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인재전쟁 - 왜 위나라가 이기고, 촉나라는 패하고, 오나라는 자멸했는가!
와타나베 요시히로 지음, 노만수 옮김 / 더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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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된 '이념'
- [삼국지 인재전쟁],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오늘날에도 흔히 쓰이는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對策)'라는 유명한 말은 '인맥'에 의해, 또한 '국가권력'에 의해 되풀이되는 강권통치 발동에 맞서온 중국인의 지혜인 셈이다.
이렇듯 '인맥'은 '삼국지' 시절이라는 아주 먼 옛날부터 형성되어 왔다. 그리고 순욱이나 제갈량이 조조와 유비와 대치하는 상황부터, '군주'에 대해 자율적 권위를 가진 '귀족'이라는 유구한 중국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지배층이 형성되기 시작한 때, 그것이 [삼국지]의 시대였다."
- [삼국지 인재전쟁], <에필로그>,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중국의 '꽌시'가 있다.
'관계(關係)'다.
우리의 '인맥'과 비슷하나, 중요한 건 실질적으로 맺어진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연', '지연', '혈연' 등의 실질적 '관계'가 그것일 게다.

중국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민주주의'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천하통일'을 지향하는 강력한 제왕적 국가권력 아래 종속되어 온 지 역시 수천 년이기 때문이리라.

알고보면 천하를 훔친 가장 큰 '도적'인 '황제'가 '하늘'이었고, 고대로부터 '공공성' 그 자체였다. 
다수 민중들은 물론 지배계급들도 이 '천자'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세월이 또 몇 천 년이다.
'민주주의'를 실현한 지 반세기도 안되는 우리 역사 또한 다르지 않았다.

'상유정책 하유대책(上有政策下有對策)'은 중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의 공통사항이다.
강권적인 권력이 '정책'을 내리면 다수 민중들은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운다.
현대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로 표현될 수 있겠다.


1.

"인간관계(인맥)는 '중국의 기본'이다. 그리고 인사는 만사의 기본이다... '인맥 형성 방식'(1장)... '국가의 관료제도 구조'(2장)... 위나라는 '혁신'(3장), 촉나라는 '전통'(4장), 오나라는 '지역'(5장), 진(晉)나라는 '제도화'(6장)에 서술의 중점을 두었다."
- [삼국지 인재전쟁], <프롤로그 : 인재와 인사는 만사의 근본이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일본의 '삼국지' 전문 역사학자 와타나베 요시히로는 중국의 삼국시대 역사 속에서 위-촉-오 삼국을 거쳐 천하통일을 이룬 서진(西晉)의 '인재전쟁'을 분석하였다. 원제가 [삼국지 인사] 정도 되는 듯 한 이 책의 국역본은 [삼국지 인재전쟁](<더봄출판사>,2023)이다.

저자는 중국의 삼국시대 '학연'과 '지연', '혈연(혼인)' 등 '인맥'의 관점에서 당시 국가 시스템과 각국의 '인사'를 분석하는데, 정리하면 조씨의 위나라는 유교적 허위에 대항한 조조의 '혁신' 이념, 유씨의 촉은 한나라를 부흥하려는 제갈량과 유비의 '전통' 이념, 손씨의 오나라는 강동에 웅크린 '지역주의', 그리고 사마씨의 진나라는 귀족서열의 '제도화'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2.

"이처럼 '명사(名士)'가 '문화자본'에서 유래한 권위를 배경으로, 사회통합의 기능을 맡은 경우는 후한 말기에 많이 나타난다. 후한의 관치와 향거리선(관리추천제도)으로 유지되어 온 지역사회의 질서는 후한 말기에 이르러 호족의 지지를 받은 '명사'들이 도맡게 되었다. 조조를 비롯한 군웅들이 '명사'를 데려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이유이다."
- [삼국지 인재전쟁], <2장. 국가 시스템과 출세의 사다리>,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진수의 정사 [삼국지]든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든, 당시의 난세를 헤쳐나가던 영웅들에게는 '명사(名士)', 즉 '세상에 이름난 선생'이 있었다.
후한 말기 환관세력이 국정을 농단하던 시기에 이를 비판하며 유학자 선비들은 [경학]을 근거로 서로의 명성을 빛내주었다. 이들은 깨끗하다 하여 '청류'라 불렸고 반면 환관권력의 청탁으로 출세한 자들은 '탁류'가 되었다. 

이 '명사'들의 '이념'은 공자와 맹자의 '유학'이었다. 한나라 시절 관리 선발제도였던 '효렴'이라는 제도는 조상과 부모를 공경하는 '효'와 청렴한 '렴'의 기준으로 추천받는 제도였기에, 후한 말 부패한 세상에서 '청류' 재야운동권들은 유학이라는 전통적 이념을 다시금 세우고자 했고, 이들이 서로서로 '학연'과 '지연', 나아가 '혈연'을 이어가며 '명사'가 되었다.


"이처럼 조조는 '명사'와의 알력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때마다 인사기준을 '유재시거(唯才是擧)'를 선포하며 '반유교주의'를 명확히 선언했다
...
위나라 문제와 명제는 유교에 대한 조조의 강한 도전을 계승하지 못했다. 유교는 그 정도로 강력하고 강인하고 끈질겼다. 조위가 사마씨에게 권력을 장악당한 것은 문제, 명제가 빨리 죽은 것만이 원인이 아니다. 문제도 명제도 '시대의 변혁자' 조조의 위대함을 이어받거나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삼국지 인재전쟁], <3장. 위나라, 시대를 변혁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조조도 젊어서 이 '청류' 운동권 학생이었지만, 그는 출사하여 직접 세상을 바꾸고 싶었기에 환관이었던 양할아버지 조등의 후광을 활용하여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곧 황건농민반란의 난세를 맞았다. 그 나름의 '혁명'과 '개혁'을 꿈꾸는 과정에서 당대 최대의 세족이었던 '여남 원씨' 원소와 대결하기 위해 조조는 많은 '명사'들의 지지를 모았고 그의 책사 중 최고의 선비 순욱은 역시 당시 강력한 가문이었던 영천지역의 '여남 순씨'였다. 조조에게 후한 황제를 영천군 허현(허도)으로 옮겨와서 황제를 끼고 최고 권력자가 되라는 대책을 낸 순욱이라는 책사가 필요했고 그의 순씨 가문 인맥은 조조에게 더욱 중요했다. 
조조 정권은 조씨와 원래 성인 하후씨 집안의 무력과 순씨 세력의 '이념'을 결합하여 난세에 '혁명'을 하고자 했으나, 한나라 황실 부흥을 바라던 순욱의 '이념'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조조의 '혁명'과 맞지 않았다. 
결국, 조조는 "나의 장자방(장량)"이라 칭하던 순욱을 숙청하고 만다.

위선적인 '효도'와 '청렴'을 부정하고 극복하려던 조조는 순욱과 같은 유학자 '명사'들을 숙청하면서 '오로지 능력 위주로 등용한다'는 '유재시거(唯才是擧)'를 내걸고 인재를 구한다. 
그러나 '창업'과 '수성'은 다르다. 조조(위무제)의 아들 조비(위문제) 이후로는 위나라 제국의 통치 이념으로서의 유학을 극복할 수 없었다.

'혁명'이 끝난 곳에서 '멸망'은 시작된다.


"제갈량을 맞이하기까지의 유비 집단은 이러한 (도원결의) '의리'를 핵심으로 한 강력한 '용병집단'이었다... 이리하여 유비는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책사로 맞이하고, 이를 계기로 '형주 명사집단'에 가입함으로써 자신의 집단을 '의리'로만 결속시킨 용병집단에서 제갈량 등 '명사'를 핵심으로 하는 정권으로 환골탈태시키는, 즉 질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힘겨루기와 대립은 다르다. 제갈량과 유비가 대립하고 있었다면 조조가 순욱을 죽인 것처럼 제갈량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제갈량과 유비는 '한실부흥'이라는 최종목적이 완전히 일치했고, 서로 굳게 신뢰하고 있었다. 다만, 어떻게 한(漢)나라를 부흥 시킬 것인지? 그 수단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 [삼국지 인재전쟁], <4장. 촉나라, 전통을 계승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유비는 조조와 달랐다.
큰 전공이나 세력 없이 원소와 조조, 유표 등의 군웅들에게 빌붙다가 익주라는 최변방에서 백만명도 안되는 인구로 촉한 황제가 되었으니 전투에는 소질이 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실은 한나라 황실의 후예로서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처럼 다시 한 번 한나라 황실을 부흥한다는 거창한 이념을 뒷받침해줄 배경이나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지, 유비는 진수가 말한 '백절불요', 백 번 꺾여도 주저앉지 않는 불세출의 영웅이며, [삼국지 인재전쟁]의 저자 와타나베 요시히로에 의하면 '전투도 잘했다'고 한다.

유비는 본질적으로 소규모 '용병집단'의 대장이었다. 푸틴에게 도전했다가 비명횡사한 프리고진처럼 애초에 조조, 원소, 유표나 심지어 여포에게 조차도 비할 수 없었지만, 제갈량의 형주 지역 '명사' 집단을 만나면서 '촉한정통론'의 이념을 비로소 구체화할 수 있게 된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는 삼국의 정립이 아니라 이를 통한 천하통일이 목표였기에, 유표 사후 형주를 차지한 유비는 본격적으로 천하통일을 도모한다.

물론, '의리'로 뭉친 난세의 용병대장으로서 유비의 최후 또한 관우의 복수에 바쳐졌지만, 제갈량은 조자룡과 달리 유비의 오나라 정벌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단다. 아마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책의 저자 요시히로의 말처럼 유비의 전투력을 믿은 당시까지는 전투실전 초보자 제갈량의 형주 탈환 도박이었을 수도, 아니면 내가 보기에는 유비라는 걸림돌 없이 제갈량이 촉한의 전권을 장악하여 북벌을 이루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제갈량은 조조 같은 대군벌의 휘하에서는 자신의 이념을 실현시킬 수 없음을 알았고, 자신의 고향은 아니지만 '학연'으로 엮인 형주 지역 '명사'들과 '지연' 및 '혈연'을 맺고 '와룡'이 되어 영웅을 기다렸다. 여기에 걸린 게 유비였을텐데, 어쨌든 유비와 제갈량의 '천하통일 이념'은 같았던 것이다. 제갈량은 유비가 '천하삼분지계'의 요충지였던 형주를 딛고 서쪽 파촉 지역의 익주로 가서 황제가 되기까지 '형주 명사'를 주력으로 '익주 명사'까지 조율하며 죽을 때까지 분연히도 북벌을 시도했다.

유비가 조조와 달리 '명사'를 탄압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했던 배경이다.


"보통은 그곳(남방)에서 발달한 한민족 문화가 북방민족(5호)이 건국한 북조문화와 다르기에 '육조(손오-동진-송-제-양-진)' 문화라고 부른다... 지역에서 생존한 손오의 존재형태가 이렇게 손오를 기원으로 간주하는 '육조(六朝)'라는 개념을 형성해 갔다.
...
(손오는) 군주권력 강화로 이어질 법한 조조와 같은 혁신적 정책이나, 제갈량처럼 조씨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통해 한(漢)나라를 지키는 정책을 제시한 적은 없었다. 즉 육손은 '강동'이라는 지역을 위해 살았다."
- [삼국지 인재전쟁], <5장. 오나라, 지역과 함께 생존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강동의 손씨 오나라는 그냥 '지역주의'다.
한참 후 '5호'라는 이민족들이 다채롭게 교차하던 북조 문화에 밀려 남조가 비로소 '중화'의 일부로 인정되기까지 이 남방 '6조'의 기원이 손오라고 한다. 하지만 삼국시대 강동의 오나라는 변방의 지역 소국에 머물고자 했지 위나라와 촉나라처럼 천하통일을 꿈꾸지 않았다. 강동지역 '명사' 사회는 물론 군부의 주축인 적벽대전의 주역 주유와 육손도 장강 이북을 넘을 생각이 없었고, '원조 천하삼분지계'를 주장했던 강동의 지식인 노숙의 목적도 '삼분'이었지 '천하통일'은 아니었다.

결국, 손권 사후 서진이 강동을 쳐들어온 후에야 '지역'을 넘어서고자 깨달았던 오나라 '지역' 인재들은 대부분 그냥 남방 '6조'의 원조로서 남고 말았다.


"후한에서 삼국 시대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연결되었던 '인맥'은 이렇게 해서 '혼인' 관계를 통해 고착화되었다. 바꿔 말해서 '인맥이 귀족제라는 제도로 조직화'되어 갔다고 해도 좋다. '명사'의 시대였던 삼국 시대와 '귀족제'의 시대가 된 서진 시대의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
요컨대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는 다가올 서진의 성립을 위해 '공-후-백-자-남'이라는 계층제로 이루어진 '오등작(五等爵)'의 수여를 통해서 귀족과 군주권력의 긴밀성을 표현하고, '귀족'을 국가 신분제로 서열화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국가 신분제를 '귀족제'라 부른다... 사마소는 '귀족제'를 형성함으로써 군주권력과의 거리를 통해서 '귀족'들을 서열화하고, 그 '자율성'을 박탈하려고 했던 것이다."
- [삼국지 인재전쟁], <6장. 서진, 조직을 제압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사마의는 어릴적 난세의 피난길에서도 유학 경전을 공부하며 자란 '명사'였지만, 난세에 태어난 그는 조조와 순욱, 유비와 제갈량 같은 선배들과 달랐다. 사마의에게 유학적 혁신이나 전통 따위는 자기 가문 생존의 부속물이었다. 그는 출세와 가문의 생존을 위해 주로 '혼인 관계'를 이용했다. 아들의 배우자는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갈아치웠고, 이후 사마사와 사마소라는 아들 둘을 거쳐 손자 사마염이 건국한 진나라는 이 가문들을 황제의 절대권력 아래 '귀족제'로서 서열화시켰다. 

지방 호족의 '지연'이나 '명사'의 '학연'의 시대는 가고, 사회계급은 귀족들의 혼인과 '혈연'으로 '제도화'되었다.

그냐마 수천 수백 년간 군주의 절대권력에 대하여 할 말은 하고 견제도 하며 '자율성'을 유지해 온 '명사'들의 이념이 사마씨 서진의 '귀족제'로 인해 절대권력에 수렴되었다.

이후 유학에 노장사상을 버무린 추상적인 '현학'을 논하며 부채들고 화장이나 하고 다니다가 술이나 약에 취해 픽픽 쓰러지기나 하던 동진의 남조 귀족문화는 사마씨 일족의 서진 정권이 확립한 강권적인 '제도화'의 결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이처럼 '한(漢)'이라는 나라는 '한족(漢族)의 나라' 중국에서 특별하고, 제갈량은 그 '한'이라는 고전 중국의 최후의 지킴이였다.
이 '한나라 이념'의 지평 위에서 촉한을 정통으로 내세우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가 탄생하고,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관제묘가 세워진 것이다."
- [삼국지 인재전쟁], <4장. 촉나라, 전통을 계승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진수의 [삼국지]는 서진시대에 지어졌는데 위나라를 찬탈했으나 중원의 전통을 잇고자 했던 진나라 권력에 의해 삼국 중 '혁신'의 위나라를 중심으로 서술된다. 여기에 한나라 '전통'을 잇는 촉한의 유비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다가 약 천 년 후 원나라 말기 한족의 민족해방 투쟁 시기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는 대놓고 유비의 '촉한정통론'을 일관되게 고수한다.

대중적인 소설에 따르면 한족 부흥을 위해 평생을 바친 유비와 제갈량 외에는 조조를 필두로 다들 '난세의 간적'일 뿐인데, 삼국지 시대의 치열한 '인재전쟁'과 함께했던 '혁신'과 '전통' 등의 '이념'은 흥미로운 소설 속에서 '신화'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역사 속에서 명멸했던 영웅들과 인재들이 목숨걸고 추구했던 그 치열한 '이념' 자체가 본래는 한낱 '신화'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

1. [삼국지 인재전쟁](2019), 와타나베 요시히로, 노만수 옮김, <더봄>, 2023.
2. [난세의 리더, 조조](2013), 친타오, 양성희 옮김, <더봄>, 2022.
3. [조조 평전](2000) / [유비 평전](2004), 장쭤야오, 남종진 옮김, <민음사>, 2010 / 2015.
4.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 제갈량],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2.
5. [자기통제의 승부사 - 사마의],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3.
6. [결국 이기는, 사마의](2017), 친타오, 박소정 옮김, <더봄>, 2018.
7.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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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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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 [모비 딕], 허먼 멜빌, 1851.


https://brunch.co.kr/@beatrice1007/325


1.

"내 이름을 이슈메일(Ishmael)이라고 해두자. 몇 년 전-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래도 좋다- 지갑은 거의 바닥이 났고 또 뭍에는 딱히 흥미를 끄는 것이 없었으므로,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내가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혈액순환을 조절하기 위해 늘 쓰는 방법이다."
- [모비 딕], <1.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 허먼 멜빌, 1851.


"Call me Ishmael."

유명한 첫 문장이라고들 한다.
내가 이 오래된 영문학 '고전'을 읽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이 첫 문장에 관한 얘기를 듣고 난 후였다.

직역하면,
"내 이름은 이슈메일" 또는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다오"가 되겠지만,
의역을 한다면,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정도가 더 어울린다고 소설가인 역자 김석희 선생은 말한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16장'에서 이스라엘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을 때 '하갈'이라는 그의 하녀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이스마엘(Ishmael)', 영어식 발음으로  '이슈메일'이라는 인물은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에 의해 쫓겨났기에 '방랑자' 혹은 '세상에서 추방당한 자'의 성경식 대명사가 되었다. 소설 [모비 딕]의 화자 '이슈메일'은 본명이라기 보다는 상징적 이름으로 보는 게 좋다고 역자 김석희 선생은 말한다([모비 딕], '옮긴이의 덧붙임', <작가정신>, 2011). 즉,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바다를 헤매는 화자를 상징적으로 은유한다는 것이니 "Call me Ishmael"을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로 의역한 것이다. 실제로 온갖 상징으로 가득한 작가 허먼 멜빌의 이 장대한 작품을 소설가인 역자는 '창작'의 정신으로 의역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서 일단,
19세기 미국의 소설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 1819~1891)이 31세인 1851년에 발표한 대작 [모비 딕(Moby Dick)]의 화자는 본명은 알 수 없지만, 일단 '방랑자'의 상징으로서 '이슈메일(Ishmael)'이라 해두고 긴 고래 이야기를 시작한다.


2.

"... 쾰른 대성당이 탑 꼭대기에 아직 기둥을 세워둔 채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듯이, 나의 '고래학' 체계도 미완성인 채로 남겨둘 작정이다. 작은 건물은 처음에 공사를 맡은 건축가들이 완성할 수 있지만, 웅장하고 참된 건물은 최후의 마무리를 후세의 손에 맡겨두는 법이다..."
- [모비 딕], <32. 고래학>, 허먼 멜빌, 1851.


[모비 딕]의 주인공은 화자인 '이슈메일'이라기 보다는, 고래잡이배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해브(Ahab)'일 수도 있고, 남태평양의 흰색 늙은 향유고래 '모비 딕(Moby Dick)'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을 '인생'에 관한 이야기로 읽으면 주인공은 사람인 '에이해브'일 수도, '자연'의 그것으로 보면 고래 '모비 딕'일 수도 있다. '죠스'나 '47미터' 같은 식인상어 영화의 주인공이 사람인가 상어인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르듯이 그렇다. 어쩌면 19세기 소설 [모비 딕]이 그 기원이 아닐는지.

소설은 장황하고 방대하다.
특히 '고래'와 '고래잡이(포경업)'에 관한 이야기는 작가가 최선을 다해 조사하고 연구한 19세기 당시의 자료를 토대로 설명해 준다. 학자나 전문가는 아니지만 스무살부터 육지를 벗어나고자 상선과 고래잡이배를 타고 나갔다가 또 다시 탈주하여 식인종 섬에서 지내기도 하다가 해군이 되어 다시 뭍으로 돌아온 작가 멜빌의 경험이 진하게 녹아있다. 
물론 당시는 바닷속 관찰이 불가능했을 것이기에 20미터가 넘는 길이의 고래를 전체적으로 묘사할 수가 없었다. 뭍에 올라와 야자나무를 들이받고 죽은 고래는 금세 썩고 해체되어 본래 바다에 살던 모습을 재현할 수 없었다. 뼈만 조립해 놓고 상상의 살을 붙여대는 지금의 공룡 재현과 같던 시절이다. 

멜빌은 자신의 조사와 연구, 수년 간의 원양어선 체험을 총동원하여 총 135장에 달하는 소설 [모비 딕]의 수많은 장을 빌어 '고래'와 '고래잡이'에 관해 친절하고도 장황하며 세밀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으나 19세기의 시대적 한계로 인해 '고래'라는 '대성당'의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못한 채 이 "웅장하고 참된 건물"의 "최후의 마무리를 후세에 손에 맡겨"두고 있다. 

'고래잡이' 어부 페르세우스가 안드로메다를 구하기 위해 메두사 머리로 물리쳤다는 바다괴수 '크라켄' 또한 어차피 상상의 괴물이라 심해 대왕오징어나 대왕문어 또는 이들을 잡아먹는 대왕고래의 합체물 아닐까 한다.
'고래'는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래 하느님의 말을 전도하라는 지시를 안듣고 도망친 예언자 '요나'를 삼켜버리는 바다괴수로서 첫 역할 이후로 과학의 발전으로 그 온전한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 그렇게 내내 베일에 싸인 존재였고 세계를 위협하는 상상속 괴물의 무한한 원천이기도 했다. 
어쩌면 멜빌이 [모비 딕]을 쓰던 19세기 중반까지도 '고래'는 그런 존재였을는지 모른다. 


"제우스의 아들인 용감한 페르세우스는 최초의 고래잡이였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의 모험담과 비슷한 이야기에 저 유명한 성 조지와 용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이 이야기가 페르세우스 이야기에서 간접적으로 유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성 조지의 이야기에 나오는 용이 바로 '고래'였다고 주장하고 싶다. 옛날 연대기에서는 고래와 용이 묘하게 혼동되는 경우가 많고,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 [모비 딕], <82. 포경업의 명예와 영광>, 허먼 멜빌, 1851.


고래가 워낙 크다 보니 소설에서 묘사하는 고래잡이 장면도 세밀하게 와닿지는 않으나 죽은 고래를 배에 올릴 수는 없고 바닷속에 둔 채 지방질 껍질을 벗기고 큰 머리를 잘라 올려 배 위에 거는 장면들이 나온다. 당시로서 고래는 고기보다는 연료와 미용 따위로 쓰는 고급 기름을 얻기 위해 사냥당했다. 북방의 해역에서는 주로 수염고래로 불리는 '참고래(그린란드고래)'였고 남양에서는 머리가 몸길이의 절반 가까이 되는 '향유고래'가 그 대상이었다. 아마도 '향기로운 기름'을 가진 '향유(香油)' 고래가 가장 값이 나갔을 터, 에이해브 선장은 오래 전 세상에서 제일 큰 것으로 보이는 흰색 향유고래 '모비 딕'을 잡다가 한쪽 다리를 잃었고, 모비 딕에 대한 복수를 위해 다시 바다로 나가게 된 것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잠시 도망친 화자 이슈메일은 우연히 에이해브 선장의 고래잡이배 '피쿼드'호에 역시 여관에서 우연히 한 침대를 쓰게 된 식인섬 출신 작살잡이 '퀴퀘그'와 함께 타게 된다. 

'피쿼드'호에는 다른 선원들도 많다. 독선적이고 말이 안 통하는 독재자 '에이해브' 선장이 있고, 별다방의 시조인 1등항해사 '스타벅'은 독실하고 진지하며 그나마 폭군선장에게 할 말은 한다. 2등항해사 '스터브'는 내가 가장 마음에 든 캐릭터로 힘든 고래잡이업과 빡센 직장상사인 선장 앞에서 한시도 개그를 놓지 않는다. '스터브'가 '에이해브'를 처음 만난 장면부터 최후에 '모비 딕'에 의해 전원 몰살당하기까지 내뱉은 말과 행동 모두 개그에 대한 그의 진심을 보여준다. 3등항해사인 땅딸이 '플래스크'는 '스터브'의 개그 말벗으로서 듀엣을 이루며 양념을 쳐준다. 이들 세 명의 항해사는 고래를 잡을 때 띄우는 개별 보트들의 대장들이다. 본선의 선장이 중대장이면 이 항해사들은 소대장이다. 이들 보트는 작살잡이 분대장들을 두는데 이 선원들이야말로 듬직하기 이를데 없다. '피쿼드'호의 작살잡이 세 명은 모두 '야만인'이다. 1등 '스타벅'의 밑에는 '이슈메일'의 절친 식인종 '퀴퀘그', 개그맨 '스터브' 밑에는 북미 인디언 '타슈테고', 땅딸이 '플래스크' 밑에는 아프리카 흑인 '다구'가 있다. 이들 작살잡이들은 기골이 장대하여 배의 온갖 힘든 일을 해결하고 고래잡이 보트에서는 작살로 고래를 공격한다. 사실 듬직한 이 작살잡이들이 하는 일이 너무 많기에 화자는 이들이 노까지 젓지 않고 빈둥거리다가 작살만 던지면 고래란 고래는 다 잡힐 거라고 깨알같이 논평을 한다. 

아무튼, 선장이 폭군이든 항해사들이 독실하거나 개그맨이거나 땅딸보거나 작살잡이들이 하는 일이 너무 많더라도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일단 돛대 위의 망꾼이 고래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일사분란하고 치열하게 고래를 사냥한다는 것. 큰 돈을 벌고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한다는 경제적 동기가 일차적이지만, 일단 고래와 싸울 때는 말할 수 없는 진지함과 엄숙함과 사명감이 있다. 위험하고 더럽고 힘든 '3D' 업종의 대명사지만 일할 때는 누구보다 멋지고 자부심 넘친다. 
사실, 독자로서 내가 [모비 딕]을 읽으며 가장 공감했던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중년이 된 우리 세대가 본인 일이 아무리 지겹고 싫게 느껴져도 막상 내 일을 하고 내 역할을 맡을 때 임하는 삶의 자세. 진지한 사람(스타벅)도, 개그맨(스터브)도, 키가 모자람(플래스크)이 있어도 자기 역할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겠다는 삶에 대한 엄숙함. 바로 그것이었다.
다만, 나는 내 일과 역할이 끝날 때까지 개그맨 '스터브'처럼 유쾌하고 싶을 뿐이다. 나의 소망은 유언으로 후세에 길이 남을 개그 한 문장을 쓰는 거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읽은 [모비 딕]의 주인공 역시,
바다괴수 '모비 딕'이 아니라 고래잡이 선원들이었다.
힘들고 험하고 천하지만 자기 일의 기원을 신의 아들 '페르세우스'나 구세자 '성 조지'에서 찾을만한 그 개성적인 인물들 말이다. 다시 말해도 그 중 단연 나의 롤모델은 개그맨 '스터브'다.


3.

"그가 서 있는 기묘한 자세도 나를 놀라게 했다. '피쿼드'호의 뒷갑판 양쪽, 뒷돛 밧줄 가까이에 있는 널빤지에 지름이 1.5센티미터쯤 되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는 고래뼈로 만든 다리를 그 구멍에 끼우고, 한 손을 들어서 밧줄을 움켜잡고 꼿꼿이 서서는, 끊임없이 곤두박질하고 있는 뱃머리 너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앞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두려움 모르는 눈길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 정신, 단호하고 양보할 수 없는 무한한 고집이 담겨 있었다."
- [모비 딕], <28. 에이해브 선장>, 허먼 멜빌, 1851.


소설을 읽는 내내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1883)이 떠올랐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103

사실상 주인공인 외다리 존 실버가 소설이 한참 진행된 이후 등장하듯, 역시 고래한테 다리를 잃은 외다리 에이해브 선장도 변죽만 울리다가 <28장>에서야 등장하되 모습은 한참 더 뜸을 들인 후에야 나타난다.


"에이해브는 바다에서 아무런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깊은 바다 속을 들여다 보자, 기껏해야 흰 족제비만 한 하얀 점 하나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살아 있는 그 점은 올라오면서 점점 커지더니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밑바닥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얗게 반짝이는 이빨이었다. 그 이빨들은 구부러진 두 줄로 길게 늘어서 았었다. 그것은 '모비 딕'의 벌린 아가리와 두루마리처럼 말린 턱이었다. 그의 거대한 몸통은 아직도 푸른 바닷물과 어우러져 어렴풋이 보였다. 번쩍이는 입은 마치 문이 활짝 열린 대리석 무덤처럼 보트 밑에 딱 벌어져 있었다. 에이해브는 이 무서운 유령을 피하기 위해 조타용 노를 옆으로 비스듬히 휘둘러 보트의 방향을 바꾸었다."
- [모비 딕], <133. 추적-첫째 날>, 허먼 멜빌, 1851.


'모비 딕'은 아예 전설과도 같이 말로만 대양을 떠돌기만 하다가 총 135장 중 <133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집중적으로 사흘간 짧게 등장한다. 그것도 물줄기를 뿜는 다른 고래떼와 달리 백상아리처럼 바다괴수답게 깊은 물속에서 큰 아가리를 벌린 채 수직을 그리며 위로 솟구친다. 3일간의 추적과정에서 모두 그렇게 등장하는 '모비 딕'은 과연 안드로메다를 제물로 잡아가려는 고대의 바다괴수 '크라켄'이나 성 조지에게 퇴치된 중세의 전설괴수 '드래곤'에 필적한다. 화자 '이슈메일'은 고대 사람들이 상상하던 용과 그리핀 등을 포함한 대부분 거대괴수들의 모티브가 바로 고래였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렇다지만,
소설의 제목도 고래 이름인 [모비 딕(Moby Dick)]이기는 하지만,
혹자는 비극적 최후를 알면서도 불굴의 정신으로 끝까지 도전하는 '에이해브' 선장이 주인공이라고 논평하지만,
내게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개성 넘치는 고래잡이 선원들이다. 
세상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 누구보다 그 세상에 치열하게 뛰어든 그 사람들이다.
두 세기가 지났지만 변함없이 열심히 내 일을 해내며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것이다.


"연극은 끝났다. 그렇다면 또 누군가가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난파에서 한 사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 [모비 딕], <에필로그>, 허먼 멜빌, 1851.


그렇게 '90년대 한 시절 '신세대'였던 우리세대 모두는 그 당당했던 선원들처럼 언젠가 한 순간에 무대에서 사라지겠지만, 
또 어느 누군가는 화자 '이슈메일'이 그랬듯 살아남아서 우리를 주인공처럼 기억해 주리라.

https://brunch.co.kr/@beatrice1007/324y

***

1. [모비 딕(Moby Dick)](1851), Herman Melville,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011.
2. [Treasure Island](1883), Robert Louis Stevenson, <Collins classics>, 2010.
3. [1990's -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 윤여일, <돌베개>,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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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
윤여일 지음 / 돌베개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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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90년대 '신세대'라 해두자
- [1990's], 윤여일, 2023.


"1990년대 초중반 '신세대론'이 기세등등할 무렵, 1980년대와 작별하는 후일담 문학이 부상했다면, 1990년대 후반 '신세대론'이 위력을 잃어갈 무렵 30대인 기성세대가 1980년대를 긍정적으로 회상하며 자기서사를 구축한 것이다. '386세대론'은 '신세대'를 탈정치적이고 개인적이고 소비지향적인 세대로 담론화하는 과정에서 그들과 변별하며 자신의 출현을 예비하고 있었다. 이후로 10대와 20대에 관한 세대론은 짧고 다양하게 변주되었지만, '386세대론'은 486, 586세대론으로 업데이트되며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이처럼 호황기에서 (IMF) 불황기로 넘어가며 젊은 세대담론은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공통점이라면 어느 쪽이든 기성세대가 젊은세대를 대상화하고 평가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 [1990's], <6. 세대, 혼란의 범주>, 윤여일, 2023.


일단, 나를 '신세대'라 해두자.
First, call me 'new generation'

나는 1974년도에 태어났고, 1993년에 스무살이 되었다.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가 시작되었을 때는 아직 서른살도 안되었고 서울 종로에서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똘망똘망한 눈으로 목도하려는 열정으로 친구들과 그 '천년의 밤'을 꼬박 새기도 했다.

남들보다 굼뜨고 조숙하지도 못했던 내가 스무살에 세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는 더 이상 군사정권 시대가 아닌 '문민정부'였고,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독재'보다는 '개혁'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었다.
스물한살이 되었을 때 후배들을 보게 되었고 선배인 나는 그들을 유행 따라 'X세대'라 불렀다.

부조리한 군부독재와 독점자본의 세상에 저항했던 1980년대 선배들을 동경했던 나는, 옆구리에 거대한 모토로라 삐삐를 차고 자가용을 끌려고 운전면허 학원에 가던 한 살 어린 후배들에게 세상을 바꾸는데 관심없다며 비난의 말을 던지기도 했다. '80년대식 끝물을 들이고 있었던 선배들이 보기에 '신세대'였던 나는 'X세대'가 되기를 거부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동경했던 '80년대 젊은이들은 '90년대 말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기성세대'인 '386세대'로 무대 위에 등장했고, 나는 여전히 그들이 규정하는 세대로, '90년대 '신세대'로 머물렀다. 


"1990년대는 동질적 내지 연속적 시기로 환원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가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이질적 시간성들이 교차하고 혼재하고 갈등하는 여러 국면들로 짜여 있다. 그래서 그 때를 회상하는 사람의 이유와 방식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소환된다. 1990년대는 하나가 아닌 복수다."
- [1990's], <2. 문제적 시대로서의 1990년대>, 윤여일, 2023.


'90년대 초반 'X세대'와 중반의 'Y세대' 등은 지금 21세기의 'MZ세대'처럼 특정시기의 세대론을 지칭한다. 현재는 'X-Y-Z세대'가 없지만, 어느 시대든 '신세대'는 존재한다. 로마시대나 삼국시대에도 여전히 젊은이들은 '싸가지'가 없었을 테고 어른들이 보기에 그래서 세상은 '말세'였을 게다. 다만, '어린이'나 '젊은이', '청춘'이나 '청년'이 아닌 '신세대'로 세대론이 이 땅에서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가 내 생각엔 1990년대 아닐까 싶다. 아니면 말고.

기성세대가 되어 정치와 경제 전반의 권력이 된 '80년대 청춘 '386세대의 회고와 추억으로 내가 접했던 1980년대는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했다. '후일담 문학'으로 문화권력까지 접근하던 '80년대가 보기에 1990년대는 더 이상 '변혁이론'도 안 통하고 '포스트모더니즘' 같이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혼돈'의 시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 '혼돈'에 앞장섰던 자들은 '소련의 몰락'과 탈냉전', '변혁이론의 쇠퇴' 등을 맞아 한 시대를 청산하고자 했던 '80년대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90년대의 '신세대'는 여전히 '80년대 기성세대의 영향력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사회학자 윤여일 박사는 2016년에 1990년대 '탈냉전' 시대 [동아시아 담론]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가 '한국사상계의 한 단면'으로서 '동아시아 담론'이라는 주제를 연구할 때 주요 소재가 '잡지(雜誌)'였다. 그에 의하면 1990년대는 '잡지의 시대'였다. 시대의 저항과 진보를 대표하는 담론들이 수많은 무크지와 계간 및 월간지로 등장했다가 '90년대 후반의 불황기를 거치며 명멸했다. 윤여일 박사가 2023년도에 [1990's]라는 표제로 전 사회적 영역에서 1990년대의 특징을 설명하고자 했을 때는 박사논문 집필 과정에서 수행했을 '잡지'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조사, 그러나 [동아시아 담론]의 주제와 무관하여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꺼내고 싶어서였을 거다.

결국 저자의 논문 [동아시아 담론]과 대중서 [1990's]의 결론은 같다. 1990년대의 '유산화', '역사화'다. 즉, 우리 역사에서 1990년대를 돌아보고 재역사화하여 미래로 이어지는 사상적 담론을 그려보자는, 뭐 그런 것 아니겠는가.


"... 그래서 1990년대는 무엇이었나... 희망도 자라났으며 위기도 드리웠다. 어떠한 변화는 원치 않았는데 닥쳐왔고 어떠한 변화는 그토록 갈구했으나 지난했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변화들 중에는 1980년대와는 달리 지금 시대에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게 많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1990년대는 '그 때 그 시절' 이야기만이 아니다."
- [1990's], <2>, 윤여일, 2023.


그래서 '90년대 '신세대'였던 나 또한 묻게 되었다. 나에게 1990년대는 무엇이었나.

군부독재의 종식과 문민정권의 등장, 초중반의 경제활황과 후반의 IMF 초유의 불황, 새세상을 꿈꾸었다면 역시 실망했을 수도, 역사는 진보하지만은 않는다며 회의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세기말이었기에 그랬는지 지난 시대인 '80년대를 계승했을 수도 부정했을 수도 있겠다. 또한 21세기하고도 사반세기가 지나는 지금 역시 마찬가지인 것처럼 도무지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의 본격적 태동기였을 수도 있겠다.


"미디어가 제공하는 나날의 시사적 사건에 그때그때 반응하는 것보다 그 사건을 사태, 추이, 국면 그리고 시대의 징후로 옮겨서 읽어내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에는 더한 정신의 노력이 요구된다. 그런데도 굳이 그런 노력을 감당하려는 자가 있다면, 과거의 '잡지는 그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 [1990's], <16. 에필로그>, 윤여일, 2023.


사실, 1990년대 말 이십대 중후반의 내가 만약 소설을 써서 신춘문예에 당선된다면 어떤 '당선소감'을 낼까 혼자 즐거운 상상을 하며 몰래 써보았을 때, 그 주제는 '90년대의 '부재(不在)'였다.
'80년대에 열렬하게 세계의 '변혁'을 외쳤던 그 세대들의 '부재', 현실에 존재하지만 또 한편으로 '부재'하던 '신세대'의 사상. 허생이 뒷문으로 달아난 좁은 방을 바라보던 어영대장 이완처럼, 어느덧 멍해져 버린 나에 관한 이야기였다.

'잡지'를 통해 1990년대의 징후를 읽을 수 있는 것처럼, 한때 '90년대의 '신세대'였던 나는 생각한다.

지난 시절 인류의 '고전'들을 '20세기 소년'이자 '90년대 '신세대'의 눈으로 읽어서 계속 남겨보자. 
'90년대를 살았다 해서 다 같을 수는 없지만, '다양성'의 시대였던 '90년대를 함께 통과했던 사람들이었으니만큼 한 시절 '신세대'의 이름으로 인류의 '고전'들과 몇 가지 책들을 나와 같은 세대들에게 읽어주자. 
'노동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범상하게 커서 '노동자'가 된 나의 '90년대 관점으로, 나와 같이 늙어가는 동료 노동자들에게 책을 읽어주자.

내가 쓰는 서평 아닌 '서평' 또는 소설 아닌 '소설'의 독자는,
'20세기 소년'들이자 '90년대 한 때 '신세대'들이다.

한 때 우린 '변화'와 '다양성'을 지향하던 한 시절 같은 '신세대' 아니었는가.

그렇게,
아직도 '책 읽어주는 노동자'인 나를 여전히, 
일단 '90년대 '신세대'라 해두자.

***

1. [1990's -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 윤여일, <돌베개>, 2023.
2. [동아시아 담론 - 1990~2000년대 한국사상계의 한 단면], 윤여일, <돌베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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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담론 - 1990 ~ 2000년대 한국사상계의 한 단면
윤여일 지음 / 돌베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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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담론'의 '동아시아화'
- [동아시아 담론], 윤여일, 2016.


"'동아시아'란 고정된 경계나 구조를 가진 실체가 아니라, 이 지역을 구성하는 '주체의 행위'에 따라 유동하는 역사적 공간이다."
- <창작과비평사>, 2003.

나는 '주체사상'은 읽지 않았다.
적어도 20세기말을 잎둔 1995년의 '주체사상'은 '김주의', 즉 '김일성주의'였다.
남한 자본주의체제의 기본모순을 '계급투쟁'으로, 주요모순'을 '민족분단문제'로 정리한 1995년경의 나는 중국의 '마오주의', 즉 모택동(마오쩌뚱)의 [모순론]과 [실천론], [신민주주의론] 등에 기반하여 남한체제를 사고했다.

스무살이던 1993년에 서구의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1994년에는 마르크스주의를 현실적 혁명으로 실현했던 '레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M-L)'를 학습하면서 그 다음은 '아시아'로 넘어와서 1995년에는 중국의 '마오주의'를 읽었다. 이제 다음은 '한반도'로 범위를 좁혀 '주체사상'을 봐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접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무관하고 인류의 해방과는 거리가 먼 북조선의 봉건세습왕조와 나는 '담론의 지향성'이 달랐다.

그럼에도 체제의 '변혁론'은 내 나라, 내 주변 지역에 천착해야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오십줄에 들어선 지금 '동아시아'가 눈에 들어온 이유다.


1. 

"'동북아'의 지역범위는 주로 지정학적 차원에서 한반도와 주변 4강(중-러-일-대만)으로 고정되어 있으나 '동아시아'는 지문화적 시각에서는 한중일 삼국, 지정학적 시각에서는 '동북아' 수준의 지역범위, 지경학적 시각에서는 동북아와 동남아 지역을 아우르는 등 탄력적으로 활용되었다. 그 탄력성이 한편으로는 '동북아 담론'이 아닌 '동아시아 담론'의 부상을 가능케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동아시아 담론'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 [동아시아 담론], <1-6. 담론 이행의 결과>, 윤여일, 2016.

사회학자 윤여일은 2016년에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동아시아 담론]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이 책의 부제는 <1990~2000년대 한국사상계의 한 단면>인데, 1980년대 남한체제 변혁이론과 저항적 지식사상계의 계승으로서 1990년대를 풍미한 '동아시아'에 관한 학술논문이다.

1990년대는 윤여일 박사의 주요한 관심사인 듯도 한데, '90년대는 '동아시아'가 다소 모호하고 중층적이지만 거대한 '담론'으로 활발히 기능하던 연대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로 인해 미-소간 또는 1세계와 2세계간 냉전이 끝난 '탈냉전'이 그 중요한 시대배경이다. 
'90년대 한국 지식계에 회자되던 '포스트(post)~ 주의'는 냉전시대의 주요 변혁이론이었던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탈주'를 의미했고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해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논쟁되던 '사회구성체론'도 남한체제의 구조적 설명의 도구로서 유효성을 상실했다.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냐 '식민지반봉건사회'냐가 아니라 남한체제는 그냥 '승리'한 '자본주의' 체제 또는 그러한 '세계체제'의 종속변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진보적 지식계에서는 '80년대의 저항성을 이어가고자 했다. 자본주의가 '승리'했다고 '완전'해지는 것은 아니기에, 오히려 빛나는 경제성장의 이면에 체제모순으로서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변혁적 진보진영에게 '포스트'는 '탈주'보다는 '이후(후기)'였다. '후기-마르크스주의'에게 변혁이론은 여전히 유효했다. '7~80년대의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은 주요한 이론적 기초가 되었고, '오리엔탈리즘'을 탈피하여 '동아시아'적 정체성을 굳게 정립하는 것이 저항적 인문학자들의 사명이었다. 

저자가 '동아시아 담론'의 시작으로 삼은 <창작과비평사>의 최원식 논문([탈냉전시대와 동아시아적 시각의 모색>)은 1993년 봄에 발표되었다. 내가 스무살 때였는데 <창비>도 알았고 <시대와철학> 등도 읽어봤지만 그 당시의 나는 아직 '동아시아'로 갈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1990년대 초반, '탈냉전' 시대를 맞은 남한 사회에서 '동아시아 담론'의 포문을 열고 논쟁을 주도한 분야는 단연 '인문학'이었다.


2.

"'동아시아 담론'은 인문학과 사회과학 영역을 망라하는 학제적 담론이다. 하지만 영역에 따라 '담론의 지향성'은 달랐다. 인문학 영역에서는 문학-역사-철학(문사철) 해석에 사용되는 서구에서 유입된 이론, 이념, 개념, 논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서양중심적 지식체계에 맞서려는 언술들이 도드라졌으며, 그러한 지식체계에 의해 망각되거나 가치절하되었던 사상적 전통을 복원하려는 논의들이 힘을 얻었다. 사회과학 영역에서는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적 발전 혹은 쇠퇴를 설명하거나 정치-경제 영역에서 지역협력체제의 제도화를 모색하는데 치중하는 경향이었다... 복수의 하위계열 구분... '동아시아 문화정체성론', '동아시아 대안체제론', '동아시아 발전모델론', '동아시아 지역주의론'... 분류의 기준은 '담론의 지향성'이다... 결국 '어떤 동아시아 담론인가'를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왜 동아시아인가', '무엇을 위한 동아시아인가'다."
- [동아시아 담론], <2-1. 동아시아 담론의 네 가지 계열>, 윤여일, 2016.

사실, 지식인의 저항성은 본래부터 '인문학'의 몫이었을지 모른다. '사회과학'은 '과학'이므로 추상성보다 현실성을 추구할 수 밖에 없기에 '정책'과 맞물린다. '휴머니즘'과 '인류해방' 같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는 '인문학'이지만 그만큼 '저항성'만큼은 전위적이다.
'탈냉전기' 새로운 지식체계의 패러다임 구축을 위해 '냉전기'와 '80년대의 서구중심주의에서 '탈주(post)'하여 '동아시아 담론'의 '네 가지 하위계열' 중 두 가지 계열로서 1) '동아시아 문화정체성론'과 2) '동아시아 대안체제론'을 주장한 인문학계의 '동아시아 담론 지향성'은 저항과 변혁이었다. 서양의 이념으로 안된다면 동양의 사상을 변혁 이데올로기로 새롭게 정립해야 했다. 그러한 차원에서 유교를 재해석하기도 하고 우리의 동학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현실을 거쳐 퇴락해갔듯, '동아시아 담론'도 현실적 정치외교 정책을 거쳐 결론적으로 소멸해 갔다.
1970~80년대 군부독재를 거쳐 1993년 문민정부의 '세계화'와 동아시아 IMF 경제위기를 맞아 한중일의 '동북아'와 '동남아'는 단일한 경제블럭을 구축하고자 했다. 김대중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참여정부 등 부르주아민주정권이 정책적으로 추진했던 '동북아' 구상의 배경이 그러한 시대정신이었다. 이는 동남아 열국들과 동북아 삼국의 결합인 '아세안+3'으로서 지경학적인 '동아시아' 개념이다. 물론, 지정학적으로 '동북아'를 넘어 '동아시아'의 중심국(가교/매개)이 되고자 했던 남한의 시도는 서아시아와 러시아를 망라한 유라시아까지 확장하려는 '대륙세력'인 중국과 미국을 계속 끌어들이는 '태평양해양세력'  일본의 의도와 같을 수 없기에 외교적 현실성이 퇴색되면서 '동아시아 담론'의 쇠퇴를 보여주고 말았다. 
3) '동아시아 발전모델론'과 4) '동아시아 지역주의론'이라는 나머지 두 계열은 사회과학자들이 동아시아 자본주의 발전을 설명하고 더욱 확장하려는 '담론의 지향성'을 가졌지만 역시 현실정치 앞에 힘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담론으로서 '동아시아'는, 
"왜 동아시아인가"라는 성찰과 "무엇을 위한 동아시아인가"라는 지향성의 문제를 담고 있다.

역시, 인문학 또는 '문-사-철'의 사명인 것이다.


"이처럼 '동아시아'는 서구의 식민주의적 확장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여 전후 초강대국 미국이 지역정책의 필요에 따라 구도한 지역상이다. 그것은 '동아(대동아공영권)'라는 일본제국의 지역상이 패배했으며, '극동'이라는 지역상으로 대변되는 유럽중심적 지식권력구조가 미국중심적 지식권력구조로 전이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동아시아'는 '동아'에 대한 아시아적 해결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로 미국과 소련의 (냉전적) 각축 속에서 분할되었다. 그리하여 위쪽의 동아시아에서는 과거 러시아제국(이후 소련)과 중화제국의 잔영을 간직한 대륙의 사회주의권이 형성되었고 아래쪽의 동아시아에서는 유럽의 '극동'과 대결하여 일본제국이 추구했던 '동아'라는 지역상이 '거대한 초승달(Great Crescent)' 지역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지정학적 구도 안에서 온존되었다. 아래쪽의 동아시아는 군사적으로 한미일 삼국관계가 골격을 이루고 경제적으로는 일본 중심의 수직적 경제구조가 짜여 그렇게 일본은 '동아시아'로 복귀했던 것이다."
- [동아시아 담론], <3-1. 동아시아 지역상의 유동성>, 윤여일, 2016.

결국, 인문학의 저항정신과 사회과학의 현실정책은 더 나은 삶을 꿈꾸고 기획하며 실현하기 위함이다. 비록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중층적이면서도 포괄적으로 사상계를 지배했던 '동아시아 담론'이 쇠퇴해 가기는 했지만, 저자 윤여일 박사의 논문의 목적은 이 '동아시아 담론'을 소중한 '유산'으로 삼아 다시금 '역사화'시켜('재역사화') '동아시아'의 현실에 뿌리내리는 것이다. 
'80년대의 저항과 변혁론을 계승하고 '90년대의 다양성을 부활시켜 새로운 세기에도 여전히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꿈을 포기하지 말고 계속 그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오래된 나라이자 젊은 국가다. 중국의 국가형태는 아직 굳어지지 않았으며 중국의 국가형태가 정립되어가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지역질서는 국제관계라는 시각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중국의 운동은 한반도의 변혁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될 것인가. 한반도 문제의 특수성과 중국 행보의 독자성은 어떻게 '생산적 접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들을 남겨둔 채 '동아시아 담론'이 소멸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 [동아시아 담론], <3-5. 한반도 문제와 동아시아 담론의 동아시아화>, 윤여일, 2016.

이 논문이 도출한 본론에서의 소결론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동아시아' 강대국들과 대립하면서도 '생산적 접점'을 찾아가면서 '동아시아 담론'을 지속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최종 <결론>으로서 '동아시아 담론'의 '동아시아화'는 '동아시아 담론'이 과거의 '유산화'나 현재의 '재역사화'의 대상은 물론, 우리의 '주체성'을 견지하면서 다시금 부활시켜야 하는 미래의 이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3.

"... '동아시아 담론'의 '유산화'... '동아시아 담론'의 '재역사화'... '동아시아 담론'의 기본적 가치를 꼽는다면 서구의 경험을 일반화한 이론을 수입해 자신의 현실에 적용하고 그 이론의 결론에 자신의 현실을 끼워맞추려는 풍토에서 벗어나 자신의 현실에서 지적 과제를 발굴하고 언어를 개발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주체성의 문제의식'... 지식식민화와 공동언어의 소실현상이 심각한 한국지식계에서 '동아시아 담론'의 부흥은 분명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동아시아 담론'의 '유산화', 논문의 목적이 이것 하나이듯 논문의 주장 역시 하나였다. '동아시아 담론'은 '동아시아화'되어야 한다."
- [동아시아 담론], <결론>, 윤여일, 2016.


그렇게 나는 중년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내 나라 내 땅의 문제로서 '동아시아'를 만났다. 

우리의 정체성 및 사상과 가치를 찾아 이 책과 저 책을 헤매다가 아예 허접한 '주체사상' 보다는 차라리 600년 전 삼봉 정도전의 '성리학'과 [조선경국전]이 훨씬 '동아시아'적 가치에 맞는 '변혁적 유물론'일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김일성을 중심으로 황장엽 같은 자가 정립했다는 '주체론'과 '품성론' 등을 진지하게 읽어보지는 못했으니 차치한다. 
한편으로 이 책에 의하면 북한은 '동아시아 담론'에서는 거의 배제 및 고립되어 있다는데, 북핵문제에서만큼은 '동북아' 6자회담 등의 지정학적 문제에서 "일부이자 전체"([동아시아 담론], <3부>)로서만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고 한다.

앞으로도 '동아시아론'을 가벼이 볼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이유는 나의 '주체성'이 이제야 제대로 확립되고 있기 때문이겠거니, 남의 어려운 박사논문을 다 읽고 나서야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다음 책은, '동아시아론자'인 윤여일 박사의 좀더 읽기 쉬울 것으로 예상되는 대중서인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2023)다.

***

1. [동아시아 담론 - 1990~2000년대 한국사상계의 한 단면], 윤여일, <돌베개>, 2016.
2.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 윤여일, <돌베개>, 2023.
3. [동아시아 자본주의 - 마르크스주의적 접근], 박노자/정성진 외 경상대 SSK연구단 연구총서, <진인진>, 2023.
4. [동아시아 마르크스주의 - 과거,현재,미래], 박노자/정성진 외 경상대 SSK연구단 연구총서, <진인진>, 2023.
5. [지정학의 힘], 김동기, <아카넷>,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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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스 포풀리 - 고전을 통해 알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던 모든 것
피터 존스 지음, 홍정인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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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인 사람을 위한 고전학 가이드'
- [복스 포플리(Vox Populi)], 피터 존스, 1999.


"서기 1421년 학자인 지오반니 아우리스파(Giovanni Aurispa : 1459년 사망)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배회하고 있었다. 1376년 시칠리아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수학한 아우리스파는 1413년 그리스로 건너가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고대 그리스어를 배우고 그리스문학 필사본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1년 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 그 동안 모은 필사본 중 일부를 되팔았다. 명민한 사람이었던 아우리스파는 자신에게 좋은 기회가 왔음을 감지했다."
- [복스 포풀리], <2장. 고대 문헌은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질까>, 피터 존스, 1999.


1.

이상한 일이다.
나는 '김치'도 좋아하고 '만두'도 좋아하는데, 
'김치만두'는 좋아하지 않는다.

스무살의 나는 '영어'를 좋아했고,
스물두살에 '문학'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나의 전공인 '영문학'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영어학'을 좋아했다는 말은 아니고 어쩌다가 철학학회에 들어가게 된 후 '영어'보다는 '철학'을 더 좋아하게 되었던 거다.
스무살 당시 나에게 '영어'는 '제국의 언어'가 되었고 고대 로마제국의 사어 라틴어와 달리 현대 전세계 통용어로 서슬퍼런 위용을 자랑하는 영어를 나는 멀리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입학 전 아버지가 공책에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를 써주시며 처음 알려주셨던 영어는 중고등 시절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과목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영어와 국어만큼은 일등을 하고 싶었다. 그랬으니 스무살 이후 영어가 '제국의 언어'로 보였다 해서 갑자기 싫어질 수는 없었다. 겉은 아닌 척 하면서도 여전히 속으로는 좋아했는데 대학입시를 앞두고 유일하게 전공으로 선택했던 '영문학'은 막상 대학에서 배워보니 마치 '김치만두'와도 같이 큰 관심이 가지 않았다.


2.

"서기 410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로마 군단이 영국을 떠나자 섬에는 켈트족 원주민만 남았다. 이때 영국인의 선조, 즉 프리슬란트족(네덜란드 북부), 색슨족(독일 북부), 앵글족과 주트족(덴마크 남부와 북부)이 들어왔고 그들은 모두 게르만어를 사용했다. 영어는 바로 이 게르만어에서 유래되었다."
- [복스 포풀리], <8장. 영어의 어휘>, 피터 존스, 1999.

'영어학개론' 수업에서였던가 고대 영어를 배우면서 영어는 독일어(게르만어)를 바탕으로 하면서 프랑스어(라틴어)의 어휘로 이루어졌다고 배운 것 같다. 실제로 고대 영어는 독일어와 프랑스어처럼 명사에 남성과 여성, 중성이 있었고 특히 프랑스어(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가 상당히 많았다. 
당시의 나는 영어가 독일어의 줄기에 프랑스어의 꽃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고전학자 피터 존스(Peter Jones)가 1999년에 [지적인 사람을 위한 고전학 가이드(An Intelligent Person's Guide to Classics)]라는 제목으로 낸 책이 있다. 이후 '고전을 통해 알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던 모든 것(Everything you ever wanted to know about the classical world but were afraid to ask)'라는 장대한 부제를 달고 개정된 이 책의 제목은 [복스 포풀리(Vox Populi)]다. 이 라틴어 문구를 번역하면 '민중의 소리'라는 의미인데, 나는 오로지 제목에 이끌려 책을 펼쳤다.

"'고전'을 뜻하는 영어 '클래식스(classics)'는 라틴어 '클라시스(classis)'에서 유래했다...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는 '최상등급에 속한다'는 뜻이다... '스크립토르 클라시쿠스(scriptor classicus : 최상급 저술가)와 대조되는 말은 '스크립토르 프롤레타리우스(scriptor proletarius : 하급 저술가)였다."
- [복스 포풀리], <머리말>, 피터 존스, 1999.

이 책은 21세기 현재에 널리 유행하고 있는 인문학 요약서의 20세기말 버전이다. '인문학'의 보고인 서양 문화의 뿌리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역사서라기 보다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역사, 문화, 정치와 법, 사회, 문헌과 언어, 철학과 과학 등에 관한 잡학서라 짧고 알뜰하게 고전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다만, 너무 다양한 주제들을 요약하다보니 잠시잠깐 한눈 팔다가는 이야기가 금세 스쳐 지나가 버린다. 특정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의 가이드에 따라 따로 공부해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class)' 투쟁에서 무산자 '프롤레타리아트'는 유산자 '부르주아지'의 적대계급으로서 투쟁하지만, 그 어원으로서 고대 로마의 라틴어 '프롤레타리우스'의 상대계급은 '계급'이라는 용어 자체의 어원인 '클라시쿠스'였다.
유추하자면, '프롤레타리아' 노동계급의 역사적 임무는 '부르주아' 타도만이 아니라 '계급' 자체의 철폐임을 역설한 칼 마르크스의 개념이 '고전적으로' 이해된다.

세기말의 지식 요약서이긴 하나, '민중의 소리(vox populi)'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저자 피터 존스는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에 미치지 못하는 현대의 의회민주주의에 비판적이다. '민중은 투표 때만 주인이다'라는 18세기 장 자크 루소나 현대의 민주주의에 익숙한 우리 민중들이 정치를 보는 시각 그대로다. 
피터 존스는 단언한다. 고대의 문화는 유치한 게 아니라 현대의 정치가 고대의 민주주의 정신에도 한참 모자란 것이라고.
민주주의와 정치 뿐만 아니라 피터 존스가 설명하는 고대의 법과 전반적인 문화는 현대의 그것들에 별로 뒤쳐지지 않는다.
이 책은 결국 현대 서양의 과학과 사상사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결론으로 한다.

'문헌'을 통해 고전과 고대를 이해하는 책이기에 이 책은 '언어' 이야기, 특히 '영어'의 역사를 잘 간추리고 있다. 켈트족이 살던 섬(지금의 영국)에 기원전 5세기 갈리아 지방으로 불린 유럽대륙을 제패한 로마제국이 들어가 갈라아인(유럽대륙인)이 다수 살게 되었고,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서기 5세기 이후 게르만인들이 몰려가 앵글로-색슨족의 나라가 되는 영국의 역사에서 서기 6세기 기독교도의 유입과 11세기 노르망디공이었던 정복왕 윌리엄의 통치 하에 프랑스어만 사용하게 된 영국의회 이야기가 삽입되면 그 자체로 영어의 역사가 된다. 즉, 게르만어를 사용하던 앵글로-색슨에게 프랑스어와 라틴어가 지배언어로 점차로 유입되면서 전체 단어의 절반 이상이 프랑스어와 라틴어에서 변형되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더 들어가 보면 이 라틴어는 로마문화 자체가 그랬듯 고대 그리스문화의 산물이다. 

그렇게 이 책은 서두를 그리스가 아닌 로마 이야기부터 시작하면서 고대 로마문화에 그리스문화가 미친 중요한 영향을 강조한다. 
15세기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한 동로마 비잔틴제국에서 탈주한 지식인들은 서로마 멸망 후 단절되었던 동서양을 다시 접속시켰는데, 이게 '르네상스'였다. 서양 중세문화는 거의 천년 동안 고대 그리스어를 모르고 살았다.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로 여겨진 토마스 아퀴나스 조차 아리스토텔레스를 스페인을 점령했던 이슬람 투르크인들이 그리스어를 번역한 아랍어로 처음 접했단다. 그러나 '인문학'을 부흥시키려는 '르네상스(재부흥)'는 고전기 그리스어와 문헌을 갈망했고 기회 포착이 빠른 아우리스파 같은 지식인은 콘스타티노플을 훑으며 고대 그리스 문헌들을 모아 서양에 내다 팔았다. 필사에 재필사를 거치며 변형되기도 했지만 이 그리스 원전문헌들은 르네상스 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된 것이다.

이를 전후한 14~15세기 영어는 프랑스어는 물론 라틴어를 몰아내고 대중의 언어가 되었고, 비슷한 시기 구텐베르그의 인쇄혁명은 지식 '민주화'의 기점이 된다. 피터 존스에게 현대 영어의 출현과 인쇄혁명 및 책(코덱스)의 출현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복스 포풀리(Vox Populi)], 즉 '민중의 목소리'가 된 것이다.


3.

"그리스 사유 중에서 우리에게 특히 더 큰 영향을 끼친 몇 가지 특색으로는 실증적 연구, 수학을 응용한 자연 세계의 이해, 연역적 공리계를 꼽을 수 있다."
- [복스 포풀리], <11장. 고대의 한계를 넘어서다>, 피터 존스, 1999.

비록 한자권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15세기 우리 한글의 발명과 대중화는 지식 '민주주의'의 기초였다. 왕정시대의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현대식 민주주의자들일 수는 없겠지만 비슷한 시기 서양에서 라틴어를 극복한 영어의 대중화 못지 않게 다수 민중들이 좀더 쉽게 문헌과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토대로서 한글을 만들고 가르쳤음에 깊이 감사한다. 
언어의 대중화는 민주주의의 기본 토대를 구축했다. 또한 구텐베르그 인쇄혁명은 이 지식 민주주의에 불을 당긴 혁명적 기제였다.

피터 존스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목적론과 원자론 등의 고대 그리스 철학과 사상까지 요약하며 현대 과학 혁명의 방법적 기초를 다진 그리스 사상의 특징을 강조하고 현대의 과학기술과 실험적 혁명으로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인문학의 발전을 전망한다.


김치도 좋아하고 만두도 좋아하는 내가 만약 김치만두도 좋아했더라면,
영어영문학 전공자인 내가 영어의 역사를 고전학자 피터 존스의 지식 요약서보다는 오래전 대학 전공필수 수업을 통해 더 잘 간추릴 수 있지 않았을까 잠시 아쉬워하며 책을 덮는다.

***

- [복스 포풀리(Vox Populi] - 고전을 통해 알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던 모든 것](1999), Peter Jones, 홍정인 옮김, <교유서가>,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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