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무인 이야기 1 - 4인의 실력자
이승한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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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려 무인 이야기 1권 째를 보는 것에서 느끼는 바는 역사의 흐름에 그 인물과 배경, 상황과 전세들은 모두 다르나 근본적인 원인과 결과는 유사한 것이다. 대학교 학부교양시간에 한국역사에 대한 강의에서 참 어려운 단어들이 교수님 입에서 나온 것을 기억난다. 그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그 교재를 찾아 내가 직접 메모한 글들을 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라는 단어를 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마르크스주의가 나오고, 어떻게 하여 마르크스가 역사와 관계가 있는가? 라는 의문에서 최근에 읽어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프랑스 내전>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변증법적인 유물론적인 구조에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된다. 역사라는 것은 단순히 모든 이들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특정 인물이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진 정치적인 영향력에 대한 기술이다. 따라서 거대한 서사에서 역사란 항상 대표자에 의한 투쟁의 역사로도 볼 수 있으나, 그 뒤에 숨은 비대표자, 하위계층의 피지배계층 역사 무시하지 못한 영향을 보여준다. 단지 헤게모니적으로 숨은 피지배 세력에서도 대표자가 있는 법이고, 주동자가 있는 법이다. 민중대란에서도 그 민중조차도 대표자가 있고, 그들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기존의 관념이란 벽을 깨는 것에서 또 다른 관념이 되듯이 인류의 역사란 결국 어떻게 하든지 정치적 상황과 그 중심의 대상인물 중심으로 기술되는 게 한계점인 것인가? 어째든 고려 무인 이야기를 보면서 느낀 점은 적어도 그런 인물들조차도 하위계층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가령 무인의 난에서 정중부나 경대승 같이 어느 정도 권력을 가진 세력이라면 몰라도 이의민과 같은 천민 출신들은 상당히 큰 전환점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역사적 이름은 그저 어느 시대에 흔한 하급무장 내지 병사일 것이다. 그런 그들이 어느 순간 쿠데타적 성향이 강한 행동으로 당시 정치권을 좌지우지했다는 점은 하위계층도 상위계층과 정치적 판도에 큰 여파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역사의 흐름에서 그 사회적 흐름은 상위구조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위구조에서도 역시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구조적인 연관성이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큰 역사적 흐름을 일으킨 사람이 그였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처음부터 자신에 대해 살인마, 반역자, 범죄란 타이틀을 쥐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가 원하여 되기보단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환경이란 결정적인 조건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의종을 직접 죽여 연못에 던져버린 이의민의 경우, 그는 분명 키도 크고 힘도 좋았으며, 무장으로 기골이 장대했다.

 

단지 출신이 비천했기에 출세할 길을 찾지 못해 결국 위에 형제 2명과 함께 행패만 부렸다. 모진 고문에 형 2명은 옥사하고, 기골이 장대한 본인은 살아남아 이 고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문을 집행하던 관리는 이의민을 기특하게 여겨 그를 군적으로 넣었고, 그런 와중에 의종과 의종의 문신들이 무신들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다면 무신의 난이 이토록 피를 부르고 재앙으로 되었을까? 역사는 단순히 결과물로서 우리에게 찾아올 뿐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우리가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적 흐름을 본래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부자연스럽게 해체하는 것과 또는 되돌려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요소들이 있으나, 그것을 증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시작할 수 없으나 다시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나는 점이다. 위에서 마르크스의 이야기가 나온 이유도 그의 저서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아주 유명한 문구가 나오기 때문이다.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 단지 역사의 반복에서 동일한(로 볼 수 있는) 인물이 똑같은 일은 2번 한다면 분명 1번째가 비극으로 되는 것은 큰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반복 1번이 소극으로 되는 것은 이미 그것을 또 다시 재현하는 것은 더 이상 해보았자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루이 보나파르트라는 나폴레옹 3세는 독일의 비스마르크의 계략에 걸려 권력을 실각하고, 파리의 시민들은 1871년 파리꼬뮌으로 천부인권을 외치나 결국 몰살당했다. 비극은 분명 2번 되풀이 되었으나, 단지 그 루이 보나파르트와 주변 인물들은 어리석은 바보가 된 것이다. 무인 정권 이야기도 비슷하다. 만약 똑같은 군사정변을 일으킨 인물이라면 비극과 소극으로 되어야 했지만, 모두 비극으로 되었을 뿐이다. 의종의 죽음과 더불어 권력을 잡은 무신들은 결국 자신들의 내부적 권력 다툼에 서로 희생되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역사의 반복에서 인물은 반복할 수 없으나 상황의 반복은 이상하게 계속되었다. 모두 자신의 권력과 재물에 눈이 멀어 처음에는 정치적 당위성과 명제에 대한 무신정권이라면 이제 그들이 그 정점에 올라가는 순간 자신의 권력을 가시적으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재물만이 필요했다. 중앙에서는 시장과 관련된 관리들과 결탁하여 폭리를 취하고, 농토를 멋대로 갈취했으면, 심지어 임금이나 다른 신료들의 여자들까지 건들고 다녔다.

 

독재자 아니 권력자들이 가장 최후에 목표로 하는 것은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싶은 것은 결국 물질로 이루어진 보물과 땅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우리 사회나 그 시대나 땅과 재물에 미친 듯이 달려드는 이유도 역시 권력을 위해서다. 재물로서 다시 권력을 키우고, 다시 권력으로 재물을 키운다. 문제는 모든 재원과 자원은 한계가 있고, 그 권력이 다투는 정치세계에서도 관직이 있고, 그 관직도 한계지점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 세계에서는 언제나 정치적 권력에 의해 견제와 음모가 존재하며, 바른 말을 하는 것이 옳은 게 아니라 권력의 힘에 따라가는 것이 옳은 게 되어 버린다.

 

칼을 들고 정권을 잡은 이들이 비참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결국 권력은 누가 더 가지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는 배제해야 하는 점과 그런 와중에 자신의 권력을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은 우월심리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묶여있지 않은 백성들에게 간다는 점이다. 무신정권 이전에도 문신들의 무능한 내정 역시 어지러우나 외지의 지방 역시 어지러웠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자 오히려 무신들이 지방에서 더 큰 부정부패를 저지른 점과 이들의 더 큰 문제점은 문인이 아니라 무인이기 때문에 사납다는 점이다.

 

경대승을 비롯한 이의민 역시 그런 무인이기에 주변에 많은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세를 유지하고 정치적 견제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수많은 사병들을 군집했다. 문제는 이들은 정상적으로 일하고 거주하는 평민이 아니라 무술에 능하고 성품이 불순한 불량집단에 가깝다는 점이다. 경대승의 무인정권에서 그가 실천한 의지는 틀린 것은 아니나, 그것을 하기 위한 과정과 그 과정의 토대가 되는 사병의 존재는 상당한 문제였다. 그들은 인근 주민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관아와 민가에 침입하여 식량이나 재물을 빼앗으며, 심지어 사람까지 죽이는 일을 저지르곤 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 경대승과 같은 무신들은 해결하기보단 오히려 무마시키며, 그런 점을 들추는 행위를 하면 정치적 압박을 가했다.

 

경대승만 아니라 많은 무신권력자들이 폭력적 수단을 사용했으며, 때로는 자신을 탄핵하거나 비판하는 관료에 대해 귀양, 파면, 살인 등을 가했다. 이러니 나라가 어지럽고 기강이 서지 않으니 중앙과 지방의 주민들은 살기가 힘들어지고, 민란이 여기저기 발생한다. 또한 중앙정부와 달리 지방 관료들은 업무의 난이도가 높고 대우는 낮은 반면, 그 지역 세력과 잘 규합했다. 그런 점에서 무신시대에 많은 난이 일어날 때 그 주모자나 세력이 일정한 세력보다는 그 지역의 농민부터 시작해 승려, 불량배, 하급 장교나 군졸까지 넓게 포진했다.

 

문제의 시작은 문신들이 자신보다 나이도 많을 뿐만 아니라 직급도 높은 무신에게 함부로 대한 것이었다. 게다가 왕은 자신의 친위대를 소홀히 하여 마치 잡부처럼 취급하며, 급료가 제대로 지불하지 못해 경제적인 문제로 많은 무인들이 고생했다는 점이다. 결국 무신정권이 탄생한 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단지 그 중신축의 인물이 그 당시 직급에 있던 자들이고, 그들이 일으킨 이유는 자신의 성장배경과 더불어 사회적 배경과 시대적 한계가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변에서 남은 것은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이 더 강하게 되었고, 결국 고려는 혼란스러운 분위기에 빠지며 1170년 의종의 폐위와 더불어 약 220년 뒤에 고려무신인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다. 이성계는 그 자신도 무신이면서 조선건국이념을 유교문화로 변모시켰다. 그러면서 무신보단 문신 위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런 시대적 한계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으키고 말았다. 역사라는 것은 항상 반복되는 이유는 그것을 반성하는 것보단 반대로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증법적으로 다시 똑같은 위기에 봉착한다. 당시는 신분계급이 세습인 봉건사회라고 하나,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여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라는 법은 없다. 교과서 무신정권 시대는 정중부만 나오는 짤막한 내용이나 드라마에선 매우 공감되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그 역시 신화적으로 우리의 욕망이나 시대적 욕망이 일치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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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
이동형 지음 / 왕의서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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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789년 루이왕정은 미국독립 전쟁 및 내정의 잘못으로 국가재정을 파탄 나게 하는 바람에 이른바 삼부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귀족, 성직자, 시민(부르주아) 대표를 모아 의논했으나 대부분 가난과 세금에 허덕이는 국민들에게 큰 길을 열어주지 않았고, 이에 대한 저항으로 삼부회 근처 테니스코트장에서 헌법으로 통한 통치를 위해서 만든 테니스코트선언이 발발된다. 그리고 우리 인류 역사상에서 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피로 물들인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 삼부회에서 시민 대표자가 법조인으로 활약한 로베스피에르였다.

 

프랑스 헌법을 만들어 국민공회까지 만들어 민주주의를 만든 그였으나, 결국 혁명을 망가뜨리고, 그도 혁명의 역사 속에 사라져버린다.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국민공회에서 공포정치를 하던 인물로 유명한 자로 생 쥐스트가 있다. 그런 로베스피에르지만, 그의 손에 항상 어느 책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다. 물론 이 책은 가끔 내 손에 들려진 책으로 우리나라 헌법만 아니라 프랑스 인권선언문까지 기초가 되는 명저이다. 오늘 내가 <사회계약론>을 다시 읽으면서 느낀 점은 민주주의 정치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론이란 점이다.

 

여론이 결국 정치적 함의를 결정하게 되며, 그런 여론이 올바르지 않으면 국민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루소도 그러하나 토크빌 역시 정치제에서 민주주의 약점으로 그런 대다수 의결에 따라 전체주의적 요소를 우려했다. 민주주의가 가장 전체주의라는 폭력적인 행위를 하는 정치제가 되기 쉬운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인가? 로베스피에르가 파리를 혁명공화국으로 만들 때, 사람들은 광기에 빠져 단두대에 피를 뿌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공포정치의 문제를 같은 자코뱅당 출신들이 비판하자, 언론의 자유를 몰살하고, 같은 프랑스대혁명의 주도자이면서도 외세침략에서 프랑스를 지킨 당통도 로베스피에르의 방식을 반대하였고, 결국 당통은 단두대 아래 사라져버렸다.

 

그만큼 민주주의 제도권에서 중요한 것은 양심의 자유와 더불어 그 양심을 지킬 수 있는 여론이 중요한 것이다. 문제는 그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 신문이고, 신문기자나 방송언론인들이 망가지면 그 나라의 미래는 암울하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계속 100년 가까이 혁명이 일어났으나 언론은 언제나 가진 자의 편이었다. 언론이란 것은 부당한 것에 대한 폭로와 저항에서 부당한 것을 유지시켜 주는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언론과 피곤한 관계에 있었냐고 생각하면 노무현 바로 그 남자다.

 

오늘 서평할 <바람이 불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를 받아보면서 마음이 참 울적했다. 아니 책을 내 손에 잡는 순간과 그 책을 열어 보는 것과 심지어 글을 적는 지금도 울적하다. 이 서평을 적는 일자가 2013년 5월 23일이다. 그가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인간에서 살아있지 않은 인간으로 된 지가 4주년이 된 것이다. 생물학적인 죽음이란 육체적인 존재가 물리적으로 실존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결국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그이나, 생물학적인 이상으로는 죽어있지 않은 것이다.

 

형이하학적으로 드러나는 실체는 없어도 형이상학적으로 우리 관념에 항상 남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존재는 유령일 수 있으나, 그 유령은 당사자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그가 유령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햄릿왕자가 죽은 아버지의 영혼을 보고 “그대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짐승인가?”, 햄릿 왕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애증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살아있을 때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아들의 심정이었으나, 한편으로 죽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란 것이다.

 

바로 노무현이란 존재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나온 햄릿 왕자가 말한 유령이다. 살아생전에 우리에게 그토록 욕만 먹고 사셨는데,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욕을 하는 지경이 되었다. 물론 지금도 욕을 하고 심지어 비인간적인 조롱을 퍼붓는 자도 있다. 사람이란 누구나 같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의 고통과 죽음을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무겁고, 책 제목처럼 <바람이 불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가 아니라 바람도 불지 않아도 생각난다. 변화를 의미하는 바람, 독일의 불굴의 뮤지션인 scorpions는 독일이 통일할 때 wind of change란 곡을 발표했다.

 

그 변화를 의미하는 바람조차 불지 않을 때에 오히려 노무현이 생각나고, 그래서 바람이 일어나길 바라는 소망이 생기는 것이다. 은폐된 진실 아래 억압과 폭력으로 가득한 신화적 세계가 아니라, 자신이 인간이기를 바랄 수 있는 자유의 바람을 말이다. 인간의 가치란 무엇일까? 노무현이란 인간을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 나는 헌법주의자라고 말하고 싶다. 헌법, 분명 대한민국 헌법에서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국가이며, 국민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천부인권, 그것은 빈부를 떠나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권리다.

 

단순히 빈부의 격차를 두고 경제적인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줄 수 있는 평등이고, 모두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평등이다. 사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데, 공화국에는 세 가지 조건이 따라야 한다. 그것은 자유, 평등, 박애다. 프랑스 국기가 블루, 화이트, 레드 이렇게 3가지인 이유도 공화국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이든 혹은 민주자유주의이든 이념적으로 민주주의는 공화주의를 모토를 삼아야 하기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가 표창한 “사람 사는 세상”의 의미는 민주공화국이란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하면 과연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물론 사람답게 사는 사람도 있고, 사람 이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람조차 되지 못한 사람도 있다. 가난에 학업에 취업에 결혼에 삶의 의미조차 찾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들이 있다. 길에 점점 부랑자가 늘고 노숙자들이 돌아다닌다. 사람이란 생물학적인 요건은 가지고 있으나, 그들에게 사회적인 사람의 존재로서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서평의 어두에 붙인 로베스피에르의 연설 일화가 인상이 남는다. 그는 공화국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자유이다. 그 자유라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존재해야 자신에게 자유가 온다는 점이다.

 

자유가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으면 결국 그것이 위험으로 다가오는 점이다. 국가 대 국가에서는 전쟁이고, 국가 정치적으로는 독재이고, 우리 일상에서는 범죄와 연결된다. 사회구조가 불평등이 가열되면 될수록 그 사회는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럽다.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이 결국 터지게 된다. 아직 우리 사회는 공화국의 모토 중에서 자유와 평등도 그러하나 박애라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은 국가이다. 승자독식에서 패자불목은 이기지 못하면 버림받을 수 없는 열기 속에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지역주의와 학벌사회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그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위한 지역주의와 사회의 공적이익을 위한 엘리트의 헌사는 바른 것이나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척하며 그에 따른 반사효과를 노리는 이 사회에서 과연 배우는 것이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노무현은 고교출신이다. 우리는 겉으로는 학벌로 사람차별하지 말자 지역차별하지 말자고 하나,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그 열기는 장난이 아니다. 좋은 대학교에 가면 줄만 잘 서도 취업잘 된다는 이유로 어린 학생들은 풍부한 감성과 합리적인 이성을 키우기보단 오로지 자기 이익에만 신경 쓰는 기계로 만들어버린다.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줘도 자신에게 아무런 피해만 없다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그런 제로섬 게임을 말이다.

 

그런 정신은 노무현이 살아오면 지독하게 여긴 적이었다. 같은 당 내부에서도 혹은 진보인사조차도 대학가방 끈을 매지 않은 이유로 무시하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그런 차별발언을 하면 안 되나, 적어도 1970년대 전후로 중고교를 다닌 사람들은 대학을 그다지 많이 나오지 못했다. 가난한 상황에 그 가난을 이기기 위해 고등학교는커녕 중학교 졸업 후에 일하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노력을 해서 사법고시를 넘어 연수원에 가도 서울권 대학교 엘리트들은 여전히 그를 멸시했고, 법을 가르쳐야 할 연수원 교수들도 그런 행동을 했다.

 

헌법의 가치란 과연 무엇인가? <바람이 불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를 읽으면 다소 감정적이고 억울한 심정으로 적어가나, 나의 글은 담담하게 적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감정이 크게 동요한 만큼 노무현이 겪은 역사적 진통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2번 반복되어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 끝난다고 하나, 그 되풀이의 1번이란 끔찍한 악몽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인간이 이성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무척이나 감정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그 감정에는 단순히 사리사욕으로 채워진 개인적 영역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윤리적인 안목이다.

 

그래서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인 루소 역시 <사회계약론>을 비록한 명저가 아직도 계속 되지 않은가?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저술할 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어린 시절 여행 중에 너무 배고파서 농가에 들려 그들의 어려움 입장을 보고 크게 분개한 것이었다. 노무현이 항상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로 바탕으로 하여 객관적인 선택을 하게 된 동기 역시 자신의 역사적 투쟁에서 보는 고통의 진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지극한 현실주의자였으나 한편으로 지독한 이상주의자로 분류되어야 했다. 이상과 현실은 종이 한 장의 차이인가?

 

그래서 이성과 감정은 무척이나 다를지도 모르나 같이 붙어있는 수평선와 같을 것이다. 그가 모든 결심은 감정적인 격류가 컸다. 사회적 약자가 겪는 고통과 눈물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것조차 묵인하고 참혹하게 억압하는 자들이 미워한 것이다. 그렇기에 논리적으로 강하게 살아온 것이다. 지금 내 글이 너무 딱딱하고 담담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만큼 내 감정이 강하게 충돌하는 것과 같다. 바람이 불어서 오는 게 아니라 바람이 불기를 바라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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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칼 마르크스 지음, 최형익 옮김 / 비르투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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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아니 영원히 반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똑같은 구조가 다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주연배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비극에서 소극으로 전환하고 있다. 그렇지 아니한가? 프랑스대혁명 이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혁명이 무너지고, 나폴레옹이 군사권으로 통해 프랑스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지나친 전쟁수행으로 인해 유폐되었고, 다시 프랑스는 봉건적인 사회가 되었으나, 한편으로 자본주의 유입으로 통해 근대화라는 착취, 억압, 폭력이란 신화로 가득차게 되었다.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혁명을 1789년 7월만 생각하고 그 뒤에 목이 단두대 아래 분리된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16세의 부르봉왕가만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1830년에도 있었고, 1848년에도 있었고, 1871년에도 있었다. 게다가 불과 반세기 전인 1968년에도 5월 혁명이 존재했다. 프랑스는 말 그대로 혁명의 나라이고, 진실한 공화국이었다. 전에 국내 어느 국회의원이 민주주의가 무엇이냐는 말에 자본주의라고 하였는데, 진정한 민주주의의 목표는 공화주의이다.

 

공화국의 가치는 자유, 평등, 박애이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고 구속받지 않을 자유와 평등, 그리고 개인적인 요소에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박애정신이 공화주의(共和主義) 국가의 이념이다. 한자로 풀어보아도 모두가 잘 지내는 것을 목표로 사는 의의를 두는 것이기에 공화국의 가치란 바로 그런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읽어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읽는 순간 조금 당황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카를 마르크스라는 사회경제학자가 여기서는 정치역사학자로서 나오기 때문이다.

 

현재 유럽 선진국에서 통용되는 사회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 노선만을 생각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차라리 민주공화주의에 더 가까운 그의 모습이 나온다. 그가 생각하는 부분은 루소와 비교하자면, 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 내지 <사회계약론>에선 농경사회 중심, 즉 착취대상자가 대부분 농민으로 본다면, 마르크스는 노동자로 보는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부르주아 계급이 막 탄생하여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입지를 세우려 했으나 봉건사회에서 왕족과 귀족이 아닌 이상 그 한계점이 존재했다.

 

그에 반해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은 부르봉파와 오를레앙파가 존재해도 이미 그들은 봉건주의적인 사고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었다. 가령 부르봉왕가는 금전적인 동산 부분을 많이 소유했다면, 오를레앙 쪽은 토지와 같은 부동산 계열에 많은 재산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추후에 의회를 가진 프랑스 국가에서 계속 정치적, 경제적인 권력을 누리고 있었으며, 그것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런 와중에 1830년 혁명에서 1848년 2월 혁명과 6월 봉기로 통해 새로운 선거를 실시했으나 여전히 부르봉파, 오를레앙파, 보나파르트파가 득세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보나파르트가 당선되고, 곧 그는 나폴레옹 3세라는 명칭과 함께 과거 프랑스에서 전쟁영웅이 된 나폴레옹의 후광을 받으려고 했다. 그는 전쟁에서 치열한 모습의 나폴레옹 동상에서 황제의상을 입은 나폴레옹으로 바꾸려고 했다. 자신을 프랑스 영웅인 나폴레옹과 동일 시 하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나폴레옹은 전쟁을 한 만큼 국고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많은 군인들을 죽도록 만들었다. 전쟁으로 영웅이 탄생하는 것은 곧 인간의 기본적인 원리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프랑스대혁명으로 인해 열기가 가득한 그 나라가 어느 순간 왕국으로 변했는가?

 

결국 나를 제외한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거나 혹은 자신을 우월하게 만들 자가 필요한 것이다. 아니라면 그런 기대감으로 가득하여 혹시 자신에게 뭔가 이익이 되는 것을 바라고 뽑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바로 루이 보나파르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다. 온갖 사기와 공갈 심지어 쿠데타까지 일으켜 의회를 점거한 그를 말이다. 그래서 반복되는 역사적 사실에서 그의 행동이 소극으로 되는 이유는 단순히 이 책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사기꾼 행위에 촉각을 두기보단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더 치중을 둔다.

 

이 책의 후반부의 논문에서 등장하는 제일 중요한 문장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자기 마음대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상황 아래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직접 발견된, 주어진, 그리고 물려받은 상황 아래서 역사를 만든다.” 라는 부분이다. 생각해보자. 분명히 프랑스 시민의 혁명과 봉기가 실패하여 민주주의 정체 역시 후퇴한다. 그것으로 통해 루이 보나파르트는 대통령이 되었으나, 어떤 구조냐는 것이다. 그것은 루소가 농경사회의 프랑스에서 가장 가엽게 여긴 농민들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 농민들에 대한 지식이나 의식구조는 정말 수준이 낮았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삼촌인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감에 젖어 프랑스 전 지역의 농민은 서로 얼굴을 맞대지 않으나 그들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자포기에 든 감자는 출신이나 생산지가 다 다르나, 그 맛은 같다고 보면 된다. 그런 상황에서 보나파르트는 승리를 하고, 그가 자신의 영역을 우위를 두기 위해 처음에 부르주아 세력과 규합하고, 그 뒤에는 사기꾼, 야바위꾼, 깡패 등과 같은 룸펜프롤레타리아를 자신의 전위대로 만들어버렸다. 사실 사회적 구조에서 가장 빈곤하고 처량하고 구제받을 대상이 가장 심한 범죄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그런 소극적 일들은 당시 프랑스에도 20세기에서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한국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정치깡패 내지 시위대 앞에 경찰이 아닌 비경찰세력이 폭력을 일으키는 현장에서 종종 룸펜프롤레타리아를 볼 수 있다. 보나파르트는 그들에게 술과 돈을 주고, 그 술과 돈은 자신에게 위지한 부르주아의 돈이었다. 처음에 보면 군중이 봉기하거나 혁명을 일으키면 부르봉왕가, 오를레앙가, 부르주아 등과 같은 지배세력이 자신의 이익을 손해 보므로 거기에 대한 대항마로서 보나파르트에게 지지했으나, 점차 보나파르트는 이들의 돈을 넘봤고, 1852년 대통령 임기가 다가오자,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잔머리를 사용한 부르주아는 오히려 그 잔머리에 발이 걸렸고, 그 당시 제일 부자인 부르주아의 집에는 보나파르트의 군대가 발사한 대포를 맞이해야 했다. 결국 보나파르트는 독재로 통해 프랑스 전부를 가질 의도였다. 그런 보나파르트가 집권하고 게다가 쿠데타를 일으켜도 국가적으로 가능하고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화적인 욕망과 더불어 무지의 산물이다.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모든 것을 판단한다. 선험적 비판능력이 없는 농민들에게 보나파르트는 그저 나폴레옹 신화의 연속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정치적 한계에서 가장 어리석은 인간들이 적에게 무모하게 도전하는 것보다 적의 적은 나의 동지라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 점들은 한국 정치사회에서 많이 본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참여에 대해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사람에게 지지를 돌린다. 이탈리아에서 어느 코미디언 같은 사람이 정치인으로 될 수 있는 이유 역시 양비론적인 자세다. 헤겔의 변증법으로 보면 찬, 반, 합의 세계에서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란 명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르크스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비극에 대한 비극은 소극이란 새로운 형태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비극이 2번 되풀이되면 소극이 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잘 드러나는지 알려주는 셈이다.

 

에리히 프롬이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적 좌표는 한계성이 있고, 그 좌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있기에 인간이기에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곧 인간은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다. 무지한 대다수의 의견이 곧 하나의 정의 내지 도덕적인 가치가 되는 순간, 민주주의가 가장 전체주의로 되기 싶다는 토크빌의 충고가 증명되는 셈이다. 또한 그런 독재자인 보나파르트에게 의지하다가 그 보나파르트에게 잡혀먹은 어리석은 부르주아의 일화에서 우리 역시 소극을 보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역사는 진실로 주인공이 바뀌면서 반복되는 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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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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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슬프군요. 다 잘했다고 인정하지 않으나, 그것을 인정하기에 진정한 글쟁이로 오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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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읽다 1980-2010 - 세계와 대륙을 뒤흔든 핵심 사건 170장면
카롤린 퓌엘 지음, 이세진 옮김 / 푸른숲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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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러시아혁명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지금 중국이 공산주의국가 여부에서 나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No!"라고 답하고 싶다. 그들의 국가적 가치관은 이른바 쇼비니즘에 가깝다. 마치 러시아혁명이 1917년 2번이나 일어나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러시아 농민 쿨라크와 같은 존재가 중국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부분에서 노동자로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19세기 중후반 독일에서 활동하다 자국 내의 검열로 인해 영국으로 추방당한 마르크스에게 당시 유럽은 근대화 기반을 이미 수행하고 있었다.

 

 

즉, 이미 많은 도시에 시골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공장 노동자로 살았던 것이고, 많은 국민들이 노동자로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들의 밀집된 공장이 있기에 유럽에서는 지금까지도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잘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 독일, 영국과 같은 정치적 선진국에서는 마르크스 연구가 활발하며, 마르크스주의로 생긴 구조주의와 프랑크푸르트학파, 버밍엄문화연구소의 경우 상당한 인문학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얼마 전에 한국에 방문한 케임브리지 대학의 테리 이글턴 교수의 경우 세계적인 석학이면서도 지식인이니 정치적 성숙과 더불어 학문적 영역까지 뛰어나다.

 

 

이와 달리 중국에서 배우는 마르크스주의란 과연 어떠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중국에서는 노동조합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오히려 노동조합의 단결력으로 노동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기에 공산주의국가라고 표방하는 중국에는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공산국가라고 하나 그것은 마르크스가 가르치던 공산주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공산당만 남은 관료주의 국가일 뿐이다. 게다가 강력한 쇼비니스트들의 모임이다. 중국의 강력한 단결력은 관료주의 체계에서 사용하는 프로파간다의 위력이다.

 

 

중국이 원인제공자이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고, 그 원인에 따른 부차적인 사고를 카메라로 집중적으로 목격하여 대국민적인 단결력을 도모한다. 가령 티베트족의 독립 문제를 거부하는 것과 달라이라마의 망명, 그리고 달라이라마의 정치적 행보를 트집 잡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마르크스주의와 관계없는 행동이다. 게다가 중국이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너무나도 다르다. 레닌은 제3인터내셔널을 조직할 때 분명한 슬로건이 있었다.

 

 

제3국의 독립과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공산주의국가 혁명으로 러시아혁명이 비록 스탈린에 의해 실패했더라도, 기본적으로 마르크스가 제시한 공산주의란 제3국의 노동자에 대해서도 보장해야할 가치였다. 중국의 경우 오히려 역행했다. 티베트를 강제적인 군사행동과 대만과의 군사적 대립, 그 외 중국내에 거주하는 다민족들까지 억압했다. 한족이 중심인 중국에서는 그저 한족이 세계 중심이 되어야 하는 점과 평등이란 오로지 자신에게 존재한 평등이었다.

 

 

따라서 중국은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강력한 관료주의에 바탕으로 한 전체주의 가치관으로 말이다. 중국이 당초 생긴 공산당이란 일본과 대립하던 독립운동이었다면 이제는 마오쩌둥이 지배하기 위해 생긴 정치적 공작기관이다. 마오쩌둥은 일생을 투쟁만 삼은 인물이다. 그 투쟁력이 있기에 중국은 독립적인 나라가 되었고, 냉소 이데올로기에 살아남아 거대한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과 같이 마오쩌둥의 강력한 모습은 정치란 단순히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만 몰고 간 것이 한계였다.

 

마오주의가 성공할 수 있는 동기는 마르크스는 혁명주체를 노동자로 봤다면, 마오는 농민으로 보았다.

 

중국이 기본적으로 1차 산업인 농업중심이었고, 그들은 광대한 대륙에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장점이자 단점이다. 러시아 농민처럼 그들은 심각한 쇼비니즘에 심취한 점이란 것이고, 교육의 한계성으로 계몽이 성사될 수 없었다. 자기 안의 계몽이 없으면 타인의 계몽은 그저 새로운 억압과 통제일 뿐이다. 마오쩌둥의 강한 의지로서 중국은 같은 공산국가인 소비에트 연방과 베트남과 이질적인 외교성을 보인다.

 

 

그런 마오쩌둥이 죽은 후에 덩샤오핑이란 인물이 나타나면서 중국은 변화의 물결을 받는다. 하지만 덩샤오핑 역시 한계성이 보이는 것은 마오쩌둥 시절에 문화대혁명에 따른 홍위병이 중국내를 혼란으로 몰고 갔다면, 1989년 천안문사태는 중국 내에서 검색이 불가능한 단어로 설정했다. 중국은 인권문제에서 매우 열악한 국가이다. 사람이 너무 많기에 개인의 중요성에서 단체적 중요성이 먼저이다. 물론 사회적 행위에서 단체의 중요성은 인정되나 그 모든 것을 위해 개인의 영역은 모두 소멸된다.

 

 

그런 점에 따라 중국은 인권의 기본핵심인 건강문제나 위생문제 역시 엉망이다. 한 마을에 에이즈가 넘쳐도 당국은 비밀에 행동하며,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알린 의사를 평생 감시 속에 나둔다. 언론의 중요성이란 정확한 객관성만큼 공정성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중요한 국가적 실책이 나오는 그 부분에서 공정성은 없다. 에이즈 문제가 생긴 마을은 통제되고 격리되었다.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부분을 생각하면 중국의 성장 뒤에는 그림자가 존재한다.

 

 

빛이란 강력한 에너지 뒤에는 어둠의 세계가 더 짙게 드리우는 것처럼 중국의 성장에서는 계속되는 발전만큼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는 점이다. 경제 성장만큼 발전하는 것이 컴퓨터와 인터넷과 통신시스템이다. 그러나 그만큼 발전해도 자유로운 언론이 보장되지 않으며 국가 전반적 문제는 여전히 비공개를 요구한다. 환경오염 부분에서도 벤젠이 유출된 문제는 심각하다. 각종 암과 백혈병을 유발하는 벤젠이 기준치 100배라는 점은 보통 인간이 흡입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분유에 멜라닌이나 최근 한국에서 시끄러운 사건인 납이 든 꽃게나 색소가 들어간 음식물은 중국이 그동안 자신들의 경제성장에 치중한 만큼의 국민성의 발전이 없었다. 그것은 강력한 국가정보 통제였다. 선전업무를 맡은 공안정치에서 적은 항상 필요로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국민은 항상 정의로운 투사야 했다. 국가나 혹은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한 항의는 재빨리 제압하던 그들은 외교문제나 소수민족의 테러에 대해서는 천안문사태가 일어난 그 광장에서 마음대로 외치기 나두었다.

 

 

중국이 최고가 되려면 중국이 아닌 자는 그 이하로 격하시켜야 한다는 강한 강박관념이 존재한 것이다. 그 성과는 경제성장이 이미 일본을 제친 것과 2008년 올림픽 경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경제성장만큼 국민의식은 발전하지 않았다. 아니 정치적 성장은 기대할 수 없었다.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은 중국올림픽 참관에서 티베트와 원만한 해결을 원했다. 그러나 중국은 그것을 부정했고, 이에 대해 티베트인이 프랑스에서 파리시장의 허락 아래 티베트 국기를 내건 점과 티베트인과 세계 인권단체에서 티베트 문제를 항의한 것이 그대로 여론에 나타났다.

 

 

프랑스는 국가 수장과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정치적 행보가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었다. 같은 국가는 그 자체가 독재국가이고 전체주의국가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해할 없었다. 지방자치분권에서 자유로운 정치권을 누릴 수 있는 것에 대해 말에서다. 프랑스의 경우 1789년 7월 대혁명부터 19세기 내내 혁명의 시기였고, 20세기에도 대혁명이 있던 국가이다. 그만큼 국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사건이나 배경이 그 어떤 나라보다 깊은 나라이고, 표현에 대한 자유와 권리를 중시했기에 중국인들로서는 프랑스가 배신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후진타오 수석이 정권을 잡을 시기인데, 후진타오 총리가 임명될 때의 일화는 너무 인상이 깊다. 중국은 부정과 비리가 너무 강한 국가였다. 공안정치가 강한만큼 관료주의 체계의 부실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와중에 가족이 없으며, 엄마처럼 키워 주신 고모까지도 인연을 끊은 후진타오의 정치적 행보는 참 인상이 깊다. 중국이란 나라가 아무리 국민성에서 다소 문제가 많아도 저런 지도자의 모습은 왠지 부럽다. 그렇지만 후진타오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니다. 티베트에서 저항운동에서 그가 펼친 강압적 조치는 유유하게 대응하면서도 한편으로 강력한 모습을 지닌 것이 배타적 요소이다.

 

 

그런 배타적인 자국민중심주의는 중국이란 국가를 선진국으로 발달시켰다. 넓은 인구에 광대한 영토에 외국기업이 투자유치하면서 기술을 배우고 외화를 벌었다. 하지만 산업스파이나 기술유출이 강한 국가로 비추어진 만큼 중국은 강대국들이 가장 경계할 대상 국가이다. 그러나 중국은 가장 멀리하기보단 가장 경제적으로 협조해야할 국가이다. 국가의 규모와 인구수만큼 시장성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시장성이 되는 인원이 소수라도 그 소수규모 자체도 다른 국가에서는 상당한 인원이다.

 

 

한국에서 보는 중국에 대한 시각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하나, 경제적 분야를 전문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매우 강한 나라이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소모품이나 물건을 보면 대부분 made in china라는 마크가 분명히 새겨져 있다. 중국에서 만들어온 물건들이 우리 일상들을 지배한다. 심지어 우리 기업이 만든 상품도 국내 공장이 아니라 해외시장으로 이주하면서 중국은 큰 공장지역으로 되었다. 하지만 외국으로 공장이 가면서 국내 내수시장은 약해지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2013년에도 중국은 마오쩌둥-덩샤오핑-짱저민-후진타오라는 거대한 4명의 남자의 입김에 움직이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연구자는 중국이 2030년 중반에 최고의 나라가 된다고 한다. 중국은 이제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보단 중국 한족의 세계적 위상을 노리고 있고, 그것을 위해 경제적인 성과에 치중한다. 이미 중국의 경제적 위력은 한국과 일본, 미국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미래를 보며 살아가는 시점에서 중국이란 나라는 적이 아닌 적이 될 것이고, 친구 아닌 친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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