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랄라 씨, 엉뚱한 네가 좋아 - 맞선 둘이 하나인 맞얽힘으로 바라본 인생
이은미 지음, 박예지 그림 / 움직이는책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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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을 읽는 시간 : 2021년
- [맞얽힘 : 맞선 둘은 하나다], 이철, <움직이는책>, 2021.
-  [주역 : 왕필 주](3세기), 왕필 주석, 임채우 옮김, <길>, 1998~2013.


"'곤(困)'은 '형통'하고,
바르고 대인이라야 길하고 허물이 없으니,
말이 있으면 믿지 않으리라.
...
[상전]에서 말하기를, 못에 물이 없는 것이 '곤(困)'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서 목숨을 다하여 뜻을 이루느니라."
- [주역], <47괘. 곤(困)>, 왕필 주석, 3세기.


1.

- 아주 좋은 궁합이야.

탑골공원 옆 사주팔자 점을 치는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 근데, 올해는 안돼. '반.드.시.' 헤어져.

2005년 5월 경이었겠다.
아내인 안은미 양과 결혼 날짜를 잡고 어두워진 종로 거리를 걷던 주말에 재미삼아 탑골공원 담장 옆 점보는 천막에 들어갔을 때가.

어릴 때 '파고다공원'으로 불리던 종로3가 탑골공원을 마주보고 좌측으로 돌면 낙원상가 들어가는 방향에 어딘가에서 사진으로 본 인디언 천막이 연상되는 것이 자세히 보니 '사주팔자', '주역' 어쩌고 써붙인 할아버지 점집이었다. 두 어개 있었나. 탑골공원에는 무료한 어르신들이 한담이나 장기를 두거나 낮술 한 두잔 주고받는 장소만이 아니라 '점'도 쳐주는 곳이란 걸 몰랐었다.
그 중 가까운 천막에 무작정 들어가 나와 안은미 양의 사주를 물었다. 지긋한 연세의 점쟁이 할아버지는 정체모를 책첩을 펼쳐 손가락으로 한참을 짚어 나갔다. 그러더니 우리 둘 각자의 매우 '불우'하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정말 '쪽집게'처럼 맞추셨다. 양가 부모님들께는 죄송한 말씀이나 우리 둘다 어려서 '부모덕은 없었다'. 하지만 성장해서는 잘 풀릴 거란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각자는 본인의 기억을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한다. 지난 8~9개월의 연애 과정에서 우리 두 청춘은 가난했고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공유했고 물론 둘 다 서울 도봉구와 경기도 의정부의 대표적 '소년/소녀 가장'이기는 했으나 이제 같은 직장에서 자립했으니 우리 힘으로 가정을 꾸리자고 작정한 터였다. 같은 직장에서 만난 후 농담따먹기나 하다가 내가 다른 곳으로 인사발령 받게된 2004년 10월부터 6개월 정도 짧은 연애를 했고, '같이 살자'고 2개월 정도 꼬셔서 안은미 양의 승락을 받았다. '부모 덕'은 없었기에 양가 부모님께는 '허락'이 아닌 '통보'를 했고 결혼 날짜도 우리 둘이 잡았다. 2005년 음력 단오였던 양력 6월 11일이 예정일이었는데, 당연히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그 민족적 축제날 '단오'를 알고 정한 건 아니었고 우연히 현실적으로 가장 후딱 해치울 수 있는 날로 잡다보니 공교롭게도 민족의 잔칫날인 '단오날'이었다. 양가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건 있을 수도 없고 한창 마이너스였던 안은미 양한테는 언감생심이었으니 우리의 결혼자금은 내 마이너스 통장 1,200만원이 전부였다. 그래도 이제 '오르막길' 더 가팔라지기 전 호주 신혼여행으로 결혼자금의 절반을 쓰기로 하고 그냥 부모님과 함께 살던 우리 전셋집 내 방에 80만원 '아씨방' 신혼가구를 들였고 예식비용은 축의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아마도 5월의 그 주말 저녁에 종로 거리를 거닐었던 날은 종로5가 금은방에서 18만원짜리 결혼반지를 산 날이었을 걸로 추정된다.

아무튼 우리는 결혼 날짜를 정했다는 말은 안 하기로 하고 '불우'한 소년/소녀 가장인 우리 둘의 궁합이나 보자며 무심히 천막에 들어갔던 터였다. 우리 둘의 사주를 듣고는 거의 정확하게 두 사람 각자의 과거를 짚어주는 할아버지의 영험함에 우린 놀라서 서로를 쳐다봤다. 이제 가정을 꾸리면 삶은 더 힘들고 가팔라질 거라는 각오를 한 우리에게 그 점쟁이 할아버지는 이제 슬슬 '풀릴 것'이라고 미래를 예측해주셨는데, 신뢰도는 이미 200프로 이상이었고, 할아버지 앞에 미래를 내다보는 '수정 구슬'이 있는 듯 했다. 예비신랑인 나는 '칼'을 쥐고 있어 돈은 많이 못 벌지만 어려움을 잘 헤쳐나갈 것이라 하여 순간 근심했으나 예비신부 안은미 양은 '금'을 깔고 앉아서 나중에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을 거라는 후문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느새 '사주명리학'의 주요 역술인으로 보이던 할아버지가 점쳐준 우리 둘의 '과거'는 정확한 '역사과학'이었고 우리의 '미래'는 장밋빛 희망이었다. 
그래, 이제 '현재'를 물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받은 결혼의 여신 헤라로부터의 '신탁'은 "궁합은 잘 맞으나 올해는 안된다"였다.

'과거'와 '미래'에 관한 '신탁'을 듣고는 신뢰도 급상승하여 나는 내처 결혼날짜인 '현재'를 털어놓을 참이었다. 그런데 그 좋은 궁합에도 불구하고 2005년 그 해에 결혼하면 우리 장인장모처럼 헤어질 거라는 헤라의 '신탁'은 금세 카산드라의 '저주'가 되었다. 나는 점값을 황급히 지불하고 안은미 양의 손을 잡고 천막을 나왔다. 황망히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얼떨결한 안은미 양은 그 와중에도 "아이는 셋이야~"라는 점쟁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예언을 들었단다. 

어언 17년이 지난 지금, 신통했던 점쟁이 할아버지의 예언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지금 우리는 자녀 셋을 기르고 있고 아직 헤어지지 않았다.
원래 자녀 한 명을 두자는 나와 적어도 셋은 있어야 한다는 안은미 양의 의견 차이가 있었는데, '칼'을 쥔 나는 하나라도 잘 키워보자, 였고, '금'을 깔고 앉은 그녀는 식구는 많을 수록 좋다, 였다. 
결국,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던 나는 그 해에 결혼하면 '반드시' 헤어진다던 점쟁이 할아버지의 예언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자녀 다다익선주의자인 안은미 양은 '아이 셋'이라는 그 할아버지의 예언이 맞다는 걸 증명하고 말았다.


2.

물론 2005년 당시에 나는, [주역]과 '사주명리학', '음양오행'이 다 같은 건 줄 알았다. 뭔가 '과학'적이지 못한 '미신' 같은 그런.

스무살 이후 20세기 내내 서구의 '사회과학'에 익숙하던 나는, 21세기 첫 해에 <한겨레21>을 구독하며 읽었던 이상수 기자의 '동서횡단'이라는 코너를 좋아라 읽어댔고 중국 전문가이자 [주역] 연구자가 된 이상수 기자가 2001년 낸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2001)이란 책을 계기로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동양 '최고의 고전'인 사마천의 [사기]도 그 이후로 읽었다. 노동계급의 사회변혁은 여전히 중요했고 소비에트도 해체된 지 오래였고 옆동네의 '인민공화국'에는 노예적 '노동' 또는 '소비' 밖에 모르는 '축생'들 뿐 '인민'은 없으니 이제 아시아에서 그 방향은 공자의 '인'과 맹자의 '의'를 통한 '대동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묵자의 '노동'에 기반한 '겸애'가 그 '평등'한 나라의 주요 덕목이었다. 노동자 보통선거가 없던 마르크스-레닌 시대의 불가피한 '폭력혁명'과 '기동전'보다는 손자처럼 '먼저 이겨놓고 싸우는' 헤게모니 '진지전'의 '평화의 병법'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던 중 너무 중국사람이 될 것 같아 뒤돌아 우리 역사를 다시 보니 역시, 1997년 조유식 선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1997) 이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게 된 '불세출의 혁명가' 삼봉 정도전 선생이 다시 생각났다.

물론 정도전 선생을 따라 '성리학'을 따로 보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인데, 삼봉 선생과 성리학자들이 바라본 세계가 그 형이상학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유물론'적 요소를 지닌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은 게 바로 [주역]이었다. 예의 이상수 기자가 2014년에 낸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2014)는 내게 [주역]과 '동양사상'이 점치는 '미신'이 아니라 집단지성에 의한 '(사회)과학'임을 알려줬다. 중국 은나라 때부터 불에 지져대던 거북이 등딱지의 '갑골문'이나 주나라 문왕이 칩거시절 정리했다는 [주역] '64괘'는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점술'이 아니라 그 방대한 기록을 통해 인류의 선택과 방향점을 '대수의 법칙'인 통계로 보여주는 고대의 '빅 데이터'와도 같았다. '사주명리'는 개인들 각각의 데이터에 어거지로 의미를 부여하는 성격이 짙고, '음양오행설'은 세상 운영의 이치를 규명하고자 하나 다분히 관념적 형상(달/해/목-화-토-금-수)을 우선으로 끼워맞추는 관념론이었다. 반면 [주역] 또는 성리학 '경전'으로서의 [역경]은 동양의 사상가들이 세상의 운동원리를 기존의 '빅 데이터'를 통해 규명하고 해석하며 주석을 다는 '유물론'적 세계관의 맹아를 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위대한 동양 역사가 사마천도 [사기]의 서문, <태사공자서>에서 '유가', '도가', '묵가', '법가', '명가' 등과 따로 '음양가'를 구분하며 [주역]에 기초한 앞의 사상들에 비해 '음양가'는 관념과 형상에 세상을 끌어 맞춘다고 평가했다. 
근대와 현대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기원전 고대에는 '철학'은 '과학' 또는 '학문'의 최고 경지였고, 점치는' 책 [주역]이 바로 '과학'이었다.


[주역]은 단순한 '점술책'이 아니다.
집단지성의 '빅 데이터' 기록을 토대로 세계를 '유물론'적으로 바라본 [주역]과 그 주석들 속에서 자연의 운명론 같은 걸 봐서는 안된다. 그 점괘와 해석을 통해 주체적으로 결단하는 인간이 [주역]의 '주역'이다. 그 인간은 도둑질이나 사기 등 소인배의 정신이 아니라 하늘의 '도(道)'를 이어받아 실현하는 '덕(德)'을 갖추고 미래를 내다 보아야 한다. 
2005년 탑골공원에서 '신탁'했던 나의 '현재'는 오로지 나의 주체적 선택의 문제였다. 결혼 후 나의 마음가짐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안은미 양과 헤어지지 않고 오래오래 백년해로할 것인가"에 맞춰졌다. 점쟁이 할아버지의 '사주명리'는 내게 '예언'이 아닌 '경계'였다.
'사주명리'나 '음양오행'이 아니라, '변화'와 '유물론'적 동양 사상의 경전인 [주역]을 읽는데 가장 중요한 게 인간의 '주체성'과 '덕성'임을 이상수 선생의 책으로부터 배운 후 2014년은 내게 [주역]의 시간이었다.

그 시기는 내 개인적으로 중요하고 어려운 시절이기도 했다. 강력한 회사에 맞서 우리의 권리를 지켜야 했던 노동조합 간부의 시기였다. 시대는 이제 임단협에서 노동자가 임금인상과 복지증진을 요구하기만 하던 시대가 아니었다. 이명박근혜로 이어진 극우 파시즘 정권은 노동법 개악을 수시로 밀어붙였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우리 집행부 임기는 이런 극우 막장정권이 임금피크제 도입과  성과형 임금체계 확대, 파견비정규 노동시장을 제도화하려는 노동법 개악을 강력 추진했고 이에 편승한 자본가들과 그 대리인들은 이제 임단협에서 회사의 요구안을 강력하고 집요하게 밀어붙이던 시기의 한 가운데를 통과했다. 계급투쟁을 시작한 건 역시나 자본가들이었고, 투쟁할 단결력을 확보하지 못한 노동조합은 판판이 깨졌다. 노사협상장에서는 '권리'의 자리는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이익'만이 판을 쳤다. 어차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협상 결과'는 '패배'의 다른 이름이었다.


3. 

"'감(坎)'을 익힘(習)은,
믿음이 있어서 오직 마음이 형통하리니,
행하면 승상함이 있으리라.
...
[상전]에서 말하기를, 물이 거듭 이르는 것이 '습감(習坎)'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서 항상 덕행을 지키며 정교의 일을 익히느니라."
- [주역], <29괘. 감(坎)>, 왕필 주석, 3세기.


'가이태서유상(假爾泰筮有常)'
"떳떳함이 있는 크나큰 시초를 빌립니다."

이 말을 두 번 외치고 나는 책상 앞에 정좌했다.
모두들 패배한다고 했고 나의 예측도 사실 그랬다. 응원하는 사람들보다는 만류하고 외면하며 심지어는 비웃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회사는 스리슬쩍 '10%도 안되던데 할 수 있겠냐' 나를 떠보았다.
손자는 그 '평화'의 [병법]에서 '난타전'은 하책이며 먼저 이겨놓고 싸움에 임하는 것이 상책이라 했지만 2005년 5월의 나처럼 2016년의 나는 여전히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간 모자란 머리로 읽었던 3세기 위진남북조 시대 '도가'적 현학자 왕필이 주석한 [주역]을 놓고 산가지는 없으니 이쑤시개 쉰다섯개를 늘여놓고는 책상에 좌정했다.

그때가 내 처음이자 마지막 '주역점'이었다.
그 이전에는 몰라서 못쳤고, 그 이후에도 역시 몰랐지만 그 하루에 더듬더듬 삼세번 정도를 쳐봤다. 그리고 이제 설령 [주역]에 대해 더 알게 된다 해도 칠 생각은 없다. 
나는 그 한 번으로 '주역점'이 뭔지 알았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첫 번째 나온 괘는 47번째 '곤괘'였다. 한자 그대로 '곤'란하고 피'곤'했다. 괘상은 위의 삼효인 상괘가 '연못'을 상징하는 '태'괘이고 아래는 '물'을 뜻하는 '감'괘다. '택수곤'이라 하여 쉬운 말로 다 '물'인데, 물은 아래로 흐르나 위로 향하는 양과 아래로 향하는 음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용]이거늘 둘다 아래로 흘러봐야 물에 잠기기만 한다. [주역]에서 '물'의 '감괘'만 따지면 그리 좋지만은 않다. 물은 '형통'하지만 대체로 흉하다. 공자 이래 지은 [주역]의 해석에 따르면 연못 아래 큰 물이 있어 정작 연못에는 물이 말라 '궁'하고 '곤'하다 했으니 이보다 나쁠 수는 없었다. 물론 '물극필반(物極必反)', 즉 '극에 닿으면 반대로 전환된다'는 [중용]의 원리에 따라 '궁즉통', 즉 '궁하면 통하여' 다음의 길함을 징조하여 결국 '대인', '군자'가 '뜻을 이룬다'고 나와 있으나 당장은 흉하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각 효는 '변효'를 포함한다. 봄을 뜻하는 '소양'의 숫자 7은 변하지 않지만 여름의 '노양' 9는 극에 달했으므로 곧 가을의 '소음' 8로 변한다. 겨울의 '노음'인 6 또한 극에 닿아 '대한'의 절기를 지나면 '입춘', 즉 7로 순환한다. 산가지 남은 갯수로 나온 이 숫자에 따라 각 효는 변하거나 불변하면서 다른 괘를 그리는데 그에 따라 나온 괘가 29번째 '감'괘였다.

또 다시 '물'에 빠졌는데 이번에는 상괘와 하괘가 모두 '물'이다. '중수감'이라 하여 온 지구의 육지가 온통 바다에 빠졌다. 흉 중의 흉이었다. 물론 도교에서 말하는 '상선약수'는 아래로 흐르는 물이 최고의 '선'이라 하고 그 주요 덕목은 '겸손/겸애'다. 하지만 [주역]의 괘로만 치면 물에 빠지는 '흉괘'다.

계속 '길함'과 '흉함'만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뜻인데, 사실 [주역]이 보여주고자 하는 세상만물의 '유물론'적 이치는 길 속에 흉의 조짐이 있고 흉 속에 길의 씨앗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운동'하고 '변화'하며 '양질전화'하듯 길흉과 흉길은 서로 전환되는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히 동양에서 먼저 발견한 '유물변증법' 또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정수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오래전 2005년 점쟁이 할아버지의 예언대로 '아이 셋'은 현실이 되었고, '그 해 결혼하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예언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며 나의 '주체적' 결단과 '덕성'으로 그 길만은 피해가고 있는 이 다복한 2021년에 동양 고전과 서양 과학 연구자인 이철 선생은 이 고전적인 사물관계를 '맞얽힘'이라 선언했다. 모든 물질은 '맞섬'의 서양식 세계관과 만물이 하나로 '얽힘'이라는 동양적 사고방식을 한데 '맞얽혀' 새로운 용어를 '직관적'으로 표현하고자 단어를 찾았으나 적절한 작명에 실패했음을 토로하는 이철 선생은 [맞얽힘 : 맞선 둘은 하나다](<움직이는 책>, 2021)에서 공자와 손자, 노장사상은 물론 이들의 사상을 관통하는 '물극필반'의 개인 윤리인 [중용]과 사회사상으로서 '평천하'의 [대학]까지 요약한다. 이를 관통하는 객관적 배경이 바로 [주역]이다. 기존 강단학계와는 다르게 '맞얽힘'의 원리로 동양 고전을 새롭게 해석했다는 저자의 공력이 대단했다. 그러나 굳은 내 머리로는 아무리 봐도 '맞섬'은 '대립'으로, '얽힘'은 '통일' 또는 '연결'로, '맞얽힘'은 '대립물의 통일'의 '변증법'으로만 읽혔다. 저자가 애써 공부하고 궁리한 새로운 세계관의 법륜을 다시 허무하게 200년 전으로 돌리는 듯 하여 매우 송구했지만 어쩔 수 없다. 대신 '물아일체'나 '일국사회주의 완성'과 같은 단순무식한 '통일'이 아닌 끝없는 '연결(얽힘)'과 교차를 꿈꾸는 '유물변증법'의 '현대화'라 급마무리하는 내 마음대로 '서평'은 하나 써서 정리해 두었다. 바야흐로 현재는 토마 피케티 같은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자도 '사회주의'의 '현대화'로 급전화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시대가 아닌가 말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싫어하는 피케티 조차도 '자유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급전향하게 만든 정치경제사회 배경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 극한의 '불평등' 사회는 '물극필반'의 원리에 의해 '평등'이라는 가치와 '맞얽힘'의 관계이기 때문이며, 시대는 다시금 '평등'의 '유물변증법'을 소환하고 있다. 그렇게 '변증법적 유물론'은 [주역]과 함께 '현대화'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4.

64괘 중 47번 '곤괘'에서 29번 '감괘'로 변화하면서 물에 퐁당 빠진 것도 모자라 아예 잠겨버렸지만, 오히려 그 이후 마음을 다스리고 지금 있는 곳에 좌정하여 다복하게 잘 지내는 지금, 잼처 [주역]을 읽던 시간을 생각한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고, 물에 빠진 생쥐꼴 보이기 싫어 물 속에서 나오기를 주저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만물은 흘러가고 변화한다. 그리고 적절히 잊혀지고 오늘의 나 또한 어제의 내가 아니다. 보는 곳이 다를 수도, 아니면 같은 곳을 보더라도 보는 방식과 자세가 다를 수도 있겠다. 
내게는 지금까지도 [주역]이 이 원리를 담고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주역]이 워낙 어려운 것과 같이 솔직히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떤 나인가 당최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역시 "너 자신을 알라"가 제일 어려운 철학적 명제가 맞다.


2005년 '사주명리'의 점괘를 경계하며 사는, 2016년까지 읽다만 [주역]을 이철 선생의 [맞얽힘 : 맞선 둘은 하나다] 덕분에 다시 펼쳐본 2021년, 다시금 [주역]을 읽는 시간을 지나겠지만 '주역점'은 다시는 치지 않을 것이다. [주역]은 어려운 책이고 [맞얽힘]도 쉽지 않은 원리지만, 그래서 이은미 작가의 [유쾌한 랄라씨, 엉뚱한 네가 좋아](<움직이는책>, 2021)라는 책처럼 '맞얽힘'의 원리를 유쾌발랄하게 재해석할 재주은 없지만, [주역]과 [맞얽힘]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내 나름대로 정리했으니 이제 다시 읽던 [주역]을 잠시 덮고 '주역점' 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 사상의 새로운 해석'을 선언한 이철 선생에게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맞얽힘'을 '새로운 (유물)변증법'으로 '현대화'시키고자 하는 지금 내게 [주역]을 읽는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1. [맞얽힘 : 맞선 둘은 하나다], 이철, <움직이는책>, 2021.
2. [유쾌한 랄라씨, 엉뚱한 네가 좋아], 이은미, <움직이는책>, 2021.
3. [주역 - 왕필 주](3세기), 왕필, 임채우 옮김, <길>, 1998~2013.
4.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 이상수, <웅진지식하우스>, 2014.
5.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이상수 지음, <길>, 2001.
6. [정도전을 위한 변명], 조유식, <푸른역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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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얽힘 - 맞선 둘은 하나다
이철 지음 / 움직이는책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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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변증법, '맞얽힘'
- [맞얽힘 : 맞선 둘은 하나다], 이철, <움직이는책>, 2021.


"... '입자(粒子)'라는 이름은 정확한 이름이라 할 수 없다. '입(粒)'은 낟알, 알갱이를 뜻하는데, 전자나 쿼크와 같은 물질들은 알갱이 성질만 지니지 않아서이다. 모든 입자는 때로는 '입자'로 존재하지만 때로는 '파동(波動)'으로 존재한다. '양자역학'에서는 이를 '파동-입자 이중성'이라 부른다... 하나의 물질이 서로 대립하는 '입자'와 '파동'이라는 두 가지 성질을 지닌 것은 물질이 '입자'와 '파동'의 '맞얽힘'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입자'는 물질의 한 측면만을 일컫는다. 정확하게 이름을 짓자면 물질은 '파립자(波粒子)' 또는 '입파자(粒波子)'이다."
- [맞얽힘], <서론. '맞얽힘', 새로운 세계관의 출현>, 이철, 2021.


서양의 세계관은 조로아스터교의 '선악' 구분의 종교에 뿌리를 둔 '이분법'에 기초한다. 한편으로 동양의 세계관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대일통'으로 여겨진다. 물론 서양 문명의 시작인 그리스 신화는 선악이 혼재했고 유라시아 유목민들의 사상은 '하늘(자연)'을 섬기면서 다분히 범신론적이었으나, 서양의 '이분법'과 동양의 '합일론'은 서양의 기독교와 동양의 유교/불교가 오랜 기간 지배이데올로기로 기능하며 고착된 세계관일 것이다.
동이족의 조상이라는 복희씨는 세상만물의 이치를 이해하는 '8괘'를 지었는데 그 머리는 사람이되 하반신은 뱀 또는 용으로써 아마도 뱀을 토템으로 삼은 종족의 상징이었을 지도 모른다. 복희씨는 여와씨와 함께 서로 맞서면서도 하반신의 뱀은 교차하는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남녀를 포함한 세상만물의 '맞섬'과 '얽힘'은 한나라 시기 무덤에서 출토된 문양으로 대표된다.

19세기 서양철학사에 헤겔이 등장했을 때, '철학은 종교의 다른 표현'이라고 했으나 인류는 태초의 '빛'은 '어둠'이 있었기에 존재 가능하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깨달았다. 헤겔은 선학자 셸링처럼 "총구에서 갑자기 발사된" 것이 아닌 의식과 개념의 긴 여정 현상을 기록했다. 이 과정은 '변증법(辨證法)'이 되었고 마르크스와 같은 후학 유물론자들은 '정신'을 앞세운 헤겔의 변증법을 거꾸로 세워 '유물변증법(변증법적 유물론)'의 사상적 체계를 구축했다. 
12세기에 유학이 주희의 '성리학(性理學)'으로 집대성되었을 때 '유일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온 자연에 존재하는 '혼백귀신'과 함께 살던 동양인들은 [주역(周易/易經)]의 원리를 통해 자연철학의 체계를 세웠다. '역(易)'의 원리는 결국 사물의 '연결'과 '하나됨'을 의미하지만 노장사상의 '무위자연' 조차도 그 과정에는 사물의 '대립'과 '맞섬'을 품고 있다.
나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 전체 물질의 이 '대립'과 '통일'을 '(유물)변증법'으로 여지껏 이해하고 있다. 


동양고전과 과학을 공부하는 독립연구자 이철 선생은 내 페친이기도 하다. 아직 확인은 못해봤지만 예전 내 살던 지역의 진보정당 당협위원장이 아니었나 싶다. 2008년 이후였을텐데, 당시 <마티> 출판사에서 낸 슬라보예 지젝의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2009)의 편집자였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그 책을 통해 내가 처음 읽게 된 슬라보예 지젝은 이 난해한 저작을 통해 결국 '변증법'적 '통일'은 더 이상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립'된 물질은 '시차적'으로 존재하며 서로 연결되지만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는 서양 현대철학사의 전형이었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다 같은 것'으로 치부된다는 '동양사상'과 대립되는 듯 하나, 나는 동양의 고전인 사마천 [사기]의 '기전체' 서술방식에서 드러나는 이 '시차성'의 모순과 연결을 주제로 서평을 써보기도 했다. 
2010년의 이야기다. 

내 추측이 맞다면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은 그 이철 선생은 동양 고전과 서양 물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2021년, '맞얽힘'의 세계관을 내놓았다. "맞선 둘은 하나다"라는 표제로 내보인 '맞얽힘'은 저자가 <덧붙임 글>에서 말하듯, 작명에 실패한 용어이기는 하나 현재로서는 이 것 말고는 더 적절하게 표현할 말을 찾기 힘든 용어다. 


"'맞선 둘의 하나됨'이라는 원리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맞섬', '대립'이라는 뜻이 들어가야 한다. 두 번째로는 '하나'라는 뜻이 들어가야 한다. '맞선 하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누구나 읽었을 때 직관적으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 [맞얽힘], <덧붙임 글. '맞얽힘'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이철, 2021.


'맞얽힘', 발음도 뜻도 생소하나 사물의 '맞섬'과 '얽힘'이라는 현상을 하나로 표현하는 다분히 "직관적"인 단어다. 
2009년의 [시차적 관점]도, 기원전 사마천의 [사기]도, 대립된 '맞섬'이 결코 교차되지 않아도 서로 '연결'되는 '얽힘'의 관계였다. 
서로 다른 '맞섬'이 함께 나타나는 것은 '맞얽힘'의 '동시태'이고, 그 양적인 운동으로 극에 달해('물극필반') 질적인 '맞섬'으로 전환되는 것이 '맞얽힘'의 '통시태'이다. '맞얽힘'에서 맞선 물질은 '동시태'와 '통시태'의 현상으로 얽힌다. 이 과정에서 길함을 유지하고 흉함을 피하는 방법은 치우치지 않게 '중용'을 지키는 절제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 '절제'만으로는 천하를 평화롭고 조화롭게 만들기 어려우니 '대학'의 '3강령(명명덕-친민-지어지선:明明德-親民-止於至善) 8조목(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이라는 '큰 배움(대학)'의 도가 필요하다.

'맞섬'과 '얽힘'이라는 현상을 관통하는 본질은 '변화'다. 그리고 '변화'의 본질은 바로 '운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동양 고전 중 [주역(周易)]을 중심으로 본 내용인 '1부'에서 '노자(1장)', '공자(2장)', '손자(3장)', '장자(4장)'를 이야기한다. 나아가 유학의 중요한 고전인 '물극필반(物極必反)'의 경전 [중용(中庸)]과 그 속에서 강조하는 '중화(中和 : '中'은 천하의 근본이며 '和'는 천하사람들이 달성해야 하는 道)'의 개인적 수양을 넘어, '평천하/천하평(平天下/天下平)'의 대동세상을 기획하는 '큰 배움'으로서 [대학(大學)]까지 요약한다. <부록>과 같은 '2부'에서는 은나라의 점술 방식이었던 '갑골복'에서 세상의 운영원리를 이해하려는 '주역점'으로 넘어오는 역사를 서술하며 '점술책'을 넘어서는 '철학서'로서의 [주역]을 설명하고 있다. 거북등짝이나 짐승뼈 굽기가 아니라 대나무 또는 산가지로 치는 '주역점 치는 방법'은 덤이다. 

[주역]의 가르침은 '점술'에 운명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중 하늘과 땅의 자연을 잇는 인간의 주체적인 '덕(德)'으로 자연 속 '변화'의 이치를 파악하고 이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이다. 
[주역]의 길한 괘사나 효사가 나온들 흉한 조짐이 있고, 흉한 괘효사에도 불구하고 궁극에 달하면 길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것이다. 

[주역]은 '변화'에 기반한 '유물론'과 '변증법', 그리고 '맞얽힘'의 경전이다. 이와 같은 동양 고전 사상은 서양의 뉴턴식 물리학적 세계관과 '맞섬'의 관계였을 수 있으나 아인슈타인을 너머 현대의 '양자역학'의 세계관과 교차됨이 없었음에도 동양과 서양이 '양자역학'적으로 감응한다. '상대성 이론'으로 뉴턴의 '절대적' 물리학 패러다임을 극복한 아인슈타인은 마지막까지 '양자역학'이 틀렸음을 증명하려 했으나 결국 그의 논증은 '양자역학'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그만큼 '양자역학'의 세계는 무궁무진한 영역이다. 
현대 물리학자들은 물론 [코스모스] 시리즈를 이어가는 칼 세이건의 동료이자 배우자인 천체물리학자 앤 드루얀 조차도 확실히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양자역학'에 따르면 '입자'는 '파동'이며 '물질'은 '에너지'다. 
고전의학 또한 '에테르체'라는 '파동' 에너지와 화학적 호르몬체의 대균형을 통해 예방의학으로 이행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의 내과 의사 리처드 거버가 1980년대에 발표한 '양자역학'적 [파동의학]은 2001년에 개정판이 나왔고 2021년에 국내 진보적 동서의학자에 의해 재번역되어 다시 나왔다. 
[맞얽힘]에서 '맞선 둘'인 동양의 [주역]과 서양의 '양자역학'은 '얽히고' 연결되는 '하나'다.

따라서 나는, '모든 물질의 본질은 운동'이고 '운동은 변화를 수반'하며 '양질 전환'을 그 내용으로 하는 '변증법'으로 '맞얽힘'을 다시 이해하고자 하는데, 아마도 새로운 세계관으로서 '맞얽힘'을 선언한 저자 이철 선생의 의도를 거스르며 다시 고전적으로 곡해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잠시 알았을 수도 있었을 저자 이철 선배님께 송구한 일이겠다. 
그러나 '맞얽힘' 또한 완성된 용어가 아니기에 나는 다시 새로운 '유물변증법' 또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소환한다.

새롭게 복원되는 우리의 '맞얽힘'의 변증법은 역시 완성되지 않은 '양자역학'과 함께 갱신되고 '현대화'되어야 한다.
'맞얽힘'은 새로운 '변증법'이다.


"... 서양의 세계관인 '분리'와 '맞섬'의 세계관과 동양의 세계관인 '얽힘'과 '연결'의 세계관을 통합해야 한다. 그 통합한 세계관이 바로 '맞얽힘'의 세계관이다. '맞얽힘'의 세계관은 나와 남을 별도의 존재로 간주하면서도 서로가 존재근거임을 인식하는 세계관이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여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분명히 인지하는 세계관이다... '양자역학'... '[주역]'... '물극필반(物極必反)'의 법칙... '맞얽힘'으로 이루어진 사물은 모두 그 변화가 궁극에 도달한다. 이 법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중(中)'이다... '[중용]'... '평천하' 사상이 등장한 것은 개인에게 '중용(中庸)'을 맡겨둘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 [맞얽힘], <결론. '맞얽힘'으로 세계관을 바꾸자>, 이철, 2021,


***

1. [맞얽힘 : 맞선 둘은 하나다], 이철, <움직이는책>, 2021.
2. [주역 - 왕필 주](3세기), 왕필, 임채우 옮김, <길>, 1998~2013.
3.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 이상수, <웅진지식하우스>, 2014.
4. [파동의학](2001), 리처드 거버, 최종구/양주원 옮김, <에디터>, 2021.
5.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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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 2021-11-29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철입니다.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시차적 관점 출간 당시 마티에서 편집이 아니라 영업을 했습니다. 맞얽힘을 변증법으로 얘기하자면, 제 생각에는 변증법은 맞얽힘을 일부만 이해했거나, 오해한 것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글 서두에서 서양의 사상이 이분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씀하셨던데, 제가 요즘은 서양 고대 철학 즉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 출간된 고전을 읽고 있는데, 서양 고대 철학자들도 ‘대립자는 하나다‘라고 이미 얘기했더군요. 아마도 변증법은 엠페도클레스, 아낙시만도로스,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말한 ‘대립자의 하나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 헤겔 등을 연구하지 않아서 확언하기는 힘듭니다. 아무튼, 서양 고대 철학은 이분법적 사상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서양고대철학과 고대 동양철학은 모두 똑같이 ‘대립자의 하나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년 초에는 서양고대철학이 말하는 ‘대립자의 하나됨‘에 관한 책을 내고자 합니다. 그때쯤이면 서양고대철학에 관한 저의 공부도 어느 정도 진전되었을 것이며, 변증법에 관해서도 더 확실한 의견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beatrice1007 2021-11-30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철 선배님, 무지 반갑습니다~ ^^*
[시차적 관점] 관련 제 초라한 서평을 칭찬해 주시던 기억도 납니다.
제 생각에도 인류의 성장단계로 추정컨대 동서양 막론 고대 철학은 비슷했을 것 같습니다.
서양에 ‘이분법‘ 종교와 동양의 ‘합일설‘ 종교가 지배이데올로기가 된 이후 서로 ‘맞선‘ 길을 갔던 게 아닌가 하는 의견입니다.
[맞얽힘]의 가르침과 ‘맞얽혀‘ ‘유물변증법‘적 사고와 비슷한 점을 찾아보고자 한 서평을 썼더니 ‘일빠‘가 되었네요. 영광입니다.
제가 천착하는 ‘변증법‘은 선배님 말씀대로 헤겔 이후의 개념 ‘변증법‘이라 내용은 같되 적합한 용어를 찾는 작업 또한 ‘유물변증법‘의 ‘현대화‘라는 지난한 여정 중 하나라 생각하게 됩니다.
이철 작가님의 분투를 기원하며, 다음 연구 또한 기대합니다!
제 공부가 얕고 부족함에 언제 한 번 뵙고 가르침을 청합니다. ^^*
 
범죄소설의 계보학 - 탐정은 왜 귀족적인 백인남성인가
계정민 지음 / 소나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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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의 '변증법'과 '리얼리즘'
- [범죄소설의 계보학], 계정민, <소나무>, 2018.


어린 시절 친구의 집에 있던 '셜록 홈즈' 전집은 검은색 표지의 얇은 단편이 50권 정도의 한질을 이루고 있었다. 

1984년에 그리 친하지 않았던 같은 반 급우의 집으로 자주 놀러간 이유가 '84 태권브이' 책받침을 계속 보고 싶어서였다면, 1985년 즈음 학교도 달랐던 아주 어린 시절 친구 집에 자주 놀러간 건 오로지 검은색 표지의 '셜록 홈즈' 단편을 보기 위해서였다. 우리집에는 노란색 표지의 '세계문학전집'과 '세계위인전집' 각 50권씩 100권이 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당시 나는 '셜록 홈즈'의 신세계를 만나 '독서'라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사실 세계문학전집은 TV에서 방영하던 일본만화와 전집의 삽화 중심으로 건성건성 읽었을 뿐, 4학년 '독서반' 특활시간에는 6개월 내내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만 들고 갔음에도 결국 다 읽지도 못했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을 당시의 어린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정확한 연도는 지금에 와서의 추정일 뿐, 내가 단편소설이나마 '책'이란 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게 된 건 오로지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덕분이었다. 이실직고 한다면, 친구가 잃어버린 셜록 홈즈 한 두 권은 내가 반납하지 않은 것이리라. 그 책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사뭇 궁금하다. 아마도 50권의 단편 중 엄선한 나만의 '베스트 컬렉션'이었겠다.

이후 오락실만 전전하던 내가 다시 '책'이란 걸 펼친 게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88년도의 애거서 크리스티 장편소설이었다. 동네 형의 어둑한 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해문출판사>의 추리소설 몇 권은 내 인생 최초로 완독한 장편소설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오리엔트 특급살인]은 내 인생의 명작이다. 곁가지로 읽었던 엘러리 퀸의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다.

내가 단편의 호수에서 물에 뜰 수 있도록 한 것은 코넌 도일의 '홈즈'였고, 장편의 바다에서 헤엄칠 수 있도록 도와준 건 애거서 크리스티의 탐정 '포와로'와 '미스 마플'이었다. 아마도 지금의 나보다 젊었을 마약쟁이 스포츠맨 '셜록 홈즈'와 얼핏 내 나이 쯤일 멋진 콧수염의 키 작은 '에르퀼 포와로', 언제까지나 수다스럽게 뜨개질을 하는 노처녀 할머니로 남아 계신 '마플 양'은 내게는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나에게는 이들이야말로, 사회악을 응징하는 '정의'의 사도들이었다.

"나는 '뉴게이트 소설'의 전복성이 초기 자본주의 체제의 잔혹성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보았다. 그리고 '뉴게이트 소설' 이후에 등장한 '(고전) 추리소설'은 '뉴게이트 소설'의 급진적인 흐름을 분쇄하고 되돌리려는 보수적인 움직임으로 파악했다. 추리소설은 지배계급에 대한 도전을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범죄에 대한 처벌을 통해 기존 체제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나는 추리소설이 '뉴게이트 소설'의 전복성을 무력화시키려는 지배계급의 입장과 함께 한다고 보았다."
- [범죄소설의 계보학], <머리말>, 계정민, 2018.

19세기 영국의 '실버-포크 소설'과 '댄디즘 소설'을 재조명한 계명대 영문학과 계정민 교수의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2021)에 관한 서평을 쓰다가 영문학사의 비주류 소설을 소개하는 저자의 연구에 이끌려 그의 2018년작 [범죄소설의 계보학]을 읽게 되었다. 역시 당대 소설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음에도 영문학사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다수가 잊혀진 '추리소설'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저자는 문학이 토대로 하는 사회적 배경에 관한 탄탄한 관점을 이 책에서부터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배경은 바로 '계급투쟁의 역사'다.

계정민 교수는 '추리소설'만을 다루지 않는다. 더 큰 범위로 '범죄소설'이라 분류되는 이 장르는 18세기 말과 20세기 초중반을 통과하면서 사회문화적 배경을 투영한다. 이 책의 제목 '범죄소설'의 '계보학'을 따라가는 영문학사의 여정이다.

1. '뉴게이트(New-gate) 소설' : '변증법'의 시작

"뉴게이트 소설의 부상은 형법 개혁운동으로 대표되던 변혁적 움직임과 함께했다. 뉴게이트 소설은 범죄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서 기인하며 범죄자 개인에 대한 처벌은 부당한 계급적 탄압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럼으로써 범죄를 하류계급에서 주로 발생하는 전염성 강한 질병으로 정의하고 범죄의 박멸을 위해 범죄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의 필요성을 주장한 지배적 범죄담론을 전복시키려 한 것이다."
- [범죄소설의 계보학], <1. 뉴게이트 소설>, 계정민, 2018.

18세기 영국의 중죄인들이 수감된 '뉴게이트' 감옥에서 집행된 공개처형은 대중들에게는 큰 구경거리였다. 아마도 중세 이단자 화형식과 같이 법을 어긴 죄인에 대한 응징을 공개하면서 지배질서를 공고히 하고 대중들에게 공포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장치였을 것이다. 1773년에는 이 사형수들의 전기를 [뉴게이트 캘린더]라는 제목으로 대중에게 배포했다. 지배질서에 도전하지 말라는 지배계급의 선전물이었겠지만, 시대는 프랑스 대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뉴게이트 캘린더]에서 다룬 중범죄자들은 19세기에 이르면 불워-리턴 같은 작가들에 의해 발표된 '뉴게이트 소설'을 통해 부당한 지배질서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대혁명으로 부상한 부르주아지에게 '사유재산'은 신을 대신했고 이를 침해하는 자는 무자비하게 처형되었다. 대혁명의 배신으로 버림받은 하류계급은 19세기 영국에서 형법 개정운동을 전개했고 '뉴게이트 소설'이 보여준 전복성의 배경은 '사유재산의 신성화'와 '잔혹한 형벌의 완화'라는 '계급투쟁'이었다. 
'뉴게이트 소설'은 범죄소설 계보학에서 '변증법'의 시작이었다.

2. '고전 추리소설' : '부정'의 단계

"추리소설에서 분석과 추론을 통해 범죄를 해결하여 사회체제를 수호하는 인물은, 하류계급 출신 경찰이 아니라 상류계급 출신 탐정인 것이다."
- [범죄소설의 계보학], <2. 추리소설>, 계정민, 2018.

'뉴게이트 소설'의 주인공은 단연 범죄자였다. 그러나 그 주인공들은 결코 지배체제를 변화시키지 못한 채 장렬히 처형당하거나 파멸한다. 영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꼽히는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뉴게이트 소설'로 분류되지만 내용은 '전복성'과 '보수성'의 타협이었다. 초기 자본주의 빈민의 삶을 사실주의적으로 고발하면서 한편으로 주인공을 범죄의 소굴에서 구출한다. 이 과정에서 범죄자를 추적하고 단죄하는 '추리소설'의 씨앗을 내포하는데, 추리소설의 '변증법'에서 '부정'의 단계 또한 내포하는 맹아이기도 하다.

이제 이 '변증법'의 부정의 단계로서 '(고전) 추리소설'의 주인공인 '탐정'이 본격 등장한다. 우리가 아는 셜록 홈즈와 에르퀼 포와로, 미스 마플은 물론 디킨스의 연구자로서 [모르그가의 살인]이라는 최초의 '추리소설'을 쓴 에드거 앨런 포의 탐정 뒤팽은 모두 상류계급 출신이다. 이들이 백인남성 또는 미혼의 노처녀 할머니인 이유는 기존 지배계급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찰이나 여성 탐정처럼 '생계'가 아닌 '지적 유희'로써 범죄를 수사한다. 여성 탐정은 사회활동을 하는 본인을 비하하면서 결국 결혼을 통한 '가정의 천사'로의 은퇴를 꿈꾸는 반면 노처녀 할머니 탐정은 이런 혐의에서 벗어나 있다. 셜록 홈즈의 라이벌 모리아티 교수가 잉글랜드에 격렬히 저항한 아일랜드인인 이유는 식민지 개척과 지배가 한창이던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외국인에 대한 영국인들의 배제와 공포가 녹아있다. 실제로 작가 코넌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는 제국주의자였고 보수주의자였다. 그들은 상류계급을 옹호했고 식민지 출신 인도인들을 짐승화했으며 여성의 참정권을 반대했다. 그들의 소설 속 탐정들은 범인은 색출하되 결코 사회모순을 고발하지 않는다. '뉴게이트 소설'에서 사건의 전말을 고발하던 범죄자들은 이제 '(고전) 추리소설'에서는 탐정에게 일체의 발언권을 빼앗긴다. 
청소년기 나에게 추리소설 작가들이 가르쳐준 '정의'는 곧 지배질서의 다른 말이었다.
'(고전) 추리소설'은 범죄소설 계보학의 '변증법'에서 '부정'의 단계였던 것이다.

3. '하드보일드(Hard-boiled) 추리소설' : '부정'의 '부정'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탐정의 재현이 이전과 극명하게 달라진 것은, 외부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사회질서와 정의의 회복과는 거리가 먼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결말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고전추리소설에서는 탐정의 개입에 의해 혼란과 불의가 사라지고, 질서와 정의로의 이행으로 서사가 종결된다. 그러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탐정의 분투에 의해 개별범죄가 해결되어도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다가올 거대한 불의와 혼돈에 대한 불안으로 서사가 종결되는 것이다."
- [범죄소설의 계보학], <3. 하드보일드 추리소설>, 계정민, 2018.

무대는 1920년대 미국으로 넘어간다. 1차 세계대전으로 국제정치 권력관계는 재편되었고 세계 자본주의 패권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갔다. 20세기 초 금융자본주의 시대 신흥 강대국 미국의 화려한 번영은 '재즈 시대'로 불렸고 유럽의 귀족적 탐정들은 신대륙의 생계형 터프가이 탐정들에게 바톤을 넘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로 대표되는 '하드보일드' 소설은 완숙된 계란노른자처럼 딱딱하고 비정하고 냉정한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리얼리즘'이다. 추리소설 또한 '부정의 부정'을 거쳐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되는데, 이 '변증법'은 잔혹한 현실 앞에서 '정-반-합'으로 완성되는 해겔식 '변증법'일 수 없었다. 끊임없이 부정되고 또 부정되는 '부정의 부정'이라는 과정 자체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주인공은 더이상 상류 계급이 아닌 거리의 터프가이 탐정과 이런 남성들을 성적으로 유혹하여 이득을 취하다가 결국 파멸하고 마는 여성악당인 '팜므 파탈'이다. 귀족적 향수가 잦아든 20세기 초 미국 '프롤레타리아' 탐정들은 시정잡배처럼 굴러먹다가 불굴의 의지로 사건은 해결하지만 역시나 '정의' 실현보다는 사적인 복수에 의존하고, 저자에 의하면 이들의 대적자로서 '팜므 파탈'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본가계급과 똑같다. 그러나 '하드보일드 소설'은 사회 절대악인 자본가계급 대신 그들을 닮은 하류계급 출신 '팜므 파탈'만 응징하고 만다. 사건이 해결되어도 자본가는 여전히 이익을 취하고 세상의 지배질서는 변함없다. 탐정의 모습이 '부정'되고 악당의 형상이 '부정'되지만 부조리한 세상이 궁극에 '부정'되지 않는 점은 '(고전) 추리소설'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종속적 여성 탐정으로 부각되던 젠더 문제는 '팜므 파탈'의 탐욕과 파멸로 인해 더 후퇴하기도 한다.

저자인 계정민 교수는 이러한 '범죄소설의 계보학'을 통해 '변증법'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이전 장르와 이후 장르 사이의 '대립("공격")'과 '타협("협상")'의 관계로 설명한다. 
18세기 부르주아 대혁명의 배경 속에서 등장한 '뉴게이트 소설'의 체제 전복성은 19세기 노동계급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배계급의 반격으로서 '(고전) 추리소설'을 유행시켰고 20세기 금융자본주의 패권을 배경으로 '정의' 실현 대신 가엾은 여성만을 파괴시키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로 전화된다. 

결국 이 추리소설의 '변증법'이 또 다시 어떻게 대립하고 타협하며 전환될 것인가는 '추리소설'이라는 '문학의 요충지'가 얼마나 시대를 사실적으로 반영하는가의 문제가 된다.

"범죄소설은 계급, 민족, 인종, 젠더를 향한 서로 다른 시각과 입장이 경합하고 충돌하고 타협하는 '문학의 요충지'로 존재해 왔다. '뉴게이트 소설', '(고전) 추리소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라는 범죄소설의 흐름 속에서 뒤에 나타난 장르는 앞서 나온 장르에 대해 공격의 칼을 휘두르기도 했고, 협상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다."
- [범죄소설의 계보학], <맺음말>, 계정민, 2018.

추리소설에서도 역시,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

- [범죄소설의 계보학], 계정민, <소나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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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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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고헤이의 '인류세의 [자본론]'
- [지속불가능 자본주의](2020) /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2017), 사이토 고헤이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완성할 수 없었다. 
1883년에 죽은 그가 1867년에 출간한 [자본론] 제1권은 '상품'이라는 '개별자'를 통해 '자본주의'의 거대한 생산체제라는 '보편자'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위대한 첫걸음이었다. 서술방식은 "개별은 보편"이라는 헤겔 논리학의 '변증법'이었다. 
1867년의 [자본론] 1권은 1848년 유럽 노동계급 혁명의 시기에 발표된 [공산당선언]을 분기점으로 하여 이전 '독일 이데올로기'나 '철학/경제학 초고' 시기의 '철학'적 단계와 단절되는 '과학'적 단계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그 준비단계는 1851년 망명지 영국의 대영도서관에서 작성된 마르크스의 24권 '런던노트'였다. 
마르크스는 미완의 발췌록과 노트를 남긴 채 저 세상으로 돌아갔고 그의 사후에 평생의 동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자본론] 2권(자본의 순환), 3권(자본의 총생산과 지대, 이윤 등), 그들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칼 카우츠키에 의해 4권에 해당되는 '잉여가치 학설사'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결코 완성될 수 없었다.


"자본주의가 지구를 부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신세(人新世/인류세:Anthropocene)'가 아니라 '자본세'라고 부르는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연대하여 '자본의 전제(專制)'에서 인류의 유일한 고향 지구를 지켜낸다면, 그때는 긍정적인 의미로 인류의 새로운 시대를 '인신세'라 부르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자본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한 '인신세의 자본론'이다."
-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마치며>, 2020.


일본의 젊은 마르크스주의 연구자 사이토 고헤이(1987~)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과 편지, 연구노트 등 일체 출간을 위해 'MEGA(마르크스-엥겔스 전집:Marx-Engels Gesamtausgabe)' 작업에 참여하는 학자다. 그가 독일에서 출간한 마르크스주의 철학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였다. [자본론]을 준비하던 마르크스의 방대한 연구노트와 발췌 등을 '훈고학'적으로 추척하여 마르크스가 말년에 기획하다가 미완으로 남긴 '생태사회주의'를 이어서 복원하려는 시도다. 이 논문의 영문판은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이란 부제를 달고 뛰어난 마르크스주의 연구자에게 수여된다는 아이작 도이처상을 받았다고 한다. 
사이토 고헤이의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2017)는 박사논문이었거니와 마르크스의 초고들의 발췌를 기본으로 했으니 상당히 딱딱하고 문헌적이며 어찌보면 교조적이기까지 하다. 결론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비판했음에도 동일하게 '성장주의'였다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말년에 자연과 인간의 원활한 '대사'와 교류를 기획했던 '생태주의'였으며 그러므로 기후위기의 시대에 부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지와 후계자에 의해 편집되고 요약되어 속간된 [자본론]이 아니라 당대부터 성장 제일주의였던 자본주의와 투쟁하던 '자연과학'이었던 생태주의 연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자본론]을 완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본론] 연구를 이르는 '정치경제학 비판'은 그렇게 미완으로 끝났고, '생태사회주의'로서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이제 '기후위기'의 '인류세'에서 다시 살아난다. 2017년의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라는 딱딱한 논문을 벗어나 사이토 고헤이는 2020년에 [지속불가능 자본주의]라는 대중서를 냈는데, 그 부제는 '인신세의 자본론'이고 국역은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이다.

'인신세'는 사이토 고헤이의 일본식 작법인 듯 하다. 1995년에 노벨 화학상를 받은 파울 크뤼천이 썼다는 '인류세'를 지칭한다. 정해진 번역어도 없고 학문적으로도 확정되지 않은 명칭으로 지금의 신생대 중 인류에 의해 지구가 장악된 시기를 일컫는 일종의 비유적인 용어다. 번역자는 고헤이의 원문에 따라 '인신세'라 쓰나 내게는 '인류세'가 익숙하니,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불가능 자본주의]는 결국 '인류세의 [자본론]'을 뜻한다.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후계자들을 제치고 이 기후위기의 '인류세'에서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자본론]을 쓰겠다는 젊은 학자의 자신감이 참으로 대단하다. 
그는 자본주의가 지구를 망친 지금의 '인류세'는 '자본세'라 불러야 마땅하나, 인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다시 인류와 자연이 원활한 교류를 해야 하므로 그냥 '인류세(인신세)'로 부르면서 자신이 연구한 말년의 마르크스 [자본론] 연구를 토대로 '탈성장 코뮤니즘'의 실천을 당장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학자지만 '이론'적 비판에 머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대로 분석만 하고 있다가 지구 온도가 2~3도 이상 오르면 한 세대 이내 지구의 대부분은 사막화되고 지금처럼 소수의 독점자본가들만 살아남거나 여차하면 그 소수만 우주 밖으로 탈주하게 된다.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 민중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성장과 이윤을 위해 인간의 노동은 물론 근본적으로 지구와 자연을 끊임없이 비틀어짜고 착취하는 자본주의를 당장 뒤엎는 실천을 해야하며, 그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무기를 이미 '1868년 이후의' 마르크스가 말년에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쓰가 발표한 '3.5퍼센트 수치'는 '3.5%가 먼저 진심으로 실천하면 다수에 의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법칙이라는데, 우리는 이미 역사속 '민중항쟁'과 혁명을 통해 보아왔다. 사이토 고헤이가 예시한 전세계적 사례에서는 빠졌지만 우리의 2016년 촛불항쟁의 시초도 거의 '3.5%'였을 게다. 
그래서 사이토 고헤이의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이 말하는 당장의 실천 또한 기다릴 것 없이 '3.5%'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최근 들어 이뤄지는 마르크스 재해석의 핵심개념 중 하나는 '커먼(common)' 혹은 '공(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커먼'이란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부(富)를 가리킨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라는 두 마르크스주의자가 [제국]이라는 책에서 제기하여 단숨에 유명해진 개념이다... '제3의 길'인 '커먼'은 수도, 전력, 주택, 의료, 교육 등을 '공공재'로 삼아서 사람들이 스스로 민주주의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목표한다."
-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4. '인신세'의 마르크스>, 2020.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에서 사이토 고헤이는 마르크스의 초고들을 추적한다. 1844년의 '파리노트'에서는 '소외' 개념을 중심으로 포이어바흐로부터 영향을 받은 '청년 헤겔학파'의 철학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노동'에 기초한 사회혁명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기획한 1848년 유럽 노동계급 혁명의 정국에서 [공산당선언]으로 역사유물론의 기초를 잡았지만 현실의 혁명은 실패했고, 1849년 영국 망명 이후 작성된 1851년의 '런던노트'에서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방대한 연구를 통해 '철학자'에서 '정치경제학자'로 진화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관한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분석으로서 [자본론]은 자본주의 총생산 분석의 틀은 잡았으나 마르크스는 이 [자본론]의 기획을 한꺼번에 완성할 수 없었다. 인간의 합목적적 노동을 통해 생산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이중성과 그로 인한 노동의 '소외', 교환가치를 매개로 하면서 인적 관계를 물적 관계로 은폐하는 '물신화(물상화)'로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노동으로 이어지는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의 왜곡은 지구환경에 대한 자본주의적 약탈로 이어지지만 지구환경이 망한다 해도 결코 멈추지 않는 자본의 자기증식 경향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작업은 막히고 말았다. 그로 인해 마르크스는 '잉여가치'와 국가, 그리고 국제정치와 세계사를 아우르는 [자본론]의 대기획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이 기후위기 '인류세'에서는 더 이상 연구만 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지구와 인류문명의 멸망으로 멈추기 전에 다수 대중의 '3.5%'부터 시작되는 당장의 실천으로 이 자본주의 체제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자본론] 1권이 나온 다음해인 1868년 이후의 마르크스는 '자연과학'을 심도깊게 공부한다. 그는 '생태학'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으나 당시 그가 연구하던 '자연과학'은 '지대'에 관한 연구를 심화시키기 위해 참고하던 '농업학'이었다. 유스투스 본 리비히와 칼 니콜라우스 프라스라는 농학자들을 우리는 잘 모른다. 이들은 '인클로저' 운동를 비롯한 자본주의적 대량생산 농축산업에 의한 토지생산성 약탈을 우려했고 마르크스는 이들의 이론을 통해 자본주의가 자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통찰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자본론] 연구에서 "너무나 큰 이론적 전환"([지속불가능 자본주의], <4>)이 이루어졌고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미완으로 남았다. 따라서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남긴 그것을 넘어서 마르크스가 완성하지 못한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다시금 잇는 실천에서 그 유산을 이어받아야 한다. 사이토 고헤이의 주장은 한가한 이론적 선택이 아니다. 기후위기의 '인류세'에서 우리 다수대중에겐 다른 선택지도 없고 기다릴 시간도 없기 때문이다. 

최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의 '불평등'에 맞서 미국에서조차 젊은이들 과반수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이 체제의 '지속성장'을 기다릴 만한 여유가 없다. "먹고 사는 게 제일 우선"이라고 선전하던 이 자본주의 체제는 다수를, 특히 우리의 미래세대인 젊은이들을 궁핍의 나락으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까지 모두 경제성장으로 번 돈으로 화성에 가서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자본주의적 희망은 그 실현 가능성이 너무도 희박하다. 그리하여 현재 자본주의가 이룬 경제성과를 배분하는 'FALC'도 등장했다. 아론 바스타니의 [완벽하게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선언(FALC)](2019)은 바로 자본주의적 공공재를 절대다수가 재전유하여 불평등 체제를 타파할 수 있다는 매우 낙관적인 전망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사이토 고헤이에 의하면 아론 바스타니의 주장은 그 바람직한 목표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과 '생산력(기술발전)'의 함정에 걸린 "가속주의라는 현실도피"([지속불가능 자본주의], <5>)에 불과하다. '노동의 종말'이나 '엔트로피 법칙' 따위로 '미래학자' 행세를 하는 제레미 리프킨 같은 학자가 내놓는 대안들이나 '그린 뉴딜' 또한 사이토 고헤이에 의하면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에 기반한 '가속주의' 또는 '기후 케인즈주의'로 분류된다.

사이토 고헤이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이나 '생산력(기술) 발전'이 아니라 '탈성장'이며 다수들의 연대에 기반한 '연합체(association)'다. 지금의 성장으로도 다수 인류가 충분히 번영을 이루며 살 수 있으니 후진국(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자연과 노동력에 대한 선진국(글로벌 노스:global north)의 약탈과 착취를 멈추고 소수에 독점된 '커먼(common)'을 다수가 재전유하는 '연합'이 필요하다. 이야말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에서 말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다. '탈성장'을 지향하는 다수 개인들이 연합하여 지구가 망하든 말든 자본주의적으로 경제를 성장시키기만 하다가 안되면 지구를 떠나겠다는 소수의 발상에 강력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커먼(common)'이라는 용어 또한 정해진 번역어는 없다. 이탈리아 정치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제국](1998), [어셈블리](2017)를 통해 다수대중인 '다중'(multitude/mass worker/people)'이 '공통적인 것(common)'을 재전유하는 '연합(association)'을 이야기한다. 즉 '커먼'을 더 많이 만들어 봐야 결국 소수가 독점하는 '결핍의 자본주의'를 벗어나, 현재의 '커먼'과 공공재를 그것을 만든 다수가 재전유하는 '풍요의 코뮤니즘'으로 이행시키는 열쇠는 '평등'과 '탈성장'을 공유하는 전세계적 연합체인 것이다. 
[공산당선언]에서 지향하는 '자/개/연(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의 현대화다.


"지금 사람들이 당사자로서 능동적으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영역이 남아 있다면 바로 '생산'일 것이다. 그러니 '변혁'을 형한 첫걸음은 '생산(노동)'에서 시작해야 한다."
-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7. '탈성장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한다>, 2020.


[21세기 자본]의 '자유주의'에서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참여사회주의'로 이행한 토마 피케티에 대한 사이토 고헤이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여기에 기후위기 문제에 기반한 '생태주의'를 결합하되, 피케티처럼 마르크스를 구닥다리로 보지 않고 지속적으로'현대화'시키는 당장의 실천을 위해 그 이론적 기초를 추적하는 것이 사이토 고헤이의 지적 여정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쓰는 '인신세(인류세)의 [자본론]'의 결론은 '노동'과 '생산'에 여전히 기반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사용가치 경제로의 전환' : 자연에 대한 무한한 착취를 멈추기 위해 인간과 자연의 본래적 '물질대사'로서의 '사용가치'가 양적이고 '물신화(물상화)'된 '교환가치'보다 우선될 것.
2) '노동시간 단축' : '노동일' 단축과 '생산혁신'을 통해 '교환가치'의 양적 생산영역이 아닌 '사용가치'의 질적 생산영역인 여가노동(시간)을 더 많이 확보할 것.
3) '획일적인 분업폐지' : 노동자가 생산의 일부만이 아니라 생산과정 일체를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노동으로 만든 생산물을 함께 전유할 것.
4) '생산과정의 민주화' : 노동자 자주관리와 상호부조에 기초한 민주적인 생산과정은 '경제성장'의 덫에 빠지지 않는 '탈성장'의 기본 운영구조이므로 더디더라도 생산과정 일체를 민주화할 것.
5) '필수노동 중시' : '교환가치' 우선의 '물신화'를 극복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돌봄(감정)노동과 공공재 생산의 '필수노동'은 기계화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중시하고 지켜낼 것.


막연한가?
언제 어느 시절에도 '변혁'과 '혁명'은 그래 왔다. 그럼에도 '인류세'에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한 인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구환경의 운명을 책임지는 임무는 우주 먼 별에서 그랜다이저를 타고 온 '듀크프리드' 왕자나 소수 독점자본가와 정치권력이 아니라 화성으로 도망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절대다수에게 있다.

사이토 고헤이는 '소비주의'적 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지만, 나부터 플라스틱 줄이기와 일회용품 안 쓰기 운동 등을 실천하면서 더 나아가 진지하게 '탈성장'과 다시금 '평등'을 곱씹어 봐야겠다.
[자본론]의 전체적인 윤곽은 잡았지만 인류와 자연과의 관계 복원에 머리를 싸맨 채 도서관에 처박혀 '자연과학(생태학)'과 게르만 '마르크공동체', 러시아의 '미르' 등과 같은 '지역공동체' 등을 공부하며 여전히 '런던노트'를 쓰던 1868년 이후의 마르크스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커피숍에서도 플라스틱 빨대는 받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쓰는 '인류세의 [자본론]'이다.

***

1.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2020), 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2.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2017), 사이토 고헤이, 추선영 옮김, <두번째테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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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
사이토 고헤이 지음, 추선영 옮김 / 두번째테제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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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고헤이의 '인류세의 [자본론]'
- [지속불가능 자본주의](2020) /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2017), 사이토 고헤이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완성할 수 없었다. 
1883년에 죽은 그가 1867년에 출간한 [자본론] 제1권은 '상품'이라는 '개별자'를 통해 '자본주의'의 거대한 생산체제라는 '보편자'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위대한 첫걸음이었다. 서술방식은 "개별은 보편"이라는 헤겔 논리학의 '변증법'이었다. 
1867년의 [자본론] 1권은 1848년 유럽 노동계급 혁명의 시기에 발표된 [공산당선언]을 분기점으로 하여 이전 '독일 이데올로기'나 '철학/경제학 초고' 시기의 '철학'적 단계와 단절되는 '과학'적 단계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그 준비단계는 1851년 망명지 영국의 대영도서관에서 작성된 마르크스의 24권 '런던노트'였다. 
마르크스는 미완의 발췌록과 노트를 남긴 채 저 세상으로 돌아갔고 그의 사후에 평생의 동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자본론] 2권(자본의 순환), 3권(자본의 총생산과 지대, 이윤 등), 그들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칼 카우츠키에 의해 4권에 해당되는 '잉여가치 학설사'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결코 완성될 수 없었다.


"자본주의가 지구를 부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신세(人新世/인류세:Anthropocene)'가 아니라 '자본세'라고 부르는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연대하여 '자본의 전제(專制)'에서 인류의 유일한 고향 지구를 지켜낸다면, 그때는 긍정적인 의미로 인류의 새로운 시대를 '인신세'라 부르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자본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한 '인신세의 자본론'이다."
-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마치며>, 2020.


일본의 젊은 마르크스주의 연구자 사이토 고헤이(1987~)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과 편지, 연구노트 등 일체 출간을 위해 'MEGA(마르크스-엥겔스 전집:Marx-Engels Gesamtausgabe)' 작업에 참여하는 학자다. 그가 독일에서 출간한 마르크스주의 철학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였다. [자본론]을 준비하던 마르크스의 방대한 연구노트와 발췌 등을 '훈고학'적으로 추척하여 마르크스가 말년에 기획하다가 미완으로 남긴 '생태사회주의'를 이어서 복원하려는 시도다. 이 논문의 영문판은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이란 부제를 달고 뛰어난 마르크스주의 연구자에게 수여된다는 아이작 도이처상을 받았다고 한다. 
사이토 고헤이의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2017)는 박사논문이었거니와 마르크스의 초고들의 발췌를 기본으로 했으니 상당히 딱딱하고 문헌적이며 어찌보면 교조적이기까지 하다. 결론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비판했음에도 동일하게 '성장주의'였다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말년에 자연과 인간의 원활한 '대사'와 교류를 기획했던 '생태주의'였으며 그러므로 기후위기의 시대에 부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지와 후계자에 의해 편집되고 요약되어 속간된 [자본론]이 아니라 당대부터 성장 제일주의였던 자본주의와 투쟁하던 '자연과학'이었던 생태주의 연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자본론]을 완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본론] 연구를 이르는 '정치경제학 비판'은 그렇게 미완으로 끝났고, '생태사회주의'로서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이제 '기후위기'의 '인류세'에서 다시 살아난다. 2017년의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라는 딱딱한 논문을 벗어나 사이토 고헤이는 2020년에 [지속불가능 자본주의]라는 대중서를 냈는데, 그 부제는 '인신세의 자본론'이고 국역은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이다.

'인신세'는 사이토 고헤이의 일본식 작법인 듯 하다. 1995년에 노벨 화학상를 받은 파울 크뤼천이 썼다는 '인류세'를 지칭한다. 정해진 번역어도 없고 학문적으로도 확정되지 않은 명칭으로 지금의 신생대 중 인류에 의해 지구가 장악된 시기를 일컫는 일종의 비유적인 용어다. 번역자는 고헤이의 원문에 따라 '인신세'라 쓰나 내게는 '인류세'가 익숙하니,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불가능 자본주의]는 결국 '인류세의 [자본론]'을 뜻한다.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후계자들을 제치고 이 기후위기의 '인류세'에서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자본론]을 쓰겠다는 젊은 학자의 자신감이 참으로 대단하다. 
그는 자본주의가 지구를 망친 지금의 '인류세'는 '자본세'라 불러야 마땅하나, 인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다시 인류와 자연이 원활한 교류를 해야 하므로 그냥 '인류세(인신세)'로 부르면서 자신이 연구한 말년의 마르크스 [자본론] 연구를 토대로 '탈성장 코뮤니즘'의 실천을 당장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학자지만 '이론'적 비판에 머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대로 분석만 하고 있다가 지구 온도가 2~3도 이상 오르면 한 세대 이내 지구의 대부분은 사막화되고 지금처럼 소수의 독점자본가들만 살아남거나 여차하면 그 소수만 우주 밖으로 탈주하게 된다.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 민중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성장과 이윤을 위해 인간의 노동은 물론 근본적으로 지구와 자연을 끊임없이 비틀어짜고 착취하는 자본주의를 당장 뒤엎는 실천을 해야하며, 그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무기를 이미 '1868년 이후의' 마르크스가 말년에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쓰가 발표한 '3.5퍼센트 수치'는 '3.5%가 먼저 진심으로 실천하면 다수에 의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법칙이라는데, 우리는 이미 역사속 '민중항쟁'과 혁명을 통해 보아왔다. 사이토 고헤이가 예시한 전세계적 사례에서는 빠졌지만 우리의 2016년 촛불항쟁의 시초도 거의 '3.5%'였을 게다. 
그래서 사이토 고헤이의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이 말하는 당장의 실천 또한 기다릴 것 없이 '3.5%'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최근 들어 이뤄지는 마르크스 재해석의 핵심개념 중 하나는 '커먼(common)' 혹은 '공(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커먼'이란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부(富)를 가리킨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라는 두 마르크스주의자가 [제국]이라는 책에서 제기하여 단숨에 유명해진 개념이다... '제3의 길'인 '커먼'은 수도, 전력, 주택, 의료, 교육 등을 '공공재'로 삼아서 사람들이 스스로 민주주의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목표한다."
-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4. '인신세'의 마르크스>, 2020.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에서 사이토 고헤이는 마르크스의 초고들을 추적한다. 1844년의 '파리노트'에서는 '소외' 개념을 중심으로 포이어바흐로부터 영향을 받은 '청년 헤겔학파'의 철학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노동'에 기초한 사회혁명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기획한 1848년 유럽 노동계급 혁명의 정국에서 [공산당선언]으로 역사유물론의 기초를 잡았지만 현실의 혁명은 실패했고, 1849년 영국 망명 이후 작성된 1851년의 '런던노트'에서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방대한 연구를 통해 '철학자'에서 '정치경제학자'로 진화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관한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분석으로서 [자본론]은 자본주의 총생산 분석의 틀은 잡았으나 마르크스는 이 [자본론]의 기획을 한꺼번에 완성할 수 없었다. 인간의 합목적적 노동을 통해 생산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이중성과 그로 인한 노동의 '소외', 교환가치를 매개로 하면서 인적 관계를 물적 관계로 은폐하는 '물신화(물상화)'로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노동으로 이어지는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의 왜곡은 지구환경에 대한 자본주의적 약탈로 이어지지만 지구환경이 망한다 해도 결코 멈추지 않는 자본의 자기증식 경향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작업은 막히고 말았다. 그로 인해 마르크스는 '잉여가치'와 국가, 그리고 국제정치와 세계사를 아우르는 [자본론]의 대기획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이 기후위기 '인류세'에서는 더 이상 연구만 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지구와 인류문명의 멸망으로 멈추기 전에 다수 대중의 '3.5%'부터 시작되는 당장의 실천으로 이 자본주의 체제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자본론] 1권이 나온 다음해인 1868년 이후의 마르크스는 '자연과학'을 심도깊게 공부한다. 그는 '생태학'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으나 당시 그가 연구하던 '자연과학'은 '지대'에 관한 연구를 심화시키기 위해 참고하던 '농업학'이었다. 유스투스 본 리비히와 칼 니콜라우스 프라스라는 농학자들을 우리는 잘 모른다. 이들은 '인클로저' 운동를 비롯한 자본주의적 대량생산 농축산업에 의한 토지생산성 약탈을 우려했고 마르크스는 이들의 이론을 통해 자본주의가 자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통찰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자본론] 연구에서 "너무나 큰 이론적 전환"([지속불가능 자본주의], <4>)이 이루어졌고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미완으로 남았다. 따라서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남긴 그것을 넘어서 마르크스가 완성하지 못한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다시금 잇는 실천에서 그 유산을 이어받아야 한다. 사이토 고헤이의 주장은 한가한 이론적 선택이 아니다. 기후위기의 '인류세'에서 우리 다수대중에겐 다른 선택지도 없고 기다릴 시간도 없기 때문이다. 

최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의 '불평등'에 맞서 미국에서조차 젊은이들 과반수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이 체제의 '지속성장'을 기다릴 만한 여유가 없다. "먹고 사는 게 제일 우선"이라고 선전하던 이 자본주의 체제는 다수를, 특히 우리의 미래세대인 젊은이들을 궁핍의 나락으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까지 모두 경제성장으로 번 돈으로 화성에 가서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자본주의적 희망은 그 실현 가능성이 너무도 희박하다. 그리하여 현재 자본주의가 이룬 경제성과를 배분하는 'FALC'도 등장했다. 아론 바스타니의 [완벽하게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선언(FALC)](2019)은 바로 자본주의적 공공재를 절대다수가 재전유하여 불평등 체제를 타파할 수 있다는 매우 낙관적인 전망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사이토 고헤이에 의하면 아론 바스타니의 주장은 그 바람직한 목표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과 '생산력(기술발전)'의 함정에 걸린 "가속주의라는 현실도피"([지속불가능 자본주의], <5>)에 불과하다. '노동의 종말'이나 '엔트로피 법칙' 따위로 '미래학자' 행세를 하는 제레미 리프킨 같은 학자가 내놓는 대안들이나 '그린 뉴딜' 또한 사이토 고헤이에 의하면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에 기반한 '가속주의' 또는 '기후 케인즈주의'로 분류된다.

사이토 고헤이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이나 '생산력(기술) 발전'이 아니라 '탈성장'이며 다수들의 연대에 기반한 '연합체(association)'다. 지금의 성장으로도 다수 인류가 충분히 번영을 이루며 살 수 있으니 후진국(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자연과 노동력에 대한 선진국(글로벌 노스:global north)의 약탈과 착취를 멈추고 소수에 독점된 '커먼(common)'을 다수가 재전유하는 '연합'이 필요하다. 이야말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에서 말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다. '탈성장'을 지향하는 다수 개인들이 연합하여 지구가 망하든 말든 자본주의적으로 경제를 성장시키기만 하다가 안되면 지구를 떠나겠다는 소수의 발상에 강력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커먼(common)'이라는 용어 또한 정해진 번역어는 없다. 이탈리아 정치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제국](1998), [어셈블리](2017)를 통해 다수대중인 '다중'(multitude/mass worker/people)'이 '공통적인 것(common)'을 재전유하는 '연합(association)'을 이야기한다. 즉 '커먼'을 더 많이 만들어 봐야 결국 소수가 독점하는 '결핍의 자본주의'를 벗어나, 현재의 '커먼'과 공공재를 그것을 만든 다수가 재전유하는 '풍요의 코뮤니즘'으로 이행시키는 열쇠는 '평등'과 '탈성장'을 공유하는 전세계적 연합체인 것이다. 
[공산당선언]에서 지향하는 '자/개/연(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의 현대화다.


"지금 사람들이 당사자로서 능동적으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영역이 남아 있다면 바로 '생산'일 것이다. 그러니 '변혁'을 형한 첫걸음은 '생산(노동)'에서 시작해야 한다."
-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7. '탈성장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한다>, 2020.


[21세기 자본]의 '자유주의'에서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참여사회주의'로 이행한 토마 피케티에 대한 사이토 고헤이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여기에 기후위기 문제에 기반한 '생태주의'를 결합하되, 피케티처럼 마르크스를 구닥다리로 보지 않고 지속적으로'현대화'시키는 당장의 실천을 위해 그 이론적 기초를 추적하는 것이 사이토 고헤이의 지적 여정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쓰는 '인신세(인류세)의 [자본론]'의 결론은 '노동'과 '생산'에 여전히 기반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사용가치 경제로의 전환' : 자연에 대한 무한한 착취를 멈추기 위해 인간과 자연의 본래적 '물질대사'로서의 '사용가치'가 양적이고 '물신화(물상화)'된 '교환가치'보다 우선될 것.
2) '노동시간 단축' : '노동일' 단축과 '생산혁신'을 통해 '교환가치'의 양적 생산영역이 아닌 '사용가치'의 질적 생산영역인 여가노동(시간)을 더 많이 확보할 것.
3) '획일적인 분업폐지' : 노동자가 생산의 일부만이 아니라 생산과정 일체를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노동으로 만든 생산물을 함께 전유할 것.
4) '생산과정의 민주화' : 노동자 자주관리와 상호부조에 기초한 민주적인 생산과정은 '경제성장'의 덫에 빠지지 않는 '탈성장'의 기본 운영구조이므로 더디더라도 생산과정 일체를 민주화할 것.
5) '필수노동 중시' : '교환가치' 우선의 '물신화'를 극복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돌봄(감정)노동과 공공재 생산의 '필수노동'은 기계화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중시하고 지켜낼 것.


막연한가?
언제 어느 시절에도 '변혁'과 '혁명'은 그래 왔다. 그럼에도 '인류세'에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한 인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구환경의 운명을 책임지는 임무는 우주 먼 별에서 그랜다이저를 타고 온 '듀크프리드' 왕자나 소수 독점자본가와 정치권력이 아니라 화성으로 도망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절대다수에게 있다.

사이토 고헤이는 '소비주의'적 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지만, 나부터 플라스틱 줄이기와 일회용품 안 쓰기 운동 등을 실천하면서 더 나아가 진지하게 '탈성장'과 다시금 '평등'을 곱씹어 봐야겠다.
[자본론]의 전체적인 윤곽은 잡았지만 인류와 자연과의 관계 복원에 머리를 싸맨 채 도서관에 처박혀 '자연과학(생태학)'과 게르만 '마르크공동체', 러시아의 '미르' 등과 같은 '지역공동체' 등을 공부하며 여전히 '런던노트'를 쓰던 1868년 이후의 마르크스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커피숍에서도 플라스틱 빨대는 받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쓰는 '인류세의 [자본론]'이다.

***

1.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2020), 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2.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2017), 사이토 고헤이, 추선영 옮김, <두번째테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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