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별짓기 -하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1세기총서 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평점 :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흐름을 보면 분명히 앙시엥 레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앙시엥 레짐이란 과거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회라고 볼 수 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고, 그 후오 절대주의 왕권봉건사회에서 상징물이던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지고, 또 다시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가 단두대의 여명 아래 그들의 몸과 분리되어 버렸다. 루이16세의 목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은 그야말로 구체제라는 구차한 유물의 상징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대체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자유시민인지, 농민인지, 노동자인지, 아니면 대학교수인지, 의사나 변호사인지를 생각해보면 답이 없었다. 토크빌의 <앙시엥 레짐과 프랑스혁명>의 역자서문처럼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 시대에 발견되는 ‘노예상태 속에서 평등’으로 개념화했던 것, 그리고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 ‘국민의 동의 없이 국민의 이름으로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수권자’로 묘사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민주적 전체주의(despotisme democratique)'이다. 그것은 또한 그가 실의와 좌절에 빠진 채 정계를 등지는 계기가 되었던 1851년의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3세)의 쿠데타를 몸소 겪은 혈적 체험이기도 하다.
위 내용들은 <구별짓기>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의 제일 뒤의 역자의 후기를 읽어보면 반드시 토크빌의 서적과 그 서적의 역자서문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구별짓기>는 결국 겉으로는 자유, 민주주의, 평등이 기반으로 되는 국가라고 하더라도 그 뒤에 가려진 자본의 불평등은 결국 계급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 계급이라고 하는 것이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역사는 계급의 투쟁이라고 하는 단순히 마르크스주의 논리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마르크스의 논리는 이 책으로 본다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반구조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하나의 사회과학적인 지표이다.
그것은 마지막 장에 가면서 칸트의 <판단력비판>으로 통해 취미와 취향을 논하지 않은가? 미적 감각이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감정이라고 하고, 그 감정조차도 이성적 판단과 지성적 수준으로 평가를 판가름할 수 있다. <판단력비판>이란 결국 어느 대상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그 기준에 대한 기준이다. 처음부터 그것을 사고할 수 있는 역량조차 가지지 못하면 판단조차도 불가능해지는 귀납적인 논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취미와 취향, 그리고 계급과 사회, 문화와 역사, 민주주의사회와 프랑스혁명에서 우리의 사회는 어느 관계가 있는가?
상당히 엉뚱한 명제들만 늘여놓은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루이16세에게 아름다운 쇳소리를 내며, 그의 목과 몸을 영원한 그림 한 폭에 집어넣는 순간, 프랑스는 前자본주의에서 실제 자본주의국가로 이환되었고, 그 자본주의적인 요소는 현재까지도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과 같은 다양한 사상과 이념이 뒤죽박죽이 되어있다. 오직 한 가지의 사상과 이념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면 그 사회는 이른바 파시스트의 세계로 되어버릴 것이다. 그만큼 다양한 담론과 의미가 내재하는 것이 건강한 사회일지 모른다. 오히려 이런저런 문제가 사소하게 터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현재 상황을 알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인 <1984> 내지 <동물농장>처럼 일이 있어도 그것조차 통제한다면 그 사회는 이미 병이 든 것도 모자라 죽어갈지 모른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와 문화, 계급, 자유, 평등 같은 정치적, 사회적 영역과 연결함에서 왜 중요한가이다. 게다가 이 책은 1970년대 도서이고, 한국에는 1996년에 번역되어, 지금 내 손에 2010년대의 사회에서 담론짓고 있다. 생각을 다시 해보면 왜 내가 앙시엥 레짐을 꺼냈는가이다.
한국은 아직 민주주의국가라고 하나, 실제로는 토크빌이 지적한 ‘노예상태 속에서 평등’이란 의미이고, 루소가 칸트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프랑스혁명이 그에게 큰 빚이 있었지만, 칸트는 프랑스혁명을 달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칸트는 이성을 중시했고, 강렬한 분노로 이루어진 테러리즘적인 혁명에서 결국 그 사회 자체는 변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프랑스혁명 이후 농민과 노동자는 여전히 빈곤했고, 러시아혁명 이후 노동자들은 빵의 부족을 시달렸다. 사회적 구조로 본다면 결국 상층을 제거하여 새로운 상층만 들어선 것이다.
우리 한국이 아직 그런 과도기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프랑스와 같은 경우 1789년부터 시작하여 꾸준히 혁명이 발발했다. 혁명이라고 하여 좌파적 성공(루소는 좌파다)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우파의 혁명도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전복되고 또 전복되어 수많은 희생자들(특히 1871년 파리코뮌)의 피로서 역사를 적어갔기에 오늘날의 프랑스가 되었다. 물론 그 중간에 세계대전의 참혹한 역시 새로운 전환기를 이어갔다. 그들은 200년이 넘는 민주주의국가 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제 해방이후 70년조차도 되지 못했다.
프랑스혁명에서 좌파인 자코뱅당이 자발적으로 주도했지만, 한국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도 착각하는 것이 좌파라고 하면 마르크스주의로만 연결하나, 실상은 루소의 이념이었다. 루소가 민주주의국가의 기틀을 잡았는데, 민주주의 시초조차도 좌파라는 점이다. 단지 그것이 시대에 따라 변해갈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과도기를 지나치지 않았기에 다른 국가의 200년 이상의 시간을 불과 70년 미만으로 해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구별짓기>라는 도서는 프랑스혁명 후 거의 200년 이후에 나온 도서이다. 그런데 이 도서가 그보다 40년 정도 뒤에 내가 읽는데도 그렇게 시대적으로 뒤떨어지는 도서가 아니었다. 지표들을 보면 당시 TV는 없었고, 라디오의 소유가 중요했다. 2010년 TV가 없는 집도 없고, 라디오는 이제 오래된 기계에 불과한 시대다. 그러나 문제는 물질적인 조건이 아니라 물질적인 조건을 부여하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란 점이다. 자본이란 것이 경제력이 아니라 학력, 사회관계, 문화, 상징 등 수많은 조건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각 차이점은 사회구성원들의 차이를 만들고, 그들의 생활과 사고방식까지 구별 짓게 하고, 최종적으로 정치적 참여까지 변화를 준다는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국가에서 자본주의 유입의 중요성은 개인의 자산을 인정한다는 점이고, 과거 봉건사회는 재산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존재하나 왕족, 귀족, 성직자, 상인, 기사, 농민, 노동자, 노예 등과 같이 간단하게 계급을 정했다. 이 중 상인이 제아무리 능력이 좋고, 재산이 많아도 정치적인 결정권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그저 돈만 많은 사람이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와 결합에서 소유의 인정은 결국 이들에게 정치적 결정권에 큰 기회를 주었고, 경제적인 능력으로 통해 다른 영역까지 충분히 손을 뻗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상인이라 하여 모두 부유한 것도 아니고, 일부 대부르주아지에서 유지되다가 그 밑으로 쁘디부르주아지, 프롤레타리아의 존재는 유효했다. 그러나 이제 쁘디부르주아지도 기존 세력, 기존세력에서 유지 혹은 몰락, 신흥세력까지 등장하고, 하층계층 농민 내지 프롤레타리아도 교육이나 사회적 지위나 여건에 따라 다르게 되었다.
게다가 이들이 파리에 사는지 혹은 근교에 사는지 시골에 사는지에 따라 다양한 변화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 변화의 세세함이 결국 취미와 취향 등에서 발견되는 점이다. 이 책에서 상류계층인 상급관리자, 자영업, 대학교수 등을 보자. 본래부터 귀족적인 부르주아지들은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을 경우가 많으며, 국립행정학교로 통해 영속적인 계급세습이 이루어진다. 이들의 취미는 테니스, 승마, 요트 등과 같이 비싼 대가를 필요로 하는 취미이고, 옷이나 가구, 구두등과 생활용품들은 최신품보다 너무 티를 내지 않은 것을 요구하며, 오히려 최신품만 추구하는 쁘디부르주아에 대해 다소의 경멸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교수나 그랑제꼴 같은 높은 학력자본소유자들은 비싼 비용보단 산책이나 독서, 미술관 관람, 음악회 감상 등과 같이 문화자본에 충실했다.
이들은 가격보다는 문화적인 영역의 정신적 혜택을 추구했고, 독서량이나 신문읽기도 다른 계층보다 높았다. 이들은 상류계층이라도 피지배분파로서 자신의 가치관을 머물지 않고 하층계층 쪽과 소통을 하려고 했다. 가령 1968년 5월 혁명을 생각하자. 이 책에서 드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1968년 5월 혁명은 드골정부의 강압적 정책에서 시작된 사건이었고, 그 계기로 1969년 선거에서 드골은 패배한다. 당시 많은 대학생과 노동자, 심지어 주부와 청소년들까지도 이 운동에 참여했다는 점과 많은 지식인들이 5월 혁명에 대해 큰 호응을 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 어느 특정 운동에 대해 대학교수나 사회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지지선언을 종종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일부는 그 운동의 시발이 되는 세력에 대해 협조적인 자세를 유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상류계층에서는 그만큼의 문화자본력과 학력자본이 있기에 사회적 현상을 제대로 간파하고, 자신의 의지를 전달할 수 있다. 정치적 참여에서 토크빌에게 큰 회의감을 안겨준 ‘민주적 전체주의(despotisme democratique)'를 극복하는 방법은 결국 지식인들의 계몽의식 전달이기도 하나, 계몽이란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타인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시작인 것처럼 한계가 있다.
어째든 상류계층에서 교수들은 문화자본과 학력자본이라면 부르주아지들은 대부분 경제자본이었고, 취미도 그런 것을 추구했다. 부르주아지가 있다면 쁘디부르주아지가 있다. 이들은 부르주아지를 넘보는 존재로서 경제적 성공을 배경이 되나 단점으로 본래의 부르주아지보다 문화자본과 상징자본이 부족하다. 특히 이들의 성공의 신화에 깊이 빠져있는 부류로서 값이 비싼 의상이나 구두, 자동차 등을 구매하고, 취미 역시 요트, 테니스, 골프를 하여 자신의 교양적 수준을 경제적 자본으로 대체하려 했다. 기본적으로 본래 부르주아지들은 억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자연스레 어린 시절부터 몸에 베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승 중인 쁘디부르주아지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만약 어느 노래나 그림이 나왔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경우 전자의 경우 “글쎄? 모르겠는데요.”라고 간단히 넘어갈 것이나, 후자의 경우 억지로 아는 채를 낸다는 점이다.
경제적 자본을 소유한 쁘디부르주아지의 특징이 이렇고, 신흥 쁘디부르주아지 중에서도 문화자본을 소유한 세력도 나타나 문학과 예술을 좋아하고, 박물관과 영화관, 미술관 등을 방문한다. 이들의 특징은 조금 열린 사고를 가진 점과 그런 사고로서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직업과 더불어 취미의 영역이 각 계층마다의 차이는 결국 그들이 추구하는 미적 감각의 차이이고, 그것이 물질적 영역인지? 아니면 정신적 영역인지에 따라 틀리다. 물론 취미생활에서 문화자본의 소유는 경제적 자본력이 필요하다.
가령 책 1권을 구입하거나, 음반 1장 구매하거나, 박물관과 영화관을 관람할 때도 티켓은 반드시 금액이 필요하다. 하지만 막대한 금액이 소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취미생활로서 자신의 취향을 살리고, 그 취향에는 다양한 가치관이 부여된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들이 농민과 노동자이다. 농민의 경우 정치적 세력에서 진보와 보수가 있다면 보수보다 더 보수적인 존재로 나온 것이 인상적이었다. 과거 러시아혁명 이후 레닌과 트로츠키가 경제개혁을 하려고 했으나, 쿨라크들이 소비니스트적인 자세로 포기해야 했다. 그 후에 트로츠키가 스탈린에게 정치적 패배를 하게 된 이후 스탈린이 쿨라크들을 모조리 탄압하여 소비에트연방은 강대국이 되었다.
저런 역사적인 사례와 더불어 농민들은 파리나 대도시 인근이 아니고, 신문이나 잡지도 잘 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잡한 이야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기존의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습관성이 있었다. 이와 달리 도시노동자의 경우 경제적 압박을 받는 점과 1968년 5월 혁명 시에 바갈로레아라는 대학입학증서 소지자조차도 노동자가 되어 학력자본 소유로 통한 계급변화가 힘들어진 점 역시 무시하지 못할 처사였다. 바갈로레아가 노동계급으로 들어올 경우 중등교육 내지 초등교육을 받은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문제와 더불어 그 안에서도 사회적 지위를 상승할 수 있는 기회까지 경쟁할 수 있는 점이다.
어째든 그런 노동자들은 대부분 생계형으로 생활패턴이 잡혀있기에 문화자본에서 독서, 영화보기 같은 것보단 TV보기와 축구나 일반적 경기관람이 많았다. 신문이나 잡지에 대한 수효는 적었다. 기본적으로 하층계층은 자신들이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수준이기에 자신의 의지로서 직접 표방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간다. 이 책에서 어느 하류계층에게 “당신의 정치적 입장은 어떠나요?”라고 물어보면 “저는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이죠?”라고 되묻는다.
비록 <구별짓기>가 취미와 취향의 분포로서 각 계층을 비교분석하는 것이나 토크빌의 주장처럼 ‘국민의 동의 없이 국민의 이름으로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수권자’가 가능한 이유는 민주주의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이 얼마나 판단능력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그러나 그 판단능력은 학력자본과 문화자본, 경제자본에 의해 다시 재정립된다. 결국 이런 자본들의 충분하지 못한 부류가 국민 대부분이기에 정치적 상황에서 어느 특정세력에 대한 지지보다는 그 자체로서의 유동적인 상황이 된다.
한국에서 정치는 바람이 불면 갈대가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갈대가 쓰러진 곳에 바람이 온다는 말처럼 하류계층의 지적영역과 인식능력에서 결국 정치적 영향으로 이어진다. 아니면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라는 말에서 이성의 영역에서 현실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영역이 이성적이라고 왜곡되는 것이다. 취미와 취향의 부류에서 왜 정치적 영역으로 가는 것일까 생각하면, 결국 취미와 취향이 인간에게 사고의 결정을 부여하고, 가치관을 정립하며, 게다가 그 취미와 취향에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같이 한다는 사회관계자본까지 결정적이다.
만약 골프나 요트타기를 한다고 가정하면 일반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취미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을 할 수 없다고 하여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통해 조직되는 계급들의 벽들은 사회적인 대립각으로 변화되는 경우가 있다.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골프장 도입을 환영하겠으나, 그 인근의 어민이나 농민들은 반대할 것이다. 조금 극단적인 경우라고 해도 사회관계의 차이는 분명히 갈등의 원인이 되는 점은 우리 현실에서 자주 보는 일이다.
내가 위에서 한국사회의 흐름이 앙시엥 레짐에 가깝다고 한 말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문화와 취미, 취향 그리고 정치적, 정치적 영역에 왜 그런 것인가이다. <구별짓기>에서 이런 말이 있다. 정치인들은 하층계급에 대해 직접적인 입장이나 상황을 알 수 없으면서 그들과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접점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과의 접점을 찾으려 한다면 그들의 생활을 따라가야 할 부분이 있다. 취미나 취향, 심지어 식사와 일반생활까지 말이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행위에 대해 진심어린 행동보단 아직까지도 상징적인 요소로 통한 신화의 단절과 단절이 아니라 영속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인류가 존재하는 이상, 신화라는 존재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화가 계속 바뀌어 갈 수 있는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아직 힘들다는 점이다. 앙시엥 레짐의 연계는 바로 상징자본적인 요소가 강한 현실의 모습이다. 프랑스에서 루이16세의 목을 국민들 스스로가 베었다면, 그것은 신체적 살해를 넘어 하나의 상징적 살해와 같다. 그러나 한국에선 상징적 상해는 없다. 그리고 그런 정치적 지지에서도 <구별짓기>가 제시한 학력자본, 문화자본, 사회관계자본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구별짓기>를 보면서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인간들 중에서 누가 가장 높은 존재인지 생각을 해보았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모든 국가권력은 국민으로 나오나, 국민들의 권력을 ‘국민의 동의 없이 국민의 이름으로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수권자’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어렵고, 경제적 규모로서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막상 생각해보면 삐에르 부르디외와 같은 지식인이어야말로 가장 높은 존재로 보여줄 수 있다. 단지 자신이 높이 보이기 위해 억지로 무리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지금 그렇게 되고 있는 사회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혁명에서 루소에게 큰 빚이 있다고 한다. 루소는 왕도 아니고 높은 계급에 오르지도 못했고, 매우 고된 삶을 보냈다고 한다. 프랑스혁명 일어나기 1년 전에 죽은 루소에게 혁명정부의 요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혁명의 앞을 만들어준 하나의 시작이란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아니라면 토크빌처럼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록과 판단하는 임무 역시 중요하다. 인간들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삐에르 부르디외가 <구별짓기>로 통해 문화의 사회학을 연구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그런 프랑스의 1970년대의 모습과 그것을 통해 보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제대로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려고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