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한 세계사 - 바이킹에서 브렉시트까지 사건과 인물로 읽다
우이룽 지음, 박소정 옮김 / 역사산책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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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우연성'과 '필연성'
- [심플한 세계사], 우이룽, 2021.


역사란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 관계에서 만들어진 온갖 사건들과 그 속에서 드러난 인간군상의 집합이다. 

나는 이 흐름 저변에 깔린 필연적 '법칙' 또는 일정한 경향성을 읽고자 한다. 이는 마르크스가 발견한 '역사'라는 '과학'에 기반한 역사유물론이다. 
이를테면,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시작했고 이를 기반으로 구축한 사회체제는 어떤 특정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계급사회의 경향으로 흘러왔으며 현대 자본주의 체제 또한 그 흐름 위에 있다는 관점이다. 
역사유물론은 그 어떤 위인이나 영웅이 우연하게 만든 역사보다는 거대한 시대정신을 담지한 다수 민중들의 역사를 더 강조한다.
한편으로 우리가 제도권 교과서로 배워 온 역사는 경향성 없는 시대구분 속에서 특정 위인과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교과서의 이 간략함과 무미건조함을 위인전기를 읽으며 보충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역사는 가정이 없다'는 전제 하에 해당 위인이 없었다면 그 사건 또한 없었다는 식으로 역사가 보일 수도 있겠다. 예를 들면 고려 태조 왕건이 아니었다면 고려는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식인데, 이런 방식이라면 고대 중앙집권체제에서 중세 지방호족연합체제로의 권력형태 이행의 필연성을 설명할 수 없다. 

내적 모순이 심화된 특정 체제는 다른 체제로 필연적인 이행을 겪고, 이 체제 또한 자기모순에 기반하여 운동하다가 또 다시 다른 체제로 이행한다.
이것은 세상만물의 필연적 운동이며, 역사는 이러한 '경향적 법칙'의 서술이다.


"바이킹은 룬 문자라는 자기만의 독특한 문자체계가 있었다. 지금도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는 신비한 부호가 새겨진 부문석을 발견할 수 있고, 룬 문자로 쓰인 장편시와 영웅전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바이킹은 룬 문자로 역사를 쓰지 않았다. 당신이 역사를 쓰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대신 쓰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바이킹이 몇 세기에 걸쳐 약탈을 했는데 그때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발언이 유럽 각국의 편년사, 군왕전기, 교회 수도사들의 일기에 널리 퍼졌다. 그때마다 항상 바이킹은 야만적이고 흉폭하며 비인간적인 해적으로 묘사되었다."
- [심플한 세계사], <2-9. 바이킹>, 우이룽, 2021.


또 한편으로 역사는 그런 사실들의 나열이 아니라, 특정 사건과 인물의 행적에 관한 기록으로 남는다. 
역사학에서 1차 사료는 문헌이고 그 다음이 유물이라고 한다. 우리 실증사학자들 주장의 근거가 중국의 역사서인 이유도 그것이다. 고대의 요동과 한반도는 고유의 문자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대륙의 한자로 적힌 오랜 기사들만 남았다. 이런 중국 사서의 기록에 관한 해석과 지역 비정 등의 이견을 중심으로 민족사학과 실증사학의 역사투쟁이 치열하지만, 어쨌든 그 1차 사료는 어쩔 수 없이 중국의 사서라는 문헌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문자로 기록된 역사서가 없음이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러한 기록들이 드러낸 '우연성'을 통해 역사의 '필연성'으로서 '경향적 법칙' 같은 교훈을 추출하고자 한다.


대만의 역사교사 우이룽은 [這様的歷史課我可以](2021)라는 대중역사서를 통해 무미건조한 역사교과서의 서술을 탈피하고 '사건'과 '인물' 중심으로 그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국역으로 [심플한 세계사](2023)로 나온 이 책의 원제는 대략 '낱개의 사례들로도 역사교과서를 서술할 수 있다' 정도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우이룽은 <서문>에서 "인성(人性)을 지나치게 간소화해서 사건을 단조롭고 재미없게" 만든 "역사교과서의 부족한 설명"에 아쉬워하며, "역사교과서 속 중요한 사건들 이면에 있는 이상야릇하고 어쩔 수없는 것, 역사적 인물들이 느낀 방황과 고민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책의 <1장>에서는 역사 속의 몇 가지 주요 '사건'들을 다룬다.
'마녀사냥'은 중세 소빙하기 농촌사회 붕괴의 배경에서 가톨릭에 반기를 든 종교개혁 정파들이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치른 포퓰리즘 의식이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의 광기와 용기는 부를 누리려는 세속적 욕망과 원죄를 한꺼번에 씻고자 하는 대중적 열망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신항로 개척' 시대 선구자 포르투갈은 희대의 사기꾼이자 뛰어난 모험가인 콜럼버스의 무모한 제안을 거절한 반면, 후발주자 스페인의 후원으로 신대륙 아메리카 발견과 뒤이은 문명파괴가 가능했다.
'계몽주의'는 어차피 정답은 없는 인간사에 그럼에도 인간 이성을 무기로 답을 찾아보려는 인문학의 숙명을 일깨웠다.
'산업혁명'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을 통해 18세기 당시 저렴했던 석탄의 대량 사용과 노동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착취를 자행했던 영국을 보며, 기후와 인간에게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안긴 번영이 과연 '인성(人性)'에 부합한 것인가 자문도 던진다.
'남극 탐험'의 경쟁에서 남극점이라는 목표만 보고 달려간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이 승리했지만, 그 경쟁 과정에서 남극의 자연과 생태에 관한 연구자료를 남긴 영국의 로버트 스콧이 과연 역사의 패배자인가 되묻기도 한다.
'베를린 장벽'은 우연히 무너졌지만 현재 이스라엘과 미국, 유럽이 다른 종교와 민족, 인종 사이에 더욱 높이고 더 길게 연장하는 장벽은 어떤가 질문한다. 이스라엘은 지금 이 시각에도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살상하고 있다.
'브렉시트'는 영국의 EU 탈퇴라는 그 정치적 이슈는 차치하고 원래부터 다른 나라는 신경 안쓰고 살아온 영국 본성의 발로라고 저자는 쓰고 있다.

<2장>은 역사 속 몇 명의 특이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다.
'바이킹'은 고대 유럽의 전문명을 파괴하기도 했지만 교류시킨 개척자이기도 했다.
중세 종교개혁 시기 언쟁의 신 '마르틴 루터'의 꺾이지 않는 투지를 강조하기도 하고,
'카우보이'는 소 키우는 '본업'에 충실하지 않은 낭만적 총잡이가 아니라 시대를 개척한 부지런한 미국정신의 기본 모델이 되었음을 소개하기도 한다.
2차 대전 중 영국 '처칠'의 고집스런 의지와 독일 '히틀러'의 뒤틀린 '예술'적 광기를 비교하며,
'고흐'의 집념어린 예술혼은 생전에는 가난했지만 '피카소'의 예술능력은 당대의 처세와 맞물려 막대한 부를 누렸음을 대비시킨다.
마지막으로 '팽크허스트'의 전투적 여성운동이 아니었다면 여성 참정권은 쟁취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통해, 억압받는 자의 권리는 점잖게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님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다시 '역사유물론'과 '역사교과서'로 돌아와 보자.

낡은 '역사교과서'를 통해 알게 되는 연대기적 사실의 나열로부터,
그 흐름 속의 특정 '사건'과 '인물'들 이야기의 '우연성'들을 거치면서,
다시금 역사 연표를 펼치고는 역사를 이루는 다수 민중들의 열망이라는 배경으로부터 '경향적 법칙'으로서 '필연성'으로 돌아온다.

'바이킹' 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북방 유목민들과 최초의 상인들이 개척한 인류 전문명의 교류를 기억한다.
'마르틴 루터'의 굳센 투지는 물론 당시 농민들의 열망을 받아안고 불 속에 뛰어든 다른 종교개혁가들 또한 기억한다.
'십자군 전쟁'이라는 수백년 광기의 이면에는 가톨릭과 세속왕권의 이익투쟁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음도 기억한다.

그렇게 나의 역사공부는,
'필연성'을 담보하는 다수 민중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지,
일부 '사건'과 '인물'의 '우연성'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책으로는,
"인류 역사에서 불가피한 사건은 거의 없다"며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을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의 "이론적 분석과 반대로 거의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분석한 호주 역사가 실라 피츠패트릭의 [아주 짧은 소련사](2022)를 읽어보기로 한다.

역사의 '우연성'과 '필연성'이 잘 조화를 이루기를 바라며.

***

1. [심플한 세계사(這様的歷史課我可以)](2021), 우이룽, 박소정 옮김, <역사산책>, 2023.
2. [유럽민중사](2016), 윌리엄 펠츠,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18.
3. [아주 짧은 소련사](2022), 실라 피츠패트릭, 안종희 옮김, <롤러코스터>,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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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리지 않는 법 - 수학적 사고의 힘
조던 앨런버그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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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다른 수단을 동원한 상식의 연장"
- [틀리지 않는 법 - 수학적 사고의 힘](2014), 조던 엘렌버그, 김명남 옮김, <열린책들>, 2016.


"수학은 우리가 '틀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과학이고, 그 기법들과 관습들은 수백년에 걸친 노력과 논쟁을 통해서 밝혀진 거야. 네가 수학의 도구들을 손에 쥐고 있으면, 세상을 더 깊게, 더 올바르게, 더 의미있게 이해할 수 있어."
- [틀리지 않는 법], <프롤로그>, 조던 엘렌버그, 2014.


1.

하나마나 한 소리로 들렸을 거다.
수학을 일찌감치 포기한 이른바 '수포자'들에게 이런 얘기를 한들.

'수학'은 고대 인류가 "세계는 무엇이며, 어떤 원리로 운동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제기한 시대부터 그 방법론으로 시작했고, 엄밀함과 정밀함을 지향하는 인류의 가장 최초의 '과학'이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증명과 정리와 논리를 대대로 전승해온 '역사'라는 말은,
내가 아들에게는 볼 때마다 대놓고 수백만 번,
나 자신에게 역시 속으로 수천만 번 했던 말이었다.

잔소리를 무차별 난사해댔지만, 
아들이 수학 못하는 걸 내심 탓할 수만은 없다.
대학 입시를 위해 억지춘향이로 외워댔지, 
사실 청소년기의 나 또한 '이딴 수학은 배워서 뭐하나'라는 자문을 하루에도 백 번은 했더랬다. 
그랬던 나의 아들이 수학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선천적인 요인은 분명히 있다.
내가 답도 없는 '문사철' 책들을 읽고 더더욱 노답인 글을 쓰는 걸 좋아하듯,
내 주변 누군가는 답이 딱 떨어지는 수학문제를 풀 때의 쾌감을 즐긴단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거다.
그러던 중에 고등학교 시절 매번 마음을 다잡고는 첫 장인 <집합>만 수십번 읽어서 <집합>편만 마르고 닳은 [수학의 기본정석]의 마지막 장이 <확률>과 <통계>였던 이유를 최근에 새삼 나는 상기하고 있었다.


2.

"클라우제비츠의 명언을 비틀어 말하자면, '수학은 다른 수단을 동원한 상식의 연장'이다. 
수학이 제공하는 엄밀한 구조가 없다면, 우리는 상식 때문에 오히려 길을 잃을 수 있다. 전투기에서 이미 충분히 튼튼한 부분에 갑옷을 더하려고 했던 장성들이 그런 경우였다. 한편 상식이 없는 형식수학은, 즉 추상적 추론과 양, 시간, 공간, 운동, 행동, 불확실성에 관한 직관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저 규칙을 따르고 계산만 해내는 메마른 활동이 될 것이다. 한마디로 미적분을 배우며 짜증내는 학생이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활동이 되고 말 것이다."
- [틀리지 않는 법], <프롤로그>, 조던 엘렌버그, 2014.


미국의 수학천재 조던 엘렌버그(Jordan Ellenberg : 1971~)는 대중들에게 수학을 쉽게 설명하는 글을 쓰고 소설도 쓰는 위스콘신 주립대학 수학교수다.

2014년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라는 두꺼운 베스트셀러 책을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샀지만 그 중 2.4%만이 그 책을 다 읽었다는 '호킹 지수'(스티븐 호킹의 책은 6.6%) 이론으로 유명해졌다는 조던 엘렌버그는 같은 해 [틀리지 않는 법]이라는 책을 통해 일상에서 '수학적 사고의 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수학을 싫어하는 내가 감히 요약하자면,
수학은 해서 뭐하냐고 짜증내며 묻지 말고,
세상을 더욱 올바르고 덜 틀리게 이해하기 위해 각종 '수학적 도구'를 연마하면,
결국 수학은 '다른 수단을 동원한 상식의 연장'임을 깨닫게 될 것이니,
지금 풀고 있는 방적식과 미적분은 축구를 잘하기 위해 지그재그 뛰기나 왔다라갔다리 달리기를 무한반복하는 기초체력 훈련이라 생각하라는 거다.

결론은, 
[수학의 기본정석]과도 같이 일상에 만연한 '불확실성'을 최대한 줄이는 '확률'의 문제로 수렴된다.
즉, 정밀한 '확실함'과 '올바름'은 무한대와 같이 이 세상에 명확히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불확실함'과 '틀림'을 최대한 줄여나갈 수 있도록 '수학적 사고의 힘'을 단련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확신하지 않는 것은 나약한 인간의 태도가 아니라 강인한 인간의 태도... 심미적인 이상의 수준에 오른, 일종의 형세관망... 그리고 수학은 그 일부이다. 사람들은 보통 수학을 확실성과 절대적 진리의 영역으로 여긴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수학은 또한 불확실한 것에 대해서 추론하게끔 해주는 수단, 불확실성을 완전히 길들이진 못할지언정 어느 정도 다스리게끔 해주는 수단이다."
- [틀리지 않는 법], <에필로그>, 조던 엘렌버그, 2014.


수학자는 순수한 모형화와 공식화를 갈고 닦으며 연구해야 하지만, 감히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 없는 일반인은 그런 '형식수학'보다는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상식의 연장(확장)'으로서 '수학적 사고의 힘'을 기르면, 살면서 조금 덜 틀릴 수 있고 조금 더 올바르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런 만큼, 엘렌버그의 [틀리지 않는 법]에는 '기대값'을 계산하는 식이 많이 등장하고, 실제 복권 구매와 선거 결과 예측에 관한 사례 및 계산식과 그래프가 무수히 등장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완전 100% 수학 무능력자가 된 나는 숫자와 계산식으로 전개한 그의 추론들을 거의 전부 이해하지 못했고, 급기야 대부분의 '기대값' 계산식은 건너뛰기도 하면서 문장 위주로 읽고 말았다.


다만, '틀리지 않고 싶은 수학적 사고의 힘'은 조금이라도 얻어걸리지 않을까 싶어 열심히 읽어댔음에도 몇 가지 사례 말고는 정리해볼 요량이 없게 되었는데, 그래도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프롤로그 : 아브라함 발드의 '전투기'

2차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의 천재수학자 아브라함 발드는 전장에서 무사귀환한 전투기의 엔진통에 기관총 구멍이 많은 걸 보고 엔진통에 철갑을 강화하자는 미공군 장성들의 말에 반대하고,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한 전투기들은 이미 전신에 구멍이 뚫려 불탔으며 그나마 엔진통이 강했기에 구멍 몇 개 뚫린채 귀환할 수 있었다는 이유를 증명하고는 전투기의 엔진통이 아닌 다른 부분을 강화했다고 한다.
바로, 단순히 눈에 보이는 '상식'이 아니라, 수학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연장시킨 '상식' 의 사례로서 이 책의 <프롤로그>는 시작된다.

2) 2장 : 기본 슬로건 - "국소적으로 직선, 대역적으로 곡선"

동양의 [노자 도덕경]은 '대직약굴(大直若屈)', 즉 '작게 보면 굽어보이지만 크게 보면 곧은 길'이라는 대인배의 사상을 품고 있다. 그러나 서양의 '수학'에서는 과학자답게 도학자적인 동양과 반대로 모든 걸 '직선'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탈피해서 크게 보아 '대역곡선'으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상식'을 확장한다. 직선 그래프의 2차 방정식을 넘어 곡선의 3차 이상의 방정식으로 복잡한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타당하다. 
고대 그리스 수학이 원의 지름을 측정한 방식이 그랬고(아르키메데스의 '실진법'), 근대 미적분과 경제학의 '한계효용' 등의 기본 원리가 그러하다.

3) 4장 : '큰 수의 법칙'

동전을 던져서 앞면 또는 뒷면이 나올 확률이 50%라는 확률적 예측은 실제로 몇 번 던져서 나온 실험결과가 아니다. 동전을 거의 무한할 정도로 던져댄다면 그 확률은 틀림없이 50%로 수렴한다. 
이것이 보험통계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인 '대수(큰 수)의 법칙'이다.
즉, 내가 80세까지 살지는 못하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사례를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누적시켜서 보면 인간은 대략 80년을 산다는 그런 이야기, 내 자동차보험계약 하나만 본다면 그렇지 않지만 수백만대의 사고율을 누적시켜 보면 보험금 대비 보험료의 적정손해율은 약 76%가 나온다는 그런저런 이야기의 배경이 바로 '대수(큰 수)의 법칙'이다.

4) 7장 : 귀무가설(歸無假說 : null hypothesis)

이른바 '거짓'임이 증명되어 기각되는 것을 목적으로 상정한 가설이다. 원래 '참'으로 증명하고 싶은 명제와 다른 조건의 가설로서 엘렌버그에 의하면 "당신이 연구하는 개입조치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가설"(같은책, <7장>)이다. 원래의 모습인 '0'(無/null)으로 돌아가야 할 귀무가설은 '올바름'을 위한 반증대상이다. 
다만, 밤에는 '귀무가설'을, 낮에는 그 반대인 '대립가설'을 진심으로 진지하게 연구해야 인간은 기존 신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지라도 '올바름'에 대한 증명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같은책, <에필로그>)고 한다.

5) 10장 : 베이즈 추론

'확률'에서 '사전 확률'과 '사후 확률'에 관한 이론이다. 즉, 어떤 "증거를 본 뒤에 무언가를 얼마나 믿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증거가 제공하는 정보에만 달린 게 아니라... '애초에' 그 무언가를 얼마나 믿었느냐에도 달려있다"(같은책, <10장>)는 이야기다.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통해 신을 믿을 확률(사후 확률)은 '애초에' 신을 믿을 마음(사전 확률)에 의해서도 어느정도 결정되어 있다는 논리로 나는 이해한다.
이른바, '확증 편향' 같이 '답은 정해져 있다'.

그렇게 나의 '수학여행'은 조던 엘렌버그의 안내에 따라,
오래전 고등학생 시절 그랬듯,
중간 과정은 이해하든 못하든,
'기본 체력훈련'은 건성건성 하는 척 하다가, 
결국 '확률'의 '정석'으로 수렴된다.


3.

역시 수학은 어렵다.
어려서부터 '수학적 사고'를 힘써 훈련하지 못했으니, 조금만 신경쓰면 이해될 수도 있을 숫자와 계산식은 그냥 눈으로 훑고 넘어간다.

이 나이에 별 재미도 없는 이론적 수식 계산으로 머리쓰기 귀찮기도 하고 실은 숫자만 봐도 내심 진절머리를 치는 내 천성은 예나 지금이나 한 치도 변함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차라리,
조던 앨렌버그의 이 책 [틀리지 않는 법]보다는, 
대략의 큰 수(big number)에 대한 기준선들을 소개해 주는 영국 보험수리학자 앤드류 엘리엇(Andrew Elliot)의 책 [숫자로 읽는 세상의 모든 것(Is That a Big Number?)](2018)을 추천한다. 
수학을 좀더 애정한다면, 수학의 '정밀함'보다 '직관'적이고 '근사치'적인 사고방식을 알려주는 일본 수학자 하타무라 요타로의 [직관 수학](2004)을 권하고 싶다.

'수학적 사고의 힘'으로 '상식을 연장'시키고 싶지만,
수학이 여전히 어렵고 숫자가 너무도 싫은 나의 천성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한편으로는 숫자로 일하는 금융회사에서 믿을 수 없게도 거의 사반세기를 버티고 있는 나 자신이 새삼 대견하거나 안쓰러워진다.

***

1. [틀리지 않는 법(How Not to Be Wrong) - 수학적 사고의 힘(The Power of Mathematical Thinking)](2014), Jordan Ellenberg, 김명남 옮김, <열린책들>, 2016.
2. [숫자로 읽는 세상의 모든 것(Is That a Big Number?)](2018), 앤드류 엘리엇, 허성심 옮김, <미래의창>, 2021.
3. [직관 수학](2004), 하타무라 요타로, 조윤동 옮김, <서울문화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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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미학강의
이중텐 지음, 곽수경 옮김 / 김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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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은 곧 미학사, 미학사는 곧 미학
- [미학강의], 이중톈, 2006.


"헤겔의 말처럼 이전 시대의 철학의 성과 위에 새로운 시대의 철학이 발전하는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어떤 철학도 소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각각의 철학의 관점은 모두 합리적이었고 어떤 역사 시기나 역사단계에서는 필연적으로 출현해야 했던 것들이었습니다... 철학과 미학은 사상이자 사상의 사상... 철학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권의 미학사 역시 반드시 미학이어야 합니다. 미학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미학적 관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요."
- [미학강의], <1-4. 미학은 곧 미학사, 미학사는 곧 미학>, 이중톈, 2006.


1.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최고의 시체 부위들을 엄선하여 인간을 닮은 피조물을 만들었던 그 밤에, 이 창조자는 무책임하게 고향으로 내빼고 말았다.
자신이 최고로 만들 줄 알았던 것이 생각과 다르게 무서웠던 거다.

이 '괴물'은 그러나 의외로 신체적 능력 뿐만 아니라 지능적으로도 매우 초인적인 존재였는데, 창조자 빅터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창조물을 싫어했다. 그리하여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은 비극이 된다.

빅터가 자신의 창조물을 본능적으로 싫어했던 이유는 못생겨서였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갑자기 '미학(美學)'을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중국의 역사가 이중톈(易中天)이었고, 그의 책 [미학강의]를 바로 주문했다.


2.

"미학의 기본 문제는 바로 '미(美)란 무엇인가'입니다...
... 철학과 예술은 모두 문제를 제기하려고 하며 위대한 철학가와 위대한 예술가는 모두 위대한 문제제기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모두 인생에 관한 것들이며 최종적인 결론은 없습니다. 최종적인 결론이 없기 때문에 철학과 예술은 영원히 시대착오적일 수 없고 영원히 생명력을 가지게 됩니다... 더군다나 미학은 원래 철학의 검으로 예술의 의혹을 풉니다. 그러니 어떻게 미학이 미학이기 이전에 철학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 [미학강의], <2-1. 플라톤, 객관미학의 기초를 세우다>, 이중톈, 2006.


2006년 [삼국지강의(品三国)]로 유명해진 중국의 대중역사가 이중톈은 같은해 [미학강의(講美學)]를 통해 미학과 미학사를 설명하고 있다. [삼국지강의]의 원제는 '품삼국'으로서 '삼국지를 품평하다'로 번역할 수 있겠는데, [미학강의] 또한 원제가 '강미학'으로 '미학을 강의하다' 정도가 되겠다.

국역 [이중톈 미학강의]의 정확한 원제목은 '파문이입:이중톈강미학(破門而入:易中天講美學)'인데, 저자는 짧은 <서문>에서 '비판적으로 문을 부순다'는 태도로 미학사를 통해 미학의 문제제기를 하고 '미학의 문제와 역사'를 새롭게 건설했다는 의미에서 '문을 부수고 들어간다(破門而入)'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이든 미학이든 '문제제기'의 역할이지 '결론도출'의 역할을 부여받지 못했기에 이중톈이 부순 문 너머에도 '미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없다.


"미학(美學)은 '문제의 문제', '기준의 기준'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미학을 연구하는 것은 예술과 심미 중에서 '근본성'과 '보편성'을 띤 문제들입니다."
- [미학강의], <1-1. 입장권을 제공하지 않는 미학>, 이중톈, 2006.


우선, 미학(美學)의 근본 질문은 '미(美)란 무엇인가?'이다. 미학은 특정 예술을 대상으로 하는 기술적 영역이 아니라 전체 예술을 아우르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미(美)' 자체가 대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또는 우주란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하는 철학과 같이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내가 보기에 미학은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하위범주다. 보편적인 '미' 자체를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것처럼, 미학의 역사 속에서 '미'의 양상도 지속적으로 변해왔다.


"... 세계는 절대이념의 자아실현 과정이 아니라 인류가 자신의 '실천'을 통해서 자아를 창조하고 실현하는 과정입니다. '실천'은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세계관의 핵심입니다... 마르크스는 새로운 유물론의 발판은 인간사회 혹은 사회화된 인간이고, 인간의 본질은 결코 개인의 고유한 추상물이 아니며 그 현실성 위에서 모든 사회관계의 총화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술철학만 이야기하고 일반예술학은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실재'적인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 [미학강의], <5-5. 헤겔 미학을 되돌아보다>, 이중톈, 2006.


미학의 결론은 없다고 했지만, 이중톈이 [미학강의]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대략의 결론은 이렇다. 

보편성을 지향하는 '미(美)'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류 예술의 역사를 통해 변화해 왔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학과 같은 미의 '규칙성'을 주장하면서 미학사의 문을 열었고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이데아론'과 같이 미의 '객관성'을 규명하려 했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을 넘어 이데아로서의 본질은 물론 속세의 형상도 중시했기에 플라톤보다 '모방론'의 현실성을 한층 강조했지만 역시 고대 미학은 미의 '객관성'의 단계였다.

미의 '객관성' 규명은 한계에 다다랐는데, 이중톈에 의하면 여기서 미학은 양갈래길에 서게 된다. 즉, 미가 인간의 '주관성'의 길로 갈 것인지, 아니면 신의 길로 갈 것인지 둘 중 하나였다. 중세는 신의 길이었고, 칸트로부터 시작한 근대 인문학적 미학은 미의 '주관성'으로서 '심미 철학'이 된 것이다.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서 미학의 '생일'은 1750년 독일 철학자 알렉산더 바움가르텐이 '에스테티카'라는 명칭으로 미학을 독립시켰을 때라고 하는데, 인간사에서 '진선미'를 놓고 보면 '진'은 '진위'를 구분하는 '논리학', '선'은 '선악'을 따지는 '윤리학', '미'는 '미추'를 가르는 '미학'의 구분이 완성된 때였다. 그러나 진정한 미학의 '아버지'는 미의 '주관성'으로서 '심미 철학'을 발전시킨 임마누엘 칸트라고 이중톈은 말한다. 
'주관적 보편성'으로서 근대 미학의 미는 "객관적인 것도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주객관의 통일도 아니며, '주관이 객관으로 표상된 것'이고 '객관적 상징의 형식으로 표현되어 나온 주관적인 것'이며, 미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공리를 초월하고 개념을 갖지 않으면서 목적을 갖지 않는 '주관적 보편성'이다"(같은책, <3-4>)라는 칸트 철학에서 미학이 비로소 한층 더 발전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칸트에게서 미는 인식의 주체로서 개인이 그 누구든 보편적으로 이익이나 목적 여부를 떠나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 그 자체였다.

그러나 주관적 관념론인 영국 경험론 철학과 칸트의 심미 철학 또한 한계에 도달하는데, 철학은 인식의 주체 뿐만 아니라 거대한 객체로서 세계도 그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의 하위범주인 미학 또한 게오르그 헤겔을 피해갈 수 없게 된다.
그렇게 고대 미학의 '객관성'이라는 정명제는 근대 주관적 관념론의 '주관성'이라는 반명제의 '부정'을 거쳐 근대 관념론 철학의 종결자인 헤겔 철학의 체계에서 '부정의 부정' 단계로 들어선다. 
바로 헤겔의 '예술 철학'이다.


"예술은 정감의 '내용'에게 대상화라는 '형식'을 주었고, 미는 대상화라는 '형식'으로 구현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 [미학강의], <7-5. 미와 추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중톈, 2006.


헤겔의 에술 철학은 그 자체로 변증법적 전화 과정을 거치는데, '형식'과 '내용'이 맹아로 존재하던 '상징형' 원시 예술에서 '형식'과 '내용'이 통일된 '고전형'으로 '부정'되고, 또 다시 '부정의 부정'으로서 '형식'과 '내용'의 모순에 봉착하는 '낭만형'으로 변화한다. 원래 헤겔 철학의 귀결점은 '절대정신'이므로 헤겔에게 미는 '절대정신의 감성적 현현'이며, 첫 단계인 감각적 '예술'의 정명제는 그 자체의 모순에 의해 '종교'의 '부정' 단계로 이행하며, '종교' 또한 내적인 변증법 과정을 거친 후 최후의 단계인 '철학'에 도달한다. '철학'에서 '이성'은 즉자 단계와 대자 관계를 거치며 즉자-대자로서 '절대정신'이라는 최종적인 단계에 이르는데, 이것이 바로 헤겔의 주저 [정신현상학](1806)의 결론이다.
아무튼, 헤겔에게 미는 '절대정신의 감성적 현현'으로서 거대한 변증법적 관념론 체계의 가장 첫 단계인 '예술 철학'의 영역이다.


"정감을 대상화하는 형식은 예술의 특징이고, 정감의 전달은 예술의 기능이며, 인간의 확증은 예술의 본질입니다."
- [미학강의], <7-3. 예술은 인간임을 증명하는 증거일까>, 이중톈, 2006.


이중톈의 방향은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적 미학론이다. 그는 이를 '실천 미학'이라 명명하는데, 마르크스가 그랬듯, 관념론 철학의 종결자 헤겔 철학을 상세하게 연구하고는 이를 뒤집어 유물론적 실천 미학을 새롭게 건설하고자 한다. 즉, 고대의 미학이라는 광대한 영역에서 근대에 이르러 '미학(美學/Aesthetics)'의 독립으로 '심미'와 '예술 철학'으로 이행하였지만, 이 추상성에 그치는 관념론적 사고방식이라는 '문'을 부수고 '예술 철학'을 넘어 '일반 예술학'의 '실재'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제시한 '사회'와 '역사'에 기반한 인간의 '실천' 중 하나로서 각종 예술 행위들을 통해 미학을 정립하고 그러한 미학사 속에서도 미학의 근본 질문인 "미란 무엇인가?"의 문제제기를 계속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결론은 없다.
미(美)라는 개념은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그러나, '미학(美學)'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그 보편성을 지향하는 근본적 문제제기를 멈추지 않는다.

역사 속 질문들은 모두 결론은 아니었을지라도 그 시대에 유효했고 '필연적'인 문제제기였다.

그래서 이중톈 [미학강의]의 결론 아닌 결론을 한 문장 뽑으라면,
"미학은 곧 미학사, 미학사는 곧 미학"(같은책, <1-4>)이다.


3.

결국, 내가 보기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애써 만든 창조물을 외면한 '미'의 기준은,

첫째, 미학 여부를 떠나서 당시 기준으로 잘생긴 외모가 아니었다는 단순한 이유였고,
둘째, 19세기 초의 그 기준이 21세기인 지금과 같을 수는 없다는 새삼스럽지도 않은 결론을 내린다.

미와 추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 증거는 유물변증법에 기반한 '실천 미학'의 과학적 사고 방식에 의하면 당대의 예술적 '실천'들이며,  미는 천상에서 내려와 사회관계를 토대로 한 현실의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실재'적으로 반영되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결론이 될 수는 없다.

다만,
"'미(美)'란 무엇인가?"라는,
'미학(美學)'의 근본적 '문제제기'만이 언제나 유효할 뿐이다.

***

- [이중톈 미학강의(破門而入:易中天講美學)](2006), 易中天, 곽수경 옮김, <김영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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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마크 피셔 지음, 박진철 옮김 / 리시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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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없는 냉정한 '현실', '자본주의 리얼리즘'
- [자본주의 리얼리즘], 마크 피셔, 2008.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슬라보예 지젝의 구절... 이 슬로건은 내가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이라는 표현으로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있는 감각이 그것이다."
- [자본주의 리얼리즘], <1. 자본주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 마크 피셔, 2008.


1.

'90년대 초반, 
한때 '신세대'였던 나는 젊은이답게 새로운 유행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대학 신입생이 되어 가난하고 위축되어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불량하게 담배를 꼬나물거나 최신유행 랩송을 외워서 불러제꼈지만 돌이켜보건대 내겐 어울리지 않았을 게다.
사실 앞뒤 꽉막히고 외골수에 가까웠던 난 유행의 흐름을 타느니 복고를 동경했는데, 그 대상이 '80년대였다.

실제로 '80년대 청춘이었다면 반체제를 외칠 결기도 없었을 나는, 이미 철지난 유행을 탔는데, 그 흐름이란 사회과학적으로는 '과학적 사회주의'였고 문학적으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었다.

적어도 '90년대 초반의 젊은 내겐,
'80년대 그때 그 시절처럼,
"다른 세상은 가능했고",
'대안'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2.

보통 '자본주의'의 '대안'이란,
에둘러 말할 것 없이 '사회주의'다.

현실 공산주의의 몰락 앞에 내가 동경했던 수많은 '80년대 학번 형님들이 좌절하고 뜻을 접었지만, 나는 그래도 아직 도래하지 않은 진정한 '평등세상'을 바라며 나름대로 책을 읽으며 자습을 했고 대안세상을 그려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가가 되기 위해 글을 끄적였다.

젊은 내가 습작하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현실 공산국가들의 체제 선전 홍보물이 아니었다.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자본주의 현체제의 부조리와 모순을 내 주변의 인물군상과 사건들을 통해 '사실(realism)'적으로 묘사하면서 아직 오지 않은 '대안세계'를 암시하는 '리얼리즘(realism)' 소설이고자 했다.
결국, 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가가 되는 것에 실패했다. 실력이 부족했고 나 자신 체제에 철저히 포섭되었으며 더욱 중요한 건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대안체제'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불평등이 극심화되는 '자본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한.


"... 녹색 쟁점들은 이미 논쟁적인 지대며 이미 '정치화'를 위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다. 이제부터 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품고있는 두 개의 상이한 아포리아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는 '정신건강'이라는 쟁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신건강 질환'이 유행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체계이기는커녕 내재적으로 고장나 있으며, 그것이 잘 작동하는 듯이 보이도록 만드는 비용이 아주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둘째 현상은 '관료주의'다... 후기 자본주의에서... '관료주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형태가 변했으며, 이 새롭고 탈중심화된 형태를 통해 오히려 증식했다..."
- [자본주의 리얼리즘], <3. 자본주의와 실재>, 마크 피셔, 2008.


영국의 저술가이자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Mark Fisher : 1968~2017)는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블로그 글쓰기로 유명하다는데, 글쓰는 영화인인 나의 조카의 소개로 읽어보게 되었다. 
마크 피셔의 첫 단행본 저서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시기에 나온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으로 2018년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다.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패러디를 넘어 한층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이 책의 역자는 말한다. 
끝없는 '시차적 관점'으로 테제와 반테제가 교차하는 일은 없다는 현대식 '변증법적 유물론'을 설파한 동유럽 마르크스주의자 슬라보예 지젝과 '포스트모더니즘'에 기반한 마르크스주의를 전개했다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사상에 기반하여 자본주의를 대체할 '대안은 없다'는 것이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다. 
제임슨과 지젝의 문장으로 표현하면,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현실주의(리얼리즘)'다.

그렇다고 '역사의 종언'을 말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자본주의 승리파가 아니라, 사회비판 헐리우드 영화의 배경처럼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음울하다. 아마도 영화 문외한인 내가 보지 못한 수많은 영화들을 인용하는 바람에 저자의 주장이 이해가 잘 안되는 구절이 다소 있기에 음울한 영화배경이 더 겹쳐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피셔의 반체제적 영감의 소재 중 하나가 영화인 듯도 하다. 또한 지금이십대 초반의 영화인인 내 조카가 극찬한 이유이기도 할게다.

이 책의 제목은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이고 부제는 "대안은 없는가?(Is There No Alternative?)"인만큼,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대안체제'는 대놓고 없다. 
그는 기존 좌파가 소비에트식 옛 노래를 흥얼거리는 통에 헷갈려 왔지만, '사회주의' 같은 다른 세상이나 대안체제를 주장하기 보다, 우리들 개인에게 오랜 시간 체화되고 내면화된 '욕망'에 주목한다. 


"이제 우리는 '신자유주의'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어야 했지만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신자유주의'적일 필요는 없음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일관되고 신뢰할 '대안'이 없다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앞으로도 정치경제적 무의식을 지배할 것이다."
- [자본주의 리얼리즘], <9. 마르크스주의적 슈퍼 보모>, 마크 피셔, 2008.


정치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는 굳건하고 신자유주의가 2008년에 위기를 맞았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몰락하지는 않는다는 이 책 주장의 근거는 자본가도 아니고 부르주아 정치가도 아닌 바로 우리 다수 대중의 '욕망'인 것이다. 즉, 우리들 다수대중들은 이제 다시 자본주의 '이전'으로 돌아가거나 '외부'로 넘어가서 살 수 없다는 '현실주의(리얼리즘)'가 바로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냉정한 본질이다.

개인의 '욕망'에 집중하다 보니, 기후 위기나 생태 문제 등의 외부 문제보다는, 자본주의 체제의 내재적 문제에 집중하게 되는 피셔는 자본주의 체제의 두 가지 병리현상에 주목한다.

첫째는 개인의 '정신건강' 문제고,
둘째는 체제의 '관료주의' 문제다.

'정신건강'은 체제의 '정신분열'은 개인적 문제가 아닌 체제의 구조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체제는 수많은 '정신병자'들을 구조적으로 양산한다는 것인데, 이미 20세기 후반으로 치닫던 1960~70년대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인 질 들뢰즈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 미셸 푸코 등이 분석한 바 있다.

'관료주의'는 본연의 생산적 노동에서 벗어난 비생산적 노동이 주류가 되면서 그 자체가 실적경쟁을 이루는 '시장주의적 스탈린주의'(같은책, <6장>)로 은유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의 이러한 비생산적 관료주의 '노동'은 다수 대중의 정치경제적 투쟁으로 분쇄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한다.

피셔의 결론은 '정신건강'에 시달린다 해도 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 것으로 '개인적' 문제들을 포함한 구조적 '관료주의' 문제 일체를 '정치화'하여, 새롭게 조직된 '정치행위주체'들에 의해 이들 문제들이 통제되어야 한다는 거다.

즉, '욕망'으로 뭉친 자본주의 체제의 소비자 또는 전유자로서 다수대중이 다양한 '정치주체화'를 통해 이 자본주의를 통제하자는 제안이며, 이를 위해 '대안체제' 같은 꿈이 아니라 자본주의 '현실'을 직시하자는 것이,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다.


"새로운 반(反)자본주의가 출현할 하나의 공간이 마련되었고 여기서는 반드시 옛 언어나 전통에 묶여있을 필요가 없다... 전(前)자본주의적 영토들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다. 반자본주의는 그 자체의 진정한 보편성을 통해 자본의 세계화에 대항해야 한다... '정치화'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것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정치적 행위주체'를 필요로 한다. 1968년 이후 노동계급의 '욕망'을 병합함으로써 승리했다면, 새로운 좌파의 실천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었으나 만족시킬 수는 없었던 '욕망'들에 기반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좌파는 신자유주의의 실패가 두드러지는 사안인 관료제의 대규모 축소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노동 및 누가 노동을 통제할지를 둘러싼 투쟁이다...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구축될 때만 그럴 수 있다."
- [자본주의 리얼리즘], <9. 마르크스주의적 슈퍼 보모>, 마크 피셔, 2008.


이 새로운 '정치주체'는 기존 노동조합일 수도 있고 새로운 조직일 수도 있다며, 마크 피셔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데, 그의 결론 또한 '파시즘'을 만든 원인으로서 '대중심리'가 결국 그 '파시즘'에게 파산을 선고한다는 빌헬름 라이히처럼, 자본주의 체제 내 '정신분열'의 '혁명성'에 주목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처럼, '다수대중'의 권력화와 전략적 리더십을 주장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처럼,
'노동'에 기반한 '민주주의', 즉
'노동민주주의'로 수렴된다.


3.

한 때,
'90년대 '신세대'였던 내가 어느덧,
'쉰세대'가 되었지만,

사실 나는,
1993년 스무살 때도 이미,
'신세대'가 아니라 '쉰세대' 같다는 말을 들었다.

20세기가 지나고,
21세기가 되어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대안'적 전망이 사라진 자리에,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냉정한 현실이 굳건히 들어선다 해도, 
'노동'하는 '다수대중'의 '민주주의',
'노동민주주의'는 여전한 이 체제의 '대안'인가보다.

***

1. [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Capitalist Realism - Is There No Alternative?)](2008), Mark Fisher,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8.
2.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2006),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3. [지식의 고고학](1969), 미셸 푸코, 이정우 옮김, <민음사>, 2000.
4. [파시즘의 대중심리](1933), 빌헬름 라이히, 황선길 옮김, <그린비>, 2006.
5. [앙띠오이디푸스](1972),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최명관 옮김, <민음사>, 1997.
6. [어셈블리(Assembly)](2017),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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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동화 1~2 세트 - 전2권
그림 형제 지음, 오토 우벨로데 그림, 전영애.김남희 옮김 / 민음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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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는 '멸종'하지 않는다
- [그림 동화], 그림 형제, 1812~1819.


"... 동화를 읽는 인간은 멸종해 가지만, 인간에게는 동화가 결코 멸종하지 않기 때문...  
바로 그러한 점을 '시(詩)'가 모든 영원한 것과 공유한다...
그것(동화)은 좋은 말 한 마디와 똑같이 우리 심성의 증언이다."
- [그림 동화], <2판 서문>, 그림 형제, 1819.7.3.


신기했다.
오래 전인 19세기 초에도 '동화'를 읽는 인간들이 '멸종'해 갔다니.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이 되어 왔고,
어른이 된 인간은 대부분 '동화'를 읽지 않았다.


1.

내가 '동화'를 다시 읽게 된 건,
초등학교 4학년인가 대략 열살이 넘었을 때부터 친다면,
첫 아이를 만난 서른셋까지 대략 20년 이상이 지난 후였다.

어린 시절,
책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으니 책 속의 삽화를 보기 위해 '동물백과사전'을 들고 다녔고 '세계문학전집'을 펼쳤다. 
몇몇 이야기는 TV에서 방영해 주던 일본 애니메이션 '세계명작동화'를 통해 대강 알았고, 오랜 시간 노란색 표지의 전집 앞에서 책등에 적힌 제목들을 주로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러다 집어든 동화책의 흑백삽화를 보며 어린 나는 상상을 펼쳤다.
초등학교 4학년 특활시간 독서반에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를 한 학기 내내 들고 다녔던 이유는 그 나이까지 책 한 권을 이어서 읽을 줄을 몰라서였다.

이후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 친구의 집에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단편들을 빌려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단편이나마 책 한 권을 온전히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사실 어린 시절에 제대로 읽은 동화책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했던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조차도 아마 나중에서야 온전히 읽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세계명작동화' 전집에 수록된 아주 짧은 이야기들은 그 어린 나이에도 몇 편 읽기는 했으리라.

[이솝 우화]나 [그림 동화] 같은.


2.

내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었지만,
실은 내가 제대로 읽어보고 싶었다.

애기들 잠들기 전 40페이지 짜리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세계명작동화'를 주로 읽어주다가, [보물섬]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빨간머리 앤], [오즈의 마법사] 등은 성인판으로 구해서 다시 읽었다. 국역으로도 읽고 영문판을 보기도 했다. 

한스 안데르센을 포함하여 장편 동화들은 비단 어린이들만을 위한 서사가 아니었다. 

이들 고전동화들은 인류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럼에도,
이솝이나 그림 형제의 동화는 그닥 관심이 가지 않다가,
어느날 문득 유럽의 [신데렐라]와 우리의 [콩쥐팥쥐] 사이에서 동서양 구전동화의 '양자역학'을 떠올렸다.
서로 접촉이 없었을 것 같은데도 동일하게 전개되는 이야기.

[신데렐라]는 프랑스 동화수집가 샤를 페로를 통해서도 전한다지만, 독일의 학자 그림 형제의 수집본에서도 볼 수 있다. 
제목은 [재투성이]다.


법학을 공부했다는 독일의 인문학자 야코프 그림(Jacob Grimm : 1785~1863)과 빌헬름 그림(Wilhelm Grimm : 1786~1859)은 독일 각 지역의 방언으로 구전되는 민담을 수집했다. 이들은 '그림 형제'로 불렸고 그림 형제가 모아서 엮은 이야기는 [그림 동화]로 우리에게 알려져 왔다.
독일 최초의 이 동화 모음집의 독일어판 원제는, 
[아이들과 가정의 동화(Kinder und Hausmärchen)]다.

1812년에 1권을, 1815년에 2권을 출간한 그림 형제가 [그림 동화] 2판을 내던 1819년 7월에 쓴 '서문' 격의 글 <민중문학의 바탕은 초록풀밭과 같다>에서 19세기 초반 당시에도 "동화를 읽는 인간은 멸종해 가지만..."이라는 요즘 들어도 익숙한 문장을 읽었다. 더 읽어보니 당시에도 시대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이야기 전승의 풍속이 사라지고 있는 풍토가 염려되었던 거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어른들은 당시 젊은 것들이 싸가지가 없어서 세상 말세라고 했다더니, 어쨌건 간에 오래 전부터 '동화를 읽는 어른'들이 이미 '멸종'해 가고 있었다니 새삼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세태에도 불구하고 그림 형제는 동화 같은 구전 이야기가 '초록풀밭'의 이삭과 씨앗들처럼 '시(詩)'의 모습으로 노래처럼 구비구비 전해져왔다고 쓰고 있다.
문자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이어진 이야기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교훈을 담고 있기도 하고 흐지부지한 결론의 전개 후에 뭔가 여운을 남기는 '동화'로 남기도 하는데, 그림 형제는 이런 이야기들이 인간의 맑은 영혼과 심성을 '증언'한다고 말한다.

추운 겨울에 화롯불 앞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들려주시던 독일 '가정의 동화(hausmärchen)'는 내 어머니가 어린 나를 아랫목에 앉혀놓고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시던 동아시아의 도깨비불이나 구미호 이야기와 같이 따뜻하고 포근하다.

그림 형제의 [아이들과 가정의 동화(Kinder und Hausmärchen)]는 19세기 당시 독일 각 지역의 방언을 그대로 살리고 표준어를 두루 쓰면서 이후 독일어사전 편찬 작업 등에 큰 기여를 했단다. 그림 형제는 인문학자답게 1~2권은 이야기 모음집으로, 3권은 구전민담에 관한 방대한 연구논문으로 남겼다는데, [그림 동화]는 독일어 뿐만 아니라 독일문학에서도 아마 중요한 문헌일 수도 있겠다.

우리의 독문학자인 서울대 전영애 명예교수와 경북대 김남희 교수가 함께 지금껏 우리에게 익숙해 온 각색된 내용이 아닌 그림 형제가 채집하여 편찬한 독일어 원본 이야기 1~2권을 그대로 우리말 번역한 [그림 동화]를 펼치면 '날 것 그대로'의 동화를 접하게 된다.


[재투성이]에서 신데렐라의 가짜 언니들은 유리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발가락과 뒷꿈치를 잘라 피바다를 연출하다가 악의 축이었던 새엄마의 거취는 온데간데 없이 새언니들만 신데렐라와 왕자의 결혼식에 가서 아양을 떨던 중 비둘기들에게 두눈을 쪼이고,

[눈처럼 하얀]에서 백설공주의 간과 심장이라고 착한 사냥꾼이 거짓으로 가져다 준 걸 남김없이 먹어치운 새엄마는 몇 차례 '미녀살해' 시도를 실패한 후 궁극에는 백설공주와 왕자의 결혼식에 굳이 또 구경갔다가 갑자기 나타난 불에 달궈진 쇠구두를 뜬금없이 신더니 뜨겁다고 춤추다 죽는다.

[라푼첼]의 결말은 라푼첼을 탑에 가둔 새엄마에게 속아 왕자님은 역시 두눈을 멀게되고 권선징악은 건너뛴 채 그냥 버려진 황무지에서 어쩐 일인지 이미 쌍둥이의 엄마로 살고 있던 라푼첼과 왕자가 다시 만나 심봉사와 심청이 부녀처럼 광명 찾고 잘 산다고 하면서 '갑분싸'로 끝나기도 하고,

[가시장미]에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운 건 왕자의 목숨을 건 용맹이 아니라 마녀의 예언대로 공주가 물레에 손을 찔려 잠든지 100년이 지나 마법이 풀린 순전한 운발이었는데 그 전에는 수많은 왕자들이 잠든 왕국의 문을 열다가 죽어갔지만 주인공인 운좋은 왕자는 하필 왕국이 잠에서 깰 때 들어간 거였다.

[헨젤과 그레텔]이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애초에 식량이 없다며 남매를 숲에 버리자고 했던 새엄마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 한 줄로만 적힌 건 권선징악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당시 기근의 무서움을 은연 중에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는데 아동 유기로 입을 줄였음에도 역시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현실의 은유일 수도 있겠다.

그 외에도 [브레멘 시립음악대]나 [빨강 모자]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는 그림 형제가 수집한 구전이야기 원작은, 그럼에도 우리가 읽어 온 '세계명작동화'와 다르다.
인위적인 훈육의 내용으로 수렴된다거나 명확하게 남기는 교훈의 메시지 같은 건 없다.


3.

그렇게 '교훈'이란 근엄한 지시와 통제 같은 기제로 전해지지 않는다.

아무리 '동화'의 교훈을 읽는 인간들이 멸종의 위기에 매번 봉착한다 해도,
날 것 그대로의 그림 형제 구전동화는,
노래처럼 수세기를 전해져 내려온 서사의 힘을 증거해주고 있다.

때 되면 흥얼거리는 시처럼 노래처럼,
'동화' 같은 인류의 옛날 이야기는,
'초록풀밭'처럼 결코 '멸종'하지 않는다.

***

- [그림(Grimm) 동화 : 아이들과 가정의 동화(Kinder und Hausmärchen)](1812~1815), 야코프/빌헬름 그림 형제, 전영애/김남희 옮김, <민음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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