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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는 식물들 - 아직 쓸모를 발견하지 못한 꽃과 풀에 대하여
존 카디너 지음, 강유리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평점 :
결국 '잡초'와 인류의 '공진화(共進化)'
- [미움받는 식물들](2021), 존 카디너, 강유리 옮김, <윌북>, 2022.
"식물은 인간없이 잡초가 될 수 없고,
인간은 잡초없이 지금의 인류가 될 수 없었다."
- [미움받는 식물들], <프롤로그>, 존 카디너, 2021.
1.
머리를 길렀다.
같이 밥을 먹다가 아버지는 "대가리꼴이 그게 뭐냐"시며 젓가락을 내동댕이 치시고는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으니 나는 머리카락을 계속 길렀고 이제 곧 2월이 되었다.
대학 1학년 동안 나는 영문과 학생회 내 '현대철학반', 줄여서 '현철반'에서 우리 학교 선배이자 철학과 강사인 우기동 선생의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라는 주 교재를 옆구리에 끼고 돌아다녔고 2학년 올라가면서 '현철반장'이 되었다. 중고등학교 때 떨어졌던 '반장'을 결국 이런식으로 하게 될 줄 몰랐지만 어쨌든 '현철반장'도 반장은 반장이었다.
1994년 2월에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간 총학생회 주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앞두고 나는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던 것인데, 좀 어이없지만 '철학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94학번 신입생들이 긴머리의 우수에 찬 2학년 선배 현철반장을 보고 현철반에 많이 들어왔으면 하는 욕심에 부자지간의 인연까지 포기해 가며 머리를 길렀던 거다. 스물한살 그때는 진정 몰랐다. 내 추레한 긴머리가 신입생들을 철학에서 더 멀어지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찌되었건, 2학년 현철반장의 긴머리 때문은 결코 아니었겠지만 대여섯 명의 신입생들이 현철반에 들어왔다. 우리 문학을 읽는 영문과 학생회 내 주력학회 '문학사랑반', 줄여서 '문사'는 신입생들이 넘쳐났고 '문사'는 우리 학회에 별 관심 없었겠지만 '문사'를 경쟁상대로 상정했던 '현철반'의 신입생 수는 초라했다. 1980년대에는 '패밀리'라는 지하서클이었던 학회들은 1990년대 들어 학생운동의 부문운동으로 공개활동을 했다는데, 영문과 학생회에서는 '문사'와 '현철반'이 아마도 그 잔재였을 것이다. '문사'와 달리 쭈그러든 '현철반'을 재건하고자 했던 나와 정박아와 지진아 등 영문과 철부지 삼인방은 그래서 '문사'를 끊임없이 의식했고 도발했다.
스물한살 당시의 나는 '현철반' 여자 후배에게 감히 철학과 학생운동을 가르친다는 핑계로 겉으로는 여학생에게 관심없는 척 하면서도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스스로가 내심 부끄러웠다. 그러나 나이를 더 먹고 알게 된 건 대부분의 청춘들이 그 때는 다 그랬다는 사실이다. 내가 속으로 좋아했던 여자후배도 안그런 척 했지만 다른 남학생의 뒤를 쫓아다녔을 테고, 나를 좋아하는 듯 했던 희귀한 여자 후배는 나만이 아니라 다른 남학생들에게도 엄청 들이댔다는 사실을. 당시에 존경해 마지않던 91학번 선배들이나 더 오래전 치열했던 80년대 학번 소위 '386' 선배들 모두 그땐 다들 그랬다는 사실을. 인류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 바빌로니아나 로마시대에도 스물한살 청춘들은 다 똑같았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없애려고 아무리 애써 뽑아도 보고 약을 쳐보아도 결국 사라지기는 커녕 더욱 창궐하며 진화발전을 거듭하는 '잡초들(Weeds)'처럼 이십대 청춘은 아무리 흑역사로 점철되더라도 똑같이 반복되고 진화발전하고 만다.
2.
하고싶은 일을 직업으로 사는 삶이 제일 부럽다.
그때는 몰랐지만 중년이 되고보니 학업을 위해 대학원에 들어가거나 운동판에 뛰어들거나 '문학도'답게 작가 또는 번역일 등을 하는 사람들이 나보다 행복해 보였다. 물론 그들은 회사 다니며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나를 그렇게 볼지도 모를 일이지만.
1994년 당시 '현철반'이 아닌 '문사' 소속으로 기억하며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연정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청춘 남학생을 쫓아다녔을지도 모르는 여자 후배가 번역가가 되었다는 소식은 익히 들었던 터였다. 대전에서 올라온 작고 눈매가 진하던 그 스무살짜리 여학생은 훗날 번역가가 되었고 오래전 소설가를 꿈꿨지만 결국 소설을 쓰지 못한 나는 그 후배의 삶을 속으로 응원했다.
얼마전 어쩌다 페이스북 친구가 되어 안부를 묻고 지내다가 그 후배가 식물을 키우는 이른바 '식집사'라는 것과 최근에 '식물'에 관한, 그 중 '잡초'를 주제로 한 미국 책을 번역했다는 걸 알고 냅다 책을 샀다. 속으로만 응원하는 게 아니라 실력은 없지만 '서평'을 쓰는 SNS 비인기 '작가'이기도 한 나는 독후감 하나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고맙게도 후배가 책을 한 권 또 보내주니 한 권은 서울집에, 다른 한 권은 오산 자취방에 두고 읽었다.
어려서부터 동물에는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구분도 잘하는 나는 사실, 식물에는 영 젬병이다. 나무와 꽃, 각종 식물은 아무리 설명을 듣고 다음에 다시 봐도 구분을 영 못한다. 그러니 실은 '잡초의 삶(Lives of Weeds)'이라는 원제목에 [미움받는 식물들]이라는 우리말 제목의 이 책의 진도가 생각보다 나가지를 않았다. 물론 내용은 흥미롭다. 결론인 즉슨, 인류가 1만년 이상 더 오래전 농경을 시작하면서부터 효율적인 작황을 바라며 제거하려던 잡초들(어저귀, 기름골, 베가위드, 망초, 비름, 돼지풀, 강아지풀 등)은 인간이 제거하려면 할수록 더욱 강해지며 진화발전한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바퀴벌레의 진화도 그렇고 공상과학 방사능 오염 괴수 고질라도 그렇고 잡초 또한 그렇다.
인류와 잡초는 '공진화(共進化)', 즉 '함께 진화'하는 것이다.
미국의 사료작물학 박사이자 농무부 연구원이라는 존 카디너(John Cardia)가 2021년에 쓴 책 [미움받는 식물들(Lives of Weeds)]은 나의 1년 과후배 강유리가 번역했다. 그 아이가 속한 '펍헙번역그룹'에서 번역가 각자의 관심사를 가지고 직접 기획하고 발굴한 책이라 하니, '식집사' 강유리 선생의 안목 또한 돋보인다. 본인이 좋아하는 내용을 본인이 좋아하는 번역으로 풀어내는 과정이 얼마나 행복했을지 상상이 간다. 인지도나 대중성 같은 건 1도 없는 나같은 아마추어 SNS 작가도 책을 읽고 글을 쓸 때가 세상 가장 행복한 순간이니 말이다.
"봄만 되면 흙을 뚫고 나타나는 잡초의 끈질긴 생명력은 세상의 모든 정원사에게 좌절감을 준다. 이러한 적시성은 수천 년 동안 의도하지 않은 농경선택의 결과다. 잡초가 정기적인 농사의 주기에 적응하게 된 것이다. 농사의 주기 뿐 아니라, 씨앗이 쟁기질에 파묻히고 경운에 따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수확물과 함께 퍼져 나가는 등 농사의 모든 과정에 잘 적응한 유전형이 유리해졌다."
- [미움받는 식물들], <비름>, 존 카디너, 2021.
한 때는 약용으로도 쓰이고 인간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던 민들레가 '잡초'가 된 건 19~20세기 초 미국 중산층들이 유럽 귀족들과 같은 넓은 잔디정원을 로망으로 삼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비름을 비롯하여 기름골과 망초 같은 식물들이 '잡초'가 된 건 농업이 기업형으로 대규모 산업이 되고 '돈이 되는' 작물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인간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 식물들을 박멸하기 시작한 시점부터다. 물론 농경을 처음 시작했을 아주 오래전부터 '잡초'는 제거의 대상이었겠지만, 본격적으로 제초제를 만들어내고 대량살포를 통해 기업형 농업을 영위하던 최근에 이 식물들은 '잡초'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제거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노력에 정확히 반비례하여 이 '잡초'들은 진화했고 또 더욱 강해졌다.
"돼지풀은 지배, 착취, 식물에 대한 오만함을 불러온 숭리이자 인류세, 아니 '암브로세Ambrocene(돼지풀세)'의 잡초라 할 만하다... 이 초라하고 너덜너덜한 잡초를 인류가 직면한 전 세계적인 환경문제와 연결 짓는 것은 무모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돼지풀과 환경문제는 둘 다 '발전'이라는 허황한 생각에서 생겨났다. 둘 다 지구에 대한 인간의 신념과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잡초가 그냥 식물이 아니듯이 '기후위기'는 그냥 날씨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에 있는 자원을 끊임없이 뽑아내고 성장할 것을 요구하는 인간 주도적 세계경제의 결과물이다."
- [미움받는 식물들], <돼지풀>, 존 카디너, 2021.
'누더기잡초(ragweed)'라는 이름에, 신들이 먹는 음식을 일컫는 '암브로시아(Ambrosia)'라는 학명을 지닌 돼지풀은 북아메리카에서 원주민들이 농경을 시작하던 5천년 전부터 '잡초'였다. 정확히 말하면 돼지풀이 다른 식물들과 자라는 땅에 인간들이 침범하여 작물을 심고 먹지도 쓰지도 못하는 돼지풀을 잡초로 규정하고는 지금껏 없애고 있는 중이다. 돼지풀이 잡초로 명성을 날리던 18~19세기 초 미국은 세계 각지로 배와 선원과 군인과 전쟁물자를 보냈고, 당시 주요 전쟁무기였던 말들의 건초더미와 군인들의 군장을 통해 돼지풀 씨앗도 확산되었다. 소련 스탈린의 농업 집산화에 저항하면서 농토를 놀렸던 우크라이나 농지에서도 이 돼지풀들이 성황하여 돼지풀은 이른바 '스탈린 잡초'라고도 불린다는데, 인류의 문명 발전과 극도로 함께 진화한 잡초의 대명사가 미국의 '국민 잡초' 돼지풀이다.
"가을강아지풀이 환경 전체를 장악하는 볏과 잡초가 된 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던 일이 아니었다. 땅과 자원 이용에 대한 태도가 다른 곳에서는 아직 주요 잡초가 아니다. 세타리아(강아지풀)가 가능성과 희망을 상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어떻게 농사를 짓고, 먹고, 소비하고, 서로를 대하고, 자연을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러한 선택에 따라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고 무엇이 잡초가 될지가 결정될 것이다."
- [미움받는 식물들], <강아지풀>, 존 카디너, 2021.
길가에 늘어선 강아지풀들(세타리아:Setaria)의 친척 중 가장 강력한 잡초가 가을강아지풀이다. 저자인 존 카디너 박사가 이 책 [미움받는 식물들]의 제일 마지막 장 주인공으로 가을강아지풀을 다루는 이유가 "잡초가 보여주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어서"(같은책, <가을강아지풀>)라고 하는 이유가 역설적으로 가을강아지풀이 최강의 잡초이기 때문이다. 모든 강아지풀이 다 잡초는 아니다. 그러나 이 '세타리아속' 식물 중 가장 크고 강력한 생존력을 지닌 이 가을강아지풀은 아마도 농업과 산업 문명 일체를 고속발전시켜 왔던 인류가 키운 최강잡초임에 틀림없다. 강력한 제초제를 이겨내고 스스로의 유전자를 변형하는 식물의 가소성과 최신 화학약품을 동반한 극한의 제초환경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선택압 속에서 강화된 강아지풀의 패자가 바로 가을강아지풀이기 때문이다.
잡초전문가인 존 카디너 박사의 결론은 수천년 동안 잡초를 없애고 이기려 해온 인류가 "결국 잡초를 당해내지 못했다"(같은책, <에필로그>)는 것이다. 즉, 초강력 잡초 가을강아지풀을 보고 인류의 문명을 다시 돌아보자는 것이다. 자연과 생태계와 동반하는 삶을 시작하면 잡초는 더 이상 인류에게 제거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그것이 인류와 잡초 사이에 이어져 온 수천수만년 간 '공진화(共進化)'의 결말이다.
3.
'공진화(共進化)'를 다시 생각해 본다.
예전의 나는 푸르른 청춘이었으나 돌아보면 쑥스럽고 겸연쩍은 흑역사를 숱하게 남겼다.
지금의 나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후회와 갖가지 회한을 곱씹지만 사실 다시 그 시간이 주어진다 한들 지금보다 더 잘 살아볼 요량은 없다.
다만, 그 당시든 지금이든 부족한 나와 함께 울고 웃으며 진화해 온 사람들과 관계, 환경을 생각한다.
머리를 기르면 내게도 '철학'이 올지도 모른다고 믿던 스물한살의 나와 그런 나를 만들어준 사람들, 90년대 초반의 시대.
좋았든 싫었든 나와 '공진화(共進化)'했던 환경들이다.
세월이 흘러 오래전 긴머리의 아들을 못마땅해하셨던 중년의 아버지가 연로하시어 거동도 어려운 지금, 나와 대립하고 상생하며 지내온 무수한 사람들과 환경을 돌아본다.
진부하지만 결론은,
내가 스스로 진화하며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다~ 모두다~ 사랑하리~"의 그룹 송골매 노래의 제목일지언정.
"사람이 있는 곳에 잡초가 있다... 우리는 결국 잡초를 당해내지 못했다."
- [미움받는 식물들], <에필로그>, 존 카디너, 2021.
오래전 알았던 대학후배가 번역한 잡초와 인간에 관한 책을 읽으며 새삼 떠올린 생각이다.
부디, 이기려 하지 말고 함께 살아가려 노력해볼 일이다.
머리가 길었고 '현철반'에 후배들을 불러모으던 그 푸르던 젊은날의 내 생각은 분명 그랬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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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움받는 식물들(Lives of Weed) - 아직 쓸모를 발견하지 못한 꽃과 풀에 대하여](2021), John Cardina, 강유리 옮김, <윌북>,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