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진화 - 아프리카에서 한반도까지, 우리가 우리가 되어 온 여정
이상희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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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 [인류의 진화], 이상희, 2023.


과학은 '가설(假說)'로부터 시작한다.
연역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과학'은 일차적으로 자료조사를 통해 어떤 대상을 설명하는 명제를 구성한다. 이 명제가 '가설'로 상정되어 본격적인 조사와 발굴, 비교검토를 통해 이 주장을 검증한다. 반증이 없다면 이 '가설'은 현재의 증거들을 통해 하나의 과학적 '사실'로 확정된다.
그러나 다른 과학적 성과가 새롭게 이뤄지면 이 오래된 '진리'는 깨진다.
따라서 엄밀하게 '과학적 진리'는 모두 '상대적 진리'다.
'가설'은 깨질 수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절대적 진리'다.
레닌은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서도 이러한 '진리의 상대성'이라는 '절대적 진리'가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가설'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계단(사다리)이 아닌 나뭇가지(덤불)처럼 뻗어나가는 모습이 20세기 후반에 자리잡은 인류의 진화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작은 물줄기에서 큰 물줄기로 모여 지구 전체를 덮고 있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다양한 집단의 다양한 기원이 만들어낸 모습입니다."
- [인류의 진화], <들어가며 : 흐르는 강물처럼>, 이상희, 2023.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대학교 인류학과 이상희 교수는 2018년 한마음평화연구재단으로부터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의 고인류를 연구해보라는 제안을 받고 2023년 [인류의 진화]라는 책을 출간했다.
호모 사피엔스로 분류되는 현생 인류의 기원을 연구하는 고인류학계의 유럽식 주류에서 탈피해 연구를 아시아로 확장하는 시도 중 하나다.
다른 말로는 유럽이 발상지인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호모 사피엔스)'의 관계에 관한 고인류학계의 오래된 '가설'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상희 교수의 [인류의 진화]를 읽기 전,
일반인 독자들은 우선 기본 '가설'부터 깰 준비를 해야 한다.

인류 진화를 과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인 나 같은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도식화한 '가설'이 있다.

대략 600만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등장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300만년 정도 아프리카 초원지대에서 살다가 200만년 전에는 '직립보행'을 하면서 유럽으로 이동했다.
100만년 전에는 석기로 대표되는 '도구 사용'의 '호모 하빌리스'가 등장하고, 그 즈음 '불'을 발견한 고인류는 70만년 전에는 '의무 직립보행'의 '호모 에렉투스'로 진화하면서 지구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되었다.
40만년 전 쯤 되면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이 등장하고 10만년 전부터는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되어 거의 그대로 현생인류로 이어져 왔다.

'계단'이나 '사다리'처럼 한 줄로 이어지는 인류 진화의 '가설'인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오스트랄로 피테쿠스(600만년 전) - 호모 하빌리스(100만년 전) - 호모 에렉투스(70만년 전) - 네안데르탈인(40~20만년 전) - 호모 사피엔스(15~10만년 전) 
2. 구석기 시대 및 수렵채집사회(200~3만년 전) - 신석기 시대 및 농경정착사회(1만년 전) 
3. 플라이스토세(5~1만년 전 대빙하기) - 홀로세(1만년 전~현재까지 간빙기) 등.

일반인들이 대중적으로 공개된 유물조사 결과를 통해 이해한 '가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도식화된 '가설'은 얽히고 설킨다.


"고인류학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사람이 다른 동물에 비해 얼마나 특별하지 않은지'를 밝혀온 역사이기도 합니다."
- [인류의 진화], <1장. 네 이름은 호미닌>, 이상희, 2023.


이와 같은 '가설'의 주요 배경은 19세기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기반한 '사람도 진화의 산물'이라는 고인류학의 대전제였다. '창조론'이 사람은 원래부터 이 상태로 창조되었다는 과학적 반증을 하지 못하는 한 '인류 진화'의 '잠정적 가설'은 '상대적'일지라도 아직 '진리'다.
'진화는 사다리가 아니라 덤불'이라고 논증한 미국의 고인류학자 도널드 프로세로에 의하면, 진화는 '잠정적 가설'이기도 하지만 현재도 진행되는 '사실'이다.


"'중력'이 일어나는 방식을 우리는 아직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물체가 땅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진화'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어쩌면 완전히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생명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진화'를 설명하는 이론은 '신다윈주의'가 전부는 아니다. '진화'는 과거에도 일어났고 바로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 [화석은 말한다], <4. 진화론의 진화>, 도널드 프로세로, 2017.


이상희 교수에게도 고인류학의 역사는 인류도 특별하지 않게 진화해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었다.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이냐 아니냐의 논란은 더 이상 의미없는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21세기에 밝혀진 팩트는 우리 안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지극히 '사람다운' 고인류종이었습니다."
- [인류의 진화], <12장. 또! 네안데르탈인>, 이상희, 2023.


고인류학의 과학에서도 '가설'은 계속 깨진다.

원래 제2차 대전 이전까지는 인류 기원이 동아프리카가 아닌 아시아였다.
호모 에렉투스로 분류되던 인도네시아 '자바원인'과 중국 북경의 '베이징 원인'이 한때 인류의 '기원'으로 여겨졌다.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는 인류와는 다른 존재였다.

그러던 중 유럽 고인류학계에서 '네인데르탈인' 유물에 대한 조사연구가 발전했다.
1960년대 즈음에는 그 동안의 유물조사 결과를 토대로 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유럽에서 네인데르탈인이 되었고 이후 크로마뇽인이라는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다는 '가설'이 우세하면서 인류의 '기원'은 아시아에서 아프리카로 옮겨진다.

'가설'은 또 다시 깨진다.

1990년대에는 '네안데르탈인'이 현생 인류에게 유전적 영향을 남기지 않았다는 유물연구가 진전되면서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와 다른 종이라는 주장이 '가설'이 된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호모 사피엔스'를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하여 다른 종들을 멸종시킨 '학살자'로 규정한 주요 근거다.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는 '가설'이다.

그러다가 21세기가 되어 유전자 연구가 발전하면서 현생 인류 유전자 중 1~4퍼센트 정도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발견된다는 사실에 기반하여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의 이종교배설이 등장한다.

즉, 교배를 통해 후손을 생식하는 것이 동종 뿐만 아니라 다른 종끼리 가능하다는 '가설'로 인해 '네안데르탈인'이 다시금 인류의 '조상' 범위에 들어오게 된다.

20세기 초에 '필트다운인'이라는 조작된 인류 '조상' 유물까지 내세우며 유럽인의 인류기원설을 주장하려던 유럽식 고인류학계에 또 다시 '네안데르탈인'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고인류학이라는 과학의 '가설' 또한 여지없이 깨질 수 있다고 논증하는 이상희 교수가 이 책 [인류의 진화]를 통해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의 고인류학을 재조명하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제가 '아프리카에서 한반도까지 우리가 우리(인류)가 되어온 여정'인 이 책 [인류의 진화]의 목적 중 하나가 유럽 주류 '네안데르탈인 불패의 신화'(같은책, <나가며>)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가설'은 깨졌다가 다시 '불패의 신화'로 되살아날 수도 있지만,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
과학적 성과는 무한하게 진보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이 인류의 조상으로 다시금 부활한들, 예전처럼 '사피엔스'의 전단계가 아니라 우리 안의 소량의 유전자로 부활한다.
이 '불패의 신화'는 옛날처럼 배타적일 수 없다. '호모 사피엔스'에게 유전자를 남긴 종이 유럽의 '네안데르탈인'(40~20만년 전) 뿐만 아니라 더 오래전 아시아 알타이 산맥의 '데니소바인'(80만년 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마저 발굴되지 못한 다른 종들도 있을 수 있다.

'가설'이 깨진 자리에 다시 부활한 '가설'이 예전의 그 '가설'일 수는 없는 것이다.


"... 우리는 지난 17세기부터 동의한 '종(種)'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다양한 '종'이 섞여 하나의 새로운 '종'을 탄생시킨다는 관점은 하나의 '종'에서 두 '종'으로 분화해야만 새로운 '종'의 탄생으로 인정한다는 입장에 전면적으로 도전합니다. 20세기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던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이 21세기에서는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 [인류의 진화], <14장. 사피엔스의 기원>, 이상희, 2023.


인류의 '기원'이나 '종(種)'의 개념도 필연적으로 깨질 운명의 '과학적 가설'처럼 다시금 재정립된다.

아시아를 거쳐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의 고인류학을 조명한다는 말이 아프리카와 유럽의 고인류학을 대체한다는 것일 수는 없다. 
인류의 '기원'이나 '조상'으로서의 아직 미지의 수많은 종들이 지구의 기후환경 변화에 따라 각지로 퍼지는 과정에 대한 확장된 연구인 것이다. 
아시아는 추위를 피하고 대형사냥감을 쫓아 이동하던 우리 조상들이 한때는 육지였던 북극의 베링해협을 통해 아메리카로 건너가거나 남방의 오세아니아로 내려가던 중간지대였고, 아직은 미약하지만 한반도 지역의 고인류학 연구는 '한민족'의 '조상'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명멸하면서 우리 인류에게 '유전자'를 남긴 수많은 종들을 찾는 작업 중 하나인 것이다.


"'조상'이나 '민족'이라는 개념은 과학적이고 생물학적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것은 사실 '허상'일 뿐입니다. 생물학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문화적 개념입니다. 
한반도의 고인류를 찾고 연구하는 일은 단일민족의 기원을 찾는 일이라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국경이 없던 시절, 바다(서해/남해)가 땅이었던 시절에 지금의 한반도에서 살고 있던 고인류는 '한민족'이 아니라 '인류'였다는 사실을 다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인류의 진화], <19장. 단군의 자손>, 이상희, 2023.


'가설'도 '약속'처럼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가설'을 깨고 다시 세우기 위해 미지의 땅을 계속 발굴해 가는 과정이다.

인류진화사도 그렇고,
이를 연구하는 과학인 고인류학도 그렇다.

***

1. [인류의 진화 - 아프리카에서 한반도까지 우리가 우리가 되어온 여정], 이상희, <동아시아>, 2023.
2. [화석은 말한다 - 화석이 말하는 진화와 창조론의 진실(EVOLUTION : What the Fossils Say and Why It Matters)](2017), Donald R. Prothero, 류운 옮김, <바다출판사>, 2019.
3.  [루시의 발자국](2020), 후안 호세 미야스/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 남진희 옮김, 김준홍 감수, <틈새책방>, 2021.
4.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조현욱 역, <김영사>, 2011.
5. [기후의 힘], 박정재, <바다출판사>, 2021.
6. [로마의 운명(The Fate of Rome)](2017), Kyle Harper, 부희령 옮김, <더봄>, 2021.
7. [지정학의 힘], 김동기, <아카넷>,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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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0-19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설은 깨진다는 과학적 접근에 동의합니다.

beatrice1007 2023-10-19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과학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당최 우길 수가 없잖아요. ^^*
 
초판본 프랑켄슈타인 - 188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메리 셸리 지음, 구자언 옮김 / 더스토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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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확신'에 대한 경고
-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1818.


고등학교 시절에는 토요일 방과 후 친구들 중 빈 집에 떼거지로 몰려가 천원 짜리를 모아서 라면을 사다 끓여먹고 비디오 대여점에서 영화를 빌려봤다. 우리 집은 반지하에다가 어머니가 늘 안방에서 악세사리 같은 걸 만드는 등 부업을 해서 집이 비어 있지도 않았거니와 결정적으로 비디오 플레이어가 없어서 친구들이 몰려올 일은 없었다. 당시 라면은 인당 두 세 개 기준에 비디오는 대놓고 성인물을 빌릴 만한 친구가 없어 남녀 애정행각이 잠시라도 꼭 나오던 '13일의 금요일' 류의 슬래셔 무비를 주로 시청했다.

제목도 기억 안 나고 주제는 더 기억 안 나지만 여배우가 예뻤던 어느 미국 공포영화는 비행청소년 본분에 충실하다가 죽은 여친을 살리기 위해 여기저기 시체들의 쓸만한 부분을 이어 붙여 되살린다는 내용이었는데, 다시 살아난 여친은 정신머리도 없고 자력행동이 불가했음에도 남친이 헌신적으로 애정애정하며 데리고 다니다가 결국 다시 골로 보낼 수 밖에 없던 슬픈 결말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역시 예쁜 여자는 누더기로 부활해도 여전히 예뻐서 비디오가 다 돌아간 후에도 나의 사춘기적 감성에 오래 각인되었다.


"자연철학은 내 운명을 지배했다."
- [프랑켄슈타인], <1-1>, 메리 셸리, 1818.

시체들을 이어 붙여 생명을 (다시) 만든다는 발상은 '프랑켄슈타인'이었다. '90년대 초 당시 나는 드라큘라나 늑대인간 등 유럽의 괴물들과 같이 노는 덩치 큰 괴물로 알고 있었는데 그 이미지는 오락실과 만화 등을 통해 본 대로 초록색 피부에 머리통에는 긴 나사가 관통해 있으며 기럭지가 짧은 누더기 양복이나 멜빵바지 같은 걸 입은 '헐크' 비슷한 거였다. 이런 비슷한 이미지는 1931년 미국 헐리우드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원조라고 한다.

이 '시체접합부활 활극'의 원작자는 19세기 영국의 여성 작가 메리 셸리(Mary Shelley : 1797~1851)다.
영국 3대 낭만주의 시인 퍼시 셸리의 두번째 아내로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기 위해 제네바로 도피행각을 벌이는 동안 친구들과 무서운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영감을 얻어 메리 셸리가 19세가 되던 1818년에 쓴 소설이라고 한다. 세간에는 공상과학 SF 소설의 시조새 정도로 알려져 있다.

18세기 이후 영국 소설은 대부분 주인공의 이름이 바로 제목이었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 같은 소설이 대표적이다. 
'프랑켄슈타인' 역시 주인공 이름이다. 이 소설의 원 제목은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판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인데, '프랑켄슈타인'은 피조물인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창조자, 즉 괴물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제네바 고위직 정치관료의 아들이다. 귀족 가문의 자제인 그는 19세기 초 당대의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아마도 화학 같은 첨단 과학의 태동기로서 당시의 '과학'은 '자연철학'에서 갓 분류되어 나오던 시기 아니었을까 싶다. 어린 시절 우연히 중세 연금술사들의 책을 접하고 이에 심취했던 주인공 빅터는 과학공부를 위해 다른 지역에 가서도 이 연금술사들을 흠모했는데 훗날 비극의 주인공이 된 후 반추하길 부친을 포함한 많은 선생들이 이 중세의 연금술을 '쓰레기'니까 보지 말라는 말 대신 화학과 같은 '현대과학'에 의해 타파된 오래전 '자연철학'임을 상냥하게 지적했더라면 본인은 그런 괴물을 만들지 않았을 거라 변명을 하고 있다.


"게다가 나는 현대의 '자연철학'을 경멸했다. 예전의 학자들이 불멸과 힘을 쫓던 시대와는 너무 많이 달랐다. 당시 학자들의 시각은 현실적으로 헛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원대했다. 하지만 지금은 판도가 확 바뀌어 버린 것이다."
- [프랑켄슈타인], <1-2>, 메리 셸리, 1818.

이게 중세 연금술 '자연철학'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빅터의 주된 생각이었다. 과학자로서 재능은 있어 현대 과학의 성과를 누구보다 먼저 습득했으나, '원대'하게 '불멸'을 쫓던 예전 과학의 꿈을 버릴 수가 없었던 거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으나 아무리 19세기라도 19세에 불과한 어린 소녀가 쓴 소설이라 과학을 다루되 과학적이진 않다. 어떤 원리와 기술로 생명이 창조되었는지 단서 따윈 없다. 그냥 우수한 과학자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어느 11월 밤에 시체 조각들을 이어붙여 생명을 창조했고, 생각보다 추한 몰골의 괴물이 일어난 걸 보고는 대책없이 도망쳐 버린다. 과학이고 뭐고 선택의 기준이 바로 '미(美)'였던 거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추구한 '자연철학'의 본질이 아마도 '미학(美學)'이었나 싶어 나도 모르게 책을 덮고 이중톈의 책  [미학강의(講美學)]를 주문하고 말았다.


"바로 그때 꺼져 가는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내 창조물이 그 누런 눈을 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숨을 거칠게 쉬더니 사지는 경련을 일으키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육과 혈관들이 누런 피부 위로 훤히 내비쳤다. 새까만 머리카락은 풍성하고 윤기가 흘렀으며 이빨은 진주처럼 새하얀 빛이었다. 그러나 그런 화려한 치장은 오히려 허연 눈동자와 창백한 흰자위, 쭈글쭈글한 얼굴, 일자로 쭉 찢어진 시커먼 입술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 끔찍할 뿐이었다."
- [프랑켄슈타인], <1-4>, 메리 셸리, 1818.

세부적이지는 않아 또렷하세 이미지화 될 수는 없지만 원작에서 그려진 괴물의 형상은 동양인의 특징인 누런 피부에 검은 머리, 부분부분 아주 좋은 시체의 재료들을 골라서 모았다지만 합쳐보니 결국 무섭고 일그러진 얼굴에 불균형하게 긴 팔과 덩치 등으로 묘사된다. 더욱 놀라운 건 이 피조물이 도바리 치는 창조자 빅터를 쫓아 초인적인 신체능력으로 산과 바다를 넘고 건너며 전 유럽을 헤집고, 믿을 수 없는 지능으로 단 몇 달만에 인간의 언어와 글을 익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이나 존 밀턴의 [실낙원] 등을 독파하며 삶과 죽음, 인생을 자신의 창조주 앞에서 상당히 유창하게 논하게 된다는 거다. 
빅터는 여친 괴물을 하나 더 만들어주면 그녀와 함께 남미의 미개척지로 가서 아예 속세를 떠나겠다는 자신의 피조물의 말에 설득되어 그의 여친을 새로 만들기 위해 제네바에서 영국까지 건너가기도 하지만, 한참 만들던 중 이내 정신차리고는 작업을 중단하면서 괴물의 분노를 사게 되고 그 결과 영국행에 동행한 절친을 잃기도 한다.

창조주 빅터가 어디에 있건 그의 가족과 친구, 연인을 차례로 죽이며 그의 앞에 나타나는 괴물에게 빅터는 불타는 증오와 복수심으로 저주를 퍼붓고 죽기살기 결판을 짓기 위해 도망치는 괴물을 되쫓길 반복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 초인적인 괴물이 그런 빅터를 쫓는 형국은 변함이 없다. 
프로메테우스가 인류를 창조하고 불을 주었지만 이 불은 유용하면서 위험한 것처럼, '현대판 프로메테우스'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이 생명체는 초인적인 능력을 지녔음에도 너무도 몰골이 추해서 인간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면서 그 잘난 초인성을 썩히고 있는 것은 물론 오히려 살인이라는 악행으로 몰린다.

괴물이 원래 악마였는가, 아니면 배척과 고립, 그리고 못생겨서 미움받았기에 악당이 되었는가 되짚어보면, 원래 선한 생명이 왕따를 당해서 악당이 된 게 맞다. 
과학이고 뭐고 원초적 기준은 역시 '외모'인 슬픈 현실이다.

소설은 자신의 피조물에게 복수를 하지 못한 채, 실은 그 괴물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다가 죽음을 맞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비극으로 끝난다. 그의 주검 앞에 나타난 괴물은 이제 자기의 할 일은 다 했으니 세상의 북쪽으로 가서 셀프 화형으로 자살을 하겠다고 선언하고는 사라진다.
창조주나 피조물이나 서로 거울 같이 살던 두 주인공 모두의 파멸이 소설의 결말이다.


오래 전 '시체접합괴물'이라도 예쁘면 용서하던 나는, 공상과학소설의 '고전'이라는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이제야 읽고는 무엇을 다시 잔상으로 남겼던가.

어떤 이는 인간세상은 물론 창조주로부터도 배척당한 괴물의 모습에서 소외된 '여성성'을 보기도 하고(같은책, <작품 해설>), 세간에는 '과학' 발전에 대한 맹신은 비극을 낳을 수도 있다는 평도 많다지만, 고전을 읽은 독자로서 내 생각은 인간의 '확신'에 대한 경고였다.

당시 최신 과학에 정통했지만 '원대한 불멸의 힘'을 바라던 '자연철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확신', 즉 완벽한 신인류를 창조할 수 있다는 망상적인 그 '확신'이 괴물을 창조했고, 신체적으로나 지능적으로 초인성을 '확신'하게 된 괴물은 본인을 저버린 창조주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파멸로 몰아 너도 죽고 나도 죽는 비극을 낳고 말았다.

그래서,
'과학'이고 뭐고, 
'미학(美學)'이고 뭐고,
'확신'은 뜻하지 않게 망상 또는 비극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고전소설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읽는다.

***

-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판 프로메테우스](1818), Mary Shelley, 구자언 옮김, <더스토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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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16 : 안사의 난 이중톈 중국사 16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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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治' ; 興 百姓苦, 亡 百姓苦
- [안사의 난], 이중톈, 2016.


"그 상황은 실로 '흥해도 백성은 고생이고 망해도 백성은 고생이다(興 百姓苦, 亡 百姓苦)'라는 말과 딱 맞아떨어졌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낙양 '민중'의 고난은 사실 '제국'의 미래가 순탄치 못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단지 당사자들은 아직 그 점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들은 잘못된 길로 계속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한 문명이 부패하다가 완전히 몰락할 때까지."
- [안사의 난], <3장. 반란의 전말>, 이중톈, 2016.


이제 기원전후 수백년을 거쳐 세계지도 위 동서양 '데칼코마니'를 찍던 [두 한나라와 두 로마]를 지나 왔으니, 중국 통사 시리즈의 기획자 이중톈의 '전공'인 '제2제국'의 절정 '당(唐)'나라 '제국'을 다시금 돌아볼 때가 되었다.

유발 하라리처럼 이중톈 역시 인류의 역사에서 '제국'이라는 정치체제와 국가제도를 높게 평가한다.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목적이 있기에 실로 직접 지배할 수 없는 광대한 영토에 폭압만이 아닌 관용을 베풀었고 '전투에서는 져도 전쟁에서는 이기는' 넓은 품으로 다양한 문화를 '용광로'처럼 녹여내며 결과적으로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빅히스토리' 역사가 유발 하라리는 '제국' 일반으로, 중국 역사가 이중톈은 '제1제국' 한나라와 로마와의 비교를 거쳐 궁극의 '제2제국'인 [수당의 정국]으로 말이다. 이후 송나라와 같은 대제국의 기반은 이중톈에 의하면 이른바 "문화의 항공모함"([수당의 정국], <5장>)으로서 관용과 포용을 갖춘 '당' 제국이었다.

그러나 당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든, 당현종 이융기의 '개원의 치'든 이 모든 빛좋은 '제국의 치(治)'는 쇠락으로 향하기 전 잠깐 빛나던 찰나였고 그나마 다수 민중의 고생은 변함이 없었을 터였다.

그리하여,
증국 속담 '興 百姓苦, 亡 百姓苦', 
즉 '흥해도 백성은 고생이고, 망해도 백성은 고생'이라는 말은 역사의 진리다.
적어도 '황제'와 '제국'이 살아 있는 한.

"그때 거의 모든 사람이 안녹산이 곧 반란을 일으키리라는 것을 알았다.
단지 현종만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는 모든 조짐을 양국충과 안녹산의 갈등 탓으로 돌렸고 그것이 어쨌든 둘이 작당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행정, 인사, 재정의 권력을 독점한 양국충과 제국 최고의 무력을 갖춘 안녹산의 대립이 장차 '제국'의 분열을 초래하리라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 [안사의 난], <2장. 잠재된 위기>, 이중톈, 2016.


적어도 근대 민중민주주의와 현대 공화정체제가 정착되기 전까지 '제국'의 중심인 '황제'는 '공공성'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한 번 정당성을 얻은 왕조를 멸하고 새 왕조를 열기 위해서는 그 '공공성'을 보증받을 명분이 필요했다. 대부분 '천명'을 조작했지만 그 모든 시작은 '제국' 내부의 모순이었고 과정은 다수 농민반란이었으며 결론은 '천하' 즉 '공공성'을 훔치는 '찬탈'로 귀결되었다.

무측천의 사후 왕자 이융기는 권력 주변 여인들을 연달아 살해하고 다시금 당나라를 재건한다. 20대 후반의 이융기가 당나라 현종이 되어 713년부터 약 20년간 연 '개원의 치'다. 처음의 그는 자신의 측근인 요숭, 송경, 장열과 우문겸 등의 재상을 두루 등용하며 그 동안 정체된 제국의 제도를 혁신하기도 했다. 

그러던 당 현종이 며느리였던 '양귀비'(양옥환)를 온천탕으로 끌어들인 것이 740년이었다. 2년 뒤 연호는 '개원'에서 '천보'로 바뀌었고 이듬해 '천보의 난'의 주역 소그드인 이민족 장수 '안녹산'(알락산;빛)이 입조했으며 양귀비의 먼 친척오빠 '양국충(양소)'이 세족의 권신 이임보의 뒤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양귀비', '양국충', '안녹산' 이 세 사람에 의해 당 제국은 멸망의 길로 치달았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 중심은 '제국'의 '황제', 당 현종이었다.

"이세민과 이융기, 앞뒤로 시차가 100년 정도 나는 이 두 이씨 황제는 아주 비슷한 경력을 가졌다. 두 사람 모두 맏아들이 아니었지만 정변에 성공하여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한때 '정관의 치'와 '개원의 치'라는 찬란한 역사를 연출했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라면 이세민은 50을 갓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반면, 이융기는 78세까지 장수했다는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이세민의 단명은 '명군'이라는 그의 영광스러운 호칭을 보전시켜 주었지만, 그보다 20년 이상을 더 산 이융기는 그 시간 때문에 '명군'에서 무도한 '혼군'으로 바뀌어 전형적인 이중 인물이 되고 말았다."
- [황제들의 중국사], <당 현종 이융기, 양귀비를 죽인 냉혹한 카사노바>, 사식, 2004.


26세에 기치를 들고 29세에 혁신군주가 된 당 현종이 50대 후반이 되었다. 수양제와 기질적으로 닮았고 찬탈 배경도 비슷했던 당 태종 이세민은 상대적으로 일찍 죽어 그나마 '정관의 치'로 기록되었지만 그 나이보다 더 산 당 현종 이융기는 예쁜 며느리를 강탈해서 '양귀비'로 삼았고, 도박을 잘한다 하여 건달 '양국충'에게 '제국'의 재정을 맡겼으며, '제국'의 '포용'이나 '관용'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중앙권력 견제를 막기 위해 이민족 장수를 기용하자는 양국충의 건의에 따라 민족간 국제 브로커 '안녹산'과 그의 사기공범 사사명을 중용했다. 
실로 '양귀비'는 현종을 정치로부터 멀리 떼어 놓았고, '양국충'은 중앙정치 독점을 위해 공을 세우는 변방장수들을 내쳤으며, 북동서 일대의 '3진' 절도사가 된 '안녹산'은 거란과 실위, 해족 등 북방민족과 없는 전쟁을 만들면서까지 공로를 조작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공공성'과 무관하게 부정과 부패로 지방권력을 전횡하는 절도사와 변방의 무력을 배제하면서 당시 유일 '공공성'의 상징인 '황제'를 고립시킨 환관권력 등을 키운 국가경영에 무능한 중앙권력의 시작은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 즉 '안사의 난(安史之亂)'이었던 것이다.

안사의 난은 비록 755년부터 763년까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진압되었지만, 중앙권력은 고립되고 지방권력인 절도사 군벌세력은 독립했다. 회흘족 같은 소수 이민족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산동의 소금장수 왕선지를 이은 황소의 농민반란군이 '황금갑옷'을 두르고 당 제국 수도 장안을 점령했다.

"사실 태종부터 현종까지, 심지어 무측천의 시대에도 '제국'의 꿈은 줄곧 세계의 중심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꿈을 가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장안은 로마와 마찬가지로 한때 세계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단지 전자는 동양의, 후자는 서양의 수도였을 뿐이다.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라고 장려한 것은 그 꿈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 [안사의 난], <5장. 당시의 정신>, 이중톈, 2016.


그러나 당제국을 멸망시킨 자는 황소가 아니었다. 그의 수하였던 주온이 황소를 배신하면서 '황제'에 붙어 반란의 진압에 협조했고 반란군 지도자 황소는 '혁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자결했다.

당 제국으로부터 '주전충'이라는 이름을 얻은 주온은 제국의 절도사가 되었고 중앙권력의 환관과 사대부를 전부 몰살시키면서 '황제'도 갈아치웠다.
[오대사] 등의 기사에 따르면 최고의 '살육 황제'였던 '후량 태조' 주전충은 당 제국을 멸하고 '5대10국'의 시대를 열었지만 너무 잔혹한 나머지 아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태평천국운동이 '전공'인 중국 역사가 사식(史式)이 쓴 [황제들의 중국사](2004)에 의하면, '후량 태조' 주전충이나 당 현종 이융기 같은 인생 궤적은 거의 모든 '황제'들의 보편적 본질이다.


"중국 역사상 '황제' 제도는 정말이지 가장 황당한 제도였다. 수많은 직업들 중 어떤 직업에 종사하건 일정한 자질과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로지 '황제'라는 직업은 아무런 자질이나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누구든 쫓아가 빼앗으면 그만이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장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라도 빼앗아 손에 넣기만 하면 모두들 납작 엎드려 만세를 부르며 섬기려 들었다.
중국 역사서 중 특히 '기전체' 역사가 가장 웃긴다. 그 자가 부랑아가 되었건 도적놈이 되었건 부모형제도 몰라보는 빌어먹을 놈이 되었건 용좌에 단 며칠, 아니 단 몇 시간이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으면 사관은 즉시 '제(帝)'니 '상(上)'이니 하는 존칭을 갖다 붙이면서 하늘과 땅에 버금가는 덕을 가진, 고금에 둘도 없는 거룩한 분이라며 공적을 칭송한다... 이에 따라 주온 같이 짐승 축에도 끼지 못할 물건조차도 '황제'로 인정하여 '후량 태조'([구오대사], <양서>, '태조기')로 불러야 하니, 이것이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 [황제들의 중국사], <후량 태조 주온, 황제가 된 살인마>, 사식, 2004.


당제국을 쇠망케 한 '양귀비'와 '양국충', '안녹산'과 '사사명'을 이용하고자 권력투쟁의 한복판으로 중용한 자는 '제국'의 '황제', 당 현종 바로 자신이었다.

'살인마 황제' 주전충을 기용한 자도 당나라 '제국'의 '황제'였다.

또 다른 관점으로,
흥하거나 망하거나 민중들만 고생시키는(興 百姓苦, 亡 百姓苦) '제국의 치(治)'는,
현대의 '공공성'인 '민주주의' 또한 지나친 신화화를 경계해야 하는 다른 한편의 반면교사일 수도 있겠다.

***

1. [안사의 난(安史之亂)], 이중톈 중국사 16](2016),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3.
2. [황제들의 중국사](2004), 사식, 김영수 옮김, <돌베개>, 2005.
3. [두 한(漢)나라와 두 로마(Roma) - 이중톈 중국사 9](2014), 이중톈, 한수희 옮김, <글항아리>, 2016.
4.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5. [남조와 북조 - 이중톈 중국사 12](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0.
6. [수당의 정국 - 이중톈 중국사 13](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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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9 : 두 한나라와 두 로마 이중톈 중국사 9
이중텐 지음, 한수희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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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양자역학'과 '데칼코마니' 제국문명
- [두 한나라와 두 로마], 이중톈, 2014.


"중화와 로마는 '신본(神本)'이 아니라 '인본(人本)'을 따랐다. 그랬기 때문에 중화는 '예치(禮治)'를, 로마는 '법치(法治)'를 발명했다. '법치'든 '예치'든 둘 다 '인간의 자치'였고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았다.
...
한(漢)나라의 공헌은 중화 제국의 기초를 닦은 것이었다... 두 개의 한(漢)나라는 '군주제도'의 표본이다.
로마(Roma)는 현대 국가에 원형을 제공했다... 사실상 '공화제'와 '법치'를 견지하면 시민 민주주의든 입헌군주든 현대 문명이다. 이것이 로마의 공헌이다."
- [두 한나라와 두 로마], <저자 후기>, 이중톈, 2014.


중국의 역사학자이자 대중저술가인 이중톈(易中天)은 역사를 '추리소설' 기법으로 풀어낸다. 사실 '역사학자'는 문헌이나 유물 등의 단서를 가지고 해당 시대의 사건과 인물 등을 추적하고 조사하며 추리하여 인과관계를 밝히는 일종의 '탐정'이다. 여기에 더해 이중톈의 장점은 역사라 하여 학술적이거나 장황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 만연체의 대가인 나라면 이야기를 더 늘어놓을 텐데, 이중톈의 역사 '추리'는 간략하다.
즉, 군더더기 없이 할 이야기만 적는다.

이미 2006년에 [삼국지] 이야기(국역은 [삼국지강의])로 중국 전역에서 선풍을 일으킨 이중톈은 현재 총 36권의 얇은 책으로 선사로부터의 중국 통사를 쓰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16권까지 번역되었는데, 36권은 총 6부에 각 부당 6권씩 배정되어 '6x6=36'이라는 고전적인 '36계' 구조를 갖추려는 듯 하다. '완전한 수'인 '3의 배수'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에게 '36'은 각 개별단위들의 교차와 조합으로 사실상 '무한'을 의미한다고 나는 본다.

사마천이 [사기]를 통해 '삼황오제'부터 계보를 갖춰 온 이래 2천 년간 이어진 역사관 대로 약 1만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1부 '중국의 뿌리'로부터 아마도 '일대일로'의 현대 중국까지 기획하고 있으리라. 

뻔한 남의 나라 역사 이야기를 다 읽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 흥미로운 작가 이중톈의 '전공'이라는 '수(隋)-당(唐)' 제국 이야기는 궁금했다. 뛰어난 글솜씨로 중국 '정사'들에 실린 이야기를 아주 간략한 요점으로 정리해내는 이 중국의 실력자가 자신의 '전공'을 어떻게 풀어내는지 말이다. '수-당' 제국을 알기 위한 사전 지식으로 '위-진 남북조'에 관한 책까지 덤으로 읽은 이유다. 

역시 이중톈은 나 같은 글쓰기 생초보는 흉내낼 수 없는 실력으로 독자대중에게 중국 '정사'들을 읽어주고 있었다. 추리소설처럼 마냥 읽다보면 어느새 [사기]나 [한서] 및 [후한서]와 [신/구당서] 등의 해당 시기 기전체 '정사'들의 <열전> 내용이나 편년체 [자치통감]의 그 시기 기사들을 읽는 셈이 되었다.

그럼에도 저자가 중국인인지라, '중화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의 '전공' 당나라 제국은 '제1제국'인 '진(秦)-한(漢)' 시대에 이어 '제2제국'으로 불리지만, 36권 이중톈 중국 통사 시리즈 '3부'의 표제는 '제2제국'이 아니라 '세계문명권'이다. 즉, 중국은 당나라에 이르러 완연한 '세계문명'을 완성했다는 시각인데, 역사란 힘있는 자의 서술과 해석일 수도 있기에 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그의 관점에 따로 논평을 할 수는 없다. 
일면 맞기도 하나 다 인정하기에는 한반도의 '소수민족'으로서 한편으로는 석연찮기도.

이중톈에게 중국의 '세계문명'적 형태는 당나라에서 갑자기 얻어진 것이 아니다. 바로 기원전부터 지속된 통일제국 '한(漢)'나라가 본격적인 기원이다. 
최초의 '제국'은 진시황이 열었지만 진(秦) 제국은 폭정으로 인해 단명했고 한고조 유방의 한나라 제국은 전한과 후한을 거쳐 4백년 동안 유지되었으므로 '세계문명'적 보편성을 부여받은 것이다.

'두 한나라'로 지칭된 한고조 유방의 전한과 광무제 유수의 후한은 중앙집권적 '군주제도'의 보편적 표본의 시작이었다는데, 역시 석연치 않다. 세계 최초의 '제국'인 서아시아의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는 폭정만 일삼아서 그렇다 쳐도 그들에 이은 '페르시아' 제국의 '관용'도 있었고, 그 외 개인의 '자유'를 외친 그리스 민주정 같이 제국과 다른 국가제도도 있었기에 '군주'의 '제국'이 '세계문명'을 대표하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중톈 역시 유발 하라리처럼 인류 역사에서 '제국'이 가장 효율적인 국가제도로 보고 있다.


"후한 환제 연희 9년(기원후 166), 즉 조조가 11세였던 해에 외국 사절단이 낙양에 왔다. 그들은 상아, 무소뿔과 거북 껍질을 가지고 와서 낯선 제국에 숭고한 경의를 표했다([후한서], <서역전> 참고)..
이들이 얼마나 오래 걸어왔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분명히 쉽지 않았을 것이다. 멀리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라서 당시의 중국인들은 해서국, 이간이라 불렀고 후한의 공식 역사책에 기록된 명칭은 '대진'이다.
'대진'은 바로 '로마'다.
파견된 사절단의 '대진왕 안돈'은 로마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였을 가능성이 높다."
- [두 한나라와 두 로마], <1장. 세계 - 로마인이 왔다>, 이중톈, 2014.


그렇기에, 이중톈은 유럽의 '로마(Roma)'를 끌어들여 세계지도의 동쪽은 중국의 '두 한나라(전한-후한)'와 서쪽은 유럽과 서아시아의 '두 로마(서로마-동로마)'로 놓고 세계사의 '데칼코마니'를 만든다.

비슷한 시기, 
전후로 나뉘고 동서로 분할되는 중국 한나라와 유럽 로마의 비교다.
두 제국의 차이점은,
중국은 유학의 '예'로써 국가를 다스렸기에 중앙집권적 군주제의 '표본'을 만들었고 주기적 폭정과 농민반란으로 왕조가 교체되기는 했지만 대개 '인의'와 '덕치'로 집권했다는 것과,
로마는 공화제의 신념으로 황제들조차 구속하며 시민의 권익을 향상시킨 '법치'의 전통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 두 문명의 공통점은,
창조주나 유일신을 배제한 '인간의 자치'였다는 것인데,
이중톈에 의하면,
한나라는 '유학'의 '무속화'로 인해 망했고,
로마는 '기독교'의 '유일신'에 의해 쇠락했다.
즉,
후한의 건국자 광무제 유수가 칼을 내려놓고 '문치'를 확립하며 후한 개국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겉으로 내세운 '도참사상'은 중국 역사에서 뿌리깊은 '도가' 사상과 결합하여 후한 말기 황건 농민군의 지도 이념이 되었다. '무속화'된 한나라 정치가 '종교화'된 농민반란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로마 황제권 확립을 위해 국교로 공인된 '유일신' 사상의 선구자 '기독교'는 신처럼 무소불위가 되고자 했던 로마황제를 무릎 꿇리며 결국 로마 자체를 잡아먹었다.
이 두 제국의 '세계문명'은 4~5세기 소빙하기를 거치면서 이민족과의 결합을 통해 세계사를 또 한 단계 발전시키게 되는 점에서 또 한 번 '양자역학'적 '데칼코마니'를 그려낸다.
중국은 위촉오 [삼국지]와 서진 '팔왕의 난'을 거쳐 '5호16국'의 역동으로, 
로마는 '동로마' 비잔틴으로의 문명확대를 한편으로 서유럽은 '게르만'의 열국으로,
세계지도의 좌우 '데칼코마니'를 찍어낸다.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 2부 '제1제국' 중 9권 [두 한나라와 두 로마]의 주제는,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5세기 세계사의 '양자역학'과도 같이 서로 직접적인 접속이나 영향이 없었음에도 다른 듯 닮은 양대 거대 제국의 필연적 종말이다.

시리즈를 다 읽을 마음은 없지만 한나라 '제국'의 전통을 이은 이중톈의 '전공'인 '세계문명' 당나라의 쇠망을 다시 한 번 읽을 차례다.

그래서 다음은,
무측천 쿠데타는 별 관심은 가지 않으니,
시리즈의 3부 '세계문명권'의 16권,
8세기 안녹산과 사사명의 반란,
[안사의 난] 이야기다.

***

1. [두 한(漢)나라와 두 로마(Roma) - 이중쳰 중국사 9](2014), 이중톈, 한수희 옮김, <글항아리>, 2016.
2. [안사의 난 - 이중톈 중국사 16](2016),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3.
3.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4. [남조와 북조 - 이중톈 중국사 12](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0.
5. [수당의 정국 - 이중톈 중국사 13](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1.
6. [삼국지강의(品三国)](2006), 이중톈, 김성배/양휘웅 옮김, <김영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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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재전쟁 - 왜 위나라가 이기고, 촉나라는 패하고, 오나라는 자멸했는가!
와타나베 요시히로 지음, 노만수 옮김 / 더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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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된 '이념'
- [삼국지 인재전쟁],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오늘날에도 흔히 쓰이는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對策)'라는 유명한 말은 '인맥'에 의해, 또한 '국가권력'에 의해 되풀이되는 강권통치 발동에 맞서온 중국인의 지혜인 셈이다.
이렇듯 '인맥'은 '삼국지' 시절이라는 아주 먼 옛날부터 형성되어 왔다. 그리고 순욱이나 제갈량이 조조와 유비와 대치하는 상황부터, '군주'에 대해 자율적 권위를 가진 '귀족'이라는 유구한 중국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지배층이 형성되기 시작한 때, 그것이 [삼국지]의 시대였다."
- [삼국지 인재전쟁], <에필로그>,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중국의 '꽌시'가 있다.
'관계(關係)'다.
우리의 '인맥'과 비슷하나, 중요한 건 실질적으로 맺어진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연', '지연', '혈연' 등의 실질적 '관계'가 그것일 게다.

중국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민주주의'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천하통일'을 지향하는 강력한 제왕적 국가권력 아래 종속되어 온 지 역시 수천 년이기 때문이리라.

알고보면 천하를 훔친 가장 큰 '도적'인 '황제'가 '하늘'이었고, 고대로부터 '공공성' 그 자체였다. 
다수 민중들은 물론 지배계급들도 이 '천자'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세월이 또 몇 천 년이다.
'민주주의'를 실현한 지 반세기도 안되는 우리 역사 또한 다르지 않았다.

'상유정책 하유대책(上有政策下有對策)'은 중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의 공통사항이다.
강권적인 권력이 '정책'을 내리면 다수 민중들은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운다.
현대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로 표현될 수 있겠다.


1.

"인간관계(인맥)는 '중국의 기본'이다. 그리고 인사는 만사의 기본이다... '인맥 형성 방식'(1장)... '국가의 관료제도 구조'(2장)... 위나라는 '혁신'(3장), 촉나라는 '전통'(4장), 오나라는 '지역'(5장), 진(晉)나라는 '제도화'(6장)에 서술의 중점을 두었다."
- [삼국지 인재전쟁], <프롤로그 : 인재와 인사는 만사의 근본이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일본의 '삼국지' 전문 역사학자 와타나베 요시히로는 중국의 삼국시대 역사 속에서 위-촉-오 삼국을 거쳐 천하통일을 이룬 서진(西晉)의 '인재전쟁'을 분석하였다. 원제가 [삼국지 인사] 정도 되는 듯 한 이 책의 국역본은 [삼국지 인재전쟁](<더봄출판사>,2023)이다.

저자는 중국의 삼국시대 '학연'과 '지연', '혈연(혼인)' 등 '인맥'의 관점에서 당시 국가 시스템과 각국의 '인사'를 분석하는데, 정리하면 조씨의 위나라는 유교적 허위에 대항한 조조의 '혁신' 이념, 유씨의 촉은 한나라를 부흥하려는 제갈량과 유비의 '전통' 이념, 손씨의 오나라는 강동에 웅크린 '지역주의', 그리고 사마씨의 진나라는 귀족서열의 '제도화'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2.

"이처럼 '명사(名士)'가 '문화자본'에서 유래한 권위를 배경으로, 사회통합의 기능을 맡은 경우는 후한 말기에 많이 나타난다. 후한의 관치와 향거리선(관리추천제도)으로 유지되어 온 지역사회의 질서는 후한 말기에 이르러 호족의 지지를 받은 '명사'들이 도맡게 되었다. 조조를 비롯한 군웅들이 '명사'를 데려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이유이다."
- [삼국지 인재전쟁], <2장. 국가 시스템과 출세의 사다리>,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진수의 정사 [삼국지]든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든, 당시의 난세를 헤쳐나가던 영웅들에게는 '명사(名士)', 즉 '세상에 이름난 선생'이 있었다.
후한 말기 환관세력이 국정을 농단하던 시기에 이를 비판하며 유학자 선비들은 [경학]을 근거로 서로의 명성을 빛내주었다. 이들은 깨끗하다 하여 '청류'라 불렸고 반면 환관권력의 청탁으로 출세한 자들은 '탁류'가 되었다. 

이 '명사'들의 '이념'은 공자와 맹자의 '유학'이었다. 한나라 시절 관리 선발제도였던 '효렴'이라는 제도는 조상과 부모를 공경하는 '효'와 청렴한 '렴'의 기준으로 추천받는 제도였기에, 후한 말 부패한 세상에서 '청류' 재야운동권들은 유학이라는 전통적 이념을 다시금 세우고자 했고, 이들이 서로서로 '학연'과 '지연', 나아가 '혈연'을 이어가며 '명사'가 되었다.


"이처럼 조조는 '명사'와의 알력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때마다 인사기준을 '유재시거(唯才是擧)'를 선포하며 '반유교주의'를 명확히 선언했다
...
위나라 문제와 명제는 유교에 대한 조조의 강한 도전을 계승하지 못했다. 유교는 그 정도로 강력하고 강인하고 끈질겼다. 조위가 사마씨에게 권력을 장악당한 것은 문제, 명제가 빨리 죽은 것만이 원인이 아니다. 문제도 명제도 '시대의 변혁자' 조조의 위대함을 이어받거나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삼국지 인재전쟁], <3장. 위나라, 시대를 변혁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조조도 젊어서 이 '청류' 운동권 학생이었지만, 그는 출사하여 직접 세상을 바꾸고 싶었기에 환관이었던 양할아버지 조등의 후광을 활용하여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곧 황건농민반란의 난세를 맞았다. 그 나름의 '혁명'과 '개혁'을 꿈꾸는 과정에서 당대 최대의 세족이었던 '여남 원씨' 원소와 대결하기 위해 조조는 많은 '명사'들의 지지를 모았고 그의 책사 중 최고의 선비 순욱은 역시 당시 강력한 가문이었던 영천지역의 '여남 순씨'였다. 조조에게 후한 황제를 영천군 허현(허도)으로 옮겨와서 황제를 끼고 최고 권력자가 되라는 대책을 낸 순욱이라는 책사가 필요했고 그의 순씨 가문 인맥은 조조에게 더욱 중요했다. 
조조 정권은 조씨와 원래 성인 하후씨 집안의 무력과 순씨 세력의 '이념'을 결합하여 난세에 '혁명'을 하고자 했으나, 한나라 황실 부흥을 바라던 순욱의 '이념'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조조의 '혁명'과 맞지 않았다. 
결국, 조조는 "나의 장자방(장량)"이라 칭하던 순욱을 숙청하고 만다.

위선적인 '효도'와 '청렴'을 부정하고 극복하려던 조조는 순욱과 같은 유학자 '명사'들을 숙청하면서 '오로지 능력 위주로 등용한다'는 '유재시거(唯才是擧)'를 내걸고 인재를 구한다. 
그러나 '창업'과 '수성'은 다르다. 조조(위무제)의 아들 조비(위문제) 이후로는 위나라 제국의 통치 이념으로서의 유학을 극복할 수 없었다.

'혁명'이 끝난 곳에서 '멸망'은 시작된다.


"제갈량을 맞이하기까지의 유비 집단은 이러한 (도원결의) '의리'를 핵심으로 한 강력한 '용병집단'이었다... 이리하여 유비는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책사로 맞이하고, 이를 계기로 '형주 명사집단'에 가입함으로써 자신의 집단을 '의리'로만 결속시킨 용병집단에서 제갈량 등 '명사'를 핵심으로 하는 정권으로 환골탈태시키는, 즉 질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힘겨루기와 대립은 다르다. 제갈량과 유비가 대립하고 있었다면 조조가 순욱을 죽인 것처럼 제갈량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제갈량과 유비는 '한실부흥'이라는 최종목적이 완전히 일치했고, 서로 굳게 신뢰하고 있었다. 다만, 어떻게 한(漢)나라를 부흥 시킬 것인지? 그 수단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 [삼국지 인재전쟁], <4장. 촉나라, 전통을 계승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유비는 조조와 달랐다.
큰 전공이나 세력 없이 원소와 조조, 유표 등의 군웅들에게 빌붙다가 익주라는 최변방에서 백만명도 안되는 인구로 촉한 황제가 되었으니 전투에는 소질이 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실은 한나라 황실의 후예로서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처럼 다시 한 번 한나라 황실을 부흥한다는 거창한 이념을 뒷받침해줄 배경이나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지, 유비는 진수가 말한 '백절불요', 백 번 꺾여도 주저앉지 않는 불세출의 영웅이며, [삼국지 인재전쟁]의 저자 와타나베 요시히로에 의하면 '전투도 잘했다'고 한다.

유비는 본질적으로 소규모 '용병집단'의 대장이었다. 푸틴에게 도전했다가 비명횡사한 프리고진처럼 애초에 조조, 원소, 유표나 심지어 여포에게 조차도 비할 수 없었지만, 제갈량의 형주 지역 '명사' 집단을 만나면서 '촉한정통론'의 이념을 비로소 구체화할 수 있게 된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는 삼국의 정립이 아니라 이를 통한 천하통일이 목표였기에, 유표 사후 형주를 차지한 유비는 본격적으로 천하통일을 도모한다.

물론, '의리'로 뭉친 난세의 용병대장으로서 유비의 최후 또한 관우의 복수에 바쳐졌지만, 제갈량은 조자룡과 달리 유비의 오나라 정벌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단다. 아마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책의 저자 요시히로의 말처럼 유비의 전투력을 믿은 당시까지는 전투실전 초보자 제갈량의 형주 탈환 도박이었을 수도, 아니면 내가 보기에는 유비라는 걸림돌 없이 제갈량이 촉한의 전권을 장악하여 북벌을 이루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제갈량은 조조 같은 대군벌의 휘하에서는 자신의 이념을 실현시킬 수 없음을 알았고, 자신의 고향은 아니지만 '학연'으로 엮인 형주 지역 '명사'들과 '지연' 및 '혈연'을 맺고 '와룡'이 되어 영웅을 기다렸다. 여기에 걸린 게 유비였을텐데, 어쨌든 유비와 제갈량의 '천하통일 이념'은 같았던 것이다. 제갈량은 유비가 '천하삼분지계'의 요충지였던 형주를 딛고 서쪽 파촉 지역의 익주로 가서 황제가 되기까지 '형주 명사'를 주력으로 '익주 명사'까지 조율하며 죽을 때까지 분연히도 북벌을 시도했다.

유비가 조조와 달리 '명사'를 탄압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했던 배경이다.


"보통은 그곳(남방)에서 발달한 한민족 문화가 북방민족(5호)이 건국한 북조문화와 다르기에 '육조(손오-동진-송-제-양-진)' 문화라고 부른다... 지역에서 생존한 손오의 존재형태가 이렇게 손오를 기원으로 간주하는 '육조(六朝)'라는 개념을 형성해 갔다.
...
(손오는) 군주권력 강화로 이어질 법한 조조와 같은 혁신적 정책이나, 제갈량처럼 조씨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통해 한(漢)나라를 지키는 정책을 제시한 적은 없었다. 즉 육손은 '강동'이라는 지역을 위해 살았다."
- [삼국지 인재전쟁], <5장. 오나라, 지역과 함께 생존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강동의 손씨 오나라는 그냥 '지역주의'다.
한참 후 '5호'라는 이민족들이 다채롭게 교차하던 북조 문화에 밀려 남조가 비로소 '중화'의 일부로 인정되기까지 이 남방 '6조'의 기원이 손오라고 한다. 하지만 삼국시대 강동의 오나라는 변방의 지역 소국에 머물고자 했지 위나라와 촉나라처럼 천하통일을 꿈꾸지 않았다. 강동지역 '명사' 사회는 물론 군부의 주축인 적벽대전의 주역 주유와 육손도 장강 이북을 넘을 생각이 없었고, '원조 천하삼분지계'를 주장했던 강동의 지식인 노숙의 목적도 '삼분'이었지 '천하통일'은 아니었다.

결국, 손권 사후 서진이 강동을 쳐들어온 후에야 '지역'을 넘어서고자 깨달았던 오나라 '지역' 인재들은 대부분 그냥 남방 '6조'의 원조로서 남고 말았다.


"후한에서 삼국 시대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연결되었던 '인맥'은 이렇게 해서 '혼인' 관계를 통해 고착화되었다. 바꿔 말해서 '인맥이 귀족제라는 제도로 조직화'되어 갔다고 해도 좋다. '명사'의 시대였던 삼국 시대와 '귀족제'의 시대가 된 서진 시대의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
요컨대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는 다가올 서진의 성립을 위해 '공-후-백-자-남'이라는 계층제로 이루어진 '오등작(五等爵)'의 수여를 통해서 귀족과 군주권력의 긴밀성을 표현하고, '귀족'을 국가 신분제로 서열화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국가 신분제를 '귀족제'라 부른다... 사마소는 '귀족제'를 형성함으로써 군주권력과의 거리를 통해서 '귀족'들을 서열화하고, 그 '자율성'을 박탈하려고 했던 것이다."
- [삼국지 인재전쟁], <6장. 서진, 조직을 제압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사마의는 어릴적 난세의 피난길에서도 유학 경전을 공부하며 자란 '명사'였지만, 난세에 태어난 그는 조조와 순욱, 유비와 제갈량 같은 선배들과 달랐다. 사마의에게 유학적 혁신이나 전통 따위는 자기 가문 생존의 부속물이었다. 그는 출세와 가문의 생존을 위해 주로 '혼인 관계'를 이용했다. 아들의 배우자는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갈아치웠고, 이후 사마사와 사마소라는 아들 둘을 거쳐 손자 사마염이 건국한 진나라는 이 가문들을 황제의 절대권력 아래 '귀족제'로서 서열화시켰다. 

지방 호족의 '지연'이나 '명사'의 '학연'의 시대는 가고, 사회계급은 귀족들의 혼인과 '혈연'으로 '제도화'되었다.

그냐마 수천 수백 년간 군주의 절대권력에 대하여 할 말은 하고 견제도 하며 '자율성'을 유지해 온 '명사'들의 이념이 사마씨 서진의 '귀족제'로 인해 절대권력에 수렴되었다.

이후 유학에 노장사상을 버무린 추상적인 '현학'을 논하며 부채들고 화장이나 하고 다니다가 술이나 약에 취해 픽픽 쓰러지기나 하던 동진의 남조 귀족문화는 사마씨 일족의 서진 정권이 확립한 강권적인 '제도화'의 결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이처럼 '한(漢)'이라는 나라는 '한족(漢族)의 나라' 중국에서 특별하고, 제갈량은 그 '한'이라는 고전 중국의 최후의 지킴이였다.
이 '한나라 이념'의 지평 위에서 촉한을 정통으로 내세우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가 탄생하고,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관제묘가 세워진 것이다."
- [삼국지 인재전쟁], <4장. 촉나라, 전통을 계승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진수의 [삼국지]는 서진시대에 지어졌는데 위나라를 찬탈했으나 중원의 전통을 잇고자 했던 진나라 권력에 의해 삼국 중 '혁신'의 위나라를 중심으로 서술된다. 여기에 한나라 '전통'을 잇는 촉한의 유비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다가 약 천 년 후 원나라 말기 한족의 민족해방 투쟁 시기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는 대놓고 유비의 '촉한정통론'을 일관되게 고수한다.

대중적인 소설에 따르면 한족 부흥을 위해 평생을 바친 유비와 제갈량 외에는 조조를 필두로 다들 '난세의 간적'일 뿐인데, 삼국지 시대의 치열한 '인재전쟁'과 함께했던 '혁신'과 '전통' 등의 '이념'은 흥미로운 소설 속에서 '신화'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역사 속에서 명멸했던 영웅들과 인재들이 목숨걸고 추구했던 그 치열한 '이념' 자체가 본래는 한낱 '신화'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

1. [삼국지 인재전쟁](2019), 와타나베 요시히로, 노만수 옮김, <더봄>, 2023.
2. [난세의 리더, 조조](2013), 친타오, 양성희 옮김, <더봄>, 2022.
3. [조조 평전](2000) / [유비 평전](2004), 장쭤야오, 남종진 옮김, <민음사>, 2010 / 2015.
4.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 제갈량],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2.
5. [자기통제의 승부사 - 사마의],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3.
6. [결국 이기는, 사마의](2017), 친타오, 박소정 옮김, <더봄>, 2018.
7.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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