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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
이동형 지음 / 왕의서재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1789년 루이왕정은 미국독립 전쟁 및 내정의 잘못으로 국가재정을 파탄 나게 하는 바람에 이른바 삼부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귀족, 성직자, 시민(부르주아) 대표를 모아 의논했으나 대부분 가난과 세금에 허덕이는 국민들에게 큰 길을 열어주지 않았고, 이에 대한 저항으로 삼부회 근처 테니스코트장에서 헌법으로 통한 통치를 위해서 만든 테니스코트선언이 발발된다. 그리고 우리 인류 역사상에서 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피로 물들인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 삼부회에서 시민 대표자가 법조인으로 활약한 로베스피에르였다.
프랑스 헌법을 만들어 국민공회까지 만들어 민주주의를 만든 그였으나, 결국 혁명을 망가뜨리고, 그도 혁명의 역사 속에 사라져버린다.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국민공회에서 공포정치를 하던 인물로 유명한 자로 생 쥐스트가 있다. 그런 로베스피에르지만, 그의 손에 항상 어느 책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다. 물론 이 책은 가끔 내 손에 들려진 책으로 우리나라 헌법만 아니라 프랑스 인권선언문까지 기초가 되는 명저이다. 오늘 내가 <사회계약론>을 다시 읽으면서 느낀 점은 민주주의 정치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론이란 점이다.
여론이 결국 정치적 함의를 결정하게 되며, 그런 여론이 올바르지 않으면 국민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루소도 그러하나 토크빌 역시 정치제에서 민주주의 약점으로 그런 대다수 의결에 따라 전체주의적 요소를 우려했다. 민주주의가 가장 전체주의라는 폭력적인 행위를 하는 정치제가 되기 쉬운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인가? 로베스피에르가 파리를 혁명공화국으로 만들 때, 사람들은 광기에 빠져 단두대에 피를 뿌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공포정치의 문제를 같은 자코뱅당 출신들이 비판하자, 언론의 자유를 몰살하고, 같은 프랑스대혁명의 주도자이면서도 외세침략에서 프랑스를 지킨 당통도 로베스피에르의 방식을 반대하였고, 결국 당통은 단두대 아래 사라져버렸다.
그만큼 민주주의 제도권에서 중요한 것은 양심의 자유와 더불어 그 양심을 지킬 수 있는 여론이 중요한 것이다. 문제는 그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 신문이고, 신문기자나 방송언론인들이 망가지면 그 나라의 미래는 암울하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계속 100년 가까이 혁명이 일어났으나 언론은 언제나 가진 자의 편이었다. 언론이란 것은 부당한 것에 대한 폭로와 저항에서 부당한 것을 유지시켜 주는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언론과 피곤한 관계에 있었냐고 생각하면 노무현 바로 그 남자다.
오늘 서평할 <바람이 불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를 받아보면서 마음이 참 울적했다. 아니 책을 내 손에 잡는 순간과 그 책을 열어 보는 것과 심지어 글을 적는 지금도 울적하다. 이 서평을 적는 일자가 2013년 5월 23일이다. 그가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인간에서 살아있지 않은 인간으로 된 지가 4주년이 된 것이다. 생물학적인 죽음이란 육체적인 존재가 물리적으로 실존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결국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그이나, 생물학적인 이상으로는 죽어있지 않은 것이다.
형이하학적으로 드러나는 실체는 없어도 형이상학적으로 우리 관념에 항상 남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존재는 유령일 수 있으나, 그 유령은 당사자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그가 유령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햄릿왕자가 죽은 아버지의 영혼을 보고 “그대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짐승인가?”, 햄릿 왕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애증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살아있을 때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아들의 심정이었으나, 한편으로 죽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란 것이다.
바로 노무현이란 존재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나온 햄릿 왕자가 말한 유령이다. 살아생전에 우리에게 그토록 욕만 먹고 사셨는데,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욕을 하는 지경이 되었다. 물론 지금도 욕을 하고 심지어 비인간적인 조롱을 퍼붓는 자도 있다. 사람이란 누구나 같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의 고통과 죽음을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무겁고, 책 제목처럼 <바람이 불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가 아니라 바람도 불지 않아도 생각난다. 변화를 의미하는 바람, 독일의 불굴의 뮤지션인 scorpions는 독일이 통일할 때 wind of change란 곡을 발표했다.
그 변화를 의미하는 바람조차 불지 않을 때에 오히려 노무현이 생각나고, 그래서 바람이 일어나길 바라는 소망이 생기는 것이다. 은폐된 진실 아래 억압과 폭력으로 가득한 신화적 세계가 아니라, 자신이 인간이기를 바랄 수 있는 자유의 바람을 말이다. 인간의 가치란 무엇일까? 노무현이란 인간을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 나는 헌법주의자라고 말하고 싶다. 헌법, 분명 대한민국 헌법에서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국가이며, 국민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천부인권, 그것은 빈부를 떠나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권리다.
단순히 빈부의 격차를 두고 경제적인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줄 수 있는 평등이고, 모두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평등이다. 사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데, 공화국에는 세 가지 조건이 따라야 한다. 그것은 자유, 평등, 박애다. 프랑스 국기가 블루, 화이트, 레드 이렇게 3가지인 이유도 공화국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이든 혹은 민주자유주의이든 이념적으로 민주주의는 공화주의를 모토를 삼아야 하기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가 표창한 “사람 사는 세상”의 의미는 민주공화국이란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하면 과연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물론 사람답게 사는 사람도 있고, 사람 이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람조차 되지 못한 사람도 있다. 가난에 학업에 취업에 결혼에 삶의 의미조차 찾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들이 있다. 길에 점점 부랑자가 늘고 노숙자들이 돌아다닌다. 사람이란 생물학적인 요건은 가지고 있으나, 그들에게 사회적인 사람의 존재로서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서평의 어두에 붙인 로베스피에르의 연설 일화가 인상이 남는다. 그는 공화국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자유이다. 그 자유라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존재해야 자신에게 자유가 온다는 점이다.
자유가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으면 결국 그것이 위험으로 다가오는 점이다. 국가 대 국가에서는 전쟁이고, 국가 정치적으로는 독재이고, 우리 일상에서는 범죄와 연결된다. 사회구조가 불평등이 가열되면 될수록 그 사회는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럽다.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이 결국 터지게 된다. 아직 우리 사회는 공화국의 모토 중에서 자유와 평등도 그러하나 박애라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은 국가이다. 승자독식에서 패자불목은 이기지 못하면 버림받을 수 없는 열기 속에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지역주의와 학벌사회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그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위한 지역주의와 사회의 공적이익을 위한 엘리트의 헌사는 바른 것이나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척하며 그에 따른 반사효과를 노리는 이 사회에서 과연 배우는 것이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노무현은 고교출신이다. 우리는 겉으로는 학벌로 사람차별하지 말자 지역차별하지 말자고 하나,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그 열기는 장난이 아니다. 좋은 대학교에 가면 줄만 잘 서도 취업잘 된다는 이유로 어린 학생들은 풍부한 감성과 합리적인 이성을 키우기보단 오로지 자기 이익에만 신경 쓰는 기계로 만들어버린다.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줘도 자신에게 아무런 피해만 없다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그런 제로섬 게임을 말이다.
그런 정신은 노무현이 살아오면 지독하게 여긴 적이었다. 같은 당 내부에서도 혹은 진보인사조차도 대학가방 끈을 매지 않은 이유로 무시하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그런 차별발언을 하면 안 되나, 적어도 1970년대 전후로 중고교를 다닌 사람들은 대학을 그다지 많이 나오지 못했다. 가난한 상황에 그 가난을 이기기 위해 고등학교는커녕 중학교 졸업 후에 일하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노력을 해서 사법고시를 넘어 연수원에 가도 서울권 대학교 엘리트들은 여전히 그를 멸시했고, 법을 가르쳐야 할 연수원 교수들도 그런 행동을 했다.
헌법의 가치란 과연 무엇인가? <바람이 불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를 읽으면 다소 감정적이고 억울한 심정으로 적어가나, 나의 글은 담담하게 적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감정이 크게 동요한 만큼 노무현이 겪은 역사적 진통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2번 반복되어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 끝난다고 하나, 그 되풀이의 1번이란 끔찍한 악몽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인간이 이성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무척이나 감정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그 감정에는 단순히 사리사욕으로 채워진 개인적 영역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윤리적인 안목이다.
그래서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인 루소 역시 <사회계약론>을 비록한 명저가 아직도 계속 되지 않은가?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저술할 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어린 시절 여행 중에 너무 배고파서 농가에 들려 그들의 어려움 입장을 보고 크게 분개한 것이었다. 노무현이 항상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로 바탕으로 하여 객관적인 선택을 하게 된 동기 역시 자신의 역사적 투쟁에서 보는 고통의 진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지극한 현실주의자였으나 한편으로 지독한 이상주의자로 분류되어야 했다. 이상과 현실은 종이 한 장의 차이인가?
그래서 이성과 감정은 무척이나 다를지도 모르나 같이 붙어있는 수평선와 같을 것이다. 그가 모든 결심은 감정적인 격류가 컸다. 사회적 약자가 겪는 고통과 눈물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것조차 묵인하고 참혹하게 억압하는 자들이 미워한 것이다. 그렇기에 논리적으로 강하게 살아온 것이다. 지금 내 글이 너무 딱딱하고 담담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만큼 내 감정이 강하게 충돌하는 것과 같다. 바람이 불어서 오는 게 아니라 바람이 불기를 바라는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