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인가 정철인가 - 기축옥사의 기억과 당쟁론 너머의 역사담론 8
오항녕 지음 / 너머북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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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이상한 책이다. 겉으로 당쟁적적 시각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려 하나,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이발의 어머니는 윤선도의 고모할머니이고, 윤선도의 할아버지 윤의중은 기축옥사로 연루되어 귀양가는 중 사망했으니 피해자의 기록 자체를 오버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엄청난 오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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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 - 청나라에 잡혀간 조선 백성의 수난사
주돈식 지음 / 학고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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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선시대 가장 비참한 시기가 언제라고 생각해야 할까? 문득 우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의 전쟁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객관적으로 사료를 뒤져보면 그것은 약과에 불과했다. 임진왜란의 상처는 할퀴고 지나가도 어째든 왜군은 격퇴되었다. 격퇴 후 전후복구 사업이 뒤따르므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전쟁은 없었다. 왜냐하면 일본 내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 멸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이 친목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다. 명나라와 신흥세력인 누르하치의 관계가 심각한 사태로 돌아섰다.

 

동북아시아 세력에 큰 변화를 맞이하면서 조선은 풍전등화의 운명을 겪게 되었다. 올해 2018년은 임진왜란이 끝이 난지 420년이 7갑자가 지나고, 정묘호란은 약 390년이 되었다. 정묘호란에서 청나라는 잠시 스치듯이 지나갔다. 이어 다시 돌아온 병자호란은 그렇지 못하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적어도 병자호란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요새 자꾸 든다. 병자호란 당시 심양에 끌려간 조선인 50만이란 말도 있고, 그 이상이란 말도 있다. 전쟁 당시 죽은 백성의 수가 수십만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매년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공납을 요구했고, 그 중에는 인간도 포함되어 있다.

 

살아있는 인간이라 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누군가의 가족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문제가 심각했다. 청나라 여진족은 문호가 전혀 없었다. 야만족의 습성이 몸에 베였고, 특히나 수렵생활은 남자만 아니라 여자도 했으며, 강한 자만 살아남는 힘든 공간에서 힘을 키워왔다. 18세기 이르러 청나라도 제법 문학이 높게 되었다. 청나라가 멸망시킨 명나라 한족(漢族)들이 청나라의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그들은 황야의 들개가 아니라 잘 길들여진 집안의 사냥개가 되었다. 들개로 있을 때는 무조건 달라 들어 그 날카로운 이빨로 상대의 목을 물고, 내장을 씹을 정도로 잔혹했다.

 

임진왜란에서 왜군은 포로를 납치하고 자국으로 데려갈 경우 배를 이용하나, 청나라는 달랐다. 그들은 육로를 이용하고, 먼 길 3,000리를 걸어가야 했다. 추운 겨울 걸어서 조선 땅을 벗어나 이국땅에 간다는 사실만으로 절망이다. 거기다 추위와 배고픔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목이 날라 가거나 죽도록 얻어터진다. 여자들은 성노리개가 되고, 남자들의 생명은 부지하기 어렵다. 정묘호란은 1627, 정유재란 종전 1598년이란 아직 전쟁의 상흔이 덜 아문 30년이 지나자 발발했다. 그리고 병자호란은 1636년으로 정묘호란의 상흔조차 가릴 수 없을 때 발발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임금과 조정은 남한산성에서 추운 날씨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항복했고, 그동안 주화파와 척화파는 서로 나누어 대립했다. 그 사이 남한산성을 지키는 군졸은 얼어 죽고, 성 밖에 살아가는 백성들은 도륙을 당했다. 청나라 군대가 몰려와 백성들을 묶어놓고 산 채로 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400년 전의 기록이나,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나로써도 너무 마음이 아픈 일이다. 전쟁의 비극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어떤 자비와 희망도 없이 오로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숙명에 놓인 것이다.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를 읽으면 조상들이 겪은 고통과 그리고 권력자들이 행한 위선에 다시금 통탄을 금치 못한다. 호란이 일어날 때 인조가 즉위했고, 인조는 공신들이 준 명검을 지니며 항상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나 인조는 현실을 몰랐다. 조선은 우물 안의 개구리고, 늘 명분만 중시했지만, 그 명분을 의미하는 진정한 실천을 하지 않았다. 광해군을 혼군이라 하여 반정을 일으킬 세력조차 다시 광해군 시대에 보여준 모순들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것도 모자라 이괄의 난에서 평양감사 박엽이 만든 정예소총부대가 완전 붕괴되었다.

 

청나라는 조선이란 국가가 약하지만, 명나라와 대결에서 조선에 의한 공격으로 후미가 무너질 경우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래서 명나라 조정 내부의 혼란을 이용하여 조선을 공격하고, 우선 명나라와 전쟁에 집중하고, 명나라 붕괴 후 조선을 정벌하고자 했다. 청나라에게 조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청나라의 기병대는 날 새고, 사나우며, 수렵으로 인한 생계로 창술과 궁술이 뛰어났다. 조선군대는 기강도 없고 훈련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더 약한 군사력을 가졌고, 거기다가 지휘관들도 자기 안위만 원했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의병들이 창궐하여 서로 목숨을 내놓았지만, 청나라와 전쟁에서 많은 관군들이 눈치만 보고, 의병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병기도 형편없고 군사기강도 무너지니 이미 나라는 끝을 본 셈이다. 광해군을 폐위한 김류를 비롯한 고관대신들은 임진왜란의 재조지은이란 명분 아래 명나라만 바라봤고, 그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섬겼다. 백성들은 명나라든 청나라든 아무 상관없었다. 제발 군역을 제대로 세우고, 세금을 지나치게 거두는 횡포만 없으면 될 뿐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가고, 인조의 가족과 친척들이 강화도로 들어갈 때 김류의 아들은 자신의 이득을 노렸고, 결국 강화가 무너지자, 사약을 먹고 죽었다. 김류의 첩과 딸이 청나라에 끌려가자 그는 자신의 권력과 부를 이용하여 많은 은을 포로 대금으로 지불했다. 돈이 많은 권력자야 돈을 만들 수 있지만, 일반 백성에겐 어림없는 일이었고, 그 돈을 설사 가졌다 해도 늘 순위 밖이었다. 만일 청나라에서 조선인 포로가 도망쳐오면 다시 잡아 청나라로 송환되고, 거기서 모진 수난을 당한다. 나라가 나라다운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그 상황에서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이권만 챙기고, 더욱더 화가 나는 건 그렇게 척화를 주장하던 고관대료들은 처음에 강하게 반발하다, 이제 청나라에게 몰락하자 태도를 바꾸었다. 청나라에서 척화신을 데리고 와서 심문하려 할 때 목소리 큰 고관대신은 어디가고 이제 중간 위치에 이른 신료만이 자진해서 갔고, 그들은 끝까지 청나라에 저항하다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참수를 당했다. 죽으면 더 이상 모욕은 받지 않으나 죽음은 너무 가혹한 처사이다. 그러나 죽음조차 감내하던 사람이 많았다. 천인 여성은 모르나 양반이나 양인 규수들과 부인들은 몸을 강제로 욕볼 바에 차라리 자살을 선택했다.

 

남자들도 그렇다. 스스로 목을 매거나 칼로 자해하거나, 종을 시켜 목을 조르게 했다. 종은 주인의 명을 받자 눈물을 흘리며 주인의 목을 줄로 졸려 죽였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물건처럼 취급받았고, 홍타이지 죽음 이후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머물면서 받은 설움과 억울함이란 말할 수 없고, 노예시장에 팔려간 조선의 백성을 볼 때마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에서 병자호란과 관련되어 또 다른 사람의 사연이 소개된다. 어느 사대부 무관의 아내가 청나라로 잡혀갈 때 집의 아이가 엄마를 놓치지 않자, 청나라 병사가 아이의 왼손을 잔인하게 잘려버렸다. 아 아이의 어미는 어떻게든 도망쳐 친정집으로 돌아왔다.

 

청나라의 횡포는 심했지만, 조선의 횡포 역시 심했다. 도망친 파로인들이 만일 내려오면 남자들은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여자들은 겁간을 당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성리학의 도의는 사라졌다. 성리학은 정치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이지, 정치적 신념은 전혀 없었다. 어미는 몰래 친정아버지 집에 살았다. 자신의 친정어머니, 시댁식구, 남편 모두 전쟁 중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우연히 아들은 살아있었다. 몇 해가 지나고 과거시험이 열렸을 때 어느 선비가 왼쪽 손목이 없었다. 손이 없던 그 선비가 소문이 나자 인조는 직접 그를 불러 손을 잡아주며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잃어버린 손과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축하의 자리가 눈물의 자리가 되었다. 이 소식이 그의 어미에게 가도 어미는 아들에게 찾아갈 수 없었다. 파로인들이 도망치면 그의 후손들이 엄청난 패널티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조차 용서되지 않은 천륜의 관계이다. 이 책을 보니 뭔가 조금 이해되는 게 있다. 우리는 중국인들을 두고 되놈(때놈)”이라 한다. 그 말의 어원이 병자호란에서 시작했다. 성남에 위치한 남한산성 인근 마을주민들은 가끔 떡국을 나누어 먹는다고 하는데, 이는 인조가 정월 하루 겨우 떡국을 먹을 수 있을 때 성 안에 있는 모든 백성에게 떡국을 내렸기 때문이다.

 

400년이나 된 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언어로 내려온다. 특히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리는 여성들의 운명은 가혹했다. 화냥년이란 말은 심한 욕이다. 그런데 그 말의 어원은 환향녀이고, 그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정조를 잃은 이유로 시댁에게 버림받고, 친정에서는 출가외인이라 하여 받아주지 않았다. 억울한 한을 풀어야 하는데, 권력층은 이들은 버렸다. 나라가 약하면 이런 비극을 당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위안부로 끌려간 그 많은 소녀들은 성노예가 되어 죽임을 당했고, 원혼도 달래지 못한 채 그렇게 세상을 하나 둘 떠나가고 있다.

 

힘이 없는 이유로 당한 수모의 역사는 피로써 글을 남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효종에 대한 글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효종은 봉림대군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같이 청나라에서 고생을 한 임금이다. 누구보다 더 가까이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보았고, 개방주의자 소현세자와 달리 군권주의자 무관임금으로 임했다. 모두들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말하고, 심지어 청나라에 머리를 숙인 이유로 사대부들이 벼슬을 거부하고 숨는 경우도 많았다. 자신의 벼슬이 판서에 이르러도 누구에게 소개할 때 현감이란 지칭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명나라 황제 만력의 연호에 내려진 벼슬은 인정하고, 청나라 태종의 연호는 거부하는 이들도 많았다. 복수를 꿈을 꾸고 청나라를 치고 싶다면 무관을 우대해야 하나 여전히 문관의 권력이 걸림돌이었다. 병력을 모우기 위해 장정을 모아야 하나 양반들은 군포조차 내지 않고, 죽은 시아버지와 배냇물도 마르지 않은 갓난아이들이 군적에 오른다. 병역비리는 곧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징조이다. 사형 찬반론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지만, 병역비리의 죄질이 나쁜 자는 총살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연유이다.

 

군인이 잡은 총이 적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에게 총구를 겨냥해 권력을 탐하고, 장정들은 혹독한 처사에 죽어가고, 농민은 수탈만 당하니 어떻게 희망이 있을까? 작가는 효종의 정신을 다시 찾은 이유는 엄정한 군기를 내세우고, 정예 병사를 만들고 키우기 위해 국가 전반의 부조리를 수정해야 했다. 백성들이 잘 살아야 강한 국력이 되어야 하나, 여전히 사대부들의 반대가 심했다. 서인들의 계보 중에 소론과 노론이 있지만, 이전에 한당(漢黨)과 산당(山堂)이 있다. 대동법과 농민조세 부담 경감이 한당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세력이 산당이다. 나라가 청나라에 밟힌 이유가 명확한데, 그 책임조차 외면하고, 남에게서 빼앗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구군분투 하던 그들을 보면, 17세기에 끝나야 할 인간들이 아직도 21세기에도 답습하고 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치욕의 역사는 부끄러움과 분노를 일으킨다. 피가 끓고, 뼈가 녹는 기분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우리가 잊는다면 다시 역사의 비극을 반복된다. 이 책에서 청나라에 끌려간 많은 조선인들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그들이 끌려간 땅에 대를 이어간다는 말을 한다. 조선인들이 구한말 간도로 넘어가거나, 일제의 잔인함에 만주로 넘어가 고국을 등진 분들이 많다. 해방되어도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못한 채 영원히 타국의 주민이 되어 한국인이 되지 못한 조선인 동포들, 그들이 조상을 한에서 이어져온 삶에서 우리는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이 결코 우연이 아닌 연속적인 사건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란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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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야담 - 보유편
이월영 역주 / 한국문화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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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를 한국에서 언제부터 민중이란 존재가 서적에서 오고가고 했을까? 한국의 문학에 대한 연구에서 설화(舌禍)를 중심으로 이어져갔다. 그 의미는 기록이 아닌 구술적 체계로 통해 전해진 것이다. 한국의 설화문화는 신화나 민담 등과 이야기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구설의 가치는 지금이야 이야기의 소재이지만, 과거에는 민중에서 흘러가는 이야기일 뿐이다. 말로 구전되므로 이야기 내용에서 인물과 장소, 사건과 흐름조차 계속 변해간다. 문자로 기록되지 않으면 자세한 전후를 알기 힘든 부분도 많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역사에서 기록문화를 담당한 사대부 중에 제대로 백성의 삶에도 관심을 가진 자가 있다.

 

유학(儒學)의 가치에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기록이 아닌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를 적은 학자가 있었다. 우리는 흔히 어우야담(於于野談)이란 말을 얼핏 들었을 것이다. 어우(於于)라는 것은 어우당(於于堂) 유몽인이 저술한 책이며, 야담이란 말처럼 정사만이 아니라 야사나 혹은 전설이나 민담조차 넣는 경우도 있었다. 유명한 역사적 기록에도 재미난 내용도 나온다. 유몽인을 임진왜란 당시 중국 명나라 외교를 진행하고, 분조와 무군사를 이끈 왕세자 광해군을 보필했다. 선조 말년과 광해군 집권 시기에도 유몽인은 계속 활동을 했다.

 

전쟁을 겪고, 어지러운 조선 중후기를 보냈기에 어우야담은 온갖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설의 고향이나 혹은 조선의 야사를 다룬 드라마에 나올 법한 이야기 소재가 <어우야담>에 나온다. 명종 시기 을사사화로 인해 대윤 윤임 일파는 숙청을 당한다. 대윤의 일파 중에 유인숙, 유관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그 시체마저 부관참시를 당하는 화를 당한다. 여기 유관의 하녀인지 혹은 유인숙의 하녀인지 조금 다르게 전개되는 바가 있으나, 어우야담에서 유인숙의 하녀는 주인을 죽게 만든 정순봉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처음 다른 종들은 모두 슬퍼하고 있으나, 얼굴이 고운 이 하녀만 오히려 생기 있는 표정으로 주인을 섬기고, 주인 가족 모두 그 하녀를 아꼈다. 하지만 어느 날 주인 정순봉이 계속 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가족들은 가장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무당을 불러 점을 친 결과 주인이 사용하는 베개 안에 해골이 있었다고 한다. 인간의 해골이 베개에 있으니, 그 당시로는 저주, 지금으로는 전염병에 걸려 죽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죽은 사람의 시신을 욕되게 하는 짓은 최악의 행위이다. 그러나 시체의 유골을 가져올 수 있는 이유는 해골의 주인이 병으로 죽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정순봉은 자신이 꾸민 계략에 결국 복수를 당한 셈이다. 문초과정에서 주인 가족에게 스스로 죄를 밟히고 그녀는 정순봉의 빈소 옆에서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후 대윤 일파의 무고가 풀리고 명예를 회복하자, 그녀의 시신을 주인의 묘지 옆에 묻혔다. 지금도 문화유씨 일족은 그 무덤을 소중히 여기고 제사를 지내준다고 하니 600년 전의 일이지만, 인간의 도리는 그 자신이 생명이 다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정신이 살아있는 한 영원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순봉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부친이 저지른 죄악에 괴로워하며 평생 벼슬을 나가지 않고, 은거하여 살았다는 점이다.

 

어우야담은 전반적으로 이야기의 전개는 길게 가나, 결론 부는 너무 담백하다. 그가 보여준 글의 깊이는 그 간략성과 결과에서 보이는 삶의 자세이다. 인간은 글에서 자신의 생각과 인품을 보여준다. 한글이 아닌 지식인 계급인 사대부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유몽인의 글은 억지로 자신을 내세우려 하기보단 그저 주변 이야기를 듣고 촌평을 날리는 형태이다. 그가 보여준 글의 정신은 인간의 삶은 순탄치 않은 점, 그리고 과거와 권력에 대한 풍자, 전쟁이 안겨준 고통과 슬픔이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직접 수습했던 이로써 안타까운 사연도 많다.

 

사연의 주인공은 비단 양반 사대부일까? 전쟁 이후로 도적이 늘었다. 하지만 도적은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게 아니라 배고픈 배를 해결하는 게 목적이다. 강도짓을 해도 살인을 하지 않은 이유는 대부분 그들이 양민이었지만, 현실의 빈곤과 어려움이 그렇게 만들었다. 유몽인은 다른 사대부와 달리 시문놀이에 젖은 정치가가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광해군 시절 임진왜란과 명나라 청나라 교체라는 최악의 시기였다. 어려운 시기였으나 어우야담에는 운명론적인 내용과 점복(占卜)에 대한 글이 많다.

 

점복으로 운명을 치는 사람은 양반보단 중과 천민 갖가지 사람이 많다. 또한 전쟁이란 큰 위기를 맞이했으나 귀신이야기도 나온다. 광해군 시대를 검토하면 유일하게 이때 외적의 침입이 없었다. 북으로 청나라에 대해 기미술을 사용하고, 왜국과는 외교와 통상을 재개했다. 북쪽의 평양감사로 박엽이란 인물이 있었다. 박엽이 북쪽에서 지키고 있을 때 청나라는 함부로 조선을 넘보지 못했다. 박엽이 지휘하는 조총부대는 아시아 최고의 사격부대였다. 물론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에서 이들은 모조리 박살났다.

 

그런 박엽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박엽은 성격이 호탕한데, 그가 전쟁 전후로 밤길을 가다 아름다운 여성이 자신의 옷깃을 일부러 스쳐가자, 그녀에게 말을 건 후 그녀의 집에 간다. 그녀의 집에 가니 가족들은 잠들어 있고, 그녀는 박엽에게 술을 접대하고 밤을 그렇게 보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녀는 사람이 아니고 차가운 시신이었다. 제대로 식사하지 못해 굶주림과 병으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모두 죽어 있었다. 옆집에 가서 갖바치에게 사정을 알아보니, 그 집은 사대부 집안이었으나 전쟁 중 굶주림으로 집안 식구가 모두 죽었다는 것을 알자, 박엽은 관을 가지고 와서 그 집 식구 모두 장례절차를 수행하였다.

 

귀신이 단순히 나쁜 존재로 본 게 아니라 귀신조차 현명한 존재로 그려낸 셈이다. 인간의 운명이 죽음을 당할지라도 그 본분을 잊지 않았고, 하물며 유관의 어린 하녀는 자신의 주인을 위하여 복수를 했다. 민중이라도 신분적으로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종복들도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런 유몽인이기에 그의 최후 역시 뭔가 모르게 마음이 아프다. 유몽인은 본래 동인이었고, 동인이 남북으로 갈렸을 때 북인으로 전향한다(그래서인지 동인에서 북인의 영수로 활동한 이산해의 이름이 자주 거론된다).

 

임진왜란 당시 남인 서애 유성룡이 북인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자, 북인 이산해와 그 중심세력이 등장하고, 이때 광해군은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광해군은 의병과 같이 활동한 세력이므로 북인 내에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나누어지고, 선조가 죽자 소북 영수 유영경은 광해군 세력인 이이첨에 의해 귀양 후 사약을 받고 죽는다. 유몽인은 북인에서 중북이었고, 권력에 지향하기보단 그저 업무에 충실히 이행하고, 글을 봐도 권력을 향하기보단 인간의 운명과 도리에 관심을 가진다.

 

말년은 권력의 중심보다 조용히 자연과 함께 살고자 했던 그의 꿈은 박살난다. 1623년 인조반정에서 유몽인은 직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나, 자신의 아들과 주변인물들이 광해군지지 세력이었고, 인조반정에 대한 반정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연좌되어 죽게 된다.

 

유몽인은 세상물정에 밝은 사람이다. 그의 글을 봐도 세상의 풍파가 얼마나 심한지 더구나 기묘사화의 조광조, 을사사화 윤임, 기축옥사 최영경을 거론한 자체로도 당쟁과 정치권력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인간의 도리를 알았다. 아들이 인조반정에 반발할 때 유몽인이 말리려다 참은 이유는 많은 사료에 나온 것으로 유몽인의 시 <상부탄(孀婦歎)>을 아들이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다.

 

일흔 된 늙은 과부, 안방을 지키며 홀로 사는데(七十老孀婦, 單居守空壺)

이웃이 개가를 권하며 무궁화 같은 얼굴의 선남이라네(傍人勸之嫁, 善男顔如槿.)

여사(궁중에서 글을 맡은 여관女官)의 시를 많이 읽고 태임(太姙)과 태사(太姒, 각각 문왕과 무왕의 어머니로 덕 있는 부인을 상징한다)의 가르침도 익히 아니(慣讀女史詩, 頗知妊姒訓)

흰 머리에 화려하게 단장하면 고운 화장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白首作春容, 寧不愧脂粉.)

 

인조가 왕이 되어도 자신은 광해군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유몽인이 이미 세자시강원에게 광해군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그와 더불어 임진왜란을 수습했기에 누구보다 광해군에 대한 마음이 아련했을 것이다. 북인의 특징, 박엽에 대한 글이 있는 점에서 그가 바라본 정치적 상황은 어림잡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우야담에서 어떻게든 발버둥치려 해도 운명의 길을 접어드는 이야기가 많다. 가령 점술사가 무덤에서 벌이 나오면 나를 죽일 것이라 했는데, 바로 그렇게 되는 이야기나, 아니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이란 예언조차 그렇다.

 

이산해와 관련된 내용에서 아계 이산해의 스승은 토정비결을 저술한 이지함이다. 이지함은 이산해의 작은아버지였던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바뀔 수 없는 것인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준경이 천거한 인물 중에 구수담이란 학자가 있다. 그는 명종 때 억울하게 죽었다, 그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여자에게 빠져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이준경이 그에게 큰 호통을 친 후 다시 공부하여 벼슬에 올랐다. 구수담의 아들 구영준이 손톱 하나가 빠져서 이준경이 왜 그런지 물어보니, 아버지 구수담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구영준은 너무 슬퍼서 땅에 손을 계속 움켜쥐었다가 그래 된 것이다.

 

인간의 천성을 고칠 수 있지만, 단지 이준경 같은 희대의 명재상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운명의 행운일지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구수담이 죽은 이유도 이준경의 천거로 조정에 나갔기 때문일 수 있다. 인간의 운명은 알다가 모르고, 일이 끝난 것을 보면 그게 어찌할 도리가 없이 되었다는 것도 볼 수 있다. 어우야담은 그가 직접 보거나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기에 일정한 소재가 아닌 다양한 내용을 등장한다. 하지만 책을 보면서 참 불행 중 다행이라 여겼다. 광해군 시기 한국의 국문학은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

 

한국 국문학에서 한글로 시조를 읊은 고산 윤선도가 광해군 시절 이이첨을 비판하다 귀양가고, 한국 국문학 소설에서 홍길동전이 허균에 의해 만들어진다. 조선의 야사 중에 하나인 어유야담 역시 광해군 시절 나온다. 허균은 능지처참으로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기에 그의 서적은 모두 소실될 뻔했다. 다행히 그의 후손이 소중히 보관하여 400년 후 우리나라에서 소중한 소설이 되어주었다. 유몽인 역시 그런 위기에 겨우 벗어난 인물이다. 시대의 아픔에서 저자들은 힘든 여정과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들의 글은 우리에게 영원한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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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3-15 0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의「어유야담」은 중국의 「요재지이」와 같은 성격의 민담설화집인 것 같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3-15 09:23   좋아요 1 | URL
민담과 설화를 문자로 남겼으니 그가 해낸 업적은 가히 높다고 봅니다
 
시골무사 이성계 - 운명을 바꾼 단 하루의 전쟁
서권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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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시작된 시기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을 정해놓으면서 된 일이다. 조선이란 역사를 보면 참 난감한 점들이 많다. 조선이 세워진 시기를 놓고 다시 생각한다면, 광해군 시기와 뭔가 상당히 많이 중첩되는 느낌이 있다는 점이다. 광해군 시기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시기라면 조선이 막 개국한 시기에는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올라오던 시기이다. 이성계는 불교와 성리학의 중간에 놓인 고려를 대신하여 유교를 중심인 조선의 시조가 되었다. 생각하면 조선의 이성계와 고려의 왕건 모두 무인에서 시작된 인물이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조차 무인의 기질이 뛰어난 인물이다.

 

무관이 왕이 되어 문관을 등용하면 다시 문관이 무관을 우습게보고, 문관이 병무의 실제 업무를 모르면서 병권을 잡게 되면 난이 생기는 일이 다분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초반에 문관도 많았지만 무관들도 많았다. 공자의 유학자에서 선비들은 원래 춘추전국시대에는 문예를 기르는 자보단 무예를 익히는 자들이 강했다. 무예를 익히는 이유는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직접 마주하기 위해서라면 각 임지를 나돌아 다녀야 하며, 더구나 전쟁이 계속 일어난 시기에 선비들의 본분은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는 일이다. 그러나 고려를 지나 조선을 오면서 선비는 무관보다 문관에 이르게 되고, 나라의 위기에 처해질 시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비들의 나라, 조선은 이성계와 무관 그리고 신진 사대부들이 함께 일으킨 국가이다. 조선이란 국가는 고려를 멸망했지만, 고려가 멸망한 이유는 다름 아닌 국가권력의 부패와 백성들의 빈곤이었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면서 가장 먼저 정리해야할 것들이 기존 권력을 청산하는 것이다. 왕족과 봉건귀족은 막대한 이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읽은 <시골무사 이성계>에서 신돈이란 승려가 정치를 하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노비의 신분해방과 농민의 억울한 처사를 풀어주는 일이다. 권력자들에게 가장 돈이 되는 것은 땅을 많이 차지하고, 땅에서 나온 소출을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이다.

 

조선이 세워진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바로 토지에 대한 문제다. 농민이 농사를 짓고 먹고살아야하는데 이게 제대로 되지 않은 점이다. 땅을 빼앗고, 빚을 갚지 못해 평생 노비로 살아가는 일들이 발생한다. 노비도 인간인데, 이상하게 소와 말보다 더 못한 대우를 받는 게 노비들이다. 권력자들의 비리는 곧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은 세계 어디를 돌아봐도 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고 사실이다. 고려의 무능한 정치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백성들이 힘드니 군역과 세금문제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

 

전쟁이 나면 어떻게 되는가? 우선 군량을 마련해야 하는데, 군사들에게 먹일 쌀이 모두 중간에서 착복되고, 군사들의 징병해야 하는데 모두 어디론가 도망친다. 게다가 군사들이 모여도 그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해 싸움을 제대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지 못한다. 겁쟁이가 되는 것은 기본이고, 무기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고려 말기, 홍건적이 조선을 침범하고, 왜구가 계속 남해안을 노략질을 한다. 이성계가 성공한 이유 그것은 무엇인가? 그가 궁술이 뛰어난 강한 무장이라 그런가? 아니면 천하의 문장가 정도전이 있었기 때문인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성계는 처음에 고려의 무관이고, 40대 중반까지 반역할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소설 <시골무사 이성계>를 보면 우리가 아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아니라 그냥 변방에서 떠도는 무관 이성계를 마주한다. 이성계는 변방을 전전하면서 여진족 같은 오랑캐 부족을 의형제를 맺으며 같이 동고동락을 한다. 이성계는 명궁이지만, 한편으로 활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중앙관직이 아닌 변방을 누비며, 그가 찬란한 업적을 보여준 것은 바로 황산대첩이다. 일본 왜구 만여명이 침범하나, 고려의 군사력은 천 명 정도이다. 게다가 지휘내부의 갈등까지 겹치고, 이민족으로 구성된 이성계의 사군들은 모두 형제이고 삼촌조카이었다.

 

이성계에 대한 일화를 보면 그는 순수 조선인 즉 고려인이 아니라 여진족과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 자로 나온다. 변방에 살아간 우리 선조들은 다 부족과 싸우기도 했지만 때로는 같이 살기도 했다. 변방의 부족을 국내로 귀화하여 살게 한 경우도 있고, 임진왜란 당시 항왜들을 조선인으로 살게 해주었다. 민족의 단일성보단 민족이 가진 문화적 정체성으로 계속 유지된 셈이다. 고려는 원나라의 종속국이었고, 원나라 본국의 신료와 고려 중앙신료들이 권력자였다. 변방의 장수는 그저 벌거숭이에 불과했고, 이 책에서 이성계는 병법서조차 읽지 않은 그저 한미한 출신의 무관이었다.

 

황산대첩 당시 종2품 도순찰사 직급을 가졌지만, 오랜 기간 변방을 누비면 생사를 오고간 그에게 너무 한미한 벼슬이다. 권력자들이 병권을 잡으면 도순찰사 이상의 벼슬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전쟁에서 1:10의 전쟁은 마치 지나가는 소설책처럼 지나가고, 우리 역시 소설책 읽듯이 스쳐간다. 하지만 진짜 소설에서 오히려 역사책보다 더 리얼한 상황을 느낄 수 있다. 활이 가르고, 칼을 베고, 창으로 찌르며, 도끼로 가른다. 말 한 마리의 숨소리와 비명, 대낮의 전투부터 야간의 전투까지 죽음의 그림자는 언제나 숨을 또 숨을 쉰다.

 

소설이지만, 소설이 현실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역사책에서 전쟁을 일어나면 그 전투장면 하나하나를 묘사하지 않는다. 누가 어떻게 죽고 다치고, 또한 죽이는지 말이다. 드라마에서 이성계를 다루는 모습은 그가 보여준 조선의 창업정신에 대한 영웅성을 보여줄 뿐이다. 그가 위기의 현실을 보여줘도 그의 비참한 모습까지 잘 보이려 하지 않는다. <시골무사 이성계>는 비참한 모습의 이성계를 보여준다. 책 표지에 있는 말을 타고 이성계의 모습은 40대 중반이라 하나, 백발이 무성한 외모는 마치 60대에 가까운 모습이다. 책 내용에서 전장을 누비면서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하고, 늘 죽음을 맞이하기에 괭한 모습만 드러낸다.

 

갑주와 투구조차 낡고 누추하고, 그의 목에는 늑대 가죽을 두르고 있어서 고려국의 종2품의 장수인지 야인인지 알 수 없다. 황산대첩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그저 활을 들고 있는 필부의 모습이다. 그는 필부로 살아갔기에 조선의 임금이 될 수 있었다. 전장에 나가면 가장 비참한 사람은 죽음 앞에서 칼을 잡는 장병이 아니다. 그저 힘없이 적의 칼에 도륙당하는 백성들이다. 왜장 아지발도가 침범할 때 왜구는 특이한 풍습을 보여준다. 전쟁을 참전하기 전 제사를 지내는데 반드시 사람을 죽인다는 점이다.

 

인신공양은 참으로 끔찍하다. 사실 동물을 그냥 죽이는 것도 끔찍하나 같은 인간, 그것도 어린 아이에게 죽음의 칼을 대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다. 아지발도는 고려 땅을 침공할 때 그 지역의 어린 소녀의 가슴에서 성기까지 칼을 베어 내장을 모조리 꺼냈다. 소설에서 만삭한 자신의 아내의 배를 갈라 뱃속의 아이를 죽였다고 하니 정말 끔찍한 일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은 백성의 죽인 것도 모자라 살아있는 자의 코와 귀를 베어가기도 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전쟁 나는 이유는 단순히 외적의 침입만이 아니다. 외적이 침범해도 그것을 방비할 수 없는 국가의 무능함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게 된 계기는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격퇴했고, 거기에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과업이 결국 전쟁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이성계의 가르침을 조선의 후대 왕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선조 당시 임진왜란이나 명종 당시 을묘왜변을 봐도 그렇다. 을묘왜변 때 이준경이 있었고, 임진왜란에는 이순신이 있었다. 그들은 조선을 배반하지 않았지만, 이성계는 배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원과 명의 교체이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는 명과 청의 교체시기이다.

 

나라의 지도자인 군주가 이성계가 밟아온 삶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렇게 처신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시골무사 이성계>를 보면서 문득 나는 예전에 읽은 책 1권이 생각났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이다. <일리아스>를 보면 트로이전쟁에서 전투를 펼치는 모습이 상기되었기 때문이다. 창이 상대방의 머리를 박히고, 도끼가 머리를 박살되며, 뜨거운 피가 용솟음 치고, 내장이 쏟아진다. 단지 <일리아스>는 영웅주의적인 요소지만, <시골무사 이성계>는 영웅을 필부처럼 묘사했다. <일리아스>는 전장을 영웅의 서사시로 그리지만, <시골무사 이성계>는 전장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야생의 짐승들처럼 표현했다.

 

작품에서 또한 인상적인 모습은 간인(間人)들의 모습이다. 간인들은 아주 다양하고 특이한 존재도 많았다. 살기 위해 활동하는 간인도 있다면, 죽을 줄 알면서도 활동하는 간인도 있다. 어제 죽은 왜구의 갑옷을 입고 적의 진영에 침투한 간인도 있고, 고려군 작전회의 자리 인근에서 구걸하거나 엿보는 간인도 있다. 간인들이 정보를 조작하여 적을 몰살시킬 수 있는 기회로 만들었다. 전투는 단순히 칼과 창으로 부딪혀 일기당천으로 해결되는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철저히 현실적이고 냉소적인 공간이다.

 

삶이란 그 하나의 공간은 어째 보면 전쟁이다. 진정한 지옥은 전쟁터이도 있지만,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세계에도 전쟁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곳에 내몰린 인간과 그 인간들 위에서 군림하거나 말로만 그들을 대하는 자는 분명히 느끼는 바가 다르다. 내모는 자들의 내몰린 자들의 치열함을 알 수 없다. 그곳이 죽음의 사선이 이어지는 공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냉소적인 세계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칼과 활 그리고 같이 죽음을 맞대고 있었던 전우들뿐이다. 동료애와 의리는 단순히 그 감정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고, 자신이 살아갈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시골무사 이성계>를 소개하는 글에서 이 책은 남자의 소설이라 한다. 하지만 보통남자라도 그런 공간에 있기 싫을 것이다. 필부(匹夫)로 등장하는 이성계처럼 나 역시 그저 필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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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사랑
정찬주 지음 / 봄아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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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다도(茶道)동아리를 활동할 때 배운 것들 중 하나가 일반적으로 차()를 지칭하는 말은 녹차(綠茶)이다. 녹차란 찻잎을 잘라 가마솥에 덖은 다음 볏짚에 차 잎을 비벼주고, 다시 가마솥과 볏짚에서 덖고 비벼, 차의 맛과 향을 내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차를 마시는 것에서 차라 결국 찻잎을 덖고 비빈 후에 만들어진 수제품이다. 그러나 보통 차를 마시는 녹차만 있는 것으로 알지, 그 찻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다른 칭호가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124절기 중에 곡우(穀雨) 전후로 따는 차 잎을 우전(雨前), 입하 이전에 딴 찻잎을 세작(細雀), 입하 이후로 중작(中雀), 한 여름에 이르러 따는 찻잎은 대작(大雀)이라 한다.

 

보통 찻잎은 세작과 중작을 많이 마시고, 대작은 잎이 너무 커서 맛이 없고, 우전은 찻잎이 너무 작고 일손이 많이 필요하며, 찻잎의 기운이 세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다. 그래서 보통 세작과 중작이 시중에 많이 나온다. 처음 찻잎을 따서 만드는 우전이 나오는 시기가 2018420일 곡우를 전후로 다가온다. 24절기는 보통 양력으로 하는 법이나, 본래 우리 민족은 양력이 아닌 음력으로 날짜 계산을 많이 했다. 우전인 날은 차와 관련된 인물하고 깊은 관계가 있는 날이다. 음력 222일은 올해 47일이다

 

음력 222일은 1836년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능내리 여유당(與猶堂)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서거한 날이다. 그분이 태어난 해는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원통하게 죽을 때이고, 그분이 돌아가신 것은 182년이 되어간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서거일은 특이하게도 회혼일이다. 병마절도사 홍화보의 외동딸은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 시집가서 다산 선생의 마지막 가던 날까지 함께 있었다. 물론 귀양의 고통은 그 가족 모두에게 절망이었지만, 다산 선생의 마지막은 행복이었을까? 아니면 절망이었을까

 

다산 선생에 대한 책을 읽다보면 희망과 절망, 슬픔과 기쁨이 너무 교차한다. 2017년 추석, 나는 이때 정민 교수님의 <다산 증업첩><다산의 재발견>을 읽었다. 페이지 수가 700에 이르는 두꺼운 도서에 책 크기도 매우 커서 읽는 시간이 아주 길었던 책이었다. 다산 선생이 직접 쓴 편지와 다산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들을 모우 번역하고, 당시 상황과 일반적으로 우리가 몰랐던 다산 선생의 모습을 잘 보여준 책이었다. 전에 강진 다산초당에 갔는데, 어느 누군가 아주 한심한 이야기를 한 것을 들었다.

 

강진은 바다가 접해진 남해권 지역이나, 한편으로 탐진강을 중심으로 논밭이 형성되어 있어 농촌과 어촌의 장점을 고루 갖춘 동네이다. 다산초당 정자에서 보이는 강진만을 넓은 바다로 이어지고, 강진의 백형인 정약전 선생을 그리는 마음을 그 자리에 서서 달랬다고 한다. 경치는 좋고, 동백나무 숲이 어울려져 있는 백련사도 옆에 있다. 초당에 오르는 산길은 약간 험하나 숲은 아름다리 나무가 우뚝 서 있고, 차나무가 산길 옆 경사에 비뚤하게 자라있다. 지금에서 보면 경치가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귀양을 온 입장에서는 답답하고도 편안한 곳이다. 그런데 어느 다산초당 방문객 한 사람이 초당 동암에 앉으면서 다산 선생이 여기서 귀양한 것을 두고 마치 휴양하러 왔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런다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다산의 일생을 알고, 그가 겪은 풍파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런 발언이 나올 수 없다. 1800년 정조대왕이 붕어하고, 18012차례의 옥고를 치루면서 막내형인 정약종과 매형인 이승훈의 목을 저잣거리에서 베어졌다. 1791년 신해사옥으로 외사촌형인 윤지충과 윤지충의 이종사촌인 권상연 역시 참수되어 효수되었다.

 

신유사옥 이후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도 죽고, 훗날 천주교 탄압에서 정약종의 아들과 딸 역시 참수되었다. 가족들이 모조리 도륙되고, 큰형의 조카사위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자신의 사촌동생은 제주의 관노로 팔려가고, 황사영의 아이는 어느 작은 섬에 몸을 숨겼다. 도륙난 집안을 두고 멀리 귀양을 온 그에게 휴양이란 말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미 나는 할 말은 잃은 셈이다. 다산은 우리가 알기에 위대한 유학자, 정치가, 경세가, 법학자, 의학자, 교육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인자한 아버지이면서 스승이기도 하다. 다산이 한국위인 중에서 항상 존경되는 분으로 선정되는 이유는 괜한 이유는 아니다.

 

이번에 읽은 <다산의 사랑>을 읽었다. 다산의 큰 모습을 보지만, 사람들은 작은 모습을 알 수 없었다. 다산의 따님이 친구에게 시집가고, 강진에서 과부를 만나 사랑을 하고 또 다른 딸을 가졌고, 다신에게 찾아온 제자들은 누구고 그들은 스승하고 어떤 교감을 지녔는지 말이다. 책을 보면서 마음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 다행인 점은 다산 선생이 해배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때 다산초당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다산 선생과 18제자가 맺은 다신계(茶信契)가 무신계(無信契)로 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다산 선생의 다신계가 해배 이후 서거하시자 거의 절명했지만, 20세기 다시 부활했다는 점이다.

 

국내 다산 선생의 연구자로서 위당 정인보 선생이 계신다. 그분은 잃어버린 조선에서 다산이란 존재란 조선의 마지막 등불이고, 우리 민족이 언제나 기억해야 할 인물이라 평했다. 다산의 제자 중에 귤동마을 윤씨들이 많았다. 귤동마을의 윤씨는 정약용 선생의 어머니와 같은 성씨이다. 그러나 촌수가 제법 먼 외척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산을 받아주고, 다산을 위해 다산초당을 내어주었다. 다산초당에서 다산에게 찾아온 애제자들은 다산의 노년에 찾아와 스승에게 안부를 나누고, 다산 선생이 서거하고 그들조차 세상에서 사라질 때 누군가는 계속 다산의 영혼을 지켜줘야 했다

 

귤동마을의 윤씨 후손들은 다산초당을 보존했고, 다산 선생이 남긴 기록을 다시 찾아내어 세상의 빛을 보게 했다. 그러나 처음 다산 선생이 강진에 오실 적에 강진에 작은 주막의 노파만이 받아주었고, 아무도 그를 가까이 보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촌마을의 윤광택은 친구의 아들이 곤란해 하자 사람을 보내 위로했고, 다산 선생을 위해 몸과 마음을 위로해준다. 윤광택은 다산 선생이 귀양 온지 몇 년 지나자 세상을 등지고, 그분의 아들인 윤서유가 다산 선생을 친구로서 대해준다

 

그런 인연일까? 다신계의 정신은 아직도 이어져 가는 것이 참 대단한 것 같다. 올해 2018년 다신계 절목이 결성된 지 200주년이 된 해이다. 다산 선생이 1818년 강진에서 해배된 시기에 결성된 것이 다신계이기 때문이다. 친구 윤서유는 다산 선생의 외동딸을 며느리로 받아들이고, 윤서유에게 방산 윤정기라는 다산학의 계승자인 아들을 얻는다. 그리고 21세기에 이르러 다산의 따님의 5대손이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정약용 선생의 묘에 찾아와 다례(茶禮)를 올린 것이다

 

다산 선생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분이 남긴 정신이 현대 한국에 남아있고, 특히 다도 문화와 조선 성리학 중 실학에 대해 연구하는 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세계유교학회에서 한국 조선유학에서 정약용 선생은 빼놓을 수 없는 분이다. 이렇게 위대한 분이라도 그도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고 싶었던 것이다. <다산의 사랑>에서 주인공은 다산이나, 오히려 다산을 중심으로 돌아가기보단 다산의 옆에 붙어 있던 혜장 스님과 다산의 몸과 마음을 추스르게 해준 홍임 모녀가 인상이 깊다. 홍임 모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얼마 되지 않고, 그나마 문서와 편지가 나오면서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사람이 배고프고, 차향이 좋고, 술맛을 느끼는 것은 남녀노소 차이가 없는데, 왜 우린 그것에 얽매여야 했는가?

 

사실 다산의 사랑은 이 책의 제목인 <다산의 사랑>보다 <다산 증언첩>이 훨씬 나은 것 같다. 다산의 편지에서 묻어나는 글귀에서 그가 가진 애정, 특히나 배고프고 헐벗은 농민들을 바라보는 애민정신은 정말 감동이 밀려온다. 그런 다산이기에 그가 제자로 받아들인 사람은 양반문중만 아니라 농민이나 중인 부류도 있었고, 천민이던 사의재의 거처인 주막주인인 늙은 노파 역시 사람으로 대했다. 단지 그가 처해진 현실이 너무 안타깝고 비참했을 뿐이다. 권력의 자리에서 부당한 세력에게 좌절했고, 그 부당한 세력에 가족까지 빼앗겼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강진에서 책을 읽고 더더욱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때 얼마나 적적하고, 이제 찾아오려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산은 본처의 눈치 대문에 홍임 모녀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본처이든 유배지에서 만든 첩(다산은 또 하나의 아내로 대해주나)이든 다산에게 모두 소중한 사람이다. 그러나 여유당에서 노년을 보내면서 강진 백련사에 머물고 있는 홍임 모녀에 대한 그리움을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 그의 심정을 어떠하랴? 조선시대 양반들은 본처가 있지만 대부분 첩을 두고 살았다. 그게 좋은 제도는 아니지만 당시 상황에서 유배지에서 홀아비처럼 살아가는 것은 너무 괴롭다. 밤에 혼자 심신이 피폐해져 잠 못 이루는 날이며, 서럽기가 그지없다.

 

홍임 모녀 역시 그렇다 홍임의 어머니는 30대 초반에 다산 선생을 만났지만, 그녀는 이미 1번 결혼 후 사별로 인해 혼자 사는 과부댁이었다. 조선시대 과부들의 삶은 비참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은 여자라는 사회적 덫도 있자만, 과부이기 때문에 아무나 대할 수 있다는 비인격적 시선이 은근히 잠재하기 때문이다. 과부라도 사람이고 여성이다. 과부도 사랑을 하고 싶고, 그 사랑하는 사람이 다산 선생처럼 고귀한 학자일 수 있다. 귀양 이후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 만났지만, 천주학쟁이로 귀양 온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란 쉽지 않다. 정분을 나눈 후에 계속 옆에 지키며 서로를 의지하는 일도 쉽지 않다.

 

다산은 해배된 후 제자들이 올라오면 홍임 모녀를 잘 돌봐줄 것을 은밀히 전하나, 그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실조차 역사의 흐름에서 사라졌을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20세기로 오면서 한국에서 다산학이 중요한 연구대상이고, 21세기 다산 선생은 세계적 위인이 되었다. 영원히 묻혀버릴 것은 같은 그 어둠의 시간에서 이제야 그 아련한 시간들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평을 적은 후 조만간 나는 집안 일로 강진군에 위치한 항촌마을에 들릴 일이 있을 것이다. 어릴 적 시골에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항촌마을에서 뛰어 놀던 기억이 있다.

 

항촌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이다. 다산의 친구인 윤서유가 살던 집은 윤서유의 일가 후손이 살고 있다. 다산 선생이 친구이자 사돈인 윤서유의 집에 놀러가고, 같이 농막에서 술을 마시며 유배지의 설움을 달랜 곳이다. 항촌마을 건너에 다산의 따님과 사위, 그리고 외손자 윤정기 선생이 잠든 묘가 위치하고 있다. 다산 선생의 슬픔과 기쁨이 숨 쉬고 있는 그 마을들이 점점 갈수록 인적 드문 곳으로 변할 때마다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다행인건 항촌마을과 귤동마을의 윤씨들은 아직도 다산 선생이 남긴 발자취를 계속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다산 선생은 힘없고 가난한 백성을 사랑했다. 또한 주변의 친구와 제자, 홍임 모녀 역시 사랑했다. 우리는 늘 다산 선생이란 존재는 거대한 민족의 태양처럼 여기지만, 그 이면에도 초가집 처마 같이 아담하고 다정한 모습도 있었다. 위에서 적었지만, 2018년은 다산 선생이 해배된 지 200년이 된 해이다. 다산 선생과 그 주변에서 보여준 여러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귀담을 만한 사연이 넘친다. 다산 선생이 서거하기 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 황상의 모습을 보고 원한 한 가지를 풀었다. 얼마 후 황상이 강진가는 길에 스승의 부음을 듣고 다시 여유당으로 돌아가서 장례식장을 지키고, 다시 강진에 내려와 스승의 죽음을 마치 부모의 죽음처럼 여기는 모습에서 인간의 도리는 말로 하기 쉬우나 실천하기란 정말 어렵다. 세상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향해 걸어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후회로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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