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 - 러시아어판 완역 레닌 에센스 1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지음, 최호정 옮김 / 박종철출판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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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걸음 정도 뒤척거리던 시간 : 1995~1997년
-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레닌, 1904.


"One step forward, Two steps backward."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내 사무실 책상 메모지에 필기체로 적은 문장이었다.
우리말로 "일보 전진, 이보 후퇴"라 적어놓으면 적어도 기무대 중사는 알아볼 것 같았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그랬다.


1.

-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여단 사령부 민심처장이 첫 면담에서 물었다.
나는 조금 생각해 보다가 독일 철학자 '헤겔'이라고 둘러댔다. 당시 내 머리에 서양철학을 '완성'한 사람은 그래도 존경할만 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민심처장은 별 대꾸가 없었는데 그 노회한 소령 장교는 아마도 헤겔을 모르는 듯 했고, 나는 근대 철학을 완성한 사람이라 그렇다고 덧붙였다.

아마도 기갑여단의 '민사심리전'을 맡은 '민심처'의 책임자가 새로 배속된 신병의 사상을 '검증'하는 2차 면접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후에 병사들의 '정신훈련'을 뜻하는 '정훈처'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 '민심처'는 우리 군의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교육하는 임무를 지고 있었는데 민심처 기간병은 그러거나 말거나 주로 국방일보를 배포하고 방송을 틀었다. 소령인 처장과 중위인 보좌관, 중사인 행정관과 기간병 두 명이 구성원이었고, 신입 이등병이었던 나를 2개월 먼저 입대한 동갑내기 이등병 선임이 매의 눈으로 항시 감시했다. 결국 그 선임은 얼마 안가 이유없이 내 목을 조르며 겁을 주려다가 후임인 내게 호되게 얻어맞고 나서 전역할 때까지 나에게 감히 한마디도 건네지 못했고 내 군생활은 뜻하지 않게 피고 말았다.

1995년 10월에 입대하여 1996년 10월에 상병휴가 나가서 후배 미선이와 사귀게 된 나는 거의 매일 열 장이 넘는 장문의 연애편지를 썼다. 당시 나의 꿈은 '소설가'였고 1996년은 내가 좋아하던 '90년대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가' 김소진이 요절한 해였다. 민심처에서 아침에 신문을 분류하고 스크랩하던 나는 그의 부고기사를 보다가 잠깐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그의 화려하지 못한 비루한 지식인 리얼리즘은 역시 잘나지 못한 내가 따라가기에도 벅찼지만, 그는 당시 나에게 최고의 '리얼리즘(사실주의/현실주의)' 소설가였다. 내가 쓰던 장문의 연애편지는 사실, 단편소설의 습작이었다. 미선이도 비슷하게 장문의 답장을 보내왔고 그렇게 1년 동안 받은 200여 통의 손편지는 그녀와 헤어진 후로도 오랫동안 내 방 구석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 답장들이 담긴 가방을 내다 버린 게 결혼 전후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이제 더 이상 나의 '첫사랑'을 떠올리지 말자고 결심한 어느날이었을게다. 

군입대는, 나에게 "두 걸음 후퇴"였지만,
세상과 격리된 채 습작을 일삼던 그 시기는 어쩌면, "한 걸음 전진"이었다.


2.

"진정한 변증법은 개인적 오류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 전향들을 연구하는 것이며, 그 발전을 구체성 속에서 최대한 상세하게 연구한 것에 근거하여 그러한 전향의 필연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변증법의 기본명제는 추상적 진리는 없으며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이는 개개인의 생활에서도, 민족의 역사에서도, 당의 발전에서도 한 번씩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 강령과 전술의 영역에서 그런 것처럼 조직의 영역에서도 부르주아 심리에 무력하게 굴복하고 부르주아민주주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취하고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의 무기를 무디게 만드는 기회주의의 파멸성을 알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권력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당)조직 외에는 다른 무기가 없다."
-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R. 변증법에 대한 몇 마디. 두 변혁>, 레닌, 1904.


레닌은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의 2차 당대회에서부터 '다수파'인 '볼셰비키'를 이끌게 된다. 1898년 창당대회인 1차 당대회 후 1902년에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정치 팜플렛을 통해 러시아 차르의 억압적인 전제체제에서 노동계급의 '혁명정당'은 비합법 전위정당이 되어야 하며 이 선진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다수 노동계급을 의식화하고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 조직을 결속하는 도구는 당기관지 <이스크라(불꽃)>였고, 이 혁명적 전위정당은 프롤레타리아 노동계급의 '무기'였다. 이 '전위정당파'는 '불꽃파'라는 이념서클이었고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당대회는 '불꽃파'를 비롯하여 '대중정당파'인 지식인 서클과 농민 중심 '인민주의자'들, 시베리아 노동그룹과 배타적 유대인 노동자동맹(분트), 국외사회주의자연맹 등의 '서클'들이 모여 혁명적 정치정당의 강령을 공식적으로 확정하는 자리였다. 레닌이 지도하던 '전위정당파(불꽃파)'는 엄격한 당원 기준을 명시하고자 했던 반면, 마르토프로 대표되던 후의 '멘셰비키(소수파)'는 '대중정당'으로서 당원의 자격을 대중일반에게 널리 열어놓자고 주장했다. 표결에서는 기권자로 인해 레닌이 '다수파'가 되고, 마르토프가 '소수파'가 되었지만, 원래 대의원표로 보면 볼셰비키의 즉각적 혁명보다는 다수 대중운동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우선 강화하자는 멘셰비키의 일반 민주주의론이 우세했다. 지금의 인식은 물론 당시 서유럽 독일의 사회민주당 강령 또한 그런 '대중주의정당' 노선이었다. 그만큼 레닌주의는 사회주의운동의 역사에서 예외적인 부류였지만, 마르크스가 혁명적이지 못한 대중정당 강령을 비판했듯 레닌은 마르크스를 따라 러시아 차르체제에서 '민주적 대중정당론'을 공격했다.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마르크스 [자본론]을 소개한 당대회 의장 플레하노프도 레닌의 편에 섰지만 레닌은 승리를 위해 반대파를 집요하게 괴롭혔고 결국 일부 반대파와 중간파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면서 '멘셰비키'는 표결에서 패배했다. 승리한 레닌은 '전위정당파'를 '볼셰비키(다수파)'로 규정했고 마르토프와 '불꽃파'의 소수파였던 트로츠키마저 본의 아니게 '멘셰비키(소수파)'가 되고 말았다. 졸지에 '소수파'가 된 마르토프는 소수파의 반격을 개시했지만 레닌은 당대회 분석자료를 방대하고도 세밀하게 저술하면서까지 이 '소수파'를 꼬투리잡고 깔아뭉갰다. 레닌에 동조하던 '중앙파' 플레하노프조차 멘셰비키로 돌아서는 이 집요한 과정에서도 레닌의 중앙식 '민주집중주의'는 마르토프의 '대중민주주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결국 레닌파는 당대회 결정에 따라 당기관지 <불꽃>으로부터도 배제되고 말지만 '전위정당' 강령투쟁에서 승리한 레닌의 '민주집중파'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을 명실상부한 혁명적 전위정당으로 자리매김해 버린다. 레닌이 당내의 온갖 '기회주의'와 '경제주의', '대중추수주의(꽁무니주의)' 및 '무정부주의' 경향들과 결연히 투쟁하고자 정리한 저작이 바로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1904)인 것이다. 즉, '서클운동'에 머물러 있던 러시아 사회주의운동이 하나의 혁명적 전위정당으로 단결한 것은 운동의 역사에서 "한 걸음 전진"이었고, '기회주의'와 '무정부주의'로 규정된 '대중민주주의'와 분열되어 길고긴 운동내 권력투쟁을 확인한 것은 '두 걸음 후퇴"였다는 의미다. 집요한 권력투쟁의 화신이었던 레닌은 결국 차르체제를 끝장낸 케렌스키의 부르주아 임시정부까지 뒤집어엎고 세계 최초의 노동자국가인 소비에트연방을 건설하고야 만다. 레닌이 전진했던 "한 걸음"은 러시아 사회주의운동이 후퇴했던 "두 걸음"보다 훨씬 큰 걸음이었다.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에서 가장 주요한 명제를 꼽으라면 나는,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다"라는 한 줄을 뽑는다. 레닌이 보기에 '멘셰비키'가 내건 대중민주주의는 추상적이고 서유럽에나 맞는 주장이었다. 1917년 2월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에서나 물러난 수백년 역사의 러시아 차르체제는 1903년 당시만 해도 서슬이 퍼랬고 그런 러시아에서 대중적 민주주의 일반론이 적용될 여지는 없었다. 레닌의 중앙식 민주집중주의는 소수의 전위정당이 다수 노동계급을 선도하고 지도하며 철옹성 같은 차르체제를 일거에 폭력적으로 뒤집는 혁명만이 유일하고도 '구체적'인 전략이라 본 것이다. 이것이 이 책에서 레닌이 주장한 '구체적 진리'의 실체였다.

내가 레닌의 혁명을 우러러 보았다면 이유는 바로, 이런 그의 '구체적'인 철학이었고 변증법적 사유였다.


3.

"마르크스, 무인년(1818) 호랑이해 초여름에 독일 라인주 트리어시에서 출생함... 엥겔스... 경진년(1820) 용해, 라인주 바르멘싱 한 자본가 가정에서 태어나다... 레닌... 경오년(1870) 말해, 평범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다... 정사년(1917) 뱀해, 소련의 시월혁명이 성공하고, 47세의 레닌이 소련공산당 총서기가 되다... 스탈린... 기묘년(1879) 토끼해, 스탈린이 조지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다... 마오쩌뚱... 계사년(1893) 뱀해, 마오주석이 사오산층의 한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나다."
- [레닌의 키스], <7-9. 해설-경앙당>, 옌롄커, 2003.


내가 군대 사무실 책상에 "일보 전진, 이보 후퇴"를 영어 필기체로 소심하게 휘갈겨 썼던 1995년은 사실 러시아 차르체제와 같이 철옹성 같던 80년대 군사독재는 아니었다. 자유민주주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민심처에는 사노맹 자료를 비롯한 수많은 사회주의 선전물이 인용된 책자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내가 싫어하던 부대내 사복입은 기무대 중사는 가끔 사무실에 오기는 했지만 일개 사병의 책상 메모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던 시절이었다. 군대내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영창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나는 불침번을 서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 1장과 4장을 마치 성경처럼 외웠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두뇌가 정지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회주의자'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군대내 '성경'과 '불경'이 허용되듯 모든 사상과 이념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나 혼자만의 '자유주의' 사상 때문이었을게다. 어느날 여단 사령부 대회의실을 청소하다가 본 방공대 신임장교가 우리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왔다가 떨어진 '주사파' 후보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지만 한참 후 베네수엘라 사회주의자 차베스 대통령이 군대 장교 재직당시 좌파혁명을 시도했다는 이야기 등으로 보았을 때, 국가를 지키는 군대의 사상이 '자유민주주의' 하나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군대의 이념은 결국 해당 국가 정체성의 물적 표현이었다. 
그렇게 "진리는 구체적"인 것이다.


중국의 소설가 옌롄커도 27년간 군대에서 복무한 작가였다. 그는 지속적으로 중국사회의 획일성을 문학적으로 폭로해 왔는데, 2003년 소설 [레닌의 키스]로 인해 아예 군복을 벗는다. 원제가 '수활(受活)'인 이 장편소설은 중국어로 '서우훠(受活)'라는 북부 오지 장애인마을이 중국의 '사회주의혁명'의 역사에서 겪는 고초를 큰 줄기로 하여, 류잉췌라는 당고급간부의 욕망과 몰락을 함께 그린다. 결국 사회주의국가 중국의 민중들은 '혁명'으로부터 반복적으로 배신을 당했고, '혁명'의 역사 속에서 영욕을 누리려는 개인 또한 체제 속에서 고사하고 만다는 이야기를 흡사 '제3세계'인 콜럼비아의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자유민주주의' 미국의 샐린저처럼 '환상적(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문체로 묘사한다. 인민들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서우훠'의 장애인묘기공연단을 운영하여 큰 돈을 벌고 이 돈으로 더 이상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국가가 아닌 1998년의 러시아로부터 레닌의 유해를 사들여 레닌 기념관을 세우고 더 큰 돈을 벌겠다는 허무맹랑한 계획이 무산되는 과정을 매우 장황하고 지루하게 서술하고 있다. 작가 옌롄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옌안의 대장정에 참여했던 혁명가 마오즈 할머니는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한 당고위관료 류잉췌 또한 이 '혁명'의 희생양이라는 것인데, 작가는 '현실주의' 또는 '리얼리즘'이나 '사실주의' 모두가 허상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그런 '진실'은 없으며 그의 작업은 그러한 사실에 대한 폭로인 것이다. 결국 그 또한 마르케스나 샐린저처럼 '사실주의'의 한 형태로 보이지만 옌롄커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진실'을 써내는 '현실주의'가 되기를 한사코 거부한다.
레닌의 유해를 구해와서 승진하고자 하는 욕망에 미쳐가는 류잉췌는 본인의 성당과 같은 '경앙당'에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과 스탈린, 마오쩌뚱과 김일성까지 모시면서 그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영전 앞줄에 본인의 사진을 앞세우기까지 하는데 '혁명'으로 치장된 '욕망'의 정신병적 현상의 단면이다.

죽은 것으로부터 병적인 '키스'를 갈구하는 한, '혁명'은 없다. '레닌의 키스'는 '혁명의 몰락'이었다. 
'혁명'은 살아있는 현실에 대한 솔직함이다. 비록 레닌은 오래전에 죽었지만, "진리는 구체적"이라는 테제는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시, '혁명'은 '리얼리즘'일 수밖에 없다


4.

한편, 내가 속한 여단 사령부의 끝자락 '민심처' 옆 언덕 위에는 '군수처'가 있었는데 나는 타자실력을 테스트받고 자전거 잘 탄다고 사기쳐서 뽑혔지만 내 훈련소 입대동기 기준이는 타자실력조차 사기쳐서 '군수처'에 들어갔다. 왕주먹에 인천에서 좀 놀았다던 나보다 한 살 아래인 그 동기 또한 내가 새벽에 자전거를 붙잡고 고생 좀 했듯, 밤새 컴퓨터를 붙잡고 애를 먹었다. 두꺼운 손가락으로 문서를 작성하던 기준이는 그래도 제대할 때 즈음에는 '파워포인트 97'의 대가가 되었다. 아무튼, 아마도 내가 자전거 테스트를 받고 동기 기준이가 컴퓨터 테스트를 받았더라면 우린 애줄없이 본부대가 아닌 공병대나 예하 전차부대로 가서 고생 좀 더 했을 테지만 90년대의 행정병 면접은 허술하기도 하고 어찌보면 매우 '인간적'이기도 했다. 내가 알 수 없는 혹시 모를 '연줄' 같은 게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지지만, 여튼 내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거다.

2개월 위 고참을 만난 나의 첫 군생활이 꼬였다면, 군수처 동기 기준이는 한달 아래 후임을 받아서 활짝 피고 말았다. 물론 나도 얼마 안가 모지리 같은 선임을 몰래 두들겨 패주고 바로 군생활이 이등병 때부터 같이 피고 말았지만. 기준이가 받은 우리보다 한달 늦은 이재환 이병은 나보다 한살 많았고 내 동기 고기준보다 옆 부서의 나와 더 친했다. 학보사 편집장을 했다던 그는 나와 대화가 좀 되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단 둘 뿐인 각자의 사무실에서 한두달 밖에 차이 안나는 선임병을 두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물론 나의 민심처 고참은 표정만 험악했지 약골이었던 반면 가엾은 이재환 이병의 군수처 고참인 내 동기 고기준 이병은 얼굴은 착했으나 주먹이 내 얼굴만했다. 이등병 말호봉 때부터 사무실 생활이 편해진 나는 방송 틀고 어슬렁대다가 커다란 기름 드럼통을 굴리던 재환이 형을 자주 보았는데 난 괜스레 돕는답시고 이재환 이병 옆에서 끝까지 꼬일 그의 군생활을 계속 상기시켜 주곤 했다. 같은 군수처였지만 전역할 때까지 한달 고참 기준이는 사무직이었고 한달 쫄따구 재환이 형은 끝까지 쌩 노가다였다. 어쩌다가 가끔 함께 보초를 서게 되면 나는 한달 후임인 재환이 형을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했고 여단 사령부 C.P. 뒤를 하릴없이 지키던 우리는 평소 군대에서 꺼내기 힘든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다. 학보사를 도구로 대학 총학생회 선거에도 개입하며 지역 '좌파의 아성'이었다던 재환이 형의 대학 이야기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학회운동을 중심으로 한 나의 변증법적 유물론 철학 이야기는 군대에서 아무하고나 나눌 수 있는 주제는 아니었다. 상대가 아무리 친한 군수처 동기 기준이라 해도 말이다.

전역을 하고 한참 후 졸업도 하고 사회에 나왔을 때 우연히 이재환 병장을 종로 낙원동 골목의 포장마차에서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소주 한 잔 하면서 나는 그를 형이라 불렀고 역시 편한 마음에 '국가독점자본주의' 이야기를 했다. '좌파의 아성' 출신이었던 재환이 형은 아직도 그런 얘기를 하느냐 물었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세계관이나 인식의 차이였다기 보다는 생활의 차이였겠다 싶었다. 사무직 노동자를 자처했지만 나는 시민운동과 거리가 있는 한가한 직장인이었고 재환이 형은 시민단체 신문기자였다. 나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국가독점자본주의론 따위를 한가하게 고담준론했고 그는 치열하게 생활로 고민했을 처지로 인한 차이였을 수도 있겠다.

21세기 벽두의 어느날 저녁 종로의 뒷골목에서 소주잔을 나누고 작별의 악수를 나눈 우리는 "또 보자"는 인사말과 달리 더는 만나지 못했다.

어쨌든 여전히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었기 때문이었겠다.


5.

'자유민주주의'의 성역인 대한민국 군대에서, 그것도 장병들의 '정신교육'을 담당하던 민심처 소속 장병이었지만 내가 지원한 것은 행정병이었지 정훈병이 아니었다. 그런게 있는지 조차도 난 몰랐다. 나는 새벽에 기상나팔과 군가방송를 틀고는 자전거를 타고 나가 국방일보와 조간신문 수백부를 방송이 끝나기 전까지 가져왔고, 장교가 시키는 온갖 쓸데없는 문서를 작성했으며 가지가지의 허드렛일을 했다. 내가 자대배치 전 보충대에서 본부대로 뽑혀간 이유는 1분에 5백타 이상의 타자실력 및 한글문서편집능력의 사실과 그리고 자전거를 잘 탄다는 거짓말 덕분이었다. 나는 문서작성과 글쓰기는 자신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자전거 잘 타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본부대 소속 여단 사령부 행정병과 자전거가 무슨 관계인가 되물어볼 입장이 전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자전거를 타다가 택시에 살짝 친 이후로 스무살 넘도록 안 타봤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편한 군생활이었겠지만 실상 자전거를 거의 못 타던 나에게 무거운 신문을 싣고 새벽 빙판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정말로 고역이었다. 역시 "진리는 구체적"이었고, 나의 군생활은 구체적으로 자전거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자전거를 그리 잘 타는 편은 아니다. 이러한 '진실'은 슬프지만 오래도록 변함없다. 보험금 지급하는 노동으로 십수년 넘게 가정을 꾸려온 내가 지금도 잘 못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보험금 지급업무다. 소설을 쓰고 싶어했고 매일 글쓴다고 끄적거리는 지금까지 내가 제일 못하는 일이 아마도 글쓰기인 것처럼.

하라는 국방은 안 하고 연애편지나 쓰다가 홀로 밤에 [공산당선언]이나 성경처럼 외우던 나는 다행히 영창은 안 갔다. 시대는 이미 그런 시대가 아니었고, 10년만 먼저 태어났다면 아마도 난 그럴 엄두조차도 내지 못했을 테지만, 사람은 누구나 그때그때마다 죽지않을 길을 찾아가는 법이다. 지금 와서는 어이없어 보이기도 했던 1995~1997년 당시의 나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미쳐버릴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두 걸음" 뒤척거렸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한 걸음" 정도는 앞으로 내딛었을지도 모를 1995~1997년 나의 군시절 이야기다.


***

1.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1904), 레닌, 최호정 옮김, <박종철출판사>, 2016.
2. [무엇을 할 것인가 -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1902), 레닌, 최호정 옮김, <박종철출판사>, 2014.
3. [레닌의 키스(受活)](2003), 옌롄커, 김태성 옮김, <문학동네>, 2020.
4. [백년 동안의 고독](1967), 가르시아 마르케스,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1999.
5. [호밀밭의 파수꾼](1951), J.D.샐린저, 공경희 옮김, <민음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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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키스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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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걸음 정도 뒤척거리던 시간 : 1995~1997년
-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레닌, 1904.


"One step forward, Two steps backward."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내 사무실 책상 메모지에 필기체로 적은 문장이었다.
우리말로 "일보 전진, 이보 후퇴"라 적어놓으면 적어도 기무대 중사는 알아볼 것 같았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그랬다.


1.

-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여단 사령부 민심처장이 첫 면담에서 물었다.
나는 조금 생각해 보다가 독일 철학자 '헤겔'이라고 둘러댔다. 당시 내 머리에 서양철학을 '완성'한 사람은 그래도 존경할만 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민심처장은 별 대꾸가 없었는데 그 노회한 소령 장교는 아마도 헤겔을 모르는 듯 했고, 나는 근대 철학을 완성한 사람이라 그렇다고 덧붙였다.

아마도 기갑여단의 '민사심리전'을 맡은 '민심처'의 책임자가 새로 배속된 신병의 사상을 '검증'하는 2차 면접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후에 병사들의 '정신훈련'을 뜻하는 '정훈처'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 '민심처'는 우리 군의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교육하는 임무를 지고 있었는데 민심처 기간병은 그러거나 말거나 주로 국방일보를 배포하고 방송을 틀었다. 소령인 처장과 중위인 보좌관, 중사인 행정관과 기간병 두 명이 구성원이었고, 신입 이등병이었던 나를 2개월 먼저 입대한 동갑내기 이등병 선임이 매의 눈으로 항시 감시했다. 결국 그 선임은 얼마 안가 이유없이 내 목을 조르며 겁을 주려다가 후임인 내게 호되게 얻어맞고 나서 전역할 때까지 나에게 감히 한마디도 건네지 못했고 내 군생활은 뜻하지 않게 피고 말았다.

1995년 10월에 입대하여 1996년 10월에 상병휴가 나가서 후배 미선이와 사귀게 된 나는 거의 매일 열 장이 넘는 장문의 연애편지를 썼다. 당시 나의 꿈은 '소설가'였고 1996년은 내가 좋아하던 '90년대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가' 김소진이 요절한 해였다. 민심처에서 아침에 신문을 분류하고 스크랩하던 나는 그의 부고기사를 보다가 잠깐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그의 화려하지 못한 비루한 지식인 리얼리즘은 역시 잘나지 못한 내가 따라가기에도 벅찼지만, 그는 당시 나에게 최고의 '리얼리즘(사실주의/현실주의)' 소설가였다. 내가 쓰던 장문의 연애편지는 사실, 단편소설의 습작이었다. 미선이도 비슷하게 장문의 답장을 보내왔고 그렇게 1년 동안 받은 200여 통의 손편지는 그녀와 헤어진 후로도 오랫동안 내 방 구석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 답장들이 담긴 가방을 내다 버린 게 결혼 전후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이제 더 이상 나의 '첫사랑'을 떠올리지 말자고 결심한 어느날이었을게다. 

군입대는, 나에게 "두 걸음 후퇴"였지만,
세상과 격리된 채 습작을 일삼던 그 시기는 어쩌면, "한 걸음 전진"이었다.


2.

"진정한 변증법은 개인적 오류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 전향들을 연구하는 것이며, 그 발전을 구체성 속에서 최대한 상세하게 연구한 것에 근거하여 그러한 전향의 필연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변증법의 기본명제는 추상적 진리는 없으며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이는 개개인의 생활에서도, 민족의 역사에서도, 당의 발전에서도 한 번씩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 강령과 전술의 영역에서 그런 것처럼 조직의 영역에서도 부르주아 심리에 무력하게 굴복하고 부르주아민주주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취하고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의 무기를 무디게 만드는 기회주의의 파멸성을 알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권력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당)조직 외에는 다른 무기가 없다."
-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R. 변증법에 대한 몇 마디. 두 변혁>, 레닌, 1904.


레닌은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의 2차 당대회에서부터 '다수파'인 '볼셰비키'를 이끌게 된다. 1898년 창당대회인 1차 당대회 후 1902년에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정치 팜플렛을 통해 러시아 차르의 억압적인 전제체제에서 노동계급의 '혁명정당'은 비합법 전위정당이 되어야 하며 이 선진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다수 노동계급을 의식화하고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 조직을 결속하는 도구는 당기관지 <이스크라(불꽃)>였고, 이 혁명적 전위정당은 프롤레타리아 노동계급의 '무기'였다. 이 '전위정당파'는 '불꽃파'라는 이념서클이었고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당대회는 '불꽃파'를 비롯하여 '대중정당파'인 지식인 서클과 농민 중심 '인민주의자'들, 시베리아 노동그룹과 배타적 유대인 노동자동맹(분트), 국외사회주의자연맹 등의 '서클'들이 모여 혁명적 정치정당의 강령을 공식적으로 확정하는 자리였다. 레닌이 지도하던 '전위정당파(불꽃파)'는 엄격한 당원 기준을 명시하고자 했던 반면, 마르토프로 대표되던 후의 '멘셰비키(소수파)'는 '대중정당'으로서 당원의 자격을 대중일반에게 널리 열어놓자고 주장했다. 표결에서는 기권자로 인해 레닌이 '다수파'가 되고, 마르토프가 '소수파'가 되었지만, 원래 대의원표로 보면 볼셰비키의 즉각적 혁명보다는 다수 대중운동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우선 강화하자는 멘셰비키의 일반 민주주의론이 우세했다. 지금의 인식은 물론 당시 서유럽 독일의 사회민주당 강령 또한 그런 '대중주의정당' 노선이었다. 그만큼 레닌주의는 사회주의운동의 역사에서 예외적인 부류였지만, 마르크스가 혁명적이지 못한 대중정당 강령을 비판했듯 레닌은 마르크스를 따라 러시아 차르체제에서 '민주적 대중정당론'을 공격했다.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마르크스 [자본론]을 소개한 당대회 의장 플레하노프도 레닌의 편에 섰지만 레닌은 승리를 위해 반대파를 집요하게 괴롭혔고 결국 일부 반대파와 중간파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면서 '멘셰비키'는 표결에서 패배했다. 승리한 레닌은 '전위정당파'를 '볼셰비키(다수파)'로 규정했고 마르토프와 '불꽃파'의 소수파였던 트로츠키마저 본의 아니게 '멘셰비키(소수파)'가 되고 말았다. 졸지에 '소수파'가 된 마르토프는 소수파의 반격을 개시했지만 레닌은 당대회 분석자료를 방대하고도 세밀하게 저술하면서까지 이 '소수파'를 꼬투리잡고 깔아뭉갰다. 레닌에 동조하던 '중앙파' 플레하노프조차 멘셰비키로 돌아서는 이 집요한 과정에서도 레닌의 중앙식 '민주집중주의'는 마르토프의 '대중민주주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결국 레닌파는 당대회 결정에 따라 당기관지 <불꽃>으로부터도 배제되고 말지만 '전위정당' 강령투쟁에서 승리한 레닌의 '민주집중파'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을 명실상부한 혁명적 전위정당으로 자리매김해 버린다. 레닌이 당내의 온갖 '기회주의'와 '경제주의', '대중추수주의(꽁무니주의)' 및 '무정부주의' 경향들과 결연히 투쟁하고자 정리한 저작이 바로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1904)인 것이다. 즉, '서클운동'에 머물러 있던 러시아 사회주의운동이 하나의 혁명적 전위정당으로 단결한 것은 운동의 역사에서 "한 걸음 전진"이었고, '기회주의'와 '무정부주의'로 규정된 '대중민주주의'와 분열되어 길고긴 운동내 권력투쟁을 확인한 것은 '두 걸음 후퇴"였다는 의미다. 집요한 권력투쟁의 화신이었던 레닌은 결국 차르체제를 끝장낸 케렌스키의 부르주아 임시정부까지 뒤집어엎고 세계 최초의 노동자국가인 소비에트연방을 건설하고야 만다. 레닌이 전진했던 "한 걸음"은 러시아 사회주의운동이 후퇴했던 "두 걸음"보다 훨씬 큰 걸음이었다.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에서 가장 주요한 명제를 꼽으라면 나는,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다"라는 한 줄을 뽑는다. 레닌이 보기에 '멘셰비키'가 내건 대중민주주의는 추상적이고 서유럽에나 맞는 주장이었다. 1917년 2월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에서나 물러난 수백년 역사의 러시아 차르체제는 1903년 당시만 해도 서슬이 퍼랬고 그런 러시아에서 대중적 민주주의 일반론이 적용될 여지는 없었다. 레닌의 중앙식 민주집중주의는 소수의 전위정당이 다수 노동계급을 선도하고 지도하며 철옹성 같은 차르체제를 일거에 폭력적으로 뒤집는 혁명만이 유일하고도 '구체적'인 전략이라 본 것이다. 이것이 이 책에서 레닌이 주장한 '구체적 진리'의 실체였다.

내가 레닌의 혁명을 우러러 보았다면 이유는 바로, 이런 그의 '구체적'인 철학이었고 변증법적 사유였다.


3.

"마르크스, 무인년(1818) 호랑이해 초여름에 독일 라인주 트리어시에서 출생함... 엥겔스... 경진년(1820) 용해, 라인주 바르멘싱 한 자본가 가정에서 태어나다... 레닌... 경오년(1870) 말해, 평범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다... 정사년(1917) 뱀해, 소련의 시월혁명이 성공하고, 47세의 레닌이 소련공산당 총서기가 되다... 스탈린... 기묘년(1879) 토끼해, 스탈린이 조지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다... 마오쩌뚱... 계사년(1893) 뱀해, 마오주석이 사오산층의 한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나다."
- [레닌의 키스], <7-9. 해설-경앙당>, 옌롄커, 2003.


내가 군대 사무실 책상에 "일보 전진, 이보 후퇴"를 영어 필기체로 소심하게 휘갈겨 썼던 1995년은 사실 러시아 차르체제와 같이 철옹성 같던 80년대 군사독재는 아니었다. 자유민주주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민심처에는 사노맹 자료를 비롯한 수많은 사회주의 선전물이 인용된 책자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내가 싫어하던 부대내 사복입은 기무대 중사는 가끔 사무실에 오기는 했지만 일개 사병의 책상 메모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던 시절이었다. 군대내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영창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나는 불침번을 서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 1장과 4장을 마치 성경처럼 외웠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두뇌가 정지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회주의자'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군대내 '성경'과 '불경'이 허용되듯 모든 사상과 이념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나 혼자만의 '자유주의' 사상 때문이었을게다. 어느날 여단 사령부 대회의실을 청소하다가 본 방공대 신임장교가 우리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왔다가 떨어진 '주사파' 후보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지만 한참 후 베네수엘라 사회주의자 차베스 대통령이 군대 장교 재직당시 좌파혁명을 시도했다는 이야기 등으로 보았을 때, 국가를 지키는 군대의 사상이 '자유민주주의' 하나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군대의 이념은 결국 해당 국가 정체성의 물적 표현이었다. 
그렇게 "진리는 구체적"인 것이다.


중국의 소설가 옌롄커도 27년간 군대에서 복무한 작가였다. 그는 지속적으로 중국사회의 획일성을 문학적으로 폭로해 왔는데, 2003년 소설 [레닌의 키스]로 인해 아예 군복을 벗는다. 원제가 '수활(受活)'인 이 장편소설은 중국어로 '서우훠(受活)'라는 북부 오지 장애인마을이 중국의 '사회주의혁명'의 역사에서 겪는 고초를 큰 줄기로 하여, 류잉췌라는 당고급간부의 욕망과 몰락을 함께 그린다. 결국 사회주의국가 중국의 민중들은 '혁명'으로부터 반복적으로 배신을 당했고, '혁명'의 역사 속에서 영욕을 누리려는 개인 또한 체제 속에서 고사하고 만다는 이야기를 흡사 '제3세계'인 콜럼비아의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자유민주주의' 미국의 샐린저처럼 '환상적(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문체로 묘사한다. 인민들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서우훠'의 장애인묘기공연단을 운영하여 큰 돈을 벌고 이 돈으로 더 이상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국가가 아닌 1998년의 러시아로부터 레닌의 유해를 사들여 레닌 기념관을 세우고 더 큰 돈을 벌겠다는 허무맹랑한 계획이 무산되는 과정을 매우 장황하고 지루하게 서술하고 있다. 작가 옌롄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옌안의 대장정에 참여했던 혁명가 마오즈 할머니는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한 당고위관료 류잉췌 또한 이 '혁명'의 희생양이라는 것인데, 작가는 '현실주의' 또는 '리얼리즘'이나 '사실주의' 모두가 허상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그런 '진실'은 없으며 그의 작업은 그러한 사실에 대한 폭로인 것이다. 결국 그 또한 마르케스나 샐린저처럼 '사실주의'의 한 형태로 보이지만 옌롄커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진실'을 써내는 '현실주의'가 되기를 한사코 거부한다.
레닌의 유해를 구해와서 승진하고자 하는 욕망에 미쳐가는 류잉췌는 본인의 성당과 같은 '경앙당'에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과 스탈린, 마오쩌뚱과 김일성까지 모시면서 그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영전 앞줄에 본인의 사진을 앞세우기까지 하는데 '혁명'으로 치장된 '욕망'의 정신병적 현상의 단면이다.

죽은 것으로부터 병적인 '키스'를 갈구하는 한, '혁명'은 없다. '레닌의 키스'는 '혁명의 몰락'이었다. 
'혁명'은 살아있는 현실에 대한 솔직함이다. 비록 레닌은 오래전에 죽었지만, "진리는 구체적"이라는 테제는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시, '혁명'은 '리얼리즘'일 수밖에 없다


4.

한편, 내가 속한 여단 사령부의 끝자락 '민심처' 옆 언덕 위에는 '군수처'가 있었는데 나는 타자실력을 테스트받고 자전거 잘 탄다고 사기쳐서 뽑혔지만 내 훈련소 입대동기 기준이는 타자실력조차 사기쳐서 '군수처'에 들어갔다. 왕주먹에 인천에서 좀 놀았다던 나보다 한 살 아래인 그 동기 또한 내가 새벽에 자전거를 붙잡고 고생 좀 했듯, 밤새 컴퓨터를 붙잡고 애를 먹었다. 두꺼운 손가락으로 문서를 작성하던 기준이는 그래도 제대할 때 즈음에는 '파워포인트 97'의 대가가 되었다. 아무튼, 아마도 내가 자전거 테스트를 받고 동기 기준이가 컴퓨터 테스트를 받았더라면 우린 애줄없이 본부대가 아닌 공병대나 예하 전차부대로 가서 고생 좀 더 했을 테지만 90년대의 행정병 면접은 허술하기도 하고 어찌보면 매우 '인간적'이기도 했다. 내가 알 수 없는 혹시 모를 '연줄' 같은 게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지지만, 여튼 내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거다.

2개월 위 고참을 만난 나의 첫 군생활이 꼬였다면, 군수처 동기 기준이는 한달 아래 후임을 받아서 활짝 피고 말았다. 물론 나도 얼마 안가 모지리 같은 선임을 몰래 두들겨 패주고 바로 군생활이 이등병 때부터 같이 피고 말았지만. 기준이가 받은 우리보다 한달 늦은 이재환 이병은 나보다 한살 많았고 내 동기 고기준보다 옆 부서의 나와 더 친했다. 학보사 편집장을 했다던 그는 나와 대화가 좀 되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단 둘 뿐인 각자의 사무실에서 한두달 밖에 차이 안나는 선임병을 두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물론 나의 민심처 고참은 표정만 험악했지 약골이었던 반면 가엾은 이재환 이병의 군수처 고참인 내 동기 고기준 이병은 얼굴은 착했으나 주먹이 내 얼굴만했다. 이등병 말호봉 때부터 사무실 생활이 편해진 나는 방송 틀고 어슬렁대다가 커다란 기름 드럼통을 굴리던 재환이 형을 자주 보았는데 난 괜스레 돕는답시고 이재환 이병 옆에서 끝까지 꼬일 그의 군생활을 계속 상기시켜 주곤 했다. 같은 군수처였지만 전역할 때까지 한달 고참 기준이는 사무직이었고 한달 쫄따구 재환이 형은 끝까지 쌩 노가다였다. 어쩌다가 가끔 함께 보초를 서게 되면 나는 한달 후임인 재환이 형을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했고 여단 사령부 C.P. 뒤를 하릴없이 지키던 우리는 평소 군대에서 꺼내기 힘든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다. 학보사를 도구로 대학 총학생회 선거에도 개입하며 지역 '좌파의 아성'이었다던 재환이 형의 대학 이야기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학회운동을 중심으로 한 나의 변증법적 유물론 철학 이야기는 군대에서 아무하고나 나눌 수 있는 주제는 아니었다. 상대가 아무리 친한 군수처 동기 기준이라 해도 말이다.

전역을 하고 한참 후 졸업도 하고 사회에 나왔을 때 우연히 이재환 병장을 종로 낙원동 골목의 포장마차에서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소주 한 잔 하면서 나는 그를 형이라 불렀고 역시 편한 마음에 '국가독점자본주의' 이야기를 했다. '좌파의 아성' 출신이었던 재환이 형은 아직도 그런 얘기를 하느냐 물었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세계관이나 인식의 차이였다기 보다는 생활의 차이였겠다 싶었다. 사무직 노동자를 자처했지만 나는 시민운동과 거리가 있는 한가한 직장인이었고 재환이 형은 시민단체 신문기자였다. 나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국가독점자본주의론 따위를 한가하게 고담준론했고 그는 치열하게 생활로 고민했을 처지로 인한 차이였을 수도 있겠다.

21세기 벽두의 어느날 저녁 종로의 뒷골목에서 소주잔을 나누고 작별의 악수를 나눈 우리는 "또 보자"는 인사말과 달리 더는 만나지 못했다.

어쨌든 여전히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었기 때문이었겠다.


5.

'자유민주주의'의 성역인 대한민국 군대에서, 그것도 장병들의 '정신교육'을 담당하던 민심처 소속 장병이었지만 내가 지원한 것은 행정병이었지 정훈병이 아니었다. 그런게 있는지 조차도 난 몰랐다. 나는 새벽에 기상나팔과 군가방송를 틀고는 자전거를 타고 나가 국방일보와 조간신문 수백부를 방송이 끝나기 전까지 가져왔고, 장교가 시키는 온갖 쓸데없는 문서를 작성했으며 가지가지의 허드렛일을 했다. 내가 자대배치 전 보충대에서 본부대로 뽑혀간 이유는 1분에 5백타 이상의 타자실력 및 한글문서편집능력의 사실과 그리고 자전거를 잘 탄다는 거짓말 덕분이었다. 나는 문서작성과 글쓰기는 자신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자전거 잘 타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본부대 소속 여단 사령부 행정병과 자전거가 무슨 관계인가 되물어볼 입장이 전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자전거를 타다가 택시에 살짝 친 이후로 스무살 넘도록 안 타봤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편한 군생활이었겠지만 실상 자전거를 거의 못 타던 나에게 무거운 신문을 싣고 새벽 빙판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정말로 고역이었다. 역시 "진리는 구체적"이었고, 나의 군생활은 구체적으로 자전거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자전거를 그리 잘 타는 편은 아니다. 이러한 '진실'은 슬프지만 오래도록 변함없다. 보험금 지급하는 노동으로 십수년 넘게 가정을 꾸려온 내가 지금도 잘 못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보험금 지급업무다. 소설을 쓰고 싶어했고 매일 글쓴다고 끄적거리는 지금까지 내가 제일 못하는 일이 아마도 글쓰기인 것처럼.

하라는 국방은 안 하고 연애편지나 쓰다가 홀로 밤에 [공산당선언]이나 성경처럼 외우던 나는 다행히 영창은 안 갔다. 시대는 이미 그런 시대가 아니었고, 10년만 먼저 태어났다면 아마도 난 그럴 엄두조차도 내지 못했을 테지만, 사람은 누구나 그때그때마다 죽지않을 길을 찾아가는 법이다. 지금 와서는 어이없어 보이기도 했던 1995~1997년 당시의 나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미쳐버릴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두 걸음" 뒤척거렸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한 걸음" 정도는 앞으로 내딛었을지도 모를 1995~1997년 나의 군시절 이야기다.


***

1.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1904), 레닌, 최호정 옮김, <박종철출판사>, 2016.
2. [무엇을 할 것인가 -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1902), 레닌, 최호정 옮김.
3. [레닌의 키스(受活)](2003), 옌롄커, 김태성 옮김, <문학동네>, 2020.
4. [백년 동안의 고독](1967), 가르시아 마르케스,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1999.
5. [호밀밭의 파수꾼](1951), J.D.샐린저, 공경희 옮김, <민음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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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노 교코의 서양기담 - 무섭고도 매혹적인 21가지 기묘한 이야기
나카노 교코 지음, 황혜연 옮김 / 브레인스토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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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奇談)을 나누던 시간 : 1993~1995년
- [서양기담] / [경성기담] / [청나라 귀신요괴전]


1.

- 다리가 둘 달린 짐승을 죽여야 하는데...

알 수 없는 저주를 벗기 위해 소년은 '다리가 둘 달린 동물의 피를 보라'는 무당의 말을 듣고는 매일밤 화장실에서 새를 죽여 피를 변기에 버렸다. 소년이 갈수록 미쳐가던 어느날, 새를 구할 수 없었던 소년은 어쩔 수 없이 '다리 둘 달린' 다른 동물을 죽여서 피를 흘려보냈는데, 그 동물은 다름아닌 소년의 엄마였다... 는 이야기에 둘러앉은 남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농활은 엠티가 아니었다.
대학의 '농촌활동'은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노동자-농민 연대를 만드는 대중적 '조직활동'이었다. 물론 돌이켜 보건대, 농민들의 생각과 대학교 학생회의 생각은 달랐을 것이지만. 학생들은 며칠도 안되는 농활 기간동안 낮에는 억지로 도움도 안되었을 일손을 돕는다며 다녔고 저녁에는 선교사처럼 '청소년부', '청년부', '부녀회' 등을 조직하여 '시국'을 논하고는 들어와서 자기들끼리는 새벽까지 '평반(평가와 반성)'을 했다. 그날 하루의 '농촌조직활동'에 대하여 심각하게 '평가'를 하고 각자 '반성'을 한 후에는 추상같은 선배들로부터 칼날같은 '비판'을 받으며 괜히 혼나고는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산으로 들로 일하러 가는 '자학'적이고 '금욕'적인 생활의 연속이었다. 심한 곳은 아마도 산장에 들어간 1970년대 일본의 '적군파' 못지 않았으리라. 마을 농민들에게 담배 태우는 모습을 함부로 보이면 안되었기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몰래 주워 피우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면서 평소엔 관계 좋았던 선배들로부터 공연히 혼나야 하는 그런 농활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걸 보면, 이 무슨 종교집단이나 고립된 사상집단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했던, 1980~90년대판 '기담(奇談)' 자체였다.

1993년 봄농활만 해도 강원도 양구의 민통선 아래 마을에서는 대학생들을 마뜩치 않아 하여 마을회관이 아닌 흉가와 같은 폐가에서 숙식을 했다. 선발대로 간 2학년 상연이 형과 1학년 신입생인 나는 한해 전인 92년도까지 군부정권이 대학생 농활대를 '빨갱이'라 선전하는 통에 마을에서 받아주지도 않아 무슨 기습작전이라도 하듯 선발대가 마을로 진입했다는 경험을 토대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진짜로 무슨 '간첩'이라도 된 양으로 마을 이장님 댁의 문을 두드렸고 그나마 흉가라도 겨우 구한 터였다. 물론 '문민정부' 첫 해인 1993년 여름농활부터는 마을회관에서 숙식할 수 있었지만 그해 5월의 봄농활 선발대로 간 나는 분명히 보았다. 마을 이장님의 경계하는 섬뜩한 눈빛을. 아마도 지난 시절 '농활 기담'을 말로만 전해 들었던 스무살의 신입생 도시 청년의 과민반응이었을 게 분명하지만, 그 때의 내 느낌은 아무튼 그랬다.

봄농활 전 나는 학교 앞에서 우연히 함께 카레덮밥을 먹던 여학생 동기에게 같이 농활을 가자고 했고, 극구 싫다던 동기 연혜가 농활 본대 깃발을 따라 내가 전날 자리잡은 그 폐가로 올라올 때, 하마터면 나는 버선발로 마당을 가로질러 내달려 그 아이를 안아줄 뻔 했다. 연혜는 나의 첫 '조직사업' 성공사례가 되었고, 그후로도 한참을 나는 폐가로 이어지는 시골길을 올라오던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방탕무례한 일상을 보내던 우리 농활대는 담배도 지참하면 안되고 우리끼리 더더욱 금주와 금연을 철저히 지키는 지극한 금욕의 시골생활을 해야 했는데, 그날은 무슨 연유였는지 1학년 신입생들끼리 저녁을 지어먹고는 둘러앉아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처럼 '기담(奇談)'을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무서운 선배들이 모두 '청년회'와 함께 마을회관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나 보았다.

모두들 자기가 알고있는 무서운 이야기나 기이한 이야기, 또는 어이없는 반전의 이야기를 풀어내었는데, 내가 풀었던 고등학교 때 알던 개그는 별 반응이 없었던 것 같고, 동기 중 삼수생 진호형이 해준 무서운 얘기는 그 어둑한 저녁 시골의 폐가에 딱 어울리는 소재였다. 소년이 '다리 둘 달린' 엄마의 피를 보았다는 마지막 대목에서 나와 연혜를 비롯한 둘러앉은 1학년 신입생 동기 모두 소리를 지르며 나자빠졌다.

언제 어디서든 틈만 나면 둘러앉아 '기담'을 나누던 1993년 봄이었다.


2.

"프랑스가 아직 갈리아라고 불리고 로마 제국에서는 야만인이 사는 변두리 땅으로 여기던 기원후 3세기(261년), 윤회를 믿으며 조상과 수목을 숭배하던 드루이드교의 땅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도착한 선교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센강의 시테섬을 거점으로 포교 활동에 힘쓰며 신자를 점차 늘려갔다. 하지만 곧 붙잡혀 투옥되었고, 주교 디오니시오와 사제 루스티코, 엘레우테리코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 언덕이 바로 몽마르트다. 디오니시오는 훗날 바티칸에서 성인으로 봉하였고 프랑스어 표기에 따라 '성 드니(생 드니 : Saint Denis)'라고 불리게 되었다."
- [나카노 교코의 서양기담], 나카노 교코, 2020.


휴대폰이 없던 시절, 남녀노소 불문하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당시에는 친구들과 이불쓰고 무서운 이야기나 음담패설을 나누었고 그런 '기담'의 대표적 사례는 단연 중세의 '데카메론(10일야화)'이었다. 중세 흑사병의 격리기간 14일 중 주일과 휴일을 제외한 열흘 간 지어진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대중에게 널리 퍼지면서 인류 보편의 기괴하고 기묘한 이야기인 '기담'을 이어갔으며 현재도 수많은 '데카메론'들이 이어진다. 문자기록보다 훨씬 오래된 '구전'의 힘이다. 인터넷 포털과 유투브가 팽배한 지금도 '기담'의 가장 결정적인 강자는 '구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혼자 읽는 책이나 혼자 보는 영상보다,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구전'은 그 이야기를 전하게 되는 '실천'의 마력이 분명 있다. 이야기 잘하는 사람을 보면 따라서 해보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끼게 된다. 나만 그런가?


내 개인적으로 가장 무서운 '기담' 또는 '괴담'은 '머리가 잘리는' 이야기다.
동양에서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하여 신체를 훼손하는 형벌이 가장 극악한 거였고, 서양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육체를 훼손하면 영혼이 살지 못한다 믿었단다. 이는 물론 동양의 유교와 서양의 기독교 이야기일테고 동서양을 불문하고 토속신앙에서의 차이는 없었을 것인데 동북아시아 선조들의 장례형식이었던 '조장'은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망자의 육체를 기꺼이 바쳤다. 유일신이 아닌 자연의 근원으로서 하늘과 땅을 섬기던 고대인들에게 새는 하늘의 상징이었으므로 망자의 영혼은 새들이 쪼아간 신체의 일부와 함께 하늘로, 썩은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는 물아일체의 합일 과정이었다. '혼비백산(魂飛魄散)',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땅으로 스며든다. 
그러다가 사유재산과 계급, 부족과 국가가 생긴 후 군인들의 '칼'이 지배하기 시작한 시공간에서는 목을 치는 '참수형(斬首刑)'이 그나마 '명예로운' 형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호전적 게르만 혈통인 '프랑크족'을 조상으로 둔 프랑스에서 20세기인 1970년대까지도 '참수형'이 행해졌다고 하는가 보았다. 프랑스대혁명에서 고안된 '기요틴(Guillotine)'은 '참수형'의 역사에서 혁신적 장치였다. 프랑크족의 도끼나 큰칼이 무디거나 망나니 또는 집행인이 미숙하면 '한 칼'에 목이 달아나지 않으니 희생자의 고통과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을 테니 말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1940)의 주인공 뫼르소가 '단두대' 참수형을 떠올리며 그 '확정적 조치'와 '기정 사실'의 예외로서 "만약에 혹시 어쩌다가 목이 잘 베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으면 다시 내리칠 뿐"(같은책, <5장>)이라고 했듯이 말이다. 참수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댕강'이 아니라 생각보다 잘 안 떨어지는 목을 장작 패듯 패거나 고기 썰듯 '썰어버리는' 작업이었을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러므로 '기요틴'은 그나마 프랑스대혁명의 '인권사상'이 낳은 근대적 결과물일 수 있겠다. 오죽하면 죄인의 가족들이 깔끔하게 한 칼에 보내달하고 사형집행인에게 뇌물을 줄 정도였겠는가. 
영국의 폭군 헨리8세는 '앤(Anne)'이라는 이름의 부인을 두 명이나 참수형에 처했는데 미운 앤에게는 일부러 미숙한 망나니에게 무딘 칼을 주었다고 한다. 대신 아들을 못낳는 바람에 억울한 죄명을 쓴 앤 불린의 목을 칠 때는 '한 칼에' 가도록 고액을 들여 외국에서 유명한 집행인을 빌려오기도 했단다.엘리자베스 1세의 친모인  이 앤 불린 왕비가 지금도 영국 런던탑에서 잘린 머리를 들고 밤에 돌아다닌다는 그 '앤 불린(Anne Boleyn)'이다.

참수형이 무서운 이유는 갖가지다. 그 중에서 최고는 잘린 목을 찾아 헤매거나 들고 다니는 '기담'들이다. 기독교가 국교화되기 전이며 프랑스가 야만의 갈리아 지방으로 불리던 기원후 3세기(261년) 성 디오니시오는 갈리아 지방의 토착신앙인 드루이드교도들에게 기독교를 알리다가 참수형을 당했는데, 그 처형 장소가 지금의 '몽마르트' 언덕이란다. '몽마르트'라는 이름의 유래가 바로 '순교자의 언덕(Mont des Martyrs)'인데, 성 디오니시오와 2인의 제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분명 무딘 도끼날로 여러 번의 가격 또는 수차례 칼질 후에 목이 떨어졌을 성 디오니시오는 태연히 잘린 머리를 들고 개울가에서 피를 씻고는 10킬로미터 거리인 '생 드니(Saint Denis)'까지 두시간 반을 걸어가며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는 그곳에서 절명했다고 한다. 아마도 잘린 목을 들고 출현하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독일 용병 슬리피 할로우나 일본 전국시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한 후 목이 날아간 오다 노부나가의 무사 시바타 가쓰이에, 영국의 앤 불린 괴담 따위의 원조이겠다. 제단화가 아니라 프랑스 절대왕정 파리의 고등법원 배경그림에 나오는 그리스도 십자가책형의 기괴한 그림에 묘사된 '성 디오니시오'가 가장 괴이하고 무서운 '기담'에 어울린다.

한편, 나가이 고의 마징가Z에 등장하는 악당 닥터 헬의 부하 중 하나인 브로켄 백작이 잘린 목을 들고 다니는데, 브로켄 산은 독일에서 유명한 '기담'의 장소라고 한다.


일본의 미술사학자 나카노 교코는 '미술사'를 좋아하는 내가 수년전 [무서운 그림] 시리즈로 알게 된 작가다. 그녀는 명화 속에 담긴 당대의 역사와 미술가 이야기를 엮어내는 실력이 뛰어나다. 나카노 교코의 책 몇 권을 재미있게 읽다 보면 서양미술사를 두루 섭렵하게 되는데 전혀 이론적이거나 학술적이지 않고 다분히 대중적이다. 2020년에는 '미술사'의 본업을 떠나 [서양기담] 21편을 짧게 엮은 이야기책을 냈는데, 브로켄산에 모이는 마녀들의 집회인 '사바쓰(sabbath)' 이야기나, 드라큘라(블라드3세)와 늑대인간(제보당의 괴수), '유령선(Flying Dutchman)'과 퇴마사제의 '엑소시즘(exorcism)' 이야기 등의 '기담' 또는 '괴담'을 풀어낸다. 역시나 '미술사'처럼 서양의 '기담'을 중심으로 한 당대 시대적 배경의 이야기다.
청나라 문인 원매의 [자불어(子不語)](국역 : [청나라 귀신요괴전])나 카이스트 교수 전봉관의 [경성기담] 등의 이야기 등 '기담' 일체는 명시적이든 아니든 당대 시대상황을 맥락 속에서 보여준다. 

잘린 목을 들고 다니는 장면을 상상하면, 억울한 원혼이 절명한 육체를 끝내 다시 잇지 못하는 무한반복의 슬픔이 그 공포의 이면에서 신음하고 있다. 브로켄 산에서 한밤에 사탄의 현신인 숫양과 집단 난교를 벌이는 마녀들의 광란에는 중세 종교재판으로 억울하게 찢기고 불태워진 억울한 여성들의 한이 서린다. 그리스어로 '엄중한 권고'를 뜻한다는 'exorkismos'를 어원으로 하는 '엑소시즘'은 악마에게 물러날 것을 엄중하게 권고하는 행위인데 최초의 엑소시스트는 '가다라' 땅에서 인간에 씌워진 악령들에게 인간들로부터 돼지에게로 '가라'고 외친 예수란다. 17세기 루덩이라는 수도원에서 수녀들이 집단 광란을 일으킨 사건은 잘생긴 외모와 자유분방한 '이단성'으로 수많은 수녀들을 후리던 그랑디에 신부를 제거하기 위한 조작극이었을 수도 있다. 
청나라에서도 잘린 목을 들고 달을 바라보던 귀신은 그 억울함이 신원되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1933년 조선의 경성에서 일어난 유아 단두(斷頭) 사건은 식민지 조선에서 '최고의 치안'을 자랑하던 일본경찰의 허위와 무능을 폭로하고 식민지 민중의 피폐한 삶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 중 하나였다. '죽첨정 단두유아 사건'은 수많은 영아들이 죽어서 암매장되었고 영아의 뇌수를 먹고 병이 낫는다는 무지몽매의 시대에 그럴듯 하게 식민지 '근대화'로 포장하던 일제의 허위를 벗겨낸 대표적 '기담'이기도 하다.


3.

나는 농활을 아홉 번 다녀왔다.
1993년 봄, 여름, 가을, 1994년 봄, 여름, 가을, 1995년 봄, 여름, 그리고 마지막 가을.
모두다 선발대로 가서는 폐가에 터를 잡고는 본대를 기다리기도 했고, 영문과 농활대장을 맡은 2학년 때부터는 '문민정부' 덕에 대부분 마을회관 옥상에서 1993년 봄농활 때의 그 여자 동기를 추억하며 본대를 기다렸다. 농민회와 학생회의 공개적 연대활동이었으나, 우리는 나름의 '철의 규율'로 진지하게 임하기도 했다. 그 정기적 '데카메론'에서 우리가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예전 군부독재와 달리 학생들의 농활을 탄압하지 않았다던 '문민정부'는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급격히 수입하는 '세계화'를 통해 자영농을 순식간에 몰락시켰다. 대학생들은 농활 마지막날에 전농이 개최하곤 했던 전국 각지에서의 농민대회를 함께 했지만, 이미 우리 농업은 죽어가고 있었다. 돌아보면 농촌마을에서 우리가, 농민들이 나누던 '기담'의 실체가 그것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다. 잘린 목을 들고 피를 흘리며 배회하던 억울한 원혼은 죽어가던 우리 농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1993년 봄 삼수생 동기형의 '기담'에서 소년이 목을 긋던 '다리 둘 달린' 동물이 자신의 엄마였다는 이야기에 모두가 소스라치던 그 순간에도 나는, 내가 처음으로 '조직'한 여자 동기의 모습만 살피고 있었다. 비록 93년 봄농활 이후 두 번 다시 참여하지 않았으나, 내 말을 들어주고 힘든 농활까지 따라와 준 강릉 출신 도시 소녀의 고마움에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보다 키가 컸던 그 동기를 심심하면 쫓아다니며 장난스레 나의 '첫사랑' 운운했지만, 그러기에는 남중과 남고를 나와 여자라고는 어머니와 누나 셋 밖에 제대로 본 적이 없던 난 너무도 미숙했고 어설펐다. 

이 또한 '데카메론'처럼 여럿이 둘러앉아 '기담'을 나누던 스무살 시절 나의 '기담'이다.

***

1. [나카노 교코의 서양기담](2020), 나카노 교코, 황혜연 옮김, <브레인스토어>, 2022.
2. [처음 가는 루브르](2013), 나카노 교코, 지종익 옮김, <아트북스>, 2016.
3. [경성기담], 전봉관, <살림>, 2006.
4. [청나라 귀신요괴전 1~2], 원매, 조성환 옮김, <글항아리>, 2021.
5. [이방인](1940), 알베르 카뮈, 박용철 옮김, <덕우>,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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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레오나르도 다빈치 - 인간 역사의 가장 위대한 상상력과 창의력 Philos 시리즈 6
월터 아이작슨 지음, 신봉아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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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의 '대비열전(對比列傳)'
-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 월터 아이작슨, 신봉아 옮김, <북이십일 arte>, 2020.


"그들의 각기 다른 접근법은 피렌체 미술계의 두 작풍을 상징했다. 레오나르도, 안드레아 델사르토, 라파엘로, 프라 바르톨로메오를 위시한 인물들은 '스푸마토(연기)'와 '키아로스쿠로(명암)'의 사용을 강조했고, 미켈란젤로, 아뇰로 브론치노, 알렉산드로 알로리 같은 인물들은 조금 더 전통적인 접근법에 따라 윤곽선을 기반으로 한 '디세뇨(소묘)'를 선호했다... 바사리에 따르면 라파엘로는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킨 두 밑그림을 구경하려고 피렌체로 갔으며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그리기도 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25장. 미켈란젤로와 사라진 전투 그림들>, 월터 아이작슨, 2017.


[서양미술사](1950)에서 '미술' 자체가 아닌 '미술가'들의 도전과 혁신을 서술한 오스트리아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 : 1909~2001)는 16세기 초를 "이탈리아 미술에 있어서, 또한 전 역사를 통해서도 가장 위대한 시기"(같은책, <15장>)로 소개한다. 
그에 의하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 특유의 말솜씨로" 15세기(1400년대)를 '콰트로첸토(400년대)'로, 16세기(1500년대)를 '친퀘첸토(500년대)'로 불렀는데, 16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가장 위대한 시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경쟁'적으로 열었고 라파엘로 산티, 바첼리오 티치아노, 조르조네, 알프레히트 뒤러 같은 거장들이 뒤를 따랐다. 


"이러한 유명한 거장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 1452~1519)는 토스카나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레오나르도와 같은 사람들의 야심은, 그림 또한 학예에 포함되어야 하며 그림 그릴 때의 손작업은 시를 쓸 때의 그것 만큼이나 결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 [서양미술사], <15잘. 조화와 달성 - 16세기 초 : 토스카나와 로마>, 에른스트 곰브리치, 1950.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결국 우리에게 '화가'로 남았지만 격동의 '르네상스' 초기였던 16세기 '친퀘첸토' 시기에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와 밀라노의 스포르차 공국, 잠시 이탈리아 공국들을 도륙한 체사레 보르자(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모델)와 프랑스 국왕 등의 후원자를 번갈아 가며 과학연구와 문예활동을 왕성하게 이어갔다. 그는 군국주의 도시국가로 분열되어있던 당시 이탈리아 공국을 오가며 특유의 호기심과 창의력을 기반으로 '군사학'을 개진하였으나 무자비한 전쟁기계 체사레 보르자 정도만 잠시 관심을 두었을 뿐 다른 군주들에게 채택되지는 못했다. 다만 레오나르도의 제자들이 전수받은 수천 장의 연구록과 필기 및 스케치 노트가 그의 천재성을 증명해주고 있다. 피렌체와 밀라노를 오고가며 미완성작만 남발하던 이 천재는 예순이 넘어 프랑스 파리에서 <모나 리자>를 남긴 채 숨을 거둔다. 
그는 평생동안 '손을 쓰는' 미술은 '머리를 쓰는' 다른 예술에 비해 천박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적 전통에 반발하여 "시를 쓰는 손이나 그림을 그리는 손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16세기(친퀘첸토:500년대) 이탈리아 미술을 그토록 빛나게 한 두 번째 피렌체 미술가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 1475~1564)였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보다 스물세 살 아래였지만 그가 죽은 뒤로 사십오 년을 더 살았다. 긴 생애 동안 그는 미술가의 지위가 완전히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변화는 어느 정도 그 자신이 이룩해 놓은 것이기도 했다... 30살이 될 무렵 그는 천재 레오나르도와 필적할 수 있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거장들 중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 [서양미술사], <15장>, 에른스트 곰브리치, 1950.


동시대 후배였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제자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 1511~1574)는 1550년에 [가장 저명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 열전]을 지어 특히 그의 스승인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을 칭송했다고 한다. 바사리 본인도 화가였는데 이 [열전]은 아마도 미술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저작과도 같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영웅들을 다룬 기원후 1~2세기의 작가 플루타르코스의 [플루타르크 영웅전]이 첫 출간된 시기도 1517년 이탈리아 피렌체였다. 물론 이는 역사의 '우연'이 아니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그에 따른 출판업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해 [플루타르크 영웅전]과 바사리의 [열전] 등이 같은 시기에 만나는 역사의 '필연'적 결과였다. 이 '필연'의 역사 속에서 바사리의 [열전]이 어쩌면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본보기로 삼았을 수도 있다. 

르네상스의 역사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경쟁'의 관계에 있다. 실제로 월터 아이작슨의 레오나르도 전기인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를 보면, 그 두 거장은 서로를 경멸하고 증오했다. 레오나르도보다 스물세 살 어린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를 대놓고 비웃었고, 연장자 레오나르도는 그 천재적 게으름과 나태함을 배경으로 무심한 척 했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미켈란젤로를 깠다.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 최고의 조각상인 '다비드'상을 어디에 전시할지 결정하기 위해 메디치 공화국이 조직한 위원회에 참석한 레오나르도는 음모와 성기를 드러낸 이 조각상은 광장이 아니라 전시관 실내에 그것도 성기를 가린 채 보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성애자에다가 자유분방한 그의 평소 성정과는 모순되는 주장이다. 분명 미켈란젤로의 성공을 시기해서였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겉으로는 다비드상을 무시했지만 실은 그의 노트에 자신만의 다비드상을 몰래 스케치하기도 했다. 다행인 것은 레오나르도는 '화가'였고,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였다는 사실인데 물론 주전공이 그렇다는 것이지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이나 '천지창조'와 같은 대작 명화도 남겼다. 아마도 '완성작'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레오나르도보다 더 많이 남겼을 테지만, 이는 레오나르도가 호기심 많고 게으른 천재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이지 미켈란젤로가 레오나르도보다 그림을 더 잘 그려서가 아니다. 아마도 미켈란젤로는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외모와 차림새도 출중한 레오나르도를 항상 의식했을 것이고 외향적인 레오나르도에 비해 음침한 본인 스스로 열등감을 가졌을 수도 있다. 
미켈란젤로는 평생 '스푸마토(연기)' 기법으로 선의 경계를 붕괴시킨 레오나르도의 작풍에 반발하여 명확한 선으로 형태를 배경과 구분했다.

이런 미술계 두 거장의 경쟁관계는 객관적으로 당시 이탈리아 군국주의 도시국가를 배경으로 한다. 군사적 무력으로 옆 도시를 침략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내부 권력투쟁도 살벌했지만 이 권력자들은 겉으로 온화한 이미지가 필요했으므로 역시 '경쟁'적으로 예술가와 수학자 등의 자연과학자 등을 유치하고 후원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도 적어도 구직과 후원 걱정은 다른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했을 것인데, 레오나르도의 생부 피에르 다빈치는 피렌체의 이름난 공증인이었으므로 필요할 때는 '아빠찬스'도 썼다. 실제로 [모나 리자]는 아버지가 성사한 계약이었는데 레오나르도는 의뢰인이었던 실크상인의 '리자 부인(모나 리자)'을 그대로 그려줄 마음이 없었다. 수십년 간 갈고 닦은 연구를 토대로 화가 본인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걸작을 완성하고 싶었다. 아버지 피에르는 계약 미이행에 화를 냈고 부자지간도 험악해졌겠지만 레오나르도는 그러거나 말거나 16년간 그가 죽기 전까지 [모나 리자]를 들고 다니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스푸마토' 기법은 물론 어디에 있든 우리와 눈을 맞추는 모나 리자의 시선과 웃는 듯 마는 듯 하지만 결국 우리 생각 속에 신비의 미소를 각인시키는 그녀의 입술은 그렇게 레오나르도가 죽어서야 '완성'되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원래 '대비열전'으로 영웅들을 비교하는 형식의 [열전]이다. 실제로 이 [영웅전]은 그리스 아테네 민주주의 시조 테세우스와 로마 건국자 로물루스의 '비교열전'으로 시작하며 이후로도 수많은 영웅들을 대립쌍으로 비교한다. 
기원전 1세기 동양의 사마천 [사기] 또한 그 <열전>이 백미인데, 인간군상들을 수시로 비교한다. 대표적으로 [사기]의 절정인 '초한전쟁'을 그린 한고조 유방의 전기 <고조본기>와 라이벌 항우의 전기인 <항우본기>는 대표적 '대비열전'이다. 나이가 스무살 이상 많은 유방은 항우장사의 기개에 속으로 엄청 쫄았지만 겉으로는 유연하고 여유있게 대처했고, 젊은 항우는 성급한 제 성미를 못 이기고는 나이 서른에 고향으로 건너지 못한 채 자결했다.
젊었던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보다 40년 이상을 더 살았지만, 항우가 유방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유분방하고 능글맞은 레오나르도를 공개적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바사리의 [열전]을 직접 읽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전기작가이자 역사학자 월터 아이작슨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6세기(친퀘첸토)의 두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대비(비교)열전'으로도 충분히 읽힌다. 물론 주인공은 레오나르도이며 미켈란젤로는 전체 33장 중 <25장> 한 챕터만 할애되었음에도 두 거장의 '경쟁'적 비교열전으로 읽기에 충분하다.


"1504년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서 서로 경쟁하고 있을 때, 한 젊은 화가가 움브리아 지방의 우르비노라는 작은 도시에서 피렌체로 왔다. 그는 바로 라파엘(Raphael)로 알려져 있는 라파엘로 산티(Raphaello Santi : 1483~1520)였다."
- [서양미술사], <15장>, 에른스트 곰브리치, 1950.


역시 동시대 후배였던 라파엘로가 찾아간 피렌체 시뇨리아 궁전의 '전투 벽화'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경쟁'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밀라노에 비해 힘이 밀리는 듯 하던 피렌체의 지도자들은 오래전에 경쟁국 밀라노로부터 얻은 승리를 상징할 필요가 있었고 1503년에는 레오나르도에게, 1504년에는 마켈란젤로에게 각기 다른 전투장면을 벽화로 그려달라는 의뢰를 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이것이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앙기아리 전투> 묘사도다. 바사리는 분명 각기 다른 작풍의 두 밑그림을 보았을테고, 라파엘로를 비롯한 당대 미술가들은 이 '경쟁작'을 보기 위해 피렌체 시뇨리아 궁전으로 향한다.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의 표현에 의하면, 이 두 거장의 '경쟁'적 밑그림은 당대 화가들에게 "세상의 학교"(같은책, <25장>) 역할을 했다. 라파엘로도, 바사리도 그 '학교'의 학생이었고, 결국 완성되지 못한 두 벽화는 다른 사람도 아닌 조르조 바사리의 손에 의해 사라졌단다. 1560년 미완성의 대회장을 보수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바사리가 손수 두 거장들의 '경쟁' 작품들 위에 여섯 개의 전투 장면을 그렸다는 것이다. 후세의 미술복원 전문가들이 두 거장의 밑그림을 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바사리의 작품이 훼손될 우려가 있어 복원을 중단했다고 하니 시뇨리아 대회장은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밑그림과 바사리의 작품이 공존하는 '친퀘첸토'의 응집된 공간이겠다.

결국,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경쟁'은 예술가들의 지위를 높였다. 
레오나르도는 원래 이단적이고 천재적인 교만함이 있었을 테고, 미켈란젤로는 그 종교적이고 금욕적인 태도와 신실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미술로서 신에게 봉사하게끔 하려거든 교황이 나를 만나러 오라"고까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중에 교황에게 무릎꿇고 빌기는 했다지만 당시로서는 유명 미술가의 대단한 사회적 지위를 시사한다. 아마도 400년 후 "비틀스는 예수만큼 유명하다"고 말한 존 레넌식 자신감의 시작이 미켈란젤로가 아닐까.

월터 아이작슨은 말한다. 16세기 르네상스 전성기를 관통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경쟁'과 대결은 "예술가의 위상을 끌어올리는데 그 어떤 '파라고네(비교)'보다 더 강력한 역할을 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명사가 되었고-당시로서는 자기 작품에 서명도 거의 하지 않던- 다른 예술가들이 그들처럼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이제 최고의 예술가들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도공계급의 일원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스타로 대접받게 되었다."(같은책, <25장>)


스스로를 높이고 위상을 확립한 동력은 기본적으로 미술가들의 천재성과 노력에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여기에 미술을 우대하던 당시 사회적 배경을 토대로 이 천재성과 도전이 유기적으로 작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관점대로 '미술사'가 단지 '미술' 또는 '미술가'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사회사'인 까닭이다.

***

1.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 월터 아이작슨, 신봉아 옮김, <북이십일 arte>, 2020.
2.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1950), 에른스트 곰브리치, 백승길/이종숭 옮김, <예경>, 2003.
3.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Social History of Art)](1951), 아르놀트 하우저, 백낙청/염무웅 외 옮김, <창비>, 1974~2016.
4. [플루타르크 영웅전](AD 1세기), 플루타르코스, 홍사중 옮김, <동서문화사>, 2007.
5. [사기(史記)](BC 1세기), 사마천 지음, 김원중 편역, <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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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 효과 프리즘 총서 7
진태원 엮음, 강희경 외 옮김 / 그린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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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를 읽던 시간 : 1998~1999년
- [마르크스를 위하여] / [자본론을 읽는다] / [레닌과 철학] / [철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 / [마키아벨리의 고독] 외 유고집


1.

"간단히 말해 철학은 분열한다는 냉혹하고도 기본적인 사실에 관한 의식이다. 과학이 하나로 된다면 철학은 분열한다. 철학은 분열함으로써만 하나가 될 수 있다… 철학적 꼬뮈니까씨옹(communication)이란 없다. 철학적 토론이란 없다."
- 루이 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1968.


또 다시 아버지에게 대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설 명절연휴 전날 마감일이 잘 풀려서 즐거운 마음에 퇴근 후 오랜만에 집에서 맥주 한 잔 하며 가족끼리 대화 중 아버지가 성질을 내시고는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리신 거였다. 
친구들과 한 잔 마시고 들어와 떠들어대던 아들과 함께 기분이 좋아진 아버지가 역시 '이 때다!' 싶어 이번 대선 얘기를 꺼내시며 남한의 '공산화'를 심히 걱정하셨고, 암환자를 모시는 삼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집안에서 정치경제와 사회문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가풍을 확립해 왔던 나는 순간 뜨끔했다. 

"에이, 뭐 그런 얘기를 하세요~" 하며 예사롭게 대처해야 했다. 하지만 한 잔 마신 나도 대뜸 할 말은 하자 싶었다. 

"폐암 4기인 아버지가 중증환자로 등록되어 의료비의 5%만 지급해도 된 후로 저는 월급에서 나가는 국민건강보험료가 전혀 아깝지 않아요. 우리 식구들 힘들게 살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무슨 상관입니까?"

"너가 아직도 잘 몰라서 그래. 지금 나라가 공산화 다 되어 있어. 나라 다 망하게 생겼어."

"보세요. 아버지가 잘 가르쳐주신 덕분에 제가 아버지보다 조금 더 알고 정보도 많잖아요. 현실 공산주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등하기를 꿈꾸는 이상사회로서 공산주의는 나쁜 것만은 아니예요."

"너 지금 우리나라 안보가 다 무너진 걸 모르고 하는 소리냐?"

애초에 대화가 될 수 없는 사안의 또 다시 반복이다. 대저 부자간의 이런 대화는 서로 답을 정해놓고 주장을 펼치기에 '토론'이 성립되지 않는다. 반론을 펼수록 서로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꼬투리에 꼬투리를 물다가 궁극에는 아들의 태도를 지적하며 아버지가 토론종료를 선언하는 게 상례다. 우리 부자도 항상 그랬었고 젊은 시절의 나는 토론 중 퇴장전술을 주로 썼으며, 시간이 흘러 중년의 아들과 마주한 늙어진 아버지는 주로 '너는 아직 세상을 모른다'라는 말과 함께 일방퇴장을 하신다. 

암선고를 받은 아버지와 부자지간의 정을 나눌 시간도 부족하니 사회문제, 특히 정치경제 얘기 말고 신변잡기 개그를 나누자던 다짐을 잠시 소홀히 한 결과 늙고 병약한 아버지가 다시금 골방과 태극기 휘날리는 유투브 세상으로 침잠하시고 말았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 1918~1990)는 '철학자'다. 후기의 수차례 '자기 반성' 전이었던 1960~1970년대의 이 철학자는 세계의 '우연'한 현상들 속에서 '필연'의 '법칙', 즉 궁극의 '진리'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정통 철학의 입장을 견지했다. '과학'의 발전과 세상의 복잡다단한 변화 속에서도 그는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인 '철학'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으려 했고, 세상만사의 현상들을 통합하는 '과학'의 성과에 비해 이 사실들을 다시금 분열시키고 논쟁시키는 '철학'의 본질적 성격을 분명히 했다. 
'철학'은 일관되고 통합된 '진리'를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과학'적 사실들 간 경계선을 긋는 역할만 하게 되고 이런 '철학'간의 분열은 새로운 '과학'의 성과로 다시금 통합되는 것이지 결코 '철학'적 '토론(커뮤니케이션/꼬뮈니까시옹)'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자' 알튀세르에게 "철학적 꼬뮈니까시옹이란 없다. 철학적 토론이란 없다".



2.

"마르크스의 이론적 혁명은 그 답의 변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변경에 있다는 것, 따라서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의 혁명은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의 지형으로부터 과학의 지형으로 옮긴 ‘제요소의 변경’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1965.


인문대 부학생회장인 국문과 후배에게 단과대 [자본론] 읽기모임을 공식사업으로 제안했던 1999년에는 나 나름대로 '절박'했다. 제대 후 복학하니 오래전 후배들을 잡아주던 복학생 형들은 당연히 온데간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학회소모임 사상운동은 무너졌다. 단과대학 각 학회에서 암약하던 정치경제, 노동사회, 문사철(文史哲) 학회들도 보이지 않았다. 뛰어난 운동가는 아니었던 나는 단과대 단위에서라도 [자본론]을 함께 읽으며 좌파사상의 단초를 다시 만드는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싶었다. 수년 전 89~91학번 복학생 선배들의 자리를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감감 무소식이던 부학생회장 후배는 슬금슬금 나를 피했고 나는 여전히 도서관에서 '자습'이나 하고 있었다.




1994년 내내 레닌을 읽던 나는 우연히 같은 단과대 89학번 선배를 통해 알튀세르를 접했다. 마르크스도 엥겔스도, 레닌도 마오쩌뚱도 '철학'은 다루었지만, 그들 모두는 시대의 '사상가'였고 '혁명가'였지 '철학자'는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중 마지막 '열한번 째 테제'에서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계를 '해석'해 왔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철학'은 세계를 '변혁'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로부터 100년 후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이를 수정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새로운 철학의 실천'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루이 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1968.)"라고 말이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철학'의 '실천'과 이를 변화된 유럽정세에서 혁신하려던 그람시의 새로운 '실천철학'을 넘어 '철학' 자체로 돌아간다. 즉, '새로운 (실천)철학'이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철학자인 루이 알튀세르는 '철학' 자체로 돌아가되 헝가리 미학자 게오르그 루카치처럼 '총체성'이라는 철학의 자루 안에 모든 개념들을 모호하게 쓸어담지 않고 '철학' 자체는 무엇인가 명확하게 확립을 하고는 사유의 여정을 출발한다.

알튀세르에게 '철학'은 학문적 '대상'을 갖지 않는다. 대상을 지닌 것은 '과학'으로서 비단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정치나 경제, 역사 등의 사회과학도 각 분야의 대상이 있고 그에 관한 연구와 혁신을 향해 나아가니 '과학'이다. '철학'은 다만 별도의 '대상'이 없이 이러한 '과학'적 성과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을 분류하고 경계선을 그으며 정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계급사회에서는 방향성 없이 생산된 온갖 과학적 성과들을 계급적으로 구분하고 경계선을 그으면서 "철학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알튀세르, <마치오키와의 대담>, 1968.)"을 표현하게 된다. '철학'의 '대상'은 '학(學)' 자체라는 헤겔을 비롯한 대철학자들의 전통 위에 알튀세르도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루이 알튀세르는 빼도박도 못하는 '철학자'일 수 밖에 없다.
다만, 그리스 탈레스로부터 플라톤까지 고대 철학에서 발견한 첫번째 '과학'의 대륙이었던 '수학'의 대륙과 중세 데카르트로부터 갈릴레이까지 두번째 '물리학'의 대륙 발견이 인류의 철학적 여정에서 중요한 발견이었던 것처럼, 근대의 마르크스가 발견한 세번째 대륙인 '역사'의 대륙은 계급투쟁의 사회사상에서 혁신적 세계관으로서 '역사적 유물론'을 정립하게 했다. 이러한 '과학'적 패러다임의 혁신 과정에서 '철학'은 지리하고 분열적인 지적 투쟁을 노정하지만, 새로운 '과학'의 대륙이 발견된 후에야 그 경계선을 구획하는 본연의 역할을 할 뿐 '철학'적 세계관 사이의 투쟁에서 '토론'은 없다. 
이것이 알튀세르의 입장에서 '철학'과 '과학'의 상호관계이며 '과학자의 자생적 철학'이 유물론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나는 제대 후에도 소설가의 꿈을 꾸었지만, 당시 나에게 소설이란 문학이라기 보다는 세계를 '변혁'하는 도구 중 하나였다. '혁명가'는 못 되었으니 '문학'이라는 무기를 들고 싶었으며 이 총에는 '철학'이라는 실탄을 장전하고 싶었다. 입대 전 만난 알튀세르를 전역 후에 다시 찾아 그의 저서 [자본론을 읽는다](1966)를 통해 마르크스의 [자본론] 원전을 읽게 되었다. 내가 단과대 학생회에 제안했던 '[자본론] 읽기' 모임은 실상 루이 알튀세르와 그의 동지 에티엔 발리바르처럼 [자본론]을 '철학'적으로 읽는 모임이었다. 알튀세르와 동지 철학자들의 공동저작인 [자본론을 읽는다]는 당시 표준적인 자본주의국가 영국을 분석하되 그 나라의 구체적인 체제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저자들은 영국이 아니라 "표준적이고 이상적인 모델(같은책)"로서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연구하며 영국을 표본으로 삼은 것 뿐이었다. 이는 역시 100년 전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을 통해 당시 최고로 발전한 자본주의국가 영국을 분석하면서 자본주의체제 일반의 성격과 비밀을 폭로한 '철학'적 전통을 잇고 있다.
레닌과 알튀세르 모두 "모든 진리는 구체적이다"라는 명제와 함께 '철학'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천'을 주장했지만, '알튀세리앵(알튀세르주의자)'을 자처하던 나는 다시금 알튀세르를 앞세워 예전처럼 '철학'의 가면을 쓰고자 했을지도 몰랐다.

결국 단과대 학습모임은 불발되었는데, 설령 공식출범했다 한들 당시의 내가 알튀세르의 [자본론을 읽는다]를 잇는 그 '철학'적 위업을 흉내나 제대로 낼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다. 구체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못했던 당시의 나는 '혁명가'도 '소설가'도, 그렇다고 '철학자'도 아니었다. 내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신춘문예로 등단할 소설이나 몇 편 써보는 것 뿐이었다. 물론, 학보사 문예상에서도 나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먹히지 않았고 마지막 교문을 나서기 전 제출한 신춘문예 신문사들로부터 답신은 오지 않았다. 
'실천'도 '철학'도 못했던 나는 결국 '소설' 마저도 제대로 못했다.

알튀세르는 20세기 말 남한에서 그렇게 잊혀졌다. 소비에트의 붕괴 이후 "다시 마르크스 자체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내건 좌파의 흐름에서 1990년대를 휩쓴 '포스트 모더니즘' 등의 사조를 타고 잠시 머물다 떠나간 이론가 중 하나로서 잠시 명멸했다가 사라졌다. 철학자이자 공산주의 이론가인데 평생 정신분열증으로 살다가 아내를 목졸라 죽이고 정신병원에 유폐된 그는 1970년대 후반까지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끝으로 더이상 저작을 발표하지 못하나, 이후 편집자들에 의해 '유고'들이 속속 출간된다.

'인간주의'적 청년 마르크스와 '구조주의'적 노년 마르크스 사이의 '인식론적 단절(절단)',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으로서의 '철학'과 '유물론'일 수 밖에 없는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 '주체 없는' 사회구성체에서의 경제적 '최종심급'을 인정하면서도 상부구조와 상호관계되는 복합적 '중층결정',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힘'으로 확장한 '국가론', 그리고 '과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은 알튀세르가 한국에 들여온 사상들이었다. 이후 몇 번의 '자기 비판'과 에티엔 발리바르 등 제자들과의 결별이 그의 '정신분열'의 영향이었는지는 나는 알 수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글과 사상은 어렵다.


3.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레닌주의의 용어로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위치, 계급관계, 그러므로 세계적 차원과 국민적 차원에서 동시적으로 제국주의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이 두 측면은 분리 불가능하죠) 계급투쟁의 상태로 필연적으로 향하는 그러한 분석을 말하는 것입니다."
- 루이 알튀세르, [검은 소], <2장. 22차 당대회의 모순>, 1976.


1976년 프랑스 공산당은 22차 당대회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폐기한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완성'을 선언하고 하나의 '현실 정치체제'가 된 후 유럽 선진 자본주의 각국에서 '의회주의'를 병행하는 유럽 공산당들은 노선 전환을 시도한다. 마르크스주의 '과학'인 '역사유물론'에서 '필연'적 이행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포기하고 '인간적인 자본주의'로 수정하는 '유로 코뮤니즘'의 출현이었는데, 이런 정국에서 루이 알튀세르와 에티엔 발리바르 등의 마르크스 철학자이자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이 기획에 '이론적'으로 반박하기 시작한다. 그 중심 테마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알튀세르를 비롯한 일련의 공산주의 '철학자'들에게 계급투쟁의 인류역사에서 '민주주의'와 '독재'의 개념은 '구체적'으로 또는 현실적으로 동일했다. 그러므로 다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다수대중에 의한 민주주의라는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이러한 체제이행의 필연적인 개념을 포기한 1976년 프랑스공산당 22차 당대회는 역시 100년전 마르크스의 [고타강령비판]의 정세의 현대적 반복이었다. 알튀세르와 동지들은 '프롤레타라아 독재'의 '철학'적 '필연성'에 관한 일련의 저작들과 주장을 열심히 제기했지만, '철학'은 결코 당대 현실 '정치'를 이길 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랑스공산당 강령에서 결국 삭제되었고 알튀세르는 공산당에서 사라졌으며 그의 동지들은 분열하고 결별했다.

이후 알튀세르는 '자기 비판'을 통해 후기 사상으로 접어들었다. '계급투쟁'의 '이론적 무기'로서의 '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지향했지만, 구체적 진리를 담보하지 못한 채 1980년대에는 사변적 골방 철학자가 되었고 프랑스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따위에 소환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결국 정신분열로 아내를 목졸라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아무도 몰라주는 '고독'에 싸인 자신을 선학인 마키아벨리나 마르크스에 빗대어 '마키아벨리의 고독'이나 '마르크스의 고독' 따위를 언급하고 그들의 '침묵'처럼 본인도 '침묵'의 철학자가 되었다. 이것이 그의 후기 사상으로서 '고독'과 '침묵', 그리고 '우연'의 철학이다.

한참 후 1990년대에 남한사회 '알튀세리앵'을 자처했던 일련의 학자들이 [알튀세르 효과]라는 책을 엮었고, 21세기 초 [마키아벨리의 가면](2001) 이후 잊고 살던 알튀세르를 2018년에 나는 그의 '유고집'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검은소]는 1976년의 어두운 정국에서 앞길을 가늠해볼 수 없었던 은유('검은소')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관한 알튀세르의 철학적 고뇌를 담고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는 마르크스주의 계급투쟁론과 국가론을 견지하면서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역시 '철학'적으로 결합한 알튀세르 후기 글들을 엮었다. 
이미 [마키아벨리의 가면] 당시 내가 읽은 알튀세르는 더이상, 세계의 '필연'적 '법칙'으로서 '진리'를 집요하게 추적하던 정통 '철학자'가 아니었다. 자기 비판과 자기 반성을 통해 '고독'과 '침묵'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알튀세르는 '필연'을 버리고는 우연'적 '만남'과 '유물변증법'을 혼란스럽게 접목시켰고 그가 추구하던 '진리'는 그의 정신분열적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아마도 정통 물리학과 상대성이론을 넘어 확률과 우연의 양자 물리학의 '과학'적 성과를 의식해서였을는지도 모른다.

이전의 나와 '단절'된 지금의 나는 폐암 4기인 아버지의 주장이 아닌 마음을 읽으려 노력하고, 주변 동료들에게도 나의 주장만이 아닌 그들의 생각을 들으려 노력한다. 
중요한 건 '철학'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20세기말 알튀세르와 결별하면서 깨닫기 시작했지만, 사실 나의 '철학'은 변함이 없다. 끊임없이 분열하고 토론도 불가한 '철학'의 전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불변의 진리' 혹은 '단 하나의 방정식'을 찾는 노력을 기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천'도 부족하고 '철학'도, '소설'도 부진했던 내가 지금껏 모자란 머리로 책을 읽는 이유다.

알튀세르를 읽던 시간이었던 지난 세기말 이후로도 내가 버리지 못하는 습성이다.


***

1. [자본론을 읽는다](1966), 루이 알튀세르, 김진엽 옮김, <두레>, 1991.
2. [마르크스를 위하여](1965), 루이 알튀세르, 고길환/이화숙 옮김, <백의>, 1990.
3. [레닌과 철학](1968), 루이 알튀세르, 이진수 옮김, <백의>, 1991.
4. [철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1967), 루이 알튀세르, 김용선 옮김, <인간사랑>, 1992.
5. [마키아벨리의 가면](1972~1986), 루이 알튀세르, 오덕근/김정한 옮김, <이후>, 2001.
6. [검은 소 -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 루이 알튀세르, 배세진 옮김, <생각의 힘>, 2018.
7. [무엇을 할 것인가? - 그람시를 읽는 두 가지 방식], 루이 알튀세르, 배세진 옮김, <오월의 봄>, 2018.
8. [알튀세르 효과], 에티엔 발리바르/서관모 외, 진태원 엮음, <그린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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