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계급, 사회 - 계급화폐의 발생과 발전, 화폐권력에 관한 사회학적 탐구
빌헬름 게를로프 지음, 현동균 옮김 / 진인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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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는 '사회적 재화'이다"
- [화폐, 계급, 사회], 빌헬름 게를로프, 1952.


"화폐는 '사회교류적 행동'의 산물이다."
- [화폐, 계급, 사회], <1-1. 사회교류적 현상으로서의 화폐-연구과제>, 빌헬름 게를로프, 1952.


'화폐'란 무엇인가.

미국의 경제학자 랜덜 레이의 '현대금융이론(MMT:Modern Money Theory)은 '화폐'는 국가에서 찍어내는 '명령화폐' 또는 '표권화폐'로서 중앙은행이 언제든지 엔터키만 누르면 발행되고 이 돈들은 다수 노동계급의 소득증대와 완전고용을 전제로 균형을 맞춘다면 인플레이션의 폐해도 상쇄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재정균형론'이나 '재정건전성'은 허구이며 국가의 적자는 다수 국민의 흑자로서 "둘이 함께 추는 탱고"에 비유된다. 
'MMT'에서 화폐는 국가권력과 재정정책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한편, 19세기 근대 '노동가치론'에 근거한 마르크스주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의 '상품론'에 기초하여 상품생산과 자본증식 과정에서 교환의 '일반적 등가물'이자 상품의 특수한 형태로서의 '상품화폐론'을 주장한다. 즉, 상품생산 및 유통과정, 자기증식을 본질로 하는 자본의 상품생산 과정과 자본주의 총생산에서 주요한 매개수단으로서의 화폐론이다.

'현대화폐이론'은 화폐에 대한 '현상'적 설명이고, 
'상품화폐론'은 '본질'적 설명으로 나는 판단한다. 
그러나 이런 화폐이론들은 오로지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역사에만 기반한 공시적 설명이다.


"본서에서는 화폐가 '경제적 영역'을 넘어서는 '사회교류적 영역'에서 기원된 것이라는 견해를 견지한다. 화폐는 이러한 '사회교류적인 영역'에서부터 발출하여 '경제적 영역'으로 침투하고 이윽고 '경제적 영역'을 지배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경제적 영역'을 넘어선 일반적인 '사회교류적인 것'까지도 포획한다."
- [화폐, 계급, 사회], <1-2. 사회교류적 현상으로서의 화폐-화폐의 사회적 이론이 가지는 의미>, 빌헬름 게를로프, 1952.


독일의 재정경제학자 빌헬름 게를로프(Wilhelm Gerloff : 1880~1954)는 1952년의 저서 [화폐, 계급, 사회]에서 인류 전역사를 관통하는 '화폐론'을 전개한다.
나치에 대한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프랑크푸르트 대학총장직에서 해임된 후, 1940년 [화폐의 발생과 화폐체계의 시작]으로 사회학적 관점의 화폐론을 열었고 1952년에는 [화폐와 사회]라는 주저를 통해 그의 '사회교류적 화폐론'을 완성한다.

게를로프의 [화폐와 사회](1952)의 한글판 제목이 바로 [화폐, 계급, 사회]다. 
원제는 [화폐와 사회(Geld und Gesellschaft)]인데, 그의 화폐론에서 화폐의 발생과 변천의 배경인 사회가 '계급사회'이고 화폐의 역사적 형태가 '계급화폐'이므로 국역판 제목에 '계급'이 포함된 듯 하다. 부제 또한 <사회적 화폐이론에 관한 연구(Versuch einer gesellschaftlichen Theorie des Geldes)>인데, 국역은 <계급화폐의 발생과 발전, 화폐권력에 관한 사회학적 탐구>로 했다. 
화폐의 역사에서 '계급'과 '권력'의 중요성이 게를로프 화폐론의 주요내용이기 때문이다.

[화폐, 계급, 사회]의 주요 명제는, 화폐는 특정 '경제적' 영역이 아닌, '사회적', 역사적 영역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 화폐 사용자들은 '경제합리적' 인간(호모 이코노미쿠스)을 넘어선 '사회교류적' 인간이자 '야심'에 찬 '평판집착적' 인간이 그 기원이라는 것이다.


"모든 '문화적 소유', 즉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문화적 재화'의 소유는 '계급소유'에서 기원하였다. 그런데 화폐도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인류학에서 언급되는 사례들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당시 사용된 '화폐증표'는 바로 '계급표시'였다는 사실이다."
- [화폐, 계급, 사회], <2-10. 화폐관용의 여명기-계급화폐>, 빌헬름 게를로프, 1952.


화폐는 그 발생의 여명기에 '선물교류'의 형태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익히 배웠듯, 근대 상업과 산업의 발전과 함께 등장한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지배계급의 '우월성' 과시수단으로 통용되던 게르만족의 금속고리 같은 희귀하거나 특별상징으로 통용된 재화가 바로 화폐의 기원이라고 게를로프는 말한다.

최초에는 소수 지배계급의 특권적인 재화로서 우월함에 대한 '인정수단'(같은책, <3-15>)이었던 이 원시화폐는 다수 농민의 직물이나 가축과 같은 재화로 그 징표가 확장되었다. 게를로프는 이를 화폐의 '민주적 확장'으로 본다. 이러한 화폐의 '민주화' 과정에서 기존의 소수 지배계급에 의한 축적된 재화 또는 '선물'로서의 화폐는 다수 거래를 통해 "측량과 숫자로 표현되는 '물질가치'로 변화하여 결국 '화폐'가 된 것이다"(같은책, <2-4>).

'계급사회'에서 출발한 만큼 화폐에는 '계급'과 '권력'의 낙인이 찍혀 있다. 
즉, 화폐는 '계급사회'의 산물이다.


"시장은 경제적 '권력투쟁'이 펼쳐지는 장이다. 화폐는 '자본주의적 경제사회' 내에서 특별한 적응과 발전을 거쳐온 이러한 투쟁에서의 무기이다. 이에 화폐가 준비되게 하고 또한 그것을 구성시키는 여러가지 요건과 '특성들' 중에서는, '경제사회'에 있어서만 무한하게 발휘될 수 있는 '화폐'의 '구매권력'의 발전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화폐, 계급, 사회], <3-16. 화폐의 본질-사회교류적 권력수단으로서의 화폐>, 빌헬름 게를로프, 1952.


화폐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발생과정을 살핀 후, 게를로프는 [화폐, 계급, 사회]의 <3부>에서 본격적으로 '화폐의 본질'을 탐구한다. 

화폐는 사회적 '관계수단'(같은책, <3-14>), '인정수단'(<3-15>), '권력수단(<3-16>), '경제수단'(<3-17>), '교환수단'(<3-18>), '가격표현수단'(<3-19>), '계산수단'(<3-20>), '지불수단'<3-21>)의 성격을 지니고,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필수 불가결한 '자본기능'(<3-22>)의 본질적 성격을 드러낸다. 

'화폐의 본질'을 서술함에서도 "화폐는 '사회교류적 행동'의 산물(창조물)이다"(같은책, <1-1>,<5-30>), 또는 "화폐는 '사회적 재화'이다"(같은책, <3-12>)같은 주요 명제는 견지된다. 

화폐의 '사회적 이론'이 관찰대상으로 삼으면서 다루어지는 주요한 개념은 '화폐관용'이다. 즉, 화폐는 국가권력의 '법적 명령' 같은 '표현수단' 이전에 그런 기능을 갖게 되어온 '관용'적 성격이 우선된다는 것이다. '교환매개수단'이나 '지불수단' 같은 '경제적 화폐' 이전에 '우월성 과시충동'이나 '인정수단', '선물교류', '속죄금', '결혼지참금(신부값)' 같은 '사회적' 화폐가 선행되었으며, 이런 원시화폐의 '필수 서비스'에 '사회교류적 권력수단'으로서의 '본질적 서비스'(같은책, <3-13>) 형태가 결합되면서 비로소 '사회적 화폐'가 된다. 

화폐는 '우월성'의 '인정수단'으로 시작되어 '사회적 계급권력 관계'에 의해 '경제적' 교환의 매개수단이 되었으나, 이 화폐라는 수단이 '권력의 담지자'(같은책, <5-30>)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되는, 즉 "수단이 목적으로 격상된 가장 인상적인 사례 중 하나"(같은책, <3-13>)가 된다.

본질적 근원인 '사회'와 현상적 표상인 '화폐'와의 변증법적 관계이며,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말하듯 수단과 목적이 역전되어 인간의 '사회적 관계'보다 '물질적 화폐'가 우선시 되는 '물신화'의 과정이다.


"자본은 특정 목표를 위하여 배치된 화폐의 명칭이다. 따라서 '화폐의 자본기능'은 화폐가 사용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화폐는 화폐의 이득을 창출하는 수단이거나 혹은 수단이 될 수 있는 한에서만 '자본'이다. 즉, 생산에 사용할 수 있도록 화폐가 제공되는 경우에 비로소 '화폐'는 '자본'이 된다... 화폐의 '자본기능'은... 화폐의 '구매권력'의 결과이다."
- [화폐, 계급, 사회], <3-22. 화폐의 본질-화폐의 자본기능>, 빌헬름 게를로프, 1952.


상품생산에 '비용재'로서 투입된 화폐는 '자본'이 되어 자기가치를 스스로 증식시키는 매개수단이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C(상품)-M(화폐)-C'(가치증식된 상품)'의 단순 상품생산 과정이 'M(화폐)-C(상품)-M'(가치증식된 화폐)'로 변태되는 상품의 유통과정을 거치면서 화폐라는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특정 상품형태가 곧 자본주의 상품경제를 확대재생산하는 주요 매개고리가 되는 과정을 서술한다. 자본주의 상품생산에서 가치증식의 수단으로 기능했던 화폐가 상품유통과 자본주의 총생산과정에서는 그 자체로 가치증식된 자본의 표현물인 목적 자체가 된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물신화'인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에서 돈이 최고다'라는 말의 화폐론적 표현이다.

여기서 빌헬름 게를로프의 [화폐, 계급, 사회]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구매권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구매권력'은 화폐가 양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수량적 표현으로서의 '구매력'과 다르다. 
게를로프에 의하면 화폐의 '구매권력'이란 "교환가능성에 대한 보증"(같은책, <4-27>)으로서 화폐가 시장에서 "통용될 수 있는 능력", "교환수단'으로서 화폐가 소지한 '사용능력'의 종류와 그 외연"(<4-27>)을 의미한다. 화폐의 양적 측면 뿐만 아니라 화폐 자체의 객체적이고 본질적 측면과 그 사용 주체의 권력적 측면 모두를 고려한 게를로프 화폐론의 필수적 개념인 것이다. 


"... 화폐는 항상 '권력수단'으로 남아있게 된다... '화폐관용'이 바로 '화폐의 권력'을 결정한다. 화폐는 그 '화폐관용'이 보편화되고 확립됨에 따라서, 그리고 특히, '교환경제적' 거래에서 '화폐의 구매권력'을 획득함에 따라 '권력수단'이 된다."
- [화폐, 계급, 사회], <5-30>, 빌헬름 게를로프, 1952.


'사회적 화폐관용'에 따라 출발하였고 '경제적 교환수단'을 거쳐 다시 '사회적 권력수단'으로서의 자리로 돌아오는 화폐의 발생과 변천 과정을 둘러본 빌헬름 게를로프의 '화폐론'의 결론을 볼 때가 되었다.

애초에 화폐의 '경제적' 지위를 넘어 그 근원으로서 '사회적' 역사를 다루는 게를로프의 '화폐론'은 화폐의 '사회심리적 기초'(같은책, <1-3>)를 연구의 기반으로 삼고 있기에 주류경제학으로부터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 사회과학으로서 정치경제학의 입장에서도 게를로프의 화폐론이 내린 결론은 비슷한 비판의 여지를 둔다.

[화폐, 계급, 사회]의 결론에 해당하는 <5부 화폐와 사회교류적 질서>는 '올바른 화폐'(같은책, <5-28>)란 무엇인가의 질문부터 시작된다.

게를로프에 의하면 "올바른 화폐"란 "정의로운 화폐"이자 "가치유지적 화폐"다. 이는 국가가 법적 명령으로 화폐를 규정한다는 '명목화폐론'처럼 "국가가 답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5-28>). 이에 대해서는 화폐사용자들이 답할 수 있는데, "국가화폐나 법적화폐가 실질적이며 생동하는 화폐인지의 여부는 화폐사용으로 이루어지는 거래에 의해 결정"(<5-28>)된다. '올바른 화폐'는 어느 정도 고정된 가치를 유지하며 사회경제적 교류의 안정화를 유지하는 화폐인데 게를로프의 이상주의적 경제사상을 보여준다. 
'과학적 사회주의' 못지 않게 이상주의적 화폐이론이다.

게를로프는 말한다.
"세상이 변하면 화폐도 변한다"고.
그리고 덧붙인다.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면 다른 종류의 화폐, '올바른 화폐'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화폐는 '사회교류적 행동'의 창조물이다."
- [화폐, 계급, 사회], <5-30. 화폐와 사회교류적 질서-화폐의 사회적 이론>, 빌헬름 게를로프, 1952.


[화폐, 계급, 사회]의 <1부 1장>을 위와 같은 말로 열었던 게를로프는 이 책의 결론인 <5부 30장>에서도 역시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다.

'사회적 인정표현의 수단'으로서 화폐는 '사회적 권력행사의 수단'이기도 한데, 경제에서의 화폐는 '권력관계', '권력역학'과 '권력차이'를 표현하는 공통분모가 되며 결국 '권력의 담지자' 그 자체가 된다(같은책, <5-30>)는 화폐와 사회의 변증법적 관계의 재반복이기도 하다.

게를로프는 화폐를 자본주의 역사에 국한시키거나 '경제적' 관점에서만 고찰하지 않는다. 결론은 화폐가 '사회교류적' 산물이라는 당연한 주장이다. 
인류사회 역사를 관통하는 '역사적 화폐론'이다.

다시 기억할 것은,
'화폐'와 '사회'의 변증법적 관계다.
즉, 인류역사에서 필연적인 공동체로서 사회는 자연적으로 화폐를 발생시켰지만, '사회교류적 행동'의 산물인 화폐는 역으로 해당 사회체제를 지배하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

1. [화폐, 계급, 사회(Geld und Gesellschaft) - 계급화폐의 발생과 발전, 화폐권력에 관한 사회학적 탐구](1952), Wilhelm Gerloff, 현동균 번역/역주/해제, <진인진>, 2024.
2. [균형재정론은 틀렸다](2015), 랜덜 레이, 홍기빈 옮김, <책담>, 2017.
3. [자본론](1867~), 칼 마르크스,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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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오는 밤 - 귀신날 호러 단편선
배명은 외 지음 / 구픽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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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불어 괴력난신'의 비밀
- [귀신이 오는 밤], 2022. / [귀신들의 땅], 2019.


"귀신날 :
음력 1월 16일,
한국의 세시풍속 중 하나로
이날 일을 하거나
바깥출입을 하면
귀신이 따른다고 믿고
집에서 쉬면서
액운을 막기 위한
풍습을 행하였다."
- [귀신이 오는 밤], <구픽>, 2022.


1. 어머니는 모른다고 하셨다.

어릴적 나는 엄마 앞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서 이야기 듣는 걸 좋아했다. 
아니 그러길 좋아했던 것 같은데 아주 어렸을 때 기억으로 자주 떠오르는 장면이 그 순간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떠오르는 걸 보면, 
분명 좋아했던 기억으로 난 믿고 있다.

엄마의 이야기는 당신이 전해들은 이야기도 있었겠지만 주로 본인이 직접 보고 겪었다는 생생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곧 망하게 될 집의 지붕 처마를 타고 미리 빠져나간 뾰족한 귀와 발을 지닌 구렁이도, 시집간 언니네 집을 다녀오던 한 밤의 산길에서 만난 소복입은 여인의 치마 밑 여우꼬리도, 숱한 밤의 도깨비불도, 어린 시절 내 엄마는 다 직접 보았다고 했다. 대여섯 살 때 추운 겨울 눈 오는 마당에 웅크려 누운 큰 강아지를 신기해서 만져보려 나가려다 언니들에게 제지당한 이야기는 예사였다. 줄무늬가 있었던 그 큰 강아지는 엄마 고향 감악산의 산신령인 호랑이였단다.

어느 정도 큰 다음에 나는, 이 모든 엄마표 전래동화 중 믿을만한 건 호랑이 이야기 뿐이었음을 안다. 어린 내가 엄마에게 무한반복 재생을 요청했던 그 많았던 옛날이야기 중 그나마 실제상황은 1940년대에는 충남 서산에 아마도 살았을 법한 호랑이였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가 아닌 '어머니'로 부른 후에도 내 어머니는 가끔 무언가를 보신 듯 한 밤에 상갓집을 다녀온 아버지를 문 밖에 세워두고는 굵은 소금을 두루 뿌리는 것도 모자라 아예 대문 밖 눈쌓인 곳에 식칼을 밤새 꽂아두기도 했다. 아버지가 상갓집이나 제삿집에서 뭔가 '겁나 험한 것'을 데리고 왔다면서 말이다.

그런 내 어머니 조차도, 
'귀신날'은 처음 들어봤다고 한다.


2. '귀신날' 또는 '귀신'의 서사

어린 내게 옛날 이야기, 주로 본인이 겪었던 '실화'로 각색된 어머니의 이야기에는 음력 1월 15일 정월 대보름 같은 우리 세시풍속에 관한 것들도 있었다. 곡식을 심기 전 논밭을 한바탕 태우는 쥐불놀이와 각종 수호신들에게 바치는 음식들을 주워먹으러 동무들과 온 마을을 하루종일 돌아다니던 일들이 고단했던 당신의 삶 속에서도 그나마 즐거웠던 어린 시절로 소환되었고, 가난하여 풀죽도 못 먹던 집에서도 이날만큼은 빚을 내서라도 좋은 음식들을 많이 준비하더라는 그런 서글픈 사연들도 있었다. 농경사회였을 당시로서 가장 중요한 풍작을 농사 시작하기 전 한 해의 첫달인 음력 1월에, 보름달이 뜨는 날에 하늘과 땅의 모든 신들에게 비는 풍습이겠다.

그런데, 음력 1월 15일 보름날의 다음날인 1월 16일이 이른바 '귀신날'이라는 걸 나는 올해 처음 들었던 거다.

<구픽> 출판사에서 '귀신'이라는 주제를 신예 작가들에게 던져주고 그에 관한 단편소설들을 모아서 엮은 앤설러지 [귀신이 오는 밤](2022)에는 정월 대보름날 다음날이 '귀신날'로 전해져 왔다고 말한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한바탕 놀고 들어간 다음날, 대보름 행사를 준비하느라 열심히 일한 머슴들이 하루 쉬려고 그 다음날을 '귀신날'이라 소문냈다는 것이 그 유래란다. 음력 1월 16일 밖에 돌아다니면 귀신에게 홀리거나 잡히게 되고, 심지어 신발을 밖에 내어 놓으면 사람을 못 잡은 귀신들이 그 신발들까지 가져간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194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충남 서산에서 호랑이는 물론 구미호와 도깨비불, 심지어 이무기로 추정되는 괴생명체까지 목격했다던 내 어머니에게조차도 정월 대보름 다음날인 음력 1월 16일 '귀신날'은 금시초문이었다. 내 어머니의 총기는 여든이 넘도록 네살 때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아 운동장에서 열린 마을주민 집단만세 행사와 옆 할머니의 '만사이~'도 여직 기억하는데도 말이다.

한편, 대만 작가 천쓰홍의 소설 [귀신들의 땅](2019)에서는 음력 7월 15일 보름날을 중심으로 한 7월 한달의 풍습인 '중원절(中元節) 이야기가 나온다. 
차별과 억압의 땅인 고국 대만과 시골 고향을 떠나 독일 베를린을 귀신처럼 떠돌다가 다시 귀신들이 여전히 흘러다니는 고향으로 돌아온 동성애자가 회상하는 시간의 중심이 바로 '중원절'이다. 이 역시 한 해 농사의 수확 전인 한 여름에 풍작을 기원하는 풍습이겠는데, 음력 7월 1일 '귀문(鬼門)'이 열리면서 온갖 귀신들이 나오기 시작하여 7월 15일 보름달이 뜨면 귀신의 문이 가장 활짝 열린다는 설이다. 대만인들은 7월 말 귀신의 문이 닫힐 때까지 주인 없는 풍성한 제삿상을 계속 차려놓는다고 한다.

우리의 음력 1월 15일 정월 대보름은 '상원(上元)이고 대만의 음력 7월은 '중원절(中元節)'이다. 
우리 귀신들은 음력 정월 대보름날의 다음날인 1월 16일에 돌아다니고, 대만의 귀신들은 음력 7월 내내 돌아다니는 거다.

그러나 귀신들이 스스로 돌아다니는 걸까.
내 보기엔 사람들이 불러내는 거다.
알아서 아무때나 돌아다니며 해코지 못하게 보름달이 뜨는 특정한 달과 날을 잡아 불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 참에 모여 고된 삶의 나날을 잊고 한바탕 산 사람들도 먹고 놀자는 거다.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말이다.

과연 종교 또는 이데올로기의 일종이다.
'귀신날' 같은 '귀신'의 서사는,
먹고 살기 위해서든 놀기 위해서든,
인류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부여에도 있었고, 고구려에도, 동예와 옥저에도 그 풍년 기원 축제들은 있었다.


3. '소외'와 '반전', 그리고 '자불어 괴력난신'

'귀신'에 관한 소설이나 영화 같은 귀신의 서사를 보다보면 나는 두 가지 개념을 떠올린다.

1) 하나는 '소외'다.

대부분의 귀신들은 원혼의 형태로 살아생전 온갖 차별을 받던 자들이다.
천쓰홍의 소설 [귀신들의 땅]에서는 산 자나 망자나 모두 '귀신'이다. 주인공은 동성애 남자로 오래도록 차별받았고 다섯 누나들은 뿌리깊은 남아선호사상과 여성차별에 익숙했으며 차별의 행위자로서 엄마 또한 대대로 억압받던 시대의 희생자였다. 결론에서는 말없이 묵묵했던 주인공의 아버지조차 대만 중화민국의 계엄과 억압에 반항하려던 비밀독서회원이었고 숨은 동성애자였다.

갖은 차별로 인해 '소외'된 자들은 자신들의 땅에 정착하지 못한 채 '귀신'이 되어 배회한다. 
19세기 중반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1848)이 "공산주의라는 '유령(귀신)'이 전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서문>)고 선언했지만 그 귀신은 바로 현실화되지 않았다. '공산당'의 아류들은 등장했다가 명멸했지만 계급차별과 노동소외가 현존하는 한 언제까지나 '귀신'이 되어 인류의 주변을 맴돈다. 
장화와 홍련의 신원은 용감한 평안도 철산부사가 풀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여성차별의 땅에서는 장화홍련의 혼은 여전히 떠돌아다닐 게다.

2) 또 다른 하나는 '반전'이다.

영화 [식스센스]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귀신의 서사에서 궁극에는 화자 자신이 귀신으로 드러난다. 
우리 신예작가들의 '귀신' 선집 [귀신이 오는 밤](2022)의 첫 작품인 배명은 작가의 <1월 16일생>의 화자도 알고보니 본인이 귀신이었다.
장자의 '호접몽'처럼 내가 귀신인지 귀신이 나인지 알 수 없는 경계가 바로 이 '반전'이 가리키는 지점이다.
쉽게 말하면,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사람'이라는 거다.

공자는 [논어]에서 "자불어 괴력난신(子不語 怪力亂神)"이라 했다.

항상 겸손했던 공자가 현세의 '사람'에 대한 일도 잘 모르는데 하물며 '귀신'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반문했다는 말이다. 유교는 여타 종교들과 다르게 절대신이나 내세 또는 사물에 깃든 신이나 귀신 같은 존재를 믿지 않는다. 제사를 중시하지만 유교의 그것은 귀신을 섬기는 게 아니다. 유교의 제삿상을 받는 조상신은 내세 또는 명부에서 '귀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주변에 바람과 공기처럼, 음양오행처럼 항상 떠돌아다니는 기운에 가깝다. 인간사의 요체인 현실정치를 중시하며 한편으로 [주역/역경] 같은 우주만물의 운동원리를 철학적으로 사고한 성리학의 급진적인 요소에서 조상신이라는 '귀신'은 '사람'과는 또 다른 '물질적' 요소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보적 성리학은 '유물론'의 단초를 지니고 있다.

모든 '귀신' 이야기는 결국,
현실에 살아있는 '사람'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이 현실 밖 '귀신'을 멀리 하고 현실 속 '사람'을 중시한 공자의 '자불어 괴력난신'의 비밀이다.

***

1. [귀신이 오는 밤 - 귀신날 호러 단편선], 배명은 외, <구픽>, 2022.
2. [귀신들의 땅(鬼地方)](2019), 천쓰홍, 김태성 옮김, <민음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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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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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불어 괴력난신'의 비밀
- [귀신이 오는 밤], 2022. / [귀신들의 땅], 2019.


"귀신날 :
음력 1월 16일,
한국의 세시풍속 중 하나로
이날 일을 하거나
바깥출입을 하면
귀신이 따른다고 믿고
집에서 쉬면서
액운을 막기 위한
풍습을 행하였다."
- [귀신이 오는 밤], <구픽>, 2022.


1. 어머니는 모른다고 하셨다.

어릴적 나는 엄마 앞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서 이야기 듣는 걸 좋아했다. 
아니 그러길 좋아했던 것 같은데 아주 어렸을 때 기억으로 자주 떠오르는 장면이 그 순간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떠오르는 걸 보면, 
분명 좋아했던 기억으로 난 믿고 있다.

엄마의 이야기는 당신이 전해들은 이야기도 있었겠지만 주로 본인이 직접 보고 겪었다는 생생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곧 망하게 될 집의 지붕 처마를 타고 미리 빠져나간 뾰족한 귀와 발을 지닌 구렁이도, 시집간 언니네 집을 다녀오던 한 밤의 산길에서 만난 소복입은 여인의 치마 밑 여우꼬리도, 숱한 밤의 도깨비불도, 어린 시절 내 엄마는 다 직접 보았다고 했다. 대여섯 살 때 추운 겨울 눈 오는 마당에 웅크려 누운 큰 강아지를 신기해서 만져보려 나가려다 언니들에게 제지당한 이야기는 예사였다. 줄무늬가 있었던 그 큰 강아지는 엄마 고향 감악산의 산신령인 호랑이였단다.

어느 정도 큰 다음에 나는, 이 모든 엄마표 전래동화 중 믿을만한 건 호랑이 이야기 뿐이었음을 안다. 어린 내가 엄마에게 무한반복 재생을 요청했던 그 많았던 옛날이야기 중 그나마 실제상황은 1940년대에는 충남 서산에 아마도 살았을 법한 호랑이였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가 아닌 '어머니'로 부른 후에도 내 어머니는 가끔 무언가를 보신 듯 한 밤에 상갓집을 다녀온 아버지를 문 밖에 세워두고는 굵은 소금을 두루 뿌리는 것도 모자라 아예 대문 밖 눈쌓인 곳에 식칼을 밤새 꽂아두기도 했다. 아버지가 상갓집이나 제삿집에서 뭔가 '겁나 험한 것'을 데리고 왔다면서 말이다.

그런 내 어머니 조차도, 
'귀신날'은 처음 들어봤다고 한다.


2. '귀신날' 또는 '귀신'의 서사

어린 내게 옛날 이야기, 주로 본인이 겪었던 '실화'로 각색된 어머니의 이야기에는 음력 1월 15일 정월 대보름 같은 우리 세시풍속에 관한 것들도 있었다. 곡식을 심기 전 논밭을 한바탕 태우는 쥐불놀이와 각종 수호신들에게 바치는 음식들을 주워먹으러 동무들과 온 마을을 하루종일 돌아다니던 일들이 고단했던 당신의 삶 속에서도 그나마 즐거웠던 어린 시절로 소환되었고, 가난하여 풀죽도 못 먹던 집에서도 이날만큼은 빚을 내서라도 좋은 음식들을 많이 준비하더라는 그런 서글픈 사연들도 있었다. 농경사회였을 당시로서 가장 중요한 풍작을 농사 시작하기 전 한 해의 첫달인 음력 1월에, 보름달이 뜨는 날에 하늘과 땅의 모든 신들에게 비는 풍습이겠다.

그런데, 음력 1월 15일 보름날의 다음날인 1월 16일이 이른바 '귀신날'이라는 걸 나는 올해 처음 들었던 거다.

<구픽> 출판사에서 '귀신'이라는 주제를 신예 작가들에게 던져주고 그에 관한 단편소설들을 모아서 엮은 앤설러지 [귀신이 오는 밤](2022)에는 정월 대보름날 다음날이 '귀신날'로 전해져 왔다고 말한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한바탕 놀고 들어간 다음날, 대보름 행사를 준비하느라 열심히 일한 머슴들이 하루 쉬려고 그 다음날을 '귀신날'이라 소문냈다는 것이 그 유래란다. 음력 1월 16일 밖에 돌아다니면 귀신에게 홀리거나 잡히게 되고, 심지어 신발을 밖에 내어 놓으면 사람을 못 잡은 귀신들이 그 신발들까지 가져간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194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충남 서산에서 호랑이는 물론 구미호와 도깨비불, 심지어 이무기로 추정되는 괴생명체까지 목격했다던 내 어머니에게조차도 정월 대보름 다음날인 음력 1월 16일 '귀신날'은 금시초문이었다. 내 어머니의 총기는 여든이 넘도록 네살 때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아 운동장에서 열린 마을주민 집단만세 행사와 옆 할머니의 '만사이~'도 여직 기억하는데도 말이다.

한편, 대만 작가 천쓰홍의 소설 [귀신들의 땅](2019)에서는 음력 7월 15일 보름날을 중심으로 한 7월 한달의 풍습인 '중원절(中元節) 이야기가 나온다. 
차별과 억압의 땅인 고국 대만과 시골 고향을 떠나 독일 베를린을 귀신처럼 떠돌다가 다시 귀신들이 여전히 흘러다니는 고향으로 돌아온 동성애자가 회상하는 시간의 중심이 바로 '중원절'이다. 이 역시 한 해 농사의 수확 전인 한 여름에 풍작을 기원하는 풍습이겠는데, 음력 7월 1일 '귀문(鬼門)'이 열리면서 온갖 귀신들이 나오기 시작하여 7월 15일 보름달이 뜨면 귀신의 문이 가장 활짝 열린다는 설이다. 대만인들은 7월 말 귀신의 문이 닫힐 때까지 주인 없는 풍성한 제삿상을 계속 차려놓는다고 한다.

우리의 음력 1월 15일 정월 대보름은 '상원(上元)이고 대만의 음력 7월은 '중원절(中元節)'이다. 
우리 귀신들은 음력 정월 대보름날의 다음날인 1월 16일에 돌아다니고, 대만의 귀신들은 음력 7월 내내 돌아다니는 거다.

그러나 귀신들이 스스로 돌아다니는 걸까.
내 보기엔 사람들이 불러내는 거다.
알아서 아무때나 돌아다니며 해코지 못하게 보름달이 뜨는 특정한 달과 날을 잡아 불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 참에 모여 고된 삶의 나날을 잊고 한바탕 산 사람들도 먹고 놀자는 거다.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말이다.

과연 종교 또는 이데올로기의 일종이다.
'귀신날' 같은 '귀신'의 서사는,
먹고 살기 위해서든 놀기 위해서든,
인류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부여에도 있었고, 고구려에도, 동예와 옥저에도 그 풍년 기원 축제들은 있었다.


3. '소외'와 '반전', 그리고 '자불어 괴력난신'

'귀신'에 관한 소설이나 영화 같은 귀신의 서사를 보다보면 나는 두 가지 개념을 떠올린다.

1) 하나는 '소외'다.

대부분의 귀신들은 원혼의 형태로 살아생전 온갖 차별을 받던 자들이다.
천쓰홍의 소설 [귀신들의 땅]에서는 산 자나 망자나 모두 '귀신'이다. 주인공은 동성애 남자로 오래도록 차별받았고 다섯 누나들은 뿌리깊은 남아선호사상과 여성차별에 익숙했으며 차별의 행위자로서 엄마 또한 대대로 억압받던 시대의 희생자였다. 결론에서는 말없이 묵묵했던 주인공의 아버지조차 대만 중화민국의 계엄과 억압에 반항하려던 비밀독서회원이었고 숨은 동성애자였다.

갖은 차별로 인해 '소외'된 자들은 자신들의 땅에 정착하지 못한 채 '귀신'이 되어 배회한다. 
19세기 중반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1848)이 "공산주의라는 '유령(귀신)'이 전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서문>)고 선언했지만 그 귀신은 바로 현실화되지 않았다. '공산당'의 아류들은 등장했다가 명멸했지만 계급차별과 노동소외가 현존하는 한 언제까지나 '귀신'이 되어 인류의 주변을 맴돈다. 
장화와 홍련의 신원은 용감한 평안도 철산부사가 풀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여성차별의 땅에서는 장화홍련의 혼은 여전히 떠돌아다닐 게다.

2) 또 다른 하나는 '반전'이다.

영화 [식스센스]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귀신의 서사에서 궁극에는 화자 자신이 귀신으로 드러난다. 
우리 신예작가들의 '귀신' 선집 [귀신이 오는 밤](2022)의 첫 작품인 배명은 작가의 <1월 16일생>의 화자도 알고보니 본인이 귀신이었다.
장자의 '호접몽'처럼 내가 귀신인지 귀신이 나인지 알 수 없는 경계가 바로 이 '반전'이 가리키는 지점이다.
쉽게 말하면,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사람'이라는 거다.

공자는 [논어]에서 "자불어 괴력난신(子不語 怪力亂神)"이라 했다.

항상 겸손했던 공자가 현세의 '사람'에 대한 일도 잘 모르는데 하물며 '귀신'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반문했다는 말이다. 유교는 여타 종교들과 다르게 절대신이나 내세 또는 사물에 깃든 신이나 귀신 같은 존재를 믿지 않는다. 제사를 중시하지만 유교의 그것은 귀신을 섬기는 게 아니다. 유교의 제삿상을 받는 조상신은 내세 또는 명부에서 '귀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주변에 바람과 공기처럼, 음양오행처럼 항상 떠돌아다니는 기운에 가깝다. 인간사의 요체인 현실정치를 중시하며 한편으로 [주역/역경] 같은 우주만물의 운동원리를 철학적으로 사고한 성리학의 급진적인 요소에서 조상신이라는 '귀신'은 '사람'과는 또 다른 '물질적' 요소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보적 성리학은 '유물론'의 단초를 지니고 있다.

모든 '귀신' 이야기는 결국,
현실에 살아있는 '사람'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이 현실 밖 '귀신'을 멀리 하고 현실 속 '사람'을 중시한 공자의 '자불어 괴력난신'의 비밀이다.

***

1. [귀신이 오는 밤 - 귀신날 호러 단편선], 배명은 외, <구픽>, 2022.
2. [귀신들의 땅(鬼地方)](2019), 천쓰홍, 김태성 옮김, <민음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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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흑학 - 승자의 역사를 만드는 뻔뻔함과 음흉함의 미학 Wisdom Classic 3
신동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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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흑(厚黑) vs. 박백(薄白)
- [후흑학], 신동준, 2011.


"이종오가 사상 최초로 거론한 '후흑(厚黑)'이라는 용어는 각각 '면후(面厚)'는 '뻔뻔함'으로, '심흑(心黑)'은 '음흉함'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가 역설한 '후흑'의 궁극적인 목적은 '후흑구국(厚黑求國)'이다... 
중국 전래의 제왕학이 바로 '후흑'의 이론적 근거인 것이다."
- [후흑학], <1부 1장. 후흑학의 탄생>, 신동준, 2011.


중국 역사상 '3대 기인'으로 불리는 청나라 말 사람 이종오(李宗吾)는 유교경전인 사서삼경이나 제자백가론, 역사서인 '24사' 등을 두루 공부했으나 이들로부터 이른바 '왕도(王道)'를 읽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기인'으로 평가받는 이유인데, 그는 역사상 천하를 거머쥔 인물들은 사실 '왕도'보다는 '패도(覇道)'의 제왕학을 실천했다고 보았다. 이종오는 남송의 주자학 또는 성리학 시대 이후 1천년 간 중국을 지배한 유교 이데올로기로서의 '인의(仁義)'보다는 도가의 '도(道)'와 불교의 '공(空)'에 기초한 소위 '후흑학(厚黑學)'을 제시했다. 
1912년의 일이란다.


고전인문학자이자 언론인 신동준 선생이 이종오의 '후흑론'을 해설한 [후흑학](2011)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은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국제정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청말 외세열강의 공세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중국의 생존철학으로서 '후흑론'의 중요성을 재조명하고 현재에 다시금 강조하는 것이라 쓰고 있다. 
'뻔뻔함'과 '음흉함'의 처세술로만 알려진 '후흑학'은 생존을 위한 필수 이론이자 실천철학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느 개인 누구나 살아남기 위해 '후흑'의 처세가 필요하다는 건 다 안다. 다만 실천의 문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대다수는 저도 모르게 '후흑'의 선택을 할 것인데, 그럼에도 '인의'와 대의명분을 선택하고는 대쪽같이 부러지는 위인들은 '후흑'의 반대말인 '박백(薄白)'으로 불린단다. 낯짝 두꺼운 '면후'의 뻔뻔함 및 속이 시커먼 '심흑'의 음흉함과 대비되는 얼굴이 두껍지 못하여 맑은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면박'과 '심백'의 차원이다. 뻔뻔하고 음흉해야 살아남는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실천하지 못하고 거꾸러지거나 물러난 대부분 사람들은 역사의 위인이 되지 못한 '박백'으로 남았고, 천하를 거머쥔 위대한 인물들은 '후흑'의 대표자들이었다는 게 이종오의 [후흑학]의 주장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뻔뻔하거나 한없이 음흉하다고 해서 천하를 제패한 역사적 위인이 되는 건 아닐테다.  당대에는 잘 나가다가도 역사적으로 소인배가 된 경우도 많다. 
그리하여 '후흑론'은 3단계로 구분된다.


[후흑학] <1부>에서 말하는 '면후심흑'의 3단계'(2장)는 다음과 같다.

1. 후여성장(厚如城墻), 흑여매탄(黑如煤炭) : 낯가죽이 성벽처럼 두껍고, 속마음이 숯덩이처럼 시꺼멓다. 평범한 사람들이 갖출 수도 있을 초보 단계로 여기서 멈추면 그냥 사기꾼이다.

2. 후이경(厚而硬), 흑이량(黑而亮) : 낯가죽이 두꺼우면서 딱딱하고, 속마음이 검으면서도 맑다. [후흑학]은 조조와 유비의 사례를 든다. 유비는 여기저기 빌붙으며 눈물로 인의를 호소하다가 결국 황제가 되었으니 '면후'의 달인이었지만 의리를 져버리지 못했으니 '심흑'은 부족했다. 한편 조조는 신의 용인술로써 '심흑'의 대가였음에도 '면후'가 부족하여 삼국통일을 이루지 못했단다. 동오의 손권은 '후흑'은 좀 알았지만 유비나 조조에 미치지 못했는데 다만 '면후'와 '심흑'을 그나마 균형적으로 부려 장수는 했다.

3. 후이무형(厚而無形), 흑이무색(黑而無色) : 낯가죽이 두꺼우면서도 형체가 없고, 속마음이 시꺼먼데도 색채가 없다. 이른바, '불후불흑(不厚不黑)'이라는 최고경지다. '대지약우(大智若愚)'와 같이 영리한데 멍청해 보이고 그럼에도 그 누구도 '후흑'의 혐의를 보지 못한다. 이종오가 가장 '후흑'의 대가로 꼽은 자가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사마의였다. 조조 사후 위나라를 두고 대외적으로는 제갈량과 내적으로는 조씨들 모두를 '후흑'의 전략으로 패퇴시키고는 사마씨의 세상을 연 사마의를 '후흑'의 역사에서 따를 자는 없다.

신동준 선생에 의하면 이종오의 '후흑론'은 도가와 불가의 공(空)과 도(道)를 따른다. 유가의 인(仁)과 의(義)를 앞세운 '인의론'은 결국 역사의 패배자로 '박백'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명철보신(明哲保身) 중 살아남는 게 지고의 가치인 '보신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청말의 혼란기에 중국 역사를 '후흑론'으로 정리한 이종오에게 중요한 단어가 또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바로 '구국(求國)'이다.

즉, 대의명분이 있는 생존투쟁의 큰 싸움판에서야말로 '후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른바 '후흑구국(厚黑求國)'이다.


이 사례로 [후흑학] <2부>는 역사상 구국과 천하쟁패를 앞둔 '후흑'과 '박백'의 투쟁을 소개한다.

1. 춘추시대 말기 월왕 구천(후흑)과 오왕 부차(박백) : 와신상담을 통해 부차에게 오랜 기간 몸을 굽힌 구천의 역사적인 복수는 서로 죽고 죽이는 본격적인 전국시대를 열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 말기 초한쟁패 또한 적이 죽어야만 내가 살아남는 '포스트-전국시대'였으니, 구천이야말로 '후흑'의 서막을 연 인물이다.

2. 초한전쟁 건곤일척의 주역인 한왕 유방(후흑)과 초패왕 항우(박백) : 서민건달 유방은 여러 재능있는 자들을 두루 품고 끝까지 야망을 밀어붙인 반면, 항우는 권토중래를 거절하고는 하늘을 탓하며 천하쟁패 투쟁을 쉽게 포기하고 만다.

3. 한신(박백)을 잡아들인 계책을 낸 장량(후흑) : 토사구팽을 예견하고 속세를 떠난 장량이 유방과 여후에게 한신을 토사구팽할 계책을 낸다.

4. 유비(면후)와 조조(심흑) : '면후'와 '심흑' 단계의 대표적 사례로서, '면후'와 '심흑'의 적절한 결합으로서 '후흑'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5. 손권(후흑)과 사마의(불후불흑의 최고경지) : 손권과 동오의 장수비결도 사마의의 최고경지를 당할 수 없었다.

6. 사서삼경 중 [주역]을 즐겼지만 '박백'했던 장개석과 [자치통감]은 물론 [한비자]를 끼고 살았던 '후흑'의 모택동 : 최대군벌이 된 후 '후흑'을 버리고 기독교에 귀의한 장개석의 '박백'이 농민혁명의 시대적 대의를 앞세운 모택동의 '후흑'에게 패배한 역사는 이종오의 '후흑론' 이후 사례로서 신동준 선생의 견해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후흑구국'의 차원에서 논하는 '후흑학'은 바로 '제왕학'이었던 것이다.


[후흑학] <3부>가 전하는 '승자의 전략'으로서 '후흑술(厚黑術)'은 아래와 같다

1. 공(空) : 위기에서 빠져나갈 퇴로를 만들라. '교토삼굴'. 살아남기 위해 여기저기 굴을 파두는 전략이다. '공성계' 또는 '36계 주위상계(走爲上計:줄행랑)' 등이다.

2. 공(貢) : 반룡부봉(攀龍附鳳)하되 역린을 조심하라. 강한 자에게 붙되 거슬리지 말 것이다. 용의 등에 탔다고 자만하다가 [한비자] <세난>에 나오는 역린을 건드리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3. 충(沖) : 호언장담으로 기선을 제압하라. 빈천한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4. 봉(捧) : 박수갈채로 자부심을 만족시켜라. 대놓고 아부보다는 상대방이 듣고 보기를 바라는 대로 말하고 행하라.

5. 공(恐) : 솜에 바늘을 숨기고 때를 노려라. 섣불리 의중을 드러내거나 잘난 체 하지 말고 사마의처럼 때를 준비하라.

6. 송(送) : 비자금을 활동자금으로 활용하라. 상대방은 물론 영향력있는 주변에 뇌물도 필요하다. 유방의 책사 진평은 빈천하여 뇌물을 받았지만 이를 사적으로 쓰지 않고 전쟁 승리를 위해 항우 주변에 뿌리는 뇌물로 썼다. 

7. 공(恭) : 사람을 가려 때에 맞게 칭찬하라. 타국 출신 관리와 책사들을 배제하려는 진시황의 '축객령'을 철회시킨 초나라 출신 진나라 유세객 이사의 '간축객서'는 제갈량의 '출사표'못지 않은 역사상 명문이다. 태산은 먼지 한 톨도 거부하지 않고 대해는 작은 물줄기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간축객서'를 쓴 이사는 진시황 전국통일 최초의 승상이 된다.

8. 붕(繃) : 큰 인물로 포장해 신뢰케 만들라. '36계' 중 제1계인 '만천과해(瞞天過海)'는 천자인 당태종을 속여 바다를 건너게 한 설인귀의 설화에서 유래한다.

9. 농(聾) : 귀머거리 흉내로 속셈을 감추라. '36계'의 27계인 '가치부전(假痴不癲)'은 어리석은 척 하며 상대방을 속이는 적극적인 전술인데, 사마의처럼 의중을 끝까지 감추는 방책이다.


개인의 생존과 처세에서 누구나 내심 떠올리고 만지작거리는 '후흑술'은 '구국'의 거대한 생존투쟁에서는 더더욱 필요한 전략임에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종오가 중국 역사에서 오랜 기간 경직된 '인의론'를 넘어 '후흑구국'의 실천철학으로 무장하여 외세를 물리치자고 강력 주장한 것 또한 동서고금의 진리다. 

그럼에도 '인의'를 지키려 한 역사를 그냥 '박백'으로 치부해버리는 건 어쩐지 입맛을 쓰게 한다.

내 생각에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내심 알고는 있을 저 '면후'와 '심흑'의 실천이 과연 훈련으로 가능할까 싶기 때문이다.

아니면,
아직 내가 '구국'의 차원만큼 생존이 절박하지 않은 것인가?

***

- [후흑학(厚黑學)], 신동준, <위즈덤하우스>, 20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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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나와 일본 - 비릿 짭짤, 일본 어식 문화 이야기
서영찬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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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릿한 '어(魚)식문화' 이야기
- [사카나와 일본], 서영찬, 2024.


"魚 물고기 어.
일본인에게 이 한자를 보여주고 한번 읽어보라 하면 대다수가 '사카나(さかな)'라고 발음할 것이다. 1973년 상용한자표가 개정된 후 초등교과과정에서 어(魚)를 '사카나'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사카나'의 본래 뜻은 '곁들여 먹는 음식'이다. 무엇과? 밥과 술이다. 그래서 사카나는 반찬이기도 하고 안주이기도 하다...
술을 마시든 안 마시든 모든 언어 대중 사이에 '술안주=사카나=생선'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이를 통해 유추 가능한 사실은 예로부터 일본인의 주류 술안주가 생선(魚/물고기)이었다는 점이다."
- [사카나와 일본], <6. 바닷물고기 언어학>, 서영찬, 2024.


1.

내 일찍이,
'회(鱠)'를 사주는 사람은 나이고하를 막론하고 '형'이라 부를 준비가 되어 있다.

점심에 누가 뭘 먹을까 물을 필요 없이 사시사철 먹을 수만 있다면 나는 늘 '물냉면'이 제일 먼저 떠오르고,
저녁에 술 한 잔 할 때 안주를 뭐로 할 것이냐 누가 묻기도 전에 나는 항상 '회(鱠)'를 떠올린다. 
진심으로 1년 내내 먹고 싶은 음식이다.

물고기의 비릿함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 중 하나다. 차고 비린 술안주의 조합이 바로 '회'다.


2. 

'회(鱠)'.

우리가 날생선 음식으로 알고 있는 이 한자는 일본에서 지은 글자란다. 원래는 고기 육(肉) 변을 쓰는 '회(膾)'였다. 익혀먹는 화식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 중국에서 닭고기와 개고기 등을 날로 먹던 풍습이 한자 '회(膾)'의 기원인데, 서기전 6세기의 공자까지도 개고기 '회'를 먹었다는 설이 있듯이 원래 '회'는 날짐승과 들짐승 등의 육지 날고기를 의미했단다. 이것이 일본으로 넘어와 육식을 금했던 에도시대에 물고기 어(魚) 변을 쓰는 '회(鱠)'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 '어식(魚食)문화'라 자칭하는 섬나라 일본에서 각종 물고기를 지칭하는 한자에 '물고기 어(魚)' 변을 붙인 일본식 조어가 등장한다.


3.

읽고 쓰는 게 취미이자 특기인 '활자중독' 인문학자이자 전직 언론인 서영찬 선생은 [사카나(魚)와 일본](2024)이라는 책을 통해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물고기와 해산물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일본에서 살아보지는 못했으나 부산 출신인 저자는 물고기에 대한 박학다식한 관심과 심화 공부를 통해 더 나아가 일본의 역사와 문화까지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진지하지 않고 즐겁고도 가볍게 읽기 참 좋은 책이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말하듯, 학술적이지 않고 "술자리나 식사 자리에서 가벼운 이야깃거리 정도"로 나눌 수 있는 소소한 내용을 목적으로 한다. 딱 내 취향이다.


"우리가 흔히 스시니, 초밥이니 부르는 것은 '니기리즈시'다. '니기리'는 '손으로 움켜쥔다'는 뜻이다. 밥알을 한 움큼 잡아 손아귀에 힘을 주고 꾸욱 움켜쥐었다가 와사비를 묻히고, 그 위에 생선살을 올린 다음 다시 한번 꾹 쥐어주면 초밥 하나가 완성된다. 이 제조 과정이 그대로 음식의 명칭이 됐다."
- [사카나와 일본], <3. 쏠쏠한 돈의 맛 : 니기리즈시>, 서영찬, 2024.

어식문화 일본의 대표음식 '스시'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말로 '초밥'이라 부르는 '스시'는 'すし' 또는 '寿司'다. 원래는 우리나라 동북해안의 가자미식혜처럼 염장생선에 밥을 얹어 발효시킨 슬로우푸드(나레즈시)였지만, 근현대 일본의 초밥은 '니기리즈시'다.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갖은 재료를 재워놓고 필요할 때마다 한 줌 쥐어서 만드는 패스트푸드의 대표음식이 되었다. 김밥의 유래리기도 하다. 전통 발효음식이 19세기 초부터 즉석식품으로 전환되는 식문화 변천과정에서도 변치 않는 건 '사카나(魚)'다. 소량 한 줌의 작은 밥덩이에 어떤 생선을 올려도 좋다.


[사카나와 일본]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0. 프롤로그
1. 애잔한 서민의 맛 
: 이와시, 멍게, 오징어, 꽁치, 가다랑어, 백합, 날치, 전갱이
2. 깊은 역사의 맛 
: 붕어, 다시마, 방어, 갯장어, 뱀장어, 붕장어, 가쓰오부시
3. 쏠쏠한 돈의 맛 
: 니기리즈시, 대게, 새우, 청어, 전어, 고등어, 명태
4. 무사의 칼맛 
: 도미, 뱅어, 아귀, 참치, 복어, 무사의 밥상
5. 신묘한 신성의 맛
: 문어, 쑤기미, 김, 전복, 연어, 고래
6. 바닷물고기 언어학

이 중 대부분은 우리 한반도에 익숙한 물고기들이다. 가다랑어와 청어, 날치와 참치 정도가 한반도와 대륙보다는 태평양 원양에 그나마 가까운 섬나라 일본의 상대적 특징이겠다. 물론 냉장냉동 기술이 발전한 지금은 어디서든 먹을 수 있으니 고대로부터 이어진 물고기 이야기인 것이다.


접대(오모테나시)를 비롯하여 물고기 중 최고는 도미(鯛/조)다. 사시미, 찜, 조림 등 어떤 음식으로도 중요한 접대의 앞자리를 차지한다. 우리는 회로 많이 먹는데, 줄돔, 가시돔 같은 건 이름만 따온 거고 진짜 도미는 '참돔'이다. 임진왜란 이후 첫 조선통신사가 건너갔을 때도 에도 막부는 도미를 차렸고 우리 젊을 때만 해도 결혼식이나 돌잔치의 뷔페상에는 도미가 통째로 누워 있었다. 우리의 붕어빵은 본래 일본의 도미빵이었고, 사시미나 회로 유명한 도미의 손질은 과연 사무라이 무사의 칼맛도 난다. 

서민의 물고기 하면 이와시(鰯/약)다. 
이 책의 첫 장을 여는 이 물고기는 청어과 생선을 싸잡아 부르는 말로 정어리와 멸치 등속의 회유성 떼거리 어종을 이른다. 떼거리로 잡히니 많은 사람들이 질리게 먹다가 버리거나 비료로도 가공하는 식이다. 다수 약한 민중들의 물고기반찬이라 약할 약(弱) 자 앞에 물고기 어(魚) 변을 붙였다. 그러나 다수의 힘을 지녀 어획량에 따라 일본 민중의 식생활을 좌지우지했다. 다수는 결코 약하지 않다.

첫 봄에 '맏물'로 잡는 가다랑어(鰹/견)는 일본 특유의 생선이다. 원양어업이 발달하기 전이었던 에도시대에는 참치(鮪/유)보다 맏물 가다랑어가 바로 부르는 게 값 1순위였단다. 오히려 먼바다에 사는 참치가 뭍에 올라왔을 때는 이미 상했거나 직전의 맛이라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가다랑어 또한 날로 먹다가 탈이 많이 나서 막부정권이 날생선 취식을 금지시키기도 했다는데, 어민들은 '겉바속촉'으로 겉만 대충 익혀 먹기도 했다. 탁탁 두드린다는 가다랑어 짚불구이 '다타키'다. 

일본 사카나의 상징인 가다랑어는 가쓰오부시(鰹節/견절)의 재료이기도 하다. 물에서 쪄낸 가다랑어를 열로 건조한 후 연기로 훈제하고 말리는 과정에서 곰팡이를 수차례 깎아내는 수개월의 과정을 거치면 딱딱한 가쓰오부시가 된다. 가쓰오부시는 중세 전국시대부터 무사들의 승전기원 식량이었고 미소된장과 주먹밥 같이 근대 일본군대의 전투식량이기도 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명태(鯳/저)는 대구과의 물고기로 우리는 생태, 황태, 동태, 먹태, 북어, 노가리, 코다리, 명란 등으로 다양하게 먹지만 일본에서는 그 모양 그대로가 아니라 주로 가공한 형태로 먹었다. 어묵도 가능하지만 분홍색 어육소시지, 게맛살 등 추억의 밥반찬의 주재료가 바로 명태다. 명란젓이라는 한반도 동북부의 특산품이 일본으로 건너가 자리잡기도 했다.

청어(鰊/련)와 연어(鮭/규)는 홋카이도 산물로 일본 혼슈의 북쪽 아이누 착취와 생선 가공업 자본축적의 상징이다. 청어와 연어를 얻기 위해 아이누족을 지배 및 착취했고 가공산업 진흥을 통해 자본축적을 했으나 현재는 청어와 연어 대부분을 수입한다는데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 과정을 보여준다.

일본의 고래(鯨/경) 잡이는 끈질기다는데 전후 일본인을 먹여살린 고래를 신성시하는 점도 있겠지만 [모비 딕]의 에이해브 선장이 오래전 다리를 잃은 장소가 일본 근해였던 것처럼 일본이 고래와 가까운 문화였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다만 후쿠시마 방류처럼 다른 나라는 무시하고 제멋대로 처신하는 일본 우익정권의 행태는 참 일관적이라는 생각은 든다.


4.

비릿한 '어식문화'는 무릇 섬나라 일본의 것만은 아니다.
내륙 출신의 내가 생선회를 스무살에 처음 먹어보았음에도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된 것만 봐도 물고기(사카나)의 비릿함은 바닷가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 같다.
비릿한 어(魚)식문화 이야기는 계속된다.

비가 오든 말든,
오늘 저녁에는 지인과 함께 도미회를 먹으며 소주 한 잔 기울여야겠다.

***

- [사카나(さかな/魚)와 일본], 서영찬, <동아시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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