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신곡』 강의 교유서가 어제의책
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이영미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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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단테처럼.
- [단테 '신곡' 강의], 이마미치 도모노부, 2002.


"우리의 생명길 한가운데에서,
어두운 삼림에 있음을 알았으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 단테 [신곡], 첫 3행, 이마미치 도모노부 번역.


1.

군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단테를 읽지 않았을 거다.

입대한지 일년이 넘었고 상병을 달았지만 대놓고 책을 읽을 짬밥은 아니었다. 읽을 책이 없어 내무반 책꽂이에 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몰래몰래 틈틈이 읽은 경험으로 단테의 [신곡]을 읽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라스콜리니코프' 따위의 러시아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 고생했는데, 단테를 읽을 때는 상황 자체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순례하는 단테를 따라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에게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던 베르길리우스는 단테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던 선학 시인이었던 반면, 
나는 나를 그 길로 안내하던 단테를 그닥 존경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래된 책으로 군대 내무반 책꽂이에 거의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것이었으니 번역이 형편없기 때문이었다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단테(Dante)에게 천국을 보여줬던 그의 이념 속 연인 '베아트리체(Beatrice)'를 따라 끝까지 읽고 말았다.
뭐 어차피, 군대 상병이었던 당시 나에겐 그 책 말고는 딱히 읽어볼 문자도 없었다.


2.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의 이메일 아이디는  'beatrice'로 시작하지 않았을 게다.

나름 '문학도'였으니 군대에서도 이등병에서 일병을 거치며 러시아 소설을 집어들었고 단테까지 펼쳐보았을 텐데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이름 '베아트리체'가 눈에 확 들어왔다. 먼저 들춰본 [신곡]의 결말에서는 온통 '베아트리체'만 보였다. 그러나 번역이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아 난 차라리 생경한 러시아 이름들로 가득한 도스토예프스키를 먼저 읽기로 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단테를 다시 펼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상병 진급 정기휴가를 나갔던 난 학교 2년 후배인 그녀에게 사귀자고 했고 뜻밖에도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녀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를 그 시간이 나에게는 지금까지도 가장 행복한 장면 중 하나였다. 

나에게도 단테처럼,
나만의 '베아트리체'가 생겼다. 

부대로 복귀한 나는 내무반 책꽂이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던 단테의 [신곡]을 다시 꺼냈고, 
단테와 나는 각자의 '베아트리체'를 따라 순례를 이어갔다. 
단테는 지옥과 연옥이라는 고난을 견뎠고, 
나는 거지같던 번역문의 고난을 견뎌냈다. 
우리에겐 '베아트리체'라는 공동의 '별'이 있었다.

그렇게 스물세살의 군장병인 내게,
사랑이 왔다.


3.

"영어 'history'의 뿌리가 된 라틴어 'historia'는 그리스어 '히스토리아'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은 '발자취를 따라 대상을 쫓아가다'를 의미하며 사냥용어로 쓰인 동사에서 비롯되었다. 즉, '발자취를 보고 동물이 도망친 방향을 안다는 것이며 그것과 동일선상의 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이 역사해석의 방법이었다."
- [단테 '신곡' 강의], <14강. 천국편 3>, 이마미치 도모노부, 2002.


전역 후 예전에는 후배였던 그녀를 본격적으로 만나면서,
처음 만든 내 이메일 아이디로 'beatrice'를 선택했다. 

군복무 후반기 일년을 헌신적으로 기다려주고 나를 위해 희생했던 그녀는,
여전히 나의 '베아트리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게든, 단테에게든, 
'베아트리체'는 현실의 사랑이 아니었다. 
그냥 동경하고 소망하는 마음 속 '별'이 되었다.


일본의 고전인문학자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2002년에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1265~1321)의 14세기 장편 서사시 [신곡(神曲/Divina Commedia)]에 관한 강의 15편을 책으로 엮어냈다.

지옥 34곡 1,540여 행과 연옥 33곡 1,540여 행, 천국 33곡과 역시 1,540여 행의 단테 [신곡] 100곡을 전부 해석할 수는 없지만, 주요 구절을 이탈리아어 원어와 그 유래로서 라틴어 및 그리스어를 상세히 열거하며 갖가지 일본식 번역을 소개하고 필자 본인의 번역도 곁들인다. 이탈리아어도, 일본어도 모르는 나는 그런 구절은 눈으로만 훑고는 빨리 넘어간다. 그랬더니 6백 페이지의 이 책은 짧은 시간에 마지막 장을 덮고 만다. 

[신곡]의 주요 싯구에 관한 세밀한 번역은 차치하고 이 책의 묘미는 사상가이자 시인인, 즉 '시인철학자'로 묘사되는 단테의 굵직한 선학들로서 그리스 문명의 호메로스와 로마의 키케로를 거쳐 베르길리우스에 이르는 인문학적 계보를 설명하는 초반부 1~3강이다.

우선, 단테는 로마의 키케로처럼 현실 정치가였다. 그것도 피렌체 공국의 '총리' 또는 장관급 되는 거물 정치인이었는데 교황권과 세속왕권의 정쟁에 휘말려 실각을 하고 망명생활까지 한다. 결국 망명지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에 라틴어가 아닌 고국의 이탈리아어 방언으로 적어내린 서사시가 [신곡]이다. 베아트리체로 상징되는 천상의 종교관의 내용과 별개로 루터의 독일어 성경 못지 않게 단테의 이탈리아어 서사시 [신곡]은 서양 인문학 고전사에서 의미가 깊다. 
단테 이후로 독실한 종교사상을 꼭 라틴어로만 적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는 호메로스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 고전을 로마식 라틴어로 번역한 키케로의 인문주의를 이어가는 길이었고 이로 인해 로마 최고 시인의 경지에 오른 베르길리우스의 인문학을 단테는 존경하며 따르게 된다.
이것이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지옥과 연옥을 안내해달라며 베르길리우스를 찾아간 이유다. 물론 천국에 오르지 못한 베르길리우스는 천국의 문 앞에서 단테를 베아트리체에게 인계한 채 사라져 버리지만, 단테가 사랑이 아닌 존경으로서 마음 속에 '별'로 삼았던 사람은 단연 [아이네이스]라는 로마건국 서사시로 로마의 주체적 역사관을 열었던 베르길리우스였다.

또한 단테의 종교관은 그리스도교에서 천국과 지옥으로 양분되는 이분법이 아니라 '연옥'의 존재로 특화된다. 
12세기경부터 구체화된 모습으로 등장했다는 '연옥'은 '지옥'과 '천국' 사이에 놓인 '희망'의 공간이다. 단테가 지옥문을 들어설 때 지옥문은 '희망을 버리라', 또는 '두고 오라'고 말한다. 지옥은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하는 절망의 공간이다. 그러나 연옥에서는 불로써 정화된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설 수도 있는 '희망'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단테는 연옥에서 비로소 '별'을 본다. [신곡]의 연옥편에 나오는 '별'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별을 쫓다보면 천국의 문 앞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나게 된다.

일본의 단테 전문가인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단테의 [신곡]을 매개로 서양 고전의 인문학적 기원을 돌아본다. 여신 무사(뮤즈)가 부르는 노래를 서사시로 옮겨적은 호메로스부터, 그리스와 로마의 인문주의를 번역의 형태로 매개했던 사상가 키케로, '나는 노래한다'고 선언하며 여신이 아닌 인문학자로서 시인 본인이 역사를 읊는 베르길리우스의 주체적 인문주의의 맥을 잇는 단테는 당대 지배이념인 그리스도교의 역사관을 장편 서사시 [신곡]에 담았다. 원래 제목이 '극(劇)'이나 '곡(曲)' 자체인 'commedia'였던 이 서사시는 이후 단테를 추앙하던 보카치오가 '신성하다(divine)'라는 의미로 앞에 'Divina'를 붙여 '신곡(神曲/Divina Commedia)'이 되었다. 
고매한 라틴어가 아닌 대중적인 이탈리아어 방언으로 적어내려간 단테의 [신곡]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 이전에 씌어졌으나 루터의 독일어 성경 못지 않게 서양 인문주의 사상사에서 사상의 대중화를 이끈 가히 '혁명'적인 계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곡]의 절정은 베아트리체를 향한 단테의 사랑이다. [신곡]의 첫머리에서 절망의 숲을 헤매던 단테에게 신의 거대한 프로그램인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며 절망을 너머 희망으로 이끈 베르길리우스 또한 베아트리체의 계획이었고 인간으로 하여금 원죄를 짓게 한 아담과 인류를 대표하여 속죄한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살해한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로마의 복수 또한 신의 역사라는 단테의 세계관의 중심에는 베아트리체가 오롯하게 서 있다. 

그렇게 단테가 천국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만나게 되는 베아트리체는, 
단테에게는 희망의 '별'인 동시에, 
신의 역사를 증명하는 단테 자신이었다.

40대에 현실에서 길을 잃고 '숲을 헤매던' 단테가 지옥과 연옥을 거친 후 천상에서 만난 베아트리체는 아마도 20대에 요절한 그 모습 그대로였을 게다.
단테의 마음 속에 남은 '희망'의 '별'로서의 그녀는 그가 '소망한 바의 실체'인 것이지 더이상 연모의 대상으로서의 여인이 아니었다.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너머 신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인 동시에 그 '희망의 실체'를 믿는 단테 본인인 것이다.


4.

"신앙이란 바라야 하는 것(소망/희망)들의 실체이다."
- 토머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천상의 안내자 베아트리체 조차도 따라오지 못한 천국의 대단원에서 신의 대리자가 단테에게 '믿음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중세 스콜라철학자 아퀴나스의 대답과 같다. 철학적으로 단테는 아퀴나스를 따르고 궁극으로 거슬러 오르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닿는다. 도식적인 해석이기는 하나 플라톤의 이분법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적 '형이상학'의 전통이다. 유물론 사상이 발전한 현대에 들어와서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관념론으로 분류되지만 단테까지의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를 가장 이단적이고 현실적이며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최고의 '과학'이자 '철학'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신학적 역사관과 철학을 견지하는 단테는 토머스 아퀴나스의 뒤를 따랐을 뿐.

그렇게 단테에게도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처럼 '신앙'이란 '희망'의 다른 이름이었고, 
베르길리우스를 통해 지옥과 연옥을, 
'베아트리체'를 쫓아 천국을 우리에게 보여준 이유가, 
바로 우리들 마음 속 '희망'이라는 '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5.

결국 그녀는 떠났지만, 
'베아트리체'는 여전히 남았다. 

이후로도 'beatrice'는 내 이메일 계정이고 각종 아이디의 대표명이다.

그녀는 아마 나를 만났던 젊은날을 지워버리고 싶은 아픈 시간으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당시 나의 '베아트리체'는 그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녀에 대한 미친 듯한 사랑도 결국 그녀를 사랑하던 젊은 나 자신에 대한 그것이었음을, 
내가 쫓던 마음 속 '별' 또한 젊은날의 나 자신이었음을,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알겠다. 
당시 부대에서 그녀와 주고받던 수백통의 군사우편에서도 비슷한 말을 해댔겠지만, 
당시야 뭐 열에 들뜬 나머지 뭔가 있어 보이려고 끄적인 거였다면, 
중년의 지금에서는 그것이 우리의 '역사(history)'였다는 걸 진정 알 것도 같다.


결국, 
당시 나의 '베아트리체'는, 
내가 한때 사랑했던 '그녀'가 아니라, 
젊음이라는 열병을 신앙과도 같이 앓던, 
나 자신이었다. 

당시 내가 단테의 [신곡]을 읽으며 쫓던 '베아트리체'는, 
스스로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었고, 
내 마음 속 '별'이었던 거다.

마치,
연옥을 해매던 단테처럼.

***

- [단테 '신곡' 강의](2002), 이마미치 도모노부, 이영미 옮김, <교유서가>,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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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 메이지 일본, 이순신을 신으로 받들다
사토 데쓰타로 외 지음, 김해경 옮김 / 가갸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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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극장엘 갔다
-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세키코세이 외, 1892~1927.



"나는 그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의 수치심을 크게 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웅지가 세상을 덮고 하늘에 닿을 호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구의 몸으로 지하에 누워 있게 된 것은 수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수군이 패한 수치는 다름 아닌 조선의 한 사내 '이순신' 때문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거늘, 어찌 오늘은 물론 옛일을 돌이켜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의연히 분발하지 않을 수 있으랴."
-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조선 이순신전>, 세키코세이, 1892.


1.

혼자 영화를 보았다.
폐암 말기 아버지의 호스피스병원을 누나들과 함께 알아보고 오랫만에 삼남매가 모였으니 서울 도심 구경도 하고 영화도 한 편 볼까했지만 비오는 종로의 횟집에서 낮술만 좀 마셨고 영화는 시간표가 맞지 않았다.

딱히 보고싶은 영화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누이들을 버스 태워 보내고 전철로 수유역에 내린 나는 집으로 걸어가다가 부러 극장 앞을 지났고 내처 들어가 영화시간표를 보았다. 

사실 보고싶은 영화가 있었던 것도 같았다.
[한산 - 용의 출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이야기를 같이 보러 가자고 며칠전 아내를 잠시 꼬셔보았지만 아내는 귀찮다며 결국 영화관에 가지 못했다. 처와 함께 극장을 가본 일이 까마득하다. 그렇다고 누나들하고 꼭 [한산]을 보겠다는 건 아니었고 시간 맞는 영화 한 편 보고 싶은 정도였다. 

그렇다.
나는 영화가 보고 싶은 게 아니고 극장에 가보고 싶었던 거다. 그러다가 떠오른 게 [한산]이었던 거다. 나 사는 방식이 늘 이렇다. 뭐 하나 절실한 게 없다. 그냥 절실하더라도 아닌 척, 준비했더라도 안한 척. 그렇다 보니 삶에 딱 절실하게 하고 싶은 게 없다. 그러다 보니 삶의 통증도 무디어져 가는 느낌이다.

결국 비오던 목요일 오후 처음으로, 
홀로 극장엘 갔다.
나는 영화 [한산]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고 극장에 가고 싶었던 걸로 정리했다.

그리고 우연히 이순신 장군을 만났다.


2.

"견내량 전투에서 좁은 해협 입구를 피해 넓은 바다로 나간 다음 재빨리 함대의 진법을 바꾸어 일제 공격을 퍼부은 점과 야간에 척후선을 파송하여 우리 수군의 동정을 정찰한 일 같은 경우는 실로 현대 함대 전쟁의 상규와도 은연중 부합한다. 그 지략의 탁월함과 용의주밀함은 우리 장수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런즉 두 나라 군대의 승패가 어찌 이유가 없다 하겠는가. 나의 말이 얼토당토 않다면 모르되 만일 불행히도 맞다면 나중에 해군에 종사하려는 사람은 잘 새겨두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조선 이순신전>, 세키코세이, 1892.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이순신전]을 쓰신 게 1908년이라고 한다. 경술국치 한일합방을 목전에 둔 풍전등화의 조선에서 단재 선생께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신라 태종무열왕, 그리고 조선의 이순신 장군을 소환하고자 했다. 고대 동북아시아 대륙의 제패자 광개토대왕과 삼한일통 후 당나라 외세를 몰아낸 김춘추, 임진년과 정유년 일본이 촉발한 동북아 대전쟁이 낳은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이다. 아마도 단재 선생의 [이순신전]이 우리나라 최초의 이순신 장군 전기 아니었을까 싶고, 우리 어릴적 읽었을 이순신 장군 위인전의 모본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사실 최초의 [이순신전]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먼저 나왔단다.

필명 '세키코세이'라는 일본인은 19세기말에 [조선 수군통제사 이순신전]을 집필하여 친구인 시바야마 나오노리에게 보냈고, 일제 외무성 관리로 조선에서 근무하던 시바야마가 이를 1892년에 소책자로 발간한다. 필명 '세키코세이'는 1891년까지 조선에 근무하다가 상해 총영사를 지낸 일본 외무성 관리 오다기리 마스노스케라는 추측이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아마도 이 소책자의 '감수자'로 되어있는 시바야마 나오노리가 실제 저자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1908년 단재 선생의 [이순신전]은 조선을 구하는 영웅을 소환하기 위해 집필된 반면, 1892년 일본인의 [조선 이순신전]은 일본의 치욕을 곱씹으며 앞으로 같은 패배가 반복되지 않도록 뼈에 새기기 위함이었다.

집필의 목적이 확연하게 다름에도 결과는 같다. 16세기말에 위기의 조선을 구했던 단 한 사람은 바로 '이.순.신' 장군 그 한 분이었다는 사실의 확인과 재확인이다. 아마도 노론 벽파와 이완용 같은 전주 이씨 왕족 일부까지 야합하여 바야흐로 조선을 일제에 팔아먹으려 하던 19세기말 그 당시의 조선에서는 덕수 이씨 순신 장군을 영웅으로까지 평가하지 않았던가 보다. 일본 또한 영웅 이순신이 아닌 3백년전 일본의 패배를 복기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이순신 장군을 성웅으로 묘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세키코세이'의 [조선 이순신전]은 한산대첩과 명량대첩, 그리고 장군의 마지막 노량대첩을 중심으로 원균의 패착과 일본 수군대장들의 무력함, 패전 원인의 분석과 그래도 결국 조선을 구한 단 한 사람은 이순신이라는 결론으로 한편 조선의 무능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후 메이지 시대 해군 교관 오가사와라 나와나리가 1902년에, 해군대장 사토 데쓰타로가 1927년에 이순신에 관한 비슷한 짧은 글을 발표했고 이렇게 세 글들을 하나로 묶은 게 국역본으로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가갸날>, 2019.)라는 책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순신 이야기, 나폴레옹을 막은 영국의 해군제독 넬슨이 있다면 조선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막은 성웅 이순신이 있다는 이야기, 변방에서 여진족을 막던 이순신을 수군통제사로 추천한 유성룡과의 인연, 원균과 이순신의 악연 등등이 19세기말 다른 사람도 아닌 일본인에 의해 정리되고 평가되었다. 물론 유성룡의 [징비록]이나 이순신 장군 본인의 [난중일기]에 나오는 이야기일 수는 있겠으나 대중서로 본격 집필된 게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좀 씁쓸하기는 하다. 그래도 얼마 안 지나 위대한 조선인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나서주심에 깊이 감사하다.

어쨌거나 일본인에게든 조선인에게든 '이순신'은 조선을 홀로 구한 영웅임에 틀림없다.


3.

"후세의 누군가 이순신을 위해 붓을 쥐게 된다면 조선의 운명은 이순신 덕분에 회복될 수 있었고, 이순신의 용기와 지략은 유성룡 덕분에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음을 기록해야 할 것이다."
-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조선 이순신전>, 세키코세이, 1892.


비오는 목요일,
홀로 극장엘 갔다.
그리고 성웅 이순신 장군을 우연인 듯 만났다.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 영화 3부작을 기획하고 있단다. 
1부 [명량]은 가장 극적인 승리를 이룬 '상유12척'의 명량대첩을 그렸고, 이를 기점으로 2부 [한산]은 이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임진전쟁 최대 승전인 한산대첩과 거북선의 출현을, 예정된 3부 [노량]은 명나라 제독 등자룡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가 전사한 이순신의 최후 노량대첩을 그릴 예정이라고 한다.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을 두려워하던 일본 수군대장 와카자키가 이전의 한산대첩에서 조선수군을 깔보던 바로 그 장수다. '세키코세이' 등 일본 이데올로그들이 조선 영웅 이순신전을 지은 관점이 바로 일본 수군제독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시각이다. 

해저괴물 '복카이센'으로 묘사된 조선의 최첨단 전선 거북선과 함께 역사에 등장한 '해룡(海龍)' 성웅 이순신 장군을 추억한다.

***

1.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1892~1927), 사토 데쓰타로/세키코세이/오가사와라 나가나리, 김혜경 옮김, <가갸날>, 2019.
2. [이순신전], 신채호, <대한매일신보>,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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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전주 여행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5
황윤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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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은 견훤(甄萱)은.
-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황윤, <책읽는고양이>, 2022.


"892년, 나라에 도둑 무리가 벌떼처럼 일어나고 백성들은 정처없이 흩어지자, 이때를 기회로 삼아 '견훤(甄萱)'은 자신을 따르는 동료를 모아 서남 해안에서 당당히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러자 불과 한 달 만에 5,000명의 무리가 그에게 모여든다. 견훤은 무주(武州), 즉 현재의 광주를 함락시키고... 앞으로 백제 영역을 완전히 장악하여 백제 왕에 오르겠다는 야심을 보이고 있을 때, 견훤의 나이 불과 스물다섯이었다."
-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후백제 왕이 된 견훤>, 황윤, 2022.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삼봉 정도전을 꼽는다. 우리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 전체 역사를 통틀어 성리학의 [대학]이 말한 '3강령 8조목'을 '혁명'을 통해 현실화시킨 인물로 나는 생각한다. 물론 유방의 한나라를 전한과 후한으로 나눈 '신'나라의 왕망도 유교 이상국가를 지향하다 단명했다지만 당시의 유학은 후대의 성리학만큼 정교한 이론이었다고 볼 수 없다. 주희 이래 성리학은 전 우주를 통찰하려는 세계관이었고, 그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새왕조를 개창한 유일한 인물이 내 생각에는 정도전이었다. 술에 취한 정도전은 말했단다.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쓴 것이라고. 이성계의 주먹이 없었더라면 정도전의 머리가 없었듯, 정도전의 머리가 없었다면 이성계의 주먹은 고려의 주먹으로 썩고 말았을 것이다.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빈어로서 그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혹은 이르기를, (궁예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때 옥상에서 하얀 빛깔이 마치 긴 무지개처럼 하늘 위로 뻗치니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중오일(단오)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齒)가 있으며, 또 불꽃이 이상하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므로 기르지 마십시오.' 하여 왕은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그 집에 가서 죽이라고 하였다. 사자가 강보 속에서 들어내어 다락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가 몰래 받다가 잘못 손으로 찔러서 한쪽 눈을 멀게 하였다.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수고하며 양육하였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자 유희를 그치지 않으니 그 유모가 말하기를, '네가 태어나서 나라의 버림을 받았으나 나는 차마 못하여 몰래 기르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너의 미친 행동이 이러하니 반드시 남이 알게 될 것이며, 너와 나는 함께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하느냐.' 하였다. 궁예는 울며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나는 떠나서 어머니의 근심을 없게 하겠습니다.' 하며 세달사로 갔는데 지금의 흥교사가 이곳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불렀다."
- [삼국사기], <열전 권10 - 궁예전>, 김부식, 1145.


그 다음으로 주목하는 인물을 톺아보라면 그 수많은 영웅들 중 후고구려의 궁예를 뽑겠다. 어린 시절의 궁핍을 딛고 본인의 이념과 실천으로 일가를 이룬 입지전적 인물의 전형이라고 나는 본다. 사료에는 신라왕족이라 적고 있으나 아버지가 무슨왕인지도 정확하지 않고 이를 뒷받침할 근거도 [삼국사기] <열전 10권> 말고는 빈약하다. 정도전 또한 서얼의 한계로 사회적 승진의 한계를 안고 있었으나 고려말 난세에 급진적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로 출사했고, 궁예는 이보다 5백년 전 '선종'이라는 세달사 탁발승에서 난세에 무장호족이 된다. 내가 중국사에서 서민황제인 한고조 유방과 궁예처럼 탁발승에 거의 극빈민에 가깝던 거지황제 명태조 주원장에 주목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난세의 시대적 배경도 있었지만 절대적으로 본인의 실력만으로 천하를 호령했던 자들이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결과의 성패를 떠나서 말이다. 물론 출신이 비슷하더라도 당말 난세의 배신의 아이콘이자 양아치황제였던 후량의 주전충 같은 자는 얘기가 다르다.


소장 역사학자이자 '나 혼자 여행' 시리즈의 작가 황윤 선생이 2022년 3월에 낸 여행기는 [나 혼자 전주 여행]이다. 전주 하니 일단 조선왕조를 개창하여 정도전을 비롯한 고려말 급진적 성리학자를 처단한 후 왕가를 확고히 한 이씨 본향의 이야기만 나올 줄 알았건만, 생각치 못했던 '견훤(甄萱)'이 등장한다. 후백제를 건국한 바로 그 견훤이다. 저자는 이성계와 견훤을 '도플갱어'로 삼아 전주 기행문을 이어가고 있다. 이 책은 신라말기 후삼국시대 군웅할거의 난세 속에서 궁예 및 왕건과 마지막까지 천하를 다투다가 고려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여 자기가 세운 후백제를 본인의 손으로 멸망시킨 견훤의 최후와 함께 논산에서 이야기를 마치는데, 단순히 '전주'라는 오래된 도시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시기 '9주 5소경' 중 하나였던 '전주'와 남원(남원경) 및 백제와 후백제 공히 멸망의 고장 논산까지 아우르는 후백제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현재까지도 전주를 지배하는 이성계와 오래전 잊혀졌지만 백제땅을 다시 지배했던 견훤의 시차적 약전(略傳)이기도 하다. 저자가 추적한 바에 의하면 견훤은 신라시대 '이씨'였고 그의 아버지였던 상주의 아자개의 본명도 '이원선'이었는데 신라의 서남쪽 해안에서 왜적을 막는 군인이었다가 장수가 된 후 백제땅에서 일가를 이룬 견훤은 본래의 '이씨' 성을 버리고 백제의 귀족성인 '견씨'를 택한다. 즉, '견훤'은 본래 '이씨'의 후예라는 추정으로 이성계의 조상일 수도 있음을 은연 중에 암시하고 있다.


"마침 이 당시 견훤은 전유와 비슷하게 892년부터 신라 서쪽을 통치하는 공(公)의 지위에 스스로 올라 있었으며, 900년부터 935년까지는 옛 백제 지역에서 후백제 왕으로 활동했다. 즉, 오월 왕 전유와 시기가 거의 겹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월과 후백제는 900년 전후부터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적극적으로 교류를 이어갔다... 이에 최승우는 고민 끝에 오월과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후백제를 자신의 정착지로 선택한다."
-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신라 3최(崔) 중 최승우>, 황윤, 2022.


이성계에게 삼봉 정도전이 있었다면, 견훤에게는 최승우가 있었다. '신라 3최(崔)'로 불리는 최치원, 최언위와 최승우는 모두 당나라 빈공과에 합격한 신라의 수재들인데 6두품의 한계로 진골이나 성골의 벽을 넘지 못했다. 신라 말기는 골품제로 대표되는 중앙집권적 귀족제의 모순이 심화되어 새로운 체제의 대두를 요청하고 있었다. 견훤의 부친인 상주(지금의 경북 문경)의 호족 아자개(이원선)도 진골이나 성골이 아니면서 1두품 각간을 자칭하던 시대였으나 신라 최고 천재 최치원은 끝까지 신라에 충성했고 그의 사촌 최언위는 고려태조 왕건에 귀부하여 이름을 날렸다. 기록에는 없으나 이들의 친척뻘로 추정되는 또 다른 수재 최승우는 후백제의 견훤을 통해 새세상을 기획한다. 당시는 중국 대륙 역시 당나라 말기 군웅할거 시대였기에 중국의 동부 오월땅에는 전유라는 자가 '오월왕'을 자칭하였는데 최승우는 당나라 시절 한때 오월왕 영향권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로 귀국한 최승우는 최치원이나 최언위와 다른 길인 후백제왕 견훤을 선택한다. 이후 결말은 달랐지만 최승우와 최언위는 각각 견훤과 왕건의 서신을 통해 경쟁을 했고 알다시피 패자는 견훤을 선택한 최승우였다.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지만 아마도 신라말 군웅할거 정세의 당시는 견훤이 더 유력자로 보였을 수도 있다. 궁예가 초기에 의탁했던 죽주(죽산)의 기훤이나 북원(원주)의 양길, 후에 명주(강릉)에서 독립한 궁예보다도 먼저 스물다섯살에 이미 무주(광주)를 점령하고 8년 후인 900년 서른셋에 전주(완산주)를 장악하여 후삼국 최초로 왕을 자칭한 영웅이 바로 견훤이었다. 기훤이나 양길의 수하였다가 이들 모두를 평정한 '일목(一目)대왕' 궁예가 부랴부랴 후고구려왕을 자칭한 게 901년이니 이보다 한해 먼저 후백제왕이 된 견훤은 신라말 군웅할거 시대를 정리하고 이른바 '후삼국시대'를 연 장본인이었다. 물론 북쪽에서 급격히 팽창하던 궁예를 의식하여 선수를 쳤을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당시는 견훤이 최고의 실력자였을 수도 있고 신라 천재 최승우가 귀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정도전도 최승우도 난세에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했다. 정도전도 장자방을 존숭했듯 자신을 한고조의 책사 장자방에 견주었던 제갈량의 주군 유비도 역사에서 승자는 아니었다. '후삼국시대'는 궁예와 견훤이 각각 고구려(고려)와 백제를 동경하여 부흥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이미 이들 나라가 멸망한지 2백년 이상 지났으니 망국의 복위운동이었다기 보다는 각자의 할거 지역 정서에 따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앞세운 것이리라. 종교적 이념은 불교의 미륵불사상, 정치적 이념은 각지의 정서를 반영하여 각각 고구려(궁예-왕건)와 백제(견훤)를 슬로건으로 내건 것이다. 당시는 당말의 중국대륙과 신라말의 한반도를 통틀어 동아시아 전체가 군웅할거의 난세였다. 이들로부터 5백년 전 광개토대왕이 대륙으로 뻗어나간 5호 16국 시대처럼 궁예와 견훤 또한 대륙의 난세 속에서 천하제패를 꿈꿀 수 있었다. 9세기말 10세기초의 한반도에서 그 첫 출발은 견훤이었고 최승우라는 신라 천재가 주군으로 선택할 만한 영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역사의 승자는 견훤과 궁예가 넘어서지 못했던 삼국과 통일신라의 고대 중앙집권 귀족체제를 끝장내고 새로운 지방 호족연합권력을 정립했던 왕건의 포용력이었다. 왕건은 궁예를 몰아냈지만 궁예가 기틀을 다진 국가체제를 부정하지 않았고 아들의 쿠데타로 인해 자신이 세운 국가를 버리고 귀의한 견훤을 내치지 않았다. 물론 궁예의 후고구려의 최대 기반이 송악(개성)의 왕건 호족집안이었고 고려의 마지막 최강숙적 후백제의 사기를 꺾을 자가 견훤 밖에 없었다는 배경은 있었겠지만 지방호족 연합정권 시대의 창시자 왕건의 내공이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니다. 신라말과 고려초(나말여초)는 신라의 삼한일통의 왕조통합과 다르게 고대 중앙집권 귀족체제에서 중세 지방호족 연합체제로 이행하는 체제의 시대적 교체기였던 것이다.


"이처럼 견훤은 자신이 세운 후백제가 멸망하는 모습을 확인한 직후 등창이 터져 이곳(황산) 사찰(논산 개태사로 추정)에서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으며, 왕건만 병력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전주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고려군이 최종승리를 만끽하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견훤은 세상을 뜬 상황이었다."
-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개태사와 왕건>, 황윤, 2022.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두 차례 '왕자의 난'으로 왕권을 찬탈한 쿠데타 후 '함흥차사'의 소문으로 남은 시기에 사실 이성계는 의정부(양주) 회암사에 머물며 함흥의 수하 조사의로 하여금 1만의 동북면 군대를 모아 반란을 사주했다. 당시는 1만의 조사의(이성계) 반란군과 5만의 조선군 사이 내전의 상황이었는데 이방원의 빠른 대처와 총력대응으로 인해 반란은 진압되었고 역사는 '이성계의 난'이 아닌 '조사의의 난'으로 기록한다. 이후 아버지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을 조선의 왕으로 인정했고 성리학 이념국가 조선에서 태종 이방원은 다행히 불효의 죄를 면할수 있었다.

견훤의 맏아들 신검이 아버지를 폐위시켜 금산사에 가두었고 나이가 들어 무력이 아닌 술책으로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이 왕건에게 항복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일흔을 바라보고 있었다. 논산에서 대치한 신검의 후백제 정예군은 고려군의 선봉에 선 후백제 건국자 견훤을 보고 창칼을 내려 놓았다. 쉽게 후백제군의 주력을 무너뜨린 왕건은 내처 후백제의 근거지인 완산주(전주)로 내달렸고 견훤은 병에 걸려 논산에 주저앉는다. 괘씸한 아들에게 복수하고 싶었겠지만 차마 자신이 만든 국가의 멸망을 직접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왕건이 후백제를 복속하고 돌아왔을 때 일흔의 견훤은 이미 자신의 나라 후백제와 함께 죽은 후였다.

똑같이 칠십대까지 살았지만 이성계는 아들에 대한 복수는 실패했으되 자신이 만든 국가 조선은 보존하면서 장수한 반면, 5백년 전 그의 '도플갱어' 견훤은 아들에게 복수는 했으나 자신이 세운 국가 후백제와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의 저자 황윤 선생은 명시적으로 말할 수 없다. 사료적 근거가 없이 역사학자는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이씨'였고 전주를 장악하며 후백제를 열었던 견훤이 그로부터 한 5백년 지난 후 '도플갱어' 이성계를 만나게 한 이유는 아마도 견훤이 이성계 일족의 먼 조상이라 암시하는 것은 아닐는지. 

궁예나 견훤은 정도전이나 이성계와 달리 초상화가 남아있지 않아 얼굴이나 풍모를 상상할 수 밖에 없다. 한편, 고려 무신반란 초기 권력자 중 하나였던 이의방은 조선태조 일족의 조상이라는데 오래전 대하사극의 각각 다른 극 중에서 이의방과 견훤을 맡은 배우가 동일했던 것 또한 참으로 우연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역사학자가 아니라 소설이나 쓰고 싶은 나는 감히 추측한다. 
소장 역사학자의 이 책을 통해 내가 찾은 견훤(甄萱)은 이성계 일족의 '할아버지'라고 말이다.

***

1.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황윤, <책읽는고양이>, 2022.
2. [슬픈 궁예], 이재범, <푸른역사>, 2000.
3. [삼국사기](1145),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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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는 식물들 - 아직 쓸모를 발견하지 못한 꽃과 풀에 대하여
존 카디너 지음, 강유리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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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잡초'와 인류의 '공진화(共進化)'
- [미움받는 식물들](2021), 존 카디너, 강유리 옮김, <윌북>, 2022.


"식물은 인간없이 잡초가 될 수 없고,
인간은 잡초없이 지금의 인류가 될 수 없었다."
- [미움받는 식물들], <프롤로그>, 존 카디너, 2021.


1. 

머리를 길렀다.
같이 밥을 먹다가 아버지는 "대가리꼴이 그게 뭐냐"시며 젓가락을 내동댕이 치시고는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으니 나는 머리카락을 계속 길렀고 이제 곧 2월이 되었다.

대학 1학년 동안 나는 영문과 학생회 내 '현대철학반', 줄여서 '현철반'에서 우리 학교 선배이자 철학과 강사인 우기동 선생의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라는 주 교재를 옆구리에 끼고 돌아다녔고 2학년 올라가면서 '현철반장'이 되었다. 중고등학교 때 떨어졌던 '반장'을 결국 이런식으로 하게 될 줄 몰랐지만 어쨌든 '현철반장'도 반장은 반장이었다. 

1994년 2월에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간 총학생회 주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앞두고 나는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던 것인데, 좀 어이없지만 '철학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94학번 신입생들이 긴머리의 우수에 찬 2학년 선배 현철반장을 보고 현철반에 많이 들어왔으면 하는 욕심에 부자지간의 인연까지 포기해 가며 머리를 길렀던 거다. 스물한살 그때는 진정 몰랐다. 내 추레한 긴머리가 신입생들을 철학에서 더 멀어지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찌되었건, 2학년 현철반장의 긴머리 때문은 결코 아니었겠지만 대여섯 명의 신입생들이 현철반에 들어왔다. 우리 문학을 읽는 영문과 학생회 내 주력학회 '문학사랑반', 줄여서 '문사'는 신입생들이 넘쳐났고 '문사'는 우리 학회에 별 관심 없었겠지만 '문사'를 경쟁상대로 상정했던 '현철반'의 신입생 수는 초라했다. 1980년대에는 '패밀리'라는 지하서클이었던 학회들은 1990년대 들어 학생운동의 부문운동으로 공개활동을 했다는데, 영문과 학생회에서는 '문사'와 '현철반'이 아마도 그 잔재였을 것이다. '문사'와 달리 쭈그러든 '현철반'을 재건하고자 했던 나와 정박아와 지진아 등 영문과 철부지 삼인방은 그래서 '문사'를 끊임없이 의식했고 도발했다.

스물한살 당시의 나는 '현철반' 여자 후배에게 감히 철학과 학생운동을 가르친다는 핑계로 겉으로는 여학생에게 관심없는 척 하면서도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스스로가 내심 부끄러웠다. 그러나 나이를 더 먹고 알게 된 건 대부분의 청춘들이 그 때는 다 그랬다는 사실이다. 내가 속으로 좋아했던 여자후배도 안그런 척 했지만 다른 남학생의 뒤를 쫓아다녔을 테고, 나를 좋아하는 듯 했던 희귀한 여자 후배는 나만이 아니라 다른 남학생들에게도 엄청 들이댔다는 사실을. 당시에 존경해 마지않던 91학번 선배들이나 더 오래전 치열했던 80년대 학번 소위 '386' 선배들 모두 그땐 다들 그랬다는 사실을. 인류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 바빌로니아나 로마시대에도 스물한살 청춘들은 다 똑같았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없애려고 아무리 애써 뽑아도 보고 약을 쳐보아도 결국 사라지기는 커녕 더욱 창궐하며 진화발전을 거듭하는 '잡초들(Weeds)'처럼 이십대 청춘은 아무리 흑역사로 점철되더라도 똑같이 반복되고 진화발전하고 만다.


2. 

하고싶은 일을 직업으로 사는 삶이 제일 부럽다.
그때는 몰랐지만 중년이 되고보니 학업을 위해 대학원에 들어가거나 운동판에 뛰어들거나 '문학도'답게 작가 또는 번역일 등을 하는 사람들이 나보다 행복해 보였다. 물론 그들은 회사 다니며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나를 그렇게 볼지도 모를 일이지만.

1994년 당시 '현철반'이 아닌 '문사' 소속으로 기억하며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연정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청춘 남학생을 쫓아다녔을지도 모르는 여자 후배가 번역가가 되었다는 소식은 익히 들었던 터였다. 대전에서 올라온 작고 눈매가 진하던 그 스무살짜리 여학생은 훗날 번역가가 되었고 오래전 소설가를 꿈꿨지만 결국 소설을 쓰지 못한 나는 그 후배의 삶을 속으로 응원했다.

얼마전 어쩌다 페이스북 친구가 되어 안부를 묻고 지내다가 그 후배가 식물을 키우는 이른바 '식집사'라는 것과 최근에 '식물'에 관한, 그 중 '잡초'를 주제로 한 미국 책을 번역했다는 걸 알고 냅다 책을 샀다. 속으로만 응원하는 게 아니라 실력은 없지만 '서평'을 쓰는 SNS 비인기 '작가'이기도 한 나는 독후감 하나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고맙게도 후배가 책을 한 권 또 보내주니 한 권은 서울집에, 다른 한 권은 오산 자취방에 두고 읽었다.

어려서부터 동물에는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구분도 잘하는 나는 사실, 식물에는 영 젬병이다. 나무와 꽃, 각종 식물은 아무리 설명을 듣고 다음에 다시 봐도 구분을 영 못한다. 그러니 실은 '잡초의 삶(Lives of Weeds)'이라는 원제목에 [미움받는 식물들]이라는 우리말 제목의 이 책의 진도가 생각보다 나가지를 않았다. 물론 내용은 흥미롭다. 결론인 즉슨, 인류가 1만년 이상 더 오래전 농경을 시작하면서부터 효율적인 작황을 바라며 제거하려던 잡초들(어저귀, 기름골, 베가위드, 망초, 비름, 돼지풀, 강아지풀 등)은 인간이 제거하려면 할수록 더욱 강해지며 진화발전한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바퀴벌레의 진화도 그렇고 공상과학 방사능 오염 괴수 고질라도 그렇고 잡초 또한 그렇다. 
인류와 잡초는 '공진화(共進化)', 즉 '함께 진화'하는 것이다.


미국의 사료작물학 박사이자 농무부 연구원이라는 존 카디너(John Cardia)가 2021년에 쓴 책 [미움받는 식물들(Lives of Weeds)]은 나의 1년 과후배 강유리가 번역했다. 그 아이가 속한 '펍헙번역그룹'에서 번역가 각자의 관심사를 가지고 직접 기획하고 발굴한 책이라 하니, '식집사' 강유리 선생의 안목 또한 돋보인다. 본인이 좋아하는 내용을 본인이 좋아하는 번역으로 풀어내는 과정이 얼마나 행복했을지 상상이 간다. 인지도나 대중성 같은 건 1도 없는 나같은 아마추어 SNS 작가도 책을 읽고 글을 쓸 때가 세상 가장 행복한 순간이니 말이다.


"봄만 되면 흙을 뚫고 나타나는 잡초의 끈질긴 생명력은 세상의 모든 정원사에게 좌절감을 준다. 이러한 적시성은 수천 년 동안 의도하지 않은 농경선택의 결과다. 잡초가 정기적인 농사의 주기에 적응하게 된 것이다. 농사의 주기 뿐 아니라, 씨앗이 쟁기질에 파묻히고 경운에 따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수확물과 함께 퍼져 나가는 등 농사의 모든 과정에 잘 적응한 유전형이 유리해졌다."
- [미움받는 식물들], <비름>, 존 카디너, 2021.


한 때는 약용으로도 쓰이고 인간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던 민들레가 '잡초'가 된 건 19~20세기 초 미국 중산층들이 유럽 귀족들과 같은 넓은 잔디정원을 로망으로 삼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비름을 비롯하여 기름골과 망초 같은 식물들이 '잡초'가 된 건 농업이 기업형으로 대규모 산업이 되고 '돈이 되는' 작물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인간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 식물들을 박멸하기 시작한 시점부터다. 물론 농경을 처음 시작했을 아주 오래전부터 '잡초'는 제거의 대상이었겠지만, 본격적으로 제초제를 만들어내고 대량살포를 통해 기업형 농업을 영위하던 최근에 이 식물들은 '잡초'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제거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노력에 정확히 반비례하여 이 '잡초'들은 진화했고 또 더욱 강해졌다.


"돼지풀은 지배, 착취, 식물에 대한 오만함을 불러온 숭리이자 인류세, 아니 '암브로세Ambrocene(돼지풀세)'의 잡초라 할 만하다... 이 초라하고 너덜너덜한 잡초를 인류가 직면한 전 세계적인 환경문제와 연결 짓는 것은 무모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돼지풀과 환경문제는 둘 다 '발전'이라는 허황한 생각에서 생겨났다. 둘 다 지구에 대한 인간의 신념과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잡초가 그냥 식물이 아니듯이 '기후위기'는 그냥 날씨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에 있는 자원을 끊임없이 뽑아내고 성장할 것을 요구하는 인간 주도적 세계경제의 결과물이다."
- [미움받는 식물들], <돼지풀>, 존 카디너, 2021.


'누더기잡초(ragweed)'라는 이름에, 신들이 먹는 음식을 일컫는 '암브로시아(Ambrosia)'라는 학명을 지닌 돼지풀은 북아메리카에서 원주민들이 농경을 시작하던 5천년 전부터 '잡초'였다. 정확히 말하면 돼지풀이 다른 식물들과 자라는 땅에 인간들이 침범하여 작물을 심고 먹지도 쓰지도 못하는 돼지풀을 잡초로 규정하고는 지금껏 없애고 있는 중이다. 돼지풀이 잡초로 명성을 날리던 18~19세기 초 미국은 세계 각지로 배와 선원과 군인과 전쟁물자를 보냈고, 당시 주요 전쟁무기였던 말들의 건초더미와 군인들의 군장을 통해 돼지풀 씨앗도 확산되었다. 소련 스탈린의 농업 집산화에 저항하면서 농토를 놀렸던 우크라이나 농지에서도 이 돼지풀들이 성황하여 돼지풀은 이른바 '스탈린 잡초'라고도 불린다는데, 인류의 문명 발전과 극도로 함께 진화한 잡초의 대명사가 미국의 '국민 잡초' 돼지풀이다.


"가을강아지풀이 환경 전체를 장악하는 볏과 잡초가 된 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던 일이 아니었다. 땅과 자원 이용에 대한 태도가 다른 곳에서는 아직 주요 잡초가 아니다. 세타리아(강아지풀)가 가능성과 희망을 상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어떻게 농사를 짓고, 먹고, 소비하고, 서로를 대하고, 자연을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러한 선택에 따라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고 무엇이 잡초가 될지가 결정될 것이다."
- [미움받는 식물들], <강아지풀>, 존 카디너, 2021.


길가에 늘어선 강아지풀들(세타리아:Setaria)의 친척 중 가장 강력한 잡초가 가을강아지풀이다. 저자인 존 카디너 박사가 이 책 [미움받는 식물들]의 제일 마지막 장 주인공으로 가을강아지풀을 다루는 이유가 "잡초가 보여주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어서"(같은책, <가을강아지풀>)라고 하는 이유가 역설적으로 가을강아지풀이 최강의 잡초이기 때문이다. 모든 강아지풀이 다 잡초는 아니다. 그러나 이 '세타리아속' 식물 중 가장 크고 강력한 생존력을 지닌 이 가을강아지풀은 아마도 농업과 산업 문명 일체를 고속발전시켜 왔던 인류가 키운 최강잡초임에 틀림없다. 강력한 제초제를 이겨내고 스스로의 유전자를 변형하는 식물의 가소성과 최신 화학약품을 동반한 극한의 제초환경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선택압 속에서 강화된 강아지풀의 패자가 바로 가을강아지풀이기 때문이다. 

잡초전문가인 존 카디너 박사의 결론은 수천년 동안 잡초를 없애고 이기려 해온 인류가 "결국 잡초를 당해내지 못했다"(같은책, <에필로그>)는 것이다. 즉, 초강력 잡초 가을강아지풀을 보고 인류의 문명을 다시 돌아보자는 것이다. 자연과 생태계와 동반하는 삶을 시작하면 잡초는 더 이상 인류에게 제거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그것이 인류와 잡초 사이에 이어져 온 수천수만년 간 '공진화(共進化)'의 결말이다.


3.

'공진화(共進化)'를 다시 생각해 본다.
예전의 나는 푸르른 청춘이었으나 돌아보면 쑥스럽고 겸연쩍은 흑역사를 숱하게 남겼다.
지금의 나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후회와 갖가지 회한을 곱씹지만 사실 다시 그 시간이 주어진다 한들 지금보다 더 잘 살아볼 요량은 없다. 
다만, 그 당시든 지금이든 부족한 나와 함께 울고 웃으며 진화해 온 사람들과 관계, 환경을 생각한다.

머리를 기르면 내게도 '철학'이 올지도 모른다고 믿던 스물한살의 나와 그런 나를 만들어준 사람들, 90년대 초반의 시대.
좋았든 싫었든 나와 '공진화(共進化)'했던 환경들이다.

세월이 흘러 오래전 긴머리의 아들을 못마땅해하셨던 중년의 아버지가 연로하시어 거동도 어려운 지금, 나와 대립하고 상생하며 지내온 무수한 사람들과 환경을 돌아본다.

진부하지만 결론은,
내가 스스로 진화하며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다~ 모두다~ 사랑하리~"의 그룹 송골매 노래의 제목일지언정.


"사람이 있는 곳에 잡초가 있다... 우리는 결국 잡초를 당해내지 못했다."
- [미움받는 식물들], <에필로그>, 존 카디너, 2021.

오래전 알았던 대학후배가 번역한 잡초와 인간에 관한 책을 읽으며 새삼 떠올린 생각이다. 
부디, 이기려 하지 말고 함께 살아가려 노력해볼 일이다.

머리가 길었고 '현철반'에 후배들을 불러모으던 그 푸르던 젊은날의 내 생각은 분명 그랬었지 않았던가.

***

- [미움받는 식물들(Lives of Weed) - 아직 쓸모를 발견하지 못한 꽃과 풀에 대하여](2021), John Cardina, 강유리 옮김, <윌북>,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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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 - 읽는 것만으로 역사의 흐름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김재원 지음 / 빅피시 / 202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를 '한 권'에 담기 위해서는
-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 김재원, <빅피시>, 2022.


"이 책은 과거를 향한 쓸데없이 신중한 접근을 삼간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거꾸로 반감부터 드는 게 인간이 아니던가. 마치 역사를 알면 세상 삼라만상의 비밀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할 생각도 없다. 그럴수록 역사는 더 지루해진다. 역사라는 학문이 지금까지 과도하게 유통되면서도 정작 사람들의 뇌리에 남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 <프롤로그>, 김재원, 2022.


오래전 소설을 써보고 싶었지만 잊고 살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중년이 되었다. 서평이라도 써서 남겨보려고 책을 읽다보니 문득, 모든 책이 '역사' 책이라는 걸 깨달았다. 철학도, 문학도, 사회과학도, [자본론]이나 [종의 기원]도 결국 '역사'로 보였다. 
그래서 굳이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역사' 관련 책만 읽지는 않는다.
인류가 남긴 모든 책에는 '역사'가 들어 있기에 독자는, 그 책에 담긴 '역사'를 찾아내는 탐정이 되면 된다.


역사학자 김재원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2022)라는 담대한 제목의 책을 통해 너무 신중하게 다루어서 지루해졌거나 또는 입시용으로만 공부했기에 대입시험 후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한국사'를 경계하며 "쉽게 그러나 가볍지 않게 떠나는 한국사 여행"(같은책, <프롤로그>)을 제안한다. 

그에 따라 저자는 <고대>를 다룬 1장에서 고조선과 삼국시대를 대표적 사건 중심으로 서술하면서 연속적 서사에 필요한 다른 이야기들은 과감하게 생략한다. 예를 들어 고조선은 단군왕검 신화와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 전환과정으로 정리하고 말지 고조선 내부의 국가체제, 사회문화, 주요인물 세부내용들은 건너뛴다. 부여라는 국가의 중요성은 잠시 언급하고 나서 삼국시대는 철기를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틀을 갖춘 고구려-백제-신라의 특징, 즉 정복약탈국가 고구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백제, 배신의 아이콘 신라와 이에 가려진 가야를 순식간에 정리하고 만다. 한 권으로 엮기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국가체제를 갖추었을 수도 있었을 고조선과 고대국가체제 이전부터도 삼국 또는 열국시대가 가능했을 수도 있다는 논쟁거리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급하게 넘어가야 하니 사료가 별로 없는 남북국 시대 발해는 본격적으로 언급할 여유도 없다.

2장의 <고려시대>는 남북국 시대의 남국 통일신라 말기 후삼국의 영웅인 궁예와 견훤, 왕건을 시작으로 고려시대의 굵직한 흐름을 잘 정리하고 있는데, 지방 호족 분권정치의 시작 및 광종과 성종의 개혁, 묘청의 서경반란의 배경인 문벌귀족 이야기와 이 체제가 초래한 무신정변, 원나라의 사위나라로서 고려의 위상 등의 흐름이 잡힌다. 입시용으로 외울 내용은 과감히 생략하고 흐름만 잡아도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생소한 <고려시대>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 책 중 가장 추천하고 싶은 장이 바로 2장 <고려시대>다.

3장 <조선시대>는 정도전과 이성계의 역성혁명의 본질을 '부동산', 즉 '계민수전'의 토지개혁으로 간단히 정리하는데, 정도전의 성리학 관료국가를 뒤집은 이방원의 왕권강화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이후 두차례의 중종 및 인조반정과 왜란과 호란의 전란 등 굵직한 사건과 그 속의 인물들 중심으로 흐름을 잡고 있다. 다들 알만한 성군 세종의 업적이나 붕당정치의 실체와 장단점 등을 논하기에 한 권으로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임진-정유왜란과 정묘-병자호란 등 조선의 국운을 꺾은 대전쟁들은 한반도 국지전을 넘은 대륙까지도 아우르는 동아시아 세계대전이라는 인식은 공감할 만한 내용이다.

4장 <근현대> 또한 구구절절 1960년의 4.19, 1961년의 5.16, 1979년의 10.26과 12.12, 1980년의 5.18이나 1987년 및 2016년 민주항쟁 같은 전통적 서사를 벗어난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면서 전두환 군사독재는 일언반구도 안하는 이유가 이승만과 박정희는 공과를 놓고 민주-반민주 진영논쟁의 여지가 있는 한편, 전두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끝났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희대의 살인권력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이 빠진 근현대 한국사는 다소 생소하다. 이 책에서 현대의 끝은 아마도 1997년 IMF 경제위기인 듯 한데, 저자는 1995년 삼풍백화점이라는 강남의 호화시설의 붕괴에 빗대어 평가하고 있다. 재해의 규모상 1950년 6.25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재난이었던 삼풍백화점 붕괴는 남한의 기존 사회경제 체제의 붕괴를 상징하며 우리 사회의 체질을 바꾼 IMF의 전조라는 저자의 결론적 평가 행간에는 그럼에도 불평등 체제가 그 위기들 이후 심화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한국사를 한 권으로 정리해야 하는 저자에게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서술할 지면적 여유는 없어 보인다.

결국, 입시를 위한 암기용이 아닌 '역사'는 세세한 내용보다는 흐름 위주로 읽어야 한다. 
중국의 역사학자 이중톈은 수십년 계획의 '중국통사' 시리즈를 쓰며 이를 위해 추리소설 기법을 접목했다. 즉,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나열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시기의 특정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시대적 배경을 아우르며 사건의 인과관계를 추적하는 방식이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도 굳이 '한 권'에 담기 위해서 노력하기 보다 '추리소설'처럼 독자를 안내해 보는 것은 어떨는지.

어떻게 쓰든,
'역사'는 흥미롭지만 말이다.

***

-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 김재원, <빅피시>,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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