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게리온: 파(破) 2.22
안노 히데아키 외 감독, 사카모토 마야 (Maaya Sakamoto 외 목소리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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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가 발매 이후 드디어 신세기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파가 발매되었다. 기존의 TVA에 방영되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극장판에서 보이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차이는 긍정적이기도 하나 다시 생각해보면 긍정적이지만은 아닌듯 싶다.

신지는 서에서 보여주는 에바 초호기 조종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심리적 요소보다는 자신의 의지로 조종하는듯 하나 사실 그 초호기 자체가 이카리 유이의 영혼이라면 신지의 영혼이 초호기 안의 유이의 공감대가 깊은 관계성을 나타내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신극장판은 이런 특성에 걸맞게 에바라는 인조인간에 대한 내용은 상당히 생략되고 대신 조종사들의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 변화에 알맞는듯 TVA에서 에바 파일럿이 신지, 레이, 아스카에서 머무던 것이 이번 신극장판에서는 마리라는 새로운 여성 파일럿이 등장한다.

마리는 그런 신극장판 작품의 성향만큼 상당히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다. 게다가 현실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스릴로서 대한다. 예전에 TVA에서 보인 신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존재다. 그런 마리의 등장은 아마도 이 작품의 총감독인 안노 히데아키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도 싶다.

안노 히데아키는 만화가 모요코와 결혼하여 샤로운 생명의 탄생까지 경험했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한 신세기 이전의 에반게리온과 신세기 이후의 에반게리온은 반드시 차이가 날 것이라는 점이다. 마리의 등장과 더불어 이런 긍정적인 마인드는 다른 파일럿에게도 일어난다.

아스카,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과거에 얽매이고 자신이 인형처럼 대하는 것을 거부하며 또한 어머니의 애증관계로 자기학대적인 나르시즘을 앓고 있다. 특히 TVA에서 그녀의 NERV 직속 상관 미사토에 대한 질투심은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존재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극장판에서의 아스카는 미사토와 관계가 날카롭지 못하다. 미사토의 연인이었던 카지가 더 이상 아스카에겐 중요한 인물이지 않게 되버린 것이다. 원래 TVA에서 아스카는 카지를 향해 사랑을 느끼고 있었으나 자신의 보호자인 미사토가 카지와 계속 사랑하는 것을 알자 자기 자신에 대해 책망한다.

게다가 자신보다 못나 보이고 한심해 보인 이카리 신지가 자신보다 더 우월한 파일럿이란 것이 뚜렷해지고, 자신이 인형임을 부정하던 아스카에게 인형처럼 보이는 레이가 오히려 인형이 아닌 인간이라고 하자 그녀에겐 모든 것이 짜증나고 귀찮아 보인다.

TVA에서 아스카는 그런 정신적인 압박과 삶에 대한 의지 상실로 욕조에서 자살기도를 한다. 그런데 신극장판에서는 카지에게 관심없다는 점과 미사토와 좋은 관계를 가지는 점은 무척이나 신기해 보인다. 아마 TVA에서 가장 발전한 인물은 바로 아스카가 아닐까 싶다.

이에 반해 신지는 어떠할까? 나는 신지가 예전에 비해 분명 마음을 열고 새롭게 자신을 개척하려는 것은 맞다. 하지만 나는 신지가 사회적인 관계유지가 좋아진들 그 자신은 발전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사도를 처리하고 써드 임펙트가 일어날 쯤에 신지가 구출한 레이의 모습에서 그는 아버지를 부정했으나 막상 보니 그는 아버지 이카리 겐도와 전혀 다를바가 없었다.

오히려 이카리 겐도처럼 자신의 욕심속에 모든 걸 져버리는 행동까지 보여준다. 그래서 신지는 외적으로 성숙했으나 내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 사도 안에 갇히 레이를 구출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던지는 것은 좋으나 아직까지 신지는 아야나미 레이가 어머니 유이의 클론임을 자각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레이를 구출했으나 그것은 레이에 대한 마음의 형태가 자각하지 못한 상태로 변형되어 세상 모두가 어찌되건 나만 좋으면 되지 아니한가라는 태도로 보인다.

이게 조금 의문스러운 부분이다. 안노 히데아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통해 자신의 틀에 갇혀 모든 대화를 거부하는 오타쿠들에 대해 경고하는 의미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만들었다. 그러나 신지가 대표하는 그런 인물이라도 막상 신극장판에서는 자신의 세계만을 구축하여 모든 것이 뒷전으로 미룬 점에서 약간 아이러니하다.

아직 3기인 급(Q)이 나오지 않은 이상 결론짓을 수는 없다. 단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신지는 외적인 영역에서 정말 강해졌다. 그러나 자기 내부 깊숙한 심리적인 곳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심은 성장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레이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을 때 들리던 "날개를 주세요"는 TVA처럼 레이에게 구원받는 신지가 아닌 레이를 구원하는 신지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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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스
오시이 마모루 감독 / 대원DVD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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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 1기와 2기는 큰 차이는 없다. 왜냐하면 쿠사나기 모토코로 통해 모든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1기의 경우 쿠사니기 모토코가 주를 이루어 행동한다면 2기에서는 쿠사나기 모토코가 숨어서 그저 지켜 볼 뿐이라는 것이다.

2501 이 숫자는 공각기동대 1기에서 쿠사나기 모토코가 인형사와 정보교류로 통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면서 네트로 떠나가기 전 바트에게 준 암호다. 그녀는 언제나 2501라는 숫자로 통해 바트와 공안9과 동료를을 바라보고 있다.

우선 이 작품의 스토리는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어느 여자아이 신체를 가진 사이보그가 작동오류로 사이보그 옆에 있던 인간을 살해하면서부터다. 그리고 그 살해사건과 여자아이 유괴사건이 동시에 나오면서 유괴사건을 맡은 검사가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이 여자아이 사이보그와 연계가 있음을 알고 첨단정보도시에 바트와 토그사가 가서 킴을 찾고 킴을 이용하여 그 원래 사이보그 제작사인 중국기업 선박에 침투하여 사건을 해결한다.

단지 바트가 선박에 뛰어들 때 쿠사나기가 여자아이 사이보그에 해킹하여 바트를 도와주고 있다는 점이다. 어째든 공각기동대 2기는 미래의 사회가 첨단정보로 인해 해킹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정보조작으로 통해 범죄를 숨기며, 그 범죄자들이 거대한 기업으로 되어 국가 및 어느 특정기관과 결탁한다는 점이다.

미래의 사회는 그런 정보조작으로 통해 얼마든지 공작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런 면은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에서 인형사로 통해 충분히 우리는 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1기에서는 그런 인형사라면 2기에서는 주요관점은 무엇인가란 것이다.

2기의 제일 중요한 관점은 수동의 존재가 수동으로 남기는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에 의해서인가? 바로 여자아이 사이보그의 정체를 알기 위해 바트와 토그사가 어느 여자박사의 연구실에 가면서 그것이 조금씩 밝혀진다. 아마 이 부분은 공각기동대 1기에서 쿠사나기 토모코가 왜 바트를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선택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유명한 극단적인 페미니스트 학자인 다나 해러웨이 덕분일 것이다. 아직 이 다나 해러웨이라는 사람의 책이나 논문을 읽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각기동대 이노센스에 등장하는 이 여자박사는 분명히 "미쓰도 미스즈도 아니오. 그저 해러웨이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사이보그라는 존재가 수동이 아닌 능동적인 존재로 보고 있고, 그 사상은 오이디푸스 가부장제도에서 벗어나려는 다나 해러웨이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상 불가능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우리가 가진 사이보그 제작기술이 인간을 닮은 것도 아니고 인간처럼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는 존재가 아닌 말 그래도 프로그래밍이 된 존재다. 하지만 이노센스의 세계라는 공상과학 및 사이버펑크세계에서는 그런 꿈의 세계를 현실의 이미지로 재현가능하다.

단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공각기동대 원작가가 시로 마시무네가 남자라는 사실과 이 작품을 만든 감독인 오시이 마모루 역시 남자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럴까 사실 2기에는 공각기동대 주인공인 쿠사나기 모토코는 나오지 않으나 적어도 1기에서의 쿠사나기 모토코는 상당히 아름답고 강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나온다. 

단지 아쉬운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진 의식이 바로 전뇌라는 것이다. 전뇌에 기록된 이때까지 자신의 모습은 자기가 공안9과를 그만 둔 이상 그 전뇌가 아닌 다른 전뇌로서 살아간다. 그럼 자신이란 존재가 이때까지 자신이 아니게 되어버리고, 그녀는 자신이 아닌 기억으로 자신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존재가 자아의 정체성이 아닌 일련의 타자들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다. 

그런 조작되고 조종되고 속박되는 것은 거부한 것이 쿠사나기 모토코이고, 그런 쿠사나기 모토코가 공각기동대 이노센스에서는 자신의 자유로운 네트세계에서 떠돌고 있다. 마치 계속 진화하여 자신이 생명이 있는 프로그램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곧 죽음이 있어서이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건 자신에게 고통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것이 모두 즐겁고 좋은 것만이 아니지만, 사실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서 살아가지 전기적인 신호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본다. 옛날 명언에 이런 말이 있지 아니한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말이다. 분명 기계의 반란처럼 수동적인 존재로 여긴 여성에 대한 억압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세상은 서로를 의지하고 존중하고 살아야 한다.

독립된 개체로 살아가기 보다는 독립된 존재로서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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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토토로
미야자키 하야오 (Hayao Miyazaki) 감독 / 대원DVD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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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작품 세계에는 3가지가 떠오른다. 1가지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 1가지는 하늘과 비행기, 하나는 자연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는 이런 3가지가 여실하게 잘 보이고 이 3가지로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가이다.

그런 점에서 이웃집 토토로는 시골에 다시 귀향한 어느 한 가족들로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았던 신과 정령들의 이야기를 다시금 우리 귀가에 속삭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사츠키와 메이는 아직 도시에서 살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소녀들이다.

그러나 이 두 소녀들은 자신들의 어머니가 건강이 좋지 않아 아버지가 살던 고향으로 다시 이사왔다. 아버지는 고고학 관련 업무를 하고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니 사츠키와 메이는 낯선 곳에서 항상 외로워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사츠키와 메이는 우연히 숲의 기적을 만난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를 자매가 만난 것이다. 원래 이 마을에는 토토로라는 숲의 정령이 있었다고 한다. 자매의 아버지도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신은 있다고 말한다.

토토로는 마을 숲속에 사는 정령신으로 보통 인간은 볼 수 없지만 아직 마음이 순수하고 어린 사츠키와 메이에게 보이기 시작한다. 메이와 사츠키는 토토로를 만나 같이 놀고 고양이버스를 타고 어머니가 계신 병원에 찾아간다. 

스토리는 이러하다. 그러나 그 스토리 이면에 감추어진 작품의 의미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느끼는 자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토토로는 거대한 몸을 가지고 있으나 매우 친절하고 온순한 정령신이다. 숲속에 사는 만큼 나무를 키우는 것도 좋아하고 나무에서 나오는 나뭇잎과 도토리를 매우 좋아한다. 

단순히 숲속에 사는 정령신이라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으로서는 토토로는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자연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작품으로 통해 그가 무형의 존재에 생명이 있는 일본전통 종교사상인 애니미즘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정령신이란 우리에게 먼 발자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옆에 항상 붙어 있다고, 그리고 그 아름답고 정이 가는 신은 아름다운 자연과 그리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인간에게 있다고, 그런 점에서 이웃집 토토로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 자연이 곧 신의 세계라는 원시적인 인간 자연관도 보여준다.

조금 안타까운 것은 현대사회의 우리인간은 도시화로 인해 희고흰 콘크리트 숲속에서 매연과 소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자연과 같이 동화되어 아름다운 자연을 느낄 수가 없다. 마음은 메말라 그저 딱딱한 인간성으로 변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이웃에 저런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살 수 있는 토토로가 찾아올까?

토토로는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 한번 생각해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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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 - 한정판 (2disc) - 서플 DVD 포함 2 디스크 디지팩 한정판
이시하라 타츠야 외 감독, 스기타 토모카즈 외 목소리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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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을 보았는데, 이번에 보면서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우선 스즈미야 하루히의 시리즈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먼저 제가 말하고 싶다면 결코 평범한 사고로 감상하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람들은 사고하는 방식이 일종의 상식이란 것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 상식은 때에 따라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무언의 약속으로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 스즈미야 하루히의 시리즈는 결코 우리가 일반적인 관념에서 보는 것을 절대적으로 거부하게 만드는 애니메이션입니다.

 

우선 애니메이션이 기존 영상서사물인 영화와 비교하여 무엇인 같은가와 다른가에서 사람들은 많은 혼돈을 빚습니다. 애니메이션은 현실적이 아니야. 애니메이션은 애들이나 보는 것이야 라고 하지만, 사실 영화관에서 보이는 실사영상도 허구의 세계이니 오히려 그 허구의 세계를 보는 게 정상이라면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비현실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극현실로 달리는 겁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란 고정관념 아래 관습이라는 것이 근원이란 것을 앞서게 되는 것이 현대사회의 인간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즈미야 하루히의 시리즈와와 같은 경우는 라이트노벨로 시작하여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제작되어 기존의 문자서사가 만화서사와 애니메이션서사로 변경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상서사와 문자서사는 기본적인 이야기흐름이나 인물, 배경들과 같은 요소는 같으나 거기서 보여지는 방법과 나타내는 방법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문자로 보기보단 영상인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것이 이해도 빠르겠지만, 한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에게 새로운 재미를 줄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에 대한 리뷰는 기존 사람들이 적은 방법과 다른 관점에서 관찰하려고 합니다. 일단 숙지해야 할 사항은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이 그냥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저는 영화라는 생각으로 적을 생각입니다. 물론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영화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이것을 웃고 즐기는 애니메이션이란 영상콘텐츠가 아닌 한편의 비평적인 부분으로 이끌어 내고자 하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영화를 보시면 우리가 처음 보는 영화이지만 내용자체는 그렇게 낯설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본래 이야기의 시작은 신화와 전설, 민담으로 시작하고 이것이 다시 고전과 문학형태로 발전하여 최근 영상시대로 발돋으면서 한편의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되었습니다. 그런 이야기의 흐름을 갖는 서사에서 우리가 왜 이렇게 스즈미야 하루히의 시리즈가 독특한 것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영화의 시작은 프랑스부터 시작하였습니다. 1895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카메라에 필름을 장착하여 연속촬영으로서 하나의 영화서사가 탄생했습니다. 그 이후 영화는 종주국인 프랑스보다는 미국 할리우드 시장에서 많이 성공했습니다. 프랑스와 같은 경우 전위예술이나 기존관념 해체라는 새로운 사상과 이상을 도입하여 예술을 중시하는 영화를 만들었고, 그 덕분에 프랑스에서 애니메이션이 상업애니메이션보다는 추상애니메이션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상업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미국 할리우드 시장에서 형성되어 이른바 할리우드영화라는 영상코드를 만들어 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의 특성은 기존 상식과 흐름을 이어가는 고전을 중시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영웅이나 소영웅 혹은 반영웅이 등장하여 자신이 아닌 상대 세력과 이원화적인 다툼으로 통해 자신들의 이념을 확고하게 보임으로써 상대방을 굴복 내지 숙청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른바 기승전결 구조라는 내러티브 요소가 탄생한 겁니다. 내러티브 요소가 강한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카메라의 시점이 주인공으로 통해 이어지기 때문에 주인공의 관점에서 모든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주인공은 언제나 영웅적인 존재이며 그 세계에서는 정당하고 합리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살아가는 세계는 비합리적에다가 그 비합리적인 세계는 주인공의 이념과 반대되는 악적인 부분이 강합니다. 그래서 가끔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보면 주인공의 반대편이 정말 극단적이고 더 이상 살려둘 가치가 없을 정도로 극악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상대방을 처치하는 것은 정당하고 당연한 일이며, 이것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겁니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서사구조에서 이런 선악의 이원화적인 구도는 대중들로 하여금 거기에 빠지게 합니다. 문제는 이런 내러티브 요소로 인해 그 상대되는 존재를 현재 자신의 국가나 세력과 반대되는 존재로 대치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반공 애니메이션으로 똘이장군, 디즈니메이션에서는 라이온킹이나 알라딘이 있고, 일본 애니메이션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미국을 악당을 만들고 동아시아전쟁을 정당화하는). 그런 점에서 기존 자신들이 가진 공통된 의식 및 무의식이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녹아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즈미야 하루히의 시리즈를 보면 전형적인 서사구조 틀을 깨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영화 애니메이션은 영화서사학적(서정남 교수의 영화서사학 참조)으로 다음과 같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첫째, 모든 종류의 이야기 안에는 일련의 사건과 행위들이 있으며, 둘째, 그 사건(행위)을 일으키고 이끌어 가는 인물(들)이 존재합니다. 셋째, 그리고 이들은 시간과 공간, 지리적, 역사적 배경 위에 존재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전통적으로 이야기 구성의 3요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넷째, 여기에 덧붙여 모든 이야기는 화자(서술자)라는 일종의 프리즘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이런 요소를 비추어 볼때 어느 특정 인물들이 어떤 특정 공간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은 어느 영화와 애니메이션에도 다 나옵니다. 하지만 문제는 셋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지리적 역사적인 관점입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어느 인물이 어떤 특정한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러나 스즈미야 하루히의 시리즈는 그런 시간과 공간의 비가역성을 거부합니다. 기본적으로 영상서사물에서 네러티브 구조에서 개연성 즉 필연성이란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이야기는 개연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런 개연적 혹은 필연적인 부분을 해체시킵니다. 그런데 그런 개연적이면서 필연적인 요소를 해체시켜도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에서는 오히려 그렇게 개연적인 부분을 해체함으로써 현재라는 필연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말했듯이 시간과 공간은 비가역성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현재가 자꾸 과거로 가게 되고, 이 현재를 맞이하는 그 앞이 미래가 되어 다시 현재가 되고 과거가 됩니다. 이게 바로 시간과 공간의 비가역성으로 생각하자면 시간을 뒤를 돌려 다시 현실을 맞추어 본다는 것은 불가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을 보고 비가역성인 부분에 대해서는 일종의 가역성으로 만들어버립니다. kyon이 우선 7월 7일 칠석날에 미쿠루선배에 의해 3년전으로 시간점프를 할때 분명 공간적으로 일치하였으나 시간적으로 3년전있고, 거기서 하루히가 운동장에 그림을 그릴때 kyon이 도와줍니다. 그런데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1화를 보면 하루히가 kyon에게 언제 우리 본적 없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1기 1화의 kyon은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2기에서는 kyon이 과거로 가서 하루히를 만나고 존 스미스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1번 존 스미스를 이야기하여 하루히가 키타고등학교 아닌 코오엔 학교로 진학합니다. 이때 성인 버전 미쿠루가 kyon에게 중학교 시절의 하루히가 kyon을 2번 만나지만, 아직 1번만 만났다고 합니다. 1번 만남으로 코오엔학교로 간 하루히고 다시 1번 말함으로써 하루히는 키타고등학교로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kyon의 기억속에는 그런 일을 몰랐으나 하루히는 기억하고 있음으로서 이야기의 실마리가 현재에서 과거로 이동하여 거기서 다시 사건과 행위들이 일어나서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시리즈가 이렇게 오래전부터 이어온 고전을 탈피한 작품은 분명한 사실이며, 또한 이 현상들을 관찰하는 kyon과 나가토의 관점도 흥미롭습니다. 우선 스즈미야하루히의 시리즈에서 단연 주인공은 하루히이겠지만, 작품 상의 관점구도는 kyon입니다. 그렇다면 스즈미야하루히의 우울에서 주인공이 1인칭이고, 그 옆에 있는 kyon이 2인칭이 되는 것이고, 전체적으로 하루히와 kyon이 나온다면 3인칭 구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히가 1인칭이 되듯이 관찰자인 kyon도 1인칭적인 관찰자가 되는 겁니다.

 

 

스즈미야 하루히를 관찰하면서 자신의 사고와 판단, 그리고 이야기의 진행을 맡는 것이 kyon이기 때문입니다. 제일 중요한 사실은 kyon이 대화할 때 앞에 있는 등장인물을 보고 하는지 혹은 자기가 혼자 대화하고 있는지가 가끔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kyon은 이 작품 세계에서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나레이터 즉 서술자가 되는 겁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객관적인 관점을 가진 작가라는 제3자가 보이는 구조보다는 그 객관적인 관점을 가진 서술자가 kyon으로 통해 모든 이야기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품 감상함에 있어서 카메라 화면 구도가 흐리거나 초점이 멀거나 좁아지거나 돌아가거나 편중되는 것은 모두 kyon이 보고 있거나 kyon이 느끼고 있는 감정입니다. 만약 우리가 실사영상으로 이루어진 드라마를 볼때 카메라는 3인칭적인 구도에서 등장인물을 바라보기 때문이죠.

 

그리고 영상과 관련하여 극장판은 TV애니메이션과 달리 작화와 음향에 상당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필름수가 24프레임인 풀 애니메이션이고, TV는 24프레임 미만인 리미티트 애니메이션입니다. 그런 점에서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화질이 우수함과 동작이 부드럽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음향도 극장에서는 앰프가 다중적으로 관객에게 들리도록 만들어서 멀리서 들리는 소리와 가까이에서 들리는 소리가 확연하게 차이납니다. 그래서 영화의 5가지 요소가 음향효과, 대사, OST, 영상, 그리고 이야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 5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 극장용 애니메이션에서 조금 관심가는 부분이 위에 언급한 작화입니다. 그 이유는 기존 TV물에서는 배경을 자세히 보면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마을이나 주변 광경이 그렇게 묘사를 자세히 하지 않았지만 극장용에서는 그런 배경적인 요소에 세심한 노력을 기울인 겁니다. kyon이 학교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마을, 그리고 병원에 입원하여 옥상에 있을때 나가토가 올라오는 장면에서 도시의 전경이 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도시배경이 정말 애니메이션인지 아닌지는 알수 없으나, 제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실사영상인듯 싶었습니다. 애니메이션에서 실사영상과 애니메이션영상을 조합하여 동시에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기법을 병치기법이라 하고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나 신보 아키유키 감독 작품을 보면 가끔 이런 장면이 보입니다.

 

 

 

이번 작품의 초점은 하루히가 소실된 것에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오직 kyon만이 모든 기억을 가진 것과 그리고 나가토가 평범한 소녀로 되어 문예부원으로 나오는 겁니다. 또한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1기에서 소멸된 아사쿠라 료코가 어긋난 세계에서 평범한 소녀로 나옵니다. 이런 세상을 만든 것은 스즈미야 하루히의 힘이지만, 그 힘을 이용한 것은 나가토 유키입니다. 나가토는 인간이 아닌 우주인으로 정보단위로 이루어진 안드로이드입니다. 나가토에겐 정보라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므로 감정이 없이 사는 철저한 이성주의자입니다. 그래서 나가토가 이성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이에 반해 아사쿠라 료코는 이성과 감성을 둘 다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사쿠라 료코는 kyon을 공격할 때 이성적인 부분보다는 감성적인 부분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아사쿠라 료코는 나가토의 백업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아사쿠라 료코는 나가토의 백업으로 되면서 나가토의 이성만 아니라 나가토 자체의 감성을 가져간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봅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 아사쿠라 료코가 왜 kyon을 죽이려고 했을까라는 생각입니다.

 

우선 하루히는 이 지구라는 세상에서 신인가 혹은 신이 아닌가라는 어중간한 존재입니다. 하루히가 신이라는 설정되면 신화라는 고전에서는 신은 이 세계를 새롭게 창조할 하나의 문화영웅입니다. 그러니깐 하루히는 건국신화에서 등장할 만한 강력하고 절대적이며 모든 것을 만든 신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본인은 신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원래 신화에서 신이라는 영웅은 자신의 절대적인 힘을 가져 세상을 다시 만들어가는 것에서 정당화를 찾습니다. 그러나 하루히에겐 분명 신에 가까운 힘이 있더라도 그 신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도 없으면 새로운 세계를 만들 생각도 없습니다. 오직 재미있는 일들만 찾으려 하고 그 찾으려는 중간중간마다 하루히가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세상을 구축하기 보단 오히려 파괴하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하루히가 세상을 창조할 신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을 무너뜨리는 악마로도 볼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이란 존재가 절대적인 진리와 선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질서한 세계와 악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하루히가 이 세상을 너무 재미없어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하루히가 자신이란 존재가 너무 작고 미약하고 자신이 이성으로서 세상을 만들어가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 안정화가 되어 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안정은 cosmos 그리고 불안정을 chaos로 보겠습니다. 본래 서사구조에서는 영웅이 등장하는 세상은 chaos 즉 불안정하여 그 불안정하고 완성되지 않은 세계를 구축하고 만드는 것이 바로 영웅입니다. 그러나 하루히는 이미 구축된 세계를 안주하기 보다는 불안정한 세계로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런 불안정한 세상에 대한 문제로 아사쿠라 료코는 kyon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 불안정한 chaos를 만드는 세계의 원흉은 바로 kyon이니 그런 chaos를 정지하려면 kyon을 죽임으로서 하루히가 더 이상 chaos를 만들지 않게 하는 것처럼 말이죠. 아마 kyon이 아사쿠라 료코에게 죽임을 당하면 지구는 파괴가 될지 존속될지 모르나 kyon이 죽었다는 것으로 kyon을 인지하는 하루히는 kyon이란 인자에 발생하는 무의식적인 반응이 마지막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아사쿠라 료코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한채 chaos의 인자인 kyon은 나가토에 의해 구출됩니다.

 

 

 

하지만 나가토가 왜 kyon에게 하루히가 없는 cosmos에 보냈는지 생각해보면 kyon이 하루히가 없는 cosmos세계를 원했을 것이란 사실과 한편으로 나가토에게 감성이란 것이 생길 수 있었을 겁니다. 우선 나가토가 감성이 생긴 이유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1기에서 kyon이 나가토에게 도서관 대출카드를 만들어 준 것이고, 나가토가 처음 감성을 보이게 된 것은 컴퓨터부와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면서 kyon이 이기고 싶냐 말에 눈을 깜빡하는 것으로 대답해줍니다. 그리고 나가토에게 이성적인 에러가 발생한 것은 엔들리스 에이트라는 지루함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깐 나가토라는 이성만 가지고 있는 존재에게 감성이란 것이 생겨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히의 소실로 나가토는 평범한 소녀가 되어 kyon에게 cosmos한 세계의 나가토 유키와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chaos를 만들어버리는 하루히를 선택할 것인가를 kyon에게 결정권을 줍니다.

 



 

그러나 kyon은 여태까지 하루히의 변덕에 지쳐있었으나 그 변덕조차 이미 자신의 삶에 일부가 되었습니다. 하루히가 없는 kyon은 분명 cosmos상태에 있겠지만, 이미 하루히와의 추억으로 통해 그 chaos적인 부분도 자신에게 하나의 kosmos가 되었습니다. 물론 혼동과 안정은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한편으로 보면 서로 같이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kyon은 이미 안정화된 cosmos 세계를 chaos로 받아들이고 세계 자체가 chaos인 원래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평범하지 않은 존재들이 모여 평범하지 않은 일들을 벌이는 chaos적인 SOS단에 자신의 cosmos를 찾아갑니다. 그러니깐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을 보면 kyon의 선택은 안정화된 세상을 추구하기 보다는 하루히가 있는 불안정한 세상을 추구하게 된 겁니다. 이 스즈미야하루히의 시리즈는 그런 안정화 추구하는 세계보단 안정화되지 않은 세계를 추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째든 이번 극장판이 원래 나올 예정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1기 오프닝을 보니 아마 이번 소실편은 계획된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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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1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 마디로 영화화 되면서 영화적 문법으로 바뀌었고 퀄리티가 올라갔다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으셨네요 스토리만 줄줄 늘어놓으시고...

만화애니비평 2014-05-21 16:03   좋아요 0 | URL
스토리에 대한 부분을 영화적으로 늘어놓았죠.

님은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적은 것 좀 보여주면 좋겠네요
 
에반게리온: 서(序) - Evangelion 1.0: You Are (Not) Alon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신세기 에반게리온 그것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역할을 해버렸다.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산업 현황이 당시 미소녀나 로리콘이라는 성적인 상품에 집착하고 있었다. 보통 애니메이션 여자에게 인기없는 남자들이나 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 이전에 건담과 마크르스와 같은 SF물은 다소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그런 2세대적인 애니메이션 오타쿠 시대에서는 애니메이션에 큰 비젼은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단순히 애니메이션은 자신의 현실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의 마약같은 도피처로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일본 애니메이션 흐름에서 가이낙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모든 판국을 변형시켜 버렸다. 애니메이션이 기존에 가진 비주류라는 특성을 어느순간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모호하게 했으며, 일본 TV에서는 애니메이션이 제대로 된 콘텐츠산업으로 활용하였다.

물론 콘텐츠산업만이 아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작품적인 요소가 다양한 소재와 장르 그리고 감독의 작가정신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오타쿠라는 존재가 과연 우리가 기존에 있는 그대로인가까지 고민하게 해주었다.

사실 가이낙스라는 팀은 다른 애니메이션 그룹과 달리 애니메이션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회사에다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제작한 안노 히데아키 역시 일본 오타쿠 4대 천왕이라고 불리 정도로 심각한 오타쿠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오타쿠에 대한 사회성 결여와 자신의 벽에 갇힌 인간을 비판해왔다. 그리고 그런 비판이 어느 순간 1997년에 나온 end of eva에서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파멸의 형국까지 치닫는다. 그래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생각하면 대단히 암울하고 희망에 대해서 보단 희망조차 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것을 봄으로써 희망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살지 말자는 희망의식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신세기가 오기 전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비극으로 끝난 점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1997년 이후 10년만에 나온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序)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신지는 기본적으로 아버지인 이카리 겐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신지를 버리고 자신의 소속관할인 NERV에 가서 신지는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버지 이카리 겐도는 냉정하게도 아들을 타인의 집에 맡겨 버렸다. 그래서 신지는 아버지에 대한 낯섳 감정, 그리움, 증오, 미움, 이해불가라는 복잡한 기분으로 대한다.

그래서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 1화에서 에바초호기를 타는 장면에서 상당한 고민과 절망을 느낀다. 하지만 신극장판에서는 고민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의지로서 타려고 한다.  TVA와 신극장판의 차이는 바로 신지의 의지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TVA에서 신지는 혼자라고 여기고 쓸쓸해 하나 신극장판에서는 혼자라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야시마작전에서 신지는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염원을 담아 그 염원을 자신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다소 신지가 아버지의 그늘과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에서 확실하게 발전했다. 하지만 뭔가 TVA에서 보여준 진정한 고뇌가 보이지 않음은 조금 묘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에반게리온 초호기는 세상 그 누구도 탑승할 수 없다. 오로지 신지만이 탑승가능하고 다른 사람에게 무리였다. 그것은 에반게리온 초호기가 신지의 어머니인 이카리 유이의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서 초호기 속에 숨쉬고 있는 유이는 자신의 하나뿐인 분신을 끌어 안아 주는 느낌이 약했다.

결국 신극장판에서 고대 그리스 신화인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처럼 아들인 오이디푸스가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부부로 맺어지는 콤플렉스적인 요소를 상당히 배제한 것이다. 그런 배제의식은 신지로 하여금 아버지 이카리 겐도에 대한 감정까지 조금 덜 표출되었다. 그래서 신지가 새롭게 변신하여 성장했는지 혹은 그냥 다르게 보이려 하는 것은 마지막 극장판을 감상하지 않은 이상 판단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안노 히데아키가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만들 때에는 그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극장판에서는 결혼하여 아이를 가진 후에 아버지가 되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안노 히데아키는 자신의 성격 하나하나와 비슷하다고 했다. 그의 결혼에 작품세계관까지 바꾼 것일까? 하지만 에반게리온 전설은 바뀌지 않은 채로 많은 극장에서 새로운 신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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