'의 영향을 받았고 19세기 '동학'의 사상적 기반도 바로 '유-불-도+기독교(서학)'이었다.


3. '유라시아'의 문명사 - 수천 년의 '종교'적 '영성'


"유교가 한족만의 사상이 아니라 몽골족과 만주족, 조선인과 월남인을 막론하고 중화문명의 보편 이론으로 기능했던 것처럼, 이슬람 또한 아랍인들의 민족종교로 그치지 않았다. '이슬람의 집'에 귀의하는 만인만족에게 열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다대한 역할을 한 족군이 바로 튀르크(돌궐)다. 중앙유라시아를 동/서로 왕래하던 유목민이 이슬람에 귀의함으로써 '이슬람의 집'은 비약적인 도약을 이루게 된다. 중국의 서쪽이 '이슬람적 중국'이 된 것도, 인도의 북쪽이 '이슬람적 인도'가 된 것도 튀르크의 공헌이었다. 튀르크가 접속함으로써 이슬람은 세계 종교가 된 것이다. 그들이 일군 600년의 최장수 제국이 바로 '오스만제국'(1299~1922)이다."
- [유라시아 견문 2], <24. '이슬람의 집', 실향과 귀향 - 이슬람 천 년 제국, 부활의 날갯짓>, 이병한.


6.25 한국전쟁에 '자유국가'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남한과 '형제국'이 된 터키 얘기가 아니다. 서구유럽에 의해 '유럽의 병자'라는 말을 들으며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멸망하고 분열된 '오스만튀르트' 얘기다. [유라시아 견문] 2권에서 저자는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및 남아시아 인도를 잇는 미얀마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인도와 이란, 중앙아시아를 지나 이집트까지 돌아보며 '이슬람교'의 힘을 재발견한다. 물론 인도는 무굴제국 이전부터 토착종교인 힌두교가 주요 종교이나 1,2차 세계대전으로 승전국인 '서구' 영국이 분리독립시켜 분할지배하기 전까지는 북인도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2억 명이 넘는 이슬람교도 공존했었다. 인도 아대륙 전체 16억 명 중 13억 힌두교에 3억 이슬람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 가장 활발한 해양교역의 장이었던 인도양을 둘러싸고 역시 3억 명 가까이 되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포함하면 남아시아만 해도 13억 힌두교를 6억의 이슬람교가 포위한 형국이다. '중동'이나 '극동' 또한 서구의 시각인데 '유라시아' 입장에서 보면 '이슬람'의 근원지인 '중동'은 진정한 '중원'이다. '중원'을 자처하는 중국 조차 변방이다. 실크로드와 중국의 차마고도, 아랍의 향신료길이나 인도의 면화길 등으로 사방팔방 교역의 중심이었던 이 '중원'을 지배한 사상이 바로 '이슬람교'인 것이다. 칭기스칸 몽골제국이 분열하고 남서부 이슬람권에서 일어선 티무르제국과 중국 명나라가 충돌 직전 명나라가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으로 찌그러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또 다시 이루어졌을 지도 모를 유라시아 대일통의 도전은 세계의 중심답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 일대에서 중국이 동남서 아시아를 다니며 육지의 '일대'와 해양의 '일로'를 적극 '지원'하고 있단다. 여기에 그리스 동방정교를 기반으로 유럽 일대를 장악하려는 러시아 문명권과 결합하면 그야말로 '세계의 중심'으로서 '유라시아' 대문명권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이 다양한 대문명의 지도에서 사통팔달의 '윤활유'와 같다.
"이제 머리가 굳어" 힘들다는 이병한 교수는 2권의 말미에서 후세들에게 '이슬람학'을 꼭 공부할 것을 당부한다. 지정학 또는 지리학적으로 '세계의 중심(중원)'으로서 중앙아시아의 힘을 발견하기 위해 그들의 오래된 '영성', 이슬람교를 소환하고 재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중앙아시아의 입장에서 영미유럽은 '극서'에 불과하다. 지금 민족과 종교로 산산히 분할된 유라시아는 20세기 서구 제국주의 산물이며 냉전기 '제3세계'의 비동맹과 '반둥회의(1955년)'는 다시 재조명되어야 한다. 새로운 세기 '유라시아 대제국'의 길이 바로 여기에 있으며 그 길에 이슬람의 역할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중요했고 앞으로 그럴 것이라고 저자는 전망한다.
이병한이 각 지역 '이니셔티브(주도권)'의 기준으로 잡는 것은 백여년의 '이성'의 '문화독재'가 아니라, 지난 수천년의 '문명자치'로서의 '종교'와 그로부터 퍼진 '영성'이다. 
동방의 유교와 도교, 남방의 불교, 북방의 그리스정교(기독교), 서방의 이슬람교와 카톨릭(기독교)이 '유라시아' 중앙에서 만나 융합한다. 


4. 그럼에도 동의할 수 없는 '제국'


'동학' 재발견의 불가피성을 깨닫기는 했으나, 나는 아직 종교적 '영성'에 동의하지 못한다. [유라시아 견문]의 관점에 절반만 수긍한다. 서구 중심 사상에서 탈피해 우리의 전통에 기반한 사상을 벼르고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되, 러시아 푸틴의 새로운 '동방정교'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새로운 '유라시아 제국주의'에 당최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의 정치체제가 서구의 '민주주의' 또는 '민주화' 잣대로 재단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나, '제국'의 '영성'으로 다수 민중이 우민화될 우려가 크다고 본다. [유라시아 견문]에서 다소 보이는 푸틴에 대한, 시진핑에 대한 호평은 지난 세기 '서구적 근대화'의 극복을 위한 노력 이상으로까지 보일 정도다. 러시아 푸틴의 책사 알렉산드르 두긴의 '러시아 정교주의'나 현대 '중국학'의 대가 후안강 인터뷰는 읽기 거북했다. 차르의 측근 라스푸틴이나 칭기스칸 같은 위인들이 회상되고 재영웅화 되는 순간, 우리의 '동학'은 '접신'과 '득도'한 '영성'만 믿고 쓰러져간 조선말 다수 농민의 슬픈 길만을 반복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신시대와 신세기의 다수 민중은 우매하지 않고 지배자들보다 훨씬 똑똑하다. 모든 사람들이 '영성'으로 수양하고, 특히 유학의 전통문명권에 속한 우리 조선인들은 무신론적 자기수양을 통해 각자 득도를 하여 더 나은 '대동세상'을 준비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 '비선실세'의 '영성'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체한 '민주주의' 정권은 좌우를 막론하고 '영성' 가득한 수많은 미친 '빠돌이'들을 조장하고 있다. 이 '영성'들은 현대화된 '파시즘'이다.
그리하여 원체 '제국' 자체를 싫어하는 나에게 '유라시아' 대제국의 '대일통'은 21세기 새로운 '제국'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그냥 놔둬도 한반도인들은 그 지정학적 특성상 끊임없이 '서구-유라시아' 간 '문명충돌'을 반복할 것으로 본다. 미국(일본) 편에 설 것인가, 중국 편에 설 것인가, 러시아 편에 설 것인가. 갈팡질팡하는 지배계급은 조선말이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이다. '서구 영미(일)'냐 '유라시아'냐 갈림길도 다르지 않다. 
'동학'의 '자주적 현대화'가 필요한 이유다.

로마, 오스만, 중화 등의 '제국'들이 다문화와 다종교를 아루르는 '포용'적 면모를 보였던 이유는 그들이 탐욕스럽게 차지했던 그 넓은 지역을 미처 다스릴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 과학과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귀결된 '국가독점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는 '이성'과 '근대화'를 명분으로 식민지들을 직접 지배하려고 했다. 그 분할과 재분할의 결과가 바로 '민족해방'과 '분리독립'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세력 역시 식민지를 강압적이고 배타적으로 직접 지배할 역량이 없었다. 어쩌면 그런 지배력 따위는 애초에 인류에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라시아 견문]을 통해 이제 다시 제출된 다문화와 다종교를 아우르는 '유라시아 대제국'의 대세적 방향성은 거스를 수 없다 해도 '영성'과 '전통'이 아닌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로 무장된 '동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주도권)'로서의 '동학'은 천재들의 사상접목이나 '득도'가 아니라, 다수 민중의 깨달음과 조직화에서 재발견되어야 한다.


5. 우리 각자의 '동학'으로


"미래의 사회주의... '고금 합작'... 각자의 문명적 고유성과 사회주의적 보편성을 튼튼하게 결합하는 '신사회주의 프로젝트'이다. 20세기 사회주의는 역사적 문명을 배격하고 배타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쌍생아였다. 그러나 미래의 사회주의는 저마다의 문명에 바탕을 둔 '오래된 사회주의'에 빗댈 수 있을 것 같다. 즉 '역사의 종언'도 아니고 '문명의 충돌'도 아닌 '역사적 사회주의', '문명적 사회주의'이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인문적 사회주의'이다. 2050년의 동아시아라면 '사회주의(Socialism)'라는 꼬리표도 떼어낼 지 모른다. '대동세계', '태평천하'라는 옛말이 한결 더 어울릴 법하다."
- [유라시아 견문 1], <35. 동서고금의 교차로, 카슈가르 - 중국에도 '서해'가 있다!>, 이병한.


수천 년의 문명적 전통으로서 종교의 역할을 굳이 '영성' 복귀에서 찾을 것 없다. 우리의 전통적 조직과 공동체 문화의 재창조에 '황족' 또는 '왕족'이 없이 모두가 평등한 '깨달음'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우리 전통의 '유불도' 사상과 결합한 '동학'의 현대화가 바로 한반도의 '사회주의', 우리의 '대동세상' 아니겠는가.
"포용적인 제국이 평등하다"는 식의 유발 하라리, 이중톈, 이병한 등의 천재들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하는 다수의 '계급투쟁'으로 '동학'은 지금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나라도 최근에 '공식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나 또한 내 나라가 '선진국'의 위상으로 피할 수 없는 '유라시아 대제국'에 당당히 참여하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동학'은 내부를 위한 사상이 아니라 외부로 확장함에 반드시 필요한 사상적 무장이 된다. 
지배계급은 '서구주의'의 수치로, [유라시아 견문]은'고금 합작'의 '영성'적 인문학으로, 피지배계급은 억압을 뚫은 다수 민중의 역동성으로 '동학'을 다시 만들어갈 것이다. 어느 편의 '동학'이 될지는 각자 발딛고 선 물질적인 계급적 토대에 기반할 것이다. 
노동계급인 내가 동의할 수만은 없지만, [유라시아 견문]의 '결론'으로 택한 단락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무리한다.


"부국강병, 세속적 목표만 추구하는 나라는 이제 '후진국'이다. 속된 부르주아를 섬기는 논리(자유주의/시민민주주의)나 천한 프롤레타리아를 모시는 논리(사회주의/인민민주주의)나 죄다 20세기의 적폐다. 인격을 드높이고 인륜을 다하며 인권을 누리는 '문명국가'가 '선진국'이다. '천상의 나라'를 지상에도 구현해 보겠다는 발심을 일으키고 '영성(靈性)'을 고양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 [유라시아 견문 3], <28. 아스타나, 카자흐스탄의 봄 - "通則不痛 不通則痛">, 이병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주도권)'의 사상적 기준으로서 현대의 '동학'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인가 각자 한 번은 돌아볼 일이다.


***

1. [유라시아 견문 1 - 몽골 로드에서 할랄 스트리트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6.
2. [유라시아 견문 2 - 히말라야에서 지중해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8.
3. [유라시아 견문 3 -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9.

* 읽는 순서는 따로 없겠으나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결론'으로서 3권을 먼저, 
처음 떠나는 1권을 다음에, 
'중원'에서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종교'를 재발견하는 2권을 마지막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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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견문 1 - 몽골 로드에서 할랄 스트리트까지 유라시아 견문 1
이병한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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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東學)] -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기준
- [유라시아 견문 1~3], 이병한, <서해문집>, 2016~2019.


"과거(過去)는 해석(解釋)의 전장(戰場)이다... 
혼자 추억하면 노스탤지어지만, 다함께 추모하면 유토피아의 원동력이 된다. 고로 역사는 인과법칙을 따지는 과학을 초월한다. 주관적이며 예술적이고 창조적이다."
- [유라시아 견문 3], <13.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제국의 추억 - "나토는 가고, 티토는 오라!">, 이병한.


1. 다시 '동학'으로


20대에는 마르크스를 모시는 '과학적 사회주의자'였다. 30대에 들어서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국학자'였다. 40대가 되어 우리 역사로 돌아와 '동학(東學)'에 귀의했다. 이십대부터 전세계를 주유했는데, '동학'으로 돌아오기까지 수년 간 '유라시아' 대륙 사방을 '견문(見聞)'했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 '신동학(新東學)'의 길을 찾고 있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유럽과 아시아 일대를 다니며 <프레시안>의 [유라시아 견문]을 쓴 원광대 교수 이병한의 이야기다. 정말 부지런하고 공부 많이 한 사람 같다. 영어, 독일어, 중국어, 아랍어까지 각종 언어를 계속 익히면서 당대 유라시아 각 지역의 문명과 문자들을 직접 훑어본다. 타국을 돌며 수년을 살면서도 요가나 운동도 열심히 한단다. 나 같은 일반인은 범접도 못할 습성이다. 나보다 네 살 어린 사십대 중반인데 '동학'에 귀의했다니 아마도 21세기의 '수운 최제우'가 되고자 하는 '천재'인가 보다. 최제우는 서른일곱에 '접신'하고 '득도'했는데 조선말 당시에는 '늙은' 축에 들었을 것이나 21세기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마흔넷은 '애기'다. 조선말 최제우는 그 나이도 되기 전 '난민(亂民)'의 죄를 쓰고 죽어갔지만 이 시대의 사십대는 아직 창창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시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학'이 시대정신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점은 같다.

'유물론자'를 자처하는 나도 지금껏 '서구사상'을 '유일신'으로 믿고 있다. '전체주의'와 '파시즘'을 비웃으며 '민주주의'에 찬동하고, '왕정'과 '제국주의'를 증오하며 '공화주의'를 앞세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함께 실현하는 사상으로 '과학적 사회주의'에 기초한 '인민민주주의'를 선호한다. 다수가 사람답게 사는 '대동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옳은 방법론이라 판단한다는 말이다. 그 과정에서 한반도의 혁명가 삼봉 정도전을 쫓다가 성리학에 부딪혀 유학을 조금 엿보게 되었고,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을 갖던 중 중국이라는 나라와 그 거대문명에 너무 빨려들 것을 경계하며 우리 역사로 되돌아서니 '동학'이 우뚝 서 있었다. 
'개벽(開闢)' 세상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학'에 관한 글을 써보다가 그래도 젊은 시절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찬양했던 내가 정작 '동학'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선후배를 만나 '동학' 이야기를 나누었다. 삼십대였던 내가 '민주주의'에 관해 많은 영감을 받은 이진 선배와 우리의 토착사상에 조예가 깊은 후배 정평을 만나 '자문'을 구하던 중 평이 추천은 물론 친히 빌려주기까지 한 책이 바로 이병한 교수의 [유라시아 견문]이었다. '동학'에서 갈라져 나온 원불교의 학당에 자리잡은 그는 이 대장정의 견문을 통해 '좌-우', '근대-전근대', '서구-비서구'의 '3중 분단체제'를 넘는 21세기 '전환시대의 반전'을 '유라시아'의 신(新) '제국'에서 찾는다. 기존 20세기 영미와 서유럽 중심의 '자유민주주의'는 물론 실패한 현실사회주의 또한 동전의 양면이라는 시각으로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대일통'과 '사통팔달'의 '대회통'을 통한 활발한 연대를 조망하고 그려나간다. 그리하여 '해석의 전장'인 과거 역사를 그 지역의 전통과 문명의 관점에서 재고찰한다. '객관성'과 '과학'으로 점철된 20세기 서구사상의 일방적 지배에서 벗어나 21세기에 다시금 '주관성'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그의 [유라시아 견문]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성(理性)과 영성(靈性)의 '공진화(共進化)'"를 뽑겠다. 지난 백년 이상 지배한 서구의 '이성의 제국'을 넘어 '영성의 제국'이 함께 지배하는 세계, 그 안에서 다시 한반도의 '동학'을 재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절반만 동의하기로 한다.


2. [유라시아 견문]의 모티브 - '개벽' 이전의 '개화'


"탈냉전은 또 다른 개항기였다. 대륙으로, 유라시아로 다시 길이 열렸다. 왕년의 초원길, 바닷길에 하늘길까지 분주하다. 고로 '포스트모던'은 치우친 독법이었다. '서구적 근대의 종언'이자 '탈서구적 근대의 개막'이 더욱 합당할 것이다. 유라시아는 그 '지구적 근대'의 중원(中原)이다. 20세기에 억압되었던 역사의 무의식이 중국몽, 인도몽, 아세안몽, 이란몽, 터키몽으로 피어난다. 유라시아로 방향을 선회하여 견문을 이어가는 까닭이다. '헛개화'를 거두고 '진(眞)개화(開化)'를 이루는 새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기를 소망한다. '개화'는 여전히, 영원히 진행형이다."
- [유라시아 견문 1], <2. 연행록과 견문록 - 개화기의 사대부 유길준, 우리는 그를 몰랐다>,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제목의 모티브는 의외로 조선말 개화파 유길준의 [서유견문]이다.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은 알고보면 '자주적 근대화'를 꿈꾼 사대부였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전쟁이 패배한 이후인 1895년에 발간된 [서유견문]은 국한문혼용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조선의 전통사상인 '유학(儒學)'의 관점에서 서구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사대부'의 부흥을 통해 개화를 하자는 입장이었단다. 유길준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만든 단체가 '흥사단(興士團)'이었다. '견문'이 가능했던 지배계급의 '개화' 중에서도 우리의 민중적 '동학'의 '개벽' 못지 않게 자주적인 '개화'가 있었던 것이다.

이병한의 [유라시아 견문]은 '자주적 근대화'의 관점에서 유럽과 동서남북의 아시아를 바라본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이성' 혁명에 억눌려 있던 각 지역의 '영성' 혁명에 주목한다. 그 실현태는 '철학'이 아니라 '종교'다. 서구 사상의 뿌리는 '기독교'이고, 동아시아는 '유교', 남아시아는 '불교', 북아시아 유목문화의 '텡그리(천명)' 사상을 넘어 러시아의 '그리스 동방정교'를 각 지역별 중심으로 삼는다. 여기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종교가 발견되는데 바로 동서남북을 잇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다. 
[유라시아 견문] 1권에서는 중국과 몽골, 실크로드 일대인 하서주랑과 동남아시아를 주유하며 유교와 불교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된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유교와 불교의 융합으로 문명을 이어왔고 이로써 우리도 토착된 '영성'을 재발굴하여 유라시아 대일통의 성원이 되자는 주장이다. 결국 [유라시아 견문]의 목표는 '동학'의 재발견이다. 저자에 의하면 '동학'은 '서학(천주교)'을 배타하지 않고 "되감아 치는 회심의 발군"(1권, <18. 인의예지의 공화국>)이자 전통을 내치지 않는 "유학의 민중화"이며, "사대부의 교양과 일상을 전 인민에게 널리 보급하는 동방형 민주화 기획"이었다. 국학의 지배사상으로 함몰되지 않고 "신세계와 신세기로 열린 고금 합작의 원조이고 원형"으로서 '동학'은 "서학과 국학의 분단체제를 허물고, 구학과 신학의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동아시아학이 지향해야 할 덕목을 상당 부분 내장"(이상 같은책)하고 있는 "굉장하고 신통"한 사상이라고 반추하고 있다. '고금 합작'에 기반하여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계급투쟁'은 기각해 버린 저자가 보기에 '동학'은 농민전쟁의 주역인 다수 피지배민중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인 '자주적 개화파' 유길준까지 포괄하는 동아시아 유교적 '대장부'의 시각이겠다.
'동학'의 재발견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대체하는 유라시아 각 지역의 '중국몽', '인도몽', '터키몽', '러시아몽', '이란몽' 등 대제국적 '꿈(夢)'들의 연합에 우리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자는 것이다. 
참고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살아온 우리는 '유-불-도'의 영향을 받았고 19세기 '동학'의 사상적 기반도 바로 '유-불-도+기독교(서학)'이었다.


3. '유라시아'의 문명사 - 수천 년의 '종교'적 '영성'


"유교가 한족만의 사상이 아니라 몽골족과 만주족, 조선인과 월남인을 막론하고 중화문명의 보편 이론으로 기능했던 것처럼, 이슬람 또한 아랍인들의 민족종교로 그치지 않았다. '이슬람의 집'에 귀의하는 만인만족에게 열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다대한 역할을 한 족군이 바로 튀르크(돌궐)다. 중앙유라시아를 동/서로 왕래하던 유목민이 이슬람에 귀의함으로써 '이슬람의 집'은 비약적인 도약을 이루게 된다. 중국의 서쪽이 '이슬람적 중국'이 된 것도, 인도의 북쪽이 '이슬람적 인도'가 된 것도 튀르크의 공헌이었다. 튀르크가 접속함으로써 이슬람은 세계 종교가 된 것이다. 그들이 일군 600년의 최장수 제국이 바로 '오스만제국'(1299~1922)이다."
- [유라시아 견문 2], <24. '이슬람의 집', 실향과 귀향 - 이슬람 천 년 제국, 부활의 날갯짓>, 이병한.


6.25 한국전쟁에 '자유국가'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남한과 '형제국'이 된 터키 얘기가 아니다. 서구유럽에 의해 '유럽의 병자'라는 말을 들으며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멸망하고 분열된 '오스만튀르트' 얘기다. [유라시아 견문] 2권에서 저자는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및 남아시아 인도를 잇는 미얀마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인도와 이란, 중앙아시아를 지나 이집트까지 돌아보며 '이슬람교'의 힘을 재발견한다. 물론 인도는 무굴제국 이전부터 토착종교인 힌두교가 주요 종교이나 1,2차 세계대전으로 승전국인 '서구' 영국이 분리독립시켜 분할지배하기 전까지는 북인도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2억 명이 넘는 이슬람교도 공존했었다. 인도 아대륙 전체 16억 명 중 13억 힌두교에 3억 이슬람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 가장 활발한 해양교역의 장이었던 인도양을 둘러싸고 역시 3억 명 가까이 되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포함하면 남아시아만 해도 13억 힌두교를 6억의 이슬람교가 포위한 형국이다. '중동'이나 '극동' 또한 서구의 시각인데 '유라시아' 입장에서 보면 '이슬람'의 근원지인 '중동'은 진정한 '중원'이다. '중원'을 자처하는 중국 조차 변방이다. 실크로드와 중국의 차마고도, 아랍의 향신료길이나 인도의 면화길 등으로 사방팔방 교역의 중심이었던 이 '중원'을 지배한 사상이 바로 '이슬람교'인 것이다. 칭기스칸 몽골제국이 분열하고 남서부 이슬람권에서 일어선 티무르제국과 중국 명나라가 충돌 직전 명나라가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으로 찌그러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또 다시 이루어졌을 지도 모를 유라시아 대일통의 도전은 세계의 중심답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 일대에서 중국이 동남서 아시아를 다니며 육지의 '일대'와 해양의 '일로'를 적극 '지원'하고 있단다. 여기에 그리스 동방정교를 기반으로 유럽 일대를 장악하려는 러시아 문명권과 결합하면 그야말로 '세계의 중심'으로서 '유라시아' 대문명권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이 다양한 대문명의 지도에서 사통팔달의 '윤활유'와 같다.
"이제 머리가 굳어" 힘들다는 이병한 교수는 2권의 말미에서 후세들에게 '이슬람학'을 꼭 공부할 것을 당부한다. 지정학 또는 지리학적으로 '세계의 중심(중원)'으로서 중앙아시아의 힘을 발견하기 위해 그들의 오래된 '영성', 이슬람교를 소환하고 재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중앙아시아의 입장에서 영미유럽은 '극서'에 불과하다. 지금 민족과 종교로 산산히 분할된 유라시아는 20세기 서구 제국주의 산물이며 냉전기 '제3세계'의 비동맹과 '반둥회의(1955년)'는 다시 재조명되어야 한다. 새로운 세기 '유라시아 대제국'의 길이 바로 여기에 있으며 그 길에 이슬람의 역할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중요했고 앞으로 그럴 것이라고 저자는 전망한다.
이병한이 각 지역 '이니셔티브(주도권)'의 기준으로 잡는 것은 백여년의 '이성'의 '문화독재'가 아니라, 지난 수천년의 '문명자치'로서의 '종교'와 그로부터 퍼진 '영성'이다. 
동방의 유교와 도교, 남방의 불교, 북방의 그리스정교(기독교), 서방의 이슬람교와 카톨릭(기독교)이 '유라시아' 중앙에서 만나 융합한다. 


4. 그럼에도 동의할 수 없는 '제국'


'동학' 재발견의 불가피성을 깨닫기는 했으나, 나는 아직 종교적 '영성'에 동의하지 못한다. [유라시아 견문]의 관점에 절반만 수긍한다. 서구 중심 사상에서 탈피해 우리의 전통에 기반한 사상을 벼르고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되, 러시아 푸틴의 새로운 '동방정교'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새로운 '유라시아 제국주의'에 당최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의 정치체제가 서구의 '민주주의' 또는 '민주화' 잣대로 재단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나, '제국'의 '영성'으로 다수 민중이 우민화될 우려가 크다고 본다. [유라시아 견문]에서 다소 보이는 푸틴에 대한, 시진핑에 대한 호평은 지난 세기 '서구적 근대화'의 극복을 위한 노력 이상으로까지 보일 정도다. 러시아 푸틴의 책사 알렉산드르 두긴의 '러시아 정교주의'나 현대 '중국학'의 대가 후안강 인터뷰는 읽기 거북했다. 차르의 측근 라스푸틴이나 칭기스칸 같은 위인들이 회상되고 재영웅화 되는 순간, 우리의 '동학'은 '접신'과 '득도'한 '영성'만 믿고 쓰러져간 조선말 다수 농민의 슬픈 길만을 반복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신시대와 신세기의 다수 민중은 우매하지 않고 지배자들보다 훨씬 똑똑하다. 모든 사람들이 '영성'으로 수양하고, 특히 유학의 전통문명권에 속한 우리 조선인들은 무신론적 자기수양을 통해 각자 득도를 하여 더 나은 '대동세상'을 준비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 '비선실세'의 '영성'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체한 '민주주의' 정권은 좌우를 막론하고 '영성' 가득한 수많은 미친 '빠돌이'들을 조장하고 있다. 이 '영성'들은 현대화된 '파시즘'이다.
그리하여 원체 '제국' 자체를 싫어하는 나에게 '유라시아' 대제국의 '대일통'은 21세기 새로운 '제국'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그냥 놔둬도 한반도인들은 그 지정학적 특성상 끊임없이 '서구-유라시아' 간 '문명충돌'을 반복할 것으로 본다. 미국(일본) 편에 설 것인가, 중국 편에 설 것인가, 러시아 편에 설 것인가. 갈팡질팡하는 지배계급은 조선말이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이다. '서구 영미(일)'냐 '유라시아'냐 갈림길도 다르지 않다. 
'동학'의 '자주적 현대화'가 필요한 이유다.

로마, 오스만, 중화 등의 '제국'들이 다문화와 다종교를 아루르는 '포용'적 면모를 보였던 이유는 그들이 탐욕스럽게 차지했던 그 넓은 지역을 미처 다스릴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 과학과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귀결된 '국가독점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는 '이성'과 '근대화'를 명분으로 식민지들을 직접 지배하려고 했다. 그 분할과 재분할의 결과가 바로 '민족해방'과 '분리독립'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세력 역시 식민지를 강압적이고 배타적으로 직접 지배할 역량이 없었다. 어쩌면 그런 지배력 따위는 애초에 인류에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라시아 견문]을 통해 이제 다시 제출된 다문화와 다종교를 아우르는 '유라시아 대제국'의 대세적 방향성은 거스를 수 없다 해도 '영성'과 '전통'이 아닌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로 무장된 '동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주도권)'로서의 '동학'은 천재들의 사상접목이나 '득도'가 아니라, 다수 민중의 깨달음과 조직화에서 재발견되어야 한다.


5. 우리 각자의 '동학'으로


"미래의 사회주의... '고금 합작'... 각자의 문명적 고유성과 사회주의적 보편성을 튼튼하게 결합하는 '신사회주의 프로젝트'이다. 20세기 사회주의는 역사적 문명을 배격하고 배타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쌍생아였다. 그러나 미래의 사회주의는 저마다의 문명에 바탕을 둔 '오래된 사회주의'에 빗댈 수 있을 것 같다. 즉 '역사의 종언'도 아니고 '문명의 충돌'도 아닌 '역사적 사회주의', '문명적 사회주의'이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인문적 사회주의'이다. 2050년의 동아시아라면 '사회주의(Socialism)'라는 꼬리표도 떼어낼 지 모른다. '대동세계', '태평천하'라는 옛말이 한결 더 어울릴 법하다."
- [유라시아 견문 1], <35. 동서고금의 교차로, 카슈가르 - 중국에도 '서해'가 있다!>, 이병한.


수천 년의 문명적 전통으로서 종교의 역할을 굳이 '영성' 복귀에서 찾을 것 없다. 우리의 전통적 조직과 공동체 문화의 재창조에 '황족' 또는 '왕족'이 없이 모두가 평등한 '깨달음'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우리 전통의 '유불도' 사상과 결합한 '동학'의 현대화가 바로 한반도의 '사회주의', 우리의 '대동세상' 아니겠는가.
"포용적인 제국이 평등하다"는 식의 유발 하라리, 이중톈, 이병한 등의 천재들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하는 다수의 '계급투쟁'으로 '동학'은 지금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나라도 최근에 '공식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나 또한 내 나라가 '선진국'의 위상으로 피할 수 없는 '유라시아 대제국'에 당당히 참여하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동학'은 내부를 위한 사상이 아니라 외부로 확장함에 반드시 필요한 사상적 무장이 된다. 
지배계급은 '서구주의'의 수치로, [유라시아 견문]은'고금 합작'의 '영성'적 인문학으로, 피지배계급은 억압을 뚫은 다수 민중의 역동성으로 '동학'을 다시 만들어갈 것이다. 어느 편의 '동학'이 될지는 각자 발딛고 선 물질적인 계급적 토대에 기반할 것이다. 
노동계급인 내가 동의할 수만은 없지만, [유라시아 견문]의 '결론'으로 택한 단락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무리한다.


"부국강병, 세속적 목표만 추구하는 나라는 이제 '후진국'이다. 속된 부르주아를 섬기는 논리(자유주의/시민민주주의)나 천한 프롤레타리아를 모시는 논리(사회주의/인민민주주의)나 죄다 20세기의 적폐다. 인격을 드높이고 인륜을 다하며 인권을 누리는 '문명국가'가 '선진국'이다. '천상의 나라'를 지상에도 구현해 보겠다는 발심을 일으키고 '영성(靈性)'을 고양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 [유라시아 견문 3], <28. 아스타나, 카자흐스탄의 봄 - "通則不痛 不通則痛">, 이병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주도권)'의 사상적 기준으로서 현대의 '동학'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인가 각자 한 번은 돌아볼 일이다.


***

1. [유라시아 견문 1 - 몽골 로드에서 할랄 스트리트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6.
2. [유라시아 견문 2 - 히말라야에서 지중해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8.
3. [유라시아 견문 3 -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9.

* 읽는 순서는 따로 없겠으나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결론'으로서 3권을 먼저, 
처음 떠나는 1권을 다음에, 
'중원'에서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종교'를 재발견하는 2권을 마지막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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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백승종 지음 / 들녘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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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을 위한 '21자 주문(呪文)'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백승종, <들녘>, 2019.


1. '개벽'을 위한 '21자 주문(呪文)' - [동경대전](최제우)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수운(최제우)이 서른일곱 되던 해가 경신년 1860년이었다. 4월 5일, 장조카의 생일에 참석했다가 한기가 몹시 나서 집에 돌아온 수운은 상제의 음성을 듣고 상제로부터 세상의 병을 고치는 영부(靈符)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조화(造化)를 얻었다. 수운은 이 세상을 구하는 큰 깨달음을 얻는 황홀함 속에서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는 알고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 곧 나이니라. 너에게 무궁무진한 도를 내릴 것이니, 이를 닦고 다듬어서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라. 너로 하여금 이 세상을 빛내게 하리라'라는 '한울님'의 말씀을 들었다."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1824년 경주의 유학자인 근암 최옥의 서자로 태어난 수운 최제우는 1864년 42세의 나이에 대구감영에서 "백성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난민(亂民)'의 죄를 받고 사형을 당한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경주의 대유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읽었을 최제우는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되 서자로서 과거시험도 보지 못하였으나 '천명'을 따르고자 했던 '성리학자'였다. 출사할 길이 막혔던 이 똑똑했던 '지식인'은 처자를 이끌고 경주에서 울산으로 방황을 하던 중 아버지가 글공부를 하던 경주 구미산의 용담정으로 돌아와 '깨달음'을 얻는다. 유교와 불교 및 도교를 두루 섭렵하고 당시 서양에서 유입되던 천주교의 하느님과 예수님까지 알고 있었으며 중국 명나라에 천주교를 전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까지 분명히 읽었을 그는 마침내 서른일곱살에 '한울님'을 영접하고 '인내천(人乃天)'의 근본이 되는 '시천주(侍天主)'를 개시하게 된다. 즉, '천명'을 따르는 '천주(한울님)'를 모시는데 그 '천주'는 바로 나의 마음이자 너의 마음, 우리 사람들 모두의 마음이라는 것,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이라는 믿음의 출발이었다. 수운 최제우는 하느님을 섬기지만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가 나뉘고 상호 소통하지 않는 천주교, 즉 '서학(西學)'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동학(東學)'을 창시한다. 글도 몰랐다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하느님/하나님/한울님(천주)'을 사람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로까지 확장하는 '생태주의'적 사상을 펼치며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포접제'의 동학 기본 조직을 만드는 '최보따리'로 불렸고 3대 교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만들었다. 

1863년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1861년 <포덕문>부터 시작하여 저술된 수운 최제우의 저작 일체를 모은 1880년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한다. '동쪽의 경전을 크게 모은다'는 제목의 [동경대전]은 순한문체로 쓰인 동학의 경전과 문집이다. 1861년의 <포덕문(布德文)>은 '덕을 펼친다', 1862년의 <동학론(東學論)/논학문(論學文)>은 '서학'과 비교되는 '동학'의 정체에 관한 논설과 '21자 주문' 해설, 같은해 <수덕문(修德文)>은 '덕을 닦는다'는 글이다. 성리학에서 기본적인 사상적, 개념적 길을 잡은 최제우에게 '덕(德)'은 '천명(天命)'이자 '도(道)'를 의미한다. 2021년에 [동경대전]을 새롭게 주해한 도올 김용옥은 1860년에 '도(道)'를 얻은 최제우가 다음해에 지은 <포덕문>은 외부를 향한 '정(正)', 그 이듬해 지은 <동학론/논학문>은 '서학'과의 대비를 통해 '동학'이 무엇인가 정의하는 '반(反)', <수덕문>은 결국 '나' 자신의 내부로 돌아와 "천인합일(天人合一)" 및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吾心卽汝心)"를 확인하는 '합(合)'이라는 헤겔식 변증법의 '정-반-합' 테제로 설명한다. 이 세 문건이 바로 [동경대전]의 핵심을 담은 세 개의 소경전이다. 도올에 의하면 '동학'의 핵심은 '천도'로서의 유학적 '도'를 넘어 '인덕'으로서 '덕'을 중시한 그 실천성에 있고 이것이 바로 기존 '유-불-도'나 기독교(천주교)와 차별되는 '동학'의 우수함이다. 그리하여 도올은 '천주'를 '한울님'으로 해석한 '천도교'의 좁은 틀을 벗어나 원래의 보편적 '천주', 즉 '하느님'으로 다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늘' 또는 '하나'가 우리말 어원인 '하느님'은 동학에서는 더 이상 '높은 곳의 유일자'가 아닌 나와 너, 우리 모두와 세상만물이지만 말이다.
최제우의 사상이 성리학에 기반하다 보니 [동경대전]에서 '천도(天道)'가 나타나는 참된 모습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조화'다. 성리학의 경전인 [중용]과 [주역]에서 말하는 '원형이정'의 '원'은 '크다', '형'은 '형통하다', '이'는 '이롭다', '정'은 '바르다'는 뜻인데, [동경대전]에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천도지상(天道之常)", 즉 "천도는 항상 '원형이정'으로 나타난다"고 적혀있다. 수운 최제우의 도통은 해월 최시형이 받았으나, '성리학자' 최제우는 여러 제자들 중 뛰어난 자들에게 '원형이정'의 조화를 내렸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선비 '강시원', 2대 도통 '최시형' 외에 '심시정'이라는 이름도 [동경대전] 편찬자의 명단에 있다. 어딘가에 아무개 '시리'라는 이름의 제자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유-불-도'의 동양 3교는 물론 서양의 천주교까지 섭렵한 최제우는 유교의 '인의예지신'과 도교적 '목화토금수' 같이 수운 자신을 중심으로 '원형이정'의 조화를 불교적 '4대천왕(지국-광목-부처-증장-다문)'으로 배치한 것 아닐까.

'동학'의 기본사상은 '삼경(三敬)', 즉 '하늘을 섬기고(경천)', '사람을 섬기며(경인)', '만물을 섬기는(경물)' 근대적 '생태주의' 철학이었다. 이 '삼경'은 누구라도 군자가 될 수 있는 실천덕목이었는데, 최제우의 '동학' 사상 자체가 그 기본 뿌리는 재차 강조하지만 유교 또는 '성리학'이었다. 14세기에 도입된 성리학은 당시에는 사회를 개조하는 진보적 실천철학이었지만,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특히 왜란과 호란의 전란을 겪은 후 사대부 지배체제가 위기를 맞고 쓸데없는 '예학'의 강조로 피지배계급에 대한 착취는 끝간 데 없었다. 썩어버린 성리학이나마 그 실천철학의 덕목은 이렇게 피지배계급 사이에서 '동학'의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최제우의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 등의 기본 개념들은 '성리학'적 개념들이다. 수운이 말한 '개벽'은 '정의로운 경제공동체'로 새로 태어나는 새로운 세상인데, '미륵불하생'의 세계관과 맞닿는다. 신세계 개벽에 대한 믿음으로 수만 명의 농민반란군은 관군과 일본군대의 신식무기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문을 외워댔고 당당하게 쓰러져 갔다. 
주자 성리학의 기초가 된 주돈이의 [태극도설]이나 소옹의 [선천역학]에서 '태극'은 동학에서는 결국 하나로 통하는 '무극'이고, '선천'과 '후천'의 구분은 결국 '개벽(開闢)'이다. 도올에 의하면 최제우는 '선천'이나 '후천'이라는 말은 한 적 없고 '개벽'만을 주장했다. 따라서 '선천'이냐 '후천'이냐는 애초 '5만년' 전 '천지개벽' 후 19세기 '다시 개벽'의 '이전(선천)'이냐 '이후(후천)'이냐 하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동학의 깨달음으로 이제 '다시 개벽'하는 실천만이 중요한 것이다.
조선 말 동학농민군이 외세와 썩은 왕조의 총포 앞에서 외우며 죽어간 이 주문이 바로 '13자 시천주주문(侍天主呪文)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인데, 원래 최제우가 [동경대전]의 <동학론/논학문>에서 선언하고 해설한 주문은 스물한자 주문인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다. 그 뜻은 "지극한 기운이 지금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비나이다. 한울님(천주)을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아니하면 온갖 일을 알게 되나이다"이며, 사람과 만물 안에 깃든 '천주(天主)'를 모셔 대자연의 만물 창조의 큰 이치인 '조화(造化)'를 정하고 이를 잊지 않고 행하면 모든 일에 통달한다는 의미겠다. 여말선초 '성리학'의 실천철학적 '진보성'을 잇는 조선 후기 새로운 실천철학 '동학'의 '진보성'은 이러한 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한 '자주적 근대화'였다.


2. '운동'으로서의 '동학'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백승종)


"'개벽'의 본질... 허황한 부귀공명을 약속하는 이상세계가 아니라, 개인의 실천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신인간(新人間;眞人)'이 땀흘려 만드는 세상이 곧 '개벽'한 세상이요, 동학이 추구하는 미륵세상이었다는 말입니다."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2강. 사람이 하늘이다. 최제우와 최시형의 가르침', 백승종, <들녘>, 2019.


역사학자 백승종 선생은 '사상의 계보학'적 추적을 통해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의 동학 사상에서 우리 역사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투영해 본다. 조선 후기 '민란의 시대' 배경을 훑어보고 수운과 해월의 사상을 정리하며 '동학운동'이 실천적으로 가능했던 농민조직을 설명한 후 이 운동의 현재적 의미를 정의하는 강의록의 제목은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2019)이다. 저자는 '동학'을 '혁명' 보다는 '운동'으로 규정하는데, 국가를 개조하고 외세를 몰아내는 '혁명'의 실패의 관점이 아닌,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운동'의 관점이다. 
그는 '동학운동'을 몇 가지 주요 키워드로 연결하고 있다. 첫째는 조선 후기의 '불평등 심화와 양극화', 둘째는 몰락 양반이나 유학자와 같은 계층이 유일한 자산인 '지식'을 팔아 키운 '평민지식인', 셋째는 오랜 동안 '두레'와 '품앗이', 동종'이나 '하계' 등을 토대로 한 농민사회 '비밀결사', 넷째는 이와 같은 자생적인 농민조직과 이들의 평등한 '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해 건설되는 '정의로운 경제공동체', 다섯째는 만물이 하늘인 '생태주의', 여섯째는 예나 지금이나 독점이 갈수록 강화되는 세상에서 사물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한 '후천개벽'으로서의 '자주적 근대화', 일곱째는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미륵신앙', 여덟째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실천'으로서의 동학, 아홉번째는 '화해'와 '협동'과 '연대'의 가치, 열번째는 불평등과 억압 및 착취를 심화하는 자본주의 청산 등이다. '동학'이 '근대화'인 이유는 '자유'와 '평등' 같은 근대 시민사회적 개념을 우리식으로 공유하려 했던 실천적 노력에서 그렇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 민중 사회의 주체적 실천이 결합하여 '자주적 근대화'가 된다. 백승종 선생에 의하면 이 '자주적 근대화'가 바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이요, 이상세계로서 불교의 '미륵하생신앙', 도교의 '조화선경', 유교의 '대동사회'였다. "평화와 정의, 풍요롭고 건강한 삶이 개벽된 새 세상의 특징(백승종, 같은책, '4강')"인 것이다. 


"동학농민들이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건설하기 원했다는 점... '유무상자(有無相資)... '정의로운 경제공동체'... '공공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 보편타당한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바로 동아시아의 '정의'... 하늘의 뜻에 부합되는 것... '경제적 정의'를 구현하여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건설하는 꿈,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진정한 목표였어요...
동학적 의미의 인간개조 또는 사회개조... '후천개벽'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정의로운 새로운 관계가 낡은 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상황, 동학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후천개벽'으로 보았습니다."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3강. 갑오동학농민운동, 그 중심에 소농이 있다', 백승종.


3. '혁명'으로서의 '동학'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신정일)


최제우가 '접신'하여 '득도'한 1860년 조선 말기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1862년은 삼남 지역의 '임술민란'의 해였고, 북쪽의 유흥렴과 남쪽의 이필제 같은 '직업혁명가'들은 수많은 가명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란들을 조직하고 선동했을 수도 있는데, 이 '직업혁명가'들이 바로 '평민지식인'들이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해 5월 '전주화약' 후 농민군이 흩어졌을 때, 태인 대접주 김개남은 서울진격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소심한 책상물림들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며 남원으로 내려갔다. 전봉준과 손화중, 손병희로 이어지는 동학농민혁명의 불꽃이 사그라지면서 '혁명'적 '동학정신'을 이어나간 것이 김개남의 집단(포)였다고 하는데, 이들이 숨어든 지리산은 이후 1~3차 지리산 의병전쟁의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 유격대의 조직적 계보를 거슬러 오르면 김개남과 동학농민군이 보인다. 민중 도보답사가 신정일 선생은 동학농민전쟁의 현장을 발로 다니며 기록한 [동학농민혁명 답사기](2019)에서 당시 "지리산을 넘어 하동, 진주까지 진출했던 김개남의 잔존세력들은... 진주 형평사운동과 고려공산당을 만든 김단야로, 민족민중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다(같은책, <남원 교룡산 : 처음부터 끝까지 혁명가였던 김개남>)"고 쓴다. 
이렇게 동학의 '실천'은 우리 역사에서 '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


"손화중이 왕이 될 것이라거나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잇고 손화중의 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접의 중심포였고 가장 많은 세력을 규합했던 손화중은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황룡강 싸움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러나 2차 봉기에 그는 공주로 가지 않고 광주 일대를 지켰다.
우금치 싸움이 패배로 돌아가고 태인에서 농민군의 주력부대가 해산하자 그는 재실지기였던 이봉우에게 '그 동안 내가 너에게 진 빚을 갚겠다. 나를 고발하여 큰 상을 받으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손화중은 서울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이듬해 전봉준과 한날한시에 처형당했다... 
어쨌거나 '비결탈취사건'은 암울했던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후천개벽'을 꿈꾸었던 민중들의 동학과 시대의 현실과 미륵설화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농민전쟁의 발단이 된 것이다."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조선 후기 또한 중국이나 후삼국 한반도 못지 않게 농민들의 '비밀결사' 조직이 성행했을 것이다. 원나라 말기 '명교'나 '백련교', 청나라 말 '태평천국' 등은 각 시대에 맞게 각색된 '미륵불하생경'이었으며 이들이 대항이데올로기로 우뚝 서 '후천개벽' 비슷한 사상을 설파할 수 있었던 배경은 농민사회 '비밀결사'였다. 
'태평천국'의 홍수전도 거듭된 과거시험 낙방 후 우연히 성경책을 읽고 '접신'을 하고는 예수의 동생이 된 것이 흡사 열 몇살 아래인 조선의 최제우와 비슷하다. 당나라 말기 황소와 청나라 말 홍수전이 과거에 합격하는 '공정'한 사회였다면, 서자였던 최제우도 성리학 이론으로 무장하여 출사할 수 있었던 세상이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접신' 또는 '후천개벽'을 외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들과 달리 '녹두장군' 전봉준은 '평민지식인'이었다. 사형당하기 전 재판서에는 그의 직업이 '농업'으로 되어 있지만, 그는 농사를 지을 줄 몰랐고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떠돌이 훈장 선생님 쯤 되었단다. 동학혁명 내내 급진 과격파 김개남과 가장 큰 조직을 지녔던 손화중은 전봉준과 함께 강경파 '남접'의 접주들이었다. 최시형과 손씨들을 비롯한 충청도와 강원도의 '북접'은 '남접'과 한때 대립까지 불사하던 온건파였는데 조직을 지키기 위한 최시형의 고뇌 또한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 '민란의 시대'는 다수 민중 모두가 죽을 줄 알면서도 '봉준이 형님'을 따라 지옥길을 나섰고 결국 '시천주주문'과 함께 수만 명의 민중들이 지옥의 명부에 갇혔다.


4. [정감록] 탈취사건 - [민란의 시대](이이화)


'동학'이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그들이기에 전투 중 위기에 빠지면 농민군은 지도자 장수에게 "언제 도술을 쓸 것이냐" 묻기도 하고 대포나 기관총 앞에서 몽둥이나 농기구만 든 채 부적을 붙이고는 13자 주문을 외웠으며 잔다르크 같이 어린 아이를 선두에서 무등 태우고는 그 아이의 지휘에 따르기도 했단다. 웃프기도 한 이 전쟁의 도발은 역시 '비기(祕記) 탈취사건'이었는데, [정감록]이었을지 [목민심서]였을지 아니면 [동경대전]의 '무극이도'나 쿵푸팬더의 빈 '용의 문서'였는지는 모르나 고창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에서 무장 접주 손화중이 '비기'를 탈취하고도 '벽력(벼락)살'을 맞지 않았다는 설에서 시작한다. 물론 끝까지 그 '비기'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고 전봉준과 함께 서울로 호송되어 재판받던 손화중이 관리에게 본인을 '소인'이라 칭하는 것을 본 시종일관 당당했던 전봉준이 "내가 저런 소인배와 큰 일을 도모했으니 실패는 정해졌던 일(신정일, 같은책)"이라 한탄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기'를 탈취한 손화중 장군도 동학농민전쟁에서 탁월했던 지도자였다. 그래도 역시 동학혁명의 자존심은 전봉준 장군이었는데 그는 죽는 그날까지 관리들에게 반말을 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죽었다고 한다. 
아무튼, '비기'의 대명사 [정감록]은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고려 말기에 이씨 왕조 예정설이 떠돌았는데 조선 중후기에 접어들면서 정씨 왕조설로 변형되었다. 원래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려 죽자 그의 후손과 세력들이 이를 애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고도 하고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이 정도전을 모함하기 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는 설도 있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정씨 왕조설을 담은 비기는 조선 후기에 들어 다른 비기들을 압도하며 유행을 탔다.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인 숙종 시기였다.
... 
한편 조일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 직전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1,000여 명이 죽었다. 정여립이 지리산에 묻힌 옥판을 찾아냈는데 여기에 정씨 왕조설과 계룡산이 도읍지라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 
숙종과 영조 시기까지도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책명은 공식 기록에 나타나지 않다가 18세기 말엽인 정조 말년에야 나타난다.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는 [정감록]이 '요서(妖書)와 방서(方書)를 섞어 모은 책'이라 하고 이어 '영조 연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9세기 문벌정치(세도정치) 시기에 들어와 [정감록]은 크게 유행을 탔다."
- [민란의 시대], '1. 문벌정치의 등장과 관서농민전쟁',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5. '동학' : '개벽'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


최제우는 '동학'이 옳다고 판단했지만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단다. [동경대전]의 <포덕문>은 '포교'의 목적이 아니었다. 유생들이 손가락질할 때 그는 "나의 도는 당신들의 도와 다르지 않다"고 했는데 동학의 개념들 자체가 성리학의 그것이었다. 즉, '하늘의 도(천도)'는 같았으되, 이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방식이 달랐다. 조선 말기의 성리학은 계급지배의 도구였고 동학은 민중적 계급투쟁의 이념이었다. 
예를 들어, '귀신(鬼神)론'의 경우, 동양의 귀신은 서양 근대의 'Ghost'가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 즉 조상이다. 하늘로 퍼지는 '신(伸/神)'과 땅으로 돌아가는 '귀(歸/鬼)'의 뜻으로서 '귀신'은 '혼백(魂魄)'이다.'혼비백산(魂飛魄散)', 하늘로 날아올라 퍼지는 것은 '혼(신)'이요, 땅으로 흩어져 스며드는 것은 '백(귀)'이다. 동양에서 '신'이, 특히 '유일신'이 없는 이유다. 우리에게는 "천지 자체가 귀신"이다. 동학의 '천주'가 모든 사람과 만물에 깃든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19세기 당시 서양 문물의 유입과 함께 콜레라와 같은 '팬데믹' 현상으로 수없이 죽어나가던 면역력 없던 동양인들의 위기의식도 '동학' 발생의 배경이라고도 하는데, 전세계가 교류하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전히 쓸려나가는 현재의 '개벽'과 '동학'이 만나는 지점이 어디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제, 모두가 '하느님'인 세상을 향한 '철학'의 새로운 '실천' 앞에 다시 '동학(東學)'이 우뚝 서 있다. 
'개벽(開闢)'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


***

1.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백승종, <들녘>, 2019.
2.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3.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4. [동경대전-2](1861), 최제우, 김용옥 주해, <통나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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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 2 - 우리가 하느님이다 동경대전 2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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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을 위한 '21자 주문(呪文)'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백승종, <들녘>, 2019.


1. '개벽'을 위한 '21자 주문(呪文)' - [동경대전](최제우)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수운(최제우)이 서른일곱 되던 해가 경신년 1860년이었다. 4월 5일, 장조카의 생일에 참석했다가 한기가 몹시 나서 집에 돌아온 수운은 상제의 음성을 듣고 상제로부터 세상의 병을 고치는 영부(靈符)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조화(造化)를 얻었다. 수운은 이 세상을 구하는 큰 깨달음을 얻는 황홀함 속에서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는 알고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 곧 나이니라. 너에게 무궁무진한 도를 내릴 것이니, 이를 닦고 다듬어서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라. 너로 하여금 이 세상을 빛내게 하리라'라는 '한울님'의 말씀을 들었다."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1824년 경주의 유학자인 근암 최옥의 서자로 태어난 수운 최제우는 1864년 42세의 나이에 대구감영에서 "백성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난민(亂民)'의 죄를 받고 사형을 당한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경주의 대유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읽었을 최제우는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되 서자로서 과거시험도 보지 못하였으나 '천명'을 따르고자 했던 '성리학자'였다. 출사할 길이 막혔던 이 똑똑했던 '지식인'은 처자를 이끌고 경주에서 울산으로 방황을 하던 중 아버지가 글공부를 하던 경주 구미산의 용담정으로 돌아와 '깨달음'을 얻는다. 유교와 불교 및 도교를 두루 섭렵하고 당시 서양에서 유입되던 천주교의 하느님과 예수님까지 알고 있었으며 중국 명나라에 천주교를 전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까지 분명히 읽었을 그는 마침내 서른일곱살에 '한울님'을 영접하고 '인내천(人乃天)'의 근본이 되는 '시천주(侍天主)'를 개시하게 된다. 즉, '천명'을 따르는 '천주(한울님)'를 모시는데 그 '천주'는 바로 나의 마음이자 너의 마음, 우리 사람들 모두의 마음이라는 것,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이라는 믿음의 출발이었다. 수운 최제우는 하느님을 섬기지만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가 나뉘고 상호 소통하지 않는 천주교, 즉 '서학(西學)'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동학(東學)'을 창시한다. 글도 몰랐다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하느님/하나님/한울님(천주)'을 사람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로까지 확장하는 '생태주의'적 사상을 펼치며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포접제'의 동학 기본 조직을 만드는 '최보따리'로 불렸고 3대 교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만들었다. 

1863년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1861년 <포덕문>부터 시작하여 저술된 수운 최제우의 저작 일체를 모은 1880년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한다. '동쪽의 경전을 크게 모은다'는 제목의 [동경대전]은 순한문체로 쓰인 동학의 경전과 문집이다. 1861년의 <포덕문(布德文)>은 '덕을 펼친다', 1862년의 <동학론(東學論)/논학문(論學文)>은 '서학'과 비교되는 '동학'의 정체에 관한 논설과 '21자 주문' 해설, 같은해 <수덕문(修德文)>은 '덕을 닦는다'는 글이다. 성리학에서 기본적인 사상적, 개념적 길을 잡은 최제우에게 '덕(德)'은 '천명(天命)'이자 '도(道)'를 의미한다. 2021년에 [동경대전]을 새롭게 주해한 도올 김용옥은 1860년에 '도(道)'를 얻은 최제우가 다음해에 지은 <포덕문>은 외부를 향한 '정(正)', 그 이듬해 지은 <동학론/논학문>은 '서학'과의 대비를 통해 '동학'이 무엇인가 정의하는 '반(反)', <수덕문>은 결국 '나' 자신의 내부로 돌아와 "천인합일(天人合一)" 및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吾心卽汝心)"를 확인하는 '합(合)'이라는 헤겔식 변증법의 '정-반-합' 테제로 설명한다. 이 세 문건이 바로 [동경대전]의 핵심을 담은 세 개의 소경전이다. 도올에 의하면 '동학'의 핵심은 '천도'로서의 유학적 '도'를 넘어 '인덕'으로서 '덕'을 중시한 그 실천성에 있고 이것이 바로 기존 '유-불-도'나 기독교(천주교)와 차별되는 '동학'의 우수함이다. 그리하여 도올은 '천주'를 '한울님'으로 해석한 '천도교'의 좁은 틀을 벗어나 원래의 보편적 '천주', 즉 '하느님'으로 다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늘' 또는 '하나'가 우리말 어원인 '하느님'은 동학에서는 더 이상 '높은 곳의 유일자'가 아닌 나와 너, 우리 모두와 세상만물이지만 말이다.
최제우의 사상이 성리학에 기반하다 보니 [동경대전]에서 '천도(天道)'가 나타나는 참된 모습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조화'다. 성리학의 경전인 [중용]과 [주역]에서 말하는 '원형이정'의 '원'은 '크다', '형'은 '형통하다', '이'는 '이롭다', '정'은 '바르다'는 뜻인데, [동경대전]에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천도지상(天道之常)", 즉 "천도는 항상 '원형이정'으로 나타난다"고 적혀있다. 수운 최제우의 도통은 해월 최시형이 받았으나, '성리학자' 최제우는 여러 제자들 중 뛰어난 자들에게 '원형이정'의 조화를 내렸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선비 '강시원', 2대 도통 '최시형' 외에 '심시정'이라는 이름도 [동경대전] 편찬자의 명단에 있다. 어딘가에 아무개 '시리'라는 이름의 제자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유-불-도'의 동양 3교는 물론 서양의 천주교까지 섭렵한 최제우는 유교의 '인의예지신'과 도교적 '목화토금수' 같이 수운 자신을 중심으로 '원형이정'의 조화를 불교적 '4대천왕(지국-광목-부처-증장-다문)'으로 배치한 것 아닐까.

'동학'의 기본사상은 '삼경(三敬)', 즉 '하늘을 섬기고(경천)', '사람을 섬기며(경인)', '만물을 섬기는(경물)' 근대적 '생태주의' 철학이었다. 이 '삼경'은 누구라도 군자가 될 수 있는 실천덕목이었는데, 최제우의 '동학' 사상 자체가 그 기본 뿌리는 재차 강조하지만 유교 또는 '성리학'이었다. 14세기에 도입된 성리학은 당시에는 사회를 개조하는 진보적 실천철학이었지만,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특히 왜란과 호란의 전란을 겪은 후 사대부 지배체제가 위기를 맞고 쓸데없는 '예학'의 강조로 피지배계급에 대한 착취는 끝간 데 없었다. 썩어버린 성리학이나마 그 실천철학의 덕목은 이렇게 피지배계급 사이에서 '동학'의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최제우의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 등의 기본 개념들은 '성리학'적 개념들이다. 수운이 말한 '개벽'은 '정의로운 경제공동체'로 새로 태어나는 새로운 세상인데, '미륵불하생'의 세계관과 맞닿는다. 신세계 개벽에 대한 믿음으로 수만 명의 농민반란군은 관군과 일본군대의 신식무기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문을 외워댔고 당당하게 쓰러져 갔다. 
주자 성리학의 기초가 된 주돈이의 [태극도설]이나 소옹의 [선천역학]에서 '태극'은 동학에서는 결국 하나로 통하는 '무극'이고, '선천'과 '후천'의 구분은 결국 '개벽(開闢)'이다. 도올에 의하면 최제우는 '선천'이나 '후천'이라는 말은 한 적 없고 '개벽'만을 주장했다. 따라서 '선천'이냐 '후천'이냐는 애초 '5만년' 전 '천지개벽' 후 19세기 '다시 개벽'의 '이전(선천)'이냐 '이후(후천)'이냐 하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동학의 깨달음으로 이제 '다시 개벽'하는 실천만이 중요한 것이다.
조선 말 동학농민군이 외세와 썩은 왕조의 총포 앞에서 외우며 죽어간 이 주문이 바로 '13자 시천주주문(侍天主呪文)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인데, 원래 최제우가 [동경대전]의 <동학론/논학문>에서 선언하고 해설한 주문은 스물한자 주문인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다. 그 뜻은 "지극한 기운이 지금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비나이다. 한울님(천주)을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아니하면 온갖 일을 알게 되나이다"이며, 사람과 만물 안에 깃든 '천주(天主)'를 모셔 대자연의 만물 창조의 큰 이치인 '조화(造化)'를 정하고 이를 잊지 않고 행하면 모든 일에 통달한다는 의미겠다. 여말선초 '성리학'의 실천철학적 '진보성'을 잇는 조선 후기 새로운 실천철학 '동학'의 '진보성'은 이러한 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한 '자주적 근대화'였다.



2. '운동'으로서의 '동학'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백승종)


"'개벽'의 본질... 허황한 부귀공명을 약속하는 이상세계가 아니라, 개인의 실천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신인간(新人間;眞人)'이 땀흘려 만드는 세상이 곧 '개벽'한 세상이요, 동학이 추구하는 미륵세상이었다는 말입니다."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2강. 사람이 하늘이다. 최제우와 최시형의 가르침', 백승종, <들녘>, 2019.


역사학자 백승종 선생은 '사상의 계보학'적 추적을 통해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의 동학 사상에서 우리 역사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투영해 본다. 조선 후기 '민란의 시대' 배경을 훑어보고 수운과 해월의 사상을 정리하며 '동학운동'이 실천적으로 가능했던 농민조직을 설명한 후 이 운동의 현재적 의미를 정의하는 강의록의 제목은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2019)이다. 저자는 '동학'을 '혁명' 보다는 '운동'으로 규정하는데, 국가를 개조하고 외세를 몰아내는 '혁명'의 실패의 관점이 아닌,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운동'의 관점이다. 
그는 '동학운동'을 몇 가지 주요 키워드로 연결하고 있다. 첫째는 조선 후기의 '불평등 심화와 양극화', 둘째는 몰락 양반이나 유학자와 같은 계층이 유일한 자산인 '지식'을 팔아 키운 '평민지식인', 셋째는 오랜 동안 '두레'와 '품앗이', 동종'이나 '하계' 등을 토대로 한 농민사회 '비밀결사', 넷째는 이와 같은 자생적인 농민조직과 이들의 평등한 '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해 건설되는 '정의로운 경제공동체', 다섯째는 만물이 하늘인 '생태주의', 여섯째는 예나 지금이나 독점이 갈수록 강화되는 세상에서 사물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한 '후천개벽'으로서의 '자주적 근대화', 일곱째는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미륵신앙', 여덟째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실천'으로서의 동학, 아홉번째는 '화해'와 '협동'과 '연대'의 가치, 열번째는 불평등과 억압 및 착취를 심화하는 자본주의 청산 등이다. '동학'이 '근대화'인 이유는 '자유'와 '평등' 같은 근대 시민사회적 개념을 우리식으로 공유하려 했던 실천적 노력에서 그렇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 민중 사회의 주체적 실천이 결합하여 '자주적 근대화'가 된다. 백승종 선생에 의하면 이 '자주적 근대화'가 바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이요, 이상세계로서 불교의 '미륵하생신앙', 도교의 '조화선경', 유교의 '대동사회'였다. "평화와 정의, 풍요롭고 건강한 삶이 개벽된 새 세상의 특징(백승종, 같은책, '4강')"인 것이다. 


"동학농민들이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건설하기 원했다는 점... '유무상자(有無相資)... '정의로운 경제공동체'... '공공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 보편타당한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바로 동아시아의 '정의'... 하늘의 뜻에 부합되는 것... '경제적 정의'를 구현하여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건설하는 꿈,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진정한 목표였어요...
동학적 의미의 인간개조 또는 사회개조... '후천개벽'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정의로운 새로운 관계가 낡은 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상황, 동학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후천개벽'으로 보았습니다."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3강. 갑오동학농민운동, 그 중심에 소농이 있다', 백승종.


3. '혁명'으로서의 '동학'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신정일)


최제우가 '접신'하여 '득도'한 1860년 조선 말기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1862년은 삼남 지역의 '임술민란'의 해였고, 북쪽의 유흥렴과 남쪽의 이필제 같은 '직업혁명가'들은 수많은 가명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란들을 조직하고 선동했을 수도 있는데, 이 '직업혁명가'들이 바로 '평민지식인'들이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해 5월 '전주화약' 후 농민군이 흩어졌을 때, 태인 대접주 김개남은 서울진격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소심한 책상물림들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며 남원으로 내려갔다. 전봉준과 손화중, 손병희로 이어지는 동학농민혁명의 불꽃이 사그라지면서 '혁명'적 '동학정신'을 이어나간 것이 김개남의 집단(포)였다고 하는데, 이들이 숨어든 지리산은 이후 1~3차 지리산 의병전쟁의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 유격대의 조직적 계보를 거슬러 오르면 김개남과 동학농민군이 보인다. 민중 도보답사가 신정일 선생은 동학농민전쟁의 현장을 발로 다니며 기록한 [동학농민혁명 답사기](2019)에서 당시 "지리산을 넘어 하동, 진주까지 진출했던 김개남의 잔존세력들은... 진주 형평사운동과 고려공산당을 만든 김단야로, 민족민중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다(같은책, <남원 교룡산 : 처음부터 끝까지 혁명가였던 김개남>)"고 쓴다. 
이렇게 동학의 '실천'은 우리 역사에서 '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


"손화중이 왕이 될 것이라거나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잇고 손화중의 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접의 중심포였고 가장 많은 세력을 규합했던 손화중은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황룡강 싸움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러나 2차 봉기에 그는 공주로 가지 않고 광주 일대를 지켰다.
우금치 싸움이 패배로 돌아가고 태인에서 농민군의 주력부대가 해산하자 그는 재실지기였던 이봉우에게 '그 동안 내가 너에게 진 빚을 갚겠다. 나를 고발하여 큰 상을 받으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손화중은 서울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이듬해 전봉준과 한날한시에 처형당했다... 
어쨌거나 '비결탈취사건'은 암울했던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후천개벽'을 꿈꾸었던 민중들의 동학과 시대의 현실과 미륵설화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농민전쟁의 발단이 된 것이다."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조선 후기 또한 중국이나 후삼국 한반도 못지 않게 농민들의 '비밀결사' 조직이 성행했을 것이다. 원나라 말기 '명교'나 '백련교', 청나라 말 '태평천국' 등은 각 시대에 맞게 각색된 '미륵불하생경'이었으며 이들이 대항이데올로기로 우뚝 서 '후천개벽' 비슷한 사상을 설파할 수 있었던 배경은 농민사회 '비밀결사'였다. 
'태평천국'의 홍수전도 거듭된 과거시험 낙방 후 우연히 성경책을 읽고 '접신'을 하고는 예수의 동생이 된 것이 흡사 열 몇살 아래인 조선의 최제우와 비슷하다. 당나라 말기 황소와 청나라 말 홍수전이 과거에 합격하는 '공정'한 사회였다면, 서자였던 최제우도 성리학 이론으로 무장하여 출사할 수 있었던 세상이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접신' 또는 '후천개벽'을 외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들과 달리 '녹두장군' 전봉준은 '평민지식인'이었다. 사형당하기 전 재판서에는 그의 직업이 '농업'으로 되어 있지만, 그는 농사를 지을 줄 몰랐고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떠돌이 훈장 선생님 쯤 되었단다. 동학혁명 내내 급진 과격파 김개남과 가장 큰 조직을 지녔던 손화중은 전봉준과 함께 강경파 '남접'의 접주들이었다. 최시형과 손씨들을 비롯한 충청도와 강원도의 '북접'은 '남접'과 한때 대립까지 불사하던 온건파였는데 조직을 지키기 위한 최시형의 고뇌 또한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 '민란의 시대'는 다수 민중 모두가 죽을 줄 알면서도 '봉준이 형님'을 따라 지옥길을 나섰고 결국 '시천주주문'과 함께 수만 명의 민중들이 지옥의 명부에 갇혔다.


4. [정감록] 탈취사건 - [민란의 시대](이이화)


'동학'이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그들이기에 전투 중 위기에 빠지면 농민군은 지도자 장수에게 "언제 도술을 쓸 것이냐" 묻기도 하고 대포나 기관총 앞에서 몽둥이나 농기구만 든 채 부적을 붙이고는 13자 주문을 외웠으며 잔다르크 같이 어린 아이를 선두에서 무등 태우고는 그 아이의 지휘에 따르기도 했단다. 웃프기도 한 이 전쟁의 도발은 역시 '비기(祕記) 탈취사건'이었는데, [정감록]이었을지 [목민심서]였을지 아니면 [동경대전]의 '무극이도'나 쿵푸팬더의 빈 '용의 문서'였는지는 모르나 고창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에서 무장 접주 손화중이 '비기'를 탈취하고도 '벽력(벼락)살'을 맞지 않았다는 설에서 시작한다. 물론 끝까지 그 '비기'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고 전봉준과 함께 서울로 호송되어 재판받던 손화중이 관리에게 본인을 '소인'이라 칭하는 것을 본 시종일관 당당했던 전봉준이 "내가 저런 소인배와 큰 일을 도모했으니 실패는 정해졌던 일(신정일, 같은책)"이라 한탄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기'를 탈취한 손화중 장군도 동학농민전쟁에서 탁월했던 지도자였다. 그래도 역시 동학혁명의 자존심은 전봉준 장군이었는데 그는 죽는 그날까지 관리들에게 반말을 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죽었다고 한다. 
아무튼, '비기'의 대명사 [정감록]은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고려 말기에 이씨 왕조 예정설이 떠돌았는데 조선 중후기에 접어들면서 정씨 왕조설로 변형되었다. 원래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려 죽자 그의 후손과 세력들이 이를 애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고도 하고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이 정도전을 모함하기 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는 설도 있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정씨 왕조설을 담은 비기는 조선 후기에 들어 다른 비기들을 압도하며 유행을 탔다.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인 숙종 시기였다.
... 
한편 조일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 직전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1,000여 명이 죽었다. 정여립이 지리산에 묻힌 옥판을 찾아냈는데 여기에 정씨 왕조설과 계룡산이 도읍지라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 
숙종과 영조 시기까지도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책명은 공식 기록에 나타나지 않다가 18세기 말엽인 정조 말년에야 나타난다.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는 [정감록]이 '요서(妖書)와 방서(方書)를 섞어 모은 책'이라 하고 이어 '영조 연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9세기 문벌정치(세도정치) 시기에 들어와 [정감록]은 크게 유행을 탔다."
- [민란의 시대], '1. 문벌정치의 등장과 관서농민전쟁',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5. '동학' : '개벽'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


최제우는 '동학'이 옳다고 판단했지만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단다. [동경대전]의 <포덕문>은 '포교'의 목적이 아니었다. 유생들이 손가락질할 때 그는 "나의 도는 당신들의 도와 다르지 않다"고 했는데 동학의 개념들 자체가 성리학의 그것이었다. 즉, '하늘의 도(천도)'는 같았으되, 이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방식이 달랐다. 조선 말기의 성리학은 계급지배의 도구였고 동학은 민중적 계급투쟁의 이념이었다. 
예를 들어, '귀신(鬼神)론'의 경우, 동양의 귀신은 서양 근대의 'Ghost'가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 즉 조상이다. 하늘로 퍼지는 '신(伸/神)'과 땅으로 돌아가는 '귀(歸/鬼)'의 뜻으로서 '귀신'은 '혼백(魂魄)'이다.'혼비백산(魂飛魄散)', 하늘로 날아 올라 퍼지는 것은 '혼(신)'이요, 땅으로 흩어져 스며드는 것은 '백(귀)'이다. 동양에서 '신'이, 특히 '유일신'이 없는 이유다. 우리에게는 "천지 자체가 귀신"이다. 동학의 '천주'가 모든 사람과 만물에 깃든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19세기 당시 서양 문물의 유입과 함께 콜레라와 같은 '팬데믹' 현상으로 수없이 죽어나가던 면역력 없던 동양인들의 위기의식도 '동학' 발생의 배경이라고도 하는데, 전세계가 교류하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전히 쓸려나가는 현재의 '개벽'과 '동학'이 만나는 지점이 어디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제, 모두가 '하느님'인 세상을 향한 '철학'의 새로운 '실천' 앞에 다시 '동학(東學)'이 우뚝 서 있다. 
'개벽(開闢)'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


***

1.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백승종, <들녘>, 2019.
2.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3.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4. [동경대전-2](1861), 최제우, 김용옥 주해, <통나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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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의 동학농민혁명답사기
신정일 지음 / 푸른영토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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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을 위한 '21자 주문(呪文)'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백승종, <들녘>, 2019.


1. '개벽'을 위한 '21자 주문(呪文)' - [동경대전](최제우)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수운(최제우)이 서른일곱 되던 해가 경신년 1860년이었다. 4월 5일, 장조카의 생일에 참석했다가 한기가 몹시 나서 집에 돌아온 수운은 상제의 음성을 듣고 상제로부터 세상의 병을 고치는 영부(靈符)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조화(造化)를 얻었다. 수운은 이 세상을 구하는 큰 깨달음을 얻는 황홀함 속에서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는 알고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 곧 나이니라. 너에게 무궁무진한 도를 내릴 것이니, 이를 닦고 다듬어서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라. 너로 하여금 이 세상을 빛내게 하리라'라는 '한울님'의 말씀을 들었다."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1824년 경주의 유학자인 근암 최옥의 서자로 태어난 수운 최제우는 1864년 42세의 나이에 대구감영에서 "백성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난민(亂民)'의 죄를 받고 사형을 당한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경주의 대유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읽었을 최제우는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되 서자로서 과거시험도 보지 못하였으나 '천명'을 따르고자 했던 '성리학자'였다. 출사할 길이 막혔던 이 똑똑했던 '지식인'은 처자를 이끌고 경주에서 울산으로 방황을 하던 중 아버지가 글공부를 하던 경주 구미산의 용담정으로 돌아와 '깨달음'을 얻는다. 유교와 불교 및 도교를 두루 섭렵하고 당시 서양에서 유입되던 천주교의 하느님과 예수님까지 알고 있었으며 중국 명날에 천주교를 전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까지 분명히 읽었을 그는 마침내 서른일곱살에 '한울님'을 영접하고 '인내천(人乃天)'의 근본이 되는 '시천주(侍天主)'를 개시하게 된다. 즉, '천명'을 따르는 '천주(한울님)'를 모시는데 그 '천주'는 바로 나의 마음이자 너의 마음, 우리 사람들 모두의 마음이라는 것,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이라는 믿음의 출발이었다. 수운 최제우는 하느님을 섬기지만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가 나뉘고 상호 소통하지 않는 천주교, 즉 '서학(西學)'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동학(東學)'을 창시한다. 글도 몰랐다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하느님/하나님/한울님(천주)'을 사람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로까지 확장하는 '생태주의'적 사상을 펼치며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포접제'의 동학 기본 조직을 만드는 '최보따리'로 불렸고 3대 교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만들었다. 

1863년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1861년 <포덕문>부터 시작하여 저술된 수운 최제우의 저작 일체를 모은 1880년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한다. '동쪽의 경전을 크게 모은다'는 제목의 [동경대전]은 순한문체로 쓰인 동학의 경전과 문집이다. 1861년의 <포덕문(布德文)>은 '덕을 펼친다', 1862년의 <동학론(東學論)/논학문(論學文)>은 '서학'과 비교되는 '동학'의 정체에 관한 논설과 '21자 주문' 해설, 같은해 <수덕문(修德文)>은 '덕을 닦는다'는 글이다. 성리학에서 기본적인 사상적, 개념적 길을 잡은 최제우에게 '덕(德)'은 '천명(天命)'이자 '도(道)'를 의미한다. 2021년에 [동경대전]을 새롭게 주해한 도올 김용옥은 1860년에 '도(道)'를 얻은 최제우가 다음해에 지은 <포덕문>은 외부를 향한 '정(正)', 그 이듬해 지은 <동학론/논학문>은 '서학'과의 대비를 통해 '동학'이 무엇인가 정의하는 '반(反)', <수덕문>은 결국 '나' 자신의 내부로 돌아와 "천인합일(天人合一)" 및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吾心卽汝心)"를 확인하는 '합(合)'이라는 헤겔식 변증법의 '정-반-합' 테제로 설명한다. 이 세 문건이 바로 [동경대전]의 핵심을 담은 세 개의 소경전이다. 도올에 의하면 '동학'의 핵심은 '천도'로서의 유학적 '도'를 넘어 '인덕'으로서 '덕'을 중시한 그 실천성에 있고 이것이 바로 기존 '유-불-도'나 기독교(천주교)와 차별되는 '동학'의 우수함이다. 그리하여 도올은 '천주'를 '한울님'으로 해석한 '천도교'의 좁은 틀을 벗어나 원래의 보편적 '천주', 즉 '하느님'으로 다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늘' 또는 '하나'가 우리말 어원인 '하느님'은 동학에서는 더 이상 '높은 곳의 유일자'가 아닌 나와 너, 우리 모두와 세상만물이지만 말이다.
최제우의 사상이 성리학에 기반하다 보니 [동경대전]에서 '천도(天道)'가 나타나는 참된 모습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조화'다. 성리학의 경전인 [중용]과 [주역]에서 말하는 '원형이정'의 '원'은 '크다', '형'은 '형통하다', '이'는 '이롭다', '정'은 '바르다'는 뜻인데, [동경대전]에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천도지상(天道之常)", 즉 "천도는 항상 '원형이정'으로 나타난다"고 적혀있다. 수운 최제우의 도통은 해월 최시형이 받았으나, '성리학자' 최제우는 여러 제자들 중 뛰어난 자들에게 '원형이정'의 조화를 내렸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선비 '강시원', 2대 도통 '최시형' 외에 '심시정'이라는 이름도 [동경대전] 편찬자의 명단에 있다. 어딘가에 아무개 '시리'라는 이름의 제자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유-불-도'의 동양 3교는 물론 서양의 천주교까지 섭렵한 최제우는 유교의 '인의예지신'과 도교적 '목화토금수' 같이 수운 자신을 중심으로 '원형이정'의 조화를 불교적 '4대천왕(지국-광목-부처-증장-다문)'으로 배치한 것 아닐까.

'동학'의 기본사상은 '삼경(三敬)', 즉 '하늘을 섬기고(경천)', '사람을 섬기며(경인)', '만물을 섬기는(경물)' 근대적 '생태주의' 철학이었다. 이 '삼경'은 누구라도 군자가 될 수 있는 실천덕목이었는데, 최제우의 '동학' 사상 자체가 그 기본 뿌리는 재차 강조하지만 유교 또는 '성리학'이었다. 14세기에 도입된 성리학은 당시에는 사회를 개조하는 진보적 실천철학이었지만,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특히 왜란과 호란의 전란을 겪은 후 사대부 지배체제가 위기를 맞고 쓸데없는 '예학'의 강조로 피지배계급에 대한 착취는 끝간 데 없었다. 썩어버린 성리학이나마 그 실천철학의 덕목은 이렇게 피지배계급 사이에서 '동학'의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최제우의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 등의 기본 개념들은 '성리학'적 개념들이다. 수운이 말한 '개벽'은 '정의로운 경제공동체'로 새로 태어나는 새로운 세상인데, '미륵불하생'의 세계관과 맞닿는다. 신세계 개벽에 대한 믿음으로 수만 명의 농민반란군은 관군과 일본군대의 신식무기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문을 외워댔고 당당하게 쓰러져 갔다. 
주자 성리학의 기초가 된 주돈이의 [태극도설]이나 소옹의 [선천역학]에서 '태극'은 동학에서는 결국 하나로 통하는 '무극'이고, '선천'과 '후천'의 구분은 결국 '개벽(開闢)'이다. 도올에 의하면 최제우는 '선천'이나 '후천'이라는 말은 한 적 없고 '개벽'만을 주장했다. 따라서 '선천'이냐 '후천'이냐는 애초 '5만년' 전 '천지개벽' 후 19세기 '다시 개벽'의 '이전(선천)'이냐 '이후(후천)'이냐 하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동학의 깨달음으로 이제 '다시 개벽'하는 실천만이 중요한 것이다.
조선 말 동학농민군이 외세와 썩은 왕조의 총포 앞에서 외우며 죽어간 이 주문이 바로 '13자 시천주주문(侍天主呪文)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인데, 원래 최제우가 [동경대전]의 <동학론/논학문>에서 선언하고 해설한 주문은 스물한자 주문인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다. 그 뜻은 "지극한 기운이 지금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비나이다. 한울님(천주)을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아니하면 온갖 일을 알게 되나이다"이며, 사람과 만물 안에 깃든 '천주(天主)'를 모셔 대자연의 만물 창조의 큰 이치인 '조화(造化)'를 정하고 이를 잊지 않고 행하면 모든 일에 통달한다는 의미겠다. 여말선초 '성리학'의 실천철학적 '진보성'을 잇는 조선 후기 새로운 실천철학 '동학'의 '진보성'은 이러한 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한 '자주적 근대화'였다.


2. '운동'으로서의 '동학'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백승종)


"'개벽'의 본질... 허황한 부귀공명을 약속하는 이상세계가 아니라, 개인의 실천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신인간(新人間;眞人)'이 땀흘려 만드는 세상이 곧 '개벽'한 세상이요, 동학이 추구하는 미륵세상이었다는 말입니다."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2강. 사람이 하늘이다. 최제우와 최시형의 가르침', 백승종, <들녘>, 2019.


역사학자 백승종 선생은 '사상의 계보학'적 추적을 통해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의 동학 사상에서 우리 역사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투영해 본다. 조선 후기 '민란의 시대' 배경을 훑어보고 수운과 해월의 사상을 정리하며 '동학운동'이 실천적으로 가능했던 농민조직을 설명한 후 이 운동의 현재적 의미를 정의하는 강의록의 제목은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2019)이다. 저자는 '동학'을 '혁명' 보다는 '운동'으로 규정하는데, 국가를 개조하고 외세를 몰아내는 '혁명'의 실패의 관점이 아닌,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운동'의 관점이다. 
그는 '동학운동'을 몇 가지 주요 키워드로 연결하고 있다. 첫째는 조선 후기의 '불평등 심화와 양극화', 둘째는 몰락 양반이나 유학자와 같은 계층이 유일한 자산인 '지식'을 팔아 키운 '평민지식인', 셋째는 오랜 동안 '두레'와 '품앗이', 동종'이나 '하계' 등을 토대로 한 농민사회 '비밀결사', 넷째는 이와 같은 자생적인 농민조직과 이들의 평등한 '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해 건설되는 '정의로운 경제공동체', 다섯째는 만물이 하늘인 '생태주의', 여섯째는 예나 지금이나 독점이 갈수록 강화되는 세상에서 사물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한 '후천개벽'으로서의 '자주적 근대화', 일곱째는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미륵신앙', 여덟째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실천'으로서의 동학, 아홉번째는 '화해'와 '협동'과 '연대'의 가치, 열번째는 불평등과 억압 및 착취를 심화하는 자본주의 청산 등이다. '동학'이 '근대화'인 이유는 '자유'와 '평등' 같은 근대 시민사회적 개념을 우리식으로 공유하려 했던 실천적 노력에서 그렇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 민중 사회의 주체적 실천이 결합하여 '자주적 근대화'가 된다. 백승종 선생에 의하면 이 '자주적 근대화'가 바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이요, 이상세계로서 불교의 '미륵하생신앙', 도교의 '조화선경', 유교의 '대동사회'였다. "평화와 정의, 풍요롭고 건강한 삶이 개벽된 새 세상의 특징(백승종, 같은책, '4강')"인 것이다. 


"동학농민들이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건설하기 원했다는 점... '유무상자(有無相資)... '정의로운 경제공동체'... '공공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 보편타당한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바로 동아시아의 '정의'... 하늘의 뜻에 부합되는 것... '경제적 정의'를 구현하여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건설하는 꿈,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진정한 목표였어요...
동학적 의미의 인간개조 또는 사회개조... '후천개벽'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정의로운 새로운 관계가 낡은 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상황, 동학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후천개벽'으로 보았습니다."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3강. 갑오동학농민운동, 그 중심에 소농이 있다', 백승종.


3. '혁명'으로서의 '동학'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신정일)


최제우가 '접신'하여 '득도'한 1860년 조선 말기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1862년은 삼남 지역의 '임술민란'의 해였고, 북쪽의 유흥렴과 남쪽의 이필제 같은 '직업혁명가'들은 수많은 가명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란들을 조직하고 선동했을 수도 있는데, 이 '직업혁명가'들이 바로 '평민지식인'들이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해 5월 '전주화약' 후 농민군이 흩어졌을 때, 태인 대접주 김개남은 서울진격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소심한 책상물림들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며 남원으로 내려갔다. 전봉준과 손화중, 손병희로 이어지는 동학농민혁명의 불꽃이 사그라지면서 '혁명'적 '동학정신'을 이어나간 것이 김개남의 집단(포)였다고 하는데, 이들이 숨어든 지리산은 이후 1~3차 지리산 의병전쟁의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 유격대의 조직적 계보를 거슬러 오르면 김개남과 동학농민군이 보인다. 민중 도보답사가 신정일 선생은 동학농민전쟁의 현장을 발로 다니며 기록한 [동학농민혁명 답사기](2019)에서 당시 "지리산을 넘어 하동, 진주까지 진출했던 김개남의 잔존세력들은... 진주 형평사운동과 고려공산당을 만든 김단야로, 민족민중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다(같은책, <남원 교룡산 : 처음부터 끝까지 혁명가였던 김개남>)"고 쓴다. 
이렇게 동학의 '실천'은 우리 역사에서 '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


"손화중이 왕이 될 것이라거나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잇고 손화중의 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접의 중심포였고 가장 많은 세력을 규합했던 손화중은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황룡강 싸움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러나 2차 봉기에 그는 공주로 가지 않고 광주 일대를 지켰다.
우금치 싸움이 패배로 돌아가고 태인에서 농민군의 주력부대가 해산하자 그는 재실지기였던 이봉우에게 '그 동안 내가 너에게 진 빚을 갚겠다. 나를 고발하여 큰 상을 받으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손화중은 서울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이듬해 전봉준과 한날한시에 처형당했다... 
어쨌거나 '비결탈취사건'은 암울했던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후천개벽'을 꿈꾸었던 민중들의 동학과 시대의 현실과 미륵설화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농민전쟁의 발단이 된 것이다."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조선 후기 또한 중국이나 후삼국 한반도 못지 않게 농민들의 '비밀결사' 조직이 성행했을 것이다. 원나라 말기 '명교'나 '백련교', 청나라 말 '태평천국' 등은 각 시대에 맞게 각색된 '미륵불하생경'이었으며 이들이 대항이데올로기로 우뚝 서 '후천개벽' 비슷한 사상을 설파할 수 있었던 배경은 농민사회 '비밀결사'였다. 
'태평천국'의 홍수전도 거듭된 과거시험 낙방 후 우연히 성경책을 읽고 '접신'을 하고는 예수의 동생이 된 것이 흡사 열 몇살 아래인 조선의 최제우와 비슷하다. 당나라 말기 황소와 청나라 말 홍수전이 과거에 합격하는 '공정'한 사회였다면, 서자였던 최제우도 성리학 이론으로 무장하여 출사할 수 있었던 세상이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접신' 또는 '후천개벽'을 외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들과 달리 '녹두장군' 전봉준은 '평민지식인'이었다. 사형당하기 전 재판서에는 그의 직업이 '농업'으로 되어 있지만, 그는 농사를 지을 줄 몰랐고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떠돌이 훈장 선생님 쯤 되었단다. 동학혁명 내내 급진 과격파 김개남과 가장 큰 조직을 지녔던 손화중은 전봉준과 함께 강경파 '남접'의 접주들이었다. 최시형과 손씨들을 비롯한 충청도와 강원도의 '북접'은 '남접'과 한때 대립까지 불사하던 온건파였는데 조직을 지키기 위한 최시형의 고뇌 또한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 '민란의 시대'는 다수 민중 모두가 죽을 줄 알면서도 '봉준이 형님'을 따라 지옥길을 나섰고 결국 '시천주주문'과 함께 수만 명의 민중들이 지옥의 명부에 갇혔다.


4. [정감록] 탈취사건 - [민란의 시대](이이화)


'동학'이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그들이기에 전투 중 위기에 빠지면 농민군은 지도자 장수에게 "언제 도술을 쓸 것이냐" 묻기도 하고 대포나 기관총 앞에서 몽둥이나 농기구만 든 채 부적을 붙이고는 13자 주문을 외웠으며 잔다르크 같이 어린 아이를 선두에서 무등 태우고는 그 아이의 지휘에 따르기도 했단다. 웃프기도 한 이 전쟁의 도발은 역시 '비기(祕記) 탈취사건'이었는데, [정감록]이었을지 [목민심서]였을지 아니면 [동경대전]의 '무극이도'나 쿵푸팬더의 빈 '용의 문서'였는지는 모르나 고창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에서 무장 접주 손화중이 '비기'를 탈취하고도 '벽력(벼락)살'을 맞지 않았다는 설에서 시작한다. 물론 끝까지 그 '비기'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고 전봉준과 함께 서울로 호송되어 재판받던 손화중이 관리에게 본인을 '소인'이라 칭하는 것을 본 시종일관 당당했던 전봉준이 "내가 저런 소인배와 큰 일을 도모했으니 실패는 정해졌던 일(신정일, 같은책)"이라 한탄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기'를 탈취한 손화중 장군도 동학농민전쟁에서 탁월했던 지도자였다. 그래도 역시 동학혁명의 자존심은 전봉준 장군이었는데 그는 죽는 그날까지 관리들에게 반말을 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죽었다고 한다. 
아무튼, '비기'의 대명사 [정감록]은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고려 말기에 이씨 왕조 예정설이 떠돌았는데 조선 중후기에 접어들면서 정씨 왕조설로 변형되었다. 원래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려 죽자 그의 후손과 세력들이 이를 애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고도 하고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이 정도전을 모함하기 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는 설도 있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정씨 왕조설을 담은 비기는 조선 후기에 들어 다른 비기들을 압도하며 유행을 탔다.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인 숙종 시기였다.
... 
한편 조일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 직전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1,000여 명이 죽었다. 정여립이 지리산에 묻힌 옥판을 찾아냈는데 여기에 정씨 왕조설과 계룡산이 도읍지라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 
숙종과 영조 시기까지도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책명은 공식 기록에 나타나지 않다가 18세기 말엽인 정조 말년에야 나타난다.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는 [정감록]이 '요서(妖書)와 방서(方書)를 섞어 모은 책'이라 하고 이어 '영조 연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9세기 문벌정치(세도정치) 시기에 들어와 [정감록]은 크게 유행을 탔다."
- [민란의 시대], '1. 문벌정치의 등장과 관서농민전쟁',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5. '동학' : '개벽'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


최제우는 '동학'이 옳다고 판단했지만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단다. [동경대전]의 <포덕문>은 '포교'의 목적이 아니었다. 유생들이 손가락질할 때 그는 "나의 도는 당신들의 도와 다르지 않다"고 했는데 동학의 개념들 자체가 성리학의 그것이었다. 즉, '하늘의 도(천도)'는 같았으되, 이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방식이 달랐다. 조선 말기의 성리학은 계급지배의 도구였고 동학은 민중적 계급투쟁의 이념이었다. 
예를 들어, '귀신(鬼神)론'의 경우, 동양의 귀신은 서양 근대의 'Ghost'가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 즉 조상이다. 하늘로 퍼지는 '신(伸/神)'과 땅으로 돌아가는 '귀(歸/鬼)'의 뜻으로서 '귀신'은 '혼백(魂魄)'이다.'혼비백산(魂飛魄散)', 하늘로 날아올라 퍼지는 것은 '혼(신)'이요, 땅으로 흩어져 스며드는 것은 '백(귀)'이다. 동양에서 '신'이, 특히 '유일신'이 없는 이유다. 우리에게는 "천지 자체가 귀신"이다. 동학의 '천주'가 모든 사람과 만물에 깃든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19세기 당시 서양 문물의 유입과 함께 콜레라와 같은 '팬데믹' 현상으로 수없이 죽어나가던 면역력 없던 동양인들의 위기의식도 '동학' 발생의 배경이라고도 하는데, 전세계가 교류하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전히 쓸려나가는 현재의 '개벽'과 '동학'이 만나는 지점이 어디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제, 모두가 '하느님'인 세상을 향한 '철학'의 새로운 '실천' 앞에 다시 '동학(東學)'이 우뚝 서 있다. 
'개벽(開闢)'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


***

1.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백승종, <들녘>, 2019.
2.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3.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4. [동경대전-2](1861), 최제우, 김용옥 주해, <통나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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