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미학 에세이 - 예술의 눈으로 세상 읽기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이상한 놈들이 책도 안 읽고 별이나 세는 잉여짓하는 애들이 도서사이트에 퍼져있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문제적 인간 7
리오 담로시 지음, 이용철 옮김 / 교양인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대한민국 헌법 제1조와 더불어 세계 헌법의 모태와 모든 자유주의, 민주주의, 심지어 사회주의까지 기초가 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이런 말이 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로 묶여 있다.", 인간이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이미 자유롭게 태어난 몸이라고 하나, 그가 태어난 순간 우리는 사회의 일부 구성원으로 등록된다. 태어나자말자 병원이란 기관에서 관리를 받고, 동사무소와 구청으로 통해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고, 평생 국가에 의해 통제받는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는 감옥의 역사를 다룬 내용으로 이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감시를 받아야 하며, 그것은 구조적인 하나의 체계라는 것을 폭로한다.

 

생각해보면 <감시와 처벌>에서 아주 인상적인 젊은 하급관리 이름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다미엥, 다미엥은 루이15세를 암살기도한 범인으로서 암살실패와 더불어 엄청난 고통 속의 사형처벌에서 죽어간다. 그의 죽음을 보자면 살아있는 자에 대한 폭력으로서 전제주의 봉건왕국의 위험을 보여준다. 그는 왕의로서 그림자가 되어야 했다. 그런 다미엥의 이름이 루소의 전기에서 등장할 줄은 몰랐다. 다미엥의 암살미수사건에서 장 자크 루소를 옭아매려 했다는 사실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사실 비단 이 문제가 결부된 것은 아니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인간불평등기원론>, <에밀>과 같은 정치, 철학, 사상, 교육, 사회학적인 도서만 아니라, <고백록>,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와 같이 철학적 요소와 더불어 인간의 이성 안에 있는 무의식과 감정을 변증법적으로 다룬 도서도 있다. 최초의 정신분석도서가 바로 <고백론>이라고 소개한 점에서 이 책에서 나는 예전부터 내가 품은 생각을 확신했다. 근대 철학이나 사상에서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추가로 소쉬르를 추가한다면 이들의 기원은 모두 루소에게 있다는 점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경우 그가 처음에 사회주의자로 활동하기보단 처음에는 자유주의자였다고 한다. 그의 정신적 지주로 피히테, 칸트, 셰익스피어, 아리스토텔레스 등과 같은 철학자였다. 그러나 막상 그의 서적에서 보인 도서내용과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보이는 점은 비슷하다. 일을 하는 사람은 가난하고, 일을 하지 않은 자는 부유하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산적 요건의 차이가 결국 빈부격차를 나타내고, 칸트의 <판단력비판(대우아카넷)>에서도 루소의 생각이 전해져온다.

 

“사치는 수백 명의 도시인을 먹여 살리지만, 수천 명의 농부는 농촌에서 죽어가게 한다. 사치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주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손 사이를 오가는 돈은 농부들의 삶에 아무 쓸모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장식 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의복이 모자란다. 사람들의 양식으로 이용되는 물질을 낭비하는 일은 사치를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내 반대자들은 우리말이 어려워 그들이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내가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행복해한다. 우리의 부엌에는 주스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환자에게는 수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부들은 물만 마신다. 가발에는 밀가루가 필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한다.”

 

소비주의적 사회에서 분명 올바른 소비는 국력을 증가하고, 국민의 이익을 증진하는 것은 사실이나, 지나친 사치는 오히려 빈곤을 만들고, 특히나 화폐의 지나친 유통으로 인플레이션이 증대되는 역기능이 있다. 트리클다운이란 낙수효과를 말하는 경제적 논점이 이미 한국정치계 여야 모두 벗어나 역트리클 다운을 모색한다. 기본적으로 생각하면 TV, 냉장고와 같은 가전제품 역시 필요 이상의 기능을 구매하면 과소비에 해당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비의 사회에서 이미지의 소비로 통해 필요 이상의 제품을 구매한다. 문제는 자기의 경제적 여유에 맞는 선에서 해결하는 것이 바르나, 그렇지 못한 점이 많다는 점이다.

 

어떤 자원에 국한된 한정량에서 분명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도 있지만, 그것이 필요의 요구보단 개인적 취향에 의해 요구된다면 그 자원은 분명 후자에게 갈 것이다. 필요의 요구성보다 취향의 요구성을 가진 자에게 훨씬 구매능력이 뛰어난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필요의 요구를 가진 자들은 어떻게든 구해야 하기에 그들의 경제적 여유에서 큰 박탈감을 지닌다. 루소가 어린 시절 홀로 길을 가다가 농장에 들려 밥을 달라했는데, 처음에 농민들은 맛 없는 빵과 간단한 음료만 주었지만, 루소가 허걱지걱 급하게 먹자 루소에게 고기를 주었다고 한다.

 

이들의 입장에서 물론 식량에 필요의 요구는 물리적으로 해결되어 있으나, 그렇게 숨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왕정, 귀족, 성직자들이 계속 이들을 착취하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의 모든 알레고리적인 연결에서 루소로 연결된다. 판테옹 프랑스 사원에 안치된 루소의 유해나 프랑스 어느 곳이든 기념된 루소의 상징물, 게다가 루소의 섬과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에서 루소의 가치는 엄청 대단하다. 솔직한 말로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분짓기>와 철학이론서에 나온 데리다의 해체적 관점 역시 루소의 사상에 상당히 근접하다.

 

1968년 파리의 5월혁명을 주도한 상황주의자인 기 드보르의 경우도 그렇다. 스펙타클이란 이미지로 매개된 사회에서 인간은 결국 이미지에 의해 조성되는 하나의 존재인 점에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의 상황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모든 이미지(사회적 풍조)와 단절을 한 루소에게 상황주의자적 요건이 보인다. 루소가 인간 개인적 그 자체적으로 생각하면 다른 철학자보단 대단한 것은 아니나, 그가 사유하고 만든 사상이란 이미 200년을 지나 300년을 지난 지금도 큰 충격과 공감을 준다.

 

그는 비도덕적인 행동도 하였고, 아이를 고아원에 보낸 비정한 아버지이었다. 덕분에 루소는 비난을 면치 못했고, 평생 꼬리를 물고 다녔지만, 그는 그것을 오히려 참회하는 심정으로 자기의 모순과 약점을 도리어 드러낸 점에서 위대할 수 있다. 위대하게 보이기보단 스스로 깎아내리는 그의 마조히스트적인 요소는 자아성찰이란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그는 자기의 아이러니하기에 오히려 더 큰 발전을 보았다. 비정한 아버지로서 <에밀>을 저술하여 그의 죄를 인정하고, 아이에게 제일 좋은 선생님은 아버지고, 어머니의 모유를 마신 아이들이 훨씬 좋은 성장을 한다고 한다.

 

결국 어머니의 모유에 의한 효능은 입증된 바이고, 그의 교육철학은 현대교육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귀족들의 찬양을 좋아해도 귀족의 지원과 살롱생활을 혐오하고, 오히려 가난하고 빈곤한 자에게 애정과 관심을 보인 루소에서 인간의 자유정신보다 박애정신의 좋은 예를 본다. 루소가 사는 곳에 가난한 주민이 있으면 그들에게 식량을 주고, 그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그들과 대해주었다고 한다. 명성이 높을 수록 자만해져, 아랫사람들을 깔보는 풍조에서 루소는 왕이나 귀족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히 했다.

 

시대적 흐름은 앙시앵레짐 즉, 구체제라는 봉건사회다. 루소의 명성은 루이16세의 결혼식에서 루소의 극본으로 오페라를 하고, 루소의 말년에 벌어진 사건이 루이16세의 재미거리였다. 길 한복판에서 거대한 사냥개와 부딪히어 기절한 루소가 마치 죽은 것처럼 소문난 것이 당대의 이슈인 점에서 루소는 시대적 불운과 명성을 같이 간 사람이다. 자신에 대한 은둔적 요소를 끊임없이 추구한 그였기에 그의 진리적 탐구는 이상적 세계관을 제시했다. <사회계약론>의 담긴 내용은 민주주의국가의 헌법에서 당연하게 여기나, 당시에는 불법도서였다.

 

1762년 <사회계약론>이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을 자르게 한 시초라고 당대 사람들은 생각했는가? 어째든 이 책에서는 루소의 서적과 당시 문헌을 인용하여 매우 객관적으로 적어내려가고 있다. 루소라는 인간이 엄청난 인물이고 위대한 철학자임은 분명하나, 그는 광기와 우울에 시달리고, 건강이 위험하여 간질증세로 고통받았다. 인간관계가 어설프고, 바랑부인에게 목매어 있었으나 그녀의 진짜 모습은 그가 생각한 것과 다르고, 당대 명사인 볼테르와 디드로에게 공격을 받는다. 계몽주의 철학이 등대한 시기에 오히려 계몽주의에서 반계몽주의로 대항한 점에서 그의 세계관은 도미노 1개를 빼면 무너지는 도미노의 탑과 같았다.

 

모든 것을 전복해버리는 루소의 사상이 오히려 지금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남았으나,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또한 테레즈에 대한 기록이 인상깊은데, 루소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마지막 10장을 미완성으로 하여 서거한다. 미망인 테레즈가 루소에게 매우 깊은 성찰과 더불어 루소 자신에게 어머니, 누이, 아내는 아니었으나 이 모든 것을 가진 여자가 테레즈라고 했다. 본래 결혼하지 않기로 했으나 결혼을 하였으며, 테레즈는 1801년 극빈의 상태에서 죽었지만, 루소의 명예를 끝까지 지켰다고 한다.

 

루소가 죽자 사람들에게 "만약 그가 성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성자라는 것인가?"에서 루소는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진정한 성자가 되었으며, 이후 계속 프랑스혁명 때부터 그의 의지는 반복된다. 사실 루소의 서적을 보면서 내 가슴이 뜨거운 것을 느꼈다. 인간에게 필요한 일반의지는 프랑스인권선언문에 그대로 올라간 단어이다. 개인의 사심이 아니라 인간의 공적이성으로 통해 올바른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여 자유공화주의적 슬로건인 자유, 평등, 박애를 실천하는 것이다. 루소가 없다면 오늘날의 세계는 없다. 미국독립의 아버지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는 토머스 페인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봉건왕족사회에서 민주주의사회로 이전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물론 당시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이 현명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그 길을 걷게 해주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에서 그에게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3-11-29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루소 하면 만애비 님 전공이군요..

만화애니비평 2013-11-29 17:30   좋아요 0 | URL
루소 빠도리입니다..ㅎㅎ

루쉰P 2016-06-03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ㅎ 루소 빠도리시라니 서재를 잘 찾아 들어온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대한 유리한 리뷰자 시길래 질문하나 드리고 싶어서요. ㅎ
제가 이번에 목돈이 좀 마련되어 이 책을 사고 싶어서요. 그런데 저는 굵은책은 번역이 잘 되지 않거나 읽는 데 어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제가 뭐 번역이 잘 되었다 아니다를 따질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은 되지 않지만 읽는 데 있어서`어?` `어?`그러는 책들이 있거든요.

뭐 `동서문화사`나 이런 류의 책들이 두꺼운 데 반해 읽기에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 책을 읽어 보셨는데 어떻게 읽을 만한 지 물어보고 싶어서요 ㅎ

제가 루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게된 것은 톨스토이가 루소 메달을 하고 다녔을 정도로 루소 빠도리(?)인 것도 그렇고, 헌법을 배우며 프랑스의 사상이 거기서 특히나 루소의 사상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배워서 도대체 루소란 인물은 어떤 인물일까? 라는 의문이 들더군요.

그래서 다른 것보다 저는 평전을 통해 루소의 사상도 같이 느끼고 싶어요 ㅎ 그래서 이렇게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루쉰 빠도리에요 ㅎ

만화애니비평 2016-06-03 17:59   좋아요 0 | URL
이 책도 사실 기본적으로 조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루소만이 아니라 마르크스나 프로이드 관련 내용이 나오죠 현대 철학사상에서 칸트 역시 루소의 초상화를 뒤에 걸고, 미국 20세기 최고의 자유주의 사상가 존 롤즈의 <만민법> 역시 사회계약론에서 많은 것을 들고 왔지요.

루소의 사상을 접하려면, 그의 도서 하나를 찾아서 하나씩 읽어보는 편이 좋습니다. 루소는 워낙 다양한 서적과 역설적인 존재이기에 추천하는 도서로는 사실 <인간불평등기원론>인데 펭귄클래식에서 나온 것이라 비싸지 않습니다.

톨스토이가 루소의 메달을 단 이유는 아마 <에밀> 때분일 겁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다른 독서감상문을 직접 옆에서 들으니 안나 카레나너에서, 톨스톨이의 추가사상은 농촌에서 부지런한 노동생활 그리고 자연적 인간인 것입니다.

루소의 <신엘로이즈>를 보면 18세기 프랑스 파리 살롱문화에 대하여 비판적인 내용이 나오는데, 그게 1세기 후의 러시아라고 보시면 됩니다. 루소의 평전으로 이 책은 좋으나 많은 텍스트를 접하야 하므로, 간단히 얇은 책이 좋습니다.

동서출판사 <사회계약론, 인간불평등기원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그것 저희 집에도 있지만, 제대로 된 책은 김중현 교수님의 번역이나 책세상의 루소전집이 좋습니다. 그러나 책세상 루소전집 양장본은 가격이 비싸므로 펭귄클래식을 추천하는 바이죠.

루쉰, 예전에 어느 여성분이 저에게 루쉰평전을 빌려주기로 했는데, 그분이 다시 상경하는 바람에 한 번도 그자에 대한 책을 읽지 못했군요..ㅎㅎㅎ


루쉰P 2016-06-03 18:08   좋아요 0 | URL
오 역시 빠도리의 역량이 느껴집니다 ㅋㅋ 지금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지만 <에밀> <인간불평등기원론> <사회계약론> 은 읽어 보았습니다. 전 루소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궁금증이 가시지를 않더군요.
도대체 어떻게 루소는 저런 생각들을 했을까? 저런 혁명적 사상을 루소는 어떻게 발견한 것일까?
마치 석존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것이 대체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었냐는 궁금증이 큰 것 같아요. ㅎ
뭐랄까? 신비한 인간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전체적인 정보가 담긴 책을 좀 읽고 싶었는데 저 평전이 눈에 걸리더군요 ㅎ

소개해 주신 역자와 책들은 너무나 감사합니다. 다시 구입을 해서 읽어 봐야 할 것 같아요 ㅎ 한 명의 인물을 자세히 안다는 것은 참 힌든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정보가 쏟아지는 속에서 말이죠 ㅋ

루쉰평전을 안 빌려준 여성분 ㅋㅋㅋ 정말 센스 꽝이세요 ㅋㅋㅋㅋ

소중한 답변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ㅎ

만화애니비평 2016-06-03 18:21   좋아요 0 | URL
루소라는 인간이 조금 궁금하면, 박아르마님이 번역한 <고백> 2권을 읽으면 압니다. 사실 루소를 알면 알수록 놀라운 것은 그가 20~30대 상당히 병약했고, 초면에 실례나, 수음(남자들의 자위)으로 너무 몸이 약해져서 유언을 쓰고, 현대판 바바리맨처럼 우물가 여자들 앞에서 과감하게 쇼를 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읽으면 당시 프랑스 파리 사람들이 가진 루소를 바라보는 시선, 인간이 가진 가증스런 요소를 잘 알 수 있죠.

시간나면 루쉰의 책을 읽어봐야겠습니다 덕질한다고(지금까지 게임하고 애니메이션 보는 충실한 오덕이라) 조매 그렇지만, 님 아이디를 보니 한 번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경한 그 여자분, 스타일적으로 센스는 넘치는데,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은 것이 넌센스였죠..ㅎㅎ

루쉰P 2016-06-03 18:35   좋아요 0 | URL
오! <고백>이라는 책 감사합니다. ㅎ 젠장 루소 ㅋㅋㅋ 우물가에서 나체쇼, 자위 매니아라니 ㅋㅋㅋ 아 정말 루소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당황스럽네요 ㅋㅋㅋ 위대한 사상가는 분명한데 뭔가 알 수가 없네요 ㅋ

루쉰 선생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차간지입니다. ㅎ 죽는 그 날까지 적들과 논쟁을 끊임없이 햇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비평가들이 그런데 힘을 쏟을 시간에 작품을 더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평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루쉰 선생 입장에서는 눈 앞의 적과 싸우지 않고서, 평생을 남는 문학을 써서 무슨 소용이냐며 권력에 아첨하는 글쟁이들이나, 민중을 우습게 여기는 권력자들에 대해 쉬지 않고 글을 썼습니다. 특히나 <무덤>의 서문 중에서 자신이 이런 쓸데없는 글을 쓰는 이유가 자기 뜻데로 세상을 살아가는 권력자들이 조금이나마 얼굴을 찡그리게 하고 싶어 쓴다는 말이 마음에 많이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루쉰 선생은 우리나라에는 <아Q정전>만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잡문이라고 불리는 날카로운 단편 글들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박홍규 교수님이 쓰신 <루쉰 문학 선집>과 <자유인 루쉰>이 참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쓴 <루쉰>도 평전으로 조금은 가치가 떨어지지만 루쉰을 통해 일본 군구주의를 뚫고 나가려고 했던 젊은 일본 중문학자의 고뇌가 느껴지는 작품이라 아름답다고 할까요? 읽는 감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애니나 만화의 덕후 정도는 아니지만 굉장히 좋아하고 즐겨 보고 있습니다. <이나중 탁구부> <크레이지 군단>를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후루야 미노루와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리어>을 최고의 만화로 삼고 있습니다. ㅎ
요즘은 <모브 사이코 100>도 보고 있습니다. ㅋ 작품이 좋더라구요. ㅋㅋㅋ 대세인 <원피스>나 <나루토>는 여태 읽어 보지 않았습니다. 전 좀 약간 소수의 만화를 좋아하는 듯 싶습니다.
애니로는 <NHK에 어서오세요>를 진짜 감명 깊게 보았고, <에덴의 동산>이라는 잉여 덕후로 혁명을 가하는 애니 역시 재미지게 봤습니다. 재미난 애니도 너무 많은데 능력이 되지 않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덴마>도 무척 좋아하는 데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도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ㅋㅋㅋ
아! 뭔가 만화애니비평님과 대화를 하니 이야기가 끊이질 않습니다. ㅋㅋ

만화애니비평 2016-06-03 18:49   좋아요 0 | URL
NHK 어서오세요. 저도 애니메이션으로 보았습니다. 동쪽의 에덴도 보고 심지어 리뷰까지!!! 했다죠. 나루토, 윈피스, 블리치 같은 전형적인 내러티브 요소를 가진 작품들은 안 좋아합니다. 너무 뻔하고, 우리는 착하고, 우리 편이 아닌 놈들은 나빠! 식만큼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없으니 말이죠.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에 매도되어 가는 것이 슬프다는 것이죠.

덕후분이 숨어 있다니. 저는 최근 애니메이션은 거의 다봅니다. 만화책은 공간이 없고, 애니메이션은 실시간으로 보고 가끔 리뷰도 적죠. 우후후훗~~

제법 만화책은 많이 아십니다. 슬램덩크 작가 이름까지 외우고 그의 작품까지 안다면 열정이 있네요. 좋은 알라딘 블로거를 알게 된 겁니다~앙..

추천도서를 지금 읽을 책들을 다 읽은 후 도서관에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지금 한명명기 교수님 책 위주로 광해군-인조 시대 때 책을 읽는 중이라 말이죠.우후후

루쉰P 2016-06-03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훗 ㅋㅋ 이거 덕후 인증 된건가요 ㅋㅋㅋㅋ 푸하하하

전 <NHk에 어서오세요>를 너무 감명 깊게 봐서, 원작 노벨 소설과 만화본까지 구해서 봣습니다. 그 작가의 세계관이 너무나 재밌어서 말이죠 ㅋ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작가는 후속작도 썼으나 그리 큰 평가를 받지 못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ㅋ

맞습니다.<동쪽의 에덴>이죠!!! 제가 잘못 썼네요. 그 작품 역시 보고서 얼마나 충격을 먹었는지 몰릅니다. 저 역시 너무 뻔한 만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후루야 미노루처럼 아예 병맛이거나 이노우에 타케히코처럼 아예 진지하게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후루야 미노루의 작품 세계를 아시다시피 작품을 감싸는 것은 병맛 키워드 이지만 <심해어>나 그 이후 지금 작품들까지 보면 인간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고뇌하며 그리고 있습니다.

전 만화 역시 하나의 어떤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을 보고 뭔가 아 정말 느낌이 오는 그 맛! 그것으로 확 감동 먹거든요.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 역시 그런 류의 작품인 것 같습니다. ㅎ

아 뭔가 덕후가 된 거 같아 뿌듯합니다. ㅋ 제 덕질이 다 의미가 있었네요 ㅋ 기회가 되시면 애니 리뷰도 손 꼽아 기다리겠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ㅎ
 
맑스 재장전 - 자본주의와 코뮤니즘에 관한 대담
제이슨 바커 엮음, 은혜.정남영 옮김 / 난장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맑스 재장전 책보단 우선 번역된 영화부터 보고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외 옮김 / 책세상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루소의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을 읽으면서 루소가 프랑스 철학, 사상, 학문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프랑스 현대철학자 중에 유명한 사람이 매우 많으나 몇몇을 가려보라고 한다면 분명 레비 스트로스와 자크 데리다 같은 철학자들이 나올 것이다. 이중에 레비 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인류학자이고, 데리다와 같은 경우 해체주의를 정립한 학자이다. 또한 자크 데리다의 경우 프랑스 구조주의 이후 후기구조주의자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고,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상가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이런 두 사람마저 영향을 루소에게서 받았다는 점이 매우 놀랐다. 개인적으로 데리아의 서적이라곤 <마르크스의 유령들> 뿐이다. 그러나 현대철학에서 데리다의 영역이 명확하기에 그의 해체주의 철학이 루소에서 나온 점에서 매우 감탄할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에 루소가 만든 서적들이 현대 철학과 사상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점에서 말이다. 당시 봉건주의 사회에서 왕족과 귀족 그리고 성직자가 절대적 권력을 지닌 시기에 지식인으로서 언어마저도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이나 감정표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방식은 지구의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이라고 말한 코페르니쿠스 전환만큼 강력하다고 볼 수 있다.

 

루소 자신도 디드로, 볼테르와 더불어 계몽주의 철학자이나, 그는 이성을 중시한 계몽주의 철학자 중에서 이성보단 자연의 본성을 중시했다는 점이 매우 특이했다. 인간에게 자연적 요소를 발견하고, 인간의 불평등은 모든 것은 소유에 대한 욕망인 점에서 이성이란 합리적인 도구가 오히려 자연 본성의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회계약론>에서 밝힌 것처럼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이나, 인간이 속해진 사회가 있기에 자유를 대신하여 억압이 존재한다. 서로 간의 영역을 위해 사회 일원이 만든 사회계약이란 일반의지는 결국 인간이란 자연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면 이성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전제가 대체된다.

 

<사회계약론>에 대해 생각해보면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이라고 거론한 것처럼 인간은 태어나면서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사회가 존재했기에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왜 루소가 갑자기 인류학의 창시자라고 레비 스트로스가 말했을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언어로 통해 문화와 억압, 착취가 생긴 것을 루소가 지적한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학문적인 요소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지질학이다. 그런데 루소의 <언어 기원의 관한 시론>은 구조주의 요소를 상당히 잘 표현했다. 언어에 대한 권력과 사회적인 요소는 미셀 푸코가 지적한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서 소쉬르의 언어학을 받아들임에서 언어학 영역에서 루소가 보여준 문명의 발달과 전개과정은 매우 흥미로웠다. 인간이 자연 상태에 그대로 있을 경우 야생이고, 조금 더 발전한 상태가 야만이고, 그 다음에 문명이라고 말한다. 문명이 생기는 점에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서 적은 것처럼 유럽이 문명이 발달한 이유는 환경적인 요건이 매우 크다. 지리학적으로 다른 나라와 가까이 붙어있는 점에서 전쟁이 늘 많았다는 점과 영토규모에 비해 주민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야생에서 거주하는 민족들은 문명국가 사람들처럼 식량에 대한 위기가 없었다. 가령 광대한 숲과 강을 가진 어느 지역에 주민 수는 겨우 밴드 하나당 30명이 넘지 않는다. 다른 밴드와 조우할 수 있는 확률은 1주일 1번 정도다. 숲 속에 언제나 나무에서 과일이 맺히고, 벌꿀이 만든 꿀통에서 달콤한 꿀을 찾을 수 있다. 삼림이 넉넉하여 동물들도 많아 사냥을 하여 언제든지 잡아먹을 수 있고, 강가에 물고기도 많아 충분히 잡아먹을 수 있다. 이들의 생활에 특별한 것들은 필요 없다. 단지 짧은 시간에 서로 채집과 사냥을 하여 같이 나누어 먹고 쉬는 것이 전부다. 인간이 수렵과 채집하던 무렵에 키가 크고 영양상태가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조건에 살아갈 수 없다. 가령 에스키모 인들과 같이 기후가 매우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적 조건이 워낙 열악하기에 사람들의 성격이 급하고 난폭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반해 열대지방에 사는 부족들은 넘쳐나는 식량으로 인해 성격을 급하게 굴 필요도 없고, 난폭하게 사람들을 대할 이유도 없다. 그들은 서로 춤을 추고 노래하고 정답게 지내는 것을 원한다. 모든 부족이 그런 것은 아니나, 가령 어느 부족이 “나를 사랑해줘요”라고 인사하면 에스키모 인들은 “나를 도와줘요”가 인사말이란 점을 생각하면 매우 인상적이다.

 

일본에서 누가 다치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다이죠브데쓰까?”라고 한다. 우리 한국말로 대체하면 “괜찮으신가요?”가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대장부입니까?” 라는 것이다. 왜 괜찮은지 괜찮지 않은가에서 대장부이냐고 묻는 표현은 조금 낯선 느낌이다. 그것은 일본의 자연조건이 열악하거나 혹은 일본의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워낙 전쟁을 많이 한 점에서 언어적인 표현방식이 다르게 될 수 있다. 인간의 생활방식이 하나의 체계화되어 언어로서 표현되는 점은 그 민족과 국가의 구조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소의 야생, 야만, 문명국가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분석은 매우 탁월했다.

 

언어가 있는 이유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선 통제와 명령이 필요하기에 언어로서 인간을 조율하는 것이다. 또한 감정이란 것도 직접적인 몸짓도 좋으나, 몸짓으로 표현하고 의사소통하기에는 그 한계범위가 있다. 말로 통해 많은 의미와 상황적 요소를 알리는 것만큼 효율적인 게 없다. 언어는 langue와 parole로 나뉜다. langue의 경우 사회적인 언어로서 언어는 사회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가 사회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요소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

 

언어야 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사실 논객들의 대화가 로고스라는 논리로서 전개해도 한편으로 파토스적인 요소가 보인다. 자신의 입장과 감정을 논리라는 이름으로 오용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루소는 또한 감정 대신 욕구로서 인간의 언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생각하면 배가 고프면 배를 가리키고, 위험하면 비명을 질러도 자신의 의사가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된다. 그러나 심적인 상황에 대해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없으면 힘들다. 상대방이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대화로 통해 우리는 상대방의 목소리의 높낮이로 통해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을 귀로서 더 자극되는 점은 영상기호학 내지 영화서사학에서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예술가 칸단스키에 의하면 인간의 감정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 대부분이 그 비율이 70% 정도라고 한다. 무성영화보다 차라리 드라마시디로 듣는 것이 더 감정적으로 자극되는 점이다. 그래서 루소는 음악에서 멜로디의 중요성을 알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라는 노래는 음율시인에 의해 전달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이야기에 음악(하프)을 넣고 이야기를 노래한다. 그때 목소리 음 높이와 박자로서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준다. 스토리텔링에서 진정한 기원은 음율시인의 노래가 아닌가 싶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론적인 예술인 정형화된 것보다 디오니소스의 형체 없이 계속 바뀌는 예술이 더 강렬함을 준다고 한다. 그림은 공간적인 요소 즉 시각이나, 시와 같은 노래는 결국 시간에 의한 소리이다. 소리는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그 강력함은 음악을 들을 때마다 느낀다. 사실 문학이란 것도 결국 신화에서 탄생하고, 신화적인 요소에서 영웅의 이야기는 시인의 입에서 전달된다. 노래가 바로 문학이란 점이고, 한국 전통문학에서도 판소리 내지 가사 등과 같은 예술이 국문학의 시작이란 점이다.

 

노래로서 진행되는 이야기, 서사의 시작은 바로 입으로 통한 상대방에 대한 정보전달 내지 감정이입으로 연결된다. 언어가 가진 놀라운 힘은 현대 영상매체시대에도 중요하다. 이미지만 나오고 소리가 동시에 나오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 정보를 이용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멀티미디어적인 영상정보매체에서 소리야말로 다시 정보를 제공하는 형태일 것이다. 예전에 대중을 위한 미학 강의에서 인간은 언어의 전달에서 처음에는 말로, 그 다음에 글로 그 다음은 영상이다. 하지만 정보의 제공에서 글이야 말로 이성판단에 도움이 되는데, 영상은 글처럼 이성적 판단이 되지 않고, 대신 영상에서 나오는 소리가 정보 전달로서 효율적이란 점이다. 인간의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결국 다시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런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기원에 대해 적는 루소의 글은 보면서 소쉬르만이 언어학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고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19세기 이후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큰 변화를 주었다고 해도 그 이전에는 루소가 있었다. 21세기 사상마저도 루소의 사상이 이어지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는 순간 경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동안 인류학 내지 사회학, 그리고 민주주의 정치제도에 대한 서적들을 읽어오면서 모든 뿌리가 루소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parole과 langue라는 언어학의 요소에서도 루소의 연구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놀라웠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언어학을 가르치고, 그의 제자들이 자신의 스승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강의내용을 모아 만든 <일반언어학> 이전에 언어학에 대한 연구부분에서 이미 루소가 상당히 연구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루소의 서적에서 <사회계약론>, <참회록>,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식물사랑>,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를 읽으면서 아직까지 읽지 못한 도서는 <인간의 언어기원론>과 <신 엘로이즈> 그리고 이번에 읽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

 

물론 국내외적으로 루소에 대한 연구서적 등은 많은 점은 알고 있다. 하지만 루소 그 자신이 저술한 도서 역시 읽어야 할 도서 목록이다. 루소의 서적을 펼치면서 지금 우리 사회가 21세기인데도 루소가 저술한 18세기에 비교하여 전혀 떨어지지 않은 내용이었다. 게다가 현대철학자의 서적 중에서도 루소의 사상이 상당히 일치하거나 유사한 내용을 가진 도서가 많았다. 가령 네오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도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 중에 하나인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의 인생이 삶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 인간 그 자신에게 잃어가는 것이 많다고 역설한다. 인간의 욕심으로 환경오염과 더불어 쾌적한 환경을 잃게 되고,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까지 탁해진다고 했다.

 

소유보다는 존재로서의 인정이 오히려 인간에게 큰 소유가 된다는 점이다. 가령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인간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의식주이다. 하지만 옷과 음식, 집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자연환경이다. 우리 인간은 대기 중의 산소가 없으면 수 분만에 질식사를 할 것이고, 물이 없다면 며칠도 못 가서 치명적인 상태가 될 것이다. 맑은 공기와 물은 인간이 지금 당장 필요한 소중한 자연자원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나친 욕심과 탐욕은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 스스로를 파괴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프랑크푸르트학파 중의 하나인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처럼 인간의 문명이 자연을 파괴하면, 결국 자연조차 파괴하지 못할 경우 인간은 인간을 파괴한다고 한다.

 

가령 우리 인간에 파괴는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성이란 고유영역이다. 인간성이란 인간의 이성과 판단도 있으나, 자연적인 부분도 있다. 인간의 자연적인 부분이 자연환경의 파괴로 인해 인간 그 고유한 자연마저 파괴당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착취가 결국 끝에 이르러 인간에 대한 착취로 이어지는 것이다. 오늘 날에도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착취로 물든 불량한 세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가? 생계를 위해 자유로운 시간과 의지도 없고, 지나친 개발로 인해 숲이 사라지고 새들을 노래하지 못한다. 인간은 감정을 가진 존재다.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인간의 감정은 점점 사막화되어 가고, 타인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 대신 오히려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 20세기와 21세기의 철학자들이 고민하고 있다면 루소는 이미 18세기에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루소는 볼테르, 디드로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라고 판단한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조차도 루소와 닮아있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을 무렵에 나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출판사 길, 강신준 교수 번역> 1권을 다시 읽고 있었다. 읽으면서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편보다 더 끔찍하고 무서운 일들이 19세기 유럽에 나온다고 마르크스가 말한다. 그것은 하루 12~18시간의 노동시간과 더불어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겨우 2시간 내지 3시간만 잠만 재우고 2일 연속으로 일을 해야 하는 가련한 어린 소녀와 소년의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이게 진짜 지옥이라 여겼다.

 

단순히 일만 한다는 것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나도 대학교 수업과목 중에서 환경위생학이나 보건위생학과 같은 것이 있었다. 환경보건위생에서 일반적으로 사람의 가정환경과 교육환경 뿐만 아니라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 문제점에서 가장 심한 것은 작업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안전문제나 위생문제다. 인간은 물과 공기의 공급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좁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더운 작업장에서 계속 장시간 노동을 하게 되면 건강상으로 매우 좋지 못하다. 공기 중의 산소가 부족하여 졸도할 수 있거나 좁은 공간에 열기로 열사병을 일으킬 수 있으며, 먼지나 유해한 가스등은 기관지, 폐, 호흡기 계통에 큰 위험을 준다.

 

심지어 굴뚝청소를 하는 아이들은 각종 염증과 암으로 시달려야 했고, 중금속을 다루는 사람들은 신경마비, 근골계 장애, 순환기 장애, 혈액질환 등과 병에 시달려야 했다. 예전에 한국에서도 14세 중학생인 문송면 군이 수은공장에서 일하다가 몇 개월 후 수은 중독으로 인해 비참하게 죽은 사건이 있었다. 인간이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노동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것은 분명 부도덕한 일이다. 그런 것은 자유주의 철학자인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다룬 것처럼 생계로 인해 일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고 했다.

 

루소는 그런 자유라는 인간이 본래 가져야 할 권리와 의무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다. 심지어 우리 헌법조차도 인용되고 있는 <사회계약론> 역시 자유를 위한 연구도서다.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이나, 태어나면서 사회가 존재하기에 억압을 받는다. 하지만 그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가지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합의가 필요하고, 그런 합의를 위해 일반의지를 수반한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있는 곳은 루소에겐 오로지 자연이었다. 자연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문명의 잔재를 깨끗하게 정화할 수 있는 장소였다. 문명과 자연, 문명은 인간에게 풍요와 부를 안겨주었다. 한편으로 그 풍요와 부는 모두가 아닌 일부에게 돌아갔다.

 

이런 문제가 착취와 궁핍을 부르고, 가난하고 힘이 약한 사람들은 평생 자손대대 그 업을 물려받아 희망조차 보이지 않게 된다. 이런 문제를 미리 지적한 사람은 루소였고, 그것은 추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로 통해 보여준다.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읽으면 마르크스는 루소에 대해 그렇게까지 평가하지 않으나 적어도 프랑스의 공화국적인 요소를 존중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나폴레옹 3세인 루이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로 부와 권력을 노리고 있을 때 프랑스 공화국의 상징인 자유, 평등, 박애는 보병, 포병, 기병으로 무참하게 밟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해도 마르크스는 분명 루소에게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본래 마르크스 헤겔 청년파이기 전에 자유주의 철학을 많이 받아들였고, 또한 칸트나 피히테 같은 철학자의 책들도 많이 읽었다. 그 중에 루소의 책이 없을 리가 없다. 그리고 프랑스대혁명이 1789년 이후 1830년과 1848년에 큰 핵심적 사상은 루소의 것이다. 1871년 프랑스 파리코뮌의 경우 마르크스, 생시몽, 푸리에, 오원 같은 다양한 사상가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프랑스에서 루소의 사상은 여전히 큰 획을 이은 것이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이런 혁명적이고, 추후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만들기 위한 초석으로 다져진 도서다. 심지어 인류학 영역도 마찬가지다.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은 2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선천적인 것으로 하나는 후천적인 것으로 말이다. 선천적인 것은 성별, 나이, 인종 등과 같이 인간 고유의 자연적인 차이라면 후천적인 것은 사회적·정치적인 요소가 들어간 것이다. 문제는 선천적인 불평등에 비해 후천적인 불평등이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다른 점을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인간의 행복은 그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것인데, 그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저마다 남을 주목하고, 자신도 남에게 주목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하나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나 재능은 물론 다르다. 그 능력과 재능이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도 있으며, 자연인은 본래 자신의 그 자체를 보여주나, 사회인은 주변 사람들이나 세견에 따라 자신을 맞추어 나간다. 그런 요소에서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된다.

 

자연주의 철학자인 루소에게 <에밀>을 보게 되면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고, 인위적으로 가르치거나 무리하게 바꿔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그런 점이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또한 지나친 교육이 인간 자체에게 불평등을 주는 것이 된다고 했다. 이미 21세기에는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왔다. 오히려 니체처럼 불평등을 불평등이라 인정하는 것이 불평등에 대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불평등 요소를 루소가 지적한데로 그것 자체가 하나의 평등한 법적인 요소라고 하는 것도 문제다.

 

인간의 빈부격차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나 그것을 하나의 제도적인 범주에서 당연성으로 가는 것이 문제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유를 늘리는 하나의 방편이다. 프랑스대혁명 시기 로베스피에르는 진정한 자유는 우리만의 자유가 아니라 타인에게 자유가 있어야 가능하고, 빵이 고루고루 들어가야 자유를 얻을 수가 있었다 한다. 그런 점에서 롤즈의 <정의론> 역시 경제적 조건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 개인에게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자유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리석게도 굶어죽을 자유 내지 비참하게 일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자유라고 하는 것은 자유를 방종한 오만인 것이다. 루소는 프랑스대혁명 이전에 죽었으나, 그의 사상은 프랑스대혁명의 상징이었다. 그의 호칭은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런 루소의 계몽주의 철학은 칸트의 관념철학에도 영향을 주고, 칸트의 철학에서도 계몽은 타인이 아닌 스스로가 일깨워야하는 것이라고 했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제네바 시민에게 보내는 글이 있다.

“지배받는데 익숙해진 국민은 이미 지배자 없이 지낼 수 없게 되지요. 만일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들은 자유에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그들은 참된 자유와 반대되는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므로, 혁명을 한다고 해도 거의 언제나 자기들의 족쇄를 더욱 무겁게 만들어버릴 뿐인 선동가들에게 스스로를 내맡기게 되지요.”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당통의 죽음과 테르미도르 반동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은 당시 프랑스국민들이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유의지가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로 가게 하였고, 결국 공화국은 군주제로 변해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점은 인간 스스로가 지배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인간은 타인을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해 타인에게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런 문구가 나오지 않은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소극으로” 말이다. 루소의 이런 선견지명은 아직도 두 번이 아니라 연속적 비극이 소극을 지나 잔학한 제노사이드로 나타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불평등에서 시작된 것이다. 인간에게 불평등은 피할 수 없는 업보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자연주의 철학자인 루소가 왜 사회계약으로 통해 인간의 정치적 사회적인 요건들을 적어나가겠는가? 그것은 인간이 불평등이 항상 존재하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인간에게 서로간의 합의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인 <학술과 예술에 대하여>에서도 나온 내용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연장선상이란 부분을 느끼게 해주는 문구가 있다. “사치는 수백 명의 도시인을 먹여 살리지만, 수천 명의 농부는 농촌에서 죽어가게 한다. 사치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주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손 사이를 오가는 돈은 농부들의 삶에 아무 쓸모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장식 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의복이 모자란다. 사람들의 양식으로 이용되는 물질을 낭비하는 일은 사치를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내 반대자들은 우리말이 어려워 그들이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내가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행복해한다. 우리의 부엌에는 주스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환자에게는 수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부들은 물만 마신다. 가발에는 밀가루가 필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한다.”

 

농사를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과 기술을 가진 사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농민들은 더 많은 노동과 착취를 당해야 했다. 그 결과 자신이 생산한 농산품을 제대로 먹지도 못해 비참한 생활에 고통 받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불평등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설파했던 루소는 본인 스스로도 가난과 불평등 그리고 국가권력(루이 16세 왕정과 정치관료)에 의해 평생 도망쳐야 했다. 그런 세월에 루소는 누군가 자신을 헤치는 것에서 두려움을 받기보단 자신을 헤칠 것이란 망상에서 괴로워하며 노년을 마감한다.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계몽주의 사상가 덕분에 우리는 조금 더 낳은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에게 여전히 유효하며,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현재도 미래에도 살아가는 우리에게 꾸준히 노크를 두드릴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