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46
칼 구스타프 융 지음, 김양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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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과학으로서, 심리학
- [인간과 상징], 칼 구스타프 융, 1964.


1.

아들이 카톡을 보내왔다.

용돈이 필요하거나 책 읽다가 모르는 단어를 물을 때 가끔 문자를 보내는 아들은 고등학생이 된 작년에 한창 'MBTI' 성격유형 테스트에 빠져있었다. 아들이 공유한 문자를 통해 나도 검사를 해보았더니  'ENJF'인가 'ENJT'인가로 나왔던 것 같다. 나는 '이 무슨 현대식 미신이냐'고 하면서 한 번 훑어보고는 치워버렸고 아들이 'MBTI' 얘기를 할라치면 '너는 아직 변화의 가능성이 무궁하다'며 일축했다.

내가 인간의 타고난 '본성' 보다는 '백지 이론'(tabula rasa/blank slate)을 믿는 대외적이고 공식적인 이유는 내가 세상의 '진보'를 믿기 때문이었고 그 이론적 전제는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이었다. 내 마음에 '심리학'이 들어설 공간은 없었다. 계급투쟁의 역사에서 굳어지고 이어져 온 인류의 사회적 '본성'은 언젠가 도래할 평등의 새 체제에서 다시금 씌어져야 했다. 

아들이 본인은 'INJT'이시라며 내게 보낸 카톡 문자는 그 성격에 관한 유투브 영상의 링크였고, MBTI '전문가'를 자처하는 유투버나 개그맨 출신 유투버의 영상을 통해 아들이 아빠인 내게 하고자 했던 말은, '하라고 하면 더 안 하는' 성격이시니 건드리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와도 같았다. 내 아들이 내 생각보다 공부를 훨씬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재작년부터 세상 스트레스 다 받으며 잔소리가 심해진 아빠에게 공부가 싫은 아들이 보내는 호소이기도 했다. 아들이 슬로건처럼 내건 'INJT'는 '무슨 말인지 이제 알았고 앞으로 알아서 할테니 자꾸 강요하지 말라'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녀석의 아버지이므로 'MBTI' 결과가 거의 비슷하다. 아니 사실은 똑같을 수도 있다. 나도 아들처럼 '직관'적이고 '판단'형인 듯도 하다. 나는 또한 '논리'적이고 싶어하며 '외향'적이기를 지향한다. 한편으로 타고난 대로 한다면 아마 나는 'INJF', 즉 '내향'적이고 '직관'적이며, '판단'형에 '감정'적인 성격에 가깝다. 그러나 성인이 된 나의 '의식'은 'ENJT', 즉 '외향'을 지향하고 '직관'을 믿으며, '판단'형에 '논리'적이고 싶어한다. 

정리하면,
나의 '의식'은 'ENJT'를 표방하고,
나의 '무의식'은 'INJF'로 잠재되어 있다.

아마도 '타고난 본성'을 믿기로 한다면,
나는 나의 '무의식'의 문을 여는 것이리라.


2.

1912년, 서른일곱살의 정신분석 의사 칼 융이 선배 의사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결별했을 때 프로이트는 쉰여섯살이었다. 
두 사람이 '무의식'의 발견과 연구라는 공통분모로 처음 만난지 5년 만이었다.

현대 심리학의 쌍벽인 두 인물의 관계는 '동지'였다. 일곱살 차이였던 조선 태조 이성계와 삼봉 정도전은 철저한 '동지'였지만, 열아홉살 차이의 프로이트와 융은 사실 '부자' 관계와도 같았다. 프로이트는 본인의 이론에 융이 철저히 따르기를 강요하는 '아버지'였고, 융은 자신만의 이론을 발전시키고자 아버지를 결국 떠나고 마는 '아들'이었다. 
신경증 환자들의 '꿈의 해석'의 추상화와 보편화, 나아가 교조화의 징후를 보이고 말기에 성에 대한 집착에 빠져 꿈해석을 이론화하던 프로이트에 반대하여 그 어떤 추상화나 보편화 일체를 경계하면서 철저하게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사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결론을 내리고자 했던 칼 융은 결국 프로이트의 이론대로 아버지를 죽이는 오이디푸스의 운명길을 따라간 것이었다.
아들 같았던 칼 융은 아버지와도 같았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당시에는 세인들에 의해 안 그래도 멸시당하던 '마음의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을 아예 "도덕적 어둠의 쓰레기장"([인간과 상징], <1>)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한다.


"꿈의 분석이란 한 인간이 배워서 규칙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일종의 '기술'이 아니라, 두 인격 사이에 이루어지는 '변증법'적 대화인 것이다."
- [인간과 상징], <1. 무의식에 대한 접근>, 칼 융, 1964.


현대 심리학의 기반이 되었으며 지금의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라는 성격유형 테스트의 이론적 토대를 놓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1875~1961)은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악몽도 꾸고 수학을 특히 싫어하며 공부만 하면 발작을 일으켜 열두살에 등교거부까지 했던, 어찌보면 지금 내 아들보다 더 말을 안 들었을 수도 있는 이 천재소년은 타고난 'INJT'였을 텐데 어쨌든 공부발작증을 극복하고 의사가 된다. 당시만 해도 완전 비인기 영역이었던 정신병원에 취직한 융은 어린 시절의 특이한 꿈들과 당시로서는 치료불능의 영역이었던 신경증 환자들의 연구 과정에서 '꿈'과 '상징', 그리고 이들의 원천으로서 '무의식'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1907년 32세에 51세의 프로이트를 만나 5년간 함께 부자지간과 같은 학문적 동지관계를 이어갔고 프로이트와 결별한 융은 꿈의 분석을 교조화하지 않고 인간 무의식의 발로로서 꿈을 절대화하지 않았으며 꿈을 비롯한 갖자기 사례를 통해 발현된 인간의 '상징'에 주목했다. 

융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개인'의 강조다. 꿈의 전형성을 가지고 일률적인 해석을 하는 게 아니라 꿈꾼 자의 성격 유형(외향-내향/감각-사고-감정-직관)을 배경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도 꿈꾼 자의 유아기와 전날 생각들을 토대로 꿈을 사례별로 해석하지만 이를 전형화하고 보편화하려는 학자적 욕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성에 대한 집착을 벗어난 융은 꿈 자체를 무의식의 '상징' 발현으로 보되 이를 보편적 이론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칼 융은 현대 심리학의 대부라는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대표저서가 없는 편이다. 1961년에 세상을 등진 융의 사후인 1964년에 그의 제자들과 공저로 출간된 [인간과 상징]에서 융은 <1장. 무의식에 대한 접근>이라는 프롤로그 개관의 집필을 했는데 융의 최측근 제자였던 루이제 폰 프란츠가 이 책 출간을 실질적으로 총괄했다. 

[인간과 상징]은 처음부터 융에 의해 기획된 작업은 아니었다. 1959년 영국 BBC에서 방영된 한 프로그램에서 칼 융의 인터뷰가 대중들의 호응을 받게 되어 1964년에 출간된 책인데, 처음에는 심리학의 '이론화'를 경계한 융이 출간을 거절했지만 전세계 시청자들의 요청에 따라 작심을 하게 되었고 융 혼자가 아닌 그의 학문적 동지들인 제자들과의 공저를 조건으로 기획된 책이라고 한다.

칼 융은 이 책의 <1장>에서 '무의식에 대한 접근'의 개괄적 내용을 통해 '꿈'과 '상징', 꿈을 꾸거나 분석하는 사람의 성격 '유형'의 문제, 인류진화사에서 유전자와도 같은 '집단 무의식'의 '원형' 문제 등을 소개하고 있다.
아마도 정치경제사회 문제에 섣불리 개입하지 않고자 했을 심리학자 융은 이러한 '원형'과 '유형'을 보편화하지 않고 각 '개인'의 개별성과 구체성에 주목한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근대인(현대인)이 '합리주의'를 앞세워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부하면서 신 또는 자연과의 거리가 멀어졌고 양차례 세계대전 같은 재앙은 이를 증명하는데 근대의 '합리주의'든 고대 및 중세의 '신비주의'든 다시금 소통하고 합일이 되어야 현대적 '단절' 현상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유전자 DNA와 같은 '원형'의 '집단 무의식'과 개인 성격 '유형'은 꿈을 비롯한 각종 행위를 통해 '무의식'의 '상징'으로서 '의식'과 함께 우리들의 심리 현상을 이룬다.

전형적인 꿈(나체꿈, 추락꿈, 비행꿈, 귀신꿈, 위인꿈, 추격당하는 꿈, 목적지가 보이는데 도달하지 못하는 꿈, 움직여야 하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 꿈 등)은 그 자체가 아니라 꿈꾼 자의 성격과 유형, 인간 무의식의 원형 등을 연구하여 종합적이고 개별적으로 분석되어야 하며, 인간 심리의 유형도 비록 '타고난 본성'이기는 하나 그 개인이 살아온 환경의 영향으로 항상 '양면성' 또는 다면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개인이야말로 유일한 현실이다. 개인에서 벗어나 인류라는 추상적인 관념으로 나아갈 수록 우리가 실패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 어디에서 무슨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면 그 변화를 경험하고 이어나가는 것은 결국 개개인이다. 실제로 변화는 '개인'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 [인간과 상징], <1>, 칼 융, 1964.


칼 융이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이고 성격유형 테스트(MBTI)의 기원과도 같지만, 그의 이론은 결코 보편적으로 이론화되지 않는다.
그에게 모든 변화의 주체는 "개인"이어야 하고, 꿈꾼 자와 꿈 분석가는 서로 "변증법적 대화"를 이어가야 하며, 항상 "진리는 구체적"인 것이다.


3. 

"성격은 한 가지로 정해진 게 아니란다."

이게 내가 'MBTI'로 본인의 정체성을 알고자 했던 내 아들에게 해준 말이었다.

칼 융 박사의 말대로 모든 사람은 각자 양면성이 있고, 설령 타고난 본성이 있다고 해서 그 '본성' 그대로가 아니라 자라온 환경에 따라 어느 한 유형이 특출나게 될 수도 있다. 
남성 속에 여성성(아니마)이 있고 여성 속에 남성성(아니무스)이 있듯, 오래전 '내향성'이었던 나는 지금 '외향성'이 더 두드러진 것처럼 행동한다.  또한 '감정'이 앞서던 나는 '이성(사고)'을 더욱 앞세우기도 한다. 

융에 의하면 나는 '의식'의 영역에서 '외향성'과 '이성'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잠재된 '무의식'의 영역에서 '내향성'과 '감정'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의식'이 '무의식'을 억압하고 통제만 한다면 이는 프로이트나 융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콤플렉스'로 나타날 수도 있다. 프로이트에게 꿈은 이 억압된 '무의식'의 '소망충족표현'인 한편, 융에게 꿈은 '의식'에 지배된 '무의식'이 그 인류의 '원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장치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융에게 '꿈'과 '상징'의 기능은 '의식'과 '무의식'이 균형을 이루는 "심리적 평형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이다"([인간과 상징], <1>).


"... '마음'은 '의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 [인간과 상징], <1>, 칼 융, 1964.


'의식'과 '무의식'의 '변증법'을 담는 그릇은 칼 융에게는 인간의 '마음'이다.

내 아들의 'MBTI'라는 '의식'은 아직은 알 수 없는 그 아이의 '무의식'을 억압하고 있을 수도,
나의 '내향'적이고 '감정'적인 '무의식'이 사실 '외향성'과 '이성'을 지향하는 '의식'을 줄곧 괴롭혀 왔는지도,
나와 내 아들 개인이 겪는 자기 성격에 관한 질문들은 결국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누구나 겪어온 공통적인 '심리학'적 현상일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심리학'은 칼 융의 인도에 따라 내게도 '마음'의 과학이 된다.

***

1. [인간과 상징(Man and his Symbols)](1964), Carl Gustav Jung 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16.
2.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1900), Sigmund Freud,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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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해석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36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김양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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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꿈을 꾸었다
- [꿈의 해석], 지그문트 프로이트, 1900.


"... 꿈은 과거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왜냐하면 꿈은 어떤 뜻으로나 과거에서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꿈은 우리에게 미래를 예시해 준다고 예로부터 믿어왔는데, 여기에도 확실히 일면의 진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꿈은 소망을 충족된 것으로서 우리에게 그려줌으로써 어느 의미에서는 우리를 미래 속으로 인도해 준다. 그러나 꿈을 꾸는 본인이 현재로 알고 있는 이 미래는 부서지지 않는 ('무의식'의) 소망에 의해서 사실은 그 과거와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 [꿈의 해석], <7장. 꿈 과정의 심리학>, 지그문트 프로이트, 1900.


1.

며칠째 같은 꿈의 반복이다.
어젯밤에도 꿈 속의 나는 헐벗고 있었다. 
그것도 완전히 홀라당.

수많은 여성들도 포함한, 아니면 죄다 여자들만이었을 수도 있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있었는데 나만 완전 홀라당 상하의 실종 상태였고 엄청나게 쪽팔리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자리를 뜰 생각도 못하고, 아니면 안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떼씹'을 하는 꿈도 아니었다. 나만 창피하다 생각했지 내 옆의 수많은 여자들은 나체로 있는 나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깨어나서도 과연 내가 그 상태로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뭐하러 거기에 그 모냥 그 꼴로 있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사춘기 시절 꾸었던 몽정도 아니고 중년에 이 무슨 일이고 싶어 찜찜한 마음으로 잠에서 깨니, 나는 또 요 위에 누워 이불은 펴지도 않고 베개와 함께 머리에 벤 채로 자고 있던 나를 발견한다. 
옆에는 역시 읽던 책 또는 접던 종이가 있다.


2.

"꿈은 완전한 심리적(또는 정신적) 현상이며, 바로 어떤 '소망의 충족(표현)'을 뜻한다. 꿈은 우리에게 이해될 수 있는, 깨어있을 때의 심리적 행위와의 관련 속에 넣을 수 있는 것이므로 아주 복잡한 정신활동으로 만들어진다."
- [꿈의 해석], <3장. 꿈은 소망의 충족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1900.


잠에서 깬 내 옆에 펼쳐져 있던 책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1900)이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6장. 꿈의 작업>의 노이로제 환자들 사례가 펼쳐져 있다.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그간 인문학 분야에서 다루지 않던 '꿈'과 '무의식'을 다룬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 1857~1939)의 대표저서 [꿈의 해석]은 의사인 그가 진료한 정신병적 노이로제 또는 히스테리 환자들의 꿈을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인간 의식 속 꿈의 의미와 그 근원으로서 '무의식'의 영역을 소개한다. 의학자이자 과학자인 그는 철학자처럼 연역적 가설을 우선 내놓지 않고 많은 사례들을 토대로 귀납적으로 꿈을 정의한다. 사례가 부족하기에 프로이트 자신의 개인적 꿈 사례도 다수 활용하고 있다. 물론 개인적 민감 정보 등은 생략하고 있지만 과학적 결론에 목마른 과학자가 본인을 피검체로 다루는 지킬 박사처럼 말이다.

[꿈의 해석]을 통해 그가 조심스레 제시하는 '무의식'의 가설(적어도 1900년 당시에는) 작업이었기에 프로이트는 '꿈이란 무엇인가' 단언하기 어렵다는 식의 말을 많이 하고 있지만, [꿈의 해석]에서 결론적으로 프로이트가 내린 꿈의 정의는 "소망충족표현"(같은책, <3장>)이다.

즉, 꿈은 낮 시간에 생각하고 있던 오만가지 잡생각들('꿈의 사고')이 어떤 '언어'나 '기호' 또는 갖가지 연상작용을 통해 밤 시간에 어떤 "논리적 관계를 표현하는 아무런 수단도 갖지 못한"(같은책, <6장>) 채 재현('꿈의 내용')되는데, 이는 아마도 바로 전날인 가장 "최근의 인상들"(같은책, <5장>)을 표면으로 하되 그 심원에는 "아동기(유아기)의 인상들"(같은책, <5장>)에서 기원한다. 
결국 잠에서 깨고 나면 전날밤의 꿈이 논리적으로 완성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사소한 개꿈"(같은책, <5장>)으로 재구성된다. 프로이트는 이 불완전한 꿈의 재구성을 "2차 가공"(같은책, <6장>)으로 명명하고 있다.


"꿈은 어떤 억압되고 억제된 '소망'의 '위장(왜곡)'된 충족이다."
- [꿈의 해석], <4장. 꿈의 왜곡>, 지그문트 프로이트, 1900.


그러나 이 꿈은 전날 낮 시간의 이야기가 그대로 재현된 것이 아니고 의식의 "검열"(같은책, <4장>)로 인해 무언가 '억압'되고 '억제'되어 있던 '소망'의 관념들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상황이다. 내가 평소 깨어있을 때 그런 생각을 하기나 했나 싶을 정도의 사례들이 나오거나 아예 평소 생각과는 정반대의 내용들이 펼쳐지기도 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는 나의 의식이 잊고 있던 오래전 유아기의 경험일 것이고 평소 나의 맨정신으로서 '의식'이 '억압'하고 있던 나의 '소망'들이다.


"우리가 '꿈의 해석'을 발전시킨 것은 바로 이 '잠재 내용'에 의해서이며, 겉으로 드러난 내용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꿈의 사고'와 '꿈의 내용'은 같은 내용을 두 가지 다른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다... '꿈의 내용'은 '꿈의 사고'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것으로, 우리가 그 뜻을 알려면 '꿈의 내용'에 나타난 '기호'나 '연결법칙' 등을 찾아내야 하는데... 우리가 이들을 알게 되면 '꿈의 사고'는 곧 쉽게 이해될 수 있다."
- [꿈의 해석], <6장. 꿈의 작업>, 지그문트 프로이트, 1900.


보통 말도 안되게 이어지는 이 "사소한 개꿈들"은 유치하기도 한데, 꿈의 근원적 배경이 유아기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평생 산 유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언어'와 '기호'의 '연결법칙' 또는 연상작용에 주목한다. 독일어로 연상작용하는 사례들이 많이 나오고 영어로 'violet'(제비꽃)은 'violate'(강간하다)과 비슷하므로 꿈에 나온 제비꽃은 성적인 표현이라는 식이다. 이와 같은 언어연상은 각자의 머릿속에 다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보편적일 수도, 개별적일 수도 있겠다. 아재개그를 생활화하고 있는 나 같은 경우도 말도 안되는 언어유희가 꿈 속에서 숱하게 재생되었을 게다. 물론 기억은 나지 않지만.

꿈으로 표현되는 나의 '소망'은 그대로 나타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의식의 '검열'로 인해 대부분 "왜곡"(같은책, <4장>)되어 나타난다. 이는 '잠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기제다. 현실과 똑같다면 우리는 잠을 잘 수가 없다. 우리는 '잠에서 깨지 않기 위해' 꿈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단언하지는 못하지만 그가 치료하는 노이로제 환자들과 그 자신의 꿈을 해석한 사례들을 통해 조심스럽게 정의하고 있다. 실험을 통해 가설을 세우고 또 다시 증명하는 과학자의 자세다.

그렇다면 이 '왜곡'되지만 변함없는 '소망충족표현'으로서의 꿈의 근원으로서 '무의식'은 대체 언제 등장하는가.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무의식'적 사고로서, 이 사고 과정은 의식의 지배 아래에서 고의로 행하는 반성과 사색의 때에 우리가 인지하는 사고 과정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 [꿈의 해석], <6장. 꿈의 작업>, 지그문트 프로이트, 1900.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전매특허 '무의식'은 총 7장으로 구성된 이 책 [꿈의 해석]의 <6장. 꿈의 작업>에 가서야 처음 등장한다. 마치 철학자 헤겔의 주저 [정신현상학](1806)에서 궁극의 결론인 '절대정신'이 마지막 장에 등장하듯이 말이다.

결론은 익히 알다시피 '무의식'에 잠재된 '소망'들이 의식의 '억압'을 거쳐 꿈에 재현되고 '왜곡'되고 '위장'될지라도 그 본질로서 '무의식'의 '소망충족표현'으로서의 꿈의 정의는 변하지 않는다.


"꿈 자체는 겉으로 나타난 이 여러 억제된 것 중의 하나이다.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꿈은 모든 경우에 그렇고, 명확한 경험에 비추어 보면... 대다수의 꿈이 그렇다. 심리적으로 억제되어 있는 것은 깨어있는 생활에서는, '여러 모순의 상쇄'에 의해 그 표현이 방해되어 내적 지각에서 절단된 것이지만, 밤 생활 속에서는, 더욱이 타협 형성물의 지배 아래서는 의식에 자리를 잡을 방법과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 [꿈의 해석], <7장. 꿈 과정의 심리학>, 지그문트 프로이트, 1900.


사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새로운 것은 아니란다. 그는 이 책의 <2장. 꿈 해석의 방법>에서 자신의 꿈 해석 방법은 고대로부터 흔히 써 온 '상징법'이 아니라 '해석법'이라고 구분하고 있다. 즉, 꿈의 사고로서 꿈꾼 사람의 유아기와 꿈꾸기 바로 전날의 일상을 그 스스로 말하도록 하여 조사하고, 그의 꿈을 또 스스로 재구성('2차 가공')하게 하여 분석하며 '해석'하는 과학적 방법이다. 고대로부터 '신의 계시' 등으로 보던 꿈의 '상징'을 먼저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낮과 밤의 구체적 사례를 낱낱이 조사한 후 꿈꾼 자 스스로 '해석'하고 프로이트는 이 '꿈의 해석'을 분석하는 방법이다. 

'무의식'의 '소망'이 '의식'적 '왜곡'과 '위장'을 통해서 '표현'되는 "소망충족표현'으로서 꿈은 이렇게 해석되는데, 이 방법은 프로이트로부터 1,700년 전 그리스 '달디스의 아르테미도로스'라는 사람의 꿈 '해석법'이라고 한다. 방법은 고대로부터 차용하였으되  프로이트의 위대한 발견은 바로 '무의식'이며 이 주인공은 헤겔의 '절대정신'처럼 [꿈의 해석]이라는 20세기 대작의 말미에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가 말하듯 그의 '무의식'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의식의 대립물'은 아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 셈"인데, "한쪽 것은 '의식화될 수 없는 것(의식의 대립물)이지만, 나머지 한쪽을... '전(前)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도 어떤 새로운 '검열(왜곡)'을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무의식' 조직을 생각하지 않고 '의식' 속에 들어올"(이상 같은책, <7장>) 어떤 것이다. 
요약하면, 꿈이란 전적으로 '무의식'의 영역은 아니고 '의식'이 지배하고 통제하며 억제하는 관념이 '무의식' 및 그 이전의 '전(前)의식'과 상호작용하며 이뤄지는 일련의 '소망충족표현'이라는 것이다. 밤에 이뤄진 '꿈의 내용'을 통해 해석되는 맨정신의 '꿈의 사고'의 관계는 '무의식'('전의식' 포함)과 '의식'의 합작품이다.


"꿈의 해석'은 정신생활 속에 있는 '무의식'적인 것을 알기 위한 왕도이다"
- [꿈의 해석], <7장. 꿈 과정의 심리학>, 지그문트 프로이트, 1900.


3.

이제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몇 차례 꾸었던 '나체망신개꿈'을 해석할 때가 되었다.

단순하다.

1) 일단 프로이트의 많은 사례들에 의하면, 이불을 덮지 않고 자다가 잠결에 추위를 느끼면 '나체꿈'을 꾼다.
2) 전날 맨정신에 음란한 생각을 대놓고 하지 않은 것 같지만, 나의 '무의식'에 잠재된 음란성에 따라 홀라당 상하의실종된 나는 수많은 여자들에 둘러싸여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정숙하든 방탕하든 프로이트 본인을 포함하여 모든 성인들의 꿈은 '반드시' '성적'인 것을 기반하고 있다.
3) 나의 '무의식'을 뒤져도 음란성을 못찾겠다면, 그건 맨정신의 '의식'이 나의 성적인 생각을 '검열'하고 '억압'하기 때문이다. 정숙하고 금욕적인 내가 '나체꿈'이나 '똥꿈'을 자주 꾸었다면 평소 나의 '의식'이 '무의식'에 잠재된 음란함과 더러움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흔히 말하듯 "꿈은 현실과 반대"가 될 수도 있다.
4) 그러므로 '나체꿈'은 앞으로 '창피'를 당할 나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꿈꾼 바로 전날과 유아기 및 사춘기 일대를 포함한 나의 "과거와 닮은 모습"(같은책, <7장>)으로 구성된다. 이런 류의 '불안한 꿈'은 이를테면 이미 통과한 시험을 다시 본다거나 아주 끔찍하게 군대를 다시 간다거나 하는 형태로 이미 걱정없이 지나온 것들을 재확인시켜주는 사실의 증명이다. 보라. 나는 이미 군에서 제대한지 26년이나 지났지 않은가.
5) 결국, '미래 예견'처럼 보이는 이 '불안한 꿈'들은 과거에 이미 극복된 현실의 확인일 수도 있으며 "꿈은 현실의 반대"라는 명제와 함께 미래의 경계가 될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죽음'을 본 꿈을 통해 오히려 현실의 '삶'을 지킬 수도 있다.

그리하여 내린 나의 '나체망신개꿈'의 해석은,
1) 예전의 사춘기와 청년기의 나는 비록 매우 음란했을 지언정, 
2) 지금의 중장년에 이불을 덮지 않고 잠자는 나는 음란하고 싶어도 몸이 따르지 않는 현실에서 '소망충족'을 꿈으로 표현하고 말았지만,
3) "꿈은 반대"니까 맨정신의 나는 결코 음란마귀가 아니며 앞으로 현실에서 창피당할 짓은 추호도 없도록 경계한다.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상징적' 꿈 해몽이 아니라 '과학적' [꿈의 해석]을 할 수 있게 도와준 지그문트 프로이트 형님께 깊은 존경과 경의를.

***

-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1900), Sigmund Freud,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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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 수 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
론다 번 지음, 김우열 옮김 / 살림Biz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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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 아는 바로 그 '비밀'
- [시크릿], 론다 번, 2006.


1.

"'비밀'이란 바로 '끌어당김의 법칙(Law of Attraction)'을 말한다."
- [시크릿], 론다 번, 2006.

레닌은 말했다.
인간의 생각도 '물질의 산물'이라고.

21세기하고도 사반세기가 넘어가는 지금 들으면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얘긴가 싶겠지만, 과학이 막 발전하던 19세기말이나 20세기 초에는 매우 심오한 철학적 문제였다. 
세상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과 답변.

종교에서는 정신이나 관념이 우선이라 답했고,
과학에서는 증명 가능한 물질이 근원이라 답했다.

전자는 '관념론'으로 불렸고,
후자는 '유물론'으로 불렸다.

19세기 말 독일의 '과학'적 사회주의자 칼 마르크스의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에서 철학을 유물론과 관념론의 전쟁터로 규정하며 현대의 노동계급의 '유물론'이 근대 독일의 관념적 사변철학을 대체하는 철학의 상속자라고 말했다.

20세기 초 러시아 '과학'적 사회주의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에서 '에너지'를 우주의 근원으로 얘기하던 오스트리아 마흐주의 같은 '경험비판론'은 과학이 아닌 '관념론'이라고 짓밟으면서 철저한 '유물론'을 확립하고자 했다.

"물질은 일차적인 것이다. 감각, 사유, 의식은 특수한 방식으로 조직된 물질의 최고산물이다."
- V. I. Lenin,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1장>, 1908.

그렇게 나온 결론이 '생각도 물질의 산물'이라는 말이었고, 
나의 청춘은 그 '유물론'의 시기였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지금,
헷갈린다.
'물질'은 무엇이고,
'관념'은 무엇이며,
'파동'은 무엇인가.


2. 

"사람들의 행동은 단지 결과일 뿐이다. 원인은 당신의 생각이다."
- [시크릿], 론다 번, 2006.

2006년에 호주의 전직 프로듀서 론다 번(Rhonda Byrne)이 찰스 해냇이라는 백여 년전 인물의 책을 우연히 접한 후 무언가 '비밀'을 알게 되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이 '시크릿(The Secret)' 시리즈로 대박을 친다. 관련 영상은 물론 그녀의 책 [시크릿]은 해리 포터 신작을 뛰어넘기도 했단다. 
부자가 되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전세계의 수많은 대중들이 이 '비밀'에 열광했고, 심지어 우리 회사에서 전혀 책이란 걸 읽을 것 같지도 않던 한 임원이 이 책을 추천하기도 했다.

이 책의 결론부터 말하면,
1) 모든 것의 원인은 당신의 생각과 마음에 달렸다.
2) 긍정의 주파수로 마음을 맞춰서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무조건 된다고만 믿어라.
3) 이미 소망을 이루었다고 믿고 행동하면 온 우주가 당신에 호응하며 도와줄 것이다.
4) 그러니, 될 때까지 믿어라.
5) 우주가 당신 편이라는 근거는 바로 '양자역학'인데, 당신의 긍정적 마음과 우주의 '끌어당김의 법칙'이 바로 인생 성공의 '비밀(The Secret)'이다.

뻔한 얘기다.
일단 될 때까지 긍정적으로 믿으면 나중에 그리 되었을 때 당신의 긍정적인 생각 덕분이고, 설령 안된다면 당신이 그렇게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공할 때까지 믿고 또 믿으라는 말이고, 만약 실패한다면 그 이유는 당신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탓이다.

빼박이다.
사람의 마음과 우주의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주파수'와 '파동'의 양자역학 원리를 부정하면 현대 과학도 모르는 모지리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긍정마인드만 갖춘다고 되겠느냐 의심하면 부정적인 인간이 되어 버린다.

그럴 듯 하기도 하다.
'주파수'와 이런 에너지들의 '파동'으로 운동하는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우주의 주인'인 나의 생각에 적극 호응하고 내 소원을 그대로 들어주는 요술램프의 지니와 같은 우주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책을 덮은 지금부터라도 나는 명확한 목표를 "구하라!", 이미 얻은 것처럼 "믿어라!", 이미 이룬 그 긍정의 감정 주파수대로 "받아라!"라는 [시크릿]의 '3계명'을 받들어야만 할 것 같다.
긍정적으로 간절하고 절실히 원하면 그에 따른 행동으로 이어지고 결국 그 실천이 쌓여 이루어진다는 평범한 진리인데, 당최 이 책 [시크릿]의 내용과 결론을 부정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다.

그러면서도 다 읽고 나서 마음이 웅장해진다.
긍정의 바이러스를 전파하듯 주변 사람들에게 꼭 추천해야만 할 것 같아서 제일 먼저 고딩 아들의 책상에 올려놓았고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던 아들은 '아빠, 또요?'라는 표정으로 한숨을 쉰다.


3.

우연히 옥탑방 책장에서 발견했고 왠지 뿌듯한 마음이 되어 읽고 난 후 가슴이 웅장해져서 굳이 주변에 전파까지 하고 보니 생각났다.

'종교'였다.
'긍정'이라는 믿음을 전파하고 일체의 '부정'적 비판을 무력하게 만드는 일종의 '관념론'이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비판하려 해도 이 '비밀(시크릿)'의 종교는 현대 과학의 끝판왕인 양자역학의 호위를 받고 있다. 
지금은 백여년 전과 상황이 다르다. '과학'은 '유물론'의 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철학의 전장'에서 '관념론'과 '유물론'의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마음'과 '생각', 나아가 '영성'까지도 그 '물질'적 본질을 밝혀낼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문제는 도대체 '물질'이 무엇인가 아닐까.

"명심하라. 생각은 모든 결과의 일차적 원인이다."
- [시크릿], 론다 번, 2006.

철학적 근본 논쟁은 접어두자.
이 책 [시크릿]은 그 터무니 없어보이는 '종교'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긍정'적이라 책을 덮은 후 마음이 밝은 주파수로 맞춰지는 건 사실이다. 안 그러면 우주가 나에 호응하지 않아 하는 일마다 잘 안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억지로라도 감정을 '긍정'의 주파수에 맞출 수밖에 없다.
이 주파수는 양자역학의 원리에 따라 우주와 파동하며 그렇게 "당신은 우주의 주인"(같은책)이 된다.

'긍정'.
누구나 다 아는 바로 그것이 내가 이 책에서 도출한 인생의 '비밀(The Secret)'이다.

뻔한 얘기로 말이 길었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꼭들 읽어보시라!

***

- [시크릿(The Secret)](2006), Rhonda Byrne, 김우열 옮김, <살림Biz>,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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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4-22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도서 읽은 분들 정말 많지요. 그 비밀이란게 도대체 뭐지요?라고 묻게 되는 책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beatrice1007 2023-04-2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찾은 ‘비밀‘은 ‘긍정‘이었습니다. ^^*
 
에로티즘 - 개정판 현대사상의 모험 24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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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즘 : 금기와 위반의 게임
- [에로티즘], 조르주 바타유, 1957.


"'에로티즘'의 최종적 의미는 '죽음'이다."
- [에로티즘], <13장. 아름다움>, 조르주 바타유, 1957.


1.

불을 켰고 그녀의 피로 침대 시트가 흥건했을 때 그는 겁이 났다. 

무척 욕망했더랬지만, 막상 닥쳐보니 떠오른 건 다름아닌 '죽음'이었다. 어쩌면 그녀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의외로 그녀는 침착했다. 처음으로 피를 보았을 때 아마도 엄마한테 배웠을 것처럼 차분하게 침대 시트를 벗겨내어 찬물로 채운 욕조에 담갔다.

'금기(禁忌)'의 선을 함께 넘어 과감한 '위반(違反)'을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지만, 마치 '죽음'을 마주한 것처럼 찝찝했던 건 오로지 흥건한 '피'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끼리 낄낄대며 바라 마지않던 '첫경험'은 그에게 '성취'라든가 새로운 남자로의 '탄생' 따위가 아닌 '죽음'과 같았다. 기성 질서에 대한 반란과 기존 금기에 대한 위반을 꿈꾸었던 이십대였지만 막상 겪은 '금기위반' 앞에서 그는 당황했다. 아마도 침착하게 자리를 수습하던 그녀는 속으로 더 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에게 첫 성행위의 의미는 '죽음'이었다.


2.

"성 '금기'의 특징 중의 특징은 성 '금기'는 '위반'에 의해 비로소 밝혀진다는 점이다... 인간의 성행위는 본질적으로 위반이다... 노동행위와 마찬가지로 위반도 인간만의 것이다. 노동행위가 조직적이듯이 위반행위도 조직적이다. 에로티즘은 넓게 보면 조직된 행위이며, 조직된 행위인 한,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 [에로티즘], <9장. 성적 팽창과 죽음>, 조르주 바타유, 1957.


20세기 프랑스 작가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 1897~1962)를 읽어보겠다고 생각한 건, 자유방탕한 그가 라스코 동굴벽화에 대해 쓴 글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예술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기 전에 내가 조르주 바타유라는 사람을 전혀 모른다는 걸 알았고 이참에 바타유의 대표적인 저서를 먼저 보겠다고 집어든 책이 바로 [에로티즘(L'Erotisme/Erotism)]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셸 푸코를 읽은 후 했던 나의 다짐을 지키는 게 맞았다는 건데, 20세기 프랑스 사상가들의 책은 읽지 말았어야 했다. 
내게는 한 때 나의 우상과도 같았던 철학자 알튀세르의 실망스러운 최후처럼 푸코든 바타유든 대부분 '잡설(雜說)'이었다.

물론, 20세기 초중반을 거쳐 1960년대 '신좌파 운동'의 자유 공간을 통해 울려퍼진 그 '잡설'들이 인류 지성사에 미친 지대한 공헌을 무시할 수는 없다. 기득권 세력인 자본과 종교 이데올로기의 공고한 벽에 본격적으로 균열을 낼 수 있도록 대중을 도왔던 그들의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 그러나 그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과하게 포장된 그 언설의 형식에는 당최 적응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다.

"철학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내용을 위해 루이 알튀세르는 너무 난해한 형식을 차용했고, 
"불연속성의 무질서에 정합성 부여"라는 내용을 미셸 푸코는 아주 장황하기 그지 없는 형식으로 포장했으며, 
그들보다 한세대 정도 윗선배인 조르주 바타유는 그 자유방탕하지만 인류가 기억할만한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글의 대부분을 '잡설'의 형식으로 도배했다.

그래도 내용이 형식을 넘어선다는 생각으로 조르주 바타유를 짚어본다면, 그의 저서 [에로티즘](1957)은 당시 유럽의 지배사상인 기독교를 넘어서 '인문학(人文學/Humanism)'을 되찾기 위한 일종의 '르네상스(Renaissance)'이기도 하다. 중세를 넘어 근대를 부른 14~16세기 르네상스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기독교가 지배세력으로 굳건히 결탁한 세상에서 다수 민중에게는 다시금 인문학 '부흥운동(르네상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적으로 '사회주의' 운동만으로 부족했다. 사회문화적으로 대대적인 '인문주의' 반란이 필요했다.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고, 금기는 위반을 전제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 자유분방과 방탕문란의 정점이 바로 1960년대 후반 '신좌파' 운동이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징조가 있는 법, 조르주 바타유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의 역사적 의의는 근대 이후 다시금 발기하는 현대 '인문학'의 '징조'였다고 본다. '에로티즘'을 다뤘다고, 책에서 변태의 시조새 사드 후작을 자주 언급했다고 대놓고 음란서적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내용을 기대했다가는 <1장>도 다 읽지 못하고 불살라 버렸을 거다. 오히려 프랑스 현대철학의 '잡설'이라 간주하는 편이 그나마 마저 읽어낼 수 있는 길일게다.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1957)은 기존 질서가 세운 '금기'와 '위반'의 '시소게임' 이론으로 볼 때 보편적이다. 그러므로 이 책 [에로티즘] 또한 필연적으로 '철학'에 귀결된다. 
성행위와 '에로티즘'의 본질은 흔히 보듯 '동물성'이 아니라 '인간성'에서 찾아야 한다. '노동'과 세속의 세계, 나아가 기독교가 이성적으로 그어놓은 '금기'의 영역은 '에로티즘'을 통해 '위반'되고 신성의 세계로 연결된다. 기독교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세계를 갈라놓았지만 루시퍼도 원래는 대천사였던 것처럼 애초에 선악은 동일자에 속했다. 기독교 이전 종교와 신화는 '에로티즘'을 불결하게 정의하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세계는 우라노스(하늘)와 가이아(땅)의 교접으로 창조되었고, 사제로서 신녀들은 최음 상태에서 신과 교접했다. 원래 신성했던 '에로티즘'을 불경한 것으로 만든 기독교가 조르주 바타유의 주적이다.

이렇게 그는 '인간성'을 그 본질로 하는 성행위와 '에로티즘'을 복원하고 '위반'을 본질로 하는 '금기'를 정의한다. 제한된 '위반'을 저질러 온 인류의 역사에게 이제 위선 그만 떨라며 대놓고 '금기위반'으로서 '에로티즘'을 외친 자유분방 방탕문란의 정신이 바로 비록 지루하고 장황한 '잡설'에도 불구하고 조르주 바타유의 업적인 것이다.
바타유에게 '에로티즘'은 '금기'와 '위반'의 시소게임이다.


"종교가 아직 우상 숭배의 단계를 벗어나지 않았을 때는 위반 자체가 신성이었다."
- [에로티즘], <11장. 기독교>, 조르주 바타유, 1957.


인간의 '내적 체험'([에로티즘], <1장>)으로서 '에로티즘'의 "최종적 의미는 죽음"(같은책, <13장>)이라거나, '에로티즘'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같은책, <서문>)이라는 이 책의 결론적인 테제들은 진짜 그대로의 공포스러운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피'나 '월경', '시체'와 '해골' 등을 마주하며 느끼는 즉자적이고 자연적이며 공포스러운 '죽음'이라기 보다는 '에로티즘(성행위)'이라는 '금기위반'을 통해 '불연속성'를 본질로 하는 세속의 개체들이 '연속성'을 그 본질로 하는 신성(神聖)의 영역과 소통한다는 의미로서의 '죽음'이다. 
'에로티즘'은 '성행위(탄생)'이자 남녀의 결합을 통한 개체의 '소멸(죽음)'이다. 바타유의 비유처럼 테레사 대수녀의 신성 고백조차 성적 오르가즘과 대동소이하다.

시대에 따라 변해왔지만, '금기'와 '위반', '불연속성'과 '연속성', '세속'과 '신성', '탄생'과 '죽음' 등 각 대립쌍들의 소통으로서 '에로티즘'의 변증법은 이제 총체성의 맹주였던 '철학(哲學)'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3.

"철학의 시간은 노동 시간, 금기 시간의 연장이다... 전개과정에 있는 철학은 위반과는 대립적이다... 
노동과 비교해 볼 때, 위반은 게임이다.
게임의 세계에서는 철학이 붕괴된다."
- [에로티즘], <결론>, 조르주 바타유, 1957.


조르주 바타유는 현대의 철학이 더 이상 총체성의 학문이 아니라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고 말한다. 세속의 세계에서 '노동'처럼 인간의 본질적 행위 중 하나가 된 철학은 더 이상 '위반이 아닌 '금기'의 영역에 갇혔다고 본다. 프랑스 사상사에서 조르주 바타유의 영향을 좀 받았을 후세대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그래도 '철학자'이고자 했기에, 철학은 과학처럼 '대상'을 갖지 않고 과학처럼 지식을 생산하지 않으며 경계선을 긋고 방향을 설정한다는 정통적인 철학관을 고수했다. 그렇게 "철학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으로 현실화된다.

선학인 바타유 역시 '과학'이 된 '철학'에서 머물지는 않는다. 그에게 철학은 "금기와 위반의 역사"를 토대로 새출발해야 한다(같은책, <결론>).
'금기'의 학문이 된 지금의 철학 스스로를 '위반'하면서 원래의 전통적인 '총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잡설'로 가득한 조르주 바타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인 이유다.


"... 총체적인 문제를 다루는 철학은, 가능하면, 금기와 위반의 역사적 분석에서 새출발해야 할 것이다. 철학은 그것들의 기원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거기에 반박하면서, 다시말해 철학을 위반하면서, 존재의 정점을 건드려야 할 것이다."
- [에로티즘], <결론>, 조르주 바타유, 1957.

***

- [에로티즘(L'Erotisme/Erotism)](1957), Georges Bataille, 조한경 옮김, <민음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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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의 역사 - 고대 그리스 영웅부터 현대 남성까지, 역사는 어떻게 젠더 이미지를 형성하고 가르쳐왔을까
루성옌 지음, 강초아 옮김 / 역사산책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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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꼰대성'의 '위험한(toxic)' 기원
- [남성성의 역사], 루성옌, 2021.


"'남성성(masculinities)'이란 남성이라면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사회가 기대하는 행위다."
- [남성성의 역사], <프롤로그>, 루성옌, 2021.


1. 

반백의 중년이 된 지금 돌아보면 믿을 수 없지만,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 '여자'가 되고 싶었다. 

남자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뭔가 있어 보이려고 친구들끼리 떼지어 뭉쳐다니기 일쑤였지만, 사실 1980년대의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의 정겨운 골목마다 마주치는 동네형들이 '뒤져서 나오면 십원에 열 대'라고 내 귀에 속삭이는 말에도 이미 신물이 났고, 남자학교에서 욱해서 어쩌다 싸움이라도 할라치면 안구액션과 구강액션은 현란해도 속으로는 얻어터지고 창피나 당할까봐 피하는 내가 싫었다. 
세지도 않으면서 괜히 '강한 남자'로 보이려고 하는 짓거리들이 좀 피곤했다. 그 때 생각에 만약 내가 여자였다면 이러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남자고등학교라면 어디든 있었을 '미친년'이라는 별명의 진상들을 보면 걔들은 진심으로 자기가 여자인 줄 아는지 일거수일투족이 일관되게 역겨웠으므로 그 생김새라도 안그러면 안되겠느냐 붙잡고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싶었다. 원래 남자가 진짜 여자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1980년대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때는 차마 발설은 못했지만 졸업해서 스무살이 되면 여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현실적인 목표로 수정했다. 키도 작고 '곱상하게' 생겼다고 어린 시절 동네 어른들한테 들었다던 어머니의 구전을 진심으로 믿었고 내 자식은 내게만 예쁘다는 진실은 13년 후에 내가 직접 부모가 된 이후에야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고등학생 당시의 나는 스무살이 되면 원래 '곱상한' 외모를 바탕으로 미니 스커트에 삐딱구두를 꼭 알다리로 신고 돌아다니고 싶었다. 당시의 나는 화장만 진하게 하면 아무도 나를 남자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나는 스무살이 되었고 세상에 나온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어느날 그런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을 거울 앞에 세워놓고 셀프 따귀를 몇 대 때려주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남성성'으로 중무장된 중년의 지금 다시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2.

대만의 역사학자 루성옌은 [남성성의 역사]를 통해 '위험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의 간략한 역사(brief history)를 이야기한다. 우리 말로 '위험'하다는 형용사는 원문 제목으로 '유독(有毒;toxic)'이다. 저자인 루성옌은 여성인데 그렇다고 페미니즘적인 내용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심리적 기반인 '위험한 남성성'이 여성은 물론 남성에게도 해롭다(有毒;toxic)는 결론이다.

약사(略史;brief history)이니 '남성성'이 어떻게 진화했나 보니,

고대 그리스에서는 항상 전쟁을 벌이던 도시국가체제였으니 정치에 참여하고 전쟁에 나가던 '시민' 남성의 강인함이 찬양되었지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같은 곳에서 이미 '혈기왕성'하고 본인만 잘난 아킬레우스나 헥토르 같은 남성은 전투만 잘했지 큰 그림을 보는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에 비해 비판받을 요소를 두루 남겨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알렉산더 대왕은 여자를 아예 무시하고 피해다녔단다.

미국의 심리학자 줄리언 제인스는 그의 저서 [의식의 기원](1976)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아] 속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말을 직접 듣는다'고 진심 믿었다는데, 인류사의 단계로 치면 어린이 수준으로, 정신분석의 영역에서는 정신분열과 같이 우뇌가 더 발달된 직관적 시기였다고 본다. 
한마디로 호메로스의 문헌 속 고대 그리스인들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 또는 미친놈 단계였다는 얘기다.
좀더 문명화된 로마에서도 '남성성'에 관한 의식은 그리스 시대와 같았지만 인류는 이전에 비해 이성적 좌뇌가 좀더 발달된 어른이 되었으니 신들의 직접적인 간섭은 어느 정도 멀어졌고 카이사르를 비롯한 남자 중의 남자들은 검투사 같이 온몸이 무기인 남자보다는 '비르투스;(virtus;덕성)'를 겸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단다.

북유럽의 바이킹들은 그들의 오딘 신화에 따라 남자라면 전투를 하다가 명예롭게 죽어 오딘을 섬기는 전투의 여신 발키리의 인도하에 '발홀'에 간다고 믿을만큼 남자 중의 상남자들이었는데, 이 '발홀'이 영화 매드맥스에 나오는 '발할라'다. 
이들 북방 게르만족이 남하하여 기독교와 만나 '남성성'은 또 한 번 진화한다.

중세는 인류사에서 이미 문명적으로 가부장제가 확립되었기 때문인지, 기독교는 사제와 수도승 같은 이미지를 시대의 '남성성'으로 변모시켰다. 그럼에도 당시의 남자들은 주요 이혼 사유였던 성기능 장애가 아님을 '현명하고 신실한 여성들'에게까지 대놓고 증명해 보여야 했던  원초적 남성성까지 거세할 수는 없었단다. 
역시 발기는 '남성성'의 처음이자 마지막인가 보다.

이후 중세 봉건제의 '기사(knight)'와 근대의 부르주아지의 등장과 함께 확장된 '신사(gentleman)'는 무력은 물론 '예의'를 갖추고 '자제력'과 '신중함'까지 공식적인 덕목으로 갖춰야 했으니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 이르면 현실적으로 그런 인간은 거의 없었겠으나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인간이 바로 '남성성' 자체가 되었다. 
물론 '신사'는 부르주아 계급들이나 가능했고 다수 노동계급은 본인의 육체노동만으로 가족을 먹여살려야 했기에 근육팔뚝과 선술집의 주정난동이 대표적인 '남성성'이 되는 아주 저질의 가부장제가 뿌리내리게 된다.

물론 역사적으로 완벽을 향해 확장된 이 '남성성'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실질적으로 무너졌다. 정확히는 소수 지배계급은 애초에 알고 있었던 게 모든 남성이 참전해야하는 '민주주의적' 세계전쟁을 통해 공식화되었다고 해야겠다. 
남성이 아무리 '용기'라는 덕성으로 무장한들 전쟁에서 죽음의 '공포'라는 본능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남성성'의 이데올로기는 건재하다. 여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패권주의와 피지배의 상징인 '여성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남성성의 역사]의 저자 루성옌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남성성'의 '위험(toxic)'함을 강조하며 이 '위험한 남성성'이 여성은 물론 남성들 본인까지도 억압해 온 간략한 역사를 조명한다.


3.

여성과 공존하지 못하고 지배하려는 '남성성'의 위험성이나, 이런 구습에 대한 즉자적 반발로서의 거세를 주장하는 극단적 '여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하여 뭐 이런 얘기를 하려고 '남성성의 역사'까지 들먹이나 싶기도 하다.

고등학생 때 잠시 '여자'가 되고 싶었던 매우 끔찍한기억에도 불구하고, 세상 반백년을 살면서 나는 주변 누구보다도 '남성성'을 강조하는 마초적 '꼰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내 생각대로 세상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다.

다만, 지금 '꼰대'로 사는 내 삶에 뿌리깊게 잠재된 '위험한 남성성'을 제압하기 위해 우선 할 수 있는 일들을 새삼 다짐해 보기로 한다.

남에게 쓸데없이 잔소리하지 않기.
내 생각과 다르다고 세상 말세가 되지 않는다.

치장하거나 집안일 하는 남자 흘겨보지 않기.
그런다고 그 남자가 여자가 되는 건 아니다.

말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하기.
왜 세탁기는 나만 돌려야 하느냐 항변하기 전에 내가 돌려야 하는 배경 먼저 찬찬히 생각해봐야 한다. 실제로는 함께 번갈아 돌리고 있는 경우가 더 많더라.

지금 꼰대인 내가 더 늙어 태극기 할아버지 같이 되지 않으려면,
'위험한 남성성'보다 우선 지금 나의 '더 위험한 꼰대성' 먼저 돌아봐야겠다.
그 더 위험한 '꼰대성'의 기원이 '위험한(toxic)' 남성성과 여성성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이십년 후 이해심과 관용이 충만해진 사회에서 할머니 여장을 하고 돌아다닐 나를 보고 사람들이 돌이나 던지지 말기를.

***

1. [남성성의 역사](2021), 루성옌, 강초아 옮김, <역사산책>, 2023.
2. [의식의 기원](1976), 줄리언 제인스, 김득룡/박주용 옮김, <연암서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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