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 문명 - 개정판 현대의 지성 65
자크 르 고프 지음, 유희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기 중세', 그 '혁신'이자 '연속'으로서의.
- [서양중세문명], 자크 르고프, 1964~1984.


"어느 누구보다도 나는 중세 사회의 움직임이, 비록 '계급'이라는 개념이 중세 사회구조에 딱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주로 적대감이나 '계급투쟁'을 통해서 밝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어떤 사회와 문명도 '총체성'과 전체에 대한 열망을 중세보다 더 강하게 가져본 적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중세는 가장 좋은 의미에서건 가장 나쁜 의미에서건 '전체주의'적이었다. 중세의 통일성을 인식하는 것, 그것은 바로 중세에 그 자체의 '총체성'을 되돌려주는 일이 될 것이다."
- [서양중세문명], <프롤로그>, 자크 르고프, 1984.


15세기 동로마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에 의해 멸망했을 때, 콘스탄티노플을 탈주한 문명이 서유럽에 대거 유입되면서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단순한 '고대'의 부활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인문주의'로서 '근대성'을 열고자 했던 이 근대인들은 새로운 시대와 대비되는 어두운 터널과 같은 한 시대를 구분해 냈다.
이 암흑의 시대가 바로 '중세'다.


프랑스 역사학자이자 '사회사' 중심의 역사관의 계보를 잇는 '아날학파' 학자인 자크 르고프(Jacques Le Goff : 1924~2014)는 [서양중세문명](1964~1984)에서 '중세'는 근대 르네상스인들이 만들어낸 구분법 속에서 '어두운 터널' 같이 묘사되었지만, 사실 '중세'는 4~5세기 게르만족에 의한 서로마의 점차적인 멸망부터 19세기 유럽의 산업혁명기까지를 관통하는 시대와 문명 일체라고 규정한다. 

이른바, '장기(長期) 중세(Long Moyen Age)'다.
1964년 자크 르고프의 '장기(長期:long)' 시대 개념은 1962년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혁명의 시대](1962)에서 19세기를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부터 1914년 제1차대전 이전의 '좋은 시절(벨라 에포크 : Belle Epoque)'까지 규정한 '장기 19세기'로 익숙한 개념이다.
자크 르고프의 '장기 중세'는 9~14세기의 구간만이 아닌, 4~5세기 고트족과 반달족, 프랑크족과 롬바르드족 등의 게르만 왕조로부터 19세기 산업혁명까지 이어지는 문명과 '계급투쟁'의 역사 전체다. 또한 고대의 개인주의의 반명제로서 '전체주의'와 '총체성'의 시작이기도 하다


"인문주의자들은 중세, 달리 말하면 과학과 예술과 문학을 통해 빛을 발하던 찬란한 두 시대 사이의 일종의 어두운 터널인 중세를 창조했다. 그런데 그들이 이러한 중세를 창조한 것은 그리스-로마, 성경의 시대 등 참된 고대로 복귀하는 것이 '근대적'이라는 주장을 통해서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혁명'이었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근본적인 구조들은 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 사회에서 지속되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1,500년 동안의 단일성을 파악할 수 있다... 봉건제도가 지배했던 '장기 중세'는 악마와 선한 신의 투쟁의 역사다. 사탄은 '장기 중세'의 초기에 태어나서 말기에 죽었다."
- [서양중세문명], <시론 - 장기 중세를 위하여>, 자크 르고프, 1983.


자크 르고프의 [서양중세문명]의 초판은 1964년에 나왔고 저자는 도판과 <에필로그>를 빼고 <프롤로그>를 다시 쓴 개정판을 1984년에 다시 내기 전인 1983년에 이 '장기 중세'에 관한 시론 '장기 중세를 위하여(Pour un Long Moyen Age)'를 통해 중세를 장기적으로 4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1,500년으로 잡아보고 있다. 9세기와 14세기 등의 몇 번의 '르네상스'적 혁신을 거쳤으나 기본적으로는 이 흐름은 '단절'이 아닌 '연속'의 역사라는 관점이다. 


"중세초가 고대세계의 종말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대의 시작인가...를 알기 위한 고전적 논쟁에서 '연속'이 종종 '단절'보다 우세해 보일 정도로 서양이 로마제국 말기 이래로 '연속'으로 기운 것처럼 보인다."
- [서양중세문명], <1-1. 게르만족의 정착(5~7세기)>, 자크 르고프, 1964.


이러한 '연속'의 '장기 중세' 관점에서 저자는 <1부. 중세사의 전개>를 통해 5~10세기 게르만족 사회의 정착 및 재편과 11~15세기 기독교 세계의 형성 및 위기를 사회구성체의 물적토대(하부구조)로부터 살펴본다. 중세 계급관계의 기초인 토지소유관계와 봉건적 봉신계약, 상부구조로서 주요한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독교 사상의 물적 토대를 우선 배경으로 고려하는 중세 '사회사'의 역사관이다.

이어지는 <2부. 중세 문명>에서는 상부구조인 사상적 문명을 여러가지로 서술하는데, 고대 로마의 광활하고 열린 군사교역도로가 막힌 채 숲과 덤불 속에 갇혀 각각 고립된 중세의 성채들과 농촌, 도시의 발전이라는 '공간'과 신에 의해 시작과 끝이 정해진 중세의 '비관'적 '시간' 관념, 이에 따른 '종말론'과 공동체 및 조합이나 코뮌 등의 집단주의적 삶이 지배한 중세의 '망탈리테(사고방식)' 등을 두루 고찰한다.

[서양중세문명]이라는 야심찬 제목이 말해주듯, 유럽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장기 중세'라는 레테르에 걸맞게 고대와 근대까지 '연속'으로 아우르는 중세의 모든 것을 망라하고자 하는 역사학자 자크 르고프의 학문적 의지가 돋보인다.


"신의 시간은 연속적이고 직선적이다... 중세적 사고는 순환적 시간을 거부하고 시간에 비순환적인 직선적 의미를 부여했다. 역사가 시작과 끝을 갖는다는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장이다. 이러한 시작과 끝은 실증적인 동시에 규범적이고, 역사적인 동시에 신학적이다."
- [서양중세문명], <2-6. 공간과 시간의 구조(10~13세기)>, 자크 르고프, 1964.


4~5세기 중세 초 마니교와 같은 선악이분법 '이단'에 의해 태어난 '사탄'은, 자크 르고프에 의하면  19세기 근대 산업혁명기에 죽었다는데, 기독교 사상이 자본주의적 물신숭배에 지배이념 자리를 내준 이후 자본이 신이자 악마의 강력한 복합체로 등장했기 때문이겠다.
기아와 전염병 등의 극한상황이 일상이었던 '자크리(Jacquerie)'들의 농민반란이 내세운 '천년왕국'은 19세기 대다수가 된 노동계급이 이어받았다. 20세기까지민 해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임무는 공산주의적 무계급사회인 '천년공화정'의 건설이었다.

혁명의 '단절' 속에도 장기 중세의 '연속'이 있다.


"대다수 농민은 영양실조와 기아와 전염병 등으로 극한상황에 처해 있었다. 후대에 프랑스에서 '자크리(Jacquerie)난'이라 불렀던 농민반란이 엄청난 절망적인 힘을 분출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극한상황에서 연유했다."
- [서양중세문명], <2-8. 기독교 사회(10~13세기)>, 자크 르고프, 1964.


중세사와 중세문명을 고찰하면서 '아날학파'답게 '사회사'의 계보를 잇는 자크 르고프의 역사관은 역시, '계급투쟁'이다.


"삼분체계(성직자-전사-농민)는 오직 상층계급만, 즉 성직자 계층, 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 중 상위계층만을 나타낸다... 그것이 프랑스에서는 세 신분으로, 즉 성직자-귀족-제3신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제3신분은 평민 전체와 동일시될 수 없다. 그것은 심지어 부르주아지 전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부르주아지 중 상위계층, 즉 유력자들로 구성되었다... 이 제3신분의 본성에 대해 중세 이래로 존재하는 모호함은, 프랑스혁명 때 제3신분 중 엘리트의 승리로 혁명을 종식하고자 했던 1789년의 사람들과, 혁명을 전인민의 승리로 끝내려 했던 사람들 사이의 투쟁으로 표현되었다."
- [서양중세문명], <2-8>, 자크 르고프, 1964.


그러나, 중세의 '계급투쟁'이 자본주의 초기처럼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같은 단순 이분법일 수는 없다.
자크 르고프의 '계급투쟁'이나 '지식인' 같은 개념은 후학인 자크 베르제에 의하면 다소 '시대착오적'이다. 왜냐하면 당시는 '현대'라 불렸을 중세 당대에는 그런 개념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중세' 당시는 후대인 우리가 지금 구분하는 것처럼 '중세'가 아니라 여전히 '현대'였을 것이고 시대정신에 맞는 개념들이 따로 있었거나 아직 등장하기 전이었다. 
자크 베르제는 중세 후기의 '지식인' 대신 '식자(識者)'라는 포괄적인 개념을 쓴다.

어쨌든, '계급투쟁' 개념이 없었을 중세에도 실질적으로 '성직자-전사(기사)-농민'의 계급이 있었고, 이후 도시공동체의 발전과 함께 상인과 대지주 같은 부르주아지가 탄생하면서 이 중세적 '삼분체계'가 '성직자-귀족-부르주아'의 체계로 전환되었다. 농민 또는 농노들의 삶은 더욱 비참해졌다. 기근과 전염병 등의 극단적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들고 일어난 다수 농민반란은 지속되었겠지만, 중세 '계급투쟁'의 최종 전선은 '귀족-부르주아지'로 끝맺는다.

한편으로 자크 르고프는 '계급투쟁'의 고질적 형태로서 '계급 내분'을 지적하는데, 중세 도시 장인조합(길드) 내부의 장인 및 도제 부류와 아직은 소수에 불과했던 비숙련 임금노동자 간의 계급내 분열과 갈등을 서술한다. 농민 사이에도 지주가 된 부농과 농노 간의 분열이 있었다. 현대사회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재벌 및 대기업과 자영업 간의 분열과 갈등구조가 비춰진다.
'장기 중세'의 '연속'과도 같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 1848년 유럽혁명은 부르주아지 상층부들만의 승리로 혁명을 종식시키려는 세력과 다수 민중들의 승리로까지 궁극적으로 이어가려는 세력간의 끝나지 않는 투쟁으로 이어진다. 
이 또한 '장기 중세'의 '연속'이다.


"14세기 위기로부터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는 듯 했다. 그러나 외형의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세계의 육체와 영혼은 그 '지속적인 것들'로 인해 특히 주목을 받을만 하다... 인쇄술, 그것은 혁명적이고 위대한 발명이었다... 인쇄술이 즉각 전파시킨 것은 '인문주의'다... 그것은 고대로의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새롭게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이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 중세에는 인간의 세계의 모방 또는 축도, 즉 소우주였다. 이제 이 관계는 뒤바뀌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간은 세계의 모형이다'라고 썼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 [서양중세문명], <에필로그 - 지속되는 것과 새로운 것(14~15세기)>, 자크 르고프, 1964.


중세가 4~19세기까지 포괄하는 1,500년 간의 '장기 중세'로서 '연속'의 역사로 이해되어야 한다지만, 문화혁명으로서 '르네상스', 그 중 대표적인 이념인 '인문주의'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중세 기독교사회에서는 세계가 이미 신의 필연적인 시공간으로 정해졌기에 인간은 이에 복종하면서 하나의 '소우주' 또는 세계의 축도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인쇄술 혁명 및 문자의 보급과 발전으로 인해 지적으로 깨어난 인간은 본인들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세계관의 척도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대의 선구자들은 항상 시대의 '모더니스트'였고 '현대인'이었지만, 15세기 중세말 인쇄술 혁명으로 인해 정통 기독교적 세계를 벗어나 동서양의 공간적 교차 및 고대와의 시간적 교류를 경험한 르네상스인들은 인류역사의 위대함을 새삼 믿게 되면서 인간을 '만물의 척도'이자 '세계의 모델'로 상정했다. 

이러한 '인문주의'는 인류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자 '혁신'이었다. 

물론 현대사상은 '인문주의'의 오만함을 경계한다. 그럼에도 인문학의 자기확신없이 이 급격한 기후생태위기와 비참한 불평등착취구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인문주의' 또한 모든 것이 그렇듯 양날의 검이며, '인문주의'를 이해하고 어둠의 중세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장기 중세'를 다시금 돌아봐야 한다.

미래는 현재의 '혁신'이자 '연속'이기 때문이다.

***

1. [서양중세문명](1964~1984), Jacques Le Goff, 유희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2.
2. [공부하는 인간 - 중세 후기 유럽의 식자들](1997), Jacques Verger, 문성욱 옮김, <읻다>, 2024.
3. [혁명의 시대](1962), Eric Hobsbawm, 정도영/차명수 옮김, <한길사>, 1998.
4. [자본의 시대](1975), Eric Hobsbawm, 정도영 옮김, <한길사>, 1998.
5. [제국의 시대](1987), Eric Hobsbawm, 김동택 옮김, <한길사>, 199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부하는 인간 - 중세 후기 유럽의 식자들 숲속의 숲
자크 베르제 지음, 문성욱 옮김 / 읻다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혁신'과 '연속', 그리고 '매개적 지식인' 또는 '유기적 지식인'
- [공부하는 인간], 자크 베르제, 1997.


"'식자(識者;gens de savoir)'는 근본적으로, 일단 동시대인들의 눈에는 '책'과 '글'의 인간이었으며, 바로 그것이 다른 모든 사회 집단과 비교해볼 때 '식자'들의 가장 뚜렷한 특유성 중 하나였다. 따져보자면 결국 그들이 지식을, 그리하여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 자체에 대한 정당화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책'으로부터였다."
- [공부하는 인간 - 중세 후기 유럽의 식자들], <1-3. 책>, 자크 베르제, 1997.


프랑스 역사학자 자크 베르제(Jacques Verger:1943~)는 '중세' 전문가다. 서구 중세 문화의 교육, 특히 '대학' 역사 전문가로서 1973년 [중세의 대학]이라는 책을 썼고, 1997년에 중세, 특히 14~15세기 중세 후기의 '지식인'들에 관해 저술한 책이 [중세 후기 유럽의 식자들(Les Gens de Savoir dans l'Europe de la fin du Moyen Age)]이다.

이 책은 중세 초기인 13세기 초 이탈리아 볼로냐와 프랑스 파리 및 몽펠리에, 영국의 옥스퍼드 등의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대학 이야기를 중심으로 시작하는데, 그에 앞서 <서론>에서는 '식자(識者)'의 정의로부터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사실,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정립된 '지식인(intellectuels)'이라는 말은 저자 자크 베르제에 의하면 '시대착오적'이다. 중세의 고급 문자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아는 '문사(vir litteratus)'나 '선생(magister)'이라는 중세적 용어도 있지만 자크 베르제가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지식인' 계층은 더 넓은 개념이다. 그의 개념은 대학의 학사나 박사 같은 학위에 국한되지 않고 교회 '성직자(clericus)'도 넘어선다. 교회와 세속적 왕정에 복무하던 사법과 행정 관리까지 포괄하는 이 '지식인' 계층은 중세 당시로서는 매우 귀했던 '책'을 소유 및 독점하던 '독서가(gens du livre)'에 가장 가까운 개념이지만, 베르제는 왕이나 귀족 같은 무식한 엘리트도 재력을 기반으로 장서만 갖춘 채 '독서가'를 자처할 수 있으므로 굳이 중립적인 '식자(識者;gens de savoir)'라는 개념을 쓴다(같은책, <서론>).
국역판은 이 '식자'를 '공부하는 인간'으로 번역하여 한국어판 제목은 [공부하는 인간]이 되었다.
부제인 '중세 후기 유럽의 식자들'이 실은 원서의 제목이다.

15세기를 넘지 않는 1,500년까지를 임의의 경계로 삼은 이 책 [공부하는 인간(식자)]은 '라틴어'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주의적 '논리학' 및 '변증론'에 기초한 중세의 지식([공부하는 인간], <1-1>), '문법-수사학-변증술'의 3과 및 '산술-음악-기하학-천문학'의 4과로 구성된 중세 대학의 학부로서 '자유 학예'(같은책, <1-2>)를 둘러본 후 '철학-신학-법학'과 '의학' 등을 전공한 박사들의 귀족화를 논증한다. 중세의 필경사와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 후 유통이 점차로 늘고 비싸던 가격이 다소 낮아진 '식자'의 표상으로서 '책'(같은책, <1-3>)에 관한 내용이 자연스레 뒤따른다. 
중세 후기 '식자'들의 특징으로서 책이 사치품이던 당시로서는 적지 않았을 수십 또는 수백 권의 '장서'를 보유한 '독서가'의 등장이다.
14~15세기 '중세'와 '르네상스'라는 '연속'과 '혁신'의 경계적 시공간의 중심에 바로 인문주의 '식자'들과 '책'이 있다.

사회사를 근본으로 하는 역사학자 답게 자크 베르제는 중세 후기 '식자'들의 배경으로 중세 당시 교회와 국가의 '근대화' 또는 '현대화'를 상정한다.
세속 왕정이 근대화되면서 구조적인 관료체계를 갖추게 되고 교회 또한 동일 체계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대학 학위를 취득한 학사나 박사가 교회 또는 국가권력에 편입되고 복무하게 된 것이다. 교회법이나 로마법에 정통한 '법학' 전공자들이 이미 서양 중세 시대부터 우대받기 시작한 것이다.
대학에서 '법대' 우세의 기원이 대학이 최초로 설립된 중세부터였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 중세 말에 이르러 '식자(識者)'들, 적어도 그 중 몇몇이 통상적인 사법, 행정 기능 수행을 넘어서는 '지적 형태의 정치적 참여'를 개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 개인의 능력과 국가에 대한 헌신적 봉사 덕분에 신분상승을 이루었던 '율사와 변호사의 시대' 다음에는 왕으로부터 신입선출 권한을 획득하고 서로가 서로를 도우면서 자녀들의 결혼으로 화합을 다지는 '인척 시대'가 오고, 마지막 '상속자의 시대'는 기세등등한 가문들의 시대로서 일단은 '양도' 이후에는 매관매직을 통해 대대로 직분을 전승하는 것이 점차 규칙으로 자리 잡는다."
- [공부하는 인간], <2-5. 지식과 권력>, 자크 베르제, 1997.


이들 중세 '식자'들은 근대화된 교회와 국가권력에 복무하면서 정통 귀족은 아니지만 귀족화되었고, 왕족과 귀족 등 엘리트 또는 식자들끼리 인척 관계를 맺으면서 지배계급으로 공고화되었으며, 대대손손 상속하면서 더더욱 귀족화되었다. 
이를 자크 베르제는 법학 학사와 박사가 우대받는 '율사와 변호사의 시대'에서 정략결혼의 '인척 시대'로, 다시 계급세습의 '상속자의 시대'로 변천되는 과정으로 묘사한다.

우리 역사로 보면,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문명 교체기와 비슷할 수 있겠다.
고려말 부패한 왕조와 권문세족이 신진사대부의 급진적 정파에 의해 패퇴되면서 건국된 성리학 이념국가 조선의 선비들은 과거시험을 통해 출사하여 국가를 이끌어가는 '사대부'가 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그러나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이 사대부 계층이 지배계급화되면서 국가의 계급모순을 유교의 예법 강화로 은폐하려던 조선 후기에는 '세도정치'와 같이 극단적으로 문벌귀족화되었고 결국 국가전복을 꿈꾸는 '지식인'들을 양산한다. 
홍경래가 그랬고 최제우나 전봉준 같은 동학의 '지식인'들이 그러했다. 시대의 장벽에 막혀 대학 학위도 없고 사대부도 되지 못했지만 그들 '식자'들은 민중의 편에서 세상을 뒤집으려던 '유기적 지식인'이었다. 

중세 후기의 '식자'들도 그렇게 변모한다.
물론 중세 말까지 대부분의 '식자'들은 그들의 지식을 전문화하면서 국가권력의 근대화를 이루는 정치적 실천을 최우선 목표로 했지만, 한편으로 일부 변경의 '식자'들은 다수 민중 반란의 이데올로그로서도 기능한다. 
종교개혁의 루터도, 영국의 존 위클리프나 프라하의 얀 후스도 모두 '식자'들이었다.

'지식인'이나 '식자'의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나 정치적 실천을 통해 '공공성'을 담보한다. 교회나 왕족이 자기 마음대로 권력과 조직을 농단하지 못하도록 이론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식자' 계층의 역할이었다. 근현대는 '민주주의'가 '공공성'이지만, 중세에는 어쩔 수 없이 교회와 군주가 '공공성'이었다. 
역사의 진보는 다수 민중의 혁명적 동력이 근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대의 '공공성'을 담지하면서 사회 변혁을 읽고 실천하는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이 인류의 역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하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개념인 '유기적 지식인'을 자크 베르제는 다소 모호하기는 하나 '매개적 지식인'이라고 부르며 수구적인 '전통적 지식인'과 구분한다.


자크 베르제에 의하면 중세 후기 '식자'의 특유성은 다음과 같다(같은책, <3-8>).

1. 도시화 : 교회 또는 왕족, 도시군주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려야 권력에 복무할 기회가 생길 수 있기에, 식자들은 '도시화'를 그 첫번째 특징으로 한다.

2. 전문직업화 : 지위가 보장되는 전통적 귀족처럼 권력에 파트타임이나 아마추어식으로 자문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직업 관료로서 보수를 받고 지식을 권력에 파는 '전문지식인'이다.

3. 정치화 : 그로 인해 국가권력의 '근대화' 또는 당시로서는 '현대화'에 기여하는 궁극의 '정치화'를 이룬다. 군주의 의지와 '식자' 개인의 야망이 교차하면서 정치적 '공공성'이 발전한다.

4. 실천적 문화 : '식자'들의 정치적 지식은 자연을 음미하며 시를 쓰는 것 같이 흡사 무사무욕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전문직업적 '노동'으로서 다분히 '실천적인 고유한 문화'를 지닌다.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의 급진적 단절이라는 낡은 낭만주의적 관점은 오래전부터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 새로운 사회 범주로까지 학업이 확장되는 것... 이 지식 문화는 근본적으로 원칙에 있어 중세의 기원에 충실하다. 
그러나 박사 시대에서 인문주의자 시대로 넘어오는 동안 단절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서구 사회가 추상적 지식에, 또한 그 지식의 보존과 전파를, 경우에 따라 실제 활용을 책임지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기꺼이 마련해 주던 자리는 이미 중세말 수세기 동안 그려진 것이었고, 이 그림은 아주 오랫동안 남을 것이었다."
- [공부하는 인간], <3-9. 박사에서 인문주의자로 : 연속과 혁신>, 자크 베르제, 1997.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혁신'적이지만 '연속'을 기반으로 흐르던 장기적인 시대에 '유기적 지식인' 또는 '매개적 지식인'으로서 인문주의적 '식자'들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러나 근대적 르네상스는 그냥 오지 않았다. <옮긴이의 말>대로 '중세'인에게 당시는 '현대'였다. 현재의 우리 시대 또한 지금은 '현대'로 불리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미래에도 여전히 '현대'로 불릴 수는 없을 게다.
'중세'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현대적 지식인'으로서 '식자'들은 역사의 '연속성'을 이어가며 '혁신'을 가능하게 했다.

'중세'에서 근대적 '르네상스'로,
'혁신' 속 깊은 '연속'을 본다.

그리하여 이제,
'장기(long) 중세'를 다룬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
자크 베르제의 선학인 자크 르 고프를 읽을 때가 되었다.

깊고 깊은 [서양중세문명](1964/1984)에 빠져들 시간이다.

***

1. [공부하는 인간 - 중세 후기 유럽의 식자들](1997), 자크 베르제, 문성욱 옮김, <읻다>, 2024.
2. [서양 중세 문명](1964/1984), 자크 르 고프, 유희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2.
3.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 조선의 계급,의식,정치,경제구조], 유승원, <역사비평사>, 20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자 풍경 - 글자에 아로새긴 스물일곱 가지 세상
유지원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자 = 글씨 + 활자
- [글자 풍경], 유지원, 2019.


"타이포그래피'는 이름 그대로 '타입(type)'을 다룬다. '글자'는 크게 손으로 쓰는 '글씨'와 기계로 쓰는 '활자'로 나뉜다."
- [글자 풍경], <붓이, 종이가, 먹물이, 몸이 서로 힘을 주고 힘을 받고>, 유지원, 2019.


취학전에 책을 끼고 다녔던 것도, 
글씨를 배우게 된 것도, 
사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덕이었다.

어둑한 방에 배깔고 엎드려 동물 삽화책을 펼쳐놓고는,
어머니가 출근 전 남겨준 16절 갱지에 0.7mm 모나미 볼펜으로,
공룡과 동물들을 그리다가 어느새 지겨워지면,
흰 바탕에 검게 박힌 글자들을 베껴 썼다.

아버지가 체계적으로 '가나다라'를 가르쳐주시기 전에 나는 그렇게 글씨를 그림처럼 그렸다.

글씨를 그림처럼 그리기 시작한 나의 문자 이력은 이후 청소년 시절에는 한자와 필기체 영어에 대한 선호로 나타났다.
상형지사 문자가 조합되는 한자와 흐르듯 이어지는 필기체 영어는 마치 그림을 그리듯 써야 제 맛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글도 나만의 0.7mm 모나미 볼펜 '필체'로 직접 쓰는 걸 좋아하게 된다.
책을 읽다가 기억해 두고 싶은 문장은 꼭 내 손으로 직접, 세상 어디에도 더 없을 유일한 나만의 '필체'로 책의 속표지에 필사해 둔다.
내가 책을 빌려 읽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독일에서 '타이포그래피'를 전공한 시각디자이너 유지원은 [글자 풍경](2019)이라는 책에서 정보와 지식을 소수 독점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하는 일을 하고 싶어 시각디자인을, 그 중에도 '글자' 디자인으로서 '타이포그래피'를 전공하게 된 어린 시절 기억을 회상하면서 책을 연다.

'글자'는 세분화하면 손으로 쓰는 '글씨'와 인쇄 기계로 찍는 '활자'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글씨'는 사람이 손으로 계속 쓰는 한 그 '필체(type+graphy)'가 다양하게 발전할 것이고, '활자(typography)'는 14세기 우리 고려의 금속활자 직지심경과 15세기 유럽의 구텐베르크 인쇄 혁명 이후 여러가지 인쇄체로 정형화되었으며, 현대는 컴퓨터 그래픽으로서 '폰트'라는 세계 공통 활자체들로 확장되어 왔다.

유럽의 북부에서 시작된 구텐베르크의 인쇄체는 '블랙레터(blackletter)'로서 흰 지면보다 검은 글자가 두드러지는 활자체였다. 그러나 기계적인 블랙레터는 유럽 남부의 르네상스 정신에는 맞지 않았다. 중세처럼 오로지 필사만으로는 대량 생산에 한계가 있었기에 남유럽의 활자체는 보다 필체적 요소를 가미한 결과 흰 지면의 여백이 드러나게 되어 '화이트레터(whiteletter)'가 되었다. 
[글자 풍경]의 저자 유지원은 북유럽의 '블랙레터'를 추운 북방의 '침엽수', 남유럽의 '화이트레터'를 따뜻한 남쪽의 '활엽수'에 비유한다. 구텐베르크의 활자체 '텍스투라' 등은 빽빽한 침엽수림으로, 인문주의 르네상스 활자체 '화이트레터'는 '로만체'의 이름으로 넉넉해진 활엽수림과도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북유럽의 기계적인 인쇄체는 13~16세기 '텍스투라(Textura)'로부터 시작된다. 
구텐베르크 당시 사용된 '텍스투라' 활자체는 아마도 예전 중세 시대부터 수도사들이 성경을 필사하던 필체들을 토대로 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개인의 필체적 개성을 탈각하고 대량 인쇄를 위해 정형화시킨 활자체로서 주로 라틴어 성경 인쇄에 쓰였다. '텍스투라'라는 이름 자체도 '텍스트(text)'에 쓰인 활자체의 원형임을 의미하겠다.
성경이라는 대표적인 '텍스트'가 유럽 각지의 언어로 번역되고 대중화되는 과정과 함께 이 '텍스투라' 활자체는 유럽 각지의 '방언', 즉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등과 같은 각 지역의 언어로 다양화되는데, 이를 14~16세기형 '바스타르다(Bastarda)'라고 부른다. 15~17세기 독일식 르네상스 '바스타르다'는 '슈바바허(Schwabacher),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사용된 독일 바로크식 활자체는 '프락투어(Fraktur)'라고 한다. 

이들 '텍스투라'-'바스타르다'-'슈바바허'/'프락투어' 등을 지금의 단순화한 활자와 폰트에 비교해 보면 상당히 장식적이다. 이 장식성의 포장은 이후 정보와 지식의 대중화와 민주화, 인쇄 문명의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벗겨지게 된다. 현대에는 '획'의 최소한의 묘미로서 획 끝의 돌기인 '세리프(Serif)' 조차도 없앤 '산-세리프(San-serif)' 활자체가 등장했다. '산(san)'은 프랑스어로 영어의 'without'을 의미한다. 글씨 쓰듯 획을 꺾는 '세리프'는 우리 한글체로는 '바탕체(명조체)', '산세리프'는 '돋움체(고딕체)'로 볼 수 있다. 컴퓨터 활자인 폰트에서는 각국의 문자들을 이런 식(바탕-돋움/세리프-산세리프)으로 정형화한 '유니코드'를 통해 현대식 '문자의 바벨탑'([글자 풍경],109쪽)을 쌓아가고 있다.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 알베르토 망구엘은 [독서의 역사](1996)에서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은 텍스트의 대량 인쇄를 통해 활자를 확산시키는 한편으로, 손으로 쓰는 육필가들은 서체를 더욱 장식적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기계 문명의 발전이 수공업적 문화를 말살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증거다.

19세기 영국의 디자이너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는 산업혁명 초중기 조악했던 기계문물의 생산물에 대항하여 인간 공예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이른바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를 전개했는데, 흡사 노동자들의 최초이자 최후의 기계파괴운동이었던 러다이트 운동과도 같이 "디자이너가 대량생산 기계에 저항한 최후의 운동"([글자풍경],275쪽)이었다. 그러나 이후 디자이너들은 기계문명의 한계는 물론 새로운 가치를 포괄하는 운동으로 전환하였다는데, 이것이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로 대표되는 공예의 '모더니즘(modernism;근대성/현대성)'의 출현이다.

[글자 풍경]은 유럽과 세계 각국의 '타이포그래피' 역사와 현재를 돌아보며, 결국 우리의 '글자'로 돌아온다.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과 동시대에 반포된 15세기 우리의 한글과 [훈민정음]에 투영된 문자 민주화의 역사. 
물론 왕조와 집현전이라는 국가기관이 시작한 위로부터의 민주화였지만 그 정신만은 다분히 근대적이었다. 다수 민중은 우리 소리에 맞는 한글을 더욱 발전시키며 진정한 한글의 민주화를 이뤄냈다. 짧지 않은 일제강점기 조선어 말살 정책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끊어짐 없이 생명력을 유지했다. 
이 책 [글자 풍경]을 출판한 <을유문화사>는 해방 후 [조선말 큰사전] 전집을 발간한 출판사라고 한다. 정말 고마운 출판사다.

우리의 '바탕체'는 '명조체'라고도 불리는데, 중국 한자의 '해서체'에서 영향을 받아서 '명나라왕조'라는 뜻의 '명조'체라고 한다. 물론 그림의 성격을 여전히 많이 지니던 한나라 '예서체'와 이후 흘려 쓰기 시작하게 된 '행서체'의 중간체인 '반흘림체'로서 '해서체'는 명나라가 아닌 당나라 때 발전했지만 조선식으로 보면 중국식은 '명나라식'이었을테니 '해서체'의 우리 한글식 글씨는 '명조체'가 된 것이다. 

지금의 '명조체'는 한글의 본 바탕이 된다고 하여 '바탕체'로 불리며, 긴 글을 담은 책으로 출판할 때 기본적으로 활용하는 활자체가 된다. 우리가 문서를 작성할 때 본문은 '바탕체'로 하고, 제목은 두드러지도록 '돋움체'를 쓰는 이유도, 획의 돌기가 있는 세리프체로서 '바탕체'는 손으로 잘 쓴 글씨처럼 읽기의 피로도가 적고, 기계적인 '고딕체'는 획의 돌기를 없앤 '산세리프체'로서 '돋움체'로 불리기에 제목처럼 강조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이처럼 '활자(폰트)'로서 '바탕체(명조체)'는 손으로 쓴 '글씨'에서 유래하는데, 손글씨 한글체는 궁중의 여성들이 국문소설을 필사하거나 한글편지를 쓰면서 발전된 '궁(서)체'가 그 시작이다. 한글 폰트에 '궁서체'가 장착된지 오래지만, 본래 손글씨는 '명조체'로 디지털화되는 한편,, '궁서체'의 아날로그적 성격으로 발전해왔을 수도 있겠다.

획의 굵기를 조절하는 것과는 별개로 활자에 투영된 손글씨의 영향이 언제까지 갈 것인가 문제는 '책'의 존립 문제와도 같이 아련하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이 '책'을 들고 다니며 읽는 한,
'책'이라는 물질이 계속 존재할 것처럼,
사람이 '글씨'를 직접 쓰는 한,
'활자'에 녹아든 '글씨'의 영향이 지속되는 것 아니겠는가.


"'수동적인 가죽 장정 대신 능동적인 독서를'. 책이 부르주아와 귀족의 비싼 서재를 그 호사스러운 가죽 장정으로 장식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모든 독자의 손에서 능동적으로 펼쳐지도록 함으로써, 편안한 독서를 제공하는 역할로 거듭나도록 하겠다는 것이 바로 '타이포그래피의 근대 정신'이다."
- [글자 풍경], <프롤로그 : 글자들의 숲길에서>, 유지원, 2019.


글자 역시 문자를 표현하는 '형태(type)'로서 정보와 지식을 소수 독점 지배자들로부터 다수 대중에게로 해방시켜 왔고, 
다수 민중들은 이 해방된 문자와 지식을 '글자'라는 형식을 통해 공유하며,
한편으로는 '글씨'를 쓰거나 '활자'를 읽으면서 다양한 해석과 함께 스스로 해방되어 왔다. 

다수 민중에게는 이와 같은 민주주의 확대가 바로, 
'문명'의 역사가 된다.

'타이포그래피(typography)'의 역사 또한 그렇다.

***

- [글자 풍경], 유지원, <을유문화사>, 20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 잠시 멈추다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2020.


"좋은 철학은 느린 철학이다... 
멈춤은 실수나 결함이 아니다... 멈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잠시 유예된 상황이다. 생각의 씨앗이다. 
모든 멈춤은 인식의 가능성, 그리고 궁금해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1-2.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에릭 와이너, 2020.


철학을 처음 접했던 소싯적에 선배들은 말했다. 철학은 끊임없이 "왜?"라고 묻는 것이라고. 영문과 철학학회 '현대철학반'은 유물론을 자처했기에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 학파 탈레스처럼 "세계의 기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지만, 철학과의 유물론자 선배들조차도 철학은 "왜?"라는 질문의 반복이라고 역시 답했다. 

아마도, 서양의 전통적 철학이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으며, 그의 [대화편]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다루기 때문이리라.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문명도시국가 아테네의 청년들과 모든 사람들을 붙잡고 계속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댔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던진 무한반복 질문의 목적은 단 하나, 당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대화의 마지막에 진짜 그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고전철학적 유행어 "너 자신을 알라"는, 무한반복되는 "왜?" 질문을 통해 그동안 확실한 것처럼 보였던 나의 생각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얼마나 아는 게 없는가를 깨닫게끔 하고, 무지한 나 자신을 알라는 결론으로 항상 이끌었단다. 잘난체 해야하는 문명도시 아테네의 궤변론자들과 시민들은 소크라테스의 집요한 질문공세에 짜증이 났고 풍기문란죄 아니면 괘씸죄나 하다못해 반역죄 같은 걸 씌워서 독약을 마시게 했다. 역시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소크라테스는 서양철학의 아버지와도 같이 궁극의 근원을 파고드는 사고실험의 본좌로 남게 되었으며 그의 제자 플라톤은 스승과의 대화를 통해 서양철학의 맏형이 되었다.


'철학적 여행자'를 자처하는 미국의 기자출신 작가 에릭 와이너(Eric Weiner)의 철학 관련 책 제목 또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2020)다. 에릭 와이너에 의하면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곧 질문이었다고 한다. 어떤 것의 근본을 향해 천천히, 집요하게, 가끔은 멈춰서게 하면서 파고드는 인간의 사고실험, 특히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실천하는 정신수양이 바로 소크라테스와 에릭 와이너가 규정하는 철학인 것이다.

그들 '소크라테스주의자'들에게 질문은 단순히 던지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그들 철학자들에게는 질문은 경험하는 것이고 살아보는 매우 심오한 것이다.

에릭 와이너의 철학 여행은 그가 좋아하는 기차(익스프레스/express)와 함께 한다. 지금은 비행기보다 느리지만 철도가 처음 길을 연 19세기의 근대에만 해도 기존의 속도 개념을 혁명적으로 바꿔버린 기차가 철학과 닮았다고 보는 듯 하다. 철학이란 항상 개념을 갱신하면서 사고의 틀을 바꿔왔기 때문이리라.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Socrates Express)]의 부제는 <죽은 철학자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In Search of Life Lessons from Dead Philosophers)>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저자는 일반인처럼 아침에 침대에서 벗어나기 싫어 끊임없이 자신이 일어나야 하는 이유를 사유했던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같은책, <1-1>)부터 철학의 성인 소크라테스(<1-2>), 부지런히 걸으면서 자연과의 조화를 꿈꾼 루소(<1-3>), 미국의 초월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1-4>),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1-5>)와 영원회귀 속 초인주의자 니체(<3-11>), 동양의 싸우는 간디(<2-8>)와 친절한 공자(<2-9>) 등을 거치면서 에피쿠로스(<2-6>)의 쾌락과 에픽테토스(<3-12>)의 스토아학파도 경유했다가 시몬느 보봐르(<3-13>)의 노화와 몽테뉴(<3-14>)의 죽음까지, 저자 스스로 엄선한 14명의 '죽은 철학자들(Dead Philosophers)'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역자의 실력이 출중하기에 가능한 것으로 믿어지나, 저자의 글솜씨 원문 자체가 재미있고 구성진 게 번역본임에도 느껴진다. 책은 기차의 속도만틈이나 빠른 속도로 넘어간다. 그러나 에릭 와이너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런 현대식 속도를 제어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는 것. 길거리에서 우연히 소크라테스를 만난 것처럼 잠시 멈출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 또한 일부러 '익스프레스'는 아니지만 출퇴근길 덜컹거리는 전철 안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곱씹어 읽어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노력해본다.

철학 여행자 에릭 와이너의 철학책 [소크라테스 익프레스]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좋은 철학은 멈춰서 다시 생각할 수 있는 느린 철학이며, 그 철학적 사유의 근원은 인식의 주체인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주가 똑같이 반복된다는 주장을 니체가 처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그보다 약 2,500년 전에 비슷한 발상을 내놓았고, 인도 경전인 [베다]는 그보다 더 빨랐다. 니체도 분명히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니체 역시 먼 곳까지 두루 살피며 지혜를 찾아 헤맸다. 
니체는 그 아이디어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고자 했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신화가 아닌 과학으로 만들고 싶었다."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3-11.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 에릭 와이너, 2020.


인도의 독립보다는 독립할 자격이 있는 인도를 목표로 평생 싸움을 했다던 간디와, [논어]에 105번 등장한다는 '인(仁)', 즉 에릭 와이너가 보기에 '인간다운 마음'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그 '인'과 도덕적 자기수양으로서의 평생 공부를 설파한 공자는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가 강조하는 주관주의 관념론의 동양적 경유지로 보인다. 

사실 동아시아의 유학과 성리학은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유물론적 성향도 분명하나, 인간 세상의 현실적 정치철학을 더욱 중시하면서 심성과 도학을 수양하는 후기 성리학의 심성론적 성격이 점차로 강화되어 왔다. 근대성의 문 앞에서 자연철학 또는 과학과 구분되는 인문학적 성격의 철학이다. 물론 고대의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와 힌두교, 자이나교 등은 말할 것도 없이 나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는 '직지심성론'이다. 본래 '유물론'적 경향도 있던 유학이 도학적 '관념론'으로 변화되는 현상은 동양적 '유-불-선', 즉 성리학이 불교 및 도교와 융합되는 일련의 과정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탄 인식의 주체철학은 이렇게 동서양을 횡단한다.

저자 에릭 와이너는 서양 에피쿠로스의 최고선으로서 '쾌락'을 동양의 불교에서 추구하는 '평정심'과 동일시하고, 스토아학파 에픽테토스의 금욕을 내 주관적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객관세계의 운동에 스트레스 받지 않고 내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자기통제로서 우리의 철학적 본보기로 삼는다.

그렇지만, 
주관적 관념론이므로,
결국 다시 프리드리히 니체다. 

니체에게 세계사는 무한반복 가능성의 '영원회귀'이고, 불확실한 통계로서 수만 가지 가능성의 '영원회귀'는 니체에게 일종의 철학적 사고실험이다. 이를 이겨내는 것은 차라투스투라 같은 선지자적 초인이고 이를 위해 니체는 죽기 전 기존의 '모든 가치의 재평가'를 위한 저서를 준비했다고 한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라고 단정한 극단적 주관론자 쇼펜하우어의 후예답다.
역시, 근현대철학에서 '욕망'을 아우르는 '주관적 관념론'의 본좌는 프리드리히 니체다.
대부분의 현대철학자들이 니체를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 오래된 격언들 사이에 몽테뉴가 직접 적은 글귀가 보인다. '크세주(Que sais-je)', '나는 무엇을 아는가?' 이 짧은 문장은 몽테뉴의 철학과 그가 살아온 방식을 깔끔하게 압축해 보여준다."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3-14. 몽테뉴처럼 죽는 법>, 에릭 와이너, 2020.


에릭 와이너의 종착지는 '에세이'를 남긴 16세기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다. 
소크라테스가 에릭 와이너의 머리라면 몽테뉴는 심장이다.

부연하자면, 소로는 눈, 쇼펜하우어는 귀, 루소는 발, 에픽테토스는 그의 손이다. 
결국, 이 모든 철학적 신체들은 주체의 마음으로 수렴된다.

몽테뉴는 절대적 진리를 부정한 회의론자였고 철학의 끝인 '죽음'에 천착했지만 결국 죽음이 뭔지 알 수는 없었다. 프랑스어로 '해보다'라는 뜻이라는 '에세이(essay)'는 몽테뉴가 고안한 철학적 글쓰기가 그 유래라고 하는데, 몽테뉴는 '죽음'이 뭔지 알 것 같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다시금 제기되는 "과연 그런가?"라는 질문을 통해 부단히도 사고실험을 이어갔단다. 그의 철학적 '시도(essay)'는 '크세주(Que sais-je)'라는 자문으로 시작하여 '죽음'이라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놀아보는 궁극의 철학적 사고실험이었다. 


"... 내가 이번 여행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식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그 생각을 좋은 생각으로 만들면 되지 않나?"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나오는 말 - 도착>, 에릭 와이너, 2020.


니체의 '영원회귀' 세상에서 인식의 주체인 나의 '인식전환'을 통해 '최고선'으로서의 '행복'을 추구하자는 에릭 와이너의 '주관적 관념철학 기차'의 슬로건은 "인식은 선택이다"라는 명제였다.

맛깔난 글솜씨와 동서양 횡단을 통해 확인한 그의 철학적 지혜의 결론은 결국,
이 세계는 주체인 내가 생각하기 나름인 그 무엇이 되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기만 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 칼 마르크스,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에 관한 제11번째 테제], 1845.


19세기 세계를 해석하기만 하던 철학이,
20세기 세계를 변혁하는 임무를 맡더니,
21세기 다시금 주체 안으로 침잠해 간다.

철학이 다시금,
여기 잠시 멈춘다.

***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Socrates Express)](2020), Eric Weiner, 김하현 옮김, <어크로스>, 20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주받은 미술관 - 그림으로 보는 재앙의 역사
나카노 교코 지음, 이희재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명화는 모두에게도 놀이터
- [저주받은 미술관] / [내 생애 마지막 그림], 나카노 교코.


다시, 
나카노 교코다.

몇 해 전 [무서운 그림] 시리즈로 알게 된 일본의 미술사학자인데, 그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림이 묘사하고자 한 인간군상의 무서움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후 그녀가 엮은 몇 권의 미술사 책을 읽었고, 이제 미술사를 좋아하는 내게 나카노 교코는 접하는 대로 무조건 읽게 되는 작가다.

이번에는,
[저주받은 미술관]과 [내 생애 마지막 그림]이다.


[저주받은 미술관](2022)에서 나카노 교코는 코로나 팬데믹 후인 지금, 인류사에서 오래된 감염병인 흑사병과 콜레라는 물론 결핵, 스페인 독감과 지금은 정복된 질병인 천연두 등을 그린 그림들과 30년 종교전쟁, 1차 세계대전 등을 통과했던 명화들을 소개한다. 물론 고대로부터 천재지변의 대명사인 대홍수와 화재 및 화산폭발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지상의 신이나 다름없는 왕, 그리고 신과 가장 가까운 성직자조차 제 수명만큼 살지 못하고 역병으로 죽었다. 이러한 '죽음의 평등주의'가 견고한 계급사회에 길들어 있던 소박한 민중을 얼마나 각성시켰을지 가히 짐작할만 하다. 특히 성직자에 대한 환멸은 컸다. 신자를 구하기는커녕 스스로도 구하지 못하면서 방관만 하던 교회의 권위가 형편없이 실추되었으니, 페스트 종식과 함께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의 탄생, 나아가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된 역사의 흐름은 자못 자연스럽다."
- [저주받은 미술관], <4장. 중세의 역병 - 팬데믹과 죽음의 무도>, 나카노 교코, 2022.


중세를 극복한 건 르네상스이기도 했지만, 어찌보면 이는 문명교체의 인문학적 징후였을 테고, 실제로는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들추는 존재"(같은책, <8장>)로서의 역병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현대사회는 어떨지 모르지만 중세의 지배계급은 민중들과마찬가지로 역병에 취약했고 그래서 역병은 '죽음의  평등주의'를 통해 기존 계급사회에 균열을 냈다.

가톨릭에 대항한 개신교 전통의 북유럽 플랑드르에서 활동한 16세기 민중화가 피터르 브뤼헐은 대대로 화가를 배출시킨 '브뤼헐가'의 시조다. 그는 종교 제단화나 신화화, 역사화 같은 대작 의뢰가 드문 북유럽 시민사회 출신이라 농민과 민중들을 주로 그렸다. 

그의 작품 [죽음의 승리](1562)에 담긴 페스트(흑사병)는 [로마의 페스트](1869)를 그린 19세기 화가 쥘 들로네 같은 비장함은 없다. 페스트가 만연하여 죽음의 우의로서 해골들이 마을 전체를 뒤덮었지만 엄중하다기 보다는 죽음을 쟁반에 올려놓고 사람들을 놀래키거나 하는 코믹한 장면을 담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피터르 브뤼헐의 스승은 북유럽의 이단아 히에로니무스 보스였단다.

[저주받은 미술관]의 표지 그림은 19세기 화가 폴 들라로슈의 [제인 그레이의 처형](1833)이다. 영국의 헨리8세 사후 메리 여왕과 왕위 다툼에서 밀려 즉위 9일만에 처형된 열여섯 살 제인 그레이의 처형 장면을 그린 작품인데, 홍수의 재난을 담은 게 아니라 1928년 런던 템스강의 대홍수로 유실되었다가 45년이 지난 1973년에 어느 신입 학예사의 성실한 탐사 끝에 부활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 후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되었을 때 인기가 좋아 사람들이 많이 몰리던 통에 이 작품 앞 바닥이 무너지기도 했단다.

17세기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는 그 특유의 풍만한 여체가 여전히 돋보이는 '알레고리', 즉 '우의'적 표현을 담아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휴전기에 [전쟁과 평화](1629~1630)를 그렸고 개전 후에는 [전쟁과 공포](1637~1638)를 통해 또 다시 닥쳐온 전쟁을 역시 우의적으로 담았다. 루벤스의 신화적 알레고리 명작들은 출연자들이 담고 있는 신화적 상징을 읽고 해석하는 재미를 감상자들에게 선사한다고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루벤스 특유의 여체 그림은 당시의 유명한 포르노그래픽으로서 주문자의 성적 취향도 고려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 화가들의 '마지막 그림'들은 어땠을까.

나카노 교코의 2015년작 [내 생애 마지막 그림]은 르네상스부터 종교화, 신화화를 그린 보티첼리, 라파엘로, 티치아노, 엘 그레코와 루벤스의 전성기 그림들과 마지막 작품들을 비교하며 소개한다. 중세를 벗어난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금욕주의에 빠진 말년의 작품에서는 건조한 여체로 변했고 루벤스의 화려한 색채와 구도는 마지막 작품의 회색빛 풍경화에서는 더 볼 수가 없다.

벨라스케스와 반다이크, 고야 같은 궁정화가의 생애와 마지막 작품은 절대군주의 후원을 배경으로 화가 개인의 신분과 지위가 르네상스의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못지 않게 더욱 높아지는 절정기를 보냈지만, 어느덧 그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던 절대왕정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문화를 적극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동양은 마침 그 무렵 크게 인기를 끌었던 인상파 작품을 회화의 교과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화폭에서 주제와 의미, 은유를 모두 걷어낸 채 오직 보고 느끼는 그림이 좋다는 인식이 생겼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인상파는 긴 회화사 가운데 그저 최신의 조류일 뿐이다. 서양회화는 먼저 신과 함께 존재했고, 왕후 귀족과 함께 존재했으며, 각 시대에 따른 민중의 생활과 함께 존재했다. 이 점을 알아두지 않으면 그림을 감상할 수 없다."
- [내 생애 마지막 그림], <3부. 화가와 민중 - 시민사회를 그리다>, 나카노 교코, 2015.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태동기와 함께 등장한 일련의 민중화가들은 이른바 풍속화를 그렸고, 신분이나 지위 상승보다는 화가로서 독립적으로 개별화된 화가 개인들의 삶 또한 미스테리 일색이다. 

피터르 부뤼헐의 그림은 그를 모작한 아들 피터르와 구분하기 어렵기도 하고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등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도 않으며 페르메이르의 마지막 작품인 [버지널 앞에 앉아 있는 여인](1670~1672)에 대한 위작 논란도 있단다. 남프랑스에서 고요한 농민 풍속화를 그린 밀레의 마지막 그림 [야간의 새사냥](1874)은 그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너무 역동적이다. 아마도 한 번은 그렇게 그려보고 싶었다는 듯이. 

고흐의 고단했던 예술가의 생애야 더 말해야 무엇할까마는, 마지막 그림 [까마귀 나는 밀밭](1890)의 노란색은 그 절정기의 색감과 어울리지 않게 죽음의 불길함을 예견한다. 고흐는 역시 그 해에 죽었다.


명화들은 미술사 작가에게는 화수분과 같다.
내가 믿고 읽는 우리나라 김선지 작가도 그렇고 일본의 나카노 교코도 명화를 중심으로 미술가와 그의 생애, 역사적 배경을 주제로 글을 연재하고 이 글들을 엮어 무한한 미술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전이 된 명화들은 이처럼 미술가의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끝없는 이야기의 원천이자, 그림을 그리는 자 뿐만 아니라 보는 자들에게도 끝없는 감상과 해석의 보고가 된다.

명화는 작가나 감상자 모두의 놀이터가 맞는가 보다.

***

1. [저주받은 미술관](2022), 나카노 교코, <영진닷컴>, 2024.
2. [내 생애 마지막 그림](2015), 나카노 교코, <오브제>, 20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