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 - 삶의 변곡점에 선 사람들을 위한 색다른 고전 읽기
최봉수 지음 / 가디언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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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古典)'의 내공
- [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 최봉수, <가디언>, 2022.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의 말'을 이루고자 합니다."
("究天人之际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
- 사마천, <보임안서>, BC.1C.


사마천이 친구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 <보임안서(報任安書)>에서 본인이 아버지 사마담에 이어 역사서 [사기]를 짓는 이유를 말한 대목이라고 한다. 
기원전 1세기 한무제 시절에 흉노에 중과부적으로 항복한 장수 이릉을 변호하다가 억울하게 사형을 받았지만 궁형을 자처하면서까지 목숨을 보전한 이유가 [사기]를 완성하기 위함이고, [사기]를 지은 이유가 세상 이치를 깨달아 "일가의 말(一家之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사마천은 토로했다. 
[사기]는 중국역사의 족보를 세운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고 있지만 한무제 당시에는 '정사'가 아니었다. 수세기 후 후한시대 반고의 [한서]는 전한의 단대사로서 왕명에 의해 유학의 관점에서 역사를 다룬 '정사'였던 반면, 사마천은 130권의 죽간의 원본은 명산 산속 깊이 보관하고 부본을 세간에 돌려 후세 성인군자들의 평가를 구해야 했다. 한나라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학의 관점만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들의 입체적 삶을 <본기>와 <열전> 등에서 교차적으로 서술하면서 "과연 하늘의 도란 무엇인가?"라는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사마천의 [사기]를 보고 당시의 절대권력자 한무제는 자신과 선왕의 본기를 폐기하라고 지시까지 했단다. 사마천이 살아서는 세상에 인정받아 '일가지언'을 이루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결국 사마천의 [사기]는 후세에 의해 중국 '25사'의 첫번째 '정사'로 인정받게 된다.
현재로서는 과연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가로서 사마천만큼 '일가지언'을 이룬 사람을 꼽을 수가 없다.


김영사와 중앙M&B 등의 출판사에서 편집자와 경영자를 지낸 최봉수 선생은 [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2022)에서 서양의 '그리스-로마 신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그리스 3대 비극',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 '플루타르크 [영웅전]', 동양의 '사마천 [사기]', '[열국지]', '[초한지]'와 [삼국지]'를 거쳐 고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본서기]'까지 동서양의 '고전(古典)' 13편을 통해 각 상황 속 사람들이 그려낸 '역사'를 읽어주고 있다. 원래 2020년에 나온 [내 맘대로 고전읽기]의 개정증보판이라고 한다.


내가 쓰고 있는 '내 맘대로 서평'과 비슷한 면이 있는 듯 하여 읽어보니 저자의 내공이 대단하다. 내가 쫓고 넘어서야 할 모델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을 직접 읽으며 확인한 건데, 단순한 '서평' 수준을 넘어 해당 고전이 담고 있는 내용을 독자적이지만 보편적 인간군상을 묘사하고자 하는 탁월한 시각에서 분석하고 해석해 준다.

이 중 내가 읽은 것은 9가지다. 서양편의 '그리스 비극'과 '헤로도토스의 [역사]',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동양편의 '[일본서기]' 등 4가지를 뺀 나머지 9종의 고전들이다. 
이 중 대학 영문과 1학년 때 멋도 모르고 읽어제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는 필수과목 숙제라 역시 아무 생각없이 원고지에 필사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스무살 또는 그 언저리였던 우리 신입생들에게 영문과 필수교양과목인 '그리스-로마 신화'와 '성서'를 가르치시던 이재호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어떤 어려운 책이라도 그냥 끝까지 읽으라'는 그 한 마디는 지금까지 내가 '고전'을 읽는 주요한 방식이다.
어쨌든 호메로스의 두 장편 서사시를 제외하고 나중에 서평이든 그 비슷한 형식이든 나만의 글로 정리해 놓은 게 대략 아래의 7가지 정도다.


1. [그리스-로마 신화] 
: 최봉수 선생은 창조와 투쟁의 반복을 통한 인류 진화의 보편적 이야기의 서양식 최초 전형으로 '그리스-로마 신화'를 든다.

2. 플루타르크 [영웅전] 
: 그리스와 로마를 통과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삶들의 '비교열전'이다. 원제가 '비교열전' 또는 '대비열전'이다.

3. [사기] 
: [사기] 집필 5백년 전 공자의 [춘추]를 기리면서도 그를 넘어서려는 사마씨 가문의 '일가지언'이다. 사마천의 화두는 "과연 하늘의 도란 과연 무엇인가?"이다.

4. [열국지] 
: 중국 고대 고사성어의 요람인 춘추전국시대 열국들과 인물들의 다양한 삶을 그려내고 있다. 출처는 주로 [사기]의 <열전>과 공자의 [춘추], 좌구명의 [전국책] 등이며 명나라 시기 풍몽룡이 집대성한 [동주 열국지]가대표적이다.

5. [초한지] 
: 비루하지만 유연한 건달황제 유방과 진격의 천하장사인 뼛속무골 항우의 대전쟁이자 중국 '건곤일척' 영웅전의 전형을 토대로, 저자는 '전한 3걸'인 소하-한신-장량 3인의 삶을 해석하고 있다.

6. [삼국지] 
: 위-촉-오 삼국지라는 중국 고대사의 에필로그를 전조한 후한 시기 하진-원소-동탁의 삼자구도를 저자는 삼각구도의 한 원형으로 소개한다.

7. [삼국사기] 
: 단재 신채호 선생의 평가와는 다르게 김부식은 사대주의 유학자라기 보다는 당시 기득권 전쟁에서 피아를 확실히 구분한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해석될 수 있다는데, 어쨌거나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정사' 역사서다.


탁월한 저자에 비교할 바는 못되지만 '나도 이 정도  수준의 내 맘대로 서평을 쓸 수 있을까?' 싶어 나름대로 톺아보았는데 춘추시대 오나라의 대장부 오자서의 말마따나 '아직 갈 길은 멀기만 한데 해는 저물고(日暮途遠)' 있으니, 더욱 박차를 가해 '고전'을 열심히 읽고 나의 '일가지언'을 조금이라도 실천하기 위해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혹시 글쓰기로 이 세상에서 '일가지언'은 결국 이룰 수 없을지라도 난 어느덧 이미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살아남고자 치욕을 무릅쓰고 궁형을 자처했던 나이인 '불혹(不惑)'의 끝줄 마흔아홉이고, 
중국을 최초로 전국통일했던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꿈꾸며 자신이 닦은 고속도로로 전국 순행 중 급사한 나이이자 최봉수 선생의 이 책 [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2022)가 콕집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오십을 앞두고 있으니 말이다.

온갖 조작 투성이로 보이는 [일본서기]와 영문과 다닌 덕에 대략 주워들은 '그리스 3대 비극'은 원전으로 읽을 마음이 아직은 눈꼽만치도 없다.
그러나, 오십줄에 들어설 즈음까지 서양 최초의 역사가라는 그리스 작가 헤로도토스의 [역사], 그리고 토머스 불핀치의 [그리스-로마 신화] 및 에디스 해밀턴의 [Mythology]의 모티브가 된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두 고전은 꼭 읽고 '내 맘대로 서평'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최봉수 선생만큼의 내공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고전'에 대한 '서평'을 앞으로 더 그럴듯하게 잘 써보겠다는 쉽지 않은 목표로 삼아서 말이다.

'고전(古典)'을 통해 인간 보편의 문제를 읽어내는 저자 최봉수 선생의 내공 또한, 
그가 '화수분'으로 비유하는 '고전(古典)' 자체가 지니는 무한한 내공이 원천이다.

***

- [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 최봉수, <가디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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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드디어 다윈 1
찰스 로버트 다윈 지음, 장대익 옮김, 최재천 감수, 다윈 포럼 기획 / 사이언스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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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덤불'이지 '사다리'가 아니다
- [화석은 말한다], 도널드 프로세로, 2017.


"생명은 처음에 창조주에 의해 소수의 또는 하나의 형태로, 여러가지 능력과 함께 불어넣어졌다는 견해, 그리고 이 지구가 확고한 중력의 법칙에 의해 계속해서 돌고 있는 동안에, 그렇게 단순한 발단에서 매우 아름답고 놀라우며 무한한 형태로 수없이 생겨나고 또 지금도 생겨나고 있다는 견해(생명관)에는 '장엄한 점(장엄미)'이 있다."
- [종의 기원], <15. 요약과 결론>, 찰스 다윈, 1859.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 1809~1882)이 1859년에 [종(種)의 기원(起源)]을 출간했을 때는 사실 '진화론'이라는 것의 첫 출현은 아니었다. 당시는 아직 신이 세상만물을 만들었다는 '창조론'의 시대였지만 칼 폰 린네 같은 생물학자들이 생물 분지학 및 계통분류학을 정립했고, 라마르크와 같은 초기 '진화론자'들도 이미 있었다. 그러나 과학사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 발표 후 본격적으로 열린 '진화론'의 세계는 생명체가 '신의 법칙'이 아니라 '자연법칙'에 따른다는 생물학의 '혁명'이었다. 
에이브리엄 링컨과 같은해 같은날 태어난 찰스 다윈은, 링컨이 미국 전근대식 흑인노예들을 근대식 노동자계급으로 '해방'시킨 것처럼 생물학을 신의 '초자연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도 하는데([화석은 말한다], <4. 진화론의 진화>, 도널드 프로세로, 2017.), 이는 물리학에서 아이작 뉴턴의 '중력 이론'이나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이 이룬 '과학혁명'에 비견될 수 있다. 생명체의 역사에서 생물이 변화해 왔다는 '증거'로서의 '진화' 사실과 이러한 유구한 '진화'가 일어나는 방식으로서 '자연선택'([종의 기원], <4. '자연도태' 또는 '적자생존'>)이라는 메커니즘을 밝히는 다윈의 [종의 기원]은 아직 '화석'이라는 주요 증거가 많이 발견되지 못했고 고생물학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주류 '창조론'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의심할 여지 없는 생물학의 '혁명'이었다. 
[종의 기원]의 원제는 '자연선택 방식에 의한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이다. 다윈은 비록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또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생명체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이의 방법이기는 하지만, 유일한 방법도 아니라는 것도 확신하고 있다"고 [종의 기원] <머리말>과 <15장 요약과 결론>에서 강조한다. 새로운 객관적 '증거'에 의해 반박되고 만약 오류가 드러나면, 즉 다윈이 "... 유익한 개체적인 차이와 변이의 보존 및 자기에게 유해한 형질을 가진 생물은 멸망된다는 것"([종의 기원], <4>)을 의미하는 '자연선택'이나 '자연도태' 또는 '적자생존' 외에 다른 '진화'의 요인이 발견되면 언제든 폐기될 수 있는 잠정적인 '과학적 가설'임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당시 '화석'과 고생물학의 발전이 더딘 관계로 '인간'의 '진화'에 관해서는 본격적으로 다룰 수는 없었지만, 다윈은 '중력'과 같은 자명한 '사실' 못지않게 생명의 '진화' 사실 자체에는 '장엄미'가 있다는 감탄과 함께 [종의 기원]을 마무리하고 있다.


"'중력'이 일어나는 방식을 우리는 아직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물체가 땅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진화'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어쩌면 완전히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생명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진화'를 설명하는 이론은 '신다윈주의'가 전부는 아니다. '진화'는 과거에도 일어났고 바로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 [화석은 말한다], <4. 진화론의 진화>, 도널드 프로세로, 2017.


미국의 고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인 도널드 프로세로(Donald R. Prothero)는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최근의 '화석' 발굴 결과에 맞춰 수정해가면서 발표한 [화석은 말한다]라는 책에서 아직도 미국의 정치권 및 교육계에 만연한 '창조론'을 최근 화석과 고생물학의 증거를 토대로 강력 반박하고 있다. 객관적 증거들을 토대로 잠정적 '가설'들을 세우지만 새로운 증거들에 의한 '실험' 및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미련없이 폐기되는 '잠정적 가설'인 '과학'적 지식으로서의 '진화론'에 기반하여, 온통 '도그마'로 점철된 '창조론'을 박살내는 과학자 프로세로의 이 책은 엥겔스의 [반뒤링론](1878)이나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못지 않게 다분히 논쟁적이다. 프로세로에 의해 '창조과학'은 논리로도 부정되고 '창조과학자'들은 인격적으로도 모독된다. 단, '창조론' 또한 하나의 '의견'이기에 '민주적'으로는 존중될 수는 있으나 '창조론'이 증거도 공부도 과학훈련도 없이 감히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ID : Intelligent Design)' 같은 '과학'적 외피를 둘렀을 때는 '과학적'으로 무참하게 깨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과학자'인 프로세로 또한 생명의 '진화'가 왜 일어나는지 알 수는 없다. 이는 '중력'이 왜 발생하는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논하자면, '진화'는 '이론(theory)'이라기 보다는 '사실(fact)'에 가깝다. 실제로 초기 '진화론자'들은 신을 믿는 자들이었고 [화석은 말한다]의 저자인 프로세로도 교회에 다니는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즉, '진화론자'라고 해서 '무신론자'는 아니다. 다만, '과학'도 아니면서 감히 '과학'을 참칭하는 '창조과학'은 쌍욕을 들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다분히 '미국'적인 시각에서 '창조론'이 끼치는 해악으로 미국 사회의 '반지성주의'적 면모인 기독교 근본주의와 공화당 트럼프와 같은 인종주의 등을 예로 들며 '창조론'이 미국의 정치권과 교육계에 더이상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결론'([화석은 말한다], <16. 무엇이 중요한가?>)으로 남기고 있다.


"다윈의 책([종의 기원])이 세상에 나오고 불과 두 해 뒤인 1861년,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졸른호펜의 석회암 채석장에서 놀라운 화석이 하나 발견되었다... 대영박물관 학예사였던 리처드 오언(Richard Owen)-'공룡(Dinosauria)'이라는 이름을 지은 사람-이 (이 화석을) 서술할 책임을 맡았다. 그보다 앞서 그 표본은 이미 '시조(始祖)새'(Archeopteryx : '고대의 날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오언도 기본적으로 그걸 '새'라고 서술하기는 했으나, '공룡'이 가진 모든 형질들이 그 골격에 담겨있음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저명한 생물학자 가운데에서 '진화론'에 반발한 마지막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오언은 이 화석을 그 친척(공룡)들과 결부시키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언의 맞수였던 토머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이 무렵에 그는 '다윈의 불독'이 되어 말과 글로 다윈의 이론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시조새'에서 보이는 그 '공룡' 형질들을 놓치지 않았다. 현생 조류를 처음으로 해부학적으로 연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자 콤프소그나투스 같은 공룡도 여럿 연구한 헉슬리는 '시조새'가 '새'와 '공룡' 사이를 이어주는 훌륭한 '빠진 고리'임을 놓치지 않고 알아보았다."
- [화석은 말한다], <12. 공룡이 진화하다. 그리고 하늘을 날다>, 도널드 프로세로, 2017.


그렇다고 해서 프로세로의 책 [화석은 말한다]가 비난으로만 일관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진화론'의 사실적 정당함을 '잠정적'으로나마 증명하는 '과학책'인만큼 흥미로운 '화석' 이야기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이 책은 <1부. 진화와 화석 기록>에서 '증거'로 세워지고 수정되며 과감하게 폐기될 수도 있는 '잠정적 가설'로서의 '과학적 지식'의 본성(1장)'과 '창조과학'의 허위성(2장), '화석'의 의미(3장)와 '진화생물학'의 발전과정 등(4~5장)에 관하여 서술하고, 
<2부. 화석은 진화를 말한다>를 통해 5억년 전 '생명의 기원들(6장)'과 5억5천만년 전 고생대 초 '캄브리아기 대진화'라는 '폭발'이라기 보다는 미생물에서부터 시작된 8천만년 동안의 점진적이고 '느린 도화(7장)' 과정을 거쳐 '무척추동물(8장)'로부터 '물고기(9장)',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10장)'와 '양막류(11장)'와 같이 '땅 위로 올라오거나 바다로 돌아간 동물'들로 이어지는 생명체 '진화'의 과정, 중생대의 '공룡과 조류(12장)', 백악기 말기부터 '진화 방산(evolutionary radiation)'으로 폭발적 진화를 이룬 '포유류(13장)'와 거대 '말굽동물(14장)'인 유제류(有蹄類)의 진화 과정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유인원의 반영(15장)'으로서 인류의 '진화사'를 돌아보며 '결론(16장)'으로 치닫는다.

과연 이 '진화사'의 '장엄'한 과정은 '창조과학'의 허위성을 밝혀내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로서 '화석'의 역사다. 라틴어로 명명된 온갖 학명들은 몰라도 상관없다. 그저 이 5억년 이상의 '장엄'한 역사에서 '진화'라는 것이 '사다리'처럼 직선적 변화 과정이 아니라 '덤불'과도 같이 우거진 광경이라는 점만 기억하면 된다. 다윈의 '진화론'을 '점진적'인 과정으로 정의하고 옹호하던 '신다윈주의'도 있었지만 이는 이른바 '신플라톤주의'와 같이 원래의 학설을 신비화시키거나 보수적으로 해석했던 경향이었다. 다윈 '진화론'의 본질은 '진화의 덤불' 속에서 폭발적으로 퍼져나간 '혁명'적 '진화'의 과정이었다. 
고대 해양 '미생물'이 '무척추동물'로 진화하고, 바다 물고기가 지상으로 올라오거나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과정도, 공룡이 조류로 변신하는 과정 및 포유류와 인류의 폭발적 '진화 방산(evolutionary radiation)' 모두는 '사다리'처럼 직선적 과정이 아니라 '덤불'과도 같은 공존과 공생의 과정이었다.


"'진화'는 '덤불'이지 '사다리'가 아니다."
- [화석은 말한다], <10.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 도널드 프로세로, 2017.


1859년에 찰스 다윈이 "자연선택은 변화의 중요한 요인이지만 변화의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종의 기원], <머리말>과 <15. 요약과 결론>)라고 강조했듯, 2017년의 도널드 프로세로도 현대판 [종의 기원]인 [화석은 말한다]에서 "진화는 덤불이지 사다리가 아니다"([화석은 말한다], <10장>부터 <16장>까지)라고 수차례 강조하고 있다.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화석 진화의 '중간 단계'를 끊임없이 요구하지만, 진화는 예를 들어 60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7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5만년 전 '네안데르탈인' 및 1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로 '사다리'처럼 이어진 것은 아니다. 6천만년 전까지 2억년 동안 이상 지구를 지배했던 거대 공룡이 대멸종을 맞고 중생대(트라이아스기-쥐라기-백악기)가 끝난 후 신생대 초기인 팔레오세에서 '진화 방산'을 시작한 소과 말과인 '말굽동물(유제류)'이 '덤불'처럼 분화하고 에오세에 개과 동물이, 올리고세에 고양이과 동물들이 분화 방산된 과정 자체도 '사다리'처럼 곧은 직선의 과정이 아니었다. 고래의 조상인 '암불로케투스'도 3천만년 전 올리고세에 바로 고래로만 진화한 것은 아니고 고래와 가장 비슷한 친척인 하마로 '덤불'처럼 분화했다. 인류 또한 600~700만년 전 지금은 '투마이(Toumai)'로 불린 화석인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Sahelanthropus tchadensis)'와 320만년 전 '최초의 인간 루시(Lucy)'로 불린 화석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의 진화 '사다리'가 아니라 '덤불' 방식의 폭발적 '진화 방산'이었다. 오늘날 밝혀졌다시피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은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조상'이 아니라 동시대 유라시아에서 공존했다. 4만5천년 전 아프리카 더운 지역에 살던 사피엔스가 추운 북쪽 유라시아에 살던 네안데르탈인의 영역으로 이주하여 두 종은 9천년 이상 공존하며 이종교배도 한 결과 현대인의 3% 정도는 호모 사피엔스보다 네안데르탈인의 형질을 가지고 있다고도 한다. 역시 '직립인간'인 '에렉투스(Homo erectus)'와 '도구인간'인 '하빌리스(Homo habilis)' 또한 '사다리' 형태가 아니라 190만년 전부터 3만년 전까지 '덤불'처럼 퍼져 공존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피엔스'와의 '사회성' 경쟁에서 밀렸을 수도 있을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운명은 아니었을지라도 '에렉투스'가 '하빌리스'를 경쟁에서 밀어냈는지는 모르지만 프로세로에 의하면 "사람족 가운데에서 (180만년 이상 존속했던) 호모 에렉투스는 처음으로 널리 퍼진 종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번성하고 가장 오래 존재한 종에 해당"([화석은 말한다], <15장>)한다고 하는데, 46억년 지구의 역사와 5억년 이상의 생명체 '진화'의 과정 속에서 이제 겨우 10~20만살 정도 되는 '사피엔스'가 더욱 겸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 '덤불'과도 같은 '장엄'한 '진화사'에 담겨 있다. 

도날드 프로세로의 다분히 논쟁적이지만 매우 유익하고 재미있는 '화석' 정보로 가득한 이 책 [화석은 말한다]의 원제는 '진화 : 화석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그것이 중요한 점(EVOLUTION : What the Fossils Say and Why It Matters)'이다. 즉, '과학적 가설'은 객관적 '사실' 및 '증거'로 인해 언제든 폐기될 수도 있는 '잠정적 가설'이기는 하나, '창조과학'처럼 '과학'도 아니면서 '증거'와 '사실'까지 조작하는 도그마와 달리 '사실'과 '증거' 자체를 매우 중시하는 지적 훈련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던 19세기와 달리 20~21세기 현대는 '진화'를 증거하는 '화석'들은 아주 풍부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그리고 미지의 '화석' 증거에 의해 '진화론'이라는 '잠정'적인 '과학적 가설' 자체가 폐기되거나 수정될 수도 있겠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화석'의 객관적인 '증거'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생명체의 '진화' 자체는 '중력' 못지 않게 자명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화석'이 지금껏 우리에게 '말'하는 것(What the fossils say)이 바로 이 '진화(evolutio)'의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중요(Why it matters)'한 것이다.


"... '과학적 가설'이란 반드시 시험 가능하고 반증 가능해야 하며, '과학자'들은 제 아무리 소중히 여기는 생각이 있다 할지라도 그게 잘못임을 '데이터'가 보여주면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는 것... 여기서 요점은, '과학'은 '이념'에 무릎을 꿇을 수 없으며, 정치지도자들을 즐겁게 할 목적으로 진실을 억지로 훼손할 수 없다는 것이다."
- [화석은 말한다], <16. 무엇이 중요한가?>, 도널드 프로세로, 2017.

***

1. [화석은 말한다 - 화석이 말하는 진화와 창조론의 진실(EVOLUTION : What the Fossils Say and Why It Matters)](2017), Donald R. Prothero, 류운 옮김, <바다출판사>, 2019.
2. [종(種)의 기원(起源)(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1859), Charles R. Darwin, 김창한 옮김, <집문당>,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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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은 말한다 - 화석이 말하는 진화와 창조론의 진실
도널드 R. 프로세로 지음, 류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진화'는 '덤불'이지 '사다리'가 아니다
- [화석은 말한다], 도널드 프로세로, 2017.


"생명은 처음에 창조주에 의해 소수의 또는 하나의 형태로, 여러가지 능력과 함께 불어넣어졌다는 견해, 그리고 이 지구가 확고한 중력의 법칙에 의해 계속해서 돌고 있는 동안에, 그렇게 단순한 발단에서 매우 아름답고 놀라우며 무한한 형태로 수없이 생겨나고 또 지금도 생겨나고 있다는 견해(생명관)에는 '장엄한 점(장엄미)'이 있다."
- [종의 기원], <15. 요약과 결론>, 찰스 다윈, 1859.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 1809~1882)이 1859년에 [종(種)의 기원(起源)]을 출간했을 때는 사실 '진화론'이라는 것의 첫 출현은 아니었다. 당시는 아직 신이 세상만물을 만들었다는 '창조론'의 시대였지만 칼 폰 린네 같은 생물학자들이 생물 분지학 및 계통분류학을 정립했고, 라마르크와 같은 초기 '진화론자'들도 이미 있었다. 그러나 과학사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 발표 후 본격적으로 열린 '진화론'의 세계는 생명체가 '신의 법칙'이 아니라 '자연법칙'에 따른다는 생물학의 '혁명'이었다. 
에이브리엄 링컨과 같은해 같은날 태어난 찰스 다윈은, 링컨이 미국 전근대식 흑인노예들을 근대식 노동자계급으로 '해방'시킨 것처럼 생물학을 신의 '초자연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도 하는데([화석은 말한다], <4. 진화론의 진화>, 도널드 프로세로, 2017.), 이는 물리학에서 아이작 뉴턴의 '중력 이론'이나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이 이룬 '과학혁명'에 비견될 수 있다. 생명체의 역사에서 생물이 변화해 왔다는 '증거'로서의 '진화' 사실과 이러한 유구한 '진화'가 일어나는 방식으로서 '자연선택'([종의 기원], <4. '자연도태' 또는 '적자생존'>)이라는 메커니즘을 밝히는 다윈의 [종의 기원]은 아직 '화석'이라는 주요 증거가 많이 발견되지 못했고 고생물학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주류 '창조론'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의심할 여지 없는 생물학의 '혁명'이었다. 
[종의 기원]의 원제는 '자연선택 방식에 의한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이다. 다윈은 비록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또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생명체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이의 방법이기는 하지만, 유일한 방법도 아니라는 것도 확신하고 있다"고 [종의 기원] <머리말>과 <15장 요약과 결론>에서 강조한다. 새로운 객관적 '증거'에 의해 반박되고 만약 오류가 드러나면, 즉 다윈이 "... 유익한 개체적인 차이와 변이의 보존 및 자기에게 유해한 형질을 가진 생물은 멸망된다는 것"([종의 기원], <4>)을 의미하는 '자연선택'이나 '자연도태' 또는 '적자생존' 외에 다른 '진화'의 요인이 발견되면 언제든 폐기될 수 있는 잠정적인 '과학적 가설'임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당시 '화석'과 고생물학의 발전이 더딘 관계로 '인간'의 '진화'에 관해서는 본격적으로 다룰 수는 없었지만, 다윈은 '중력'과 같은 자명한 '사실' 못지않게 생명의 '진화' 사실 자체에는 '장엄미'가 있다는 감탄과 함께 [종의 기원]을 마무리하고 있다.


"'중력'이 일어나는 방식을 우리는 아직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물체가 땅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진화'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어쩌면 완전히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생명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진화'를 설명하는 이론은 '신다윈주의'가 전부는 아니다. '진화'는 과거에도 일어났고 바로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 [화석은 말한다], <4. 진화론의 진화>, 도널드 프로세로, 2017.


미국의 고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인 도널드 프로세로(Donald R. Prothero)는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최근의 '화석' 발굴 결과에 맞춰 수정해가면서 발표한 [화석은 말한다]라는 책에서 아직도 미국의 정치권 및 교육계에 만연한 '창조론'을 최근 화석과 고생물학의 증거를 토대로 강력 반박하고 있다. 객관적 증거들을 토대로 잠정적 '가설'들을 세우지만 새로운 증거들에 의한 '실험' 및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미련없이 폐기되는 '잠정적 가설'인 '과학'적 지식으로서의 '진화론'에 기반하여, 온통 '도그마'로 점철된 '창조론'을 박살내는 과학자 프로세로의 이 책은 엥겔스의 [반뒤링론](1878)이나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못지 않게 다분히 논쟁적이다. 프로세로에 의해 '창조과학'은 논리로도 부정되고 '창조과학자'들은 인격적으로도 모독된다. 단, '창조론' 또한 하나의 '의견'이기에 '민주적'으로는 존중될 수는 있으나 '창조론'이 증거도 공부도 과학훈련도 없이 감히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ID : Intelligent Design)' 같은 '과학'적 외피를 둘렀을 때는 '과학적'으로 무참하게 깨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과학자'인 프로세로 또한 생명의 '진화'가 왜 일어나는지 알 수는 없다. 이는 '중력'이 왜 발생하는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논하자면, '진화'는 '이론(theory)'이라기 보다는 '사실(fact)'에 가깝다. 실제로 초기 '진화론자'들은 신을 믿는 자들이었고 [화석은 말한다]의 저자인 프로세로도 교회에 다니는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즉, '진화론자'라고 해서 '무신론자'는 아니다. 다만, '과학'도 아니면서 감히 '과학'을 참칭하는 '창조과학'은 쌍욕을 들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다분히 '미국'적인 시각에서 '창조론'이 끼치는 해악으로 미국 사회의 '반지성주의'적 면모인 기독교 근본주의와 공화당 트럼프와 같은 인종주의 등을 예로 들며 '창조론'이 미국의 정치권과 교육계에 더이상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결론'([화석은 말한다], <16. 무엇이 중요한가?>)으로 남기고 있다.


"다윈의 책([종의 기원])이 세상에 나오고 불과 두 해 뒤인 1861년,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졸른호펜의 석회암 채석장에서 놀라운 화석이 하나 발견되었다... 대영박물관 학예사였던 리처드 오언(Richard Owen)-'공룡(Dinosauria)'이라는 이름을 지은 사람-이 (이 화석을) 서술할 책임을 맡았다. 그보다 앞서 그 표본은 이미 '시조(始祖)새'(Archeopteryx : '고대의 날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오언도 기본적으로 그걸 '새'라고 서술하기는 했으나, '공룡'이 가진 모든 형질들이 그 골격에 담겨있음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저명한 생물학자 가운데에서 '진화론'에 반발한 마지막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오언은 이 화석을 그 친척(공룡)들과 결부시키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언의 맞수였던 토머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이 무렵에 그는 '다윈의 불독'이 되어 말과 글로 다윈의 이론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시조새'에서 보이는 그 '공룡' 형질들을 놓치지 않았다. 현생 조류를 처음으로 해부학적으로 연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자 콤프소그나투스 같은 공룡도 여럿 연구한 헉슬리는 '시조새'가 '새'와 '공룡' 사이를 이어주는 훌륭한 '빠진 고리'임을 놓치지 않고 알아보았다."
- [화석은 말한다], <12. 공룡이 진화하다. 그리고 하늘을 날다>, 도널드 프로세로, 2017.


그렇다고 해서 프로세로의 책 [화석은 말한다]가 비난으로만 일관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진화론'의 사실적 정당함을 '잠정적'으로나마 증명하는 '과학책'인만큼 흥미로운 '화석' 이야기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이 책은 <1부. 진화와 화석 기록>에서 '증거'로 세워지고 수정되며 과감하게 폐기될 수도 있는 '잠정적 가설'로서의 '과학적 지식'의 본성(1장)'과 '창조과학'의 허위성(2장), '화석'의 의미(3장)와 '진화생물학'의 발전과정 등(4~5장)에 관하여 서술하고, 
<2부. 화석은 진화를 말한다>를 통해 5억년 전 '생명의 기원들(6장)'과 5억5천만년 전 고생대 초 '캄브리아기 대진화'라는 '폭발'이라기 보다는 미생물에서부터 시작된 8천만년 동안의 점진적이고 '느린 도화(7장)' 과정을 거쳐 '무척추동물(8장)'로부터 '물고기(9장)',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10장)'와 '양막류(11장)'와 같이 '땅 위로 올라오거나 바다로 돌아간 동물'들로 이어지는 생명체 '진화'의 과정, 중생대의 '공룡과 조류(12장)', 백악기 말기부터 '진화 방산(evolutionary radiation)'으로 폭발적 진화를 이룬 '포유류(13장)'와 거대 '말굽동물(14장)'인 유제류(有蹄類)의 진화 과정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유인원의 반영(15장)'으로서 인류의 '진화사'를 돌아보며 '결론(16장)'으로 치닫는다.

과연 이 '진화사'의 '장엄'한 과정은 '창조과학'의 허위성을 밝혀내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로서 '화석'의 역사다. 라틴어로 명명된 온갖 학명들은 몰라도 상관없다. 그저 이 5억년 이상의 '장엄'한 역사에서 '진화'라는 것이 '사다리'처럼 직선적 변화 과정이 아니라 '덤불'과도 같이 우거진 광경이라는 점만 기억하면 된다. 다윈의 '진화론'을 '점진적'인 과정으로 정의하고 옹호하던 '신다윈주의'도 있었지만 이는 이른바 '신플라톤주의'와 같이 원래의 학설을 신비화시키거나 보수적으로 해석했던 경향이었다. 다윈 '진화론'의 본질은 '진화의 덤불' 속에서 폭발적으로 퍼져나간 '혁명'적 '진화'의 과정이었다. 
고대 해양 '미생물'이 '무척추동물'로 진화하고, 바다 물고기가 지상으로 올라오거나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과정도, 공룡이 조류로 변신하는 과정 및 포유류와 인류의 폭발적 '진화 방산(evolutionary radiation)' 모두는 '사다리'처럼 직선적 과정이 아니라 '덤불'과도 같은 공존과 공생의 과정이었다.


"'진화'는 '덤불'이지 '사다리'가 아니다."
- [화석은 말한다], <10.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 도널드 프로세로, 2017.


1859년에 찰스 다윈이 "자연선택은 변화의 중요한 요인이지만 변화의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종의 기원], <머리말>과 <15. 요약과 결론>)라고 강조했듯, 2017년의 도널드 프로세로도 현대판 [종의 기원]인 [화석은 말한다]에서 "진화는 덤불이지 사다리가 아니다"([화석은 말한다], <10장>부터 <16장>까지)라고 수차례 강조하고 있다.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화석 진화의 '중간 단계'를 끊임없이 요구하지만, 진화는 예를 들어 60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7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5만년 전 '네안데르탈인' 및 1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로 '사다리'처럼 이어진 것은 아니다. 6천만년 전까지 2억년 동안 이상 지구를 지배했던 거대 공룡이 대멸종을 맞고 중생대(트라이아스기-쥐라기-백악기)가 끝난 후 신생대 초기인 팔레오세에서 '진화 방산'을 시작한 소과 말과인 '말굽동물(유제류)'이 '덤불'처럼 분화하고 에오세에 개과 동물이, 올리고세에 고양이과 동물들이 분화 방산된 과정 자체도 '사다리'처럼 곧은 직선의 과정이 아니었다. 고래의 조상인 '암불로케투스'도 3천만년 전 올리고세에 바로 고래로만 진화한 것은 아니고 고래와 가장 비슷한 친척인 하마로 '덤불'처럼 분화했다. 인류 또한 600~700만년 전 지금은 '투마이(Toumai)'로 불린 화석인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Sahelanthropus tchadensis)'와 320만년 전 '최초의 인간 루시(Lucy)'로 불린 화석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의 진화 '사다리'가 아니라 '덤불' 방식의 폭발적 '진화 방산'이었다. 오늘날 밝혀졌다시피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은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조상'이 아니라 동시대 유라시아에서 공존했다. 4만5천년 전 아프리카 더운 지역에 살던 사피엔스가 추운 북쪽 유라시아에 살던 네안데르탈인의 영역으로 이주하여 두 종은 9천년 이상 공존하며 이종교배도 한 결과 현대인의 3% 정도는 호모 사피엔스보다 네안데르탈인의 형질을 가지고 있다고도 한다. 역시 '직립인간'인 '에렉투스(Homo erectus)'와 '도구인간'인 '하빌리스(Homo habilis)' 또한 '사다리' 형태가 아니라 190만년 전부터 3만년 전까지 '덤불'처럼 퍼져 공존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피엔스'와의 '사회성' 경쟁에서 밀렸을 수도 있을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운명은 아니었을지라도 '에렉투스'가 '하빌리스'를 경쟁에서 밀어냈는지는 모르지만 프로세로에 의하면 "사람족 가운데에서 (180만년 이상 존속했던) 호모 에렉투스는 처음으로 널리 퍼진 종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번성하고 가장 오래 존재한 종에 해당"([화석은 말한다], <15장>)한다고 하는데, 46억년 지구의 역사와 5억년 이상의 생명체 '진화'의 과정 속에서 이제 겨우 10~20만살 정도 되는 '사피엔스'가 더욱 겸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 '덤불'과도 같은 '장엄'한 '진화사'에 담겨 있다. 

도날드 프로세로의 다분히 논쟁적이지만 매우 유익하고 재미있는 '화석' 정보로 가득한 이 책 [화석은 말한다]의 원제는 '진화 : 화석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그것이 중요한 점(EVOLUTION : What the Fossils Say and Why It Matters)'이다. 즉, '과학적 가설'은 객관적 '사실' 및 '증거'로 인해 언제든 폐기될 수도 있는 '잠정적 가설'이기는 하나, '창조과학'처럼 '과학'도 아니면서 '증거'와 '사실'까지 조작하는 도그마와 달리 '사실'과 '증거' 자체를 매우 중시하는 지적 훈련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던 19세기와 달리 20~21세기 현대는 '진화'를 증거하는 '화석'들은 아주 풍부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그리고 미지의 '화석' 증거에 의해 '진화론'이라는 '잠정'적인 '과학적 가설' 자체가 폐기되거나 수정될 수도 있겠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화석'의 객관적인 '증거'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생명체의 '진화' 자체는 '중력' 못지 않게 자명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화석'이 지금껏 우리에게 '말'하는 것(What the fossils say)이 바로 이 '진화(evolutio)'의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중요(Why it matters)'한 것이다.


"... '과학적 가설'이란 반드시 시험 가능하고 반증 가능해야 하며, '과학자'들은 제 아무리 소중히 여기는 생각이 있다 할지라도 그게 잘못임을 '데이터'가 보여주면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는 것... 여기서 요점은, '과학'은 '이념'에 무릎을 꿇을 수 없으며, 정치지도자들을 즐겁게 할 목적으로 진실을 억지로 훼손할 수 없다는 것이다."
- [화석은 말한다], <16. 무엇이 중요한가?>, 도널드 프로세로, 2017.

***

1. [화석은 말한다 - 화석이 말하는 진화와 창조론의 진실(EVOLUTION : What the Fossils Say and Why It Matters)](2017), Donald R. Prothero, 류운 옮김, <바다출판사>, 2019.
2. [종(種)의 기원(起源)(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1859), Charles R. Darwin, 김창한 옮김, <집문당>,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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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 - 뗀석기에서 인공지능까지, 인간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왔는가
슈테판 클라인 지음, 유영미 옮김 / 어크로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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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자세로서의 '창조성'
-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 슈테판 클라인, 2021.


"하지만 '프로메테우스'가 역사적 인물이 아닌 것처럼 천재 숭배 역시 현실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최신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창조성'은 몇몇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재능이 아니다... '창조적 사고'는 인간 이성의 기본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의 이성이 어떤 열매를 맺느냐는 개인적인 자질보다는 다른 사람과 어떻게 소통하고 교류하는가에 달려있다. '창조성'은 한 개인의 머릿속에서 펼쳐지기 보다는 타인, 그리고 타인의 생각과 생산적으로 만나는 가운데 펼쳐지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새로운 착상을 빚어내는데 필요한 정신적 재료와 연장을 우리는 '문화'라 부른다."
-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 <들어가는 말>, 슈테판 클라인, 2021.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라는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아닌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기반하고 있다. 
인간은 '100% 동물'이라는 전제 하에 수억년간 '생존과 번식'을 위해 각 시기 '행복'이라는 정신적 '도구'를 이용하면서 지금까지 종을 유지해 왔다는 거다.

독일의 생물물리학 박사 슈테판 클라인(Stefan Klein)은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2021)를 통해 인간의 '집단적 뇌'가 수백만년 동안 진화해온 과정을 총 <4부>로 나누어 고찰한다. 
이는 인류 역사에서 4차례의 '혁명적 사건'을 기준으로 하는데, <1부>는 인류가 이동생활을 하던 330만년전 '르메크위'라는 곳에서 만들어진 '뗀석기(주먹도끼/돌칼)'로 표현되는 물질적 영역, <2부>는 인류 정착 후인 1만년전부터 '상징'적 사고인 신화와 예술로 대표되는 정신적 영역, <3부>는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세계교류를 통해 인류의 뇌가 연결되고 창조적 사고가 세계화되는 과정, 마지막 <4부>는 컴퓨터와 이동통신기계, 인공지능을 통한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영역이다.

슈테판 클라인은 '구텐베르크'로 불린 금속세공사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Johannes Gensfleisch), 콜럼버스와 코페르니쿠스, 아인슈타인과 스티브 잡스 등  인류 진화사에서 '창조적 사고'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은 이 천재들의 뇌가 특출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지능이 '창조'적으로 발휘되게끔 했던 인류 역사상 '집단적 뇌'(같은책, <1-3>)에 주목한다. 
소수의 '천재'가 역사를 이끌어왔다는 것은 '프로메테우스의 불'만큼이나 신화적이라는 말이다. 
330만년 전 '르메크위'라는 곳에서 실용적이고 심미적이기까지 했던 '뗀석기'의 '창조성'이 등장하기까지 인류는 역시 300만년 이상을 척박한 자연에 적응해야 했다. '상징'과 정교한 '언어'로 공동체를 꾸려나가기까지 또한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인류의 '집단적 뇌'가 오랜 세대를 통해 전승되는 공시성은 물론 동시대의 '집단적 뇌'를 연결시키는 통시성을 획득한 계기는 단연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이것의 확산을 통해 글을 접하고 읽을 필요성을 느꼈던 수많은 다수 민중들의 실천이었다. 1430년대 성지순례자들로부터 성지의 신성한 빛을 담아올 청동거울을 만들어 팔기 위해 목재 프레스기계를 주문 제작한 구텐베르크의 동기는 물질적 '이익'이었다. 흑사병으로 사업은 실패했고 이 목재 프레스기계로 어떻게  20여년 후 성경을 대량인쇄할 발상을 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인쇄술의 '영웅'의 사업실패로 인해 오히려 인쇄술은 다수가 공유할 수 있었고 그만큼 더욱 자유롭게 널리널리 퍼져나갈 수 있었던 역설 또한 이 '창조성'의 역사 속에 도사리고 있다.
결국 문자와 책은 말과 달리 증발되지 않고 공시적이고 통시적으로 인류의 '집단적 뇌'를 혁신적으로 연결하며 진화시켰다. 
이제 컴퓨터와 기계에 의한 '혁명'은 단기간에 이루어졌고 그 기간은 앞으로 더욱 단축된다.


"두뇌는 5억년 이상의 진화를 거치면서 유기체의 존속과 번식에 기여하도록 발달해 왔다. 이것이 인간의 지성과 기계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다. 컴퓨터는 문제해결, 두뇌는 생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두뇌의 작동원칙은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모든 행동은 유익하다고 보는 것이다... 컴퓨터에는 특정한 목표가, 반면 우리에게는 '자유'가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창조'적 사고가 인간을 자연계에서 조금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적 사고에 식량과 후손으로 보답한 자연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우리는 생물학적 존재로 남았다..."
-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 <4-10. 예언과 현실>, 슈테판 클라인, 2021.


그러나 저자는 이 '기하급수적인 발전'(같은책, <1-2>)을 이루는 로그 척도 도표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명확한 관점을 유지한다. 즉, 단지 연산능력이 인간보다 빠를 뿐인 컴퓨터와 경우의 수 확률데이터로 그 능력이 확장된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창조적 사고'의 유구한 역사를 압도할 수는 없다는 희망적인 주장이다. 인류라는 종에게는 수백만년, 전 생명체로 보면 5억년 동안 진화해 온 생물학적 뇌의 장대한 역사를 보았을 때, 특정 '목표'에 맞춰 프로그램 되어진 컴퓨터 등의 '4차 혁명' 요인들은 오랜 기간 진화를 거듭한 인간 '집단적 뇌'의 '자유'를 따라올 수 없다. 인간은 '행복'과 같은 '감정'을 통해 이 '창조적 사고'의 혁명적 진화를 가능케 해왔고 앞으로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류에게는 샹각과 사상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 관건이다.

단, 종의 존속을 위한 조건이 있다.
지구와 자연을 더이상 파괴시키면서까지 필요 이상의 욕심을 부리면 안될 것이며,
'아이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다.
이것이 현재 '삶의 자세로서의 창조성'(같은책, <4-11>)이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그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것을 실험할 준비가 되어있는 '아이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본다. '창조성'은 재능이 아니라 삶의 자세다.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것은 '창조성' 덕분이다. 인류의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서로에게 배우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경험자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후손에게 전해주었기에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 <4-11. 세상을 변화시키는 법>, 슈테판 클라인, 2021.

***

-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2021), 슈테판 클라인, 유영미 옮김, <어크로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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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원 -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서은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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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목적'이 아닌 '도구'다
- [행복의 기원], 서은국, <21세기북스>, 2021.


"뇌는 살벌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일종의 '생존지침서'다... 뇌는 생존경쟁에서 직면하게 되는 과제들이 무엇이고, 이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담고있는 수백년간의 생존기록서다... 인간은 여전히 100% 동물이다. 바로 이것이 최근 심리학계를 뒤흔드는 연구들의 공통점이다... 인간은 (이성통제라는) 자화자찬의 몽상에 수천년간 빠져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다윈의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현재 심리학에 막대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물결에 이상할 정도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연구자들이 한 부류 있다. '행복'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서양학자들은 '진화론'과 대조적 시각을 가졌던 한 철학자의 영향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다."
- [행복의 기원], <2. 인간은 100% 동물이다>, 서은국, 2021.


'스노비즘(snobbism)'이라는 용어가 있단다. 대상의 실체에는 관심없이 단지 아는체 하기 위한 '문화적 허영'이라고 번역된다는데, '스노비즘'적 해당 '전문가'는 속된 말로 '좆문가'란다.
이삼십대에는 별 관심도 없다가 나이들어 심심해진 내가 미셸 푸코 같은 난해한 프랑스 현대철학자의 저작에 손을 댔고 서평까지 써서 대학동기 단톡에 올리니 어느 동기 하나가 인간 모두의 '지적 허영'을 '스노비즘'에 빗대었다. 

이십년 전 푸코의 [감시와 처벌](1975)을 읽고 나서는 책 자체를 처단했고, 며칠전 [지식의 고고학](1969)과 [말과 사물](1966)을 읽을 때는 사실 '왜 이딴 책을 이리도 장황하게 썼을까?'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더랬다. 물론, 학자가 아닌, 특히 철학자가 아닌 일반인인 내가 푸코의 철학적 개념의 엄밀한 규정 속에서 그의 '고고학'적 사유를 추적하고 검증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란 건 안다. 푸코의 저작이 프랑스인들의 주식인 바게뜨빵만큼 팔렸다는 1960년대 중후반 프랑스 지적 분위기 자체도 곧이곧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동일자' 중심의 고전주의적이고 근대적인 철학관념이 견고했기에 1960년대 '신좌파'들이 니체와 같이 망치를 들고 고정관념을 깨부수려는 푸코 부류의 신사상에 그만큼 환호했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한편으로, 철학자 푸코는 박식하기 때문에 자기 사상의 증거로 온갖 사상가들과 예술작품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엔 사실 그게 바로 '스노비즘' 자체였다. 다시 말하지만, 학자가 아닌 내 눈높이에서는 푸코가 끌어다쓰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이나,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 및 잡다한 사상가들의 비유 같은 건 독서에 오히려 방해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푸코나 나나 '근대성'의 '인문과학'과 함께 등장한 '유한성'의 '인간'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 '인간' 모두는 100% '동물'이고, 그 무엇을 하든 '생존과 번식'을 위해 오랜 세월 그 최적화된 선택을 따라 유지되어온 '진화'의 산물이다.


"'행복'은 '사회적 동물'에게 필요했던 생존 장치..."
- [행복의 기원], <5. 결국은 사람이다>, 서은국, 2021.


심리학자 서은국 교수는 '행복'를 오래 연구한 학자라고 한다. 미국에서 역시 '행복' 권위자인 에드 디너(Ed Diener) 교수에게 배우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심리학 종신교수가 되었으나 귀국하여 국내에서 '행복'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다. 
그가 2021년에 낸 '행복'에 관한 심리학 대중서 [행복의 기원]은 일단 쉽고 재미있다. '행복'에 관해 학술연구서 같이 써봐야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이 결코 '행복'할 리가 없을테니 당연한 귀결일게다.

[행복의 기원]의 출발은 '철학'이 아니라 '생물학'이다. 인격화시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다윈'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진화생물학'에 가깝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목적론'적 사고 방식은 우리 인간사회 삶의 '목표'가 '행복'이라고 굳혀진 반면, 18세기 다윈으로부터 본격화된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수많은 생물들 중 하나의 동물종에 불과하고 이 '호모 사피엔스' 또한 다른 종들처럼 '생존과 번식'에 최적화된 조건으로 '적응'하며 지금까지 진화하고 살아남았다는 거다. 쉽게 말해 다들 알다시피 '인간도 100% 동물'이며 '행복'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해 '행복'이라는 '정신적 도구'를 역시 진화시킨 것이다. 인간의 뇌는 바로 '생존과 번식', 그리고 '진화'에 최적화된 기계이며 우리는 스스로도 모르게 이 오래된 '진화'의 습성을 따른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해 '행복'이라는 '도구'를 이용한다. 
이 책의 제목이 [행복의 기원]인 이유는, '진화론'을 정립한 찰스 다윈의 기념비적 저작인 [종의 기원](1859)을 기리기 위한 일종의 오마쥬와 같다.


"이 새로운 관점으로 보면 '행복'은 삶의 최종적인 이유도, 목적도 아니고, 다만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신적 '도구'일 뿐이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 [행복의 기원], <4. 동전탐지기로 찾는 행복>, 서은국, 2021.


그리하여 다시 푸코 얘기를 한다면, 그의 '스노비즘' 또한 철학이라는 어려운 학문의 영역에서 놀고는 있으나 철학하는 인간으로서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지적 허영'이라는 '행복'한 '도구'를 이용한 것이다.
한편, 이런 푸코를 씹으면서도 서평으로 요약하려는 나는, '글쓰기'나 '서평'이라는 '행복'한 '목적'을 위해 그러는 게 아니라 심심하지 않고 나름 즐겁게 '생존'하기 위해 '지적 허영 따라하기'라는 '행복'한 '도구'를 이용했을 뿐이다. 나는 '글쓰기'로 '생존'은 물론 '번식'도 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서은국 교수는 이 책에서 '행복'이라는 '정신적 도구'는 아이스크림과 같이 녹는 성질이 있으므로 복권 당첨과 같은 큰 '행복'보다는 시시하고 사소하고 작은 '행복'들이 더 효과적이라고 한다. 46억년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수백만년 동안 '생존과 번식'을 위해 진화해 온 인류는 이 수많은 작고 사소한 '행복'들을 통해 지금의 우리로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진화론'적 사실이다. 

그렇게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로 예리하게 다 베어내고 남은 [행복의 기원]의 결론은 결국, 우리는 "문명에 묻혀 살지만, 우리의 원시적인 뇌가 여전히 가장 흥분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음식, 그리고 사람"(같은책, <9장>)이라는 것이며, '사회성'을 통해 자연에 '적응'하고 함께 생존해 온 "결국은 사람이다"(같은책, <5장>과 <7장>)라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으로서 '행복'의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때"(이상 같은책, <9장>)가 된다. 음식은 금방 소화되고 '행복'은 아이스크림처럼 금세 녹지만, 이 맛을 안 사람은 또 다시 그 맛을 찾아 '사냥'에 나서고 그 무한반복 과정에서 '최적'의 형태로 '적응'하고 또다시 '진화'하게 될 것이다.


"결국 진화 과정에서 도움을 줄 때 기쁨을 느꼈던 자들('외향성'='사회성')이 선택적으로 더 많이 생존하게 되고, 그들의 유전자를 통해 우리는 이 습성을 물려받은 것은 아닐지..."
- [행복의 기원], <7. '사람쟁이' 성격>, 서은국, 2021.


'행복' 심리학자의 짧고도 유익한 책 덕분에 나는, 오래전 사두었으나 읽지 않았던 '진화론' 관련 책을 다음으로 읽기로 한다.

바로, '진화론'은 과학적 가설로서의 '이론(theory)'이라기 보다는 '창조론자' 조차도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fact)'이라고 단언하는 도널드 프로세로(Donald Prothero)의 [화석은 말한다(Evoluton : What the fossils say and What it matters)](2017)가 나의 다음 서평 타겟이다.


"결론... 우선, '행복'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 그것은 쾌락에 뿌리를 둔, 기쁨과 즐거움 같은 긍정적 정서들이다. 이런 경험은 본질적으로 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철학'이 아닌 '생물학'적 논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둘째, '행복'에 대한 이해는 곧 인간이라는 동물이 왜 쾌감을 느끼는지를 이해하는 것과 직결된다... 가장 본질적인 쾌감...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 진화의 여정에서 쾌감이라는 경험이 탄생한 이유 자체가 두 자원(생존과 번식)을 확보하도록하기 위함이었다."
- [행복의 기원], <9. 오컴의 날로 행복을 베다>, 서은국,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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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의 기원 - 생존과 번식, 행복은 진화의 산물이다], 서은국, <21세기북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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