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김영명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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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정말 무엇을 하자는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다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자는 것도 아니다. 완전히 아는 것도 아니요 그런다고 모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종교적인 부분에서 어디가 가장 강한 종교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불교라고 대답할 것이다. 불교라는 것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유입되어 지금까지 계속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향유되던 종교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한국인과 같이해온 종교로서 분명히 한국사회와 많은 친숙함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계속 깊이 들어가면 이해하기란 어렵다. 지금 글을 적는 본인도 사실 가정 내에서 어머니는 절에 다니시고, 이글을 적는 석가탄신일 당일 역시 절에 가셨다. 또한 평소에 좋은 명산에 있는 사찰에 친구 되시는 분들과 같이 다니시니 우리 집안 역시 불교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다. 게다가 나는 중학교 시절 불교재단의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다고 하여 나는 절실한 불교신자도 아니고, 그런다고 다른 종교를 믿는 것도 아니다.

 

 

나에겐 종교라는 것은 신앙심과 이념을 강조하는 부분만 보이는 것만 같아 종교라는 것 자체에 흥미가 없다. 그래도 나는 부처님과 예수님은 좋아한다. 단지 부처님과 예수님 옆에 두고 근본이 아닌 교조적인 이념으로 몰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멀리 하는 것이다. 종교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인간은 이성을 가지면서 동물과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동물은 지금의 현재시점에 본능적으로 살아가므로 죽음이란 단어를 심각히 고민하지 않는다.

 

 

아니 죽는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슬픈 이야기나 가시고기 부모들은 알을 놓을 때 어미는 배란 후에 어디 멀리 가서 죽고, 아비는 새끼들이 부화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주다가 알에서 부화한 새끼들의 밥이 되어준다고 한다. 그들에게 죽음은 무엇일까? 그 죽음이란 것 역시 본능에 의한 하나의 삶의 과정이 아니런가? 그래도 그런 본능을 보자니 인간보다 동물이 더 위대해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희생으로 후예를 이끌어가는 그 생존본능에서 말이다.

 

 

그래서 죽음을 알 수 있는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언제나 다른 것이기도 하나같은 것이기도 하다. 철학을 하는 이유에서도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기에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점과 그 죽음이란 무의 경지조차도 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런다고 현실적 존재가 아니기에 무라고 할 수 있는 오묘한 이야기가 들린다. 인간에게 죽음은 정말 두렵고 무섭고도 상상 이상의 억눌림이다. 과거 프랑스혁명에서 루이16세의 목이 단두대 아래 잘려나간 후에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도 죽게 되었는데, 그녀는 죽기 전날에 죽음에 대한 공포감으로 인해 머리색이 하얗게 되었다고 한다.

 

 

죽음의 공포란 그 누구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인과인 것이다. 불교에서 부처님으로 모셔지는 석가모니와 경우 그런 인간의 고통을 일찍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점과 그런 고통이 생로병사라는 길에서 헤매는 것을 알고선 출가를 했다. 당시 왕의 아들이요, 앞으로 왕이 될 권력자가 그 모든 것을 접고 출가를 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대부분 불교설화집에서 많이 나오는 부분이다. 그런다고 하여 우리 일반적인 인간들이 부처님의 깊고 오묘한 진리를 같이 찾는 것은 어렵다. 그 분은 오랜 수행과 깊은 마음 그리고 넓고 아름다운 자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렇게 되지 못할망정 그런 분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좋아한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반드시 생각해 볼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알고 보면 매우 간단하면서도 복잡하고 또한 실행하기가 쉬우면서도 어렵다는 점이다. 인간의 생활에서 보자면 그런 일들은 매우 많다. 설령 행동을 하려고 하는 점에서 그것을 위한 하나의 가치관 정립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을 저술한 김영명 교수는 분명 정치학을 전공한 인물이다. 그는 본래 불교에 깊은 뜻을 두던 사람도 아니고, 우연히 불교강좌를 듣고 나서 불교에 흥미를 가졌다.

 

 

불교에 깊게 관여하지 않은 사람이 불교에 대해 적는다. 어떻게 보면 논리적이지 못하면서 어울리지 않을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히려 그런 부분이 있기에 볼 내용이 있다는 점이다. 솔직히 불교의 경전을 생각하면 대부분 한자어로 되어 있고, 한자어라고 하여도 말을 상당히 어렵게 만들어져 있다. 불교라는 것이 부처님이 많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가르침을 내세우지만 그것이 도로 아미타불이라면 부처님의 말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래서 불교에 흥미를 가지고 불교에 조금 다가가려는 사람에게 불교라는 것이 친숙해야할 존재이어야 하는데, 도리어 권위와 낯설음의 존재라면 그것은 종교적인 종교가 아니라 권위로서의 종교로 자리 잡음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 하여 색이 있는 것이 색이 없고, 색이 없는 것이 비어있다는 말처럼 뜻을 생각하기 어렵고 난해하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쉽게 가느냐 말이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쉬운 말일 것이다. 단순히 불교를 종교적 영역이 아닌 철학적 영역으로 본다면 말이다.

 

 

불교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실존주의적인 영역이다. 부처님도 자신의 가르침을 받는 것도 좋으나 그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자신의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스스로를 발견하라는 점이다. 자기의 말이란 그것을 위한 도움이란 점이다. 또한 비어있는 것과 채워진 것에서 불교에서 있음과 없음이 동시에 내세우는 것을 중시한다. 인간에게 언제나 가지지 못하는 것이 마음의 평온이고, 또한 존재적인 현상이다.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없다. 하지만 인간에게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진리가 가장 진리적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유동적으로 대처하고,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일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 살아가면서 행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른다고 하여 지나칠 수는 뭔가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으나, 시중에 나온 불교도서들이 너무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 역시 문제 중에 하나이다. 따라서 이제 접하는데, 이게 뭔지 몰라서 조금이라도 알고 싶은 사람이 만든 책이니 불교에 이미 오래 머문 분이나 혹은 이제 접근한 분이 이 책을 본다면 조금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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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법
존 롤스 지음, 장동진 외 옮김 / 아카넷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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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영향을 준 사상가 및 철학자라면 선택하라면 나는 2사람을 선택할 것이다. 1사람은 카를 마르크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존 롤즈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의 경우는 내가 <자본>, <공산당 선언>, <경제학철학초고>를 읽어보면서 마르크스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노력했는지, 그런 사회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동시에 구조적인 설명을 통해 사회과학적인 체계를 확립하였다.

 

그 덕분에 나의 사고는 단순히 나의 독단적인 판단구조에서 다소 사회구조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덕분으로 프랑스 구조주의학자들의 서적들을 조금씩 이해하면서 보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두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보편적이란 사실에서 구조적인 사고로 통해 전반적으로 사회를 과학적으로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도서를 읽어보면 현실에서는 유토피아가 없는 것 같았다. 유토피아란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추구한다고 해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없다. “어떠한 높으신 양반, 고귀한 이념도, 허공에 매인 십자가도 우릴 구원 못하네” 라는 노래가사 있듯이 그 어떤 사고관념이란 것은 허물에 매이는 족쇄이지 그 어떤 대안이 되지 못한 점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의 서적을 보면 그들은 철학이란 관념을 생산하여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유물론적인 관점을 끊임없이 관념론과 대립하여 비판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자면 철학에서 지금의 자기를 만족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사유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철학자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유토피아가 없기 때문에 오직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비판으로 통한 일상생활의 혁명으로 통해 계속 이어나가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유토피아란 것은 괜한 말로만 보여줄 존재라는 것인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존재이나, 이미 인간의 관념이란 공간에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생겼고, 현실에서 형이하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어도 인간의 사고라는 인식에서 충분히 가능하다.

 

형이상학이라고 하여도 결국 보이던 것조차도 왜 존재하고 그것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연구하지 않은가? 유토피아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와 달리 분명하게 현실에서도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 현실적 유토피아에 대해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위대한 철학자가 있으니 그는 존 롤즈이고, 이번에 읽은 도서가 바로 존 롤즈의 만민법(The Law Of Peoples)이다.

 

만민법에서 만민이 결국 Peoples인데, 이 단어를 다르게 생각한다면 가령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mass(대중), mobs(선동가), 그리고 people(인민)이다. 시민이라는 이 단어 속에서 과연 어떻게 우리가 대중에서 시민으로 가야할지 혹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솔직하게 내 의견으로서는 시민들의 의해 정치적 입장이 분명하고, 자신의 이익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까지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민주적 자유주의의 업적을 올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보는 그런 시민사회를 일구어 갈 수 있는 만민들은 흔하지 않다는 점이다. 만민법에서 만민은 합리적이기보다는 합당한 것이 옳기 때문에 자신의 이성적인 자유의지로 통해 타인과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롤즈는 기본적으로 임마누엘 칸트, 게오르크 헤겔,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이성적인 인간을 추구하는 철학자에 동의했으며, 그 중에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처럼 시민사회인 세상을 원했다.

 

단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는 남녀평등과 노예제도 폐지를 인정했으나, 각 개인에 대해 1인 1표에 대한 정치권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정치적 역량과 도덕적 기준에 따라 정치적 표력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어떻게 본다면 시민이란 존재는 대중들과 차이가 나는 존재라는 점이 분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민법에서는 비이성적인 사회의 국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했으며, 정치적인 결정에서 종교적인 개입을 반대했다.

 

그러나 종교적 관념은 이성적인 영역보다는 이성적이지 못한 영역에 더욱 가깝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종교적인 존재는 현실적인 존재라기보다는 관념적인 존재에 가까우며, 또한 인간의 믿음이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심리적인 요인이 크기 때문에 종교단체가 정치적으로 개입할 경우 이성적인 정치를 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가령 1600년대부터 독일을 비롯한 유럽사회에서 발생한 마녀사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시 국가와 종교가 서로 정치적 연합으로 통해 많은 국민들을 탄압하지 않았는가? 만민법에서는 종교가 정치적으로 분리되어야 하며, 또한 한국처럼 종교단체가 지나친 자선단체의 개입은 종교의 영향이 정치적으로 여전히 주고 있어서 그것이 종교적 조직으로 통해 이성적인 정치제가 어렵지 않은가 생각했다. 그런 롤즈가 이성을 중시하고 이성을 위해서는 철학적인 자세를 만민이 가지는 것을 권장했다.

 

게다가 종교적 교리가 자유를 위하 하나의 사상이 아닌 포괄적인 자유로 보며, 종교가 절실하게 자신의 도덕적 교리를 따르면 그것이 제1의 철학과 동격으로 된다고 한다. 참고로 철학 중에서 제일 첫 번째가 되는 것은 에토스가 중시되는 윤리학이란 점이다. 윤리학은 결국 인간을 위해 자신보다는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주는 것이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신의 선(goods)보다는 타인의 선을 수동적인 입장이 아닌 능동적인 자세에서 실시하는 것이 진정한 도덕적 법칙으로 생각한다.

 

문제는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인간들은 그런 윤리적 가치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의해 즉 합리적인 사고에 의해 살아간다. 그 합리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자신에게 얼마나 유리한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의 논리라는 것은 윤리가 선행되지 않으면 논리적 가치가 없다고 한다. 만약 카를 마르크스가 당시 많은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일하였으나, 이와 반대되던 세력은 카를 마르크스가 선동자로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 위대한 선동자를 만들어낸 원인제공자란 누구란 말인가? 만민법에서는 분명히 재산의 분배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의 재산이 일정한 기준에 도달하게 하는 것은 반대한다. 롤즈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경제적인 부분 역시 인정하는 점이다. 하지만 그가 더욱 더 중요하는 자유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민주적으로 공적으로서 정의가 존재하는 조건에서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른바 자유를 위한 자유주의인 것이다. 또는 한나 아렌트처럼 권리를 위한 권리처럼 말이다.

 

만약 롤즈가 제시한 것처럼 만민들이 세계적으로 포진하여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거나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최악의 상황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1871년 파리코뭔들이 독일군과 프랑스 독재정치에 항거할 때 어느 소녀가 은방울꽃을 들은 채로 죽었다고 한다. 왜 그 소녀가 죽어야 했을까? 만민법적인 입장에서 보면 만민이란 부당한 외압에 의해 자신들의 인권에 위협당하지 않은 권리가 있다. 그들이 전쟁에 참가하는 이유는 오직 부당한 외침에 의해서다. 전쟁을 하더라도 전쟁을 기획하는 정치인과 군인들에 대해 군사적인 영역에서 처리하여야지 죄가 없는 민간인들에 대해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고 했다.

 

아마 그것은 롤즈가 2차 세계대전에 미육군으로 입대하면서 일본이 항복하고 난 뒤에 1946년까지 일본에 잠시 머문 점일 것이다. 일본에 머무른 롤즈에게 당시 일본의 민생이 전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의 전범후손들이 계속 정권과 대기업의 사업가로 권세를 누린다. 그에 반해 일본 국민들은 비참한 삶을 영위했을 것이다. 롤즈는 일본이 6월경에 항복에 대한 부분을 천황이 각료에게 지시한 것을 언급한 것에서 1945년 8월 핵폭탄 투하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 덕분에 일본은 핵폭탄 피해자란 생각에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반성하기보다는 오히려 피해자라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특히 더 중요한 사실은 핵폭탄의 위력은 군인보다는 아무 방비도 없는 민간인에게 심각한 타격을 준 것이다. 진실로 만민이라면 이런 야만적인 전쟁을 일으키면 안되는 것이고, 일으킨다고 하여 죄 없는 국민들을 피해주면 안되는 것이다. 전에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라는 도서에서 전쟁에서 책임을 지는 존재는 장교라고 하는데, 병사들은 그들에게 군정에 대한 권한도 없이 강제로 징용된 점과 그 군인들은 모두 평범한 국민이란 점이다.

 

그래서인지 만민법은 분명히 유토피아를 추구하고 있으나, 롤즈의 사상을 보면 현실적인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롤즈의 사상은 철저하게 현실의 비극에서 시작된 씨앗이란 점이고, 그 비극을 줄이기 위해 만민이란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만민법에서 만민에 대한 법이라고 하여 그 법이 어느 국가가 지닌 각각의 법과 제도가 아니라 만민법은 그 자체만으로 범세계적인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만민법이란 강제적인 조항과 의무사항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면 그것은 진정한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정치적 자유주의를 위한 거대한 의지인 것이다. 자기 가족과 국가를 사랑하되 그것에 해당하는 만큼 다른 국가와 민족을 존중하고, 자신의 의견을 중시한 만큼 타인의 의견을 같이 조정해야하며, 부당하게 피해를 입거나 어려운 사람들이 계속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같이 하나의 인간체로 보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롤즈가 제시한 만민법처럼 세상에는 분쟁이 줄어들고 전쟁이 사라지는 현실적인 유토피아가 올 수 있을까라는 점에서 오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롤즈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얼마나 어떻게 준비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인간의 이성에 대해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의심하지 않으려고 한다. 인간은 자신의 비이성적인 관념조차도 이성이다! 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상에 떠도는 많은 전쟁과 분쟁, 인종차별, 남녀차별, 신분차별 등이 생기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그래도 롤즈는 그런 세상을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심장병으로 쓰러져서 강의하지 못하게 되어도 그는 병상에서 계속 집필했다.

 

그래도 성과가 있었는지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힐러리 여사는 그들이 대학교에 다닐 적에 존 롤즈의 철학은 상당한 공부가 되었다고 한다. 롤즈의 서적은 다른 철학자와 달리 책이 많지 않다. 서적 1권 적는데 걸린 시간을 보니 거의 경이롭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불세출의 명저인 <정의론> 1권 적는데 20년이, <정치적 자유주의>는 23년이 걸렸다고 한다. 2002년 자택에서 서거할 때까지 그는 세상을 좀 더 좋게 현실적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마르크스처럼 연속적인 투쟁을 살아온 마르크스와 다른 노선을 걷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본다면 마르크스와 롤즈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적 마인드는 크게 다른 점은 없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에 치중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자기 스스로 운명 개척을 주장했지만, 롤즈는 이와 반대로 인간 스스로 시민, 즉 만민이 되어 분쟁과 줄이고, 다 같이 잘 살 것을 추구했다. 뭔가 다른 방향이나 기본적으로 인간에 가져야 할 권리와 자유를 모두 인정한 것이다.

 

재산적인 부분에서 열심히 일한만큼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나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은 그렇지 못했다. 하루 12시간 격렬한 노동을 해도 1가족의 생계는 막막했다. 적어도 마르크스는 독일인에게 맥주를 프랑스인에게 포도주란 말처럼 최소한 생계를 넘어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추구했다. 단지 추구하지 못하기에 그런 격동의 시간을 보낸 것이고, 롤즈는 그런 극단적 상황이 오지 않기 위해 현실적 유토피아라는 대안을 내놓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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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산에 대하여 - 자크 비데 서문 동문선 문예신서 346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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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존 유럽 철학에서 근대철학자로 데카르트, 루소, 볼테르, 몽테키스외 같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18세기 유명세를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철학자들의 공통된 특성이 있다. 그들은 프랑스 철학자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한 계몽주의 철학과 사상을 남긴 이들의 업적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프랑스의 숙적 독일에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칸트, 칸트의 등장은 철학의 기조가 프랑스에서 독일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그 후로 칸트를 비롯하여 헤겔, 마르크스, 엥겔스, 니체, 프로이트와 같은 철학자, 사상가, 사회학자 들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 미칠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런 독일 철학자들의 위대한 업적이 계속 지속되리라고 생각했으나, 독일에 히틀러의 등장과 더불어 나치가 유럽을 망가뜨리고 있을 때, 다시 철학의 거대한 틀은 프랑스로 가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철학과 사상계열이 구조주의이다. 구조주의의 영향은 철학과 사회학을 지나 정신분석학, 계보학, 문학, 인류학 등 다양한 인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구조주의의 등장은 곧 세계 사상계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구조주의학자 중에서 유명한 4인방이 있다. 인류학자이면서 콜라쥬 드 프랑스라는 프랑스 최고의 학술기관에서 강의하게 된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 니체를 이어 진정한 자유와 인간이 믿고 있는 인식 그 자체가 억압이란 것을 폭로한 미셀 푸코, 프로이트를 이어 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한층 더 성숙시킨 자크 라캉, 그리고 문학과 더불어 기호학에 큰 업적을 남긴 롤랑 바르트, 이렇게 4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소개하려는 이 책에서는 전혀 다른 인물 1명이 들어가고 롤랑 바르트는 빠지게 된다. 그 1명이 바로 루이 알튀세르이다. 루이 알튀세르의 서적 중에 다른 한권을 전에 읽어보았는데, 그는 진실로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한편으로 유물론과 관념론을 끊임없이 대립하여 꾸준히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철학자였다. 철학은 자신이 믿고 있는 관념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관념을 넘어 새로운 가치관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고, 그 새로운 가치관을 세상에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실천이 필요하다.

 

어떻게 본다면 언행일치로서 선을 추구하는 고대 그리스철학과 비슷한 점이 없지 않다. 단지 그리스철학은 당시 그리스에서 통용되고 사고되는 것이지 세상이 바뀌고, 조건이 달라지면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 그래서 루이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에서 철학은 있어도 그 철학은 단지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하나의 조건이지, 그것이 그 자체가 아닐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을 생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루이 알튀세르의 판단이게도 이번에 읽은 <재생산에 대하여>는 철학적인 도서보다는 차라리 사회과학적인 도서에 가깝다. 철학을 전공한 마르크스가 왜 철학적인 도서가 아닌 <자본>과 <공산당선언>을 저술했는지 생각하면 루이 알튀세르 역시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그는 분명히 철학자이지만, 내가 읽은 도서는 철학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관념보다는 현실 속에 보이는 인간의 과학적인 고찰이 주요 관건이었다. 그러나 그런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고와 거기에 대한 성찰이 오히려 더 철학적이었다. 왜냐하면 진정한 철학은 세상을 바르게 만들어가야 하는 하나의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책임에 대해 이 책을 한번 읽으면서 내가 생각나는 점은 예전에 마르크스의 자본(도서출판 길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강신준 교수 번역)을 다시 보는 느낌이었다. 물론 자본 3편에 대한 국내번역본 5권에 비하면 이 책은 상당히 적은 분량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다시 마르크스 자본을 보고 지금 루이 알튀세르가 보고 있는 프랑스와 그 동안 프랑스가 살아온 현실을 적용한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투쟁과 갈등, 그리고 희생과 도전이라는 변증법적인 관계로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도서 1권이 생각났다. 구조주의자 1명인 미셀 푸코이다. 예전에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도서를 읽은 적이 있다. 루이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는 마치 마르크스의 자본과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믹스하여 그 중간마다 프랑스 역사를 집어넣은 것처럼 보였다. 제일 기억나는 점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을 구속하는 방법은 어느 조직의 하나의 존재로 만드는 법이다.

 

인간을 하나의 조직체가 되고, 그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감시하도록 하고, 그 인간이 말을 잘 듣는 수동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고, 또 한편으로 수동적인 인간들에 대해 능동적으로 지휘해야 하는 인간이 필요했다. 그 지휘하는 인간은 수동적인 인간들을 다룬다고 하여 그 자체가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단지 그 수동적인 인간에 대해서만 능동이지, 그 능동 자체도 하나의 수동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누군가 단체생활을 한다면 그 단체에 대한 장이 필요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리더는 과연 능동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인간은 단순히 매뉴얼에 움직이는 머리라고 한다면 말이다. 현대사회에 오면서 엘리트라는 존재는 분명히 엘리트적이지 못한 인간들에 비해 머리 위에 군림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그 엘리트가 군림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나 혹은 조직들이 그 엘리트 머리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점이다. 엘리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직적인 사회가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을 더욱 더 하나의 부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다.

 

인간들은 그런 관계 속에서 계속 지배당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게 될지 모른다. 가령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국가에서는 주권은 국민과 시민들에게 있다고 하나, 불과 한국은 을사늑약과 합일강제병합이 체결되기 전에는 조선이란 국가는 영원한 군주를 위한 국가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군주국을 정립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모두 정신병자로 취급할 것이다. 또 다시 넘어가 루이16세가 단두대 아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18세기 프랑스에서 봉건적인 국가가 영원하리라 믿었을 것이다.

 

나라가 멸망하거나 혁명이 일어날 시기만 국민과 시민이 국가체계 전복을 꿈을 꿀 뿐이지, 그 이전에는 꿈도 꿀 수 없다. 만약 그 꿈을 누군가 옆보고 있다면 그는 당장 다음날 목이 잘려나간 채로 광장에서 가장 높은 꼭대기나 혹은 성문 앞에 걸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게다가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자신의 존재에 어울린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길들여져 갔다. 그것은 국가로 하여금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감시와 처벌에 보면 임금을 살해하려한 남자가 미수에 끝난 채 간단히 죽이지 않고, 왕과 대등한 수준의 고통을 받아야 했을까? 앙상 레짐(구체제)에서 왕에게 신체적 존재와 더불어 권력적 존재가 함께 했다.

 

그렇게 존재하는 왕권신수설 내지 절대왕권의 힘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 결국 그렇게 만들도록 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있지 않은가 이다.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국가적 권력을 위한 도구이며 장치인 듯하다. 가령 유럽에서는 모든 국가에서 가톨릭을 신봉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한국의 가톨릭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의 가톨릭이 존재했다. 물론 다른 가톨릭이라도 가톨릭 중에 하나임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 가톨릭의 최정상의 권좌에 앉은 자가 문제였다. 그의 존재는 교황이다.

 

가톨릭의 종교적인 권위는 이미 유럽의 모든 왕권에 외교정치적인 압박을 전달할 정도로 막강했다. 문제는 이 종교가 하나의 권력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감시와 처벌을 보면 인간을 감시하기 제일 좋은 방법과 그 감시 속에서 길들이기 좋은 방법은 하나의 숭배의식이다. 신의 숭배로 통해 전 국민들이 종교를 강요하고, 그 종교의 신앙심이 하나의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서 교황의 성스러움 안위를 전도 받은 왕에게 축복한다. 결국 신의 대리인 중에서 최고의 권위자인 교황이 모든 유럽의 관념을 지배할 때 왕에게 축복을 내렸다는 사실과 거기에 따른 국민의 신앙심에서 국민의 신앙심은 국가체계에 대한 복종에 이어진다는 점이다.

 

재생산에 대하여서는 교회가 개인이란 존재를 가족들로 하여금 복종시키는 수단이었다. 교회에 가서 종교제의와 더불어 도덕적 가치관을 강요당한다. 그 가치관은 왕권이 또는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는 도구로 쓸 수 있다. 생각해본다면 상당히 정치를 못하고, 능력도 없는 무능한 권력자가 있다. 그런데 그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그 군대 대부분 신분들은 귀족출신 장교보다는 마을의 가난한 주민들로 이루어져있다. 군대 안의 병사들은 막대한 화기를 지녔고, 인원도 많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대적하지 못한다. 장교가 붙어 있기도 하나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누군가 발설하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말이다. 이런 두려움의 의심은 더욱 더 지배계급에게 영원한 권력의 확신을 준다. 인간의 두려움은 본능이다. 하지만 그 본능을 이용하고 더욱 더 체계화하는 것은 조직적인 교육이다. 그런 교육이 처음에는 교회인 것이다. 그리고 봉건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와도 그 기관은 존재했다. 교회가 인간을 교육을 맡았다고 하나, 근대사회에서 진정한 교육은 교육기관인 학교에서 실시된다.

 

교육기관이 학교는 교회와 달리 더욱 더 철저하게 인간들을 감시하고 원하는 것을 교육시킬 수 있다. 물론 학교가 있음으로 인간의 문명사회는 유지되고 있으나, 그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한편으로 생각하면 모순 역시 유지되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사회의 톱니바퀴를 돌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새로운 부품이 교체되어야 한다. 학교라는 장소는 그런 곳이다. 감시의 효율과 감시의 처벌에서 우등과 열등의 상하를 나누고, 거기에 따라 충실한 노동자와 농민도 생가고, 정부기관의 요원도 생긴다.

 

어차피 국가가 돌아가기 위해서 국가권력이 하나의 장치로서 움직이려면 누군가는 계속 있어야 하는 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돌아가는 과정에서 하부계층에 있는 존재가 계속 하부로서 머물고 있다는 점과 그 하부계층이 어떤 노력을 해도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권력이 작동하는 것으로 보면 교육은 하나의 문학적인 장치다. 교육과 훈육은 국가사회에 대한 이데올로기에 복종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만약 복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가 또 하나의 문제다.

 

그것은 아주 냉혹하고 처절한 엄벌이다. 국가는 자신들의 국가권력을 위해 공권력과 경찰력, 법적인 강제집행, 무력으로서 응징하는 군사력도 가지고 있다.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있다. 가령 우리나라에서 동학운동을 했는데, 원인은 부정부패한 관리와 정치인들의 무능함에서 비롯했다. 그들이 강요한 성리학이 더 이상 하층계급에 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관군에게 밀리게 되자 일본군으로 토벌하게 된다. 1905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상트페테르부르크 피의 일요일을 보자. 공장운영자들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자 노동자들은 시내에 나와 평화시위를 했으나, 그들에게 온 것은 차가운 총알이었다.

 

차르 왕권이 보호해주지 못할망정 그들을 외면했다. 국가적 폭력은 문화적으로 폭력적으로 대중들을 억압하고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계속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특권을 누리기 위해 계속 이어가기 위해 재생산이 필요했다. 누군가 재화를 생산하여야 할 이 사회의 톱니바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톱니바퀴는 어쩔 수 없이 톱니바퀴로 이어진다. 부모님이 계속 대를 이어 자손을 남겨두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에겐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오로지 자신의 몸만 있었으며, 이 몸으로 육체적, 정신적 노동만 수행하는 것이 가능했다. 고용주에게 고용되는 것은 고용주와의 계약이라고 하나, 그 계약이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망정 평등하지 못하다. 그 자유는 노동자가 자신이 일할 공장이나 직장의 선택이지, 자신이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채 끊임없이 노동해야 하는 점은 변함없는 점이다. 사실 이런 말이 기억난다. 고용주의 이익이 노동자의 이익일까? 노동자의 이익이 고용주의 이익일까?

 

그러나 기본적으로 후자보다는 전자편이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다고 해서 고용주들이 고용인들에게 제때 급료를 지불하고, 노동기준과 시간, 작업환경과 위생, 각종 지켜야할 의무를 지킨다면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등장하는 점이다.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작업공간에서 쉬는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과도한 노동에 급료도 밀리고, 임금도 오르지 않는다. 착취에 대한 분노에서 노동자들은 파업 내지 사보타지를 일으킬 것이다.

 

이 일이 발생할 때 윤리적 가치에서는 분명하게 원인제공자들에게 책임이 전가되어야 하나, 막상 현실을 보면 파업노동자들이 구속되거나 파업한 만큼 월급삭감 및 손해보상을 하게 만든다. 게다가 파업의 강도가 심해지면 공권력이 투입되어 그들을 폭력으로서 막는다. 물론 자기가 태어난 가정이 먹고살아가는 것에 대해 특별나게 고민이 없다면 전혀 이해가지 않은 현상이나, 당장 내일 생존이 걸린 인간이라면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노동자들에게 생산수단이 없고, 오로지 노동할 육체와 정신만 존재할 뿐이다.

 

내가 가장 심각하다고 여기는 문제 중에 국가가 이런 사항(파업과 사보타지)에 대해 원인규명과 적절한 제도개선이 가능하면 모르나, 지금 법의 진행이 인권중심보다는 개인에 대한 권리라는 점이다. 인권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막론하고 그 인간 자체에 대한 하나의 권리, 즉 권리를 위한 권리라고 칭한다면, 개인에 대한 권리는 어느 개인이 가진 권리를 위한 것이다. 개인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위는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고, 게다가 그 기회를 줄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인 교육까지도 차별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과연 이것이 제대로 되었다고 생각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부분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요소에서 도출되고 있으나,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도 도출되고 있다. 정치적 자유주의 내지 민주적 자유주의를 선호하는 미국 철학자 존 롤즈의 사상에도 이런 부분은 확실하게 언급하고 넘어간 것이다. 최소수혜자에 대한 최소의 기회가 있어야 공정으로서 정의로운 사회라고 한다면 이런 문제만이 마르크스주의만의 고민이라는 것도 조금 웃기는 사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그런 고민들은 계속 진행 중이다. 아니 더 더욱 심각해진다. 부익부 빈익빈의 가속화는 심각해진다.

 

재생산에서 인간의 재생산이 가족단위로 이루어져도 사회의 재생산에서 희망 없이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은 매우 유감이다. 예전에 가라타니 고진의 책에서 이런 내용이 기억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분명히 나누어져 있으나, 노동자는 생산품만 생산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생산된 상품에 대하여 서로 다른 프롤레타리아가 소비하고 있다. 즉 대중들의 대부분인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들은 서로가 소비자라는 점이다. 소비의 사회에서 소비자의 권리가 어떻게 보면 일반 국민과 시민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부의 균형에서 고용주가 성공해야 고용인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인들이 성공해야 고용주가 성공한다고 말이다. 결국 재생산되는 것에 대한 소비는 부르주아 계급보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더욱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재생산을 착취의 도구로 전이하고, 그 과정을 합리화하는 도구와 장치가 있음은 단순히 계급의 차이만이 아니라 국가에 의한 전폭적인 압력이 뒤에 숨어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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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에세이
김만권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정치는 무엇이고? 사회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사회라는 구조 안에서 평생을 머물게 된다. 먼저 가족이라는 작은 혈연지간의 사회, 다음에 학교와 지역사회, 그 다음으로 넘어가면 군대와 직장, 국가까지 연계된다. 사회라는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은 자신만의 의견과 생각으로만 살 수 없다.

 

인간과 인간이란 사이를 이어주는 사회구조 속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있을 만큼의 여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무엇이 필요 한가 라고 상기시켜보면 정치라는 큰 조율적인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많은 문제가 있다. 인간은 언제나 사회라는 틀에 머물기 때문에 인간 본인이 사회적 존재가 아닌 동물적 내지 무의식 또는 식욕, 수면욕, 성욕까지도 사회적 영역에 벗어날 수 없다.

 

밥을 먹는 시간과 공간마저도 사회 안에서 이루어질 문제고, 잠을 자는 공간 역시 자기의 집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집인지 또는 집단 무리인지, 성욕도 부부의 합법적인 행위로 이어지는지 혹은 불법적으로 이루어지는지 미성년자들끼리의 동의로서 오묘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난감한 상황이 계속 벌어진다. 인간이 가진 기본 무의식 욕구마저도 사회적 조건과 정치적 상황에 계속 변화가 온다.

 

인간이 동물적인 요소로 살아가는 것마저도 사회와 밀접한 관계에 있고, 정치적인 영역 아래 영향을 받는다. 실제 저런 기본 욕구마저도 인간이 만든 이성과 그 이성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법과 제도로서 통제를 받는다. 지나친 무의식의 표출은 사회에 큰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하여 인간은 자기의 무의식적 세계의 표출과 또는 욕망, 이성적으로 추구하는 이익을 포기할 수 없는 존재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좋은 것을 찾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행동하기에 정치적인 중재나 판단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많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대부분 인간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과 그리고 자신 주변 또는 그 너머에 있는 세상에 대해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즉 사회현상에 대해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 누구라도 쉽게 이야기하고 옳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다른 누군가가 부정하게 될 경우 상당히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한다. 타인의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가치가 월등하게 높은 것이 인간 본인들의 운명이다. 물론 그런 것들에 대해 나 역시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점들로 얼룩진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로지 이익에 대한 인간의 집착과 그 집착을 받쳐주는 권력이나 힘의 대결로 이어질 것이다.

 

실제 많은 역사적 기록이나 사건을 참고하더라도 인간의 역사란 결코 아름다운 문화 창조만이 아니라 투쟁과 전쟁, 갈등과 고뇌의 연속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많은 문제들이 문화 창조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다. 즉 파괴를 위해 창조가 일어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위한 기술 중에서 대중교통과 의료기술이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빠른 병력이동과 빠른 적군의 타격은 자동차, 선박, 항공기로 이어지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화학전, 생물학전, 방사능전의 공격이 약학과 의학, 그리고 엑스레이 등과 같은 영상진단장치 기술을 발달시켰다.

 

인간의 갈등이 인간을 파괴하면서 이룩해온 인류의 문명과 역사 속에서 정치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그 현재의 순간만으로 판단해야할 것인가? 아니면 그 이전과 저기 너머, 앞으로 다가올 미래 그리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들, 정치라는 것은 언제나 이런 문제에 난봉을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치와 사회에 대해 쉽게 말할지언정 그 정치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원인과 문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방법이나 가치들은 정말 찾아가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치와 사회를 일상 속에서 말하고 살지만, 정치학과 사회학에 대하여 대부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며, 정치학과 사회학의 원류가 될 수 있는 철학을 더더욱 멀리한다.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마키아 밸리의 군주론으로 통해 철학이 정치에서 분리된 최초라고 하여도 정치에 철학이 따라붙지 않을 수가 없다. 정치는 인간을 상대로 목적의식을 가져야 하는 윤리적인 영역이지 결코 공학적으로 보는 수단적인 영역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많은 인간들이 희생되고 고통 받고 억울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지 않은가? 이번에 읽은 김만권 박사의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들”이란 도서는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에세이로서 현실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해 담론하는 도서다. 이미 김만권 박사의 서적은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으로 통해 미리 접촉한 바가 있다.

 

앞에도 읽어본 이 책 역시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맞으나 그 이야기 뒤에는 사상과 사상가가 있었다. 사상가는 결국 사회학과 철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2가지 책에서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을 쉽게 개념을 설명하는 책이라면,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은 좀 더 내용이 깊이를 추가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기본적으로 두 책에서 마키아 밸리의 등장과 더불어 기본적으로 다루어야할 근대 내지 현대철학자들이 속속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에서 철학적인 영역에서 가장 중요시 다루는 사건은 세계 제1차 내지 2차 대전이다. 20세기에 들어온 인간들이 합리적인 사고를 가졌는지 아니면 광기에 빠졌는지 당시 구분하지 못할 병폐가 세계 도처에 만연했다. 히틀러라는 독재자와 히틀러만큼의 난폭한 스탈린의 등장은 전체주의적인 사회와 국가의 권력이 민주주의사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감시와 통제로 이어지는 여파로 이어졌다.

 

인간이란 자기의 주관과 가치를 명확히 이해하고 살아가기 보다는 그저 파블로프의 개처럼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개인이 자각과 판단 의지를 모두 살해당한 채 말이다. 인간의 광기가 폭발하던 시기에 인권이 무엇인지? 또 그런 인간들이 무참히 살아가야했던 지난 세월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생각하는지 이 책에서 하나의 의문을 던지고, 그 의문에 대해 많은 철학자들의 논리와 주장으로 풀어나간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많은 공감과 이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란 단순히 한 가지로 잴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그런다고 하여 인간 모두에게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인정하고 살아가야할 권리도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그 가치적인 영역에서 많은 고민이 든다. 루소가 인간은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고 하고, 니체는 인간을 평등하다는 것이 오히려 불평등하다는 점, 인간의 자유적인 가치가 평등한 인권이 아니라 개인적인 재산권에 따라 달라지는 사회 등등에서 어떻게 우리는 제대로 판단하고 살아야할지 또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어야 말로 한나 아렌트가 말한 대중(mass), 선동가(mobs), 시민(people, 책에서는 인민)에서 진정한 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결국 대중들이 선동가들에게 휘말리지 않고 시민으로서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그런 구도를 지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듯 하다. 인간이 합리주의 사상이 나오기 전에 신을 믿는 신화적 세계에서 그것을 제거하는 계몽 자체가 다시 억압이라는 신화로 탄생했다. 오히려 더 합리적인 가치라고 하여 하나의 헤게모니로서 억압과 비이성이란 형태로 나오지 않았던가?

 

아니면 인간은 너무 이성적인가? 혹은 아직 이성이 결여되어서 그런가? 내가 볼 때는 인간은 분명 이성이 결여되어 있지만, 자기 자신은 너무 이성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란 모든 경험적인 조건을 배제하여 순수하게 형이상학적 관념으로서 판단하려고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처럼 이성의 영역은 모든 인간에게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성 자체에 대한 의심과 비판 없이는 나갈 수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나는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이기에 어느 큰 비이성적인 대규모가 하나의 합리적 이성으로 변모하여 마녀재판을 열어 인간을 사냥하듯이 말이다.

 

그런다고 하여 인간의 이성으로만 바라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인간에게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만 남겨 놓는다면 그것은 육체라는 껍질만 지닌 인공지능 로봇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런 존재가 바로 전체주의적인 국가이며, 그곳에는 오로지 국가권력 합리화를 위해 약자를 계속 희생시켜야만 한다. 누군가 정의롭게 보이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정의롭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그 사회의 정치적 도덕이라고 한다면 정말 정치적이라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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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하여 동문선 현대신서 119
루이 알튀세르 지음, 서관모, 백승욱 옮김 / 동문선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루이 알튀세르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2011년 3월이었다. 당시 나는 프랑스 사회학자 겸 철학자인 삐에르 부르디외라는 교수의 “구별짓기” 상권을 읽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구분짓기라는 도서는 결국 사회학과 문화학에 대한 담론인 도서로 상당히 구체적이면서도 통계적인 자료도 많았으나, 한편으로 기본적인 철학과 사회학 등 다양한 인문학적 내용을 알지 못하면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도서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책 겉표지에 적힌 <왜 노동계급은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에 몰두하는 반면 ‘사회지도층’은 가리고, 삼기고, 절제하는가? 경제자본, 학력자본(학벌), 문화자본, 사회관계자본(인줄) 상징자본의 계급별 구성과 사회적 궤적을 추적하면서 상징이 지배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해부해낸 문화연구 분야의 ‘자본론’>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아직 뚜껑도 열어보지 못한 채 나는 1년이나 이 책을 집에 사두고 방치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선행적으로 읽어야 할 도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당시 우연히 발견한 도서 경희대학교 영미문학전공의 이택광 교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보면서 단순히 좌파와 우파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넘어 <인문좌파 즉 지금 뭐가 잘못된 현상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이것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논하는 것이 인문좌파이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 우리가 생각해야할 철학과 사회학에 대한 부분이 아닐까? 철학이란 학문은 항상 보면 지금이야 우리가 일반적으로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나오는 당시만 해도 이것은 전혀 반갑지 않은 존재이며, 기존 인식에는 상당히 위험한 사고이다. 가령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당시 신을 믿지 않고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이유로 그리스 아테네 폴리스의 가치를 따라 독배를 들어 그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플라톤과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자신의 신변이 그렇게 좋은 입장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로 그들의 존재는 기존 지배계층이나 권력가들인 소피스트에게 매우 도전적인 인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혹자라면 프랑스 봉건세력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하고,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단두대 아래 이슬로 만든 프랑스혁명의 원죄자를 찾으라면 장 자크 루소가 나온다.

 

당시 루소의 철학적 견해는 봉건사회에서는 위험하고 배척해야할 가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루소의 서적은 철학이나 사회학, 역사학에서 다루어야 하나의 학문으로 변했다. 당시에는 학문적인 가치영역이 아니라 실제로 정치적 여파가 큰 존재다. 그래서 루소의 철학을 민주주의사회의 기원에 설명할 수 있는 지금이나, 당시로서 루소는 혁명적이고 극좌파적인 존재다. 그러면 루소는 좌파인가? 우파인가?

 

그런 이유로 인문좌파라는 것은 이런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인 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또한 지금과 미래를 어떻게 보고 듣고 판단해야하는지 사고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이론가이드 도서이다. 말 그대로 인문좌파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좌파의 기원은 어디인가? 흔히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로 보통 보겠으나, 좌파의 근원은 프랑스혁명 후 루이의 목을 베고 난 후에 생긴 자코뱅당이다.

 

봉건적인 권익을 추구하는 우파에 반대하여 좌측에 있어서 좌파로 통한 것이다. 아마 지금 좌파하면 무조건 매도하는 사람으로서 프랑스역사와 철학사 따위는 머릿속에 제대로 인지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진짜 좌파의 기본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실이다. 그런 마르크스주의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9세기에 눈을 감고 후발주자로서 나타난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을 다룬 도서가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이고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그람시, 발터 벤야민, 장 폴 사르트르, 게오르크 루카치, 루이 알튀세르, 자크 데리다, 자크 라캉, 슬라보예 지젝 등이다. 이중에는 슬라보예 지젝, 자크 랑시에르, 조르조 아감벤은 현재 실존하는 철학자 및 사상가로 21세기를 대표하는 대석학적인 지식인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나는 현대철학과 철학자, 그리고 그들까지 이어져 있던 사람들을 하나 둘씩 알아갔다. 물론 모든 것의 시작은 마르크스의 <자본>과 <공산당선언>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자본은 계속 새롭게 적어지고 교정되어 가야할 도서지만, 공산당선언은 약간 금이 새어가고 있다. 그 도서의 취지와 달리 현실 속에 보이는 현상들은 어긋나 있었다.

 

이런 문제를 초기에 인식한 사람은 시각의 현상학을 저술한 모리스 메를로 퐁티였다. 최근에 읽은 <휴머니즘과 폭력>에서 메를로 퐁티는 마르크스주의가 반드시 공산주의가 아니라 반공좌파라는 것을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런 스탈린주의로 변질된 공산주의에 대해 1976년 프랑스 공산당에서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공산주의를 자신들이 추구하던 마르크스주의에서 결별을 선언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생각과 의견을 틀렸는가? 아니면 무엇부터 문제인가? 그런 고민은 남을 수밖에 없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지금 내가 적으려고 하는 루이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하여”는 그런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서 어떻게 루이 알튀세르가 이끌어 가려고 하는지 잘 나와 있다. 이 책은 1부에서 페르난다 나바로라는 멕시코 산 니콜라스 데 이딜고의 미초아키나의 대학의 철학교수와 루이 알튀세르의 대화를 나눈 것이고, 2부는 루이 알튀세르가 편지를 받은 다음 나바로에게 답장을 하는 내용이다.

 

내용을 보면서 생각하는 점은 루이 알튀세르가 기존에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메를로 퐁티가 한국전쟁을 보고 비판한 것처럼 그 후에 다가올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미래와 그리고 진정으로 마르크스로 돌아가려 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재미난 사실은 마르크스의 자본은 사실 철학도서가 아니고 사회과학이라는 점이다. 그의 도서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과학적인 시점으로 통해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분석과 비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혁명 성공이후 대부분의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들은 그것을 망각했다. 아니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적인 영역에서 다루고 있으면서도 결코 철학으로 생산하지 않았다. 또한 분명히 마르크스는 철학과를 전공했고, 당시 헤겔청년파에서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헤겔의 변증법을 연구하여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철학적 사명을 수행하였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예전에 내가 알던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대학교 강의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과목은 개설되어 있고, 마르크스주의는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학문과 그에 대한 사상을 소개하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나에게 강의를 하던 교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교수는 마르크스의 이론만 내놓지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적인 면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실천이 아닌 단순히 관념적인 영역에 속한 부류라는 점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 그것은 인간이 가진 모든 관념과 행동 그리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심지어 보일수도 없는 저 너머까지 연구한다. 그런 철학에서 오히려 철학을 말한다는 것이 철학적인가? 아니면 덜 철학적인가? 상당히 난해하다. 왜냐하면 철학은 인간의 이성으로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수철학인 형이상학에서 칸트는 이성으로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순수이성을 논함으로 철학이란 관념적인 부분에 상당히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순수이성비판에서 논리는 윤리가 선행되어야 논리적이라는 점과 후에 실천이성비판에서 다루듯이 이성이 실천적으로 행함으로서 타인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은 윤리적인 가치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철학은 관념적으로 봐야할 것인가? 아니면 행동적으로 보는 것인가? 참 난해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을 본다면 루이 알튀세르는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인 견해는 관념적일 수고 없고, 유물론적일수도 없다고 했다. 아니라면 두 가지를 동시에 대립하면 꾸준히 발전해 나가야할 가치라고 했다.

 

그런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존재하는데, 그 철학이 철학으로서 생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철학이 그 자체로 움직이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철학에서 철학적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철학만 논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생애에서는 그는 분명 철학을 많이 알고 있었으나 그는 비판적인 경제학과 사회과학으로서 행동했다. 그런다고 해서 그가 철학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인생 자체는 철학을 논한 것은 거의 없었으나 그의 인생 자체가 철학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순된 사회구조와 더불어 그 사회에서 고통 받는 많은 대다수의 약자인 노동자와 농민을 생각했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 행동했다. 마르크스의 행동 자체 하나마다 철학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만 자본을 집필하면서 그는 철학적인 부분 관념적인 부분보단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부분으로 저술했다.

 

또 다르게 생각하면 그렇게 적는 것 자체도 관념적인 부분이 아닌가 싶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처럼 마르크스가 언제나 약자인 노동자와 농민을 생각하며 저술한 것 자체가 하나의 관념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도 싶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관념적으로 철학적으로 저술한 게 아니라 현실을 보고 적은 것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관념적이거나 합리주의적인 면에 대항하는 하나의 안티테제 역시 관념적인 영역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하나는 분명히 관념적인 부분에서만 나온 것이고, 하나는 유물론적인 부분을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나 정치적 문제를 Yes or No로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원인과 구조를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관념론적 영역과 유물론적 영역을 한쪽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중요하다.

 

왜 스탈린이 정권은 잡은 소비에트가 마르크스주의에게 독이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들에겐 하나의 관념만 사로잡고 있었다는 뜻이다. 자신들이 거기에 얽매여 착취적 자본주의에 대항하고, 게다가 파시스트에게 대항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문제는 자신들이 거기에 대항하였으며, 자신 역시 그러지 않았을까 이다. 분명 그들은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해 대항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렇게 되어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관념이 결국 공포정치로 변화하고, 현실 속의 대중들은 착취에 벗어나지 못했다.

 

스탈린이 레닌에게 선택받은 후계자 6인 중의 한명이라고 하여 그 자체가 하나의 관념적인 영역으로 끝나 버리고,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외쳐도 그는 그 관념 안에서 머물고 있었지 그 후에는 없었다. 바로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에 분명히 철학이 있어도 그것인 철학으로 생산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실천으로 철학이 완성되는 것을 망각한 점이다. 노동자와 농민을 억압하는 것에 반대하여 발생한 1917년 2월 볼셰비키혁명이 철학을 내세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철학적으로 되었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끊임없이 현실을 바라보고 비판하고 나가야 할 마르크스주의가 러시아혁명에 묶여 결국 자신들에게 위기를 안겨준 셈이다.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바라보면서 반면교사하여 새롭게 나갈 것을 권장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치적 헤게모니에 대해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헤게모니로 인해 고통 받는 노동자와 농민을 인간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레비나스가 말했듯이 제1의 철학은 윤리학이다. 마르크스가 윤리학을 위한 도서를 만든 적은 없으나, 그가 살아온 행동은 상당히 윤리적인 입장이다.

 

하루 12시간 넘게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여성, 하루 12시간 넘게 탄광 속에서 안전 보호 장구도 없이 일하다가 탄광이 무너져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어린아이, 철로를 놓다가 공장에서 일하다 깔려죽거나 폭발하여 죽는 노동자들, 이런 행동들이 지금 도덕적인 가치관에 아니라면 윤리적인 가치관에 옳다고 여기는가? 당시 19세기 유럽의 문제는 단순히 마르크스주의를 넘어 민주자유주의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가치는 그 개인의 존엄성이어야 하며, 그 개인에겐 최소한의 삶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후자는 존 스튜어트 밀과 존 롤즈의 사상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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