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망 - 항우에서 한신까지
리카이위안 지음, 김영문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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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전국시대 : 2] "초나라는 멸망한다"
- [초망(楚亡)](2015), 리카이위안,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2021.


"수천 년 동안 '역사'는 중국인의 '종교'였다. 우리(중국인)에게 '성경'은 없지만 '고전'은 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비춰볼 수 있지만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시대의 흥망을 알 수 있다([묵자]). 자신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으므로 거울에 비춰봐야 한다. 당대의 사실로는 당대를 인식할 수 없으므로 '역사'에 비춰봐야 한다. 사마천은 또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세상을 살면서 옛날의 이치를 기록하는 것은 스스로를 비춰보기 위해서다'([사기], <고조공신후자연표>)... 위대한 사마천은 자신의 생명을 '역사'에 쏟아부어 일가의 언어를 저술하는 가운데서 영생을 얻었다. '역사'는 그의 종교였고, 그는 '역사'의 사제였다."
- [초망], <후기 : 역사는 우리의 종교>, 리카이위안, 2015.


기원전 206년, 진(秦) 나라가 멸망했다.
중국의 역사학자이자 문학박사 리카이위안은 '초한전쟁' 무대였던 진말한초의 시기를 '포스트-전국시대'로 규정하며 '진나라 붕괴(秦崩)'의 과정을 서술했다. '진시황에서 유방까지'의 이 '열전'은 '역사의 공백'을 메우려는 저자의 노력이다. 
사마천의 후예로서 그는 생생한 현장답사를 통해 고대 문헌이 말하지 않는 '공백'의 '역사'를 '문학'적 서사로 채운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모든 역사는 추측과 상상"([초망], <프롤로그>, <6-6>)이라고 말하는 리카이위안에게 "때로는 '문학'이 '사학'에 비해 훨씬 진실하다"([초망], <프롤로그>).

'역사'는 시대를 보는 '거울'이라는 말은 오래된 은유다. '유가'의 공자가 지은 [춘추]부터 [묵가]는 물론, 사마천의 [사기]와 [구당서]의 <위징전> 등의 내로라 하는 역사책들이 전하는 잠언이다. '유일신'의 '종교'적 전통이 없는 동아시아에서 '신'은 '하늘'이었다. 유교에서 '천인합일'은 동양사상 궁극의 목표였다. 인간과 구분되는 '천상'의 신이 아닌 인간과 함께 호흡하는 '귀신'을 섬기는 제사의 전통이 있다. 신과 인간의 이분법이 아닌 자연만물과 인간사회의 공존의 철학이기도 하다. 기후위기로 자연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지금, 한 번쯤 돌아볼 일이다. 우리를 포함한 동아시아인들에게 '역사'는 어쩌면 '종교' 대신이었고, 그만큼 '역사'라는 '거울'은 두고두고 닦아써야 했다. 그리고 고대 기원전 3세기의 중국역사를 [진붕(秦崩)](진나라의 붕괴)의 '거울'로 비춰보았다.
이제 '포스트-전국시대'에서 진(秦) 나라의 뒤를 이은 '초(楚) 나라의 멸망'을 살필 차례다.
드디어 [초망(楚亡)의 시간이다.


"(초 회왕)의제의 죽음은... 진나라 말기의 대란 이후 잠시 부활된 '포스트-전국시대'와 왕정복고 시대의 종결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때부터 중국역사는 초나라와 한나라 양웅의 주도 아래 여러 제후국이 분쟁을 벌이는 시대로 접어든다... 이는 마치 전국시대 말기의 '합종연횡'이 재현된 것과 같았다. 새로운 초한전쟁의 역사에서 항우는 초나라를 계승하여 '합종책'의 패왕이 되었고, 유방은 진나라를 계승하여 '연횡책'의 맹주가 되었다... 고국의 옛주군 초 회왕의 정통을 계승하는 것은 천하쟁패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자 처리해야 할 난제였다."
- [초망], <2-6. 의제의 죽음>, 리카이위안, 2015.


초(楚) 나라의 멸망은 비단 유방과 겨루던 초 패왕 항우의 몰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나라가 6국을 병탄한 후에도 정복과 탄압을 그치지 않자 열국의 사람들은 진나라에 이를 갈았다. 진승과 오광의 반란이 시작되자 망국의 사람들은 복국을 외치며 '포스트-전국시대'를 열었는데, "진나라를 멸하는 것은 초나라"라는 참언처럼 반란군 지도자의 대부분은 초나라 사람이었다. 진승, 항우, 유방까지 모두 초나라 사람이었다. 그들이 '반진(反秦)'의 기치를 올렸을 때 반란군의 제도와 편제, 병력과 근거지 일체는 초나라의 그것이었다. 초나라 최후의 명장 항연의 일족인 항씨 가문은 말할 것도 없고 '평민' 건달 출신인 유방도 그랬으며, 초 회왕(의제)이 선포했던 '포스트-전국시대'의 천하공약이자 계책으로서 '회왕의 약속(약조)' 또한 초나라 중심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초망(楚亡)]은 항우의 멸망이 아니라 '초나라 중심사상'의 종결이었다. 유방의 책사 장량은 물론 대장군 한신으로 인해 유방이 초나라의 근간에 진나라의 사상을 접목하면서 초나라가 지양된 것이 바로 [초망(楚亡)]의 실체였다.

장량은 이미 황석공으로부터 [태공병법]을 전수받은 이후 천하통일의 대전략을 고민했고 유방이라는 그릇에 그 방략을 담고자 했다. 천하를 양분하는 건곤일척의 '초한전쟁' 전선을 최초로 그려낸 인물은 아마도 장량일 것인데, 이를 군사적으로 제안한 인물은 바로 한신이었다. 


"'한중대(漢中對)'는 초나라와 한나라 쟁패의 역사적 기점이었다. 유방 집단은 이때부터 북상하여 삼진을 다시 평정하고, 동쪽으로 나아가 천하를 쟁패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후에 전개된 역사에 의거하여 살펴볼 때 '한중대'의 정확한 정책결정과 성공적인 추진력이야말로 유방 집단을 수동적 위치에서 주체적 위치로 전환시키고 연약함을 강력함으로 바꿔놓은 변곡점이었다. 나중에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천하를 쟁취한 토대는 바로 여기에서 마련된 셈이다. 이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중국역사에서 제시된 전략결정 중 성공적인 모범으로 '한중대'를 손꼽으면서 제갈량이 유비에게 답한 '융중대'에 비견하고 있다."
- [초망], <1-7. 한중대>, 리카이위안, 2015.


삼국지에서 유비는 '삼고초려' 후 '융중'에서 제갈량으로부터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 계책을 듣는다. 삼국이 "솥발처럼" 서로 견제하며 자립하는 정세다. 유방보다 스물여덟살 정도 아래인 한신이 항우의 진영에서 나와 우여곡절 끝에 유방을 만나 기묘한 계책을 제시한 것이 훗날 '융중대'의 표본이 된 '한중대(漢中對)'였다. 소하와 하우영과의 면접 후 그들의 추천을 받았으나 유방은 신출내기 한신을 크게 중용하지 않았다. 항우처럼 자기를 중용하지 않은 유방에게 시위하듯 탈영을 하는 한신을 소하가 직접 다시 끌고오는 한바탕 쑈를 하고난 후 '한중'에서 한신이 유방에게 제시한 전략이 '한중대'다. 이를 전후로 소하의 적극 추천에 힘입어 한신은 스물셋의 나이에 유방군의 대장군이 된다. 아마도 '한중대'는 한신 개인의 의견이라기 보다는 한중에 갇혀 항우군에 비해 군사적 열세를 겪던 유방에게 장량과 소하 등의 중신들이 [손자병법] 등에 능한 '군사천재' 한신의 입을 빌려 제안한 대책이었을 것이다. 고립되었지만 풍족한 관서와 한중을 기반으로 관동의 항우와 동서로 대치하는 전선이 그어진 순간, 동남쪽의 초나라 문명은 이미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

한신은 장량의 '천하양분지계(天下兩分之計)'를 바탕으로 유방이 관중을 나가 옛 진나라의 수도권인 삼진땅을 차지하는 '암도진창' 계책으로 '초한전쟁'의 천하양분을 실현하는 기반을 마련했고, 유방의 연합군이 항우군에게 몰살당할 때마다 신병을 보충해주는 화수분이었다. 유방이 팽성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후 한신은 전장을 북방으로 확장시켜 대장군 본인이 옛 조나라와 위나라는 물론 연과 제까지 평정하고 항우의 북방을 위협하는 전략을 또 다시 제시하고 실현한다. 모사 괴통의 '천하삼분지계' 제안에도 불구하고 한신은 끝까지 '천하양분지계'를 고수하다가 '토사구팽' 당하고 만다.
장막에서 큰 그림을 그리는 기획자 장량도 위대하지만 이를 군사적으로 현실화하는 대장군 한신이 누구보다 공이 큰 이유다. 전투시 후방보급과 국정운영을 한 소하와 책사 장량, 군신 한신이 한나라 건국 '3걸'이 된 이유다.

한편, 한신처럼 항우의 진영에서 유방의 진영으로 온 모사 진평은 유방군의 첩보부대 책임자였다. 초나라와 한나라가 형양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음모꾼 진평의 이간책이 빛을 발하는데, [사기]에는 항우의 사자에게 항우의 스승과도 같은 책사 범증의 사자인 줄 착각했다면서 진수성찬을 허접한 음식으로 새로 세팅했다고 하나 이는 일화에 불과하다. 홍문연에서부터 항씨 가문과 범증의 정적관계를 알고 있는 진평이 항백과 범증을 이간질시켜 결국 항우로 하여금 범증을 내치게 만든 것이다. 범증은 초나라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의제를 지키고자 했고, 항씨는 초나라 왕족의 성인 웅씨를 항씨로 바꾸고자 했다. 그리고 결국 의제는 살해되고 범증 또한 숙청되었을 때, 초나라는 멸망했다. 초나라는 '포스트-전국시대'의 마지막 보루였다. 오래된 '전국시대'를 계승하는 구체제의 대표였다. 항우는 진나라 수도 함양을 도륙하고 불태운 후 기존 '전국시대' 제도를 본인이 패왕이 되는 '춘추시대'의 제도와 시간적으로 결합하면서 이후 '연합제국'의 과도기를 열었다. 항우의 초나라를 멸망시킨 후 유방은 진나라가 놓은 '제국'에 기초하여 초나라가 추진했던 기존 '전국시대'의 분봉을 결합하면서 '연합제국'을 열었다고 리카이위안은 평가한다([초망], <5-8. 유방이 정도에서 즉위하다>). 진시황의 진제국과 달리 유방의 전한은 황제가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수도권과 유씨 지방제후국의 '연합'이었다는 것이다.
초나라 사람 유방군이 초나라의 옛 제도를 무너뜨리고 새시대를 연 것이 바로 [초망]이다. 그렇게 "초나라는 멸망한다".


"[사기]와 [한서]의 <공신표>... 항우를 죽인 다섯 명의 기병 장수는 모두 옛 진나라 출신이며, 또 모두 옛 진나라 군대의 장수였다... 항우를 죽인 한나라 기병대 장수 5명이 모두 진나라 본토의 수도 내사지 출신이며 진나라 기병 장교 출신이라는 점을 <공신표>로 알 수 있다... 즉, 이들은 진나라 멸망 후 관중 지역에서 유방집단으로 편입한 사람들이다."
- [초망], <6-1. 누가 항우를 죽였나>, 리카이위안, 2015.


형양에서 초-한의 군대가 오래도록 대치하고 있을 때, 후공이라는 신비로운 모사가 항우를 찾아가 홍구를 사이로 양국이 천하를 나누고 휴전하자는 협정을 성사시킨다. 팽성대전의 참패 후 한나라는 진나라의 기병부대를 흡수하여 전력이 보강되었다. 초나라의 보병 중심 전술은 항우 기병대의 파괴력에 무력했다. 
리카이위안에 의하면 유방의 주력군은 최초 기의시 풍패의 유협집단인 '패현자제병' 3천을 기반으로 진승의 장초에 편입되었을 때 받은 탕군의 군사 6천, 항량 밑에 들어가 늘어난 5천을 모은 약 1만 명이었다. 초 회왕의 휘하에서 3만으로 늘어난 이 '탕사초인집단'은 유방이 '회왕의 약조'에 따라 관중에 들어갈 때의 주요 병력이었고 이후 한나라 건국 후 지배집단을 형성했다고 한다. 여기에 살상과 약탈을 삼가면서 진나라 관중지역의 민심을 얻은 유방에게 옛 진나라 군대가 세를 불려주는데, '탕사초인집단'이 똑같은 초나라 군대인 항우군으로부터 열세에서 우세로 전환된 계기가 바로 이 진나라 군대의 결합이었다. 북방의 흉노 및 서방 기마민족과 초원에서 전투를 벌이던 진나라 군대는 당시 유라시아 제국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했다고 한다. 초나라는 물론 예전의 열국과 망국 진나라의 '민심'을 얻고 '군심'까지 가세한 유방의 한나라 군대는 수차례 전투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미 '초-한' 대전쟁에서 이기고 있었다. 오강정에서 '하늘의 탓'이라며 31세에 자결한 항우의 시체를 갈기갈기 나누어 가진 장수 5명은 모두 진나라 사람들이었는데, 신안에서 진나라 사람 20만 명을 생매장하고 함양을 불태움으로써 '민심'을 잃은 항우에 대한 진나라 사람들의 깊은 원한을 알 수 있다.


"유방은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았고,
항우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 [초망], <2-10. 팽성전투를 돌아보다>, 리카이위안, 2015.


팽성대전에서 60만 연합군으로 10만 항우군에 대패한 유방은 그럼에도 기죽지 않았다. 겨우 한신의 군영에 살아돌아온 후 말 안장에 기대어 "나는 관동 등지의 땅을 여러분에게 봉토로 주고자 하는데 누가 나와 함께 공을 세울 수 있겠는가?"([사기], <유후세가>)라고 물었다는 유방은 "보통사람의 경지를 초월한... 실로 심리적 강인함이 대단한 천재적 영수"([초망], <3-1. 유방의 강인함>)라고 리카이위안은 평한다. [삼국지]의 진수가 촉한의 유비를 "백절불굴", 즉 '백 번 꺾여도 굽히지 않는다'라고 평한 것처럼, 사마천을 잇는 역사가 리카이위안은 유방을 "심리적 강인함이 대단한 천재적 영수"로 정리한다. 관동으로 호기롭게 진출하다가 순식간에 60만을 잃고도 적장 항우가 차지하고 있는 그 관동 땅의 봉지분배를 논하는 멘탈이 어디 보통 사람의 그것이겠는가? '약법삼장' 등으로 얻은 '민심'의 지지와 대장군 한신은 물론 선봉장 영포, 후방유격부대 팽월 등의 '군심' 또한 유방 본인의 편이며, 이미 '민심'이 떠난 항우는 결코 유방 본인을 이길 수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겠다. 


"민심을 잃은 자는 천하를 잃는다!"
- [초망], <에필로그>, 리카이위안, 2015.


결국, "초나라는 멸망했다(초망)".
'포스트-전국시대'의 마지막 주자 초나라의 낡은 체제는 가고, '제국' 시대의 새로운 체제가 등장한다. 그러나 유방 집단이 개국한 한나라는 기존 진나라와 달랐다. 다스릴 능력도 없으면서 억압하기만 했던 진제국의 시행착오를 넘어 '포스트-전국시대'의 '초-한전쟁'을 겪으면서 구체제와 신체제를 결합한 '연합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그 기반은 말할 것도 없이 다수 민중의 '민심'이었다.

"초나라는 망했다(楚亡)"지만, 미흡하기는 해도 '민심'과 '혁명'의 역사는 [초망]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

1. [초망(楚亡) - 항우에서 한신까지](2015), 리카이위안,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2021.
2. [진붕(秦崩) - 진시황에서 유방까지](2015), 리카이위안, 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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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붕 秦崩 - 진시황에서 유방까지
리카이위안 지음, 이유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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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전국시대 : 1] "진나라가 붕괴한다"
- [진붕(秦崩)](2015), 리카이위안, 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2021.


"유방은 동시대의 영웅호걸들과 함께 '전국시대'를 회복하고 왕정을 부활하며, 지나간 것을 이어받아 미래를 열고 옛것을 회복하고 혁신했다. 그들은 함께 '포스트-전국시대'의 역사국면을 열었다. '포스트-전국시대'에는 전국칠웅이 나라를 회복하고 합종연횡하면서 분쟁과 병립이 재현되었다... '포스트-전국시대'라는 이 새로운 관념 역시 또 다른 역사의 발견일 것이다."
- [진붕], <서문을 대신하여>, 리카이위안, 2015.


지난 세기말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용어가 유행했다. 우리말로 '후기-모더니즘' 정도로 번역되었다. '후기 인상주의'와 같이 어느 사조의 '후기'를 뜻하는 '포스트(post)'와 '근대성'의 모더니즘(modernism)'이 조합된 신사조였다. '후기' 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이자 인상주의가 아니었고 '매너리즘' 등이 나타난 '후기' 르네상스도 르네상스만은 아니었다. '모더니즘'은 20세기 초 지난 세기와 구분되는 '근대성(modernity)'의 예술적 선언이었다. 지금에야 '근대성'이지만 그 당시는 '현대(modern)성'의 구현이었다. '모더니즘'은 말 그대로 고전적으로 정형화되지 않은 '새로운' 것의 포괄적인 표현이었다. 서구에서 1980년대부터 등장하여 1990년대에 우리 사회에 유입된 '포스트-모더니즘'은 정형화되던 '근대성'보다 더 새로운 '후기-근대(현대)주의'였다. 신세기를 앞두고 모든 규정과 틀을 거부하는 '현대성' 자체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자 '모더니즘'이 아니었는데, 생각해 보면 다른 체제로 이행하기 전 모든 '후기'의 양상이 그렇다. '양-질 전환' 법칙의 본질이다.


중국 역사학자이자 일본에서 문학을 전공한 리카이위안은 중국 각지를 현장답사하며 기원전 3세기 진-한 시대 역사를 문학적으로 서술한다. 2015년 [진붕(秦崩)]과 [초망(楚亡)] 세트로 진-한 교체기를 다루면서 [사기]의 사마천의 본을 받아 역사 서술에서 '문사철(文史哲)'을 소통시키고자 한다. 리카이위안에 의하면 "역사학의 본원은 '역사 서사'다"([진붕], <맺음말>). 2천년 전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역사적 사료인 문헌과 유물 등을 기본으로 역사가 침묵하는 사안들은 발로 찾는 현지 답사와 민간의 전설과 담론을 직접 취재하면서 '역사의 공백'을 메꿨다. 그렇게 풍부해진 역사 서사는 그 자체로 역사적 문헌자료가 되었고 이후 사가들의 고전이 되었다. 현대적 사마천이 되고자 하는 이 역사학자는 "발산 형식의 추리와 연쇄 형식의 연상" 및 "고대사 고증과 추리소설 간의 내재적 연계"를 통해 이미 장기판처럼 진부해진 '초한전쟁'을 복구하는데, 리카이위안에게 "역사학자는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혹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포와로와 같다"(이하 [진붕], <맺음말>). 또 다른 중국 역사학자로 중국통사를 집필 중인 이중텐 역시 역사 서술에서 '추리소설' 기법을 중시한다. 
'역사'의 서사에서 '철학'을 담기 위해서는 '문학'이 결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사철'이다.

리카이위안이 사마천의 길을 따라 새롭게 구성한 '초한지'의 키워드는 '포스트-전국시대'다. 진-한 교체기로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가 쟁패하던 시기는 이전 열국의 춘추전국 시대로부터 제국의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기였다. 진시황제에 의해 중국 역사 최초로 '제국'의 기반이 다져지는 신시대였음과 동시에 '전국시대'의 '포스트(post-)', 즉 '후기성' 또는 '말기성'의 향연이었다. 진시황 영정의 급사 후 진시황릉 부역자 진승과 오광이 대택향에서 반진의 깃발을 처음 올렸을 때, 15년 전 진나라에 의해 멸망된 '초, 제, 조, 위, 연, 한' 6국 사람들은 다시금 복국과 왕정복고를 위해 봉기하고 호응했다. 유방과 항우, 한신과 영포 등의 반란군 지도자들이 주로 초나라 출신이었지, 위표와 조헐 등은 망국의 귀족공자로서 열국의 독립을 통해 전국시대의 부활을 바랬다. 유방의 책사 장량은 '초한전쟁'을 거치면서 새로운 중앙집권식 제국 체제 구상을 정립하게 되지만 진제국이 무너지던 진말 시기에는 한(韓)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박랑사 진시황 테러를 시행하기도 하고 유방의 한(漢) 나라를 위해 일하면서도 고국인 한(韓)을 복국하기 위해 길을 떠나던 한(韓) 나라의 몰락 귀족이었다. 진승과 오광의 봉기로 '장초(楚)' 정권을 세운 진승 또한 리카이위안의 고증과 추리에 의하면 '진(陣)' 씨의 성으로 보아 춘추 열국 중 하나로 초나라에 의해 멸망한 진(陣) 나라의 왕족이었단다. 어떤 사가에 의하면 귀족이나 무관이 아니었기에 말을 잘 못타서 전장을 직접 지휘할 수 없었던 진승은 평민으로 자라서 말을 못 탔을 뿐 그 핏줄은 왕족이었다고 추리된다. '진시황에서 유방까지'를 부제로 한 [진붕] 다음으로 '항우에서 한신까지' 다룬 [초망]에서 저자는 한신의 성 '한(韓)' 씨를 증거로 그를 한(韓) 나라 왕족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마도 고대의 평민들은 성이 없었을 것인데 진말에 봉기한 군웅들은 각기 다 성씨가 있어 일반 평민보다는 몰락 귀족이나 왕족의 후예들이었을 수 있다. 죄수로서 얼굴에 먹칠을 한 구강왕 경포의 본명이 영포인데 그의 성 '영' 또한 오래전 춘추시대 '영' 땅의 후예였기에 그 땅의 '왕족'이었을 수 있다고 저자는 [초망]에서 추측하고 있다. 

[초망]은 [포스트-전국시대 : 2']를 통해 서평하고자 한다.


"통일제국 2천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중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무장할거로써 대업을 이룬 영웅은 망탕산에서 흥기한 유방이었다. 이후 그의 발자취를 잇는 인물들이 잇달았다. 무장할거를 통해 대성공를 거둔 경우는 두말할 것 없이 징강산(정강산)의 마오쩌뚱이다... 망탕산이 징강산과 감응하여 통했다. 고금을 두루 훑어보면 역사의 연속과 반복은 바로 망탕산-징강산과 연결되어 감응한다."
- [진붕], <2-9. 망탕산이 징강산과 감응하여 통하다>, 리카이위안, 2015.


[진붕]의 주인공은 역시 유방이다. 
다른 반란군 세력들은 거의 망국의 귀족이나 왕족으로 추정된다는데, 유방(劉邦)은 그 '방(邦)'이라는 이름조차 제위에 오른 후 '나라'의 뜻으로 고상하게 지은 것이고 원래 초한전쟁터에서 한창 굴러먹을 때 이름은 '계(季)'였다. 유씨 집안의 '막내'라는 뜻으로 정식 이름조차 기록에 없던 평민이었다는 것이다. 사마천 [사기]의 <고조본기>에는 '계(季)'가 그의 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고대에 '유(劉)'라는 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유방의 부친 유태공은 패현 풍읍 일대의 자산가 또는 유지 정도 되었을 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 제업을 이룬 '평민' 지도자는 세 명인데, 그 시초가 한고조 유방이고 다음이 명태조 주원장이며 마지막이 중화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모택동(마오쩌뚱)이다. 마오쩌뚱 또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방과 같은 지역 자산가의 집안 출신이라 하니 오로지 주원장만이 하층 계급 출신 황제다. 유방은 한량이나 건달 같은 '유협' 출신이었으나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킨 후 지역 보안관 같은 '정장'을 맡으면서 말단 관리의 세계로 진입하여 소하와 조참 같은 유능한 관료 인재를 만났고 이들은 번쾌, 하우영, 노관 등 유협 시절 동지들과 함께 한나라 제국의 지배집단을 형성한다. 주원장은 굶어죽지 않으려고 탁발승을 전전하던 진정한 흙수저였고 마오쩌뚱은 주은래처럼 유학은 못 갔지만 최소한의 배움은 받은 '식자층'에는 속했다. 이들로 대표되는 '혁명'의 전통은 통치계급과  피통치계급의 '수직이동'으로 나타났다. 리카이위안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이래, 중국은 여러 나라가 전쟁을 벌이던 열국시대를 매듭짓고 왕조가 교체되는 제국시대로 진입했다"([진붕], <2-9>)면서 "열국시대에는 정권교체의 동력이 대부분 국외에서 비롯되었고, 권력은 통치계급 사이에서 '평행'으로 이동"한 반면, "제국시대에 정권교체의 동력은 주로 민간 사회의 무장폭력에서 나왔고, 권력은 통치계급과 피통치계급 간의 '수직'으로 이동했다"면서 "이것이 2천년 중화제국 정권교체의 기본특징을 형성했다"고 규정한다. 민중반란으로 혁명을 통해 권력을 교체한 역사는 유방의 '망탕산'과 마오쩌뚱의 '징강산'의 무장투쟁의 정신으로 "감응하여 통한다"(이하 [진붕], <2-9>).


"진승은 장초 정권을 세움으로써 포악한 진나라를 멸망시킬 대업을 열었다. 항우는 진나라 주력군을 소멸시키고 진나라 멸망의 운명을 결정했으며, 천하 분할의 기초를 마련했다. 유방은 관중을 공격해 진나라 정부가 투항하게 함으로써 최종의 제업을 성취했다... 사마천은 ([사기]) <진초지제월표>에 진나라 말의 난에서부터 한왕조 건립까지의 역사를 '진-초(秦-楚) 시기'로 간주했는데, 여기서 강조한 것은 진나라 말 역사에서 초나라와 초나라 사람의 독특한 지위와 역할이다."
- [진붕], <4-9. "진나라를 멸망시킬 것은 반드시 초나라"라는 말의 참된 의미>, 리카이위안, 2015.


'포스트-전국시대'는 결국 '진-초 시기'였다. 반진의 선봉 초나라는 열국의 패국으로서 연합군을 형성하여 진나라에 복수하고 멸망시킨다는 것이다. 항우의 숙부 항량이 진나라 명장 장함에게 패한 후 항량이 세운 초 회왕이 친정에 나서면서 제일 먼저 관중을 평정하고 진나라 수도 함양을 정복한 자를 '진(秦) 왕'으로 정한다는 기원전 208년 '회왕의 약조'를 선포했다. 초나라의 전략은 각지의 '전국 7웅' 열국을 복국하면서 초나라가 '패업'을 달성한다는 것인 바, 진나라를 멸한 유방만 '진왕'이 되면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항우의 생각은 달랐다. '포스트-전국시대'의 대전략은 동의하되 초 회왕의 자리는 본인의 것이 되어야 했으며 '전국 7웅'을 갈가리 찢어 더 나누고 본인은 서초의 '패왕'이 되는 것이었다. 항우는 계속 자신을 견제하던 초 회왕의 심복인 대장군 송의를 죽이고 다소 독립적이던 제나라와의 동맹을 끊었으며 유방이 관중으로 진군하던 사이 40만 반진 연합군을 이끌고 진나라의 주력군인 장함의 군대를 거록에서 물리쳤다. 그러나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함의 항복을 받고 60만 대군이 된 항우의 연합군은 진나라 사람들의 반항으로 진군이 지체되었으며 결국 신안에서 20만 진나라 투항군들을 살육하고 생매장함으로써 진나라 사람들의 철천지 원수가 되고 만다. 결국 '신안의 20만 생매장 사건'으로 항우는 진나라 수도 함양을 정복하고도 관서 지역에서 창업하지 못한 채 강동으로 '금의환향'하여 팽성을 수도로 '서초패왕'의 길을 택한다. 초나라 패왕 항우는 결코 진나라까지 정복할 수 없었다.

관서지역의 민심은 함양에 먼저 도착하여 '약법삼장'으로  진나라 사람들의 망국의 한을 어루만진 '한왕' 유방의 차지가 된다. 이제 '포스트-전국시대'의 정국은 다수 민중의 민심을 얻은 관서의 유방 한(漢) 나라와 각국 영지의 지도자들을 지배하려는 관동의 항우 초(楚) 나라의 건곤일척 천하쟁패의 양상으로 진화한다. 열국의 복고주의자들은 유방의 '연횡책'과 항우의 '합종책'을 두고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며 다시금 전국시대처럼 '합종연횡'을 재현했으나 관건은 더 이상 전국시대처럼 지배계급의 이익 보다는 '초한전쟁'에서 어느 편이 더 민심을 얻는가의 문제였다. 

유방의 책사 장량이 기획한 '전국시대'에서 '초-한 쟁패'로의 정국 이행은 '전국시대'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포스트-전국시대'의 정세에서 '팽성 대전'과 '형양 전투'를 거치며 수세에 몰린 유방으로 하여금 다수 민중의 민심과 군웅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결국 마지막 '해하의 전투'의 승리를 쟁취하게 만들었다. "민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결론은 '항우에서 한신으로' 이어지는 [초망]에서 다르는 주제이므로 다음에 살펴보기로 한다.
[진붕]의 결론은 '포스트-전국시대' 정세에서 '진나라 붕괴(진붕/秦崩)'의 원인이다.


"진나라 말의 역사... 후안무치한 영웅시대였다... 모두 음모와 모략 뿐이었다... 당시 역사 무대에서 각축을 벌이던 정치인물들은 단지 권력과 이익만을 따졌고 윤리도덕에 구애되지 않았다. 그들은 인생의 근본이 이익에 있다고 보았다. 이익이 있는 곳이 바로 행동이 있는 곳이었다. 이익은 도덕과 무관했고, 이익이 도덕과 충돌할 때는 도덕을 버렸다. 윤리도덕의 규범이 세워진 건 한왕조가 들어서고도 100년이 지나서다... 덮어놓고 진취와 발전만 추구한 게 사회의 불안을 초래... 오랫동안 공리주의를 받들어 실행한 반면 윤리도덕의 규범 및 인문교육 체계의 건설을 홀시... 진제국 멸망의 원인..."
- [진붕], <8-10. 진나라 멸망의 역사 교훈>, 리카이위안, 2015.


사실 진시황과 유방은 '동시대인'이었다. 진시황 영정은 유방보다 고작 세 살 많았다. 13세에 온갖 고난 끝에 진왕이 된 영정은 마흔 전에 중국을 통일하고 시황제가 되었으나 정복의 근성을 버리지 못한 채 민중들을 끊임없이 동원하고 괴롭히다가 50세에 죽었다. 유방은 50세가 거의 다 된 지금 나와 동갑인 48세에 봉기하여 50대 중반에 천하를 통일했다. 이들 세대는 모두 '천하'를 위한다는 '공리주의'를 앞세워 이익을 쫓던 '영웅 시대' 인물들이었다. 진나라 통일의 마지막 주역 이사는 유방보다 스무살 이상 많았고 전국시대의 틀을 깬 항우는 유방보다 스무살 이상 적었다. 진 2세 호해를 앞세워 부소와 몽염의 세력을 숙청하고 승상 이사까지 제거한 조고는 고증에 의하면 거세된 환관이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진제국의 최고 관료였는데, 유방과 동갑인 조고는 유방이 관중에 진입한 후 2세 황제를 버리고 유방과 손잡으려고 했던 진말 '이익 최상주의자'의 전형이었다. 물론 부소라는 '도덕'을 버리고 호해라는 '이익'에 아첨하며 목숨을 부지하려던 이사는 그의 본보기였다. '법가'를 숭상했다는 진나라는 공손앙부터 여불위는 물론 이사와 조고까지 본인 스스로가 놓은 수에 본인이 걸려 넘어졌고, 진나라 자체의 운명도 그러했다. 열국을 짓밟고 민중을 잔인하게 억압하며 수탈했던 진나라는 이들 다수 피억압자들의 손에 붕괴되고 말았다. 그 선봉에 진나라를 향한 복수심이 가장 강했고 가장 광범위했던 초나라 사람들이 앞장섰을 뿐이다. "초나라에 '3호'가 남는다 할지라도 진나라를 멸망시킬 것은 반드시 초나라다"라는 참언에서 이르는 '3호', 즉 세 집은 바로 진승, 항우, 유방이었다([진붕], <4-9>).


'진-초-한(秦-楚-漢)' 이행기는 '전국시대'에서 '제국'으로 이행하는 첫 과도기였다. 리카이위안이 규정한 '포스트-전국시대'는 '전국시대'의 '후기'로서 '제국'을 본격적으로 열기 위한 준비기였다. 
진시황이 놓은 제국의 초석은 서초패왕 항우의 '논공행상' 전략을 통해 기존의 전국시대와 새로운 제국의 제도간 '시간적(통시적)' 접속을 시도했고, 한고조 유방은 반진의 선봉인 초나라에 갇힌 제도를 진나라의 그것과 '공간적(공시적)' 접속을 완수하면서 2천년 중국역사의 원형을 만들었다.


이렇게 '포스트-전국시대'의 이행기에서 "진나라가 붕괴한다(진붕)".
그리고 8년의 '초한전쟁'을 거쳐 "초나라가 멸망([초망])"하면서 '포스트-전국시대'는 막을 내린다.

[진붕] 이후 [초망]이 임박한다.

***

1. [진붕(秦崩) - 진시황에서 유방까지](2015), 리카이위안, 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2021.
2. [초망(楚亡) - 항우에서 한신까지](2015), 리카이위안,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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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3
게르하르트 L. 와인버그 지음, 박수민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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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의 진행사는 대부분 방대하고 분량도 많다. 독일 출신 유대인으로 미국의 군사역사학자인 게르하르트 와인버그의 이 책은 간략한 서술로 2차 세계대전의 전체를 조망하고 있어 추천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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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 기후, 질병, 그리고 제국의 종말
카일 하퍼 지음, 부희령 옮김 / 더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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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을 가른 '자연의 복수'
- [로마의 운명](2017), 카일 하퍼, 부희령 옮김, <더봄>, 2021.


1. 기후 변화와 로마의 운명


"고대인들은 '포르투나 여신(운명/복수의 여신)'의 섬뜩한 지배력을 존경했다. 그들 나름대로,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구조와 우연, 자연의 법칙과 순전한 운이 혼합된 변덕스러운 것임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인류 서사 중에서도 '운명'적인 시기에 살았다... 역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문명 중 하나를 만들고 해체하는 일에 '환경'이 일정 부분을 담당했음을 여러 방식으로 알 수 있다. 로마는 거의 필연적으로 거울이자 척도이기도 하다... '자연의 복수'... 이 문명의 '운명'을 좌우할 '자연환경'의 막강한 힘을 생각하면, 우리는 로마인들에게 공감하며 다가갈 수밖에 없다."
- [로마의 운명], <에필로그>, 카일 하퍼, 2017.


흔히 지금 우리들 사는 시대를 '인류세'라 부른다.
46억살인 우리 지구는 생명체가 등장하고 약 20여 만년 정도는 '플라이스토세(홍적세)'인 빙하기에 있었고, 최근 약 1만년 정도는 '홀로세(충적세)'라는 신생대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인류의 원시 조상과 구석기인들은 빙하기를 겪었고, 신석기 시대 농경을 하면서는 다소 온난해진 기후에서 정착 문명을 영위할 수 있었다. 사피엔스의 입장에서 보면, 위대한 발견과 문명의 발전이겠지만, 지구의 입장에서는 온난다습한 기후가 뒷받침해주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유발 하라리가 보기에는 '밀'이라는 종이 정착과 스스로의 번식을 위해 사피엔스를 이용했을 수도 있단다. 농경과 정착을 하면서 예전의 수렵, 채취 시절에 비해 더욱 빈번해진 각종 질병과 기근으로 고생한 사피엔스는 오히려 '밀'을 포함한 다른 종들에게 사기당한 것이란다. '인류세'는 지구 기후환경의 폭력적 변화를 가속시키는 인류가 그만큼 환경에 영향를 크게 미치기 때문에 더욱 자연을 보호하고 경계하자는 뜻에서 이르는 일종의 은유이자 경고일 뿐, 학문적으로 아직까지 지금의 지구는 '홀로세'를 지나고 있다. 그런데 '홀로세'라고 하여 항상 기후환경이 같을 수는 없었다. 지구는 약간 기울어져 있기에 태양을 공전하는 동안 각도의 변화로 태양열을 일정하게 받을 수도 없고 지각변동은 끊임없으며 화산폭발로 대기가 변화되면 오랜 기간 기온이 떨어지기도 했다. 과학은 자연을 정밀하게 관찰하여 그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법칙을 찾고자 했으나 역사 속에서 이런 지구의 변화는 '우연' 그 자체다.
고대인들이 '신'과 같은 절대자를 떠올렸던 것은 과학이 미처 발달하기 전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지구환경의 '우연성'을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운명' 또는 '복수'의 여신인 '포르투나'는 어떤 때는 눈을 가린 채 공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지구라는 자연 앞에 선 인류도 그렇다.

기원전 8세기에 시작된 도시국가 로마는 기원전 3세기부터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이후인 기원후 1세기를 지나 '5현제'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통치하던 2세기 경에 걸쳐 '기후최적기'를 맞게 된다. 지중해를 둘러싼 이 고대 로마 문명은 고온다습하고 온난한 '홀로세'의 변덕에 힘입어 발전하고 팽창하면서 거대 제국이 되었으나, 크고 작은 기후 변화를 동반한 과도기를 거쳐 기원후 5세기 이후인 '고대 후기 소빙하기'가 닥치면서 제국의 해체를 향해 노정한다. 이러한 기후 변화는 로마의 도시국가들이 삼림벌채 등의 대개발로 인해 지구를 건조화시킨 영향도 다소 있었겠지만, 고대에는 지금처럼 화석연료를 태워대며 대놓고 환경을 오염시킬 만한 단계는 아니었다. 고대인들은 고작 나무를 베고 만든 도시에 모여서 배설물이나 오물을 집단으로 버리는 수준이었다. 

18세기에 [로마제국 쇠망사]를 지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가 쇠망한 것은 "무절제한 팽창이 가져온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썼다. "번영은 쇠망의 원리를 성숙시켰고, 정복의 확대에 의해서 파괴의 원인이 증가했으며, 그리고 시간이 지나 또는 우연히 인위적 기둥들이 허물어지게 되자 그 방대한 구조물은 자체의 무게에 짓눌려 무너졌다([로마제국 쇠망사])"는 것이다. 인간의 욕심으로 인한 팽창이 시작하자마자 쇠망의 기운이 함께 싹튼다는 고찰이며, 이런 원리는 세상만물에 투영된다. 로마의 멸망에 관한 후대의 논의는 많고도 복잡하겠지만, 기번의 평가는 인류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수긍할 만 하다. 그러나 관점을 좀더 넓혀 우리 지구별로 확장하면 이야기는 '기후'와 '질병'을 피해갈 수 없다. '자연의 복수' 또한 불가피하다.


"로마제국의 몰락은 곧 인간의 야심에 대한 '자연의 승리'였다. '로마의 운명(The Fate of Rome)'은 황제들과 야만인들, 원로들과 장군들, 병사들과 노예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러나 또한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화산'과 '태양주기'의 영향도 컸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생태환경의 변화'라는 거대한 드라마에 로마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배역을 맡고 등장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과학적 도구(자연기록보관소)'를 갖게 되었다."
- [로마의 운명], <프롤로그>, 카일 하퍼, 2017.


미국 오클라호마대학 역사학 교수인 카일 하퍼(Kyle Harper)는 [로마의 운명(The Fate of Rome)](2017)에서 로마의 몰락은 "인간의 야심에 대한 '자연의 승리'"로 규정한다. 로마와 중세 초기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 하퍼는 에드워드 기번부터 시오노 나나미까지 로마의 역사에 관한 대작들에 공감하며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도구는 '자연기록보관소'에서 최근에서야 얻을 수 있는 '자연'에 관한 정보와 데이터들이다. 

방대한 제국으로 팽창한 로마는 고대 서방의 중심으로서 사통팔달의 도로를 통해 세상만물과 만인의 교류가 가능하도록 만든 대명사가 되었다. 전쟁이든 교역이든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 제국의 팽창과 함께 로마 특유의 '공화정'이 자리잡는 한편, 이를 뒷받침했던 '기후최적기'는 지구 고유의 변덕스러운 운동을 토대로 도시문명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환경, 즉 지중해와 근동지역 일대의 건조화를 서서히 진행시키고 있었다. 여기에 아직 풍토화되지 않았던 미생물들의 확장으로 세 차례의 '페스트(전염병 팬데믹)'를 겪는다. 로마 '기후최적기'가 끝나가는 기원후 2세기의 '안토니누스 페스트'와 3세기의 '키프리아누스 페스트', 그리고 마지막 6세기부터 8세기를 거쳐 지속적으로 창궐한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가 그것이다.


2. 팬데믹과 로마의 운명


"... 물건(교역)과 신(종교)이 가는 곳에는 '병원균'들도 간다. 인도양 체제의 진정한 생물학적 의의는 '유라시아의 문명화된 질병집단들'을 융합시킨 것이 아니라, 장애물 없이 신종 전염병을 통과시킬 수 있는 통로를 형성했다는 데 있었다... 질병사의 드라마는 병원체의 진화와 인간의 연결성이 끊임없이 충돌하는데 있다. 로마제국에서는 그 두 가지 힘이 특별히 중대한 방식으로 함께 어우러졌다."
- [로마의 운명], <3. 아폴로의 복수>, 카일 하퍼, 2017.


'기후 변화' 이후에는 항상 '전염병(질병)'이 왔다. 이는 로마만의 일이 아니었지만, '팬데믹'의 관점에서 보면 아마도 로마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제국의 도로망으로 제국의 군대와 생산물을 퍼뜨리기 시작한 최초의 거대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세 차례 '페스트'는 팬데믹으로 불리는 대재앙이었고 한때 7,500만 명에 이르던 로마 인구의 절반을 죽였다. 사망률은 60~40%에 이르렀다고 하퍼는 고대의 기록과 현대의 데이터로 추정한다. 

기원후 165년, '5현제' 중 네번째 '안토니누스' 황제의 치세와 번영에도 불구하고 '기후최적기'가 지나자마자 '5현제'의 마지막 다섯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집권 초기 '안토니누스 페스트'가 발생했다. 단정지을 수는 없으나 하퍼는 이를 '천연두'로 추정한다. 하퍼가 로마를 "유럽에 결핵이 퍼져나가는 분수령"이자 "달팽이처럼 퍼져나가던 나병의 전파를 가속화([로마의 운명], <3. 아폴로의 복수>)"한 주범으로 지목했듯 '결핵'과 '나병', '말라리아'와 '탄저병' 등은 이미 이들 병원균들이 유입된 후 도시에 토착화된 로마가 전유럽에 퍼뜨린 질병이었는데, 역시 도시로 밀집정착하는 생활로 인해 발생했을 이 1차 '천연두' 팬데믹은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전방위적 파괴력으로 로마 인구를 10% 정도 감소시켰다. '안토니누스 페스트'는 인류에 의해 정복되지 않은 채 공공보건이 정착되기 전까지 다른 질병들과 함께 풍토병이 된다.

제국의 쇠망을 지켜보던 알렉산드리아 주교 키프리아누스는 '안토니아누스 페스트' 이후 로마제국의 모습에서 '세계의 노년기'를 본다. 냉랭해지고 건조해진 기후와 팬데믹으로 지쳐가는 제국의 실상을 본 것일 수도, 그리스 문명의 뒤를 이어 전염병을 '아폴로(태양의 신)'에 기대 극복하려던 다신교적 문화를 본 기독교인의 절망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주교의 기록으로 기원후 249년부터 10년 이상 지속된 2차 팬데믹은 '키프리아누스 페스트'로 남았다. 로마 중기 '기후최적기'에서 고대 후기 소빙하기로 변화하던 과도기에 등장한 이 2차 '페스트'를 하퍼는 역시 과학적 데이터를 토대로 '인플루엔자'로 추측한다. 아마도 파르티아(페르시아) 원정으로 인한 동방의 모기나 벼룩, 설치류를 접한 군대의 복귀로 유입된 '바이러스성 출혈열'일 수도 있을 이 '키프리아누스 페스트'의 결과는 '세계의 노년기'의 확인이었다. 1차 팬데믹 이후 로마는 제국의 활발한 연결망과 황제 및 원로원 등 '공화정'의 정통성으로 다시 이전처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 전체를 강타한 2차 팬데믹을 겪은 '노년기' 로마의 회복탄력성은 떨어졌고 군대 신병 모집은 어려워졌기에 북방 '야만인'과의 타협이 불가피했다. 북방의 전선이 뚫리면서 변경의 용맹한 장군들은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했는데, '키프리아누스 페스트'는 정권의 '정통성'이 약한 '군인황제'의 시대를 열었다. 

어느덧 기독교는 슬그머니 지배이념이 되었는데 아마도 '세계의 노년기'를 본 로마인들이 더 나아가 '세계의 종말'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회복탄력성'과 '정통성'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과 시민들의 자부심은 그냥 무너지지 않았다. 여전히 군대를 앞세운 호전적인 정복활동과 제국의 팽창은 멈추지 않았고 서로마의 도시 로마는 제국의 상징적 중심,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은 실질적 중심으로서 건재해 보였다. 그러던 중 지구는 기원후 536년 '여름이 없는 해'가 올 정도로 냉랭하고 추운 기후를 점차로 드러냈고 이로 인해 아래로 내려오는 이민족들과 '곰쥐' 같은 설치류, 벼룩으로 인해 3차 팬데믹을 겪게 된다. 로마의 '기후최적기' 이후 슬슬 추워진 제국의 동북방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밀려온 훈족에 의해 밀려난 고트족이 로마의 변경을 밀고 들어왔고 알라리크 왕이 통일하여 결집시킨 강력해진 고트족 군대에 의해 5세기에 서로마는 멸망했다. 기독교인들이 전염병과 같은 '신의 채찍'이라 부른 훈족의 아틸라 왕이 헝가리에서 진군을 멈추고 돌아간 이유 또한 로마제국의 중심부가 '말라리아'라는 "세균갑옷으로 무장([로마의 운명], <5. 운명의 수레바퀴>)"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를 구하고도 찬양받지 못한 구원자" 말라리아를 옮기는 "아노펠리스 모기는 춥고 건조한 곳까지는 따라갈 수 없었다(같은책, 같은곳)". '말라리아'는 로마인에게 이미 풍토병이었는데, 6세기에 새롭게 창궐하여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로 불리게되는 전염병은 말 그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페스트(흑사병)'의 시작이었다. 주인공은 서혜부 림프종을 일컫는 '부보닉 페스트'와 '폐 페스트'의 원인이 되는 '예르시니아 페스티스' 박테리아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걸렸다가 살아남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이 진짜 '페스트'는 기원후 541년에 이집트 해안에 상륙한 이후 약 2세기 동안 15년 마다 또는 나중에는 65년에 한 번씩 창궐하면서 로마 인구를 절반으로 줄였다. 이 '페스트'는 14세기 이후 500년 동안 유럽인구를 반토막 냈다는 바로 그 '흑사병'이었다. 로마 공화정은 역시 재기를 꿈꾸었지만, 서로마는 이미 5세기에 이민족에 의해 멸망되었고 이를 되찾으려는 동로마(비잔틴) 제국은 어느새 예전의 제국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인구는 정체되었고 "고대 후기의 소빙하기로 알려진 물리적 기후 악화와 팬데믹으로 인해 고대 질서의 마지막 기반이 깨끗이 사라졌다([로마의 운명], <6. 분노의 포도착즙기>)".


3. '자연의 복수'와 사피엔스의 운명


"'종말이라는 열쇠'...
... 안토니누스 페스트는 고대적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의 방향을 바꾸었고, 아폴로 숭배가 보편적이 되도록 했다. 키프리아누스 페스트는 고대 시민의 다신교라는 기반을 무너뜨렸으며, 기독교가 슬그머니 세상에 나오도록 허용했다. 6세기와 7세기에는 페스트와 기후 변동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고대 후기의 마지막 자손인 이슬람교 안에서 '종말론(메시아주의)'의 시대를 열었다. 환경의 격변, 정치적 해체, 종교적 소요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로마가 몰락해가는 마지막 순서를 결정했다...
그것이 '세상의 종말'이었다."
- [로마의 운명], <7. 심판의 날>, 카일 하퍼, 2017.


카일 하퍼는 우리가 지금껏 역사를 볼 때 "자연을 정적인 배경으로 여겨왔다([로마의 운명], <에필로그>)."고 하면서 그 사례로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1798)을 들며 책의 '에필로그'를 연다. 역사는 인류의 정치경제 및 사회체제의 프리즘에 국한해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치경제체제를 인구통계학적 고찰로까지 상승시킨 업적에도 불구하고, 18~19세기의 맬서스는 이후 인류가 해법으로 내놓은 '산업혁명'을 예측할 수 없었고 한편으로 현대와 같은 '기후변동' 또한 고려할 수 없었다. 
급격한 기후 변화와 이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오던 이민족들 및 듣도보도 못한 전염병으로 몰락한 고대 로마인들 또한 자연을 항상 그대로인 '정적인 배경'으로 전제했을 수도 있다. 로마인들은 로마가 망한다고 보지 않았다. 다만 변화한다고 보았다. 그들에게 로마의 멸망은 '세상의 종말'이었다. 이는 아마도 근현대 다수 경제학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의 몰락은 '세계의 종말'이라며 불안을 조성한다. '과학'이 아닌 '종교'가 된 주류경제학이다. 불평등 체제의 종식에서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평등체제로의 이행이라는 과학적인 '희망'을 보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이 더욱 필요한 지점이다. 여기에 현재는 급격하게 진행 중인 '기후 위기'에 대한 대안이 항상 결합되어야 한다. 
카일 하퍼는 [로마의 운명]을 논하면서 최근의 방대하고 정교한 정보와 데이터를 토대로 하여 '역사'를 또 하나의 '과학'으로 만들고 있다. 고대의 로마인들이 '기후 변화'와 '전염병'을 보며 '세상의 종말'을 보았다면, 현대의 우리는 임박한 '기후 위기'와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이 끊이지 않을 '팬데믹'을 앞두고 과학적 예측과 그럼에도 불구한 세계의 '종말'이 아닌  '희망'을 보아야 하겠다. 
그것이 기존의 로마 쇠망의 전통적인 원인에 덧붙여 역사학자 카일 하퍼가 다시금 '로마'의 '운명'을 고찰하는 이유 아니겠는가.

자연은 로마제국에 '복수'를 했고, 로마시민들의 욕망에 맞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자연에 맞서 '승리'하기 위해 다시금 정복하고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기후'와 '질병'이라는 이 대자연에 얹혀사는 사피엔스의 '운명'이다.

***

1. [로마의 운명(The Fate of Rome)](2017), Kyle Harper, 부희령 옮김, <더봄>, 2021.
2. [로마제국 쇠망사](1776~1788), 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편집, 황건 옮김, <까치>, 2010.
3. [공화국의 몰락](2003), 톰 홀랜드, 김병화 옮김, <웅진닷컴>, 2004.
4. [청소년을 위한 로마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원저, 배은숙 지음, <두리미디어>,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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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 - 민중의 전쟁 VS 제국의 전쟁
도니 글룩스타인 지음, 김덕련 옮김 / 오월의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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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진행 중인 '두 개의 전쟁' : '평행 전쟁'
-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2012), 도니 글룩스타인, 김덕련 옮김, <오월의봄>, 2021.


"연합국 정부들의 동기와 야만,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 사람들 사이의 간극은 메울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따라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세계를 산산조각 낸 사건들은 추축국과 맞서 싸운 단일한 전투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뚜렷이 구별되는 '두 개의 전쟁'에 해당한다... 내각과 소작농들, 육군사령부와 막사, 중역들과 노동자들은 각각 다른 전쟁을 벌였다 - 한쪽은 '제국주의 전쟁'을, 다른 한쪽은 '민중의 전쟁'을... 2차 세계대전은... 누가 지배해야 하는가를 놓고 연합국 정부들과 추축국 정부들 간에 벌어진 다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파시즘 대 반파시즘'이라는 보통 사람들의 믿음은 추축국/연합국으로 나뉜 양측 지배자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 <들어가는 말>, 도니 글룩스타인, 2012.


2차 세계대전은 전쟁영화 소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현대사 가장 최근의 전세계적 '총력전'이었다. 전쟁영화의 2/3 정도가 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데 2차 세계대전이 절반, 1차 세계대전이 12%,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이 각 2%씩 된다고 한다(도니 글룩스타인, 같은책).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국민(민족)국가'는 예전 중세봉건적 체제와 달리 국가 중앙군의 강화를 이루어냈다. 초기 자본주의 시초축적과 함께 봉건제를 탈피하려던 '절대왕정' 시기의 중앙집중적 국가체계를 계승한 근대 부르주아 국가체계는 자본주의 과잉생산 발달과 함께 전세계로 시장을 넓히면서 '제국주의'로 진화한다. 국가의 중앙군대로서 '국민군'은 전 민중의 총동원을 의미한다. 
자본은 필연적으로 대자본으로 독점화되고 이와 결탁한 국가권력은 해외 팽창을 통해 전세계 식민지를 분할하고 또 다시 재분할한다(레닌, [제국주의론]). 

1차 세계대전은 현대 '제국'으로 탈바꿈하려는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합스부르크)  제국의 구지배에 대항한 프랑스-영국-러시아 제국의 기득권 투쟁이었다. 이 전형적 '제국주의 전쟁'은 각국에서 점차 발전하던 노동계급의 내전으로 인해 종전되는데, '총력전'으로 피폐해진 각국의 다수 노동자-농민들이 대중파업과 같은 계급투쟁을 통해 국가독점자본주의 권력으로 하여금 전쟁을 더 수행할 수 없도록 강제했다. '제국주의 전쟁'과 평행한 '민중의 전쟁'은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과 1918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1920년대 오스트리아 '붉은 빈' 건설 등으로 나타났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막대한 배상청구로 파산한 독일과 떡고물을 별로 챙기지 못한 이탈리아 및 일본의 제국주의 국가권력은 '파시즘(이탈리아)', '나치즘(독일)', '천왕군국주의(일본)' 등의 국가주의 사상으로 나타나 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 전선을 형성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은 이 전쟁을 '정의'가 승리한 '반파시즘' 전쟁으로 선전했고 전쟁 영화의 대부분 소재가 된 이유도 '정의의 전쟁'이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이론가 토니 클리프의 아들이자 트로츠키주의자인 도니 글룩스타인은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2012)에서 2차 세계대전을 '평행 전쟁(pararell war)'으로 규정한다. 일반의 믿음과는 달리 2차 세계대전은 '정의의 반파시즘 전쟁'이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과 '민중의 전쟁'이 여전히 병행했던 '평행 전쟁'이었는데, 1차 세계대전은 다수 노동계급의 계급투쟁 내전으로 종식되었으나 더욱 진화된 지배계급의 2차 '제국주의 전쟁'은 새로운 형태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정치체제인 '파시즘(나치즘)'의 등장으로 인해 이에 대항한 지배계급의 전쟁과 피지배계급의 전쟁이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2차 세계대전을 조망하는데, 유고슬라비아에서 친왕정 기득권인 미하일로비치 게릴라부대는 침략자인 독일 나치즘과의 전쟁보다 티토가 이끄는 국내 공산주의 게릴라 토벌에 더 힘썼고 연합국의 지원만 기다리는 '대기주의'로 일관하며 기득권 체제 유지를 위해 나치와의 타협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그리스 지배계급도 마찬가지였다. 히틀러가 배신하기 전까지 스탈린 또한 '반파시즘' 전쟁에 나서느니 불가침협정을 맺었고 영국이나 미국 등 연합국 또한 '선전포고'는 말 뿐, 추축국이 자기들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한 후에야 마지못해 방어전에 나섰다. 영국은 히틀러를 믿어서 뮌헨 협정에 서명했다기 보다 공산주의 세계혁명을 막기 위해 차라리 이 전쟁광과 손잡으려 했다. '제국주의 전쟁'의 주체인 연합국 지배계급의 목적은 '반파시즘'이 아니라 '파시즘'과의 타협이었다. 이들 제국주의 연합국의 본질은 2차 세계대전 직전 파시스트 프랑코의 승리로 끝난 스페인 내전에서 이미 드러났다. 무솔리니든 히틀러든 프랑스나 영국 정부 모두 스페인 노동계급을 탄압하는 프랑코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는데 이들 제국주의자들의 공동전선은 다수 노동계급의 혁명을 막는 것이었다. 공산주의를 공동의 적으로 설정하였으나 현실 '공산주의' 소련 또한 스페인 내전에서 노동계급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자유주의든 '파시즘'이든 스탈린주의든 그들 모든 지배계급이 두려워한 것은 바로 다수 노동계급의 체제전복, 즉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도니 글룩스타인은 2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으로서 스페인 내전으로부터 시작하여 유고, 그리스 등 중간 교전지대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 독일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추축국은 물론, 인도와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의 아시아에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전 등의 전쟁 상황을 서술하면서 이 '두 개의 평행 전쟁'의 양상을 추적한다.
'민중의 전쟁'은 현 체제 유지를 위한 '제국주의 전쟁'을 너머 새로운 세상을 지향했고, 각국 레지스탕스 게릴라군대는 양성 평등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치마를 입고 총을 든 여성전사들의 사진이 인상깊다. 소설 [태백산맥]의 '외서댁'은 '민중의 전쟁'의 전세계적 흐름이었다.

한편, 이 모든 2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한 연합국들의 목표는 식민지들의 '해방'이 아니라 본인들의 하수인 정권 수립이었다. 지배계급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이를 위해서 좀전의 적이었던 '파시스트'와의 협력도 불사했다. 우리 한반도는 이 책에서 별 언급이 없는데, 아마도 일제의 직접지배를 이미 받고 있었으므로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게릴라전과 같은 '민중의 전쟁' 양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직접지배지인 우리의 항일 게릴라전쟁은 주로 해외에서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종전 후 한반도에서 나타난 계급지배의 양상은 비슷했다. 국내 계급투쟁이나 해외 항일 게릴라전쟁 등의 '민중의 전쟁'을 이어갔던 세력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축출되었고 남한에서는 미군정과 이승만 단독정권의 지배를 위해 친일 부역자들이 다시 부활했다. 유고의 티토나 프랑스 레지스탕스, 독일과 이탈리아의 노동계급과 정당은 파시스트 부역자들을 대대적으로 단죄하였으나 강대국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된 그리스는 격렬한 레지스탕스 투쟁에도 불구하고 전후 괴뢰왕정이 복고되었으며, 우리 한반도는 해외에서 '민중의 전쟁'을 수행한 독립운동가들 조차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친일-친미 부역정권이 오래도록 막았다. 일제강점기 '민중의 전쟁'이 부각될 수록 독재정권의 '정당성'은 부정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김원봉 선생은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홍범도 장군은 2021년이 되어서야 고향도 아닌 남한땅에 그것도 부역자들도 묻힌 곳에 함께 모셔졌다.


"'평행 전쟁(pararell war)'은 다른 면에서도 달랐다. 연합국의 지배계급은 그들이 특권을 누리는 현재 상태를 내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싸웠고, 그에 반해 대중의 무장투쟁은 진정한, 모든 이를 아우르는 인간해방과 더 공정하고 민주적인 미래를 위해 분투했다... 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전쟁'과 나란히 '민중의 전쟁'을 창출한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였다 - '제국주의 전쟁'을 멈추기 위한 '민중의 봉기'였다. 2차 세계대전은 다른 많은 면에서 1차 세계대전과 상당히 달랐다."
-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 <나가는 말>, 도니 글룩스타인, 2012.


친일, 친나치, 파시스트 부역자들은 결국 연합국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여기저기에서 부활했는데, 자본의 이익을 확대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며 계급지배를 공고히 하는 목적을 애초부터 함께 공유했기 때문이다. 친일파 이완용은 자식들에게 앞으로는 친미파가 되라는 '선견지명'이 담긴 유언을 남겼고, 그 자식들의 이익은 사유재산을 신성시하는 대한민국이 아직도 법으로 보호해주고 있다. 독점자본이 된 대자본들은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파시즘에 부역하지 않은 사례가 없다. 그들의 목적은 '공동체'가 아니라 '사적 이익'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적 이익'만을 신성시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변하지 않는 한 이러한 경향은 반복된다.

"2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전쟁'이었나, '민중의 전쟁'이었나?"라는 질문에 도니 글룩스타인은 이 책을 통해 답한다. "둘 다였다."라고. 그리고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의 유언과도 같은 [분노하라!](2011)를 인용하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21세기인 지금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 지배계급이 일으키는 '제국주의 전쟁'과 이에 맞서는 '민중의 전쟁'은 진행 중이다.

***

1.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2012), Donny Gluckstein, 김덕련 옮김, <오월의봄>, 2021.
2. [제2차 세계대전](2014), 게르하르트 와인버그, 박수민 옮김, <교유서가>, 2018.
: 2차 세계대전의 진행사는 대부분 방대하고 분량도 많다. 독일 출신 유대인으로 미국의 군사역사학자인 게르하르트 와인버그의 이 책은 간략한 서술로 2차 세계대전의 전체를 조망하고 있어 추천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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