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Classical Art 편 (리커버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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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법'과 '인상주의'로 미술사를 돌아보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흔히 투시법은 서구 미술에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원근법이 유일한 투시법은 아니다. 파노프스키가 지적한 대로 그것은 가능한 많은 투시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원근법과는 다른 투시법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러시아 성상에 적용된 역원근법이다. 
르네상스 원근법은 움직이지 않는 시점을 전제한다. 러시아 성상에서는 시점이 움직인다. 이렇게 움직이는 시점으로 본 장면들을 하나로 통일시킬 때, 외려 가까이 있는 것일 수록 짧게 묘사되는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한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고전예술편>, 5장 '물구나무선 원근법'


'미학'을 대중적으로 풀어쓴 진중권이 '서양미술사'를 개괄한 대중서 4편이다. 
통시적으로 '고전예술편', '모더니즘편',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편'으로 '서양미술사'를 돌아봤던 기존 3편에 최근 '인상주의편'을 추가하였다.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나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등이 미술이나 예술 전문가들을 위한 학술고전 같은 성격이라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는 미술사를 처음 접하는 일반 대중들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미술의 역사이다 보니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있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두 가지 테마는 '원근법'과 '인상주의'다.

2차원 평면에 잠겨있던 고대와 중세의 그림에 3차원적 혁명을 불러온 것이 르네상스의 원근법이다. 진중권은 이 혁명이 하나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는 '고전적 원근법'에 불과하며, 실제 과학적인 사실은 여러개의 다양한 시선으로 대상을 보는 것으로서 '러시아의 역원근법'을 거쳐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알려진 폴 세잔의 '체험된 원근법'으로 풀어낸다.
즉, 우리의 안구와 지각을 통해 보이는 사물이나 대상은 하나의 고정된 시선이 아닌 다양한 시선으로 현상한다는 것이다.

미술사 또한 인류 역사처럼 '부정의 부정', 끊임없는 변증법적 혁명의 과정이다.
이런 미술사를 관통하는 첫번째 테마가 바로 '원근법'인 것이다.

'고전예술편'은 에르빈 파노프스키, 하인리히 뵐플린 같은 저명한 미술비평가들의 논문을 한편 한편 소개하는 방식으로 모더니즘 이전까지를 정리한다.
유시민도 2018년 신작 [역사의 역사]에서 헤로도토스, 사마천, 마르크스, 카, 박은식과 신채호,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아랍 역사가 이븐 할둔까지의 역사서를 소개하면서 비슷한 서술방식를 취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서술방식이 좋아 진중권의 4편 중 ‘고전예술편’을 가장 추천한다.

역사도 그렇지만 미술사라는 것이 갖가지 '예술사조'로 도식화될 수 없다. 곰브리치나 하우저도, 진중권은 특히 그러한 도식화를 경계하고 있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전문분야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런 도식화가 불가피하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주로 '사실주의(또는 ‘리얼리즘’)를, 곰브리치는 '모더니즘'을, 하우저는 '낭만주의'를 분명하게 지지하는데, 진중권이 미술사를 읽는 두번째 테마는 '인상주의'다.

과학과 산업의 혁명적 발전을 배경으로 기존 '고전주의'를 부정한 쿠르베의 '사실주의'로부터 시작하여 진중권은 대상의 객관적 묘사에 복무하는 '사실주의'보다는 인간의 지각에 묘사된 사물을 그린 '인상주의'에 주목한다.

특히, 진중권은 '인상주의'를 넘어서 현대미술을 시작하는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폴 세잔에게서 현대미술의 '혁명'을 본다.

고전적 미술로부터 "색채를 해방시킨 '야수주의' 앙리 마티스"와 "형태를 해방시킨 '입체주의' 파블로 피카소" 둘 다 '후기 인상주의' 폴 세잔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진중권은 폴 세잔을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로 규정한다.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로서... 세잔의 작업은 고전미술이 현대미술로 이행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그의 화면에서 발견되는 '색채의 놀라운 풍부함'과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형태, '고전적 원근법'과 다른 '체험된 원근법'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초석이 된다. 마티스는 그에게서 색채의 효과를, 피카소는 그에게서 형태의 기하학적 단순화와 고전적 원근법의 파괴를 배웠다. 현대미술의 두 위대한 이정표 모두 세잔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그 때문이다...
마티스와 드랭의 야수주의,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 현대미술의 두 이정표도 세잔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거나, 혹은 그 탄생이 뒤로 한참 늦춰졌을 것이다. 세잔은 마지막 고전주의자이자 최초의 현대주의자였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 11~12장 '세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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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방정식 - 궁극의 이론을 찾아서
미치오 카쿠 지음, 박병철 옮김 / 김영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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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생이 '물리학'을 읽던 시간 : 1993~2000년
- [단 하나의 방정식], 미치오 카쿠, 2021.


"... 물리학 이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몇 개의 방정식으로 축약되면서 더욱 단순하고 강력해진다. 이것이 바로 물리학의 매력이다... 우주를 올바르게 서술하는 방정식은 단 하나 뿐이다. 그 외의 방정식들은 수학적으로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 [단 하나의 방정식], <7. 우주의 의미를 찾아서>, 미치오 카쿠, 2021.


1.

열 다섯명의 주소록이 돌았다.
아미즈 호프의 '아무거나' 안주접시를 둘러싸고 앉은 '철봉파' 친구들은 매번 업데이트되는 총무 철호의 주소록을 또 검토한다. '철봉파' 조직원 15소년의 주소와 집 전화번호가 신형엑셀로 정리된 출력물로 친구들 각자의 손에 쥐어져 있다. 때는 1993~1994년, 휴대폰도, 삐삐도 없어 친구 집으로 전화하면 본의 아니게 친구의 가족들과도 통화를 많이 하던 시절 이야기다. 대학가에서는 서점 앞 게시판을 보고 약속장소를 찾아가던 시절이었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경희고 31회 동창인 우리 '철봉파'는 1학년 때부터 재수생은 물론 문과와 이과를 '파동'처럼 이어 철봉대 아래 모였던 조직이었다. 각자 초중교 시절 친구들이나 같은 반 친구들을 데려와서 야간자율학습 전까지 운동장과 오락실을 전전하던 아웃사이더들이었다. 우린 함께 백일주를 마셨고, 졸업 후 대학으로 진학한 친구, 재수삼수를 하기로 하거나 사회로 진출한 친구들로 각자 다양하더라도 매월 셋째주 토요일에는 무조건 이문동 외대앞 정문에서 모이기로 졸업식날 저녁 전철 1호선 휘경역 인근 뮌헨 호프에서 결의했다. 그날 스무살 또는 스물한살이 된 우리 '철봉파'의 총무로는 가장 머리가 좋은 철호가 맡을 수 밖에 없었다.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철봉파'의 두뇌 철호는 물리학과에 진학한 터였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는 부반장 전문이었던 철호는 나의 초중교 동창이자 오랜 친구다. 근데 사실 중학교 때까지 나는 민수와 주로 붙어다녔지 철호는 '팬더 종이공작'의 취미가 비슷하여 만나게 되는 친구였다. 더 거슬러 가면 초등 4학년 때인가 같은반에 공부를 못하던 중국집 아들이 있었는데 나는 공부를 알려준다는 핑계로 진심은 짜장면 얻어먹으러 몇 번 들락거리다가 어느날 나보다 공부를 더 잘하는 우리반 부반장 철호를 그 중국집에서 만났던 거였다. 그 이후로 철호와 나는 친구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이과' 머리 철호는 아마도 꿈이 '과학자'였지 싶다. <해문>과 <지경사> 등지의 종이공작을 넘어 스타워즈 비행기 등을 본인이 직접 그리고 설계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던 진정한 '금손'이었으며, 컴퓨터와 각종 최신 전자장비의 선구자였다. 친구였으되 민수와 주로 놀던 내가 철호네 집에 갈 때는 사실 당시는 흔하지 않던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비디오 시청을 하고 싶은 무언가 '필요'가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진학 후 철봉대 아래에서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오랜 단짝 민수가 철봉을 떠난 후 오랜 동창 철호는 나의 '불알친구'가 되었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컴퓨터를 전공하고 싶어했을지도 몰랐던 철호가 '물리학'이라는 순수 자연과학을 전공하게 된 1993년 2월, 철호는 우리 '철봉파' 최초의 '공식' 총무이자 영원한 '원조' 총무가 되었다.


2. 

진심으로 '문과'적 인간인 나는 아마도 철호와 엥겔스와 레닌이 아니었다면, '물리학'이라는 영역을 쳐다볼 엄두도 못 냈을 게다. 철호는 말할 것도 없이 내 주변에서 가장 '이과'적 인간이었는데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과학'의 이름으로 철학적 관념론과 사이비 사회주의를 신랄하게 깨부수던 엥겔스와 레닌의 논쟁적 저작들을 읽다가 미적분 수학이나 중력과 힘의 작용과 반작용 같은 사안이 나오면 난 어김없이 철호네 집으로 전화하거나 녀석을 찾아갔다. 물리학자 철호는 열심히 설명를 해줬고 사실 나는 반도 이해 못했지만 그래도 안 듣는 것보다는 나았다.


미국의 일본계 물리학자 미치오 카쿠는 아인슈타인이 '통일장 이론(Unified field theory)'으로 우주를 수학적으로 정리하려던 미완의 노트를 펼쳐놓은 채 블랙홀 너머로 돌아간 1955년에 여덟살이었는데, 그 어린 나이에 아인슈타인의 사망기사를 보고는 저 '통일장 이론'을 본인이 완성하겠다는 다짐을 했단다.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이런 이과적 물리학의 세상에서 미치오 카쿠는 뉴턴의 전통 물리법칙의 세계를 혁신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또 넘은 양자물리학을 더 넘어 '끈 이론(string theory)'을 계속 다듬어서 우주 삼라만상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방정식'을 완성하고자 한다. 
'문과'적으로 보면 서양의 논리학과 철학, 동양의 '기(氣)'와 명상, 득도를 통해 만들어질 법한 이 단 하나의 '신의 법칙'은, '이과'적으로 보면 수학적으로 표현되는 가장 명료하고 단순한 '방정식(equation)'의 '대칭(symmetry)'으로 압축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서 '세계관'은 문과적, 이과적으로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언제나 '진리(眞理)'를 추구하는 인간의 이성은 그 방식이 다를 뿐 '절대불변'의 법칙을 향해 수렴한다. 철학에서는 '일자(一者)'를 향한 끊임없는 도전과 실패를 통해, 물리학에서는 '무한대'라는 불가지론을 극복하려는 수학적 공식의 무한한 수정을 통해 우주 법칙의 필연성을 증명하는 시도가 끊어질 수 없다. 이들의 문과, 이과적 노력은 궁극의 세계관을 정립하고 또 반증에 따라 폐기되고 수정된다. 이런 진리의 '상대성'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절대'적 진리를 찾아 나아갈 수 밖에 없는데, 미치오 카쿠 같은 물리학자에게 이것은 '궁극의 이론'이자 '신의 방정식'이며 우리말 번역본 제목에 따라 [단 하나의 방정식]이 된다. 이를 위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이와 모순되는 듯 보이는 최근의 '양자역학'을 접목시키되 '중력'이라는 매우 전통적이고 고전적이며 어려운 힘의 주제를 포괄하는 미시적인 '끈 이론(string theory)' 또는 거시적인 '초끈 이론(super string theory)'에 대해 미치오 카쿠는 대중적으로 간략하게 소개하는 책을 2021년에 낸 것이다. 이 책의 원제가 [The God Equation(신의 방정식) - The Quest for a Theory of Everything(궁극의 이론에 대하여)]이고 국역본의 제목이 [단 하나의 방정식]이다.
결론적으로, 세상 '거의 모든 것의 이론'으로서 '궁극의 이론'을 이과적으로 표현한 단 하나의 '신의 방정식'은 역시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는 그 수식까지 상세하게 소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설령 수식이 나온다 한들 일반인이자 다분히 문과적 대표인간인 나는 그 '물리학' 법칙에 담긴 단 하나의 의미도 '수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게다.


"... 완전한 이론이 되려면 '대칭'이 붕괴된 원인과 과정까지 설명해야 한다... 중력, 빛(전자기력), 그리고 핵력(강력과 약력)은 언뜻 보기에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힘들이 조금씩 비슷해지다가, 창조의 순간(빅뱅)까지 가면 하나로 통일된다. 그리하여 물리학자들은 '우주론(cosmology)' 최고 미스터리인 창조의 순간에 입자물리학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다른 분야였던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이 어쩔 수 없이 한 배를 타게 된 것이다... '신의 방정식(The God Equation)'... 그것은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그 누구도 떠올린 적 없는 '초대형대칭(마스터대칭)'이었다."
- [단 하나의 방정식], <4. '거의 모든 것'의 이론>, 미치오 카쿠, 2021.


다만, 철학과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방향이듯, 단 하나의 '신의 방정식'을 향한 경향은 '문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으니, 중력을 비롯한 세상 만물의 근원인 '신(神)'은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 신'이 아니라 목적이 없는 '단 하나의 법칙'으로서의 그것이라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후예들, 요하네스 케플러와 '이단자' 갈릴레이 등도 사실은 '신'을 증명하려고 했던 과학자들이었는데, 그 신은 '무한대'라는 무책임한 불가지론이 아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수학적으로 방정식의 미학은 '대칭(symmetry)'이며 이 대칭만이 무한대의 문제를 해결하므로 미치오 카쿠에 의하면 '대칭'이야말로 물리학의 미학적 정점이 된다. 궁극의 이론에서 이러한 미시적 '대칭'은 거시적인 '초대칭(Master-symmetry)'이 되며 우주 발생의 근원인 '빅뱅'까지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내 마음대로 '문과'적으로 정리하면, 우주 발생 전 최초의 '초대칭'에서 '대칭'을 무너뜨린 '붕괴'가 발생했고 이러한 '빅뱅'으로 우주는 팽창하는데 이런 무한 확장성을 '무한대'나 '신' 또는 '불가지론'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대칭'과 '붕괴율'과 또다시 이어지는 '초대칭'의 물리학적 법칙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방정식이 '끈 이론'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미치오 카쿠의 주장이다. 그의 '끈 이론'은 원자 또는 입자의 전통 물리학에 이들간의 진동과 파동의 관계까지 아우르는 '양자역학'을 접목하되 '중력은 실체적 힘이 아니라 휘어진 공간에서 나타나는 환상'(같은책, <2. 통일을 향한 아인슈타인의 여정>)이라는 일반상대성이론의 거시적 영역에서 작용한다. 즉, 아인슈타인의 후예인 미치오 카쿠는 아인슈타인이 확립한 '중력'의 세계를 '끈 이론'이라는 새로운 이론에 "갖다붙이는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중력을 끈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이다"(같은책, <옮긴이의 말>).

사실 책을 몇 번 다시 뒤적여 봐도 1968년에 발표되었다던 '끈 이론'을 나는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입자가 아닌 '끈'으로 3차원이 아닌 10차원(또는 11차원)의 공간에서 쌍방 입자를 끈으로 이어 대칭을 이룬 결과 '무한대'의 문제를 해결한 이론이라는데, 궁극의 수학공식을 소개하지 않으니 그 증명과정을 알 수 없을 뿐더러 다시 말하지만 설령 수학공식을 봐도 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다만,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혁신한 '중력'의 문제와 입자와 파동으로 운동법칙의 확률을 다루는 양자역학을 수학적으로 접목하는 이론이 아직 미완성된 '끈 이론'이며 미치오 카쿠에게는 이것만이 온 우주법칙을 단 한 줄의 방정식으로 정리하려고 했던 아인슈타인의 유언과도 같은 '통일장 이론'을 완성하는 길이다.

물론, 물리학자인 저자는 철학자가 아니기에 논리학만이 아니라 '수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단 하나의 '신의 방정식'으로 세계관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3.

미아역 신일고 옆 건물 2층에서 며칠밤을 샌 철호가 까치집 머리를 하고 내려왔다.
우리 둘은 그 건물 1층 오락실에서 테트리스 한 판을 하고는 음침한 그 사무실에 잠시 들러 레츠비 캔커피와 담배 하나씩 피우고는 다시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나는 물리학과에서 우등생으로 졸업한 철호가 대학원 가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할 줄 알았다. 휴학 없는 입대와 전역으로 나보다 1년 먼저 조기졸업한 물리학도 철호의 1998년 학사논문의 주제는 [반도체 기술 및 제조공정(Semiconductor Technology & Fabrication)]이었는데, 깔끔하게 제본까지 한 그 논문책을 증정받은 나는 "라면 받침대로 잘 쓰겠다"는 말로 친구의 호의에 답변했지만 실은 읽어도 역시 전혀 이해를 못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각별하게 선물이나 증정받은 책을 끝까지 못 읽은 아마도 첫 케이스였고 '논문'이란 건 읽으라고 주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첫 계기였다. 

내가 군에서 전역하고 맞이한 세상은 'IMF' 구제금융의 신탁통치 시대의 첫 해였고 구조조정에 맞선 민주노총 권영길 후보가 군소후보지만 노동자민중운동진영의 대표로서 "불심으로 대동단결!"을 외치던 호국당 스님후보와 TV토론하는데 둘 다 삭발이니 유권자들이 민중진영과 불교진영을 구분하지 못하면 어쩌나 내심 염려되던 시절이었다. 대선결과 김대중 정권이 들어섰고 예상대로 IMF구제금융 체제는 우리 사회를 대규모 구조조정의 신자유주의 체제로 질적 전환을 주도했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이후 노무현 '참여정부'의 토로는 실상 IMF 구제금융 체제를 선도한 김대중 '국민의정부'가 앞서 몸소 실천한 바에 대한 고백에 불과했다. 자본주의 경제위기에서 집권한 '부르주아 민주정부'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생명줄과 독점자본의 생명줄을 맞바꿨고 남한 자본주의 체질을 전반적으로 바꿔버렸다.

대학원 진학 예상을 깬 철호는 당시 정부가 적극 지원을 시작한 '신지식산업'인 IT업계에 취업했고 수년 간 여기저기 회사를 옮기며 밤을 새워 일했다. 그동안 '철봉파'의 총무는 몇 차례 다른 친구들로 바뀌었고 집에도 잘 못들어오던 '원조 총무' 철호는 '철봉파' 모임에는 한동안 통 나오질 못했다. 나를 비롯한 '철봉파' 친구들은 늘 줄담배를 피우던 철호에게 "밤새 야동 그만보고 이제 집으로, 친구들 곁으로 돌아오라" 선동질을 해댔다. 하지만 복잡한 하도급 다단계 체제에서 우리의 '물리학도' 철호가 임금도 체불되며 밤새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는 미처 몰랐다.

나도 회사에 취직하고 오후 외근길에 찾아간 21세기 첫 해의 철호의 어둑한 사무실에서 본 여전한 줄담배와 캔커피, 종이컵 믹스커피의 풍경이 아련하다. 아마도 그 회사에서도 변함은 없었을 임금 체불과 그럼에도 '신지식산업'의 선두주자가 되고자 꿈을 꾸었을 '철봉파'의 이과적 두뇌 철호를 회상한다. 역경을 딛고 창업신화를 쓰면서 신기술 첨단과학을 통해 인류의 문명을 혁신하기 위해 투신했던 수많은 '20세기말 IT 소년'들을 생각한다. 지금은 변화주기가 더 빨라진 신기술에 밀리고 있을 수도, '과학자'의 꿈에서 이탈하여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 그 빛나던 '두뇌'들의 지난날을 새삼 돌아본다.

아인슈타인의 부고기사를 읽고 그 천재의 꿈을 이어가고자 했던 여덟살의 미치오 카쿠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끊임없이 아인슈타인의 뒤를 이으려던 두뇌들이 수많은 별처럼 빛났으리라. 우주의 별처럼 많았을 그 천재들의 천체에서 그 언젠가 저멀리 작게 빛났을 우리 '철봉파 원조 총무' 철호의 오래전 지난날이 역시 아련하다.

***

1. [단 하나의 방정식(The God Equation)](2021), 미치오 카쿠, 박병철 옮김,<김영사>, 2021.
2. [세계관 - 당신 지식의 한계](2018), 리처드 드위트, 김희주 옮김, <세종>, 2020.
3. [반도체 기술 및 제조공정(Semiconductor Technology & Fabrication)], 유철호, <광운대학교 물리학과>,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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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기의 달이 뜨면 - 1940 런던 공습, 전격하는 히틀러와 처칠의 도전
에릭 라슨 지음, 이경남 옮김 / 생각의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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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기의 달'이 뜨던 시간 : 1987~1989년
- [폭격기의 달이 뜨면](2020), 에릭 라슨, 이경남 옮김, <생각의힘>, 2021.


1.

민수가 어느 순간 변했다.
중학교 때까지 나랑 단짝이었던 친구 민수가 어느날부터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사실 초등(국민)학교 때부터 중학교 내내 나의 친구는 민수 하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도, 일요일에도 거의 나는 민수네 집에서 주로 놀았다. 호기심 많은 '똘똘이 스머프'를 닮은 안경 낀 민수는 책을 많이 읽어서 아는 게 참 많았다. 전반적으로 성장이 늦은 나는 녀석을 따라다니기만 해도 똑똑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한 1990년에 민수와 나는 학교 철봉대 밑에서 다른 중학교 출신의 친구들을 여럿 만나기 시작했고, 열댓 명의 친구들이 모여 '철봉파'를 결성했을 때 민수는 더 이상 철봉대 밑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변한 건 민수가 아니라 나였는지도 몰랐다.

민수의 특기는 1,2차 세계대전의 역사였고 주특기는 나치 독일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의 전쟁기계 이야기였다. 중학 시절이던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나는 민수가 들려준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이야기와 녀석이 보여준 전투기/전차/군함 '대백과 사전'을 함께 읽으며  당시 <해문> 출판사의 '팬더 종이공작' 시리즈로 나온 독일의 킹타이거, 판저, 롬멜 습격포 전차와 포케 볼프, 메셔슈미트 전투기, 비스마르크 전함 등의 종이공작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중학교 때는 둘이 집에서 수많은 종이공작과 프라모델을 만들고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행적을 쫓느라 다른 친구들과 뛰어놀 시간이 없었다. 
고등학교에 같이 진학한 초반은 토요일 하교 후에 민수방에 가서 당시 채널 2번 'afkn' 미군방송에서 하던 'WWF' 미국 프로레슬링을 보고 따라하느라 한때 여념이 없었는데, 내가 더이상 쉬는 시간 복도에서 '랜디 더 마초맨 새비지'의 '빅 엘보 드롭'과 '릭 더 모델 마텔'의 '보스턴 크랩 홀드'를 사용하지 않을 즈음인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어느 순간부터 민수를 철봉대에서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건대,
역시 변한 건 민수가 아니었다. 
성장이 늦었던 내가 부쩍 컸고 더 많은 친구들을 찾으면서,'단짝'이었던 내가 변했던 거다.


2.

"... 크고 정말 끔찍한 '폭격기의 달(bomber's moon)..."
- 1940. 11. 15. 보름달밤, 런던, '매스옵저베이션'의 어느 일기기록원.


중학 시절, 나는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신비주의, 아리아(게르만) 순혈주의 등을 읽었지만, '파시즘' 일반은 잘 몰랐다. 나는 오로지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전쟁기계에만 관심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보다는 추축국 독일과 더 나아가 일본의 전투기와 전차, 전함과 항공모함에 평균 이상으로 광분했다. 욕정이 넘쳐 '단순무식폭력'으로 점철된 관심사였으나 머리가 없으니 결코 사상적일 수 없었던 당시의 어린 나에게 훗날 욕정은 좀 줄고 머리가 조금 생긴 후의 나는 감사해 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 멋진 전쟁병기들의 위용이 아니었다면 나는, 몇 년 후 '네오 나치'의 광신도나 '일베'의 원조가 되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신비주의적이고 음모론적인 한편 교조적이고 편집증적인 측면이 있었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밀교'와 '오컬트'의 그림경전인 오기노 마코토의 일본만화 [소년 공작왕]을 좋아했고, 세상만사에는 온갖 주술적 '음모'가 숨어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어딘가에는 아직도 '성배'와 '롱기누스의 창'을 찾아다니는 히틀러의 후예들이 있을 것만 같았다. 역시 다행인 건 나는 '악당(The Vile)' 편이 아니라 이를 막는 '선한(splendid) 공작왕' 편이었다는 거다. 물론 '공작왕'은 선악의 짬뽕이었지만 결국에는 착하게 살았다.
아무튼, 1987~1989년 중학교 다니던 당시 내 머리 위로는 독일의 단발 전투기 포케 볼프와 메셔슈미트, 쌍발 이상인 융커스와 스투카 폭격기가 매일 날아다녔다.


미국의 논픽션 작가 에릭 라슨(Erik Larson)의 2020년 논픽션 소설 [폭격기의 달이 뜨면]의 제목을 페이스북에서 보았을 때, 작가와 내용, 목차 따위를 더 알아볼 필요는 없었다. 제목만으로도 바로 구입해야 할 책이었다. 원제는 [The Splendid and The Vile]이니 번역하면 '천사와 악마' 또는 '선과 악' 정도 되겠으나 2021년 국역판 제목 [폭격기의 달이 뜨면]은 책을 덮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너무 잘 지은 것 같다.

배경은 1940년 5월부터 1941년 5월까지 독일의 '런던 대공습' 1년의 기록이다. 독일 공군의 '보름달 밤' 대공습으로 시작된 이 전투는 영국공군의 독일 공습으로 주거니 받거니 밝은달이 뜨는 밤마다 수십만 대의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수천 회의 출격으로 기록된다. 당시 과학으로는 단발 전투기가 한 번에 90시간 정도 밖에 못 날았으니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아주 많은 전투기들이 떴다 내렸다를 번갈았을 게다. 수십만 톤의 독일제 고폭탄은 '여리고의 나팔'이라 불리던 매우 기분 나쁜 공포를 수반하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영국의 런던과 주요 도시들에 떨어졌지만 바로 터지지 않은 폭탄도 많았단다. 일제시대 윤봉길 의사가 던진 도시락 폭탄 중 하나는 터지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여럿이지만 1940년 5월 영국 수상이 된 윈스턴 처칠이 중심인물이라 봐도 무방하다. 처칠의 전기나 관련 기록은 많으나 에릭 라슨의 이 논픽션 소설은 처칠과 그 일가 및 측근과 주변인물들의 육필기록을 소재로 하고 당시 영국의 여론조사 같은 '매스옵저베이션(Mass-observation)' 기록원들의 '일기'를 곁들여 처참한 런던 대공습을 매우 '처칠스럽게' 묘사하고 서술한다. 20세기 '제국주의' 전쟁의 끝판왕이었던 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의의 따위는 집어치웠다. 오로지 처칠과 그 관련 인물들의 일기장을 유머러스하게 조합했다. 18세기의 에드워드기번이 4~5세기 고대 로마를 개그어린 시선으로 조망했듯이.


"그리고... 우리는 깨진 병을 집어들고 싸울 것이오. 가진 게 빌어먹을 그것 밖에 없으니까."
- 1940. 6. 4. 하원 연설, 처칠.

1940년 독일의 대공습 개시 국면에서 영국 총리가 된 처칠은 '열정'과 '의지', '용기'와 '고집', 그리고 '유머'의 대명사와 같다. 독일에 의해 북유럽과 프랑스가 파죽지세로 항복하고 수만의 영국군들이 물자는 다 버리고 몸만 빠져나온 '덩케르크 대철수' 이후의 고립된 상황에서도 '대영제국'의 '결사항전' 의지를 고집스럽게 사수했고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좌충우돌하며 '유머'와 '개그'를 잊지 않았던 처칠과 영국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공습으로 수천 명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옥상에서 현장을 지켜보겠다고 우기며 잠옷 같은 걸 입고 술 마시다가 굳이 올라가겠다고 우기는 처칠과 전쟁의 와중에도 역사를 인용하며 온갖 역설과 반어법을 구사하는 그의 연설에서 다소 초현실적이지만 '여유' 같은 게 보이기도 한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18세기 영국의 대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을 자주 읽었다는 보수정치인 윈스턴 처칠의 면모다. 그는 '자유'를 앞세웠지만 '대영제국'의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보수당 정치인이자, 언제 어느 때든 에드워드 기번의 본을 따라 '유머'로 역사를 받아치는 정치 개그맨이었다. 생긴 것도 어찌보면 우습다. 진보정치인이라 결은 다르지만 역경 속에서도 늘 여유를 잊지 않던 우리의 노회찬 의원의 넉넉한 웃음이 교차된다.

영국인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참전 또는 물자지원을 끈질기게 요청하는 그의 연설은 아마도 그 바닥에서는 매우 유명했던 것 같다. 이 책에서는 그의 연설은 물론 그의 비서와 막내딸, 폭격의 공포에 둘러싸인 영국사람들의 목격담과 일기의 구절들이 정확히 처칠 식으로, 아니 기번 식으로 즐비하다. 예를 들면, 1941년 4월 16일 '폭격기의 달'인 밝은 보름달 아래 런던 공습의 대참사 속에서 한 가톨릭 사제는 "어느 술집 당구대 아래에서 술집 주인과 가족들의 고해를 받았고", 처칠의 망나니 아들인 랜돌프의 가엾은 아내이자 스물한살의 조숙한 며느리 파멜라와 미국 대사 해리먼은 어느 방에 들어갔는데 "폭탄이 떨어질 때 옷도 흘러내렸다"는 식이다. "대공습은 누군가와 침대로 들어가기에 아주 좋은 구실이지"라는 누군가의 사후평가를 남기면서 말이다. 물론 상류층 얘기겠지만 당시의 젊은이들은 대공습의 참사 속에서 내일 살아있을지 어떨지 기약이 없었기에 오늘 만난 사람과 바로 침대로 들어갔고 처칠의 막내딸은 공습을 피해 사교파티를 전전하며 일기를 남겼다. 작금의 코로나 재난 중에도 사람들은 변함없이 놀고 먹고 자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처칠과 전시내각 관료들 또한 대공습 1년간 주말마다 알고보면 폭격으로부터 별로 안전하지도 않은 체커빌 별장으로 가서 새벽까지 술판을 벌이며 국사를 논한다. 세월호 참사날 박근혜의 '7시간'은 찜쪄먹는 이러한 비상식적 행태들과 기록들은 아무리 옛날옛적 이야기라 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희대의 사이코 히틀러도 똑같은 미치광이였지만 전시에 처칠처럼 참사현장 순회하면서 목욕물 데우라고 짜증내거나 매일 술담배에 쩔어있지는 않았다고 하니 이 처칠이라는 위인은 정말 기이한 인물이다. 

근거도 없이 용감한 처칠이 결국 영국을 구하고 전시내각을 성공적으로 이끈 총리로 남은 이유는 아무래도 히틀러의 전략적 착오 덕분이 아닌가 싶다. 영국왕립공군(RAF)의 전력이 독일공군(루프트바페)보다 우세하지도, 처칠의 전략이 치밀한 것도 아니었다. 독일 '제3제국군'의 전례없는 총공세의 효과를 너무도 맹신한 히틀러와 공군책임자 헤르만 괴링의 자만으로 영국의 항전의지를 얕보고는 1941년 6월 전선을 소련침략의 동부로까지 확대한 독일의 전략적 오류가 주원인이었다. 이 동부전선으로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인해 독일의 전력은 영국의 서부전선과 리비아 사막의 남부전선 등으로 분산되었고 런던 대공습은 처참했지만 1년 간만 집중되었다. 에릭 라슨의 소설 [폭격기의 달이 뜨면]이 바로 이 1년의 기록인 것이다. 
1923년 '뮌헨반란'의 실패 후 히틀러와 함께 '감방'에 가면서부터 그의 최측근으로 유명해졌으며, 게르만 지정학자 칼 하우스호퍼로부터 하틀러와 함께 '두 마리의 젊은 독수리'로 불리던 나치 독일 명목상 '2인자' 루돌프 헤스의 어이없는 1941년 비행쇼와 엽기행각은 역시 나치 파시스트들의 신비주의적 광기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3.

"나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외에는 드릴 게 없습니다."
- 1940. 5. 14. 하원 연설, 처칠.

전시에나 영웅인 이 정치개그맨 처칠은 좌충우돌에 괴짜라 '대영제국'을 지킬 의지와 용기만 충만했지 정작 조국에 바칠 건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말고는 없었다. 사실 그 누군들 조국과 역사 앞에 그 이상을 바칠 수 있을까마는, 위기의 상황에서 정치 지도자가 저런 연설을, 그것도 정치적 반대파가 째려보고 있는 하원에서 한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처칠은 저 말을 대공습 1년 후 독일에 더 항전할 것인가 타협할 것인가 여부를 본인의 신임투표와 연계하여 의회에 부친 1941년의 하원에서 다시 반복한다. 그리고는 압도적인 찬성표로 재신임을 받고 미국의 지원을 받았으며 수많은 영국인들의 사기를 높였다. 숱한 폭격 현장을 돌아다니며 영국인들의 사기를 북돋는 장면은 의회의 정적들을 제치고 민중들과 직접 만나겠다는 정치적 연출이기도 했겠지만 처칠 또한 지속되는 대공습을 버티면서 총리를 환호하는 영국 민중들로부터 감명을 받고 눈물을 훔친다. 중년 여성 뿐만 아니라 젊은 여성에게도 인기가 많다고 그 와중에 개그를 치는 처칠은 말한다. 본인은 "영국인들의 용기를 높인 게 아니라 그들의 용기를 모은 것 뿐"이라고.
물론, 대의정치라도 주권은 인민에게 있는 터라 독일이 항복한 1945년 5월 이후 치러진 7월 총선에서 처칠의 보수당은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에 패해 정권을 내어준다. 
그럼에도 이 괴짜 정치개그맨 처칠은 '삼국지' 조조처럼 '난세의 영웅'임에 틀림은 없다.


1년 간 런던 대공습으로 죽거나 다친 영국인이 5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대참사를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기억해도 되는가 싶기도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1987년부터 1989년까지의 까까머리 중학생으로 돌아가 친구 민수와 함께 영국의 전투기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를 소환했고, 하늘에서 이와 맞서는 독일의 메셔슈미트의 매끈한 몸체를 더듬었다. 영국을 구한 스핏파이어가 독일 폭격기 융커스의 뒷꽁무니를 쫓으면서 이 대형 폭격기가 사방으로 퍼붓는 기관포를 피해 공격하는 상상을 하다가 처칠의 막내딸 메리가 남긴 하찮은 일기들을 수차례 놓치기도 했다.

결국 내가 변해서 철봉대를 떠난 나의 첫 친구 민수가 생각나는 이 밤하늘에 '폭격기' 융커스가 메셔슈미트의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공습해 올 것 같은 보름달이 떠오른다.

***

1. [폭격기의 달이 뜨면(The Splendid and The Vile)](2020), 에릭 라슨, 이경남 옮김, <생각의힘>, 2021.
2.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2012), Donny Gluckstein, 김덕련 옮김, <오월의봄>, 2021.
3. [제2차 세계대전](2014), 게르하르트 와인버그, 박수민 옮김, <교유서가>, 2018.
: 독일 출신 유대인으로 미국의 군사역사학자인 게르하르트 와인버그의 간략한 서술로 2차 세계대전의 전체를 조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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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을 읽던 시간 : 1993~1995년
- [철학노트] /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 [제국주의론] / [국가와 혁명] 외


"통일물의 분열, 그리고 통일물의 모순되는 성분에 관한 인식은 변증법의 '본질'이다... 과학사를 통해 분명히 검증... 수학에서는 +와 -, 미분과 적분. 역학에서는 작용과 반작용. 물리학에서는 양전기와 음전기. 화학에서는 원자의 화합과 분해. 사회과학에서는 '계급투쟁'. 대립물들의 동일성이란 자연(여기에서는 정신과 사회도 포함)의 모든 현상과 사건들 안에 있는, 모순되고 상호배제하는 대립된 경향들을 인식(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의 모든 사건들을 그 '자기운동'에서, 그 자발적 발전에서, 그 살아있는 생활에서 인식하는데 필요한 조건은 그 모든 사건들을 대립물의 통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상호배제하는 대립물의 투쟁은 발전과 운동이 절대적이듯이, 절대적이다... '변증법'은 다름아닌 (헤겔과)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이다."
- 레닌, [철학노트], <6장. 변증법의 문제에 대하여>, 1914.


1.

- 나는 노동자의 아들이니까.

20대 내내 여차하면 내가 어금니 위에 올려놓고 혼자 잘근잘근 씹던 말이었다. 
나보다 똑똑하거나, 나보다 말을 잘하거나, 아니면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며 줄곧 혼자 내뱉던 말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진심 '보수'였다. 어른들 말씀대로 세상에서 김일성이 제일 싫었고, 사립대학 병설 사립중고등학교인 모교에서 알려준 대로 '전교조' 선생님들도 싫었다. 학교에서 학생들 패는데 비범한 기술과 특별한 조예를 갖춘 선생들은 어째 모두 '전교조' 가입했다는 소문이 몇년간 횡행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사회비판적이었던 정치경제 선생님은 다행히 제자들을 때리진 않았지만 '또라이'로 소문났다. 아마도 그 선생님도 '전교조'였을 것 같았는데, 사립고등학교의 그 어떤 교사도 '전교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전교조'는 말없이 음험한 소문으로 퍼지던 '학교괴담'과도 같았다. 우리 학교 운동장 지하에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전설과도 같이.
때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였다.

심지어 중학교 시절 나는, 2차대전의 무솔리니 파시즘과 히틀러 나치즘에도 관심이 많았다. 독일의 킹타이거(티거)나 야크트판더 전차와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 전함, 융커스 폭격기 및 메서슈미트 전투기 등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도 '친일파'는 싫었던지 일본군국주의 전투기와 전함은 숨어서 좋아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딱 '수구꼴통'이었는데 당시의 나는 아직 애기였으므로 다행히 아직 '정치'에 관심은 없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오락실이나 학교운동장에서 보냈다.

스무살이 되어 대학 오리엔테이션 참가하는 버스에서 자기소개 시간에 알았다.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일상에는 없다는 것을. 지금 생각해보면 잘 보이지 않았거나 얘기하지 않았던 것일 테지만, 아무튼 당시 내가 보기엔 그랬다. 고만고만한 동네친구들만 득시글했던 학창시절과 달리 스무살의 세상은 나보다 나이 많은 재수생과 삼수생, 군대까지 다녀온 형들도 많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친구들은 각지의 다양한 사투리로 가끔 통역이 필요하기도 했으며, 왠지 다들 부잣집 자제들 같아서 가난했던 나는 겉으로는 결코 아닌척 했지만 속으로 위축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나는 우리집을 보고 친구 아닌 동급생들이 뒤에서 수군대진 않을까 찜찜해 하지 않아도 되었고 어디 가서 주눅들지 말라고 만원짜리 몇 장을 자주 쥐어주시던 가난했지만 통큰 어머니가 계셨다. 우리 동네가 아닌 학교 앞에 가면 적어도 나와 대학 사람들은 모든게 '동등'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영어를 무척 좋아했다. 전국 모의고사에서 국어와 영어만은 1%였다. 나는 '영문과' 말고 다른 과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직장생활하면서 내 인생에도 '법대'가 있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싶기도 했고, 마흔이 넘어 '모든 책이 다 역사책'이라는 깨달음에 왜 '사학과'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쉽긴 했다. 하지만 내 지론은,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한들 난 역시 똑같이 살았을 거라는 거다. 다시 돌아간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여전히 그때의 나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좋아했던 나는 '문학'은 아직 잘 몰랐고, 1993년 2월의 대학 오리엔테이션 버스 안에서 만난 같은과 동기들은 다들 나보다 잘나 보였다. 충남 태안에서 온 공부 잘해 보이는 친구는 '전교조' 선생님한테 배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불렀고, 딱 서울 뺀질이 친구들은 나보다 훨씬 잘생긴 데다가 말도 품위있게 잘했다. 경남 마산 출신 친구는 얼굴이 철면피 자체로 워낙 여기저기로 나대는 바람에 '정박아'라는 별명을 바로 득템하기도 했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출신임에도 시골 어디서 왔느냐, 삼수생이냐 초면에 숱한 질문을 받던 나 또한 동기들처럼 잘나 보이고 싶었지만 내세울 게 없어 최신곡 랩이었던 김건모의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전날 내내 외워서 자기소개 시간에 불렀다. 관광버스 앞뒤를 왔다리갔다리 하면서 읊은 그 노래는 반응이 나쁘지 않았고 이후 일년 내내 술집과 엠티 등지에서 나는 그 노래를 줄창 불러댔다. 
나의 궁핍함과 열등감은 가수 김건모가 대충 상쇄시켜주었지만, 영어를 좋아했던 나는 '영자신문사'에 들어갔고 신문기자를 꿈꾸고자 했다. 영자신문사 시험을 봤고 합격하여 간 첫 신고식에서 신문사의 전통과 같았던 학군단 선배들이 시키는 말도 안되는 행태에 기겁을 한 나는 바로 영자신문사를 때려치웠다. '수구꼴통' 기질에 지금으로 치면 '일베' 끼가 다분하던 내가 보기에도 영자신문사의 쓰질데기 없는 역사와 전통은 참고 봐줄 수가 없었다. 군부독재에서 벗어난 '문민정부'에서 군사문화의 잔재가 여전히 횡행한다는 게 이해가 안되었고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대학의 선배들에 비하면 영자신문사의 전통이 너무도 비루해 보였다. 저렇게 영어공부나 하다가 신문기자가 되어봐야 뭐하나 싶었고 학과의 선배들과 잘나보이던 자유로운 영혼의 동기들 얼굴이 아른거렸다. 아마도 91, 92학번 선배들의 후배 '의식화'가 꽤 성공적이었던지 파시즘을 동경하던 '수구꼴통'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빌어먹을 영자신문사 덕분에 급격히 '좌경화'되었다. 신고식 며칠 후 사직서를 내는 나에게 이렇게 그만두면 후회할 거라던 영자신문사의 편집장의 말과 반대로 난 그 신문사 일을 계속 했으면 두고두고 더 크게 실망했을 거였다. 

문과대로 다시 돌아온 탕아인 나를 학과 선배들과 동기들은 반겨주었고, 난 다시 술집과 과 학생회 행사에서 소주병에 꽂은 숟가락을 김건모 마이크처럼 잡고 "쓸픈 노래는 듣고 싶지 않아~"를 불러 제꼈다.
다들 반갑고도 즐거운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전국 각지에서 모인 나보다 잘나고 똑똑하고 말 잘하고 집도 부자인 친구들에게 가진 모종의 열등감은 여전했고, 오히려 더 강해졌는데 나를 버티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말이 이 말이었던 거다.

'나는 노동계급의 아들이니까', 라는.


2. 

"국가가 화해불가능한 계급 적대감의 산물이고 사회의 상부에 위치하면서 '사회로부터 자기를 스스로 점점 소외시키고 있는' 권력이라면, 억압받는 계급의 해방은 '폭력혁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창출했고, 또한 이러한 '소외'를 이루고 있는 몸체인 국가권력기구의 '파괴를 통하지 않고서는' 계급해방이 불가능하다."
-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결과적으로, 나는 '영어'를 좋아했지만 '영문학' 공부는 안 했고, 영자신문사를 초단기간에 때려치우면서 신문기자의 꿈은 바로 접었다. 나는 영문과 내 철학학회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우정어린 '과학적 사회주의'를 함께 읽었고 숱하게 데모대 뒤 꽁무니를 쫓아다녔지만 전경한테 두들겨 맞고 달려갈까봐 무서워 제일 먼저 내빼기 일쑤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형님 덕분에 어느새 '노동자의 아들'에서 '노동계급의 아들'로 진화한 나는 아쉽게도 투쟁의 최전선에 파이프를 들고 서 있는 '전사'는 못 되었다. 똑똑하지도, 말을 잘하지도 못하고, 부자도 아닌 나는 '전투력' 조차도 없어 술만 마시다가 돈도 없으니 친구 자취방 앞 골목에서 새벽 깡술을 마셨다. 그때 당시 하늘과 같던 87학번 선배가 지나던 길에 '정박아', '지진아', '벅스터(내가 벅스터다)' 우리 셋의 깡술판에 앉아 '파시즘'과 '독재'의 차이가 뭐냐 물었고 횡설수설하는 우리 삼인방에게 경주 출신의 그 선배는 파시즘과 독재의 차이는 '폭력'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라면서 "공부 쫌 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표표히 사라졌다. 
멋졌다. 
그 순간 '나도 공부 쫌 해서 저런 선배가 되자'고 나는 내심 결심했던 것 같다. 

대학 1학년 때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선생의 우정이 깃든 글들을 읽어 보았다. 물론 마르크스의 주저 [자본론]은 군에서 제대한 1998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읽었지만 그 외 다른 저작들은 대부분 1993년에 읽었다. 이제 '공부 쫌' 하기 위해서는 선택해야 했다. '철학'이나 붙잡고 아는 척이나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선배처럼 후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실천'을 할 것인가. 
그렇게 1994년의 나는 '레닌'을 읽기 시작했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을 이끈 사회주의 혁명가다. 나보다 말도 잘하고 오지랖도 넓었던 '정박아'는 1902년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들고 다녔지만, 혼자 틀어박혀 자습을 했던 나는 1908년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읽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불꽃(이스크라)' 같은 혁명가의 지하조직과 실천을 불같이 토했지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레닌은 평생 관념론과 싸운 유물론자 엥겔스의 전통에 따라 당대 오스트리아 마흐주의로 대표되는 사이비 유물론인 '경험비판론'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사실 양자역학의 현대과학에서 보면 20세기 초 레닌의 교조적 유물론보다 마흐의 '경험비판론'이 더 설득력 있을 수도 있겠는데 어쨌든 오스트리아 '경험비판론'은 지금이 아닌 20세기 초의 이론이었고 당시 다수 노동계급이 상속받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해 반박되어야 했다. 레닌은 선학인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사이비 사회주의자 오이겐 뒤링 씨를 신랄하게 까댄 [반뒤링론]의 전통을 이으며 '경험비판론'의 사이비 과학주의를 거의 욕설까지 섞어가며 짓밟아 뭉개고 있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후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가지 전술]을 쓴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2단계 혁명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은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1단계를 우선 거쳐야 한다는 멘셰비키의 주장을 레닌은 역시 '반동'으로 몰면서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혁명 단계에서부터 노동자-농민 독재의 전술을 펼쳐야 한다는 매우 급진적 주장을 펼친다. 이는 마르크스가 1848년 프랑스 혁명에서 계급투쟁 양상을 현실적으로 분석한 전통을 잇는다. 즉 부르주아지는 다수 프롤레타리아트를 이용하여 집권하지만 이내 다수 노동계급을 배신하는 '반혁명'의 시간이 도래하므로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 다수의 독재와 헤게모니가 강력하고 광범위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1920년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이나 1940년대 마오쩌뚱의 [신민주주의론]과도 맞닿는 면이 있지만, 20세기 벽두 러시아 차르체제에서 레닌의 시간은 '폭력'에 의한 즉각적 혁명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이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러시아 레닌주의와 서유럽 카우츠키의 논쟁을 읽어야 할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가 '의회주의'와 동일시되던 1990년대 초반의 대학가에서 칼 카우츠키는 비록 마르크스주의 '교황'의 권위에도 불구하고 널리 읽히지 않았다. 이후 1999년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산물인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대중투쟁과 의회전술이 결합되어야 하고 민주주의가 단순한 전술이나 운영원리가 아니라 운동의 중심이 된 이후에야 나는 카우츠키를 읽었다. 1994년의 내게 카우츠키는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의 '배신자' 또는 '배교자'로 낙인 찍었기 때문에 안중에 없었는데, 이후에 보니 지금의 진보정당 노선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카우츠키의 강령이었던 것이다. 

카우츠키는 투사나 정치인이 아니라 이론가였다. 그는 엥겔스의 '제2인터내셔널' 교리대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생산력의 사회화와 생산관계의 사유화의 모순에 의해 생산양식이 사회화되는 사회주의 경제로 자연이행된다는 매우 낙관적인 관점을 기본으로 한다. 노동자 보통선거권이 실현되던 당시 서유럽의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가능한 시각이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러시아 차르의 압제 아래 살아온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농민이 의회에서 다수를 점할 방법도, 가능성도 없었으니 민주주의를 보는 방식도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즉, 카우츠키에게 보통선거로 노동계급이 다수를 점하는 의회민주주의가 사회민주주의였다면, 레닌주의자에게 민주주의는 한 계급의 독재에 다름 아니었다. 레닌의 사회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였다. 따라서 부르주아 독재정권을 타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다수대중에 의한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실제로 1994년 레닌을 읽던 나에게 민주주의는 독재와 구분되지 않았다. 계급투쟁의 관점에서는 논리적으로 적합한 권력론이었던 것이다.

이제, '국가론'과 '혁명론'은 불가피했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레닌을 읽는 이유는 체제를 전복하는 '혁명'을 읽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1916~17년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종착점이었다. 민주주의는 독재의 다른 말이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의해 구축된 국가기구는 철저히 파괴되어야 하고 프롤레타리아 다수대중 독재에 의해 다시 건설되는 것. 이것이 [국가와 혁명]이라는 레닌의 미완의 저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실제로 레닌은 마지막 장을 쓰기 전에 "난 이제 그만 펜을 놓고는 총들고 혁명하러 나간다~"며 책을 마치고 있다. 매우 위험했지만 '노동계급의 아들'인 스물한살의 나에게 이만한 매력적이고 고마운 인물과 사상이 있을 수 없었다.

"모든 부르주아 국가는 그들의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고 끝까지 그 본질을 분석해 보면 '부르주아지의 독재'라는 동일한 본질이 드러난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풍부하고 아주 다양한 정치적 형태들을 창출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동일하게 될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이다."
-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3.

"헤겔의 논리학 전체를 철저하게 연구하지 않고 또 이해하지 않고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특히 제1장(상품)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반세기를 경과하였지만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 레닌, [철학노트], 1914.


1995년 10월에 군대 가기 전,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했을 때 나와 놀아주는 선후배나 동기는 더더욱 없었다. 입대 전까지 나는 아마도 마오쩌뚱의 [모순론]과 [지구전론], [신민주주의론]을 읽었지만 그 속에 온통 레닌 뿐이었다. 19세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럽식 사회주의가 1917년 러시아 억압 문명에서 레닌주의로 실현되었고 1949년 중국의 유교 문명에서 마오쩌뚱주의로 실현되었기에 내 사상의 경로는 마오주의로까지 가야했지만 사실 그리 정치적이지 못하고 실천적이지도 못했던 나는 레닌에서 멈췄다. 더구나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주체사상'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인성론'이니 '품성론' 따위를 거론하며 주석을 옹립하고 세습시키는 북조선은 애초에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마오주의까지 가지 못하고 1995년까지도 레닌에 머물렀던 건, 그의 [철학노트] 때문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목전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앞세웠던 '배신자' 카우츠키의 후예들 대부분이 전시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지며 국수주의(쇼비니즘) 제국전쟁을 옹호하던 그 암울한 시대에 레닌은 마르크스가 그랬듯 대영도서관에 틀어박혔다. 노동자 보통선거권으로 의회에 들어간 진보정당 의원들 중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소수였다. 카우츠키도 전시공채 법안에 반대하며 독일 사회민주당의 분당을 이끌었지만 법안에 찬성한 다수 사회민주당 의회주의자들은 카우츠키의 사회민주주의 후예들이었다. 
1914년의 레닌은 이들 모두가 [자본론]을 오독했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니었다고 규정했다. 레닌은 헤겔의 [대논리학]을 다시 연구하면서 그 거대 관념론 체계 속에서 '유물론' 사상을 읽어내고자 했다. 변증법적으로 전도되는 그 유물론('변증법적 유물론')의 혁명적 성격을 규명하지 못하는 한 "어느 누구도([철학노트])"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얼마 동안이었을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1914년의 암울한 제국주의 전쟁의 세계 정세에서 레닌은 제국주의 심장 런던의 도서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고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는 물론 헤겔 철학을 다시 읽으며 '유물론'을 재정립하고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의 칼날을 갈았다.

1916년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레닌은 '독점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 [제국주의론]을 썼는데 사실 볼셰비키 최고의 경제두뇌 부하린의 '제국주의 이론'을 따른 것이지만 레닌 특유의 신랄함과 이론적 단순화의 미학을 담고 있어 내가 가장 최고로 치는 레닌의 저작이다.

한편, 1920년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은 소비에트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논쟁서라 집권세력의 변명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영어를 좋아했지만 영문학은 공부하지 않았고 그래도 문학은 좋았으나 철학책을 들고 다녔던 이십대 초반의 나는 그렇게 혁명가 레닌의 1914년 [철학노트]에서 멈추고 말았다.
엄밀히 말하면 레닌의 [철학노트]는 정식 출간을 위한 저작이 아니라 자습을 위한 학습노트였고 나는 '혁명가'로서의 레닌이 아닌 '철학자'로서의 레닌을 읽었다. 
잠시의 공백 후 1998년 내게 알튀세르의 시간이 오기 전까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무엇을 읽든 내게는 언제나 레닌이 보였다.

레닌을 읽던 시간, 
1993년부터 1995년 10월까지의 이야기다.


***

1. [철학노트](1914), 레닌, 홍영두 옮김, <논장>, 1989.
2.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레닌, 박정호 옮김, <돌베개>, 1992.
3. [무엇을 할 것인가 -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1902), 레닌, 최호정 옮김.
4.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1905), 레닌, 이채욱/이용재 옮김, <돌베개>, 1992.
5. [제국주의 –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1916), 레닌, 박상철 옮김, <돌베개>, 1992.
6. [국가와 혁명](1917), 레닌, 김영철 옮김, <논장>, 1994.
7.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1924), 레닌, 김남섭 옮김, <돌베개>, 1989.
8. [민주주의와 독재](1976), 에티엔 발리바르, 최인락 옮김, <연구사>, 1988.
9. [에르푸르트 강령](1891), 칼 카우츠키, 서석연 옮김, <범우사>, 2003.
10. [프롤레타리아 독재/테러리즘과 공산주의:혁명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1918), 칼 카우츠키, 강신준 옮김, <한길사>, 2006.
11. [신민주주의론](1940),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12. [실천론/모순론](1937),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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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2-01-15 2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 오는 밤~ 잠은 안 오고~ 괜스레 마음만 설레~ 안녕하세요? 1학년 때 두 번 달린 쪽팔린 기억이 있습니다.. ㅋ

beatrice1007 2022-01-17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역시 ˝쓸픈 노래는~˝ 다시 돌아가도 전 똑같을 거라는 거. ㅋ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 - 러시아어판 완역 레닌 에센스 1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지음, 최호정 옮김 / 박종철출판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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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을 읽던 시간 : 1993~1995년
- [철학노트] /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 [제국주의론] / [국가와 혁명] 외


"통일물의 분열, 그리고 통일물의 모순되는 성분에 관한 인식은 변증법의 '본질'이다... 과학사를 통해 분명히 검증... 수학에서는 +와 -, 미분과 적분. 역학에서는 작용과 반작용. 물리학에서는 양전기와 음전기. 화학에서는 원자의 화합과 분해. 사회과학에서는 '계급투쟁'. 대립물들의 동일성이란 자연(여기에서는 정신과 사회도 포함)의 모든 현상과 사건들 안에 있는, 모순되고 상호배제하는 대립된 경향들을 인식(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의 모든 사건들을 그 '자기운동'에서, 그 자발적 발전에서, 그 살아있는 생활에서 인식하는데 필요한 조건은 그 모든 사건들을 대립물의 통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상호배제하는 대립물의 투쟁은 발전과 운동이 절대적이듯이, 절대적이다... '변증법'은 다름아닌 (헤겔과)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이다."
- 레닌, [철학노트], <6장. 변증법의 문제에 대하여>, 1914.


1.

- 나는 노동자의 아들이니까.

20대 내내 여차하면 내가 어금니 위에 올려놓고 혼자 잘근잘근 씹던 말이었다. 
나보다 똑똑하거나, 나보다 말을 잘하거나, 아니면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며 줄곧 혼자 내뱉던 말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진심 '보수'였다. 어른들 말씀대로 세상에서 김일성이 제일 싫었고, 사립대학 병설 사립중고등학교인 모교에서 알려준 대로 '전교조' 선생님들도 싫었다. 학교에서 학생들 패는데 비범한 기술과 특별한 조예를 갖춘 선생들은 어째 모두 '전교조' 가입했다는 소문이 몇년간 횡행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사회비판적이었던 정치경제 선생님은 다행히 제자들을 때리진 않았지만 '또라이'로 소문났다. 아마도 그 선생님도 '전교조'였을 것 같았는데, 사립고등학교의 그 어떤 교사도 '전교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전교조'는 말없이 음험한 소문으로 퍼지던 '학교괴담'과도 같았다. 우리 학교 운동장 지하에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전설과도 같이.
때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였다.

심지어 중학교 시절 나는, 2차대전의 무솔리니 파시즘과 히틀러 나치즘에도 관심이 많았다. 독일의 킹타이거(티거)나 야크트판더 전차와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 전함, 융커스 폭격기 및 메서슈미트 전투기등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도 '친일파'는 싫었던지 일본군국주의 전투기와 전함은 숨어서 좋아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딱 '수구꼴통'이었는데 당시의 나는 아직 애기였으므로 다행히 아직 '정치'에 관심은 없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오락실이나 학교운동장에서 보냈다.

스무살이 되어 대학 오리엔테이션 참가하는 버스에서 자기소개 시간에 알았다.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일상에는 없다는 것을. 지금 생각해보면 잘 보이지 않았거나 얘기하지 않았던 것일 테지만, 아무튼 당시 내가 보기엔 그랬다. 고만고만한 동네친구들만 득시글했던 학창시절과 달리 스무살의 세상은 나보다 나이 많은 재수생과 삼수생, 군대까지 다녀온 형들도 많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친구들은 각지의 다양한 사투리로 가끔 통역이 필요하기도 했으며, 왠지 다들 부잣집 자제들 같아서 가난했던 나는 겉으로는 결코 아닌척 했지만 속으로 위축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나는 우리집을 보고 친구 아닌 동급생들이 뒤에서 수군대진 않을까 찜찜해 하지 않아도 되었고 어디 가서 주눅들지 말라고 만원짜리 몇 장을 자주 쥐어주시던 가난했지만 통큰 어머니가 계셨다. 우리 동네가 아닌 학교 앞에 가면 적어도 나와 대학 사람들은 모든게 '동등'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영어를 무척 좋아했다. 전국 모의고사에서 국어와 영어만은 1%였다. 나는 '영문과' 말고 다른 과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직장생활하면서 내 인생에도 '법대'가 있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싶기도 했고, 마흔이 넘어 '모든 책이 다 역사책'이라는 깨달음에 왜 '사학과'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쉽긴 했다. 하지만 내 지론은,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한들 난 역시 똑같이 살았을 거라는 거다. 다시 돌아간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여전히 그때의 나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좋아했던 나는 '문학'은 아직 잘 몰랐고, 1993년 2월의 대학 오리엔테이션 버스 안에서 만난 같은과 동기들은 다들 나보다 잘나 보였다. 충남 태안에서 온 공부 잘해 보이는 친구는 '전교조' 선생님한테 배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불렀고, 딱 서울 뺀질이 친구들은 나보다 훨씬 잘생긴 데다가 말도 품위있게 잘했다. 경남 마산 출신 친구는 얼굴이 철면피 자체로 워낙 여기저기로 나대는 바람에 '정박아'라는 별명을 바로 득템하기도 했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출신임에도 시골 어디서 왔느냐, 삼수생이냐 초면에 숱한 질문을 받던 나 또한 동기들처럼 잘나 보이고 싶었지만 내세울 게 없어 최신곡 랩이었던 김건모의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전날 내내 외워서 자기소개 시간에 불렀다. 관광버스 앞뒤를 왔다리갔다리 하면서 읊은 그 노래는 반응이 나쁘지 않았고 이후 일년 내내 술집과 엠티 등지에서 나는 그 노래를 줄창 불러댔다. 
나의 궁핍함과 열등감은 가수 김건모가 대충 상쇄시켜주었지만, 영어를 좋아했던 나는 '영자신문사'에 들어갔고 신문기자를 꿈꾸고자 했다. 영자신문사 시험을 봤고 합격하여 간 첫 신고식에서 신문사의 전통과 같았던 학군단 선배들이 시키는 말도 안되는 행태에 기겁을 한 나는 바로 영자신문사를 때려치웠다. '수구꼴통' 기질에 지금으로 치면 '일베' 끼가 다분하던 내가 보기에도 영자신문사의 쓰질데기 없는 역사와 전통은 참고 봐줄 수가 없었다. 군부독재에서 벗어난 '문민정부'에서 군사문화의 잔재가 여전히 횡행한다는 게 이해가 안되었고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대학의 선배들에 비하면 영자신문사의 전통이 너무도 비루해 보였다. 저렇게 영어공부나 하다가 신문기자가 되어봐야 뭐하나 싶었고 학과의 선배들과 잘나보이던 자유로운 영혼의 동기들 얼굴이 아른거렸다. 아마도 91, 92학번 선배들의 후배 '의식화'가 꽤 성공적이었던지 파시즘을 동경하던 '수구꼴통'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빌어먹을 영자신문사 덕분에 급격히 '좌경화'되었다. 신고식 며칠 후 사직서를 내는 나에게 이렇게 그만두면 후회할 거라던 영자신문사의 편집장의 말과 반대로 난 그 신문사 일을 계속 했으면 두고두고 더 크게 실망했을 거였다. 

문과대로 다시 돌아온 탕아인 나를 학과 선배들과 동기들은 반겨주었고, 난 다시 술집과 과 학생회 행사에서 소주병에 꽂은 숟가락을 김건모 마이크처럼 잡고 "쓸픈 노래는 듣고 싶지 않아~"를 불러 제꼈다.
다들 반갑고도 즐거운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전국 각지에서 모인 나보다 잘나고 똑똑하고 말 잘하고 집도 부자인 친구들에게 가진 모종의 열등감은 여전했고, 오히려 더 강해졌는데 나를 버티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말이 이 말이었던 거다.

'나는 노동계급의 아들이니까', 라는.


2. 

"국가가 화해불가능한 계급 적대감의 산물이고 사회의 상부에 위치하면서 '사회로부터 자기를 스스로 점점 소외시키고 있는' 권력이라면, 억압받는 계급의 해방은 '폭력혁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창출했고, 또한 이러한 '소외'를 이루고 있는 몸체인 국가권력기구의 '파괴를 통하지 않고서는' 계급해방이 불가능하다."
-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결과적으로, 나는 '영어'를 좋아했지만 '영문학' 공부는 안 했고, 영자신문사를 초단기간에 때려치우면서 신문기자의 꿈은 바로 접었다. 나는 영문과 내 철학학회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우정어린 '과학적 사회주의'를 함께 읽었고 숱하게 데모대 뒤 꽁무니를 쫓아다녔지만 전경한테 두들겨 맞고 달려갈까봐 무서워 제일 먼저 내빼기 일쑤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형님 덕분에 어느새 '노동자의 아들'에서 '노동계급의 아들'로 진화한 나는 아쉽게도 투쟁의 최전선에 파이프를 들고 서 있는 '전사'는 못 되었다. 똑똑하지도, 말을 잘하지도 못하고, 부자도 아닌 나는 '전투력' 조차도 없어 술만 마시다가 돈도 없으니 친구 자취방 앞 골목에서 새벽 깡술을 마셨다. 그때 당시 하늘과 같던 87학번 선배가 지나던 길에 '정박아', '지진아', '벅스터(내가 벅스터다)' 우리 셋의 깡술판에 앉아 '파시즘'과 '독재'의 차이가 뭐냐 물었고 횡설수설하는 우리 삼인방에게 경주 출신의 그 선배는 파시즘과 독재의 차이는 '폭력'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라면서 "공부 쫌 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표표히 사라졌다. 
멋졌다. 
그 순간 '나도 공부 쫌 해서 저런 선배가 되자'고 나는 내심 결심했던 것 같다. 

대학 1학년 때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선생의 우정이 깃든 글들을 읽어 보았다. 물론 마르크스의 주저 [자본론]은 군에서 제대한 1998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읽었지만 그 외 다른 저작들은 대부분 1993년에 읽었다. 이제 '공부 쫌' 하기 위해서는 선택해야 했다. '철학'이나 붙잡고 아는 척이나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선배처럼 후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실천'을 할 것인가. 
그렇게 1994년의 나는 '레닌'을 읽기 시작했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을 이끈 사회주의 혁명가다. 나보다 말도 잘하고 오지랖도 넓었던 '정박아'는 1902년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들고 다녔지만, 혼자 틀어박혀 자습을 했던 나는 1908년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읽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불꽃(이스크라)' 같은 혁명가의 지하조직과 실천을 불같이 토했지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레닌은 평생 관념론과 싸운 유물론자 엥겔스의 전통에 따라 당대 오스트리아 마흐주의로 대표되는 사이비 유물론인 '경험비판론'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사실 양자역학의 현대과학에서 보면 20세기 초 레닌의 교조적 유물론보다 마흐의 '경험비판론'이 더 설득력 있을 수도 있겠는데 어쨌든 오스트리아 '경험비판론'은 지금이 아닌 20세기 초의 이론이었고 당시 다수 노동계급이 상속받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해 반박되어야 했다. 레닌은 선학인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사이비 사회주의자 오이겐 뒤링 씨를 신랄하게 까댄 [반뒤링론]의 전통을 이으며 '경험비판론'의 사이비 과학주의를 거의 욕설까지 섞어가며 짓밟아 뭉개고 있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후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가지 전술]을 쓴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2단계 혁명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은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1단계를 우선 거쳐야 한다는 멘셰비키의 주장을 레닌은 역시 '반동'으로 몰면서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혁명 단계에서부터 노동자-농민 독재의 전술을 펼쳐야 한다는 매우 급진적 주장을 펼친다. 이는 마르크스가 1848년 프랑스 혁명에서 계급투쟁 양상을 현실적으로 분석한 전통을 잇는다. 즉 부르주아지는 다수 프롤레타리아트를 이용하여 집권하지만 이내 다수 노동계급을 배신하는 '반혁명'의 시간이 도래하므로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 다수의 독재와 헤게모니가 강력하고 광범위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1920년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이나 1940년대 마오쩌뚱의 [신민주주의론]과도 맞닿는 면이 있지만, 20세기 벽두 러시아 차르체제에서 레닌의 시간은 '폭력'에 의한 즉각적 혁명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이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러시아 레닌주의와 서유럽 카우츠키의 논쟁을 읽어야 할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가 '의회주의'와 동일시되던 1990년대 초반의 대학가에서 칼 카우츠키는 비록 마르크스주의 '교황'의 권위에도 불구하고 널리 읽히지 않았다. 이후 1999년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산물인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대중투쟁과 의회전술이 결합되어야 하고 민주주의가 단순한 전술이나 운영원리가 아니라 운동의 중심이 된 이후에야 나는 카우츠키를 읽었다. 1994년의 내게 카우츠키는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의 '배신자' 또는 '배교자'로 낙인 찍었기 때문에 안중에 없었는데, 이후에 보니 지금의 진보정당 노선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카우츠키의 강령이었던 것이다. 

카우츠키는 투사나 정치인이 아니라 이론가였다. 그는 엥겔스의 '제2인터내셔널' 교리대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생산력의 사회화와 생산관계의 사유화의 모순에 의해 생산양식이 사회화되는 사회주의 경제로 자연이행된다는 매우 낙관적인 관점을 기본으로 한다. 노동자 보통선거권이 실현되던 당시 서유럽의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가능한 시각이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러시아 차르의 압제 아래 살아온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농민이 의회에서 다수를 점할 방법도, 가능성도 없었으니 민주주의를 보는 방식도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즉, 카우츠키에게 보통선거로 노동계급이 다수를 점하는 의회민주주의가 사회민주주의였다면, 레닌주의자에게 민주주의는 한 계급의 독재에 다름 아니었다. 레닌의 사회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였다. 따라서 부르주아 독재정권을 타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다수대중에 의한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실제로 1994년 레닌을 읽던 나에게 민주주의는 독재와 구분되지 않았다. 계급투쟁의 관점에서는 논리적으로 적합한 권력론이었던 것이다.

이제, '국가론'과 '혁명론'은 불가피했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레닌을 읽는 이유는 체제를 전복하는 '혁명'을 읽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1916~17년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종착점이었다. 민주주의는 독재의 다른 말이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의해 구축된 국가기구는 철저히 파괴되어야 하고 프롤레타리아 다수대중 독재에 의해 다시 건설되는 것. 이것이 [국가와 혁명]이라는 레닌의 미완의 저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실제로 레닌은 마지막 장을 쓰기 전에 "난 이제 그만 펜을 놓고는 총들고 혁명하러 나간다~"며 책을 마치고 있다. 매우 위험했지만 '노동계급의 아들'인 스물한살의 나에게 이만한 매력적이고 고마운 인물과 사상이 있을 수 없었다.

"모든 부르주아 국가는 그들의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고 끝까지 그 본질을 분석해 보면 '부르주아지의 독재'라는 동일한 본질이 드러난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풍부하고 아주 다양한 정치적 형태들을 창출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동일하게 될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이다."
-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3.

"헤겔의 논리학 전체를 철저하게 연구하지 않고 또 이해하지 않고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특히 제1장(상품)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반세기를 경과하였지만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 레닌, [철학노트], 1914.


1995년 10월에 군대 가기 전,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했을 때 나와 놀아주는 선후배나 동기는 더더욱 없었다. 입대 전까지 나는 아마도 마오쩌뚱의 [모순론]과 [지구전론], [신민주주의론]을 읽었지만 그 속에 온통 레닌 뿐이었다. 19세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럽식 사회주의가 1917년 러시아 억압 문명에서 레닌주의로 실현되었고 1949년 중국의 유교 문명에서 마오쩌뚱주의로 실현되었기에 내 사상의 경로는 마오주의로까지 가야했지만 사실 그리 정치적이지 못하고 실천적이지도 못했던 나는 레닌에서 멈췄다. 더구나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주체사상'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인성론'이니 '품성론' 따위를 거론하며 주석을 옹립하고 세습시키는 북조선은 애초에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마오주의까지 가지 못하고 1995년까지도 레닌에 머물렀던 건, 그의 [철학노트] 때문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목전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앞세웠던 '배신자' 카우츠키의 후예들 대부분이 전시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지며 국수주의(쇼비니즘) 제국전쟁을 옹호하던 그 암울한 시대에 레닌은 마르크스가 그랬듯 대영도서관에 틀어박혔다. 노동자 보통선거권으로 의회에 들어간 진보정당 의원들 중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소수였다. 카우츠키도 전시공채 법안에 반대하며 독일 사회민주당의 분당을 이끌었지만 법안에 찬성한 다수 사회민주당 의회주의자들은 카우츠키의 사회민주주의 후예들이었다. 
1914년의 레닌은 이들 모두가 [자본론]을 오독했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니었다고 규정했다. 레닌은 헤겔의 [대논리학]을 다시 연구하면서 그 거대 관념론 체계 속에서 '유물론' 사상을 읽어내고자 했다. 변증법적으로 전도되는 그 유물론('변증법적 유물론')의 혁명적 성격을 규명하지 못하는 한 "어느 누구도([철학노트])"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얼마 동안이었을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1914년의 암울한 제국주의 전쟁의 세계 정세에서 레닌은 제국주의 심장 런던의 도서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고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는 물론 헤겔 철학을 다시 읽으며 '유물론'을 재정립하고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의 칼날을 갈았다.

1916년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레닌은 '독점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 [제국주의론]을 썼는데 사실 볼셰비키 최고의 경제두뇌 부하린의 '제국주의 이론'을 따른 것이지만 레닌 특유의 신랄함과 이론적 단순화의 미학을 담고 있어 내가 가장 최고로 치는 레닌의 저작이다.

한편, 1920년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은 소비에트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논쟁서라 집권세력의 변명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영어를 좋아했지만 영문학은 공부하지 않았고 그래도 문학은 좋았으나 철학책을 들고 다녔던 이십대 초반의 나는 그렇게 혁명가 레닌의 1914년 [철학노트]에서 멈추고 말았다.
엄밀히 말하면 레닌의 [철학노트]는 정식 출간을 위한 저작이 아니라 자습을 위한 학습노트였고 나는 '혁명가'로서의 레닌이 아닌 '철학자'로서의 레닌을 읽었다. 
잠시의 공백 후 1998년 내게 알튀세르의 시간이 오기 전까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무엇을 읽든 내게는 언제나 레닌이 보였다.

레닌을 읽던 시간, 
1993년부터 1995년 10월까지의 이야기다.


***

1. [철학노트](1914), 레닌, 홍영두 옮김, <논장>, 1989.
2.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레닌, 박정호 옮김, <돌베개>, 1992.
3. [무엇을 할 것인가 -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1902), 레닌, 최호정 옮김.
4.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1905), 레닌, 이채욱/이용재 옮김, <돌베개>, 1992.
5. [제국주의 –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1916), 레닌, 박상철 옮김, <돌베개>, 1992.
6. [국가와 혁명](1917), 레닌, 김영철 옮김, <논장>, 1994.
7.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1924), 레닌, 김남섭 옮김, <돌베개>, 1989.
8. [민주주의와 독재](1976), 에티엔 발리바르, 최인락 옮김, <연구사>, 1988.
9. [에르푸르트 강령](1891), 칼 카우츠키, 서석연 옮김, <범우사>, 2003.
10. [프롤레타리아 독재/테러리즘과 공산주의:혁명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1918), 칼 카우츠키, 강신준 옮김, <한길사>, 2006.
11. [신민주주의론](1940),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12. [실천론/모순론](1937),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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