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릿 - 수 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
론다 번 지음, 김우열 옮김 / 살림Biz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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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 아는 바로 그 '비밀'
- [시크릿], 론다 번, 2006.


1.

"'비밀'이란 바로 '끌어당김의 법칙(Law of Attraction)'을 말한다."
- [시크릿], 론다 번, 2006.

레닌은 말했다.
인간의 생각도 '물질의 산물'이라고.

21세기하고도 사반세기가 넘어가는 지금 들으면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얘긴가 싶겠지만, 과학이 막 발전하던 19세기말이나 20세기 초에는 매우 심오한 철학적 문제였다. 
세상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과 답변.

종교에서는 정신이나 관념이 우선이라 답했고,
과학에서는 증명 가능한 물질이 근원이라 답했다.

전자는 '관념론'으로 불렸고,
후자는 '유물론'으로 불렸다.

19세기 말 독일의 '과학'적 사회주의자 칼 마르크스의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에서 철학을 유물론과 관념론의 전쟁터로 규정하며 현대의 노동계급의 '유물론'이 근대 독일의 관념적 사변철학을 대체하는 철학의 상속자라고 말했다.

20세기 초 러시아 '과학'적 사회주의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에서 '에너지'를 우주의 근원으로 얘기하던 오스트리아 마흐주의 같은 '경험비판론'은 과학이 아닌 '관념론'이라고 짓밟으면서 철저한 '유물론'을 확립하고자 했다.

"물질은 일차적인 것이다. 감각, 사유, 의식은 특수한 방식으로 조직된 물질의 최고산물이다."
- V. I. Lenin,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1장>, 1908.

그렇게 나온 결론이 '생각도 물질의 산물'이라는 말이었고, 
나의 청춘은 그 '유물론'의 시기였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지금,
헷갈린다.
'물질'은 무엇이고,
'관념'은 무엇이며,
'파동'은 무엇인가.


2. 

"사람들의 행동은 단지 결과일 뿐이다. 원인은 당신의 생각이다."
- [시크릿], 론다 번, 2006.

2006년에 호주의 전직 프로듀서 론다 번(Rhonda Byrne)이 찰스 해냇이라는 백여 년전 인물의 책을 우연히 접한 후 무언가 '비밀'을 알게 되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이 '시크릿(The Secret)' 시리즈로 대박을 친다. 관련 영상은 물론 그녀의 책 [시크릿]은 해리 포터 신작을 뛰어넘기도 했단다. 
부자가 되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전세계의 수많은 대중들이 이 '비밀'에 열광했고, 심지어 우리 회사에서 전혀 책이란 걸 읽을 것 같지도 않던 한 임원이 이 책을 추천하기도 했다.

이 책의 결론부터 말하면,
1) 모든 것의 원인은 당신의 생각과 마음에 달렸다.
2) 긍정의 주파수로 마음을 맞춰서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무조건 된다고만 믿어라.
3) 이미 소망을 이루었다고 믿고 행동하면 온 우주가 당신에 호응하며 도와줄 것이다.
4) 그러니, 될 때까지 믿어라.
5) 우주가 당신 편이라는 근거는 바로 '양자역학'인데, 당신의 긍정적 마음과 우주의 '끌어당김의 법칙'이 바로 인생 성공의 '비밀(The Secret)'이다.

뻔한 얘기다.
일단 될 때까지 긍정적으로 믿으면 나중에 그리 되었을 때 당신의 긍정적인 생각 덕분이고, 설령 안된다면 당신이 그렇게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공할 때까지 믿고 또 믿으라는 말이고, 만약 실패한다면 그 이유는 당신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탓이다.

빼박이다.
사람의 마음과 우주의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주파수'와 '파동'의 양자역학 원리를 부정하면 현대 과학도 모르는 모지리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긍정마인드만 갖춘다고 되겠느냐 의심하면 부정적인 인간이 되어 버린다.

그럴 듯 하기도 하다.
'주파수'와 이런 에너지들의 '파동'으로 운동하는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우주의 주인'인 나의 생각에 적극 호응하고 내 소원을 그대로 들어주는 요술램프의 지니와 같은 우주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책을 덮은 지금부터라도 나는 명확한 목표를 "구하라!", 이미 얻은 것처럼 "믿어라!", 이미 이룬 그 긍정의 감정 주파수대로 "받아라!"라는 [시크릿]의 '3계명'을 받들어야만 할 것 같다.
긍정적으로 간절하고 절실히 원하면 그에 따른 행동으로 이어지고 결국 그 실천이 쌓여 이루어진다는 평범한 진리인데, 당최 이 책 [시크릿]의 내용과 결론을 부정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다.

그러면서도 다 읽고 나서 마음이 웅장해진다.
긍정의 바이러스를 전파하듯 주변 사람들에게 꼭 추천해야만 할 것 같아서 제일 먼저 고딩 아들의 책상에 올려놓았고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던 아들은 '아빠, 또요?'라는 표정으로 한숨을 쉰다.


3.

우연히 옥탑방 책장에서 발견했고 왠지 뿌듯한 마음이 되어 읽고 난 후 가슴이 웅장해져서 굳이 주변에 전파까지 하고 보니 생각났다.

'종교'였다.
'긍정'이라는 믿음을 전파하고 일체의 '부정'적 비판을 무력하게 만드는 일종의 '관념론'이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비판하려 해도 이 '비밀(시크릿)'의 종교는 현대 과학의 끝판왕인 양자역학의 호위를 받고 있다. 
지금은 백여년 전과 상황이 다르다. '과학'은 '유물론'의 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철학의 전장'에서 '관념론'과 '유물론'의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마음'과 '생각', 나아가 '영성'까지도 그 '물질'적 본질을 밝혀낼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문제는 도대체 '물질'이 무엇인가 아닐까.

"명심하라. 생각은 모든 결과의 일차적 원인이다."
- [시크릿], 론다 번, 2006.

철학적 근본 논쟁은 접어두자.
이 책 [시크릿]은 그 터무니 없어보이는 '종교'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긍정'적이라 책을 덮은 후 마음이 밝은 주파수로 맞춰지는 건 사실이다. 안 그러면 우주가 나에 호응하지 않아 하는 일마다 잘 안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억지로라도 감정을 '긍정'의 주파수에 맞출 수밖에 없다.
이 주파수는 양자역학의 원리에 따라 우주와 파동하며 그렇게 "당신은 우주의 주인"(같은책)이 된다.

'긍정'.
누구나 다 아는 바로 그것이 내가 이 책에서 도출한 인생의 '비밀(The Secret)'이다.

뻔한 얘기로 말이 길었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꼭들 읽어보시라!

***

- [시크릿(The Secret)](2006), Rhonda Byrne, 김우열 옮김, <살림Biz>,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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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4-22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도서 읽은 분들 정말 많지요. 그 비밀이란게 도대체 뭐지요?라고 묻게 되는 책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beatrice1007 2023-04-2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찾은 ‘비밀‘은 ‘긍정‘이었습니다. ^^*
 
에로티즘 - 개정판 현대사상의 모험 24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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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즘 : 금기와 위반의 게임
- [에로티즘], 조르주 바타유, 1957.


"'에로티즘'의 최종적 의미는 '죽음'이다."
- [에로티즘], <13장. 아름다움>, 조르주 바타유, 1957.


1.

불을 켰고 그녀의 피로 침대 시트가 흥건했을 때 그는 겁이 났다. 

무척 욕망했더랬지만, 막상 닥쳐보니 떠오른 건 다름아닌 '죽음'이었다. 어쩌면 그녀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의외로 그녀는 침착했다. 처음으로 피를 보았을 때 아마도 엄마한테 배웠을 것처럼 차분하게 침대 시트를 벗겨내어 찬물로 채운 욕조에 담갔다.

'금기(禁忌)'의 선을 함께 넘어 과감한 '위반(違反)'을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지만, 마치 '죽음'을 마주한 것처럼 찝찝했던 건 오로지 흥건한 '피'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끼리 낄낄대며 바라 마지않던 '첫경험'은 그에게 '성취'라든가 새로운 남자로의 '탄생' 따위가 아닌 '죽음'과 같았다. 기성 질서에 대한 반란과 기존 금기에 대한 위반을 꿈꾸었던 이십대였지만 막상 겪은 '금기위반' 앞에서 그는 당황했다. 아마도 침착하게 자리를 수습하던 그녀는 속으로 더 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에게 첫 성행위의 의미는 '죽음'이었다.


2.

"성 '금기'의 특징 중의 특징은 성 '금기'는 '위반'에 의해 비로소 밝혀진다는 점이다... 인간의 성행위는 본질적으로 위반이다... 노동행위와 마찬가지로 위반도 인간만의 것이다. 노동행위가 조직적이듯이 위반행위도 조직적이다. 에로티즘은 넓게 보면 조직된 행위이며, 조직된 행위인 한,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 [에로티즘], <9장. 성적 팽창과 죽음>, 조르주 바타유, 1957.


20세기 프랑스 작가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 1897~1962)를 읽어보겠다고 생각한 건, 자유방탕한 그가 라스코 동굴벽화에 대해 쓴 글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예술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기 전에 내가 조르주 바타유라는 사람을 전혀 모른다는 걸 알았고 이참에 바타유의 대표적인 저서를 먼저 보겠다고 집어든 책이 바로 [에로티즘(L'Erotisme/Erotism)]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셸 푸코를 읽은 후 했던 나의 다짐을 지키는 게 맞았다는 건데, 20세기 프랑스 사상가들의 책은 읽지 말았어야 했다. 
내게는 한 때 나의 우상과도 같았던 철학자 알튀세르의 실망스러운 최후처럼 푸코든 바타유든 대부분 '잡설(雜說)'이었다.

물론, 20세기 초중반을 거쳐 1960년대 '신좌파 운동'의 자유 공간을 통해 울려퍼진 그 '잡설'들이 인류 지성사에 미친 지대한 공헌을 무시할 수는 없다. 기득권 세력인 자본과 종교 이데올로기의 공고한 벽에 본격적으로 균열을 낼 수 있도록 대중을 도왔던 그들의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 그러나 그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과하게 포장된 그 언설의 형식에는 당최 적응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다.

"철학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내용을 위해 루이 알튀세르는 너무 난해한 형식을 차용했고, 
"불연속성의 무질서에 정합성 부여"라는 내용을 미셸 푸코는 아주 장황하기 그지 없는 형식으로 포장했으며, 
그들보다 한세대 정도 윗선배인 조르주 바타유는 그 자유방탕하지만 인류가 기억할만한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글의 대부분을 '잡설'의 형식으로 도배했다.

그래도 내용이 형식을 넘어선다는 생각으로 조르주 바타유를 짚어본다면, 그의 저서 [에로티즘](1957)은 당시 유럽의 지배사상인 기독교를 넘어서 '인문학(人文學/Humanism)'을 되찾기 위한 일종의 '르네상스(Renaissance)'이기도 하다. 중세를 넘어 근대를 부른 14~16세기 르네상스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기독교가 지배세력으로 굳건히 결탁한 세상에서 다수 민중에게는 다시금 인문학 '부흥운동(르네상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적으로 '사회주의' 운동만으로 부족했다. 사회문화적으로 대대적인 '인문주의' 반란이 필요했다.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고, 금기는 위반을 전제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 자유분방과 방탕문란의 정점이 바로 1960년대 후반 '신좌파' 운동이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징조가 있는 법, 조르주 바타유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의 역사적 의의는 근대 이후 다시금 발기하는 현대 '인문학'의 '징조'였다고 본다. '에로티즘'을 다뤘다고, 책에서 변태의 시조새 사드 후작을 자주 언급했다고 대놓고 음란서적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내용을 기대했다가는 <1장>도 다 읽지 못하고 불살라 버렸을 거다. 오히려 프랑스 현대철학의 '잡설'이라 간주하는 편이 그나마 마저 읽어낼 수 있는 길일게다.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1957)은 기존 질서가 세운 '금기'와 '위반'의 '시소게임' 이론으로 볼 때 보편적이다. 그러므로 이 책 [에로티즘] 또한 필연적으로 '철학'에 귀결된다. 
성행위와 '에로티즘'의 본질은 흔히 보듯 '동물성'이 아니라 '인간성'에서 찾아야 한다. '노동'과 세속의 세계, 나아가 기독교가 이성적으로 그어놓은 '금기'의 영역은 '에로티즘'을 통해 '위반'되고 신성의 세계로 연결된다. 기독교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세계를 갈라놓았지만 루시퍼도 원래는 대천사였던 것처럼 애초에 선악은 동일자에 속했다. 기독교 이전 종교와 신화는 '에로티즘'을 불결하게 정의하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세계는 우라노스(하늘)와 가이아(땅)의 교접으로 창조되었고, 사제로서 신녀들은 최음 상태에서 신과 교접했다. 원래 신성했던 '에로티즘'을 불경한 것으로 만든 기독교가 조르주 바타유의 주적이다.

이렇게 그는 '인간성'을 그 본질로 하는 성행위와 '에로티즘'을 복원하고 '위반'을 본질로 하는 '금기'를 정의한다. 제한된 '위반'을 저질러 온 인류의 역사에게 이제 위선 그만 떨라며 대놓고 '금기위반'으로서 '에로티즘'을 외친 자유분방 방탕문란의 정신이 바로 비록 지루하고 장황한 '잡설'에도 불구하고 조르주 바타유의 업적인 것이다.
바타유에게 '에로티즘'은 '금기'와 '위반'의 시소게임이다.


"종교가 아직 우상 숭배의 단계를 벗어나지 않았을 때는 위반 자체가 신성이었다."
- [에로티즘], <11장. 기독교>, 조르주 바타유, 1957.


인간의 '내적 체험'([에로티즘], <1장>)으로서 '에로티즘'의 "최종적 의미는 죽음"(같은책, <13장>)이라거나, '에로티즘'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같은책, <서문>)이라는 이 책의 결론적인 테제들은 진짜 그대로의 공포스러운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피'나 '월경', '시체'와 '해골' 등을 마주하며 느끼는 즉자적이고 자연적이며 공포스러운 '죽음'이라기 보다는 '에로티즘(성행위)'이라는 '금기위반'을 통해 '불연속성'를 본질로 하는 세속의 개체들이 '연속성'을 그 본질로 하는 신성(神聖)의 영역과 소통한다는 의미로서의 '죽음'이다. 
'에로티즘'은 '성행위(탄생)'이자 남녀의 결합을 통한 개체의 '소멸(죽음)'이다. 바타유의 비유처럼 테레사 대수녀의 신성 고백조차 성적 오르가즘과 대동소이하다.

시대에 따라 변해왔지만, '금기'와 '위반', '불연속성'과 '연속성', '세속'과 '신성', '탄생'과 '죽음' 등 각 대립쌍들의 소통으로서 '에로티즘'의 변증법은 이제 총체성의 맹주였던 '철학(哲學)'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3.

"철학의 시간은 노동 시간, 금기 시간의 연장이다... 전개과정에 있는 철학은 위반과는 대립적이다... 
노동과 비교해 볼 때, 위반은 게임이다.
게임의 세계에서는 철학이 붕괴된다."
- [에로티즘], <결론>, 조르주 바타유, 1957.


조르주 바타유는 현대의 철학이 더 이상 총체성의 학문이 아니라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고 말한다. 세속의 세계에서 '노동'처럼 인간의 본질적 행위 중 하나가 된 철학은 더 이상 '위반이 아닌 '금기'의 영역에 갇혔다고 본다. 프랑스 사상사에서 조르주 바타유의 영향을 좀 받았을 후세대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그래도 '철학자'이고자 했기에, 철학은 과학처럼 '대상'을 갖지 않고 과학처럼 지식을 생산하지 않으며 경계선을 긋고 방향을 설정한다는 정통적인 철학관을 고수했다. 그렇게 "철학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으로 현실화된다.

선학인 바타유 역시 '과학'이 된 '철학'에서 머물지는 않는다. 그에게 철학은 "금기와 위반의 역사"를 토대로 새출발해야 한다(같은책, <결론>).
'금기'의 학문이 된 지금의 철학 스스로를 '위반'하면서 원래의 전통적인 '총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잡설'로 가득한 조르주 바타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인 이유다.


"... 총체적인 문제를 다루는 철학은, 가능하면, 금기와 위반의 역사적 분석에서 새출발해야 할 것이다. 철학은 그것들의 기원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거기에 반박하면서, 다시말해 철학을 위반하면서, 존재의 정점을 건드려야 할 것이다."
- [에로티즘], <결론>, 조르주 바타유, 1957.

***

- [에로티즘(L'Erotisme/Erotism)](1957), Georges Bataille, 조한경 옮김, <민음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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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의 역사 - 고대 그리스 영웅부터 현대 남성까지, 역사는 어떻게 젠더 이미지를 형성하고 가르쳐왔을까
루성옌 지음, 강초아 옮김 / 역사산책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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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꼰대성'의 '위험한(toxic)' 기원
- [남성성의 역사], 루성옌, 2021.


"'남성성(masculinities)'이란 남성이라면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사회가 기대하는 행위다."
- [남성성의 역사], <프롤로그>, 루성옌, 2021.


1. 

반백의 중년이 된 지금 돌아보면 믿을 수 없지만,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 '여자'가 되고 싶었다. 

남자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뭔가 있어 보이려고 친구들끼리 떼지어 뭉쳐다니기 일쑤였지만, 사실 1980년대의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의 정겨운 골목마다 마주치는 동네형들이 '뒤져서 나오면 십원에 열 대'라고 내 귀에 속삭이는 말에도 이미 신물이 났고, 남자학교에서 욱해서 어쩌다 싸움이라도 할라치면 안구액션과 구강액션은 현란해도 속으로는 얻어터지고 창피나 당할까봐 피하는 내가 싫었다. 
세지도 않으면서 괜히 '강한 남자'로 보이려고 하는 짓거리들이 좀 피곤했다. 그 때 생각에 만약 내가 여자였다면 이러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남자고등학교라면 어디든 있었을 '미친년'이라는 별명의 진상들을 보면 걔들은 진심으로 자기가 여자인 줄 아는지 일거수일투족이 일관되게 역겨웠으므로 그 생김새라도 안그러면 안되겠느냐 붙잡고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싶었다. 원래 남자가 진짜 여자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1980년대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때는 차마 발설은 못했지만 졸업해서 스무살이 되면 여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현실적인 목표로 수정했다. 키도 작고 '곱상하게' 생겼다고 어린 시절 동네 어른들한테 들었다던 어머니의 구전을 진심으로 믿었고 내 자식은 내게만 예쁘다는 진실은 13년 후에 내가 직접 부모가 된 이후에야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고등학생 당시의 나는 스무살이 되면 원래 '곱상한' 외모를 바탕으로 미니 스커트에 삐딱구두를 꼭 알다리로 신고 돌아다니고 싶었다. 당시의 나는 화장만 진하게 하면 아무도 나를 남자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나는 스무살이 되었고 세상에 나온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어느날 그런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을 거울 앞에 세워놓고 셀프 따귀를 몇 대 때려주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남성성'으로 중무장된 중년의 지금 다시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2.

대만의 역사학자 루성옌은 [남성성의 역사]를 통해 '위험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의 간략한 역사(brief history)를 이야기한다. 우리 말로 '위험'하다는 형용사는 원문 제목으로 '유독(有毒;toxic)'이다. 저자인 루성옌은 여성인데 그렇다고 페미니즘적인 내용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심리적 기반인 '위험한 남성성'이 여성은 물론 남성에게도 해롭다(有毒;toxic)는 결론이다.

약사(略史;brief history)이니 '남성성'이 어떻게 진화했나 보니,

고대 그리스에서는 항상 전쟁을 벌이던 도시국가체제였으니 정치에 참여하고 전쟁에 나가던 '시민' 남성의 강인함이 찬양되었지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같은 곳에서 이미 '혈기왕성'하고 본인만 잘난 아킬레우스나 헥토르 같은 남성은 전투만 잘했지 큰 그림을 보는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에 비해 비판받을 요소를 두루 남겨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알렉산더 대왕은 여자를 아예 무시하고 피해다녔단다.

미국의 심리학자 줄리언 제인스는 그의 저서 [의식의 기원](1976)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아] 속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말을 직접 듣는다'고 진심 믿었다는데, 인류사의 단계로 치면 어린이 수준으로, 정신분석의 영역에서는 정신분열과 같이 우뇌가 더 발달된 직관적 시기였다고 본다. 
한마디로 호메로스의 문헌 속 고대 그리스인들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 또는 미친놈 단계였다는 얘기다.
좀더 문명화된 로마에서도 '남성성'에 관한 의식은 그리스 시대와 같았지만 인류는 이전에 비해 이성적 좌뇌가 좀더 발달된 어른이 되었으니 신들의 직접적인 간섭은 어느 정도 멀어졌고 카이사르를 비롯한 남자 중의 남자들은 검투사 같이 온몸이 무기인 남자보다는 '비르투스;(virtus;덕성)'를 겸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단다.

북유럽의 바이킹들은 그들의 오딘 신화에 따라 남자라면 전투를 하다가 명예롭게 죽어 오딘을 섬기는 전투의 여신 발키리의 인도하에 '발홀'에 간다고 믿을만큼 남자 중의 상남자들이었는데, 이 '발홀'이 영화 매드맥스에 나오는 '발할라'다. 
이들 북방 게르만족이 남하하여 기독교와 만나 '남성성'은 또 한 번 진화한다.

중세는 인류사에서 이미 문명적으로 가부장제가 확립되었기 때문인지, 기독교는 사제와 수도승 같은 이미지를 시대의 '남성성'으로 변모시켰다. 그럼에도 당시의 남자들은 주요 이혼 사유였던 성기능 장애가 아님을 '현명하고 신실한 여성들'에게까지 대놓고 증명해 보여야 했던  원초적 남성성까지 거세할 수는 없었단다. 
역시 발기는 '남성성'의 처음이자 마지막인가 보다.

이후 중세 봉건제의 '기사(knight)'와 근대의 부르주아지의 등장과 함께 확장된 '신사(gentleman)'는 무력은 물론 '예의'를 갖추고 '자제력'과 '신중함'까지 공식적인 덕목으로 갖춰야 했으니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 이르면 현실적으로 그런 인간은 거의 없었겠으나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인간이 바로 '남성성' 자체가 되었다. 
물론 '신사'는 부르주아 계급들이나 가능했고 다수 노동계급은 본인의 육체노동만으로 가족을 먹여살려야 했기에 근육팔뚝과 선술집의 주정난동이 대표적인 '남성성'이 되는 아주 저질의 가부장제가 뿌리내리게 된다.

물론 역사적으로 완벽을 향해 확장된 이 '남성성'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실질적으로 무너졌다. 정확히는 소수 지배계급은 애초에 알고 있었던 게 모든 남성이 참전해야하는 '민주주의적' 세계전쟁을 통해 공식화되었다고 해야겠다. 
남성이 아무리 '용기'라는 덕성으로 무장한들 전쟁에서 죽음의 '공포'라는 본능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남성성'의 이데올로기는 건재하다. 여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패권주의와 피지배의 상징인 '여성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남성성의 역사]의 저자 루성옌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남성성'의 '위험(toxic)'함을 강조하며 이 '위험한 남성성'이 여성은 물론 남성들 본인까지도 억압해 온 간략한 역사를 조명한다.


3.

여성과 공존하지 못하고 지배하려는 '남성성'의 위험성이나, 이런 구습에 대한 즉자적 반발로서의 거세를 주장하는 극단적 '여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하여 뭐 이런 얘기를 하려고 '남성성의 역사'까지 들먹이나 싶기도 하다.

고등학생 때 잠시 '여자'가 되고 싶었던 매우 끔찍한기억에도 불구하고, 세상 반백년을 살면서 나는 주변 누구보다도 '남성성'을 강조하는 마초적 '꼰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내 생각대로 세상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다.

다만, 지금 '꼰대'로 사는 내 삶에 뿌리깊게 잠재된 '위험한 남성성'을 제압하기 위해 우선 할 수 있는 일들을 새삼 다짐해 보기로 한다.

남에게 쓸데없이 잔소리하지 않기.
내 생각과 다르다고 세상 말세가 되지 않는다.

치장하거나 집안일 하는 남자 흘겨보지 않기.
그런다고 그 남자가 여자가 되는 건 아니다.

말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하기.
왜 세탁기는 나만 돌려야 하느냐 항변하기 전에 내가 돌려야 하는 배경 먼저 찬찬히 생각해봐야 한다. 실제로는 함께 번갈아 돌리고 있는 경우가 더 많더라.

지금 꼰대인 내가 더 늙어 태극기 할아버지 같이 되지 않으려면,
'위험한 남성성'보다 우선 지금 나의 '더 위험한 꼰대성' 먼저 돌아봐야겠다.
그 더 위험한 '꼰대성'의 기원이 '위험한(toxic)' 남성성과 여성성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이십년 후 이해심과 관용이 충만해진 사회에서 할머니 여장을 하고 돌아다닐 나를 보고 사람들이 돌이나 던지지 말기를.

***

1. [남성성의 역사](2021), 루성옌, 강초아 옮김, <역사산책>, 2023.
2. [의식의 기원](1976), 줄리언 제인스, 김득룡/박주용 옮김, <연암서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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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길 -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낸시 프레이저 지음, 장석준 옮김 / 서해문집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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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사회주의'도 돌아왔다!
- [좌파의 길], 낸시 프레이저, 2022.


1.

아직도 '자본주의', '사회주의', '신자유주의' 얘기냐, 묻는 옛 친구들은 "시대가 변했으니 생각도 변해야 한다"는 말하나 마나인 당연한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먹고 살아남기가 얼마나 힘든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변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햇빛에 푸른 등을 반짝이며 날뛰던 산 고등어 시절에 잠시 빠졌던 '거대담론'들이 이제는 삶에 유효하지 않다는 말은,
'자본주의'라는 현 사회체제가 성공하여 역사의 종말을 증명해서였다기 보다는,
세상이라는 뜨거운 석쇠 위에 올라 등이 까맣게 탄 죽은 고등어가 되지 않으려 각자도생 쟁투하는 우리들 삶에선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었다.

그러던 중 21세기에,
'자본주의'가 돌아왔다.


2.

"... 현 위기를 발생시킨 책임은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 시스템에 있다... 이 모든 재난이 한데 모여 서로를 악화시키며 우리를 집어삼키겠다고 위협하는, 사회질서 전체의 전반적 위기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 역시 '경제' 위기만이 아니라 '돌봄(사회적 재생산)', '생태계(환경)', '정치(공적 권력)'의 위기를 함께 불러들이는 경향이 있으며,... 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접합부위마다 벌어지는 '경계투쟁(boundary struggles)'을 불러 일으킨다...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 사적 권력과 공적 권력의 관계, 인간 사회와 비인간 자연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구축해야 한다... '최선의 희망'은... 오직 '더 커다란 대안을 사고'해야만, 우리 모두를 잡아먹으려는 '식인 자본주의'의 끝없는 식욕을 제압하기 위해 싸울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
- [좌파의 길], <서문 - '식인'이라는 은유>, 낸시 프레이저, 2022.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 1947~)는 마르크스 이론을 기반으로 존 롤스의 미국식 '정의론'의 '분배' 이론에 각 주체들의 '인정' 이론을 접합한 '사회주의자'다. 여성운동가로서 좌파적 페미니스트에 자본주의 체제의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특징으로서 강력한 '정치'의 역할도 강조한다.

국내에서 올해 [좌파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진보정치 이론가 장석준 선생이 번역하여 출간된 낸시 프레이저의 최근 저서는 그녀가 2022년 발표한 책,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가 원제다. 
코로나 팬데믹과 극심해진 불평등 자본주의 극단에서 프레이저 사상의 잠정적 총결산과도 같다.

21세기 금융자본주의가 성장할 수록 환경파괴와 기후위기는 심화되고 독점자본이라는 사적 권력을 향한 기업들의 경쟁이 생산하는 재화들이 '공공재(커먼즈:commons)'가 되면서 이 '공공재'를 공유하는 다수대중의 권력이 [어셈블리](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에서 주장하듯 더욱 확장되고 강화되는 현재, '럭셔리 공산주의 선언'(아론 바스타니)을 비롯하여 미국에서조차 '사회주의 선언'(바스카 선카라)도 이미 나왔다.
낸시 프레이저의 '사회주의' 또한 같은 객관적 세계체제를 배경으로 하니, 생산수단으로부터는 배제되어 있지만 공공재를 소유하게 된 집단적 다수대중의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사회주의적 '실천'을 강조하는 결론은 다들 대동소이하다. 

낸시 프레이저의 책에서 중요한 개념은 '식인 자본주의'와 '수탈', '4D'와 '경계투쟁', 그리고 '생태 사회주의' 정도 되겠다.


1) '식인'이라는 은유

프레이저가 자본주의 사회체제 전반을 은유하는 '식인(cannibalism)'은 사람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들을, 나아가 체제로서 스스로 "제 살 깎아먹는"(같은책, <1>) 자본주의의 본원적 특징이다. 서양 신화에 나오는 "자기 꼬리를 먹는 뱀 '우로보로스(Ouroboros)'"다.

"따라서 요점은,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화된 측면'과 '비시장화된 측면'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예외적인 현상이나 우연적인 경험이 아니라 자본주의 DNA에 각인된 특징이다. 사실 '공존'은 이 둘의 관계를 포착하기에는 너무 약한 단어다... 이러한 측면을가장 훌륭하게 표현하는 말은 '제 살 깎아먹기(cannibalization)'다."
- [좌파의 길], <1. 걸신들린 짐승 : '자본주의'의 재인식>, 낸시 프레이저, 2022.

자본주의는 '정치'적으로는 자기자본 증식과 잉여가치 창출의 목적을 위해 자본의 사적 권력으로 '정치'의 공적 권력을 이용하거나 무력화시켰다. 
'경제'적으로는 생산수단의 소유를 둘러싼 '계급투쟁'의 '경제' 영역 뿐만 아니라, 임금노동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가정과 여성의 '사회적 재생산' 및 '돌봄' 노동처럼 노동의 가치가 지불되지 않는 '비-경제' 영역까지 착취하며, 저발전 남반구의 유색인종들과 자연환경 일체를 아주 공짜로 착취한다. 

이 '착취'는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이념을 넘어 '수탈'로 정의된다.

2) '착취'에서 '수탈'로? 아니 원래 '수탈'로부터

"자본이 임금을 대가로 '노동력'을 구매하는 계약관계 대신, '수탈'은 인간역량과 자연자원을 징발하여 자본확장 회로에 징용함으로써 작동한다... 인종화된 타자에 대한 '수탈'은 노동자 '착취'의 필수배경을 이룬다... '수탈'... 마르크스가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지 못한 또 다른 사회적 분할을 드러낸다. 자본이 임금노동을 통해 착취하는 (이중으로) 자유로운 노동자와, 자본이 다른 수단을 통해 '제 살 깎아먹기' 대상으로 삼는 부자유한 또는 종속적인 주체 사이의 사회적 분할이 그것이다... '수탈'과 '착취'의 구별은 '경제'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다."
- [좌파의 길], <2. 수탈 탐식가 : 착취와 수탈의 새로운 얽힘>, 낸시 프레이저, 2022.

낸시 프레이저는 사회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데, 그녀의 "확장된 자본주의론"은 마르크스의 '정통 교리'에 기반하고 있지는 않다. 즉, 마르크스의 [자본론]처럼 '착취'라는 '경제'적 개념으로 자본의 축적(본원적 축적 또는 원시축적)을 근원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 자연'과 '제국주의'적이든 아니든 패권에 의해 무력해진 '인종들', 그리고 '사회적 재생산'을 맡고 있음에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돌봄 노동과 여성들에 대한 전방위적 '수탈'로부터 정의한다. 
장석준 선생의 <옮긴이 후기>에 의하면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의 이론적 계보를 잇는 낸시 프레이저의 '수탈' 이론은 "확장된 자본주의관"의 핵심이다.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 사이토 고헤이의 연구에 의하면 마르크스가 인간 사회의 '착취'를 발견한 1867년의 [자본론] 1권 이후 자본주의의 자연 '수탈'에 천착하여 그 뒤로 이어질 자본 연구를 초고 상태로 남길 수 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지구를 파괴하는 자본주의는 결국 무자비한 '자연 수탈'을 그 존재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확장된 관점의 자본주의는 임노동 '착취'의 기본 모순을 넘어 자연(환경), 인종과 여성(사회적 재생산), 정치(공적 권력)에 대한 '수탈'을 통해 "제 살 깎아먹기"(같은책, <1장>)를 시전하며, 위 영역들을 '분할'한 '식인 자본주의'가 그은 각종 '경계'에서 이뤄지는 '경계투쟁(boundary struggles)'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반자본주의' 연대 블록으로 결합된다.

3) '4D' 현상

이 "확대인식된 자본주의 사회"(같은책, <4>)의 모순은 이른바 '4D' 현상으로 압축되는데, '분할(Division)' + '의존(Dependency)' + '책임회피(Disavowal)'의 '3D'가 합쳐져 또 하나의 'D'인 '불안정성(Destabilization)'으로 현상한다는 주장이다. 

'경제'와 '비-경제'를, '인간'과 '비인간 자연'을, '경제'와 '정치'를 '분할'하고, 소외된 주체(유색인종, 여성) 및 자연을 무상 또는 저렴하게 수탈하면서 '의존'하며, 잉여가치 창출 외에 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회피'를 일삼는 자본주의는 결국 '불안정'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는 의미겠다.

4) '경계투쟁' = '반자본주의'

"자본주의 사회는 역사적으로 여러차례 자신을 재발명했다. 특히 다양한 모순들(정치적, 경제적, 생태적, 사회재생산적)이 수렴하는 전반적 위기 국면에는,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제도적 '분할'이 이뤄지는 장소에서 '경계투쟁'이 분출했다. 그 장소란, 경제와 정치가 만나고, 사회와 자연이 만나며, 수탈이 착취와 만나고, 생산과 재생산이 만나는 곳이다."
- [좌파의 길], <3. 돌봄 폭식가 : 생산과 재생산, 젠더화된 위기>, 낸시 프레이저, 2022.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에서 공산주의자의 임무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투쟁과 연대하며 미래의 운동을 대표한다는 '반자본주의' 결론의 현대화다.
생산의 사회화를 위한 조직된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넘어 여성운동과 반인종주의운동, 생태주의 운동과 결합하는 대대적인 '반자본주의 연대 블록'의 형성과 근본적인 자본주의 체제변혁운동이 21세기 사회주의라는 것이다.

5) '확장'된 '생태 사회주의'

이제 "확장된 자본주의관은 사회주의에 관해서도 확장된 인식이 필요함"(같은책, <6>)을 말해주는데, '자본주의'와 함께 "돌아온" '사회주의'는 단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체제 붕괴의 징후적 배경과 함께 다시 떠오르는 '반자본주의'적이면서 '자본 이후'를 그려내는 실천적 현실이다. 

'자연보호' 수준의 '생태주의'는 '반자본주의'로 방향을 잡고, 이제는 자본가들에 의해 수탈당하지 않는 자연을 복원하는 사회주의여야만 기후환경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할 수 있다. 

"'반자본주의'라는 이 퍼즐조각은 환경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적 지향과 비판세력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반자본주의'는 모든 역사적 블록에 필수적인 '우리'와 '저들' 사이의 대립선을 긋는 역할을 한다... '최대의 희망'... '환경을 넘어서는 반자본주의적 대항 헤게모니 블록'을 건설하는 데 있다... '생태 사회주의'..."
- [좌파의 길], <4. 꿀꺽 삼켜진 자연 : 수탈, 돌봄, 정치와 얽혀있는 생태 위기>, 낸시 프레이저, 2022.

낸시 프레이저의 "확장된 사회주의론"은 '생태 사회주의'다.


"어쨌든 사회주의도 돌아왔다... 나의 목표는 사회주의 역시 하나의 '제도화된 사회질서'로서 재인식하는 것이며, 이렇게 포괄적이어야만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한 믿을만한 대안이라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 [좌파의 길], <6. 진정한 대안의 이름으로 : 사회주의의 재발명>,낸시 프레이저, 2022.

"제 살 깎아먹는" 식인 자본주의라는 확장된 자본주의론에 걸맞게 그 대안으로서 사회주의 또한 '생산수단의 사회화'의 경제 영역만을 근본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인 정치적 자치의 범위를 확장"(같은책, <6>)하고 자본주의가 그은 "경계선들을 다시 그음으로써 자본주의가 '경제'적인 것과 관련지은 긴급한 사안들을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같은책, <6>)을 주요 실천적 임무로 둔다. 

물론, 낸시 프레이저는 대안적 사회주의 미래상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다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 '식인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총체성"(같은책, <5>) 속에서 '경계투쟁'들의 실천적 연대를 기대하고 있다.

"좌익의 정통교리와는 달리, 자본 축적은 (이중으로) 자유로운 임금노동자의 '착취'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과 법적으로 유효한 권리를 빼앗긴 종속적 인구집단에 대한 '수탈'을 통해서도 전개된다. '착취'와 '수탈'의 이러한 구분은 전 지구적인 피부색의 경계선과 일치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내장된 특징인 인종적, 제국주의적 약탈은 현 위기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어 있다... (현재의) 노동계급은 더 이상 백인남성광부, 공장직공, 건설노동자로 전형화될 수 없으며, 이제 그 전형은 돌봄노동자, Geek(비정규직)-노동자, 저임금 서비스노동자다. (어쨌든 급여를 받을 경우에는) 재생산 비용보다 더 적은 급여를 받는 이 현대 노동계급은 '착취'를 당하면서 동시에 '수탈'도 당한다. 코비드(Covid-19)는 이 추악한 비밀까지 폭로했다."
- [좌파의 길], <에필로그 - 팬데믹, 식인 자본주의의 광란의 파티>, 낸시 프레이저, 2022.


3.

그리고 어쨌든,
'사회주의'도 돌아왔다.

새로운 '사회적 총체성'의 철학으로 무장한,
'생태 사회주의'로.

언젠가 은근슬쩍 사라졌던 '거대담론'들이 그러했듯,
객관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서.

먹고 살기 바빠 언제나 생존의 전선에 선 생활인들이 인정하든 말든 말이다.

***

1. [좌파의 길(Cannibal Capitalism)](2022), Nancy Fraser,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23.
2. [어셈블리(Assembly)](2017),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3. [21세기 공산주의 선언 - FALC](2019), 아론 바스타니, 김민수/윤종은 옮김, <황소걸음>, 2020.
4.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2019), 바스카 선카라,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편집부 옮김, 2021.
5.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2020), 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6.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2017), 사이토 고헤이, 추선영 옮김, <두번째테제>, 2020.
7.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 마르크스/엥겔스, 1848.
8. [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황광우/장석준, <실천문학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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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특별판)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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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라니
- [보건교사 안은영](2015), 정세랑 / [종의 기원](2016), 정유정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 [보건교사 안은영], <돌풍 속에 우리 둘이 안고 있었지>, 정세랑, 2015.


1.

소설을 쓰고 싶다 생각한 건,
1995년 가을 군입대를 앞두고서였다.

대학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나 나는 철학학회 활동을 하며 문학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설에 관한 책들을 찾아읽고 공부하게 된 것도 대학 3학년 1학기부터였다. 군대를 다녀온다는 건 왠지 모르게 '어른'이 된다는 기점 같기도 했고 그러니 왠지 나도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선택과 결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스물두살,
나의 선택은 '리얼리즘' 소설이었다.
불평등한 사회체제를 묘사하고 그 속에서 '혁명'을 부르짖다가 어느새 사라지는 사람들의 '부재(不在)'. 그럼에도 끊임없이 세상을 변혁하려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 그 과정에서 90년대 초반 청춘들의 '부재성'의 경험.
내 소설의 주제는 뭐 그런 것들이었다.

1995년 대학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에 빗소리를 들으며 학교 PC실에서 나의 첫 단편소설 습작 '담배 세 까치'를 썼다. 그리고는 그 해 10월 군입대 전 학교 '심산문학상'에 응모하고는 결과는 보지 못한 채 군대를 갔다.

이듬해 첫 휴가를 나와 군복을 입고 학교를 찾아 90학번 선배 대훈이 형과 술을 마시며 물었더니 내 소설이 심산문학상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기대는 안 했지만 실망은 조금 했다. '입대를 앞둔 한 젊은이의 넋두리'라고 한 줄 심사평을 전하던 대훈이형의 말에 나는 더욱 실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오기로 찾아본 1995년 심산문학상 당선작은 공교롭게도 나와 같은 과 후배의 작품이었다. 학생회에서 오며 가며 한 번은 본 듯한 창백한 인상의 남자 후배였던 것 같았는데 이듬해 등단했던 소설가 김영하의 소설과도 비슷하게 싸가지 없던 그 후배의 소설에는 귀신이 등장했다. 나의 '리얼리즘' 목록에는 있을 수 없는 귀신과 환영, 개인주의와 '판타지'.

1970년대 황석영과 80년대의 방현석, 90년대의 김소진으로 연결시키던 나의 '리얼리즘' 소설계보에서는 볼 수 없는 소설 작풍의 시작이었다. 사회를 고발하는 '리얼리즘' 소설을 쓰고 싶던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미친 듯 팔짝 뛰다가 툭 쓰러지는 심정으로 심산문학상에 승복할 수 없었다.

이런 세상에 '판타지'라니.


2.

20세기를 마감하던 해에 신문사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나의 마지막 단편소설 습작 '제4의 점령'에는 '귀신'이 등장한다. 
정확히는 귀신이라기 보다 일제시대 카프시인 임화에 빙의된 청춘이다. 시대의 '부재'를 은유하던 어느 복학생의 미친 영혼 또는 그를 바라보던 화자인 나의 환영(幻影)이었다. 
나 나름대로 세상과 '타협'한 판타지였다. 
대학교 정문을 마지막으로 나오기 전 학교 우체국에서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두 군데 신문사에 보낸 등기에는 결국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기대는 조금 했지만, 실망은 조금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라 사회에 홀로 독립해야 했기에 조급한 마음이 일었다.
21세기가 열린 이듬해 초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으며 '리얼리즘' 소설가 지망생인 나는 또 다시 혀를 찼다.
쯧, '판타지'라니.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이있을까~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지 아않을까~"

노래로만 부르던 삼십대에 접어들기 전 '4차원'을 의미하는 임화의 '제4의 점령(占領)'을 얘기하던 나의 습작 소설도 다름아닌 '판타지'였지만 정작 나는 그걸 인정할 수 없었다. 나의 소설은 '리얼리즘'이어야 했다. 
그런 내게 '판타지'라니.


오십줄에 접어든 올해 오로지 제목에 이끌려 우연히 집어든 소설가 정유정의 [종의 기원]도 '판타지'다. 미국의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The Blank Slate / tabula rasa)]을 읽다가 진짜 인간은 '백지'로 태어난 게 아니라 '본성' 자체가 아로새겨져 있는 걸까 궁금하던 차에 살인자의 본성을 타고난 정유정 소설 속 악인 한유진을 만났다. 작가는 단순한 살인자 DNA 소유자가 아니라 살인의 인류 진화사에서 가장 최상위 '포식자(프레데터)'로서의 악인(惡人)의 개인적 기원(The origin)을 추적한다. 인간 본성에 관한 '보편적' 기원, 즉 '종의 기원'이라는 근대 진화생물학의 본좌 찰스 다윈의 주저에서 제목을 차용했지만 내용은 결코 '보편적' 종(種)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 살인의 오랜 진화사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의 무의식에 잠재된 '살인'과 '폭력'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특정한 사이코패스 포식자의 이야기다. 작가는 굳이 꼭 존속살해의 과정을 세밀하게 써야 했을까. 결국 살인누명을 씌운 친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존속살인 현장을 정리하는 과정 자체도 결코 현실적이지 않았다. 거실과 방청소만 해도 모자랄 두어시간에 어머니의 피로 온통 칠갑된 그 넓은 집을 락스로 말끔히 치우는 게 가능한가. 친구에게 자기 죄를 누명씌워 죽게 한 과정과 목포에서 원양어선을 타고 한참 떠돌다 돌아오는 과정 자체도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 '종의 기원'이라는 거창한 제목이 무색할 정도의 극단적 살인 '판타지'였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은 내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과 함께 또 한 번 혀를 내둘렀다.
저런, 극단적 '판타지'라니.


아예 '판타지'의 세계에 들어온 김에 소설 한 권을 더 펼쳤다. 몇해 전 드라마로 유명해진 [보건교사 안은영]이다. 소설가 정세랑의 이 작품은 그냥 대놓고 '판타지'라 읽기가 훨씬 편했다. 우리 사회 고등학교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에서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소재와 에피소드를 만화처럼 묘사하고 있어 재미지게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비비탄 권총과 장난감 무지개 칼로 귀신들을 물리치는 고등학교 보건교사(우리 시절의 양호선생님) 안은영의 발랄한 활약 속에서 '친절한 사람들'과 '악귀들'의 전쟁터인 이 현실을 보여주는 '판타지'임에도 인간사의 '리얼리즘'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명랑발랄 퇴마사 안은영 쌤의 다음 활약은 아마도 또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책을 덮었다. 
꼭 악당들에게 이기지는 못할 수도 있고 그대로 도망칠 수도 있겠지만 항상 '친절'을 잊지 말자고 강조하는 이야기에 나는 또 혀를 놀린다.
이런, 만화같은 '판타지'라니.


3.

나의 20세기 마지막 단편소설 습작 '제4의 점령'도 나의 바램과 달리 이미 '판타지'였다. 
소설가 김소진의 초기 단편소설처럼 쓰고 싶었지만 나의 경험과 필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빈 서판(tabula rasa)'의 백지이론을 믿는 나는 나보다 작가의 본성을 더 많이 받고 태어난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그들보다 노력과 근성이 부족함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도 내 소설습작에 '귀신'을 불러들였지만 역시 실패였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은 원래 '백지'와 '빈 서판' 또는 '빈 공책'을 들고 나왔으니, 50년 간 이리 쓰고 저리 써서 얼마 남지 않은 내 노트 구석에라도 계속 적어댈 것만은 안다. 
나의 평생 꿈 '리얼리즘'이나 '판타지'나 결국 모든 건 작가의 머릿속 '환영'일테고 그 환상들이 결국 세상을 어떻게 그려내고 묘사하느냐에 따라 '리얼리즘'도 될 수 있고 '판타지'도 될 수 있겠기에, 나는 나의 앳된 소설관을 좀더 친절하고 너그럽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친절한 시선으로 '리얼리스트' 나를 돌아보며 나는 혀를 낼름 또 내민다.
저런, 나 역시 결국 '판타지'였다니.

***

1.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민음사>, 2015.
2. [종의 기원], 정유정, <은행나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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