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
정광호 지음 / 눌와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세계 어디를 가도 가족의 죽음은 아주 큰 비극이다. 사람이 죽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천운이다. 생물로 태어나면 생명은 사라지고, 사라진 생명을 대신할 새로운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영겁의 순환으로 살아간다. 동물은 본능으로 살아가나, 인간은 조금 다른 식으로 전환된다. 동물에게 문화라는 조건이 없다. 인간만이 지구에서 문화라는 매체로 살아간다. 동물은 필요한 수요만큼 생명을 죽이나 인간은 필요한 수요 이상으로 생물은 죽인다. 게다가 필요 이상으로 동족까지 공격하는 부류이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는 없다. 단지 인간은 문화라는 매체를 가지고 있고, 그런 문화적 문제로 인해 필요 이상으로 사람의 목숨을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 20세기 후반이 되자 한국은 민주주의 체계가 정립되었다. 무고한 사람들이 지하고문실로 끌려가서 물고문이나 전기고문을 받지 않게 되었고, 의문의 실족사나 행방불명도 되는 일도 드물게 되었다. 민주주의체계를 보자면 정치사회적인 여건이나, 이것도 하나의 문화적 요건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우리 역사를 유교문화국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조선은 유교가 종교이며 정치이며, 철학이며 하나의 삶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나, 거대한 시스템이란 체계구조에서 유교가 하나의 큰 틀이었기 때문이다. 유교사회의 지배계층과 더불어 우리의 역사에 남기는 존재는 대부분 양반 사대부들이다. 사대부들의 역할을 두고 공자의 <논어>와 관한 책을 조금이라도 읽는다면 전혀 다른 양상으로 가지만, 그래도 공자의 사상을 유지하려는 사람도 제법 많았다. 이런 사회에서 부모가 죽는다는 것은 엄청 큰 불운이었고, 특히 집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더욱 큰 불운이었다.

 

가부장 사회라는 점도 있지만, 한국에서 역사적으로나 혹은 신화학적 연구에서 제일 심한 욕이 후레자식이다. 아비 없는 놈이라는 의미이다. 아비 없이 자란 인물도 많고, 큰 업적도 남긴 분도 많다. 단지 아비가 없는 것은 경제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큰 상실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아비가 자식의 장성하는 모습을 본 후 세상을 떠나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아비를 잃은 자식에겐 큰 숙제가 남아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죽으면 묘비를 남기는데, 그 묘비를 새기는 일은 아무나 맡기는 게 아니라 주변에 큰 인물이나 대단한 명사에게 맡기는 것이 예의였다.

 

집안의 내력이 그래서인가? 아니면 개인적 성향이 작용한 게 아닐까 싶으나, 역사서적을 읽으면 한국 향교에 배향된 인물에서 사림집단의 시작점을 지난 후 인물 대부분이 서인들이 많다는 점이다. 특히 노론계통이 많았다. 한국의 유학자를 보면 서인이 아니라도 동인(북인과 남인)도 제법 올릴 사람이 많다. 남명 조식 같은 학자나 문도공 다산 정약용도 그렇다. 그러나 항교에 배향된 인물은 그렇지 못한 느낌이 다소 많이 든다.

 

어떻게 보면 어느 후손들에게 다소 불쾌감을 줄 수 있으나, 조선시대의 선비는 그런 소신과 처신의 삶에서 생애를 좌우했다. 왜 아비의 묘비가 중요한가? 광해군 이후 북인들이 득세 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득세하였는데, 서인들이 숙종 시절 남인을 무고하게 도륙한 이유로 소론과 노론으로 구분되었다. 이때 소론의 영수가 윤증, 그의 아버지는 윤선거이었다. 윤서거가 우암 송시열과 친한 사이였으나, 어느 순간 약간 미묘한 관계가 되었고, 윤증이 남인 영수인 백호 윤휴와 사이좋은 이유로 송시열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윤증의 아버지가 윤선거가 별세하자, 비문을 송시열에게 부탁했으나, 당시 송시열의 주자학의 절대적 신봉에 의해 윤선거의 묘비명은 조롱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노론과 소론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소신이 중요한 이유는 조선은 물질적 조건을 중시하는 현대가 아닌 정신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관념적 유교사회이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는 그 자식에게 위로하지 못할망정, 아비를 욕되게 하는 것은 원수로 지내자는 말과 같은 것이다. 소신의 시작은 미묘하게 틀어진다. 죽음과 배신, 그리고 거대한 피바람을 부는 숙청까지 이어진다. 노론과 소론은 숙종과 영조까지 이어지고, 경종의 독살설까지 이어진다. 하다못해 사도세자의 비극에도 이런 씨앗이 움트고 있을 줄 누가 아리랴?

 

조선의 선비는 참으로 바보 같기도 하지만, 때로는 비장미가 승화될 정도였다. 조선의 양반은 지배계급이기도 하나, 어떻게 보면 피지배계급보다 못한 경우도 많다. 심한 착취, 무능한 탐관오리만 아니면 백성은 그렇게 살기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삶은 임진왜란 이후로 계속 이어진 점이다. 백성이 어려우면 사대부의 역할은 백성에게 편한 삶을 살도록 열어주는 게 임무이다. 여기서 권력을 잡은 자들이 계속 이윤을 추구하면 문제가 발생된다. 소신과 처신, 권력과 막대한 경계점과 마주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중종반정 후 사림의 집권은 하지만, 기묘사화는 씻을 수 없는 피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에서 다소 비극적인 게, 기묘사회로 친척들이 화를 당한 동고 이준경이 나중에 중종에 의해 기용되어 선조까지 보필한 사례이다. 동고 이준경은 연산군에 의해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목숨을 잃게 되었다. 기묘사회에서 화를 당한 사촌형 탄수 이연경에게 글을 배운 이준경은 추후에 영의정까지 올라간다. 그런 그가 아주 침착한 처신을 하지만, 한편으로 마지막은 극렬한 반응을 보여준다.

 

이준경은 죽기 전 선조에게 상소를 올리는데, 당시 명사인 율곡 이이가 붕당의 문제점을 간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았고, 이이와 서인들은 이준경을 공격하지만, 죽기 전 고령의 대신이 남기는 상소이기에 조용히 넘어가는 것은 마무리 지었다. 이때 그를 도운 사람으로 서애 유성룡이 있었다. 유성룡은 이준경에 의해 천거되고, 유성룡은 충무공 이순신의 친구이다. 이준경은 이미 을묘왜변 때 왜구를 격퇴한 문관이기도 하니, 참으로 운명은 이상하게 돌아간다. 이준경은 가족들의 화를 당해도 참고 참아 국정을 수행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예언대로 붕당의 폐단은 일어나고, 이 책의 주인공인 송강 정철의 기축옥사를 발견한다.

 

이 책이 작가 분은 다소 나하고 성향은 다를지 모른다. 기축옥사에서 정개청은 반역을 주도한 게 아니라 오히려 사료를 다시 뒤집어보면 변방의 외적침입을 대비하기 위한 하나의 방어구축체계를 따랐으며, 그 체계는 궁술연습하다 반역으로 몰렸다. 기축옥사가 임진왜란 3년 전에 일어난 일에서 만일 기축옥사를 제대로 간파했다면 임진왜란의 양상이 다르게 갔을지 모른다. 임진왜란과 호란, 숙종에 이르러 임금은 권력이 약해지면서 권신을 이용하여 피바람을 일으킨다. 남인이라 해도 정약용이나 이가환, 채제공 같은 명재가 있는 것만은 아니고, 서인이라 해도 권력에 빠진 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간의 복수심과 증오로 피를 계속 피로 씻어 내릴 뿐이다. 연좌제로 걸려 귀양 가거나 사형 당하거나, 심지어 말 한 마디를 잘못해서 자신은 참수, 아들은 교수형, 며느리와 딸들은 관비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멀쩡히 산이나 변방에서 글을 읽다가 귀양 가거나 곤장을 맞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런 운명은 선비만이 아니다. 왕족은 더욱 심했다. 조선시대 가장 슬픈 왕자를 상기한다면 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자들은 시파, 여기에 반대하는 자는 벽파이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도 있지만, 정조의 형제도 있었다. 아니 정조의 조카도 있었지만, 대부분 귀양 내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솔직히 이 책에서 보고 놀라지만, 흥성대원군 고종의 아버지가 사도세자의 후손이란 점은 더욱 놀란다. 사도세자의 죽은 노론과의 정쟁으로 희생된 것이다. 자신의 종친들이 죽는 모습을 본 이하응은 자신이 왕족처럼 행동하기보단 거리의 건달 내지 바보처럼 행동했다. 그 덕분에 이항은 죽지 않고 국왕의 아버지 대원군이 되었다. 처신 중의 처신이 아닐 수가 없다. 소신을 내세운 왕족들은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소신과 처신 모두 다 지니어야 하는 상황은 무엇인가? 정약용은 1800년 정조대왕이 붕어하자, 다음 해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로 옥고를 당한다. 작은형 정약종은 한국만 아니라 세계 천주교회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매형 이승훈과 같이 참수되기 전 정약용은 국문에 나와 천주교와 관한 심문을 받는다. 이때 유명한 말로 자신은 나라의 신하이니 위로는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자신은 형님의 동생이니 형님을 고발할 수 없으니 결국 자신에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라고 했다.

 

상당히 모순된 발언이나 상당히 뛰어난 재치가 숨은 말이며, 때로는 자신의 소신이 담긴 발언이다. 정약용은 귀양 전 삶은 오로지 소신을 위한 삶이었다. 정조를 위해, 백성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정약용은 너무 완벽한 천재였다. 군자인 그가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사도세자의 업적을 기른 것은 벽파에게 큰 정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어느 권력자는 왜 정약용을 죽일 수 없느냐고 다른 대신에게 말하자, 그 말을 들은 대신은 하늘이 그러니 어찌 하겠소? 라고 할 정도이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오자 오로지 한 일은 학문의 연구이다. 해배된 후에도 학문의 연구이지만, 여유당이란 이름처럼 살얼음을 걷는 삶처럼 그는 소신과 처신의 사이에서 아주 절묘한 균형을 찾은 것이다. 당시에 역모들의 주범이라 들었던 정약용은 21세기에는 한국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에 하나이며,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학자이다(유네스코에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될 정도이니). 그분의 삶이 소신을 숨기기 위한 처신이니 참으로 선비의 운명은 기구했다. 21세기 한국에서 그 당시 권력을 위한 소신을 삶을 산 자들은 비난의 대상이, 백성을 위해 소신으로 죽은 자에게 다시 평가가 이루어진다.

 

생각해보면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지만, 인간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막상 이름만 남기고 죽으면 무슨 이유로 보람이 있을까 하나, 적어도 그 이름을 남긴 자들의 후예들에게 평생의 짐이 된다. 매국노 을사5적은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에 부와 권력을 잡았고, 현재도 어느 정도 잡고 있지만, 점점 갈수록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오욕으로 남는다. E.H 카가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 한다. 과거의 오점이 먼 미래의 후예에게 미치고, 현재의 상황이 과거를 바꾸기도 한다.

 

21세기 한국에서 소신의 삶을 살아가기 너무 힘든 것 같다. 바른 말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도 어렵다. 물론 처신도 더욱 힘든 것 같다. 처신은 자신의 몸만 무사하게 넘기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게 아니다. 자신의 가족과 주변까지 돌아봐야 한다. 눈앞으로 이익에 눈이 멀어 처신을 잘못하면 그 화가 언젠가 자신이 아닌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일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민주주의사회이기 때문에 목숨까지 잃는 경우는 종종 없지만, 조선은 연좌제도 강했고, 상대방을 무고할 때 그만큼의 죄를 되받는 반좌죄도 역시 무서웠다. 내가 상대방을 죽일 것을 건의하면 나도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권력만 믿고 행패를 부리다 능지처사 후 효수된다면, 죽기 전의 그 고통은 얼마나 괴로우며, 죽은 이후에 올 치욕은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가? 하지만 더 안타까운 일들은 그런 비극적인 일들은 권력자보단 권력자에 의해 희생된 자가 많았다. 백성들이 능지처사보단 그저 곤장이나 참수로 끝나지만, 선비사회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소신을 물리자니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배반하고, 소신에 너무 따르자니 화가 닥친다. 화를 받는 순간 목이 떨어지고, 화를 피하는 순간 화병으로 죽는다. 그래서 경종의 독살에 의심한 소론 김일경은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 라고 했는지 모른다.

 

지금 보면 너무 무모하지만, 다르게 보면 누군가 당산에게 소신이나 명분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자라고 듣는 것도 싫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걸핏하면 홧김에 하는 경우가 많으나 선비의 삶에서 소신과 현대인의 홧김에는 분명 차이는 있다. 어떻게 보면 소신의 삶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도 처신일지 모른다. 적어도 역사의 이름 앞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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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5 14: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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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5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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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종과 <임금님의 사건수첩>'

예종이란 임금은 재위기간이 매우 짧은 왕이었다. 본인 장남이 아닌 차남이었지만, 자신의 큰 형님이 병으로 죽어 아버지 세조를 대신하여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이 예종이다. 예종은 참으로 안타까운 왕이다. 그가 일찍 죽은 이유도 있지만, 아버지 세조는 역사의 역대평가에서 매우 좋지 못한 왕으로 평가되었다. 세조는 세종의 아들이고, 태종 이방원의 손자이다. 이방원은 철인군주에서 철인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철인적 정치기반이 없다면 세종대왕이란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다.
     
세종의 아들 문종과 세조, 형제는 매우 친하고 서로를 아꼈다. 사랑하는 친형을 보내고, 왜 조카를 죽이야 하는 삼촌이 되었을까? 태조 이방원은 고려를 역모하여 왕조를 일으킨 무관이다. 그의 아들 이방원은 무관의 아들로 태어나 무장으로 활약하였다. 임금이란 무릇 학문을 뜻을 두어 큰 대의를 지니어야 하나, 그가 가진 역사란 피로 얼룩진 나날이다.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자를 베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베였으며, 자신의 아들을 반항하려고 하던 자까지 베던 무정한 군주였다.
     
그러나 태종의 방침은 다 이유가 있다. 임금이란 무릇 만 백성의 아버지로 있어야 했다. 세자의 아들이나 혹은 왕실과 종친, 그리고 외척의 가족에 있어서 안 되었다. 만 백성이 아버지, 즉 어버이로 되려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했고, 백성의 억울함은 정치사회적 모순과 부조리고, 그 부조리를 일으키는 것은 권력을 잡은 인간이다. 권력을 가진 자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권력을 잡은 자는 임금이고, 임금은 측근에게 돌아가는 권력은 막강하다. 임금 스스로 권력을 좌지우지 하지 않으면 만 백성에게 일어날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멸사봉공, 말이야 쉽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임금님의 사건수첩>을 감상하면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왕은 왜 그렇게 행동해야 했을까? 조선왕조실록 모두를 아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조선의 역사에서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사이의 간극은 멈추지 않을 분쟁과 위기의 순간이다. 그 이유를 대자면 사실 세조가 일으킨 난이나 혹은 그 이후로 일어난 많은 역성과 반정, 전쟁과 조선의 패망조차 이 관계성에서 나온 하나의 법칙이었기 때문이다.
     
 
2. 지루하나 들어볼만한 조선역사 이야기
세종대왕 시절, 조선 최고의 명재상이 있었다. 그 이름은 황희 정승,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만한 이름이고, 황씨 문중에서 최근 어느 정치인 발언에 분노하게 만든 이름 중에 하나이다. 황희는 영의정이란 직책을 맡았다. 영의정이면 조선 정부조직 서열 2위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가난했고, 노년에도 세종의 엄청난 노동착취(인재 활용)에 의해 제대로 쉬지 못한 노인이었다. 황희 정승처럼 말 그대로 정사에만 몰두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황희가 너무 노약하자 그의 후계자로 장군 김종서를 키우려 한다. 김종서가 무관으로 생각하나 그도 역시 문관의 기질이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이다. 조선의 왕은 군주이나, 조선 군주의 후예 모둔 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왕의 후손 중 대군은 왕이 되지 못하고, 그의 후손은 사대부가 된다. 사대부가 되어도 입관하지 못하면 그대로 몰락할 수 있다. 그런다고 종실의 후손들은 왕족을 배신하지 않았다. 문제는 왕실이 사대부가 되듯이, 그 외의 사대부도 사대로 이어져 간다. 사대부(士大夫)에서 선비는 벼슬하지 않거나 5품의 벼슬까지 지칭하며, 대부는 4품 이상의 벼슬을 의미한다. 외국에서 군주가 있으면 귀족과 기사계급이 있다. 왕에게 충성하여 영지를 다스리거나 혹은 정사에 관여한다.
     
그러나 모든 귀족과 기사가 왕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충성하는 것은 왕인지 아니면 자신인지 모른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생명과 이기심에 충성하나, 그 이상으로 충성하거나 혹은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왕과 신하의 관계성은 여기서 문제가 발생된다. 왕의 권력이 너무 심하면 독재가 있어날 수 있으나, 너무 약할 경우 신하에 의해 위축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왕권의 확립이 중요한 것은 다 그 이유가 있다.
     
3. 왜 왕권인가?
 
신하의 권력이 심하면 왜 문제가 생기는가?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조선에서 왕권에서 신하의 권력으로 넘어간 계기는 다름 아래 중종반종이라 나는 생각한다. 중종은 자신이 왕이 될 것이란 생각도 없었고, 그저 재야에 편하게 머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복형인 연산군은 무섭고, 그의 폭종은 더욱 무서웠다. 연산군 폭정이 길어도 기간이 10년이 넘는다. 그러다 어느덧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중종반정의 명분은 연산군의 폭정과 반륜도 있다. 그렇다면 그가 한참 그런 폭정과 폐륜을 일삼을 때 역성혁명을 일으킨 게 아니라 한참 뒤에 일어난 것인가?
     
연산군은 낭비가 심했다. 술과 연회, 거기에 들어가는 많은 경비, 이때까지 연산군의 주변에서 벼슬하던 이들이 갑자기 반정을 일으킨다. 왜 그럴까? 그것은 낭비로 인해 부족한 재고를 채우기 위해 반정을 할 생각조차 없던 대신의 재산을 탐냈기 때문이다. 결국 재산, 가진 것에 대한 탐욕이다. 연산군의 어리석지만, 중종에 일어난 기묘사회처럼 중종시대 권력자들도 자신의 욕심으로 무고한 사화를 일으킨다. 예종이 왜 고민하고 그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는 것인가? 이런 역사적 맥락을 보면 조금 더 잘 알 수 있을지 않은가?
     
4. 영화는 픽션이나 전후맥락적으로 다르다.
 
영화에서 과학적 근거로 통해 많은 미스터리를 푸는 예종의 모습이 나온다. 괴물물고기나, 흔들리는 호리병이나 기타 등등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종이 권력이 없다는 점이다. 아버지 세조는 반정에 의해 옹립된 군주이고, 군조로 옹립될 때 3정승 체계에서 6판서 체계로 이전하려 했다. 그 의미는 3정승이 6판서의 정치적 입안을 왕에게 직접 다 올리지 않고, 중간에서 조절하는 것이다. 왕에게 모든 처분을 맡기지 않으면, 나머지 신하가 처리하고, 게다가 이조는 문관의 인사권, 병조는 무관의 인사권을 결정한다.
     
인사권을 가지면, 자신에게 유리한 사람에게 관직을 주고, 그 관직의 권력에 의해 정치적 변수가 일어난다. 예종은 아버지 세조에 의해 왕좌를 받은 인물이다. 반정공신은 아버지 세조를 돕기 때문에 그 권력이 막강하다. 세조가 문종과 단종의 충신 김종서를 죽인 이유는 권력의 유지와 더불어 권력이 신하보다 왕에게 더 가기 위해서이다. 예종은 영화에서 보면 외로운 임금이다. 이미 훈구대신이 혼사 정략으로 통해 사돈을 맺어 권력의 사슬을 굵게 다짐 이후에서 정사를 돌보고 있었던 것이다. 
     
5. 사관 윤이서의 등장
 
사관 윤이서는 아무런 권력적 사슬이 없다. 그가 사관이 되어 왕을 따르고, 다섯 걸음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이유는 윤이서에게 권력의 이해득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은 계속 독살설이나 암살설에 시달리는데, 그 이유는 신하들 사이 권력의 관계성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군주는 오로지 백성을 위해 산다. 백성의 배불리 생업에 보장케 하고, 억울한 일에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예종의 조카, 형님의 아들은 추후 조선 명군 중 하나인 성종이 된다. 연산군의 아버지이나, 그는 인간을 매우 아꼈다.
     
실록의 기록에서 어느 한 여종노비가 다리가 잘린 채 추위에 죽어가는 것을 발견하고, 극진한 간호를 명하고, 그 여종노비가 앞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조치하도록 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아무것도 되지 못한 여종, 관비도 아닌 사비이면 그 처지는 비참했다. 그러나 성종은 그 노비를 위해 정성을 다 했으며, 조선왕조에서 가뭄이나 홍수가 들어서면 임금은 직접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스스로를 책문했다. 백성이 괴로운 이유는 그들의 물질적 주인인 양반이 문제였다. 권력을 가진 이유로 노비나 백성을 괴롭히고, 백성의 재산을 빼앗았다.
     
그런 양반들이 계속 관직에 출세하고, 권력의 고리는 계속 연결되어 깨지지 않으면 어째 백성의 고통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벼슬 중에 특히 문관, 그중에 임금 곁에 있을 수 있는 자는 양반사대부 집안의 문관이다. 그런 문관이 권력과 밀접한 순간 왕의 개혁의지는 이미 수가 틀리게 되는 것이다. 윤이서는 권력 사슬구조가 없으며, 부당한 일에 납득하지 못한다. 예종이 그를 거둔 이유는 기존 구조의 문제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서였다. 물론 구조보단 그 구조를 이루는 인간이 문제였다.
     
6. 경제학적 관점
 
조선의 군주와 사대부는 백성의 경제적 상황이 중요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돈만이 아니라 배불리 먹고 제대로 된 물건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 되는가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철광석이다. 철은 인류가 모든 발전을 하기 위한 물질이다. 무기에서 검과 창이 되고, 집과 배를 만드는 구조물이며, 인류역사에서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한 기초적 광물이 철이다. 그 철이 누군가 독점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조선은 자본주의 국가, 아니 근대국가는 아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특성에서 재료의 중요성은 보인다, 지금도 건설현장에서 레미콘 톤당 가격이 무척 중요하다. 하물며 철이면 얼마나 더 심한가? 누군가 철광석의 존재를 숨기고, 그것을 독점하면 어찌 되는가? 국가는 비싼 것에 무기를 만든 원자재 철을 구매하고, 백성은 생활용구 원자재인 철을 구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한다. 결국 국가가 빈곤해지고, 백성 역시 삶이 수척해진다.
     
영화가 비록 조선이란 이전시대를 현대적 감각을 다소 반영했다지만,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요건을 배제할 수 없다. 서양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경제학을 강조하는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적재적소에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에서 시작된다. 지금 우리의 경제적 관념과 경제학의 경제관념은 다르지만, 영화에서 경제학적 관점은 백성에게 필요한 철의 제공이 원활하게 되어야 하나, 누군가 그 철광석을 일부러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이 보낸 밀사조차 암살당하고, 왕의 목을 노리는 자들도 속출한다.
     
7. 코미디지만 코미디가 아니다.
 
<임금님의 사건수첩>은 예종과 사관 2사람의 이상한 플레이로 웃음을 자아낸다. 모든 것을 기억하나 다소 얼이 빠진 사관, 그리고 똑똑하지만 엉뚱하고 자애로운 군주, 이들이 왕권을 위해 움직이려 하나, 주변은 온통 적이다. 장면을 보면 예종이 죽은 것처럼 소문나자 모든 고위대신들이 속이 편한 것처럼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백성들은 철이 비싸서 생계에 많은 부담이 와도 이들에게 큰 문제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왕이 개혁안을 내놓으려 하면 백성의 이름으로 만류한다.
     
백성의 이름은 팔아먹으면서 백성의 등골을 빠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예종의 모습은 보면 엉뚱하더라도 성군(聖君)이고 명군(明君)이다. 하지만 그런 군주일수록 간신배에겐 그저 불편한 임금에 불과하다. 임금은 외로웠다. 그리고 백성들은 혼란에 빠진다. 예종이 보여주는 기상천외한 과학, 판단력, 인덕은 분명 생각해 볼 수 있으나, 그가 넘지 못한 벽은 여실히 보여준다. 형님의 아들 성종을 아끼는 그의 마음에서 알 수 있다. 고위대신이 종실을 이간질하는 책략에서 예종은 오히려 종친을 지키려 하는 모습이 나온다.
     
성종 다음 중종은 명군 대신 용군(庸君)으로 통한다. 명종과 선조 역시 사화와 옥사를 일으키고 인조는 전쟁의 화를 만들고, 숙종은 용군의 특성을 이용하여 정치적으로 피를 흘리게 만든다. 정치적으로 군주의 위치가 불안하면 신하들 사이에서 이간질과 정치적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예종은 종실을 지킨다고 하나, 후에 그것은 좌절된다. 그래도 성종의 업적인 경국대전의 초석을 마련한 것이 예종이니 어찌 큰 업적을 남기지 않았는가? 
     
8. 영화의 흐름과 원작, 시대적 조건
 
영화는 예종의 엉뚱한 사관의 어설픈 행동을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만들어낸다. 웃음이 나오지만 웃음이 나오기도 어렵다. 이 영화의 원작은 직접 본 것은 아니나, 원작은 만화책인 것으로 안다. 예종은 20살 정도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배우 이선균 씨는 나이가 제법 있으나 20살의 연기를 맡아야 했다. 게다가 예종은 젊은 나이에 운명을 하고 만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무술실력이 매우 뛰어난 장수이고, 이방원과 그의 후손 왕조 역시 무술이 뛰어난 군주(효종과 사도세자)는 많으나, 예종의 무술을 보면 너무 지나치게 수준이 높다. 무관으로 입관하여 오랑캐가 출몰하는 국경의 부사 내지 무관의 무술실력은 보통은 아니다. 작가의 마인드나 영화연출을 위한 장면이겠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너무 예종은 띄워준 것은 아닌가 싶다.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와 암수는 리뷰에 올리지 않겠지만,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임금이란 자리와 더불어 임금을 중심으로 둘러싼 신하들의 권력관계이다.
     
조선이 몰락하고 망한 이유는 바로 왕권의 몰락이다. 태종시대에 누가 조금이라도 백성의 재산을 탐닉하거나 혹은 국가 재산을 가로채면 용서란 없었다. 왕자의 난이 2번 일어나 형제를 죽인 정도이니 그 처참함을 생각이라도 할 수 있을까? 예종에겐 그런 증조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쓸쓸한 임금, 그 옆에 지키고 있는 오보 윤이서지만, 권력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영화 <사도>에서 송강호 씨는 영조를 맡는데, 그때 대사 중에 이 장면이 인상이 깊다.
     
단지 대사 모두가 기억나지 않지만, “왕이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신하가 결정한 사항에 대하여 책임지는 잘기이다.” 이미 영조는 조선왕조의 권력이 임금이 아니라 신하에게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조는 조선의 권력이 노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노론에 의해 임금이 된 왕이다. 형님 경종의 죽음에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평생 후회한 임금, 그 모든 것은 조선왕조의 권력이 군주정이 아닌 신하들의 중심이고, 그 신하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정치권력이 이익에 의해 움직이니 당연히 백성들은 슬퍼하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예종이 그렇게도 바삐 움직이는 이유에 대해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영화는 픽션이어도 예종의 입장에서 픽션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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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위의 역사 - 역사학자, 조선을 읽고 대한민국을 말하다
이덕일 지음 / 인문서원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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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오래된 동네 친구와 그냥 하랄 것 없이 집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한 번씩 박물관에 가서 쉬는 경우가 있다. 박물관 입장이 무료에다가 집하고 가까우니 아무런 부담 없이 주말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그곳을 방문하면서 나는 조금 놀라게 되었다. 그곳의 상시 전시장으로 해양박물역사관이 있고, 한국의 해양인물, 해군의 영원히 군신, 조선의 성웅인 충무공 이순신 기록문헌이 있다. 내가 읽은 책이 이덕일의 <칼날 위의 역사>이다. 그런데 전시관에 가보니 이순신이 자신의 방에 항상 장식해둔 장검이 전시관에 배치되어 있던 것이다.

 

물론 원본은 다른 곳에 있지만, 복제한 전시품이라 해도 충무공의 정신을 알 수 있었다. 3, 대략 길이가 보통 남성의 키와 유사한 도()를 보는데, 죽고자 하면 살 것이오, 살자고 하면 죽을 것이란 글귀가 적힌 한자가 눈에 들어왔다. <칼날 위의 역사>에서 나온 이순신 장군의 칼과, 전시관에서 본 칼을 보면서 이런 상황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번에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라는 책을 보고 서평을 적었는데, 이번에도 그 서평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서평이 되었다.

 

이순신 하면 성웅이기도 하나, 한국 전사인 조선왕조실록에서 전쟁사만이 아니라 정치와 외교까지 영역을 넓힐 수밖에 없다. 조선의 초기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그가 왕권을 유지하려한 이유는 고려시대 백성들의 생활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고관대작부터 시작하여 하급관리까지 백성을 수탈하는데, 그 근본이 권력의 유착성과 재산의 분배였다. 한 권력자에게 재물이 모이면, 누군가 그 재물을 위한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조선시대까지 1차 산업시대, 즉 농업을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정리된 사회이다.

 

조선이 멸망하여 일제로 들어가면서 2차 산업이 도입되고, 한국정부 수립 후 근대화 이름으로 사회가 급속으로 변화해도, 근본은 농촌사회라는 점이다. 아직까지 시골 농촌이 도시와 비교하여 전통문화가 잘 유지되는 이유는 농업이 기반 되었기 때문이다. 농업의 기반은 농민이 주도로 생업에 종사되어야 하는 게 정론이다. 농민 그리고 평민 내지 양인이 많아야 재정도 탄실하고, 부국강병이 된다. 하지만 농민이 가진 땅이 적어지고, 그들의 생계가 어려워지면 국가재정이 파탄하고, 전쟁의 위기에서 패망의 길로 접어든다.

 

프랑스 대혁명의 아버지면서 세계 민주주의사상을 만들어준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민이 저절로 늘어나는 국가는 발전하나, 인민이 저절로 줄어드는 국가는 망한다고 했다. 사회계약론이 정치철학적 도서이기도 하나, 루소의 사상은 정치학을 떠나 경제학, 즉 정치경제학적 영역에서도 중요하다. 인구의 배분, 국민의 생계현황은 국가의 위기에서 어떤 상황으로 이끌어주는지 잘 알려준다. 조선은 바로 이런 문제로 시작된 국가이나, 이런 문제로 망한 국가이다.

 

태종 이방원은 외척과 고관대신의 비리와 부정을 용서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형제, 아들, 조카까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만일 그들의 비리와 부정을 눈을 감아주면 그것에 의해 백성이 피해보고, 그들이 피해보면 국가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또한 약자들은 강자의 부당한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계속 피해를 본다면 국가 존위에 막중한 위기를 주는 점이다. 태종의 사상은 세종대왕의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주는 계기지만, 세종이 다시 정승제의 도입은 세조의 쿠데타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단지 세종은 황희 정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의정이 중심으로 6조를 관리하든지 혹은 왕이 직접 6조를 대면하든 문제는 사람이었다. 인물을 보고 잘 판단하는 것은 중요한 점은 역사로 통해 알 수 있다. <칼날 위의 역사>2016년에 나온 도서이고, 그 책에서 나온 일들은 700년 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이어진다. 과거의 일이 과거만이 아니라 현대에도 계속 비슷한 일이 다시 돌아오는 점이다. 조선시대 권력층과 지식인은 사대부이나, 한편으로 양반 사대부들은 칼날에서 언제나 목을 갖다 바쳐야 했다.

 

그들의 죽음은 권력에 저항했기에 권력을 승복했기에 권력에 의존했기에 권력을 이용했기에 그렇다. 애초부터 태종의 조치나, 연산군의 사화나, 기묘사화, 윤휴의 죽음, 이순신 죽음, 류성룡의 기각, 정조의 의문스러운 붕어조차 그렇다. 대한민국에 비명으로 죽은 어느 한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 아니라 조선 역사에서 바른 말하던 사람들은 모조리 죽고, 피지배자 계급인 약자는 평생 억압을 받고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한 채 서러운 인생을 살아야 했다고 말한다. 생각하면 정말 그런 것 같다.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집에 있는 족보는 결국 나의 소유물이 되었다. 이전부터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혹은 아버지가 병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족보를 틈틈이 보게 되었다.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실 적에 나의 친할아버지는 3권짜리 족보를 유산으로 들고 갔다. 재물보단 족보를 선택하였다. 그 족보는 아버지로 넘어가 이제 나에게 돌아왔다. 과거의 이야기에 매달리는 것을 바보 같다고 보나, 그건 아니라 본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를 열광적으로 시청하면서 집안의 족보는 우습게 보는 사람이야말로 한심한 것이다.

 

족보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을 했는데, 그 시기가 중종이었다. 이분이 중종 이전 연산군 시절에 진위장군(振威將軍)에서 사간원 정언(正言) 자리를 맡았는데, 연산군 10년차에 만화석(滿花席) 문제로 장 70대를 맞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물론 장을 맞기 전에 연산군 시절 내내 비리나 부정, 혹은 잘못된 것에 대해 계속 상소나 진언을 올렸다. 결국 바른 말을 하다가 화를 당한 것이다. 그래서 병조참의공비문을 보면, 이분의 업적이 나오는데, 최고의 업적은 자식을 많이 두어 집안을 번창하게 해준 공이다. 지금의 내가 있는 것도 이분의 덕분이지만, 이분의 비문을 보면 그렇게 즐겁지는 않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순국했는데, 비문을 보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순국한 이름이 너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할아버지의 종형제 후손은 충무공 진영을 도와주기 위해 진군 중 적군과 만나 순국하고, 그 소식을 충무공 이순신 이억기 수사가 듣자 분통을 참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억기는 전투 중에 죽고, 이순신은 친우 류성룡이 실각되자 희망을 잃는다. 아무 생각이 없던 과거에는 그저 드라마(<불멸의 이순신>)에서 드라마틱한 상황으로 보겠지만, 가문의 사연에서는 한탄스러운 이야기이다.

 

<칼날 위의 역사>를 보면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게 아니라 되풀이 된다는 식으로 정리된다. 과거 조상들에게 닥친 일들이 지난 일이 아니라 나에게도 비슷한 일들이 닥칠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권력에 의한 무고한 신하를 죽이고, 권력을 위해 임금을 속이는 행위에서 그 모든 피해는 백성에게 부가된다. 사간원 청빈한 자리이고, 모든 백성의 눈총을 받는 자리이다. 그런 만큼 위험한 자리이면서 권력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청백한 관료들은 권력자들에게 박해받고, 권력을 오로지 권력을 위해 존재하는 지난 역사를 보면서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순신을 몰아낸 서인들은 노론으로 이어지고, 노론은 을사오적의 뿌리이다. 노론의 역사는 400년이나, 우리 사회에서 그들이 만들어낸 사회적 통념은 아직도 은근히 남아있다. 과거에 집착해서는 아니 되고, 과거의 폐단을 고쳐가는 게 정당하나, 그런다고 과거를 버리는 것은 우리의 지금을 완전 부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점조차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솔직히 조선이 과거의 유물이라 해도 조선의 관직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권력의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각각 인사권과 수사권을 분산하고, 서로 간의 부정부패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관료제를 보면서 아무리 조선이 낡은 것이라 해도 현재 관료조직보다 훌륭한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단지 일당으로 채워진 관료는 심각한 폐단이 되었을 뿐이다.

 

지금은 당론정치가 국회와 정부 수장에게 주어지지, 하부 관료들에겐 당론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당론의 주장이 하부관료들에게 운영지침이 되는 것도 현실이다. 조직만큼이나 중요한 인물, 인물을 찾아내거나 혹은 검증하기 위한 제도, 비선제도를 엄연히 통제하기 위한 시스템 구축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모든 오류와 왜곡은 백성들에게 피해로 이어지고, 백성이 가난하면 나라는 망한다. 대한민국은 왕조국가에서 민주국가로 되나, 민주정이나 군주정이나 근본은 같다.

 

백성, 국민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기 위해서이다. 국민이 아닌 권력자를 위한 정치란 곧 망국의 시작이다. 국가의 주인이 바뀌어도, 국가의 존립자체에서 그 근본 토대는 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을 망각하고 날뛰는 세력은 여전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과거에는 그것을 바꿀 힘을 국민에게 주지 않았으나, 이제는 국민만이 바꿀 힘을 가지고 있다. 대신 국민 스스로가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그 고통의 나날은 변하지 않고 지속될 뿐이다. <칼날 위의 역사>에서 조선은 칼로서 목을 베나, 현대는 칼보다 더 무서운 무기들이 나온다. 인터넷의 정보와 첨단무기 등등, 어찌 보면 오늘 우리는 칼날 위가 아니라 미사일 위에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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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3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23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 한 인간을 둘러싼 300년 신화의 가면 벗기기, 전면 개정판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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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예전의 일이다. 아버지가 제법 건강한 상태에서 배를 타고 때이다. 아버지와 나는 당시 TV를 보면서 역사관련 영상물을 보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송강 정철이었다. 송강 정철이라면 선조 시대 아주 유명한 정치가이고, 명문가이며, 국어교과서에 가사문학의 대가로 나온다. 그런 정철을 보는 아버지의 시선은 조금 의아했다. 송강 정철은 유배가면서 사미인곡을 저술했는데, 임금에 대한 그리움과 나라를 걱정하는 충신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말한 것은 송강 정철은 아주 아부를 잘 하며, 그래 훌륭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했다.

 

당시 나로서는 알 수는 없었지만, 어느 날 그것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게 되었다. 5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라도 과거의 인간으로 끝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철이 기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많은 문무백관과 선비를 죽게 만들었다. 당시 기축옥사 발화점이 서인이던 정여립이 남인과 어울리면서 이것에 대한 불만이 이상하게 터진 것이다. 물론 동인(남인과 북인의 이전 통합세력)이 서인의 반대세력은 맞으나, 권력관계에서 이상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동인의, 영수 이발이 기축옥사로 죽게 되는데, 이발이 죽게 되면서 그의 노모와 아들까지 옥사로 죽고 만다.

 

이발의 노모 연세는 팔순을 지났고, 어린 아들은 아직 10살 밖에 되지 않았다. 아들과 아버지가 역모와 아무 관계도 없는데도, 국문에 불러와 고문을 받은 할머니와 손자는 그대로 차가운 시신이 되었다. 이발의 노모에게 남동생이 있었다. 그 남동생도 기축옥사와 연루되어 귀양 가는 길에서 객사하고 만다. 기축옥사는 430년 전의 일이다. 생각한다면 아득한 과거이나, 문제는 그 이발의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내 직계할아버지와 6촌 관계였다. 정여립의 주요 활동처가 전남이었는데, 강진과 해남 일대에 이발의 외가 친척들이 포진한 곳이다.

 

지금이야 촌수 6촌도 잘 모르는 시대지만, 당시는 형제와 부모 그리고 일가들이 같은 마을에 무리지어 살거나 설사 같이 있지 않더라도 다소 가까운 자리에 머물며 왕래가 잦았다. 정철의 서인과 남인의 관계는 1589년 기축옥사를 시작하여 학봉 김성일이 왜국의 시찰가던 일까지 파장을 일으킨다. 학봉 김성일은 남인계통 문관이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사람이다. 같이 일본에 간 사람이 서인이었고, 남인과 서인의 관계가 틀어질 때,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그런 관계성은 잘 보여준다.

 

흔히 임진왜란에 활약한 인물하면 바로 이순신, 이억기, 곽재우 등을 떠오른다. 문제는 이순신과 그 친구 서애 류성룡은 남인 계열이고, 곽재우와 정인홍은 북인 계열이다. 남인 영수 류성룡이 왜국과 임진왜란을 종결한 이유로 탄핵받아 평생 안동에 머물다 울화병으로 인해 생을 마감한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 송시열이 나오기 전에 이미 정철과 류성룡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오래된 원한과 권력투쟁에서 시작된 비극이란 점이다. 광해군 시기는 북인이 대세였고, 그 밖의 서인과 남인이 연합한다고 해도, 남인의 대우는 다시 집안의 가계를 생각하면 틀이 맞는다.

 

내 직계 할아버지 1분은 무반으로 입관하여 함경도 북청군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이가 70세가 넘어 그런 추운 오지에 보내는 것은 솔직히 죽어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훈련원정(訓鍊院正)을 역임했는데,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은 타개책으로 양반이 아닌 천민이 왜군 하나를 죽이면, 면천을, 2면은 호위무사, 어느 이상이 되면 충분한 직급을 주어 출세하게 해준다는 정책이었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여기에 군사를 양성한다면 충분히 병력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기존 사대부계층의 특권에 큰 반류가 형성되므로, 기득권을 잡은 양반들에게 반발을 당했다. 군역과 세금문제에 류성룡은 실각하게 되고, 조광조 역시 기묘사화로 당하고, 백호 윤휴도 죽임을 당한다.

 

문제는 류성룡과 윤휴의 실각에서 반대세력이 깊숙하게 개입하고, 윤휴에 이르면 노론과 노론 영수 송시열의 권력에 의해 이루어진 점이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이해라면 여러 가지 정황을 이해하는 것이고, 나는 거기에 집안의 내력에 대입한 셈이다. 한국의 조선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있다. 그분이 서가한지 100년 정도 지나 일제 치하에서도 그분의 책이 제대로 융통되지 못했다. 그만큼 역사에서 보인 권력의 욕망은 세대를 지나 영원불구로 가려는 것 같다.

 

물론 송시열은 유학자로 실력이 뛰어나고, 우암연구소가 생길 정도로 현대 한국에서 큰 인정을 받는 선비이나, 그의 신화는 그의 진정한 모습보단 후대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이야기가 많다는 게 이책의 요점이다. 율곡 이이는 서인의 학문적 스승이다. 이에 반대되는 사람은 퇴계 이황이다. 남인과 서인은 초반에 같은 사림의 동료지만, 어느덧 죽고 죽이는 사이가 되었다. 이이의 연구자료를 보면 그는 임진왜란 전 10만 대군 양병성을 주장하지 않았으나, 후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송시열의 북벌론은 그가 주장한 게 아니라 윤휴의 주장이었다.

 

윤휴는 효종과 현종 시대 계속 북벌론을 주장하고, 이에 대한 대책은 양인의 양성, 군병의 보강이다. 양인의 보강은 노비를 줄여 농사짓는 평민을 늘려 재정자원을 확보하고, 양민에게 입관할 기회를 주어 병력보강을 하자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이 만든 기획안은 이미 폐기되었고, 거기에 동참한 무관과 평민, 노비 모두 귀양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숭명반청을 외친 사대부사회라고 실제는 그렇지 않고, 단지 자신들의 이익에 몰두한 셈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나친 강요와 집착은 그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진 사상적 기반을 철학적 사유와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하나의 통치방법론으로 만들어버린다.

 

주자가 만든 성리학은 결국 공자맹자가 만든 유학을 변용할 뿐이다. 공자는 선비를 두고 백성들이 평안히 자신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이라 말한다. 말 그대로 생업에 종사하더라도, 여러 가지 행정이나 학문적 도움이 필요하면 여기에 선비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 했다. 하지만 양반들은 권력을 누리기 위해 기득권을 놓지 않았고, 세금과 병역폐단은 이미 뿌리깊이 못이 박혀버렸다. 우암 송시열과 그들의 세력에게 농민과 노비의 운명은 중요하지 않았다.

 

송시열은 자신의 이익에 치중하지 않았지만, 송시열을 따른 무리들은 송시열이란 인물로 통해 이익을 추구하려 했다. 현종 사후, 숙종이 등극할 때, 숙종은 매우 무서운 군주였다. 숙종은 장인과 외척세력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기 위해 공작정치를 했다. 송시열도 여기에 한몫했다는 점에서 그는 권력에 대한 집요한 집착이 있었다. 물론 반대세력 남인도 존재했다. 하지만 학문과 학문으로 통해보는 왕조시대에 송시열은 조선을 왕권이 아닌 신권이 중시되어야 주장했다.

 

왕권이 강화되면 사대부들이 누릴 이익과 기득권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이익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런 것보다 자신의 관점에서 정립되어야 주자학을 절대성의 불가침에 집착한 셈이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지니 거기에 따른다면 어떤 문제에 봉착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인가? 예송논쟁에서 임금이 장남이든 차남의 관계보단 왕이란 직분이 중요했지만, 오히려 사대부와 동일한 시점에서 파악하려 했다는 점이다. 왕과의 권력관계 주도성이 신하에게 가면서 임금이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절대적으로 보장해주어야 할 보증인이 된 것이다.

 

만일 거기에 의문이나 반대론을 주장하면 가만히 두지 않았다. 많은 피를 뿌렸고, 영원히 희생당한 자들의 자손까지 피를 보게 만들었다. 송시열의 주적에서 백호 윤휴가 있지만, 또 하나는 고산 윤선도가 있다. 윤선도는 기축옥사 죽은 이발에게 외삼촌의 손자이다. 서인에게 대한 분노와 원망에서 가족을 잃은 윤선도의 입장에서 천하의 원수이고, 임금에 대한 충정에서 왕조국가 군주정을 위협하는 세력이다. 그러나 서인에 의한 인조반정은 이미 기울어진 축구장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조선왕조는 이어갔다.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인 정조시대 다산 정약용이 등장해도, 그의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의 직계 후손이었다. 정약용이 남긴 글에서 조선의 한 사람에게 매우 따르는 것에 대해 깊이 우려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한 사람은 여기서의 송시열을 의미한다. 예송논쟁은 350년 전에 일어난 일이나, 지금도 문제가 되는 내용이고, 450년 전의 기축옥사의 억울함 역시 지금도 역사학자들에게 늘 새로운 숙제로 등장한다. 권력을 잡기 위한 사대주의적 태도는 늘 우리 한국사회에서 자주성을 놓치게 만드는 요인이다.

 

문제는 그런 흐름이 이미 450년 전후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역사를 보면 지금을 알고, 지금을 알아 가면 미래에 우리가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 생각할 수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E.H 카가 역사란 과거와 현재가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화라고 지칭한다. 지난 일이 뭐가 중요하냐는 말에 그 사람의 불과 1일 내지 1년 전에 일어난 불행한 일조차 하나의 역사이다. 단지 우리의 역사는 국가적 틀에서 보겠지만, 국가나 개인에게 일어난 시간적 흐름을 그대로 흘러 보낸다는 것은 정말 위험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란 지금의 현실이 만들어진 것을 알게 해주는 스토리텔링이라 생각한다. 스토리텔링의 이야기구조에서 Narrative의 시작과 끝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단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통해 어떤 이데올로기가 함축되어진 것인지 알아가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관점은 화자 내지 화자를 형성하는 어떤 특정세력에 의해 의미로 만들어질 수 있다. 21세기 한국에서 향교에 가면 공자와 맹자, 그리고 조광조와 이황 같은 유학자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그러나 이중에 송시열이란 이름도 당당히 들어가 있다.

 

노론 일당독재 시대를 수 백 년을 거친 조선에서 송시열의 존재란 당연히 신성시 되어야 할 존재일 것이다. 물론 그의 학문의 정신과 깊이는 엄청나지만, 그가 가지고 온 학문의 자율적인 관점, 그리고 상대방의 무관용은 조선의 정치사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서평을 적으면 생각하나,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인물을 주요인물만 생각해야 하나, 진정한 인물을 보는 것은 그 인물이 무엇을 하려 했고, 누구를 통해 무엇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다.

 

조선 사대부는 지식인이고 엘리트이다. 그들이 지식인이라면 민중, 즉 백성의 의향을 정치권과 학문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정도의 학문이다. 그런 학문과 정치를 하지 않은 사대부는 그저 권력만 치중한 소인배 일뿐이다. 소인배는 대의라는 이름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나, 대인은 대의라는 큰 의지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작은 것 하나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주자가 만든 소학을 읽으면 작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이 마주해야 할 작은 대상도 포함되어야 한다. 임금을 구중궁궐에 앉아있지만, 도탄에 빠진 백성의 눈물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백성들의 작은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하는 게 정치의 기본도덕이나, 과연 거기에 충실하였다면 그는 분명 훌륭한 정치가이나, 그렇지 못하면 권력자들에게 훌륭한 상징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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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4-21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님 심정을 저도 이해 됩니다. 저도 광산 이씨집안이고, 할아버지 중 한 분이 말씀하신 이 발 자 할아버지셔서 공감이 가네요...지금도 집안에서는 정씨 집안과 혼인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저는 한 편으로는 정 철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적 문제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드네요...

만화애니비평 2017-04-22 08:10   좋아요 1 | URL
기축옥사와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집안에 화를 너무 당한지라 참 끔직해보이더군요. 장형 참 무섭더군요. 장형 1대만 맞아도 고통이 이만전만 아닌데 수십대를 맞은 할머니와 어린아이에겐 무슨 죄가 있는지.
기록을 보니 당시 광산 이씨의 씨를 말리려 했다는 글에 깜짝 놀랐습니다.
광주(광산) 이씨 중 국상 동고 이준경이란 분이 운명하기 전 붕당의 폐단을
지적하는데, 그 폐단의 화염이 바로 정철이란 아이러니하군요

2017-04-22 0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22 0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22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 - 무지와 오해로 얼룩진 사극 속 전통 무예
최형국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집안 문중에서 발간한 도서를 보면 반드시 등장하는 그림이 있다. 자신의 얼굴을 그린 자화상이 현재 국보 240호로 되어 있고, 그의 작품 중에 유명한 것으로 <유하백마도>가 있다. 백마를 그린 이 작품을 본다면 당시 한국의 말들, 즉 조선의 마필은 우리가 TV에서 보는 말하고 상당히 다르다. 우리가 보는 말은 다리가 매우 길고, 몸매가 매우 날씬하여 승마용으로 사용되는 말들이다. 그러나 조선의 말은 덩치가 크고, 다리가 그렇게 길지 않으나 다리 굵기가 매우 굵은 편이다. 제주도의 조랑말이나 혹은 조선의 여타 지역의 말은 보면 키가 그렇게 높지 않으나 덩치나 다리 굵기가 매우 튼튼해 보이는 점이 특징이다.

 

한국의 지리를 잘 생각해보자. 유럽의 지형은 일부지역은 제외하면 대부분 평야들판이다. 산이 많지 않고 오히려 큰 하천을 중심으로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하상계수, 하천의 경사가 급한 한국의 지형에서 서양의 말들, 특히 경마공원에서 보이는 말들이 제대로 달릴 수가 없다.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구릉지에 도로를 만들고, 산을 깎아내려 거대한 대규모 단지를 만든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개발이 덜 된 지역을 가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한국의 산세는 그렇게 평탄한 편이 아니란 점이다. 배산임수(背山臨水), 산을 뒤로 하고 강이 앞에 있는 지형은 전형적인 한국의 전통적인 삶의 형태이다.

 

산에서 나무도 하고, 열매를 채집하며, 사람이 죽으면 산에서 장례식절차를 밟는다. 강이 옆에 있으면 논에 물을 대고, 식수도 구한다. 산이 많은 지형에 경기용 승마들이 달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TV 사극이나 하다못해 역사를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도 서양식 마필과 안정까지 등장한다. 역사적 고증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학자들도 과연 얼마나 여기에 집중하고 하는지 모르나, 대부분 국민들이 접하는 역사는 중고교 과정의 국사 혹은 대학에서 배우는 교양 선택과목 수준이다.

 

그 외는 TV에서 보는 것인 역사이다. 주몽이 누구냐고 물으면 고구려의 창시자로 인식하기보단 오히려 탤런트 송일국 씨를 생각할 것이다. 태왕사신기에서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을 소재로 한다면, 광개토대왕을 사람들은 떠오르기보단 배용준 씨를 더 먼저 생각 낼 것이다. 물론 배우의 인기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분명한 것은 어쩔 수 없으나, 하다못해 역사적 고증절차는 신경 써야 하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나라는 안타깝게 일제 치하 시대와 한국전쟁으로 많은 문화유산을 소실했다.

 

조선시대나 그 이전에도 전쟁에 의해 문화재들이 모두 소실되는 경우가 많다. 아주 사소한 단서로 역사의 형태를 복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에서 작가는 이런 문제를 잘 지적했다. 그는 처음부터 E.H Carr<역사란 무엇인가> 한 대목을 제기한다. 역사라는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계속 대화하는 점이다. 과거의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하나의 사실보단 현재의 상황에 따라 새롭게 재구성되는 현재형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조선의 병사들은 삼지창처럼 생기 당파를 들고 싸웠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파는 베거나 찌르는 도구로 사용하기에 많은 문제가 있다. 당파는 창의 길이처럼 되어 있으나 창처럼 길게 찌르기에 부적합하고, 환도처럼 베는 것도 어렵다. 무기는 단순히 폼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이 거기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면 조선의 병사들은 당파만 들고 있다. 오히려 일반적인 창이나 환도를 들고 있는 것이 적합한 게 아닐까 싶다.

 

대부분 병사들은 당파만 사용하는데, 당파 말고 다른 무기가 없는 것인가? 전쟁에서 무기의 백미는 20세기부터는 공중전, 16~19세기 전후로는 근대는 총과 대포, 그 이전에는 칼이다. 물론 근대전쟁에서 근접전에서 칼은 중요하다. 한국 군대를 입영하는 장병에게 총검술은 아직도 필수과목이다. 총에 검을 부착하여 적에게 직접적인 물리공격을 취하는 것은 공중에서 미사일을 날려도 유효하다. 다소 구시대적 발상이 아닐 수 없겠지만, 칼을 사용하는 것이 최고의 전략전술 뿐만 아니라 전투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칼을 사용할 때 보병과 기병의 차이에서 기병은 보통 칼집을 한 손에 잡고, 말고삐를 잡고 이동한다. 다르게 생각하면 말의 고삐는 두 손을 잡는 편이 더 안전하고, 말을 훨씬 조정하기 쉽다. 이 책에서는 기병은 어리에 허리끈처럼 생긴 띠에 칼집을 연결시켜 칼을 언제 어디에서 꺼낼 수 있도록 고안했다. 허리춤에 칼을 차는 것은 일본 왜구군사들이 많이 쓰던 방법이다. 무기나 갑옷 체계도 일본, 중국하고 분별하지 않은 게 많았던 것이다.

 

이러다보니 시청자들에겐 보이는 조선시대 전쟁은 그렇게 만들어진 사극에 의해 아니면 그 영화로 만든 장면에 바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의복은 어느 정도 거의 일치하지만, 전투장면은 언제나 볼거리로 만들어진 셈이다. 전쟁에서 장수는 언제나 군주나 군주 바로 밑에 있는 고위신료들이 지휘하는 것은 옳다. 적어도 국가가 처음 생길 때는 군주가 장수로 등장하여 부하를 이끄나, 국가체계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히면 장수가 앞에 나가 싸우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지휘관은 전장에서 부하를 이끌고 명령하는 존재지, 선발대 병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투구도 착용하지 않고, 맨 머리로 싸우는 형태, 칼을 한 번 베면 바로 죽는 장면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과거 전쟁에서 가장 많이 죽는 이유는 칼에 신체()가 절단되거나 과다한 출혈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처에 파상풍균 등과 같은 세균에 의한 패혈증 증세로 사망하는 경우가 높다. 갑주를 만들 때 그리 쉽게 칼에 베이거나 화살이 관통당하지 않는다. 화살도 깃이 3개가 정석인데, 우리가 보는 TV2개로 나온다. 조선시대 무기체계가 상당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어느 순간 한국 전통문화는 낡은 것이고, 그런 소재조차 고증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멋대로 만들어낸다.

 

현대 산업은 문화라는 콘텐츠를 통해 새로운 이익을 창출한다. 문화산업을 하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와 정체성을 드러나게 해주는 중요한 수단이다. 일본하면 유명한 소재는 사무라이이고, 중국하면 쿵푸나 소림사 권법이다. 유럽에도 유럽 나름의 문화재 소재를 항상 문화산업 매체에 반영한다. 그런 중요한 일에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자면 다소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다른 나라의 작품을 참고하는 것도 좋지만, 국내 사극드라마 전투장면은 일본 사무라이 장르를 어느 정도 따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드라마로 통해 조선시대 역사를 거의 배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도전과 이성계, 태종대왕과 세종대왕, 세조와 단종, 성종과 연산군, 정조와 영조 등등 그 시대의 인물은 우리가 직접 보지 않았기에 알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현대적 관점으로 복원하는 가이다. 지금 만일 이런 관점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우리의 먼 미래에 사는 한국인도 21세기 한국인에 대한 정의를 엉뚱하게 내릴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대해 아주 고리타분하고 지난 것은 보겠지만, 우리 역시 먼 미래에 아득한 과거에 불과하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는 책이 있듯이 우리의 미래는 결국 현대의 인간들이 조성한 토대에 의해 올라올 수밖에 없다. 과거의 모든 것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있었던 것을 모조리 부정하면 나라는 존재는 과연 어디에서 왔는지를 잃어버린다. 외국에 나가면 세계 문화유산을 접한 계기는 매우 많다. 하다못해 그 나라의 지역에서 조성된 유서 깊은 거리나 마을을 방문하면서 좋은 경험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우리나라에 대해 생각하면 깊은 관심을 표하지 않는다. 그렇게 깊게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나, 최소한 우리가 무엇인지 생각을 하고 주변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

 

나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관점, 그 무게의 중심을 잡은 후 서서히 주변을 확장하여 퍼져가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 중에 불교가 조선에 오면 조선의 불교가 아니라 부처의 조선이 되고, 유교가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유교가 아니라 공자의 조선이 된다는 말을 본 것 같다. 세계화 시대가 이미 지난 시대에 근대화란 이름은 이렇게 우리 스스로를 파괴했는지 모른다. 전통을 지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나, 전통도 새로운 문화적 형태를 받아들여 그 자체로 전통이 된다. 가령 우리 제사상을 보면 사과와 시금치가 올라오나, 그것들은 원래 한국 토지에 없던 작물이었다. 그러나 집안제사를 가면 사과는 항상 올라가는 과일이다.

 

한국 전통문화 제사조차 그러하니, 앞으로 한국의 다양한 문화가 그대로 유지되기보단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고증이나 제대로 된 장면을 위해서라면 그런 섬세한 요소를 제대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전에 읽은 책으로 <문무를 갖춘 양반의 나라>를 보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동반인 문관보단 서반이 무관의 수가 더 많았다. 집에 있는 족보를 봐도 나의 할아버지들은 문관보단 오히려 무관들이 더 많았다. 그 중에는 을묘왜변(1555) 때 왜구를 무찌른 만호공(萬戶公)도 계셨고, 임진왜란 시기에 무관을 하시 분도 계셨으며, 그 무관의 친척들은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는데, 아버지와 아들, 조카까지 같이 순국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가 400년이나 더 되어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순신 장군을 성웅으로 모시고, 통영 충렬사에서 매년 충무공을 위한 제사가 열린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 동상이 조선의 갑옷이 아닌 중국식 갑옷이란 책 본문을 보면서 아직 갈 길이 참으로 멀다고 여겼다. 가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보면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 신선조와 유신자사의 이야기가 너무 낭만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과 메이지유신 이후의 조선침략 준비 시기는 그들에게 언제나 좋은 콘텐츠거리이다. 그에 반해 우리는 어떠한가?

 

독도문제가 외교문제만 아니라 역사문제까지 확장되는 점을 보면서 생각하지만, 지나친 민족주의는 문제가 되나, 근본을 모르는 상태는 더 심각하다고 여겼다. 조선이 처음부터 문약한 국가라고 생각하나, 처음부터 문약한 게 아니라 문약해지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도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과거가 문약하고 여기는 것은 역사에 대하여 너무 가볍게 혹은 너무 재미를 위한 관심거리로 봐서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든다. 가벼운 기분으로 접하는 부분은 인정한다. 대중이 쉽게 접하는 방법은 미디어밖에 없다. 그러나 그 미디어 자체가 틀려먹는다면 많이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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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7-04-10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화문 이순신 동상은 중국식 갑옷에 일본식 검을 차고 있다는데, 사극 속 우리나라 무예와 전쟁신 또한 잘못된 고증이 많았나 보네요. 몰랐던 사실을 알고 갑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04-10 15:54   좋아요 0 | URL
칼집이 허리춤에 있는 띠가 아닌 그냥 들고 있지 않은 게 한국식 무장체계이니 읽으면서 계속 놀라움만 뽑아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