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최전선
박찬희 지음 / 빨간소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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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의 확장
- [박물관의 최전선], 박찬희, <빨간소금>, 2021.


"박물관 전시실, 그곳은 '박물관의 최전선'이다... 전시실은 어떻게 구성될까? 전시실의 주제 구성은 논문의 구성과 비슷하다. 꼭 논문이 아니더라도 책의 차례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편하다. 전체 주제, 그 아래 몇 개의 중간 주제, 그 아래 몇 개의 소주제가 피라미드처럼 이어진다. 논문 주제를 한 가지로 정하듯 한 전시실도 대부분 하나의 주제로 구성된다. 이 주제는 보통 그 전시실의 이름이 되고, 전시실의 입구에 표시된다. 전시실 이름을 알면 그곳이 어떤 곳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전시실인지 알고 들어가는 것과 그냥 들어가는 것은 차이가 크다. 이름표를 외롭게 두지 말자."
- [박물관의 최전선], '2-9. 전시실과 친해지는 법', 박찬희, <빨간소금>, 2021.


아주 어렸을 적 나의 꿈은 '고고학자'였다. 
어린 나의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준 공룡을 발굴하고 싶었고 조금 더 큰 후에는 그리스 미케네 문명을 발굴한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이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메소포타미아의 살인] 등에 나오는 고고학자들에 매료되기도 했다. 더 이상 '고고학자'가 꿈이 될 수 없었던 성인이 되어서는 미술 작품의 역사를 밝히고 그 의미를 도출하는 '미술사'나 '예술사'에 관한 책을 찾아 읽기도 했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나 줄리오 레오니의 [단테의 모자이크 살인] 같은 책은 베스트셀러를 떠나 꼭 읽어야만 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새로운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기사를 보면 가슴이 뛴다.

어렸을 적 꿈이었다 보니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나중에서야 박물관 큐레이터나 학예사 연구원 등의 직업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내 꿈은 '고고학자'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온갖 유물에 관심이 있고 그 유물들이 한데 모인 박물관을 사랑한다. 게으른 성정에 자주 가지는 못해도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자주 구경했고 각 지역에 가면 무조건 그 지역의 박물관을 들른다. 
눈으로 '책'을 읽는다면, 발로 '박물관'을 읽어야 그 지역을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술사를 전공하고 호림박물관 큐레이터로 근무한 박찬희 선생은 [박물관의 최전선](2021)을 통해 박물관의 유물과 일반 관람객의 일상적 접속과 소통을 시도한다. 
박물관 전시기획자의 시각을 너머 관람객의 관점에서 박물관의 오랜 유물과 현재의 관람객을 잇는 역할을 하는 저자에게 '박물관의 최전선'은 유물과 사람이 만나는 접점, 바로 '전시실'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마따나 미리 공부하고 유적지나 사찰을 답사하거나, 박물관을 한 권의 책을 보듯 목차에 따라 읽어 나가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때가 있다. 함께 간 처자식이나 일행은 빨리 보고 지나가자고 재촉하기 일쑤인데, 한 번은 후딱 보고 지나가야 할 후쿠오카의 박물관에서 인솔자인 내가 박물관 관람에 빠져 문닫기 전에 겨우 빠져나온 적도 있었다. 일행들이 인솔자인 나를 찾아다니고 난리였다. 
우리 국보와 보물의 대부분을 간직한 사찰도 내게는 박물관이다. 해당 사찰의 역사와 배경을 각종 답사기 책으로 먼저 읽고, 직접 찾아가서 나름의 '목차'에 따라 주제별로 '읽어 간다'. 각 유물의 설명판은 보통 초등학교 수준이면 이해할 정도로 쉽게 쓴다고 하니 웬만하면 모든 설명판을 다 읽는다. 일본의 박물관에서 오래 걸린 이유 중 하나도 일어를 모르니 영어 설명판을 다 읽으려다 그랬으리라. 
마치 책으로 공부라도 하듯이 눈으로 읽고 머리로 유추하고 발로 다니려는 나와 함께 사찰이나 박물관을 간 일행은 빨리 가자고 독촉할 수 밖에 없을 게다.
그렇게 '박물관'은 내게 살아 있는 '책'이며, '박물관의 최전선'으로서의 전시실은 오래된 책냄새와 함께 육감으로 한장 한장 넘겨지는 책장이다.



"이전에는 유물 자체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유물이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때로는 진열장과 박물관을 벗어날 때 속 깊은 이야기가 들렸다. 유물을 사람들과 연결시켜 살펴보자 유물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거듭되는 발걸음으로 박물관을 명사에서 동사로 만들기를 바란다."
- [박물관의 최전선], '책을 펴내며 - 박물관의 최전선에서', 박찬희, <빨간소금>, 2021.


저자 박찬희 선생은 박물관의 전시는 유물이나 전시기획으로부터 일반 관람객과 접속으로 '확장'되어야 비로소 완성된다고 말한다. 오래된 유물의 보호를 위한 '조명발'과 안락한 의자 등의 배경은 그 유물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편안함을 주는데 이 모든 것이 옛날의  유물과 지금의 사람이 만나는 방식이다. 누군가는 '공부'를 하고 누군가는 편하게 심신을 쉬면서 다스리는 공간으로서의 박물관. '아는 만큼' 보인다지만, '모른다' 하여 어떤가. 책이나 논문을 보듯 박물관을 섭렵할 수도 있지만, 오래전 조상들의 삶이 담긴 유물과 같은 공간에서 편히 쉬어가는 것도 역사와 함께 숨쉬는 방법이다. 
전시기획자를 너머 관람객까지로 '박물관의 확장'을 바라는 저자는 [박물관의 최전선]을 통해 신라금관, 김홍도의 풍속도와 정선의 풍경화, 불화와 불상, 반가사유상 및 청자와 백자 등의 각종 유물에 담긴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관람객의 힘으로 함께 오래오래 살려내자고 말하는 듯 하다.


자녀들 어렸을 적에는 유물의 이름이나 설명판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바람에 박물관에 가자고 하면 우리 아이들은 손사래부터 쳐댔다. 아빠의 탓이다. 함께 쉽게 가 볼 수 없는 '대영박물관'에서 펴낸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를 자녀들에게 사주었지만 아빠인 나 혼자 읽던 시절에는 몰랐다. 박물관이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공부'를 눈과 머리로 접속하는 '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듯, 그냥 스쳐지나며 편히 쉬어가는 '박물관'도 중요한 경험의 공간이자 삶의 '공부'일 게다. 

사람마다 다양한 것처럼 박물관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각자 다르다는 것을 박찬희 선생의 [박물관의 최전선]을 통해 다시금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할 때 전부는 알 수 없더라도 대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듯 그렇게 '책'을 읽는 내게는 여전히 '박물관' 또한 오래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책'과 같은 장소다. 물론 게으른 나는 발품을 파느니 눈품을 파는 '책'을 더 선호하지만.

박물관의 '확장'을 위해 조만간 처자식과 함께 박물관을 다시 가봐야겠다. 
나부터 이젠 '책'이 아닌 '쉼'의 공간으로서 '확장'된 박물관과 새롭게 접속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1. [박물관의 최전선], 박찬희, <빨간소금>, 2021.
2.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 닐 맥그리거(대영박물관장), 김미경 옮김, <다산초당>, 2014.

#박물관의최전선 #박찬희 #빨간소금 #박물관 #책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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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읽는 세상의 모든 것 - 잠들어 있는 당신의 수 감각을 깨워라
앤드류 엘리엇 지음, 허성심 옮김 / 미래의창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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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큰 수인가(Is that a big number)?"
- [숫자로 읽는 세상의 모든 것], 앤드류 엘리엇, 허성심 옮김, <미래의창>, 2021.


"이 책을 쓰는 사이에 관찰 가능한 우주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은하의 수가 1,000억 개에서 2조 개로 20배나 증가했다. 이는 단순히 의견이 바뀐 것이 아니라 전례 없이 정교해진 허블 우주망원경으로 20년 동안 관측한 데이터를 연구해서 얻은 결과다. 현재 허블 우주망원경의 뒤를 이은 제임스 웨브 우주망원경이 건설 중에 있고 2021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새로운 망원경을 통한 관측으로 허블 우주망원경이 제시한 '큰 수'를 갱신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숫자로 읽는 세상의 모든 것], <3. 과학의 수 - 하늘 위까지>, 앤드류 엘리엇, 2018.


1980년대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를 경이롭게 저술했을 때 우주에는 약 1조 3천억 ~ 1조 5천억 개 정도의 별들이 있었다고 했던가. 그로부터 10년도 지나지 않아 인류는 허블 망원경을 지구 밖 우주로 쏘아 지금은 별이 아닌 은하가 2조 개 정도 된다고 본다. 2021년 10월에 차세대 우주망원경인 제임스 웹 망원경이 발사되고 상용화되면 '창백한 푸른 점'에 사는 인간의 시야가 더 넓어지고 '우주'적 범위에서 가늠될 숫자는 무한대로 가까이 더욱 더 커질 것이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1980년대의 '1조 몇천억 개'는 이미 '무한대'의 다른 표현이었을 것이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일정하다고 볼 때 1년에 약 3,150만 초를 사는 인간은 1초에 하나 씩 수를 세며 수천 년을 살아도 칼 세이건이 세었던 1조가 넘는 별들을 셀 수 없다. 그렇기에 인류는 대를 이어 유산을 물려주게 되는데 이것이 '역사'다.

태양계는 태양의 중력이 미치는 범위를 보는데 지구를 포함한 8개 행성계는 전체 태양계의 1/3 정도에 불과하다. 태양과 같은 강력한 인력으로 여러 행성들을 거느리는 또 다른 항성이 또 하나의 '항성계'를 구성하고 이들이 모인 것이 '은하'인데, 이 2조 개의 '은하'들이 모인 '은하계'가 현재 우리 인류가 정의한 '우주'의 질서, 즉 '코스모스(Cosmos)'다. 
산술적으로는 인간이 아무리 역사를 거쳐도 일일이 셀 수 없는 '큰 수(big number)'다. 태양과 지구의 거리는 1억5천만 km고 이 단위를 '1'로 정한 단위가 'AU(Astronomical Unit)'라고 하는데, 너무 단위가 커서 '천문학적(astronomical)'으로 환산한 것이다. 태양에서 명왕성까지 거리가 약 '40AU'라니 약 '60억km'다. 이것의 3배인 '180억km'가 대략의 태양계의 반지름인데 1시간에 약 11억km(10.8억km/h)를 간다는 '광속'으로 따지면 태양계의 반지름은 '2만 광년', 즉 빛이 2만년을 가야 닿는 거리란다. 전체 태양계의 지름이 '4만 광년'이라는 말이다. 1광년이 예의 'AU'로 환산하면 6.3만AU라고 하니 어마무시하다. 
우리 은하의 폭이 12만 광년이고 우리 은하 옆에 전체 폭 22만 광년의 '안드로메다' 은하와의 거리도 256만 광년의 거리에다가 군소 은하를 포함한 국부 '은하계'로서 '가시적' 주변 은하군의 폭은 '1천만 광년(6천억AU=9천5백경km=9.5X10의19승km)' 정도가 된다. 참고로 이런 '은하군'이 모인 '가시적' 전체 우주의 폭은 8,800해km(8.8X10의23승km)란다.


영국의 보험수리학자 앤드류 엘리엇(Andrew Elliott)은 2018년 세상 만물의 수치를 들어 세계를 이해하는 [Is That a Big Number?]라는 책을 통해 '숫자를 통한 세계관'을 이야기한다. 수학 이야기가 아니다. 숫자를 이해하면 세상 만물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자연과학의 시조인 수학처럼 논리가 정연하고 수치가 정확히 떨어져야 하는 게 아니다. 어떤 기준에 따라 어림셈하고 비교하여 해당 사물의 본모습을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큰 수인가(Is that a big number)?"라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다. 길이가 9,290km이며, 철로가 직선으로 뻗어 있다면 지구 둘레(4만km)의 4분의 1보다 조금 짧다... 오리엔트 특급은 원래 파리에서 시작해  당시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끝나는 대략 2,800km를 이동하는 여행이었다... 중국 시안에서 이탈리아 베니스까지 이어진 실크로드의 직선거리가 7,800km 정도이므로 실제 육로는 1만km가 넘고 왕복하는데 2년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 [숫자로 읽는 세상의 모든 것], <2. 측정하기 - 대략 그 정도의 크기>, 앤드류 엘리엇, 2018.


유라시아 전역을 지배했던 칭기스 칸의 장수 수보타이(수베데이)는 증원부대나 네비게이터 없이 8천km를 주파했고 그 이전 알렉산더 대왕은 약 5천km(4,800km)를 달렸단다. 지구의 적도 지름이 4만km니 수보타이는 지구의 1/5을 다녔고 알렉산더는 1/8을 지났다. 지구 전체 표면적인 5억 평방km의 1/3인 1억5천 평방km가 육지이니 그들의 지배 영역은 직선거리를 너머 더욱 넓었을지도 모른다. 인류가 항해술을 발전시켜 대륙간 교역을 활발하게 하게 된 것이 15~16세기니 그 이전의 육로만 생각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고 하늘과 바닷길로 더 멀리 다니는 지금과는 비교할 바 없이 고된 역정이었을 게다.


앤드류 엘리엇은 세상을 이루는 이런 '큰 수(big number)'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 '이정표 수' : 적절히 골라 맥락을 설정하는데 필요한 잣대를 삼는다.
둘째, '시각화' : 주어진 수가 합당한지 볼 수 있는 시각을 형성한다.
셋째, '분할 점령' : 복잡한 상황을 분할하고 표준화하여 전체로 종합한다.
넷째, '비율과 비' : '인간적 척도(인치/피트/척/자)'로 큰 수를 재거나 비율화한다.
다섯째, '로그(log) 척도' : 10진법의 지수와 배수를 이용하여 크기 차이가 매우 큰 기하급수적 수치 변화를 표현하고 이해한다.
적도길이인 지구의 지름이 4만km인데 호주대륙의 동서횡단길이가 4천km이므로 호주는 지구의 1/10이다. 양키 스타디움 관중 5만석은 면적당 5백명씩 100구역으로 계산한다. 이런 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위에서 본 우주의 크기와 은하의 갯수 등을 헤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일이 갯수를 헤아리던 조상들이 수리적 '세계관'을 키워 후대에게 물려준 유산이자 위대한 역사다.

마지막 기법으로 '로그 척도'에 이르면 "결국 수학 이야기 아니냐?" 하겠지만 고등학교 수학 과목에서 배운 지금은 그게 뭔지도 모르겠는 '로그 함수'가 아니다. 로마인들이 10진법에서 1천 단위로 묶어 '큰 수'에 접근한 것처럼(지금 1천 단위 별로 '컴머(,)'가 찍힌 기원), 억-조-경-해, 그 이상을 넘어가는 숫자들에 접근하기 위한 10의 배수를 표현하는 것이 '로그 척도'다. 이미 과학 전문 분야에서는 '유효 숫자' X '10의 배수'로 표현하는 그 '렌즈'로 우주적 '큰 수'를 이해하자는 것이다. 관측 가능한 우주의 지름인 '8,800해km'는 '10의 24승km'의 범위 내의 크기로 표현한다. 이 '로그 렌즈'를 통해야만 현재 76억 인구수의 추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 전 숫자가 처음 발명된 기원전 3천년 경 세계 인구수는 약 4,500만 명이었다가 3천년이 지나 서력 기원이 시작했을 즈음에는 약 1억9천만 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2017년 76억 명을 넘는 추이를 시각화된 그래프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로축의 숫자가 일정해서는 안되고 10의 배수인 '천'이나 '백만' 또는 '십억' 단위로 표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척도가 바로 '로그 척도'다.
빅뱅 이후 140억년의 우주 역사와 이 중 46억년의 지구 나이, 그 중에서 600만년의 인류 역사를 가늠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척도다. 우주의 나이가 한 살(1년)이라면 지구의 나이는 한 계절 정도이고 인류의 전 역사는 1초에도 못 미친다. 


"요컨대, '안다'는 것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대상을 확인하는 활동이다. 곧 '안다'는 것은 '직관' 바로 그것이다."
- [직관 수학], <머리말 - 본래 수학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 하타무라 요타로, 2004.


우리 어머니의 꿈은 아들을 공대로 진학시켜 평생 먹고살 걱정 없는 '기술'을 갖게 하는 거였는데 아쉽게도 어린 시절 나는 '수학이 인생에 왜 필요하지?'라는 고민이 컸다. 수학을 못했다는 말이다. 성인이 되어서야 수학은 과학의 어머니이고 철학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걸 깨닫고 뒤늦게나마 또 다시 아쉬워했으나 그렇다고 수학이 쉬워졌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집 중학생 아들도 "수학이 왜 필요하냐?"는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내 아들이다 싶다.


2차대전 때 전투기 엔진에 총탄을 맞은 비율이 가장 낮아 엔진이 튼튼한 부위라는 의견에 반대해 오히려 엔진이 약하니 더욱 보강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의 수학자 아브라함 발드 이야기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전투기 엔진이 튼튼하다고 본 이유는 그들이 엔진을 피격당해 폭파되어 돌아오지 못한 전투기들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간파한 수학자의 일화부터 시작하여  '틀리지 않는 수학의 힘'을 역설한 미국의 수학 천재 조던 엘렌버그의 [틀리지 않는 법](2014)은 재미도 없고 대부분 이해하기 어려웠다. 수학을 싫어했던 내게 가장 인상적인 '수학책'은 일본의 공학교수 하타무라 요타로의 [직관 수학](2004)이었다. 수학을 정확하게 공부해야 하는 입시생이나 전문 수학자 또는 공학자들은 엄격한 논리와 계산이 즉 수학이겠지만, 나 같은 일반인에게 수학이란 '피타고라스 정리'와 같은 논리적 추론을 바탕으로 한 논리학의 한 분야일 수도 있고 이 대강의 논리를 대략이나마 이해하는 '직관'의 영역일 수도 있다. 하타무라 요타로는 [직관 수학]에서 삼각함수와 미적분 등의 개념을 소개하고는 있지만, 결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직관적으로 뭉뚱그려 먼저 계산하되 중요한 몇 가지 기준은 암기하여 바로 적용한다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아무런 도구가 없어도 머리로 각 조건들을 스스로 계산해 보라는 것이다. 구구단을 비롯한 각 배수와 로그지수 등 몇 가지를 암기한 후 큰 수에서 뭉뚱그려 계산한 후 다음에 세부적으로 검산하는 것과, 우리 주변의 경험들을 총동원하여 머릿속으로 산출해 보려는 습관이 중요하다는 말인데, 습관이 안 된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나 '수학'에 관한 '직관'을 깨닫게 된 인상적인 책이었다.


앤드류 엘리엇의 [숫자로 읽는 세상의 모든 것(Is That a Big Number?)]은 '수학'에 관한 책은 아니다. 우리 주변의 '큰 수'에 당황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정확한 수학적 논증과 정밀한 계산이 필요없는 나 같은 '문과적' 인간이 '숫자'로 이루어진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 책은 '숫자'의 망망대해에서 헤엄칠 수 있는, 적어도 가라앉지 않고 뜰 수 있는 '직관'을 선사하고 있다.


***

1. [숫자로 읽는 세상의 모든 것(Is That a Big Number?)](2018), 앤드류 엘리엇, 허성심 옮김, <미래의창>, 2021.
2. [직관 수학](2004), 하타무라 요타로, 조윤동 옮김, <서울문화사>, 2005.
3. [틀리지 않는 법 - 수학적 사고의 힘](2014), 조던 엘렌버그, 김명남 옮김, <열린책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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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서, 조선을 말하다 - 혼란과 저항의 조선사
최형국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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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서(兵書)'로 읽는 조선의 역사
- [병서, 조선을 말하다], 최형국, <인물과사상사>, 2018.


"정조는 [무예도보통지]에 군사 업무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적 입장까지 담아놓았다. [무예도보통지]는 사도세자의 [무예신보] 편찬 의도와 맥을 같이하며, 이 병서로 기존의 당파와 무관한 새로운 무반을 육성하고 장용영을 중심으로 무예 체계를 표준화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후에 이루어진 단병 무예서 편찬은 [무예제보], [무예제보번역속집], [무예신보], [무예도보통지]로 이어지며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병서, 조선을 말하다], <3-4. 동양 삼국 무예의 집대성 [무예도보통지]>, 최형국, 2018.


성리학 '이념국가' 조선은 군주부터 신하는 물론 가능하다면 일반 민중들까지도 '유학'으로 신념화되기를 바랬다. 권문세족과 불교로 인해 부패한 고려 왕조를 뒤집어 엎은 급진 성리학자들은 "토지는 농민에게, 권력은 성리학자에게!"라는 민본주의적 '계민수전(計民收田)'의 슬로건으로 새로운 국가 조선을 건설하고 절대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성리학자들의 관료지배체제를 공고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상계는 조선을 '문인' 관료의 사회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개국의 '혁명가' 삼봉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새 국가 체계의 틀을 잡고 군사적으로 사병을 혁파하여 국가 상비군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정도전은 사찬 형식의 병서 [진법(陣法)]을 저술한다. 혁명 초기 '혁명국가' 조선의 권력을 호위하기 위한 '문무겸전'의 시작이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정도전' 레온 트로츠키가 소비에트 연방의 외무부 인민위원이자 붉은 군대 사령관으로 내전을 지휘한 것과 같다. 물론 정도전의 '문무겸전' 프로그램은 그를 죽이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태종 이방원이 그대로 물려받는다. 정도전에 의해 '사병', 왕자의 개인군대를 해체당하기 직전 이방원은 그의 사병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지만 왕권 강화를 위해 형제 및 처가와 사돈 등의 사병을 해체하고 중앙군 체제를 확립했다. 태조 이성계의 북방 사병들은 새 국가 조선에서 '신권 강화'를 바탕으로 한 삼봉 정도전의 중앙군제의 [진법]으로 개편되어야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왕권 강화'를 위한 태종 이방원의 사병 쿠데타로 혁파된다. 이방원은 '역적' 정도전의 길을 따라 사병을 해체하여 중앙군을 강화했고, 조선 최초의 병서인 정도전의 [진법]을 [진도지법]으로 계승한다. 세종 즉위 초 상왕으로 병권을 잡고 있던 태종에 의해 병조가 공식편찬한 조선 최초 어정 병서가 [진도지법]이다. 
물론 두 사람의 정치강령은 달랐다. 정도전은 성리학 관료들이 지배하는 조선, 이방원은 성리학 군주가 지배하는 조선을 각각 꿈꾸었고 결국 이방원이 승리했다. 


국내 유일의 '문무겸비' 학자인 최형국 박사는 수원시 무예24기 시범단장이다. 그는 2021년 정조가 편찬한 조선 최후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를 번역하고 해설하였다. 조선 후기를 개혁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정조가 '문치 개혁'의 핵심인 규장각과 '무치 개혁'의 중심인 장용영에게 명하여 조선의 단병접전 전투기술을 총망라하게 한 병서다. 

( https://brunch.co.kr/@beatrice1007/216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1790) - 정조 )

조선은 16~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급격한 체제 위기를 맞았다. 왕권 강화를 위한 중앙군은 시대를 따라가지 못했고 국가 위기에도 성리학 관료들은 쓰잘데기 없는 유교식 예법 강화에서 국난 위기 극복의 해법을 찾았다. 대외 국력은 허약한데 내부 신분적 계급체제를 격화시켜 조선 후기는 필연적으로 '민란의 시대'를 불러왔다.
그 중에도 조선 후기 군사전술 변화의 큰 계기가 된 사건은 1811년 관서지방의 '홍경래의 난'이었는데, 세도정치와 삼정 문란으로 격화된 민심이반을 토대로 허술한 조선의 군사력이 만천하에 드러난 사건이자 이후 조선 농민들의 치열한 반란을 예고하는 중대 사건이다. 이로부터 자생적으로 훈련된 '직업혁명가'들은 한반도 일대를 누비며 각종 민란을 조직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세도정치'와 '민란의 시대'를 배태하고 있던 조선 후기를 개혁하기 위해 조선 22대 왕 정조는 '성리학 부흥'과 '왕권 강화'의 길을 택하는데, 국가의 사상적으로 [대전통편], 군대의 집단 진법적으로 [병학통], 군인의 단병접전의 [무예도보통지] 등 '3통(通)'이었다. '통(通)'은 과거시험 만점과 같이 모든 것을 '통달'했다는 자심감의 표현이자 각 부문별 '소통'을 의미할 수도 있었겠다. 최형국 박사는 "'통'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막힘없이 소통할 수 있는 상태([병서, 조선을 말하다], <3-4>)"로 정의한다. '문치규장, 무설장용'의 '문무겸전' 부활을 통한 전방위적인 조선 개혁을 꿈꾸었던 정조는 [경국대전]을 '개헌'한 [대전통편]에서 군사력 강화의 <병전>을 특히 더 개혁하고, 단병술인 '무예24기'를 전국적으로 통일 확립하는 [무예도보통지], 즉 각 단병접전술(무예) '24기'의 그림(도)과 해설(보)을 총망라한 기록(통지)를 완성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중 선조 때(1598년) 편찬된 [무예제보] '6기'와 광해군 때(1610년) 증편된 [무예제보번역속집]의 '10기',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시절(1759년) 지어졌으나 소실된 [무예신보]의 '18기'를 이어 조선의 단병접전 무예를 '24기'로 확정한 기록이다. [대전통편]과 [무예도보통지]의 중간에 위치한 집단적 군사진법 병서인 [병학통]은 정도전과 이방원이 길은 달랐지만 함께 꿈꾸었던 조선 중앙군의 [진법]과 [진도지법]과 같은 조선 진법의 집대성이었다.


"[병학지남]은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에서 군대 훈련과 군사 선발에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 편집한 병서로, 임진왜란을 겪으며 대대적으로 변화한 조선 후기 군사 조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병서다. [병학지남]은 그 이름처럼 조선 후기 '군사학의 길잡이'가 되었다.
[병학지남]은 명나라 병서인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조선군에 필요한 내용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주체적인 문화 수용이 나타났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처음에는 [기효신서]의 내용 몇 가지를 뽑아서 훈련에 차용하다가 수정, 보완을 거듭하면서 점차 단일 병서로 묶어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 [병서, 조선을 말하다], <2-6. 정조, 새로운 군대를 꿈꾸다 [병학지남]>, 최형국, 2018.


정도전의 [진법]과 이방원의 [진도지법], 문종과 수양대군의 [오위진법] 등 왜란과 호란 전까지 조선의 진법 관련 '병서'들이 있었다. 이후 조선 중후기 진법서들은 발췌본과 편집본 형식으로 숙종 시기부터 [병학지남] 이름으로 산재한 것을 정조가 1787년에 통합편찬본 [병학지남]을 간행했다. 이 집단 교련서에 앞선 것이 1785년 [병학통]이었다. '지남철(나침반)'처럼 군사학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병학지남]이 조선 중후기 조선 진법을 집대성한 병서라면, [병학통]은 이를 위한 정조의 '진법'을 총망라하는 개혁 '3통'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중국대륙의 영향을 많이 받던 동아시아 문화권에 있었기에 [무예제보]로부터 시작한 무예서 일반 또한 명나라 장수 척계광의 [기효신서]와 모원의의 [무비지] 등의 중국 병서에서 발췌한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우리식으로 수정과 보완을 거쳐 주체적 문화수용를 통해 조선식으로 재구성했다. 

해방 후 1949년 무예가 곽동철이 지은 [무예도보신지]는 '조선 최후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책 제목도 비슷하게 지었는데, 국정 편찬은 아니지만 아마도 '해방 후 남한 최초의 무예서' 아닐까 싶다. 조선 무예서의 전통을 이으면서 현대식 '총검술'과 '검도'를 포함했다는데 일본식 검도술이 아닌 우리식으로 수용하고 재구성한 주체적 검도술도 담고 있단다. 총검술의 달인이었던 저자 곽동철은 조선의 '본국검'과 같은 검술을 망라하면서 검도술에서 맨손무예인 다리걸기와 상박 등도 포괄하고 있다는데 이는 대한검도회의 '정통(일본)' 검도와는 맥을 달리 한다고 최형국 박사는 평가한다.

이외에도 최형국 박사는 국내 유일 '무예 인문학자'답게 무예와 인문학을 접목한 서술을 이어왔다. 
모든 만물에는 '역사'가 깃들여져 있다. 그러므로 '전쟁 인문학'은 물론 '음식 인문학', '스포츠 인문학' 등의 다양한 '인문학'은 '역사'를 필수로 바탕한다.
'무예 인문학'의 권위자 최형국 박사의 [병서, 조선을 말하다]를 통해 조선 5백년의 역사는 물론 일제강점기 독립투쟁과 해방 후 역사를 '통사'로 돌아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

1. [병서, 조선을 말하다], 최형국, <인물과사상사>, 2018.
2. [정조, 무예와 통하다 - 正譯 武藝圖譜通志], 박제가/이덕무/백동수 지음, 최형국 역해, <민속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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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 한 잔 술에 담긴 인류 역사 이야기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정세환 옮김 / 탐나는책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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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 '접신(接神)'의 역사
-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2007), 미야자키 마사카츠, 정세환 옮김, <탐나는책>, 2020.


"이슬람 세계에서 동방의 인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로 이어지는 바닷길을 따라 증류기 '알렘빅'과 증류 기술이 전해졌다. 서아시아의 '아락'에서 일본의 '소주'에 이르는 길고 긴 여행의 시작이다... 먼저 인도에 '알렘빅'이 전해져 증류주가 만들어졌다. 오늘날 인도에는 쌀, 당밀, 야자를 발효시킨 후 단식 증류기로 두 번에서 세 번 증류하는 '아락'이라는 증류주가 있다... 이슬람과 인도의 교역이 탄생시킨 '아락'은 두 문화가 융합한 성과로 볼 수 있다. 이집트의 술 '아라키', 터키의 술 '라키', 리비아의 술 '락비' 등도 '아락'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아락'은 이슬람 상인의 넓은 상권이 만들고 키운 술인 것이다.
...
원의 황제 '칸(가한)'을 위해 쓴 요리책 [음선정요]는 증류한 소주를 '아라길주'라고 적었다. '아라길'은 좋은 술을 증발시켜 수분을 제거한 찌꺼기를 뜻하는데, 동남아시아로부터 전해진 '소주'라는 뜻도 있다. '아라길'이라는 말에서 '알렘빅'을 연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증류기를 '알렘빅'이라고 불렀는데, 아시아에서는 증류주 자체를 '아라길'이라고 부른 듯 하다."
-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3장. 이슬람 세계에서 동서로 전해진 증류주>, 미야자키 마사카츠, 2007.


지금 생각해도 이십대에 술마신 기억이 사뭇 아찔할 때가 있다. 차비는 커녕 술값도 없어 학생증 맡기고 외상술에 외박을 일삼았고, 장마철에는 빗속에서 엄동설한에도 한파 속에서 음주 풍찬노숙을 하다가 자칫 골로 갈 뻔한 적이 돌아보면 여러 번이었다. 그 때마다 아마도 '신(神)'의 덕으로 여태 살아남았을 게다.
인류가 신을 만나 일체가 된 '접신(接神)'의 역사는 바로 '술'의 역사다.


일본의 역사가 미야자키 마사카츠는 어느날 우연히 '바'에서 술을 마시다가 '술'을 매개로 세계사를 써볼 생각을 했단다. '바텐더(Bar-tender)'는 미국의 서부개척시대 술을 훔쳐먹지 못하게 '바(bar)'를 설치하고 술통들을 '지키던 사람(tender)'에서 유래하는데, 지금은 와인을 설명하는 '소믈리에(식품운반업자)' 못지 않게 각종 술의 특성을 숙지하고 이들을 혼합하는 칵테일 전문가를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세계사 전문가인 미야자키 마사카츠는 술 전문가인 단골 바텐더를 통해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2007)라는 책으로 세상 모든 술의 흐름에 따라 세계사의 단편들을 보여준다.


술은 크게 '발효주', '증류주', '혼성주'로 나뉜다.

'발효주'는 고대로부터 벌꿀을 자연발효시킨 봉밀주 '미드', 지중해 온대지방의 포도가 자연발화한 포도주 '와인', 아메리카 옥수수술 '치차' 등이 그 시초인데, 메소포타미아의 보리로 만든 '액체빵' 맥주는 수천년 전에는 발효효소가 없어 보리빵을 사람이 씹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동시대로 추정되는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옥수수를 신성한 처녀인 '아크라'가 씹어서 옥수수술 '치차'를 만들었다고 하니 타액에 발효효과가 있다는 것을 지구의 양 극단에서도 알았다는 것이 신기하다. 가히 역사의 '양자 역학'이다. 한편으로 침범벅인 고대의 양조주를 거리낌없이 마신 것을 보면 역시 '접신'의 힘이 무섭기도 하다. 이후 천연발효주인 와인 이외에도 양조주는 쌀/보리와 당밀(사탕수수 찌꺼기), 고구마나 감자 등의 곡식에 누룩 같은 발효효소를 가미하게 되면서 서양의 맥주와 동양의 황주, 청주, 막걸리 등의 모습이 된다. 

다음으로 '증류주'는 고대 이슬람의 연금술사들이 싼 금속으로부터 비싼 금은을 추출하기 위해 발명한 '증류기'로부터 유래한다. 물과 알코올의 끓는 온도가 다른 점에 착안하여 발효주를 끓여 먼저 수증기가 되는 알코올 성분을 다시 액화시키는 방식으로 증류기에 '땀'처럼 맺힌 것을 보고 아랍인들은 이 증류기를 '알렘빅(Alembic:땀)'이라 불렀단다. 증류주의 발견은 아마도 동아시아 도교의 '신선술'과 서아시아 이슬람의 '연금술'의 문명적 결합의 산실일 수 있는데, 영생을 구하려던 진시황과 같은 절대권력자들의 등을 쳐먹은 신선들의 '불로장생약'과 아랍의 연금술이 만나 우연하게도 발효주를 끓여 얻은 증류주가 발견되었을 것이란다. 수당시대 서아시아 교역으로부터 이슬람 상인들의 활동으로 이러한 증류주는 동방에서 전통 발효 곡주를 증류한 '아락'과 '소주'로, 서방에서는 14세기 페스트의 공포 속에서 전통적 와인을 불꽃이 일 정도로 알코올 도수가 높게 증류한 '생명의 물' '위스키'와 '브랜디', 북방 러시아의 '보드카'와 바이킹의 '아쿠아비트(생명수)' 등의 모습으로 각지에 출현했다. 이슬람은 음주를 '악마'의 행위로 여겨 '금주'가 율법인데, 이들의 증류기 '알렘빅'이 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이슬람공화국을 자처하는 터키는 '라키'라는 독한 증류주를 마시는데 아마도 서양의 근대화를 쫓은 증거일 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혼성주'는 이런 증류주에 과일이나 설탕 등 다른 요소를 가미하여 풍미를 높인 술이다. 설탕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당밀을 이용해 만든 해적들의 싸구려술 '럼주', 근대 자본주의 대항해 시대의 시초 네덜란드에서 현대의 콜라처럼 소화제로 만들었다는 '진', 미국에서 우연히 불에 탄 오크통에서 숙성된 '버번(부르봉:bourbon) 위스키' 등의 과도기를 거쳐 지금의 칵테일과 각종 혼합주로 다양하게 발전해 온 것이 '술'의 역사다.


"희석식 소주... 고구마나 감자에 화학 처리를 하여 값싼 알코올을 추출하는 기술은 1920년대 초반 화석 연료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일제도 '연료 국책' 방침에 따라 1936년부터 조선에 무수주정(無水酒精) 공장을 만들었다... 이 뒤로 '값싼 알코올'이 대량 생산되어 연료와 음료에 공용되었다. 그 덕에 알코올 도수가 높은 '소주' 값은 싸졌다. 세상에 흔하면서 신성한 존재는 없다... 소주가 '서민의 술'이 됨으로써 술의 '신성성'도 더불어 옅어졌다."
- [우리 역사는 깊다 - 1], <4월 7일 - 값싼 알코올, 대량생산 본격화>, 전우용, 2015.


술이 대중화된 역사는 소수만이 독점하던 '접신'의 대중화와 맥을 같이 한다. 권력자들은 이러한 술에 세금을 부과하여 통제하려 했지만, 밀주를 포함하여 술을 절대로 끊을 수 없었던 인류는 한편으로 '접신'을 통해 신의 권위에 끊임없이 도전해 왔다. 

중국의 '불로장생약' 신선술과 이슬람의 연금술이 결합하여 우연히 발견된 '증류주'는 동양에서는 대표적으로 '소주(燒酒)'가 된다.
역사학자 전우용에 의하면 고려 시대 몽골을 통해 들어온 증류주인 '소주'는 우리의 전통적 주조 방식으로 이어져 왔고 조선 후기까지 각 지역의 '어지간히 살 만한 집'들은 단식 증류기인 '조선식 고리'를 갖추고는 나름의 증류주인 '소주' 제조법을 종갓집 며느리를 통해 전수해 왔다고 한다. '소주'는 원래 동아시아 조선의 '고급술'이었던 것이다. '소주'를 마실 수 없었던 다수 민중들은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식 소주의 '신맛'이 '유치한 제조방법'에 있다면서 일본식 주조방식으로 대체함으로써 우리 전통의 소주들을 말살했다. 술 또한 일제의 '근대화' 이식의 희생물이었다. 한편으로 '술'과 '주세'는 전통적으로 국가행정의 중요 부문이었고 국가권력은 이 '접신'의 매개물을 '국민건강'의 이름으로 통제하고자 했다. '신의 대리인'에서 유래한 국가권력 이데올로기는 다수의 '접신'을 통제함으로써 가급적 다수 민중들을 신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억압의 최고조에 달했던 1930년대 중반 '총력전' 시대에는 조선의 소나무 껍질까지도 전쟁연료로 벗겨가던 시기였다. 화석연료가 부족하여 대체연료로서 '무수주정'은 고구마와 감자와 같은 구황작물에서 순수 에탄올을 추출하는 작업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원료를 희석시켜 만든 '희석식 소주'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고급술'이었던 전통 '소주'들을 아예 대체하였다. 어차피 일제의 '주조법 근대화'로 우리의 '안동소주', '평양소주' 등의 지역 소주는 근본을 잃었던 터였다. 알코올 도수가 보드카나 고량주처럼 40도를 넘던 전통적 '고급 소주'는 도수를 낮출 수 밖에 없는 화학적 희석식 '인공 소주'에게 자리를 물려주면서 급기야 도시화와 공업화가 급격히 추진되던 1960년대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 이르면 이 인공적 '희석식 소주'가 막걸리를 대신하여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다수 주종이 된다. 평양의 '어복장국'과 서울의 '설렁탕', 전주의 콩나물 '탁백이국'과 함께 나오던 '탁배기(막걸리)'가 서서히 '희석식 소주'로 대체된 것이다.


"소주회사의 통합 과정은 또 다른 측면에서 증류식 소주, 혼합식 소주, 희석식 소주 등으로 나누어져 있던 소주를 '희석식 소주'로 단일화시키는 역할도 했다. '희석식 소주'는 고구마나 타피오카와 같은 곡물을 발효시켜 나온 알코올을 분해해 정제한 주정에 물과 향료를 희석해 만든 술이다. 주정은 그냥 마시면 치명적일 정도로 독하기 때문에 물을 섞어서 써야 한다. 이 같은 주정은 결코 전래의 증류 방식을 온전히 따라 만든 것이 아니다. 밑술인 양조주를 만들지 않고 발효균을 원료에 넣어서 기계에서 연속으로 증류시켜 만든다. 그렇기에 발효주와 같은 독특한 향기가 주정에서는 나지 않는다."
- [식탁 위의 한국사], <5-3. 식품공업의 성장과 뒤안길>, 주영하, 2013.


음식인문학자 주영하는 역시 음식을 중심으로 돌아본 한국사를 통해 '식품공업화'를 통해 사라지는 전통적인 '간장'과 '술' 등의 역사도 언급한다. 1970년대 국가와 독점자본이 결탁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술공장 역시 통폐합하는데 국가는 세금을 많이 걷어 좋고 국가권력에 가까운 '정치력' 있는 대자본가는 군소자본들을 흡수하면서 독점자본으로 성장하여 좋은 자본주의 필연적 발전단계였다. 1970년에 전국의 387개 탁주 제조창은 113개로 통합되었고, 1973년에는 전국의 334개 소주공장은 34개로 통폐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별 독점적 '소주 자본'(경기 진로, 강원 경월, 경남 무학 등)이 시장을 휘저었고,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21세기에는 각지의 소주들도 전국적으로 끝이 없는 통폐합을 노정하고 있다. 21세기의 자본주의는 국가권력의 협조 없이도 이윤의 자기증식을 위해 스스로 거대독점자본을 만들어 간다. 

'국가독점자본주의' 시기에 '소주 자본'은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국가'가 필요했다. 국가는 독점자본의 이익을 지켜주면서 세수도 늘리고 다수 민중의 직접적 '접신'을 통제했으나 예로부터 다수 민중은 동서를 막론하고 밀주를 만들어 마시며 지속적으로 '접신'을 이어왔다. 
이제 국가권력보다 훨씬 강력해진 독점자본은 더 이상 국가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거대독점권력이 되어 다수의 삶에 침투한 지 오래다. 아마도 또 하나의 '절대권력'이 되고자 하는 이 '독점적 소주 자본'은 본의 아니게 다수의 음주 속에 도사린 '저항'과 '공유'의 역사를 한 단계 더 진보시킬 수도 있겠다. 
'술'과 '음주'의 역사에서 다수의 '접신(接神)'을 매개로 '저항'과 '공유'의 도도한 역사를 낚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불로장생 '신선술'이 절대권력 황제들을 무너뜨렸고, 영국 명예혁명으로 유입된 네덜란드 '진'이 초기 자본주의 영국을 망가뜨렸으며, 현대의 '희석식 소주'가 우리의 산업자본주의 역사에서 노동계급을 단결시켜온 것처럼 말이다.


***

1.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2007), 미야자키 마사카츠, 정세환 옮김, <탐나는책>, 2020.
2. [우리 역사는 깊다 - 1], 전우용, <푸른역사>, 2015.
3.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휴머니스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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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무예와 통하다 - 정역 무예도보통지 민속원 아르케북스 188
정조 명, 최형국 옮김 / 민속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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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혁'을 위한 '최후의 무예서'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정조(正祖) 편찬, 박제가/이덕무/백동수 저술, <규장각/장용영>, 1790.


"무예제보(武藝諸譜)에 수록된 곤방,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 등 '6기'는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서 나왔다. 선조(宣祖) 임금께서 재위시절 (훈련도감) 훈국랑 한교가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 장수들에게 두루 물어 편찬하여 간행한 것이다. 선왕(영조) 기사년(1749년)부터 아버지 사도세자께서 업무를 대신 수행하셨는데 기묘년(1758년)에 죽장창, 기창, 예도, 왜검, 교전, 월도, 협도, 쌍검, 제독검, 본국검, 권법, 편곤 등 '12기'를 증입하도록 명하였고, 그림(圖)과 해설(譜)을 모두 모아 정리하여 [무예신보(武藝新譜)]를 만들었는데... 내가 즉위한 원년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앞의 '18기'를 함께 무예시험 과목으로 연습하도록 처음으로 명하였고, 또한 기창,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 등 '4기'를 더 추가하였다. 지금 또 격구와 마상재를 그 아래에 덧붙였다.
...
이에 무예의 신/구보 '24목'을 너희들에게 모두 주어 상세히 연구케 하여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는 이름을 내려주노라."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병기총서>, 정조, 1790.


어린 시절, 태권도 '품증'은 배불뚝이 아저씨 한 분이 택견 품세를 하는 그림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림그리기 좋아했던 내게는 품증의 내용보다는 그 바탕화면이 항상 먼저 눈에 들어왔다.

조선 후기 학자 이만영의 [재물보](1789)라는 책에는 '권법'을 이르는 '변(卞)'과 '각력(角力)'에 관한 해설이 있다고 한다. 고대로부터 전승된 우리식 씨름인 '수박(手搏)'을 '변'이라 하고 겨루기를 뜻하는 '각력'은 '무(武)'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이를 '탁견'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중국 [한서] <애제기>편에 적힌 "변사와 무희를 관람하셨다"는 최초 기록에서 힘을 겨루는 '변'과 '각력'은 고대로부터 '무예놀이(무희:武戲)'라는 주석이 나왔다는데, 황해도에 있는 우리의 고구려 안악 3호분묘 벽화에도 맨손무예인 '수박'의 장면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오래전부터 이런 격투기 대련은 관람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에서도 '레슬링'이 고전종목이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 이 맨손무예를 '탁견'이라 불렀단다. 우리 태권도의 원형으로서 '택견'의 어원에 관한 기록이다. 전통 무예로서 그 역사와 정신을 추적하는 태권도협회의 노력은 우리 권법의 사료적 기원을 우리식 무예서에서 찾을 것인데, 우리식 '권법' 총화의 원형은 사도세자의 [무예신보]에 전하는 '18기(十八技)'에서 찾는다.

우리 한반도와 요동인들은 오래전부터 활과 화살을 강조했고 수련해 왔다. 고대 원거리 전투의 효자종목인 활쏘기는 우리 전쟁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했고 우리 역사에서 대부분의 영웅들은 명궁이었다. 조선 무과에서도 아마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에 등장한 조총은 신병기로서 그 위력은 놀라웠겠으나 사정거리나 장전능력에서 아직 활보다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장도를 앞세운 왜군의 단병접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조선군은 왜란 후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포수(조총)', '사수(활)', '살수(창칼)' 등의 부대 편제와 훈련을 강화한다. 선조는 훈련도감 장수 한교에게 명해 명나라 파병군의 장수를 만나 여섯 가지 무예를 전수받아 조선 최초의 국정 무예서를 만들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무예제보](1598)다. 곤방(봉), 등패(방패), 낭선(독묻힌 대나무 가지), 장창(긴 창), 당파(삼지창), 쌍수도(양손으로 잡는 긴 칼) 등 '6기'를 그림과 설명으로 확정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킨 것이다. 이것이 광해군 대에 [무예제보번역속집](1610)이라는 제목으로 '권법', '청룡언월도', '협도곤', '왜검' 등 '4기'를 추가하였으나 패주인 광해군의 업적은 높이 기릴 수 없었다. 영조 시절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는 병자호란을 겪고 청에서 인질생활을 하다가 즉위 후 '북벌'을 외치던 효종이 말을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던 기상을 본받아 무예를 중시했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사도세자가 편찬한 [무예신보] 또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북방의 기병술과 남방의 보병술을 두루 훈련하기 위해 기존 '10기'에 죽장창(긴 대나무창), 기창(깃발창), 예도(일반검), 교전(검겨루기), 쌍검(쌍칼), 제독검(장수검), 본국검(조선검), 편곤(도리깨/쌍절곤) 등 '8기'를 보태어 조선무예 '18기'를 완성한다.
결국 조선 후기 '르네상스 개혁군주' 정조에 이르러 기창(말을 탄 창술),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 격구(마상 스포츠), 마상재(마상 서커스) 등 '6기'를 덧붙여 조선무예 '24기'로 증편되었다.

정조는 즉위 연설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 일갈했다는데, 이는 노론에 대한 정치보복을 예고하는 말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사도세자의 형인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 형식으로 '적통'이 만들어져 즉위한 정조는 본인을 앞세워 사도세자를 극히 높여 당쟁을 격화하는 술수를 부리지 말라는 경고를 통해 당시 집권당 노론을 경계했다. 영조의 '탕평책'을 잇겠다는 천명이었으되 한편으로 조선 개혁의 동력을 지배세력에서 찾지 않고 서얼 출신의 천재들을 직접 기용하여 '개혁군주'의 친위대로 삼았다. 정조 개혁의 핵심 조직은 '문치개혁'의 '규장각'과 '무치개혁'의 '장용영'이었다.


"정조 시대의 국정 운영의 방향은 '문치규장 무설장용(文治奎章 武設壯勇)'이라는 문장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문'은 '규장각'을 중심으로 초계문신제를 도입하고 성리학을 바로 잡으며, '무'는 친위 군영인 '장용영'을 통해 왕권을 강화시킨다는 것이다. 특히 중앙군영 장악은 국정 장악에 반드시 필요했기에 가장 중요한 개혁의 대상이었다. 정조의 '무(武)'에 대한 특별한 인식은 장용영 설치와 함께 다양한 병서의 편찬으로 구체화되었다."
- [정조, 무예와 통하다], <[고이표]와 '통지'의 의미>, 최형국, <민속원>, 2021.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꾼 '개혁군주' 정조는 '왕권 강화'를 통해 조선의 변화를 기획했다. 18세기 당시 유럽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의 목이 날아가던 '시민권 강화'의 시대였지만, 아시아에서는 다수의 복지 증진을 위한 '공공성'이 '시민권'이 아니라 '왕권'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19세기에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패해 서양에게 굴욕을 당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몇 세기 전부터 전제왕권을 성공적으로 강화했기 때문에 사회 전반의 개혁이 불가능했다는 점도 들고 있다. 동아시아는 역시 그 영향권 안에 있었다. 정조의 '개혁'은 결국 '왕권 강화'의 강령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정조 즉위 당시 집권당 노론은 각 정부관제를 장악하고 서로 사돈을 맺어 세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선대 '탕평책'의 말로였다. 스스로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가 되어 국가 전체의 '기강'을 바로잡으려던 정조는 본인이 직접 발탁한 '초계문신'들을 직접 가르쳐 규장각에 집합시키고,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장용영의 친위부대를 길러 국정을 장악하려 했다. 물론 서얼자의 한계로 뜻을 펴지 못한 천재들을 파격적으로 기용한 면모는 가히 개혁적이었다. 높은 관직은 아니었지만 조선의 모든 지식의 집합소인 '규장각'을 거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의 이 어용지식인 관료들은 이후 실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물론 정조의 성리학 '르네상스'는 결국 얼마 후 세도정치의 물결을 막지 못하였는데, 시대와 역사는 정조가 '왕권 강화'를 통한 조선 개혁이 성공할수록 사회의 진보를 그 이상으로 더 늦추었을 것이라는 거대한 '역설'을 보여줄 것이었다. 조선을 바꾼 것은 정조의 시대착오적 '왕권 강화'가 아니라, 왕조의 명을 재촉하는 다수 민중의 반란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개혁군주' 정조의 노력은 가상하여 문무를 겸비한 총체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으니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을 '개헌'한 [대전통편(大典通編)], 정도전의 [진법(陣法)]으로부터 기원했을 조선의 '진법'을 정리한 [병학통(兵學通)], '조선 최후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3통(通)'이 그것이다. 법전을 개혁하여 국가의 세계관을 재정립하고, '병법'을 정리하여 국가의 군사력을 강화한 것이다. [병학통]은 군대의 전체 대오를 통해 전투에서 승리하는 '진법'의 집대성이었다. 이후 이어진 [무예보도통지]는 각 군사의 개별 무예를 총정리하여 위의 '진법'에서 종합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유기적 발상이었다. 원래 조선의 국정 무예서의 시초인 [무예제보]가 참고했던 명나라 장수 척계광의 [기효신서] 또한 각 진영이 '원앙'처럼 찰지게 어우러지는 '원앙진'의 개별 요소로서 단병접전술을 총정리한 것이었다. 척계광의 '척가군'은 기병 중심의 중원 전투에 비해 광동과 절강성 지역을 노략질하던 왜적의 단병접전에 대응하기 위한 게릴라전과 각개전투의 기술 및 무기개발에 그 효용성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척계광은 물론 역시 왜국에 대비한 무인 집안의 후예로서 무예서 [무비지] 240권을 지은 명나라 장수 모원의 또한 참고하고 있는데, 책의 앞부분에 <척소보/모총병 사실>이라는 장을 통해 위 두 장수를 간략히 소개하고 뒤 이어 <기예질의>를 통해 [무예제보]를 지은 한교가 왜란시 파견된 명나라 장수를 찾아가 '병서' 전반을 질의한 내용도 싣고 있어, 국정 무예서의 시초로서 선조대 [무예제보]의 위상을 확실히 해두고 있다.

한편, 정조의 [무예도보통지]에서 주목할 점은 '성리학 지식인 개혁군주'이고자 했던 정조답게 이 '조선 최후의 무예서' 집필을 지식인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기존 '훈련도감'에서 관장했던 [무예제보]나 [무예제보번역속집]과 달리 [무예도보통지]는 '규장각'의 지식인 박제가와 이덕무가 총괄했다. 이에 신체적 교본의 실험과 취재는 '장용영' 장수 백동수가 맡은 것이었는데, 이 지은이 셋 모두 서얼 출신의 천재들이었다. 과연 이 '조선 최후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는 무술의 '실전교본'을 넘어 무예에 깃든 철학과 역사, 해당 무기의 잡학사 일체를 아우른다. 물론 그 사상적 기본 태도는 '성리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였다.


"[검결가]에 실려 있는,
...
조선세법은 처음에 안법, 격법, 세법, 자법 등을 연습한다. 격법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즉 표두격, 과좌격, 과우격, 익좌격, 익우격 등이다..."
- [무예도보통지], <예도(銳刀)>, 1790.


[무예도보통지]의 서문과 각 사설의 앞부분(권수)을 지나면 1권에서 '찌름을 위한 무예'로 '창'술을 다루고 2~3권에서 '베기를 위한 무예'로서 '검'술을 망라하며, 4권에서는 '치기를 위한 무예'인 권법 및 봉술과 쌍절곤(편곤)술, 기타 마상 무예를 합쳐 '24기'에 관한 그림과 설명을 상세히 기록한다. 제목의 뜻은 '무예(武藝)'에 관한 '그림과 설명(도보:圖譜)'을 총망라하고 '완전히 달통한 기록(통지:通志)'로서 '무예(武藝)'+'도보(圖譜)'+'통지(通志)'인 것이다. 참고로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 '만점'을 의미하는 단어 또한 '통(通)'이었단다. 과연 '성리학자' 지식인이 되고 싶었던 군주 정조다운 작명법이다.
각 무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묘사, 그 원료로서 금속과 나무의 재질과 제작법은 물론 무기의 변천사 등을 박제가와 이덕무 등의 규장각 '천재'들이 취재하고 짓고 감수하며, 각 무기들의 활용법은 장용영 장수 백동수가 장사들을 데리고 시범하면서 실증한다.
각 자세들은 '태산압란세(태산이 알을 누르듯 창을 든 자세), '거정세(솥을 들듯 검을 치켜든 자세)', '복호세(호랑이처럼 낮춘 자세)', 표두격(표범이 머리를 공격하는 것)' 등의 비유적 표현이 차고 넘친다. 몇 번 따라 해보려는데 현대인인 나로서는 구현이 쉽지 않다. 하지만 '격법(치고)', '세법(베고)', '자법(찌르고)' 등의 직접 행동 이전에 '안법(눈으로 보고)'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은 싸움은 무기와 기술도 중요하나 '눈'을 비롯한 '오감'으로 상대를 사전 제압하는 '담력'을 최고로 치는 '도(道)'를 앞에 두는 사상을 잊지 않는다. '태권도', '유도', '검도', 하물며 '합기도'까지 '기예' 이전에 올바른 '도(道)'를 중시하는 바로 그 전통선상에 있다.

맨손무예로서 '권법'은 수많은 무기들을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한 기본적 신체단련으로서 '도수체조'와 같은 성격이며, 이를 기본으로 중앙군부터 지방군까지 전국이 표준적이고 통일화되어 단련한 각종의 무기술은 각 무기의 특성에 맞게 각 군대의 진법에서 결국 유기적으로 활용된다는 것이다. [대전통편]에서 정립된 국가 사상이 [병학통]의 '진법' 속에서 [무예도보통지]의 각개전투술로 어우러지며 구현되는데, 이 모두를 잇는 한 글자 역시 다름아닌 '통(通)'이다.


"비록 진법을 완벽하게 구축하였을지라도 군사 개개인의 무예가 잘 갖춰지지 않으면 전투가 불가한 것으로 보고... 따라서 [병학통]을 중심으로 대규모 부대의 진법을 완성하고, [무예도보통지]의 무예를 군사 개개인이 익혀야만 병법이 완성된다...
즉, 진법과 무예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성격으로 해당 진법의 변화는 무예의 변화와 직결되는 것이고, 반대로 해당 무예의 변화는 곧 진법의 변화와 연관이 되는 것이다."
- [정조, 무예와 통하다], '부록 1 - [무예도보통지] 편찬 의미와 당대의 활용', 최형국, <민속원>, 2021.


전통무예 연구가로서 '조선무예 24기'를 수련한 최형국 박사는 한문과 한글(언문)로 간행된 정조의 [무예도보통지]를 번역하고 해설한 [정조, 무예와 통하다](2021)라는 책을 내면서 정조 개혁의 '3통(通)'에서 '통(通)'을 '소통'으로 해석한다. 정조의 개혁정신을 높이 사는 저자는 정조가 펼친 이 '소통'의 가치 또한 이 책의 결론으로 가져간다.
한편, '왕정'이라면 그 어떤 형식으로든 경멸하고 반대하는 '공화주의자' 독자인 내가 읽은 '조선 최후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는 성리학 사상과 전통무예 기술의 '소통', 진법과 각개무술의 '소통', 과거의 전통과 현대의 혁신과의 '소통' 등 이 모든 변증법적 '소통' 속에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통(通)'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등패(단거리 방패)' 부대를 중거리 '낭선(대나무 가지)' 부대가 호응하고, 중거리 '장창(긴 창)' 부대는 단거리 '당파(삼지창)' 부대가 구원하는 종합전술 병법처럼 이론과 실천, 전통과 혁신이 변증법적으로 상호 어우러지는 '소통'이 정조의 시대착오적이지만 절실했던 개혁의 방향이었을 것이다. 

정조는 세간의 평과 달리 문치 군주 세종보다는 무예를 숭상한 수양대군 세조를 더욱 닮았다고 한다. 세조는 성종대에 완성되는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하고 선왕 문종대부터 무예서 편찬을 관장했다고 한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후 중앙집권적 왕권 강화를 꾀한 이유는 반란을 막고 왕위를 지키기 위한 책략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조선왕조를 한층 제도적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문무를 겸비한 정조 또한 왕위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내치용 개혁으로서 왕권 강화를 꾀한 것에 불과했음에도 후세에 조선의 '개혁군주' 평가를 받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자고로 한 개인이나 소수의 의도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북한은 2016년에 단독으로 [무예도보통지]를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하였다고 한다. 남북이 함께 했었으면 좋았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우리 역사가 전수해 준 '조선 최후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의 이 '소통'의 비법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가 아닐는지.


* 여담으로, 이 역해본 책의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다. 
하지만 박물관에 소장된 한문과 언해본의 영인본이나마 소장할 가치로만 해도 그 가격은 전혀 아깝지 않다.


***

- [정조, 무예와 통하다 - 正譯 武藝圖譜通志], 박제가/이덕무/백동수 지음, 최형국 역해, <민속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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