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미술관 - 양정무의 미술 에세이
양정무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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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a Ludo(세리아 루도)!"
- [벌거벗은 미술관], 양정무, <창비>, 2021.


"고전(古典)은 영어 classic의 번역어인데, 그 어원은 라틴어 Classicus로 '최상의 클래스', 즉 최상의 계급에 속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중세... 이 시기 '클래식'이라는 용어는 주로 라틴어로 쓰인 중요한 문헌을 의미했습니다. '클래식'을 한자로 옮기면서 '고전(古典)', 즉 '옛날책'이라고 풀이한 건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겁니다... '고전미술'이라고 하면 우선적으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미술, 즉 기원전 8세기(호메로스)에서 서기 5세기(서로마 멸망)까지의 서양미술을 가리킵니다."
- [벌거벗은 미술관], <1장. 고전은 없다>, 양정무, 2021.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실패한 '혁명 정신'을 팔며 전 유럽을 침략한 후 '벨베데레의 아폴로'와 같은 고대 로마의 고전미술들은 이 절대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에 모인 고전미술 작품들은 제국주의 팽창의 필수품이었는데 한 세기 이상 지난 20세기에 제2차 세계대전을 벌였던 미술가 지망생 아돌프 히틀러가 수십만 점의 고전미술을 수집하고 집착한 이유 또한 나폴레옹이나 영국여왕과 다르지 않았다. 유럽을 지배하고자 했던 제국주의 독재자들과 파시스트들은 본인들이 유럽 문명의 '정신적 뿌리'를 차지한 '정통성' 있는 유일한 권력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벌거벗은 미술사], <3장. 반전의 박물관>). 
고대 그리스의 미술작품들은 눈에 보이는 신체를 최대한 이상화시켜서 표현했다. 인체의 비례에 집착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있는 것을 그린 이전의 이집트 미술과 다른 점이었다. 이는 알렉산더의 정복전쟁을 통해 동서양이 교류되는 헬레니즘 미술로 발전했고 이후 로마 시대에는 더욱 이상화된 그리스 미술은 수없이 모방되고 양식화되었으며 확대재생산되었다. 유럽인들의 문화적 근원이라 칭해지는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미술'의 탄생이다. 이후 유럽을 지배하려는 권력자들이 찾는 유럽의 '정통성'의 상징은 바로 이 '고전미술'이 되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대혁명 후 파리의 루브르 궁은 '공공 미술관'이 된다. 12세기 바이킹을 방어하는 요새로 지어졌던 루브르는 16세기부터 왕궁으로 사용되다가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로 궁전을 옮기면서 왕가의 미술품 수장고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혁명 후 혁명의회는 이 미술품들을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최초의 '공공 미술관'을 열었다. 혁명 공화국을 배반하고 황제가 되어 제정을 복고시킨 나폴레옹이 이 '공공 미술관'인 루브르 미술관을 약탈한 고전미술품들로 채운 것은 또 하나의 혁명의 '반전'이었다. 혁명적 공화국이 내세웠던 '자유'의 기치는 반동적 제국의 약탈로 '반전'되었고, 그에 따라 인류의 자유의지를 표현했던 '고전미술'은 제국주의 전리품이 되었다. 소수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확대된 '공공 미술관'의 역사는 한편으로 제국주의적 약탈의 역사라는 '반전'을 담고 있다.


미술이론가 양정무 교수의 [벌거벗은 미술관](2021)은 이른바 '고전미술'에 관한 에세이다. '인문성(humanity)'을 담아내고자 했던 '고전미술'을 주제로 그 뜻과 표정, 반전의 역사와 팬데믹 시대 속 의미 등을 여러 미술작품들을 함께 소개하면서 풀어낸다. 
'고전'이란 고대에는 '최상위 계급'(라틴어 Classicus)'의 전유물이었고 중세까지도 기독교 사제와 왕족이나 귀족 등이 배타적으로 소유하였으나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했으며 프랑스 대혁명 후 '공공'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형태로 더욱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보아온 고대 그리스 조각 같은 고전미술은 대부분이 로마에서 모방한 대리석 작품들이었다. 20세기 들어 고도화된 미술사학의 발전으로 원래 고대 그리스 조각은 채색된 형태였는데 거의 파괴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벨베데레의 아폴로'나 '밀로의 비너스', '라오콘 군상' 등의 정교한 흰색 조각품들은 18세기 미술고고학의 시조인 신고전주의 미학자 요한 요하임 빙켈만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복제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실각 후 각국의 요구로 미술품들을 다시 반환해야 했을 때 프랑스에서는 해당 미술품들을 다시 똑같이 복제하는 기술이 발전했다고 한다. 이후 이런 석고 조각들에 대한 '소묘', '드로잉(drawing)', '데생(dessin)'이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 근대 미술교육의 핵심이 되었고 이러한 방식이 일본을 통해 아시아까지 들어온 결과 '미대입시'의 기본실기가 '석고 데생'이 된 것이라고 한다.

'미술', 더 나아가 '고전미술'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벌거벗은 미술관]의 저자는 "고전미술로 집약되는 절대적인 '미'의 세계가 있다는 신념 하에 그 세계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것이 르네상스 이후 서양 근대미술의 전통"(같은책, <1장>)이라면서 '인문성(humanity)'을 담고자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는 미술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전은 없다'. 다만, 어디에도 구속됨 없이 고난과 어려움을 딛고 어디에도 없을지 모르는 '완벽한 미'를 구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과 '인문성'이 남는다. '고전'의 '신비성'과 허상을 벗어냄으로 인해 결국 '고전미술이란 없다'.


"서양 근대문화의 시작은 르네상스이고, 르네상스 문화의 핵심은 '휴머니즘'... '미술'은 'Art' 또는 'Fine Art'에 대한 번역어로, 그 어원을 따지자면 라틴어 'Ars'로 거슬러 갑니다. 여기서 라틴어 'Ars'는 그리스어로는 'Techne'로 즉, '기술' 또는 '좋은 기술'이 '미술'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는 것을 짚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술'의 의미는 '미' 보다는 '좋은 기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입니다."
- [벌거벗은 미술관], <에필로그>, 양정무, 2021,


'고전미술'의 '신비성'을 벗기고, 미술사의 '반전'을 돌아보며 중세 흑사병과 현대 스페인독감의 팬데믹을 그린 미술의 역사를 통해 미술 자체의 옷을 벗긴 저자는 그 속에서 '인문성(humanity)'을 찾아낸다. 19~20세기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이 말한 '3F', 즉 'Form Follows Function(형태는 기능을 따른다)'은 저자에 의하면 "Form Follows Humanity(형태는 인문성을 따른다)"로 정정된다. 팬데믹을 이겨내고자 했던 인류는 그 의지를 미술로 표현했고 이 미술 작품들은 더 많은 다수의 호응과 지지를 기반으로 인간의 실패도 표현했지만 희망 또한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지금의 인류 역사로까지 진화할 수 있도록 한 하나의 기제였다. 중세 흑사병의 격리기간 14일 중 주일과 휴일을 제외한 열흘 간 지어진 보카치오의 '데카메론(10일야화)'은 대중에게 널리 퍼지면서 인류 보편의 기괴하고 기묘한 이야기를 이어갔으며 현재도 수많은 '데카메론'들이 이어진다. 
문자보다 더 효과적인 미술은 '인문성'을 담아내는 주요한 형식이다.


문화콘텐츠 기획자였다가 프랑스로 건너가 문화해설사로 일하는 진병관은 [기묘한 미술관](2021)이라는 책에서 미술작품들의 여러 뒷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로코코 화가 프랑수아 부셰의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화> 속 디드로 백과사전을 통해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의 지원을 받은 '백과전서파'가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적 토대가 되어 결국 왕정을 무너뜨렸다는 이야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제단화 <쾌락의 정원>은 그 파격성으로 인해 결국 제단화로서의 본래 역할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인간사의 혼돈을 품고는 후세로 하여금 현재까지 미스터리의 반복적 근원이 되었다는 이야기 등, 흥미로운 미술관 이야기를 풀어낸다. 대중화된 '공공 미술관'의 미술사 이야기는 더 많은 이들에게 재미있는 소재다. 18세기 영국의 '여흥클럽'인 'Society of Dilettanti(소사이어트 오브 딜레탕티)'는 이탈리아 문예여행자들의 '금수저 클럽'이었는데, 할 일 없이 매일매일 술이나 마시며 '고전미술'을 수집하고 돌려보는 한량들이었지만 결국 그들의 수집품들이 오늘날의 고전미술 컬렉션에 기여하기도 했단다. 이들의 젠 체하는 건배사 중 "Seria Ludo(세리아 루도)!"는 "심각한 문제도 놀면서 풀자!"는 의미의 라틴어 문구였다. 심각한 인간사를 진지하지 않게 놀면서 풀기에 '미술' 만한 좋은 '기술(Art / Ars / Techne)'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다수 대중이 공유하고 통제하는 진정한 '공공 미술관'에서는 더욱 더 "Seria Ludo"가 현실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술 또한 현대의 '공유재'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미술의 역사는 '고전미술'이나 '명작'들이 모여 만든 역사가 아니다. 미술사는 인류의 실패와 미완성으로 점철된 고뇌와 좌절의 역사이며, 그럼에도 이겨내고 버텨내게 되는, 끝도 없고, 완벽한 미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러나 '진지한 문제도 놀면서 풀 수 있는(Seria Ludo)' 인류의 생생한 이야기다.

***

1. [벌거벗은 미술관 - 양정무의 미술에세이], 양정무, <창비>, 2021.
2. [기묘한 미술관], 진병관, <빅피시>,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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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a Ludo(세리아 루도)!"
- [벌거벗은 미술관], 양정무, <창비>, 2021.
- [기묘한 미술관], 진병관, <빅피시>, 2021.


"고전(古典)은 영어 classic의 번역어인데, 그 어원은 라틴어 Classicus로 '최상의 클래스', 즉 최상의 계급에 속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중세... 이 시기 '클래식'이라는 용어는 주로 라틴어로 쓰인 중요한 문헌을 의미했습니다. '클래식'을 한자로 옮기면서 '고전(古典)', 즉 '옛날책'이라고 풀이한 건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겁니다... '고전미술'이라고 하면 우선적으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미술, 즉 기원전 8세기(호메로스)에서 서기 5세기(서로마 멸망)까지의 서양미술을 가리킵니다."
- [벌거벗은 미술관], <1장. 고전은 없다>, 양정무, 2021.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실패한 '혁명 정신'을 팔며 전 유럽을 침략한 후 '벨베데레의 아폴로'와 같은 고대 로마의 고전미술들은 이 절대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에 모인 고전미술 작품들은 제국주의 팽창의 필수품이었는데 한 세기 이상 지난 20세기에 제2차 세계대전을 벌였던 미술가 지망생 아돌프 히틀러가 수십만 점의 고전미술을 수집하고 집착한 이유 또한 나폴레옹이나 영국여왕과 다르지 않았다. 유럽을 지배하고자 했던 제국주의 독재자들과 파시스트들은 본인들이 유럽 문명의 '정신적 뿌리'를 차지한 '정통성' 있는 유일한 권력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벌거벗은 미술사], <3장. 반전의 박물관>). 
고대 그리스의 미술작품들은 눈에 보이는 신체를 최대한 이상화시켜서 표현했다. 인체의 비례에 집착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있는 것을 그린 이전의 이집트 미술과 다른 점이었다. 이는 알렉산더의 정복전쟁을 통해 동서양이 교류되는 헬레니즘 미술로 발전했고 이후 로마 시대에는 더욱 이상화된 그리스 미술은 수없이 모방되고 양식화되었으며 확대재생산되었다. 유럽인들의 문화적 근원이라 칭해지는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미술'의 탄생이다. 이후 유럽을 지배하려는 권력자들이 찾는 유럽의 '정통성'의 상징은 바로 이 '고전미술'이 되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대혁명 후 파리의 루브르 궁은 '공공 미술관'이 된다. 12세기 바이킹을 방어하는 요새로 지어졌던 루브르는 16세기부터 왕궁으로 사용되다가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로 궁전을 옮기면서 왕가의 미술품 수장고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혁명 후 혁명의회는 이 미술품들을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최초의 '공공 미술관'을 열었다. 혁명 공화국을 배반하고 황제가 되어 제정을 복고시킨 나폴레옹이 이 '공공 미술관'인 루브르 미술관을 약탈한 고전미술품들로 채운 것은 또 하나의 혁명의 '반전'이었다. 혁명적 공화국이 내세웠던 '자유'의 기치는 반동적 제국의 약탈로 '반전'되었고, 그에 따라 인류의 자유의지를 표현했던 '고전미술'은 제국주의 전리품이 되었다. 소수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확대된 '공공 미술관'의 역사는 한편으로 제국주의적 약탈의 역사라는 '반전'을 담고 있다.


미술이론가 양정무 교수의 [벌거벗은 미술관](2021)은 이른바 '고전미술'에 관한 에세이다. '인문성(humanity)'을 담아내고자 했던 '고전미술'을 주제로 그 뜻과 표정, 반전의 역사와 팬데믹 시대 속 의미 등을 여러 미술작품들을 함께 소개하면서 풀어낸다. 
'고전'이란 고대에는 '최상위 계급'(라틴어 Classicus)'의 전유물이었고 중세까지도 기독교 사제와 왕족이나 귀족 등이 배타적으로 소유하였으나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했으며 프랑스 대혁명 후 '공공'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형태로 더욱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보아온 고대 그리스 조각 같은 고전미술은 대부분이 로마에서 모방한 대리석 작품들이었다. 20세기 들어 고도화된 미술사학의 발전으로 원래 고대 그리스 조각은 채색된 형태였는데 거의 파괴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벨베데레의 아폴로'나 '밀로의 비너스', '라오콘 군상' 등의 정교한 흰색 조각품들은 18세기 미술고고학의 시조인 신고전주의 미학자 요한 요하임 빙켈만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복제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실각 후 각국의 요구로 미술품들을 다시 반환해야 했을 때 프랑스에서는 해당 미술품들을 다시 똑같이 복제하는 기술이 발전했다고 한다. 이후 이런 석고 조각들에 대한 '소묘', '드로잉(drawing)', '데생(dessin)'이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 근대 미술교육의 핵심이 되었고 이러한 방식이 일본을 통해 아시아까지 들어온 결과 '미대입시'의 기본실기가 '석고 데생'이 된 것이라고 한다.

'미술', 더 나아가 '고전미술'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벌거벗은 미술관]의 저자는 "고전미술로 집약되는 절대적인 '미'의 세계가 있다는 신념 하에 그 세계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것이 르네상스 이후 서양 근대미술의 전통"(같은책, <1장>)이라면서 '인문성(humanity)'을 담고자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는 미술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전은 없다'. 다만, 어디에도 구속됨 없이 고난과 어려움을 딛고 어디에도 없을지 모르는 '완벽한 미'를 구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과 '인문성'이 남는다. '고전'의 '신비성'과 허상을 벗어냄으로 인해 결국 '고전미술이란 없다'.


"서양 근대문화의 시작은 르네상스이고, 르네상스 문화의 핵심은 '휴머니즘'... '미술'은 'Art' 또는 'Fine Art'에 대한 번역어로, 그 어원을 따지자면 라틴어 'Ars'로 거슬러 갑니다. 여기서 라틴어 'Ars'는 그리스어로는 'Techne'로 즉, '기술' 또는 '좋은 기술'이 '미술'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는 것을 짚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술'의 의미는 '미' 보다는 '좋은 기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입니다."
- [벌거벗은 미술관], <에필로그>, 양정무, 2021,


'고전미술'의 '신비성'을 벗기고, 미술사의 '반전'을 돌아보며 중세 흑사병과 현대 스페인독감의 팬데믹을 그린 미술의 역사를 통해 미술 자체의 옷을 벗긴 저자는 그 속에서 '인문성(humanity)'을 찾아낸다. 19~20세기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이 말한 '3F', 즉 'Form Follows Function(형태는 기능을 따른다)'은 저자에 의하면 "Form Follows Humanity(형태는 인문성을 따른다)"로 정정된다. 팬데믹을 이겨내고자 했던 인류는 그 의지를 미술로 표현했고 이 미술 작품들은 더 많은 다수의 호응과 지지를 기반으로 인간의 실패도 표현했지만 희망 또한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지금의 인류 역사로까지 진화할 수 있도록 한 하나의 기제였다. 중세 흑사병의 격리기간 14일 중 주일과 휴일을 제외한 열흘 간 지어진 보카치오의 '데카메론(10일야화)'은 대중에게 널리 퍼지면서 인류 보편의 기괴하고 기묘한 이야기를 이어갔으며 현재도 수많은 '데카메론'들이 이어진다. 
문자보다 더 효과적인 미술은 '인문성'을 담아내는 주요한 형식이다.


문화콘텐츠 기획자였다가 프랑스로 건너가 문화해설사로 일하는 진병관은 [기묘한 미술관](2021)이라는 책에서 미술작품들의 여러 뒷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로코코 화가 프랑수아 부셰의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화> 속 디드로 백과사전을 통해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의 지원을 받은 '백과전서파'가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적 토대가 되어 결국 왕정을 무너뜨렸다는 이야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제단화 <쾌락의 정원>은 그 파격성으로 인해 결국 제단화로서의 본래 역할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인간사의 혼돈을 품고는 후세로 하여금 현재까지 미스터리의 반복적 근원이 되었다는 이야기 등, 흥미로운 미술관 이야기를 풀어낸다. 대중화된 '공공 미술관'의 미술사 이야기는 더 많은 이들에게 재미있는 소재다. 18세기 영국의 '여흥클럽'인 'Society of Dilettanti(소사이어트 오브 딜레탕티)'는 이탈리아 문예여행자들의 '금수저 클럽'이었는데, 할 일 없이 매일매일 술이나 마시며 '고전미술'을 수집하고 돌려보는 한량들이었지만 결국 그들의 수집품들이 오늘날의 고전미술 컬렉션에 기여하기도 했단다. 이들의 젠 체하는 건배사 중 "Seria Ludo(세리아 루도)!"는 "심각한 문제도 놀면서 풀자!"는 의미의 라틴어 문구였다. 심각한 인간사를 진지하지 않게 놀면서 풀기에 '미술' 만한 좋은 '기술(Art / Ars / Techne)'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다수 대중이 공유하고 통제하는 진정한 '공공 미술관'에서는 더욱 더 "Seria Ludo"가 현실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술 또한 현대의 '공유재'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미술의 역사는 '고전미술'이나 '명작'들이 모여 만든 역사가 아니다. 미술사는 인류의 실패와 미완성으로 점철된 고뇌와 좌절의 역사이며, 그럼에도 이겨내고 버텨내게 되는, 끝도 없고, 완벽한 미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러나 '진지한 문제도 놀면서 풀 수 있는(Seria Ludo)' 인류의 생생한 이야기다.

***

1. [벌거벗은 미술관 - 양정무의 미술에세이], 양정무, <창비>, 2021.
2. [기묘한 미술관], 진병관, <빅피시>,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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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주의 선언 - 극단적 불평등 시대에 급진적 정치를 위한 옹호론
바스카 선카라 지음, 미래를소유한사람들 편집부 옮김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21년 9월
평점 :
절판


새로울 것 없는 '사회주의 선언'의 새로움
-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2019), 바스카 선카라,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편집부 옮김, 2021.




"사회주의자들은 종종 미래에만 눈을 두는 이상주의자들로 오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사회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역사학의 학도들이었다.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도 이 전통을 따라야 한다.
...
우리의 긴급한 사명은 분명하다. 우리는 착취, 기후적인 대재앙, 악선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류를 위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자신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 <1장. 사회주의 시민의 어떤 하루>, 바스카 선카라, 2019.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8년 유럽 혁명을 앞두고 '사회주의' 정치강령을 담은 팜플렛을 쓴다.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과정에서 소외된 노동과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과 구제를 앞세운 '공상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노동자들 스스로 노동계급으로 각성하여 주체적으로 해방을 쟁취한다는 '과학적 사회주의' 강령의 고전이 된 이 저작이 바로 [공산당 선언] 또는 [공산주의자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이다.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공산당 선언], <1장>)인데,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계급의 탄생은 우연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생산의 사회화 사이의 모순으로 인한 필연적 결과이며,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이 최고조에 이르면 인류 역사에서 계급투쟁을 영원히 끝내는 역사적 사명을 절대다수 노동계급이 지게 된다는 이 혁명강령에서, 노동계급의 친구이며 동지인 '과학적 사회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는 "노동계급의 당면한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싸우는 동시에, 현재의 운동 속에서 이 운동의 '미래'를 보여주어야"([공산당 선언], <4장>) 하는 임무를 맡는다.

'공산주의자' 또는 그보다 폭넓게 '사회주의자'는 그래서 '미래'의 유토피아를, 그 이상적인 다음 체제를 꿈꾸는 자들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미국의 급진주의 잡지 <자코뱅>의 창립자이자 편집자인 바스카 선카라(Bhaska Sunkara)에 의하면 이는 '오해'이며, 사회주의자는 원래부터 '역사학도'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류의 역사에서 '평등'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사회주의의 교훈과 분석, 실천(행동)의 준거로 삼을 '전통'이 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그 역사로부터 배워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바스카 선카라가 2019년에 지구상 최강의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사회주의 선언(The Socialist Manifesto)]이라는 책을 냈을 때, 그 부제는 <극단적 불평등 시대에 급진적 정치를 위한 옹호론(The Case for Radical Politics in an Era of Extreme Inequality)>으로 삼았다. 토마 피케티의 주제인 '불평등'이 역시 문제였고, 21세기 신자유주의적 세계 금융자본주의 체제는 극단적 '불평등'으로 무너지기 시작한지 오래였다. 1980년대말 자본주의 승리로서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2018년에 본인의 헛소리를 인정했다는데, '불평등'을 먹고자란 자본주의는 이미 예전처럼 고쳐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930년대의 케인즈주의나 이후 1970년대까지의 사회민주주의를 다시 불러온들 회생불가의 체제가 되었다. 이대로 가면 1%와 99%의 투쟁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바스카 선카라는 '자본주의가 최고로 발전한 곳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분석한 마르크스주의 분석틀을 다시금 소환하며 2019년의 미국에서 [사회주의 선언]을 출간했는데, 2021년 우리 국역은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이 되었다.


"[공산당 선언]은 정치강령을 대중화하기 위하여 (1848년) 세계혁명 직전에 쓰여진 짧은 문서... 그것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발전시키고 노동계급을 '미래'의 전환을 가져올 핵심에 있는 행위자로 기술한 것이다... 1850년대와 1860년대에 '노동조합주의'가 확산되었을 때 마르크스는 이 운동이 가진 잠재력을 보았다... 그에게 이 (노동조합) 운동은 노동자를 비극에서 구원할 수 있는 투쟁의 필요조건으로 보았다."
-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 <2장. 무덤을 파는 사람들>, 바스카 선카라, 2019.


'역사학도'인 사회주의자답게 바스카 선카라는 '과학적 사회주의' 창시자인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부터 시작하여 사회주의 역사를 <1부>에 싣고 있다. 역사의 필연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의 자본가계급은 생산수단의 독점과 잉여가치 창출의 과정인 '착취'를 통해 노동계급을 대규모로 양산함으로써 "스스로 무덤을 파고 명부의 문을 연다"([공산당 선언]). 선카라의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 <1부>의 <2장. 무덤을 파는 사람들>에서는 노동계급의 주체적 운동을 강조한 마르크스주의를 다룬다. <3장. 우리가 상실한 미래>에서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초기 혁명적 역사에서 세계대전을 거치며 수정된 자본주의 체제 내 개량의 역사를, <4장. 소수의 승리>에서는 독일 사민당의 개량화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 러시아 볼셰비키혁명과 그 실패를 다룬다. <5장. 실패한 신>에서는 자본주의 체제 내 복지국가의 길을 갔으나 "원칙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사회주의적 지평을 공유"하며 "잠정적 유토피아"를 자처한 스웨덴 사회민주주의를 돌아본다. 중국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다룬 <6장. 제3세계 혁명>을 거쳐 <7장. 사회주의와 미국>에서는 저자 본인이 살고 있는 세계 최강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독일 사회주의자 베르너 좀바르트의 질문이었던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나?"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남북전쟁 이후 근대 노예노동을 해체하고 산업 노동력을 대거 확보한 북군의 임무는 급진적 사회주의 봉기를 막는 것이 되었고, 19세기말 미국 철도노동자 유진 뎁스로 대표되던 미국 사회주의당의 투쟁은 결국 공화-민주 양당 체제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는데, 선카라에 의하면 그 이유는 유럽이나 러시아 등과는 다르게 미국의 사회주의는 강력한 이념적 통일성이 없이 넓은 지역에서 다양한 언어로 느슨하게 연결된 일종의 "폭넓은 정치동맹"(같은책, <7장>)이었기 때문으로 보는 듯 하다. 한편으로 20세기 초까지 미국의 대중적 사회주의자의 대표였던 유진 뎁스의 '유연함'을 언급하고 미국에서 좌파가 주류가 되려면 "일상에 뿌리를 둔 우리 자신의 언어로 표현"(같은책, <7장>)된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저자의 논지는 미국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어쩐지 일목요연하지 않다. 아마도 '양당주의' 정치체제가 굳어진 미국의 현실과 사회주의 이념 사이의 "외줄타기"의 모호함의 덫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 책의 <1부>는 마르크스 이후 현대 미국까지의 사회주의 통사를 다루되 모든 것을 말하려 하지는 않고 짧게 흐름만 건드리고 있다. 마치 중국 역사가 이중텐의 [중국통사] 시리즈처럼 몇 가지 사안 중심으로 간략히 서술한다. '사회주의'에 대해 60% 가까이 호감을 표시한 21세기 미국의 신세대가 접근하기 쉽게 의도한 듯 한 서술이다.
사회주의와 진보정당 운동의 세부적인 역사를 읽어보려면 장석준의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2019)가 추천할 만 하다.


"사회주의적 전제는 명확하다. 그 핵심적인 것은 인민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품위와 존중, 공정한 대우를 바란다는 점이다. '민주적인 계급정치'는 공동의 반대자에 맞서서 인민을 단결시키고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최선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모두를 인종, 성, 편견에 뿌리를 둔 압제에 대항하는 긴 대열에 참여시킨다...
... 운동 내부에 '사회주의자들'이 있어야 운동의 전망을 제시하고 운동을 추진할 수 있다."
-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 <9장.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바스카 선카라, 2019.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는 미국의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를 피해갈 수 없다. 바스카 선카라가 이 책의 <2부>에서 평하는 버니 샌더스는 "근대적인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같은책, <8장. 맥의 귀환>). 즉, 체제 내 개량으로 선회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폐기한 '계급투쟁'을 샌더스는 미국 사회에서 다시 복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샌더스는 극단적 불평등에 분노한 다수 대중에게 엘리트들과 투쟁하여 그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오자고 주장한다. 모두 함께 미국을 위해 일하고 '국민통합'으로 국가를 살리자는 게 아니라 '계급투쟁'을 다시금 복원하여 절대 다수가 살만한 국가를 만들자고 외친다. 현대의 제대로 된 '계급정치'가 미국에 의외의 한방을 날리고 있다.

바스카 선카라는 한편으로 계급투쟁은 해본 역사가 없던 영국의 노동당에서 영국인 다수의 분노와 참여를 업은 제레미 코빈의 등극을 조명한다. 코빈은 미국의 샌더스처럼 평생 사회주의적 일관성을 견지하고 노동계급과 함께한 인물로 '코비니즘'이 영국 노동당을 통해 제시한 경제강령은 "자본주의의 미래를 내다보는 사회민주주의적 정치비전을 되살렸다"(같은책, <8장>). 지배계급의 조롱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코비니즘은 체제 내 개혁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본의 소유권과 통제에 도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같은책, <8장>). 비록 브렉시트 정국에서 실각하기는 했으나 다수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믿고 끊임없이 자본의 소유권에 도전하고 자본의 통제를 시도하는 코비니즘의 정치는 저자의 눈에 현대적 '사회주의 선언'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모든 사회주의적 전진은 세 가지 요소(대중정당, 사회운동적 기반, 노동계급의 참여)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 분산된 산발적인 저항을 사회주의 운동으로 통합하고 발전시키는 '노동계급 정당'과 '노동조합'이 필요하다."
-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 <9장.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바스카 선카라, 2019.


<1부>에서 사회주의 역사를 일별한 후, 신자유주의를 사기꾼 '맥(The Mack)'으로 은유한 이 책 <2부>의 <8장. 맥의 귀환>에서 1980년대 이후 세계 자본주의 지배이념이 된 신자유주의에 도전하는 가장 왼쪽의 버니 샌더스의 '계급정치'와 제레미 코빈의 '대안정치'를 평가한 후 바스카 선카라는 다시 '사회주의 원칙'으로 돌아온다. 즉, 사회주의가 전면에 나서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는 강력한 대중적 '노동자 정당', 둘째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로 운영되는 사회운동적 기반(조직), 셋째는 마르크스로부터 강조된 강력한 '노동조합 운동'이다. 의아스럽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주의 선언'의 요소가 왜 2백년 전 이야기와 같은가.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 중 하나로 "느슨한 정치동맹체"를 지목한 저자는 그리스 시리자나 스페인 포데모스 등의 좌파연합체보다는 확실히 강력한 노동자 중심의 대중정당에 방점을 찍고 있다. 또 하나 필요한 것이 노동조합의 '민주화'다. 이 전통적인 두 요소를 관통하는 중요한 원리는 바로 아래로부터의 대중 '민주주의'다.

사회주의자는 기본적으로 '역사학도'라고 했다. 진정한 역사학은 해당 시기를 고정된 것으로 전제하지 않는다. 원칙은 그대로라도 시대적 조건이 다르면 그 원칙이 실현되는 형태가 다르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폭력혁명'을 주장했다면 그 배경은 평등한 보통선거로 정치참여가 불가능했던 19세기의 열악한 조건이 있었다. 독일 사민당 역사에서 칼 카우츠키가 19세기말 에르푸르트 강령을 통해 한층 더 낙관적인 계급투쟁과 생산수단 사회화를 주장했던 배경에는 자본주의 생산력의 낙관적 발전과 의회의 다수점령을 통한 노동계급의 참정권 확대의 조건이 있었다. 20세기초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이 가능했다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전쟁터에서 죽느냐 아니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들다가 죽느냐 둘 중 하나의 극단적 선택지를 쥔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민주주의라는 조건이 있었다. 스웨덴 사민당이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벗어나 자본의 이윤과 함께 동반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한 배경에는 세계대전으로 피해를 덜 입었고 그로 인해 자본의 파괴가 덜했던 스웨덴의 조건이 한 몫 했다. '혁명'이란 대규모의 전면적 파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인데, 두 차례 세계대전은 자본주의적 전쟁경제를 강화하기도 했지만 이런 대규모 자본파괴를 동반했다.

지금 다시 19세기의 사회주의 원칙인 '강력한 산별노조'와 '강력한 대중적 진보정당'을 '사회주의 선언'의 조건으로 내걸 수 있는 배경은, 우리 모두들 알고 있다. 극단적으로 치닫는 '불평등' 구조와 그럼에도 생산력 발전은 정체되며 기후위기로 인한 대재앙이 예고되는 세상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동안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해 정보네트워크 등 사회기반시설이 '공유재'의 경향성을 가지면서 더 많은 다수가 연대하고 단결할 수 있는 '대중 민주주의'가 무한 확장된다는 점이다. 다수가 생산한 '공유재'를 다수가 전유함으로써 노동조합의 관료성이 허물어지고 진보정당도 민주화되는 조건이라면, 신세대 '사회주의 선언'의 조건이 다시금 '진보정당'과 '노동조합', 그리고 '민주주의'로 재소환되어도 우리 다수가 얻어올 세상은 이전 세기와 달라질 수 있다. 
역시 미국의 정치 평론가인 아론 바스타니(Aaron Bastani)가 2019년에 매우 낙관적으로 주장한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FALC : Fully Automated Luxury Communism)'라는 놀라운 작명의 [21세기 공산주의 선언]의 시대적 배경도 동일하다. 동시대 사람인 바스카 선카라가 [사회주의 선언]의 결론(<9장>)으로 내건 '15개 테제들'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해도 변화된 현재의 시대적 배경에서 변치 않는 '사회주의 선언'의 원칙으로 돌아갈 필요는 있을지 모른다.
전혀 새로울 것 없어 보이는 '사회주의 선언'은 달라진 시대적 배경을 조건으로 할 때 다시금 새로워진다.

이제 비로소,
잃을 것은 낡은 체제요, 
얻을 것은 새로운 세계다.

***

1.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The Socialist Manifesto)](2019), Bhaska Sunkara,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편집부 옮김, 2021.
2. [21세기 공산주의 선언 - FALC](2019), Aaron Bastani, 김민수/윤종은 옮김, <황소걸음>, 2020.
3.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1848.
4. [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황광우/장석준, <실천문학사>, 2003.
5.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 - ‘큰 개혁’과 ‘작은 혁명’들의 이야기], 장석준, <서해문집>,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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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게임 -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숨겨진 전쟁
피터 홉커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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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vs. '볼샤야 이그라(Bolshaya Igra)'
- [그레이트 게임](1990), 피터 홉커크, 정영목 옮김, <사계절>, 2008.


"...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그 출발선에는 1810년의 헨리 포팅어와 찰스 크리스티가 서 있고, 거의 100년 뒤의 프랜시스 영허즈번드가 마감을 한다. 이들에 맞선 러시아의 선수들도 영국인들에 전혀 뒤질 것이 없었는데, 이들은 용맹스러운 무라비요프와 은밀한 빗케비치에서 시작하여 가공할 그롬쳅스키와 교활한 바드마예프에서 끝이 난다... '볼샤야 이그라(Bolshaya Igra)'..."
- [그레이트 게임], <프롤로그>, 피터 홉커크, 1990.


1981년에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는 책으로 영국 도서 논픽션상을 수상한 피터 홉커크(1930~2014)는 1990년 소비에트러시아연방이 해체되던 시기에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책을 썼다. 그리고 21세기 초 미국에서 일어난 알 카에다 '9.11 테러' 후 나토군이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후인 2006년 개정판을 냈다.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 지역은 2021년 미군의 철수를 계기로 다시금 '핫 이슈'가 되고 있다.

영국의 '중앙아시아' 전문 탐험가이자 작가였던 피터 홉커크는 러시아 '제국'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대영 '제국'의 신민이자, '그레이트 게임'의 '전진파'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충실한 계승자였다. 그는 20세기 중반 영국군의 장교로서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근무했으며 신문사의 통신원으로서 중앙아시아 일대를 두루 다니며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아마도 19세기에 태어났다면 '그레이트 게임'의 영국 선수들 중 하나가 되었을 피터 홉커크는 대놓고 영국을 옹호하지도, 적국 러시아를 비난하지도 않은 채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고자 한다. 1981년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돈황 유적을 약탈해 간 서양 탐험가들을 동양인이 부른 대로 '서양 악마들(Foreign Devils)'이라 칭하지만 그들의 '악행'을 비난하지 않는 것처럼, 1990년의 [그레이트 게임]에서는 영-러간 '제국주의' 전쟁의 서막을 소개하면서도 균형적 시각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중간중간 모국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점은 어쩔 수 없는 개인들의 한계다. 요동과 한반도의 후예인 우리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식민사관'에 동조할 수 없는 그런 것과 같다.

19세기 영국의 여왕과 러시아의 차르는 '제국'의 영토를 넓히는 치열한 경쟁을 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중근동의 오스만 투르크와 페르시아를 두고 벌인 크림전쟁과 같은 실제 유혈 전쟁도 있었고, 영국의 주요 식민지 인도 북부접경인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 일대를 두고 '첩보전쟁'을 이어갔다. 호전적인 부족들이 '칸'을 자처하며 할거하던 중앙아시아는 험한 지형과 약탈의 위험으로 인해 유럽인들의 지도에 공백 상태인 '미지의 땅'이었다. 러시아는 지속적인 남방정책을 추진했고 영국은 식민지 인도를 지키기 위해 러시아를 광적으로 견제했다. 천년 전까지 동서양의 통로였던 '실크로드'는 해양 무역과 신대륙 시장의 확장 등으로 이미 끊긴 채 지도로 그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곳에 영국과 러시아의 모험심과 공명심 높은 젊은 장교들이 투입되는데, 피터 홉커크는 영국과 러시아의 소리없는 '제국주의' 전쟁을 배경으로 하되 미지의 세계에서 수없이 죽어간 젊은 탐험가들 개인을 중심으로 서술을 이어간다. 
그들의 조국이 벌이기 시작하던 '제국주의' 전쟁 자체가 세계지도를 펼치고 대자본들과 국가권력들이 벌이는 무모한 '도박'이었는데, 이 용감하고 대담한 젊은 스파이 개인들에게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모험은 한탕의 '큰 도박'이었다. 
영국인들에게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었도, 러시아인들에게는 '볼샤야 이그라(Bolshaya Igra : 큰 도박)'였다.


"번스와 맥노튼에게도, 또 코널리와 스토다트에게도 '그레이트 게임'은 끝이 났다. 모두 그들 자신이 열렬하게 옹호하고 또 입안한 '전진정책'의 희생자들이었다... 엘드라드 포팅어... 존 코널리 중위... 이렇게 해서 여섯명의 저명한 영국 선수들이 윌리엄 무어크로프트, 그리고 러시아 선수들인 그리보예도프와 빗케비치의 뒤를 이어 잇따라 '그레이트 게임'의 영웅들을 위해 마련된 '발할라'에 들어갔다. 물론 이들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 [그레이트 게임], <코널리와 스토다트의 최후>, 피터 홉커크, 1990.


러시아의 유라시아 정복욕을 잘 아는 프랑스 나폴레옹 1세는 이미 19세기 초에 중앙아시아를 장악하여 영국의 식민지 인도를 침략하고 유라시아를 프랑스와 러시아가 나눠먹자는 제안을 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와 등을 지고 아시아는 커녕 유럽에서 패퇴하고 있던 시기 영국의 주적은 러시아가 되었는데 1810년 찰스 크리스티 대위와 헨리 포팅어 중위가 순례자 복장을 하고 각각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었을 때 중앙아시아에서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은 시작되었다. 물론 러시아의 지리학자와 군인들은 수없이 다녀갔을지 모르지만 '그레이트 게임'은 영국이 인도 북부 국경을 넘고 펀자브 지역을 넘어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한 이후부터 이야기가 된다. '제국'에 의해 아프가니스탄과 주변 지역의 정권이 좌우된다는 요소가 이 도박판의 주요 변수였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의 히바, 부하라는 물론, 옛 실크로드 상의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및 코칸트, 중국(청나라)으로 이어지는 카슈가르와 야르칸트 등의 '아미르(제후)' 군소국가에 상인이나 순례자로 잠입했다가 죽어간 피끓던 젊은 '선수들'을 생각한다. 이후 20세기 들어 좀더 동쪽으로 진출한 스벤 헤딘(스웨덴), 폰 르코크(독일), 오렐 스타인(영국), 폴 펠리오(프랑스), 랭던 워너(미국) 등 '실크로드의 악마들'은 비록 '제국주의'를 등에 업었지만 '학자'였다. '학자'나 '지식인'이 '제국주의'의 더 나쁜 첨병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인류 문명 보존의 '사명' 같은 것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그레이트 게임'의 초기 첩보전에는 젊은 장교 뿐이었다. 전투에서 공을 세우지 못한 군인들의 공명심과 모험심이 주된 동력이었고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용어를 처음 썼던 아서 코널리 중위 또한 그칠 줄 모르는 모험 끝에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후 수많은 '선수'들이 기꺼이 '제국주의'의 제물이 되었는데, 물론 운좋게 살아남은 젊은 장교들은 보고서 기록의 책 출간과 장성 진급을 통해 '대박'이 났다. 피터 홉커크의 생생한 기록 또한 이 탐험가들의 기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국과 러시아의 위대한 모험가들은 용감하고 대담했으며 중앙아시아의 권력자 앞이나 경쟁자들 곁에서도 유연했고 또 의연했다. 삶과 죽음에 연연하지 않고 밀어붙인 그들의 탐험정신은 결국 미지의 땅을 세계지도에 그릴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결국 이 위대한 정신들은 '제국주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으니 본국의 정세에 따라 그들의 모험이 빛을 발할 수도, 조용히 사장될 수도 있었다. 영국의 강경 '매파'는 소위 '전진정책'을 지지한 '전진파'로서 '러시아 도깨비'에 대한 끊임없는 공포증으로 인도를 지키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정권들을 조종하고 이들을 앞세워 중앙아시아를 영-러 전쟁판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들이 제국의 권력을 장악하면 불나방 같은 젊은이들이 더 많이 첩보전장에서 죽어가거나 공적을 남겼다. 
그렇게 중앙아시아의 '그레이트 게임' 또는 '볼샤야 이그라'는 땅따먹기 도박판이자 개인적 성공의 판돈도 걸렸던 한편, 치열하지만 소리없는 대규모 전쟁이었다.


"1907년 8월... '그레이트 게임'은 이제 급속하게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영국과 러시아간) 이 합의는 이 지역에서 양국의 입장 차이를 영원히 해소할 뿐 아니라 독일의 동진을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또 앞으로는 러시아가 터키 해협들을 지배하고자 할 때 영국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제 영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독일이 그곳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1907년의 영-러 협약은 '그레이트 게임'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 [그레이트 게임], <게임종료>, 피터 홉커크, 1990.


결국 '그레이트 게임'을 종료시킨 것은 영국과 러시아의 야욕에 도전하는 새로운 '제국'의 등장이었다.
유럽에서 독일(프로이센)의 성장과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득세였다. 당시까지 미국은 구대륙에 대한 힘을 크게 미치지 못했고, 러시아 샹트페테르부르크와 친하게 지내려던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영국의 주요 경쟁자로 부상했다. 영국의 관심사는 예전 프랑스 나폴레옹이 시도했던 것처럼 아시아에 독일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되었으며 이를 위해 예전의 적이었던 러시아와 손을 잡는 것이었다. 때마침 러시아의 극동 함대는 1905년 일본에게 대패를 당했고(러-일전쟁), 소비에트 혁명운동의 시작('피의 일요일') 등 대내외적 난관으로 인해 러시아의 남방정책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황이 겹쳐 영국과 러시아 두 '제국'은 1907년 '그레이트 게임'을 종료시키는 데 합의하게 된다.

이후 유럽의 구세력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합스부르크 왕국을 앞세운 독일과 러시아가 '유럽의 병자'라 칭한 오스만 투르크의 부흥을 막고자 영국과 러시아는 한 진영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른다. 
1차 대전의 결과로 러시아는 1917년 소비에트혁명을 야기했는데, 소비에트러시아연방은 이전 차르가 맺은 조약 일체를 부정했다. 그러므로 '그레이트 게임'의 종료 조건으로 러시아 차르가 인정했던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점령권은 무효화되었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왕국들은 사회주의 '혁명지대'로 바뀌었다. 1979년에야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빠져나갔을 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탈레반'이 득세했다지만, 이들은 아마도 '제국주의' 국가들이 중앙아시아를 '세계지도'에 채워넣기 위해 잠입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 지역에서 살아가던 주역들이라는 점에는 틀림없다. '그레이트 게임'이 한창이던 시절에도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이나 러시아가 장악할 수 없는지역이었고, 20세기의 소련도, 21세기의 미국도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지 못했다. 피터 홉커크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이길 수 없는 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자신들이 선택한 전장에서는 과거의 막강한 전투능력을 조금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속하게 최신 전쟁기술까지 끌어안는"(이상, [그레이트 게임], <프롤로그>) 그들의 힘을 평가하고 있다. 이것이 '림랜드(주변부)'의 저력이다.

'탈레반'의 '인권탄압'은 전세계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는 맞다. 그러나 서방의 뉴스매체가 내보내는 정보가 과연 현실 사정을 제대로 반영한 것인지 또한 의문스럽기도 하다. [유라시아 견문](2018)을 통해 이슬람사회의 독립적 역사와 그들의 '영성'을 강조한 이병한 원광대 교수는 해당 지역의 현장에서 지역언론은 '제국주의'적 국제언론의 논조와 큰 차이가 있다는 생생한 증언을 한다. 미군의 철수로 인해 '독립정권'을 세운 아프가니스탄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 국제언론의 그것을 배경으로 하지는 않았는가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19~20세기 영국('시파워')과 러시아('랜드파워')의 소리없는 전쟁에 이어 20~21세기 미국의 '시파워(sea-power)'와 러시아 및 중국의 '랜드파워(land-power)'의 지정학적 대립은 여전히 가장자리 '림랜드(rim-land)'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고대 유목민들과 중세 몽골 제국 등이 활약하며 동서남북을 이어주던 이 주변부 '림랜드'는 오랜 동안 이슬람인들이 자취를 남기며 문명교류를 활발히 만들어간 지역이었다. '제국주의' 침탈로 인해 부침을 겪은 동아시아의 '림랜드'인 우리 요동-한반도인으로서 중앙아시아가 남의 역사 같지 않은 이유다.

한편으로, '시파워'와 '랜드파워'가 접속하는 가장자리 주변부의 우리 '림랜드' 요동-한반도 또한 중앙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처럼 '제국주의'가 결코 "이길 수 없는" 대상이라는 사실 또한 기억하기로 한다.
수천 년간 지역민인 우리들 외에 그 어떤 외부 세력도 한반도를 오롯이 지배하지는 못했다.

***

1.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On Secret Srevice in High Asia)](1990,2006), Peter Hopkirk, 정영목 옮김, <사계절>, 2008.
2. [실크로드의 악마들](1981), 피터 홉커크, 김영종 옮김, <사계절>, 2000.
3. [유라시아 견문 2 - 히말라야에서 지중해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8.
4. [지정학의 힘], 김동기, <아카넷>,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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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역사 - 홀연히 사라진 4천 년 역사의 위대한 문명도시를 다시 만나다 더숲히스토리
카렌 라드너 지음, 서경의 옮김, 유흥태 감수 / 더숲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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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의 '프로토 타입'
- [바빌론의 역사](2020), 카렌 라드너, 서경의 옮김, <더숲>, 2021.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만나면서 남쪽 페르시아만으로 흘러가는 지점은 이라크 남부에 위치한 광대한 범람원의 북부지역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두 강은 많은 지류와 수로를 만나서 삼각주를 이룬다. 봄이 되면 자그로스산맥과 토로스산맥에서 눈과 얼음이 녹은 물이 평야에 이른다. 그리고 수로가 범람하면서 소중한 침전물이 함유된 진흙을 땅에 퇴적시킨다. 이는 천연비료 역할을 하여 곡류(보리와 밀)를 경작하고 대추야자를 재배하기 위한 최상의 환경을 조성한다.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없었다면 강우량이 적은 이곳은 아마도 사막이 되었을 것이다."
- [바빌론의 역사], <1. 바빌론의 시대와 공간>, 카렌 라드너, 2020.


인류 문명사의 '최초'를 생각한다.
'최초'의 문자, '최초'의 숫자, '최초'의 족장, '최초'의 국가, '최초'의 제국 등 '문명'을 이루는 제도와 문화의 '프로토 타입(proto-type)'이다. 
약 1만년 전 정착과 농경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부터 큰 강물의 범람으로 비옥한 토지에 기반한 공동체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황하', '인더스강', '나일강'의 '4대 문명 발상지'로 지목된다. 이 중 대부분 문명의 '원형'인 '프로토 타입'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의 삼각주인 이른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그 '최초'의 시작점을 둔다.
이라크 지역 일대인 이 '중간 지대'는 동서남방의 각 문명이 교차하는 지역이었다. 그로 인해 점토 서판에 기록된 문자와 회계장부, 5천년 전 '최초'의 언어와 문자인 '수메르어'와 '최초'의 세습체제 '우루크' 왕조, 4천5백년 전 '아카드어'와 '최초'의 도시국가 '아카드', 4천년 전 히브리족의 조상인 '최초'의 족장 '아브람', 3천5백년 전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부터 북부중앙의 히타이트와 아시리아 및 바빌로니아, 남부 '해상국가'들의 교류와 통혼을 통한 철기 문명의 발전, 배타적 유일신교의 원형인 마르두크로부터 '유대교'의 구약과 '최초'의 제국인 페르시아 문명 등 인류 문명의 '프로토 타입'이 바로 '중간 지대'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있다.

4대 문명지인 큰 강은 범람하여 토지를 비옥하게 했는데, 유프라테스-티그리스-다얄라강 삼각주는 건조한 지대지만 상류의 자그로스산맥과 토로스산맥의 눈이 녹아내리는 봄에 범람하면서 옥토를 만든다고 한다. 이 지역을 이르는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이 자연범람과 관개를 위해 점성술(또는 천문학)과 "정교한 산수능력"을 발전시켰는데, 현재까지 시간과 날짜의 단위, 각도의 측량단위(360도)의 기준이 되는 '60진법'이 바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서 "도시 혁명"이 시작되면서 "촌락에서 도시로, 혈연사회에서 국가로 발전"된 사회체제는 "사회적 계층화, 기술의 전문화, 관료체제의 발달과 그에 따른 문자의 발명"(이상 같은책, <1장>)이 뒤따른다. 

메소포타미아의 대표적 도시는 '바빌론(Babylon)'이다. 우르와 우르크, 아카드, 아시리아의 아수르와 니네베도 있지만, '바빌로니아'의 정치적 중심도시 '바빌론'이 가장 유명하다. 1978년 보니엠의 노래 <By the Rivers of Babylon>에서 바빌론의 강가에서 떠올린 고향에 대한 향수는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이 일대 정복과정에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바빌론으로 차출된 유대인 노동자들의 구슬픈 심정이 모티브다. [구약]의 <다니엘서>에 나오는 이 '바빌론 유수'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슬픔이었고, 바빌로니아 입장에서는 찬란했던 역사의 한 장이었겠다. 기원전 6~7세기경 아시리아로부터 바빌로니아를 다시 독립시키고 나아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면서 '공중정원' 등의 거대유적을 만들어낸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구약]의 '느부갓네살'이다. 

기원전 3천년대 최초의 도시국가 아카드 왕국의 총독 처소로 처음 언급된 '바빌론'은 '신의 문'이라는 뜻의 아카드어 '바빌림'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말이다. 바빌론은 그로부터 천년후 우르 왕국의 지방 중심지가 되었다가 기원전 18세기 그 유명한 함무라비 왕의 바빌로니아의 수도가 된다. 약 백년 후에는 북부의 히타이트 철기문명에 의해 파괴된 바빌로니아는 용병군대가 권력을 잡은 카시트왕조가 지역의 남부까지 장악했지만, 기원전 13세기 아시리아에 의해 정복된다. 기원전 12세기에 네부카드네자르 1세가 다시 바빌로니아를 복원하고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사르곤 왕이 바빌론의 왕이 되기도 했다. 이후 기원전 6~7세기 바빌론의 나보폴라사르와 위에 언급한 '바빌론 유수'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바빌로니아의 재번영을 이끌었다. 히타이트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가 '바빌론'을 중심으로 패권을 이어가던 열국시대였겠는데, 우리 동아시아식으로 보면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제가 복속시키기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바빌로니아-아시리아의 '남북국' 시대에 북방의 하타이트 철기인들이 대립과 병립을 하던 시대로 생각된다. 이 문명은 결국 기원전 331년, 마케도니아 왕인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 멸망한다. 그러나 유구한 문명의 역사를 이어온 바빌론 사람들은 바빌로니아가 망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일신 마르두크를 숭배하며 이어온 바빌론의 역사를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이 물려받아 지킬 것이라 생각했다. 알렉산더가 요절한 궁전은 이후 기원후 2세기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경건한 마음으로 찾아왔고, 19세기에 프로이센의 빌헬름 2세가 발굴단을 보냈으며 20세기 말까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대대적인 복원작업을 했다는데, 이 권력자들의 유적지 발굴과 복원 목적은 자신의 권력을 신성화하고 더욱 공고화하기 위함이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가혹했을 대대적 토목공사와 주변 민족민중들에 대한 잔혹한 착취는 결국 후대에게는 역사적 문명유적을 남긴다. 진시황의 만리장성과 제국의 순행도로, 수양제의 대운하 뱃놀이가 당대 민중들의 고혈을 깊은 지하에 묻은 채 후대에게 주요한 역사문명 유산을 남기기도 했듯이 말이다.


"바빌론에 대한 카시트 왕조의 오랜 통치가 끝난 후 격동의 기원전 12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마르두크'는 바빌론의 왕위를 하사하는 땅의 주인이 되었다... '마르두크'가 왕위를 승계받는 자가 아니라 승리자에게 왕권을 하사한다는 개념은 매우 실용적이면서도 새로운 개념이었다. 이로 인해 바빌론은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오랜 관습을 따르는 이웃왕국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바빌론의 새로운 개념은 누가 왕위에 오르는가의 문제에 있어서 더 큰 융통성을 제공했으며, 이러한 실용적 탄력성은 정치적 주체의 역할을 하는 (마르두크의) 에산길라 신전 공동체와 함께 바빌론의 정치와 역사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바빌론의 왕은 전적으로 신(마르두크)에 의해 결정되며, 왕위에 오른 자는 바빌론 주민의 권리를 존중하는 의사로 발전했다."
- [바빌론의 역사], <5. 신이 바빌론의 왕을 정하다>, 카렌 라드너, 2020.


인류는 사회체제와 국가체계를 통해 계급지배의 역사를 유지했고, 이 과정에서 주요한 '인지 혁명'으로 '신'을 창조해 낸다. 동아시아는 오래 전부터 '하늘(天;텡그리)'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영웅들이 다들 '알'에서 태어난 이유도 '하늘'을 나는 '새'를 추앙했기 때문이다. 서방은 그리스 신화의 다신교와 샤머니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이분법 등이 산재했겠으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마르두크라는 어린 신이 바다 괴물을 물리치고는 세상의 문명을 재창조하며 '유일신'의 자리를 차지한다. 흡사 제우스가 티타노마키아 대전쟁을 통해 신의 세계를 장악한 것과 비슷하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마르두크'는 좀더 배타적이었는지 이후 이 지역에서 유래한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유일신'의 성격이 더욱 강하다. 

마르두크는 세 번 바빌론을 떠나 납치당한다. 기원전 16세기 히타이트, 기원전 13세기 아시리아, 기원전 12세기 이란 남서부 엘람 왕국에 의해서다. '마르두크의 예언'에 따라 이 왕국들을 멸하고 다시 바빌론으로 돌아온 '마르두크'는 기원전 12세기경 바빌론에 '새로운 개념'을 정착시킨다. 즉, 왕위의 단순한 혈통적 계승을 넘어 '마르두크'로부터 '천명'을 받은 자가 권력을 잡는다는 신개념이었다.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었고 세속과 천상이 분리되기는 했으나 고대에 '과학'과 '철학'의 자리를 대신했던 '종교'와 '영성'을 공유한 다수 민중에 의해 권력자들이 교체될 수도 있는 '혁명'의 맹아 또한 배태하기 시작했다. 
"전적으로 신에 의해 결정"된 바빌론의 왕이 마르두크의 눈치를 보며 이 유일신이 보호해주는 이 다수 "바빌론 주민의 권리를 존중하는 의식으로 발전"(이상 같은책, <5장>)했다는 것은, 다수 민중들의 정서와 삶에 역행하는 권력자는 언제든 쫓겨날 수 있다는 '혁명'의 가능성이었다. 물론 지금으로부터 3천년 이전의 고대에는 히타이트-아시리아-바빌로니아-남부 해상국들의 열국의 쟁탈로 권력의 '수평 이동'의 형태였다. 이는 초한전쟁 이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나 우리의 삼국시대까지 보이던 권력이동과 왕조교체의 양상이었다. 아무튼, 유일신 마르두크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신개념'에 따라 바빌론은 아시리아에 의해 마르두크 신상을 빼앗긴 시기부터 이후 페르시아 지배기인 키루스와 다리우스, 크세르크세스 치하에서 끊임없이 반란을 시도했다. 마르두크에 의해 '신명'을 받은 다수의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 n세'들은 계속 반란을 시도했고 결국 페르시아 왕들에게 진압되었다. 기층 민중 출신의 반란으로 권력의 '수직 이동'의 '혁명'이 아닌 귀족과 왕족 중심의 '수평 이동' 쿠데타였지만, 마르두크를 믿는 다수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그 어떤 권력자도 '바빌론'의 왕을 자처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의 공화정에서 '민주주의'라는 '유일신'을 두고 이뤄지는 권력투쟁의 원형, '프로토 타입(proto-type)'이다.

물론,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는 '바빌론'을 정복 후 '마르두크'를 버렸고,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또한 마르두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페르시아 왕들과 알렉산더는 본인이 곧 신(神) 자체가 되고자 했다. 그러므로 정치와 권력의 요체였던 '마르두크'는 바빌론의 다수 민중들 몫으로 남을 수 있었다. 
권력자가 누가 되었든,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 '바빌론'은 인류 문명사의 원형, '프로토 타입'으로서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다소 비약적이지만,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한 '혁명'의 '프로토 타입' 또한 바빌론의 '마르두크'에서 추출해 볼 수 있겠다.


영국의 메소포타미아 역사 전문가 카렌 라드너(Karen Radner)는 2020년 잊혀진 바빌론의 역사를 대중적으로 짧게 소개한 책을 냈다. 원제인 [A Short History of Babylon]은 말 그대로 바빌론의 '약사(略史;short history)'로서 바빌론의 역사를 간략하게 읽어볼 수 있다.
19세기말부터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약 20년 간 바빌론을 발굴한 독일의 고고학자 로베르토 콜데바이(Roberto Koldewey) 이야기가 더 궁금하긴 했으나, 고고학자들의 활약에 대해서는 다음 책으로 중근동에서 좀더 중앙아시아로 무대를 옮겨 치러진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피터 홉커크, 1990)을 통해 읽어볼 예정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고고학자'를 꿈꾸지는 않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내게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힘이 있다.

고대근동 바빌론의 역사는 카렌 라드너의 마지막 말로 이만 정리하면서 중앙아시아로 이동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많은 별자리와 황도십이궁은 '바빌론'의 유산이다. 또한 '60진법'은 우리의 매순간을 시간, 날짜, 달과 연으로 구분하는 기초로 사용되고 있다. 다음번에 시간을 확인하게 되면 '바빌론'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 [바빌론의 역사], <9. 역사에서 사라지다>, 카렌 라드너, 2020.

***

1. [바빌론의 역사(A Short History of Babylon)](2020), Karen Radner, 서경의 옮김, 유흥태 감수, <더숲>, 2021.
2.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기원전 20세기), 김산해 지음, <휴머니스트>, 2005~2020.
3.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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