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왕 - The King of Pig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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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왕을 보면 3명의 친구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돼지들 무리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 돼지들이 군림하는 공간에서 돼지의 왕이라는 것은 곧 돼지들이 우글거리는 그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지겠다는 의미이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돼지란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 인간의 단백질과 지방 등을 공급하는 식량원 중에 가장 중요한 가축이다.

그런 돼지를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열심히 먹이를 먹고 먹어 언제나 살을 찌우기 바쁜 욕심이 많은 동물이다. 동물에겐 본능만 존재하고 있기에 언제나 그 욕구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그런 돼지가 그것도 식탐이란 욕구에 충실한 돼지를 언급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라는 존재가 과연 식탐에 빠져 허우적대는 돼지들의 천국이 아닌가 싶은가 라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이란 함은 정말 하늘나라 선녀님이나 천사들이 있는 천국이 아니라 온통 더럽고 추악하며 차마 옆에서 보는 것조차도 숨이 막히는 공간이 아닌가 싶다. 그런 숨 막히는 공간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이다. 그런 더럽고 추악한 현실을 우리는 돼지의 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어느 한 여인의 죽음부터이다. 그 여인은 주인공 중에 하나인 황경민의 아내였다. 작품 내의 대사를 들어보면 경민이가 대학을 다닐 시적에 만난 후배로 경민을 잘 따르던 여자인 모양이다. 그녀가 죽기 전의 정황으로 식탁위에는 음식이 차려진 것으로 보아 경민이 사업이 망해도 그녀는 경민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경민은 자신이 사랑하던 아내를 목을 졸라 교사시켰다. 그리고 집안 주변을 보니 가득하게 붙여진 붉은 딱지였다. 경민은 사업에 실패하여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여 이제 더 이상의 희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주 예전의 친구였던 정종석에게 전화를 한다. 15년 전에 중학교 다닐 때의 친구인 그에게 전화한 것이다. 왜 경민은 종석에게 전화를 하여 그를 불러내었을까?

모든 의문은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그런 의문을 뒤로한 채 경민은 샤워를 한 후에 자신의 몸을 검은 하늘이 보이는 창밖에 비추어본다. 거기에는 경민의 모습에서 어느덧 괴물처럼 보이는 돼지 한 마리가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한 마리의 추악하고 험상궂게 생긴 존재라고, 하지만 그것은 정말 추악한 것인가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내내 상영되면서 반전을 이룬다.
주인공 경민은 중학교를 다니면서 이른바 왕따 혹은 학급 내의 불량하지 않은 불량아들에게 폭력과 횡포를 당하는 학생이다. 어느 중학교에서 흔히 보일 것 같은 아주 소심하고 약하고 비열하기도 한 인간이다. 그에겐 친구 한 명이 있다. 그의 이름은 종석이다. 종속은 경민과 달리 집안이 무척 가난하나 평소 학급 내의 통치자에게 그다지 눈에 걸리지 않은 존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학급 내의 분위기가 싫었다. 반에 반장이란 녀석은 겉으로는 학급을 잘 조절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는 사실 폭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공부도 잘하였으며, 게다가 덩치도 좋았고 싸움도 조금 하는 편이었다. 그런 반장에게 반 전체 아이들은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었다. 그런 반장에게 늘 경민은 수치스러운 장난을 당한다.

반장이 경민에게 다가와 경민의 바지에 손을 올린 후에 경민의 성기를 만지면서 조롱하듯이 약을 올린다. 그런 부당한 횡포에도 경민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당한다. 다른 날이었다. 3학년 중에 자신이 총학생회장 대표라고 하는 사람이 경민이 있는 반에 찾아와 자신을 뽑아달라며 후배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때 경민은 숙제를 다시 정리한다고 연설을 듣지 않고 그냥 자기 숙제만 정리하고 있었다.

갈등의 발단을 지나 위기의 시작은 여기서 부터이다. 경민은 연설을 제대로 듣지 않은 이유로 학급 내의 반장에게 모지게 폭행당한다. 이때 보고 있기 거북한 철이가 나와 반장을 엄청나게 때린다. 물론 이번 일만이 아니었다. 경민만 아니라 종석이까지 괴롭힘을 당해도 철이는 폭력으로 대처해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불행의 시작과 종말을 동시에 알리는 비극이었다. 철이는 사실 인생에 대해 상당히 불만을 가진 비관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집을 버리고 나간 아버지를 증오하며, 아버지를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바람에 철이의 어머니는 경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성인용)노래방에서 일을 한다. 철이에게 보이는 것은 부조리한 현실이며, 그가 바라는 것은 그런 부조리한 현실 안에서도 자신들을 억압하는 학교의 권력자들이었다. 


 


학교가 비록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기관이라고 하나, 사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그런 축소판 사회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갖가지 암흑적인 면도 불합리적인 면이 많이 나온다. 철이는 자신이 겪은 사회적인 억압과 횡포에 직접 대항할 수 없으나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에서는 가능했다. 그는 돈도 많고, 권력을 가진 녀석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철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혜택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혜택이 없어서 무시당하는 것에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가난하다는 게 죄라는 부분이 여실히 나타난다. 우선 철이는 아버지가 나간 것이 집안 가정경제가 엉망이 된 것이 원인이고, 어머니가 윤락녀가 되어 경민의 아버지에게 맞는 이유도 다 가난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종석이의 누나가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 이유도 다 가난해서이다.

왜 가난한 것이 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영화 중간을 보면 가난하다는 것은 죄가 되고, 그것은 하나의 권력이 되어 가난한 자가 억압을 받는 모습이 나온다. 그 대표적인 모습은 종석이가 학급의 반장 일행에게 폭력을 당할 때이다. 그의 얼굴이 무참하게 신발에 밟히는 클로즈업된 모습에서 우리는 그 폭력의 당사자의 신발을 잘 봐야 한다. 



그가 신고 있던 신발은 나이키 운동화이다. 나이키는 유명메이커 상품이다. 이것은 곧 상품이 기호이고, 기호가 곧 상품이라는 의미이다. 현대사회의 인간들은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다. 곧 종석의 얼굴을 무참하게 밟는 신발 가격이 10만원이라면 실제 그 신발의 기능할 수 있는 상품가격은 3만원이다. 나머지 7만원은 나이키의 상표가격이다. 그것은 곧 신발을 신는 것이 아니라 나이키를 신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이런 기호의 소비가 작용하고, 그런 점은 하나의 계급을 형성한다. 또한 현대사회는 소비의 문화이기 때문에 결국 소비로 통하여 자신의 계급이나 위치를 나타낸다. 문화자본에서 소비경제능력은 문화의 지표를 나타나게 해준다. 그런 점은 무참히 얼굴을 밟히던 종석의 누나에서 알 수 있다. 종석의 누나는 집에 와서 청바지를 사달라고 졸라댄다.

친구들은 모두 그 청바지를 사서 입는데, 자기는 그 청바지가 없어서 애들이 무시당한다고 한다. 흔히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누구는 소유하고 있는 반면 누구는 소유하지 못한다. 소유하지 않음은 곧 도태로 치부되게 되고, 문화적 공유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덕분에 단칸방에 살아가는 종석의 가족은 누나의 응석에 결국 그 청바지인 guess 블랙진을 사게 된다. 단칸방에 식구 4명이나 자는데, 그 청바지를 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누나는 이 시대의 가난한 사람의 모습이다.

누군가를 뒤쫓아 가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란 강박관념이 말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욕망은 자신의 욕망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서 비로소 인간으로서 사회적인 존재로 부각 받는 것이다. 문제는 욕망은 욕구와 다른 점이다. 진짜 돼지는 먹기만 하면 배부르기만 하면 그 욕구는 다 한다. 인간의 욕구는 돼지와 처음에 같을지는 모르나 욕망은 다르다. 욕망은 욕구를 지나 인간이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종석은 그런 누나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도 역시 소비사회의 인간으로서 욕망은 있었다. 학교에 갈 때 누나의 청바지를 입고 갔으나 문제는 여자청바지는 삼각형이 붉은색이라는 점이다. 그가 체육시간에 옷을 갈아입고 들어오니 학급반장과 그 일행들이 종석의 바지를 찢어 버려 칠판에 붙였다. 그것도 모자라 종석이 입고 온 청바지가 여자용이니 그것을 여자가 마치 남자에게 성행위를 요구하여 하는 모욕적인 그림을 그린다.

가난하지만 어떻게든 몸부림을 쳐도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오히려 묵살하고 놀리는 것이다. 그래서 종석은 돼지들의 세계인 자신의 학급과 학교를 저주한다. 그런 곳에 종석의 친구인 경민 역시 저주한다. 자신을 때리고 놀리고 조롱하는 학급을 말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모든 것을 우선시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시골에서 전학 온 안경잡이 녀석을 특히나 그랬다.

안경잡이 우등생 천영이는 공부도 잘하였으며, 처음에 그를 달갑지 않은 반장과 일행에게 대항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연히 함정에 걸려 그들에게 대항하려 했을 때 옆 반에 있던 학생회장 졸개 하나가 천영이를 무참하게 때린다. 그 후 천영이는 자신의 모습을 숨김며, 반장 친구녀석이 그의 바지 위에 손을 올려 성기를 만져도 오히려 웃어댄다. 폭력이란 이름 아래 모든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었던 존재는 바로 철이였다. 철이는 경민과 준석이에게 모두 희망의 존재였다. 그는 패싸움을 하여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으며, 학교에서 유명한 싸움꾼이 와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 모조리 이겨주었다. 학교 선생이 우연히 소식을 듣고 와서 철이를 때려도 철이는 학급반장과 옆 반 싸움꾼을 모조리 잡아 패버렸다.

철이는 유일한 돼지의 세계에서 군림하는 돼지의 왕, 아니 돼지의 왕을 능가하는 괴물이었다. 철이의 존재는 자신들만의 세계, 즉 안정화된 세계를 원하는 학급반장과 학생회장에겐 눈의 가시거리였다. 그러나 과연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누구일까? 학생회장과 반장은 겉으론 학교 분위기를 위해서라고 하나 폭력과 협박으로 통치한다. 어떻게 본다면 정치란 인간들 사회에서 어떻게 잘 다스릴 것인가? 라는 철학적인 질문보단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잘 눌려 자신들이 이익을 보는가이다.

정치라는 것에 철학보다는 사익이라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폭력은 거기에 동원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폭력 뒤에는 또 권력을 이용했다. 그것은 처벌이란 제도였다. 분명 잘못은 반장무리가 잘못하였으나, 모든 상황적인 최종 죄인으로 분류되는 것은 철이었다. 정학을 당한 것도 심지어 퇴학을 당한 것도 말이다.

퇴학은 학생회장과 그 일당들이 단체로 경민과 종석을 붙잡아 가혹하게 폭력을 휘두르고, 자신의 방해물인 철이를 불러내어 굴복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철이는 굴복하기 보다는 떼로 덤벼드는 학생회장 일원들을 때려 눕혔으며, 최후에 자신의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될 때에는 나이프를 꺼내어 자신을 붙잡고 있던 녀석의 손등을 베었다. 



철이의 폭력은 권력을 잡기보다는 권력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파시즘으로 얼룩진 학교의 전체주의에 대항하던 철이의 최후의 발악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악은 죄가 되어버렸다. 중학교 1학년인 이제 퇴학을 당하고, 집안은 엉망이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객지에서 자살하여 죽었다. 더는 철이에게 삶의 의미는 없었다.

그런 철이에게 한 가지 다른 희망이 생겼다. 철이의 어머니는 언제나 죽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희망이 잃은 채 살아간다. 그런 철이의 어머니가 좌절할 때 철이는 모든 분노와 좌절에 이성을 상실한다. 철이는 식칼을 들고 어머니를 죽이려 한다. 그러나 때마침 어머니는 노래방 사장인 경민의 아버지에게 모질게 혼나 그것이 서러워서 혼자서 울고 있었다.

게다가 가게 전화기로 자신의 언니에게 전화하여 사는 것이 어렵지만, 남편이 죽었지만 그래도 철이가 있어서 힘내서 살아가고 싶다고 한다. 철이는 그 말을 듣자 어머니를 죽일 수가 없었다. 대신 어머니를 괴롭히는 경민의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포기하게 되었다. 그는 우연히 마주친 경민이 때문에 노래방 사장이 경민이 아버지란 사실을 안 것이다.

철이에겐 더 이상 돼지의 왕으로 군림할 수 없었다. 그는 퇴학은 당했지만 그가 그토록 증오하고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아버지가 객지에서 죽어 자신의 복수의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려 모든 것을 버리려 했는데, 어머니까지 철이가 있어서 살아간다는 말에 죽을 이유도 없어졌다. 또한 학교에서 잘만 하면 퇴학에서 재입학이 가능하다고 한다.

문제는 철이가 퇴학을 하고 나서이다. 철이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퇴학을 당하여 미친 듯이 본드를 마시고, 세상을 저주할 때 그는 자살할 것이라 한다. 자살을 하여 자신과 자신의 친구를 괴롭히던 부와 권력을 지닌 반장과 학생회장, 그리고 안일한 사회구조를 만드는 교장과 선생에게 복수하기로 한다. 그런 최고의 방법은 자신의 생명을 던져 모두를 절망으로 만드는 것이다.

거기서 인상 깊은 말은 철이가 만약 이들이 어린 시절 이후 어른이 되어도 이들은 과연 변하는가라는 것이다. 계속 이대로 계속 커서 어른이 되어도 그들은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축소판에 있던 자들이 사회로 가는 것은 확장되어 팽창되어 나갈 뿐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폭력과 압박이 강해질 뿐이다.

아무리 가난하고 힘이 약한 자들은 발버둥 쳐도 그 자리에서 헤맬 뿐이다. 그 말은 남동생 종석에게 뺨을 맞은 종성의 누나가 한 이야기처럼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고등학교만 나오고, 결혼하여 자식을 놓아도 계속 가난한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 열심히 할 필요 없이 그저 원하는 것을 억지로 손을 넣으려 한다. 그것이 비록 법적으로 틀려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 뭔가 고칠 수 없을망정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분노와 울분 정도는 보여주어 파장을 줄 수 있다. 3친구의 대화에서 그 녀석들이 어른이 되어 중학교 시절이 과연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좋은 추억으로 그냥 내버려 둘 수 있는가이다. 반장과 학생회장과 싸우고 대들어서 퇴학당한 철이로서는 그것이 최고의 복수였다. 만약 그 복수가 통한다면 반장과 학생회장은 더 이상 자신들의 부당한 폭력정치로 이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속한 월요일 조례시간 철이는 학교건물 옥상에 나타나고, 그대로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져 즉사한다. 그 후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굳이 영화관의 스크린에 나오지 않아도 말이다. 그 뒤의 일로 종석과 경민은 평생 말도 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실 철이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사랑을 보고 다시 제대로 살아가기로 한다. 게다가 학교에 다시 오면 반장과 학생회장에게 더 이상 눈에 가시가 되지 않고, 적당히 살아가려 한다. 그것을 위해 철이는 경민에게 자신이 옥상에 올라가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면 비명을 질러달라고 한다. 만약 지르면 퇴학은 무효가 되고, 자신들을 괴롭히던 권력자들은 그렇게까지 괴롭히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날 철이는 떨어져서 죽는다. 그 죽음의 원인은 경민은 알고 있었다. 바로 뒤에서 종석이 밀었기 때문이다. 종석은 철이가 죽어야지 자신이 비로소 지긋지긋한 학급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비밀을 풀기 전에 분명 경민의 행동들이 비겁하고 줏대가 없었다. 철이에게 붙다가 전학생에게 붙다가 이제 다시 철이에게 가다가, 옥상에서 학생회장 일당에게 맞을 때에는 철이를 불러 친구를 팔아먹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비겁한 경민보다 더 비겁한 것은 종석이었다. 종석은 마치 옆에서 관찰하고 지켜보는 입장에 가깝다. 그는 물론 철이의 광기에 동의하여 고양이의 배에 나이프를 찔러 죽인다. 반장과 싸움꾼이 철이에게 맞을 때 반장 친구녀석이 교무실 가는 것마저 길을 막는다. 그런 그가 철이를 죽게 한 것이다. 그가 철이를 죽이게 한 것은 돼지의 왕이 필요해서이다. 왕은 모든 것을 통치하나 모든 희생을 감수하는 희생양이었다.

왕은 곧 지배자이며, 하나의 제물인 것이다. 철이는 돼지의 왕으로 되기를 종석이 기대했다. 하지만 그것이 틀렸기 때문에 종석은 억지로 철이를 돼지의 왕으로 만들었다. 그런 종석의 비밀을 알고 있던 경민은 15년 지난 후에 종석 앞에 그 비밀을 폭로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경민이 진정 자신이 돼지의 왕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15년 전에 이루지 못한 철이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종석이 학교건물에서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이때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돌아보니 차가운 콘크리트 위에 15년 전의 바로 그 자리에 철이가 죽었던 자리에 경민이가 자살하여 차가운 시체로 변한 것이다. 그때 종석에게 걸려온 종석의 여자 친구 목소리에 종석은 아주 무서웠다고 눈물을 흘리면 절규한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로 지금 어디냐는 말에 그는 자신이 나온 초등학교가 아니라 바로 이 현실이라고 한다. 그렇다. 돼지의 왕에서 돼지들은 이 현실에 살아가는 추악하고 비겁하고 치사한 인간들인 것이다. 마치 그것은 종석이 교실에서 괴롭힘을 당해도 주변 학급학우들이 무관심하게 외면하는 모습에서 말이다. 돼지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는 약자는 그저 밟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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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서진 2020-05-04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돼지의왕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 다른만화 시리즈 1
마이크 코노패키 외 지음, 송민경 옮김 / 다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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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의 이름은 이전에 어느 정도 듣고 있었다. 하워드 진 교수는 미국 역사학자라는 것과 얼마 전 작년 1월에 작고하신 20C와 21C의 사이에서 활동하던 양심적인 지식인이다. 하워드 진의 책을 직접 읽어보진 않았으나, 그가 예전에 MIT공대 노암 촘스키라는 언어학자와 함께 여론조작이란 도서를 같이 낸 것으로 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을 읽어 볼 때 마치 노암 촘스키의 도서 중에 예전에 내가 읽은 것들이 생각난다. 집에 노암 촘스키의 불량국가로 통해 국제사회의 테러리스트들의 활동이 무엇에 의해 생기는지 또는 강대국들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테러리즘 정치, 외교, 군사, 사회, 문화, 경제 등의 다양한 문제를 고발한 도서이다.

과연 우리는 우리가 겉으로 알고 있는 이 세상의 이야기들이 진실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알 수 없이 그저 묵과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아름답게 미화되어 추악한 면을 마치 동화처럼 꾸민 신데렐라 신화와 백설공주 신화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참고로 신데렐라의 신화는 매우 끔찍하고 잔인하며, 백설공주 신화는 매우 부도덕한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디즈니 세계명작만화에서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흘러간다. 세상에 그렇게 좋겠지만 보이는 게 너무 많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또한 실제로 있었던 일 조차도 숨기고 조작한 이야기들을 고발한 작품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노암 촘스키나 하워드 진이라는 인물을 알고 이 책을 열어보면 그렇게 충격을 받지 않을 것이나, 모르고 본다면 충격 그 자체이다. 자유와 평등의 국가에서 어떻게 인종차별과 다른 국가에 저지른 범죄를 그것도 인권이나 윤리도 없이 말이다. 인종차별에서 인디언들을 몰살시키고, 그들의 전통문화를 파괴했으며 또한 그들을 자유의 적으로 몰아버렸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인디언의 몰살, 그와 동시에 시작된 흑인에 대한 무차별적 대우는 미국이란 국가가 과연 자유와 평등이 있는가이다. 있기는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있지 못할 존재가 있으면 되는 것이다. 쿠바, 멕시코에 군사작전을 펼치고,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할 때 묵인한 것도 모자라 원조까지 해주었다.

필리핀을 침공할 때에는 민간인들에 대한 살육은 도가 지나쳤으며, 베트남 전쟁의 통킹만 사건은 이미 미국정부가 진실을 공개한 일이기도 하다. 전쟁을 일으키면 누가 이익을 볼까? 무기판매와 더불어 각종 공장에서 군수물자의 생산은 일부 기득권층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그들은 이전부터 계속 그렇게 이익을 가졌으며, 국민들에 대해 속이고 억압하려 했다.

가령 전쟁을 일부러 하기 위해 조작과 첩보활동을 한 것에 지나지 않아 국민을 죽음의 사지로 내몰고, 그들에게 전쟁을 원하지 않고 반대하면 자유를 거부하는 것이라 했다. 물론 적어도 세계 2차 대전의 독일과 이탈리아의 나치즘과 파시즘은 그러하고, 일본의 군국주의 역시 응징을 받아야 대상이다. 하지만 그런 파시즘과 군국주의 요소를 자신들에게 가지지 않았나는 것이다.

그런 폭력적인 테러리즘 정치와 군사 활동은 오직 적을 만들어가고 그 적을 응징함으로 자신들의 정의를 관찰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정의내부에도 문제가 있었다. 자유와 평등을 외치던 그 조직 내에서 흑인과 유색인종 차별은 극하게 심했다. 밥을 따로 먹거나 건물에 같이 못 들어가거나 특히나 대학도서관에서 어느 흑인대학생이 미국독립선언문을 빌리려고 하는데 그것을 거부당하고, 또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빌리려고 해도 거부당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나도 읽어본 도서이다. 인간의 자유와 그 자유에 대한 책임과 권리, 그리고 윤리 등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보편적인 인권을 다룬 도서이다. 여자에게도 똑같은 정치참여권을 부여하고, 노예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는 인간의 가치를 말하는 책이다. 도서관에 자유론을 소장하고도 그 자유론에 대한 가치를 묵살하는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하워드 진은 그런 미국 역사의 오랜 인종차별과 테러리즘 정치, 그리고 하워드 진 스스로가 살아온 그 역사에서 그도 인종차별 반대와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평등 인권을 위해 활동하다가 대학교에서 해고당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 책이 발매된 동기는 아마 2001년 911테러 사건이 동기였을 것이다.

테러가 일어난 것이 단순히 테러리스트들의 폭력적이고 무차별적인 행위인가? 아니면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원인인가?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가? 물론 이런 극단적인 위협은 대외적으로 받은 것만은 아니다. 20C 초반에 미국 내의 많은 노동자들이 철도나 광산에서 일을 하다가 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또는 경제지수의 변화에서 월급이 깎이고 해고당하기도 했다. 거리에 해고된 노동자가 분노하여 울부짖는데, 양심 없는 악덕고용주는 자신들의 주주배당금이 더 많아졌다고 좋아한다.

그리고 거리에서 분노한 대중들을 비웃으며, 그들의 절규에는 단지 공권력만 투입되어 폭력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것이 과연 자유와 평등을 기초한 국가일까?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권을 보장하는 평등과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살고 싶으나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과연 자유와 평등을 기초한 것일까? 나는 이 책에서 가장 끔찍한 정치가의 이야기를 보았다.

영국의 전쟁영웅인 원스턴 처칠이 아주 유능하고 잘생긴 장교시절에 한 이야기다. 앵글로 잭슨족이 지배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고, 그것이 비록 자신들에게 라이벌이 되는 국가라도 말이다. 2차 세계 대전에 파시즘을 몰아내고 세계평화를 찾겠다고 하는 이들이 다른 국가와 민족에 대한 강압적인 정치는 인정한다는 것 자체에서 과연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어떤 시각으로 역사를 보아야 하는가?

참고로 이 만화는 다른출판사의 다른만화시리즈의 제1번째 작품이다. 다른출판사의 다른만화시리즈 중에서 2번째인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이란 작품이 있다. 본래 이 작품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팩션 영화를 만화로 만든 것이다. 만화이든 애니메이션이든 그 “바시르와 왈츠를”과 이 “하워드 진의 미국 만화사”를 같이 읽으면 조금 공통적인 접점이 보인다. 그것은 하워드 진 교수가 고발한 내용이 거기에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ps. 2010년 1월에 작고하신 하워드 진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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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프리카
곤 사토시 감독, 푸루야 토루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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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프리카라는 것은 고추 품종의 하나인 파프리카의 씨를 빻아서 만든 향기로운 향신료로서 우리 인간이 먹는 식단에서 달콤한 입맛을 선사하는 식물이다. 그런 향기로운 향기를 가진 파프리카처럼 콘 사토시 감독의 파프리카는 과연 어떤 달콤하고 향기로운 맛을 주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이미 제목부터 묻고 있다.

우선 파프리카라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들어가기 이전에 우리는 이 작품을 만든 콘 사토시 감독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콘 사토시는 분명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또한 일본 애니메이션은 흔히 저패니메이션이라고 하여 상업 애니메이션을 추구하는 거대한 문화산업이다. 하지만 상업 애니메이션이라고 하여 그곳에 자본력만 융통되는 단순한 영상콘텐츠가 아니다. 그 상업성 내에 거대한 담론과 예술이라는 큰 가치가 향유하고 있다.

그런 작품을 만들고 제작하던 사람이 바로 콘 사토시다. 특히 일본 최초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인 “아키라”를 만든 오오토모 카츠히로가 상당한 작가주의적인 애니메이션 메모리즈(memories)라는 옴니버스 시리즈로 제작한다. 그때 오오토모 카츠히로 감독과 함께 각본을 짜던 사람이 바로 콘 사토시다. 이 작품을 본다면 일본 근대 자본주의사회와 더불어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 그리고 획일화적인 교육과 사회관념, 거기에 태어난 비인간성, 조직관료 체계 안에 갇혀 아직도 그런 못에 박힌 사고를 지닌 일본 근현대 사회를 비판했다.

오오토모 카츠히로 감독과 같이 작업한 이상 그의 작품은 단순히 재미와 흥미를 주기 보다는 철학과 사상이 깊이 파고든 하나의 예술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작품관을 가지고 퍼펙트블루와 망상대리인 천년여우, 도쿄 갓파더즈 등의 작품에 직접 제작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이 파프리카는 피할 수 없는 재미와 감동 그리고 심오한 담론을 펼친다. 왜 그럴까?

일단 감독에 대한 간단한 이력을 말한 후에 그가 보여주고 싶은 세계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우리는 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파프리카가 인간에게 향신료와 같은 달콤한 존재라면 이 제목과 더불어 작품 내의 주인공이 파프리카는 과연 어떤 향신료처럼 달콤하고 향기롭게 되고 싶은가이다. 우선 이 작품의 간단한 스토리는 이렇다.

누군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지배를 바로 눈 앞에서 실현하기 보다는 인간이 모르는 사이에 지배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런 인간의 의식구조에서 만약 당신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당신은 이제부터 나의 명령에만 따르게 됩니다.”라고 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그것을 거절할 것이다. 또한 대부분 인간은 시각과 청각 중에서 특히 시각적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가 용이하다. 하지만 그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각의 정보가 차단된 상태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파프리카 작품 내에서 이런 인간의 이성이 살아있는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잠들어 숙면상태에 있는 무의식이라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기계 DC라는 꿈 모니터링 컴퓨터 장치의 도난에서 시작된다. 게다가 의심 가는 용의자는 의식불명이고, 다른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하며, 계속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나서 통제가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거기에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참여한 토나카와 형사가 가세하면서 사건을 오히려 미궁에 빠진다.

그러나 모든 서사구조를 가진 작품처럼 이 애니메이션 역시 작품 내의 수수께끼와 사건을 차례차례 해결해 나간다. 그렇다면 이미 서사 앞부분에서 DC장비의 분실과 연구원들의 실종과 의식불명이 있었다면 작품의 필연적인 상황에 따라 인과관계가 연계되어 여기에 따른 최종 마무리로 결말을 짓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단순히 우리는 여기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을 통해 무엇을 나타내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이다.

이 작품에서 인간은 2가지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현실의 나, 그리고 하나는 현실이 아닌 나라는 점이다. 현실에 있든지 혹은 현실이 아니든지 다른 나라고 하여도 그 나라는 존재는 결국 한명으로 귀결된다. 그럼 나라는 자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나누어지고 혹은 일치하는가이다. 인간은 자신의 무의식적인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받는다. 그런 무의식적으로 남는 기억은 인간 본인에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어떤 행동과 말을 하게하며, 심지어는 그것이 하나의 당위성까지 가지게 된다.

또한 의식과 무의식은 하나는 전자는 직접 감지하여 사고할 수 있으나 후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후자의 세계를 통제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런 후자를 통치하게 된다면 아무리 이성이 인간을 받치고 있더라도 인간의 이성한계가 무의식의 힘을 이기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모든 지배를 받을 것이다.

그런 무의식 세계가 얼마나 작품 내에서 큰 영향을 주는지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다. 특히 2명의 인물에서 이런 부분을 잘 볼 수 있다. 작품의 제목처럼 파프리카라고 하는 여성은 10대의 미모를 지닌 미인으로 상당히 밝고 긍정적인 사고를 지닌 인물이다. 그렇지만 이 여성은 현실세계의 사람이 아니라 비현실세계의 여성이다. 오로지 꿈의 세계 즉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만 존재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꿈의 장치로 통한 현실왜곡으로 그녀가 실제 현실에서 나오는 것처럼 설정된다. 그렇다면 이 꿈의 세계에 등장하는 여성의 몸주인은 누구인가? 그녀는 바로 치바 아츠코라는 연구원으로 평소에 매우 날카롭고 이성적이며 상당히 딱딱한 느낌을 주는 전형적인 연구실에만 살아가는 여성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어긋난 꿈과 현실의 그녀들이 왜 이리 되었을까?

우리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은 이성적 사고를 나타내는 대화와 문장으로 나타내기 보다는 차라리 허상 즉 이미지의 세계로만 충족할 수 있다. 물론 이미지를 기표로 삼아 그것의 기의를 찾아 해석하는 기호학은 있으나, 적어도 기표라는 이미지는 욕망덩어리를 보여주기에는 상당히 좋은 존재이다. 그렇듯이 아츠코는 평소 말이 없고 조용하고, 외적인 모습에도 안경을 쓰고 머리까지 묶는 전형적인 차가운 스타일이다.

그런 차갑고 이성적인 그녀에게서 파프리카라는 열정이 넘치고 활달한 소녀가 나온다. 결국 파프리카라는 소녀는 치바 아츠코가 가지지 못한 하나의 선망적인 존재이다. 현실에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입장에서 이룰 수 없는 욕망을 파프리카가 대신 해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파프리카는 그런 그녀의 이성에 억압된 잠재의식이 폭발한 것처럼 꿈을 모니터링하는 세계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한다. 마치 그 세계에 새로운 영웅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꿈이라는 것은 자신의 욕망에 대한 한시적인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는 것이 그 자체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치바 아츠코처럼 자신의 의식에 눌린 무의식을 폭발하는 파프리카가 있다면 이와 반대되는 사람은 있지 않을까? 그렇다. 그런 인간은 존재한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솔직하고 욕심이 없을 사람일 것이다. 우리 인간은 분명히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어도 자신의 욕망에 목이 말라 계속 신기루 속의 오아시스를 찾아  다닌다. 하지만 진정한 오아시스는 바로 코앞에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욕구가 아닌 욕망의 동물이다. 일반 동물은 한번 그때 만족하면 그것으로 끝이나 인간은 그것이 아니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계속 누군가와 마주하면서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결국 자신이 욕망하여 결국 그것을 성취해도 다른 욕망이 계속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인간에게 고뇌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이에 반해 이런 고뇌와 불만족은 인간 그 자체를 성숙시키고 문명의 발전을 안겨주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인간이 가진 욕망의 굴레에서 가장 행복하게 나온 사람이 누구냐고 한다면 이 작품에서는 토키타 코사쿠라는 천재박사이다. 그는 치바 아츠코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고, 같은 연구소의 연구원이다. 하지만 토키타 박사는 치바와 달리 냉정하거나 이성적이거나 딱딱하지 않다. 오히려 어린아이가 처음 동물원에 가서 많은 동물들을 보고 놀라는 그 느낌을 가진 존재이다. 즉 그는 세상 모든 것에서 신기하고 재미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찾아가는 사람이다.

특별히 돈과 명예에 관심도 없고, 단순히 놀이기구도 좋아하고 인형도 좋아하고 광대행진도 좋아한다. 여기에 평소 즐기는 것은 단순한 식탐에 의한 간식사냥이다. 그는 성욕에도 크게 지배받지 않는다. 자기의 마음은 언제나 솔직하고 그 기분에 따라 움직이며, 게다가 타인에게도 친절하다. 물론 겉모습은 뚱뚱하고 둔하여 남자로서의 매력은 없다. 그래도 세상에 자신에게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 남자에게 꿈과 현실은 그야말로 모두 놀이기구다.

놀이기구를 좋아하여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어른이 되어서도 놀이에 흠뻑 빠지고, 근무시간에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과도한 노동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장난감을 만들어서 이용한다고 하는 기분일 것이다. 역시 그는 꿈과 현실 모두가 놀이터이고, 재미있는 세상이다. 그런 그에게 자신 스스로가 만든 위기가 있을까? 없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는 위기가 터진다. 그것은 어긋난 꿈의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식이 있는 이성 아래에서 타인을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성의 사고가 있는 과정에서 자신의 심신을 판단할 수 있는 자율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율성이 없는 꿈의 세계에서 그것을 강제적으로 꾸준히 교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작품에서 내가 소개한 치바와 토키타는 서로 어긋난 현실과 꿈을 가지고 있으나 적어도 각자의 꿈을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다. 단지 그 꿈의 발현되어 느끼는 것이 다르지만 말이다.

그럼 역으로 그 꿈을 소중함을 알기에 그것을 이용하려는 존재에 대해 어떻게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인가? 이 작품의 최고의 악은 자신의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행동들을 반대로 꿈에서 보상받으려 한다. 그런데 웃기게도 꿈이라는 자유를 지나 방종의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꿈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 불간섭적인 존재다. 단지 그 꿈이 어떻게 변형되고 왜곡되게 나오는 것은 하나의 인자로서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꿈의 세계를 억압하고 현실을 지배할 욕망은 품은 인간에서 보이는 오류는 타인의 꿈은 부정하고 통제하면서 결국 자기가 욕망하는 것 자체 역시 꿈이라는 세계다. 꿈이 현실을 지나친 돌출을 원하지 않으면서 결국 자신의 욕망을 돌출시키는 모순적인 행동이 보인다. 그런 행동을 보인 암흑의 존재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은 이른바 인간이 가진 무의식적인 콤플렉스를 자기 역시 당면하기 때문이다.

음모의 배후에 숨은 자는 현실에서 가질 수 없는 심적 박탈감을 꿈의 세계에서 대신 누리려 한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꿈을 볼 수 있는 기계를 물리적으로 현실 속에서 다룰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배후의 하수인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 하수인에게 큰 맹점이 있었다. 꿈을 억압하는 것을 반대하는 파프리카의 원본 치바를 사랑하던 것이다. 그러나 꿈의 세계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치바를 제거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치바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독점할 것인가?

여기서 권력을 가진 아버지같은 존재를 치고, 여자를 가질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포기할 것인가? 보통 하나의 세계를 만든 신화를 본다면 신화의 주인공은 아버지로부터 권위를 받아가기 보다는 아버지가 없이 자신의 권위를 만들고, 그 권위의 최종 과업 종결점은 여자와의 결혼이다. 결국 피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무의식적인 욕망에 의해 아버지와 아들로 경쟁하는 음모자들은 서로 자기의 세계를 차지하기 싸운다.

그 세계란 자기가 가지지 못한 현실에서 느낀 박탈감을 채우기 위한 욕망의 공간이다. 우리는 흔히 꿈을 꾼다고 하면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먼 미래 자신이 되고 싶은 하나의 존재인지 혹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타나는 미지의 세계인지 말이다. 어떻게 되었든 그 세계는 현실의 자신이 가진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자신이 원한 것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그런 인간의 욕망을 담은 꿈, 그것을 보여주는 파프리카에서 우리는 우리의 꿈을 어떻게 봐야하는 것일까?

ps. 콘 사토시 감독의 명복을 빕니다. 그곳에서 행복한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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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쿠리코 언덕에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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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미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그 감독의 자리를 본인이 하기 보다는 본인의 아들에게 그 위치를 인수하여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스튜디오 지브리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위치는 상당히 강하다. 비록 그의 아들인 오료가 감독을 맡았는데 말이다. 미야자키 가문의 2대 연속 애니메이션 감독 출신은 매우 소중하고 귀한 일이다. 정녕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데즈카 오사무 이후로 명맥을 이어온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제는 자신의 은퇴 후를 넘어 보아 미야자키 코드를 이어갈 다리를 만든 것이다.

이번에 2011년 스튜디오 극장용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이제 미야자키 하야오의 특유한 작품과 설정 그리고 맛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미야자키 고료라는 감독은 2006년 게드전기를 발표하였으나,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가 2004년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2008년 “벼랑 위의 포뇨”에 대해 감독과 각본을 맡았다. 2010년 “마루 밑의 아리에티”에서 각본을 맡고 이번에 나온 “코쿠리코 언덕에서” 역시 각본을 맡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제 정면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전두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에서 물량을 받쳐주는 지원군으로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아들이 이번 작품의 감독을 맡은 것은 1941년도 태어난 70대 어르신으로 본다면 그는 역시 스튜디오 지브리를 이끌어 나갈 신인 애니메이터 지휘관을 받쳐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이름을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라는 명감독이 이름을 떨치므로 그들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운 업적이라는 것은 차마 따질 수 없을 만큼 상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일까? 이 작품을 그러니깐 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애니메이션의 서사를 읽어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부분이 나온다. 그것은 단순히 스토리 외적으로 흘러가는 부분이 아니다.

흔히 서사구조 즉 내러티브(narrative)에서는 중요한 구조를 가진다. 그것은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갈등이나 혹은 위기를 발현하는 극적플롯이 존재하여 그것이 극대화되면 작품 내의 주인공들의 갈등과 위기상황을 연출하고 어떤 우연한 계기와 조력자로 통하여 그것을 해소하여 스토리의 결말을 이끌어 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詩學)으로 통해 철학적인 이야기를 펼쳐가며 해석하듯이 이 작품 역시 서사 속에 숨겨진 담론이 나의 눈에 들어온다.

작품 시기는 1963년 어느 바다마을로 중심이 되어 1964년에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이때의 일본은 1945년 태평양전쟁 패전과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국내외 전쟁에서 큰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이때 일본은 한국전쟁으로 통해 미군 및 연합군의 군수물자 기지로서 큰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 경제적인 발달이 1960년대 일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배경에서 이 작품을 새롭게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이야기에서 여자주인공 미츠자키 우미로 통해 단순히 남자주인공 카자마 슌과의 첫사랑 이야기의 비극과 비극의 해결이 주된 요소가 아니다. 이 작품의 제일 중요한 부분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왜 아버지이라는 것이 등장할까? 여자주인공 우미는 자신의 아버지가 선원이었고, 그 아버지는 배를 타고 나와 영영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군수물자 이동 시에 적의 공격으로 인해 배가 침몰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코하마 작은 어촌에서 우미는 아버지가 오기를 바라며 국기계양대에 깃발 2개를 항상 올린다.

그 깃발은 언제가 자신에게 돌아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기에 대한 위로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깃발에 모든 마음을 담은 우미에게 새로운 사람이 온다. 바로 학생회장 친구이면서 학교신문을 발간하는 카자마군을 만난 것이다. 그는 우미가 올린 깃발의 의미를 알고 그의 아버지 배를 탈 때마다 그 깃발이 항상 달린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학교 신문에 우미의 깃발 이야기를 시로서 풀어낸다.

카자마군은 그의 아버지가 선원이므로 뱃사람에 대해 잘 알고 깃발에 대해 알았으며, 모스 신호 역시 알았다. 하지만 우미의 깃발은 단순한 깃발이 아니라 아버지에 향한 딸의 사랑이었다. 이쯤되어 나는 이것을 생각했다. 마치 자신의 어머니인 클리템네스트라와 어머니의 간부인 아이기스토스가 생각났다. 물론 우미는 엘렉트라 신화에서 동생인 오레스테스를 이용하여 아버지 아가멤논 왕의 원수인 어머니와 어머니의 간부를 살인하지 않으나, 그런 심리적인 부분에서 신화에서 보이는 듯한 심리적인 상황을 반영했다.

물론 추후에 설명하겠으나, 이 작품에서 우미의 어머니가 등장한 것은 카자마군에 대한 체념 후에 등장한 것이다. 일단 왜 우미가 카자마군과 중요한 역할과 그것이 보이는 일본의 역사적 배경은 어떻게 이어질까? 카자마군은 자신의 학교에서 낡고 허름한 동아리건물을 철거에 반대하기 위해 시위를 한다. 그리고 동아리 건물 아래에 있는 작은 인공 수원지에 몸을 날린다. 그때 우연히 만난 카자마군과 우미는 운명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이것은 두 사람으로 통해 이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단순하게 연애를 주제로 하는 작품으로 오인하게금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건물로 가면 알 수 있다. 낡은 건물안에 있는 카자마군을 만나기 위해 우미와 우미의 동생 하나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 건물이 매우 오래되어 너무 지저분하다는 점과 이 건물이 낡아 이제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자마군은 어느날 학생집회 토론에서 이 건물을 부수지 말고 존치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반대로 많은 학생들은 이 건물을 헐고 새로운 건물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이 작품의 진정한 숨은 이야기는 바로 이 낡고 허름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대사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카르티에 라탱' 안의 “먼지도 문화”라고 말이다. 이 건물은 일본 경제성장과 더불어 지난 과거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건물을 모조리 없애려고 한다.

건물을 없애 버리는 것은 좀 더 생각하면 과거 일본의 이야기를 없애는 것과 같다. 과거 일본 태평양전쟁 이후 패전과 더불어 경제성장하여 과거의 자신의 잘못을 그대로 누적(카르티에 라탱 안의 먼지처럼)하다가 이제 없애는 것은 과거를 모조리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런 점을 카자마군은 반대했다. 오히려 과거부터 이어온 잘못된 점은 모두가 고쳐나가고 이것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 전통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을 학생들이 보고 서로 간의 대립이 이어지는 것이 한참 보인다. 그런데 이 토론의 갈등도 우연히 학교 교장과 교사의 등장으로 인해 멈춘다. 그들은 과거 일본의 상징이다. 늙고 낡은 과거의 치적을 모조리 없애고 새로운 일본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게다가 이 낡은 공간에서는 여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 이 폐쇄되고 낡은 공간에서 유일한 최초 방문자는 미츠자키 자매였고, 그런 카르티에 라탱을 지켜낸 핵심적 뿌리는 우미였다. 

 

우미는 여학생들을 이 낡고 늙은 공간을 다시 들어가서 청소하고 정리하고 새롭게 변모했다. 과거 일본 즉 태평양전쟁 시대에서 그 사회적 분위기는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남성이 모든 것을 좌우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이제 학교 내에서 자발적으로 여학생이 카르티에 라탱을 변모하면서 학교 학생들이 변하고 심지어 이 건물을 철거하는 계획까지 막아낸다. 과거 붉은 돼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녀는 상당히 강했다.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인 오료 역시 소녀가 강했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하늘을 공간으로 펼쳐갔다면 아들은 이번에 바다로 통해 풀어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소녀와 하늘은 결코 빠질 수 없는 필수적인 아이템이다. 이번 작품 역시 요코하마의 작은 마을에서 어느 고등학교를 바꾼 것은 이 소녀이다. 물론 이 소녀는 처음에는 카자마군으로 시작했으나 어느 순간 그것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 모든 학교 안의 카르티에 라탱을 지키기 위해 우미, 카자마군, 학생회장 3명은 학교 이사장을 만나로 간다.

그런데 그 이사장이 우미에게 묻는다. 아버지가 누구냐고 말이다. 그 말에 우미가 아버지는 선원이고, 한국전쟁에 죽었다. 다시 이사장은 묻는다. 그 건물을 지키고 싶은 이유가 뭐냐고 말이다. 우미는 아무런 미련 없이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우미는 자신의 잃어버린 아버지를 스토리 외적으로는 카자마군에게 겹쳤고, 스토리 내의 의미에서는 카르티에 라탱에게 겹쳤다.
 

 


왜냐하면 우미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우미는 자신의 아버지를 매일 생각하고, 그런 아버지 모습을 카자마군에게 본 것이다. 하지만 우미는 아버지의 그늘을 카자마군에게 전이시키려 했으나,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카자마군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카자마군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올 때 우미가 올린 깃발은 다른 모습이었다. 호쿠토라는 깃발에서 기존 2개의 깃발이 5개로 늘어났다. 그녀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카자마군의 고백에서 그녀는 카자마가 친오빠인 것으로 오인했다. 그런 오인의 절망에서 다시 깃발은 2개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은 이게 아니었다. 언제나 아버지가 오기를 기다리며, 또한 기다리는 아버지 대신하여 카자마군을 사랑하던 우미가 절망에 빠질 무렵 유력한 조력자가 등장한다. 그것은 우미의 어머니였다. 우미의 어머니는 우습게도 우미가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 한 후에 그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카자마군을 만난 후 다시 그 카마자군과의 사랑을 포기하고 난 뒤에 나타났다.

사실 우미는 죽을 것으로 설정된 아버지가 돌아와서 그녀를 안으려고 할 때 분명 어머니는 등장하지 않을 설정이었다. 왜냐하면 정말 카자마군이 우미의 친오빠라면 카자마는 우미의 어머니와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요소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렇지만 우미의 어머니가 등장하고 나서는 오히려 그 갈등은 이어지기 보다는 해소되었다. 우미의 아버지는 카자마군을 놓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 친구가 전시에 죽고, 그의 아이가 고아원에 보내기를 거부했다. 다시 우미의 아버지는 그 아이를 카자마군의 아버지에게 맡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자리이동에서 지난 일본의 슬픔을 알 수 있다.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카자마군의 친아버지는 죽었다. 그리고 우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으로 죽었다. 2사람의 아버지는 결국 일본 근대화의 역사에서 지나간 아버지였고, 우미는 그런 아버지의 그늘 아래 살아가고 있었다. 작품 마지막에 우미는 다시 깃발 2개를 올리면서 미소를 띄운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음을 알아도 학교 동아리 건물인 카르티에 라탱을 지켜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지킬 수 있었으며, 또한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카자마군과의 사랑 역시 지킬 수 있었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우미의 첫사랑인 카자마군과의 관계에서 이른바 친남매라는 오해의 갈등에서 시작했으나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친남매가 아니라는 점과 또한 이들이 학교 안의 소중한 공간인 카르티에 라탱을 지켰다는 것이다. 스토리로 본다면 요지는 간단한다. 하지만 그 간단한 요지 뒤에 보이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즉 과거의 자신의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가는지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이름은 2가지다. 그립기도 하나 한편으로 부끄럽거나 미운 대상이다.

그렇다면 그들(지나간 역사 내지 과거들)을 강제로 없애 버리거나(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덮어버리거나) 할 수 있지만, 그것조차도 현재 자신의 모습이었다. 싫든지 좋든지 과거가 어떻게 되어 왔어도 현재 살아가는 인간이 형성된 모습이었다. 과거를 부정하면 현재도 없고, 다시 미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과거의 모습에서 아버지들은 떠돌아다니는 혼령으로 되어 계속 괴롭힘을 후세에 주는 것일까? 아니면 모두의 정신을 병들게 하는 망령이 되어 악몽을 꾸게 하는 것일까?

이 작품의 결말은 그런 아버지와 과거의 모습을 버리기 보다는 새롭게 먼지를 털어(자신들의 오류를 스스로 인정하고 청산하여)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이 작품을 보기 전후에 기회가 닿는다면 한번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를 보기를 바란다.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형적인 정신세계와 관념이 들어가 있다. 파시즘을 거부하는 돼지, 그는 전쟁과 착취를 떠나 모든 것을 초월하여 돼지가 되었다.

또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독일 사회철학자 칼 마르크스를 좋아하던 마르크스주의자다. 그런 그가 일본 근대화의 역사에서 어두운 전쟁에 죽은 아버지를 추모하는 작품을 만들게 한 것은 어긋난 아버지의 모습과 과거의 역사에 얽매이는 일본을 마치 카르티에 라탱의 먼지처럼 털어내어 자신들의 역사를 새롭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잘못된 부분을 털어내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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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온!! 2기 상권 LE : 1~15화 - 한정판 (5disc) - 필름컷 모양의 북마크 5종 + 클래스 메이트 카드포함
야마다 나오코 감독 / 미라지엔터테인먼트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케이온 1기와 2기를 보면 조금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외형적인 스토리에서는 일상적인 소녀들의 이야기로 통해 웃고 즐기는 것은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 중에서 특히나 상업 애니메이션이란 시청자로 하여금 즐거움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즐거움에 너무나도 많은 집착을 가지게 된다면 작품의 원론적인 미학적인 가치를 놓칠 수 있다.

따라서 당초부터 선악 내지 라이벌로 구성된 이원화된 작품세계에서는 그런 가치를 주인공 시점에서 가지고 있다. 보통 카메라의 시점은 1인칭과 3인칭으로 구성되어 있다. 1인칭은 개인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라 할 수 있고, 3인칭은 다른 사람이 개인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웅을 중심으로 하는 1인칭 내지 3인칭 서사전개는 이미 그 영웅에 따라 모든 이야기가 결정되는 것이다.

분명 어느 세계에 내던져짐으로 많은 고통과 위기 속에 헤쳐 나가는 것을 보고 또한 그것에 대한 대리만족으로 기쁨을 느꼈다면 단지 그런 스토리텔링에 대한 즐거움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하지만 그 스토리텔링 이면 감추어진 서사 즉 이야기구조들은 어떻게 우리는 봐야할 것인가?

케이온은 그런 이원화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취약하다. 왜냐하면 케이온의 작품세계에서는 작품의 내의 세력의 대립구도로 충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케이온은 작품 내의 대립을 유발하기 보다는 작품 외의 현실을 대립하게 한다. 하지만 그런 대립적인 부분을 이해하기란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영화, 소설, 각종 서사매체들은 가상의 세계를 설정하여 그것을 우리가 훔쳐보는 식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단순히 작가와 영상제작자들이 설정해 놓은 세계로만 보는 것이다. 그것을 외적인 부분으로 인용하고 나타낸다면 다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경우는 작품 내에서는 nerv라는 비밀결사조직으로 통해 미확인 존재 사도를 격퇴하는 이원화적인 대립구도로 보였으나 실제 그 대립구도의 내면에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문명,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타인과 본인, 외부의 자아와 내면의 자아가 끊임없이 대립된다.

그것으로 통해 이미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단순히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통하여 세상을 봐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 내의 텍스트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그것을 맞추어본다는 것은 일방적이고 자기주도적인 사고방식으로 볼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과 사회적인 현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예전에 만화애니메이션영상기호론이란 서적을 보면서 외부의 기표와 그 기표의 의미에 해당되는 기의가 도출되어 다시 그 기의를 기표로 하여 기의를 의미하는 2차적인 분석이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 구조주의학자인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적인 해석이다. 그냥 단순해 보이는 표상의 이미지가 내면에 다른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기표는 기의에 미끄러진다는 이야기처럼 케이온이란 작품은 그렇게 해석함이 바른 작품이다.

케이온에서 보이는 카메라 구도나 혹은 소품, 배치, 조명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영상이미지에 대해 그냥 스쳐가는 잔상으로 기억하나 케이온은 조금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아직 영상기호학에 대해 초보적인 단계에 있으나 미쟝센이란 기법으로 케이온을 본다면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 보인다.

가령 케이온 작품 내의 주인공인 히라사와 유이가 아침에 등교하기 위해 급하게 옷을 입고 나오는데, 처음에 학교에 갈 적에는 기타가방이 없었고, 2번째는 기타가방이 있었다. 문제는 기타가방이 없을 적에는 마루바닥에 자신의 레깅스와 접촉으로 통해 마찰력을 유지할 수 없어서 그냥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게 된다. 그러나 기타가방을 들고 다시 현관으로 급하게 달려갈 때 넘어지지 않는다. 기타가방이 유이의 신체적인 구조에서 균형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 장면의 의미는 유이가 경음부에서 친구들과 만나 기타를 치면서 자신이 그동안 허둥지둥 달리면서 넘어지게 되었는데, 이제는 넘어지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나는 케이온이란 작품은 밴드를 하는 음악장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밴드로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가령 이런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인문학자인 매릴린 옐롬 교수의 유방의 역사라는 여성학 관련 도서를 본다면 조금 참고가 될 것이다. 그것은 기존 사회적 구조가 남근중심이란 점과 특히 그런 남근중심의 사회구조가 강력한 일본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여성들의 지위적인 문제를 환상적인 면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환상에 대한 열정과 희망에 대해 매우 잔뜩 이야기했으나 그 이야기의 종말은 졸업이란 테마로 환상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사실 기정화했다. 단지 그 환상을 꿈꾸고 싶은 생각은 기존 남근중심적인 일본사회에서 그대로 애니메이션에 반영된 점을 케이온에서 조금 바꾸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원화된 구조인 선과 악, 남자와 여자, 문명과 자연, 인간과 기계, 능동과 수동 등에서 전자는 우월한 것으로 보고 후자는 열등한 것으로 보아 지배 내지 배제해야할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점들을 다시 새롭게 보려는 방법으로 보는 것이 비평적인 관점에서 맞다는 것이다.

물론 본인이 적은 리뷰에서는 어문들이 미사어구로 비추어질 수 있을지 모르나, 단순히 쾌·불쾌로 보는 작품 감상이 과연 애니메이션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 귀결될 수 있을까라는 것이 나의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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